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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8/03/08 01:06:13 ID : k9Ap9ijdu09
일단 노예로 팔려나간 후손들은 당연히 아프리카 밖에 살겠지? 노예 후손들은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나 중동으로 팔려갔으니까. 아프리카 노예들은 어떤 흑인이었냐면 부족간 전쟁에서 잡힌 포로들이었어. 쎈 부족이 약한 부족 잡아서 유럽인들한테 넘긴거. 이 말은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흑인들은 유럽인들의 동업자이자 가해자의 후손이란 소리임.
이름없음 2018/03/21 20:35:04 ID : GpU7thdVhxS
그냥 운 좋게 안 팔려나가서 살아남은 흑인들도 모두 공범인건가.
이름없음 2018/03/21 20:37:46 ID : iqpe0lii8nP
내 조상이 사실은 친일파였다고 해도 애초에 나는 그걸 모를뿐더러 조상과 나는 별개이고,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부당한 식민지배를 당한 조선인들에게 이입하지 이걸 말이라고…
이름없음 2018/03/30 19:15:42 ID : NwGsphwJWlz
은 역사를 다시 공부하는게 좋을것 같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부족간 전쟁에서 잡힌 포로라고 일방적으로 단정짓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역사에서 밝혀진것에 따르면 초기 아프리카 노예 무역에서는 그들의 왕국(혹은 유력자,토호)에 주류,공예품,무기(총포류가 아닌 무기류를 말한다)를 판매하고 노예를 수입했는데 이때의 노예는 대부분 범죄자들이었어. 그러다가 16세기에 들어서면 범죄자가 아니라 아예 황금해안,기니만 등에서 강의 상류까지 거슬러올라가서 부족을 습격해 납치해왔고.
이름없음 2018/03/30 19:18:55 ID : NwGsphwJWlz
의 말대로면 '한국전쟁당시 서울대병원 학살과 포로 학살등의 전쟁 범죄를 일으킨 북한이 6-70년대 시절 남한에 공책,필기류 등을 지원해줬음으로 이미 책임을 다한것이며 끝난 문제이다. 또한 북한은 같은 동포인 남한에 물건을 주면서 경제발전에 이바지했으므로 한국은 북한에 그것을 갚아줘야한다' 는 소리랑 뭐가 다르냐?
이름없음 2018/03/30 22:58:18 ID : zPcpPcrcL86
다른데? 굳이 따르자면 일제시대 친일파 후손이 일본한테 사과를 요청하는 꼴. 백인이 아프리카 내부까지 침투해서 흑인 잡아간게 아니라 흑인끼리 싸우다 생긴 포로를 사간거
이름없음 2018/03/31 01:25:01 ID : NwGsphwJWlz
제발 역사좀 더 공부하고 글좀 올리자. 16-17세기의 기록에서는 밤에 카누를 타고 마을에 조용히 접근해서 사람들을 잡아가는 전투를 많이 언급하며,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 들 가운데에서도 규모가 큰 국가들은 영토 전쟁을 자주 했지만 그 이하의 중소 국가들(니제르 강 하구 유억의 누페, 이갈라 등 인구 5-15만 정도의 국가들이 중급 규모이고, 그 아래 인구가 2-3만, 심지어는 3천-5천 가량에 불과한 소규모 국가들이 많이 존재했다)에서는 노예 획득 전쟁이 자주 벌어졌다 (Thornton 1998: 104-107) 1680년대 세구에서처럼 전쟁 포로가 노예가 되는 것은 아주 일방적인 현상이었고, 황금해안 배후지의 아산테 왕국은 이웃 지역과 전쟁을 꼐속했고, 전쟁 후에도 지속되는 봉기들을 진압해야 했으므로 포로들이 많이 생겨났다. (Adas 1993: 172-177)
이름없음 2018/03/31 01:33:22 ID : NwGsphwJWlz
이 왕국들은 전쟁 포로를 노예로 파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노예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하기도 했다. 해안 지역에서 노예 가격이 오르면 주변 지역의 지배자들이 포로 획득을 위해 전투를 개시하는 것이다. 이보다 위험이 적은 방식은 범죄인을 노예로 판매하는 것이였고, 간통을 저지른 부인을 노예로 처분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젊고 앎다운 부인을 이용해 희생자를 끌어들여 범죄자로 만든 다음 판매하는 속칭 꽃뱀의 경우도 있었다. 1746년과 1754년 세네갈에 대흉작이 들었을때 많은 노예들이 생겨났었고, 1780년대에 앙골라에서 가뭄으로 극심한 흉작이 벌어졌을 때 노예 매매가 이전 시대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었다. 콩고 강 하구에 유럽 각구 노예상들이 모여 들었으며 이때 노예 가겨은 하락했다. 또한 Austen 1992: 214-248에 따르면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 이지트 지역으로 향한 노예 무역의 일부 사례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420년 상부 이집트에서 세금 명목으로 1.8천명의 노예들을 사로잡아서 카이로로 보냈고, 1560년 연례 조공으로 흑인 노예들을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스탄불로 보냈으며, 1570년대 카이로에서 장이 서는 시기에 수천명의 흑인 노예가 매매 됨(프랑스 예컨데 Pinon의 언급) 1581년 카이로의 시장에서 한 번에 400명 이상의 노예들이 거래되며 대부분 흑인임(프랑스 여행자 Palerne)의 언급) 1588년 매년 캐러반이 많은 흑인 노예들을 이집트로 들여오는데 여기에서 오토만 제국의 여타 지역으로 재수출됨(독일 여행자 Keichel)의 언급) 1665-1666년 매년 이집트에 3천-4천명의 노예들이 유입되며, 카이로 시장에서 하루에 8백-1천명의 노예들을 볼 수 있음(에스파냐-벨기에 여행자 Gonzales의 언급) 예컨데 케러반을 통해 많은 흑인 노예들이 카이로 시장에 유입되어 거래되는것을 알수있다. Austen(1992: 219)에 따르면 1400년-1820년의 연평균은 3천명으로써 총 소계는 126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름없음 2018/03/31 01:49:16 ID : NwGsphwJWlz
그리고 너는 '다른데? 굳이 따르자면 일제시대 친일파 후손이 일본한테 사과를 요청하는 꼴. 백인이 아프리카 내부까지 침투해서 흑인 잡아간게 아니라 흑인끼리 싸우다 생긴 포로를 사간거' 라고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포르투칼인들이 1441년에 모리타니아 해안에서 10명의 주민을 포획, 노예화 했다는 기록이 있다. (Da Zurara 1936) 이때 노예무역의 가능성이 확인되자 3년후 300명의 아프리카 인이 리스본으로 끌려갔고 1482년에 포르투칼은 상호르헤델미나에 요새화된 상업 기지를 건설해서 노예무역의 본부로 삼았다.
이름없음 2018/03/31 01:56:09 ID : zPcpPcrcL86
결국 흑인을 판 것은 토착민이잖아?
이름없음 2018/03/31 02:00:08 ID : NwGsphwJWlz
아프리카의 노예 송출 지역은 45% 가량이 중서부 아프리카에서 출발했으며, 베넹 만, 비아프라 만, 황금 해안 순서로 많았다. 즉 현재의 세네갈에서부터 카메룬에 이르는 해안 지역이 노예 무역의 최대 대상지임을 알 수 있다. 노예들은 아메리카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흩어져 갔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큰 ㅂ중을 차지하는 곳은 브라질 남동부, 자메이카, 바이아 등지로써 이 세지역만 합쳐도 40%가 넘는다. 브라질에는 1550년경에 처음 아프리카 노예가 들어왔고 1600년경에는 흑인 노예가 플랜테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력 제공원이 되었고 90년에는 미나스제라이스 금광이 발견되었다. 외에도 커피, 인디고, 담배, 면화등도 노예 노동을 많이 필요로 하는 분야였다. 17세기 후반 이후에 노예 ㅅ입이 크게 확대됭ㅆ고 노예제 플랜테이션이 완전히 자리 잡게 되었다. 예컨대 바베이도스 지역에서는 1660년대까지 유럽인 노예(계약직 노예)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나 이 이후 아프리카 노예 노동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이름없음 2018/03/31 02:03:22 ID : NwGsphwJWlz
노예무역은 대체로 국가가 후원하는 회사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영국의 왕립 아프리카 회사(Engilsh Royal Africa Company),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프랑스 기니아회사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이 회사들은 기본적으로 개인 사업자가 민간 자본을 모아서 운영하는 방식이었지만 동시에 국가의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 회사들은 아프리카 해안에 거래 거점을 두어야 했다(Postma 2003: 14-15)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여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는데, 이들의 아전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아프리카 인들이 아니라 다른 유럽 겅쟁자였는데 이 점은 요새의 대포가 내륙 바염ㄴ이 아닌 바다를 향해 설치되어있다는 점에서 알수 있다. 유럽 경쟁자중에는 다른 나라 상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부여한 독점권에 저항하여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자국 상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경쟁자들을 경계하면서 요새를 거점으로 내륙의 노예 공급선을 확보하여 거래를 하는 방식을 성채 무역이라고 하는데, 이때까지는 성채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아프리카 측의 중간상인들이 노예들을 데리고 오던 때였으나 이후 유럽 상인들 스스로 해안을 돌아다니며 노예 판매인을 찾던가 스스로 마을을 약탈함으로 노예를 조달해야하는 상황에 이르었다. 긴 보트를 타고 강 상류로 올라가서 아프리카 상인과 접촉을 시도하는 방식을 코스팅(coasting)이라 한다.
이름없음 2018/03/31 02:25:43 ID : NwGsphwJWlz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비공식 정주민들이 생겨나서 이들이 유럽 상인들과 아프리카인들 사이에 중개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란사도스(Iancados)라 부른다(Thomas 1997: 338, 388) 대체로 1520년대부터 생겨난 이 집단은 대개 카보베르데 출신이며 여기에 일부 유대인들이 합류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기독교도, 즉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으로써 많은 경우 이는 위장에 불과했다) 콩고와 응돈고 같은 지역에서는 현지인들도 이들을 선호하여 포르투갈 정부가 이들에 대해 항의할 때 현지 지배자들이 이들의 공동체를 보호해주었다. 포르투갈 정부 측은 란사도스의 중개에 의존하는 대신 자국 관리들이 통제하는 곳(feiras)에서 사업을 하도록 강제하려고 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어느 한지역에서 구입한 노예들의 수요가 충분치 못한 경우나 아프리카 상인들이 너무 높은 가격을 불는 경우, 노예상들은 배를 타고 연안을 따라 하앻하여 이웃 지역으로 가서 노예를 구매했다. 이런 식으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충분한 노예들을 확보하기까지는 짧아도 4-6주, 대개는 3-4개월이 소요되었다.*Haudrere 2003: 59) 그런데 이렇게 노예 구입이 어려워지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면 이전에 미리 확보해 놓은 노예들이 해안 지역에서 혹은 배의 선창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이런 시간 지체는 사업에 극히 불리한 요소였다. 이 사업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노예 가격이 제일 높을 때 현지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대개는 수확 철에 노예 가격이 가장 높았으나 지역마다 수확 철이 달랐기 때문에 노예무역업자로서는 시간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들은 가급적 빨리 아메리카 대륙까지 오가기 위해 작고 빠른 배를 이용하였고,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로 들여오는 회항 상품은 거의 없었다. 한편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상품을 수출하는 것은 따로 정기적인 항로가 만들어졌으므로 노예무역의 회항 상품으로 그런 상품 수송을 할 필요는 없었다. 즉 쉽게 말해서 전통적으로 대서양 무역을 설명하던 삼각 무역이라는 개념은 수정이 필요하다. 대개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두 지역을 오가는 항로가 일반적이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해안 지역에만 머물렀을 뿐 대륙 깊이로는 거의 진입해 들어가지 못했다는 얘기와 다르게 포르투칼 인들이(에스파냐는 19세기에 들어서 노예 무역에 직접 뛰어들었다. 그 이전까지는 해외 국가들에게 위탁을 맡기는 형식으로 노예를 충당했다.) 아메리카 등지에서의 흑인 노예 도입을 위해 아프리카 지역 토호들과 거래를 한것뿐만이 아니라 로망고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600명의 포로를 잡았다(Pescatello 1987: 75-88) 아프리카 지배자들은 때로 그들의 사업 파트너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갈아치우기도 했는데, 예컨대 1730년대의 아가자(Agaja) 왕은 노예해안에선 네덜란드 인들을 축출해버리고 그 대신 포르투갈 인들에게 거래 거점 건설을 허락했다.
이름없음 2018/03/31 02:39:25 ID : NwGsphwJWlz
유럽인들이 많은 노예를 고용할 수 있엇던 데에는 아프리카에서 끊임없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어서 노예 가격이 매우 저렴했기 때문인데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송출하는 현상은 19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Pescatello 1987: 46)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의 지배층은 특이한 색깔, 디자인, 질감, 모양을 가진 외국산 직물들을 전시하는 것이 자신들의 위세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편이었는데 예컨대 1624년에 로앙고의 왕이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는 대량의 직물들을 전시하였다. 이런 이유로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한편으로 직물을 수출하면서 동시에 다른 직물을 수입하는 것이다. 한가지 특별히 언급할 상품은 총과 화약인데 과거의 주장은 수입된 총이 노예를 포획하는 데에 쓰였다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이 없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아주 심각한 문제가 내포되어있는데 아프리카로 수출한 총의 품질이 아주 저급해서 이것으로는 전쟁이나 포로 획득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총과 화약은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위세 과시가 주된 용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의 생각은 '유럽인들은 해안 지역에만 머물며 내륙 지역으로부터의 노예 공급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인데 이게 틀린것이.. 1630년경 유럽인들은 이슬람인(델릴레르, 아큰즈)를 보디가드로 고용했다. 용병의 고용은 늘 위ㅓㅁ을 안고 있었지만 그들로서는 어쩌수없는 선택이었는데, 이들의 장점은 아주 싸게 고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임금은 포르투칼 병사의 반값이었고 심지어는 먹여만 주면 와서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다만 그들이 원하는 대가는 이 경우 작물 한 필, 혹은 점령 후 약탈을 허용하는 정도였다) 유럽인들은 주로 동부 아프리카의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약탈하였는데 필요한 지점에 전력을 집중하여 승리를 거두어 확실한 거점으로 삼고 이런 곳들을 연결하는 육상 네트워크를 확보함으로써 노예 수탈업과 교역로를 연결시켰다. (Scammell 1980: 28-39)
이름없음 2018/03/31 02:48:50 ID : NwGsphwJWlz
유럽 식민 세력이 현지인 병사들을 충원하여 전력을 강화하는 것은 이전부터 있었던 일인데 특히 호전적인 종족으로 알려진 사람들(인도네시아의 암본 사람들이나 필리핀의 팜파냐 사람들이 대표적) 혹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영국령 인도에서는 토파즈, 네덜란드령 자바에서는 마르데이커로 알려진 사람들)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허나 이들은 모두 보조 병력이었고 그들은 각자 자신의 전통적인 의상을 입고 전통적인 무기를 이용해 나름의 방식으로 싸웠다. 아프리카의 해안 지역에 유럽인들이 상륙한 것은 사실이고, 유럽인의 지배는 바로 그 해안의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을 뿐 내륙 지역은 19세기에 가서야 정복된다는것도 사실이나 그것이 유럽인들의 노예 무역이 해안가에서만 이루어졌다는것(즉 직접적인 약탈 없이 평화적인 교역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을 증명하진 않는다. 1446년 누누 트리스탕(Nuno Tristao)이 지휘하는 배에서 무장 세력이 세네감비아에 상륙했었다. 다음 해 발라르테(Valarte, 포르투갈에 봉사하는 덴마크 선장)가 고레(Goree) 섬 근처에 갔었다. 16세기에 호킨스(Hawkins)라는 선장이 카보베르데에 갔을때 160명의 인원을 상륙시켜서 흑인들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Rathbone 1985: 174-176)
이름없음 2018/03/31 02:53:07 ID : NwGsphwJWlz
아프리카 인들의 방어법은 상구아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계속해서 지그재그로 몸을 비틀며 뛰는 것인데 몸이 어찌나 빠른지화살이나 창을 모두 피할수 있다. 전사들은 전장에 도착하면 넓은 간격을 두고 서서 이런식으로 각 개인의 기술을 발휘했다. 이런 아프리카 군대와 직면했을 때 유럽 군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군대의 총기는 큰 장점이 되지 못했다. 정확성이 떨어지는 초기의 총은 단지 큰 소리로 인한 심리적 효과만 있었다. 물론 그 효과는 단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Thornton, John 1988: 363-366) 1585년의 기록을 보면 포르투갈 군대는 300명의 포르투갈 인과 9천명의 앙골라 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Thornton, John 1988: 377)
이름없음 2018/03/31 03:01:09 ID : NwGsphwJWlz
그리고 통상 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한 유럽인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실제 사망률은 20% 미만으로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신 더 높다고 할 수 없다(Feingerg 1974: 371) 또한 아프리카의 노예 무역은 흔히 갖는 인식과는 다르게 '막대한 차익'을 남기는 것도 아니었고 참여하는 상인들도 그리 유력한 이들은 아니었다. 유력 상인들은 오히려 당시 영국과의 무역에 뛰어들었다.
이름없음 2018/11/10 15:49:15 ID : r9jvwoIIJTS
스레주가 너무 일반화시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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