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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8/03/23 00:20:01 ID : O9vBbAY9s8p
너는 내게 '일본어를 잘한다'고 했다. 네 입을 통해서 들은 말도 아닌 그게 내가 아는 유일한 나의 첫인상이다.
이름없음 2018/03/23 00:26:41 ID : O9vBbAY9s8p
너는 지나치게 스스럼없이 내게 악수를 건넸다. 잘 지내보자고. 친해지기 편한 사람이었다. 뒤이어 너는 여자친구가 있다고 얘기했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다소 낯을 가리는 나는 너보다 세발 정도 앞서서 멍하니 걸어나갔다. 그런 나를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했던걸까. 대체 어떤 마음으로 앞서가던 내 배낭 옆주머니에 길게 핀 강아지풀을 꽂아 넣었을까. 나는 뒤늦게 집에 도착해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잠시 망설였다. 이걸 그냥 쓰레기통에 넣어야 할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 강아지풀을 조용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어쩌면 너를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름없음 2018/03/23 00:34:54 ID : O9vBbAY9s8p
이곳의 일몰은 빨랐다. 6시가 갓 지난 시간에도 이미 거리는 어두웠다. 집에 먹을 게 없다는 내 말에 너는 마트에 가자며 나를 불러냈다. 우리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마트는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는 다소 먼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오는 길에 너는 내게 발이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아프다는 말이 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저었다. 너는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시선을 떨궜다. 말주변이 없는 나는 이 어색한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만 바랐다. 집에 도착하기만을.
이름없음 2018/03/23 00:45:56 ID : O9vBbAY9s8p
시간은 흘렀다. 강아지풀이 빨래 건조대에서 바싹바싹 말라갔다. 처음에는 지나다닐 때마다 눈에 밟히더니, 이제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시간표를 짜자며 나는 너의 방으로 가겠다고 했다. 네 집 문 앞에 선 나에게 너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다며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너는 나를 문 밖에 세워둘 정도로 매몰차지 않았고, 빈 거실에 나를 홀로 앉혀둘 정도로 집에 익숙해져 있지도 않았다. 나는 네 침대에 걸터앉았다. 조금만 기다리라며 너는 선심쓰듯이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주었다. '꽃다발.' 나는 핸드폰을 들어 너의 핸드폰 화면을 찍었다. 찾아들을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나름 최소한의 예의였다.
이름없음 2018/03/23 01:06:52 ID : O9vBbAY9s8p
그해 들어 가장 아프던 날, 아침부터 나는 옷이 그게 뭐냐는 소리를 들었다. 기분은 꿀꿀했고, 하늘에서도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졌다. 옆 자리의 금발 청년이 내 옷이 귀엽다고 해주었다. 거의 처음 말을 섞어보는 친구였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일 수 밖엔 없었다. 지금 떠올려봐도 그날은 정말 최악이었다. 그냥 앉아만 있는데도 마구 토기가 올라왔다.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 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던 것이 기억난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화장실 변기에 걸터앉자 내 몸의 모든 구멍이 무언가를 내뱉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바로 빈혈 증세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양호실에서 약을 받아 먹고 밥을 제대로 챙겨먹으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났는지 네가 다른 누군가와 웃으며 걸어가다 비척거리는 나를 맞닥뜨렸다. 너는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의미 없는 인사치레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괜찮지 않다고 대답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크게 의미 없는 존재였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이름없음 2018/03/23 01:29:18 ID : O9vBbAY9s8p
다소 늦게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 너보다 친한 친구가 많았다. 우리는 시간표를 같이 짰지만 애매하게 등하교 시간이 엇갈렸고, 둘이서만 밥을 먹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너는 곧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수업 시간에 옆자리에 앉아서 우리만의 언어로 잡담을 하거나, 교수에게 지목당해 서로에게 대답을 떠넘기면서 우리는 시나브로 친해졌다. 나는 항상 너보다 먼저 수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대충 떼우고 잠시 딴 짓을 하고 있노라면 항상 네가 밥은 먹었냐고 물어 왔다. 때로는 대충 떼웠다고 답했고, 때로는 아직이라고 답했다. 말만 잘하면 너와 저녁을 같이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건 몰랐다. 첫 일주일은 그렇게 바쁘게 흘러갔다.
이름없음 2018/03/23 01:52:04 ID : O9vBbAY9s8p
공강 날이었다. 우리는 그날까지 학교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굳이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학교로 향했다. 그때의 나는 그때의 너를 제법 똑부러지는 사람이라 믿고 있었고, 내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너에게 보고할 이유도 없었다. 볼 일을 끝내고 학교 주변을 이유 없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주말 내내 소식 없던 네게서 연락이 왔다. 뭐하냐는 물음엔 학교 주변 산책이라고 답했고, 학교는 왜 갔냐는 물음엔 오늘까지 해야 하는 일은 끝냈냐고 되물었다. 그제야 너는 부랴부랴 학교 갈 채비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내가 혼자 있고 아직 점심도 먹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너는 나에게 같이 점심을 먹고 들어오자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한 역 떨어진 쇼핑센터의 식당가에서 그 당시에는 다소 비싸게 느껴졌던 점심을 먹었다. 단 둘이 밖에서 밥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적어도 나는 아쉽지 않은 인사를 했다.
이름없음 2018/03/23 02:09:59 ID : O9vBbAY9s8p
첫 주보다는 조금 안정된 둘째 주엔 유학생들이 모이는 파티가 있었다. 나는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고, 너는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시시덕대는 자리는 질색이었다. 우리는 갈까말까를 수 없이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엔 회장까지 들어섰고, 시작되기 전에 도로 나가야겠다는 너와 실랑이를 했다. 나는 도저히 이미 들어온 회장을 떠날 배짱이 없었다. 비록 우리는 다른 조에 배정되었지만, 그래도 네가 있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너는 내 투정에 못이겨 결국 파티에 참가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내게 누군가 물어왔다. "남자친구예요?" 나는 그 질문이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엷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왜요?" 파티 시작 전에 가지말라고 붙잡고 실랑이 하던 것에 흐뭇한 시선을 보낸 사람이 있는 거겠지 싶으면서도 나는 부러 이유를 물었다. "아니, 저쪽이 계속 웃으면서 보고 있어가지고. 둘이 사귀는 건가 해서. 아니에요?" 고개를 돌려 너를 바라봤다. 너는 정말로 웃고 있었다. 금방 웃음기 가신 얼굴로 뭘 보냐며 날 쥐어박는 시늉을 했지만. 너는 여자친구가 있다. 나는 조용히 되새기며 그런 거 아니라며 못을 박았다.
이름없음 2018/03/23 02:18:06 ID : O9vBbAY9s8p
알 수 없는 말들을 하는 외국인들에게 둘러싸여 밥을 깨작대다 문득 네가 보고 싶어졌다. 오후 수업 밖에 없는 너는 아직 집에서 시간이나 떼우고 있을 테다. 그래도 혹시나하는 마음에 나는 너에게 어디냐고 물었다. 보고 싶어도 참으라는 답이 왔다. 솔직하고 싶어도 솔직할 수 없던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답하고 먹던 밥이나 계속 먹었다. 집을 나선 네가 비가 온다고 알려주었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나는 어쩌면 네 우산을 함께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바로 지워버렸다. 당연하게도 수업이 끝날 즈음에 비는 이미 그친 뒤였다.
이름없음 2018/03/23 02:30:23 ID : O9vBbAY9s8p
점심 때가 되면 으레 나는 단체 채팅방에 같이 밥 먹을 사람 어디 없냐는 질문을 했지만, 시간이 되는 건 너 하나 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점심을 둘이서 먹는 건 둘이 함께 수업을 듣는 것처럼 점차 익숙해져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너는 은근슬쩍 다가오는 네 생일을 알렸다. 나는 네 생일을 개인적으로 챙길 수는 없었지만, 쓸쓸히 지나가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아는 사람 몇 명을 모아 생일 축하 겸 친목 도모를 위한 자리를 계획했다.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생일 전 날, 너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늘 내리던 역을 지나쳤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재밌게 놀으라는 인사를 하고 늘 내리던 역에서 내렸다. 미소의 뒷 맛이 씁쓸했다.
이름없음 2018/03/23 02:47:31 ID : O9vBbAY9s8p
비가 오는 아침이었다. 내가 쓸데없이 여유를 부리다가 전철을 눈앞에서 놓친 아침, 너는 집에서 아침을 먹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나를 단박에 알아보고, 내가 역 계단을 올라 전철을 놓치는 것을 줄곧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방과 후, 학교 카페에서 네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는 나를 너는 또 구경하고 있었다. 노트 정리에 열중하고 있는 내가 고개를 들기를 기다리며 창 밖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그때 나를 보고 있던 네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름없음 2018/03/23 03:01:37 ID : O9vBbAY9s8p
저녁이 빠른 이곳은 밤이 길다. 9시,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에 너는 나를 불러냈다. 우리는 노래방에 갔다. 단 둘이서 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국어를 하는 것은 우리 둘 뿐이었다. 노래방 시간이 다해갈 때 쯤, 너는 내게 듀엣곡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냥 맥주 몇 잔에 흥이 올랐던 걸까. 기분이 좋으면 누구하고든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걸까. 의미 부여는 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노래방에서 나온 뒤 우리는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너의 방으로 갔다. 그날 함께 논 독일인은 술을 사양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었고, 너는 너 자신도 놀랄 정도로 취했다. 적당히 집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데리고 너는 술을 좀 깨자며 산책을 했다. 밤 공기는 차고 맑았다. 네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술기운이 가셨다. 실없고 약간 거친 농담에도 나는 웃음만 나왔다. 다음날이 되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죄책감에 몸서리칠 걸 알면서도 그 밤은 너무나 행복했다.
이름없음 2018/03/23 03:13:15 ID : O9vBbAY9s8p
마치 종이가 물에 젖듯이 나의 하루에 네가 번져갔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너와의 연락으로 보냈다. 답이 오길 기다리고 답장을 고민했다. 너에게 잘 자라는 답이 오기 전에는 잠도 오지 않았다. 사랑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이었다. 아무 맥락 없이 보내오는 네 사진이라던가 별 생각 없이 뱉어내는 걱정들이 지나치게 오래 가슴에 남았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아도 네가 먼저 연락해주는 것도 기뻤다. 저녁을 같이 먹자고 물어보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여서 설렜다. 가끔 입고 온 옷 색깔이 겹칠 때면, 그래서 주변에서 커플룩이라며 놀려댈 때면 표정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마 모두 알고 있었겠지. 적어도 너는 알고 있었다.
이름없음 2018/03/23 03:32:58 ID : O9vBbAY9s8p
이곳의 가을은 유난히 비가 잦다. 매일 같이 비가 질리도록 내렸다. 가을비 내리는 저녁에 너는 라면을 먹으러 가자며 나를 불러냈다. 라면집 골목은 좁지 않았지만 우산 두 개가 나란히 걸을 정도로 넓지도 않았고, 너는 길이 좁다며 우산을 같이 쓰자고 했다. 한 우산을 같이 쓰고 우리는 골목을 빠져나왔다. 역에 도착해서 전철을 타고, 다시 전철을 내려서도 나는 우산을 펴지 않았다. 너는 살 게 있다며 근처 상가로 향했고, 나는 그제야 너의 젖은 어깨에 눈길이 갔다. 어쩌면 내 어깨도 젖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네 우산이 충분히 크지 않았고, 네가 충분히 너에게 붙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너는 그날, 지금은 받기 조금 그렇다며 오는 전화가 끊기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누구냐고 물으니 여자친구라 대답하고 의미 모를 미소를 지어보였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네 오른쪽 어깨가 젖어있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기적이게도.
이름없음 2018/03/23 03:54:30 ID : O9vBbAY9s8p
너는 데이트를 하면서도 내 카톡에 제법 성심껏 답을 해주었다. 집에 도착했다고 해서 재밌게 잘 놀았냐고 물어보면 슬쩍 말을 돌렸다. 물론 너는 나를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나는 그런 너의 행동에 조금 기대하게 되어버리곤 했다. 가끔씩 네가 네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좋아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 의미 없는 망상은 나를 좀먹어 갔지만, 내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너의 여자친구에게 날마다 마음 속으로 사과를 보냈다.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가면서도 너를 사랑했다. 이유 없이 너에게 연락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하교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이름없음 2018/03/23 04:03:47 ID : O9vBbAY9s8p
그런 나에게 너는 당연하다는 듯이 다정하게 굴었다. 어느날은 수업이 끝나고 둘이 시내로 나가 밤 늦게까지 함께 돌아다녔다. 내가 술자리에 나가면 많이 마시지 말라며 걱정했다. 감기가 돌면 감기 조심하라고, 밥을 안 먹으면 밥 먹고 다니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수업이 끝나면 빨리 나가자고 재촉하며 코트를 입혀주었다. 가끔은 지나가는 말로 나를 예쁘다고 해주었다. 학교에서 우리가 눈에 띄게 붙어다녔는 지, 유학생들 사이에서 우리가 사귄다는 소문이 기정사실화 되어 갔다.
이름없음 2018/03/23 04:22:33 ID : O9vBbAY9s8p
시간은 속절 없이 흘렀다.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은 애초부터 한 학기로 정해져 있었다. 너는 언제부턴가 여자친구 이야길 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 없는 길로 간다는 핑계를 대며 괜히 역까지 돌아가는 길을 둘이 걸었고, 때로는 두 역 거리인 집까지 천천히 걸어서 돌아갔다. 처음으로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 돌아가던 날, 좀 더 걷자는 나에게 너는 의외라는 듯이 '너 걷는 거 진짜 좋아하는구나'하고 말했다. 그리고 예의 그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나도 좋아해'하고 덧붙였다. 어느날은 수업 시간 내내 내 손을 빤히 보더니, 고생 하나 안 한 손이라며 놀리듯이 말했다. 또 어느날은 내가 항상 왼쪽 발을 살짝 안으로 굽혀 걷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여고생 같다며, 나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는 것이 상상도 안 간다고 얘기해 나를 하루종일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너와 함께 한 몇 개월이 나에게는 너무나 특별했다. 나는 혼자 사랑하면서도,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싶었다. 오만한 발상이었지만, 너를 내 첫사랑이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을 접어야 할 때는 다가오고 있었다.
이름없음 2018/03/23 04:30:53 ID : O9vBbAY9s8p
그해의 크리스마스가 왔다. 눈은 오지 않았지만 날이 찼다. 어김없이 비가 부슬부슬 떨어져 내렸다. 나는 아주 살짝 술에 취해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나는 솔직히 너에게 차이고 싶었다. 여지없이 비참하게 차여서 강제로 마음을 접고 싶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네게 오늘 무얼 했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여자친구를 만났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로 나는 여자친구는 만나지 않았냐고 다시 물었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답이 오지 않았다.
이름없음 2018/03/23 04:37:34 ID : O9vBbAY9s8p
마지막 기회였다. 어쩌면 이대로 그냥 대답을 듣지 않으면 나는 계속 혼자 기대하고 혼자 설렐 수 있을 터였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곡의 가사가 머리를 맴돌았다. 왜 나한테 여자친구 얘기를 안 하느냐고, 나는 재차 물었다. 너는 마치 그런 거 물을 줄 몰랐다는 천진한 문장으로 나는 원래 그런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 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네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너는 나에게는 좀 더 특별히 대했을 터였다. 왜냐면 내 다음 질문이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정말 몰랐느냐'였기 때문이다.
이름없음 2018/03/23 04:43:09 ID : O9vBbAY9s8p
너는 올 것이 왔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히 알고 있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나에게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너는 말을 돌렸다. 나는 차이고 싶었지만, 너는 속시원히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와 함께 내 첫사랑은 지나가는 듯 했다.
이름없음 2018/03/23 04:52:23 ID : O9vBbAY9s8p
그 뒤의 이야기는 뻔하다. 나는 너에게 미련이 덕지덕지 남아서, 어떤 방식으로라도 너의 곁에 남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너를 대하기가 많이 어색해졌지만, 그래도 네 곁에 있고 싶었다. 그 전처럼 연락해주지 않는 너를 보며 이대로 남이 될까 두려워했다. 너와 함께 찍힌 사진을 보거나 네가 보냈던 메세지를 읽으며 우울한 겨울을 보냈다. 나 혼자만의 짝사랑에 이토록 예민하게 대응하는 나를 끝없이 자책하면서. 그리고 나를 헷갈리게 했다는 이유로 너를 끝없이 미워하면서. 그렇게 우리가 헤어져야하는 2월이 다가왔다.
이름없음 2018/03/23 04:58:47 ID : O9vBbAY9s8p
너도 나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던지 헤어지기 직전의 그 2월달에 우리는 제법 자주 만났다. 한 번의 술자리에서 나는 아직 버리지 못한 미련을 해결해보고자 네게 나를 차달라고 부탁했다. 너는 '사귄 것도 아닌걸'이라며 그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눈물이 터지려해 말문이 막혔지만, 너의 울지 말라는 부탁에 그 눈물마저 삼켰다. 그게 너에게 직접 내 마음을 표현한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는데.
이름없음 2018/03/23 05:09:19 ID : O9vBbAY9s8p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날 새벽, 너를 만나고 들어와서 씻고 잘 준비를 하던 내게 네가 연락을 해왔다. 대수롭지 않게 평소와 같은 연락이었다. 그렇게 시덥잖은 얘기를 잠깐 한 너는 그제야 내 진심을 들어주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이제야 너를 지워가던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망설일 필요조차 없었다. 결국 나는 너에게 모든 걸 얘기할 수 밖에 없으니까. 그 뒤에 너는, 역시 망설이다가 마지막이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가하고 날이 좋을 때면 나를 데리고 놀러가고 싶었다는 이야기.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간 여자친구에겐 숨겨왔다는 이야기. 내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못 한 것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 그리고 너는 애매하게 다시 말을 돌렸다. 우리는 그 다음날 마지막으로 함께 점심을 먹었고, 뒤 한 번 돌아봐주지 않고 전철역으로 향하는 네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이름없음 2018/03/23 05:11:53 ID : O9vBbAY9s8p
너를 추억할 때마다 나는 항상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를 한 번 안아주고 싶었는데 잊어버렸다는 너의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이름없음 2018/03/29 19:58:08 ID : aoJQnA7s04M
꽃다발 어때? 지금부터 우리 함께 해도 될까? 글쎄... 뭐, 일단은 같이 있고 싶긴 한데 말이야. 그렇네, 근데 말야. 그래도 역시 마지막엔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겠지? 글쎄다. 뭐 일단은 사귀어봐도 좋을 것 같아. 바람 피워도 얘기하지 않기로 하자. 모르고 있다면 슬프지도 않을 거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난 나름대로 진지하게 너랑 같이 지내보고 싶은데 말이야. 나는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너를 끌어 안고 네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떠올릴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는 추억을 너와 함께 만들고 싶어. 그야 싸우기도 하겠지만. 그러면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사과하고 고맙다는 말도 절대 빼먹지 않을게. 미안하다는 말을 훨씬 더 많이 하게 될 것 같지만 그 정도는 봐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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