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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8/04/24 09:51:22 ID : lhatteJSIIE
수능을 마치고 돌아오는 전철 안이었다. 앞으로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아주 멍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다는, 그런 처절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공허하고, 답답하고, 불안했다. 느껴지는 불안은 꽤나 큰 것이어서 아랫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도 했다. 온몸이 굳게 경직돼있었고 턱 밑이 살짝 아려왔다. 전철 안은 계속 해서 고요했고 사람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전체는 적막으로 가득했다. 역을 빠져 나오니 아까 봤던 노을은 이미 저물어 없었고, 별빛 하나 없는 어둔 하늘 뿐이었다. 쌀쌀한 밤 공기, 밤 하늘, 그 모든 게 내 앞길처럼 느껴졌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 내 미래가 저 답답한 하늘과 닮아 있다.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쭉 살아도 되는 걸까,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좀처럼 무거웠다. 가슴 속에 돌덩이가 앉은 것처럼, 아무리 한숨을 쉬어도 그 돌덩이는 사라지질 않았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마음은 계속 해서 불안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도 싫었고, 엄마의 부재중 전화도 싫었다. 계속 해서 진동하는 내 핸드폰, 나는 전화를 받을 자신이 없었다. 엄마가 내게 무슨 소리를 할 지는 뻔하다. 나는 그 뻔한 소리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이런 기분일까, 누군가 내 목에 칼 끝을 겨눈 것처럼 불안했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여는 상상을 하니 그 공포는 배가 되었다. 현관 위에 신발을 벗기도 전, 내 앞으로 옹기종기 모일 가족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입을 열고, 굳은 표정이 된 가족들 생각도 났다. 그 인간들, 온갖 욕설과 고함으로 나를 죽이려 들거야, 그렇게 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 수록 점점 더 불안해졌다. '이 길이 영원했으면 좋겠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영원하길 바랐다. 영원히 집에 도착할 수 없게, 나는 바라고, 또 바랐다.
이름없음 2018/04/24 10:49:21 ID : lhatteJSIIE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다. 모두가 일찍이 학교에 모였다. 순서대로 성적표를 나눠받는다. 성적표를 받아든 아이들의 표정을 보면 대부분 굳게 닫혀있다. 물론 나도 그랬지. 의자에 앉아 성적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예상했던 성적표, '확인 사살'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 내게 별 다른 감흥은 없었다. 다른 눈이 없다면 성적표를 있는 힘껏 구겨버리고 싶었지만,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을까봐 그러진 못했다. 대충 반으로 접고는 가방에 조심스레 집어 넣었다. 성적표를 받아 든 아이들을 앉히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다만 졸업식에는 참석해야 한다고, 그리고 모두 수고했다고, 그럼 이제 돌아가도 좋다고, 그렇게 차분한 말투로 말씀하시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교실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그렇게 조회와 동시에 종례가 끝나는 기적의 순간을 마주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기적의 순간 속에서 '와!'라거나, '끝났다'라거나, '이제 해방이다'라거나, 하는 등의 탄성은 없었다. 이따금씩 서러운 헛기침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곧 가방 메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로 교실이 시끌벅적해졌고, 그렇게 아이들도 선생님을 따라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참 많은 아이들이 하늘이 아닌 땅을 보고 걷는구나, 나도 아이들 따라 가방을 싸들고 교실을 나섰다.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은 붐비는 인파 속에서도 별 다른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문 아이들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느리게 보였다. 그렇게 성적표를 받아든 아이들은 고개 숙여 쓸쓸할 뿐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모두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을텐데, 정작 그 무리 속에서 기뻐하는 아이는 보이질 않았다. 참담한 현실을 직시했달까, 모두가 암울해보였다. 물론 우리 학교의 자랑이라는, 저쪽 아이는 조금 달라보이긴 했지만. 어찌 됐든 저 한 명을 빼놓고 보면 학교 분위기는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다시금 떠올랐다. 굳이 나오고 싶으면, 그러니까 정 나오고 싶으면, 나오라고. 그 말을 떠올리니 조금 웃겼다. 나오고 싶은 애가 있긴 할까, 아무래도 없을 거야, 아닌가, 혹시 인생을 다 얻은 저 아이는, 유달리 들떠보이는 저 아이는, 전리품을 수집하는 승전군이 된 기분으로, 학교에 다시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저 아이는 혹시라도 그런 마음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저 아이에게 전리품을 내어줘야 하는, 그러니까 승전군이 아닌 패전군이 된 나는, 괜스레 슬퍼보였고, 아파보였고, 한심해보였다. 그 생각 따라 마음도 괜스레 울적해졌다. 집에 돌아오니 조용한 기운이 맴돌았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니, 적적한 아침 햇볕이 기분 좋게 마루 위를 덮고 있었다. 모두가 나가고 없는 시간, 시침은 열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랜 만에 맞이한 평화였다. 고함과, 욕설과, 폭력과, 학대가 없는, 그런 평화로운 집안 분위기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평생을 이 평화와 함께 하고 싶은 나는, 유치원에 다니기도 전부터 나를 걸레짝 취급하던, 그 인간들과 함께 살기 보다는, 이 고립과, 고독과, 외로움과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저밀 정도로 간절하고 처절하게, 고립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혼자일 때가 제일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렇게 내게 외로움은 행복이고 사랑이다. '모두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난 당신들에게 더 이상 사랑과 관심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 그 동안 상처 받고 갈기갈기 찢기던 어린 나를 퍽 안아주고 싶다. 온 힘을 다해 꽉 안아주고 싶다. 사랑을 마구 퍼부어주고 싶다. 너무 미안했고 안타까워서 그렇다. 이렇게 자랄 아이가 아니었는데 말이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저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내 마음을 스스로 학대하고 주물렀다. 당신들이 내 뺨을 갈기던, 저능아 취급을 하던, 내 얼굴에 침을 튀기던, 주먹이 내 머리를 내려 찍건, 난 그 수모를 행복이라고 합리화하며 살아왔다. 부모라는 인간들이 아이를 화풀이 용도로 쓴다는 것이, 그 시절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너무 힘겨웠으니까. 너무 힘겨웠던 거지, '콩쥐팥쥐'를 읽다가 눈시울이 빨개졌지. 그 계모가, 바로 내 부모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싫었던 거겠지, 현실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걸지도 몰라. 너희들의 학대를 행복이라고, 괜찮다고, 우리 부모님은 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날 아껴주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삐딱한 생각하지 말라고, 눈물 뚝뚝 흘리며 나를 타이르고 또 타일렀지. 물론 그 합리화와 발악들이 얼마나 징그러운 것인지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지.
이름없음 2018/04/24 11:00:23 ID : lhatteJSIIE
난 사람들이 싫다. 무섭다. 내 무의식을 마구 더럽혀 놓는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제발이지, 모두가 날 잊었으면 싶고, 나를 좀 혼자 두었으면 싶다. 내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당신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테니, 당신들도 내게 상처를 주지 말라는 거다. 그러면 서로 좋은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병적인 살욕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죽인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이 아니다. 난 당신들이 살았으면 좋겠다. 난 당신들의 목숨을 살려두네, 마네, 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누구에게도 권위적이고 싶지 않고, 그 누구도 좌절시키고 싶지 않다. 우리 부모가 날 죽였던 것처럼,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다. 무력하고 나약했던 날 마음껏 분해하고, 조립하고, 못 박던 것이 내 부모의 모습일진데, 그 모습이 내게도 투영될 생각을 하면, 아주 더러운 피가 내 몸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으니까, 그리고 그 핏줄이 터질 것만 같은 분노로 가득해지니까, 나를 좀 혼자 두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내게 했던 취급들을 떠올릴 때 난 매번 강력한 혐오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나는 그 혐오감을 너무 혐오하는 사람이니까, 그 누구와도 상관 없는 영원한 남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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