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경 전까지 시를 썼고 피가 나자 시로부터 나로부터 박탈되었고 그 이후로 나는 완전히 미친 것 같아요 쿠마리-김이듬 두번째 책갈피. 첫번째 책갈피: http://thredic.com/index.php?document_srl=19658124
  • 아무데서나 나도 팍 쓰러지고 싶었다 화염에 휩싸인 채 흘러가는 구름들, 들판 위의 집들 빠르게 빠르게 하늘을 건너갈 때/누군가의 깊은 한숨이 마리화나의 새떼를 날릴 때/날아가는 새떼들 위로 쏟아지던, 화염방사기 속의 여름 나는 아무데서나 어디로든 도피하고 싶었다 하늘에서 참새구이들이 투툭 떨어져, 소주병 속으로 떨어져/푸른 정맥 속에서 하나의 길이 예감처럼 솟구쳐오를 때 사랑을 잃고 나는 걸었네/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했네/추억이 페달이었네 폐허와 폐허와 폐허와 또 다른 폐허 속에서 푸푸 푸른 현기증이 나도, 페달을 밟으면서/길 옆으로는 가기도 잘도 갔네 아 하면 아이디 아이다 호호호, 푸푸푸 하면서 세월이 갔네 아무데서나 사랑을 했네/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쓴 것이 몸에는 좋다네 아이다호-박정대
  • >>205 >>902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소멸의 형태는 가학적이었다. 사랑은 시간이 지나자 세월을 닮아 무거워졌다. 나날이 가벼워지는 건 짐승의 몸이었다. 하루는 머리카락이 병(病)처럼 쏟아졌다. 별이었다. 변이었다. 적출된 안구의 열상. 뜨겁게 보이는 것들을 회개하며 미움을 확장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하루는 미욱한 맹세. 하루는 파괴된 영원. 개처럼 혹은 새처럼 자유에 무뎌졌다. 하루는 또 다른 폭행의 맛. 폭력과 미움의 상흔을 새겼다. 질병에 젖은 기관들, 벌어진 관절 사이에 염증이 들어앉았다. 모든 생명이 거쳐갔던 몸은 하염없이 외면당했다. 하루는 일몰. 하루는 네 발 달린 짐승. 하루는 하루의 인내와 하루만큼의 희생. 염원처럼 짐승처럼 늙어갔다./내가 긁어낸 벽지가 손톱 사이에서 별이 되어 지고 있었다. 짐승ㅡ아내-조혜은
  •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추위 탓으로 돌립니다/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괜히 가방이 사고 싶습니다/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그 이유는 단 하나,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근로자도 아니고/어린이도 아니고/어버이도 아니고/스승도 아닌데다/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그간 못 쓴 사족이/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놀랍게도,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무덥습니다/온갖 몹쓸 감정들이/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밤이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오릅니다/어제의 밥이, 그제의 욕심이, 그끄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합니다/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1년만큼 더 늙은 내가/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1년-오은
  • 1/돌아보니 한번도 정갈한 손으로/너를 안은 적이 없었다 우리는 늘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너의 등을 만나기 위해/치석 같은 판단들을 사정없이 긁어냈고/시간을 닦아낸 휴지 조각은 산처럼 쌓였다 우리가 그토록 초조하게 찾으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너의 것인 줄 알고 받아들인/수많은 헛것들 두 눈 똑바로 뜬 채, 앞에 앉은 너에게/너를 빌려주어서 고마웠노라고 말한다 영사기에서 새어나온 우리는 허상이었다 말한다 초조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만날 수 없었다 사람의 발에 시간을 신길 순 없었다 이제 우리는 벗었던 양말을 신어야 한다 서로의 수음을 구경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가-김소연
  • 2/또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반복을 세뇌하는 복음/벗겨내고 나무젓가락 두 쪽을 쪼갠다/길다란 종이에 포장된 나무젓가락 두 쪽을 그들은 쪼개지만, 왜 그와 그 여잔 명료하게 쪼개지질 않을까 숨통 막히는 포장지 벗어던지고 그 여자는 국수를 비비면서 오늘도 생각했다 나무젓가락 두 쪽을 딱, 쪼개듯 쪼개질 수 없는 그에 대해/자웅동체처럼 붙어 사는 접착 본드의 위력에 대해 그 여자는 내일도 생각할 것이다 한 젓가락의 운명을 쓸모있게 들어올려보았으면/그런 후, 부러지고 버려져보았으면! 나는 새로운가-김소연
  • 3/거기 화환을 줄지어 내다놓은 양화점/새로 문을 여시는군/거리의 새로운 출발을 목격하는 나는 새로운가 한 사람의 구원덩어리가 버스에 올라탔다/식권을 쥐어주듯, 우리들 허기를 걱정하는/경고장을 나눠주었다 기쁘다, 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모든 사람들은/바쁘다, 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신촌역 로터리에서 버스의 그림자가 급회전할 때/나는 생각한다 무관한 행려병자의 안구와 오장육부에 대해/그리고 나는 쉽게 전염된다 세브란스/영안실의 무관한 통곡들에 덩달아 화를 내는 일 잦아도 덩달아/기뻐하는 일이 드문 나는 말한다/거리의 화환이 즐비한 어떤 양화점 지나며 당신들은 좋겠어요/짧은 희망들마저도 내다놓고 장식할 줄 아시니 나는 새로운가-김소연
  • 사회자가 외쳤다/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보라, 이 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홀린 사람-기형도
  •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박형준
  • 난 사랑을 잊기 않기 위해 당신과 만나지 않고, 당신과 숱하게 만나면서 당신과 나 사이에 잊혀진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작별을 선택한 사람이다. 내게 시는 그런 것이다. 기억을 잊기 않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것을 기억하기 위해 쓴다. 내게 시는 망각이며, 정확하게는 기억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는 부재의 이미지이다. 난 길을 걷다가 눈을 감고 손을 내밀면 공기의 서랍장이 쓱 열릴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그 속에 무엇이 있을까 묻지는 말자. -박형준
  • 유년 시절의 경험은 종종 일생 동안 그 그림자를 드리운다. 누구나 마음속 작은 구석방에는 '어린 아이'가 숨어 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방에 잠들어 있어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아이는, 어떤 계기나 상처에 의해 깨어나 소리 없이 울곤 한다. -나는 아직도 사람이 어렵다, 강은호•김종철.
  •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파부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서정주
  • 사랑이란 저런 거지. 바로 저런 거요. 인간은 사랑의 긴장을 오래 견디지 못해요. 사랑이 스스로 지나가지 않아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끈을 놓거나 아니면 자살이라도 해야 하는 거요. -내 생에 꼭 하루 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 우리는 더러 사막과 마주친다/그때 한 걸음을 내디디면 스스로 사막이 될 수 있다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혼자 밤길을 걸을 때 결국 노변에 주저앉아 꺽꺽거릴 때 자동차가 새보다 빨리 곁을 지나갈 때/믿었던 사람이 등을 보일 때 우산 없이 비를 맞을 때 느닷없 이 욕설을 들을 때 아무도 나를 보고 웃지 않고 이름을 기억 해주지 않을 때 내가 살아서 세상이 더 더러워졌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럴 때 화를 내는 불길 너머로 흐르는 눈물 너머로 우 리는 사막을 본다 내디디면 누구나 곧 한 필지의 사막이 된다 누군가 그를 불러 웃어준다면 그의 이름을 기억해준다면 떠난 이 그에게 돌아온다면 그의 손을 잡고 가슴을 보여준다면 그를 다시 길가 술집으로 데려가 함께 앉는다면 차를 세워 태운다면 우산 속으로 젖은 그를 들인다면 그가 있어 세상이 더 아름다움을 알려준다면 그 눈의 불길과 눈물을 거두어 준다면 그는 사막으로 떠나지 않고 사막이 되지 않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당장 오늘 누구를 위로해주지 않으면 그는 내일 사막이 될지 모른다 그가 사막이 되기 전에/내가 사막이 되지 않고 견디는 데에/그의 노래가 힘이 되었음을 전할 수 있었다면/그는 아직도 노래할까 그를 본 적도 없는 나는 오늘도/그가 남긴 푸른 노래를 들으며/사막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고 있다 사막이 되지 않기 위해ㅡ故김광석에게-이희중
  • #6/우르르 유령 시인들이 몰려와 여자의 종이를 찢어버립니다. 종이만 찢었을 뿐인데 여자의 가슴에서 피가 흐릅니다. 욕조 안에 핏물이 고입니다. 유령 시인들은 종이에 대고 협박합니다. 자신의 시를 모방했다고, 갖은 기교 범벅 비스킷 같다느니 뭐니 벽돌로 여자의 머리를 빗어줍니다. 칭찬은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상(李箱) 옆에서 김수영이 사랑에 미처 날뛰는 날을 이야기합니다. 전 당신들을 닮을 생각도 없고 오마주도 모르는데요. 우리는 영원히 무한히 우리를 배신하여…… 입에서 두부만 한 핏덩이가 쏟아집니다. 가만히 보니 오래 묵은 자의식과 낭패감 따위가 묻어 있습니다. 초라한 절망으로는 충분히 가벼워지지 않은 근육들이 핏물에 자유롭게 꿈틀거립니다. 여자는 잠에 빠지듯 혼몽합니다. 몸이 조금씩 빠져나갑니다. 스르르 욕조 구멍에서 빠져나가 다른 세계로 흘러갑니다. 모든 수치와 장난, 인연으로부터 먼 세계로 나아갑니다. 기고 있지만 날아가는 것 같고 유령들과 한패가 된 듯도 하지만 동물들의 울음을 이해합니다. 용감무쌍하지 않고 나약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절반 죽은 것 같습니다. 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김이듬
  • #8/급하니 빨리 빨리 빨아 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김이듬
  • #9/그녀가 만난 유령들은 광인들에 가까웠고 초년에 자살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간에 지상에는 없는 아름다운 언어로 욕설을 했고 어쩔 수 없을 정도의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번번이 여자를 떠나보냈습니다. 어쨌든 자살하지 말라. 노란 4H연필로 노트 첫 장에 글씨를 씁니다. 유령 마야코프스키의 것인지 바하만의 것인지 모르지만 슬쩍했나 봅니다. 결백하기 위하여 모순투성이의 인간이 될 것입니다. ​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김이듬
  • #10/(……)봐라! 너도 더럽잖아, 네 아버지와 똑같지 않니? 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김이듬
  • #11/버림받은 어린 딸이 엄마를 찾아가는 것은 별이 뜨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김이듬
  • #13/모든 것은 변해가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날들입니다. 오히려 더욱 외롭고 춥게 더더욱 허무하게 손전등을 켜고 유령 놀이를 합니다. 텅 빈 광장에는 교활한 침묵뿐. 운이 좋아 들어온 고모라 같은 이곳에는 엇물리는 이상한 시간들이 있습니다. 포용의 복도도 삼빡한 연애나 우정의 비상구도 없습니다. 매일 문장이 탈주한 자리엔 얼음이 깊어지고 매캐한 연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하루 끼니를 겨우 해결한 우울한 바보 여자는 유령들의 정원을 내려다봅니다. 거미줄을 걷어보면 거울 안의 욕조에 심장의 묘비에 때가 많이 끼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 못 찾습니다. 사실 여자라기엔 애매한 실존입니다. 둘 중 하나는 유령입니다 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김이듬
  • 죽음은 조는 동안에 와서, 별 좋은 일도 없이 스러지고 말아라 황촉불-김소월
  • 친구의 잠과 이 마당은 낯설고 하수구 냄새를 만든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일요일/친구의 약을 얻어먹고 오후를 넓히는 데 집중한다 친구의 티셔츠처럼 친구는 조금 크고 조금 길고/이집에서 나는 노력 없이 노력한 것보다 더 작아진다 친구, 너는 왜 고아가 아닐까 건조대에 빨래집게가 가득 매달려 있다 친구는 약을 먹으면서 많이 좋아져서/이제는 약을 먹지 않을 때만 깨어 있다 친구의 선생님은 대문과 현관 사이를 마당이라고 부른다/뭔가 키워보라고 권한다 다이빙 선수가 가진 어두움, 수면에 비친 그림자가 확 튀어 오른다 빨래가 ​끝났다 마당에 비가 올지도 모른다 친구의 앞날을 빈다 뺨에 난 베개 자국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비 냄새가 나면 다시 세탁기를 돌려야지, 친구는 나를 키우다 죽게 된다 그래도 된다 잉어 양식장-김복희
  • >>923 친구의 선생님은 대문과 현관 사이를 마당이라고 부른다/뭔가 키워보라고 권한다.
  • 사과하실 거면 하지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나는 사과했어. 그 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 -우아한 거짓말, 김려령.
  • 누군가의 손이 한 사람의 손안으로 들어가/악의 없이 주먹을 쥘 때/동그랗게 말린 허공의 밀도는 낡은 지구본을 닮아 간다/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너무 아프지 않을 만큼 주먹을 감싸는 사랑은 떠받치는 쪽보다 누르는 쪽을 더 섬세하게 여행하고/지명(地名)을 알 수 없는 소도시를 돌아/서로를 일주한 연인들의 방명록을 넘겨 볼 때 명사보다 동사가 많았던 페이지에선 또 다른/생애를 맞이하는 세계의 이면이 드러난다 아프지 않을 만큼만 당신을 후려치고 싶어, 주먹이 빠져나간 저녁마다 옅은 멍 자국이 맺힌 가로등이 켜진다 멈춰 선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당신과 빈 곳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이/주먹을 쥔 채 외투에 찔러 넣은 것들은눈물보다 습한 밀림을 이룬다/안쪽은 왜 곁이 없는 오지로 남는 것인지를 밀림-기혁
  • 내 방에는 벤치가 있다/안에 있는 바깥이고 겉을 둘러싼 속이다/외출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달라서/우리는 매일 죽고 다시 난다/벤치는 늘 죽은 나로 비좁다 왜 그러고 살아/그러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니 그러는 거지 나였던 나와 나였었던 나의 담소는 마른 화초처럼 권태롭다/다행히 그들은 음악을 애호하는 취향이 같다 남향의 집에는 귤빛 볕이 가득하고/벤치의 나와 나는 서로 어깨에 기대 선잠에 든다 나와 내가 장난인 듯 벤치를 집밖으로 들어 옮기려 한다/하지만 벤치는 식물성이고 뿌리가 깊다/우리 중 누군가 몰래 물을 주고 있다 나로서의 기억도 잊은 오래된 나는, 오늘도 "네가 있어서, 나는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 너인 줄 알았다" 라는 문장의 뒤를 잇지 못한다/이제 나는 거의 벤치와 하나가 되었다 벤치의 발치에 누워 빤한 운명을 긍정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내일이면 벤치는 더욱 비좁겠지만/우리는 모두 벤치를 사랑할 것이 분명하다 그가 벤치에 앉기 전 잃어버린 문장은 무엇이었을까 벤치는 열린 결말처럼 벤치-이현호
  • 눈물로 적시고 또 적시여도/속절없이 식어가는 네 흰 가슴이/저 꽃으로 문지르면 더워 오리야 아홉 밤 아홉 낮을 빌고 빌어도/덧없이 스러지는 푸른 숨결이/저 꽃으로 문지르면 도라 오리야 門열어라 鄭道令아-서정주
  •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백색소음-이다희
  •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백색소음-이다희
  •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백색소음-이다희
  • 오 내 사랑, 넌 내가 팔베개 해주는 걸 좋아했지/내 팔에 안겨 새끈새끈 잠들곤 했지/처음에 난 그저 행복하기만 했어/곱게 잠든 네 얼굴에 키스하며 온 밤을 세웠어 오 내 사랑, 제발 기억해 다오/내가 아픔을 참고 매일 밤 팔베개를 해줬다는 걸 하지만 난 결국 팔에 신경통이 생겨/더 이상 팔베개를 해줄 수가 없었지 정말 아팠어 오 내 사랑, 그러자 넌 내 곁을 떠났다/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나는 팔이 아파 너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다만 애원하며 설득했을 뿐, 이것이 사랑의 실존이라고 오 내 사랑, 그래도 넌 내곁을 떠났다/팔베개 하나 못 해주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며 그립다 내 사랑, 제발 기억해 다오/내가 매일 밤 팔베개로 널 재웠다는 걸 돌아와라 내 사랑, 이젠 팔이 다 나았으니 사랑의 슬픔-마광수
  • 너의 예언으로/이 세계를 잃어버리고 싶어 예언자4-김학중
  •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 -에우로파, 한강.
  • 욕설로 말해주세요./아니면 차라리 침묵해주세요./말은 진실을 전달할 수 없는 것, 쟁기로 굳은 땅을 갈아엎듯/삽으로 잠든 흙을 뒤집어엎듯/이제는 욕설로 나무라주세요. 욕설-오세영
  •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시-정현종
  •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나의 고아원-안미옥
  • 사람들이 우리를 잊은 게 아닐까? -비행운, 김애란.
  •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수천 번 죽음을 노래했건만/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게 이상하다 불안한 것들-강정
  • 비린 물고기의 살덩이를 나는 좋아한다/역한 감각을 발산하는 것들에 나는 내 고통을 교통시킨다 나는 아프지 않다/내가 아프다고 느낄 때조차 나는 아프지 않다/내가 아플 때 내 몸은 물고기들 아가미 속에서 아파하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본다/쟤, 정말 아픈 걸까? 불안한 것들-강정
  • 누구든 날 먹어 제 살을 불리는 족속들은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불안한 것들-강정
  • 나는 기다린다 이상하게도 나는 기다린다 기다릴 게 아무것도 없는데 기다리는 나는 참 이상하다/세상의 하복부를 적시는 빗물 속에서 나는 기다리는데 정말 이상하다/ 완전히 허물어졌는데 내시가 파멸을 상정하지 않다니? 내 기다림은 불안일까? 불안한 것들-강정
  • 이젠 울어도 돼, 이곳은/물 샐 틈 없으니까. 폐수종-송기영
  • 가장 먼저 등 돌리데/가장 그리운 것들/기억을 향해 총을 겨눴지 꼼짝 마라, 잡것들아/살고 싶으면 차라리 죽어라/역겨워, 지겨워, 왜 영원하다는 것들은 다 그 모양이야 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심보선
  • 가장 먼저 사라지데/가장 사랑하던 것들 추억을 뒤집으니 그냥 시커멓데 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심보선
  • 나는 갈수록 추해진다/나쁜 냄새가 난다 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심보선
  • 왜 나는 데려가지 않았어요? 왜 모든 것 속에 나는 없어요? 나는 무의미해져도 무가 되지 않고, 무감각해져도 무가 되지 않고, 커도 어른이 되지 않고, 불행한 이웃을 그리워해도 불행한 이웃이 되지 않고…… 되지 않는 모든 게 진짜 나란 말입니까. 되지 않는 모든 것을 합치면, 결국 뭐라도 됩니까. 조용한 지구-김행숙
  • 내게는 습관이 남아 있었고, 나는 서 있었다. 그날 당신이 내게 말을 건넨 거예요. 나는 약속했고, 무의미해져도 지킬 거예요. 약속 장소에 나갈 거예요. 조용한 지구-김행숙
  •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이상
  • 만나서 결국 아무 이야기도 못 하고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저 만나기라도 합시다. -이상
  • 엊그제 나는 당신이/죽어버리라고 빌었습니다/그때 당신은 조금이라도 죽을 맘이 생겼습니까?/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나요?/진도 3과 7의 지진처럼/약하게 한 번 강하게 한 번/빌었는데 아무 기척 없었습니까? 기나긴 욕 속에 예언합니다 당신의 머리카락 없고 이빨 몽땅 빠진 미래/얻어맞은 당신이 끙끙 앓는 소리를 기원합니다/열병을 앓고 열병을 앓아 하나의 불덩어리로 화르륵 타버릴 당신 재로 날아갈 당신 훨훨 훨훨 나는 왜 춤을 못 출까요 방방 뛸 준비를 마쳤는데 날아오를 때가 되었는데/신명이 오르질 않네요 당신이 앓을 때 나는 멀쩡합니까?/정말 당신의 고통 속에서 나는 춤출 수 있습니까?/내가 그린 지옥도 속에서 당신은 튀겨지고 있고 당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내 표정 본 적 있습니까? 비는 대로 이루어지는 힘 저주 받을 나의 힘 스스로가 징그러워서/나는 구덩이 속으로 빨려갑니다 우리는 함께 삶아지고 구워지는 중인데/나는 자꾸 캐묻습니다 당신을 향한 원한은 효과가 있습니까? 매스껍지는 않나요?/어제와 오늘의 차이는요? 어지럽나요? 차도가 있나요? 차도가 있어요? 있어요? 있어요? 여기 없고 당신은/아니라고 아니라고 고갤 젓습니다. 저주 후의 문진-권민경
  •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밑구녁까지 보이며 애원했건만 /네가 준 것은/차와 동정뿐/내 마음은 허겁지겁 미지근한 동정에도 입술을 데었고/너덜너덜 해진 자존심을 붙들고/오늘도 거울 앞에 섰다 봄이라고/개나리가 피었다 지는 줄도 모르고…… 차와 동정-최영미
  • ㅡ*바쁜 척 그만하고 나 좀 고쳐줘요. 냉장고 속에 붙여진 작은 쪽지 속에 '나'는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남자는 자신의 감정을 낱낱히 해부해가며 숨겨져 있던 진심과 그간 외면해오던 사랑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에 아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냉장고를 손보는 행위 따위가 아니라 그녀에 대한 한 남자의 따뜻한 손길이었음을. 일찍이 고장 난 냉장고 속에서 뒤늦게 발견된 줄리아의 메모는 처음으로 데이비드를 울게 만든다./지독한 상실의 끝에서 다시 사랑할 용기를 찾는 것, 진정한 그리움은 그런 것이다. 무너진 자아를 외면하지 않고 그로 인해 다시 일어서는 방법을 배우는 것, 언제나 그랬듯이 상실과 그리움의 경계에서 우리의 삶은 깊어진다. 그리워진다. -서서히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 김민준.
  • >>953 *영화 데몰리션(2015년 개봉작, 장 마크 발레 감독.)
  • 나는, 그저, 짐승처럼 앉아 있었을 뿐인데요/누가 나를 여기 데려왔죠? 왜 거두는 거예요/내 자궁은 썩은 쇳조각, 분신할 아들도 파업할 딸년도 낳을 수가 없는데요 발작-이연주
  • 언젠가 죽어본 적 있는 그 시간이다/달이 찼다/영원히 살 것처럼 탐욕 하는 부자들이 불쌍하다 이 별에서 꼭 해야 할 일은/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뿐 가을에 떠난 너의 이름을/다시 가을이 온 후에 비로소 불러보았다 아무렇지 않았다/여전히 사랑했다 산 사람들 속에 죽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서/여기가 진짜 지옥이 되지는 않는 거라고, 나에게 보낸 너의 마지막 편지에 쓰여 있었다 달빛이 따스했다 착하고 슬픈 사람들을 위해 시를 쓰겠다고/달에게 약속했다 나들의 시 om 11시-김선우
  •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am과 pm의 시간에서 누군가 말한다 그 순간 om의 시간이 그믐처럼 스미며 당신……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나들의 시 om 11시-김선우
  • 넌 왜 날 버렸니? 내가 언제 널? 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상처였지, 별달리 상처될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 캐나다? 계곡? 나무집? 안데스의 단풍숲?/모든 관계는 비통하다, 지그시 목을 누르며 밥을 삼킨다 서늘한 점심상-허수경
  • 이제 나에게는 안 오지? 너한테는 잘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 가까이할 수 없는 인간들끼리 가까이하는 일도 큰 죄야, 심지어 죄라구? 서늘한 점심상-허수경
  • (……)먼 곳에서 당신이 죽을까봐 두려워요. 당신이 죽은 지 일년이 지났는데 나는 슬퍼하지도 못했을까봐 진짜 두려워요. 당신이 지진이라면-김행숙
  • 오래된 습관을 반복하듯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대는 묻는다, 왜 어둠을 그리도 오래 바라보냐고, 나는 답한다, 그것이 어둠인 줄 몰랐다고, 그대는 다시 묻는다, 이제 어둠인 줄 알았는데 왜 계속 바라보냐고, 나는 다시 답한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그대는 내 어깨 너머의 어둠을 응시하며 말한다, 아니요, 당신은 멀쩡히 깨어 있어요, 너무 오랜 고독이 당신의 얼굴 위에 꿈꾸는 표정을 조각해놓았을 뿐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심보선
  • 이 밤에 열에 하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열에 하나는 무척 외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열에 하나는 흐느껴 울기도 한다, 이 밤에 그대와 내가 이별할 확률(=0.1x0.1x0.1)을 떠올리면 내 얼굴은 저 높이 까마득한 어둠 속 백동전으로 박힌 달 표면처럼 창백해진다, 나는 다만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시간의 완곡한 안쪽에 웅크리고 누워 잠들고 싶은데, 지금 나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잊고 번민으로 오로지 번민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심보선
  • 모든 병든 개와 모든 풋내기가 그러하듯 나는 운명 앞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대를 오랫동안 품에 안았으나 내 심장은 환희를 거절하고 우울한 예감만을 가슴 복판에 맹렬히 망치질 하였다, 우연이란 운명이 아주 잠깐 망설이는 순간 같은 것, 그 순간에 그대와 나는 또 다른 운명으로 만났다, 그러나 운명과 우연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 서로의 목전에서 모래알처럼 산지사방 흩어지고 있는데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심보선
  • 그대에게서 밤안개의 비린 향이 난다, 그대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 어둠 속 내륙의 습지를 돌아와 내 눈동자에 이르나 보다,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첫 페이지부터 파본인 가여운 책 한 권 같군요, 나는 수치심에 젖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묻는다, 여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덜 슬프겠는가, 어느 것이 먼 훗날 불멸의 침대 위에 놓이겠는가, 확률은 반반이다, 확률이란 비극의 신분을 감춘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계산법이 아닌가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심보선
  • 눈을 떴을 때 그대는 떠났는가, 떠나고 없는 그대여, 나는 다시 오랜 습관을 반복하듯 그대의 부재로 한층 깊어진 눈앞의 어둠을 응시한다, 순서대로라면, 흐느껴 울 차례이리라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심보선
  • 저것이 상자인지 사체보관함인지/저것이 욕조인지 유골항아리인지/저것이 변기인지 우체통인지 난 모른다 새로 나온 고양이 전용 세탁기인지/새로 나온 신사용 거들인지 난 모른다 어쨌 누군가 난 석기함을 입는다 말하면 이것은 옷이 된다/난 석기함을 읽는다 말하면 이것은 책이 된다/난 석기함을 피운다 말하면 이것은 담배가 되고/난 석기함을 먹는다 말하면 이것은 음식이 된다/한 마리 붕어빵이 되고 맛있는 찹쌀호떡도 된다 어쨌든 누군가 난 석기함을 그린다 말하면 이것은 그림이 된다/난 석기함을 듣는다 말하면 이것은 음악이 되고/난 석기함을 기른다 말하면 이것은 애완동물이 된다/한 마리 개가 되고 고양이가 된다 당신이 석기함으로 입술을 칠하면 그것은 립스틱이 된다/당신이 석기함을 무덤에 세우면 그것은 묘비가 된다 당신이 석기함을 섹/스 때 사용하면 피임기구가 되지만/당신이 석기함으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살인도구가 되고/당신이 석기함에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살인장소가 된다 석기함은 무엇인가? 당신이 거울을 통해 석기함을 만나면 그것은 당신이 되고/당신이 생의 종점에서 석기함을 만나면 그것은 죽음이 된다 과연 석기함은 무엇이고 어디 있는가? 그것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짐승인지/하나의 실체인지 유령인지 허깨비인지/하나의 혼돈인지 꿈인지 환각인지 난 모른다 그래서 요즘 나는/석기함에게 발이 시려운 편지를 쓴다 석기함으로 맛있는 요리도 해먹고/석기함으로 맛있는 목욕도 한다/석기함에 누워 달콤한 꿈을 꾸기도 하고/석기함과 함께 놀이동산에도 간다 석기함-함기석
  • 사내가 초록 페인트 통을 엎지른다/나는 붉은 색이 없다/손목을 잘라야겠다 봄이 왔다-진은영
  • 사랑니 두 개 한꺼번에 뽑았습니다/필요 없는 사랑 여태 갖고 있었냐는 의사의 말에/오래 숨겨놓은 비밀 들킨 것 같아 움찔 했지요 사랑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말이 헛돌고/비릿한 슬픔이 이빨에 씹힙니다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는 이런 거구나/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아픔 삭여야 하는, 내 안에 당신이라는 큰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던 그런 일 같았지요 이제 치통을 핑계 삼아 엉엉 울고 싶은 날은 없을 것입니다만, 사랑이 빠져버린 자리에 새살 돋는 소리에 귀 기울일 것입니다 안부-정다혜
  • 나는 누군가에게 영혼을 팔지 않고 살아가는 것보다 휼륭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 나는 너를 거칠게 대하고 싶어 죽은 체하는 걸까/산 체하는 걸까 물의 친교-김행숙
  • 사랑은 익사하지 않는다 뼈와 살-김언
  • 우리는 겨우 의지하고 있다/뼈와 살처럼 ​당신 대신 일어나는 감정을/허겁지겁 붙잡고 나왔다/살려고 살려고/방금 전까지 동반 자살하던/그가, 뼈와 살-김언
  • >>971 >>972 함께 있지만 하나 될 수 없는 운명.
  • 지혈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며 적혈구의 생김처럼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서효인
  • 금연건물에서 모르핀을 허벅지에 찌르는 당신은 인내심 강한 사람이다.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서효인
  • 노래책을 뒤지며 모든 일을 망각하는 당신은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불침번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당신은 사람이다.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나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서효인
  • 아이티에서 진흙 쿠키를 먹는 아이를 보면서 밥을 굶지 말자. 진흙 같은 마음을 구웠다. 내전이 빈번한 나라처럼 부글부글 끓는다. 라면 같은 그것을 날마다 먹어야 한다. 스스로를 아끼자, 스프 같은 마음을 삼켰다. 한 장의 휴지를 아끼기 위하여 코를 마셨다. 자위를 삼갔다. 물로 닦았다. 성병 걸린 르완다 여자애를 떠올리며 성호를 그었다. 이마에서 배로 손가락을 옮길 때 손을 잘 씻어야지, 불현듯 다짐했다. 지진을 대비한 건물처럼 잘 휘어지는 마음. 변덕을 견디며 체위는 다양해져 갔다. 깨끗한 사람이 되기 위해 거품을 일으켰다. 부글부글 빨리 익었다. 모스크바에서 황산을 뒤집어쓴 베트남 유학생 얘기를 들으며 편식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뭐든 차별은 나쁜 일. 풀과 나뭇잎의 색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쌀국수를 먹을 때는 꼭꼭 씹는 게 중요합니다, 의사는 말했다. 할례 의식 중인 꼬마를 보며 의사의 말을 되씹었다. 꼭꼭 씹어 삼킨 다음엔 양치질을 오래 하리라, 삐친 사람의 입처럼 벌어지지 않던 꼬마의 그곳이 벌어지자 치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마그마처럼 헛구역질을 하며 괴상한 소리를 내 본다. 뜨거운 다짐들이 피부를 뚫고 폭발한다. 바로 이곳에 서 있다. 들끓는 마음을 가진, 괴물. 마그마-서효인
  • 이 세상에서 뭐가 제일 싫다고 해도 싫은 사람같이 싫은 것이 또 있을까? 나의 작은 채린(2)-전혜린
  • 커다랗게, 뜨겁게 빛에 차서 더러운 것, 얕은 것을 속에 끊자. 언제나 창조하는 근원의 힘에 서 있자. 애써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내자. 채린이 생일날에 언니가(3)-전혜린
  • 나는 행복하다. 지금 이 순간(1955년 8월 24일 오전 2시 30분). 무의미한 눈물이 끝없이 뺨을 구르도록 내버려둔 만큼 나는 앓고 있다. 지금......이 얼마나 강렬한 즐거움이랴. 아무에게도 뺏길 수 없는 나의 단 하나의 소유가 있다면 그것은 너다. 아니,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이다./나는 기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른다. 나는 의아히 여긴다. 분석해 본다. 이윽고 나의 전신은 이미 있을 우리의 이별에 흐느끼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헤어진다. 지금, 가슴이 찢긴다. 채린아!/마지막으로 마음껏 불러본다. 이 10년간의 내 애정과 존경의 전부를 이 일순에 기울인다. 채린이 생일날에 언니가(3)-전혜린
  • 굶었던 것이 버릇이 되어 밥은 입에 안 들어가고 그저 금붕어처럼 커피만 자꾸 끓여서 꿀떡꿀떡 마시고 있다. 독한 술이나 짙은 시가가 그리울 때도 많다. 모두가 울분 때문인 것이다. 또는 자기 불만, 더 철학적으로 말하면 자기와 참 자기(일상인으로서가 아닌 실존하는 참 자기) 사이의 '거리감(Pathos der Distanz)' 이라고 철학 용어로는 말한다. 그 때문에 발광 상태에 가까운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채린이에게(5)-전혜린
  • 새카만 커피만이 주식이 되고 만 이 팽팽한 신경의 끊길 듯한 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무관심이란다. 나의 생(生)도 나의 사(死)도. 채린이에게(5)-전혜린
  • 너나 나나 다 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져 있는 것을 놀라움을 가지고 발견하고 회의하고 있는 인식의 학생들이다. 괴로워도 괴로워도 최후의 인식의 날을 위해서 출발하자. 세계와 또 쓸데없는 모든 것과는 거침없이 하자. 채린이에게(5)-전혜린
  • 다들 죽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말 조르주 상드의 말대로 그 모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생이란 취하게 하는 것, 좋은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그렇게 귀중한 것이다. 나의 동생 채린이에게(6)-전혜린
  • 나의 약한 몸으로는 아기를 낳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아마 무리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낳고 싶다. 죽음을 마음 속 깊이 각오하고 있다. 생명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깨끗한 일이 아닐까. 채린이에게(7)-전혜린
  • 요새 나는 자기의 무지를 더욱더 뼈아프게 느끼고 있다. 그래도 절망은 안 한다. 채린아(10)-전혜린
  • 내 속에 고요한 하모니가 깃들고 있다. 고독이 얼마나 필요 불가결한 물건인가를 절실히 느낀다. 예술은 고독 속에만 탄생될 수 잇는 것이다. 고독 속에서 자기를 속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 괴롭고도 자랑스러운 투쟁의 순간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방안에 뮤즈의 날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채린아(10)-전혜린
  • 결국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의식뿐이지 기타는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는 것을 네가 깨달았다면 그것은 큰 여행 수확이지 결코 도로는 아니리라. 채린아(11)-전혜린
  • 아편이나 에테르도, 술도, 시도, 미덕도, 아무것도 없는 우리다. 실로 기막힌 이 살덩어리와 추한 피부밖에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여행'뿐이고 그것이 환멸로 끝날 것은 미리부터 약속되어 있는 까닭에 출발이 그다지도 정다웠고 마음 아픈 환희를 주었던 것이다. 채린아(11)-전혜린
  • 각설하고, 집안 소식/1. 살로메의 입술처럼 진홍빛으로 무르익은 달디단 수박이 남아 돌아간다는 것./2. 오이지 담갔단다(1천 개)./3. 어제부터 비가 온다는 것 채린아(11)-전혜린
  • 꽃이 한 무더기 피었다 질 동안 침묵의 상자 속에서 웅크리며 지냈다 봄볕은 창문 틈으로 조금씩 끓어넘쳤지만 뒷걸음질치는 퉁퉁 부은 발 앞에서 거품처럼 흩어지고 문득 며칠동안 말을 않고 지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라디오의 전원을 켠다 무너지는 것을 견디기 위해서 무너질 수밖에는 없었다 차가운 맥주에도 입천장은 쉽게 벗겨지고 한 무더기 독초를 뜯어먹고 온 저녁이면 해독 불가능한 언어의 노래를 들으며 불면의 밤을 보냈다 그리워할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없는 날들 속에서 난 그저 온몸으로 세상의 치수를 재는 한 마리 자벌레일 뿐이었다 번데기-조영석
  • 기적이 벌어지는 동안/누이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가족사진-조영석
  • 이 집엔 바퀴벌레도 살지 못한다 가족사진-조영석
  • 칠십을 넘겨서까지/세상에 버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외탁-조영석
  • 나의 생(生)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말았지만/그리하여 난 늘 바깥만 그리워하였지만/눈 속의 핏줄은 쉬 충혈되곤 하였다/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를/이 세상 밖에 어딘가에서 만난다면/서로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며/사내에게만 유전되는 슬픔을 알아볼 수 있을까? 내 피의 구 할은 바깥으로부터 흘러들어 온 것이다 외탁-조영석
  • (……)취기에 휘청이며 딱히 누구에게랄 것 없이 중얼거린다 "사는 게, 사는 게 말이지요. 참, 좆 같습니다" 고단하다 팍팍하다도 아닌 좆이란다 하고 많은 것 중에 하필 좆같단다 쓸쓸하기 그지없다 좆같은 세상-손세실리아
  • 세상살이가 좆 같기만 하다면야 더 바랄 게 무에 있겠는가 그 존재만으로도 벌써 엄청난 위안이며 희망이지 않은가 좆같은 세상-손세실리아
  • 하루를 나갔다 오면/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든다 손을 씻는다-황지우
  • 4(……)얼마나 고마운 일이니 새벽 4시에 전화가 다 오다니 나의 파란 캐스터네츠-김이듬
  • >>72 >>73 >>117 >>118 >>136 >>312 >>313 >>314 >>315 >>419 >>423 >>482 >>512 >>707 >>712 >>735 >>748 >>814 >>824 >>872 >>884 >>924 선생님 시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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