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열망은 어제까지 애써 참다가 오늘에서야 쇠고기 스튜를 끓였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뜨거운 육수, 먹음직스럽게 돌변한 갈색의 큼지막한 버터 덩어리에 결정을 후회할 순 없다. 아, 새벽의 만찬은 이리도 즐거운 것이었던가! 나는 기독교를 믿는 종교쟁이가 아니다만, 지금만큼은 하느님에게 조금 감사하련다. 오두막을 찾지 못했더라면, 눈보라 치는 숲에서 꼼작 없이 얼어 죽어 이 맛있는 걸 먹지도 못하고 어림잡아 이삼백 년 뒤에나 발굴되어 구경거리가 됐을 것이다. 몸에 온기가 달아오르니 차츰 끝 무렵부터 피부의 감각이 돌아와 잘린 새끼발가락의 상처가 쑤신다. 동사란 놈은 참으로 지독했다. 겨울 산에서 나고 자라신 아버지의 말을 빌려서, 고통은 먹을거리로 해결하는 게 가장 좋댔다. 큼지막한 돼지고기는 농후한 육즙이 터져 나와 부드럽게 씹는 맛이 일품이다. 잠시 눈을 감아 음미하며 기대하다가, 그래, 여전히 아픈 걸 보니 아버지의 말은 사실 거짓말이었나 보다. 혀에 즐기며 고통에 신음하는 와중에도 밤의 하얀 야수 떼가 나무문을 두드리다가 내심 포효한다. 이러면 무서워서라도 뛰쳐나오지 않을까, 나를 노리고 있다. 창문에서도 그 시선을 태워 나에게 보낸다. 두렵긴커녕 가소롭다. 내 앞에 걸쭉한 음식이 무엇인 줄 아는 건지. 이건 소고기다. 늑대 같은 사나운 자연에게 넘겨줄 수 있을쏜가. 하여 잡다한 생각이 들 적에 국물을 한입 들이킨다.
  • 배가 따스해졌다. 바닥에 누워서, 품 편하니 네 생각이 다 난다. 역병이 심히 들어 별이 되어 멀리 날아간 네가 그리워진다. 혼자서 비싼 고기를 먹는 게 적적하고, 너의 왁자지껄하며, 흔히 미소를 지으며 국물을 입술에 이리저리 묻히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눈시울은 벌겋게 뜬다. 아버지는 내게 남자가 돼서 눈물을 보이지 말라고 하셨다. 다만 아버지는 어릴 적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던가. 나는 상상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만, 이따금 공중에 네가 모닥불 반대편에 앉아 화염의 춤사위를 골똘히 감상하는 감정을 끄적인다. 순진한 얼굴을 해서는, 한껏 보듬어주고픈 마음에 나는 다시 허릴 꼿꼿이 펴서 일어난다. 항상 기다랗게 땋은 머리카락은 너의 자랑거리였다. 이제 다음 차례는 뒤에서 수십 번이나 반복된 말이다. -너는 사서 고생이야. 너의 잔소리는 듣기 좋다, 적어도 상황 정도는. -이제 어쩔 거야? 이 날씨에 산을 넘기엔 글렀고... 그러게, 마을 내들이 너를 무모한 놈이라 부르는 데엔 다 뼈가 있어. 나무라는 너의 말투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한 온갖 걱정과 안쓰러움이 묻어나온다. 네 그 장난기는 어디 갔나. 펄펄 끓던 국물의 김은 벌써 저만치로 달아났다. 옅은 목소리에 오두막의 고요하디 차분한 모닥불이 타오른다. 그저 다분한 상상, 꼭 틀어막혀 천장에 대고 고민하다, 사색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고른다. 밤중의 속삭임을 향해 언짢게 웃더라도 웃는 게 어딜까.
  • -별이 되어 하늘에 여행 간 사람이 말이 많아. 딴 사람이 이쁜 얼굴만 보면 산 사람인 줄 알아 반하겠네. 네 얼빠진 얼굴로 헤실대는 게 정말 바보 같다. 시도 때도 없이 보고픈 데 이젠 그럴 수 없다. 그래도 지금 이 나무토막에 둘러싸여서는 너와 함께 너무나도 안락하구나. 한밤중의 눈보라 속 빛이 붐비는 따뜻한 오두막에, 어쩌면 꿈일지도 모르는 환상에 취한다. 지금부턴 어제도 하고 그저께도, 네가 간 그 순간부터 생각해온 질문을 할 차례다. -그. -왜? -아냐. 그냥, 암것도. 나는 깊은 생각이라도 있어서 다시 자리에 웅크린다. 네 모양은 눈에 뵈지 않는다. 네가 보기 싫었다. 볼 수 없었다. 작은 오두막은 아주 쓸쓸하여 들리는 소린 창문에 부딪히는 발길질뿐이다. -얼탱이. 나의 말은 목덜미에서 자꾸만 감돌았다. 무턱대고 말해서야 진심도 아니니 머리라도 긁적인다. 허, 뭐를 위해 이러는 건지. 다 헛것일 뿐인데, 나의 거짓된 단출함일 뿐인데, 나도 참 우스운 놈이다. 땅바닥에 뒹구는 감촉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눈 사이사이로 톱밥이 어슬렁어슬렁 인다. 내가 말을 연 건 단순히 건조해서다.
  • -그쪽은 따뜻해... 너는 다시 미소를 짓는다. -엄청, 남향의 봄꽃이 흐르는 곳보다. 봄꽃이 뭐던가, 나는 손가락이 몇 갠지 센다. -역병은, 병치레 같은 건 없겠지. -무서울 정도로 아이가 뛰놀고 있어. 늙지 않는 아이가. 늙지 않는 아이는 뉘던가, 네 말은 말아 듣지 못할 것투성이다. 몸 성한 데 없을 때 만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 너는 그저 상상이던가. 없을 따름이다. -너는... 괜찮아? 너의 미소는 지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그대로 뚝, 사라졌다. -그러는 너는?
  • 그래, 되물을 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아니지. 내가 괜찮을 리가. -없잖아. 괜찮은 게 있을 리가 없어. 네가 없어. 전부 다, -없어! 위스키병은 공중을 빠르게 날아가 너의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나는 서늘한 공기 중에 가쁜 숨소리를 내뱉는다. 폐가 얼어붙은 것만 같이 고통스럽다. 온통 푸른색으로 변해버린 세상 속에, 어제 끓였어야 할 스튜는 표식조차 남기지 않았다. 먼지 눌어붙은 바닥이 나를 지탱한다. 차갑게 굳어가는 손가락이 따갑다. 나는 가까스로 알아차린다. 나는 혼자였다. 상상을 좋아하는 족속이 아녔다. 남을 웃길 만큼 유쾌한 남자도 아녔다. 나는 잠시 숨을 참아 올라오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눌러 담는다. 딸꾹 이는 코를 태우고 나는 한 켠 가장자리에 몸을 기댄다. 남쪽 한여름의 아지랑이같이 인생이 울렁인다. 굴곡진 면에 색깔들은 쇳빛에 죽어간다. 푸르스름한 창문 밖을 내다보고, 나는 발걸음을 한 자리로 고정한다. 발은 비틀거림 없이 나아간다. 나는 완고하며 결단력 있는 남자다. 투명한 유리 조각에 얼굴은 비치지 않았다. 문은 여러 번 두드린 후에야 비로소 열렸다. 눈바람은 걷히고 밖의 숲속은 청명한 순백의 아침을 맞이한다. 나는 시원한 바람을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쉰다. 나의 꿈은 찬찬히 밝아진다. 정신이 맑아지고 앞의 새하얀 강줄기를 맞이한다. 거대한 창공, 나는 이곳에 몸을 담구고 있었구나! 이를 마다하고 나는 이를 두고 당신을 따라가리오. 나의 너요, 너의 나요. 나는 흰 도화지의 마지막 물감이어라. 나의 전부여. 손목을 크게 들어, 나는 당신을 따.
  • .META DOME. Recorded Files
  • 내 숨은 무엇보다 크게 몰아친다.
  • "네, 살아있습니다. 약간의 혼선 장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1340933번은 기억 혼합 액체에 흠뻑 젖은 채로 안쓰럽게 콜록거렸다. 직원은 전화를 끊고 부츠 소리를 크게 내며 1340933번의 몸을 부축했다. 동공은 맨눈으로 보기에도 매우 빠르게 진동했다. 1340933번은 갑작스레 정신이 들었는지 직원을 뿌리치고 연구원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가 '나'라도 되는 양, 아직 하얀 기억 추출실의 단면을 천국의 취조실이라 여기며 애타게 '너'를 찾아 나섰다. 수차례의 몸싸움 직후, 1340933번의 넝마는 눈물이 닿아 차가운 파란색으로 물들여갔다. 1340933번은 나직이 하늘을 바라보며 '너'의 이름을 불렀다. 1340933번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 prologue end
  • 1. Rebirth
  • 사회자는 리모컨을 눌러 자글거리는 텔레비전을 껐다. 흔히 내비게이터라 불리는 그 사회자는 목을 가다듬고 대강당에 앉아있는 수십 명의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보신 이 사건은 기억 혼돈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기억에 중독되는 분들께서 겪는 현상인데, 제가 굳이 이 끔찍한 참상을 보여드리는 이유는, 최근 들어 이 현상으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차여차 해서 그 남자 내비게이터가 강조하고자 한 바는, '과도기적 기억 몰입은 좋지 않다.'는 것과 '여러분은 우리의 귀중한 재산이다.' 같은 어줍지도 않은 조언이었다. 애초에 기억이란 게 마약과 다를 것도 없거니와 나는 그런 타인의 기억 따위에게 의지할 만큼 나약하지도 않기에, 고리타분하고 장황한 연설을 무지하게 감수해야 했다. 하품을 참으며 주위를 차츰 둘러보니 다른 지원자들도 나와 별반 다르게 없었다. 언제 끝나려나 하고 눈알을 시계의 분침에 우두커니 고정할 뿐이었다. 한 이십 분 정도 지나니 새하얀 강당의 표면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뇌를 긁어내고 비워내서 일말의 잡념조차 사라져갔다. 한 시간이 지나 마침내 반가운 소식, 개똥철학의 연설이 끝났다! 나는 고개를 움찔하고 허릴 다시 바로 폈다. 당장에라도 내비게이터가 회사의 좌우명을 선창하고 우리가 복창하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날 수 있다. 잠시 후, 우리는 내비게이터의 계시에 일제히 일어나 희미하게 들리는 말을 듣고 우렁차게 외친다.
  • .META DOME. We hope, We dream, We make.
  • 선언이 끝나고 세 평 남짓한 방에 들어서자 직원에게서 사복을 받을 수 있었다. 오래전에 맡아둔 코트는 관리를 잘한 듯 주름 하나 없었다. 나는 직원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 정도로 우수한 보살핌을 받는 것은 나에겐 너무나도 과분했다. 어째선지 이제 사회로 내몰린다는 미래에 안타까워졌다. 그래도 사복을 입는다는 해방감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거울 앞에 서서 코트를 허겁지겁 뒤집어썼다. -어깨가 좀 끼네. 예상보다 감상은 좋지 않았다. 지금 보니 소매는 물기가 마르질 않아서 축축했다. 어깨도 탈수 방법이 잘못됐는지 답답하게 줄어있었다. 겉에만 신경 써서 내실엔 불분명한 티가 팍팍 났다. 나는 눈가를 찡그리고 침대에 코트를 벗어 던졌다. 이게 지금까지 갇혀 지낸 대가를 위한 보상인가? 쭉 늘려지는 옷에 기억 소켓이 걸려 척추가 찌릿했다. 어루만지는 아픈 등허리에 눈물이 아른거렸다. 아까는 좋게 여겨줬는데, 아무도 없는 바깥의 고요에 가슴속의 울화는 치밀어 올랐다. -뚜우. 빨간 버저가 크게 울렸다. -개인실에 알려드립니다. 마지막 날에 맞춰서 만찬을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꼭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시험 때문에 못 쓰니까 금단 증상이... 크헉
  • 1화 내용 대폭 수정해야겠다... 문제가 보이네.
  • >>10 >>11 >>12 >>13 >>14 >>15 걸러줭
  • .
  • 프롤로그 정리본 나의 열망은 어제까지 애써 참다가 오늘에서야 돼지고기 스튜를 끓였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뜨거운 육수, 먹음직스럽게 돌변한 갈색의 큼지막한 버터 덩어리에 결정을 후회할 순 없다. 아, 새벽의 만찬은 이리도 즐거운 것이었던가! 나는 기독교를 믿는 종교쟁이가 아니다만, 지금만큼은 하느님에게 조금 감사하련다. 오두막을 찾지 못했더라면, 눈보라 치는 숲에 꼼작 없이 얼어 죽어 이 맛있는 걸 먹지도 못하고 어림잡아 이삼백 년 뒤에나 발굴되어 구경거리가 됐을 것이다. 몸에 온기가 달아오르니 끝 무렵부터 차츰 피부의 감각이 돌아와 잘린 새끼발가락의 상처가 쑤신다. 동사란 놈은 참으로 지독했다. 겨울 산에서 나고 자라신 아버지의 말을 빌려서, 고통은 먹을거리로 해결하는 게 가장 좋댔다. 큼지막한 돼지고기는 농후한 육즙이 터져 나와서 그런지 부드럽게 씹는 맛이 일품이다. 잠시 눈을 감아 음미하며 기대하다가, 그래, 여전히 아픈 걸 보니 아버지의 말은 사실 거짓말이었나 보다. 혀에 즐기며 고통에 신음하는 와중에도 밤의 하얀 야수 떼가 나무문을 두드리다가 내심 포효한다. 이러면 무서워서라도 뛰쳐나오지 않을까, 나를 노리고 있다. 창문에서도 그 시선을 태워 내게 보낸다. 두렵긴커녕 가소롭다. 내 앞의 걸쭉한 음식이 무엇인 줄 아는 건지. 이건 고기다. 늑대 같이 사나운 자연에게 넘겨줄 수 있을쏜가, 하여 잡다한 생각이 들 적에 국물을 한입 들이킨다. 배가 따스해졌다. 바닥에 누워, 품 편하니 네 생각이 다 난다. 역병이 심히 들어 별이 되어 멀리 날아간 네가 그리워진다. 혼자서 비싼 고기를 먹는 게 적적하고, 너의 왁자지껄하며, 흔히 미소를 지으며, 국물을 입에 이리저리 묻히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눈시울은 벌겋게 뜬다. 아버지는 내게 남자가 돼서 눈물을 보이지 말라고 하셨다. 다만 아버지는 어릴 적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던가. 나는 상상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만, 오늘만큼은 네가 모닥불의 반대편에 앉아 화염의 춤사위를 골똘히 감상하는 형상을 끄적인다. 순진한 얼굴을 해서는, 한껏 보듬어주고픈 마음에 나는 다시 허릴 펴서 일어난다. 항상 기다랗게 땋은 머리카락은 너의 자랑거리였다. 이제 차례는 기억 뒤에서 수십 번이나 반복된 말이다. -너는 사서 고생이야. 너의 잔소리는 듣기 좋다, 적어도 상황 정도는. -이제 어쩔 거야? 이 날씨에 산을 넘긴 글렀고... 마을 내들이 너를 무모한 놈이라 부르는 덴 다 뼈가 있어. 나무라는 말투에선 한 번도 듣지 못한 걱정과 안쓰러움이 묻어나온다. 네 장난기는 어디 갔나. 펄펄 끓던 국물의 김은 벌써 저만치로 달아났다. 옅은 목소리에 오두막의 고요하디 차분한 모닥불이 타오른다. 그저 다분한 상상, 꼭 틀어막혀 천장에 대고 고민하다, 사색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고른다. 밤중의 속삭임을 향해 언짢게 웃더라도 웃는 게 어딜까. -별이 되어 하늘에 여행 간 사람이 말이 많아. 딴 사람이 이쁜 얼굴만 보면 산 사람인 줄 알고 반하겠네. 네 얼빠진 얼굴로 헤실대는 게 정말 바보 같다. 시도 때도 없이 보고픈 데 이젠 그럴 수 없다. 그래도 지금 이 나무토막에 둘러싸여서는 정말 안락하구나. 한밤중의 눈보라 속 불빛 붐비는 따뜻한 오두막에, 어쩌면 꿈일지 모르는 환상에 취한다. 지금부턴 어제도 하고 그저께도, 네가 간 그 순간부터 생각해온 질문을 할 차례다. -그. -왜? -아냐. 그냥, 암것도. 나는 깊은 생각이라도 있어서 다시 자리에 웅크린다. 피하겠다고 장담했건만 네 눈동자는 너무 맑았다,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웃지마라. 미소는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난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네가 내 손을 꼭 움켜쥐던 과거의 머리맡에, 쓰라리는 상처만이 네게 가지는 모든 감정이었다. 보기 싫다. 볼 수 없다. 나는 네게 고개를 치켜들 자격이 없다. 작은 오두막은 아주 쓸쓸하여 들리는 소린 창문에 부딪히는 발길질뿐이다. -얼탱이. 나의 말은 목덜미에서 자꾸만 감돌았다. 무턱대고 말해서야 진심도 아니니 머리라도 긁적인다. 허, 뭐를 위해 이러는 건지. 다 헛것일 뿐인데, 나의 거짓된 단출함일 뿐인데, 나도 참 우스운 놈이다. 땅바닥에 뒹구는 감촉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눈 사이사이로 톱밥이 어슬렁어슬렁 인다. 내가 말을 연 건 단순히 공기가 건조해서다. -그쪽은 따뜻해... 너는 다시 미소를 짓는다. -엄청, 남향의 봄꽃이 흐르는 곳보다. 봄꽃이 뭐던가, 나는 손가락이 몇 갠지 센다. -역병은, 병치레 같은 건 없겠지. -무서울 정도로 아이가 뛰놀고 있어. 늙지 않는 아이가. 늙지 않는 아이는 뉘던가, 네 말은 말아 듣지 못할 것투성이다. 내 몸 성한 데 없을 때 만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 너는 상상이던가. 없을 따름이다. -너는... 괜찮아? 너의 미소는 지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그대로 뚝, 사라졌다. -너는? 되물을 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아니지. 내가 괜찮을 리가. -없잖아. 괜찮은 게 있을 리가 없어. 네가 없어. 전부 다, -없어! 위스키병은 공중을 빠르게 날아가 너의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나는 서늘한 공중에 가쁜 숨소리를 내뱉는다. 폐가 얼어붙은 것만 같이 고통스럽다. 온통 푸른색으로 변해버린 세상 속에, 어제 끓였어야 할 스튜는 표식조차 남기지 않았다. 오직 먼지 눌어붙은 바닥만이 나를 지탱한다. 차갑게 굳어가는 손가락이 따갑고, 나는 그 감각에 가까스로 알아차린다. 나는 혼자였다. 상상을 좋아하는 족속이 아녔고 남을 웃길 만큼 유쾌한 남자도 아녔다. 나는 잠시 숨을 참아 올라오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눌러 담는다. 딸꾹 이는 코를 붉게 태우고 나는 한 켠 가장자리에 몸을 기댄다. 남쪽 한여름의 아지랑이같이 인생이 울렁이며 굴곡진 면의 색깔들은 쇳빛에 죽어간다. 푸르스름한 창문 밖을 내다보고, 나는 발걸음을 한 자리로 고정한다. 발은 비틀거림 없이 나아간다. 나는 완고하며 결단력 있는 남자다. 투명한 유리 조각에 얼굴은 비치지 않았다. 문은 여러 번 두드린 후에야 비로소 열렸다. 눈바람은 걷히고 밖의 숲속은 순백의 아침을 맞이한다. 나는 시원한 바람을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쉰다. 나의 꿈은 찬찬히 밝아진다. 정신이 맑아지고 앞의 새하얀 강줄기를 맞이한다. 거대한 창공, 나는 이곳에 몸을 담구고 있었구나! 이를 마다하고 나는 이를 두고 당신을 따라가리오. 나의 너요, 너의 나요. 나는 흰 도화지의 마지막 물감이어라. 나의 전부여. 손목을 크게 들어, 나는 당신을 따. .META DOME. EPISODE.1 내 숨은 무엇보다 크게 몰아친다. "네, 살아있습니다. 약간의 혼선 장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1340933번은 기억 혼합 액체에 흠뻑 젖은 채로 안쓰럽게 콜록거렸다. 직원은 전화를 끊고 부츠 소리를 크게 내며 1340933번의 몸을 부축했다. 동공은 맨눈으로 보기에도 매우 빠르게 진동했다. 1340933번은 갑작스레 정신이 들었는지 직원을 뿌리치고 연구원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가 '나'라도 되는 양, 아직 하얀 기억 추출실의 단면을 천국의 취조실이라 여기며 애타게 '너'를 찾아 나섰다. 수차례의 몸싸움 직후, 1340933번의 너울은 눈물이 닿아 차가운 파란색으로 물들여갔다. 1340933번은 나직이 하늘을 바라보며 '너'의 이름을 불렀다. 1340933번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 서로의 기화된 공포에 모두가 몸서리치고 있었다. 새벽의 끈적이는 해초의 감각은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밖의 어두운 연기는 우리가 지하에 있는 건지 지상에 있는 건지 분간조차 하기 어렵게 강요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향하는 곳은 절대로 위쪽이 아니란 것이었다. 모노레일은 덜컹거리는 흔적을 곳곳에 남겼다. 시도 때도 없이 부딪히는 어깨의 폭력 속에서 얇은 가방끈만이 나를 지탱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 작은 심장은 그 무엇보다 빠르게 진동한다. 곧바로 죽어버릴 만큼의 고동은 손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남들이 날 이상하게 바라보면 나는 그대로 끝이었다. -Averie Davison Lautner 계십니까. -에이버리? 네! 저예요, 저! 에이버리 로트너! 언급된 이름에 나는 인파를 뚫고 다급히 앞으로 뛰쳐나갔다. 조금만 늦어서 들켰더라면 아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인제야 끔찍한 고통이 끝난다는 직감에 나는 너무 기뻐서 나를 주체할 수 없었다. -진정하세요, 로트너 씨. 흥분해봤자 좋을 건 없습니다. 간단한 질문, 최고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스피커의 차가운 음성이 속삭였다. 웬만한 정보는 한 달 전부터 숙지하고 있었기에 목소리의 떨림만 제외하면 질문은 순탄히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시험의 결과, 긴장의 웃음이 내 얼굴 가득히 지어졌다. -본인이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왼쪽 아래의 구멍에 손을 넣어 확인 절차를 마무리... -여기 도둑 새끼가 있다! 등록 와중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흠칫거리며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도둑은 보안 로봇에 의해 모노레일 바깥으로 내몰린 뒤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명은 심연의 아래로, 아래로,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신경이 곤두섰다. 내가 안심할 만한 상황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식은땀은 바닥에 떨어졌다. -축하드립니다! 에이버리 님! 회사의 동반자가 되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곧 본사에 도착할 테니 자리에 돌아가서 지급된 팸플릿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절망적인 눈빛, 공포와 불안의 분노, 초췌한 얼굴들 위로 천장의 칙칙한 노란 전등이 깜빡였다. 나의 거짓된 진실은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지옥에서 도망쳐온 게 맞나? 지금으로써는 알 길이 없다.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 에이버리 데이비슨 로트너, 나의 소중한 이름, 그렇게 추락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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