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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8/06/10 14:44:54 ID : Gq442K442Mm
구레딕에서 '빙글빙글빙글' 이라는 제목으로 썰을 풀다가 사라졌었던 한 레더야. 내 유아기에서부터 시작된 사건이 하나 있었어.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된 최근에야 이 일이 정리됐고, 누군가에게라도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져서 다시 스레딕을 찾아오게 됐어. 길고 좀 불쾌한 이야기지만 누군가가 들어줬으면 해. 구레딕에서 괴담판에 풀었던 이야기니까 이번에도 그냥 여기에 풀게. 조악한 기억력을 기반으로 쓰는 글이라서 유년기, 학생기 시절의 경험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줘. 신상 관련된 부분은 적당히 비틀게.
이름없음 2018/06/10 14:45:39 ID : Gq442K442Mm
일단 이 모든 사건이 시작된 유아기 시절부터. 난 어린 시절 굉장히 겁이 많고 소심한 아이였어. 또래 친구도 잘 사귀지 못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글을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일찍 깨쳐서, 말하기보다 읽기와 쓰기가 항상 더 능숙했어. 난 사교성이 없는 외톨이였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콕 박혀 보냈지. 부모님은 당연하게도 나를 걱정하셨어.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서울 근교의 나무가 많은 소도시였고, 근처에는 산과 계곡이 있어서 내 또래의 애들은 꺄르륵거리며 미친듯이 밖에서 뛰놀곤 했었어. 난 벌레랑 아이들을 무서워해서 밖에서 잘 놀지 않았지만 말이야.
이름없음 2018/06/10 14:46:03 ID : Gq442K442Mm
그리고 내가 다섯 살 무렵이였던 어느 날엔가 아버지가 앞집 살던 내 동갑내기와 나를 밖으로 내몰았어. 나가서 좀 놀라는 거였지.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 남자애는 당연하다는 듯이 날 두고 초등학교 남자애들 무리에 합류했고 난 꿍시렁대면서 가지고 나온 책을 읽었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기억해. 그 당시의 나는 몽상가였고 책벌레였지. 현실보다는 책으로 더 많은 경험을 쌓았고, 아직 픽션과 현실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나이였고. 무슨 이유였던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난 혼자 앉아있던 벤치에서 내려와서 어디론가 아장아장 사라져 버렸어. 아마도 정황상 토끼풀을 뜯으러 갔던 거 같은데 잘은 모르겠다.
이름없음 2018/06/10 14:51:26 ID : Gq442K442Mm
저녁을 먹을 때가 되어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니 온 동네가 뒤집어졌지. 그때까지는 아직 이웃들 간의 정이라는 게 있었던 시기니까. 어른들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온 동네를 뒤졌어. 퇴근하셨던 사서분께서는 일부러 도서관에 돌아가셔서 다시 도서관을 뒤지기까지 하셨어. 행여나 내가 그 안에서 잠이라도 들었을까봐. 내 부모님들께서는 겁에 질리셨고 날 따돌리고 계곡에 놀러갔던 앞집 남자애는 호되게 혼났다고 해. 이건 지금 생각해도 좀 미안한데. 그리고 오후 여덟시가 넘어갈 무렵에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셨어. 우리 집 뒷편의 쓰레기장에서.
이름없음 2018/06/10 14:57:42 ID : Gq442K442Mm
쓰레기장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고물 집하장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겠다. 이사를 가면서 사람들이 가구나 물건들을 두고 간 게 쌓인 곳이야. 낡은 침대나 옷장, 인형, 페인트, 비닐 천이나 심지어 찢어진 비닐하우스에 폐차까지. 그 위에는 풀이니 넝쿨이니 하는 게 잔뜩 자라서 어쩐지 세기말스러운 분위기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 우리 동네 애들은 거기서 엄청 놀았어. 부모님들은 위험하다며 말리셨지만 뭐 그 나이 애들이 부모님 말을 듣던가? 거기에는 동네 꼬마들이 만든 아지트가 제법 많았고 개중에는 내것도 있었어. 난 친구가 없었지만 아지트는 가지고 싶어했었거든. 침대의 뼈대에 낡은 천막천을 씌운 그건 5살짜리의 솜씨답게 굉장히 조잡했지만 나 하나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사이즈였어.
이름없음 2018/06/10 15:01:48 ID : Gq442K442Mm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날 발견한 것도 그곳이야. 처음에는 그냥 쓰레기 더미인 줄 아셨지만, 그 안에서 뭔가가 바스락대는 소리를 듣고 안을 들여다보셨다고 해.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깜빡거리고, 늦여름의 공기는 후덥지근하고, 모기는 날아들고. 그리고 그 안의 어두운 공간에 내가 앉아 있었대. 맨바닥에, 가슴팍에는 책을 끌어안고서. 아버지는 안도하고 나를 끌어내려고 하셨어. 근데 내 상태가 좀 이상했다는 거야.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하고 온 몸이 흙투성이였대. 그리고 무엇보다 팔에 모기가 몇마리나 앉아서 피를 빨고 있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이 계속 '빙글빙글'을 중얼거리고 있더래.
이름없음 2018/06/10 15:06:05 ID : Gq442K442Mm
어쨌든 아버지는 날 꺼내려고 내 아지트 천장을 걷고 나에게 손을 뻗었어. 그런데 아버지의 손이 닿는 순간 내가 비명을 질렀대. "하지마"와 "오지마"의 중간쯤 되는 비명이였다나. 난 순해빠진 꼬마였고 큰 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었어. 그런 내가 실성하듯 비명을 질렀으니 아버지는 많이 놀라셨대. 초보 아빠는 울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몸부림치는 날 껴안고 집으로 뛰셨다고 해. 난 그러다가 뻗어서 잠들었고, 살펴보니 애가 어디 아픈 것 같지는 않아서 일단 집에 데려와서 재웠대. 그리고 다음 날 나한테 어디 갔었냐고 조심스레 물어보니까, 난 빵 가장자리를 오물오물 씹으면서 "졸렸어"라고 태평하게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나.
이름없음 2018/06/10 15:07:05 ID : qi02oGk1bbg
보고 있어~
이름없음 2018/06/10 15:12:18 ID : 7tcpWoY3yGl
난 이 사건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전혀 없어. 앞집 남자애가 날 두고 가버리던 건 기억나지만 이게 그 사건 당일의 기억인가는 확실하지 않아. 내가 왜 그 아지트에서 혼자 그러고 있었는지, 내가 벤치를 떠난 오후 한시부터 여덟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오랫동안 몰랐어. 중간에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서 내가 도서관에 혼자 왔다 갔다는 말을 해주셨기는 한데(도서관이 성인 걸음으로 걸어서 5분 거리거든. 꼬맹이한테는 10분?) 내가 도서관에 나타난 것도 2시 정도거든. 그러면 내가 도서관 문이 닫힐 때까지 거기 있었다 쳐도, 도서관 이용시간이 끝나는 저녁 6시부터 내가 발견된 8시 사이의 공백은 도무지 무슨 일이였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이름없음 2018/06/10 15:18:44 ID : Gq442K442Mm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난 계속 꿈을 꾸었어. 하얀 벽의 원통형 건물이야. 벽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수없이 꽂혀 있고, 비어 있는 천장에서는 햇살이 비쳐 들어와. 건물 내부는 밝고 차분해. 벽면을 따라서 내려가는 통로가 있어. 건물이 원통형이라고 말했지? 그러니까 통로는 커다란 나선계단 형태지. 설명하기 좀 어렵네. 화장실 휴지의 심을 생각해봐. 그런 모양의 건물이고, 내부 벽을 따라서 완만한 경사의 내리막길을 맨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연결한다고 치면 그 내리막길은 나선계단처럼 빙글빙글 돌게 되지? 그런 꼴이라고 생각하면 돼. 꿈에서 난 그 건물 안에 있고, 그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고 있어. 그리고 뒤에서는 항상 뭔가가 쫓아와.
이름없음 2018/06/10 15:19:17 ID : Gq442K442Mm
현생을 잠깐 챙기러 다녀올게. 저녁에 잇겠습니다.
이름없음 2018/06/10 15:19:32 ID : Gq442K442Mm
앗, 들어줘서 고마워!
이름없음 2018/06/10 16:32:58 ID : HBe6paqY8kp
보고있어 ^^
이름없음 2018/06/10 19:37:54 ID : qi5XBzcINwM
듣고있어! 기다릴게~
이름없음 2018/06/10 19:49:23 ID : tjwMkpSJRyN
기다릴게~~!!
이름없음 2018/06/11 03:23:20 ID : Crta1cpSHxw
궁금햇..
이름없음 2018/06/11 06:20:04 ID : HBe6paqY8kp
보고있어~~
이름없음 2018/06/13 18:36:16 ID : s3vjs7e7s03
미안! 치킨 뜯으러 갔다가 썰 푸는 걸 잊어버렸던 스레주입니다... 마저 풀도록 할게.
이름없음 2018/06/13 18:36:56 ID : s3vjs7e7s03
사실 지금 좀 취해서 조리 있게 글을 쓰지는 못할듯...
이름없음 2018/06/13 18:37:39 ID : CmGr9du3zQr
괜찮아!
이름없음 2018/06/13 18:42:57 ID : s3vjs7e7s03
꿈 얘기부터 마저 해야겠구나. 내가 그 꿈을 꾸는 건 잦으면 일주일에 두어 차례, 가장 드물 때는 한달에 한 번. 난 그 꿈을 거의 십여년간 계속 꿔왔어. 자주 꿀 때도, 드물게 꿀 때도 있었지만 그 꿈을 한달 이상 꾸지 않았던 적도 없었지. 그 꿈 속에서 나는 어린아이야. 그리고 나는 공포에 잔뜩 질려서 그 건물의 내리막길을 따라 달려내려가고 있어. 뒤에서는 항상 뭔가가 나를 쫓아오고 있지. 죽은 돼지였던 때도, 낡은 고양이 인형이였을 때도 있었어. 하지만 가장 많이 나오던 건 낡은 마네킹이야. 내가 살던 그 동네의 쓰레기장에는 마네킹이 잔뜩 버려져 있었던 곳이 있었어. 낡아서 부서지고 때탄 마네킹들의 위로 음침한 분위기의 넝쿨식물들이 자라고 있었지. 소나무가 잔뜩 자라서 항상 음울한 분위기였던 그 쪽으로는 어떤 아이도 혼자 가지 않았어. 분위기가 매우 무서운데다 인적도 별로 없어서, 부모님들의 만류 이전에 일단 아이들부터가 그곳을 피했었지.
이름없음 2018/06/13 19:02:28 ID : a6Y2oIFinTQ
보고있어!
이름없음 2018/06/16 19:14:19 ID : k5Rva5WjfO5
보고있어!!
이름없음 2018/06/17 17:58:15 ID : th9h84HyFio
갱신....궁금해...
이름없음 2018/06/18 07:01:58 ID : Pirs2oHwlii
갱신! 진짜 궁금하다 이거
이름없음 2018/06/18 19:15:15 ID : 01a05RCo458
갱신!!!
이름없음 2018/06/20 15:10:04 ID : 7tcpWoY3yGl
으학학; 안녕 스레주야. 스레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기다려준 레더들 미안해. 그럼 꿈 얘기부터 더 마저 할게. 내가 그 건물 안에서 쫓기는 꿈을 계속 꿨다는 건 말했지? 하지만 난 내가 사라졌었던 날의 사건과 꿈이 뭔가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당연하잖아? 나한테 그 꿈은 일상 같은 거였어. 기억조차 희미한 유년기부터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 사건이 얼마나 이상한 것이든 간에 그건 그냥 일상이 돼. 뭔가 이상하다며 의심을 할 이유도 없는 거지. 난 모든 사람들이 나 같이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꾸는 줄만 알았어. (내가 꾸는 꿈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뒤로 거의 10년이 지나서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이야.) 나에게 그 꿈은 지독한 악몽이였어. 항상 그 꿈을 꾸고 난 다음에는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가끔씩은 엄청난 공포와 함께 한밤중에 깨어나기도 했었지. 그래도 뭐 일상이였으니까, 난 사소한 수면장애가 있긴 해도 그냥 평범한 아이로 자랐어. 내가 살던 그 문제의 동네는 재건축을 하게 되었고 난 근처의 주택가로 이사하게 되었지. 걸어서 15분 쯤 걸리는 가까운 곳이였어.
이름없음 2018/06/20 15:23:10 ID : 7tcpWoY3yGl
그렇게 한 5년을 보내다가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이였나? 그 즈음에 난 내가 내가 어린 시절에 짧게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는 수도권치고는 말도 안되게 작고 유동인구가 없는 곳이야. 길을 걷다 보면 아는 얼굴과 수없이 마주치고, 유치원 동창이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동창으로 이어지는 그런 조그만 동네지.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타인은 날 기억하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매우 익숙했고, 그 날도 그런 경우였어. 난 이사한 다음부터는 내가 어렸을 때 자주 가던 그 도서관에 가지 않았어. 이사한 집 근처에도 작은 도서관이 있었으니까 그 쪽으로 갔었지.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다녔던 그 도서관에서 내가 전부터 보고 싶어했던 영화를 상영해 준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난 친구랑 손을 잡고 쭐래쭐래 도서관에 영화를 보러 갔었어. 그런데 어딘가 익숙하지만 누군지는 잘 알 수 없는 어떤 중년 여성분이 나한테 엄청 살갑게 인사를 하시는 거야. 알고 보니까 그 분께서는 내가 위에 상기한 바 있는, 도서관 단골이였던 나를 퍽 예뻐하셨던 그 사서분이셨어. 내가 그 분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그 분은 조금 섭섭해하시며 "스레주야~ 내가 너 없어졌을 때 도서관까지 다시 다 뒤지면서 찾아줬었는데, 이렇게 선생님을 잊어버리면 어떡하니~" 라고 너스레를 떠셨지. 난 어색하게 웃으면서 적당히 맞장구를 쳤고. 원래 그런 분이랑 만나면 정말 옛날,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 말고는 할 얘기가 없지. 사서 선생님께서는 내가 반가우셨던지 아이스크림을 사 주시며 내가 어렸던 시절의 우리 동네 얘기를 늘어놓으셨고 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걸 어색하게 들어야 했어. 어쨌든 그 날에 난 내가 온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는 실종 사건의 주인공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이름없음 2018/06/20 15:28:17 ID : 7tcpWoY3yGl
뭐 이 사건도 딱히 별 일 없이 지나갔어. 내가 내 꿈과 내 짧은 실종이 뭔가 연결되어 있지 않나 의심하기 시작한 건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이니까. 내가 어린 시절 살던 동네의 재건축이 끝나고 우리 가족은 다시 그 동네로 돌아가게 되었어.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난 중학생이 되었지. 그리고 내 인생의 암흑기인 사춘기가 찾아왔고 말이야... 여기서부터는 흑역사 발굴이구만.
이름없음 2018/06/20 15:45:29 ID : 7tcpWoY3yGl
이 부분은 신상정보를 너무 상세하게 썼던 듯; 우리 동네 사는 사람이라면 알아볼 것 같으니 수정할게
이름없음 2018/06/20 15:56:17 ID : 7tcpWoY3yGl
신상정보 너무 자세하게 쓴 것 같아서 수정할게;
이름없음 2018/06/20 20:13:04 ID : DvBfcMlxDs5
보고있어! 다음이야기가 궁금해지는걸!
이름없음 2019/05/17 10:37:24 ID : jimGnvjusph
갱신. 맙소사 이걸 잊고 있었네;
이름없음 2019/05/17 10:37:41 ID : jimGnvjusph
오늘 강의 끝나면 마저 풀어야겠다
이름없음 2019/05/17 11:03:46 ID : skmpTXxO02t
보고있어!
이름없음 2019/05/17 11:10:54 ID : dBampSFck9B
오 이따 이어가는 거야?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0/04/22 17:16:21 ID : mIKZjAnVdXu
안녕. 스레주야. 아직 보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풀게.
이름없음 2020/04/22 17:17:13 ID : mIKZjAnVdXu
개인정보를 너무 상세하게 적었다 싶어서 무서워져서 더 이상 못풀었었는데, 그래도 이야기 마무리는 하고 싶었어. 어디에라도 그냥 써야지 내 악몽이 진짜 끝나겠다 싶기도 했어.
이름없음 2020/04/22 17:19:17 ID : mIKZjAnVdXu
어디까지 풀었더라? 내 실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거였지. 그 날 당일로 돌아가서 다시 얘기해볼게. 마네킹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고. 우리 동네는 수도권 근교의 조금 낙후된 배드타운이였어. 산이 있고, 나무가 많고,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으슥한 수풀과 비허가 쓰레기장. 그리고 마네킹. 우리 동네에는 마네킹이 정말 많았어. 버려진 낡고 더러운 마네킹이 줄지어 길가에 서 있었던 게 또렷하게 기억나.
이름없음 2020/04/22 17:22:36 ID : mIKZjAnVdXu
아무리 더럽고 버려졌다 해도 인간을 닮은 물건은 왠지 함부로 대하기 꺼려지지. 약간 금기같은 느낌이 들잖아. 인간을 닮은 인형의 목을 함부로 자를 수 없는 것처럼 난 마네킹도 왠지 함부로 손상시키기 무서웠어. 하지만 내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에게는 이야기가 달라지지. 누가 더 또라이같고 누가 더 반사회적인 짓을 저지르느냐가 남자아이들 사이의 서열을 정하던 시기인걸. 우리 반 아이들 중에서는 독보적인 애 하나가 있었어. 폭력적이고, 걸핏하면 욕설을 하고, 여자아이들에게 성희롱을 퍼붓는 걸로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추앙받는 그런 유형의 미친놈 있잖아. 개구리 해부를 하는 날이면 다리를 잘라서 그날 하루종일 휘두르고 다니는 그런 애. 걔를 A라고 부를게.
이름없음 2020/04/22 17:27:18 ID : mIKZjAnVdXu
A와 나는 근처에 살고 있었어. 나는 만성적인 수면부족으로 음침하기 이를데가 없는 찌질한 여자애였고 걔는 우리 반을 대표하는 일진이였고. 하여튼 이건 마네킹이랑 A에 대한 이야기야. A는 나를 싫어했어. 난 조용하고 음침한데다 딱히 잘난 것 하나 없는 찌질이였고, A는 누군가를 찍어누르는 것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딱 그 나이 또래 남자애였고. 서로 궁합 잘 맞겠지? 직접적인 신체적 폭력이나 물품 갈취는 없었어. 대신 내 공책에 적는 성적인 욕설이나 대놓고 앞에서 날 바라보며 말하는 강간해버리자는 앞담이 주였지. 난 멍청해서 그게 학교폭력인 줄 몰랐고, 그래서 신고도 하지 않았어. 그러다가 중학교 1학년 여름쯤 됐을 때였어.
이름없음 2020/04/22 17:30:54 ID : mIKZjAnVdXu
말했지만 우리 동네에는 마네킹이 많았어. 토막난 몸뚱이처럼 해체돼서 굴러다니는 팔다리와 허리, 머리통이 수풀에 쳐박혀 있고는 했어. 어디 옷가게가 폐업하면서 버렸다더라, 지금은 못 들어가는 폐가가 원래는 마네킹 공장이였다더라 하는 얘기는 많았지만 그 중 어떤 것도 확실하지는 않았어. A는 그런 마네킹을 보다가 진짜 괴랄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나중에 들은 거지만 걔네는 처음에 나를 상정하고 그런 장난을 친 건 아니라고 해. 그냥 마네킹을 짜맞추고 거기에 성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놀다가 걔네가 모여있던 골목이 내가 저녁마다 지나가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왕 짜맞춘 마네킹을 그냥 던져두기도 그래서 나나 놀려먹자는 식이 된거라고 하더라.
이름없음 2020/04/22 17:34:22 ID : SGsi1dzVbA6
미친놈들....보고있어 레주야
이름없음 2020/04/22 17:36:38 ID : mIKZjAnVdXu
옛날 가로등 불빛 기억하는 레더 있어? 주황색, 가끔 깜빡거리고, 램프 안에는 벌래 시체가 쌓여서 빛을 흔들리게 하는 그런 진한 주황색 불빛 있잖아. 그 때는 초여름 해질녘이었고 모기가 더럽게 많아서 나는 팔다리를 가끔 쓸어내리면서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어. 매타세콰이어 나무가 양옆에 크게 자라서 어둑어둑했기 때문에 가로등 불빛 말고는 괄목할만한 광원이 없었어. 그 골목길은 으슥했어. 나무가 잔뜩 자란 가파른 둔덕과 메타세콰이어 나무로 가득한 아파트 화단 사이를 가로지르는 낡은 시멘트 길이였어. 아무도 지나는 사람이 없어서 그쪽으로 가면 안된다는 경고를 몇 번 들었지만... 그 길을 통하는 게 집까지 가는 데는 가장 빨랐으니까 난 언제나처럼 그냥 그 길목을 지나고 있었어. 근데 아무생각 없이 매미 허물을 하나 집어들고 걷고 있는데 길 저편에 뭔가가 있더라고. 팔다리가 토막난 채로 짜맞춰져 있는 마네킹이 길바닥에 누워 있었어.
이름없음 2020/04/22 17:42:49 ID : mIKZjAnVdXu
머리가 핑 도는 기분 알아? 옛날에 있던 어떤 일이 어떤 계기로 갑자기 생각날 때 드는 기분 있잖아. 오랫동안 잊고 있었고 별로 기억해낼 가치도 없는 일이 갑자기 의식의 표면 위로 확 끌어올려질 때 드는 그 기분. 정신이 아득하고 어지러울 정도였어. 기분이랑 같이 구역감, 공포,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를 잡다한 감정이 머리를 강타했어. 주황빛 가로등 불빛 아래에 마네킹이 쓰러져 있었어. 난 가로등 불빛이 그려낸 그림자 때문에 사실 그게 마네킹인 줄도 몰랐어. 난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어. 숨이 막혀서 그 정도의 힘도 없었거든. 그대로 다리가 풀려서 시멘트 바닥 위에 쓰러졌어. 스타킹 올이 풀리고 다리가 긁혔지만 그건 안중에도 없었어. 공포영화에서 살인마를 앞에 둔 주인공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건 과장이 아니더라고. 일어날 정신도 없었고 쓰러진 채로 어떻게든 마네킹에서 멀어지려고 꼴사납게 질질 짜면서 버둥거렸어.
이름없음 2020/04/22 17:49:50 ID : mIKZjAnVdXu
내 손 안에서 매미허물이 박살나서 뭉그러지던 감각이 기억나. 애매미 허물이였나? 보기 드문 거여서 신기해서 집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뭔지도 모르겠다. 난 중학생 때 곤충을 좋아했고 그것도 따돌림 원인 중 하나였거든. 어쨌든 나는 꺽꺽 울면서 바닥에서 버둥거리다가 간신히 이성을 찾았어. 건물 그림자 뒤에서 한 무리의 애들이 나왔거든. 평소에는 꼴보기도 싫었던 애들이였는데 공포로 이성이 나가있던 그때는 진짜 구세주 같았어. 나는 비명을 지르며 마네킹을 지나쳐 그 애들에게로 달려가 매달렸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 진짜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걔는 당연하게도 A였어. 걘 깔깔 웃어대며 눈물로 범벅된 내 얼굴이 더럽다며 날 뒤로 밀었어. 내가 지나치게 과민반응을 보여서인지 당황한 것 같던 다른 남자애들도 리더격인 A가 웃자 다들 같이 비웃었어. 근데 진짜로 내 알 바 아니였어. 난 진짜 무서워서 돌아버릴 지격이였거든. A가 밀자 난 마네킹 옆으로 쓰러졌어. 진흙과 페인트 따위로 더러워지고 이목구비가 갈려나간 토막난 마네킹 위로 넘어진 나는 교복 치마가 뒤집어지든 말든 바둥대며 마네킹에서 떨어지려고 애를 썼어.
이름없음 2020/04/22 17:55:19 ID : mIKZjAnVdXu
그 이후 걔네가 학교에서 날 뭐라고 불렀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 스킵. 중요한 건 내가 마네킹에 지독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근데 왜 하필 그 날 그 때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였을까? 난 평소에 마네킹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어. 집 옆에 마네킹이 있든 없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였다고. 마네킹 머리가 굴러다니는 옆에서 소풍 놀이를 하면서 컸단 말이야. 근데 강조하지만 난 그 때 사춘기였어. 내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내 인생에는 무슨 특별한 서사가 예정되어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을 시기였단 말이지. 특별한 거 없고 음침한 애였던 내가 내 인생의 '특별함'을 어디서 찾았겠어? 내 꿈이야. 보통 사람들은 반복되는 꿈을 꾸지 않는데 나 혼자만 반복되는 꿈을 꾼다는 걸 알아차린 뒤에 난 좀 흥분했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한테 무당 혈통이 있는 거 아니냐는 망상까지 했다.
이름없음 2020/04/22 18:01:50 ID : mIKZjAnVdXu
현생 챙기러 다녀옴. 흑역사 공개 생각보다 되게 쪽팔리네;;;;
이름없음 2020/04/22 18:08:04 ID : a8ry0txQoHx
아니 남자애들 너무 미친 놈들이잖아... 레주 고생 많았어 ㅜㅜㅜ
이름없음 2020/04/22 20:18:52 ID : k07cJXvxwmm
아니 세상에 그 남자애들 미친 것 같애 진짜...;;;
이름없음 2020/04/22 22:03:19 ID : mIKZjAnVdXu
봐주는 사람 있다니 왠지 응원된다 고마워! 난 걔네들이 막 엄청 나쁜 애들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딱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들, 그러니까전형적인 바보들이였겠지. 근데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학교폭력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도 있어...ㅎ 거의 10년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그 날의 기억들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했거든. 걔네가 내가 기억하는 무시무시한 악마들이 아니고, 그냥 어리고 한없이 멍청한 놈들이였다고 나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썰을 푸는 거기도 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정말 오래가는구나... 지금 술에 꼴아있으므로 썰은 이성이 되돌아온 내일 마저 풀게 그럼 20000
이름없음 2020/04/23 13:42:52 ID : a7ar84E009s
마 빨리 풀어조라ㅠㅠ
이름없음 2020/04/23 13:56:35 ID : gry3SHwmpSJ
스레주 필력이 엄청나구나ㅠㅠ 얼른 풀어죠
이름없음 2020/04/23 19:20:34 ID : mIKZjAnVdXu
미안 여러분 오늘 또 얼큰하게 취해버려서 술 좀 깨고 돌아올게
이름없음 2020/04/23 19:21:27 ID : u4HxvdwoE65
오예 기다릴게
이름없음 2020/04/24 12:32:52 ID : ctzeZctAkr8
안녕, 해장용 라면에 아메리카노까지 퍼마시고 간신히 정신차린 스레주야. 소맥으로 달리는 게 아니였다고 진심으로 후회중이야... 길게 썰 풀 정신은 없으니까 몇 가지만 간단하게 쓰고 갈게. 1. 이 모든 일은 종료된 지 오래야! 난 이 사건을 찝찝하게나마 해결했어. 깔끔한 기승전결은 없지만 최소한 그 날(내가 없어졌던 날)에 대해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다 풀어냈어. 2. 그리고 사건이 해결된 지금 난 지금 완전 멀쩡해. 대학생이고, 대인관계 괜찮고, 악몽도 없이 그냥저냥 잘 살고 있어. 3. 미리 경고하지만 혹시 성폭력이나 범죄 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은 내 썰을 피하가기를 권고할게. 지금까지의 글에서 대충 눈치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 글에는 폭력에 대한 묘사가 잦을거야.
이름없음 2020/04/24 12:36:13 ID : pSK0nA5e5an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0/04/24 12:39:19 ID : E6Y1hbxDs7h
그럼 어디까지 얘기했냐. A와 마네킹에 대한 거였구나. 지속적인 폭력은 사람을 돌게 만들지만 동시에 무뎌지게 만들기도 한다고 생각해. 그 후 중학교 1년은 어떻게든 흘러갔어. 이후 난 친구가 생겼어. 근데 그걸 친구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든 걔를 B라고 부를게. B는 중학교 2학년답게 괴담이나 오컬트에 미쳐있는 애였어. 근데 나도 같이 미쳐있었으므로 할 말은 없다.
이름없음 2020/04/24 20:23:02 ID : y6rumlctvxu
보고있엉!! 레주 필력 어휘력 장난 아니다
이름없음 2020/04/24 20:33:15 ID : ctxXBwK6rxO
보고있어!! 2년 전에 봤었는데 ㅜㅜ 돌아왔구나
이름없음 2020/04/25 15:17:35 ID : mIKZjAnVdXu
그럴리가! 안녕ㅋㅋㅋㅋㅋ 사실 나 이거 구레딕에서도 풀다가 사라졌었어. 그 때가 내가 고등학생 때였나? 내가 아직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을 때였고. 그때는 난 아직 내가 특별하다고 믿는 중2병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무렵이였고, 아직 귀신이니 원혼이니 하는 것들을 믿고, 괴담과 오컬트를 좋아할 때였지. (근데 사실 괴담이랑 오컬트는 지금도 좋아행.) 하여튼 그래서 괴담판에 내 꿈 얘기를 풀었었어. 내가 무슨 악령의 저주에 걸린 줄 알았거든ㅋㅋㅋㅋㅋ 그래서 그 때는 내 꿈 얘기를 하면서 '반복되는 꿈을 꾸고 있는데 이걸 어쩌지?'가 주된 내용이였어. 주로 꿈에 대한 설명과 나한테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에 대해 얘기했었고. 혹시 그거 봤던 사람도 있으려나? '반복되는 꿈을 꾸고 있어'라는 스레였던 것 같은데.
이름없음 2020/04/25 15:21:25 ID : mIKZjAnVdXu
미안 잡소리가 길었다. 마저 풀게. B와 나는 순식간에 친해졌어. B는 그 나이답지 않은 성숙한 태도에 단호한 말투를 가진 여자아이였어. 사실 내가 동경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였지. 난 B를 거의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의존했어. 난 학교폭력에 지칠대로 지쳐버린 사회성 없는 애였고, 친구의 존재는 진짜 너무 달콤했단 말이야. B와 나는 괴담, 오컬트 이야기로 의기투합했어. 서로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고 강령술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실행하자고 떠들었지. 내 꿈 얘기가 나온 것도 그때였어. 내가 반복되는 악몽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B는 적잖게 흥분했어. 몽마, 저주, 원령... 진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괴담의 래퍼토리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나를 쫓아오는 그 무언가가 나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한다'였지.
이름없음 2020/04/25 15:25:27 ID : mIKZjAnVdXu
그래서 뭘 했겠어? B는 나에게 이번에는 꿈에서 좀 다르게 행동해볼 것을 권유했어. 반대로 뛰든, 난간을 넘어 아래로 뛰어내리든, 아니면 나를 쫓아오는 그 '무언가'에게 붙잡히든 간에 뭐든지 해보라고. 그러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거라고. 하지만 난 괴담판 잔뼈가 긴 공포물 매니아였고, 그래서 '보통 그렇게 행동한 놈들이 가장 먼저 죽지 않냐?'라고 대꾸했어. 뭔가 해보겠다고 나대다가 죽는 건 공포물 클리셰잖아. 꿈 속에서 다른 걸 시도하는 것은 뭔가 위험할 것 같았거든. 하지만 B는 굳건했어. 뒤에서 뭔가가 쫓아오는 이유는 그것이 너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으니 원한을 풀어줘야 한다. 너에게 영감이 있는 것 아니냐. 넌 할 수 있다. 이런 말들이 당시에는 꽤 솔깃했어. 말했잖아, 난 나를 특별하다고 믿고 있었다니까.
이름없음 2020/04/25 15:26:41 ID : Mqjbg1CoY9A
뭔가 위험하다고 생각되네... 보고있어
이름없음 2020/04/25 15:32:19 ID : mIKZjAnVdXu
그 날 밤에도 나는 꿈을 꿨어. 하얀 건물과 나선형 비탈길, 뒤에서 뭐가 쫓아오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마네킹이였겠지. 하지만 꿈 속의 나는 그 날도 그냥 도망칠 뿐 그 외의 다른 행동은 할 수 없었어. 자각몽이 아닌 이상 꿈 속의 자신을 마음대로 컨트롤한다는 건 애초에 가당찮은 짓이였겠지. 다음날 B는 크게 실망했어. 왜 그랬냐며 나를 다그치는 B를 나는 더 이상 실망시키기 싫었어. B는 내가 중학교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으니까. 난 버림받는 게 너무 무서웠거든. 그래서 그날 밤 난 계속 한 가지를 중얼거리다가 잠에 들었어. 뒤로 달릴 것, 뒤로 달릴 것, 뒤로 달릴 것. 운 좋게도 그날밤에 난 또 꿈을 꿨어. 하지만 뭔가가 좀 달랐어. 내가 꿈 속에서 늘 가던 건물의 바닥은 흙바닥이 되어 있었던 게 기억이 나. 내가 움직일 때마다 진한 주황색 불빛이 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벽에 꽂혀있던 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어. 천장의 박제된 새와 공룡 모형도 없었어. 대신 창문 밖으로 어두운 공원이 보였어.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랑 같이. 그리고 내가 달려 내려가야 할 앞길은 공사장처럼 낡고 녹슨 철봉으로 얼기설기 막혀 있었지. 꿈 속의 나는 도무지 그걸 넘어갈 수가 없었어. 하지만 도망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억지로 그 앞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위화감이 느껴졌어.
이름없음 2020/04/25 15:40:51 ID : mIKZjAnVdXu
왜 도망가야 하더라? 의문이 든 꿈 속의 나는 뒤를 돌아보았어. 그리고 내 뒤를 쫓아오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어. 꿈 속인만큼 사고는 느리고, 비틀린 방향으로 나아갔어. 나는 내가 평소에 꾸던 꿈과 지금 내 상황이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금 꿈 속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건 아니야. 대신 나는 공포에 빠졌어. 어떻게 해, 아무도 안쫓아오네. 이러면 B가 화를 낼텐데. 그렇게 비논리적인 결론을 내려버린 꿈 속의 나는 나선형 건물의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어. 날 쫓아오는 '누군가'가 있어야만 B와 얘기할 거리가 있으니, B에게 버려지지 않으려면 난 그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발 아래로 잘그락대는 흙바닥의 감촉이 너무 생생했어. 오르막을 올라간 끝에 어느샌가 내 옆으로는 수풀이 자라났고, 난 언제부터인가 공원을 걷고 있었어. 꿈 속의 배경은 아마 여름 즈음이였을 거야. 가로등 아래에서 벌래가 날고 있었으니까. 꿈 속의 공원에 가득했던 그 먹먹한 침묵과 긴장감을 견디지 못할 지경이였을 무렵 난 발을 헛디뎌 안전매트가 깔린 바닥 위로 넘어졌고, 바닥에 무릎이 닿음과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어.
이름없음 2020/04/25 15:47:05 ID : mIKZjAnVdXu
그리고 난 루시드드림을 연습중이였기 때문에 바로 꿈일기에 그 꿈을 적었어. 손에 땀이 흥건해서 종이가 살갗에 달라붙었어. 창 밖으로 비쳐드는 가로등 불빛이 주황색이 아니라 흰색이란 사실이 반가웠어. 난 더 이상 그 공원에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거든.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B는 기뻐했어. 자기가 말한 게 역시 옳았다고 으스댔지. 그녀는 나에게 그 꿈 속의 공원을 알고 있냐고 물었어.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어. 실제로도 그 공원을 알고 있었거든. 악몽 속 발 아래에서 느껴졌던 낡은 분홍색 체크무늬 안전매트는 분명 내가 아는 물건이였어. 내가 어릴 적 살던 도서관 옆에 딸린 작은 공원, 그리고 그 옆에 있던 그보다 더 작은 어린이집 놀이터. 그 놀이터에 깔려있던 안전매트였어. 확실해. 그쪽 동네는 싸그리 갈아엎어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도서관은 아니였지. 도서관과 공원은 아직 옛날 모습 그대로일 거야.
이름없음 2020/04/25 15:54:22 ID : mIKZjAnVdXu
B는 내가 그 공원에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어. 하지만 거긴 여기서 버스 3정거장 거리고, 우린 기말고사 기간이였지. 학원도 가야 하고 말이야. B와 내가 학원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에 공원에 가보자는 얘기는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어. 그렇게 내 꿈 얘기도 공원도 우리 사이에서는 잊혀지고 말았고. 결국에는 이 이야기 전체가 통채로 심심한 여자애 둘의 심심풀이 땅콩일 뿐이였으니까. 그렇게 여름방학이 되었어. B는 우리집과 꽤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기에 그 애와 나는 여름방학 동안은 만날 일이 없었어.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그 도서관 근처로 가게 될 일이 있었어. 꿈이 생각난 나는 곧바로 그 공원을 찾아갔지. 근데 아무 일도 없고 아무것도 없더라. 여름이라서 분수에는 물이 틀어져 있었고 아이들이 거기서 꺅꺅대며 뛰어다니고 있었어. 뜨겁게 달아오른 미끄럼틀에서는 쇠냄새가 물씬 풍겼고 바닥의 안전매트는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낡아서 일부를 제외하면 모조리 다 갈아엎어져 있었지. 여름이라 무성한 수풀과 매미 소리까지, 죄다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좀 많이 달랐어. 난 좀 더 음침한 곳일 거라고 멋대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거긴 결국 그냥 공원이였을 뿐이였으니까.
이름없음 2020/04/25 15:54:36 ID : mIKZjAnVdXu
나중에 돌아옴.
이름없음 2020/04/25 21:37:09 ID : y6rumlctvxu
재밌다!! 혹시 인코 달아줄 수 있을까? ㅠㅠ
◆la4GqZirwNx 2020/04/26 15:33:47 ID : 05XBAnTV9eL
처음부터 인코 없이 써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 혹시 보기 불편해? 그럼 인코 달고! 싸강 때문에 과제가 너무 많아...ㅠ 조금 있다가 다시 돌아와서 풀고 갈게. 중간에 뭐 하나 생략한 거 있어서 그것도 풀어야 하고
이름없음 2020/04/26 18:01:33 ID : twKZba3u5U5
레주 기다릴게 ㅠㅠㅠㅠ 잘 보구이쏘
이름없음 2020/04/27 10:44:24 ID : y6rumlctvxu
앗 인코 고마워!!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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