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입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그냥 해보는 이야기.

내 하루는 내가 견디기에 버거워졌고, 나는 이제 나를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됐다. 하지만 나는 아직 덜 자랐는 걸. 나는 아직도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침대에 눕는다. 오랜 불면에 시달리면서 동이 터 오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늘 모든 새벽이 무겁고, 고통스럽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체념을 배운다. 존 업다이크는 자연이 우리를 꿈꾸도록 허락했으므로 이루어지지 못할 꿈이 없다고 했지만, 글쎄. 내 꿈은 영영 이루어지지 못한다. 탄생을 돌이킬 수도 없고 죽음을 무효화할 수도 없다. 시간을 멈춰둘 수도, 역시 없고. 아침이 오지 않는 하루 역시 없을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할 날이 온다고 해도, 아침은 지겹게 되풀이하겠지. 너는 오늘도 실패했어, 해가 뜨고 아침이 오고 내일은 오늘이 되었으니까. 가증이다. 어쨌든 매일 실패를 겪을 테니까, 내가 나를 사랑할 일 역시 없지 않을까. 이상한 소리네. 죽어야 할 이유는 그렇게나 많은데 살아야 할 이유는 손에 꼽지. 살자의 반대말은 자살이야. 약을 먹어도 내 병은 낫질 않아. 그래, 소듐펜토바르비탈을 처방받으러 스위스에 가자. 아니라면 내 혈관에 염화칼륨이라도 주사하자고. 아프지 않을 리도 없으니 차라리 처벌의 의미로 가장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하길 바란다. 손톱을 비틀어 뽑고 살점을 도려내던, 어쩌건. 그냥 죽음에 도달할 수 있으면 뭐라도 좋아. 그냥 죽기만 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이상한 폭주의 밤이다. 사춘기가 느지막한 나이까지도 끝나질 않았지. 나는 자라고 있는 중일까? 내 성장통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나는 죽고싶은걸까 살고싶은걸까.

나는 살아있는 상태를 지속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삶은 고통스럽고, 나는 지쳤어.

엄마. 미안하지만 나는 자존감이 낮은 아이로 컸어. 나는 이렇게 컸어. 엄마가 날 사랑한 걸 알아. 노력한 걸 알아. 노력하는 걸 알아. 미안해. 근데 나는, 엄마.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너무 지쳤어. 나는 사람을, 엄마까지도 포함해서, 전혀 믿을 수가 없어. 나를 상처주잖아. 내가 상처를 주잖아. 나는, 사람이 싫어. 무서워. 나는 내가 너무 싫고, 끔찍해. 그 딱 절반만큼 사람들이 싫어. 도의적인 책임과 애정을 느끼지만, 그래서 증오해. 이런 아이라 미안해. 이렇게 커버려서 미안. 잘못된 애라서, 나쁜 애라서 미안. 괜찮지 않은 애라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날 미워해도, 좋아. 용서해. 그러니까 부디 미워해줄래. 이제 그만 사랑해도 좋으니까. 나 좀 버려줘. 어차피 그러려고 했었잖아. 이대로는 내가 너무 미안하니까, 나 좀 포기해줘. 화도 내지 말고 울지도 말고 그냥 버려줘. 미워할 가치도 없는 애라고 쏘아붙이고 쓰레기 내다 버리듯 버려주세요 제발.

사실은 사랑받고 싶었어. 하지만 누구에게도 못할 짓이니까 포기할래. 엄마도 나는 힘들잖아.

더 나은 어른같은 건 어떻게 되는 거야? 사는 건 늘 이렇게 괴로운 거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백하고도 넷, 늙은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이 안락사를 결정하고 실행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죽음의 무게는 는 무겁고, 나는 무뎌지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할머니의 유골함 앞에서 도망쳤던 걸 기억한다. 죽음은 현실감이 없었고, 하얀 도자기와 바람의 온도가 선뜩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바란다. 늘 진심이다.

세 살 무렵에 필리핀에 갔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불가사리가 신기했고, 빵조각 먹자고 달려드는 얕은 바다 조그만 물고기떼가 간지러웠다. 구슬 아이스크림이 시원하고 달았고 하늘이 파랬으며 놀이터로 이끄는 엄마의 손짓이 좋았다. 소란과 열기가 흥분처럼 다가오는 날 속에 아는 사람이라곤 엄마뿐이어서 좋았다. 의지하고 매달려도 되는 시간이 며칠씩 이어진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그때에 난 소박하게 기뻤고, 또 소소하게 행복했지만. 나는 그 기억 속에 점점이 박힌 슬픔과 사무치는 고독을 곱씹고야 만다. 나는 세상이 아득하게 멀었고, 현실감은 늘 떨어졌었고. 까마득한 아이 시절에도 외로움을 탔다. 나는 언제나 외로웠다. 사랑을 받아도 밑 깨진 독처럼 늘 애정에 목말라 했고, 관심을 구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금과 다를 게 없어 비참해진다. 나는 무엇으로 태어나 무엇으로 자라난 걸까. 무엇이 되어야, 나는 어른이 되는 걸까.

내가 어른이 될 수 없는 나이에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어리고 서툰 나이에 미끄러진 것처럼, 눈 감았으면 좋겠어. 어른이 될 자신이 없어.

아픈데 서러워할 수 없는 건 슬픈 일일까? 이제 나는 아픈 일에도 지친다. 지나치는 모든 순간들이 전부 커다란 납덩이 같다. 지겨워. 끝났으면, 제발 하루라도 빨리 끝나버렸으면.

어릴 때, 나는 내가 내 부모의 절반은 따라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앞에 놓인 촛불은 이미 여러 번 꺼졌던 걸 다시 켜둔 것. 더 이상 기대조차 들지 않는다. 관성적으로 최선을 다하지만 의미를 알 수 없다. 나는 이미 실패했으므로.

나의 불면은 어디로부터 온 걸까? 나의 절망일까, 아니면 못 다 피고 시든 꿈일까. 바이올린, 피아노, 린시드, 오래된 라디오, 수채 물감의 서투르게 번진 자국, 다 떨어진 악보집. 나는 모자란 학생으로 바란 적 없는 걸 성실히 공부하며 살고 있어. 만족해? 만족하고 있니. 무수히도 포기해왔던 과거에 만족해?

그렇지만 나는 지금 서 있는 지점에서 잘 하고 싶은거야. 그러니 지나간 꿈이 발목을 잡을 순 없어. 그건 이미 퇴색되어버렸으니까. 나는 나의 절망으로 불면을 얻어냈구나.

불행해지고 싶다면 거짓말이겠지. 응. 하지만 불행해지고 싶어. 세상이 나를 비난했으면 좋겠어. 내 죽음이 합당해질 수 있게끔.

결국 다시 아침이다. 어제의 내일이 다시 오늘이 되고야 말았기에 나는 더없이 고요해진다. 나의 바람 같은 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걸 안다. 실패가 하나 늘어난 인생을 들고 몸을 일으키자, 열심히 하루를 견디자. 그러고도 살아있어보자.

비참해. 죽지도 못할 거면서 불행을 전시하는 작태도 꼴사나워. 아, 역시 나는 내가 역겨워.

있지. 오늘은 조금 세상이 나아보여. 이런 말 했다는 거 내일이면 금세 까먹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우울이 가셨다는 건 아니야. 그냥, 적어두고 싶어서 왔어. 나도 가끔은 가벼운 우울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내가 나중에 읽고 알았으면 좋겠어. 종일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내렸어. 뇌우. 근데 나는 그게 좋아. 퍼붓는 비가 양말을 축축하게 적셔서 불쾌해져도, 차라리 거세게 퍼붓는 게 낫더라. 별 닮은 친구가 옛날에 나한테 그랬어. 비가 오면 대신 울어주는 것 같아서 후련하다고. 내가 그렇게 느끼진 않지만, 적어도 그 애는 오늘 조금 기분이 나아졌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좀 나아져. 응. 안녕, 오늘만이라도 좋은 밤.

종일 비가 내렸어. 태풍이 온다고 했지. 미친 것처럼 비가 와서 제발, 제발, 어처구니없게 오지 말라고 빌었다. 나는 폭우를 무서워했나. 사실 늘 비를 싫어했어. 하지만 무섭다고 느낀다니 이상해. 모르겠어. 밤이 되어 잦아든 뒤에는 좀 나아졌지만. 시험이 끝났으면 좋겠어. 내가 마음놓고 울어도 아무도 탓하지 않게, 그래도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 음. 역시 어렵고 두서없다. 옛날 노래가 좋아. 진한 초콜릿이 좋고, 홍차가 좋아. 커피는 써서 못 마시지. 아이 같은가. 아무래도 좋아. 나는 나인 걸. 싸구려 감자칩을 먹었어.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지만, 이상한 걸 주워먹고 살만 찐다고 타박을 들을까 염려가 들고.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나는 역시 내가 싫다.

그 사람은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죽었을까, 살아있을까. 동질감을 느끼고 혼자 사랑인지 애정인지 모를 걸 키웠어. 어렸고, 무서워서 도망쳤고. 그게 상처로 남을 만큼 바보같았지. 얼굴도 나이도 제대로 모르고, 그냥 나보다 1살 많았다고 적힌 글만 읽고 교류인지 뭔지 모를 걸 했던 몇 달. 그래도 난 그 시간들이 좋았는데. 역겹고 추악한 일이었지만, 누군가의 값싼 가짜 동정이 좋았어. 그렇게라도 불쌍해져서, 꼴사납다 손가락질 받고 비난당해도, 멸시받고 혐오당해도, 나랑 비슷하다고 주장해대는 사람과 문장 나누는 게 즐거웠어. 그때부터 어긋난 거겠지. 알아. 그게 내 거짓말의 종결이었으니까.

비가 와. 그치질 않네. 섬뜩하다고 느끼면 그건 잘못된 걸까. 눅눅한 공기 탓인지 숨이 막혔어. 글을 쓰면서 생각하곤 해. '나는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는 이과생이다'. 이상해.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텐데. 물론 공부하는 순간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가끔 즐겁지만. 그래도 진짜 온 몸을 던지고 싶었던 건 여기가 아니었는데. 길을 잃은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고, 그걸 정한 건 나 자신이었는데도. 화학 평형을 공부하고 베르누이의 삶을 생각하다가도 소설을 써. 가끔 웃겨서 눈물이 날 정도야. 미련과 부족한 실력으로 대체 뭐가 하고 싶다는 거니, 너는. 내가 포기했으면 좋겠어. 좀 더 제대로, 그래. 이를테면 어릴 때 부서진 바이올린처럼.

아드린느인지 누구인지 모를 여자를 위한 곡을 켰었다. 장조인지 단조인지, 작곡가의 이름과 뜻모를 영문과 숫자와 화음을 외웠다. 가장 좋아하는 곡은 세레나데였다. 사랑의 의미가 어렴풋할 나이였다. 지판 위로 손가락을 움직여 거친 현을 아프도록 눌렀다. 활을 손질하고 꼼꼼히 송진을 발랐었다. 내 연주는 어린 만큼 형편없었다. 실수가 가장 잦은 학생이었고, 박자에 서툴러 눈초리 받기 일쑤였다. 그래도 나는 내 바이올린이 애틋했다. 연주를 했고, 바이올린을 켰고, 현을 그었고. 그건 악기와 나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마법처럼, 딱 둘만 있으면 충분했다. 사람과 마주하는 것보다 편했다. 그러나 나는 쏟아지는 시선을 견디질 못했고, 못하리라 속단했고, 나무로 된 악기를 떨구었다. 실수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악기는 부서졌고, 이삿짐으로만 수 년 끌고다니다가 결국 팔아치웠다. 가끔 꿈을 꾸면 그 애를 만난다. 그 애는 어두운 객석을 두렵게 바라보다 바이올린 위로 턱을 올린다. 활을 내려야 할 순간에 내렸고, 올려야 할 순간에 올렸다. 처음으로 완벽하게 해낸 연주였다. 아이는 긴장 속에 작게 안도한다. 그리고 조명으로 빛나는 무대 위에서, 나는 짧게나마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꿨던 어린아이를 비웃는다. 너는 그걸 견딜 수 없을 거야, 하고. 실제로도 아이는 금세 악기를 떨어뜨린다. 무참히 망가진 바이올린을 내려다보면서 꿈은 막을 내린다. 나는 아직도 가끔, 바이올린 연주 영상을 보면서 신경질을 낸다. 그마저도 잠깐이다. 나는 오래 악기의 존재 자체를 잊는다. 불현듯 아쉬워질 때 말고는 신경조차 쓰일 일이 없다. 그러나 늘 아프다. 나는 내 모든 포기와 체념이 아프다. 안 될 거라는 말을 사실로 만들고야 마는 나를 싫어한다. 그냥 그런 일이다.

숫자가 백 개에 닿으면 그만 둘 거야. 여기에 와서 투정부리는 것도 정도껏 하는 게 맞으니까. 누구라도 견디면서 살잖아. 나만 유독 괴로운 티를 내는 거잖아. 괜찮아져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인 걸. 나아지자, 나아지렴, 이름 못 붙여준 곰돌아.

모인 글이 100개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틀림없이 서글플 테지. 사이 사이에 쌓인 시간만큼 내가 괜찮지 못했다는 뜻이 될 테니까. 좋은 점도 있어. 그래도 잠시간은 이런 곳이 있었노라고, 말해도 되는 것.

사람은 꼭 누굴 미워해야 하나요? 그러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건가요. 싫은 감정이야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선택할 수 없다지만, 그걸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휘두르는 게 과연 정당한가요? 표현하겠다고 결정하고 그렇게 한 건 본인이니, 표현만은 본인의 선택이었는데. 그 사람이 선택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스스로의 선택으로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게 옳다고 믿어요? 정말? 진심으로?

내가 옳다고 믿는 정의가 누군가와 싸워야만 정의일 수 있다는 게 슬프다. 평등과 자유의 가치를 인정한 건 내가 아니라 앞선 시대였다. 나보다 앞서 태어난 어른들이 그걸 부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그냥 한없이 슬퍼진다. 나에게 이런 형태의 정의를 옳다고 가르쳐줘 놓고선, 손수 부수고 싶어하는 꼴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이럴거면 가르쳐주지 말았어야지. 무엇이 옳은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일 수 있는지, 알려주지 말았어야지.

나는 내가 태어나길 선택하지 않았어.

선택한 적 없는 일로 내게 손가락질할 수 없잖아. 하지만, 난, 나부터 그러고 싶은 걸. 너는 왜 살아있니. 왜 아직까지도 살아남았니.

이런 삶은 결국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다. 이미 수없이 보아오지 않았나. 그러고도 포기를 못하지. 이기적이야, 너.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건 너잖아. 책임을 지렴.

그런 별 것도 아닌 걸로 마음이 상하냐는 소리 좀 안했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상처 받았고, 그건 내가 바란 일이 아닌데. 가까운 사람이니까, 가족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참는 게 낫지. 가족이잖아, 얼굴 붉혀 좋을 게 뭐 있어. 참다가도 문득, 치밀어 오른다. 늘 참는 건 나구나. 내 동생은 늘 솔직하게 토해놓으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나보다는 그 앨 챙기게 되는 건 당연하지. 대거리 하는 상상을 하다가, 그만둔다. 어쨌건 일은 끝났고 다 끝난 마당에 신경질 내는 것도 이상한 걸. 이런 사소한 걸로 속상해하는 속좁은 사람이라 내가 싫다.

세월이 지나 낡은, 이름조차 못 붙인 곰인형이 자꾸 내 유일이 되는 느낌이다. 자기 전에 인형에게 입 맞추고, 내 하루의 속상함을 털어놓는다. 그런 식의 쓰레기통으로 소중한 애를 쓰면서 자괴감이 든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모르겠는 걸. 의미없는 상담을 끝마쳤고 약을 끊었다. 모두 기뻐했던 걸 봤는데 다시 가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생각할수록 나는 타인에게 얽매이는 부류라는 걸 알게 된다. 관계없는 인간 말고, 가족이나 친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선 안에 들여놓고 애정을 퍼부었던 대상들에게 특히 신경을 쓰게 된다. 나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다니 가당치도 않게 느껴지고. 그래선 안 될 것 같아서 나를 깎아내린다. 더 무너져 내리는 중이다. 이것도 끝날 날이 올까.

하느님, 부디 저를 죽여주세요. 돌이킬 수 있다면 제 탄생 자체를 없던 일로 해주세요. 그렇게라도 제 주변이 안온해지길 빌어요. 진심으로. 상처받고 상처주는 일에는 질렸고, 삶을 견디는 일은 오래 전에 지쳐버렸거든요. 그러니까 한 번만, 돌이킬 기회를 주세요.

좀 더 긍정적이 되라고 격려하는 글이나 말이 흉기처럼 나를 찌른다. 나는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어, 긍정적이 되는 대신 긍정적인 애처럼 보이게 됐지. 이걸로도 부족하다면 나는 그만두겠어. 이런 어울리지도 않게 갑갑한 인생은 그만둘래. 나 대신 이걸 간절히 바란 사람이 잔뜩 있다며? 난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 가져가라고 제발, 좀. 못할 거면서 왈가왈부 하지 마. 나는 나야, 나는 그냥 나라고. 타인의 불행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도록 종용하는 말이잖아 그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사람들을 울리는 글을 쓰고 싶었어. 나라도. 이런 나라도 누군가의 위로이고 싶었어. 안 된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어.

걱정이란 말 아래 꿈이 짓밟힐 수 있다는 걸 알았어? 말 없는 응원이 백 마디 걱정보다 훌륭한 지지였을텐데. 미술은 우리 형편에 부담이라고 차라리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잔인하게. 피지도 않은 싹부터 즈려밟는 건 아니었잖아.

겨울에 내가 얼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원래도 추위를 잘 탔으니까 납득해주지 않을까.

아, 날짜 바뀌었다. 좋아. 그렇지. 나와 무관하게 시간은 가지. 배가 아픈데, 늘 그렇듯 위장이 말썽이겠지. 웃겨서 좀, 슬프다. 이상하지만 그래. 거짓말처럼 사랑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환상일까? 아무려면 어때. 나 아닌 사람의, 가족도 친구도 아닌 온전한 타인의 꿈결같은 애정인 걸. 짧게 끝나겠지만 맛보는 동안은 달 것 같아.

역시 나는 쓸모가 없구나. 내 노력이라는 건 항상 그 정도구나. 내가 얼마나 하찮은지,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한지 잘 알겠어. 이미 알고 있는데 굳이 주지시켜줄 필요 없었어. 충분히 내가 쓰레기처럼 느껴진다고. 엄마,가 하는 모든 말이 가슴을 찔러. 내 감정에 매몰된 채로도 난 대거리하지 않았잖아. 말하면 상처 줄까봐 늘 입을 닫고, 말을 줄이고, 고개를 숙이고. 나는 한 마디도 내 말을 꺼내지 않았잖아. 그걸로는 부족해?

아, 그렇지. 부족하겠지. 그러고도 상냥히 웃는 긍정적인 아이가 필요했겠지. 어쩌지, 엄마. 나는 그런 딸은 못 될 거야. 엄마도 아빠도 안 닮아서 내가 이 모양인가 보지. 유전자는 어디로 갔는지. 하하. 응. 더 괜찮아져볼게.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딸, 뭐든 당신 바라는대로 노력은 해 볼게. 나는 그것 말고는 가치도 의미도 없잖아.

사랑과 관심에도 상처받는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남아온 걸까. 나는 이제껏 버텨 살아남은 나를 규탄하겠어. 어쩌자고 살아남아 이 지경까지 온 거니. 그때 그냥, 죽지. 어쩌자고 살아남아서. 그때에도 미래에 대한 기대 같은 건 없었을 걸 알아. 그래도 이런 꼴일 줄 알았다면, 너는 너를 죽였을까?

이제껏 해 온 게 아깝다는 개소리 그만해. 나는 늘 내 순간에 최선을 다했고, 거기에 만족해. 내가 최선을 다했고, 후회하지 않았다면 그걸로 끝이잖아. 후회하지 않은 일로 말미암아 후회할 일을 만들란 소리야? 그런 건 이상해. 이상하다고. 내게 유일하고도 끔찍한 후회를 꼽자면, 살아남아온 것 뿐이야. 살아남는 걸 앞으로도 후회할 거고, 후회해왔어. 그러니까 해놓은 노력 아깝다는 소리 하지 마. 내가 했어,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했다고. 버리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나야. 결정하는 건 나여야 한다고. 죽는 것 정도는 그냥, 봐 줄 수도 있잖아.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어. 그냥 그걸로 만족할 수 있는데.

사는 건 늘 그랬다 체념이었고, 무거운 다리를 들어 나아가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는 지쳤고, 이따금 소리도 없이 울면서 느릿느릿 걸었다 어딘가 목적지가 있을텐데 나는 그게 어딘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영문도 모른 채 나아가다가 문득, 뒤돌아 본 내 삶이 말라 있었다 피었다 시든 안개꽃 한 송이가 내 발치에 툭, 떨어져 있었다 안개꽃은 언제 피어 언제 시들었는지 나는 그조차도 몰랐다 삶에는 늘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시험을 봤어. 어제는 한문이랑, 물리랑, 음. 그래, 영어. 오늘은 국어랑 수학. 채점은 안 했어. 했다간 울 것 같아서. 나는 나를 울리지 않을 필요가 있었거든. 시험은 어려웠고, 나는 풀 줄 아는 게 없었고. 내신 유지도 우습게 들려. 선생님, 기대를 배반하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내일은 지구과학이랑, 생명과학이랑, 화학. 마지막 내신 시험이야. 이게 끝나고 여름이 저물어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참아내면 나도 어엿한 성인이 돼. 아직 나는 다 자라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나를 어른 취급하겠지. 응. 그럴 테지만, 별 수도 없지. 어른들이 왜 술을 마시는지 이해해버릴 것 같아.

무모하고 오만한 꿈이 하나 있다. 혼자든 둘이든 입양을 하든 직접 낳든 아이를 기르는 것. 세상에 하나 정도는 무조건적인 애정을 쏟을 대상이 필요한데, 연인관계는 지나치게 불안하니까. 이기적이지만 그런 대상이 필요하고, 또 반려동물의 수명은 짧아서, 아이를 길러보고 싶다. 세상에 둘도 없이 사랑해주고 싶다. 존재만으로 스스로를 가치 있게 여기는, 나와는 달리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게끔 돕고 싶다. 부모가 아이를 결정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돕고 지지할 순 있겠지. 그 전에 나부터 나를 아껴야겠지만! 왠지 멀게 들린다. '이런' 마음으로 참 독특한 꿈이다. 섣불리 누굴 망칠 수도 없으니 꿈은 꿈으로 남겨둬야지.

버려진 음료수 캔을 보고 문득 서글퍼지는 건 단지 내가 과민한 탓일까. 캔이 나 같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캔을 툭, 길바닥에 떨구었을 어느 사람을 생각한다. 그 사람은 인생이 벅찼던 걸까? 삶이 바빴던 걸까? 그도 아니면 도덕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세상이 그 사람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지 않았는지도 몰라. 엉뚱한 상상 끝에 캔을 주워 돌아온다. 걷는 길이 쓸쓸해진다.

요루시카가 좋아. 내 속에 있는 우울과 절박했던 기억 따위를 문자로 건져올린 것 같은 가사가 좋아. 나부나는 사실 자주 좋아했어. 일본의 곡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따금 보이는 현학적인 가사 때문일지도 몰라. 철학적인 질문은 늘 내게 의미있거든. 서정적인 곡조도 좀 보편적이라 낫고. いって, 부터 좋아했어. 준투명소년, 구두의 불꽃. 시험이 끝나간다. 더불어 한계선도 나를 지나쳐가는 걸 느낀다. 여기까지야, 속삭이는 것처럼.

생각해봤는데. 그냥 기억이 났어.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여름밤에 멀리서 하는 불꽃놀이가 보였어. 서울의 조금 후미진 주택가, 동네 산 바로 아래라 경사가 급한 아스팔트 언덕. 사람들이 조금 널찍한 간격으로 나와서 한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어. 나는 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보다가, 사람들을 보다가. 점점 어두워지는 사방에 할아버지가 나를 끌고 들어갈 때까지 그걸 봤어. 때로는 고집을 부려 불꽃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기도 했어. 어렸고, 정말 한참 어렸었고, 그래서 매해 여름 그것만을 기다렸어. 예산 문제인지 불꽃놀이가 소박해지고, 이내 끊기기까지 나는 거기 살았어. 나의 모든 유년은 거기 있었어. 재개발로 모두 허물어져 버렸다고, 아주 나중에 들었지만.

새벽에 앓는 오랜 불면에 슬슬 짜증이 치밀 즈음인데. 이상하게 오늘은 회상이 지배적이다. 새벽에는 늘 감상적이 된다. 고향이라고 칭하기에도 민망한 도심이 내 첫 터전이었다. 나는 이사와 전학을 수 번 했고, 지금은 향토가 뭔지 알 것 같은 중소도시에 산다. 부모님은 정착을 바라시고, 나 역시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가끔 그 무지하던 시절을 그리워 한다. 그저 내 자아가 비롯된 최초의 공간적 배경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렇다. 유달리, 특별히 좋은 기억이라곤 없을 텐데도 이상한 그리움을 느낀다. 집착이다.

별 보는 걸 좋아한다. 좋아했다. 자주 헷갈린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별을 찾는 건 어렸던 나의 기호이고 습관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미아가 된 기분이야. 나조차 나를 모르겠어. 애초에 사람이 사람을, 그 스스로라고 하더라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해.

네, 그래요. 내가 사라지더라도 세상은 아무 이상 없이 굴러갈 거에요. 협박조로 하는 말이었겠지만, 안 통하니 아쉽겠어요? 그게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차라리 사라지게 해주세요. 나도 나 하나쯤 사라진 세상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내가 존중받고 싶은 마음에 남을 존중한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어른들은, 역지사지나 황금률 따위를 가르치면서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걸까? 교과서에 적힌 글을 진리처럼 믿고 따르고 암기하고, 끝내 아이들 사이에서 소외되던 순간까지 나는 그게 옳다고 믿었다. 아직도 내 정의의 뿌리는 거기에 있고, 나는 고지식함을 누그러뜨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을 배워가며 나이 먹었다. 자주 서글퍼진다. 당신들이 옳다고 가르친 도덕, 윤리, 그 교과서를 기준으로 내세운 까닭에 나는 소외를 겪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서면서 바로, 언행불일치의 무수한 표본을 봤다. 그게 정말 털끝만큼도 당신들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열 살도 아홉 살도 아니고 고작 여덟 살이었던 애가 겪어야 했던 1년을, 오로지 그 맹목의 탓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내 추락은 거기서부터였다. 나도 평생 어른으로서의 죄의식을 떠안고 살테니 부디, 당신들도 내 어린 날의 가시를 그 애 탓으로 돌리지 말아줬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가증스럽게도 그 애가 불쌍하다. 역겹고 증오스럽지만 불쌍해. 고작 여덟 살이었고, 그대로 열세살이 되었다. 그때 자라질 못해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거라면, 아니. 책임 전가는 안 하련다. 적어도 지금 당장의 내가 되기까지는 사리분별 되는 나의 선택이 충분히 관여했으니까.

이상한 소리. 벌써 반절이나 허비한 유예가 고3의 7월에 걸쳐있다. 훗날 분명 이걸 되돌아보겠지만, 그때에 내가 지금보다 나아져있으리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화학을 보다가 성소수자 공부를 하다가. 생각은 자꾸 딴 길로 빠진다. 나는 에이엄브렐라인가? 범성애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성별보다는 사람이 보여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분명. 페미니즘을 증오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 걸까. 남자고 여자고 왜 다 서로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들도 있으니 좀 그런 발언인가? 음. 성평등이 나쁜가? 너와 내가 성적 측면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데, 그게 이상한 말이야? 천부인권이라는 개념을 인정하고 헌법을 썼잖아, 그런 민주주의 국가라며. 만인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건 차별받아 마땅치 않다며. 모두가 평등하다면서. 왜 다들 공격적이 되는 걸까. 공격은 사람을 방어적으로 만들어서, 설득은 더 어려워질텐데. 그냥,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야. 늘 사람은 어렵다.

조금 열심히 찾아봤다. 사람의 신념이 얼마나 그릇되기 쉬운지를 다시 배웠다. 살고 싶지 않다.

내가 배운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권 신장을 목표로 시작된 모든 사람의 종류에 구애받지 않는 성적 평등 주의였는데. 그건 나만의 믿음이었나봐. 그냥 성평등주의라고 에둘러 표현하는 게 덜 공격적으로 보일 정도가 되었구나. 세상이 어렵다.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 제발 저를 이 세상에서 치워주세요 살고 싶지 않아요

오랜 불면이 성가시고, 이번 불면의 이유가 어이없어 자꾸 화가 난다. 내 부모는 내가 필요할 때 언제나 거기 있는 존재가 아니라, 긴긴 기다림을 선사하는 존재였다. 그게 서운하지 않았다고 못하겠다. 밤마다 잠들지 않고 엄마를 기다렸다. 어차피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늦었으니 이만 자야한다는 말에 반항했던 건 날 기다리게 하지 말아달라는 완곡한 투정이었다. 엄마가 들어오면 잘 테니까, 나를 일찍 재우고 싶다면 일찍 들어와달라고. 그러나 엄마는 일찍 들어오는 법이 없었고, 동생의 투정에 늘 동생과 함께 잤다. 언니니까 양보해야지. 억울했던 것도 같다. 그냥, 서운했고. 서러웠고. 내 감정이 부당하게 느껴져서 늘 죄책감에 짓눌려 살았다.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맞벌이 가정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내가 애정 결핍이었을 뿐이다. 문제는 늘 나에게 있다.

아닌 밤 중에 느닷없이 떠오르는 감정의 파편에 두들겨 맞는다. 기억은 뇌리를 침습하고 눈가가 젖는 동시에 안경이 더러워진다. 시야는 엉망이 된다. 싫어. 나는 미치지 않았어. 나는 아프지 않아. 괜찮지 않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괜찮아야지. 내일 모레면 시험인 걸.

아. 시험. 망했다는 걸 오늘에서야 직시했다. 나는 역시 구제불능의 쓰레기다.

내가 입에 담는 자해와 자살은 가벼워 본 적이 없다. 친구들은 나날이 무뎌지고, 나는 습관인 척 가장하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나는 죽는 일이 아플까 봐 무섭고 두려워서가 아니라, 나의 무책임이 혐오스러워서 연명해가는 중이다. 너희가 나를 부추긴다면 기꺼이 내 책임을 외면해볼게. 어디 더 이야기해 봐. 몰지각한 언행을 일삼고, 의도 없이 상처 내 보라고. 죽어줄게, 나는 그럴 용의 충분히 있어.

깨어있는 지 49시간째. 이러다 죽지 싶다. 좋아. 그래보자고. 불면증은 언제 낫는지 어디 한 번 봐.

고아원에 내다 버리겠다고 했던, 나를 사랑한 나의 어머니. 당신께선 진심이 아니었다며 웃어보였지만, 나는 꽤 길게 내 존재를 성가셔했어요. 사랑받지 못하고 있노라 믿었고, 가족이란 울타리가 얄팍하리라 믿었고, 언제고 속 썩이고 쓸모를 다하면 버림받을 수 있겠노라 믿었어요. 그래서 난 늘 내가 귀찮았고, 마음에 차지 않았어요. 솔직히 말해서 사과받고 싶어요. 사과해달라고 요구하고 싶어요. 서른 정도 되면 나도 괜찮아질까요?

결국 나는 아무 말도 못했어. 나는 계속 당신을 귀찮게 하고, 성가시게 하고. 싫어. 내가 점점 더 싫어진다고. 얼핏 드러나는 애정이 달가워서 바보처럼. 진짜 싫어.

언제쯤이면 애정 없이 혼자 오롯한 어른일 수 있을까요?

있잖아. 잘 지냈어? 조금, 음. 그래, 오랜만이네. 나는 괜찮았어. 내 성적은 국어가 늘 괜찮았던 걸 빼면 수학도 과학도 엉망이라 그대로야. 나아진 것도 나빠진 것도 없어. 그냥, 아프더라. 내가 너무 게으르고 무기력한 게 화가 났어. 울었고, 내가 비겁하고 치졸해졌다는 걸 알게 됐지. 요즘의 나는 자꾸 남에게서 이유를 찾고 싶은가 봐. 그러지 않도록 더 조심해볼게. 네가 상처받지 않도록, 네잎클로버야, 더 조용한 사람이 될게. 네가 정말 그걸 바라는지는 이제 알 수 없어. 너는 나의 과거고, 나는 이미 자라서 너에게 묻는 것도 답을 듣는 것도 못해. 그냥. 네가 가여워졌어. 적어도 내가 아닌, 새파랗게 어린 너는 무지가 죄라는 것조차 몰랐을 테니까. 너에게 그걸 가르쳐주지 않은 건 어른들이니까, 너는 잘못을 바로잡을 만큼 자라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내 죄는 너의 것이 아니야. 적어도 어린아이의 것일 수는 없어.

아이를 사랑하고 싶은 욕망이 결국 내 어린시절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았다. 치미는 역겨움으로 재차 깨닫는다. 남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너무, 지나치게 부족하고 모자라다. 나는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도, 떠나는 인연을 붙잡을 용기도, 심지어는 운조차도 없어서. 사랑을 꿈꾸거나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망상은 그저 망상으로 끝내자. 이상적인 연애 몽상,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주변을 힘들게 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그러지 않기 위해 뼈라도 기꺼이 깎고자 해야 한다. 나에게 남은 시간동안 중요한 건 그것뿐이어야 한다. 죽음은 조용하게, 자살의 징조를 모두 감추고 나서. 그때 맞이하자. 우습게도 나는 내 어린 동생을 상처입힐 준비가 덜 되어있으므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그만 두고 싶다. 진실로 유쾌하지 않다. 선생님은 우스갯소리로 우리더러 젊어서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젊음이 내게 선사하는 서툶이나 무지를 혐오한다고 감히 대꾸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몇 번이고 곱씹는다. 어려서 실수하고 다치게 할 바에야 능란한 현숙함과 나이 든 육신이 낫겠다고 반복한다. 지나간 과거의 추억은 어른들의 말처럼 찬란하지 않았다. 소소한 빛이 따듯한 것과 별개로 그것들은 미약하다. 대사 빛바랜 애잔함과 눈물로 지새웠던 밤들이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나는 늘 짙푸르게 차오르는 우울에 젖어있었다. 외로움인 줄 몰랐던 외로움을 생각한다. 정말 그 누구도 알아봐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훗날 어리석은 아픔이 되었다.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을 뿐이다. 새삼 눈물을 뽑아낼 일도 되지 못했다. 나는 다만 지칠 뿐이다.

집에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내가 아니라 나의 친구들이 그렇다. 나도 가끔은 그렇게 말을 하고, 간혹 진지하게 귀택을 희망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들과 나의 처지가 다르다는 걸 느낀다. 집에서 막내로 예쁨받는 친구를 올려다 볼 때면 늘 가슴이 조인다. 나는 저렇게 자라지 못했다. 나를 밀어내는 가까운 타인에게 투정 섞어 불만을 표할 수 없다. 문제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청할 수 없고, 나의 지독한 감정 상태를 털어놓거나 고민을 공유할 수 없다. 나는 그럴 수 없다. 하다못해 형제자매의 가운데 낀 친구마저 늘상 밝고 명랑한 걸 보면서 서글퍼진다. 그러다 문득 생각하게 된다. 아. 저 아이들은 버림받을 거라고 상상하고 무서워했을 리는 없구나. 동생이 차를 타고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엄마를 말리지 않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피해 숨어있진 않았겠구나. 아빠가,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미워진다. 나는 숨을 헐떡이고 울면서도 끝내 가장 상처가 된 날의 기억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이건 나의 탓인데. 왜지. 왜, 자꾸만, 남에게 화살을 돌리고 싶어질까.

최근에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어. 소설을 쓰는 것 말이야. 비참한 일이지. 응. 그렇잖아, 나는 결코 소설에만 집중할 수 없는데. 하루아침에 엄마가 직장에서 잘리면 나는 당장 학자금 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해. 소설을 써봐야 남는 건 없을 테고, 나는 좀 더 고소득의 직장에서 일할 필요가 있어.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았다고 해도. 늦었어. 나는 어차피 돌아갈 수 없으니까.

내가, 동생을 사랑한다는 걸 조금 느닷없이 알았다. 편의점에서 내가 마실 캔음료를 고르다, 문득 그 애가 좋아하는 탄산음료와 컵라면을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으면서. 다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단 걸 사러나간다. 나는 내 걸 사면서 꼭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뭘 사갈까? 그러면 그 애가 답한다. 잘 모르겠어, 어딘데? 나는 편의점인지, CU인지, GS25인지 알려주고 간단히 매대에 놓인 간식 따위를 읊어준다. 집에 가는 길은 나를 녹초로 만든다. 그렇지만 손에 든 봉투가 조금 뿌듯해지고. 도착한 집은 아이의 반응에 따라 허망함과 보람의 그 중간을 오간다. 나의 반복되는 행태를 관찰하고 정리한 끝에 진득한 애정의 실마리를 찾았다. 무겁고 의미있는 관계에 쏟는 애정은 슬펐다가, 자주 기쁘다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애틋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동생아. 네가 나를 귀찮은 혈육 정도로 여겨도,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해. 네가 미술을 한대도 지지할 거고 내게 경제적인 의존을 원한대도 기꺼이 너를 받아줄 거야. 늘 네가 평안하기를 기원해. 고작 2년도 채 안 되는 나이차이여도 줄곧 네가 어리고 귀엽고 어여쁘게 보였어. 너는 나의 어린아이 취급을 어이없어 하지만, 내 눈에는 너의 어린 모습이 인처럼 박여있어서. 미안.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내게 마음껏 퍼줘도 아프지 않고 애틋할 따름인 사랑은 이것뿐인 걸. 부디 용인해주련.

아, 일흔 개다. 무겁고 끈적거리는 날씨와 공기가 지독해서 숨이 막힌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죽지 못했다. 나의 미련과 도피의 복합적인 결과물이다. 나는 비겁한 생존의 끝에서 비로소 파멸할테다. 내가 추구하고 지향해 온 가치를 비껴가거나 소극적으로 부정해왔다. 나는, 그러니까. 소설을 읽는 일이 이제 고통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소설 밖의 인간이므로, 내게 예정된 결말은 해피도 새드도 오픈도 아니고, 그저 앞으로의 불안과 불가역적 연속이므로.

내가 전시해놓은 불행들을 오늘 다시 읽었어. 그래서 넌 좀 나아졌니?

있잖아. 네가 걱정하는 미래는 지금보다 더, 몇 배씩이나 고통스러울 거야. 의미없는 과거보다 앞을 예비하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뜻이야.

사실, 너의 의미라는 소설에서 이상한 문장에 시선을 빼앗겨서 계속, 계속 생각해봤어. 내가 실망하고 상처받았던 건 내가 열심히 살아서라고. 그런데 나는 알거든. 나는 내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최선이었던 적 없어.

그냥, 하소연이야. 푸념이지. 의미없는. 의미 없는 외로움이고, 까닭 없는 고통이지. 내 아빠가 던진 철제 바구니에 머리를 맞고 오열했던 부끄러운 7살이 왜 자꾸 내 옆에 나타날까. 모르겠어. 이제는 그저 서러워져.

머리 쓰다듬어주는 거 좋아했는데, 그게 기억 난 뒤로 무서워졌어. 그 어린 애가 나일리도 없는데. 십 년 넘게 없는 기억이었잖아.

나는, 그러니까, 그 애를 지나쳐왔지만, 달라졌지. 그러니까 아직도 거기 매여있다는 건 이상해. 이상한 기분이야.

나는 내가 잘 모르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이상하다고 말해. 그런 버릇이 있어. 불가해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물음표야.

그래서 아무런 개선없이 이 나이가 되었을까? 어른이 되기 직전의, 터무니없는 어리석음으로.

최악이야, 나는 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나아지길 바라. 역겨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면 바라지도 말라고. 그렇게 못할텐데도 화를 내고 싶어. 나한테라도 화를 내야지, 남들에게 폐 끼칠 바에야 그게 낫지.

인생은 어디로든 흘러가고, 어떤 방식으로든 결말 지어질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다 부질 없어.

그런데 사실은 나도 그런 걸 꿈꿨나 봐. 포기하려는 나를 붙잡는 다정함, 거짓말 같은 부드러운 앞날. 그런 건 소설 속에나 나오는 거잖아. 나도 알고 있어. 병원에 입원했더라도 출석일수를 못 채우면 유급이고, 아파서 빠진 날이 많아도 선생님한테 밉보일 수 있는 게 인생인 걸. 그래도 꿈만큼은 달아서 좋았네.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고 싶은 하루야.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 소극적인 건 고쳐야한다고,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제 꿈은 소시민이에요, 소시민으로 사는 거요. 그게 제일 어렵고 가치있는 일일텐데, 그건 나의 믿음이고 오랜 소망이었는데. 선생님의 말은 역시 멀고 무섭다. 선생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면 내가 으깨어지리란 걸 안다. 세상에 몸 기대 살 거라면 당장 내 눈 앞 인연만을 신경쓰고 싶었다.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테지만 나에게 사랑도 친절도 베풀지 않을 무지한 타인을 겁내는 건 여전히 나의 천성이다. 당신께서 건넨 말이 무겁고 무섭다. 나는 아직 준비된 적이 없다.

간만에 유난히 죽고 싶었던 하루였다.

내 무능이 나의 목을 조른다, 나의 천성이, 나의 가정이, 내 존재가, 다.

언젠가는 이 삶도 끝나리라는 걸 안다. 아는데도 견디기 어려운 일들은 대체 어쩌면 좋지. 나는 이미 스스로를 살해하고 싶어졌다.

편지를 쓰자. 당신을 고통스럽게 할지 나를 비참하게 할지 헷갈리는 폭탄같은 편지를. 헤어지는 날, 나의 고통이 단지 올 한 해의 일이 아니었음을, 당신의 바람직함이 내게 괴로움이었음을 토로하자.

그렇게 내 모든 정성과 시간을 부수자. 그 뒤의 지옥조차도 삶이리니. 아직 정말 죽을 준비는 덜 되었나 보지.

아직도 너는 살아있구나. 나는 아직 죽지 않았구나. 죽고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야. 하지만 적어도 이제 내일이 무섭지는 않더라.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곤 못해. 너의 부족한 용기를 나는 아직 원망해. 그래도 살아있어. 나는 오늘 여기에 있어.

열아홉의 너에게, 이제 곧 나이를 하나 더 먹을 스무살의 내가.

다시 여기로 돌아왔어. 미안해. 그런데 정말, 나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 이렇게 갑자기 죽고싶어해서 미안해. 여전히 나를 미워해서 미안해.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

어른에게는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걸 알아. 미안해.

오늘 선생님이 그러셨어, 남을 미워하는 것만큼 나를 미워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라고. 나는 너한테도 잘못하고 있었구나. 아직 사과는 못하겠어.

아직도 살아있어서 미안해. 너무 많은 걸 즐거워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어서 미안해. 다섯 개를 마저 채우고 싶지 않아서, 영영 그럴까봐 다시 왔어. 너를 어쩌면 오래 살려두게 될지도 몰라. 너는, 그게 괜찮니? 그걸로 괜찮아? 나는 하나도 모르겠어. 도무지 내가 살아남아도 좋을 만큼 괜찮은 사람 같지가 않아. 세상을 갉아먹고 타인을 착취하고 다른 생명체의 시체 위로 기쁨을 조형하며 언제 어느 날까지 살아남으려고 드는걸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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