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스레더즈에서 제3장과 외전까지 연재되었으며 사이트와 함께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제0장과 제1장을 찾았으므로, 기억을 되살려 나머지 내용도 복구할 요량으로 스레를 세웁니다. 앵커판에서 연재되었던 이상, 이 글은 저뿐만 아니라 저 외의 참가자들과 함께 만들어졌음을 알립니다. 설정 오류를 메우는 등의 이유로 내용이 기존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하로는 제2장부터 연재됩니다. 이하 링크의 제0장과 제1장부터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https://www.evernote.com/shard/s399/sh/9be6d940-2861-4aef-b13f-22ea5bce937c/6399a3b14b3d7897dc74d6a324881353 (제0장 + 제1장)
  • +제2장 야구공이 있는 풍경 "...나." "일어나." "이새벽, 일어나. 오늘 파티를 열어야지." 새벽은 눈을 뜹니다. 머리맡에 익숙한 나무의 감촉이 느껴집니다. 무릎에 담요가 덮여 있습니다. 바람이 환한 빛처럼 교실에 가득이 번집니다. 분필 가루가 포말을 머금은 바닷물처럼 휘몰아칩니다. 새벽은 창문으로 눈을 돌립니다. 텅 빈 운동장이 보입니다. 해변도 아니고, 소금기 없는 공기는 말랐으나, 친근한 목소리에 새벽은 부력을 느낍니다. 책상 앞에 학생이 서있습니다.
  • 새벽은 바로 꿈임을 직감합니다. 그는 산타처럼, 또는 산타의 자루에 숨어 그를 뒤쫓는 아이처럼 분명히 하늘을 날고 있었으므로. 학생은 얼음이 녹듯이 느린 새벽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티를 냅니다. 새벽이 묻습니다. "누구야?" "자다 깬 줄 알았더니 죽었다 살아났냐. 숨쉬는지 잠시 확인을 안 했더니 이런 불상사가." 학생이 팔짱을 끼지만, 방어적인 태도가 무색하게 웃고 맙니다. 장난기가 가득합니다. 소년의 겁먹은 목소리를 흉내냅니다. "도와줘, 누나. 길 잃었어." "어릴 적 일이잖아!" "봐아. 기억하잖아." 학생이 목소리를 얻은 공주처럼 폭소합니다. 교정의 고요함이 몸을 낮춰 절합니다. 새벽은 턱을 굅니다. 학생을 모를 리야 없습니다. 삼 년 전에 새벽의 옆집에 이사온 친구로 계속 어울려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은 그보다 더 오래 되었는데, 그들은 칠 년 전, 새벽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같은 놀이공원에서 같은 시간에 미아가 된 전적이 있었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사람 사이로 점점 더 걸어들어갔더니, 놀라워라, 때마침 터진, 과자들보다 더 수많은 색깔과 수의 폭죽에 눈이 뺏겨 그들은 폐관 즈음에야 심장이 화덕에 밀쳐진 부모에게 손이 잡혀 헤어졌지요.
  • "왜 여기야?" 새벽은 상자에 갇혀 매립지에 온 곰인형처럼 맥락이 낯섭니다. "전원 안 들어왔니. 110볼트에 꽂힌 헤어 드라이어 같다. 짐작해봐." "기억이 안 나는걸." "난 좀 더 넓은 의미로 말한 거야. 평일인데 여기 있을 이유가 뭐 있겠어?" 조금씩 기억이 돌아옵니다. 그들은 학생이 없는 등교길을 따라 학생이 없는 교문에 다다랐습니다. 그날이 개교기념일이었음을 머리보다 발이 먼저 알았지요. 하지만 칼을 뺐으면 하다못해 다른 칼이라도 베어야 한다며 학생은 새벽을 데리고 교문을 넘어갔습니다. 졸렸던 새벽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한숨 잠을 청했습니다.
  •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새벽은 입가로만 웃더니 책상에 머리를 대고 눕습니다. 학생은 새벽이 조는 줄로 알고 칠판을 탕탕 칩니다. "평소와 다르네. 정체를 밝혀! 넌 필시 새벽이로 분장한 외계인이렸다." "그렇다는 증거는?" 새벽이 고개를 살짝 듭니다. 학생이 걸어오더니 자신만만하게 새벽의 상의를 잡습니다. "숨어들어오겠다면 사전준비가 철저했어야지. 우리 학교 넥타이가 아냐! 옆 중학교의 넥타이지!" 학생은 새벽의 넥타이를 풀더니 교탁 위에 던집니다. 새벽의 잠이 달아났음을 확인하자, 학생은 교탁 뒤로 성큼 걸어가더니 분필을 잡습니다. 줄을 그어 칠판을 둘로 나누고, 중앙보다 조금 위에 정형적인 문을 그리더니, 팔을 치켜 올려 맨 상단에 글자를 적습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고, 학생은 우리뿐이니, 이 학교는 우리 거야." 학생이 힘을 주어 흰 글씨를 눌러씁니다. 대문자로 생일 축하를 적습니다. "오늘은 우리 동생 생일이야! 우리, 세계 최고의 멍청이들끼리 머리를 모아 최고의 생일 잔치를 만들자! 왼쪽에는 준비물을, 오른쪽에는 무엇을 할지를 적는 거야." 대차대조표 같은, 하루 더 움직여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보이는 것만 같은 두 개로 나뉜 칠판을, 새벽은 응시합니다.
  • "교실에서 하겠다면, 책상과 의자로 왕좌를 만드는 것이 어때?" 새벽이 순서를 양보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듭니다. "채택! 집에서 이불을 들고 와서 장식해야겠다!" 학생의 손이 글씨를 남기고 움직입니다. 궁전, 그 밑으로 PNE 케이크와 폭죽을 적습니다. "우리 동생은 불꽃놀이라면 사족을 못 써. 쥐불놀이는 위험하겠으니 이걸로 만족하자." 학생은 끙 소리를 내더니 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양머리처럼 감습니다. "케이크 자르고 불꽃놀이라면 너무 심심한데." "학교 전체가 무대이니 추격전이 제격이겠다." 학생은 새벽의 말을 듣고 교실 한복판으로 걸어갑니다. 새벽과 하이파이브를 칩니다. "채택! 우리 동생에게 딱이야. 경쟁심이 강하니까." 그렇게 칠판이 채워집니다. 둘은 완성된 선과 문과 글자와 계획을 응시합니다. 지켜졌으면 좋을 그림들입니다.
  • "하지만 이불을 들고 와야 한다면." 새벽이 말을 흐립니다. 그들의 아파트는 학교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신선한 5월일지라도 그런 고행은 사람들의 눈을 너무 사로잡습니다. 칠판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며 빙빙 돌던 학생이 휴대전화를 높이 꺼내듭니다. "도움을 청하자. 여명 오빠한테 전화할게." "여명 형한테? 수업이 있을 시간이야." "내 부탁이면 수업도 빼고 와줄 거야." 학생이 표정에 신자 같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신호음이 들리더니 덜컥 남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쌤. 오늘 저희 좀 도와주세요." 여명은 학생의 과외 선생입니다. 새벽은 학생이 전화를 하는 모습을 단지 바라봅니다. "그래요. 오빠가 올 필요는 없고 저희가 그쪽으로 갈게요. 점심 때 갈 테니 뭐 좀 사주시고요. 좋아요. 다음 수업도 잘 부탁드려요." 예의 바른, 또한 거리를 벌리는 인사로 학생은 통화를 마칩니다. 새벽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함박 웃음을 짓습니다. "잘 됐어. 나가는 김에 밥먹고 장보고 오자. 여명 오빠도 파티에 참석시키고. 오후 4시에 운동장이 개방되니 그때 짐 가지고 들어오면 제격이겠네."
  • 새벽은 '장을 본다'는 말을 들으니 문득 무엇인가가, 생일잔치에서 빼놓아선 안 될 무엇인가가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선물이 없었구나. 마침 추격전이고 하니 운동화가 어떨까 싶은걸." 학생은 어느새 교탁 위에 올라가 다리를 가위질하듯이 흔들고 있습니다. 내려오기가 귀찮은지, 학생은 분필을 잡지 않고 대답합니다. "채택! 우리 동생과 이미지가 겹쳐. 달림으로써 마음의 구멍을 잊으려 드는 폭주열차지." "썩 나쁜 성격은 아닌 것 같네." "도넛의 구멍은 도넛일까?" "하루키구나. 네가 준 책 읽었어. 구멍 없이 도넛을 먹을 수 없다면 도넛이겠지." 새벽의 지식은 대부분 학생이 알려준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학생은 지루해졌는지 다리를 흔들기도 그만둡니다. 박자를 맞추는 짓조차 아주 지루할 떄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멸망하면 좋겠다. 나는 타자이고 타자는 지옥이니까." 학생이 허공을 올려다봅니다. 꺼진 조명입니다. 학생은 조심스럽게, 쓸쓸해지지 않을 속도로 교탁 위에 눕습니다. 교실 뒤쪽으로 돌아눕습니다. 새벽은 시야를 낮춥니다. 자신보다 앞서 쓴 사람들이 흔적을 남긴 책상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더럽혀야만 흔적을 남길 수 있나 봅니다. 학생은 점심 때까지, 잠시 쉬자고 말합니다. 누운 채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작지만 확고한 발성입니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노래가 계속됩니다. 시작을 말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하나, 끝을 말하기 위해선 이 네 단어로 충분합니다. 새벽은 책상 위의 선들을 봅니다. 갑자기 슬퍼집니다. 이곳이 꿈인 줄을 알고 있으므로. 지금 자신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학생이 현실에서는 죽었음을 믿지 않지만 짐작하고 있으므로. 부정하지만 죽었음을 상정하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금요일에 사태가 발발했을 때, 자신이 학생을 놔두고 도주해버렸으므로. 새벽은 엎드립니다. 무릎 위의 담요는 전혀 흩뜨리지 않고. 학생은 새벽을 깨우지 않습니다. 두 팔을 짚어 교탁 위에 앉더니, 이번에는 칠판을 보고 노래를 거듭할 뿐입니다. 같은 곡조를 다른 가사로. 여명을 만나러 이 교실을 떠날 때까지. 이것은 필시 새벽의 꿈입니다.
  • 오... 갱신!
  • 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스레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 이거 열심히 따라갔던 레스더 중 한 명인데 이거 날아가버렸을까봐 너무 걱정했는데 ㅠㅠㅠ 뒷부분 날아갔구나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복구할 수 있길 바랄게 진짜진짜로 재미있게 봤었고 앞부분이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스레더즈 진짜.... 백업시간도 안주고....... 스레주 힘내고 응원하고 있어...!! 고마워!!!!
  • 기억해주셔서,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이전에 본 적이 없으신 분도 참여해주셨던 분도 모두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독립기념일이라고 근처 산에서 불꽃놀이가 열렸는데, 취재 가야겠다 생각만 하고 기껏 밤이 되니 치안이 걱정되어 못 갔네요. 소설 내에서 생일잔치 때 불꽃놀이 장면을 적는 것으로라도 추후에 만족해야겠습니다.
  • 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행복한 꿈에서라면 자는 것이 악몽보다도 두려운 일입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꿈은 뒤집힌 상자의 유리잔처럼 깨지는 일이 잦으니까요. 잠을 자도 사라지지 않는 세계라면 그것은 악몽입니다. 그런 까닭에, 눈꺼풀을 열었을 때 바깥 풍경처럼 학생이 있는 교실이 보이자, 새벽은 내심 기뻤습니다. 잠을 자지 않고 눈을 감고 있던 학생과 일어서 교실을 떠납니다. 아직 굳게 닫힌 교문 철창을 넘습니다. 목적지는 학교와 상점가가 있는 도시 서쪽입니다.
  • 대학으로 가는 길에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교복을 입고 정오에 외출을 하고 있자니, 규칙을 어기고 있지 않음에도 영화 페리스의 해방에서와 같이 일탈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인파에 쓸려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새벽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말 그대로의 햇빛입니다. 하루동안 밤 속에서 불을 밝히며 견뎌왔던 새벽에게는 의미를 가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길이 분주합니다. 낮은 자신이 지기 전에 모든 일을 끝마치라고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것만 같습니다. 호손 효과가 처음 발견됐던 실험도 그랬지요. 빛이 강할수록 성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관찰될 때 더 성실해집니다. 새벽이 앞서 가는 학생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놀이동산에서 만날 때만 해도 여러모로 더 어려보이던 학생은 이제 새벽을 끌고 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를 잠시나마 잃자 한번도 뺏긴 적 없는 것처럼 슬퍼하던 그녀의 부모는 별거하고 있습니다. 서쪽으로 걸어가면 그림자는 옆으로 늘어집니다. 발치의 짧은 그림자를 꾸준히 보다, 새벽은 가끔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잔상을 하늘에 새깁니다. 학생은 심심할 때면 새벽에게 끝말잇기를 걸었다가, 발걸음이 빨라지면 멈추기를 거듭합니다.
  • 둘은 대학의 정문을 지나갑니다. 자동차가 주차된 선 없는 공터를 둘이 지나갑니다. 여명은 학교 도서관 안에 있다고 합니다. 새벽이 걱정합니다. "전화를 하는 것은 꺼려지네." "들어가면 되지. 자주 드나들어 사서 직원과 아는 사이야. 나만 믿어." 학생에 끌려 새벽은 강제로 나무 그늘을 밟고 갑니다. 정문에서 학생이 사서에게 익숙한 듯 손을 들어 인사를 합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일행이에요." 새벽이 따라가려 합니다. 사서도 문을 열고 있으나, 학생은 장난스럽게 새벽을 밀칩니다. "아니에요. 나 혼자 찾아올 테니까 가만 있어." 학생이 열람실로 향합니다. 새벽은 멀뚱멀뚱 서있습니다. 점심시간이라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쪽으로 비켜섭니다. 사서 직원은 학생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이미 알고 있는지 수긍하는 표정으로 웃습니다. 학생과 여명이 곧 내려옵니다. 반대편 문으로 가고 있어, 새벽은 급히 건물을 반 바퀴 돌아갑니다. "아, 새벽이구나." "안녕하세요, 여명 형. 들었다시피 생일 파티에요." "주인공은 우리 둘 다 모르는 사람인가?" 여명이 자신과 새벽을 지시하며 학생에게 묻습니다. "제 동생이니, 오고가며 보았을지는 몰라도 사실상 초면이지요." 학생이 둘을 바라보며 뒤로 걷습니다. " 준비나 빨리 끝마치자고요. 식사가 먼저고, 생일 선물을 사면, 마지막으로 쌤 집에서 이불 좀 빌려와야해요." "이런. 오랜만에 기숙사에서 집으로 가는데, 가족들은 다 나가있을 시간대잖아." 여명이 한숨을 쉽니다. 가족을 등한시하는 자신이 미안한 듯합니다.
  • 정오, 어느덧 그림자가 밟힐 것을 신경쓰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시간대가 되었으므로, 셋은 서둘러 점심 식사부터 하기로 합니다. 학생의 주도로 버거킹에 들어갑니다. 체면이 있는지라 여명이 지갑을 꺼냅니다. 여명부터 차례로 주문을 합니다. "와퍼. 단품으로요. 콜라도 됐어요." "불고기 와퍼요. 물론 세트에요." 학생이 끼어듭니다. "간단히 와퍼 세트로 주세요." 새벽이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일행이에요." "아니에요." "또 이러기야?" 새벽이 학생을 찌릅니다. 여명이 빨대를 뽑더니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감자튀김을 트레이에 쏟아 탁자 한복판에 모읍니다. 간단한, 식사 속도를 늦추기에는 충분한 잡담이 시작됩니다. 새벽과 학생이 정한 준비물을 여명이 읽습니다. 궁전, PNE 케이크, 폭죽, 이불, 그리고 운동화. 여명의 손가락이 종이를 가리킵니다. "다 좋은데, 이 PNE 케이크란 대체 뭐냐?" "Price not economic! 비싼 케이크요!" 학생이 곧장 답합니다. "왜 이렇게 줄임말을 쓰니. 물론 간결함은 통속적인 미덕이지만." 여명이 불평하더니, 학생의 동생에 대해 묻습니다. 학생은 뒷담화를 시작하려는지 힐끗 미소를 짓습니다.
  • 아우구스틴 노래도 오랜만이다ㅠㅠㅜㅜㅠ행복해!
  • 기억해주셔 감사합니다. 이 스레 이후로 제게도 아우구스틴 노래는 특별해졌습니다. 스레딕에 온 것도 소설 '악령'에서 그 노래가 나온 탓에 기억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 "중학교 2학년. 2003년 5월 23일 출생." 학생이 동생의 신변을 읊습니다. "수학을 잘해요. 전에 확실한 지식에 매달리는 것은 소통을 바라는 욕망에서 온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그제야 그랬구나, 싶더군요." "하긴, 실험과학이란 놈은 칼 전에 말을 꺼내자고 만들어졌어. 그게 역사야." 여명이 동조합니다. "동생이래도 남이잖아. 그렇게 속을 잘 알겠어?" 새벽이 궁금해 묻습니다. "걔 마음이야 동화책처럼 쉽게 읽혀." 학생이 말합니다. 빨대로 음료를 휘젓습니다. "자기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고 해. 성적도 좋고 운동도 잘하지." "천재인 편이야?" 새벽이 되묻습니다. "아니. 노력의 결과야. 혀를 뱀의 것으로, 심장을 석탄으로 바꾸는 수준의 노력. 한 번 잘한다고 소문이 나면 변화할 여지가 없어져. 끝까지 일관된, 간단한 사람이 되어버리지." 새벽은 학생이 말한 이미지를 그려보려 합니다. 그 나이라면 이해되지 못함을 자랑거리로 여기는 일이 흔한데,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걸까요. "누구나 신비로운 부분이 필요한데. 만들어내지 않아도 이미 밤 같은 부분이 있는데. 말만 듣자니 너무 불을 밝히려 하는 것 같구나." 이미 식사를 마친 여명의 말입니다. 학생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탕진되지 않으니, 걔는 걔대로 죽 살아가면 돼요. 고등학생이 되면 바뀔 거니까. 그게 이치죠." 학생이 말을 거둡니다. 그대로 이만 의자에서 일어설때까지 입을 다뭅니다. 새벽이 감자를 집을 때마다 학생을 훔쳐 봅니다. 어째서인지 슬퍼보입니다. 감자 튀김이 바닥나며 난 구멍으로 듬성듬성 빨간 트레이가 보입니다. 감자가 사라지자 구멍도 사라집니다.
  • 셋은 망설임 없이 대형마트로 갑니다. 여명이 폭죽을 찾으러 올라간 사이 새벽과 학생은 케이크를 살핍니다. 학생은 새벽이 고민하던 시간에 시식용 빵을 뜯어먹다가 곧장 고구마 케이크를 고릅니다. "중학생 입맛에 괜찮겠어? 초콜렛이 적당할까 싶었는데." "그건 네 입맛이고. 우리 자매 입맛은 이쪽이야. 초콜릿이라니, 귀여워라." "나이도 같으면서." "그래봤자. 네 입맛은 나보다 삼 년은 뒤떨어졌어." 둘이 투닥대며 여명이 내려올 에스컬레이터로 걸어갑니다. 여명은 장난감 폭죽을 여러 종, 캔디 가게에 들어간 아이처럼 안고 있습니다. 밤의 불꽃놀이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기대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나 봅니다.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제의를 하는 것만 보아도요. "나도 참가해야겠지. 불을 붙여야 하니까." "라이터라면 동생이 갖고 있어요. 담배는 안 피지만." 학생이 말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니. 불을 붙이는 쪽이 문제야." 여명이 투정을 부립니다. "아예 생일잔치도 하지 말고 선물로 하나, 짜잔, 개당 만 원짜리 생일잔치를 주지 그러니. 이벤트 회사에 있을 테니." "제 기억이 맞다면 갖고 있다는 거니까. 혹시 모르니 와주세요." 학생이 거리감 없이 말합니다. 미래의 일이라면 너그러워지는 사람 마음입니다.
  • 마지막 준비물은 왕좌에 쓰일 이불입니다. 운동화와 폭죽, 케이크를 들고 상점가 근처의 아파트로 갑니다. 여명이 집열쇠로 문을 엽니다. 숨기 위해서가 아니라 덮기 위해 쓰일 이부자리를 한바탕 꺼냅니다. 최대한 얇은 이불을 위주로 고르지만, 부피가 상당합니다. 무거운 꿈이 아닌 거추장스런 꿈이 쉽게 포기되듯이, 현관으로 들고나오는 것마저도 주체스러운 모양입니다. "힘내세요." 새벽이 말합니다. "새벽아, 너 정말 인성이 나쁘구나. 같이 들어준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니." 학생이 장난을 치며 현관까지 걸어온 여명에게서 이불 일부를 넘겨받습니다. 새벽이 한 손으로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들고 다른 손으로 이불을 머리 위에 얹습니다. 정전기 덕분에 엉망이 될 머리가 벌써부터 눈에 선합니다.
  • 열린 교문 옆으로 경비 직원이 빗자루질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이 먼저 성큼성큼 다가갑니다. "들어갈게요. 생일 축하 협회가 열려요." 경비 직원은 느리게 반응합니다. "상관은 없는데, 너무 시끄럽게 굴지만 말아." "교실 좀 뒤엎을게요." "내일 수업에 지장 없도록만 뒷정리 잘해. 돈도 안 주면서 일을 떠넘기기 일쑤라니까. 참, 술 먹지 말고. 감시하러 갈 테니." 학생은 고개로 여명을 가리키며, 보호자가 있으니 걱정 말라 당부합니다. 교실로 들어갑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주인공을 들이기 위한 준비가. "중요한 준비물을 빼놓은 것 같은걸." 새벽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케이크에 첨부된 생일칼도, 운동화와 같이 포장된 신발끈도 다 확인한 뒤에 한 말입니다. 여명이 툭 말합니다. "생일선물이 셋이 아니라 하나라 그런가?" "아참." 이렇게 놀라는 새벽을 학생이 한심하게 쳐다봅니다. "그게 아니지. 사람을 안 불렀잖아." "임금 노동자?" "주인공 말이야. 우리 동생." 교탁 위에 걸터앉아, 이번에도 전화를 높이 꺼내듭니다. 번호를 누르며 고민을 말합니다. "무슨 핑계로 부르지. 외계인 사냥이라 하고 분장한 둘을 쫓을까. 아니, 과학 밖에는 워낙에 관심이 없으시니 이를 어쩌나." 하지만 그 새에 전화가 연결되어 버립니다. 학생은 혀를 차더니 통화를 시작합니다.
  • "안녕, 우리 동생." 수화기 너머로 말합니다. 상대의 반응이 불퉁한지, 학생의 어조가 머쓱해집니다. "에에이, 저녁이나 먹자고." "안 내려가는 줄 알거든요. 너 오늘 집에 있잖아." "불만이 너무 많다, 너. 식사나 하자니까. 응? 내 얼굴 봐서." "보기 싫구나. 그러지 말고." 흥정이 시작도 전에 난관에 봉착했나 봅니다. 쩔쩔매던 학생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승부수를 던집니다. "내가 한가하게 이러는 줄 알아? 이유가 다 있어. 자매 간의 서열을 정하자." 이 단어가 먹혀들었나 봅니다. 상대는 자신을 더 성가시게 하지 말라는 어투인 것 같았으니까요. 학생은 교탁에서 내려와 사정 없이 돌며 사방에 총을 헛쏘는 시늉을 합니다. 총을 쏘는 시늉과 구별이 되지는 않지만요. "맞아. 앞으로는 귀찮게 안 할게. 네가 이기면 오늘이 마지막이 되지. 내가 이겨도 바뀌는 건 없고. 밑지는 장사라니까." 네가 질 리가 없다니, 학생이 상대의 말을 웃음을 섞어 따라합니다. 나름의 자극이 된 모양입니다. "흐음. 좋아. 아, 콧노래 아니거든. 우리 학교 알지? 2학년 1반 교실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저녁 6시에 와!" 전화가 끝나자마자 학생이 손을 높이 듭니다. 기지개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동작입니다. 비로소 새벽은 이것이 회상이 아닌 꿈임을 확실히 깨닫습니다. 한 달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나, 그때에 학생의 동생은 지방에 내려간 탓에 파티에 오지 못했습니다. 기억이 아닌 꿈입니다. 비극은 희극으로 반복될 수 있습니다. 한 철학자가 꼬집었듯, 비극은 정당한 두 측이 모두 양보하지 않음에서 성립하니까요. 지금으로부터 이어질 꿈이 희극이 될지는 순전히 앞으로의 선택에 맡겨져 있습니다. 꿈에서 깨도 후회하지 않을 각오를 미리 할 시점입니다.
  •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불로 덮인 책상과 의자는, 바닷속 괴물처럼 오르려는 사람을 휩쓸 것 같으나, 여명이 보증하는 바 굳건합니다. 세 사람이 이곳을 오르는 경쟁을 해도 안전할 것이라 자부합니다. 여명은 케이크와 운동화, 그리고 폭죽 더미를 이불 밑에 숨깁니다. 그대로 들어가려는 여명을 학생이 붙듭니다. "어디 가세요?" "추격전이니 숨어야지. 나는 뛰는 것이 질색이다." "저도 연기는 질색이에요. 무엇을 한다? 두 사람이 시합을 한다. 그런데 한 명이 위치를 안다면 무슨 소용이죠?" "그 말은 즉." "뛰세요." 학생이 여명보다 앞서 걷더니 교실의 앞문을 활짝 엽니다. "도망칠 곳이, 제가 찾으러 갈 곳이 많이 남았어요." "교실의 문은 다 잠겼을걸. 복도나 뛰어다니는 시합이 무슨 재미이니." 여명이 항변합니다. 새벽이 두 손을 꼭 쥐고 여명을 응원합니다. 하지만 학생은 주머니에 손을 넣습니다. "궁전이 만들어질 동안 손놓고 있지는 않았답니다. 경비 직원께 마스터키 두 벌을 빌려왔죠. 뭐, 교무실은 안 열리니 시도도 말고요." 둘은 얼떨결에 열쇠를 받고 맙니다. 동의한 격이 되어버립니다. 새벽이 시계를 훔쳐봅니다. 벌써 약속시간인 6시가 다 되어갑니다. 미룰 수가 없습니다. "가야죠." 학생이 말합니다. 여명과 새벽은 입이 많은 것처럼 한숨을 쉬더니 입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갑니다.
  • "항상 자신만만하다니까." 여명이 말합니다. "어느 돌이 움직일까 예상하고 있는데, 체스의 규칙을 모두 알아와선 수를 두는 느낌이죠." 둘은 중앙계단에서 둘로 갈라집니다. 새벽의 목적지는 컴퓨터실입니다. 의자를 빼내 데스크톱 밑으로 숨어듭니다. 어둡습니다. 우산 안에서처럼 시간 감각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시간은 흐릅니다. 어느덧 약속 시간이 되었는지, 한 층 위에서 다짐이 들려왔으니까요. 학생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없는 사람처럼 숨어있던 새벽은 화들짝 놀랍니다. 필시 동생의 것이겠죠. "더 이상 장난에는 안 놀아나. 낮잡아 보이는 기분이 어쩐지 알아야 안 이러지." 소리가 사라지자 빛도 한층 줄어듭니다. 검은 커튼이 물들어갈 때, 갑자기 컴퓨터실의 문이 열립니다. 빛이 새어옵니다. 학생도 동생도 아닌 경비 직원입니다. "누구 있니?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주렴." "아, 안녕하세요." 새벽이 기어나옵니다. "문을 잠구어야 하니 너무 늦게까지 있지는 마렴. 그나저나 무엇 하니?" "...생일잔치요." 진실입니다. "교실에 가니 웬 책상이 괴물처럼 쌓여있고, 넌 여기 숨어있고, 그런데 잔치라고?" "그렇네요." 새벽이 생각해도 어색합니다. 그때 직원 뒤에 실루엣이 보입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좀 잡혀주세요!" 학생입니다. 새벽은 서둘러 앞문으로 도망칩니다. "그러니까 지금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주겠니." "네. 잡혀주시면요." "생일잔치라던데." 직원이 엉거주춤 걸어가며, 바지춤에 달린 열쇠와 소지품을 점검합니다. 채하가 친절히 설명해줍니다. "네, 그러니 잡혀주셔야 해요." "요즘 생일잔치는 이렇구나. 하긴, 이런 날에라도 고독이 필요한 걸까." 경비 직원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다, 어느 새에 수긍합니다. 어찌 되었든 잡혀갑니다.
  • 새벽이 새로 숨은 장소는 음악실입니다. 커버로 쌓인 장구를 드러내고 다행히 먼지가 적은 수납장 안에 들어가 문을 닫습니다. 열쇠가 바닥에 부딪혀 소리를 냅니다. 음악실 근처에서 언쟁이 들립니다. 학생과 동생의 목소리입니다. 새벽은 놀랍니다. 뛰쳐나와 둘을 살펴보기보다는 더 몸을 좁혀 앉습니다. "반칙이야! 왜 여기 선생이 잡혀와?" 동생의 목소리입니다. 학생은 능청스럽습니다. "홀수로 만들어야지. 그래야 승부가 나잖아. 승부 내기 싫어?" "규칙을 자기 멋대로 만들잖아! 항상 그래." "그러면 네 점수에 보태." 학생이 말합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가, 동생의 얼빠진 반응이 들립니다. "너무 가볍잖아." "일 점인걸." "아니, 태도가 너무 가벼워. 그래도 서열을 정하는 자리인데." 동생이 투덜대어 보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명백히 자신에게 좋습니다. 발소리부터 들립니다. "그래. 그럼 내가 한 명만 찾아도 이겨. 열심히 해, 언니." 곧이어 식은 목소리가 가라앉습니다. 학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숨가쁜 걸음, 이윽고 음악실 문이 열립니다. 방음이 되지 않는 음악실의 문이 닫힙니다. 새벽은 수납장 너머에서 인기척을 느낍니다. 저쪽도 이쪽의 인기척을 느낄까요.
  • 갱신!
  • 주말 동안 오지 못했네요. 모래, 수요일 밤에 다시 올 것 같습니다. 한국 시각으론 목요일 4시겠네요.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 "새벽, 너 보여. 나와 봐." 학생의 목소리입니다. 새벽은 악령의 장난에 길을 잃은 사람처럼 수납장 안에 더 단단히 숨습니다. 학생은 멈추어 서 주위를 둘러봅니다. 실패도 성공도 없다는 것처럼. 학생은 마침 눈에 들어온 피아노의 덮개를 엽니다. 떨어지지 않는 빗물이 맺힌 우산을 흔들듯이, 음이 톡톡 떨어집니다.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아 학생이 음을 반복해서 칩니다. 음성이 잘못 들어온 춤곡처럼 섞입니다. "돈마저 연인마저 잃었네 아우구스틴.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한 곡조를 끝내자, 태엽이 그만큼만 감겼다는 듯 학생은 재빨리 음악실을 나갑니다. 새벽은 꿈에서 꺨 것만 같은 예감에 숨을 더 죽입니다.
  • 다시 음악실의 문이 열립니다. 문이 열리면 안 되는 게임입니다. 새벽은 수납장의 보이지 않는 입구를 바라봅니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학생의 동생입니다. 그녀가 멈추어 서 음악실을 한 바퀴 둘러봅니다. 그러더니, 수납장 옆에 꺼내어진 악기들을 보고, 새벽을 향해 발을 옮깁니다. 수납장의 문이 열립니다. 눈이 마주칩니다. 새벽은 이미 예감을 했었음에도 어느 정도 놀랍니다. 학생의 동생은 당연한 일을 받아들이는 듯 수납장의 두 문을 더욱 활짝 엽니다. 침침한, 불이 꺼진 교실이지만, 어떤 사람의 얼굴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어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찾았다." 학생의 동생이 예의 바르게 말합니다. 수납장에서 새벽을 끌어냅니다. 갇히지 않았으나 나올 수 없던 새벽은 드디어 찌뿌둥하던 몸을 폅니다. "...이름이 뭡니까?" 음악실에서 나오며 학생의 동생이 묻습니다. 냉정한 태도입니다. 새벽은 자신의 이름을 말합니다.
  • 동생이 셋 중 둘을 찾았으므로 동생의 승리입니다. 교실 문이 개선문인 것처럼 동생이 당당히 1반 교실로 들어갑니다. 새벽은 개선문 앞 술집에서 나오는 사람처럼 비틀댑니다. 꿈에서도 졸릴 수 있다니, 습관은 대단합니다. 언니는 이미 도착해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교실 한복판에 우뚝선 왕좌를 봅니다. 책상과 걸상이 이불 밑에 감추어진 하나의 커다란 의자를. 언니가 경비 직원에게 말합니다. "이제 가셔도 좋아요. 정산은 끝났으니." 경비 직원은 새벽과 여명에게서 마스터키를 돌려받고 자신의 자리로 떠납니다. 언니가 짝, 손벽을 칩니다. "이제 축하를 해보자." "말 안해도 시작하거든." 동생이 따지고 듭니다. 외롭지 않을 때 땅을 보므로 외로울 때는 하늘을 보는 사람처럼, 동생은 언덕 같은, 이불에 덮인 보좌를 응시합니다. 그러더니 조심해서, 형태의 견고한 부분에만 발을 딛으며 조심스럽게 위로 올라갑니다. 발을 단단한 나무에 꼭 붙인 채로. 그 사이에 여명은 이불을 들치고 넣어두었던 물품들을 꺼내듭니다. 새벽이 교탁 위를 한 번 더 깔끔히 닦습니다.
  • 동생은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갑니다. 위험 없이는 고귀함이 없음을 아는 듯, 그녀는 자신의 육체에 무책임하게 털썩 꼭대기에 앉습니다. 의자 세 개를 늘어놓아 앉을 자리는 넓습니다. 균형을 잡느라 한동안 발 밑만을 쳐다봅니다. 안심하고서야 눈을 들고 불평하듯이 묻습니다. "그래서, 이제 뭐야?" "우리를 보면 돼." 언니가 말합니다. 등을 돌리고 들고 있던 것을 숨기던 여명이 케이크를 교탁 위에 놓습니다. 언니는 준비해놓았던 생일 초를 서둘러 케이크 위에 꽂습니다. 큰 초 하나에 작은 초 다섯 개입니다. 여명은 라이터를 들어, 생일초 여섯 개와 양쪽에 늘어선 양초 두 개에 차례차례 불을 붙입니다. 융통성 없게 하나씩. 때문에 생긴 긴 시간의 공백을, 동생은 깊은 침묵으로 되메웁니다. 불이 꺼진 교실이 초 하나의 분량만큼 점차 밝아집니다. 불을 다 붙인 여명이 어정쩡한 자세로 돌아섭니다. 케이크의 HAPPY BIRTYDAY가 적힌 부분을 노을이 앉은 방향으로 돌립니다. 노을에게는 보이지 않을 거리지만. 여명이 부끄러운지 학생에게 소곤댑니다. "나, 노래는 정말 못 한다? 조그맣게 부를 거지만 알아듣을 거라고 믿어." 여명은 그렇게 말하고도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노래를 부릅니다.
  • 동생은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열한 가지 그림자는 교실 뒤쪽으로, 관객들로부터 멀리 향합니다. 큰 초도 작은 초도 양초도, 똑같이 어두운 그림자를 만듭니다. 곧 다가올 체념은 왜 그리움의 모습을 하고 겨우내 버텼던 달력을 찢을까요. 빛을 향하고 있어 고개를 돌려도 얼굴이 어두워지지 못합니다. 한없이 부끄러워하며, 동생이 이미 해가 진, 그리고 해가 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나 노래는 듣지 않을 방도가 없습니다.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박노을. 생일..." 꿈이 멈춥니다. 현실로 돌아갑니다.
  • 새벽이 눈을 뜹니다. 나무의 감촉이 느껴집니다. 날벌레가 햇살 밑의 먼지처럼 날아다닙니다. 숲입니다. 새벽은 담요를 덮고 나무 판자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옆에는 놀이공원에서 왔던 롤러코스터 조각이 보입니다. 새벽이 정체 모를 사람에게 잡혀 탔던 그 롤러코스터입니다. 그 위에 마녀모자를 쓴 여자가 앉아있습니다. 막 잠에서 깬 모양입니다. 아직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심한 기시감을 느끼며 새벽이 망설입니다. 조용히 일어서 그녀에게 걸어갑니다. "너, 누구야?" 불확실해지기 위해 묻습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집니다. 여자는 나무가 자라듯이 얼굴을 내보입니다. 새벽이 아는 사람입니다. "나야. 채하. 따뜻하고 빛나는 노을." 이게 꿈인가요, 생시인가요. 마녀모자를 썼던 채하는 감기기운에 재채기를 하더니, 말을 마저 잇습니다. "네 옆집에 사는 친구. 어릴 적 놀이공원에서 같이 미아가 됐던 친구. 네가 좀비 사이에 버리고 갔던 친구. 노을이의 언니." 감기 기운에 목소리가 조금 바뀌었으나, 새벽은 기시감이 풀린, 물에 풀려 녹은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은 보다시피 마녀로 활동 중이야." 하지만 평소와 바뀐 것이 없다고, 평소처럼 전능감을 타고 날아다니던 모습과 그대로라고, 새벽은 속으로 중얼댑니다.
  • "어떻게 꿈인 줄 알았어? 우리는 정말로 한 달 전, 개교기념일에 등교했잖아." 채하가 즐겁게 말을 건넵니다. 새벽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물론 생일잔치를 하자고 네가 말했고, 준비도 끝냈지만, 정작 네 동생이 안 왔잖아." 채하는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끼려다가, 수갑 때문에 손을 교차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려놓습니다. "그렇지. 노을이는 못 왔지. 지방에 내려갔으니까. 바뀌었지. 그러니 주마등이나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꿈인 줄을 직감했겠구나." 새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대뜸 묻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남은 거야?" 채하는 지금 자신의 모습 외에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는 듯 어꺠를 으쓱댑니다. 호연이 채웠던 수갑이 찰랑입니다. "지금은 밤이야. 잘 시간이지. 살아남은 이야기는 아침에 하고, 지금은 밤답게 완벽히 살아가도록 하자." 채하는 롤러코스터 좌석에 다시 털썩 눕습니다. 이러니 몸살이 날 법도 합니다. 채하의 말이 영 틀리지 않았으므로, 새벽은 다시 나무 판자로 돌아갑니다. 자신이 쓰러져 자고 있던. 누우며, 새벽은 말도 안 되는 발상을 합니다. 이미 끝났던 꿈이 이어질지 모른다고. 현실에선 주인공이 오지 못해 불발했던 생일잔치가 성사된 만큼, 꿈에서만 일어난 일이 계속 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생각을 하며, 어느새 문을 열듯 정신을 잃습니다.
  • 새벽은 눈을 뜹니다. 꿈이 이어집니다. 눈앞에 초들이, 그 너머에 왕좌 위에 올라선 노을이 보입니다. 노을은 앞머리를 긁적이며 표정의 반을 가립니다. 채하가 빵칼을 꺼냅니다. 여명이 수저를 꺼내다 말합니다. "케이크를 자르려면 촛불을 꺼야겠지." "그래. 식사를 하려면 누군가 내려와야겠네." 둘은 동시에 위를 올려다봅니다. 노을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고도에서 내려가며 버리려는 모양입니다. 일어서더니 조심해서 단단한 책상을 찾아 발을 딛습니다. 채하와 새벽이 밑에서 기다리다 노을의 손을 잡고 내려오는 일을 거듭니다. "알아. 빨리 끄라는 거지." 노을이 손부채질을 하려는지 팔을 걷습니다. 채하가 만류합니다. "소원을 떠올리면서 불어." "이루지 않기 위해서나 소원을 비는 거지. 이룰 소원이면 안 빌어도 돼." 노을의 손을 붙잡고 있던 채하는 갑자기 웃음이 만연해져선, 뒤로 돌아가더니 노을의 등을 떠밉니다. "그래.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네. 빨리 불이나 끄고 케이크나 먹자." 등이 밀리자 반항심이 든 모양입니다. 노을은 교탁 양편에 손을 짚더니, 입바람으로 생일 초 6개를 끕니다. 양초만이 생일 잔치 현장을 밝힙니다. 촛불을 끄는 노을을 보며, 여명과 새벽과 채하는 희미하게 웃습니다. 그녀가 소원을 빌었을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 새벽이 케이크에 발을 담갔던 초를 꺼냅니다. 초는 뿌리를 잃습니다. 이들은 제 몸도 다 태워보지 못한 채, 이렇게 10분 남짓 타오르다 모조리 버려지는 운명이지요. 교탁 한구석에 생일초를 치우고, 새벽은 조심해 고구마 케이크를 여덟 조각으로 나눕니다. 노을은 새벽의 등 뒤에 서 케이크가 나뉘는 모습을 빤히 바라다봅니다. 노을의 시선에 민망해져 새벽은 서둘러 케이크 자르기를 마칩니다. 새벽과 노을을 남기고 여명과 채하가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 이불 밑에 숨었던 운동화와 폭죽 세트를 꺼내옵니다. 노을은 선물이란 티가 확 나는 운동화보다도, 아직 터지지 조차 않은 불꽃놀이에 더 흥미가 동한 모양입니다. "불꽃놀이야?" "그래. 학교는 우리가 세를 냈어. 하늘도 곧 세를 내줄게." 노을은 과장된 칭찬을 하는 대신 총총걸음으로 교탁 옆에 붙습니다. 플라스틱 숟가락을 들더니 케이크 한 조각을 한 움큼 떠먹습니다. 미소를 짓습니다. 불꽃놀이와 케이크에 대한 반응을 한 번에 하는 성싶습니다.
  • 머지않아 넷은 식사를 마칩니다. 케이크가 사라집니다. 유일한 광원이던 양초 두 개가 점차 짧아집니다. 적은 수가 모인 자리에는 활기보다도 고요가 어울리는지, 넷 중 누구도 교실을 빛으로 시끄럽게 채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스위치는 방치됩니다. 노을은 책상 한 개를 이불에서 빼내 그 위에 걸터앉습니다. 여명과 채하는 폭죽을 나눠듭니다. 운동장에 폭죽을 설치하러 나간다고 합니다. 둘의 족음이 교실에서 복도로 빠져나갑니다. 새벽은 따라나서려다, 생일잔치의 주인공인 노을을 홀로 두기가 마음에 걸려 교실 안에서 미적댑니다. 봄의 저녁은 봄 같지가 않아 나갈 의욕이 줄어듭니다. 노을은 가만히, 고민에 잠긴 것처럼 턱을 괴고 꾸준히 앉아있습니다. 새벽을 고의로 무시하는 것처럼. 이런 어색함이 겸연쩍어 새벽은 이제야 교실 앞의 스위치를 떠올립니다. 대화 거리가 생기기를 바라며 교실의 불을 켭니다. 양초 두 개가 순식간에 빛을 잃습니다. 노을은 화들짝 놀라 잠시 눈을 가립니다. 실뚱머룩한 얼굴을 든 노을은, 이제야 칠판이 눈에 들어온 모양새입니다. 생일 잔치의 준비물과 순서가 보란듯이 적혀있습니다. 광원이 양초 두 개뿐일 때에는 미처 보이지 못했습니다. 고민 이외에 무엇인가에 이제야 감흥이 생겼나 봅니다. 노을이 일어섭니다. 칠판 쪽으로 향합니다. 새벽은 교실의 문 쪽에 기대어 서있습니다. "언니는 가끔 무섭다니까. 내가 이걸 못 알아볼 줄을 다 알아채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을은 칠판을 만집니다. 하얀 선으로 갈라진 좌우. 그리고 중앙의 위편에 그려진, 어울리지 않는 하얀 문. 손에 닿지 않는 것은 언제나 잃을 수 있습니다. 노을은 어떤 본뜻에서였는지, 위로 팔을 뻗습니다.
  • 문 틈새로 저녁의 햇빛이 들어옵니다. 노을은 놀라 뒤로 물러섭니다. 아무리 거리를 두더라도 새로운 것의 신비는 가시지 않음에도. 새벽은 이곳이 꿈이므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음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놀란 채로 노을의 손끝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필로 그려졌을 하얀 문이 벌컥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풍경은, 새벽이 사춘기 특유의 결백함을 빌려, 결코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던 것입니다. "아는 곳이야." 새벽이 말합니다. 노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시겠지요. 저희 도시의 놀이동산이니." 침착한 노을의 답변에 새벽은 말문이 막힙니다. 의표입니다. 분주한 사람들, 시원스럽게 핀 튤립, 돌아가는 회전목마, 이들을 보자면 틀림없이 단순한 놀이공원일 뿐입니다. 새벽은 7년 전, 새벽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채하와 만났던 놀이공원을 자신도 모르는 중에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그곳이라는 보장이 없음에도. 비록 새벽의 꿈이라고 할지라도. 새벽이 칠판의 열린 문을 빤히 쳐다보자, 노을은 거리감을 두려는지 더욱 뒤로 물러섭니다. 새벽은 노을에겐 자신이 초면이니 이런 태도가 당연하다 여깁니다. 어제 보았던 활기찬 모습과는 다른, 완전히 가라앉은 모습이 어색할지라도 말입니다. "관심이 있으신가 봐요?" 노을이 빈정댑니다. "마치 발 뻗을 자리를 찾듯이 바라보시네요."
  • 새벽은 대답도 겁도 없이 열린 문 뒤로 팔을 넣어봅니다. 새벽의 팔이 저녁 햇빛에 물듭니다. 공간이 이어져 있습니다. 다리를 내딛어보려 하자, 문은 칠판만큼이나 커지더니 생일잔치에 대해 쓰인 모든 글씨를 잡아먹고 맙니다. 노을은 문이 열렸을 때 놀랄 기력을 모두 소진했는지, 식은 얼굴로 조금씩 비꼽니다. "가려고요? 인사하듯 떠나려고요?" "아직은." 새벽이 답합니다. "파티 주인공만 남기기 꺼려져. 그러니 폭죽 설치하러 운동장에 내려가지도 않았는걸." 노을은 머리를 오른쪽으로 기울입니다. 왼쪽 머리에 묶은 꽁지가 미끄러져 턱을 가립니다. "혼자 가기는 싫다는 건가요." "말이 그렇게 되네." 새벽은 수긍합니다. 노을이 촛불을 끄듯이 입바람을 붑니다. 물론 한숨입니다. "전 불꽃놀이 전에야 오면 되니, 목숨으로 딱지를 치듯 떠나보죠." 새벽은 채하가 말하던 노을의 성격을 떠올립니다. 절실한 소통을 위해 확실한 지식에 매달린다고 하였죠. 눈앞의 이치를 벗어난 장소에, 자신은 초면인 사람과 들어가는 상황은 그 묘사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어쩌면 생일은 하루 치의 희망을 품게 하는 날일까요. 내가 아는 것 너머에 나를 아는, 심지어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하던, 삼 일 이상 가지 않던 우리의 희망을.
  • 새벽과 노을은 어쩌다 같은 길을 가게 된 사람처럼, 따로따로 저녁의 놀이공원으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분주하고 서로 다른 목적지를 지녔음에도 일사분란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제 하루를 놀이공원에 대피해 보냈으므로, 새벽은 몇 번 들렀던 놀이공원의 길을 나름 파악합니다. 그들이 걷고 있는 이곳은 관람차 앞에 펼쳐진 넓은 광장입니다. 눈앞에는 고개를 들어야만 눈에 다 들어오는 관람차가 수레바퀴처럼 서서히 돌고 있습니다. 행선지가 없는 새벽과 노을은 사람들의 길을 방해하지 않고자, 꼭 붙어 길 한복판으로 비켜섭니다. 마침 비어있던 벤치에 둘은 앉습니다. 관람차를 향하는 방향입니다. 그리고 새벽은, 아주 익숙한 장면을 발견합니다. 삼인칭 시점의 광경이 눈에 익었을 리야 없음에도. 유년기의 기억 대다수가 삼인칭으로 재구성됨을 생각하면, 시각은 의외로 눈만의 소유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10살 남짓되어 보이는 두 아이가 관람차에 오르는 줄에 서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시간이 쓰이는지 너무나도 명쾌한 광경입니다.
  • 표현력 갓갓... 날아간 뒷부분 다시 써주기까지 할줄은 몰랐는데 고마워 ㅠㅠ
  • 읽어주셔, 과분한 응원을 주셔 감사합니다. 다시 쓴다고 해도 이미 내용을 기억하는지라, 무리 없으면서도 글쓰기 연습하기에는 좋네요. 귀중한 앵커가 날아갔음은 아쉽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 비둘기가 땅에 내려앉았다가 발길을 피해 도망갈 만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두 꼬마 앞의 줄이 줄어들었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 둘을 보더니 묻습니다. "부모님은?" "쉬고 계세요." 관람차 안에서 어른이 필요할 만큼 위험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아르바이트생은 그들을 순순히 안으로 들입니다. 한바퀴 돌고온 관람차의 문을 열고, 가족을 꺼낸 후, 두 꼬마를 서둘러 태웁니다. 앞서 가던 소년이 소녀에게 손을 내밉니다. 소년이 소녀보다 키가 조금 더 크나, 그럼에도 동갑으로 보일 만큼 소녀는 당찬 인상입니다. "채하야, 어서 타." "알거든." 무심하게, 눈을 평소보다 오래 깜빡이며 소녀가 올라탑니다. 문이 닫힙니다. 밖에서만 열릴 관람차의 문이 닫힙니다. 새벽과 노을은 관람차 쪽을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벤치에 앉아있던 노을이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립니다. 중얼거리는 말이 손에 모여, 새벽은 되물어야만 했습니다. "이건 악몽이야." 노을이 말합니다. "왜 그러는 거야?" 새벽이 되묻지만, 노을은 밑을, 바닥이 호수라면 관람차가 비쳤을 돌덩이들을 내려다볼 따름입니다. 새벽은 속이 탑니다. 넘치지 않는 말재주를 힘껏 짜냅니다.
  • "아참. 내 이름 모르고 있겠구나. 이새벽이야. 이름은 네멋대로 불러줘." 기껏 찾아낸 단어가 이러한 것들입니다. 한 박자 뒤늦게 고개를 든 노을은, 입이 보이지 않음에도 피식 웃는 것 같습니다. "불편하면 반말해. 불편하면 존대말도 시켜. 채하와 말을 놓고 지내다 보니, 동생이라고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었네." 새벽의 장광설을 노을은 그저 듣습니다. 하늘의 빛이 점차 짙어집니다. 노을이 행인들에게 시선을 줍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지, 노을은 목 부근에 놓였던 두 손을 포개 내립니다. 차분히 단어를 뱉습니다. "새끼고양이." 새벽이 되묻습니다. 노을은 머리를, 거절을 뜻하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저으며 일어섭니다. 철제 구조물을 손가락질합니다. "우리도 관람차를 타자." "흥미가 동했어?" 새벽이 묻습니다. "아니. 줄이 짧으니까." 두 손을 맞잡고 있던 노을은 자신의 손목을 매만집니다. 어느새, 종이로 만들어진 자유이용권이 의복인 양 매달려 있습니다. 노을과 새벽이 관람차에 들어갈 차례가 되자, 새벽은 위를 올려다봅니다. 어린 시절의 자신과 채하가 탔던 관람차가 꼭대기에 올라갔을 시간이라 생각하며. 초등학교 4학년이던 시절, 미아가 되었을 당시의 놀이공원에 발을 딛게 된 것은 대체 어떤 연유에서 일까요. 잠시 공상에 빠지며 새벽은 노을의 부축을 받아 관람차에 오릅니다. 아르바이트생이 밖에서 문을 닫습니다.
  • 새벽은 압니다. 한바퀴를 도는 데에 이십 분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어색하지 않게 관람차에 앉아있을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상대가 편하지 않을 때라야 상대를 자세히 보는 법입니다. 새벽은 반대편으로 시선을 향합니다. 노을은 왼편으로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은은한 햇빛이 새어 들어옵니다. 햇빛이 닿는 곳마다 먼지가 반딧불처럼 제멋대로 날아다닙니다. 철제 바닥을, 노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신의 신발을 새벽은 봅니다. 먼지가 보이지 않는 구간입니다. 그러나 어째선지 자신이 불안정한 공중에 발을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만큼이나 견고한 대지에 서있다는 인상을 풍기는 풍경입니다. 옅은 바람에, 풍경처럼 관람차도 새벽도 노을도 딸랑 흔들립니다. "저기 범퍼카가 보이네." 먼저 말을 꺼내는 영광은 노을에게 돌아갑니다. 새벽은 노을의 시선을 재빨리 쫓습니다. "즐겨?" "우리집에는 자동차가 없거든. 그래서 자동차가 가끔은 비행기 같아." 노을이 말합니다. "지인을 안 데리고 가면 민망해서 못 타겠던걸." 일행이 아닌 사람과 부딪힐 때의 부끄러움을 떠올리며 새벽이 힐끗 웃습니다. 노을도 따라 소리 없이 웃습니다. "가끔 언니와 오기는 하지만, 공중을 날아다니기를 즐기는 사람이라 내가 항상 져주곤 해. 탄 지 3년은 넘었지." 할 말이 많나 봅니다. 그러나 새벽에게 할 말은 아닌가 봅니다. 관람차가 올라갈수록, 같은 꿈을 보기 위해 노을은 고개를 더 숙여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좀 타자. 이 관람차에서 내리면." 새벽은 노을의 말에 말없이 동의합니다. 어찌 된 일인지, 노을이 제안하지 않았어도 서로 말없이 동의했을 만큼 당연한 수순으로 느껴집니다.
  • 다시 둘은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안전 벨트가 필요할 만큼의 위험 없이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니, 불공평한 장사 같습니다. 결국 노을이 감탄을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맙니다. "경치가 좋다." "엄밀히 따지자면 경치에 반사된 빛이 멋진 거지만." 새벽의 말에 노을은 갑자기 시무룩해진 티를 당당히 냅니다. "그럴 거면 빛이 멋지다 하지 말고, 그 빛을 보는 자기의 뇌가 아름답다고 하지 그래." 책망이지만 부정적인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신비는 가격표가 붙지 않았을 뿐이지, 분명히 필수적인 것이겠지요. 관람차가 막 사분의 일 지점을 지납니다. 과거의 채하와 새벽이 탄 관람차가 정확히 반대편에, 저울처럼 매달려 있을 것이라 새벽은 어림합니다. 뒤를 돌아봅니다. 이번에는 노을이 궁금증 어린 시선으로 새벽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막 떠올린듯 말합니다. "여기에는 튤립이 예뻐." 사실입니다. 놀이공원에서는 매년 3월에서 4월 사이, 튤립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꽃이 지면 튤립 구근 캐기 행사도 한정적으로 진행됩니다. 축제가 열리는 꽃밭이 바로 새벽이 바라보는 방향입니다. 그것 때문에 연상한 것인가 하고, 새벽은 어림짐작합니다. 노을이 계속 이릅니다. "튤립이 좋아. 얽힌 일화를 좋아하거든." "그리스 신화 거야?" 노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람 무덤이지." "역시나." 그 말 대로라면, 놀이공원은 매년 장례식을 여는 셈입니다.
  • 꽃 하나를 과학은 생식기관이라고, 신화는 무덤이라고 말하니, 언젠가는 번식도 하지 못하면서 신화가 이름을 붙이지 못한 꽃만이 순수한 꽃으로 대접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꽃이 필요한지는 모든 무용한 상상이 그렇듯이, 둘째 치고요. 노을이 이야기꾼 노릇을 합니다. 두 손을 의자에 짚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여인에게 세 명의 구혼자가 찾아왔어. 물론 선물을 가져왔어. 다 비슷한 사람들이었으니, 조금이라도 차별화가 필요했겠지." 선물을 줄 능력이 못되는 구혼자가 쫓겨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새벽은 마음속으로만 생각합니다. "첫째는 왕관을 쓰게 해주겠다고 했어. 둘째는 보검을 휘두르고 다니게 해주겠다고 했어. 셋째는 황금을 안고 살게 해주겠다고 했어." 그러더니 노을이 오묘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야기를 멈출 요량인가 봅니다. "자, 새벽.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 처음으로 새벽의 이름이 불렸습니다.
  • "내가 골라야 할까. 시합을 붙여서 정하고 싶네." "으음." 노을은 허를 찔렸는지 입을 가로막고 곰곰히 생각에 들어갑니다. 입으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튀어나올까 몸을 사리고 있는 걸까요. 결국 이렇게 핀잔을 줍니다. "하지만 능력주의도 완벽하지 않아. 무엇이 능력인지 결정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지." 우리는 완벽하기보다는 책임을 덜 질 해결책을 종종 고른다고 말하고 싶어지지만, 중학교 2학년에게는 어떤 해답도 이르다 생각되어, 새벽은 웃으며 확답을 아낍니다. 궁금증이 동해 묻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에서는 어떻게 골랐어?"
  • "모두 거절했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를 원했기 때문에. 여자는 왕관과 보검과 황금을 받는 대신에, 자신이 그들이 되기로 했어. 그래서 왕관과 같은 꽃을 피우고, 보검과 같은 줄기로 서고, 황금과 같은 뿌리를 내리는 튤립이 되었지." 노을이 수줍게 웃습니다. 바닥이 철제가 아닌 땅인 양 애정 깊게 바라봅니다. 새벽은 노을이 이 일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감상을 남깁니다. "바라는 대신에 스스로 그것이 되었구나." 비록 무덤의 형태를 띄었을지라도. 특이한 무덤입니다. 매년 성장하고 번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라던 것의 모양만을 옮겼을 뿐, 완전히 새로운 생물이 되었다는 점에서.
  • 후련해졌는지 노을이 한층 풀린 표정으로 튤립 공원 쪽을 바라다봅니다. 새벽은 이전에 노을과 했던 대화가 떠올라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튤립이 좋아, 관람차가 좋아?" "물론 튤립이지. 새벽은 반대지만." 앞서 노을이 한 질문에 새벽이 한 대답이었지요. 새벽은 웃으며 나름 설명할 길을 찾습니다. "왜 그럴까. 관람차는 바퀴를 얼마나 돌려도 그 관람차지만, 튤립은 지고 다시 피면 튤립이 아니라서?" "...안에 든 사람은 다르잖아." 노을이 나섭니다. 튤립에게도 변호가 필요하겠지요. "튤립을 보는 사람도 다르니, 수치로만 따지자면." 새벽은 자신의 대답에 더욱 확신을 가져 갑니다. 다시 찾아오겠다면 달라지지 않은 채 오는 편이 좋겠지요. "으음. 새벽의 기준에 따르자면 해와 달도 튤립보다 좋겠네."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고무줄의 변덕스러움을 알기에 노을은 너무 건강할까요. 그러나 새벽은 노을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그렇네. 튤립보다는 좋겠나봐." "하지만 날씨는 매일 달라지지. 노을이 지는 순간도 매일 달라지고. 그러니 노을보다 관람차가 좋다고 말했구나." 노을의 목소리가 물을 뿌리지 않은 조화처럼 말라있습니다. 새벽이 앞을 봅니다. 노을은 해가 지는 곳을 바라봅니다. 산소를 찾아 문 밖으로 달려드는 화염처럼 불콰한 햇빛이 초승달 옆에 보이는 둥근 그림자처럼 관람차의 나머지 부분을 채웁니다. 어여쁜 정경입니다. 새벽은 보이는 것을 말하기로 합니다.
  • "방금전에, 관람차에 들어온 빛에 감탄할 바에는 뇌를 사랑하라고 했잖아?" 노을이 새벽을 힐끔 쳐다봅니다. 별 말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쓸쓸하잖아. 역시 관람차보다는, 광원보다는 경치 자체에 감탄해야 하나봐." "그 말은 곧?" "관람차보다는 바깥 풍경이 어여쁘네." 노을은 양팔을 허리 옆에 붙입니다. 일몰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말합니다. 책망의 뜻이 담기지 않은 책망의 언어를 써. "말을 왜 바꿔. 관람차가, 모닥불이 좋다며."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는 것처럼, 러시아 인형이 두 개로 늘어나듯이 별 변화 없었다는 것처럼, 관람차는 계속해서 조용히 돌아갑니다.
  • 새벽은 문득 미심쩍어집니다. 지금 이것이 새벽의 꿈이 맞을까요. 꿈을 이어서 꿀 수 있다면, 최소한 지은 것이라도 허물어지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겠지요. 그러나 왜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채하는 새벽의 꿈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러나 왜 노을은 이토록, 새벽이 모르는 노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새벽은 자신이 꾸었던 악몽들을 떠올립니다. 그때 느끼던 두려움을 알 것 같습니다. 괴기한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자신의 꿈에 자신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감정이었습니다. 노을이 문득 새벽을 곁눈질합니다. 새벽이 거리낌 없이 웃습니다. "같은 말이어도 다를 때가 많구나." 노을은 크리스마스 전의 아이가 눈물을 대하듯이 말을 얌전히 참습니다. "현실에서 이것이 현실이라 말하는 건 심각할 때뿐인데, 꿈에서는 이것이 꿈이라고 언제 말해도 어색하지 않으니." 노을은 눈을 감더니 팔짱을 낍니다. 그때, 수면에 밀쳐진 것처럼 온몸에 충격이 가해집니다. 말보다 빨리 전해지는 무엇을 듣듯이. 새벽과 관람차가 들썩입니다. 충격을 줄이려 몸을 감싸안았던 새벽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다시 눈을 뜹니다. 노을은 조용히 바닥을 내려다볼 뿐입니다. 관람차는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갑니다. 노을은 새벽이 모르는 표정을 짓습니다.
  • 지금부터 잠시, 관람차 바깥이 이야기됩니다. 운동장입니다. 폭죽을 설치하러 내려갔던 채하가 교문 근처 자전거 보관대 위에 걸터앉아 여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운동장의 앉기 좋던 놀이기구가 채하는 어쩐지 그립습니다. 불편해지면 하늘을 보게 되나 봅니다. 폭죽을 밝히기 좋을 정도의 어둠입니다. 교정은 어두우나, 교실 하나에만 불이 켜져 있습니다. 생일잔치가 열렸던 2학년 1반 교실입니다. 새벽과 노을이 필시 저 안에 있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채하가 불안감을 따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용합니다. 채하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눈을 찌푸립니다. 교실에서 나오는 빛에 이물이 섞여 있습니다. 저녁 햇살과 같은, 교실에서 나올 리가 없는 색이. 채하는 떠올리고 맙니다. 생일잔치를 준비할 적, 칠판에 분필로 문을 그렸지요. 손을 하얗게 만들어 가며. 채하가 좋아한 문양이었을 뿐이나, 이것은 채하만의 꿈이 아닙니다. 다른 요인이 얼마든지 끼어들 수 있습니다. 채하는 감시받는 사람처럼 생각을 숨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채하는 거의 옳은 추측을 했습니다. 새벽과 노을이 교실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갔으리라. 채하는 운동화의 발등으로 모래를 내려찍습니다. 채하에게 무한정 좋지만은 않은 전개입니다. "악역을 도맡아 볼까." 채하가 혼잣말을 합니다. 말을 한 뒤에 으레 그러듯 주위를 돌아봅니다. 교문 밖에서 터덜터덜 돌아오는 여명을 발견합니다. 두 손이 가득합니다.
  • 조금 노파심이 듭니다. 어디서부터 신발을 잘못 신겼을까요. 그러나 여명 앞에서 평소대로의 태도를 되찾습니다. 평상시의, 수풀 밑에 가려진 아스팔트 길을 걷는 정찰대 같은 자신만만함을 두릅니다. "라이터나 구해오라 했더니, 품에 그건 뭐예요?" 채하는 바닥에 엎드려 있던 폭죽 다발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며, 여명의 품에 들린 상자에 대해 캐묻습니다. 여명이 자연스럽게 답합니다. "바주카포야." "어째서요. 아니, 그보다 어떻게 구했어요." 채하가 평행대 위에서처럼 말을 더듬습니다. "마트에서 팔더라고. 저렴했어." "시장경제가 일 안하네." 채하가 한숨을 쉬다가, 문득 눈을 반짝이며 교정을 올려다 봅니다. 저녁 햇빛이 새어나오는 교실을.
  • "설치할 줄 아나요?" 채하가 여명의 팔을 붙듭니다. "폭죽처럼 설치하면 되잖니?" "그래요. 90도로 쏘아올려 90도로 내려앉는다면, 세상에 전쟁은 없겠군요." "농담이야. 물론." 채하는 주저앉아 운동화 끈을 한 번 더 묶습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일찌감치 포기합니다. 그보다는, 교실로 올라가 새벽과 노을을 끌고올 필요가 있겠지요. 일어난 채하는 여명이 운동장 한복판으로 걸어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바주카포와 빨간 스위치를 전선으로 잇고 있습니다. 채하가 총총걸음으로 달려가 묻습니다. "핵 발사 버튼 같네요." "바주카 발사 버튼은 돼." 여명이 돌아봅니다. 어둑한 밤이나 표정에는 꾸민 기색이 없습니다. 채하의 말이 당황합니다. 꿈인 줄을 알면서도 단어는 마음대로 골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구했어요?" "사은품으로 주더라고." "아니, 꿈이라도 너무하잖아요. 쌤은 너무 잘 속아요." 여명은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설명서로 목에 맺힌 땀을 닦습니다. 일어섭니다. 짜잔, 누구나 쏠 수 있는 바주카포 완성입니다.
  • "라이터로 불 붙일 필요는 없어." 여명이 주머니에 손을 넣습니다. 그가 외출을 한 원래 목적은 이것이었지요. "알거든요." 핀잔을 주더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교정을 올려다봅니다. 항공모함에 전투기가 내려앉을 때 보이는 전광판처럼, 오직 한 칸에만 불이 들어가 있습니다. 채하가 바주카포를 집어듭니다. 묵직합니다. 차갑게 질렸습니다. "쌤, 제가 반동을 견딜 수 있을까요." 반작용을 고려하고 살아오지도 않았으면서, 채하가 괜히 묻습니다. 여명은 옆에 멀뚱히 서있습니다. 역할이 잠시 끝난 태엽장치처럼. "꿈이니 괜찮지 않니." "역시나 알고 계셨군요." 채하가 쓸쓸히 웃습니다. 그러나 여명에겐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겠니. 꿈에서라도 반동을 생각하지 않고 해봐. 너는 늘 우선순위를 올바로 찾아냈잖아."
  • 여명이 채하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채하는 여명이 없는 듯 행동합니다. 여명에게 들리지 않게 중얼거립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마. 여차하면 무너진단 말이야. 있을 곳으로 돌아와." 채하가 바주카를 조준합니다. 발로 빨간 버튼을 밟습니다. 순간, 채하가 반동으로 땅에 닿기도 전에 학교 건물에 폭파음이 들립니다. 벽이 무너집니다. 2학년 1반 교실이 있던 자리에, 쌓아올린 왕좌가 있던 자리에 연기와 먼지가 들어섭니다. 스프링클러가 작동합니다. 이사를 온 윗집처럼 부서지는 소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연기가 검은 밤 중으로 흩어집니다. 채하는 쓰러진 채 위를 올려다봅니다. 여명이 팔다리를 내리고 앉습니다. "후련해졌니?" 여명이 묻습니다. "아니오. 저 두 명이 돌아올 때까지는 불안하죠."
  • 지금부터 다시, 관람차 안의 이야기입니다. 관람차는 문제 없이 돌아갑니다. 바람에 흔들리기에 관람차는 너무도 묵직한가 봅니다. 노을이 흥겹게 다리를 좌우로 흔듭니다. 박자에 맞추어 노래를 나긋하게 부릅니다. "오월이라 단오날에 수리치떡은, 해보단도 더 뜨거워 혼자 못 먹네. 오라버니, 오라버니, 젓가락 줄까. 잘 불어서 씹어 삼켜 먹어야 하네." 서정주의 단오노래입니다. 시이므로, 노을은 자신에게 익숙한 민요 곡조를 붙여 부르는 것에 불과하겠으나, 새벽은 그것이 원래 있던 민요라 무의식중에 여깁니다. 캔 같은 관람차 안의 평평한 바닥에 둘은 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요. 그때였습니다. 몸을 움츠리는 느낌이 들더니, 둘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집니다. 무너진 하늘이 갈라지지 않은 땅에 부딪혀 내는 것과 같은, 하나 하나가 묵직한 굉음이 사방에서 들립니다. 철제 봉을 잡고 균형을 잡은 새벽이 비명을 지릅니다. 몸을 낮추고 있던 노을은, 진동이 진정되자 조심스레 일어서 창문 밖을 내다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구까지를 내놓고 노을이 입을 다뭅니다. 바깥의 풍경에 말을 잃었나 봅니다. "왜 그래, 노을아?" 새벽도 조심스럽게 머리를 돌립니다. 문과 하나인 창문을 봅니다. 신기하게도, 방금 전까지 옆에 보이던 롤러코스터의 노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진귀한 경험이로군요.
  • 일설에 의하면, 꿈은 외부의 현실로부터 잠을 지키는 역을 맡는다고 합니다. 집에 진실로 불이 나면, 꿈은 그 안에 화염을 키워 우리가 밤잠을 설치지 않도록 도와주지요. 이 화염이 정말 소중한 것을 침범하지 않는 한, 꿈은 지속됩니다. 새벽이 본 것은, 운동장에 있던 채하가 보았던 검은 연기와 흡사한, 몽실몽실한 구름입니다. 새벽은 혹시나 싶어 밑을 내려다봅니다. 놀이공원이 보입니다. 놀이공원이 통째로 한눈에 들어옵니다. 관람차가 땅에서 뽑혀나와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노을이 고개를 새벽을 향해 돌립니다. 둘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노을이 반쯤 본정신을 잃습니다. "와하. 이거 난다, 날아." "노을아, 정신 차려!" "와하." 새벽도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노을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와하." 새벽도 충격에 거의 실성하나, 그 틈에 노을이 안정됩니다. 침착하게 새벽의 양어깨를 붙잡고 흔들어 새벽의 빠져나간 혼을 넣습니다. "새벽, 너도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어서 살 길을 찾은 사람처럼 호랑이굴에 들어가자." 새벽은 노을의 말이 이해 안 되는 것이, 자신의 정신이 나갔기 때문인지 잠시 고민합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노을의 말은 사실입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요.
  • 나왔다 와하 ㅋㅋㅋㅋㅋ 실시간으로 봤을때 엄청 웃었는데!!
  • 전에 이 장면을 거칠 때 달렸던 반응이 기억났습니다. 제가 썼던 것은 어떻게든 다시 적는다 해도, 사라지고 만 반응에는 그저 속절없네요. 할 수 있는 한 성심성의껏 계속하겠습니다.
  • 노을은 계속해서 바깥을 내려다봅니다. 붉은 하늘이 점차 보랏빛이 되어갑니다. 새벽이 짓는 미소를 노을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름의 해답을 찾았나 봅니다. "관람차 문은 열리지 않아." "다른 문은?" 새벽이 되묻습니다. "여기서 들어왔던 방법으로 나갈 수 있겠지." 노을이 치마 주머니에서 하얀 분필 조각을 꺼냅니다. 흔적을 남기려면 더럽혀져야 함을 나타내는지, 노을의 검지와 엄지 손가락에 하얀 가루가 묻었습니다. 노을은 그려보자, 라 중얼대더니 바닥에 직사각형을 그리고, 초콜릿처럼 줄을 그어 칸을 나눕니다. 그리고는 새벽처럼, 관람차의 좌석에 털썩 앉습니다. 보존되어야 할 현장을 지키는 경계처럼 보이던 비뚤배뚤한 선들은, 둘이 놀이공원에 들어왔던 때처럼 일시에 커지더니 바닥을 덮어버립니다. 문이 아래로 열립니다. 물 같은 하얀 유체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새벽과 노을의 신발이 담깁니다. 젖지도 않은 채 불순물의 모양에 맞추어 모양을 바꾸고 있을 뿐입니다. 노을은 선물 받은 운동화가 아까운지, 오른발을 들어 좌석 위에 앉은 다리를 합니다. "선을 그어도 어떻게든 되는구나." 노을이 중얼댑니다. 새벽이 노을의 어꺠를 두드립니다. "떠날 거지?" 노을은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이번엔 하얀색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이라면 마땅히 이래야 하겠지요. 문은 창문이 아닙니다. "새벽은 갈 생각이지?" 새벽은 너머가 보이지 않는 문 대신 노을을 지켜봅니다. 노을이 꿈 속의 인물이라 여기면서도 그녀의 의사를 물으려 드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느 한 명이 동의해야 경사를 미끄러지듯이 진행되겠다 싶어 새벽이 기어코 고개를 끄덕입니다. 눈을 질끈 감고.
  • 새벽의 실책이었습니다. 양팔이 잡힙니다. 눈을 뜨자 이미 떨어지는 노을이 보였습니다. 탄력 있게 폴짝 뛰었는지, 반신이 이미 바닥을 통과해 있습니다. "가자." 노을의 말도 추락합니다. 새벽은 꼼짝할 새도 없이 문으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벽이 아닌 모든 곳으로 이끌립니다. 노을과 새벽은 주위를 돌아봅니다. 형형색색, 그 외에 묘사할 방도가 없습니다. 몸이 감속됩니다. 둘은 햇빛처럼 안전히 땅에 내려앉습니다. 먼저랄 것 없이 위를 올려다봅니다. 색색의 구름이 떠다니는 한낮입니다. 색색의 빛이 노을과 새벽의 구름자를 여러 개로 나눕니다. 사람이 없는 길거리입니다. 이 도시의 유명한 디저트 카페 앞입니다. 기울어진 필기체로 간판이 멋들어지게 쓰여 있습니다. 유리문에는 닫혔다는 팻말이 걸려있습니다. 멀리 오토바이 위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울며 털을 고르고 있습니다. 경계하는지 눈을 매섭게 향하지만, 밤이 아닌 이상 무섭지는 않습니다. 노을이 새벽의 옷깃을 붙잡습니다. 디저트 카페를 가리킵니다. 새벽이 가자는 뜻이냐고 확인하기도 전에 총총거리며 보도블록을 밟고 있습니다. 상가 앞 입간판에는 분필로 케이크 그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 "천천히 가." "고양이는 움직이잖아." 새벽은 붙잡히지 않았으면서도 서둘러 노을을 따라갑니다. 주위를 돌아봅니다. 유일한 생명체인 고양이는 오토바이의 푹신한 시트 위에 발자국을 찍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것이라면 바람에 날리는 모자 같은 구름뿐입니다. 노을이 밀치는 유리문도 움직입니다. 노을이 뒤집는 원목 팻말도, 새벽이 놓은 유리문도 움직입니다. 노을이 들어올리는 메뉴판도 움직입니다. 가게 안에 없는 누구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카페 안에는 두 사람뿐입니다. 진열장에는 완성된 조각케이크가 정성스럽게 잘려 놓여있습니다. 노을이 카운터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이스티 분말이 있습니다. 노을이 새벽에게서 주문을 받습니다. "할 줄 아는 메뉴는 복숭아 아이스티가 있어."
  • 새벽은 진열장 위에 손을 얹고 이름을 하나씩 읽어봅니다. "노을과 같은 메뉴로. 노을은 고구마 케이크 먹지?" "그럼. 우리 가족 입맛은 거의 비슷하거든." 새벽이 손잡이를 잡고 문을 밉니다. 떠나는 기차처럼 벌컥 열립니다. 새벽은 많은 조각 케이크 중 고구마 무스가 들어간 것을 고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생크림과 초콜릿이 층을 이룬, 보기에도 말랑말랑한 접시를 고릅니다. 접시 두 개를 저울처럼 들고 탁자로 걸어갑니다. 그새 노을은 주전자를 올려둔 채, 손으로 잡기에 좋은 모양의 유리잔에 얼음을 카랑카랑 쏟아넣습니다. 꼬마처럼 조그만 숟가락과 냅킨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새벽은 부엌으로 들어옵니다. "꿈에서는 살이 안 찌겠지." 새벽이 설탕통을 집어들며 혼잣말을 합니다. 노을이 볼을 부풀리더니 빈정댑니다. "난 꿈이 아냐." 그걸 증명하려는지, 노을은 행주로 손을 감싸고 주전자를 듭니다. 화분에 물을 주듯 유리컵에 살짝 붓습니다. 공백은 찬물을 부어 메꿉니다. 얼음은 후회 없이 자라는 나무처럼 딸랑대며 흙과 같은 색을 입습니다. 컵을 감싼 손에 맺힐 물방울이 벌써부터 보이는 것 같습니다.
  • 노을과 새벽이 의자를 꺼내 앉습니다. 케이크와 아이스티 두 개씩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먼저랄 것 없이 인사를 합니다. 새벽이 초콜릿 케이크를 한 스푼 떠 입에 넣습니다. 텁텁한 가루가 목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집니다. 앞니 뒷편에 케이크 시트가 달라붙습니다. 달콤하되 씁쓸하지 않은 크림이 천천히, 뿌리에 물이 스며드는 속도로 녹습니다. 새벽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습니다. 둘은 음식에 열중합니다. 조용합니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놀란 새벽과 노을이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Jeff Bernat의 groovin입니다. 둘은 낯선 것의 틈입에 과민반응하지 않고, 꿈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웃으며 받아넘깁니다. "많이 듣던 노래네. 채하가 여기에 끌고오곤 했거든." 새벽이 말합니다. "제목은 몰라?" "그러게. 모르는 채로 있었구나." "뭐를 몰라. 가사는 알잖아." 케이크를 삼키느라 잠시 뜸을 들이다, 노을이 묻습니다. "영어는 알잖아." "이 정도 청해능력은 안 돼."
  • 노을은 잠시 망설이더니 제안을 합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하는 것도 아닌 할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번역해줄까? 덮어 씌워서." "호의는 고맙지만 원래 노래 가사가 안 들리잖아." 새벽이 손사래를 칩니다. 하지만 이윽고 그것도 나름의 풍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벽이 발끝을 박자에 맞추어 흔듭니다. 노을은 이웃을 찌르지 않고 장미가 자라나듯, 투명한 목소리로 영어 노래 위에 자신의 문장을 붙입니다. "왼쪽으로 둘, 오른쪽으로 둘, 우리 같이 손가락을 튕기며 밤이 되어도 계속해요. 내가 당신에 맞추듯이 당신은 내게 맞추어요. 무도장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춤을 추자고요." 노을은 틈틈이 아이스티를 머금으며 새벽을 위해 번역합니다. 새벽은 부탁한 자가 으레 그래야 하듯, 지루하다는 기색도 없이 노을의 번역을 듣습니다. 노을의 목소리에 노래가 들리지 않게 되는 순간에마저도. 노래 한 곡이 끝납니다. 새벽과 노을은 비운 접시와 컵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습니다. 벽의 자리에 걸린 유리창에는 아직도 색색의 구름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불순물이 다이아몬드를 분홍색으로 만드는 원리와 같다면, 대체 어떤 먼지가 구름에 대해 그런 모험을 한 것일까요.
  • 노을은 원목 팻말이 걸린 유리문을 바라봅니다. 안쪽에는 닫힌, 바깥에는 열린 나무 조각. 노을은 뒤돌아 새벽을 바라봅니다. "어디로든 가자. 여기만 아니라면." 새벽은 노을에게서 분필을 건네받습니다. 노을의 손과 같은 흔적이 남아버립니다. 손을 하얗게 만들어가며, 새벽은 유리창 위에 분필을 긋습니다. 어떤 자국도 남지 않았으나 일시에 하얀 문이 만들어집니다. 어두운 학교의 마루가 그들 앞에 보입니다. 둘은 발을 내딛습니다. 꿈이므로, 아무 책임도 없이 가볍게. 꿈속에서 가장 꿈 같은 존재는 다름 아닌 자신이겠지요. 새벽과 노을은 매캐한 냄새를 맡습니다. 동시에, 이곳이 그들이 처음 떠나왔던 2학년 1반 교실 근처의 정경과 매우 흡사함을 발견합니다. 매연을 빼내기 위한 용도인지 복도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지만 말입니다. 노을이 재채기를 합니다. 교실로 보이는 방 안에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천쪼가리가 캐리어에 들어간 짐들처럼 정신 없이 쌓여있습니다. "뭐야. 이상한 곳으로 와버렸네. 당장에 떠나자." 새벽이 말합니다. "응. 그렇지. 이런 곳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확인할 건 확인하고 가야겠다." 노을이 방실방실 웃으며 창가로 걸어갑니다. 검은 운동장이 보입니다. 그 밑에서, 노을은 매우 익숙한 얼굴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하입니다. "언니!" 노을이 외칩니다. 자신의 왕좌가, 한 번 올라가보았던 왕좌가 사라졌다는 좌절감 떄문이었을까요.
  • 이제부터 다시, 운동장에서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채하는 구멍이 난 학교를 바라봅니다. 별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꿈임을 자각하기도 했고, 책임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었습니다. 채하는 어떤 변화가 생기기를 기다립니다. 이쪽의 일이 문을 매개로 저쪽을 방해했듯, 저쪽에서 새로 일어난 일도 이곳에 영향을 미치겠지요. 채하는 교문을 향해 앉은 방향을 돌립니다. 경비 직원이 뛰어오고 있습니다. 안쓰럽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저는 마트에서 바주카를 사 학교에 날렸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모른다는 거구나." 채하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다음으로 추궁을 받는 사람은 여명입니다. 채하는 턱을 괴고 기둥 두 개로 만들어진 문을 봅니다. 경비 직원 너머로 인파가 느껴집니다. 구름처럼 몰려드는 그들을 보며, 채하는 새벽과 노을이 사람이 많은 곳에 갔거나, 아니면 하늘로 치솟았겠다고 짐작합니다. 옆 중학교에서 자습활동을 하다 나온 중학생들입니다. 그들이 난생 처음으로 부서진 학교를 보더니 앞다투어 감탄을 내뱉습니다. 채하는 서둘러 그들의 수를 셉니다. 서른 명 남짓입니다. "언니, 언니가 부쉈어요?" 가장 어려 보이는 학생이 묻습니다. 채하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경비 직원이 돌아옵니다. 채하는 학생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경비 직원을 피합니다.
  • 여명은 그들을 관조하더니, 일어서 운동장에 폭죽을 설치하기 시작합니다. 학생들이 여명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채하에게 묻습니다. "여기서 무엇 있나요?" "축제야. 너희들은 무엇 했니?" "자습이죠. 선택하는 사람 한에서요. 저녁을 주거든요." "고등학생 되면 안 해도 되겠죠." 채하는 그들을 내려다보다, 웃으며 자조합니다. "중학생이라니. 커봤자 나처럼 될 텐데." "이렇게 축제를 열 수 있잖아요?" "축제가 열릴 떄마다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걸." 채하의 말에 학생들이 또다시 여명을 바라봅니다. 운동장을 끝까지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교실을 떠나고 보니 흥에 들떴는지, 학생들은 도저히 해산하려 들지 않습니다. 채하는 남몰래 교정을 올려다보다, 노을과 새벽이 곧 돌아오리라 믿고 마음을 놓습니다. 이 이상 할 수 있을 일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그들을 행사에 참가시킬 생각입니다. "자, 밤이 무르익었다. 축제답게 무엇을 해야 할까?" "술?" 가장 어려 보이는 학생이 말합니다. "힘내라, 공교육." 채하는 운동장으로 걸어가 여명과 함께 설치된 폭죽의 배치를 확인합니다. 여명은 이유 없이 슬퍼 보입니다. 곧 터질 화려한 음색과 색상의 불꽃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겠다 미리 선언하는 것만 같습니다. 채하가 감사인사를 하지만 여명은 쓸개즙을 삼킨 사람처럼 조용히 비닐봉지와 이미 한 번 쓰인 화약을 정리할 뿐입니다. 채하는 멋쩍어져 들뜬 학생들에게 천천히 돌아갑니다. 노을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 그때였습니다. 채하는 활기를 되찾습니다.
  • "쌤! 지금이에요! 불 붙일 준비를 해주세요!" 채하가 여명을 부른 뒤, 교정 쪽으로 걸어갑니다. 두 손을 나팔 모양으로 만듭니다. 외칩니다. "잘 왔어! 이제 불꽃을 쏘아 올릴게!" "교실이 왜 이 난장판이야!" 메아리처럼 더 작은 소리가 되돌아옵니다. "라이터가 작동하나 확인 좀 해봤어! 내려올 거면 빨리 내려와!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봐야지, 옆에서 보려고?" "여기에 있을래!" 노을의 고함에 채하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듭니다. 그래요, 이 번잡한 운동장에 사람을 더 끼워넣을 필요는 없겠지요. 자기 앞의 관중들에나 집중하도록 합시다. 채하는 중학생들에게 돌아갑니다. 노을의 옆에 새벽이 달라붙습니다. 노을은 눈을 크게 뜹니다. 무너진 왕좌를 빤히 바라봅니다. 아직 건재한 책상 하나가 있습니다. 말이 건재하지, 모서리는 그을음을 먹었고, 불이 만든 재와 불을 끄려 내려온 물이 늘어붙어 표면은 진득진득합니다. "어디 앉아서 보자." "조끼라도 깔고 앉자." 새벽이 교복 윗옷을 벗습니다. 책상 위에 벽지처럼 바릅니다. 풀은 더러워지기 쉬우므로, 더러운 것만이 장식에 쓰일 수 있습니다. 노을은 창문 밖으로 숨을 내쉽니다. 몇 년 간 불꽃놀이를 보지 않았습니다. 총과 같은 폭발음이 쏘아올려지면, 사람들이 환영하듯 카메라 플래시를 쏘아올리던 광경을 보던 때도 내겐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속이 답답해졌습니다. 무너진, 유리조각마저도 부서져 열린 창틀이 매섭습니다. 노을은 폭죽이 터지지 않은 공중을 올려다봅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립니다. 강 같은 밤 속에서, 노을은 휘날리는 것 같습니다.
  • 봄은 파랗고 여름은 불콰하고 가을은 창백하고 겨울은 어둡다 하여, 청춘이라 불리는 나이인데도, 짙은 파랑인 하늘만이 시야에 들어오다보면, 노을은 파랑을 제외한 모든 색이 자신에 속한 것만 같아집니다. 봄을 제외한 모든 계절이. 이제 피워올릴 것이 없어진 지금으로서 남은 의무라고는, 그나마 남은 것을 긁어모아 이름을 붙여주고 못된 것들을 열심히 미워해주는 것밖에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노을은 허무를 삼킵니다. 공중으로 말을 건넵니다. "언니는 정말 싫어. 언니가 다섯 살이 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좋아해본 적 없어." 새벽이 그 말을 듣고 있습니다. 노을이 앉을 자리를 데우며, 노을의 뒷모습을 보며. 지금의 노을은 부서져 열리지도, 부서져 깨지지도 않고, 그저 부서질 것 같습니다. 위태로운 노을을 새벽이 부릅니다. "불꽃놀이 좋아해?" "많이. 불보다 더 좋아해." "튤립보다 더 좋아해?" "어쩌면. 하지만 꽃이라면 장미가 더 좋아." 노을이 돌아섭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가, 이름표가 잡아뜯긴 조끼가, 선물받은 날에 한에서는 더러워지지 않을 운동화가, 동시에 새벽을 향해 돌아섭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 대사가 좋거든. 장미가 이름이 바뀐다 해서 그 아름다움이 가시겠어요?" 새벽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가 나를 장미라 부르는데, 만일 나의 본 이름을 알았더라면. 이 시구도 좋아해." "어느 시인이야?" "잊었어. 언젠가 이름을 알고 싶네." 노을이 쓸쓸하게 고개를 내립니다. 무엇도 둘 사이에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소리는 들어옵니다. 노을의 뒤편에서 폭죽이 터집니다. 예고도 없던 폭음에 노을은 울상이 되어 바람이 오는 쪽을 바라봅니다. 물기가 어렸던 얼굴이 한순간에 시원해집니다. 파란 밤이, 하얀 색을, 검은 색을, 빨간 색을, 그리고 파랑이 아닌 모든 색을 맞이합니다. 스탠드와 층 두 개를 뛰어올라, 새벽과 노을이 있는 교실의 바로 앞에서 터지고 있습니다. 하나가 터지면 하나가, 다시 하나가, 밤을 밤으로 놔두지 않고 달라붙습니다. 이 튀어오르는 소리 하나만으로도 언제나 이 교실을 느낄 수 있으리라, 노을은 미래에게 약속합니다. 왜 불꽃놀이를 좋아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느낍니다.
  • 튀어오릅니다. 하늘로 올라갑니다. 언제라도 기억에서 불러올 수 있도록, 명쾌하고 확실하게. 채하는 중학생들을, 영화를 다시 보며 관객의 반응을 즐기는 열성 팬처럼 지켜봅니다. 그러다 보니, 채하는 튀어오르는 불꽃을 등지고 있습니다. 가장 어려보이던 중학생이 묻습니다. "언니, 왜 안 보는 거에요?" "즐길 사람은 내가 아니거든. 저 위에 있어." 빛을 등진 채하의 표정은, 채하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쉽사리 파악되지 못합니다. 색색의 빛이 튀어나올 때마다, 채하는 상대적으로 어두워 보입니다. "이게 내 일이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과는 남한테 가지." "힘들잖아?" 중학생이 다시 묻습니다. 불꽃놀이를 무시하고. 채하를 바라보며. 채하는 별나다는 듯 답합니다. "걱정마렴. 이게 내 임무야. 너도 이렇게 될 거란다." 채하는 경쾌하게 모래를 박차며, 폭죽을 등지고 조금씩 나아갑니다. 등을 지고 길을 밝히는, 가스등을 밝히는 지난 세기의 가로등지기처럼. 채하는 성취감을 느끼며, 어서 꿈이 끝나기를 고대할 뿐입니다. 역광, 빛이 아름다운 역광입니다.
  • 불을 모조리 붙인 여명은, 철창 가까이 서 담배에 불을 붙입니다. 그러나 무슨 변덕인지, 꽁초를 손에서 놓더니 짓뭉개기 시작합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독사라도 잡듯이, 신경질적으로. 폭죽이 터질 때마다 여명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심장박동 한 번의 시간만큼도 살지 못한 담배 연기보다도, 더 흐릿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내 어리석음의 증거가 없어지기를, 여명은 바랍니다. 어서 꿈이 끝나기를. 노을은 새벽이 앉았던 책상에 앉아있습니다. 새벽은 좁은 자리를 공유합니다. 장난감 폭죽이 거의 다 터졌습니다. 공백이 찾아옵니다. 노을이 읊조립니다. "지금 폭죽 개수, 새벽이 나이네." 그 순간 한 개 더, 늦게 쏘아올려집니다. 노을은 성급했습니다. "새벽, 열아홉 살인 걸로 하자." "그건 무리야." 새벽이 웃습니다. "그게 뭐 대수라고." 노을은 자신이 덜 섬세했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실패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해보고 싶습니다. 실패를 기꺼이 할 수 있을 어치의 자유를 가지고 싶습니다. 노을은 한계가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꿈이므로, 환상이므로, 환상의 존재 이유는 자유 외에 그 무엇도 아니므로. 노을은 다른 사람의 눈을 향해 눈을 돌립니다. 그러나 하려 했던 말은 입에 걸렸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노을은 주머니에 넣은 분필을 억울하다는 듯이 꼭 쥡니다. 밀쳐집니다. 꿈에서 밀쳐집니다. 꿈이 끝나고 있습니다. 꿈이 닫힙니다. 문조차도 사라집니다.
  • 새벽은 눈을 뜹니다. 노을은 눈을 뜹니다. 습관적으로 자신의 꿈노트를 집어듭니다. 예지몽을 꾸게 된 이후로, 해석을 위해 빠짐없이 메모를 하고는 했습니다. 기억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지만 펜을 들 기력이 없습니다. 노을은 손에 힘을 풉니다. 꿈노트마저 관람차의 바닥으로 굴러떨어집니다. 손에 포근한 요가 닿습니다. 담요를 좌석 한 구석에 밀어넣으며, 노을은 중얼거립니다. 평소와는 달랐다고. 역시나, 아무리 잠을 자도 밤입니다. 이 밤은 끝날 기색이 없습니다. 노을은 창을 보다, 창 밑에 달린 손잡이를 붙잡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갇혔음을 깨닫습니다. 문에 괴었던 턱은 치워져 있습니다. 어젯밤 마녀가 찾아온 후, 노을은 탈출을 시도할 수 있다는 이유로 관람차에 갇혔습니다. 외부에서만 열 수 있으니, 노을은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갇힌 신세인 것이지요. 노을은 한숨을 쉽니다. 비를 맞을 일이 없으니 우산은 지금처럼 간이집을 만드는 용도로만 쓰입니다. 시간을 떼울 물건으로는 새벽이 준 퍼즐이 있으나, 빛 한 줄기 없는데 어떤 각오로 퍼즐을 바닥에 쏟겠나요. 관람차가 텅텅 울리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관람차가 치솟을 일은 없습니다. 노을은 인기척을 느낍니다. 앞머리를 정돈합니다. 노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노을이 잠에서 꺠어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바깥에서 문을 엽니다. 가스등불을 든 호연입니다. "경찰 씨." 노을이 호연에게 달라붙습니다. 호연은 실소합니다. "기분 전환하러 가자. 내일 웃으며 새벽을 맞아야지." "이상한 꿈을 꿨어." "예지몽이었니?" "아니. 기억이 잘 안나. 불꽃놀이를 본 것 같아. 차암, 다음 점심 때는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일찍이 부결된 제안이지만, 호연은 노을을 위로하는 데에 신경을 쓰기로 합니다. 둘은 불이 밝히는 철제 계단을 같은 발걸음으로 내려갑니다. 옆으로 휑한 꽃밭이 보입니다. 튤립이 피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구근마저도 없겠지요. 바람에 날아온 꽃씨나 자랄 겁니다. 어쨌거나 꽃이 자랄 거라고 생각하자, 노을은 풍경을 보며 들었던 비관이 조금씩 허물어짐을 느낍니다.
  • "계획이 실패해서 조금 슬펐어.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불안하기만 했단 말이야. 그런데 마치 세계 전체가 준비한 것처럼 길이 확고히 보이니까, 거기로 뛰어가야겠다고 느껴졌어." "그런 말 하지 마." 호연이 말을 자릅니다. 노을은 호연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제야, 호연이 자신을 구하고 오는 길에 가족 둘을 잃었음이 기억납니다. 철창 너머로 내민 팔에 저항하지 않고 붙잡혔던 때를, 호연이 떠올리고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단발이 책에 끼우지 않은 가름끈처럼 휘청댑니다. 가스등불을 더 강하게 잡습니다. "함부로 죽는다는 말 하지 마. 나는 혼자니까 부디 내버려두지 말라고. 그 잘난 꿈이 너한테 무엇이 되라고 시키든간에, 나부터 먼저 봐. 꿈은 숨을 안 쉬고 난 숨을 쉬어. 제발."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고, 미안하다고 호연이 부끄러워합니다. 가스등불을 든 손으로 머리를 긁습니다. 그림자가 길게 뽑힙니다. 가늘어진 팔 다리의 그림자가 낭창낭창거리며 땅 위를 오갑니다. 노을은 뒷말을 삼킵니다. 그렇게 느꼈으나 무엇인가 잊어버렸다는 직감이 들어, 더 오래 있어야만 할 것 같다고. 내가 모르는 것이 지상에 남았고 그것은 분명 좋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고. 노을은 밤의 놀이동산에서 배려를 배웁니다. 낮의 놀이동산에선 배운 적 없는 것입니다.
  •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호연과 노을은 계단을 모두 내려왔습니다. 밤은 기약이 없습니다. 이 밤에 한 약속이라면 마치 평생을 갈 것만 같습니다. 밤이 가득합니다. 낮보다 몸무게가 갑절로 나갈 것 같습니다. 노을은 무겁게, 고심하는 시늉을 합니다. "츄러스 천막으로." 새벽과 여명의 숙소입니다. 호연이 얼이 빠져 되묻습니다. "거기는 왜?" "식욕이 생겼어." 좋은 전조구나, 호연은 츄러스 천막에는 여명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노을의 말을 따릅니다. "왜 들어오시려 하십니까." "순찰중이에요." "이 안에는 저밖에 없는데요." 여명밖에 없음을, 순찰에서 돌아온 지 채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졸도할 지경일 여명임음을 알면서도, 둘은 천막에 다다랐습니다. 호연과 여명이 천막의 입구 천을 붙잡고 대치하고 있습니다. 노을이 달려들어 몸으로 천막을 뭉개려 합니다. 천막의 높이가 낮아집니다. "아악. 미안해. 열게!" 눈이 퀭한 여명이 보입니다. 순찰을 나갔다간 터벅터벅 걷던 도중 어느새 좀비가 되어도 아무도 모를 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아직 순찰 나갔던 복식 그대로, 옷조차 갈아입지 못한 차림입니다. 일단 천막을 열었으나, 여명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호연도 모르고 있습니다. 여명이 묻습니다. "그래서, 뭐 하러 오신 건가요."
  • 호연이 노을을 돌아봅니다. 오자고 말했으니 이유는 정해두었겠지요. 그러나 노을도 역시 멍해있는 상태입니다. 이 인분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됨을 느끼자, 노을은 일시에 정신을 차립니다. 발작하듯이 외칩니다. "츄러스를 내놓아라!" "저, 저기, 이거 장난이죠?" 여명이 호연을 보며 묻습니다. 천 한쪽을 꼭 붙잡은 채입니다. 호연은 망설이다 맞장구를 칩니다. "노을이의 말대로야! 츄러스를 내놓아!" "꺅." 여명이 뒤로 물러섭니다. 얼떨결에 호연과 노을은 천막 안으로 들어섭니다. 땅을 짚던 여명은 천막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밀가루 포대를 찾습니다. 그것을 두 진상, 노을과 호연 앞에 진상합니다. "여기에 어린 강도께서 찾으시는 츄러스가 있을 겁니다." "와, 정말이야?" 노을이 환하게 웃습니다. "숨겨놓은 츄러스가 없는지 보아야겠다. 가방을 압수수색하마." 어느새 노을보다 더 신이 나버린 호연입니다. "...네." 여명은 두 손 두 발을 모두 내려놓고, 피곤에 지쳐 이부자리로 기어 들어갑니다. 자신이 이 일을 내일 아침에 기억할지조차도 가물가물한 상태입니다.
  • 아포칼립스에 츄러스라니. 그러나 공무원 시험 준비에, 합격하고 나서부터는 주주주야비야비야비의 암호 같은 교대근무를 하다보니, 츄러스를 먹기는커녕 그것을 파는 공간 자체를 한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호연은 여명이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며, 노을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츄러스처럼 생긴 야구방망이를 찾았어!" 노을이 방망이를 꺼내 조심스럽게 휘두릅니다. 낚싯대처럼 낭창거립니다. 호연은 쓴웃음을 짓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들고가면 새벽이가 야구를 못하잖아." "글쎄. 앗, 이거 내가 준 모자야." 노을이 울상을 짓습니다. 노을이 준 모자가 가방 뒤편에 놓여있습니다. 순찰을 갈 때 쓰지 않았군요. 그리고 쓰지 않은 채로 납치까지 당해,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게 되었군요. 노을이 모자의 울분을 대리합니다. 호연이 동조합니다. "어머. 이건 새벽이가 나빴는걸." "벌로 야구공과 글러브도 들고가야겠다." "...어라? 응. 그래." 호연은 얼떨결에 노을이 넘겨준 글러브와 공을 손에 들고 맙니다. 둘은 여명이 엎드려 뒹구는 천막을 조용하게 빠져나옵니다. 야밤의 완벽범죄가 완성됩니다.
  • 호연은 자신의 품을 안절부절 못하며 내려다봅니다. 이것들을 서둘러 쓰지 않았다간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캐치볼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범퍼카 앞 공터가 낙점됩니다. 조금 긴 여로를 걷습니다. "옛날에는 선생을 꿈꿨는데." 호연이 경찰복을 내려다봅니다. 시선이 얄궂습니다. "지금 직업에 만족해. 꿈을 이루는 이야기도 아니고,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종말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더라고." "선생이라. 그랬으면 멋졌겠네." "그러게 말이야. 이제는 그런 꿈 없지만. 시간이 아까워. 사범대까지 갔었는데." 노을이 이유를 묻습니다. 호연이 노래를 중얼거립니다. 노을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사라진 놀이입니다. "옛날에 말이야, 마리아가 살았는데, 마리아가 마리아를 좋아했단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마리아가 말이야, 마리아가 죽었는데 말이야. 마리아가 몇 번 나왔는지 말이야, 한 번 맞춰보란 말이야." "뭐야 그런 정신 빠지는 문장은." 호연이 두 손을 들더니 허탈하게 웃습니다. 예시가 더 필요할까요. "이래서 안 된다는 거야. 어릴 떄는 몰랐는데, 난 세대 차이를 엄청 강하게 느끼더라고. 지나갔음을 느낄 때마다 진이 빠져. 선생을 못 할 체질이지."
  • 도착합니다. 노을을 세워두고, 호연은 몇 발 자국 더 걸어가 바닥에 가스등불을 내려놓습니다. 던지는 공을 잡을 수 있도록, 놓친 공을 뒤쫓을 수 있도록. 노을은 호연이 거리를 벌리는 동안 자기 등 뒤의 그림자를 가지고 놉니다. 팔을 듭니다. 그림자는 팔을 듭니다. 노을이 기뻐 웃습니다. 그림자는 웃지 않습니다. 노을은 하얀 숨을 들이쉽니다. 기억을 해보려 합니다. 자신이 꾸었던 꿈은 무엇이었던가요.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한 것만 같습니다. 숨겼던 것을 거의 털어놓았던 것만 같습니다. 노을이 잠시 눈을 반짝입니다. 그러나 곧 실소로 바뀝니다. 심도 있는 대화라니. 꿈에서 어떤 논의를 펼치든, 그것은 공상에 불과합니다. 불안에 휩싸입니다.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리라, 누구에게도 알아차려지지 못하리라,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신을 열심히 꾸미는 예언가가 되리라. 남의 말을 들어도 남이 들어줄 말은 하지 못합니다. 공을 받되 받을 수 있도록 던지지는 못합니다. 생각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이어집니다. 새로운 생각의 입가에 더 많은 피가 묻습니다. 더 큰 생각은 더 큰 비관을 뱉어냅니다. 현실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 노을은 "노을아, 받아." 호연의 말에 노을은 놀랍니다. 얼떨결에 공을 받습니다. 노을은 공을 되던집니다. 호연은 안정적인 자세로 공을 받습니다. 한 걸음씩 더 뒤로 물러섭니다. 원래 서로가 서있던 위치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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