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스레더즈에서 제3장과 외전까지 연재되었으며 사이트와 함께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제0장과 제1장을 찾았으므로, 기억을 되살려 나머지 내용도 복구할 요량으로 스레를 세웁니다. 앵커판에서 연재되었던 이상, 이 글은 저뿐만 아니라 저 외의 참가자들과 함께 만들어졌음을 알립니다. 설정 오류를 메우는 등의 이유로 내용이 기존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하로는 제2장부터 연재됩니다. 이하 링크의 제0장과 제1장부터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https://www.evernote.com/shard/s399/sh/9be6d940-2861-4aef-b13f-22ea5bce937c/6399a3b14b3d7897dc74d6a324881353 (제0장 + 제1장)
  • "이런 이치구나." 노을이 말합니다. "언니를 위해 새벽 씨의 생일잔치를 열었어. 새벽 씨를 위해 내 생일잔치를 열었어. 이제 나를 위해 언니의 생일잔치를 여는구나." "수레바퀴처럼." 새벽의 말이 구릅니다. "누군가는 깔려죽었겠지." GOOD END 1. 수레바퀴 아래서
  • >>197에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 새벽은 가던 길을 돌아 운동장으로 내려옵니다. 인파를 뚫고 그 맨 앞에 섭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호연이 분주해 보입니다. 채하는 차를 등지고 서있습니다. 차 안을 살펴보는 척 사람들의 눈길을 피합니다. 지프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뒤로 물러나 보실래요." 채하가 소곤거립니다. 사람들은 한시에 조용해집니다. 몇몇 사람들이 뒷걸음질을 칩니다. 채하는 바로 옆에 서있던 호연에게도 물러가라는 손동작을 합니다. 얼굴이 드리워진 그늘이 도드라집니다. 새벽은 의아함을 느낍니다. 역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갑니다. 고개를 들어 새벽을 바라다보는 채하의 눈빛엔 낙관이 한 점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불안해집니다. 새벽이 호연에게, 몸을 피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무엇을 하려고?" "그야 차는 훌륭한 연료니까." 새벽은 채하가 자폭을 시도하려 했음을 알아챕니다. 채하는 고분고분합니다. 원망과 수치, 회한과 자책이 넓게 펼쳐집니다. 자포자기한 심정인 것 같으면서도 정처 없는 결의가 엿보입니다. 이런 결말에 이를 것이었다면 없는 편이 좋았을 자유를, 감히 내치지 못하고 위태롭게나마 서있습니다.
  • 이틀 전에 다쳤던 다리를 아직도 접니다. 곤란한 기침이 터져나옵니다. 제대로 쉬지도 먹지조차 못했으니 몸상태가 좋지 않음이 당연합니다. 채한느 자신의 저는 다리를 보며 생각에 빠집니다. 유치원 시절에는 연극 무대에 올랐었는데.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도록 각광을 받고, 다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시하는 각본을 달달 외웠는데. 거짓말을 목발로 삼아 여기까지 왔구나. 연기는 끝장난 채로. 새벽이 또 다시 걸어옵니다. 채하는 자신의 생각이 움직이는 길을 봅니다. 피식 웃음을 짓고 맙니다. 새벽을 참으로 미워하였지요. 악의를 가득 품고 살았지요. 무력하게, 그러면서도 멍청하게 버텨왔지요. 사람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간직할 수는 있다면, 자신은 대체 무엇을 지켜온 것일까요. 채하의 눈앞에까지 걸어온 새벽이 묻습니다. "왜 그래?" 채하는 답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말하는 순간 새벽이 자신을 이해할까봐. 위로할까봐. 그러면 자신이 마음을 놓아버릴까봐. 종래는 피해자 행세를 하며 잘못을 덮어버릴까봐. 지금보다 더 못된 인간이 되어버릴까봐. 그러나 목은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하나인 목은 외로워 자꾸만 진실을 토로하려 듭니다.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다만 한 사람에게라도 비밀을 털어놓으면 안 될까요. 그러는 것이 그토록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요.
  • 채하는 고개를 옆으로 틉니다. 호연이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호연은 계속 노을의 편이어야 합니다. 채하는 돌렸던 고개를 그대로 앞으로 틉니다. 새벽이 보입니다. 채하는 희망을 걸어보자 합니다. 채하가 손을 뻗습니다. 새벽의 어꺠를 잡습니다. 부탁합니다. "내가 밉지. 하지만 삼십 분만 시간을 줄 수 있어? 값은 치를게." 새벽은 주위를 돌아봅니다. 자신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꾸로 자라는 고드름처럼 자리를 가만히 붙들고 있습니다. 호연이 한숨을 쉬더니 나섭니다. "자리를 비울 때가 아니에요. 인생에는 살아갈 때와 증언할 때가 있죠. 지금은 주위 경계를 철저히 해야 할 시점이에요. 잘못하면 몰살이죠." "이런 처지가 된 것이 누구 때문인지." 목소리가 들립니다. "대신 생존자도 합류시켰고 안전한 공간도 만들어졌죠. 잠시만 시간을 줍시다." 호연의 말에 결국 모두가 흩어집니다. 스탠드에 선 서장이 그들을 재촉합니다. 안심하며 호연은 뒤를 돌아봅니다. 봉에서 빠져나온 커튼처럼 새벽과 채하가 운동장 위로 허물어집니다. 호연이 놀라 그들을 흔듭니다. 미묘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채하의 이마를 짚은 호연이 혼잣말을 합니다.
  • 새벽은 눈을 뜹니다. 익숙한 공간입니다. 놀이공원입니다. 레일을 따라 휩쓸리는 사람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릅니다.관람차가 천천히 돌아갑니다. 따뜻한 저녁입니다. 모두 다른 목적지를 지녔음에도 질서정연하게 사람들이 이동합니다. 인파로부터 비켜서 온갖 소리를 듣습니다. 외동인 두 아이를 찾는 방송에서부터, 두 꼬마의 재잘거림까지. 새벽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길 반대편에 채하가 있었습니다. 새벽이 채하에게 걸어갑니다. 채하는 새벽이 도착하기도 전에 발을 뗍니다. 채하가 새벽을 이끄는 꼴이 되었습니다. 조용히 둘은 마지막 햇빛이 내려앉는 흙먼지 위로 신발을 얹습니다. "나는 꿈을 만들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어. 하지만 아무 꿈이나 만들 수 있는 건 아냐. 내가 체험해본 일을 기반으로 해야 해." 말하며 채하가 새벽을 돌아봅니다. 새벽은 멈추어섭니다. 멈춘 둘을, 돌 앞에서 휘어가는 물처럼 인파가 자연스럽게 피해갑니다. "네가 요근래 들어 꾼 꿈은 모두 내가 만든 거야. 내 경험이란 거지. 현실에서 직접 경험했단 것은 아니지만." "노을의 예지몽도?" "맞아." 채하는 마녀모자를 들어올리더니 벗어버립니다. 떨어졌던 모자는 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어 저 멀리 날아갑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채하가 겪지 않았는데도 꿈의 배경이 된 장소들이 있었잖아." 새벽은 채하의 말에 숨을 죽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꿈 속에서 들렀던 장소에는 어디가 있던가요. 고등학교, 새벽이 미아가 되었던 놀이공원, 노을의 집, 노을의 수학여행지, 새벽과 채하가 처음 만났던 산책로, 그리고 노을이 불타오르던 캠프파이어. 그러나 채하가 경험하지 않았을 것들이 있습니다.
  • "놀이공원에서 나와 만난 건 노을이었어." "알아챘구나. 노을이 말했지?" 채하가 웃습니다. "넌 그때 실종되었어." "채하는 실종됐지." 채하가 말을 받습니다. "그리고?" "노을이가 수학여행을 간 버스와 숙소도." "그렇지. 게다가 거기에는 노을이의 반 친구들도 있었지? 채하가 걔들과 같은 반이었을 리는 없으니." 새벽은 자신이 꿈속에서 만난 노을과 겪었던 일을 채하가 이상하리만치 잘 알고 있는 것이 미심쩍습니다. 그러나 다음 의문점을 제시하는 데 열을 올립니다. "노을이 불타오르던 캠프파이어도." "그럼. 노을이는 살았으니까."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잖아." "아니. 일어났어." 채하가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그리고 곧장 표정이 굳습니다. "예지몽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야." 새벽이 말을 잇습니다. "노을이 말하길, 바다에서 내가 보트를 타고 상어들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꿈이 있다고 했었어." "새벽이 그런 경험이 없다면 나 역시 없었겠지." 채하가 답합니다. 전혀 숨기는 기색이 없습니다. 배를 감싸쥐고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희미하게 웃습니다. 뒤돌아서 다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새벽이 채하를 뒤따라갑니다. 인적이 묘연한 천막으로 걸어갑니다.
  • 둘은 막사 안으로 들어갑니다. 천막은 어둡습니다. 채하가 빔프로젝터를 켭니다. 흰 화면이 바람에 물결치는 천막 위를 뛰놉니다. 채하가 그 앞에 병을 세워둡니다. 병이 조명이 됩니다. 채하가 뒤돌아 새벽을 마주봅니다. "하지만 다른 사례들은 왜 이상하지 않을까? 그야 당연하겠지. 내가 채하로 살았으니, 채하의 기억을 갖는 건 당연해." 채하가 천천히 벽면을 따라 걷기 시작합니다. 걸음이 가지를 치듯이 느릿합니다. 채하는 자신의 말을 계속합니다. "하나도 이상한 건 없다고 생각해봐. 내가 노을의 기억을 갖는 것이 당연할 가능성도 있겠지. 어떤 사례일까?" 채하는 새벽을 바라보는 대신 발걸음을 지속합니다. 새벽은 채하를 지켜봅니다. 채하가 유도하고자 하는 결론은 너무도 낮고 속이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물이 고이듯이 의도치 않았는데도 답을 찾고야 맙니다. 새벽이 입을 엽니다. "넌 노을이야?" 확신을 하지 못하면서도 말을 내뱉고 맙니다. 채하는 여전히 새벽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그저 순순히 고개를 조악댑니다.
  • 채하가 말을 시작합니다. 시계반대방향으로 천막을 빙빙 돌며. 오른손으로 벽면을 쓰다듬습니다. 손이 분필자루를 잡을 때와는 정반대로, 까맣게 더러워지고 말겠지요. "나는 노을이었어. 지금의 노을과 똑같이 행동했어. 좀비 사태가 일어났고 예지몽을 꿨지. 놀이동산에 가 새벽을 만났어." 채하는 기억을 더듬습니다. 벌써 3년 전의 일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어. 난 캠프파이어 날 죽었어. 꿈에서 너희가 보았던 노을이 나야. 언니가 모두를 설득했지." 6월 27일에 죽었지요. 언니가 설득했던 모두에는 새벽 역시 들어있었습니다. 채하는 새벽을 좋아했던 날을 떠올립니다. 6월 26일부터 27일. 언니에 대한 반감에서 피어올랐을 감정일 뿐이라고, 채하는 조소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낮의 버스 터미널에 있었지. 경찰에게 넘겨졌어. 거울을 보고야 알았어. 내 모습은 삼 년 전,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언니의 모습과 닮았구나." 채하는 떠올립니다. 자신의 모습이 언니와 완전히 같음을 눈치채고 말았던 때를. 그리고 집을 묻는 경찰에게, 자신은 실종됐으며 집은 어디라고 호수까지 정확히 말했던 그 파출소를.
  • 채하가 한숨을 내뱉습니다. 이제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할 차레입니다. 어리석던 나날들에게 작별을 하는 대신 짓밟아버리고 싶습니다. "타임 패러독스는 알지? 근본 없는 반복 패러독스라고 생각했어. 그저 내가 기억하는 언니의 행동을 따라하면 됐어." 채하가 노을을 죽입니다. 노을은 삼 년 전으로 돌아와 채하의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노을을 죽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시간여행을 다룬 많은 작품에서 택하는 소재이지요. "동생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신은 없다고 했지? 있더라. 시간이야. 두려웠어. 내가 언니와 다르게 행동하면 회복불가능한 큰일이 벌어지고 말까봐."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처럼 존재가 지워지거나, 아니면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일이 일어날까봐. 그래서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언니가 자신에게 했던 일을, 자신이 동생에게 반복하기. 삼 년 전에 자신의 이름을 뺏어갔던 가증스러운 언니를 모르는 척 따라하기. "모두 내가 겪었던 바와 똑같이 진행됐어. 그런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왜일까. 다른 결말로 와버렸네. 노을은 나처럼 죽지 않았어." 채하는 잠시 걸음을 늦춥니다. 아랫입술을 깨뭅니다. 과거를 떠올릴 때 되풀이되던 고통이 기억납니다. 자신은 마녀모자를 쓰고 타죽었습니다. 그런데 노을은 왜 죽지 않은 것인가요. 달라질 수 있는 현실이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요. 자신이 당했던 괴롭힘과 놀림을 그대로 노을에게 전했는데, 이런 상황을 맞아버린다면 대체 어떤 당위성을 확보할 수나 있는가요.
  • "도망쳤어." 묘목을 심듯 발을 옮깁니다. 다른 발을 옮깁니다. 채하는 강조해 말합니다. "너무 당황해서 도망쳤어. 지금까지 내가 쓴 삼 년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더라. 학교로 도망쳐 하루 고민을 해보았어. 그제야 다른 생각이 들었어. 아, 중요한 건 노을이 죽어 다른 세계의 채하가 되는 것이구나. 그러니 내가 꾸었던 꿈들이 짜맞추어 지더라고." 채하는 뜸을 들이더니 쏟아냅니다. 여전히 새벽을 보지 않습니다. "내가 왜 첫 순찰 날 죽던 예지몽을 꾸었을까? 그날 죽지 않았음에도. 그때 언니가 노을이던 시절이 있었겠구나 싶어졌어." 책상 위에 불편하게 누워, 콜록거리며 겨우 떠올린 발상이었습니다. "나는 첫 순찰 때 살아남았으니. 언니는 나를 그 다음 날 죽인 거야. 이유야 간단하지." 가변역사와 불가변역사. 오직 중요한 일만이 보존되면 됩니다. 중요한 사건만 되풀이되면 됩니다. 지켜지면 됩니다. "노을은 죽어 다른 세계의 채하가 된다. 그렇다면 노을이 죽는 일만 반복되면 됐던 거야. 그래서 나는 머지 않아 불타 죽고 말게 된 거지."
  • 채하는 발작하듯 웃어보려 합니다. 그러나 흥이 돋우어지지 않습니다. 무미건조하게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계속해갈 뿐입니다. 어조도 외견도 신경쓰지 못하고 다만 진실을 말하는 데에만 집중하며. "노을은 죽어 다른 세계의 채하가 된다. 이것만이 진실이야. 지금까지 무수히 반복되어 왔을 테니까. 나도 언니에게 죽었고, 언니도 언니의 언니에게 죽었겠지. 이게 계속되었겠지." 벽면을 긁던 채하가 멈춥니다. 천막을 잡아 뜯으려 합니다. 그러나 천은 질깁니다. 무게를 맡긴 채 숨을 고릅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생각해?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어. 3년을 언니처럼 살아왔어. 이제 와 달리 살아갈 수는 없었다고." 채하의 목소리에 습기가 차오릅니다. "새벽 네가, 내가 실제로 겪었던 바와 달리 소원팔찌를 넘겨주기 전까지, 난 언니의 전철을 충실히 밟아왔단 말이야." 여러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모조리 떠오르기도 전에 터집니다. 다만 모르겠다는 한 마디만이 머리를 헤집고 다닙니다. 어리석었습니다. 반복되었으니 반복되어야 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에, 과학의 탈을 쓴 미신에 속아 삶을 허비해버렸습니다. 자신이 겪었던 짓을 그대로 동생에게 물려주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을 때 자신은 열다섯 살에 불과했다는 것 외에는 변명할 거리조차 없습니다.
  • 무엇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노을이 커서 채하가 되고 채하는 노을을 죽인다. 그것 외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침묵을 고수할 수는 없습니다. 해야 할 말은 해야 합니다. 채하가 결국에는 새벽을 바라봅니다. 새벽은 지금까지 계속 채하를 지켜보는 중이었습니다. 최대한 당당해 보이려 애쓰며 채하가 입을 엽니다. "동정하지는 마. 난 이 결말을 골랐어. 내가 언니를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고 착각한 것에 불과해. 나를 버리고 산 죄값을 받으면 그뿐이야." 새벽은 생각합니다. 마녀 모자를 쓰지 않은 채하를 본 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삼 년을 모자 없는 모습만 봐왔는데, 어쨰서 근래 이틀을 보았을 뿐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되어버리고 말았을까요. 새벽은 채하에게 다가갑니다. 그러나 함부로 입을 열지는 못합니다. 대체 무엇을 말해야 말이 흉기가 되지 않을까요. 지금으로선 위로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산불을 일으킨 것 외엔 아직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고 일러주어야 할까요. 그 중립적일 말이 왜 이토록 기울어진 것 같을까요. 그러나 그 모든 고민이 무색해집니다. 새벽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말을 꺼내고 말았습니다. "힘들었지. 고생 많았어." 채하는 바닥을 내려다봅니다. 서럽게 울음을 터뜨립니다. 장애물이 없어 채하의 머리카락도 표정도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맙니다. 병 한 개 분량의 빛 안에서 새벽은 채하를 간간히 위로합니다. 채하의 어리석음은 유별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 정도의 어리석음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고. 방향지시등이 꺼진 것처럼 어둠이 찾아옵니다. 새벽은 밀쳐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눈을 감습니다. 눈을 뜹니다. 꿈이 깨집니다.
  • 양호실입니다. 새벽은 몸을 돌립니다. 노을과 호연이 입구 근처 의자에 앉아있었습니다. 건너편의 침대에 누운 채하가 보입니다. 채하도 막 잠에서 깨어난 모양입니다. 채하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봅니다. 수갑이 풀려있습니다. 자는 새에 호연이 풀었나 봅니다. 호연은 일어난 둘을 발견합니다. 채하가 누운 침대 옆에 섭니다. 간결히, 정말 용무밖에 없다는 것처럼 묻습니다. "괜찮니? 열이 나더구나." "절 미워하셔야죠." 채하가 말합니다. 호연이 고개를 도리질합니다. 채하의 눈에 빛이 감돕니다. "어른이거든. 싫어하는 상대도 좋아하는 상대처럼 대할 수 있어." 채하가 쓴웃음을 짓습니다. 손을 내려다봅니다. 양초 같은 노을의 시선을 피합니다. "많은 것은 바라지 않으마. 그래도 이유만은 듣고 싶구나. 어쩌다 마녀가 됐니? 왜 노을을 죽이려 거짓말을 했니?" 호연이 칼을 빼어들듯 묻습니다. 채하는 천천히 반응합니다. 거짓말을 생각하나 봅니다. 그러더니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는지, 한 단어씩 또박또박 뱉어냅니다. "전 계속 마녀였어요. 무수히 많은 시간을 채하로 살아오며 노을이를 죽였어요. 노을을 죽이면 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갔죠. 채하이기 전의 시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에요." "그렇다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줄은 알지?" 호연이 뒤에 노을을 감추고 묻습니다. 노을은 새벽을 바라봅니다. 새벽은 씁쓸하게 손을 흔듭니다. 새벽으로서는 간섭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채하의 선택이라면. 채하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입니다. "네. 우리는 자유로워야만 하니까요." 채하를 덮은 이불은, 악의 한 톨도 막지 못할 만큼 얇디 얇아 보입니다. 새벽이 눈을 돌립니다.
  • 호연과 노을이 양호실을 나갑니다. 새벽이 일어나 신발을 신습니다. 채하에게 다가갑니다. 채하는 풀이 죽은 얼굴입니다. "노을일 적에는 호연 언니에게 의존했어. 경찰 씨, 경찰 씨 부르며 따라다녔지. 나는 모닥불에 타죽도록 내버려두었으면서도 노을이는 잘만 지켜주는구나. 나도 노을이었는데." 채하의 말에는 원망보다도 회한이 가득합니다. 어리광을 부리는 느낌이 강합니다. 새벽이 묻습니다. "왜 진실을 안 말했어?" "나를 안타까워할 수도 있잖아. 차라리 이쪽이 더 나아." 채하는 하얀 이불을 내려다봅니다. 언니로부터 배웠던 노래들을 떠올립니다. 죽기 직전에야 개사된 가사 전체를 알 수 있던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에서부터, 엘루이즈의 미성년, 그리고 show me where it hurts까지. 거의 모든 가사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창단원 같다는 마지막 것의 가사만을 빼면. 하지만 하루 사이에 모든 것이 뒤집혀버렸습니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이 거짓인 것만 같습니다. 채하는 고개를 듭니다. 문이 열려있습니다. 새벽이 양호실을 나갔습니다. 새벽이 호연과 노을을 따라잡습니다. 새벽이 숨을 돌립니다. 호연이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멈추어 뒤돕니다. "전할 말이 있어?" 있습니다. 채하가 거짓말을 했다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그러나 채하가 말하지 않은 것을 자신이 말할 권리가 있을까요? 단지 채하가 일러주었단 이유만으로? 새벽은 망설입니다. 노을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호연 누나는 항상 노을이의 편이 되어주세요."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호연이 풋,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럼. 안 그래도 그러고 있잖니." 채하로 개명되었던 노을이 다시 개명되기 전까지, 잠시나마 동생은 채하로, 언니는 노을로 불렸을 것입니다. 채하가 보여준 꿈 속에 명백히 있던 장면이었지요. 새벽은 지금의 채하 역시 한때는 노을이었다 이르는 대신, 이런 차선책만을 고릅니다. 뒤돌아섭니다. 노을이 새벽을 부릅니다.
  • "잠시 뒤에 생일파티를 열 거야. 준비를 부탁해놨어. 2학년 1반 교실로 언니를 데리고 와." "파티?" "언니 생일파티를 못 했잖아. 지난 토요일이었는데." 노을이 웃으며 답합니다. 생일잔치에 참석하기 전, 새벽은 잠시 교정을 돌아다닙니다. 창가에 기댄 여명을 만납니다. 담배를 피지 않는데도 세상에 정신을 뺏긴 모습입니다. 여명이 새벽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잔치가 있다는 말은 들으셨죠?" "내가 가서 뭐하겠니." 여명은 창밖으로 말합니다. 목소리가 쓸쓸해집니다. "미안했다. 멋대로 동생 노릇을 시키고, 멋대로 내버려서." 새벽은 답하는 대신 여명의 어깨를 주무릅니다. 여명은 퀭한 눈으로 밤을 쳐다봅니다. 눈에 의아함이 서립니다. 그러나 교내는 충분히 혼란스러우니 괜히 말을 더 보탤 필요는 없겠지요. 여명은 달도 없는 밤을 봅니다. 그러더니 생일 잔치가 어디서 열리냐고 묻습니다.
  • 교실로 가니 복도에 민기와 설기, 연화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교실 안쪽을 보니 왕좌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셋이 혹사하고 말았나 봅니다. 새벽이 그들을 천천히 교실 안으로 유도합니다. 셋은 교실에 들어옵니다. 벽에 나란히 기댑니다. 노을과 채하가 서로 데면데면해하며 주위를 돌아봅니다. 문이 열립니다. 호연과 여명이 케이크를 들고 왔습니다. 새벽이 가방을 뒤져 생일초를 꺼냅니다. 채하의 나이에 맞추어 초를 꽂습니다. 여명이 양초에 불을 붙입니다. 양초 두 개를 양쪽에 세웁니다. 불이 환하게 타오릅니다. 채하가, 호연이 급조한 고깔모자를 씁니다. 모자가 떨어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 채하를 보며 웃으며, 나머지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합니다. 생일 축하 노래가 시작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박채하. 생일..." 아기 울음소리에 노래가 끊겨버립니다. 일행이 놀라 일제히 시선을 돌립니다. 앞문에 서장이 아기를 안고 와있습니다. 호연의 늦둥이 동생입니다. "서장님, 조심하시지!" 호연이 탓합니다. "아니에요." 채하가 조심히 호연을 말립니다. "전 오히려 기쁘니까." 선물을 줄 시간입니다. 새벽은 가방을 뒤지다가 머그컵을 꺼냅니다. 노을이 새벽에게 달려듭니다. "내 선물이잖아!" "마음이 담겼잖아." "마음은 나도 줄 수 있거든." "네 마음을 대신 전해주잖아." 쳇, 노을은 삐져서는 호연 뒤로 총총 숨어듭니다. 머그컵을 손에 든 채하가 새벽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선물을 돌려받았다고 이릅니다. 삼 년 전에 주었던 선물을 이제야.
  • 생일 잔치가 끝났습니다. 2학년 1반 창틀에는 롤러코스터가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선두에는 채하가 탔습니다. 그 뒤로 호연과 여명이 타고 있습니다. 도시를 순찰하는 용도입니다. 서장의 부탁 떄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채하가 끼친 피해는 불을 낸 것 하나뿐이니, 그 불을 서둘러 진정시키고 그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우면 된다 하였습니다. 채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채하가 지도를 내려다봅니다. 호연과 상의합니다. "우선 불부터 끄러 가죠. 그 뒤에는 도시 전역을 돌며 좀비를 없앨 거에요." "이런 능력이 있으면 진작에 썼어야지." "도와달라고 안 했는데 나타나는 영웅은 교만하죠." 옆에서 설기가 끼어듭니다. 아직 출발을 하지 않았습니다. 민기와 설기, 연화, 서장이 창가에 나란히 서 그들을 배웅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설기의 말에 호연이 웃음을 터뜨립니다. 채하는 나아갈 길을 봅니다. 하늘이 보입니다. 별빛이 총총합니다. 웃기지 않나요. 사람을 세울 수도 없고 손으로 잡아챌 수도 없는 머나먼 공간입니다. 소원을 아무리 빌어도 망가뜨립니다. 어두워 표정을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요. 마치 스노볼처럼 간섭할 수도 없는 저 세계가 왜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도 용서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질까요. 잘못된 바람을 가졌던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일까요. 채하는 자신이 제기했던 의문을 떠올립니다.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요. 그러나 현실에서의 잘못은 현실에서 고쳐야 할 것입니다. 관념 속에서, 자신만이 만족하는 답변을 내린다면 차 안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가로등 밑에서 찾는 격이겠지요. 채하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쉽니다. 형태도 없는, 채하가 아닌 것이 채하를 채웁니다. "가볼까요." "나 데려가!" 채하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립니다. 굉음에 호연의 늦둥이 동생이 또 놀라고 맙니다. 서장의 품에서 다시 울음을 터뜨립니다. 서장이 급히 아기를 어릅니다. 문가에 서있던 노을이 잠시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옵니다. 아기를 내려다봅니다. "울지마." "자연스러운 거야. 내버려둬." 설기가 말합니다. 채하를 향해 돌아봅니다. 어서 노을의 말에 답하라는 압박이 느껴집니다. 채하가 노을을 보며 말합니다. "어서 가자." 노을이 롤러코스터 위에 올라탑니다.
  • 롤러코스터가 출발합니다. 행선지를 모를 경로를 따라갑니다. 학교에는 사람들이 남습니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봅니다. 그 밑 층 교실에는 새벽이 있습니다. 역시 하늘을 바라보는 중입니다. 노을이 막 나갔던 문으로 바람이 쏟아집니다. 교실에, 새벽은 잠옷을 입고 서있습니다. 끝을 맞을 때에야 적합할 맑은 공기입니다. 이틀 이상 해가 뜨지 않았을 때에만 허용될 경계 없는 어둠이 운동장을 채웁니다. 떠난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어둠엔 무게가 없으니, 버거워하며 소리를 지를 이유 역시 없습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새벽은 듣습니다. 속으로 낭독한 구절을 잊을라 금세 입밖으로 냅니다. 새벽 기도를 하는 간절함이 비칩니다. 하늘에는 떠나가는 사람밖에 없으나, 별 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자장가 같이 고요합니다. 또박또박 정확한 음정을 찾습니다. 모두 끝났음에도 자라날 뼈가 있다는 듯 조용히 울려퍼집니다. 새벽은 귀를 연 채 눈을 감습니다. 잠에 눌려 점차 중얼거림이 작아집니다. 노래가 끝났습니다. 잠에 빠지는 새벽의 위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라. 저쪽이 밝아오는걸." "산불이야. 바보 오빠." "아니. 동서남북. 저긴 동쪽이잖아." "서쪽이거든. 여기가 오른쪽이야." "아니야. 해가 뜬다니까. 사흘 전의 노을 이후로, 처음 찾아오는 새벽이야." 설기와 민기는 끝까지 승강이를 벌입니다. "그래봤자 밤은 또 오거든요." "이제 버티는 법을 알잖아." GOOD END 2. 스노볼
  • 제3장이 끝났습니다. 기억 탓에 예전과 많은 부분이 바뀌었네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 있던 설기와 민기의 대화는, 올리기 직전에야 기억해냈습니다. 읽어주셔서, 그리고 이 이야기를 만들어주셔 감사합니다. 내일부터 짧은 외전을 적고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 제?장 '소원팔찌' 1 선물로 책을 받았다. 수레바퀴 아래서. 막 배포했던 게임에 나온 장면을 따라했음에 틀림없다. 새벽은 이런 데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속에는 모르는 문장이 연필로 적혀 있었다. 신은 인간을 듣지 못한 척한다, 고. 어디서 베껴왔느냐 따지니 시에서 따왔다고 자백받았다. 최백규의 시이며 제목은 '너의 18번째 생일을 축하해'라 하였다. 검색해본 뒤에야 진짜인 줄을 알았다. 잔치를 정리하고 침대에 눕자 동생이 내게 덤비어 왔다. 이틀 후는 일요일이었으며, 그 이전에 새벽의 생일이었다. 놀이공원에 가자며 투정을 부리던 동생을, 옆집에 살던 새벽을 데려와 겨우 말렸다. 노을의 친구까지 넷이 놀러가기로 확약을 했다. 노을의 친구의 이름은 연화인데, 나는 착각해 게임 상의 이름을 월하라 잘못 입력한 전적이 있었다. 노을이 반응을 알려주었다. 머리카락이 떨어지듯 소소히 자책하며 수정을 끝내고서야 의문이 들었다. 노을에게 물었다. 자기를 허락도 없이 게임에 넣은 것엔 별 말이 없었느냐고. 노을은 답했다. 어차피 이름만 빌렸을 뿐이 아니냐고. 자기 전에 한 번 더 게임을 켜보았다. 조악한 창작물이다. 납치를 막지 못했을 때와 누적된 점수가 얼마 이상일 때는 배드엔드가, 산불이 났을 때 노을을 고르지 않으면 노멀엔드가, 그 뒤로는 굿엔드가 나오게 만들었다. 연필로 그린 것 같은 웃음을 지어봤다. 꺼진 화면에 비치는 나는 그림자와 닮았다. 노을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림자에게 고백해 보았다. 내 시야에서 사라진, 그리하여 달라졌을 사람들을 많이 보고 싶다. 말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처럼 공중에 번지더니 떠나 버렸다.
  • 2 모두가 자유이용권을 손목에 찼다. 노을의 소개로 연화를 만나기는 처음이라 점잖은 태도를 취했다. 노을의 말에 따르면 연화는 내가 만든 게임에 많이 파고들었다 했다. 게임 상에서 노을과 새벽이 7년만에 서로를 찾는 건 어린왕자가 거친 일곱 별의 비유냐고, 어린왕자 영역본에 딱 두 번 나오는 tie와 주연 세 명의 관계는 일부러 연동시킨 것이냐고 물어 나를 당황시켰다. 아니라는 답변을 듣더니 왜 굳이 어린왕자를 패러디했는지 물었다. 내가 적은 것이 아니므로 내가 작품을 모두 알지는 않는다고 조용히 타이르는 수밖에 없었다. 나들이는 나름 쑬쑬했다. 기념품 가게에 가 돈을 탕진했다. 중간에 엇갈리기도 하였다. 그 탓에 관람차에 올라 보이지 않는 새벽과 노을을 찾아야 한적도 있었다. 관람차 안에서 연화는 게임 이야기를 했다. "오래 걸렸죠? 일 년보다 많이?" "더." "왜 만든 건가요?" "노을이의 열네번째 생일 선물로 주고 싶었어. 늦었지만. 생일선물이 아닌 선물이 되고 말았지." "그게 일주일 전이었군요." "뭐. 내 생일이 오기 전에만 주면 됐으니. 아슬아슬하긴 했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사람들이 25일을 걸어다녔다. 그중에 범퍼카를 기다리는 줄을 선 새벽과 노을을 기어코 찾았다. 찾고도 내려가기까지, 문이 열리기까지 20분을 꼬박 기다려야 했다. 관람차는 느리게 돌아갔다.
  • 3 "어쩌다 이런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내가 만들지 않았어. 우연이야. 다른 사람들이 내게 준 것을, 내가 내 밖으로 돌려주었을 뿐이야." 게임이 아니더라도 많은 것이 비슷한 논리를 가지겠지. 식사를 먼저 마친 노을과 새벽이 야구공과 글러브를 갖고 먼저 일어섰다. 관람차 앞의 넓은 공터에서 캐치볼을 하겠다 하였다. 둘의 손목에는 기념품 가게에서 산 소원팔찌가 자유이용권 위로 흔들렸다. 매듭이 끊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던, 아주 튼튼하게 만든 팔찌였다. 둘은 문을 잡아주며 나란히 떠났다. "행복해. 일 하나를 끝마친 탓이기도 하고, 별 일 없이 매일매일이 흘러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다는 사실이 가장 커." "저 둘은 잘 지냈죠. 알겠지만, 금요일에 비가 왔을 때는 저 형이 노을을 배웅나왔더라고요." "내가 부탁했어. 노을은 우산을 종종 잊으니." 쇠 포크를 냅킨 위에 올려놓았다. 색이 짙어졌다. 일어날 시간이 되었으니 동물원 쪽이나 둘러보아야겠다 공상하며 지갑을 뒤지고 있으니, 갑자기 연화가 내게 짐짓 진지하게 물어왔다. "게임 설정에 조금 구멍이 있어 보였어요." "난 최선을 다했어." "언니가 동생을 죽이고, 동생은 다른 세계의 언니가 된다는 설정이죠?" "그게 반복되지." "동생이 예지몽을 꾸는 것은 언니가 꿈을 만들었기 때문이고요." "언급했지." "언니가 그 꿈을 만드는 것은 그 장면을 예지몽으로 간접 체험했기 때문이라 했어요." "맞아." 연화가 스탠드처럼 턱을 괴었다. 손을 찌르려는 물레를 쳐다보는 어린 황족처럼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난 물을 들이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 4 "동생을 죽이는 언니는 한때 동생이었어야 해요. 영원히 거슬러 올라가죠." "시작점을 알 수 없다는 거구나." 잠잠한 척하지만 꽤 큰 설정오류라고요, 라며 연화는 턱에 괸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찔렀다. "일렬로 늘어서면 문제가 생기죠. 뭐, 게임 속의 이야기라 말하는 거지만, 설정오류를 해결할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요." "그런 방법이 있었니?" 나는 잔잔하게 놀랐다. 조금 추워 가게에서 사들였던 퍼즐상자를 꼭 껴안아야 했다. "원형이라면 문제가 없죠." "원형이라고?" 꼭 관람차처럼. "네. 선형이면 끝이 있어야 하니 무한히 거슬러 가야 하잖아요? 하지만 원형이면 많은 세계가 필요하지도 않아요. 네 개면 해결돼요." 연화가 종업원에게 부탁해 영수증과 볼펜을 받았다. 뒷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굿엔드가 아닌 엔딩이 총 세 개였죠. 납치되는 엔딩. 불에 타는 엔딩. 노을이 숲속의 공주처럼 영원히 잠드는 엔딩." 연화는 나침반 같은 원을, 그리고 동서남북 네 방향에 네모를 그렸다. 시계반대방향으로 1부터 4까지 번호를 매겼다. "세계 1은 배드엔드1이 일어난 세계라 하죠. 세계 2는 배드엔드2가 속한 세계. 세계3은 노멀엔드로 끝난 세계." 나는 말없이 잠자코 들었다. 연화가 머뭇거리더니 참견했다. "참. 노멀엔드가 그냥 엔드로 표시되더라고요. 번호도 무엇도 없이. 고치셔야죠." 고개를 떨어뜨리듯이 끄덕였다. 연화는 볼펜을 손에서 놓았다. 나를 바라보았다. 질문을 바라는 것 같았다.
  • 5 "그렇다 치자. 정말로 해결이 되기는 하는구나." 시작점이 없다. 한정된 세계만으로도 무리 없이 돌아간다. "굿엔딩은 이 루프에서 벗어나는 결말이 되네." 옅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간단하고도 명료한 해법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마리가 될 수 없음은 알고 있다. 나는 따지고 드는 대신에, 왠지 모르게 기대에 찼던 자신을 비웃으며 그렇구나, 하고 손을 저었다. 연화는 나를 보더니 볼펜을 다시 집었다. 아직 더 적을 것이 있나 보다. "더 흥미로운 가설도 있어요." 나는 그제야 빈칸을 보았다. 세계4에 대한 설명은 아직 없었다. 세계1의 동생은 세계2의 언니가, 세계2의 동생은 세계3의 언니가, 세계3의 동생은 세계4의 언니가 되는 구조다. 저 빈칸을 채우지 않고 이리 뜸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궁금스러운 표정을 짓자 연화는 말할 기력이 나나 보았다. "이전 세계의 동생이 다음 세계에 있을 일을 간접체험하기만 하면 되죠. 그 수단이 꿈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꿈이 아니라니." "흥미롭다고 한 이유가 여기 있어요. 재미삼아 하는 것이지만 우리 이야기거든요. 세계4는 우리가 있는 여기에요." 나는 세계3과 세계4를 이은 곡선을, 개미를 눌러 죽이듯 지긋이 내려보았다. 연화는 시계를 고칠 때처럼 조심스러워 했다. "세계4의 동생은 예지몽을 꾸지 않아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체험할 방법을 갖고 있죠."
  • 6 "간접체험이라면." "네. 게임이죠." 말을 줄였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식당에 들어왔다. 연명하기 위하여. 난 수확되지 않은 과실 같이 종이 위에 뚝뚝 떨어졌다. 연화는 볼펜을 지시봉처럼 들고 설명했다. "세계3의 동생은 죽어 세계4의 언니가 되었다. 해피엔딩을 바라며 굿엔드를 넣은 게임을 만들었다. 루프에 갇혔던 언니를, 그리고 무수히 많았을 노을을 추모하기 위해." 연화는 침을 삼키듯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 게임도 비극의 일부였다. 해피엔드를 단지 꿈꾸기만 했으므로 실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세계4의 노을은 사고로 죽어 세계1의 언니가 되었고, 게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 우리는 시간에 역행하는 수레바퀴처럼 계속 앞뒤로 밀려간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비틀었다. 그러더니 너무도 진솔한 웃음을 지었다. "어때요? 쯔꾸르 게임 뒤에는 뒤풀이 방이 있잖아요. 후일담인 척 넣어보는 거예요. 요즘 게임은 다 이렇게 경계를 부수죠." "난 지금 결말이 좋다고 생각해." "재미인걸요. 현실도 아닌걸요." 악의가 없는, 오히려 나를 도우려 드는 행위였다. 아득하였다. 너는 내가 적은 세계에 어떤 권리도 없다고 말하려다, 그가 자신을 게임에 쓰는 것에 동의했음을 깨달았다. 난 그에게 작은 빚을 졌다. 궁금해져 물었다. "참. 난 널 무단으로 넣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왜 화를 내기는커녕 이렇게 열정적이니?" "누구나 창작물 속의 인물이 되어보길 꿈꿔요." 단지 그뿐일까. 종이 위에 떨어진 내가 일부러 낸 흠집처럼 뭉그러졌다.
  • 7 연화를 먼저 놀이공원 입구에서 떠나보냈다. 등산을 가셨던 부모님을 데려왔다. 게임과 달리 모두가 같은 집에서 배려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보다 더 나은 행복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폐관시간이 이만 다가왔다. 부모님은 경찰서로 가셨다. 난 새벽의 가족과 동행해 저녁을 얻어먹고 그의 집에 갔다. 잠시 머물게 될 것이었다. 새벽은 어쩌면 내일, 우리가 증언을 하러 나가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미 간단한 사정을 모두에게 전한 후였다. 화장실에 간다고 야구글러브를 벗어놓고 자리를 비웠다고. 이것보다 더 자세히 할 말이 없는데 대체 무엇을 더 증언해야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새벽은 방을 나갔다. 나는 모처럼 고마울 것을 찾았다. 난 내 표정을 볼 수 없다. 이것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8 문을 열고 나왔다. 문짝이 속눈썹처럼 거칠거칠해 눈살이 찌푸려졌다. 거실에는 새벽의 일가족이 모여 퍼즐조각을 짜맞추고 있었다. 사람도 조각도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퍼즐판 위로 좁게 길이 나있었다. 거의 다 끝난 참이었다. 무엇도 보탤 것이 없을 것임에도 뒤늦게 합류했다. 몇 조각 남지 않자 새벽의 아버지가 퍼즐을 고정하자고 말했다. 일가족이 덤벼들어야 해결될 퍼즐을 또 뭉개지 말고, 아예 액자처럼 전시해버리자고 했다. 모두가 동의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퍼즐 한 조각이 끝내 보이지 않았다. 옷가지를 다 들어보아도 없었다. 가운데에 뻥 구멍이 나버리고 말 지경이었다. 발상이 떠올랐다. 우리집으로 갔다. 노을이 쓰던 크레파스를 찾았다. 종합장을 한 장 뜯어 돌아왔다. 커버의 그림을 참조하여 비워진 조각을 그렸다. 가위로 잘라 빈칸에 채우니, 가짜인 티가 역력히 나면서도 꽤 볼만 하였다. 퍼즐은 그대로 고정됐다. 한 조각이 가짜 조각으로, 내가 그린 조각으로 채워졌다. 몇 시간만 있으면 벽면에 안심하고 걸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일단 과업 하나를 달성했으므로 모두가 웃어보았다. 그 새에 더 큰 것을 잃어버리진 않았는지를 고의로 잊으면서. 아무도 못과 망치를 찾지 않았다. 어서 접착제가 마를 시간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대로 퍼즐이 고정되어버리기 전에 실종된 노을이 돌아와야 했다. 그러면 이곳의 모두가 서둘러 집을 뛰쳐나오는 통에, 저 퍼즐은 다시 엉망이 되리라. 그래서 다시 맞추어야 하게 되리라. 시간이 흐르고 접착제는 굳어갔다. 내가 그린 가짜 그림이 포함된 채 정겨운 산과 강의 풍경이 메말라갔다. 새벽이 문득 말을 걸었다. 다시 게임을 만들어볼 것이냐고.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나는 답했다. 난 진실을 속에 품은 거짓이 아니라, 단순한 거짓을 만든 채 만족했을 뿐이었다.
  • 8.1 퍼즐이 굳었다. 벽에 걸린 퍼즐은 아름다웠다.
  • 어림잡아 14만자. 결국은 끝났네요. 이제야 원래대로 돌려놓았네요. 설정비화가 남아는 있으나 여기에까지 올릴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마음 가시는대로 완결된 이들의 세상살이를 돌아봐 주시길 바란다는, 마지막 설정비화의 문장만으로 압축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제0장, >>10의 '승패를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승리한 것일까요'는 기형도의 '노을'을, >>20의 '뼈가 자라는 소리'는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첫 설정비화에서 이들을 밝히며 노을의 이름이 결정되기도 전에 노을이 불린 것과, 허공의 아이들과의 공통점이 많다는 점이 신기하다고 말했었죠. 제 것이 아닌 글은 돌려놓습니다. 깔끔히 정리할 시간이지요. 혼자가 아닌 여럿이 모여 적히는 이야기가 어떤 모양일지 궁금했습니다. 본 적이 없는 플롯을 적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선물 받은 제게 과분한 글을 드디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놓습니다. 이전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인물들의 나흘살이에 참여해주시고 읽어주셔 감사했습니다.
  • 수고하셨어요 드디어 끝이 났네요 여기에서 다시 보게되어서 반갑고 어리둥절하면서 엄청 기뻤어요! 천천히 정독해야지 ㅠㅠㅠㅠ 감사합니다!
  • 갱신
  • 진짜 열심히 참여했었고 다시 적느라 수고했어 고마워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을게 앵커판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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