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우중충한 날씨다. 머리맡의 약정이 해지된지 오래된 폴더폰을 열어보니 오후 2시임애도 불구하고 하늘엔 빛 한점이 내리쬐지 않는다. 그저 티끌하나 묻지않고 맑게 흐리다면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 나는 스물 여섯살 김하늘. 시외 변두리 옥탑방 원룸에 살면서 인생의 재미라곤 말미 끝도 찾아보기 힘들다. 늘 힘들고 늘상 그늘에서 쉬고싶다. 인간의 본성은..., 아니 모든 동물의 본성은 지칠때로 지친 상태에서 잘못된 선택임을 알고서도 그릇된 선택을 하곤 한다. 그게 나일 것이다.
  • 항상 모든 동물들은 힘들고 괴로우면 더이상 구태여 괴롭힘을 받지 않을 상태로 자연스럽게 도피한다. 이건 지극히 정상이고 당연스러운 일이다. 맞다. 물론 내 핑계다. 나는 지금 긴 옷걸이 봉에 로프를 매달아놓고 장고 하고있다.
  • [아니 제발, 몇십 분 동안 고민하고 있으면 아무나라도 좋으니 문좀 두들겨 달란 말이야.] 한심하게 혼자 포효하듯 말하고서는 다시 한번 죄책감에 시달린다. 친구도 없고, 부모님은 작년에 돌아가셨으며 직장도 없고 학교도 다니지 않는다. 나에겐 지금 모든게 무의미하다.
  • 화장실 거울을 본다. 옷은 란닝구에 바지는 한심한 사각팬티. 얼굴은 그나마 훤칠하지만 떡져버린 머리. 그리고 누런 이빨까지. 당연히 친구도 애인도 없을만 하다. 물론 수도꼭지를 돌려도 물은 나오지 않는다.
  • 열아홉때 까지만해도 학우가 참 많았고 남 부러울 것 없이 살아왔다. 스무살에 대학에 갓 입학하고 그저그런 지방대에 다니다가 군대에 가고 복학. 복학 이후에 게임에 빠져 게임만 하다 부모님과 사이도 틀어지고 대학교에서도 아싸생활. 결국 어중이떠중이로 지내다가 유급받고 낙심하여 자퇴 결정. 내가 한심하게 느껴져서 연락오는 동창생들 마저 전부 수신거절. 내가 나를 스스로 수렁에 빠트리고 있었다.
  • 알바라도 해볼까 싶어서 프리터로 직업을 결정하려던 와중에 이러쿵 저러쿵 뭐 맞는 일이 없다는 핑계로 결국 25살. 아마 그 해 가을에 부모님이 차사고가 나셔서 돌아가셨지. 물론 나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이 걱정 되셔서 지방까지 내려오시다 역주행 차량에 의해 그 자리에서 두분 다 즉사. 물론 한심한 난 그 자리에서 오열하며 땅을 쳐보아도 그냥 그대로. 인간 하나는 그저 나약한 생명체임을 깨닫게 된 순간 이었다.
  • 타온 보험금으로 반년 간 흥청망청 놀다가 결국 궁지에 몰려서 옥탑방 생활을 하다 지금 봄, 자살을 고민중.
  • 자살의 징후는 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일단 주위의 모든 사람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날 져버리고 먼저 떠난 부모님 탓. 심하게 구타하여 여전히 후유증을 남긴 군대 선임 탓. 날 찾지 않아주는 친구들 탓. 날 짤라버린 알바처 사장 탓... 그러고 나면 2단계로 그냥 나 자신을 탓하고 한탄한다.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음을 지각하고선 그냥 나 하나 사라지면 이 악굴레가 다 끝날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저 현실 도피일 뿐이다. 인간의 그릇된 습관이다. 힘들고 지치면 도피하는거. 하지만 저급한 나로썬 이게 내 최선의 노력인데 뭘 어쩌겠는가.
  • 한적하게 있다가 너무 더워졌다. 아직 초여름이거나 봄인데도 이렇게 덥다니, 심지어 에어컨 까지 없다. 더군다나 여긴 옥탑방 열기가 땅에서 스물스물 아지랭이가 되어 올라온다. 그러다 문뜩 선풍기가 생각나 창고의 짐 상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역시 있구나.]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 찾아낸 것은 완전히 '고장이 나버린' 선풍기 였다. 땀을 흘릴때로 흘려서 실신하기 직전인데, 심지어 수도꼭지에선 물도 나오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간 그냥 열사병으로 죽을거 같아서 일어서는데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곤 창고를 비틀거리며 벗어나는데 바지 허리춤에서 편지종이가 하나가 떨어졌다. 엉성하게 만든 편지종이. 그 편지종이의 꼭다리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서민주'
  • 그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한가하게 편지를 열어보기로 했다. 이래봬도, 학생때는 외모가 수려해서 인기가 꽤나 있었었다. 물론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아무짝에 쓸모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지만. 이 역시 러브레터 겠거니 하고 열어보았다. 한심하고 초라한 인생인 내가 이 순간만큼은 그나마 자아 승리감에 고취되는 얼마 안 되는 소중한 순간이다. 물론 많은 러브레터를 내 인생을 비관하며 버린지 꽤 됐지만, 이건 끼어있던 탓인지 남아있는 모양인가 보다.
  • 생각과는 다르게 내가 고백하고 그에대한 답장이었던 것 같다. 편지에는 장문의 예쁜 글귀가 적혀져 있었으며, 아주 호감적인 내용이었다. 정말 행복하다느니, 좋다느니 기쁘다느니..., 보고있는 나도 덩달아 흐뭇해져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보아하니 서민주는 중학교 친구였던걸로 기억하는데, 분명 내가 좋아했던 기억은 있는데 이 편지와 얘랑 사겼는지 그 이후는 어떻게 됐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 민주는 예쁜 외모로 그 당시에 인기가 많았고 나 또한 꿇리질 않을 인기라 고백했던 것으로 기억이.... 날 듯 하지만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냥 방금 저 말은 내 얼마 안 되는 학창시절 기억속 일부를 끼워맞춘 것이고, 그러고보니 민주한테 고백을 했었나?? 편지를 보니 아리송하게 이것저것 고민이 많이 된다.
  • 조금 생각하다 보니 금세 온 몸은 뜨겁게 달궈져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물론 죽으려고 로프를 매달아 놓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민하던 나였지만 이런식으로 죽기는 싫다. 편지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서는 그대로 계단을 내려와 동네 대형마트로 생각없이 걸어나가기로 한다.
  • 걷는동안 좁디 좁아 터진 동네라 서로 안면을 어느정도 알고있는 동네 아줌마들이 날 보고 수군거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워낙 익숙하던 터라 재빨리 발걸음만 재촉한다. 금방 대형마트에 도착했고, 체험용 안마의자에 앉기로 했다. 피로가 풀리고 눈좀 붙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주'의 목소리였다.
  •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다 보니, 역시나 고운 외모에 케쥬얼 옷을 입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마트를 쏘다니는 듯 하다. 순간적으로 보자마자 나는 얼굴을 붉히며 잘못한 꼬마마냥 그 자리에서 일어나 총총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중학교 고교 시절 그 민주가 맞다. 편지를 주머니에서 슬며시 꺼내 뿌듯함을 얻는다. 물론 한심하지만 어쨌거나 저런 여자가 한 때는 내 고백을 받아줬다고 생각하면 자신은 얼마나 뿌듯하겠냐.. 어쨌거나 민주를 쭉 지켜보기로 한다. 관음증 변태마냥 잡혀갈 만한 차림새에 기둥뒤에 숨은게 너무나도 수상하지만 뭐 나는 괜찮다. 어차피 죽으면 그만이니까.
  • 쭉 보고있자니 친구들도 명품 옷에 명품 백에 심지어 민주는 남자친구와 통화도 하는 듯 보였다. 정말 잘난 인생을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동창회라도 좀 나갈걸 하고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조금 지켜보자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딱히 내색하지 않고 나는 시식코너를 몇 번 돈뒤, 그냥 그대로 마트를 빠져나왔다.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마저 하던일을 정리해야겠다.
  • 옥탑방으로 향해 낡은 슬레이트 지붕의 집 문을 열어제낀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린다. 한 숨을 쉬고 다시 로프 앞에 앉아서 조용히 흐느낀다. 나는 정말 왜 이렇게 사는지, 신이 있다면 정말 공평한 것이 맞는지, 나는 왜 아무런 재능이 없는지. 나를 비판하다 못해 죽일 기세로 나 자신을 까내려 간다. 아, 진짜 죽으려는거 맞구나. 어쨌든, 한 동안 그걸 반복하다 무의식으로 일어나서 주머니에 있던 편지를 꼬깃꼬깃 구겨서 허공에다 던져버린다. [어차피 안 될거, 뭐하러 가지고 있냐] 나즈막히 말하고는 한 동안 허공을 바라본다. 내가 좋아했던 여자는 저렇게 잘 살고 명품을 몸에 바르고 친구들과 여가를 즐기면서 애인과 통화를 하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즐기고 있는데 나 자신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벌레만도 못한 인생임을 스스로 자각하면서 자꾸자꾸 무너지고 있는 와중이다. 더이상 나에게 버틸 기력따위는 없는 듯 했다.
  • 큰 결심을 했다는 듯 바로 열어두었던 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가 울먹이며 로프 끈을 잡는다. 마지막이다. 정말 마지막 순간이다. 이제 나한텐 더 이상 이유따윈 없으며 희망따위도 없다. 그나마 있는 약은 희망이라면 이 길 밖에는 없다. 혼자 그렇게 열변을 토해내며 눈을 질끈 감는다. 홧김인듯 아닌 자살을 해버렸다. 리빙박스 위에서 로프를 목에 매달고 리빙박스를 발로 찬 순간 마치 구름위를 떠다니는 것 처럼 발이 공중에 두둥실, 하고 떠올랐다. 아프다거나 그렇진 않았다. 그저 편안하고 고즈넉한 느낌이었다. 나도 이렇게 이 세상이란 곳에서 흔적을 지워가는 구나 하고 느끼면서 편하게 눈을 감았다. 더이상 나는 발버둥 치지도, 숨을 쉬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짧은 로프에 몸을 맡긴채 조용히 기분좋은 미소를 짓고는 눈만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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