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찾아온 봄에도 불구하고, 강바람은 꽤나 쌀쌀했다. 난 이 세상에, 자기 자신에게 절망했다. 고졸에, 백수에, 취업은 안 되지. 찾아드는 초조함과는 별개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의 장례식이 열렸다. 교통사고였다. 며칠 간의 장례식이 끝나고, 난 스스로를 방구석으로 내몰았다. 강박적일 정도의 자책과 무력감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내던 와중,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쓰레기를 필요로 해 주는 사람 따위는 이 세상에 없고, 나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죽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저 순간적인 충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은, 적어도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불행이었는지 행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내가 살던 집은 강 근처였고, 다리에 도착해 뛰어내릴 만한 곳을 찾기까지는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바람이 살을 에는 듯 했지만 달리 신경쓰지 않았다. 이런 삶에 가치 따위는 없었다. 난간 너머로 몸을 굽혔다. 인생을 끝낼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저기, 잠깐만요!"  "...네?"  "혹시, 신을 믿으십니까?"  ---- 스타트! 전에 스레더즈에서 쓰다 사이트가 폭파돼버려서 끊긴 스레야. 창작소설판에 갈까도 싶었는데, 원체 BL판에 있던 스레였던데다 중간중간 대화문 분량이 꽤 돼서 BL판이 열리기를 계속 기다리다 결국 커플링판으로 왔어. 혹여나 문제되면 판 이전을 문의할게. 다들 잘 부탁해!

"앞으로는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게. 그러니까."  "...응."  "혼자 슬퍼하지 말아 줘."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  순간 형의 호흡이 크게 흔들렸다. 미안하다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고작 그런 것으로 가슴 벅차하는 바보같은 형이다. 이런 짧은 말로는 턱없이 부족할 지도 모른다. 사과해야 하는 것은 나였다. 형은 잘못한 거 없으니까, 그만해도 돼. 고심 끝에 겨우 말을 내뱉었다. 다시금 자신에 환멸을 느꼈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쉽사리 할 수 없는 답답한 놈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제쳐 두고서라도, 모든 말들은 진심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의지해 왔던 형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그 시간들의 대가를 이런 몇 마디로 갚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렇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것 역시 없었고, 그렇기에 두려웠고, 삶이 혐오스러울 뿐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냥 옆에 있어 줘. 힘겨운 말이었다. 심장박동이 콧잔등을 두드렸다. 품이 따뜻했다. 그 온도가, 깊은 박동이 언젠가 안겼던 부모님의 품과 닮아 있어서,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미안해.  아직까지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감사도, 속죄도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  가슴 밑바닥에 들어찬 공허를 메울 방법을 모르겠어.  이런 우울을 안은 채 살아가고 싶지 않아.  어쩌면 죽고 싶은 건 아닐 지도 몰라. 그렇지만 살고 싶지도 않아. 언제까지고 이대로라면, 변하는 건 없어. 쓸데없이 겁은 많아서, 숨이 끊기는 그 순간이 두려워.  하지만, 끝내고 싶어. 이런 바보같은 나를.  누군가 나를 구해줄 수는 없을까.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생각해 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 지구는 언제건 돌아가.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손을 내밀어 줘.  잊지 않을 테니까.  나의 세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형, 정말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하지만 난 아직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기대도 되니까 이 건: ...좀 있으면 이삿짐 오겠네. 빨리 정리하자.  이 현: ...... 이 건: 네 방은 거의 끝났지? 거실만 좀 더 치우면 되겠네.  이 현: ...형.  이 건: 왜?  이 현: 아니 그냥, 형도 힘들면 말하라고.  이 건: ...  이 현: 맨날 나만 챙기고, 자기 생각은 안 하잖아.  이 건: ...고마워. 우리 현이 많이 컸네.  이 현: 별로.. 그냥 좀 미안해서. 이 건: 알아. 괜찮아. 이 현: ...나도.  고작 이게 전부인 사과지만, 그래도.

그 시각  백 설기: 쫓겨나 버렸네요... 페리우스: 그런 셈이지. 백 설기: 아까부터 선배가 왠지 심상치 않았는데, 마왕님이 말한 거죠? 선배가 엄청 심각해 보였어요.  페리우스: 그랬네.  백 설기: 말해도 되는 거였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선배 화나면 진짜 무섭던데.  페리우스: 화내지 않을 것이라 믿네. 백 설기: 뭐, 마왕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페리우스: 분명 잘 될 것이네! 내가 보장하지. 백 설기: 잠시만요, 조용해졌어요. 뭔가 얘기하는 것 같은데요?  페리우스: 가 보도록 하지. 같이 갈 텐가? 백 설기: 당연하죠! 둘 다 대문에 붙어서 엿듣고 있었다는 후문이.

발각  이 현: 쓰레기 내놓고 올게.  이 건: 잘 다녀와~  이 현: 무겁네.. 문이 왜 이렇게 안 밀리지(벌컥)  백 설기: 아.  이 현: ...뭔데 이건.  백 설기: 들켜버렸네요♡ 이 현: 들켜버렸네요♡ 는 또 뭔데!! 듣고 있었어?!  페리우스: 다 듣고 있었네!  이 현: 이런 미친...  백 설기: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죄송해요.  이 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쪽팔려... 진짜 어떻게 살라고...  백 설기: 현 씨 울어요?  이 현: 안 울어!!

뻔하네요  이 건: 아, 밑에 트럭 왔다.  이 현: 난 나가 있을게. 귀찮아..  이 건: 어디 갈 건데? 가게 열쇠 줄까?  이 현: 그건 됐어. 혼자만 있기도 그렇고.. 갈 만한 곳이 없네.  백 설기: 우리 집에 오면 되지 않나요? 신도는 환영이랍니다.  이 현: 됐거든. 내가 또 갈 줄 알고..  백 설기: 치킨 시킬까요, 마왕님?  페리우스: 좋다! 매운 걸로 부탁하지.  이 현: ...잠깐만 있다가 갈게.  백 설기: 그럼 들어와요!

의문  이 현: 심심해... 치킨 언제 오지.. 백 설기: 집 구경할래요?  이 현: 그럴까.  백 설기: 여기가 제 방이예요!  이 현: 깔끔하네.  백 설기: 옆집 사는 누구 씨와는 다르니까요.  이 현: 아 그러세요.  백 설기: 반응이 없네요...  이 현: 애초에 혼자 사는데, 별로 치울 필요 없었잖아. 형이 오긴 했지만.  백 설기: 그래도 아까 상태는 좀 심했어요. 너무 더러우면 건강에 안 좋아요! 이 현: 뭐, 한동안은 치울 만한 정신도 없었으니까. 정신이 좀 들고 나니 손쓸 수 없을 정도였고. 백 설기: ...지금은 좀 괜찮아요? 이 현: ......몰라. 그리고 설기 씨,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우리 엄마 돌아가신 거, 어떻게 알았어?

방음이 안 돼 백 설기: 몇 달 전에, 현 씨가 검은 정장을 입고 들어가는 걸 봤어요.  이 현: 그것만으로?  백 설기: 아뇨. 이 방, 현 씨네 방 바로 옆에 붙어 있거든요. 조용할 때는 벽 너머로 소리가 들려요.  이 현: 아니 그런...  백 설기: 우는 소리가 다 들리는데, 모를 리가요.  이 현: ......  백 설기: 그리고 야한 건 이어폰 끼고 봐요! 밤에는 다 들린다고요!  이 현: ...알았어.  백 설기: 현 씨 얼굴 빨개졌어요.  이 현: 좀 조용히 해... 아 쪽팔려...  백 설기: 귀엽네요♡ 이 현: 아 쫌!!!

이 현: 하나만 더 물을게.  백 설기: 뭔데요?  이 현: ...어제, 왜 구했던 거야?  백 설기: 네?  이 현: 왜 구해줬냐고. 솔직히 이해가 안 가서.  백 설기: 전도를 위해서였죠!  이 현: 적당히 넘기려 하지 말고.  백 설기: 정말인데요?  이 현: 그만해. 말해 줘.  백 설기: ......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보랏빛 눈은, 더 많은 걸 담고 있다고.

구원  백 설기: 이럴 때 보면, 현 씨는 선배랑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진지해지는 게 똑같네요.  이 현: ...뭐 그렇지.  백 설기: 뭐랄까... 딱히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죽게 놔두고 싶지 않았어요.  이 현: ...  백 설기: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는 걸 보고 싶지도 않았고, 또 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도 싫었어요.  이 현: ...그런...  백 설기: 이기적인 걸지도 모른다고, 주제넘은 참견일 수도 있다고 몇 번씩 생각했었는데, 역시 현 씨가 죽는 건 싫더라고요.  이 현: ...... 백 설기: 그냥, 구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 때의 내가 구원받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투영  백 설기: 그리고 그 때 현 씨에게서 예전의 제가 보였던 것만 같아서, 내버려둘 수가 없었어요.  이 현: 무슨 말이야? 백 설기: 예전에, 저도 죽으려 했었거든요. 거기서.  이 현: 설기 씨가?  백 설기: 현 씨, 세상은 가혹해요.  이 현: ...그렇지.  백 설기: 절망적이고,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가고, 마음을 죽여요. 불합리하죠. 견딜 수 없는 순간도 오고요.  이 현: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백 설기: 그런 세상에서라도, 어떻게든 살아가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거예요. 죄송해요. 머릿속이 복잡해서... 앞뒤가 안 맞는 거 알아요. 납득하기 힘들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래도.  백 설기: 살아 주세요. 저를 위해서.  의지할 무언가를 찾는다면.  숨을 쉬는 것에서, 아침마다 눈을 뜨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그 때는 당신도 조금은 강해져 있지 않을까.  만약, 내가 당신의 「의미」가 될 수 있다면, 그건 정말로 기쁜 일이 아닐까.

아 우웃....ㅠㅠㅠ 짱이다 진짜...ㅠㅠ

>>113 고마워! 내가 이 구역 짱짱맨이다 후헤헤헿

"...이해가 안 돼. 왜 나 같은 걸..."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현 씨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했어요." 더 모르겠다. 그래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순 있었다. 이 사람은 형이랑 비슷하다. 받지 않아도 되는, 그저 애정을 주고 싶어 하는 그런 점이 비슷했다. 다만, 이 사람은 조금 더 단단했다.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빛이었다. 마주친 자색 눈에 속이 꿰뚫리는 듯 했다.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가슴을 휘저어 놓고 나가는 시선에 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뭐라고. 소중한 사람? 고작 만난 지 하루 된 사람에게는 과분한 칭호다. 아, 예전에 알았다고 했었나. 그렇지만 난 당신의 이름조차 몰랐는데.  저런 이타심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이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일까.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역시 이상한 사람이다. 어쩐지 조금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것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넓어져 갔다. 이상하게도 얼굴에 열이 퍼져나가서, 당신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혹시 현 씨는 눈 마주치는 거 싫어해요?"  "별로... 싫어하는 건 아닌데, 가끔 좀 부담스러워."  약간 죄책감 같은 게 든다고나 할까. 웅얼거리며 뒷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저런 걸 바라봐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게 되어버린다. 다른 사람의 눈을 마주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이제는 뇌리에 박혀버린 말이 가슴을 짓눌렀다. 나약할 것이 분명할 스스로를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특히 당신같은 사람에게라면 더더욱. 맑은 보라색 눈을 마주하면, 그 안에는 호수가 하나 있었다. 바라보고 있자면 빠져들어가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나 깊었다. 물이 마음을 휩쓸고, 통증을 걷어내고 나간다. 요컨대, 호수는 한껏 쏟아낸 눈물과 비슷한 효험을 지니는 것이다. 그의 눈은 그랬다. 어쩐지 구원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헛된 희망을 가지게 만드는 눈이었다. 그러니 마주할 수 없는 것이다. 맑게 빛나는, 신성함에 가까운 그 보랏빛을. 이해하고 있다며, 모든 것을 다 받아 주겠다고 말하는 듯한 그 눈은 내겐 너무 과분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열기에 먹혀버릴 것만 같았다.

이것은 분명 울분이나 억울함 같은 뜨거움과는 달랐다. 좀 더 간질간질하고 따뜻했다. 당신을 바라볼 때마다 조금씩 요동치는 느낌이 들어서, 그야말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런 것을 머리로 정의내릴 수 있을 리 없다. 뱉어낼 수 없는 날것의 덩어리. 숨기지 못한 채 드러난, 저 안쪽에 잠들어있던 감정. 이런 걸 어떻게 형용하면 좋을까. 알 수 없는 감정은 내게 있어 언제나 위험요소였다. 토해내는 순간의 아픔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이 사람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간신히 폭발을 막아오던 마지막 한 가닥의 의지가 끊겨서, 저 아래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에 불타 버렸다. 울분에 지배당하고 말았다. 이런 골칫덩어리 따위, 차라리 처음부터 없는 것이 속이 편했다. 꺼내서는 안 된다. 통제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내게 있어, 지금의 이 감정은 의문 그 자체였다. 이걸 뭐라고 하면 좋지. 속이 울렁거려 멀미가 날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은 피곤했다. 혐오스러운 자신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머리 아프네... 잠시만 쉬어도 될까."  "그렇게 해요. 피곤하면 아예 자고 갈래요? 오늘 무지 일찍 깬 거잖아요, 현 씨는."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뭐 어때요. 이거 덮어요!"   폭, 하고 이불이 날아왔다. 잠시만, 그렇게 던지면, 아 잠깐만! 찰나의 틈조차 없이 날아오는 베개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어서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튼 칠까요? 어이가 없어서, 그냥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간질거리던 열기가 이제는 터질 듯 가슴을 채웠다. 내쉰 숨결이 뜨거웠고,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듯 했다. 이불을 덮고 몸을 눕혔다. 베개에서 은은한 샴푸 냄새가 풍겼다. 침대 전체에서 옅은 향이 나는 듯 했다. 텅 빈 품이 허전해 이불을 끌어안으려던 순간, 결 좋은 은발이 팔 사이를 메웠다. 그가 품속에 들어와 있었다.

"뭐 하는 건데."  "껴안을 거 없으면 못 잔다면서요. 안고 자요!"  "됐으니까 내려가."  "제 침대인데요? 현 씨는 내려가라면 안 내려갈 거잖아요! 주객전도라고요."  "그건 맞지만, 애초에 누우라고 한 건 설기 씨..."  "이러려고 그랬던 거였는데요?"  "됐어!! 안 자고 만다!"  "내려가지 마요...!"  애원하는 눈망울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했다. 숨결이 맞닿을 때마다 심장박동이 빨라져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내려가 줬으면 했다. 하얀 피부와 시트에 흐드러진 은발. 자색 눈동자와 오밀조밀한 입술, 은은한 샴푸의 향.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고개를 돌리려 했건만, 그는 나의 한쪽 뺨에 손을 얹어버렸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굴이 있는 대로 뜨거워져 이젠 숨길 수도 없었다. 이 어지러운 느낌을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까.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시야가 암전하기 직전, 그의 보랏빛 눈이 잠시 보였던 것 같았다.

현 씨, 얼굴이 뜨거워요! 일부러 저러는 건지, 그냥 그렇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까도 그렇고, 역시 반쯤은 고의인 것이 아닐까. 여러모로 헷갈리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얼굴에 올라온 손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내 뺨이 달아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눈을 살짝 뜨자, 그가 시야에 들어차 있었다. 눈 떴네요. 그는 그리 말하며 베시시 웃었다. 그만하고, 잘 거니까 건들지 마. 그렇게 몸을 돌리자, 이번에는 뒤쪽에서 껴안아 왔다. 이건 안 된다. 심장 소리를 들키고 만다. 그대로 다시 뒤돌았다. 그는 날 보고는 한 번 더 웃더니, 그럼 잘 자요, 하고는 껴안았다. 울려퍼지는 고동과 체온, 바디워시의 향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 했다. 이젠 그냥 쉬고 싶었다. 어차피 심장 소리는 이미 들킨 지 오래였을 것이다. 고동에 몸을 맡긴 채, 다시 눈을 감았다. 그가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부드럽게 내려가는 손길에 온 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 했다. 의식이 무겁게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뛰는 가슴이 간지러워 그를 꼭 끌어안자, 그도 덩달아 내 몸을 당겼다. 마음이 먹먹하고 뜨거워서 잠겨버릴 것만 같았다.

와와.... 너무 좋다 ㅋㅋ 이렇게 꾸준히 연재해 줘서 정말 고마워!

스레주 바빠...? ㅠㅠ

>>121 >>122 오늘, 아니지 어제 시험 끝났다...! 스레주가 이제 곧 고삼이라 현생이 쪼오끔 빡세다... 슬슬 복귀해야겠지 싶어서 들어왔다가 레스 보고 의무감이 솟아올라서 레스 하나 파바박 마감했다... 진짜 읽어 줘서 언제나 고마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랑한다 레더들ㅠㅠㅠㅠㅠ퓨ㅠㅠㅠㅠ

"...모르겠어.."  "뭐가요?"  "왜, 나를..."   몽롱했다. 당신이 왜 이러는 건지,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다른 세계에 있지 않은가. 어차피 나는 유리되어 있다고,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당신이 어디 있든 상관없다 생각했다. 그런데도 박동이 멎지 않아서, 당신은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얄팍한 감에 휩싸여서. 무언가를 받아 본 기억들이 전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형이랑, 그리고, 그리고 -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그대로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울면 다시 당신 품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힘을 잃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간신히 뱉었다. 고마워. 겨우 떠오른 진심을 내칠 정도로 난 강하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나에게 그렇게나 빛나는 걸 줘서 고마워. 언제나 그랬다. 분명 살아오면서 세상에게 받은 게 너무도 많았는데, 좁아터진 스스로의 그릇에 흘러넘친 마음들을 어찌할 수도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감사가 아닌 속죄였는데, 그런데, 그런데도. 결국 고맙단 말을 내뱉은 것은 역시 내가 바보같아서다. 아니, 그래도 괜찮다고 당신은 말하겠지. 난 그걸 참을 수 없어. 미안해. 어디부터 비틀린 건진 모르겠지만, 난 당신에 대해 아직 알 수 없어. 그래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받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사념들이 한데 뒤엉켜 오전의 각성에 작별을 고했다. 의식이 잠겨들어가다, 이내 희미해진다. 뛰는 가슴을 끌어안고, 체온에 파묻혀 잠든다. 어째서였을까. 사실은 옛날부터 바라고 있었던지도 모른다고, 저도 모르는 새에 이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잘 자요 - 귓전에 울린 당신의 목소리를 끝으로, 세상이 완전히 암전했다.

잠들었네요, 하고 의미 없는 말을 내뱉어 봤습니다. 품속에서 잠든 당신은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호흡을 따라 오르내리는 당신의 몸을, 꼭 붙들려 주름진 저의 옷자락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잠시 떨어져 당신의 잠든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습니다. 고운 피부, 이마를 덮은 고동색 머리칼, 희미하게 흩어지는 호흡. 그 모든 것들이 그 때와 다를 것이 없어서, 조금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솔직하지 못한 말에서부터,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상처까지 모든 것들을 감싸안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관한 확신은 저리 치워두고서라도, 당신이 그렇듯 내가 아직 전하지 않은 것이 많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도 당연한 말을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를 아득한 미래에 새겨넣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웃고 싶어서, 용서는 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만났을 때, 당신을 처음으로 구했던 그 날에 멈춰 있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습니다. 계속 그 자리에 있으면, 제가 언제라도 다시 찾아낼 테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요. 옅게 신음하는 그의 뺨을 쓰다듬었습니다. 꼭 감은 눈에 맺혀들어간 눈물을 살짝 닦아내리고, 불안정한 그를 바라봤습니다. 그가 무엇을 끌어안고 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이해하려 할 뿐이었습니다. 모친의 죽음. 단지 그것뿐인 고통이라면야 차라리 간단했겠지만, 당신은 마치 무언가가 결여된 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신에게서 닿아오는 것들은 그저 안개가 낀 듯한 감정들이었습니다. 사소한 행동이나 말에 녹아드는 마음을 숨길 정도로 당신은 철저하지 못했고, 결국 어떤 식으로든 내비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당신에게서 보인 것은, 아마도 자책, 무력감, 허무. 거기서 저는 아마도 과거의 자신을 비추어 보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 사실이 어쩐지 우스워서, 하는 짓이 어지간히 똑같아야 말이죠, 하고 몇 마디를 더 내뱉었습니다. 쓸데없는 말이 많아 봤자 별 쓸모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벼운 푸념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구할 수는 없을까요. 그 때의 내가 받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당신의 「신」이 될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울 것만 같은 당신을 다시 끌어안았습니다. 착하죠, 울지 말고 뚝. 당신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지금은 몰라도 괜찮을 것입니다. 품 속에서 안정과 불안정을 반복하던 당신을 바라봤습니다.

당신의 두 눈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렇게나 보이기 싫은 건가요, 하고 중얼거리며 손을 살짝 그의 눈꺼풀 위로 가져갔습니다. 속눈썹이 긴 편입니다. 눈가에 옅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뺨이 부드럽습니다. 보고 있자면 귀여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학창 시절 내내 인기가 없었던 것은 역시 키 때문이었을까요. 이런 농담을 치워두고 나면 그곳엔 당신의 일그러진 자기인식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친 벽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향한 것으로 오해받았을 것이고, 살아 나가기에 급급한 세상에서 그것을 부술 만한 애정을 퍼부을 정도로 여유로운 타인은 아마 없었을 것이라고 저는 막연히 추측했습니다. 스스로를 상처입히며 무뎌진 날들은 기억 저편에 쌓여만 가고, 종국엔 농밀한 독이 되어 당신의 심장을 꿰뚫을 지도 모릅니다. 혹시라도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에 전 당신을 지탱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감사하라고요, 정말. 이런 목소리 따위 들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계속 곁에 있어줬으면 했습니다. 당신에게 다가가 이마에 입을 맞췄습니다. 언제까지고 이대로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당신을 조금 더 꼭 끌어안았습니다. 안정된 듯한 박동이 당신의 피부 아래서 울리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그 온기에 물들고 싶어져 천천히 눈을 감았습니다. 잘 자요. 그런 말을 조용히 속삭이고는, 당신과 함께 잠들었습니다.

당신을 그렇게까지 괴롭게 하는 건 무엇일까요.  그 안에 품고 있는 건 무엇일까요.  울고 있나요. 물론 울어도 괜찮아요.  다만, 다시 절망하지 말아 줘요.  그 눈으로 날 봐 줘요. 웃어 줘요.  견딜 수 없다면, 무너진다면 옆에 있어 줄게요. 괜찮아요. 놓치지 않아요. 몇 년 만에 찾아낸 당신이니까요.  죽지 말아요. 슬퍼하지 말아요.  언젠가는 구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그냥 곁에 있어 주세요.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당신이라면 분명 극복해 낼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흔들린다면 잡아줄게요.  함께 있어줄게요.  사랑해 줄게요.  그러니까 그렇게 괴로워하지 말아 주세요.  언제 어디서라도, 제가 당신 곁에 있을 테니까요.

설기 파트 존댓말로 간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과거 부분 서술도 존댓말로 수정할까 싶었는데, 과거는 반말도 나름대로 잘 맞는 느낌이라 일단 놔 두기로 했어. 피드백과 감상은 언제나 환영이야!

페리우스: 둘 다 나와보게! 치킨이 왔... 아, 자는 것인가? 이 현, 백 설기: (껴안은 채로 취침 중)  페리우스: ...정말이지, 이러고 있으면 깨울 수도 없네만. 뭐, 나중에 먹으면 될 일이지. 그대들이 행복해 보이니, 방해할 수 없지 않은가.

저녁  이 현: (살짝 깬다)...아, 나 잠들었었지... 몇 시지, 지금. 해 진 것 같은데. 백 설기:(자고 있다)  이 현: 6시... 오래 잤네.  이 현: 일어나기 싫다... 좀 더 잘까.  당신의 품이, 비쳐 들어오는 저녁빛이 따뜻해서,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어.

술판  이 현: 몇 시간이나 잔 거지... 설기 씨도 없고, 나가볼까.(벌컥)  이 건: 일어났어?  이 현: ...맥주?!  페리우스: 자고로 치킨엔 맥주 아닌가!  백 설기: 현 씨도 같이 마셔요!  이 현: 어쩌다 술판이 된 건데... 난 됐어.  이 건: 그러고 보니, 현이는 술 잘 못 마셨지? 싫으면 먼저 들어가 있어.  백 설기: 술 못 하나요? 귀엽네요♡ 이 현: 됐거든! 먹고 갈 거야.  페리우스: 역시 치킨이 목적인가...! 이 현: 나도 마실 거거든. 틀린 말은 아니지만.(캔을 딴다)  이 건: 괜찮겠어?  이 현: 괜찮겠지 뭐.

집 이 건: 이사 끝내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남는 방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원룸으로 안 하길 잘했지? 이 현: 그렇네. 집 새로 구하기도 번거로우니까. 예전 집은 - 이 건: 예전 집은? 이 현: ...둘이 살기엔 너무 넓으니까. 이 건: ......응, 그렇네.

어쩌다 이 건: 그런데, 페리랑 설기는 어쩌다 만나게 된 거야? 옆집에 살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페리우스: 이 몸이 직접 전도했네! 나의 신자가 되라고 말이지. 백 설기: 그래서 어찌저찌 마왕님이랑 지내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이 현: 너무 건너뛰어 설명한 것 같은데. 백 설기: 다 말하자면 꽤 기니까요. 핵심만 짚자면 전도당했기 때문이 맞아요. 이 건: 정말...설기 넌 갑자기 잠수 타더니 아무 소식도 없고, 학교 안 나오길래 휴학한 건가 싶었는데 들리는 말로는 자퇴했다 그러고. 전화를 해 봐도 없는 번호라 뜨는데 어디서 뭘 하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단 말야. 그리고, 백 설기: 그리고요? 이 건: ...아니야. 다음에 얘기하자.

오핸만에 와봤는데 아직까지 꾸준히 하고있구나! 오랜만에 보니까 더 재미있다 :)

>>135 레스 고마워...!! 너무 오랜만에 와 버렸네ㅠㅠㅠㅠㅠㅠㅠ 언제든 찾아와서 보고 가ㅠㅠㅠㅠㅠ

술주정  이 현: 내애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에...히끅..  백 설기: 으어어 현 씨 울지 마요오오오...! 제가 어떻게든... (털썩)  이 현: 설기 씨..? 죽지 마!! 일어나아아...!  이 건: 둘 다 취했네. 페리우스: 오, 그럼 이제 단둘인 것인가!  이 건: 그런 것 같네. 페리도 얼굴 빨개졌는데?  페리우스: 그럴 지도 모르겠군. 꽤 마셨으니 말이네.  이 건: 페리는 술 세구나~  페리우스: 그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 몇 캔째인지 이젠 짐작도 안 가네만. 이 건: 맥주는 괜찮아! 뭐, 현이는 반 캔만에 뻗었지만. 설기도 원래 약한 편이었고.  페리우스: 그랬지.  이 건: 응. 그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

이 건 : ...2년간, 설기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페리우스: 어땠을 거라 생각하는가? 이 건: 글쎄... 많은 일들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곤 있어. 너희 말대로 긴 이야기겠지. 페리우스: 그 말대로네. 이 건: 2년 전에, 설기랑 갑자기 연락이 끊겼어. 자퇴했다고 들었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동생이랑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고 - 페리우스: 사실이네.  이 건: ...그렇구나. 그래도, 걱정하던 것보단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싶었어. 설기도 현이도... 가족의 죽음은, 극복하기 쉬운 게 아니니까.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가슴에 그 사람의 자리만큼 공백이 생겨 버려.

이 건: 현이, 많이 우울해 보였어?  페리우스: 우울이라... 개인적인 견해네만, 그보단 자책에 가까워 보였네. 이 건: 그랬나...  페리우스: 이 몸의 안목은 정확하니 믿어도 좋네! 이 건: 응, 그렇지.  페리우스: 이 몸은 「신」이 아니더냐. 전지전능할 수밖에 없지.  그리고, 이 몸의 눈에 비치는 그대는, 아직도 괴로워 보여서.

"그대는, 지금 간신히 일어서 있군."  "무슨 말이야?"  "무너진 마음을 억지로 이어붙인 것이 아닌가."  "......"  말문이 턱 막힌다. 너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찾을 수 없는 붉은 눈이다. 눈빛이 머릿속을 뚫고, 심장까지 내려가 휘저어댄다. 무어라 변명을 해 볼 작정이었지만, 목에서 막혀 버렸다. 누덕누덕해진 마음과 간신히 버티고 있는 두 다리. 추상적이지만 직관적으로 꽂혀 오는 말이었다. 이러한 화법 또한 너의 힘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다시 한 번, 네가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한다. 역시 눈에 보인다고나 할까, 힘들어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전부 간파당한 듯한 기분이다. 사람을 너무도 잘 안다는 점에서, 너는 의외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마냥 느긋한 듯 보여도 판단이 빠르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언제나 진심으로 행동한다. 또한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바래지 않는, 정열적인 적색이다. 그 눈이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말한다. 그런가. 이 한 마디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은, 나약한 나로서는 불가능했다.

"강한 척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은가."  "......"  "아니, 정정하지. 그대는 강하다. 하지만."  "...좀 더 기대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네."  "현이랑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페리는."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 고통이 버겁다고 외칠 수 없었던 날들이 이어져 왔다. 벼랑 끝에 몰린 것만 같다고 생각해 왔다. 그럼에도 자신을 포장해서 멀쩡한 척하고,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는 것이 정말 최악이다. 맥주캔을 따 한 번에 들이켰다. 술기운이 오르지 않았다. 역시 소주를 사올 걸 그랬나 보다. 고개를 돌리면, 날 응시하는 네가 보였다. 저 눈을 바라봐도 될까. 그렇지 않다면, 난 눈을 감아야 하는 걸까. 가슴 속에 뭔가가 응어리진 듯 했다. 캔을 내려놨다.

"그대가 생각하는 「신」은 어떤 존재인가?"  "전지전능한, 의지할 수 있는 존재?"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신」이 맞겠지."  "애매모호하네."  "추상적인 개념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네. 각자 기준이 다르니 말일세."  "그럼, 페리의 기준은 뭔데?"   너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눈을 굴리더니, 이내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짓는다. 취기가 올라 홍조를 띤 얼굴과,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 붉디 붉은 동공과, 왼쪽 눈 밑에 새겨진 작은 문신. 맥주캔을 꼬옥 쥔 손가락과 그 위로 이어지는 팔목. 마왕의 자격을 증명하는 듯 둘러진 망토와 그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 밤 9시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시간인 듯 했다. 이런 너와 함께할 수는 없을까. 자유로운 새와 같은 너를 품에 안아도 될까. 「신」을 붙잡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너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위험한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역시 조금 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는 신은-"  「누군가를 구원하는 자」이네.

"구원?"  "말하자면 그렇다네."  "자세히 얘기해 줘."  "단적인 예로는, 그 사람의 어둠을 걷어내는 것이라고나 할까."  "......알 것 같아, 그건."   애매한, 그렇기에 흥미로운 개념이다.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지상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어둠은 안개와도 같았다. 시야를 가린다. 이성도 통찰도 사라진, 그저 흐릿함만이 가득한 세상을 불러 온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기에. 그러다 눈 앞에서 손을 휘젓는 너에 정신을 차렸다. 괜찮은가, 하고 네가 묻는다. 얼떨떨한 느낌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입술을 굳게 물고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생각해 보니, 피가 나는 곳은 이미 한 번 터졌던 곳이었다. 낫지 않은 곳을 후벼파면 더 아픈 법이었다. 심지어 더더욱 쉽게 상처입는다. 그렇다면 감추는 것이 답이었다. 감싸고 감싸서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조차도 마주하지 않을 수 있게끔 묻어버린다. 그러고 나면 다시 아름다운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감싼 상처의 위에 선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바라본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선을 고정할 수가 없었다. 풀 한 포기, 건물 한 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회색빛 구름과 콘크리트 바닥만이 그 곳에 있었다. 목이 말랐던 것도 같았다. 발 밑의 상처가 말했다. 이건 나야. 상처의 말은 모호했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이곳은 어딘지 발치에 대고 물었다. 그리고 난 상처에게 비웃음당했다.  나는 너고,  너는 나고.  나는, 너는, 혹은 우리는, 이 세상이라고.

나는 되물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뭐냐고. 이때쯤부턴 울먹이고 있었던 것 같다. 발 밑의 상처가 재차 웃었다. 목소리가 들렸다. 알고 싶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가 말했다. 나는 말이야.  그날 그 횡단보도의 반대편이고.  동생의 눈물이고.  너의 책임감이고.  동시에 「너」그 자체이기도 하지.  이제 좀 솔직해져도 되잖아?  아무리 날 감싸고 외면해도, 넌 도망칠 수 없어. 나는 이 세상인 걸.  뭐, 이렇게 말해도 넌 절대 날 마주하지 못하겠지만.  넌 진짜 쓸모 없구나.  너덜너덜한 주제에 강한 척이나 해 대고.  덕분에 이 모양 이 꼴이잖아. 피 나는 것 좀 봐.  존재하는 이유가 뭔데?  동생? 그 애가 널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  알량한 방어기제에 불과해. 자기합리화일 뿐이야.  아, 하나 더 늘었다.  나는 말이야.  너의 「절망」이야.

"정말 괜찮은 것인가? 아까부터 좀 멍한 것 같아서."  "...아, 미안. 그냥 좀 피곤했나 봐."  "그런가."   그렇게 말해 놓고는, 넌 나를 의아한 듯한 눈으로 쳐다본다. 시선에 쿡쿡 찔리는 느낌이다. 변명인 것을 너는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무슨 일인지 묻지 말아 주었으면 했다. 이 갈 곳 없는 절망을 들키지 않도록. 나는 강한 사람이다. 형은 강한 사람이니까. 그대는 강하다. 그런 기대들을 져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좀 더 감춰둘 필요가 있었다. 너는 손에 쥔 맥주캔을 내려놓았다. 가벼운 소리가 나는 것이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붉어진 네가 휘청이는 듯 하더니, 이내 내가 있는 쪽으로 쓰러졌다. 취한 것 같군, 하고 네가 중얼거렸다. 응, 그런 것 같네. 어깨에 기대 오는 너의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었다.

오후 아홉 시. 밤과 저녁 사이에 걸친, 잠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그렇다기엔 이미 곯아떨어진 사람도 두 명이나 있지만, 뭐 어떤가. 너는 나의 어깨에 뺨을 부비더니, 아래로 스르륵 내려가 무릎을 베고 누웠다. 취했구나, 하고 말을 붙이자 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칠흑 같은 머리칼을 손끝으로 흩뜨리고 있자니, 네가 손을 뻗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 했는데, 네가 터진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통증이 욱신거리며 전해져 왔다. 아프지 않은가, 하고 네가 묻는다. 괜찮다며 웃는데, 어쩐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 어쩐지 아슬아슬한 기분이다. 입꼬리가 떨렸다. 너는 어쩐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봤다. 어딘가가 꿰뚫리는 듯 했다. 올곧은 눈이다. 그 붉은 색은 너의 영혼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본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을, 영혼을 보는 것과도 같다. 그 말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순간, 네가 입을 열었다. 다시 묻지. 정말 괜찮은가. 네가 웬일로 진지하다. 말문이 막혔다. 저런 눈 앞에선 거짓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드러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네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 싫어서. 그렇기에 웃으며 말한다.  괜찮을 거야.  아마도.  그런데 왜 눈물이 나지.

"울어도 괜찮네."  "아니야. 진짜 괜찮으니까..."  "조금은 솔직해져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건 - "  "그대가 아프다면, 언제든 이 몸이 안아줄 터이니."  "......"  "그렇게 혼자 끌어안고 있지 말게나."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속에서 일렁이던 것이 어느 순간 흘러 넘쳐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미안, 꼴사나운 건 아는데, 멈출 수가 없어. 그 뒤론 계속 울었던 것 같다. 반쯤은 오열하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이렇게까지 운 건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그 날부터 끝나지 읺을 듯한 공허에 시달려 왔다. 그 끔찍한 빈자리의, 텅 빈 세상의 구석에서 그저 말라 비틀어질 것만 같은 나날들을 보냈다. 가슴 한 구석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데,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었다. 엄마는 죽었다. 그럼 현이는. 주위를 둘러봤는데, 그 애가 곁에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현이에겐 의지할 수 없었다. 난 형이니까. 지켜야 하니까. 하지만, 그럼 난 누구한테 기대야 해?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난 혼자구나, 하고.

삼 개월 정도 전이었다. 마치 엊그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몇십 년 전에 있었던 일 같기도 했다. 그저 작년에는 함께 있었다는 사실과, 잊을 수 없는 모친의 기일이 그 기간을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그 순간의 기억 자체가 흐릿했다. 저도 모르게 지워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막연히 추측만 해볼 뿐이었다. 저 아래 무의식에 묻혀 있는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사고의 장면이 직접적으로 떠오르지 않기 시작할 때쯤, 꿈에 나오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튕겨나오는 날이 늘었다. 무슨 행복한 꿈을 꾸든, 결과는 하나였다. 엄마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절망했다. 외면하고픈 현실을 꿈에서조차 봐야 하는 것은 괴로웠다. 그런 밤들을 열댓 번쯤 반복하고 나자, 잠이 오지 않았다. 의사는 불면증이라고 했다. 수면제를 처방받았지만, 먹지 않았다. 자고 싶지 않았다. 꿈이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현실의 연장선이었고, 절망의 밑바닥일 뿐이었다. 제 발로 그런 곳에 걸어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침대에서 눈을 떴다. 잠시 졸았던 것 같았다.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낮인가 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빈 속이 쓰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뭔가를 먹은 기억이 없었다. 물이라도 마실까 싶었는데,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사고 이후 생활감각이 거의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했다. 자고 싶지도,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하루종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병원에도 안 가고, 출근도 안 하고 있으니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난 이 의지따위 찾아볼 수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뭔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있었다. 다만 그것 뿐이었다. 생각만 하고 실천은 안 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기운도 없었다. 이게 며칠째더라. 구석에 걸린 달력을 확인했다. 작년 12월을 알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의미가 없다. 그러고 보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애초에 달력이 있어봤자였다. 침대 밑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웠다. 켜지지 않았다. 충전기는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포기하자. 휴대폰을 툭 내려놓고 다시 드러누웠다.

속쓰림이 유난히 심했다. 목 아래부터 아랫배까지가 텅 비어서, 찬바람만이 나돌며 살을 베어내는 느낌이었다. 이건 식사 여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깊은 공허이며 빈자리다. 평생을 함께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었던 가족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순간, 저도 모르게 그 날의 향취를 떠올리고 말았다. 피비린내다. 겨울날의 차가운 공기와 뒤섞인 쇠 냄새다. 후각을 기점으로, 죽어 있던 감각들이 차례차례 되살아난다. 요근래 억눌러 놓았던 기억들이 되돌아온다. 호흡이 안정되지 않는다. 횡단보도의 반대편. 붉게 빛나던 차량용 신호등. 트럭의 브레이크 소리. 현이를 밀쳐내는 엄마. 현이의 울음 섞인 외침. 그리고 일 초도 안 되어 들려왔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비명과 웅성거림, 비린내와 구급차의 소리가 뒤섞여 멀어지더니, 순간 시야가 흐릿해졌다. 안 돼. 막아야 하는데.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미 사고의 현장은 내게서 떠나 있었다. 익숙한 천장이 눈에 비쳤다. 잠에서 깨어났다. 방이 어두웠다. 커튼 사이로 흐릿하게 비쳐들어오던 빛이 사라져 있었다. 꿈이었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이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던 때부터? 아니면 일어났던 것도 꿈이었나? 혼란스러운 와중, 돌연 이상한 희망이 한 줄기 돋았다. 지금 이것도 꿈은 아닐까. 깨어나면, 언제나처럼 모두가 반겨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잤냐고 물어보고, 비몽사몽한 현이를 깨우고, 엄마가 해준 아침밥을 먹고 카페에 나가는 일상이 돌아올 지도 모른다. 헛된 희망, 아니 그것을 넘은 환상에 가까운 것에 도취될 듯 했다. 바라던, 보내 왔던 삶이 눈 앞에 있었다. 그 안에서 영원히 행복할 수 있도록,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었다. 난 잠시 고민했다. 깨어나다니, 그럼 어떻게? 그 순간 튀어오른 생각은 꽤나 위험한 것이었다.  죽으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분명 깨어날 수 있을 텐데.
레스 작성
3레스 Dead by daylight (데바데) BL스레 2019.05.10 74 Hit
커플링 2019/02/09 00:17:00 이름 : 이름없음
45레스 [드림] 드림커플 초성 외치고가자! 2019.05.07 711 Hit
커플링 2018/06/28 00:13:38 이름 : 이름없음
7레스 노래 가사가 전부 최애커플 이야기로 들리는 스레 2019.05.05 114 Hit
커플링 2019/05/02 22:09:37 이름 : 이름없음
11레스 란의 커플링 2019.05.05 195 Hit
커플링 2019/03/30 23:17:07 이름 : 이름없음
20레스 애정컾의 나이차를 쓰고 가는 스레 2019.05.05 154 Hit
커플링 2019/04/08 09:49:48 이름 : 이름없음
49레스 [All] 포켓몬스터 커플링 스레!!! 2019.05.04 851 Hit
커플링 2018/06/28 12:42:41 이름 : 이름없음
1레스 앙스타 커플링 스레! 2019.05.01 42 Hit
커플링 2019/05/01 21:09:56 이름 : 이름없음
3레스 (ALL) 결혼식을 합시다 2019.05.01 57 Hit
커플링 2019/04/30 19:33:54 이름 : 이름없음
42레스 사귀어라!/결혼해라!/행복하게 살아라! 를 외치고 가는 스레 2019.04.29 550 Hit
커플링 2018/11/02 01:58:45 이름 : 이름없음
154레스 » [BL] [1차] 신을 믿으십니까? 2019.04.29 932 Hit
커플링 2018/07/22 10:53:00 이름 : ◆FeE2nDuk9uo
11레스 아래위로 생각나는 커플링 말해주는 스레 2019.04.27 159 Hit
커플링 2019/03/31 23:44:22 이름 : 이름없음
3레스 S.K.T-swallow knights tales외 김철곤 작가 소설 통합 스레 2019.04.26 31 Hit
커플링 2019/04/26 10:38:54 이름 : 이름없음
7레스 커플링 파다가 속상한일 적어보자 2019.04.26 82 Hit
커플링 2019/04/25 21:22:28 이름 : 이름없음
17레스 오버워치 내에서 파는 컾링! 2019.04.25 89 Hit
커플링 2019/04/08 11:18:50 이름 : 이름없음
15레스 크레용신짱 짱구는못말려 커플링 외쳐보자!!!!!!!! 2019.04.25 131 Hit
커플링 2019/04/23 22:22:52 이름 : ◆TVdO2smLb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