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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E8i2pV82k8 2018/08/12 15:37:43 ID : 2q3PhasmJQt
고전들을 매일 30쪽씩 필사하는 스레입니다. 스레주가 시간이 없어서 격일로 할 수도 있습니다.
10p 2018/08/12 15:56:41 ID : 2q3PhasmJQt
가을 학기가 되자, 00일보사에서 주최하는 학생 계몽 운동에 참가하였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오늘 저녁은 각처에서 모여든 대원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그 신문사 누상에서 열린 것이다. 오륙백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에는 전 조선의 방방곡곡으로 흩어져서 한 여름동안 땀을 흘려가며 활동한 남녀 대원들로 빈틈없이 들어찼다. 폭양에 그은 그들의 시꺼먼 얼굴! 큰 박덩이만큼씩한 전등이 드문드문하게 달린 천장에서 내리비치는 불빛이 휘황할수록 흰 백을 등지고 앉은 그네들의 얼굴은 더 한층 검어보인다. 만호장안의 별처럼 깔린 등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도록 사방에 유리창을 활짝 열어젖혔건만, 건장한 청년들의 코와 몸에서 풍기는 훈김이 우거진 콩밭 속에를 들어간 것만큼이나 후끈후끈 끼친다. 정각이 되자, P학당의 취주 악대는 코넷, 트럼펫 같은 번쩍거리는 악기를 들고 연단 앞줄에 가 벌여 선다. 지휘자가 손을 내젓는 대로 힘차게 연주하는 것은 유명한 독일 사람의 작곡인 쌍두취행진곡이다. 그 활발하고 장쾌한 멜로디는 여러사람의 심장까지 울리면서 장내의 공기를 진동시킨다. 악대의 연주가 끝난 다음에 사회자인 이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안경을 번득이며 점잖은 걸음걸이로 단 위에 나타났다. "에 ㅡ, 아직 개학을 안 한 학교도 있어서 미처 올라오지 못한 대원이 많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여러분끼리 서로 간친하는 기회를 드리려는 다과회가 무슨 강연회처럼 되었습니다." 하고 일장의 인사를 베푼 뒤에 으흠으흠하고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금년에는 여러 가지로 지장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작년보다도 거의 곱절이나 되는 놀라울 만한 성적을 보게 됐습니다. 이것은 오직 동족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열성과 문맹을 한 사람이라도 더물리치려는 헌신적 노력의 결과인 것이 물론 입니다. 그러므로 주최자 측으로서 여러분의 수고를 감사할 뿐 아니라 우리 계몽 운동의 장래를 위해서 경축하기를 마지않는 바 입니다. 처음에는 늦게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수성수성하던 장내가 이제는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사회자는 말을 이어, "긴 말씀은 하지 않겠으나, 차나 마셔 가면서 간담적으로 피차에 의견도 교환하고, 그동안에 분투한 체험담도 들려주셔서, 앞으로 이 운동을 계속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 입니다." 하는 부탁을 한 후 단에서 내렸다. 대원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어느 전문학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이 나가 간단한 답사를 하고 돌아왔다. 문간에서 회장을 정돈시키던 이 신문사의 배지를 붙인 사원이 눈짓을 하니까, L여학교 가사과의 학생들은 굉장한 연회나 차리는 듯이 일제히 에이프런을 두르고 돌아다니며 자기네의 손으로 만든 과자와 차를 죽 돌린다.
20p 2018/08/12 16:37:03 ID : 2q3PhasmJQt
대원들은 찻잔을 받아들고 앉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은 과자 접시를 들여다 보면서 '에계 ㅡ, 요걸루 어디 간에 기별이나 가겠나.'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신다. 장내는 사기그릇이 부딪쳐 대그락거리는 소리와 잡담을 하는 소리로 웅성웅성 하는데 맨 앞줄 한구석에서 '하와이안 기타'를 뜯는 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애응애응하고 들리기 시작한다. 남양의 달밤을 상상케 하는 애련하고도 청아한 선율에 회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C 전문의 명물인 익살꾼으로 기타의 명수인 S군이 자청을 해서 한 곡조를 타는 것이다. S 군은 한참 타다가, 저 혼자 신이 나서 악기를 들고 일어나 엉덩춤을 춘다. 메기같이 넓적한 입을 실룩거리며 토인의 노래를 흉내 내는데, 그 목소리는 체수에 어울리지 않게 염소가 우는 소리와 흡사하게 떨려 나와서 여러 사람의 웃음보가 터졌다. 어떤 중학생은 웃음을 억지로 참다가 입에 물고 있던 과자를 앞줄에 앉은 사람의 뒤통수에다가 확 내뿜었다. 한구석에 몰려 앉은 여학생들은 손수건을 입에 대고 허리를 잡는다. "재청요ㅡ." "앙콜ㅡ, 앙콜."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며 회장 안은 벌통 속처럼 와글와글한다. S 군은 저더러 잘한다는 줄만 알고, 두 번 세 번 껑충거리고 나와서 익살을 깨뜨리는 바람에, 점잔을 빼던 사회자도 간신히 웃음을 참고 앉았다.그는 미소를 띠고 일어서며 "여러분, 고만 조용합시다." 하고 손을 들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체험담을 듣겠습니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고향에서 활동하던 이야기를 골고루 듣구는 싶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는 관계로 유감천만이나 사회자가 몇 분을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양복 주머니에서 각 지방으로부터 온 통신과 이미 신문에 발표된 대원들의 보고서를 한 뭉텅이나 꺼내 놓고 뒤적거리더니 "금년에 활동한 계몽 대원 중에 뛰어나게 좋은 성적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글을 깨쳐 준 아동의 수효로는 우리 신문사에서 이 운동을 개시한 이래 최고 기록을 지은 분을 소개하겠소이다." 하고는 다시 안경 너머로 서류를 들여다 보다가 얼굴을 들고 선생이 출석을 부르듯이 "00고등농림의 박동혁 군!"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내는 테를 맨듯이 긴장해졌건만, 제 이름을 못 들었는지 얼핏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박동혁 군 왔소?" 사회자는 더 한층 목소리를 높이고는 사면을 살핀다. 만장의 학생들은 "박동혁이가 어떻게 생긴 사람이야?" 하는 듯이 서로 돌아다보며 이름을 불린 고등학생을 찾는다. "여기 있습니다." 맨 뒷줄에서 굵다란 목소리가 청처짐하게 들렸다. 여러 사람의 고개는 일제히 목소리가 난 데로 돌려졌다. "그리로 나가랍니까?" 엉거주춤하고 묻는 말이다. "이리 나오시오." 사회자는 연단에서 비켜서며 손짓을 한다. 기골이 장대한 고농 학생이 뭇사람이 쏘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뚜벅뚜벅 걸어 나오자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강당이 떠나갈 듯이 일어났다. 박동혁이라고 불린 학생은 연단에 올라서기를 사양하고 앞줄에 가 두 다리를 떡 버티고 섰다. 빗질도 안 한 듯한 올백으로 넘긴 머리며 숱하게 난 눈썹 밑에 부리부리한 두 눈동자에는 여러사람을 누르는 위엄이 떠돈다. 그는 박수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여러분!" 청중이 숨소리를 죽이게 하는 저력 있는 목소리다. "오늘 저녁에 항상 그리워하던 여러분 동지와 한자리에 모여서 흉금을 터놓고 서로 얘기할 기회를 얻은 것을 무한히 기뻐합니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음성이 아니요, 땀에 전 교복이 팽팽하게 켕기도록 떡 벌어진 가슴 한복판을 울리며 나오는 바리톤이다. 청중은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지려나?" 하는 듯이 눈도 깜짝거리지 않으며 동혁의 얼굴을 바라다본다. 동혁은 장내를 다시 한 번 둘러본 뒤에 천천히 입을 연다. "그러나 삼 년째 이 운동에 참가해서 적으나마 힘을 써 온 이 사람으로서 그 경험이나 감상을 다 말씀하려면 매우 장황하겠습니다. 더구나 오늘 저녁은 간단한 경과만 보고하기를 약속한 까닭에, 정작 이 가슴속에 첩첩이 쌓인 그 무엇을 여러분 앞에 시원스럽게 부르짖지 못하는 것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못 하는 말은 사사로운 좌석에서 얘기할 기회를 갖고, 또는 개인적으로도 긴밀한 연락을 취해서 서로 간담을 비춰가며 토론도 하고 의견도 교환하기를 바랍니다." 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수첩을 꺼내 들고 자기의 고향인 남조선의 서해변에 있는 한곡리라는 궁벽한 마을의 형편을 숫자적으로 대강 보고를 한다. 호수가 구십사 호인데, 농업이 칠 할, 어업이 이 할이요, 토기업이 일 할이라는 것과 인구가 사백육십여 명에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이 팔 할 이상이나 점령한 것을 삼 년 동안을 두고 여름과 겨울 방학에 중년 이하의 여자들과 육칠 세 이상의 아동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깨쳐 주고 간단한 셈수를 가르쳐 준 것이 이백사십칠 명에 달하는데, 그곳 보통학교 출신들의 조력이 많았다는 것을 말하자 박수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동혁은 천천히 수첩을 접어 넣으면서 집한 식구와 이야기하는 듯 한 말씨로 "우리 고향은 워낙 원시부락과 같은 농어촌이 돼서, 무지한 부형들의 이해가 전연 없는 데다가 관변의 간섭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어요. 그런 걸 별짓을 다 해 가면서 억지로 시작을 했지요. 첫해에는 아이들을 잔뜩 모아는 놨어두 가르칠 장소가 없어서 큰 은행나무 밑에다 널판때기에 먹칠을 한 걸 칠판이라고 기대어 놓고, 공석이나 가마니를 깔고는 밤 깊도록 이슬을 맞아 가면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였는데, 마침 장마때라 비가 자꾸만 와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움을 팠어요, 나흘 동안이나 장정 십여 명이 들러붙어서 한 대여섯 간 통이나 파고서 밀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덮고, 그 속에 들어가서 진땀을 흘리며 '가갸거겨'를 가르쳤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밤새도록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가 보니까 교실 속에 빗물이 웅덩이처럼 흥건하게 고였는데, 송판으로 엉성하게 만든 책상 걸상이 둥실둥실 떠다니더군요." 그 말에 여기저기서 픽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동혁이 자신도 남자다운 웃음을 띠고 "그뿐인가요. 제철을 만난 맹꽁이란 놈들이 뛰어들어서 저희 끼리나 글을 읽겠다고 '맹자 왈', '공자 왈' 해 가며 한바탕 복습을 하는데 ... ... ." 그때에 어느 실없는 군이 코를 싸쥐고 "매앵꽁, 매앵꽁." 하고 커다랗게 흉내를 내서 여러 사람은 천장을 우러러 간간대소를 하였다. 여학생들은 킬킬거리고 웃어 대다가 눈물을 다 질금질금 흘린다. 그러자 "웃을 얘기가 아니오!" "쉬 ㅡ, 조용들 합시다." 하고 꾸짖듯 하는 소리가 회장 한복판에서 들렸다. 동혁이도 검붉은 얼굴에 떠돌던 웃음을 지워버리고 한 걸음 다가서며 "나 역시 이 자리를 웃음 바탕을 만들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닙니다. 이보다 더 비참한 현실과 부딪쳐서 더 한층 쓰라린 체험을 하신 분도 많을 줄 알면서도 다만 한 가지 예를 들었을 뿐입니다." 하고 잠시 눈을 꼭 감고 침묵하더니 손을 번쩍 쳐들며 "그러나 여러분! 끝으로 꼭 한마디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고 목청을 높여 힘차게 청중에게 소리친다. 대원들은 물론 사회자까지도 다시금 긴장해서 움숙해진 동혁의 얼굴만 주목한다. "눈 뜬 소경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필요합니다. 계몽 운동이 우리에게 잇어서 가장 시급한 사업중의 하나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지식 분자인 우리들이 이러한 기회에 전 조선의 농촌, 어촌, 산촌으로 방방곡곡에 파고 들어가서 그네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네들이 그 더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하는 문제를 머리를 싸매고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부터 육칠십 년 전 노서아의 청년들의 부르짖던 브나로드를 지금 와서야 우리가 입내 내듯 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부끄러운 일 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남에게 뒤떨어진 것을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높직이 앉아서 민중을 관찰하거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태도를 단연히 버리고, 그네들이 즉 우리 조선 사람이 제 힘으로써 다시 살아나기 위한 그 기초 공사를 해야겠습니다. 오늘저녁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의 손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물지로, 즉 경제적으로는 일조일석에 부활하기가 어렵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것을 비재하고 온갖 행동의 원동력이 되는 정신, 요샛말로 '이데올로기'를 통일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끝마다 힘을 주다가,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를 못살게 구는 적이, 고쳐 말씀하면 우리의 원수가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하고 나서, 그는 무슨 범인이나 찾는 듯한 눈초리로 청중을 돌아 본 뒤에 손가락을 펴들어 저의 머리통을 가리키며 "그 원수가 이 속에 들었습니다. '아이구, 인제는 죽는구나.' , '너 나 할 것 없이 모조리 굶어 죽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절망과 탄식! 이것 때문에 우리는 두 눈을 멀거니 뜬 채 피를 봅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지레짐작 즉 선입관념이 골수에 박혀 있는 까닭에 우리가 피만 식지 않은 송장 노릇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야 천치 바보가 아닌 담에야 우리의 현실을 낙관할 수야 없겠지요, 덮어놓고 '기운을 차려라.' , " 벌떡 일어나 달음박질을 해라 ' 하고 고함을 지르며 채찍질을 한대도 몇십 년이나 앓던 중병 환자가 벌떡 일어나지야 못하겠지요. 그렇지만 ... ... ," 하고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며 혀끝으로 불을 뿜는 듯한 열변에 회장은 유리창이 깨어질 듯한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옳소 ㅡ." "그렇소 ㅡ." 하는 고함과 함께 "그건 탈선이오." 하고 반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동혁은 금세 눈초리가 실쭉해지더니 "어째서 탈선이란 말이오?" 하고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며 목소리가 난 쪽을 노려보는 판에, 사회자는 동혁의 겉으로 가서 무어라고 귓속말을 한다. "중지시킬 권리가 없소!" "말해라, 말해!" 이번에는 발을 구르며 사회자를 공박하는 소리로 장내가 물 끓듯 한다 동혁은 그 자리에 꿈쩍도 안 하고 버티고 서서 매우 흥분된 어조로.
이름없음 2018/08/12 17:01:06 ID : 2q3PhasmJQt
"지금은 시간의 자유까지도 없지만 내 의견과 틀리는 분은 이 회가 파한 뒤에 얼마든지 토론을 합시다." 하고 누구든지 덤벼라! 하는 기세를 보이더니 "나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 민중에게 우선 희망의 정신과 용기를 길러 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우리 계몽 운동 대원의 가장 큰 사명이라 믿습니다. 동시에 여러분도 이 신조를 다 같이 지키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동혁은 성량껏 부르짖고는 교복 소매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회자는 아까보다도 더 정중한 태도를 짓고 동혁이가 섰던 자리로 가서, 장내가 정숙해지기를 기다려 "박동혁 군의 말은 개념적이나마 누구나 존중해야 할 좋은 의견으로 압니다." 하고는 "그러나 현재의 정세로 보아서 어느 시기까지는 계몽 운동과 사상운동을 절대로 혼동해서는 아니 됩니다. 계몽 운동은 계몽 운동에 그칠 따름이지, 부질없이 혼동해 가지고 공연한 데까지 폐해를 끼칠 까닭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하고 단단히 주의를 시킨다. 그때에 한구석에서 "에그, 추워 ㅡ." 하고 일부러 어깨와 목소리를 떠는 학생이 있었다. 동혁의 뒤를 이어 서너 사람이나 판에 박은 듯한 경과보고가 지루하게 있은 후, 사회자는 "이번에는 금년에 처음으로 참가한 여자 대원 중에서 제일 좋은 성적을 나타낸 00여자 신학교에 재학 중인 채영신 양의 감상담이 있겟습니다." 하고 회장 오른편에 여자들이 모여앉은 데를 바라다본다.남학생들은 그 편으로머리를 굴리며 손뼉을 친다. 채영신이라고 불린 여자는 한참 만에 얼굴이 딸기빛이 되어가지고 일어서더니 "전 아무 말도 하기 싫습니다!" 하고 머리를 내저으며 여무지게 한마디를 하고는 펄썩 앉아 버린다. 사회자는 영문을 몰라서 눈이 둥그레 졌다. 뜻밖에 미리 약속까지 하였던 여자가 말하기를 딱 거절하는 데는 사회자와 청중이 함께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말합시다." "그 대신 독창이래두 시키세." 상대자가 여자인 까닭에 더욱 호기심을 가진 남학생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음악회에서 억지로 끌어내어 재청이나 시키는 것처럼 짓곶게 박수를 하며 야단들이다. "간단하게나마 말씀해 주시지요." 사회자는 좀 무색한 듯이 채영신이가 앉은 편으로 몇 걸음 다가오며 어서 일어나기를 권한다. 그래도 영신은 꼼짝도 아니하고 앉았다가 곁에서 동지들이 옆구리를 찌그로 등을 떠다밀어서 마지못해 일어났다. 서울 여자들은 잠자리 날개처럼 속살이 하얗게 내비치는 깨끼적삼에 무늬가 혼란한 조세트나 근래에 유행하는 수박색 코로나프레프 같은 박래품으로 치마를 정강마루까지 추켜 입고 다닐 때건만 그는 언뜻 보기에도 수수한 굵다란 광당포 적삼에 검정 해동 치마를 입었고, 화장품과는 인연이 없는 듯 시골서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과년한 처녀를 붙들어다 세워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얼굴에 두드러진 특징은 없어도 청중을 둘러보는 두 눈동자는 인텔리 여성다운 이지가 샛별처럼 빛난다. 그는 사회자를 쏘아보며 "첫째, 이런 자리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지는 모르지만, 남이 다 말을 하고 난 맨 끄트머리에 언권을 주는 것이 몹시 불쾌합니다." 새되고 결곡한 목소리다. "흥, 엔간한걸." "여간내기가 아닌데." 남학생들은 혀를 내두르며 수군거린다. 제자리에 돌아와 이제껏 흥분을 가라앉히느라고 눈을 딱 감고 있던 동혁이도 얼굴을 쳐들고 채영신의 편을 주목한다.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영신은 말을 이어 "둘째는 제 속에 있는 말씀을 솔직하게 쏟아 놓고는 싶어두요, 사회하시는 분이 또 무어라고 제재를 하실 테니깐, 구차스레 그런 속박을 받아 가면서까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 하고 다시 앉아 버린다. 이번에는 여자 석에서 손뼉 치는 소리가 생철 지붕에 소낙비 쏟아지듯 한다. 사회자는 그만 무안에 취해서 얼굴을 붉히며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아까 박동혁 군이 말할 때는 시간이 없다고 주의를 시킨 것이지 말의 내용을 간섭한 것은 아닙니다." 하고 뿌옇게 발뺌을 한다. 그러자 동혁이가 벌떡 일어나 나치식으로 팔을 들며 "사회!" 하고 회장이 쩌렁쩌렁하도록 부른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기회에 우리는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고 싶습니다. 우선 지도원리를 통일해 놓고 나서 깃발을 드는 것이 일의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톡톡히 항의를 한다. 사회자는 시계를 꺼내 보고 사교적 웃음을 띄며 "채영신 씨 그럼 내년에는 맨 먼첨 언권을 드릴 테니 그렇게 고집하지 마시고 말씀하시지요." 하고는 장내의 공기를 완화시키려고 슬쩍 농친다. 영신은 다시 망설이다가, 이번에는 대접상으로 간신히 일어났다. 저는 금년에야 참가를 했으니가 이렇다고 보고를 할 만한 재료가 없고요, 고생을 좀 했다고 자랑할 것도 못 될 줄 압니다. 그저 앞으로 이 운동을 꾸준하게 해 나갈 결심이 굳을 뿐이니까요." 하고는 그 영채가 도는 눈을 사방으로 돌리더니 "그렇지만 저 역시 여러분께 우리 계몽대의 운동이 글자를 가르치는 데만 그치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거의 전부라고 할 만한 절대 다수인 농민들의 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우선 그네들에게 희망의 정신을 넣어 주자는 ... ... ." 하다가 상막해서 잠시 이름을 생각해 보더니 " ... ... 박동혁 씨의 의견에 저도 전적 동감입니다!" 하고 남학생 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여러분은 학교를 졸업하면 양복을 갈아 붙이고 의자를 타고 앉아서 월급이나 타 먹으려는 공상부터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 남녀가 총동원을 해서 머리를 동쳐 매고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서 우리의 농촌, 어촌, 산촌을 붙들지 않으면, 그네들을 위해서 한 몸을 희생해 바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거듭나지 못합니다!" 그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고만 쓰러지듯이 앉아버린다. 장내는 엄숙한 기분에 잠겼다 말썽을 부리던 남학생들도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 그네들의 머릿속에도 감격의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매우 긴장된 중에 K 보육학교 학생들의 코러스로 간친회는 파하였다. 동혁은 여러 학생들 틈에 섞여서 서대문행 전차를 탔다 전차가 막 떠나려는데, 놓치면 큰일이나 날 듯이 뛰어오르는 한 여학생이 있다. 그는 동혁에게 생후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준 채영신이었다. 영신은 승객들에게 밀려서 동혁이가 걸터앉은 데까지 와서는 손밥이를 붙들고 섰다. 두 사람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검붉은 얼굴을 서로 무릎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대하게 되었다. 그들은 저도 모르는 겨를에 서로 목례를 주고받았다. 비록 오늘 저녁 공석에서 처음 대면을 하였건만,여러 해 사귀어 온 지기와 같이 피차에 반가웠던 것이다. 동혁은 앉아 있기가 미안해서 "이리 앉으시지요." 하고 일어서며 자리를 내준다. 영신은 머리를 숙이며 "고맙습니다. 전 섰는 게 시원해 좋아요." 하고 사양하면서 도리어 반걸음쯤 물러선다. 동혁은 아직도 애티가 남아있어 귀염성스러운 영신의 입모습을 보았다. 그 입모습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소를 보았다.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더 시원한데요." 동혁은 엉거주춤하고 자꾸만 앉기를 권한다. "어서 앉아 계세요. 전 괜찮아요." "그럼 나도 서겠습니다." 동혁이가 반쯤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다른 승객이 냉큼 뚱뚱한 궁둥이를 들이밀었다. 동혁은 '어지간히 고집이 세구나.' 하면서도, 영신이가 저를 연약한 여자라고 자리를 사양하는 그런 대우가 받기 싫어서 굳이 앉지 않는 줄은 몰랐으리라. 차 속이 부퍼서 두 사람은 손잡이 하나를 나누어 쥐고 옷이 스치도록 나란히 섰건만 "되레 미안합니다." "천만에요." 하고 한마디씩 주고 받은 다음에는 말이 없었다. 운전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밤바람은 여간 시원하지가 않다. 영신은 앞머리카락이 자꾸만 이마를 간질여서, 물동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뿌리듯 한다. 한 발자국쯤 앞에 선 동혁의 안반같은 잔등이에서는 교복에 전 땀 냄새가 영신의 코에까지 맡인다. 그러나 한여름 동안 머리도 감지 않은 촌 여편네들과 세수도 변변히 아지 않은 아이들 틈에 끼어 지내서,시크무레한 땀내가 코에 밴 영신은 동혁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고개를 돌리도록 불쾌하지는 않았다. 전차가 '감영'앞에 와 정거를 하자, 영신은 앞을 비비고 나서며 "전 여기서 내립니다." 하고 공손히 예를 한다. 동혁은 목을 늘이고 창밖을 내다보더니 "나도 여기서 내려야 겠는데요." 하고 영신의 뒤를따라 내렸다. 안전지대에서 두 사람은 즉시 헤어지지를 못하고 서성서성하다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동혁이가 물었다. "학교 기숙사로 가서 잘 텐데, 문 닫을 시간이 지나서 걱정이야요. 여간 규칙이 엄해야죠. 시간이 급해서 사감한텐 말도 못하고 나왔는데요." 180812 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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