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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8/09/09 03:28:03 ID : 7zhy5bDAi7h
" 긴급속보입니다. 일본에서만 불다가 갈 줄 알았던 태풍이 한국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오전 3시쯤, 모든 사람과 차를 휩쓸 태풍이 제주에서부터 올라올 예정입니다. 9시엔 서울을 모두 점령할 것이오니, 신속하게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
이름없음 2018/09/09 03:30:41 ID : 7zhy5bDAi7h
...뭐라고? 오후9시, 늦은 저녁식사를 하던 중 난데없는 뉴스에 가족들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저 심각한 사태를 6시간 전에 알리다니, 제주도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는거야?
이름없음 2018/09/09 03:41:34 ID : 7zhy5bDAi7h
" 미쳤어! 아직 쌀도 안 사놨는데! " 마른 수건을 곱게 접던 엄마는 옆에서 졸고있던 아빠의 어깨를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 아씨 깜짝이야. 뭐야,뭔데?! " 아빠는 턱까지 흐른 침을 닦으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뉴스를 보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 이 망할! 어쩌자고 그런 것도 빨리빨리 안사놔?! 지금까지 뭐하다가 그걸 이제야 말하는 거냐고!! 지금 나가서 사와야... " " 아빠,아빠 진정해. 저걸 봐. " 나는 당장 엄마가 곱게 개어놨던 모든 빨래를 아빠가 망치기라도 할까봐 진정시켰다. " 지금 영업중인 모든 마트, 가게들은 신속히 정리후 최대한 빠른 귀가를 바라며, 편의점은 오전 12시까지만 영업 바라겠습니다. 모든 분들께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필요한 것들만 편의점에서 구입해주십시오. " 아빠는 뉴스를 보더니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 보도자들 정신 나갔네. "
이름없음 2018/09/09 03:53:21 ID : 7zhy5bDAi7h
아직 3살밖에 안 됐지만 쓸데없이 상황파악이 빠른 동생 보아는 목놓고 울기까지 했다. " 우엑!!! 듕는거 시더!!!!!! " " 아니, 이런걸로 안죽어 보아야.. " 당황한 나는 당장 달려가서 보아를 달랬다. " 안듀거..? " 울음이 뚝 그친 보아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 모습에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당연하지! 엄마,아빠,언니가 보아옆에 꼭 붙어있는데 왜죽어?? " 그말을 들은 보아의 얼굴은 이내 웃음꽃을 만발하였다. " 헿ㅎ 그럼 지성이도 볼 수 있겠다!! " " 지성이..? " 보아의 입에서 나온 갑작스런 이름에 의문을 품자, " 웅! 여더띠에 안개뇨이터에서 보기됴 해떠~" ... 뭐?
이름없음 2018/09/09 04:03:32 ID : 7zhy5bDAi7h
아니 8시면 태풍이 서울로 오는 시간인데?!!? 근데 어떻게 아직 3살밖에 안 된 보아가 약속이라는 개념을 가지고있지..? 아니 그보다, 그 지성이라는 애 엄마가 내일 그 놀이터로 보내긴 할까? 나는 혼란스러움과 자꾸만 불어나는 내적 질문들을 감출 수 없었다. " 보아야.. 그거 엄마도 알아? " 조용히 속삭여보았다. 엄마가 아시기라도 한다면, 절대 보내시지 않을 테니까. 보아는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다. " 있잖아 보아야, 엄마가 알게되면 무조~~건 안보낼거야. " " 왜?? 디성이당 이뎌케 손가댝거고 약똑햇는데?? " " 맞아, 지성이랑 약속은 지켜야지. 근데... 내일 태풍이 보아를 잡아갈지도 몰라! 지성이도 잡아갈 수도 있어!! 그래서 지성이는 잡혀가는게 무서워서 안나올 수도 있는데, 그래도 갈거야? " " 시뎌. 안답혀 가꺼야. " 보아는 울먹이며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크 너무 귀엽다 진짜...
이름없음 2018/09/09 04:10:12 ID : 7zhy5bDAi7h
그렇게 설득된 줄 알고 폰하러 가려던 찰나였다. " 근뎨... 지덩이가 꼭 오라해떠.. 안가면 내 툐코이(초콜릿) 업다고,... " " 지성이가 초콜릿 뺏어갔어?! " " 아니.. 그양 준대떠.. 그디고 내가 됴아하는 이녕도 둔대떠... " 하.. 짜식 보아가 좋아하는 인형이랑 초콜릿으로 마음을 사려하다니, 3살주제에 퍽 똑똑하잖아? " 그 초콜릿이랑 인형, 나중에 언니가 많이사줄게. 내일만 지나면... 그러니까 내일만 참자, 응? " " 시뎌!!!! 지덩이 만나꺼야!!! " 그래 내말이 통할리가 있겠니 허허. 제법 씁쓸해진 나는 이것저것 방안을 고민해보려 노력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름없음 2018/09/09 04:18:16 ID : 7zhy5bDAi7h
보아의 괴성(?)을 들은 엄마는 놀라 다그치듯 말했다. " 무조건 니가 양보해라. 아직 3살이다. " 응 그래... 애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도 양보해야 하는구나.. 이참에 엄마한테 말해서 보아를 못나가게 막고 싶었지만, 만약 진짜로 지성이가 나오면 약속을 깨게 된다고 생각하니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제비가 내 목숨이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보아는 꼭 품에 안고 날아가야지. 그 어려운 결심만 여러번하다 잠이 들었다. 그날 밤은 진짜 제비의 옷을 입은 보아가 초콜릿으로 나를 쪼아대는 개꿈을 꾸었다.
이름없음 2018/09/09 04:26:18 ID : 7zhy5bDAi7h
눈부시게 따뜻한 햇빛이 춤을추며 다가와 내 몸을 간질여 나를 깨웠다. ...라는 아침은 오지 않았다. 대신에 묵직한 먹구름들이 아직도 쳐자고 있냐는 듯 내려보기만 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30분 전이였다. 7시 30분, 준비해서 나가기에 적당한 시간이 내게 주어졌지만, 방도를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름없음 2018/09/09 04:31:36 ID : 7zhy5bDAi7h
나는 당장 보아를 몰래 깨웠다. " 보아야! 일어나야지! 지성이 만나자. " " 으응... " " 쉿! 엄마아빠 몰래 가는거니까 조용히 나가자. " " 웅! " 급하게 상황파악을 한 천재 3살꼬마 보아는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그동안 나는 머리를 감고 말린 뒤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은 간단하게 식빵을 먹고, 우리는 나가려고 했다. " 어디가니? "
이름없음 2018/09/09 04:34:28 ID : 7zhy5bDAi7h
엄마?! 그래요 맞아요 우리의 약속은 여기까ㅈ... 아 아빠네. " 그냥 잠깐 앞에 아주 잠깐만 다녀올라고. " 나는 엄마가 깨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오늘같은 날 감히 어딜가냐며 버럭 성질을 낼 아빠가 졸음이 든든한 무기가 됐는지 늦지 말라고 한 뒤 하품을 길게 내뱉으며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름없음 2018/09/09 04:42:58 ID : 7zhy5bDAi7h
현관문, 그리고 공동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어쩐지 강한 바람이 자꾸만 맨살을 스치며 갔다. 나는 바람이 세질수록 보아의 손을 더 꼭 붙잡았다. 그렇게 바람과 1:1로 맞장을 뜨며 앞으로 나아가다보니 '안개놀이터'라고 둥글게 적힌 팻말이 멀리에서 보였다. 나는 재빨리 그 놀이터에 남자애기가 있는지 훑어보았지만, 남자애기는 무슨 사람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오전8시 01분이였다. 그럼에도 없다는 건 안온다는 게 틀림 없었다. " 거봐, 없지? " 보아는 매우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집에 가자는 나에게 이끌리듯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자꾸만 놀이터쪽을 뒤돌아보며 갔다. 집에 거의 다온 우리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공동 현관문을 들어가려 했다. 그러던 찰나,
이름없음 2018/09/09 04:47:02 ID : 7zhy5bDAi7h
보아는 내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서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 보아야!!!!! " 그때, 저멀리서 멀쩡히 서있던 차 한대가 난데없이 날아갔다. 이대로는 안돼!!!!!! 나는 보아가 있는 쪽을 향해 젖먹던 힘까지 써가며 달렸다. 보아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보아앞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차마저 날아가버렸다. 차 : ㅅㅂ... 인생 최대의 위기의 순간이였다.
이름없음 2018/09/09 04:53:24 ID : 7zhy5bDAi7h
나는 보아를 있는힘껏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 보아야, 너만큼은 내 품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는 게 아니였는데, 많이 모자란 언니를 용서해줘... .... ....? 어째서인지 바람소리가 그쳤다. 무슨일인 지는 몰라도, 보아의 대각선에 있는 자동차까진 날아갔었는데, 그 후 바람이 말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게 뭐람.... ' 털썩. ' 안도의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보아의 반복되는 [언니!! 왜그대?!] 라는 말조차 들어줄 새없이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때였다.
이름없음 2018/09/09 05:05:00 ID : 7zhy5bDAi7h
" 괜찮아요?! " 자상하게 생긴 한 남자가 다급하게 달려온다. 이내 나와 보아앞에서 멈추더니 숨도 제대로 못가누면서 저 하고싶은 말을 했다. " 헉..헉.. 차들이 후 막 날아가길래.. 헥 그쪽들도 날아가는 줄만 알았어요.. " 정말? 그러기엔 기막힌 타이밍이다. 마치 나를 구해주기라도 한 듯 그는 말과는 다르게 안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 네, 덕분에 살았네요. " " 덕분..이라뇨? " 그는 의아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아 뭐, 저를 이렇게 걱정해준 덕분이라는 거죠. 이렇게라도 살았으니 다행이잖아요. 그쪽도 용케 살아있고요. " 나는 엉덩이를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네 맞아요. 쓰레기 버리러 나왔는데 제가 쓰레기가 되는 줄 알았다니깐요? " " 아ㅋㅋㅋㅋㅋ " 이 남자는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잘도 나오나보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손에 쓰레기 봉투가 없는걸 보니 쓰레기도 날아갔나보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어떻게 살았지?
이름없음 2018/09/09 05:13:39 ID : 7zhy5bDAi7h
모든 것들이 의문 투성이였지만, 어쨌든 죽다 살아났으니 그걸로 만족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갔다가 엄마한테 엄청 혼났긴 했지만, 보아와 나는 마주보며 서로 웃기다며 웃어댔다. 여느때와는 조금 특별했던 일요일 오전, 생사를 오고갔던 일요일 오전, 하지만 멋진 남자를 알게된 것같기도 했던 일요일 오전이 조용히 마무리 되어갔다. 점심은 어쩔 수없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 " 어제 편의점에서 햇반이라도 사올걸... " 엄마는 익어가는 라면에 계란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 앞으로는 그런거 미리미리 합시다. 올바른 나처럼 말이야. " " 피곤하다고 침흘리던 게 누구였더라? " " 그러는 당신도 강동X인지 참치캔인지 오빠~거리면서 잘 자더만? " " 뭐요? 방금 말 다했어요? " 또 또 시작이다. 그냥 내가 보아에게 상념을 퍼붓지 말고 편의점 갔다올걸... " 에휴-- "
이름없음 2018/09/09 11:50:37 ID : 7zhy5bDAi7h
나는 엄마와 아빠의 다툼이 지겹다는 걸 표현이라도 한 듯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보글보글 끓던 라면은 이내 꺼지더니 탐나는 msg의 향기를 계속해서 뿜고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마치 라면이 ' 빨리와서 당장 모두 흡입해 ' 라면서 나를 유혹하고 있는 듯 했다. " 그래 사랑스러운 애기들아 모두 내 뱃속으로 들어오련~~♥ " 행복한 표정으로 냄비에 담긴 라면을 그릇으로 옮기려고 할 때였다. " 뭐야? 니껀 니가 끓여먹어. " ..? 와 치사하다. 딱 아빠랑 엄마것만 끓였네. 하긴, 한꺼번에 4개를 끓이는 건 쉬운일이 아니긴 하다만... 그래, 나와 보아꺼는 내가 해먹어야겠다. msg의 냄새가 보아의 청각신경까지 유혹해 버렸는지, 보아가 졸졸 쫓아와서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 다면! 다면!! " 침흘리는 자신을 제어못한 채 보아는 엄마가 그릇으로 옮기는 라면을 바라보았다. " 응, 라면 언니가 맛있게 해줄게. " " 시뎌, 저거 머그꺼야!!! " " 아니야, 저거 엄마랑 아빠거야. 좀만 기다려~ 언니가 맛있게 끓여줄게~ " " 우엑!!!! " 떼를 쓰는 보아를 뒤로한 채 라면의 자취가 남아있는 냄비를 헹궈서 새 물을 올렸다. --------------------------------------------------------------------------------------- (앞으론 끝나는 이야기엔 경계선 추가!
이름없음 2018/09/09 11:58:46 ID : 7zhy5bDAi7h
상쾌한 바람이 내 속눈썹에서 미끄럼틀을 탔다. 한산한 어느 9월의 월요일 아침, 7시 5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입밖으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 ㅎㅎ..뭐라고, 시계야? " 나는 졸린 눈으로 해맑은 미소를 띄우며 시계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 아니 ㅎㅎ 시계야,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 거실을 나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보아를 데리고 아침부터 정모를 나갔고, 아빠는 이미 6시에 출근하고 없었다. ...망했다. 학교까지 약 20분 거리인 나는 머리를 감을 새도 없이 옷만 갈아입고 재빨리 나갔다. 어제 보아를 쫓아가던 그 힘을 다해서 달린다!!! 실시!!!! 이런 군대 상황극을 하고있자니, 갑자기 억울해졌다. 아니 내가 왜 이틀 연속으로 이렇게 달려야하지? 하지만 연속으로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 하늘을 한탄할 수도 없었다.
이름없음 2018/09/09 13:11:47 ID : 7zhy5bDAi7h
저 멀리서 내가 타야하는 버스가 우뚝 멈춰섰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버스를 잡기 위해 더 죽을 듯이 달렸다. 더욱 거칠어진 숨을 연신 내뱉어대며 겨우 버스를 올라타 카드를 찍고나서야 안정이 되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버스안은 매우 혼잡했다. 그 사이를 겨우 헤집고 들어가 뒷문앞에 서서 미리 내릴 준비를 하였다. 제발 신호야, 오늘만큼은 꺼져줘라. 그런 내 염원을 누가 듣기라도 한 듯, 버스는 신호등마다 거뜬히 건넜다. 그 광경을 보고있자니 행복과 안도감이 나에게서 공존하였다. 하지만 그 때, 운전자의 갑작스런 급브레이크에 나는 어떤 사람에게 기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뒤돌고 있던 것도 아니였고 정면이라 그런지 그사람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어버렸다. 그사람보다 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나는 당장 사과를 하려고 뒤를 돌았다. " 죄송합ㄴ...어? "
이름없음 2018/09/09 13:24:16 ID : 7zhy5bDAi7h
그 사람의 이목구비를 두 홍채로 인식한 나는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 마치 내 놀람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제보다 더 눈부신 미소를 내게 보였다. " 네? 네.. 안녕하세요. 근데 혹시, 과일 고등학교 학생이세요? " 그가 입고있는 교복이 우리학교 남자 동복이였다. 우리학교 교복이 흔한 교복도 아니라서 비슷한 교복이 있을 리는 없었다. " 네, 맞아요. " " 혹시.. 몇학년이세요? " " 2학년 2반이에요~ " 묻지 않은 반까지 대답하며 그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갑작스런 햇살이 그의 얼굴을 돋보이게 한다. 그를 보던 여자들이 하나같이 넋놓고 빠져있었다. " 와...진짜 잘생겼다... " " 저 여자보다 예쁜 미소좀 봐... " 그들은 제말이 들리던 말던 그의 얼굴에 대한 솔직한 말을 연신 내뱉었다. 여자보다 예쁜미소... 확실히 그는 ' 눈부시게 쏟아지는 황금 달빛 아래 수억개의 프리즘을 지닌 보석이 깨질 듯 ' 한 미소를 지녔다. 하지만 곧 의구심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저렇게 웃어도 입가에 경련이 안나다니? 그리고 그 의구심은 나를 뭔가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경계하자. 저 미소속에 담긴 의미와 나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접근한 목적이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속은 알다가도 모르는 법이니, 너무 저사람을 믿지 말자. 대신 나도 질세라 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 나랑 동갑이네. 말 편하게 놔. " 그는 순간적으로 일시정지를 누른 듯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름없음 2018/09/09 13:37:44 ID : 7zhy5bDAi7h
------------------------------------------------------------------------------------------- 저 아이가 저렇게나 예뻤었나? 이상하다, 저정도면 널리고 널린 여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내 정보에 오류가 있었던 건가? 2150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라온 나 ' 크리스미 쇼안 ' 은 한가지 부족한 점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 고귀한 신분으로 인해 나날들이 따분하기 그지 없다는 점이였다. 2160년, 내가 9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분으로 인해 누군가는 불행하고 누군가는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당시의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분이 낮을 수록 불행하다고? 지금 나는 이 신분에도 따분하다는 불행을 겪고 있는데? 내 하인 중 한명이자 친구인 러바이스 해비는 전혀 불행해보이지 않았다. 항상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해비에게 나는 직접 물어보자고 결심했다. " 해비! 해비! " " 어쩐 일이십니까, 쇼안 리프님? " 리프는 리틀 프린스의 줄임말이다. 왕의 자식이라 하여 여기선 그렇게 불린다. 해비는 따뜻한 미소로 물어봤다. 역시.. 해비는 불행한 게 아니였어. 그럼 신분이 낮아도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가? 나는 곧 나오려던 질문을 도로 삼켰다. " 같이 놀자. " 해비는 더욱 짙은 미소로 말했다. " 좋아요, 오늘은 무얼 할까요? " 그렇게 해비덕에 심심함을 달래가며 나날을 보냈다.
이름없음 2018/09/09 13:43:57 ID : 7zhy5bDAi7h
내가 12살이 되고, 하루는 해비가 우리엄마한테 혼나고 있던 걸 문틈으로 보아버렸다. " 너! 그게 얼마나 큰 위험인지는 알고 하는거냐?!! " " 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 해비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 송구합니다만, 온 세상이 말린다 해도 제 생각을 거두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 네이놈... " " 부디 저를 믿어주십시오. " " 마음대로 해라. " 무슨말이지? 대체 해비가 뭘 하려고 하길래? 당장 해비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엿들었다는 걸 알면 또 엄청 화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장 방으로 달려가 자는 척을 했다.
이름없음 2018/09/09 13:51:43 ID : 7zhy5bDAi7h
이불을 덮고 눈을 감은 뒤 5초만에 누군가 내 침대 옆의 의자에 앉는 듯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 리프님... " 해비의 목소리였다. 곧 내 손을 잡은 그는 내 손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상했다. 항상 미소만 짓고다니던 해비가? 해비가 아닌가 의심도 들었지만, 목소리와 저 온기는 해비일 수밖에 없었다. 해비는 눈물을 멈추더니 곧 힘겹게 말했다. " 쇼안님, 저는 지금까지 제 불행을 감추고 그 불행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언제나 미소를 지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차마 미소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분명 미소를 지으면 미친놈일 겁니다. " 그랬구나.. 항상 미소만 지어왔던 해비에게는 그런 사연이 숨겨져있던 것이였다. 그런데, 어째서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상황이, 그토록 해맑던 해비의 미소까지 앗아간 거지?
이름없음 2018/09/09 14:07:03 ID : 7zhy5bDAi7h
나는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어 곧바로 눈을 떴다. " 헉..! 취침 중이 아니셨... " " 무슨 일이야? 네가 말한 게 대체 어떤 상황인데? " 나는 놀라 동그랗게 벌어진 해비의 눈에서마저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 그게... " 해비는 말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 넌 내 하나뿐인 친구잖아. 응? 그런 것쯤은 나한테 털어놔도 돼. " " 안됩니다. 상황이 .. 그래, 상황이 마무리되면 그때 말해드릴게요. " " 쳇.. 알겠어. 그땐 꼭 말해줘야 한다? " 이렇게까지 말을 안하는 걸 보면 분명 해비에게도 사연이 있겠지, 나는 해비를 기다려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 한심한 결심은 훗날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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