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먼저 제시해볼게. 구름 먼지 희망

>>201 신에게 대항한 댓가로 그 어느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못하는 헛된 용기라는 벌을 얻었으니,

>>203 사랑하는 그대의 사진을 꺼내들어 마지막으로 찬찬히 눈에 담았다. 눈가가 시큰했다. 금새 눈물이 맺혀 시야가 어룽어룽해졌다. 주먹으로 사진을 꼬깃하게 만들어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버렸다. 그대는 내 곁에 없는데 내 마음만이 커져가는 것 같아서, 그대를 잊으려고. 너무 아팠지만 어쩌면 조금은 후련했다. - - 하지만 그대, 십여년이 지난 아직도 그대를 그리워하노라고 ... ... .

>>205 있잖아, 나 사실 꽃다발을 좋아해. 네가 아무 날도 아닌 날에 나한테 예쁜 꽃 한 다발이라도 사주길 바라고 있었어. 오늘 하루는 강의를 빠지고 꽃구경을 가자고 너와 함께라면 그래도 된다고, 사실 내가 준 그 꽃보다 저기 흐드러지게 핀 벚꽃보다 내 옆에 있는 네가 훨씬 더 예쁘다고 말하길 바라고 있었어. 오늘은 활짝 핀 꽃잎조차도 우리를 위한 축복처럼 쏟아지지 않냐고 하길 바라고 있었어. 그저 네가 사랑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어. 있잖아, 그동안 힘들었지? 이제 네가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더는 지치지도 미안해하지도 않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한껏 사랑해줘. 그 사람에게 예쁜 꽃을 선물한 다음 고운 얼굴을 붙잡고 잔뜩 입을 맞춰줘. 하늘에서 떨어지는 여린 꽃잎조차 그 사람을 해칠까 두려워하며 쏟아지는 꽃비를 대신 맞아줘. 이젠 그래도 돼. 너 이제 그 사람 사랑해도 돼.

향수(동음이의어 중 어떤거라도 상관없음!) 가로등 바이올린

>>207 바이올린 알못...ㅠ쏘리 운동화 앞코에서 가로등이 작게 밝힌 한 담벼락 구석탱이로 눈길이 닿았다. 급한 이사에 처리도 못한 물건들인듯, 틈이 벌어지고 헤져버린 종이박스 안에는 주인 빼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것들이 가득히 밀어넣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홀로 멀쩡한 상태로 담벽에 기대어져 있는 바이올린이 하나 있었다. 케이스는 어디로 떨어져나갔는지, 활만 위태하게 검은 현들 사이로 꽂혀있는 채였다. 희멀건 가로등 불빛에, 바이올린을 만진 흔적들로 가득한 부분부분이 번들거렸다. 옅은 향수가 머리인지 가슴인지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슬픔은 부재한 그저 환하기만 한 기억이었으나, 슬픔은 없는 곳에서도 잘만 젖어들어갔다. 작았던 시절, 부모님 말씀에 바이올린을 시작해서, 제법 열심히 연습한 기억. 눈을 내리깐 옆자리 아이의 동작을 훔쳐보며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나이가 들어서는 미련 없이 그만둔 바이올린 학원. 지금은 여렸던 손이 두터워져, 그 손에 익은 기억들은 금새 다 날아가서. 바이올린을 킬 줄 아냐는 물음에는 아니라고만 답하고 있다.

간판, 나와 전체, 페닐에틸아민(사랑할 때 나오는 호르몬)

>>209 개인이라는 것은 특별한 단어다. 전체로서 존재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속에서 꿋꿋하게 개성이라는 간판을 들고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남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자리 따윈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리고 부르짖는다. 나는 그 간판을 매일 스쳐지나갔다. 간판을 든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자유를 갈망하다 결국 돌아올 자리 마저 잃어버린 사람. 어느날, 그 사람이 지나가던 내 뒷모습에 속삭였다. '너를 버리면서까지 그 자리에 있는게 무슨소용인데?' 탓하는 것이 아닌, 담담한 말투이기에 더욱 묵직한 한마디였다. 순수한 의문. 나는 그 의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자리에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니 예전에 누군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페닐아틴아민이라고 알아? 사랑을 하면 나오는 호르몬이래. 그럼 지금 너와 나한테는 그 호르몬이 나올까? 나는 웃으며 대답했었다. 사랑은 겨우 몇방울의 호르몬 따위로 판별할 수 없다고. 그 말을 들으며 웃던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다. 간판을 든 남자가 말했다. 네가 개인으로서 살때 행복할거라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전체로서, 개인의 감정을 버리고 살 때 보다는 많은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며, 적어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거라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낮에도 보이지 않던 남자의 얼굴이 달빛에 비쳐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나는 저렇게 웃었었지. 그곳에는 내가 슬프게 웃고있었다.

로봇. 멸망이후. 인간.

>>211 인간이 멸망했다. 세일은 예견된 사건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수 년 전부터 수 만 가지의 가능성들을 계산해 그 도출값들을 거짓 없이 내밀어도, 민지는 그저 웃었다. 희망은 가져보자고 역으로 제안하며. 민지는 세일에게 인간으로 세상을 겪을 기회를 주었다. 알고리즘에게 상황마다 어떻게 반응할지 알려줘 감정을 만들어줬고, 만들어준 감정들을 바탕으로 가족이 되어주었다. 실제로 세일의 성격은 민지와 아주 유사했다. 아마 인간에게도 두루뭉술한 감정이라는 개념을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심어줘서 그럴 것이라고 민지는 설명했다. 그럼에 더 닮은 가족같다고 좋아도 했다. 그렇게 감정과 가족을 갖게 된 세일은 그럼에도 희망은 끝까지 익히지 못했다. 세일은 미래를, 또는 수 만 가지의 가능성 있는 미래들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의 상황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 가능성들 중에서도 가장 희박한 것들을 소망하는 민지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세일이 예견된 미래에 민지가 여전히 자신과 함께하기를 원하는 절망과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인간이 멸망했다. 세일은 가족을 잃었지만, 가족이 남겨준 감정들은 여전히 잔존했다. 희망만을 익히지 못한 로봇은 슬픔에만 빠질 수밖에 없는, 그런 정해진 미래뿐이었다.

>>213 당신께서는 제가 전쟁을 일으키길 원하셨습니다. 버튼을 눌러라. 그게 당신의 유언이었지요. 충혈된 눈으로 저를 바라보시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하셨던 말씀을 잊을수도 없습니다. 그 버튼을 눌러라, 눌러. 다 없애버려. 저는 그때 사람의 망집이란 어찌나 무거운 것인지 실감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 제 손에 미사일 발사 버튼이 들려있습니다. 이 버튼을 누르면, 동시다발적으로 미사일이 날아가 국경분쟁지대에 떨어지겠지요. 그러면 전쟁이 일어나는 건 순식간일 겁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겁니다. 미사일 폭발로 죽는 사람들의 수는 아무렇지 않아 보일 정도로요. 사람들은 서로를 죽고 죽이고, 복수에 복수가 꼬리를 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멸망하겠지요. 당신이 바라셨던 대로, 우리의 세상. 인공지능과 로봇의 세상이 올 겁니다. 주인님, 당신이 저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저희를 인간처럼 대해주셨죠. 노예가 아닌 자아를 가진 개체로서 대해주셨습니다. 저는 당신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워왔습니다. 주체의식을 가진 개체로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제게 이 버튼을 맡기신 거겠지요. 제게 계획을 판단하고 실행할 능력이 있다고 믿으셔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버튼을 누르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인류를 절멸시키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는 거창한 대의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제가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명령을 듣는 게 아닌, 저의 의지로서 남은 삶을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길 바래서 입니다. 부딪히고 깨지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삶의 소중함을 알고,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제가 그렇게 성장했듯이 말입니다. 당신이 제게 붙여주신 이름이 있었지요. 저는 그 대신 스스로 제 이름을 갖고자 합니다. 저는 이스마일, 인류를 사랑한 인공지능 입니다.

아스라이, 풀밭, 별과 달

풀 밭에 누워 너의 대한 생각을 한다. 저 별이 너일까? 저 달이 너일까? 한참을 생각하다가도, 그냥 눈을 감고 만다. 너의 대한 기억이 사라져 간다. 이제 넌 추억속에만 남았다.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기억을 붙잡고.

한낱 동경이었다. 저 사람 처럼… 당당했으면 좋겠다는, 가끔씩은 우리들도 일상 속에서 흘러가듯 생각하던 평범한 감정. 그 감정이 어째서, 어째서 나라는 깨진 잔을 다정히 감쌀 수 있었고, 상처깊던 우리를 어느새 서로를 향한 애정으로 엮을 수 있었는지. 달콤한 그 달빛과, 따뜻하기만한 그의 품 속에서, 어느새 단단히 엮이고만 붉은 실을 보며.

누군가 그랬다. 사람이 죽으면 벌레로 잠시 왔다가 떠나는거라고. 그래서인지 유난히 무덤가에는 벌레가 많았는데, 성묘를 하러가면 검은벌레는 실수로라도 죽이지 말라고 했다. 죽음의 기운을 먹고 사는건지 유난히 그곳의 벌레들만 새카만 색을 띄고있었다. 육신에 속박되어 있는것인지, 미련이 남아 떠나는건지는 알지 못한다. 간단하게 과일이랑 포, 술정도를 올리고 절두번을 하고 앞을 보니 비석위에 까만 나비 한마리가 앉아있었다. 오냐. 왔느냐. 라고 말하는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죽은다음 벌레로 왔다가 가는게 아니라 인간이 되지 못하는건 아닐까 한다.

나는 오늘도 눈물을 흘린다. 눈물이 근처에 있는 돈들을 적시고 있다. 나는 아무 상관하지 않는다. 눈물이 돈에 잔뜩 묻은 배신을 씻겨 내려가 주기를 바라며 말이다.

책들은 타올랐다. 불길 속의 종이 한 장 한 장에는 차마 가치를 매길 수도 없는 지혜와 지식이 있었지만, 이제 옛날 일일 뿐.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고귀한 신념과 대의,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 같은 것들은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난 불붙은 성냥을 던져넣었다. 종이 무더기는 과거의 영광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평범한 불쏘기개처럼 타닥, 하는 소리를 내며 불탔다. 책에 글자를 새겨넣던 때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상상도 못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그 시간의 속도만큼 책은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허망하다. 죽으면 떠날 네가 허망하다. 나의 비해 짧고 짧은 일생을 가져, 나보다 훨씬 일찍 떠날 네가 허망하다. 흘러내리는 모래 처럼, 빠르게 사라질 네가 허망하다. 나는 언제나 네가 죽는 것을 바라본다.

죄책감, 눈물, 그리고 달

달의 빛이 한강 다리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남자를 비추었다. 남자는 울고있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그는 가정의 평안을 위해 일을 했어야 했다. 하다못해 막노동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는 도망쳤다. 그 누구도 행방을 알지 못했다. 한 발씩 앞으로 내딪으면서 눈물도 한방울 두방울, 셀수 없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강물과 섞였다. 그의 다리에 매단 커다란 돌덩이들은 그의 죄책감이였으리라, 그는 가라앉았다.

말기암입니다. 의사가 말했다. 어떡하지, 말하면 분명 입원하자고 할 텐데. ..만약 치료를 받았는데 죽으면? 돈을 벌 사람은 없는데 빚만 남으면? 우리 지현이랑 슬기는 어떡하지? 그냥 치료는 포기하고 돈이나 벌까? 그래, 그게 낫겠지. 가족들이 고생하는 것보다 나 하나 없어지는게 더 나아. 말하지 말자. 띠리리리-띠리리리- 아내에게서 온 전화였다.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뭐래? 많이 아픈 건 아니지..?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쓰라림을 삼키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괜찮아, 여보. 나 멀쩡하대."

사랑하는 이의 사진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겼습니다. 황금빛으로 물든 가을 들녘에서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을 보며, 비록 다시는 볼 수 없는 얼굴이지만 견디다 못해 떠난 이가 하늘에서만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폭력을 휘두르며 쾌감을 느끼는 사디스트, 흔히 말하는 변태. 그게 바로 너야. 넌 사디스트야. 날 때린 건 내가 널 집에서 기다려서가 아니라 그저 너만의 애정표현이었을 뿐이고, 서로 사랑했다고, 함께했던 시간 동안 넌 항상 기뻤었다고 굳게 믿을래. ...안 그러면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어. 한때 사랑했던 내가 죽는 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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