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날 견디지 못했다.
내가 고여선 썩어들어가는 걸 넌 한심하게 여겼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해 본다.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이건 확신이며, 너무도 뚜렷한 칼날이다. 인정하는 순간 무너지는 것은 나다. 그것을 알기에 오늘도 머문다. 나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너와 내가 함께했던 시간에, 별것 아니었던 단절에 대해서. 모든 것은 결국 나를 위해서. 이 조각들은 그래.
너이며,
나다.
내일을, 내일을 주겠다. 그러니 떠나지 말아라. 돈이건 몸이건 심장이건 전부 바칠 테니, 날 죽여도 상관없으니 여길 보아라. 너의 아픔은 알고 있다. 네가 결국 같은 말을, 세월을 반복할 뿐이란 것도, 매번 똑같은 고백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다. 사실 더 이상 어떻게 너를 붙들어둬야 할 지 모르겠다. 네가 저 밤하늘로, 첩첩산중으로, 서역의 먼 나라로 떠난다 해도 나는 너를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너의 정이 나를 떠나 버린 후라면 그러한 탐색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 헤매는 족속이라고 너는 말했다. 너의 온 혐오감을 절망을 눌러담아 내게 내뱉었다. 그것이 정말론 너 자신을 향하는 말이었단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분별 없고 미련한 나라지만 그 정도는 진즉에 눈치챘었다. 나는 언제나 내 생각에 자만이 지나치다고 그랬었지. 허나 내가 보기엔 너도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네가 너를 그리도 미워하는 것이 오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라 생각하느냐? 아직까지도 자학을 숭배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 태도야말로 기만이다. 죽음을 택하기에 넌 너무도 아름답고 숭고하다. 이런 뻔한 말밖엔 할 수 없어 미안하다. 이러한 형식적인 미사여구는 분명 네가 가당찮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었지. 허나 이것은 내 진심이고, 이보다 더하거나 덜한 말로는 도저히 너를 그려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구나.
삭히고, 덮고, 덧칠하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널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한 채 계속 살아가는 거지. 내 안에 멈춰 있어. 날 상처입히던 순간의 너로, 날 경멸하던 옛날의 너로. 네가 남기고 간 상처를 기억할게. 흉지지도 아물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쓰러져버리게.
이제 됐다. 타인에게서 인생을 보상받길 바라는 건 바보같은 짓이다. 씁쓸하지만 충족은 결코 인간에게 바랄 만한 것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할 필요도 없다. 매달리기를 그만두거나, 혼자 틀어박히거나, 외로운 척하지 않아도 된다. 너를 구할 수 있는 건 너뿐이다. 너는 어쩌면 이 말을, 나의 진리를 또다시 망각할 수도 있다. 애초부터 스스로에게 결점 따윈 없다며 외면할 수도 있다. 허나 네가 언젠가 다시 무너질 때, 도저히 사랑을 찾을 수 없어 울부짖을 때를 대비하여 이 구절을 보내 둔다.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입바른 소리라 비웃어도 좋다. 네가 그저 나의 말을 기억해주기만 한다면, 길을 잃은 날의 아스팔트 위에 이 마음을 새겨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족하다. 쓰러져도 좋다. 하지만 너만은 너를 사랑해 주어라. 사랑은 분명 가혹하지만, 적어도 아예 존재치 않는 것만은 아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이 땅의 칠십오억 군중 사이에 너의 기적은 반드시 존재한다. 네가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너일 수 있도록, 올바름을 올바르다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외로움을 외롭다 외칠 수 있었으면 하여 다시 너를 부른다. 사랑이여, 무릎꿇지 마라. 너의 태양은 아직 저물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됐다. 나는 언제까지고 네 안에 있으니.
인정받고 싶어? 무서워? 죽고 싶었어? 흐르는 LCL의 바다 속에서 그녀는 너의 등허리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나는, 나는. 짧게 말을 잇던 너는 결국엔 입을 다문다. 진실 따윈 마주하고 싶지 않다. 내뱉은 숨이 도로 폐를 채워 산소를 흘려보낸다. 소중한 어중이떠중이들의 혼이 사방팔방 혼비백산 흩어져 뭉친다. 창이 박혔던 가슴이 아프다 시야가 붉다, 그러나 그녀의 품은 따뜻하다. 너는 무엇을 찾아 싸워 왔는가. 이제 와 떠올리기는 싫다 그냥 편해지고 싶다, 이대로 서로를 보완해가며 끊임없이 평생 우주가 끝날 때까지 살아간다면 그걸로 됐지 않은가. 레이. 여태껏 예쁜 성씨에 덮혀 부르지 않았던 그녀의 이름을 너는 읊는다. 그래 너는 행복을 찾았다. 하나가 되자, 레이. 그래 너는 선택했다 그녀의 미소가 뇌리를 물들인다. 그래 영원은 이곳에 모두에게 너에게.
텅텅 비어있으니 그만큼 잘 볼 수 있는 거야, 그러니 더 부러워하고 동경하게 되는 거지. 하지만 그것뿐이야 넌 결국 누구도 될 수 없어 너 자신조차도 아니야 그 신체는 빈껍데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하지만 그런 너를 사랑해 나를 봐 내 현실을 봐 너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아도 돼. 네겐 내가 있어. 항상 너는 나는 마지막 문장을 고민하게 되지 끝맺음은 어떡할까 한 줄을 더 이을까 아님 아예 지워버릴까. 어느 쪽이건 괜찮아 우린 같이 있어 세상을 보지 마 눈이 멀어버리기 전에. 아 맞다 참고로 마침표는 없어 내가 네게 그런 걸 줄 리 없잖아 이리 와
글과 인간이 다르다는 평을 자주 들어요, 나도 알아요 다행이도 이건 그저 생각일 뿐이고 내 생각은 내가 아니니까. 정말 여기 적힌 대로만 살았다면 무너졌겠죠 진즉 목을 맸겠죠 안 그래요? 왜 그렇게 봐요 아직 죽을 생각 없어. 안쓰러워하지 마요 농담이야 근데 사실 거짓말이야 동정해 줘요. 아니다 동정을 줄 바엔 사랑해 줘요 아냐 그것도 아니지 사랑할 바에야 머리나 한 번 쓰다듬어 주고 가요. 오늘 아침에 감아서 깨끗해 뭐야 왜 또 그런 표정을 지어요 울지 마 나도 안 우는데 왜 당신이 울어. 괜찮아요.
미친 듯이 써지네 봇물이 터졌나 기관총같아. 아 이렇게 말하면 또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돼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니까 다시 진부해져 이런 건 싫은데. 취한 것도 아니야 취해 봤는데 생각보다 못 써먹겠더라고 차라리 콜라가 더 좋아. 난 펩시도 좋아해 너도 좋아하고 맥콜도 잘 마신다? 근데 사실 거짓말이야 딱 한 번 마셔봤는데 별로 맛 없더라 그렇다고 못 마신단 건 아니니까 완전 뻥도 아니고. 거짓말의 거짓말을 했네 우습지? 한 잔 하러 가자 곱창 구워 줘 난 한번도 제대로 먹어본 적 없지만 말야
발전한 걸까
옛날엔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나
그때처럼 괴롭진 않아 대신 외로워
갈망이 늘었어 욕구가 생긴 건 좋은 징조겠지 사람다워진 거니까
하지만 결국 넌 없고 난 그걸 되새기고
이젠 빈자리조차 흐려져 시야에 담기지도 않아
그냥 이대로 널 잊어버릴까
이젠 아무것도 아니니
하지만 너도 날 잊어버렸을까
아니었으면 해
네가 아팠으면 좋겠다
후회해 줘
후회해 줘
후회해 줘
애정전선이 위험합니다 파묻혀 찾아주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침잠해 있습니다 악몽을 꿉니다 구조신호를 보냅니다 빛으로 여길 태워 주세요 지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성처럼 날아와 대기를 더럽혀 주세요 당신의 숨으로 인류를 최소한 저를 끝내 주시지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멘 에일리언
그냥저냥 우물 안에서 살 수도 있었습니다. 축축한 단물에 잠겨 행복하다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매일 똑같은 사랑시를 적는 삶이 그다지 나쁘다 생각진 않습니다마는 기왕이면 그대 품에서 잠들고 싶었습니다. 좁고 둥근 하늘에 볕이 들고 달이 들고, 동아줄마냥 축 처져 내려온 당신의 흰 손을 창백한 머리칼을 붙들고 쓰다듬고 타고 올라가 진짜 지평선을 보고. 그렇죠 이번엔 당신 미소를 비소를 구하고 싶어서, 이런 뻔한 언어의 나열을 이젠 으스러뜨리고 싶어서 입을 맞춥니다. 불어터진 입술을 뜯겨 나간 살점을 꿰메 드릴게요 마치 당신이 살아있는 것처럼. 시야의 막힌 부분을 열어 주세요. 당신은 등 뒤에도 눈이 달려 있다 그랬잖아요. 약속을 지켜요 내가 올라왔잖아요 어서 눈을 떠요 빨리
욕망, 욕망이 있었다. 무엇이든 가지고 싶었다. 점화당하고 싶었고, 모두가 이 열기를 알아줬으면 했다. 스스로를 몰아붙여만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뒤를 돌아보게 되었고, 시야에는 빙판길의 잔예가 남아 있었다. 깨부수며 온 것이다. 녹이는 게, 손을 잡아주는 게 아니라 말이지. 발밑을 내려다 보면 너의 왼손이 떨어져 있었다. 시뻘건 단면에 눈을 맞춰 속삭인다. 미안해. 내가 널 망쳤지. 이젠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 바닷속은 춥지? 이런 겨울이니 말이야. 고마웠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수십 번째 반복 중인 말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진위를 알 수 없게 된다. 살기 위해 타인이 필요하다니, 모두가 타인에게서 태어나 젖을 빨며 발버둥쳐야만 한다니. 이 굴레는, 생명의 연쇄는 그저 저주다. 어떤 실에도 묶일 순 없었다.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더럽히지 마. 외침과 동시에 화장실 거울을 깨부쉈다. 눈앞에서 조각난 스스로에게 눈물로 외친다. 이젠 너도 싫어. 파열음이 언제까지고 귓전을 맴돌았다.
부조리와 불합리만을 쳐다보며 살았다. 온 세상에 먹물 같은 것이 들어차 있었다. 꿈틀거리는 손을 사방으로 뻗는 액과, 도처에 사린 악 따위를 우리는 혐오라 불렀다. 인간들 중 대다수는 분노를 억누르머 살아간다 들었다. 찬양받고픈 자들의 시대가, 욕망을 온전히 욕망이라 부를 수 있는 낙원이 도래치 않으리란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최소한 자신들의 세대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상을 비웃는다. 간밤의 소망을 헛꿈이라 말한다. 사실 있는 그대로도 나름 괜찮다. 변치 않는 매일을 행복이라 치고, 그저 그런 톱니바퀴로 일생을 마감하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테다. 허나 무언가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잿빛 하늘이 전쟁터를 흐릿하게 비춘다. 칼날 끝에 선다. 피는 흐르지 않는다. 분명 개중 누군가는 혈자리를 짚어 날을 쑤시겠지만 마음은 애석하게도 비명을 지르지 못한다. 애초 마음 따위로 할 수 있는 일들은 대부분이 가당찮다. 사실 심장을 찔러 줬으면 한다고, 선홍을 목도하길 빈다고 외치고 싶다. 다른 사람들 따위는 어찌 되건 상관없다. 세상이 먹으로 넘쳐 흘러도, 설령 그것이 날 향하는 것이래도 견딜 수 있다. 눅눅한 어물전 향에 잠긴 끝에 보이는 것이 너라면 정말 아무래도 좋다. 회색빛 하늘도 멸시도 네가 주고 간 것이지만, 불타 재가 된 혐오감도 일반화에의 합리화도 이젠 일상이 되었지만, 그것을 이상이라 할 순 없겠지만 삼라만상 전부가 결국 너인 것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베어도 좋다. 지긋지긋한 색맹에서 날 꺼내 주어라. 팔방으로 신체를 끌어안아라 그것이야말로 액의 진정한 가치이니.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텅 비어 있을 리는 없다. 세상에 나와 톡톡히 깨닫고 있다. 매일 밤 후회로 기도하는 중이다. 사라지지 않을 것이면 내게로 와라 여기서 칼날이 되어라. 함께 하찮은 것들을 멸시하자. 마천루를 내려다보며 투신하자 우리의 진홍이 헛되지 않도록. 시야에 사랑의 색을 담아 반항하자 메마른 아스팔트에 두개골을 으깨서라도. 그것으로 불합리가 지워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너의 부조리한 기록을 세상에 남기고 싶다.
총성. 단발로 사람을 죽이는 법. 무지함의 나선. 서릿발. 언뜻 의미 있어 보이는 많은 것들이 널 좀먹고 있었다. 너의 거친 호흡이 눈발 사이서 희게 흩어진다. 휘두른 머플러는 성에가 낀 듯 얼어 있다. 넌 한기에 목을 졸린 것마냥 기침을 내뱉고, 갈라진 목소리로 이내 말한다. 질식사한 거야, 이 사람은. 그리고 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실이 아프다 해 도망치지 말았으면
너를 잃지 않았으면
허나 이미 용기가 너를 떠났다면
그래서 울고 있다면
손을 잡아 주겠다 말하고 싶다
뻔한 위로조차 쉬이 꺼내진 못하겠지만
나 역시도 숨어들어가는 게 고작이지만
그래도 손길이 울음이 전부 가치없진 않다고 말하겠다
네가 그곳에 있어도 된다 전하겠다
섣불리 발걸음을 뗀다 네 눈물을 향해
방주에 너를 싣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