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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레주 2019/02/20 00:40:49 ID : pSE4K7y2Gsr
제목 그대로 나 혼자 알기 아쉬워서 남기는 기록이야. 사랑 이야기는 여기저기 털어놓는 게 없어 보이잖아. 그러니 익명으로.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이름은 구분하기 쉽게 적어놓은 거야. 내 스레에서만 이름을 달께.
스레주 2019/02/20 00:44:58 ID : pSE4K7y2Gsr
난 남자랑 통 인연이 없었어. 중학교, 고등학교 다 공학을 나왔는데도. 내 전화번호부에 남자는 혈연 관계가 전부였고, 복도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인사하는 그 정도 관계조차 없었어. 아주 가끔씩 고백을 받는다거나 누가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었으니까, 아마 문제는 내 성격일꺼야. 나이가 들수록 남자에게 어색해져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남자와 나는 얘기가 "선생님이 너 부르셨어." "어." 가 전부였어. 내 인생에 남자가 너무 없었다 보니까, 저 간단한 대화도 정확하게 기억해.
스레주 2019/02/20 00:49:02 ID : pSE4K7y2Gsr
그렇다고 남자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어. 그냥 너무 어색하고, 어쩔 줄 몰랐을 뿐이지. 기계공학과에 입학이 결정나고부터, 주변에서는 공대 아름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어. 나는 물론 아닐 거라고 내숭을 떨었지만, 속으로는 "정말 공대 아름이가 있을까?" "그게 내가 될까?" "나도 연애를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스레주 2019/02/20 01:03:43 ID : pSE4K7y2Gsr
막상 공대에 진학했는 데 수수하고 조용한 여자애에게 용기있게 말을 붙이는 남자는 별로 없었고, 그마저도 내 어색한 태도로 본의 아니게 벽을 쳤지. 내 인생에 본격적으로 남자가 끼어들기 시작한 건 어느 동아리에서 홍보용으로 주최한 조그만 신입생 캡프에서였어. 1박 2일이었는데, 놀랍게도, 총원 40명. 남자 36명. 여자 4명. 그래도 아무일도 없었다. 나는 외모로나 성격으로나 튀는 게 없었으니까. 맨투맨 청바지 그리고 쌩얼이었다. 일은 신입생 캠프가 끝나고, 며칠 뒤 열린 뒷풀이에서였어. 캠프에서 나에게 호감을 보였던 남자애가 우리 테이블로 와서 내 벌주를 잔뜩 따라주었어. 나는 안 그래도 비호감이었던 애가 잔을 가득 채우니까 표정이 확 굳었는데, 그 애가 나한테 "흑기사 해줄까?"하고 묻더라. 그 말에 오기가 나서 원샷 해버렸다. 한 번도 취해본 적 없었지만 별 일이야 있겠어?하는 마음이었다. 놀랍게도 내 술주정은 호흡곤란이었어. 그 날 처음 알았지. 원샷 하자마자 찬공기가 마시고 싶어지면서 술집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점점 숨이 가빠오는 거야.
이름없음 2019/02/20 01:06:28 ID : 8kqZdCqmJSL
보고있어
스레주 2019/02/20 01:18:05 ID : pSE4K7y2Gsr
빈혈이 온 것처럼 어지러워서 벽에 몸을 기댄채로 미친 듯이 헐떡거리고 있는데 날 따라 나온 남자애들이 빙 둘러싸고 구경을 하고 있으니까 창피하더라. 얼마나 심했냐면 그 남자애들 눈에 걱정이 아니라 공포가 보일 정도였어. 내 친구 다람이 말로는 날 둘러싼 남자애들이 한 7명은 되었다는데, 7명이나 되는 남자애들은 새내기답게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괜찮아?" "괜찮아." "구급차 불러야 되나?" "아냐, 부르지마, 안 불러도 돼." 괜찮다고 말을 하는 게 힘들 정도였는데, 그렇다고 괜찮다고 하지 않고 숨만 고르고 있으면 진짜 구급차라도 부를 기세였기에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었어. 솔직히 그냥 다 꺼지고 기숙사도 텔레포트하고 싶었어. 바로 그때 남학생 한 무리(3명에서 5명 정도로 추정)가 그 인간벽을 뚫고 들어왔어. "니 괜찮나?" "응..." 누군지도 몰랐지만 대답했지. 사실 다 몰랐어. 내가 1박 2일 동안 36명 중에 몇 명이나 기억할 수 있었겠어? 그 애는 나에게 초코에몽을 주고 다시 무리를 이끌고 가버렸지. 호흡곤란이 진정되고 나서 고맙다고 하려고 했지만 어디 간 건지 아니면 내가 얼굴을 기억을 못하는 건지 없었어. 나중에 알았지만, 그 애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A야.
스레주 2019/02/20 01:25:11 ID : pSE4K7y2Gsr
고마워. 하지만 그 때는 A는 내 관심에 없었어. 나는 그 날 다른 애에게 반했거든. 날 둘러싸고 "괜찮아?"라고 묻던 남자애들 중 한 명. 피부가 하얗고 가녀렸어. 얼굴은 작고 눈코입이 오밀조밀했어. 완전 내 이상형. 추하게 헐떡거리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계속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 애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싫지는 않았어.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에 "아까 개 무서웠다!"하고 호들갑을 떠는 데 그것조차 귀여웠어. 그 남자애를 토깽이라고 부를께. 기숙사에 들어와서 내 친구 다람이에게 "아까 괜찮은 애 있지 않았어?" 놀랍게도 다람이도 토깽이를 지목했다. 더 놀랍게도 다람이 친구 중의 한 명도 토깽이에게 호감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았어.
스레주 2019/02/20 01:34:09 ID : pSE4K7y2Gsr
내 나이는 스무살이었지만 남자 문제에 한해서는 중학생이나 다름 없었다. 아니, 요즘 중학생도 나보다는 적극적일 거야. 나는 안 하던 화장을 하고 머리에 고데기를 하고 치마를 입었어.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번호를 물어보는 건 물론 그냥 말을 붙이는 것 조차도 감히 할 수 없었어. 그냥 토깽이를 보려고, 토깽이가 볼 까봐. 오늘은 볼 수 있을까. 오늘은 인사할 수 있을까. 토깽이랑 마주쳐서 인사를 할 때, 웃고 있었나 안 웃고 있었나로 내 그날 기분이 정해졌어. 그 애한테는 그냥 인사일 뿐인데, 나는 그 모든 게 내 탓이라도 되는 양 매일 다람이를 불러서 오늘은 봤네, 못 봤네, 인사를 했네, 안 했네, 웃고 있었네, 안 웃고 있었네, 나 어떡하니, 솔직히 꼴값이었다. "...레주야, 니 얘기 질린다." "응?" "인사에서 발전이 없잖아... 번호라도 따고 말을 해." "내가 번호를 어떻게 따!!!"
이름없음 2019/02/20 01:35:36 ID : 8kqZdCqmJSL
ㅋㅋㅋㅋㅋㅋㅋㅋ
스레주 2019/02/20 01:45:33 ID : pSE4K7y2Gsr
토깽이만 제외하면 내 남자 관계는 점점 나아지고 있었어. 사실 별 거 아니더라. 그 남사친이란 거. 크고 까맣게 보였던 애들이 알고보니까 순하고 착하더라고. 중간고사가 지나갈 때까지 토깽이와는 아무런 발전이 없었는데, 다른 남자와는 2대2 데이트 약속이 잡혔어. 정말 데이트는 아니었고, 그냥 나(여)와 다람이(여), 다람이의 친구(남), 다람이의 친구의 친구(남). 즉, 친구들끼리 주말에 시내에 나가서 놀자는 약속이었어. 하지만, 꼭 2대2 커플 데이트같지 않아? 남자랑 학교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그 것도 여자 둘 남자 둘이면, 나한테는 순정 만화에서나 보던 그런 일이었지. 고등학생 때 남자랑 인연이 없는 것은 나나 다람이나 친구끼리 매한가지라서 둘 다 무척 들떠 있었다. 그 전 날에 내 기숙사 방에 모여서 같이 화장 연습까지 해 볼 정도였어.
스레주 2019/02/20 01:53:24 ID : pSE4K7y2Gsr
다람이의 친구인 시츄와는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는데, 시츄의 친구는 "누구야?" "사진 보여줄까?" 누가 봐도 기숙사에서 편하게 있는 걸 누가(아마 시츄가)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이제 생각해보면, 비록 이상한 사진은 아니었어도, 자기 친구의 사진을 참 태연하게 여자에게 전송했었구나 싶네). 사진이 찍히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바닥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하는 옆모습이었는데, 나에게는 반바지 밖으로 드러난 남자의 맨다리가 꽤 야하게 보여서 사진을 자세히 보지는 않았어. 당시 나는 아이돌 상의 탈의 조차도 제대로 못 봐서 넘기곤 했으니까. 그런 시절도 있었네. 세월무상.
스레주 2019/02/20 02:03:15 ID : pSE4K7y2Gsr
토요일이었어. 남자애 둘은 이미 준비를 다 마치고 여자애 둘을 기다리고 있었어. 사진 속 그 남자애가 있었어. 나는 그 애를 보자마자 앞으로 성큼 다가가서 최대한 예쁜 표정을 지었어. "안녕? 니가 A야?" "어... 안녕." A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수줍게 웃었어. 나는 그 표정을 보자마자 생각했어. '어라? 얘 왜 나한테 반해 있지?' ...여기서 '이 스레주 뭐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음... 맞아. 나 이상해. 나는 남자라고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으로 밖에 안 접해봤고, 남자에 관해서는 정상적인 20살 여자애의 사고와 동떨어져 있었어. 사실 정상적인 그 누구와도 동떨어져 있지. 하지만 이 당시 내 남자에 대한 태도나 사고는 설명하자면 너무 기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봐. 어차피 보다보면 조금씩 알게 될꺼야.
스레주 2019/02/20 02:27:08 ID : pSE4K7y2Gsr
우리는 데이트 코스를 충실히 따랐어. 아쉽게도 그 순서는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그 조각조각은 기억하고 있어. A는 나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적어도 겉으로는. 하지만 다람이와 시츄의 눈에서 멀어질 때마다, 은근히 나를 향하는 시선같은 게 있었어. 나를 대하는 게 무척 조심스럽고 태도가 부드러웠어. 나를 무슨 청순한, 그런 존재로 보는 듯이. 그게 너무 부담스러웠어. 난 그냥 음침한 오타쿠에 불과한데. 그걸 알려주고 싶어서 노래방에서 일본 노래만 불렀지. 나는 노래방은 가지 않는 성격이라서, 사실 아는 일본 노래도 몇 곡 없는데도. 그 왜, 성형을 한 사람들 중에, 성형한 곳을 칭찬받으면 "아, 그, 성형했어요ㅎㅎ"하고 실토하는 타입있잖아. "어떡하지... 내가 부를 수 있는 일본 노래가 더 없어." "왜 일본 노래만 부르는데!?" A는 당황해 보이긴 했지만 그냥 '이런 면도 있구나'하고 놀라는 수준에서 그쳤던 것 같아. 나중에(몇 년 뒤에...) 알고 보니 A는 숨덕이었더라... 내 일본 노래는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했고, 오히려 A의 눈빛이 좀 더 친근해졌어. A는 네 명이 모두 모여 있을 때면 일절 나에게 특별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지만, 난 알 수 있었어. 악세사리 점에서 머리띠에 정신이 팔려서 혼자서 이것저것 써보는데, 거울 속 A와 눈이 마주쳤다. 하필 그때 쓰고 있던 머리띠가 커다란 리본이 달린 좀 주책맞은 물건이었기에 나는 민망해져서 웃으면서 뒤돌아봤어. A가 씨익 웃었어. "잘 어울려."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해. A에 대해 몇 개 없는 좋은 기억이야.
스레주 2019/02/20 02:53:27 ID : pSE4K7y2Gsr
나는 노는 내내 계속 A가 나에게 정말 반한 건지, 왜 반한 건지, 설마 아침에 인사하는 그 순간에 반한 건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혼자서 치열하게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단서는 점심 식사 중에 나왔어. "응? A도 신입생 캠프에 왔었어?" "...니 나 모르나?" A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대답했어. "레주야, 우리 다 신입생 캠프 갔던 사람들이야. 사진 보여줬었잖아." "아, 그래서 니가 나한테 사진 보여준 거구나. 보면 누군지 알 거라고 생각해서." "......" "미안. 나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해. 같은 조였던 애들도 잘 기억 안 나." A는 가만히 아래만 쳐다보다가 하, 하고 비웃는 소리를 내면서 "하긴 나도 너 기억 안 났어. 남들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럼 아까 그 배신당한 표정은 뭐였으며,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해도 겨우 4명 있는 여자를 몰랐단 말인가.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다람이는 눈치가 없었다. "너가 레주 부른 거 아니었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응?" A는 당황했다. "너가 시츄한테, 레주도 부르고 해서 넷이 한 번 놀자구, 내 친구니까, 레주도 불러보라구, 난 그렇게 들었는데?" 수수께끼가 풀린 순간이었어! 나는 속으로 기뻐하면서 겉으로는 최대한 당황한 척 '어머, 이게 다 무슨 소리람.'하는 표정을 지었어. 궁지에 몰린 A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다람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중저음으로 말했어. "나 쟤 모르는데?" "..." "나 쟤 모르는데. 오늘 처음 봤고. 그거 캠프 온 지도 오늘 처음 알았다고." 바로 앞에 두고 '쟤'라고 칭하는 무례함에, 표정 말투 전부 다 방금까지랑 전혀 다른 애 같아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어. 다람이는 "내가 잘 못 알았나봐."하고 넘어갔고, 그 순간은 정말 잠깐이었지만 기분이 찝찝해졌지. 그게 A의 본성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스레주 2019/02/20 03:09:23 ID : pSE4K7y2Gsr
나중에, 정말 나중에 우리가 사귀게 되었을 때, A가 고백했어. "니 그 날 기억나나? 너랑 나랑 다람이랑 시츄랑 같이 시내에 놀러 나갔을 때, 사실 그 자리 내가 만들었다." "뭐?" "그냥 너 뭐 이쁘게 생깄고, 여성스러워 보이고, 관심 있었다고." "...정말로?" "내가 니랑 다람이랑 친구인 거 알아서, 시츄랑 다람이랑 둘이 놀면 좀 그러니까, 나도 같이 끼고 다람이 친구도 부르라고 해라, 그랬지 내가." "......" "몰랐지?" A는 득의양양한 표정이었어. 나는 그 날 다람이를 압박하던 A의 모습이 다시 생각나서 얼어붙어 있었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잘 몰랐어. 내가 그렇게 예뻤어? 내 어디가 예뻤어? 그 날 나 어땠어? 부끄러워, 너무 기뻐! 너무 좋아! 머릿속에 수 개의 선택지가 지나갔지만 말 할 수 없었어. 다 거짓말이었거든. '그럼 너 다람이한테 왜 화낸 거야? 거짓말 친 건 너면서. 네 별 것도 아닌 거짓말을 얼버무리려고 다람이를 겁 준거야?' 물론 이렇게도 말할 수 없었지. 난 그저 띄엄띄엄 힘겹게 "난... 정말... 몰랐어...... 하나도 몰랐어..." A는 내가 감동받은 줄 알았을 테지만.
스레주 2019/02/20 03:33:12 ID : pSE4K7y2Gsr
하지만 당시에는 A의 말을 믿었어. 잠깐 지나갔던 차가운 태도에 대해서는 그냥, 다람이가 좀 착각했을 수도 있지 별 것도 아닌 걸로 정색이야, 라고만 생각했어. 본성이고 뭐고 기분탓이라 치고 솔직히 아까까지 나한테 헤실거리던 남자애가 정색하고 쟤, 쟤, 거리면서 무안 주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고 기분이 나빴지만, 또 금새 나에게 잘해줬으니까. 저녁 쯤에는 번호가 궁금한 수준까지 갔는데, 내가 나라서 역시 물어보지는 못했어. 그 날 저녁 다람이를 불러냈지. "나 A 좀 괜찮은 것 같더라." "......A가?" "왜? A가 뭐 어때서? 엄청 친절하고 자상하던데." "......A가?" 알고 보니까 다람이와 A는 학기 초, 그러니까 3월 달부터 아는 사이였는데, 말투도 영 싸가지 없고, 신학기라 애들이랑 좀 친해져보려고 여기저기 부러 말을 걸고 살갑게 인사하는데, A는 그 인사 받아주는 것조차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하고 만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앞에서 물어보지도 않고 담패를 피는 모습에 정이 뚝 떨어졌다고 했다. 나는 지금 다람이가 얘기하는 인물과 오늘 본 인물이 동일인물이 맞나 헷갈릴 정도였다. "담배라고?" (담배피는 남자 싫은데, 라고 생각했다.) "걔 재수없어." "...오늘은 안 그랬잖아? 그런 성격으로는 안 보이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만만하고 놀려먹기 쉬운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다람이는 내 말에 잠깐 고민하더니 긍정했다. "오늘은 좀 이상했지. 기분 좋은 일 있었나?"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천장을 보면서 잠시 본론을 꺼낼 마음의 준비를 했다. 다람이가 또 나를 이상하게 볼 게 분명했으니까. "아까는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사실 A가 나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다람이가 묻기 전에 미리 말했다. "걔가 딱히 나한테 뭘 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 호감을 표시하는 말이나 행동을 한 건 아니야." 다람이는 이미 내 기행을 몇 번 봤었다. 또 시작이야,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조심스럽게 할 말을 골랐다. "그럼... 왜 그렇게... 생각했어?" 우리가 좀 더 친했다면 네가 그런 헛소리를 할 때마다 욕을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다람이는 회상하고 한다. "눈빛. 나에게 반한 눈빛이었어." "......" 어쩌면 다람이는 그때, 나에게 할 말이 아예 욕 밖에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문 걸 수도 있다. "진짜라니까?" "......" "에잇, 몰라. 나한테는 토깽이가 있으니까."
스레주 2019/02/20 03:33:27 ID : pSE4K7y2Gsr
내일 올께
이름없음 2019/02/20 09:28:33 ID : WpbwlcsrwGm
소설보는거같아,,,,!ㅜㅜ 필력 최고..
스레주 2019/02/20 16:58:03 ID : pSE4K7y2Gsr
고마워! 나는 그 날부터 A와 토깽이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웃기는 일이지만 난 꽤 심각했다. 토깽이와는 영 제자리 걸음이었는데, 어찌되었든 A는 이미 나에게 호감이 있잖아. 어느 날인가는 A가 나한테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했는데 나는 그 날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누구인지 못 알아보고 눈을 찌뿌리기만 했다. "방금 누구였어?" "A잖아." "뭐!?" 아 어떡해 인사 받아줄 걸. "근데 쟤 저렇게 환하게 인사하는 거 처음 봤어." "역시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거야." 다람이는 무시했다. "오늘 기분 좋은 날인가봐."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토깽이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다. 왜냐면, 토깽이는 인사라도 할 수 있지. A는 다른 과에 수업 듣는 건물로 달라서 아예 마주치기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깽이에게도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고 나는 강수를 두기로 결심했다. 너구리. 20. 여. 축구 동아리 매니저. "진작 말하지. 나 토깽이랑 같은 동아린데."
스레주 2019/02/20 17:04:22 ID : pSE4K7y2Gsr
토깽이가 축구부라니. 그 청순한 외모에 운동까지 잘하다니!(제정신이 아니었음) 너구리는 나에게 축구부 연습날 구경갈 때 같이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저녁에 제법 꾸미고 운동장에 가서 앉아 있는데, 토깽이가 잠시 쉬러 나와서 나와 세 발자국 쯤 떨어진 곳에 앉았다. "안녕." "안녕."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딱히 말 붙힐 거리도 찾지 못하고. 내가 보고 싶은 건 더이상 앞이 아니라 옆에 있는데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이상한 공기마저 흐르는 것 같았다.(제정신이 아니었음2)
스레주 2019/02/20 17:11:39 ID : pSE4K7y2Gsr
잔뜩 긴장만 한 채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데, 다람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멀리 뒤로 빠진 뒤 전화를 받았다. "잘 되가고 있어?" "아니! 어떡해? 나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어! 아무 말도 안 걸어! 여기 온 지 한 시간인데!" "너가 말 걸어봐." "못해!" "......" "남자는 관심 있는 여자한테 말 걸지 않아 보통? 이거 무슨 뜻이야?" "...나도 남자를 잘 모르니까 무슨 말을 못해주겠다." 다람이는 나의 연애 상담에 지쳤는 지, 떠넘길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아예 남자애한테 상담 받는 건 어때?" "누구? 그럴만한 애가 있어?" "시츄?" "시츄는 싫어. 남자애가 아니고 여자애같단 말이야. 너랑 똑같은 말 할 게 뻔해." "그럼... A?" 연애 상담을 할 정도로 편하고, 토깽이와 접점이 없으며, 남자에 대해서 잘 알 것 같은 사람은 A 뿐이었다. "다람아, 넌 천재야!" 아니, 난 바보야. 그게 내 대학교 1학년 최악의 실수였다.
스레주 2019/02/20 17:24:28 ID : pSE4K7y2Gsr
나는 그 길로 너구리에게 먼저 들어간다고 하고 기숙사로 갔다. 나는 A의 번호가 없었기 때문에 다람이의 폰을 빌려야만 했다. "야, 얘 진짜 너한테 호감 있나봐." 이제와서 인정? "내가 부르니까 피곤하다고 안 나온다고 했는데, 레주가 부르는 거라고 하니까 씼고 나간대." 나는 나를 좋아하는 남자에게 내가 좋아하는 남자 얘기를 하며 상담을 할 생각에 신나졌다. 분명 그 반응이 매우 귀여울 것이다. 맞아, 나는 개 또라이다.
스레주 2019/02/20 17:33:40 ID : pSE4K7y2Gsr
말마따나 A는 정말로 피곤해보였다. 눈을 비비다가 나를 힐끗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미안해, 많이 피곤해?" "아냐 괜찮다." "억지로 나온 거 아니지?" "아이다. ...왜 무슨 고민인데." "내가... 내가 엄청 큰 고민이 있어!" 내가 무슨 고민인지 맞춰보라고 하자 "...남자 얘기겠지 뭐." "맞았어! 어떻게 알았어?" "그거 말고 더 있나. 뭐 누가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그게 싫다거나 뭐..." "오! 정말 거의 다 맞았는 데, 딱 한 가지 빼고." "뭐?" "나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 거야." A의 걸음이 뚝 멈췄다. 잠깐의 침묵 뒤 "...으응."이라고 대답하고 아무 말도 없었는데, 나는 그 표정에 충격을 받고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얼마나 실례인 짓을 짓을 한 건지 이제야 안 것이다. 아니야. A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다 내 억측이야. 아무 증거도 없잖아. "일단 내려가서 얘기하자." 자기합리화를 했지만 벤치에 앉을 때까지 아무 대화도 없었다.
스레주 2019/02/20 17:42:41 ID : pSE4K7y2Gsr
이거 쓴다고 카톡 내역 찾아보는데 갑자기 감성 돋네... ㅅㅂ 좀 더 있다가 다시 올께
이름없음 2019/02/20 21:11:00 ID : zTTV9ctulij
ㄹ...레주야 글을 왤케 잘써...? 다음얘기가 너무 궁금해...
이름없음 2019/02/20 23:29:38 ID : yIHCpfglyJX
오 글 잘쓴다
스레주 2019/02/21 13:39:23 ID : pSE4K7y2Gsr
고마워! 글 잘 쓴다고 하니까 꼭 연재 소설 쓰는 느낌이야ㅋㅋㅋ 다람이는 "자 이제 A도 나왔으니까 나는 이제 들어가봐도 되지?"하고 물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나를 방금 찬 (거나 마찬가지인) 남자와 단 둘이 두지마!!! 솔직히 A가 무서웠다. 아까보다 훨씬 더 피곤해보였으니까. "얘가! 얘가 지금까지 내 얘기 다 들었으니까! 제일 잘 알아... 잘 알잖아... 들어가지 마......" "그래. 다.. 더.. 너 이름 뭐였지? 들어갈 지 말지 니 맘대로 해." "......" "...니 내 이름 모르나?" 다람이가 황당해했다. "기억 잘 못 한다." 다람이랑은 3월 달부터 안면 트고 인사했다면서... 남한테 관심 없다는 얘기가 사실이었구나, 하는 순간에 갑자기 A가 혼자서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니도! 니도 잘 모린다. 원래 이름 기억 몬하고 그냥 다 조... 이름으로 기억했다. 니는 크리스탈(다람이), 니는 스타르타(스레주) 그냥 그렇게만 기억했지..." 이 병신은 자기가 불과 1분 전에 나를 스레주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캠프 때 못 봤다고 했으면서 조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더욱 더 A가 불쌍해졌다. 제 발이 저려 안 해도 될 거짓말을 하는 것부터, 사소한 거짓말들끼리 설정 충돌을 일으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전형적인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나는 습관적으로 속아주는 타입이었다. 굳이 지적하지 않고 모른 척 넘어갔다.
스레주 2019/02/21 22:19:42 ID : pSE4K7y2Gsr
썰을 푸는데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더니 날 보면서 "걔 사진 있냐?" "왜?" "어떻게 생겼길래." "싫어." "보여줘." "너가 알 수도 있잖아." "몰라. 누군데. 우리 과야?" "아니... 우리 같이... 신입생 캠프 갔던, 애야." A는 나를 지긋이 쳐다보다가 다시 보챘다. "괜찮아. 나 잘 몰라. 알아도 말 안 해." "......토깽이." "몰라. 모르는 애야." A는 토깽이의 사진을 보자마자 귀찮다는 듯 손사래쳤다. "야. 그냥 고백해. 니가 아깝다." "에에에에?? 아니거든!?" (난 존나 오타쿠라서 감탄사도 이딴 거임. 버릇이라 잘 안 고쳐져.) A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존나 빻았구만." 말투 보소. A가 사실은 싸가지가 없다는 다람이의 증언이 떠올랐다. 얘는 내가 연애 상담을 하자마자 진짜 성격을 보여주나보다. "사진이 못 나온 거야! 얘가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 나 말고 다람이도 얘한테 호감 있었고, 다람이 친구도 호감 있었고, 공대에서 하렘 차리는 대단한 녀석이라고!" 그 말에 A가 나와 다람이를 '뭐 하는 애들이지?'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다람이가 변명하듯 말했다. "내 친구는 귀여운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토깽이를 좋아했는데, 얼굴만 귀엽고 성격이 너무 시크하다고 접었고, 나는, 내가 인사하는 거 잘 받아주지도 않아. 지금 그나마 반응 제일 좋은 게 레주야." "야 일단 번호를 따," "못 따!! 어떻게 따!" "그럼 말이라도 걸어보고," "못 걸어!" "이... 이 이천십팔년도 같은 년아!" 쫄았다. "존나 답답하네. 난 담배 한 대 피우고 온다." 나는 얼어붙어 있다가 A가 사라지고 나서 다람이를 쳐다보았다. "쟤... 저런 성격이었어?" 다람이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가 말했잖아."
스레주 2019/02/21 22:22:32 ID : pSE4K7y2Gsr
그 때 카톡이 날아왔다. 너구리 [레주야 지금 1학년들끼리 뒷풀이하자는 데 너도 올래?] 이렇게 갑자기!? "어떡해? 다람아 나 오늘 예뻐?" "잘 모르겠어." "어떡하지?" "가!" 스레주 [나도 껴도 돼?] 너구리 [응 어차피 다 너도 아는 애들이야] 갔다.
스레주 2019/02/21 22:35:13 ID : pSE4K7y2Gsr
축구로 땀에 절은 남학생들이 샤워를 하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날의 술자리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술이 취했던 날 이후 처음으로 토깽이와 대화를 했다. 자리를 나와 걷는 길에는 일행과 떨어져 둘이 함께 걸었다. 머릿속에 A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가. 가서 번호 따.' "나도 축구하고 싶었는데." "동아리 들어와라." '번호 따와 이 가시나야.' "아니. 매니저 말고. 나도 운동하고 싶어. 여자는 안 시켜주겠지?" "될... 걸? 가끔 구석에서 남자들이랑 같이 공차는 여자애들 있어." '오늘 안에 따와.' "아 맞다." '안 따면 디진다.' "번호 알려줘." 짝사랑 약 한달 째. 드디어 번호를 땄다.
스레주 2019/02/21 22:50:05 ID : pSE4K7y2Gsr
내가 번호를 따자마자 앞서 갔던 축구 동아리 일행들이 뒤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다. 안 그런 척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 주책맞은 남학생이 호오, 하는 추임새를 넣으며 키득키득거렸다. 그 이후로 나와 토깽이는 오늘 술자리의 뜨거운 감자였다. 주변의 호응에 노래방에서 듀엣을 불렀다. 아이유 - Rain drop "레주 눈 풀린 것 같은데. 취했다." "응.. 조금 힘드네." "야, 토깽이 뭐 하는데! 데려다줘라!" 아까 키득거린 남학생이었다. 나는 처음 겪는 민망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몰랐다. 토깽이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갈까?"
스레주 2019/02/21 22:50:31 ID : pSE4K7y2Gsr
갑자기... 서류 작성 좀 하고 올께ㅠㅠ
이름없음 2019/02/23 19:25:45 ID : Zcsqry41A1C
아 너무 궁금해요.....
이름없음 2019/02/23 19:26:01 ID : Zcsqry41A1C
으아 ㅠㅠ뒷이야기 흐긓ㄱ

레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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