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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nn 2019/08/09 00:13:15 ID : Y01jzbCqlBd
찬란한 물감이 옅게 번져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목도한 하늘이 온통 적갈색인지라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파묻은 손바닥 사이로 짙은 액체가 흘렀다. 역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그래, 얼마 전 다녀갔던 산이 생각이 났다. 내려오는 길이 미끄러워 진창 욕을 뱉어냈었는데 까닭은 바닥에 빈틈없이 깔린 거무죽죽한 아카시아 때문이었다. 언젠가 영원의 시간을 샀을 아카시아는 어느새 본연의 색을 잃고 짓밟히고 뜯기어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조금의 안타까움과 더불어 여유분의 동정을 주곤 제 갈길을 갔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명은 제 손에 있는 액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것이 짓씹힌 아카시아일지도 모른다고, 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Aynn 2019/08/09 00:21:10 ID : Y01jzbCqlBd
그녀의 정신적 지주는 노란 토끼였다. 명이 어릴 적에 제 모친이 속삭이듯 읽어주었던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글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아이이기도 했다. 명은 이빨이 검붉고, 눈이 파랗고, 털은 온통 프리지아로 물들인 듯 노란 그 작은 토끼를 몇 번이고 곱씹어 부르고는 했다. 노란 토끼야, 노란 토끼야. 노란 토끼와 눈을 맞대면 소원을 들어준다 지껄이는 그 허구를 명은 철썩같이 믿었다. 내 소원은, 사람들이 모두 죽는거야. 죽어서 없어지는거야. 뼈채로 가루처럼 녹아버리는거야.
Aynn 2019/08/09 00:30:51 ID : Y01jzbCqlBd
명은 제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하지 못했다. 덕에 의심스러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녀는 일단 용의선상을 벗어나고는 했다. 저렇게 감정절제를 모르는 아이가 그럴 일이 없지. 숱하게도 들어왔던 말이었다. 명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실 맞으니까. 고개가 꺾여 돌아가는 아픔을 느끼고도 악을 쓰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거니까. 한번은 입고있던 교복을 내던지고 길바닥에 나체로 누워 구른 적도 있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웃음에 미친듯이 쾌락을 느꼈다. 명이 중얼거렸다. 그때 참 행복했는데.
Aynn 2019/08/09 00:34:40 ID : Y01jzbCqlBd
명의 모친은 말을 할 줄 몰랐다. 명이 여덟 살을 넘기던 그 해에 입이 반 이상이나 찢어져서는 흐르던 피를 닦아내지도 않으며 웃었다. 활짝. 찢어진 입이 더 찢어지게 웃었다. 그때 내 표정은 어땠더라. 울었던가, 낯이 시퍼렇게 질렸던가. 것도 아님 제 엄마를 따라 웃었던가.
Aynn 2019/08/09 00:48:38 ID : Y01jzbCqlBd
명은 고등학교 이 학년으로 올라섰다. 느즈막히 내린 새하얀 눈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 학년으로 접어들었을 시점에, 명의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일이 하나 일어났다. 걔 알아? 존나 예쁘대. 이번에 전학온 애 말이야. 이름이 연이라고 했던가? 야, 그렇게 따지면 이 학년 일 반에 걔, 창년. 몸 판다는 애 있잖아. 걔도 예쁘지 않아? 이름이 운 명이었나. 하긴, 예쁜 걸로 치면 걔가 우리 학교 통틀어서 제일 반반할 걸. 우리 학교가 뭐야, 내가 보기엔 이 일대에서 제일인 것 같던데. 근데 걘 존나 성격이, 좆같잖아. 아무한테나 위 아래 다 대주고 다니고. 학교도 거의 항상 오지도 않고. 걔, 근데 부모가 대기업 회장이라 그러지 않았어? 나도 그 얘기 들었는데, 지랄. 설마... 야, 걔 어릴 때 희귀병 앓았다고 그랬잖아. 그 뭐더라. 멜라닌 색소 다 빠지고 피부는 시리게 창백한데다가 홍채 존나 새빨간 오드아이 된 거. 씨발, 야, 나도 그런 희귀병 좀 앓고 싶다. 지랄, 넌 운 명이랑 본판부터가 다르잖아. 좆까, 피차 마찬가지면서.
Aynn 2019/08/09 00:59:29 ID : Y01jzbCqlBd
학교에는 명의 이름을 모를 사람이 없었다. 학교 뿐이 아니었다. 소문에 소문을 타고 흘러간 몇 학교에서도 이미 명을 알고 있었다. 알 뿐일까. 그, 백금발 머리에 붉은 눈 걔 있잖아, 하면 다들 아, 걔. 하며 신통하게도 알아처먹었다. 까닭은 이래저래 많았는데, 첫째를 꼽자면 환장하게 예뻐서, 둘째로는 미친년, 창년, 싸이코 등 갖가지 수식어가 따라붙어서, 셋째로는 세간을 떠도는 숱한 소문의 중심이어서. 쟤네 부모는 대기업 회장이래, 희귀병을 앓는대, 창년이래, 사실 교포래, 몸 대주고 다닌대, 것도 여자한테만. 남자는 죽어도 피한다고 하더라. 듣기만 해도 씨발스러운 말들에 부정하며 외려 핀잔을 주었던 이들도 명을 한 번 만나면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했다. 명도 그 소문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부정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거, 절반은 맞는 말이라. 딱히 트집잡을만한 내용이 없던 뜻에 명은 아이들이 하라는대로 냅두었다. 해명한다한들 달라지는 것도 없을텐데. 명이 조용히 뇌까렸다.
Aynn 2019/08/09 01:10:00 ID : Y01jzbCqlBd
전학을 오기도 전부터 학생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된 화제의 주인공은 짧은 머리를 가진 무표정의 여자아이였다. 이름은 외자, 특이하게도 부친 쪽 성이 아닌 모친 쪽 성을 따랐다. 필 연, 굳이 번역하자면 必緣. 짙은 쌍커풀에, 눈을 깜빡일때마다 말려올라가는 속눈썹. 연이 아이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씨발스럽게 예뻐서. 쉽게 다가가지 못할 짙은 분위기에 싸늘한 얼굴, 언제나 무표정만을 고수하는 연의 얼굴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두 호를 외쳐댈만큼 잘생긴데다가 예뻐서, 한동안 그녀 역시 숱한 염문설들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다.
Aynn 2019/08/09 01:19:09 ID : Y01jzbCqlBd
긴 겨울을 마치고 시작되는 학기 첫 날, 명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반사적으로 온 몸이 부서질만큼 죄이는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가는 걸음을 틀어 아침 하늘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바들이 즐비한 곳으로 향했다. 명이 중학교 일 학년에 소속되어 있을 무렵부터 알았던 여자가 사장으로 있는 곳이었다. 디 에이프럴. 명에게는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온통 씹스러운 소리만을 뱉어내는 곳이라, 자신도 마음 놓고 씹스러울 수가 있어서.
Aynn 2019/08/09 01:30:45 ID : Y01jzbCqlBd
흰 간판에 검은 고딕체로 쓰여진 간판은 깔끔하니 예쁘장했다. 샵, 디 에이프럴. 오후 여덟 시부터 운영합니다. 역시나 불은 꺼져있었다. 명은 교복의 안주머니에서 여자에게 받았던 마스터키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갈 곳이 없으면 방황하지 말고 여기로 와. 내가 허락한 거잖아. 네 나이 때에는 기댈 곳이 없다는 거, 그게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몰라. 여자의 중얼거림이 그 날 명에게는 커다란 파장으로 다가왔다. 생각하자니 괜시리 비웃음이 새려고 했다. 언제적 말을 아직도 믿어. 정신차려, 미친 것아. 제 자신이 웃겨 죽을 노릇이었다. 명이 천천히 마스터키를 구멍에 넣고 돌렸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대로 뒈질 수 있담 얼마나 웃긴 꼴일까.
Aynn 2019/08/09 01:33:48 ID : Y01jzbCqlBd
"첫 날부터 땡땡이 까고 있네."
Aynn 2019/08/09 01:38:07 ID : Y01jzbCqlBd
순간의 환영을 깬 낯선 목소리에 헛것이라도 본 것인지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더 희게 질렸다. 명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같은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였다. 짧은 머리에, 무심한 표정. 명찰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있지 않다. 명이 멍청하게 아이의 왼쪽 가슴을 바라보던 시선을 그녀의 얼굴로 옮겼다. 존나 예쁘네, 얘. 그런 생각이 머릿 속을 난잡하게 헤집어 놓았다. 씨발, 뭔데 저렇게 예뻐. 좆같이 예쁘잖아.
Aynn 2019/08/09 01:41:22 ID : Y01jzbCqlBd
"같은 학교인 것 같은데, 그쪽은 학교는 안 갈 것 같고." "......" "좆같이 보일 건 아는데 아는 척은 좀 하고 싶네. 존나게 예뻐서, 그쪽이."
Aynn 2019/08/09 01:44:54 ID : Y01jzbCqlBd
순간 제가 말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씨발, 뭔데 저렇게 내가 할 말을 대신 해주고 지랄이야. 고개를 모로 돌린 명이 문 따기에 집중했다. 더 상대하다가는 좆같게도 그쪽도 예쁘다는 소리를 뱉을 것만 같았다. 명이 흥미를 보이지 않자 올렸던 손을 내리고는 짤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명아. 어느 사이에 명의 명찰까지 본 듯 했다. 그 아이는 어느 새 명을 지나쳐 학교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한채로.
이름없음 2019/08/09 01:58:09 ID : k8ja8jjBxRx
분위기랑 등장인물 서사에 홀려부룟다 완존 취저.... 난입이라면 미안해 꼭 계속 이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ㅠ.ㅠ
Aynn 2019/08/09 13:22:00 ID : Y01jzbCqlBd
난입은 환영이에요, 언제든 와도 좋으니까 꼭 자주 들려주면 더 좋고.
Aynn 2019/08/09 13:59:36 ID : Y01jzbCqlBd
아이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보던 명이 빳빳한 저 쪽의 교복과 너저분히 주름잡힌 제 교복을 흘기다 눈을 자물쇠에 고정했다. 실은, 그러니까. 방금 전에 이미 다 열어버렸다. 그 애가 다가오기도 전에. 자물쇠를 문고리에서 빼내고, 검은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여는 그 일련의 동작은 명이 수십 번도 더 되감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말을 건 찰나 손에서 자물쇠를 놓쳐버렸다. 오가며 몇 번은 본 사이마냥 침착하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꽂혀올 때, 명은 제 당황을 여과없이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당황, 둘째는 황당해서. 제가 아무리 늘상 웃는 표정으로 다닌다 한들 아이들에게는 그게 살인자의 미소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옆을 스쳐지날 때마다 아무런 까닭 없이 섬칫 떠는 아이의 몸을 그렇게 열 네 번 정도 번복해서 보고야 깨달았다. 아 이런, 씨발.
Aynn 2019/08/09 14:12:05 ID : Y01jzbCqlBd
그 후로는 웃고 다니길 포기했다. 짜증이 잔뜩 배어나오는 얼굴로 하루에도 몇 번씩 무언가를 토해내고는 했다. 그게 좆같은 비속어든, 음식물이든 간에. 가끔은 기침을 하다가 제 손바닥에 가득 고인 붉은 그것을 마주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활짝 웃었다. 세상이 떠나갈만큼. 명은 어쩌다 한 두번씩 학교에 나오고는 했다. 굳이 나오지 않아도 훈수를 둘 사람은 없었지만, 명은 이따금씩 학교에 얼굴을 내비추고는 했다. 드문드문 기억나던 교과서 내음이 그리워질 때 즈음에 학교에 찾아와 제 자리에 쌓인 수많은 프린트들을 수거해갔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창가의 녹색 담쟁이들이 시간이 갈수록 녹빛에서 황토색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론 물을 주거나 한다는 친절은 내비추지 않았다. 명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Aynn 2019/08/09 14:20:19 ID : Y01jzbCqlBd
노란 토끼야, 노란 토끼야. 명의 속살거림에도 대답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말해 봐. 소원을 들어준다며? 왜 사람들은 죽지 않아? 내가 빌어온 소원은 왜 이루어지지 않지? 일 학년의 마지막을 앞두고 그녀가 학교를 온 날, 담쟁이들은 모조리 앙상하게 말라있었다. 진부하지만 현실적인 결과였다. 어쩌면 담쟁이의 수명이 질길 것이라 착각했던 제 모가지를 비틀어 죄이고싶었다. 명은 그 순간 아주 조금, 어쩌면 저 담쟁이들이 저와 같은 팔자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동정이라 치부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을 빠져나왔다. 옥상으로부터 뿌리를 뻗었던 담쟁이들을 모조리 철거한다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들어왔다.
Aynn 2019/08/09 14:28:35 ID : Y01jzbCqlBd
명이 희귀병 진단을 받았던 것은 여덟 살의 늦가을이었다. 다른 날보다 조금 더 바람이 세찼고, 모친한테는 조금 더 맞은 날이었다. 까닭없이 센 제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터무니없이 의심스러워 부친의 손을 잡고 대학 병원으로 이동했다. 그 후로는 목소리를 낮춘 굵직한 어른들의 몇 마디 외엔 더 이상의 말이 오가지 않았고, 명은 졸음에 감아지는 눈을 버티고 서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오른쪽은 다홍빛의 눈동자, 왼쪽은 고동색의 눈동자. 괴물, 머저리, 정신병자. 명이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괴물, 머저리, 정신병자. 제 부친은 제가 매일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알까. 괴물, 머저리, 정신병자. 흰 선반 위에 놓인 면도칼이 눈에 들어왔다.
Aynn 2019/08/10 20:06:05 ID : Y01jzbCqlBd
좆같은 딜레마였다. 망각이 신의 축복이라고 어느 누가 지껄였던가. 그렇담 왜, 이 빌어먹을 기억력은 이렇게 사진찍히듯 선명한걸까. 하나의 사람이기 이전에 신에게 버림받은 존재이던가. 신은 제 눈에 어여쁘다하는 사람에게 시련을 준다 들었다. 야, 것들 다 지랄이라고 전해. 세상 그 누가 제 눈에 들어차는 고난을 주겠어. 그냥, 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조품이니 굴려대는거지... 씨이발.
Aynn 2019/08/10 20:13:50 ID : Y01jzbCqlBd
당연한 소리이겠지만, 그녀는 신을 믿지 않았다. 이 세상 어느 것도 믿지 않았다. 물론 저도 믿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조용히 살아보려고 했더니 별 거지같은 일들이 태반으로 쌓여서 지랄이다. 죽음에 미치도록 초연한 명의 두 눈을 몇 초 이상이나 똑바로 본 사람은 없었다. 그 눈동자가 깜빡일 때는 그저 인형같고 예쁘다 여겼으나 막상 마주한 순간은 한여름에도 오한이 서렸다. 담담함, 좆같음, 배신감, 분노 등이 뒤섞여 한 덩어리의 구가 된 명의 두 눈은 마주하는 이로 하여금 살결이 죄 튿어지고 뼈가 곱게 갈려 승냥이들의 먹이로 던져진 자신을 보는 듯한 혼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 감정들을 모두 묶어 한 단어로 정리시키자면, 살기. 그건 다른 무엇도 아닌 세상을 향한 살기였다.
Aynn 2019/08/10 20:16:33 ID : Y01jzbCqlBd
"성은 필, 이름은 연 입니다. 저를 부를 때에는 성을 떼고 불러주심 좋겠네요."
Aynn 2019/08/10 20:25:31 ID : Y01jzbCqlBd
누가 감히 연의 앞에서 가식의 '가' 자를 꺼낼 수가 있을까. 세상 누구에게도 잘 보이려는 척, 그딴 게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무감각한 인사에 걸맞은 목소리까지 섞어 교실을 대차게도 싸하게 만들어 놓은 연이다. 짜맞추기라도 한 듯 입을 다문 아이들은 어쩌면 '싸가지 없지만 잘생기고 졸라 예쁜 애' 이미지를 구상해 공상 속에서 적절하게 로맨스도 때려처넣으며 썩 그럴싸한 삼류 소설을 하나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 주인공은 방금 막 전학 수속을 모두 마친 장본인이겠지만.
Aynn 2019/08/10 20:31:30 ID : Y01jzbCqlBd
그리고 그 소설에 조금 더 클리셰적인 요소를 붓는다면, '남들한테는 까칠하면서도 제 이름만 불리면 입꼬리가 올라가는 아이' 정도겠지. 몇몇은 그 주인공의 파트너가 되리란 망상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모양이었다. 까닭은 얼굴이 붉어지는 아이들도 군데군데 속출하기 시작했음이다. 아주 지랄들을 해요. 연의 입매가 뒤틀렸다.
Aynn 2019/08/10 20:39:25 ID : Y01jzbCqlBd
어설프게 일단락된 연의 첫 날은, 생각보다 너저분했으며 개 같았다.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도 이유없이 짜증이 저몄다. 제가 옆을 스쳐가기라도 하면 수줍게 얽힌 얼굴로 히죽이는 꼴을 몇 번을 본 지 몰랐다. 나는, 나보다 예쁜 년 아니면 안 만나. 그게 연의 오래된 관습이었다. 그게 친구든, 애인이든간에.
Aynn 2019/08/10 20:44:59 ID : Y01jzbCqlBd
오전에 마주쳤던 여자가 생각이 났다. 백금발에, 한 쪽 눈은 붉은 빛을 띄고 있던. 그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다던 연의 심장이 거짓 조금 보태서 존나 세차게 뛰었단다. 같은 반일까. 어디에 살까.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같은 교복이란 건 인지했지만 더 이상의 사고회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교복 코스프레는 아니겠지. 씨발, 그래도 좋을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까 미성년자는 술집 출입금지 아니었어? 뭐 그렇게 당당하게 교복을 입고, 아침에. 거기가 어디었더라. 샵까지는 봤는데 그 뒤에 적힌 문장은 못 봤네, 그 사람 얼굴 보느라.
이름없음 2019/08/11 02:15:32 ID : k8ja8jjBxRx
존대를 쓰시니 저도 존대로... 약간 투박하고 거칠고 극단적인 문체 좋아하는데 그래서인지 읽을 수록 점점 빠져드네요 표현이 부족해서 알맞은 단어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그만큼 좋다는 말이에요...,,
Aynn 2019/08/12 23:18:47 ID : Y01jzbCqlBd
최고의 칭찬입니다 고마워요 ㅋㅋㅋㅋㅋㅋㅋ 한동안 안 오다가 와보니 이런 댓글이 달려있어서 순간이나마 행복했습니다
이름없음 2019/08/12 23:26:13 ID : O63TPbeHBaq
자까님 잼써요 8ㅅ8 더 써주세요,,,ㅜㅜ 물론 재촉은 아니구 간간히 들려달라는 말이엇슴다
Aynn 2019/08/12 23:32:54 ID : Y01jzbCqlBd
해는 벌써 저만치 제 연기만을 남긴 채 바쁘게 사라져갔다. 붉은 머릿가닥은 여러 손길을 거친 듯 부스스하다. 익숙하게 뜬 머리를 가라앉히며 걸어오는 저 편의 여자가 눈에 띄었다. 새우튀김마냥 돌돌 땋아 넘기곤 흐트러지지 않도록 유달리 신경을 썼던 제 머리를 이젠 될대로 되라지, 심정으로 팽개쳐버린 직후다. 도시의 밤거리는 낮과 퍽 다르게 느슨히 풀어진 공기가 은은하게 깔려있다. 그리고 여자는 그 공기를 더욱 고르게 깔아놓으려 걸음 하나에도 신중을 기한다. 그렇게 빨간 문패가 걸린 집으로부터 이천스물 두 발짝을 옮겨놓으면 네온사인이 밝혀진 삼 층짜리 건물이 눈에 띄인다. 샵, 디 에이프럴. 여자는 에이프럴의 사장이자, 명의 오랜 지인이었다.
Aynn 2019/08/12 23:35:00 ID : Y01jzbCqlBd
상상치도 못한 댓글이 달려 놀랐어요 ㅋㅋㅋㅋㅋ 누추한 글을 읽어주셔 고맙습니다 부디 자주 방문해 주세요.
Aynn 2019/08/12 23:53:14 ID : Y01jzbCqlBd
노랗고 빨간 불빛이 잔잔한 새벽의 시간에 한 번이라도 들러본 사람이라면 건너건너 들어보았을 이름이었다. 통칭 디, 말 그대로 단조로운 알파벳 하나. 신기하게 그녀 자신과의 접촉은 한 번도 없던 사람까지도 그녀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왜, 붉은 머리 꼬맹이 있잖아. 라고 속살거린다면 아, 디? 라며 즉각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Aynn 2019/08/13 00:29:36 ID : Y01jzbCqlBd
디의 이름은 하나였다. 말 그대로, 1월 1일. 새해에 태어난 아이.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똑바로 부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까닭은 본명을 모른다는 것도 있었겠지만 누구라도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처절하게 무너지는 것을 눈앞에서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는 감히 하나의 앞에서 그녀의 본명을 꺼내는 일은 금기시되었다.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덕에 그녀의 이름을 아는 이는 명을 포함해서 몇 단골밖에는 되지 않았다.
Aynn 2019/08/13 00:34:17 ID : Y01jzbCqlBd
에이프럴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하나가 멈칫했다. 불이 켜져있었다. 네온이야 제가 전날에 켜놓고 간 것이라고 짐작되었지만 누가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필시 저보다 새카맣게 어린 꼬맹이리라. 누구겠어. 백금발에 붉은 눈, 그 새파랗게 어린 고딩 말이지. 하나가 문을 부러 세게 열어젖혔다. 날카로운 밤공기가 나른한 조명을 타고 흘러들었다. 스탠드 불을 밝혀놓고, 다리를 삐딱하게 꼬고 앉아 주인장 흉내를 내고 있는 명이 뻔뻔한 웃음으로 손을 들었다.
Aynn 2019/08/13 00:36:08 ID : Y01jzbCqlBd
"하이, 디."
Aynn 2019/08/13 00:50:21 ID : Y01jzbCqlBd
하나는 스물 다섯이었다. 그럼에도 꼬맹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녀가 명보다도 어릴 무렵에 밤거리를 처음으로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당돌하게 미성년에게는 금지된 새벽의 시간을 파고든 하나는 그 무렵부터 D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당연스럽게도 그녀를 찾아왔던 단골들에게 꼬맹이라는 수식어를 달게되었다. 꼬맹아, 붉은 머리 걔, 야, 저기, 빨강머리 앤. 그들이 하나를 부르는 애칭은 차고 넘쳤다. 언젠가 명이 물은 적이 있었다. 언니는 왜, D라는 이름을 써요? 멋있어 보이려고? 멋대로 취해서 주절거리는 명이 시끄럽기도 했다. 다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동안 숱하게도 단골들이 하나에게 물었던 질문이었지만 섣불리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명에게는 달랐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빼다 박은듯한 명에게는 농처럼 가벼이 일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Aynn 2019/08/13 00:55:48 ID : Y01jzbCqlBd
데이 드림이 뭔 지 알아? 하나가 가지런하게 진열된 유리잔들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씨발, 나도 취한 거지... 이 시간에. 아니면 왜 이 말을 하겠어, 오랫동안 묵혀와서 잊었을 거라 성급하게 착각했던 이 말을. 명이 조소를 띄우며 받아쳤다. 제가 언제 학교를 제대로 가 본 적이나 있어요? 연달아 갔던 최고 기록이 이틀인가, 그럴걸요? 하나가 웃었다. 알 거라고 기대도 안 했어. 백일몽이야, 데이 드림 뜻.
Aynn 2019/08/13 01:00:43 ID : Y01jzbCqlBd
백일몽, 실현될 수 없는 헛된 꿈인가... 그거던데. 명이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하나가 무심하게 답문했다. 영어는 잘 모르더니, 그건 어떻게 알았어. 명의 입술이 활 모양을 그렸다. 어쩐지 그 웃음이 누군가를 겨냥한 지독히도 쓰라린 상처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Aynn 2019/08/13 01:01:07 ID : Y01jzbCqlBd
"나도 있거든요, 백일몽."
Aynn 2019/08/13 01:03:56 ID : Y01jzbCqlBd
그렇게 말하는 명의 눈가가 깊게 패여보였다. 눈동자가 달 아래 호수처럼 깊어진다. 까닭없이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죄 쏟아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하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기 기억이었다. 지난 몇 년간 묻어놓고 그 근처에는 발자국조차 찍어놓지 않았던 유기 기억.
Aynn 2019/08/13 01:14:09 ID : Y01jzbCqlBd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꺼내놓기엔 아직 자신은 상대적으로 미성숙에 가까웠다. 언젠간, 그래. 언젠간. 명이 또 한 잔을 부었다. 이러단 병나발을 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미친 하나가 명의 것을 빼앗듯이 감추었다. 명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릴 뿐 아무런 태도도 비추지 않았다. 곧 부서질 듯 아슬한 그녀의 얼굴에 하나에게는 죄책감의 빛이 떠올랐다. 또, 또다. 명은 일정 간격으로 무언가에 잠식되는 시간이 있었다. 그게 언제던지, 어느 곳에서든지. 마치 기면증처럼, 무언가의 발작처럼. 명을 제외한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나가 명의 턱을 끌어 자신과 시선을 맞추었다. 짧은 찰나 명의 눈동자에 검은 불길이 일렁였다.
Aynn 2019/08/13 01:14:38 ID : Y01jzbCqlBd
"언니, 나랑 씹 뜰래요?"
Aynn 2019/08/13 01:15:58 ID : Y01jzbCqlBd
그렇게 말하는 명의 눈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눈 뿐만이 아니었다. 얼굴 전체가 잘 빚어진 석고상마냥 표정이 없었다. 그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하나도 전혀 읽어낼 수 없었다. 하나가 피식 웃었다. 새파랗게 어린 고딩이.
Aynn 2019/08/13 01:17:47 ID : Y01jzbCqlBd
왜요, 새파랗게 어린 고딩이라고 무시하는 거에요? 얼마 전에 다녀간 손님이랑은 씹 떴다면서요. 걔도 나랑 차이 얼마 안 나 보였는데. 내가 걔보다 잘 울 걸요. 내가 걔보다 잘 해요. 잘 돌리고, 잘 조이는데.
Aynn 2019/08/13 01:22:30 ID : Y01jzbCqlBd
하나가 명의 뺨을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느릿하게 동공을 굴리던 명이 볼을 만졌다. 쓰라린 게, 현실임에 틀림이 없었다. 좆같은 소리 하지 마, 네가 창년이야? 네가, 아무데서나 몸 굴리고 오는 년이냐고. 싸늘한 말투이자, 명은 처음 듣는 하나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제 볼을 만지작대다가 명이 픽 웃었다. 언니는 언니네요, 다른 년들하고는 다르긴 다르구나. 하나도 그만 웃고 말았다. 그렇게 말하는 명의 목소리에는 한 줌 장난기가 서려있어서, 설사 방금 것이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알고도 모른 척 할 수 있을 수가 있어서. 명이 비척이며 일어났다. 갈게요. 하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떼서 기계처럼 대답했다. 잘 가.
이름없음 2019/08/13 02:40:12 ID : k8ja8jjBxRx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 너무 기다려지네요 늘 생각하는 거지만 등장인물 서사에 대해 덤덤하게 읊으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심장을 뻐렁치게 만듭니다... 올 때마다 분량이 많기도 많아서 한 번 읽고 정주행하고 반복해서 읽어용 혹시 여기서 연재 그만두시고 다른곳으로 가신다면 부디 주소 함 찍어주시고 삭제해주세요 이건 꼭 결말까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Aynn 2019/08/16 21:13:51 ID : Y01jzbCqlBd
너무 오래간만인가요. 본업이 학생인지라 개학 덕에 이래저래 바빠 틈이 나지 못했는데 기다려주었던 분이 있다니 황송하고도 한편으로는 죄송하네요. 아이디 외워두고 있습니다. 언제나 들러주시는 것에 감사드려요. 제대로 글을 배워보지도 못했고 나이도 한참 어린지라 글이 단정치 못한 부분이 많을텐데 그럼에도 한 마디 질책조차 않으시고 예쁜 감상평 달아주시는 것 덕에 하루하루 기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부디 그 쪽도 그러기를 바라요.
Aynn 2019/08/16 21:24:09 ID : Y01jzbCqlBd
"하이는 지랄, 운 명. 너 학교 안 갔지?"
이름없음 2019/08/16 21:59:20 ID : Y01jzbCqlBd
하나가 질책하는 말투로 명에게 물었다. 명은 고개를 으쓱이더니 중얼거렸다. 여기 있으라며 허락해줄 땐 언제고. 야, 그게 그거랑 같아? 내가 학교 빼먹으라는 소리까지 했어? 진짜... 내가 애를 키우지. 하나의 말에 명이 깔깔 웃었다. 키워요? 누가, 언니가? 저를요?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배가 아파올때쯤, 돌연 숨을 멈추고는 진득이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에 움찔했다. 짙은 밤색의 눈동자부터 시작해서 괜시리 명의 시선이 닿는 곳곳이 따끔거린다. 찰나가 곧게 늘어져 마치 수억년의 세월을 헤쳐온듯한 혼동이 일 정도로 느렸다. 적당한 곳에 시선을 두고 하나가 입을 떼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어렵사리 뱉어낸 의문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금세 누군가의 숨으로 인해 먹혀들어간다. 우물우물 씹히고, 넘겨져서. 끝내 입 안에 맴도는 여운을 뒤로한 채 조각조각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문드러진다. 호흡이 벅찼다. 짧게 입을 맞대고 떨어진 명이 들썩이는 가슴팍을 보고는 또 한 번 웃었다.
이름없음 2019/08/18 04:37:38 ID : k8ja8jjBxRx
또 올라온 걸 이제 발견했네요... 부담가지지 마시구 천천히 와주세요 언제고 기다리겠습니다!
이름없음 2019/10/04 23:43:23 ID : i63Pa07bu2n
.
이름없음 2019/10/04 23:44:22 ID : i63Pa07bu2n
작가님 존버타고 있습니다... 보고 싶어요.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들러 읽다가 가곤 합니다. 언제쯤에야 오실까요. 보고 싶어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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