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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pTUZfPioZir 2020/04/10 00:29:03 ID : kmoFjusp9jt
닥치는 대로 읽기. 난입가능, 단 스탑 설정 후 부탁드려요.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1 06:09:48 ID : kmoFjusp9jt
태초에 욕망이 있었다. 더 높은 것은, 더 많은 것을, 더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사람이 그 무규칙하고 사나운 성질을 두려워하여 인과를 만들어 냈다. 인과는 책임과 비례성을, 한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문명의 시작은 천벌과 같은 사건이었다……. 모든 명분과 당위는 욕망을 속여 가두기 위한 게임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욕망을 통치하려는 술책은 얼마나 잘 작동하고 있는가. 인간은 거기에서도 각자의 샛길을 찾아내 유용하고 있지 않나. 도덕의 원리는 부덕한 사람을 짓뭉갤 근거가 되며 인간은 곧잘 자신의 잘못에 신의 이름을 덧붙여 쓴다. 그런 기만의 역사가 시장의 잔인성으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일 것이다. 돈이 그 자체로 악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돈의 성질은 도리어 윤리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부분에서 온다. 중요한 건 그게 수많은 게임을 하나로 엮어 준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 에서 이름과 서사를 지워 버린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익명 뒤에 숨을 때 가장 솔직해지듯이 욕망의 정직성은 무기명의 티켓 위에서 되살아난다. -인버스, 단요.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1 06:11:20 ID : kmoFjusp9jt
(……) 그리고 엄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참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비집어 나오는 웃음. 웃음은 점점 커져서 환해지다가 얼굴을 가득 덮었다. 그 모임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밝았다. 거대한 유빙의 일부가 끊어져 내려오고 또 녹아내려서 바다의 일부가 되는 순간 같았다. 비로소. 나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늦잠에서 깨어나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을 보는 것처럼, 눈물이 약간 났고 심장이 따끔거렸다. 다시 그 감각이다. 나는 순간적인 이미지를 마취약으로 삼는 것이 나의 최선임을 알았고, 내가 밟아 오른 불행들과 앞으로의 악덕을 찰나의 구원 속에 감췄다. 나는 영원히 평안하게, 행복하게, 조용하게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살 것이다. 거기에서 명분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 욕망이,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세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에 대해서라면 이것 으로 충분하다. 나는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인버스, 단요.
다정의 말, 현상현 2024/03/22 03:50:59 ID : kmoFjusp9jt
너는 알고 있는 거지, 내 가슴팍은 너에게만 잘게 부서진다는 걸. 너는 조용히 무릎을 내어주며, "여기 가만히 누워서 빗소리를 들어봐 귀 기울이면 멀리 자동차 굴러가는 소리도 들려." 너는 내가 잠들 때까지 속삭이네. 소근소근 흥얼거리네. 그만하라고 나를 쓰다듬고 잠재우는 일은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고 잠의 바깥으로 달려나가고 싶었지만 결국 내가 도망칠 곳 또한 너였지. 부드러운 말들로 나를 길들이지 말아 줘 나를 마지막이라 부르지 않을 거면 차라리 어떤 이름도 내어 주지 말고 아침이 와도 그림자 하나 남기지 말아 줘.
재주, 현상현 2024/03/22 03:51:38 ID : kmoFjusp9jt
그러니까 선생님 제겐 위로하는 재주가 없습니다. 구원 역시 불가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것 말고는 별 방도가 없습니다. 그저 싸늘하게 사랑하는 재주. 밤낮으로 실패하기를 반복하지만 지겹게도 사랑하는 재주. 윤을 사랑하는 재주. 제겐 그것 하나 말고는 없습니다.
약속해, 반드시, 현상현 2024/03/22 03:55:42 ID : kmoFjusp9jt
너는 더 녹아내리고 싶거나 더 타버리고 싶어 어떤 약속이라도 했을 것이다. 문 앞에서 속삭이는 안부를 두드려 팬 뒤 어제의 슬픔과 함께 달여 먹고 형태가 허물어진 외로움을 소분하여 며칠씩 꾸준히 복용하는 일은 분명 괴롭지만 효과적인 방식이었지. 말하자면 이건 모두 네 죄다. 내 모든 꿈을 강탈한 죄. 환한 낯빛으로 내 핏줄에 불씨를 댕긴 죄. 온 거리에 슬픔을 흩뿌려두고 그리움을 달리 발음 한 죄. 평화 속에 침몰해 가던 나를 불시에 건져 올렸다가 그리움의 방벽을 무너뜨려 온 마음을 수몰시킨 죄. 네 이름 하나 재갈처럼 물리고 그 외의 표음을 잊게 하여 사람의 발음을 잊게 만들어 짐승의 소리로만 살게 만든 죄. 결국 이 울음도 네 공복의 위장 그 깊은 곳으로 기어들어 가겠지만 약속해. 반드시 너에게도 물 한 모금 제대로 삼키지 못할 날이 올 것이다.
기교, 현상현 2024/03/22 03:58:16 ID : kmoFjusp9jt
지독하게 울음을 참는 너는 나와 닮아 있었다. 나도 한 때 는 별 것 아닌 일에 소리를 내며 울던 아이였으나 슬픔의 종지부는 영영 찍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부터는 모든 슬픔을 이성적인 일들로 치부했다. 그러면 침묵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기교를 부릴 수 있었다. 그 기교 하나만 있으면 살았으면 하는 소망과 죽었으면 하는 충동 사이에서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입을 열어 울지 않으면 울음과 슬픔과 외로움과 공포가 쏟아져 내리는 일은 없는 법이다. 그저 입술을 수문인양 마주 닫고 목구멍을 치고 올라 혓바닥을 침몰 시키는 그 젖은 소리만 끌어안으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마음속에 바다를 만들어가면 되는 일이다. 익숙해지리라 믿으며 새것처럼 슬픔을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너도 고요히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이다. 두서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조용히 흘리며 침묵하며 우는 이들의 슬픔은 대개 이런 것이다. 나와 비슷한. 상실이라 서툴게 이름 붙이는 순간들을 서서히 맵짠 바다로 만들어가는 것. 봄날처럼 웃으며 무수히도 아름다웠던 네가 실은 사그라들지 파도의 마음을 가진 아이였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너는 여전히 울음소리를 내지 않을 듯하다. 너는 꽉 깨문 입술에서 조용히 새어 나오는 핏방울로 울음을 대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와 마찬가지로.
기교, 현상현 2024/03/22 03:58:43 ID : kmoFjusp9jt
나는 미친 척하고 슬펐던 너에 관해 쓴다. 우리가 비슷한 불행들로 서로에게 간절해질 수 있다고 믿으며.
탄식, 현상현 2024/03/22 04:00:19 ID : kmoFjusp9jt
알아. 이제 이 아름다운 책장에서 꺼내볼 수 있는 기억은 오로지 우울한 기상 현상뿐이라는 걸. 한 구절 입에 담으면 처음 며칠은 밤낮없이 가슴을 짓누르고, 이어지는 날들은 절망만을 희망하게 만들어 삶의 궤도를 안팎으로 뒤얽히게 만드는 파렴치한 문장. 벽력도 아니면서 새벽잠을 뒤척이게 만들었다가 척추 위로 매끈하게 흐르는 물방울이 되기도 하는 문장. 그래. 너도 이렇게 병증 같은 문장이 되고 싶은 거겠지. 누군가의 장탄식이 되어 가장 신성한 것부터 가장 부정한 것까지 모조리 차지하려는 거지. 이 눈가를 나른하게 물들이면서도 결코 채색을 허락지 않고 윤곽으로만 남고 싶은 거겠지.
오염, 현상현 2024/03/22 04:01:12 ID : kmoFjusp9jt
선생님. 고꾸라지는 저 낙엽은 누구의 기억으로 저리도 허약합니까. 맛보지도 못할 겨울에 지쳤습니다. 저는 조금 투박하게 걷는 일에 익숙하고 또 익숙해지길 즐기며 한 해 를 보내고 있습니다. 결코 이해를 원하지 않고 오로지 입술과 혀의 아우성에만 충실하다고 전한다면 선생님께선 조금 기뻐해 주실까요. 그 와 반대로 날로 가까워지는 절망에 입 맞추며 단물처럼 애정을 갈구한다 전하면 한숨을 쉬며 곤욕스러워해 주실까요. 선생님. 저는 이제 사랑받는 법을 알아요. 몇 알의 낱말을 레몬 사탕처럼 굴려가며 새침하게 웃어 보일 줄 알아요. 기형의 문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살 꿰어드는 영악함을 알아요. 시시탐탐 거짓 위로 손을 뻗고 푸념처럼 위로를 발음해요. 밤을 해체하고 핏물을 죄 뽑아내곤 창백하게 잠들어요. 이제 사실보다 더 좋은 걸 쓸 줄 알아요.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2 04:01:33 ID : kmoFjusp9jt
이제 사실보다 더 좋은 걸 쓸 줄 알아요.
슬픔, 현상현 2024/03/22 04:02:44 ID : kmoFjusp9jt
이름은 이미 다 써버렸습니다. 작달비 머문 고운 자리마다 당신 이름 다 써버렸습니다. 허물어지기 위해 쌓아올렸습니다. 마음은 지체없이 가난해졌다가 미적미적 늙어갔습니다. 사랑을 품는 일이란 살아남아 죽는 일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 문장들을 기억해주세요. 이제 우리는 어느 누구를 안아도 아픔에 완벽히 물들 수 없으며, 우리를 견고하게 만든 슬픔들이 결코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진 못할 것입니다.
기이하지, 현상현 2024/03/22 04:04:18 ID : kmoFjusp9jt
기이하지. 우리가 서로의 손목을 걸어 잠글 때면 나는 영영 돌아갈 길을 버리고 싶어졌다. 메아리 같은 흉터가 울먹 울먹 치밀어 오를 때면 어리광부리듯 잘게 앓는 소릴 내었지. 그럴 때마다 너는 괜찮다고 말해줬고 나는 괜찮지 않음에도 고분고분해는 밤을 얻었지. 석양에 손을 스치면 검지 손톱에 오색 물이 들까 그림자에 그림자를 덧붙여 걸으면 우린 먼 길을 떠날 수 있을까 감은 눈언저리를 데워주던 굿 나잇 키스 없이도 내일은 올 수 있을까. 기이하지. 깊이 잠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네가 없는데. 괜찮다고 말해주는 목소리가 오늘 밤엔 없는데. 빗장뼈 마다 달라붙어 있는 낮은 달빛은 여전한데. 조심성도 없이 너를 추억한다는 게. 그러다 옅은 네 웃음소리 가슴에 짤랑 떨어지면 그 여름 달빛이 온 방 안을 가득 채운다는 게.
더 이상, 현상현 2024/03/22 04:04:59 ID : kmoFjusp9jt
선생님. 꼼꼼하게 헐거워지는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이 마른 목구멍으론 소음 같은 시간을 마시고 있습니다. 무엇을 더 삼키고 무엇을 더 뱉어야 할까요. 희끗한 안부를 묻고 겁 많은 생각만 파내면 그만일까요. 그럼 더 엉망이 될 수 있을까요. 전 예전보다 나쁜 것에 능한데 엉망이 될 구석이 여즉 남아 있을까요.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2 04:05:26 ID : kmoFjusp9jt
더 엉망이 될 수 있을까요. 전 예전보다 나쁜 것에 능한데 엉망이 될 구석이 여즉 남아 있을까요.
같은 슬픔, 현상현 2024/03/22 04:08:00 ID : kmoFjusp9jt
요즘은 괜찮아요 선생님. 종일 아네모네로 꽃반지를 만들어도 좋을 만큼요. 밤마다 타들어 가는 별똥별의 길고 검은 꽁지깃을 지켜보다 잠드는 일은 또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 거예요. 제 몸을 태워 추락하는 꼴이 꼭 저 같아서 그저 주저 앉아 노래하는 방탕함도 꽤 유익하게 느껴지더라니까요. 선생님. 애써 저를 토닥이실 필요는 정말 없어요. 다정한 말은 사실 슬픔을 밑져서 만드는 거잖아요. 선생님께선 제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거든요. 다정한 사람들은 꼭 하나인 양 고열을 앓았다는 걸요. 그러니 선생님. 저는 영영 3인칭의 글은 쓰지 못할 거예요.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일이 제겐 가장 큰 미덕인걸요. 그래서 말인데요. 선생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흰 이불만 도로 덮어주세요. 꼭 이마도 보이지 않게 끝까지 덮어 주셔야 해요. 내일 아침 제 마음이 적신 베게 한 귀퉁이도 모른 척해주셔야 해요.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2 04:08:46 ID : kmoFjusp9jt
다정한 말은 사실 슬픔을 밑져서 만드는 거잖아요. 선생님께선 제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거든요. 다정한 사람들은 꼭 하나인 양 고열을 앓았다는 걸요. (……) 그래서 말인데요. 선생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작달비, 현상현 2024/03/22 04:10:50 ID : kmoFjusp9jt
잘 지내지. 내 사랑. 지독한 작달비를 맞던 날들이었어. 여름의 빗줄기는 사람을 새침하고 측은하게 만들어 물잔을 관통하는 한 줄기 빛 에서도 수백의 공상을 만들어내지. 종종 우리의 약속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조곤히 무지개에 목을 매달기도 했어. 다정히 식칼을 들어 외로운 동맥을 방문하기도 했지. 계세요. 그곳에 꼭 계신가요. 여전히 확연히 춤추고 계신가 요. 버려진 적 없는데 이 마음은 너무 자주 일렁이고 있어. 잘게 내 쉰 숨결마다 어지러이 흐트러지는 너는 여전해. 그러니 어떤 염려도 하지 말고 잘 지내야 해. 내 사랑. 나는 이상도 이하도 없이 억장으로 무너지는 제철 꽃을 바라보고 있어. 한 점 오염도 없이 이 여름을 지나고 있어.
목소리의 주인, 현상현 2024/03/22 04:12:08 ID : kmoFjusp9jt
(……) 생각해보면 늘 사소한 게 저를 죽여요. 시멘트 바닥 위를 투정 없이 미끄러지던 바람이나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이 당신의 정수리 위로 부드럽게 추락하던 햇살 같은 거. 손잡고 걸으면 종말까지 걸어도 좋겠다고 말하던 입술. 뭐 그런 거. 꼭 그런 것들이 저를 죽여요. 네. 당신이에요. 당신이 저를 죽여요. 당신은 제 가진 것 중 가장 어여쁜 불행이에요.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2 04:13:32 ID : kmoFjusp9jt
사람들은 내 연서를 읽고 정신 나간 새끼라고 손가락질 하는구나. 음전히 미쳤다고 한마디씩 하는 걸 보니 내 그리움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구나. 제 하는 짓이 미친 짓인지를 모르고 견디고 맞서며 저항 하길 즐기는 것. 사랑은 본디 이렇게 버러지 같은 것 아니었느냐. _사랑은 본디 그런 것 아니었느냐, 현상현 *이름칸 글자수 제한으로 본문 기재.
체념, 현상현 2024/03/22 04:14:41 ID : kmoFjusp9jt
나긋한 그 입술 위에서 떨어지는 단어들은 이른 오후 얌전히 타오르는 구름 같다가도 닫힌 창을 두드리던 폭풍우 같기도 하였습니다. 당신이 저지르는 숨결이면 제 온종일은 폐허가 되어도 좋았으니 당신에게 이해당한 듯 희망하겠습니다. 어느 날 제 시체를 저밀 때면 함께 죽었어야 한다고 말할 당신의 입술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도 헤어져야 하는 때에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계절 하나 넘긴다고 당신이 잊힐 리도 없습니다. 저는 이제 설명할 수 없는 거짓말을 써내리겠습니다. 어긋난 해피엔딩은 예의 바르게 훌로 간직하겠습니다.
악의, 현상현 2024/03/22 04:16:39 ID : kmoFjusp9jt
선생님. 이 지랄 같은 무례를 끝장내려면 몇 번의 계절을 더 보내야 할까요. 가없이 엉망이 되기 위해 몇 줄의 관심을 얻어야 할까요. 행복을 기도하는 사람 곁에서 울음을 기술하는 이 쾌락을 감히 아첨이라 칭해도 될까요. 제가 그들 손에 쥐여주는 건 늘 불공평하고 난삽한 문장뿐인데 그들이 흘리는 그림자를 주워 먹어도 될까요. 선생님. 면구스러운 이야기지만 저를 먹여 살리지 못하는 글줄이 도리어 저를 신나게 한답니다. 쓸모없음이 도리어 쓸모를 만든다는 사실이 얼마나 향기로운지, 환하도록 고통 스러운 것이 어찌나 달고 시큼하던지 저들의 무용한 안녕을 깨물고 싶어 새벽마다 어금니가 가려웠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부디 아무 의미 없이 나쁜 짓만 일삼는 저를 멀리해져야 합니다. 배신이 발화하기 위해선 꼭 믿음이 필요한 법이니 부디 저를 멀리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S에게_8, 현상현 2024/03/22 04:19:24 ID : kmoFjusp9jt
(……) 넌 미움 받길 원해? 원한다면 미워해 줄래? 그런 말 하지 마. 도대체 왜 그러냐고 화내셨다면 울먹이는 표정이라도 지어 보였을까요. 반드시 그랬겠지요. 눈가를 난만하게 어지럽히는 말속엔 꼭 습한 것들이 맺혀 있는 듯했습니다. 허나 그런 건 간밤 나뭇등걸 베개 삼아 잠든 이슬과는 본질부 더 다른 것이어서 투명하지도 위생적이지도 못하여 그저 우스울 만큼 진득할 뿐이라 말리기보다는 태워 버리기에 좋은 것입니다. 쉽게 속을 내보이는 당신께선 영영 가지지 못하는 것. 아주 어울리지 않아 도리어 온전히 제 것임을 증명 하는 것이었기에 그날 저녁은 아득하도록 다행이었습니다. 목덜미 위로는 서늘한 바람 불고 시간은 점차로 흘러 밤 까지 치닫고 창밖에선 문득문득 전구가 켜집니다. 바람에 너풀거리는 옷자락과 눈 시린 세페우스 별자리 아래에서 라디오는 백색소음 가지런히 울어내고 당신은 어렴풋이 속살 거립니다. 그 목소리 즐거워 보여 미상의 악보를 어루만지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모양새에 저는 어떤 것도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가눌 수 없어져 중심을 잃을 것 같습니다. 발이란 무엇이고 손이란 무엇이며 길과 기록은 무엇인 걸까요. 이 모든 건 제게 무엇이 될까요.
사랑하는 S에게_8, 현상현 2024/03/22 04:21:10 ID : kmoFjusp9jt
(……) 사실 이런 건 제게 중요치 않습니다. 전하고 싶은 말도 이런 건 아니었지요. 그저 그 맑던 한낮, 마주 앉아 농담을 나눠 먹고 느릿느릿 손등을 스치며 걸으며 조심스레 옆모습을 훔쳐보는 동안 품속에 고인 고백이 길 아래로 아무렇게나 쏟아지는 동안, 당신께 제 마음을 아무렇게나 내놓아도 다 좋았습니다. '시월의 어느 사흘', '이듬해 새봄 아침’ 같은 말이 우리의 약속을 굳건히 담보하지 못해도, 밤새 외곽의 어느 냇가를 말없이 걸으며, 새끼손가락으로 걸어둔 약속을 없던 일이라 말씀하셔도 저는 마냥 좋았습니다. 당신의 무엇도 되지 못하는 제 모습마저 모지도록 찬란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S. 여기 다음 계절로 침물하기 위해 당신에게만 입을 엽니다. 흑 저를 생각해주신다면 저를 위해 건강히 지내주시기를. 그럼 이만.
미련, 현상현 2024/03/22 04:22:02 ID : kmoFjusp9jt
허파부터 철썩 치고 드는 그리움을 입속에 가두며 생각했지. 넌 어디서 또 누구를 죽이고 있진 않을까. 네가 죽이는 건 오로지 나여야만 하는데. 네 눈물은 오로지 나만을 수장시켜야 하는데 넌 또 어디서 누구를 잠겨 죽게 하고 있지 않을까. 네가 내뱉던 숨결에 난 여지껏 균열 졌는데 너는 끝끝내 나를 죽이려 들진 않는구나. 그리운 마음은 발 등 아래까지 폭삭 녹아 저 아침까지 흘러내리는데 나는 끝끝내 멀쩡하구나.
기도, 현상현 2024/03/22 04:22:55 ID : kmoFjusp9jt
(……) 사랑을 할까 더 외로워질까 아니면 그 둘을 동시에 해볼까 문턱을 기웃거리는 아이러니가 우리를 울리더라도 부디 다정은 멈추지 말아줘. 아주 잠시만 곁에 있어 줘. 내가 기른 눈물들을 다독여줘. 이 그리움은 꿈속에서 울타리치고 당신 모르게 방목할 테니, 부를 수 없는 곳에 있더라도 꼭 나를 못살게 굴어줘. 그러면 좋을 거야. 분명 좋을 테지. 반드시 좋을 거야.
거미의 논증, 현상현 2024/03/22 04:26:08 ID : kmoFjusp9jt
(……) 그래, 시라는 취미. 그 끔찍하도록 감상적인 짓거리에 재미를 붙이는 년놈들과 농담 한마디 섞기 힘들었던 건 어쩌면 아이들의 자기보호 본능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슬픔이 울대까지 처 밀려와도 나래 분식집의 연갈색 핫도그 위에 새빨간 웃음을 뿌려 목청으로 쑤셔 넣으면 이게 더 편리하고 안전한 방식이라 자위할 수 있던 우리였으니까. 물론 시를 읽고 쓰는 그런 쓸모없는 짓거리엔 전염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그 구성요소마저도 생활에 지나치게 유해한 성분으로만 이루어져 있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은 제대로 된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족히 구분할 수 있었으니 간혹 우연찮게 시집을 펼치게 된 녀석들이 금세 진저 리를 치며 열람실에서 줄행랑을 치는 모습을 너와 나는 자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니 케첩 묻고 손때가 탄 낡은 시집을 책가방에 넣어 두고 다녔던 너는 지겨운 우리 중에서도 유독 역겨운 점이 많았다. 물론 너의 악취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녀석들도 많았으나 아무렴... 추깃물 내 풍기는 너의 슬픔은 나에게만은 그 본래의 모습을 곧잘 들키곤 했다.
거미의 논증, 현상현 2024/03/22 04:28:29 ID : kmoFjusp9jt
(……) 그런 순간들이 내 입술의 제방을 무너뜨려도 내겐 그 나날들이 굉장히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서로를 언제까지나 용서할 수 있는 사이였으니까. 안 그래? 너는 어땠는지 모르나 나는 둔탁하고도 세세하게 너를 맹신했으므로 마주앉은 너에게 슬픈 문장 한둘쯤 적어 맹서처럼 건네주는 슬픈 놀 이를 멈출 수 없었다. 너는 슬프기를 즐겼으니까. 그런 네가 남은 인생을 모두 슬픔으로 만들고 싶었다면 나는 그 일 에도 기꺼이 어울려 줬을테다. 너의 바이브레이터가 되는 건 그 후에 달성해도 좋을 보너스 게임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너는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는 완벽한 슬픔에는 관심 없다는 듯 전화기 너머에서 말했지. 나의 꿈을 박살 낸 너의 말. 이름 모를 시인의 새끼를 배었다는 고백과 아기를 지울 생각은 없다는 경멸스러운 말까지. 별안간 내 사타구니가 딱딱한 비명을 질렀음을 나도 뒤늦게 고백을 해볼까. 민. 너는 늘 내 중심에 있었다.
가을의 건널목, 현상현 2024/03/22 04:32:10 ID : kmoFjusp9jt
건널목에는 진로를 잃은 바람이 몇 있습니다. 명치께에 쏟아지는 햇살에는 이물감이 없습니다. 같이 살자 보다 같이 죽자는 말이 끌어안기에 더 좋았습니다.
초콜렛, 현상현 2024/03/22 04:32:57 ID : kmoFjusp9jt
여기 달콤한 그리움을 가져왔어 똑똑 부러뜨려 한 조각 소르르 삼키면 죽어있던 혀가 살아나고 이내 꼬마처럼 신이 나서 웃어댈 거야. 그림자는 점차로 까매지고 까매지다 결국 너는 밤이 될 거야 깊고 어두운 단잠이 될 거야. 조금만 죽어버릴 거야 아주 완벽히 죽어버리지 못하는 너는 조금 역겨워질 거야.
원망, 현상현 2024/03/22 04:34:48 ID : kmoFjusp9jt
저는 성긴 거즈예요. 당신의 연한 살갗 위에 가지런히 누워 파릇한 상흔을 만지길 좋아해요. 새벽까지 농익어가는 공허를 죄다 빨아 먹고는 불시에 버려지길 좋아해요. 그럼요. 그렇다니까요. 전 당신을 안쓰러워하지도 않으면서 식어버린 맥박 끝에 불을 지퍼요. 당신은 제 생각 하나 끌어안고 머리 위로 수천의 너울을 뒤집어써야 해요. 그렇게 저는 당신의 모든 꿈속에서 알록달록 나부끼길 좋아해요. 그럼요. 전 지랄맞게도 예쁘기를 잘해요. 앞으로도 저는 유령처럼 예쁠 거예요. 당신은 오롯이 제게만 미쳐야해요. 그럼요. 그렇다니까요. 당신도 우리가 입 맞추길 상상하면 좋을 텐데. 그럼 우린 저주처럼 흠씬 사랑에 빠질 텐데.
누나, 현상현 2024/03/22 04:37:40 ID : kmoFjusp9jt
누나. 이거 봐요. 여기 테라스에 흩어져 흐느끼는 시들은 다 뭐예요. 이거 다 누나가 사랑한다 말했던 거잖아요. 간밤엔 불안한 바람 하나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다 뭐예요. 이제 우스꽝스럽도록 알싸한 그리움으로 글을 쓰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고요해진 맥박을 다시 켜올리려 얼마나 오랜 세월을 허비했는지 벌써 다 잊은 거예요. 아니면 전혀 잊지 못해서 이러는 거예요. 하루는 입술을 열어 달력의 숫자를 뜯어먹고 다음 날은 들썩이는 목구멍으로 죄 토해내며 "나도 매일이 낯설어. 근데 오늘이 마지막이야. 조금만 봐줘." 그거 다 꼼짝없이 미친 사람이 하는 말인데도 저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잖아요. 근데 정말 이게 다 뭐예요. 누차 말하지만 슬픈 결말이란 건 파도의 포말처럼 부서졌다 사그라드는 그런 천진한 게 아니에요. 그건 아주 오래 된 농담에 불과해요. 이렇게 끝 모르고 발목 아래까지 짠 물 묻히며 서서히 스러지는거. 입술이 열에 달뜨는 밤 느슨 하게 일어나 의미 없는 구절을 소낙눈처럼 흘려대는 거. 식은 숨결로 서리꽃 피우고 서걱한 음색으로 노래하고 속삭 이며 오늘 밤만 견디면 기다리던 이 온다고 말하는. 이런 게 결말이에요. 씨발. 누나가 사랑한다고 했던 슬픈 결말은 이런 거예요.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2 04:37:59 ID : kmoFjusp9jt
씨발. 누나가 사랑한다고 했던 슬픈 결말은 이런 거예요.
잠, 현상현 2024/03/22 04:39:16 ID : kmoFjusp9jt
.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2 04:43:23 ID : kmoFjusp9jt
이름없는 애인에게, 현상현 사색집 수록.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5 19:05:20 ID : kmoFjusp9jt
너와 나를 붙들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 /친절하거나 적대하도록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수조에 처박힌 나를 구원한 건 언제나 내가 체념한 후였다. ///발버둥 치지 않는 것 내 체념이 그들에겐 나의 힘으로 보였다. ////처박히며 깊게 숨을 들이마신 건 기포와 나란히 하려는 나만의 태도였던 것. (……) _물질의 최종 구조에 대한 무례한 질문,성윤석 *이름칸 글자수 제한으로 본문 기재.
화학적 거세, 성윤석 2024/03/25 19:06:28 ID : kmoFjusp9jt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게 이 텍스트의 목적이다.
티타늄 Ti, 성윤석 2024/03/25 19:19:16 ID : kmoFjusp9jt
녀석은.... 히키코모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공부하겠다고....일 년 동안 /제 방에서......나오지 않았다 // 숫돌로 갈면 혼자서 흰 불꽃을 내는 저 금속처럼 녀석은 외톨이로 살았다 /// 음... 애니에서...... 가상현실......VR에만 빠져 있어 /// 일본 가서 ...... 혼자 살려면 ...... 슈퍼에도 가고 ...... 식당에도 가야 하는데 할 수 //// 있겠냐고...... 물어보면 거기서는...... 잘 할 수 있겠다고. 다른 언어로는.........잘 살 수 있다고. 밖에 나가......거리에서....담배를 피우며, /나도 이젠......다른 속도를 내는......언어가 좋다고 //조금 느린......속도면 좋겠다고 나도 다른 언어로......있고 싶고 가고 싶다고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5 19:20:09 ID : kmoFjusp9jt
나도 다른 언어로 있고 싶고, 가고 싶고, 잘 살 수 있을 거라 여기던 때가 있었지.
백금 Pt, 성윤석 2024/03/25 19:21:39 ID : kmoFjusp9jt
(……) 지방의 비밀은 모두가 아는데 혼자만 모르는 비밀이라지. 그런데 중앙과 지방이 있는 걸까. 비밀의 무덤은 쓰레기통인걸. 버리고 버림받고 떠나고 탈퇴하고 변심하여도 너무 오래된 너와 나의 다정들. 변할 수 있을까. 비밀이 쓰레기로 쌓여도? 다정은 서로 잊고 가고 있는 중일 뿐일 텐데.
세계世界, 성윤석 2024/03/25 19:27:13 ID : kmoFjusp9jt
새벽에 눈뜰 때마다 나는 세계에서 몇 번째인가를 생각한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세계에서 몇 번째인 창밖 아침을 내다보며, 아침으로 미끄러진 뒤 세계에서 몇 번째인 오토바이를 타고 부둣가를 달리는 것이다. 세계에서 저 붉은 등대는 몇 번째로 서 있는가, 를 심사숙고해본다. /너는 내가 소중하게 아끼는 존재야,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네게서 나는 몇 번째인데? 라고 물었다가 개새끼야, 라고 욕을 먹은 적이 있다. 나는 아침이 올 때마다 세계에서 몇 번째인지 모를 모멸감의 국물에 밥을 말며, 세계에서 몇 번째일 가난한 여름날과 은행과 또 몇 번째가 될 당신과의 키스와 햄버거와 구름과 자동차 따위를 먹어치우며 / 가끔 시같은 마음, 세계에서 몇 번째일 시 이전의 시, 시 이후의 시같은 마음도 가져보는 것이다. //착지와 구르기 같은 것. 섞이지 않는 것을 섞어놓고 햇빛에 놓아두는 것. 뛰어올라, 남는 그 무엇이든, 무엇을 언제나 허공에 두고 내리는 것. 다시 아침이다. 나는 몇번째인가. /나는 다시 몇번째인가. 벽을치며, 걷고 또 고개를 까닥거리며, 담배를 삐뚜름하게 물어보며 다시 연급에 연습을 둘둘 마는 자세로 Are you there? 도대체 세계에서 몇 번째인가, 이 세계는.
책갈피◆3xxvfVfcHvf 2024/03/25 19:27:32 ID : kmoFjusp9jt
너는 내가 소중하게 아끼는 존재야,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네게서 나는 몇 번째인데? 라고 물었다가 개새끼야, 라고 욕을 먹은 적이 있다.
먼지의 화학식, 성윤석 2024/03/25 19:28:55 ID : kmoFjusp9jt
(……) 여자는 지켜보다 산소를 녹여, 다시 내 혀 밑에 넣어준다. 과거란 모든 게 끝나지 않음에도, 과거로 정리된다. 폭발이 일어나, 종잇장처럼 찢긴 유리창 속에서 세계는 사람의 피를 비커에 담아 귀가할 것이다. 이것으로 세계는 무엇을 만들고 쓸 것인가. 그불안한 시간 속에서도 마치A액과B액이 그러하듯, 나는 나에게 반응할 여자를 기다린다. 아아, 나는 진짜 진짜 개새끼!
먼지의 화학식2, 성윤석 2024/03/25 19:29:44 ID : kmoFjusp9jt
(……) 그리고 추운 세상이 올 거야. 넌 혼자가 될 거야. 네가 아닌 사물들이 널 들여다보겠지. 사물들의 뒤편엔 이웃들의 사유들이 먼지처럼 쌓일 거야. 커피 찌꺼기를 다시 얻으러 간다. 커피 가루는 순하다. 부드럽다. 혼자 있으려는 이 성질. 나도 벌써부터 혼자다. 실험실을 나와 혼자서 똥통 위 밥상에 앉아 말없이 야식을 먹는다. 마치 이게 옳다, 라는 듯이
밤의 질량, 성윤석 2024/03/25 19:30:20 ID : kmoFjusp9jt
밤은 조금 부족한 듯했다. 별들이 떠 있기에는, 이 해안 도시는 너무 작았다. 나는 월요일만 얘기했고 당신은 화요일만 내밀었다. 역시 밤은 부족했다. 당신과 내가 모두의 슬픔에 고리 모양의 구조를 달 여백이 없었다. 밤이 다시 조금 사라진 듯했다. 없어지는 게 당신의 숨결인지, 공기인지 알 수 없었다. 안기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밤의 치마에는 당신의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었다. 슬픔을 방두 개에 다 채워 넣고 나와 걸었다. 숨고 싶은 슬픔의 치마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밤의 함몰 흉터들을 나는 오래 걷고 있었다. 밤은 다시 조금 부족한 듯했다. 한장 검은 봉지 같은 밤이었다고 말했다.
원소들의 사회, 성윤석 2024/03/25 19:31:26 ID : kmoFjusp9jt
(……) 사용당한 기계와 인간들은 자해를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는다.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것에 불평을 늘어놓는다. 볼 수 없는 허공 사람의 속에 생긴 천공은 가을 하늘이 아니면, 안 메워지리. 짐작도 못하리. 보지 못한 일이 어디 있으랴. 비커 속에서 배신은 접시처럼 닦이고
아르곤Ar, 성윤석 2024/03/25 19:31:57 ID : kmoFjusp9jt
다음에 다시 쓰겠습니다. 지붕 위의 쌓인 눈 같은 붕괴가 있었고 공기 중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마음이 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사람을 되찾는 일은 그 사람을 다르게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나의 괄호 속에 당신이 들앉았듯, 다음에 다시 쓰겠습니다. 가끔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얇고 긴 진공관 같은 고독 속에 빛으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나의 계절에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5 19:39:49 ID : kmoFjusp9jt
밤의 화학식, 성윤석 시집 수록. 『밤의 화학식』에서 규정된 화학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문학을 현장에 부려놓으면, 화학이 된다. 그것은 화학이다.(글자들)그러므로 '문학/시'는 현장에 부려놓아진 과학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문학/책'이란 세상의 눈물로 만든 얼음 고체"('물질의 최종 구조에 대한 무례한 질문)에 속한다. 곡진한 삶의 현장에서 '눈물이 직조해낸 얼음'이 바로 시라는 뜻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란 "글자들이 환원"(글자들)되는 삶의 현실을 질료로 삼아 슬픔을 연금하는 과학이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밤의 화학식』을 시집에 실린 한 시의 제목을 빌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규정할 수도 있겠다. 즉, 「밤의 화학식』은 최종적으로 삶을 구성하는 「물 질의 최종 구조에 대한 무례한 질문」에 대한 시인 나름의 실험적 연구의 결과물이라고 말이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이미 시집에 실린 작품들을 “실험실에서 끄적인 메모들”을 시로 옮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서 '물질의 최종 구조'란 바로 이 세상의 최종 구조이자 삶의 최종 구조를 말하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 구조를 문제 삼는 일이 무례한 것도 바로 같은 이유 때문이다. _ 슬픔을 가지고 놀다(부제: 성윤석의 시 세계), 김진수 (문학 평론가)
환영幻影, 마경덕 2024/03/27 05:20:25 ID : kmoFjusp9jt
(……) 하루치 밥을 벌고 돌아가는 길, 멀리서 옛 부엉이가 날아온다 /구름다리를 스치는 몇 초 동안, 저곳에 잠시 살았던 느낌 어둑하고 좁은 골목, //가난의 모서리에 질겨진 울음이 발을 포개고 있다 슬픔은 늘 이런 방식이었다
바람의 性別, 마경덕 2024/03/27 05:24:37 ID : kmoFjusp9jt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람이 너울녀울 밀고 간 모래물결, 맨발로 사막을 건너간 암컷의 흔적이다. 치맛자락 끌고 조신하게 걸어갔다. 수천 년 모래알을 세며 사막을 걸을 수 있는 자는 몸을 찢은 어미만이 가능한 일,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은 어디론가 흘러간 제 새끼를 보려고 족적足迹을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기록이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낙타의 행렬이 그녀의 발자국에 겹쳐지고 바람이 묻힌 자리에 또 바 람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니, /이곳에서 이별이란 그저 사소한 일. 평생을 떠돌다가 우연히 마주쳐도 늙어버린 어미를 기억할 바람은 없다. 새끼를 낳은 것들의 형벌은 떠난 자식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뼈를 묻으며 살아가는 것은 사막의 오랜 관습. 별들의 장지葬地가 된 이곳에서 떠돌이 바람도 수없이 뒤꿈치를 물렸을 것이다. 그때 물결 같은 발자국이 찍혔을 것이다. 사구砂丘를 넘어온 회오리바람이 모래밭을 헤집는다. /짝을 잃은 수컷들이다.
음식모형, 마경덕 2024/03/27 05:25:46 ID : kmoFjusp9jt
(……) 붓끝에서 재구성된 식감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물감으로 미각을 조립하는 전문가의 감각은 요리사보다 더 사실적이다 앞은 치밀하고 뒤는 허술한 모형들 부패를 모르기에 맛과 향도 없다 실물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저 음식모형에 한 덩어리 허기가 도사리고 있다
꽃병, 마경덕 2024/03/27 05:26:43 ID : kmoFjusp9jt
온몸이 입이다. 한 입에 우겨넣은 붉은 목 한 다발. 부르르 꽃잎이 떨린다. 잘린 발목에서 쏟아지는 비린 수액, 입 안 그득 핏물이 고인다. 소리 없이 생피를 들이키는 저 집요함. 허기진 구멍으로 한 아름 허무를 받아먹는, 식욕과 배설뿐인 캄캄한 구멍은 입이고 항문이다. 시한부 목숨들. 물컹물컹 썩어 가는 발목을 담그고 일제히 폭소를 터트린다.
여성 외출학개론, 마경덕 2024/03/27 05:28:49 ID : kmoFjusp9jt
(……) 수십 개의 넥타이를 두고 또 넥타이를 고르는 남자들 처럼 외출을 고르는 것은 그날의 기분을 고르는 것 / 자주 끼니를 놓친 여자들은 안색이 창백하다 그러나 외출엔 반드시 부작용이 따른다 쉽게 감정을 낭비한 사람들은 또 다른 감정이 쌓이게 마련, 그동안 구매한 과잉된 감정들은 옷장에 숨어 있거나 침대 밑에 엎드려 있다 집에 돌아온 외출은 늘 절반의 가격으로 계산되고 더러는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버젓이 거실에 진열된다 잠시 맡겨둔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백화점 / 함부로 소비한 감정은 다시 되돌아온다 // 잦은 외출에 연체이자가 붙는다는 것을 /// 여자들은 그때야 깨닫는다
통조림, 마경덕 2024/03/27 05:29:53 ID : kmoFjusp9jt
밀봉된 바다, 무게 400g. 꽁치의 짭조름한 눈물이 캔에 담겨 있다. 천사백 원을 지불하면 원터치로 열리는 진공의 바다, 같은 용량의 인스턴트 바다들이 마트 진열대에 쌓여있다. 제발 저를 당겨주세요. 고리는 밑바닥에 바짝 들러붙었다. 누가 안전핀을 뽑듯 저 고리를 당겨준다면… 뚜껑이 열리기까지는 얼마를 기다려야 하나. 유통기한을 며칠 남긴 꽁치의 눈빛이 흐리다. 바코드가 찍힌 저 바다는 누군가의 식탁으로 초대되어 참았던 숨을 왈칵, 토할 것이다. 순간 손가락을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뚜껑을 조 심하라. 열 받은 것들은 뚜껑이 열리기 쉽다. 즉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일회용 바다를 사들고 간다. 흔들면 파도소리가 들리는 둥근 관, 머리가 사라진 토막 난 죽음이 떠 있다. 캔 속엔 눈알도 꼬리도 빠진 물렁한 꽁치토막들, 썩지 않는 지루한 권태뿐이다.
입관, 마경덕 2024/03/27 05:31:07 ID : kmoFjusp9jt
하얀 보에 덮여 누워있는 어머니 둥근 베개 하나가 무거운 잠을 받치고 있었다 장례지도사인 젊은 염습사는 보 밑으로 손을 넣어 익숙하게 몸을 닦았다 감정은 삭제되고 절차만 기억하는 손길로 미처 살아보지 못한 생의 끝자락을 만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주검을 갈무리하여 먼 길을 떠나보냈을까
토마토가 말하다, 마경덕 2024/03/27 05:33:08 ID : kmoFjusp9jt
(……) 입이 없는 토마토는 제 안의 슬픔을, 얼룩얼룩 셔츠에 지리고 그러니까 탐스런 엉덩이는 울컥 무언가를 배설하고 헤이 토마토! 우물우물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지? 귀보다 말이 많아 나는 마지막 유언을 읽을 수 없다 내 입은 입이 없는 것들의 가슴을 모른다
강력탈취제, 마경덕 2024/03/27 05:35:17 ID : kmoFjusp9jt
(……) 터치 후레시에 희박한 공기가 살아난다 치료 불가능한 상처들, 최첨단장비로 감쪽같이 삭제된 스팸메일들 과거를 재구성하고 거리를 활보한다
이름없음◆pTUZfPioZir 2024/03/27 05:40:20 ID : kmoFjusp9jt
시집 글러브 중독자 수록. 시인의 말: 통증이 심했다 /그때마다 시를 복용했다 //그 힘으로 이 바닥에서 십년을 잘 굴렀다 나는 시 중독자 /가능한, 치명적으로 시를 퍼트려야 한다 // 상처 깊은 사람이 너무 많다 2012년 초가을 마경덕 *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아마도 변화에 대비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모르는 계시를 감지하려고 하기 때문일게다. 우리는 타인을, 그리고 타인은 우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정이나 사랑은 너무나 취약하고, 위축되거나 사라지기 쉬우며, 시간과 공간에 의해, 불완전한 연민에 의해, 가정과 애정 생활의 온갖 슬픔으로 인해 짓눌리기 쉽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불쑥 내 몸을 치고 사라지는" 순간은 어떤 사람이었을 것이다. 문득 그 사람이 어릴 때 좋아했던 사람(하지만 좋아해서는 안 되었던 사람)에 대해 억압했던 표상들이 귀환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다. 그런 억압들은 우리가 꿈에서 자주 만났던 기억(또는 망각)의 흔적들이다. 아, 그 사람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마경덕의 시는 그런 억압의 공간을, 그러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간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 말한 것 속에 함의하고 있다. 그것이 독자를 환호하게 한다. 어디에선가 마경덕 시인의 시는 쉽게 읽힌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쓰여 있는 글을 발견한 적이 있다. 물론 그런 해석이 가능한 시들도 많다. 하지만 그의 시들을 잘 살펴보면 두려운 낯설음, 단순히 해석되지 않는 낯선 친근함이 있다. _바빌로니아, 유폐 또는 마경덕의 도시 (변학수, 문학 평론가 및 경북대 교수)
🎗️ 2024/04/02 06:06:07 ID : kmoFjusp9jt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솟아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없음을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 침묵도, 반성도 부끄러운 죄다 쏟아져 들어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 세상을 안심시켜 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 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 보았을 공기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_아,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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