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스레드
북마크
이름없음 2023/03/20 21:39:07 ID : Dy2LbCi4Lhs
괴담판에 쓸까하다 이게 괴담판인가 싶었고, 꿈이라 하기에는 어느날 불쑥 기억이 찾아와서 알게 된 이야기. 어차피 주작이라 할 거 같고 글 리젠 느리지만 다른 판보다 평화로운 여기를 찾아왔어. 그 사람도 여기라면 써도 된다고 허락해 주기도 했고. 주작이다 싶으면 주작이라 생각하고 읽어도 돼. 그럼 그때부터 나는 이 글을 읽어주는 너희를 위한 소설을 쓰고 있는게 되니까. 그러니까 이 판에 맞는 글을 쓰게 되는 거니까 여기 오길 잘했다고 생각할게.
이름없음 2023/03/20 21:41:23 ID : Dy2LbCi4Lhs
우선 전생의 나에 대해 써봐야겠지? 전생의 내 이름은 란교야. 이제부터 나를 란교라 생각하고 읽어줘. 이름이 특이하지? 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이름이야.
이름없음 2023/03/20 21:49:50 ID : Dy2LbCi4Lhs
시간은 대략.. 일제강점기 시대라고 생각해줘. 나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머릿 속에 떠오르는 걸 적는거라 정확한 년도나 시대는 몰라. 그래서 내가 살았던 곳이 조선인지 일본인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어. 나는 유곽의 기생이었어. 근데 적으려고 보니 여기 수위에 맞게 써야하나, 아니면 내 기억을 토대로 써도 되나 그게 좀 걸리네. 일단 최대한 전체이용가로 써볼게. 내가 이 이야기를 담담히 할 수 있는 건, 현생의 나는 아주 잘 살고 있어서야. 전생이 어찌됐든 그게 나에게 큰 충격을 주진 않았어. 아마 이건 전생의 나와도 관련 있는 거 같아. 란교도 정말.. 이야기 하다보면 성격 얘기를 당연히 하겠지만 매사 침착하고 싸늘하거든. 그래서 현생의 나와 비슷한 점들을 알게 되면 신기해.
이름없음 2023/03/20 22:00:26 ID : Dy2LbCi4Lhs
혹시 여기 소설판이라고 소설처럼 써야하고 그런 건 아니지? 1인칭으로 써도 되지? 어차피 그사람 이야기도 끼워맞출 거긴한데 일단 1인칭으로 쓸게. 또 쓰다보면 내가 모르는 것들이 있어. 나는 조선시대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 단어를 잘 모르거든. 그래서 내가 모르는 단어 있으면 일단은 찾아보겠는데 혹시 알면 좀 말해주라. 그럼 다시 시작할게. 태어날 때부터 내 하늘은 유곽의 밋밋한 천장이었어. 엄마도 유곽의 기생이었고, 어디 소설에나 나올법한 그런 시작이야.
이름없음 2023/03/20 22:04:39 ID : Dy2LbCi4Lhs
내 엄마는 아주 예뻤는데, 그 예쁜 얼굴로 나에게 웃어준 적은 없었어. 나는 엄마를 많이 만나지 못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늘 울 것 같은 얼굴이었어. 미안해서였을까, 날 볼 때마다 후회하나, 이런 생각을 했어. 하지만 물어보지도 못하고 엄마는 성병으로 돌아가셨어. 내가 아직 이빨을 빼던 시기에 말이야. 그 시절부터 다시 기억이 생생한데 나는 언니들 -다른 기생들- 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어.
이름없음 2023/03/20 22:15:36 ID : Dy2LbCi4Lhs
엄마를 많이 만나지 못했던 건 앞서 말했듯 엄마가 예뻤기 때문이야. 유곽에서는 예쁘고, 춤과 노래, 술 따라주기, 남자의 이야기를 적당히 들어주며 분위기를 살리는 게 중요하잖아. 엄마는 모든 분야에 능통했어. 그래서 많은 남자들을 접대해야 했지. 이런 걸 해어화라 하나. 찾아보니 그렇게 나오네. 아무튼, 엄마는 그림도 잘 그렸는데, 나중에 엄마의 유품 중 세모시 옷 -으로 기억하는데 기모노도 입고 볼 때마다 옷이 달랐어. 그래서 배경이 더 헷갈려. 아마 일제강점기를 겪고 있던 조선이 맞지 않으려나?- 안에 아기 때 내 얼굴이 그려져 있었어. 눈이 엄마를 많이 닮았고, 코는 엄마를 닮은 거 같지는 않았어. 전체적으로 유전자는 엄마를 닮은 거 같아.
이름없음 2023/03/20 22:16:48 ID : Dy2LbCi4Lhs
오늘은 여기까지 쓸게. 더 쓰려고 기억하고 찾는데 머리가 좀 아파서. 가능하면 매일 오고 자주 와서 써볼게.
이름없음 2023/03/21 12:55:16 ID : Dy2LbCi4Lhs
어제 전생 얘기를 해서 그런가 오랜만에 전생 꿈을 꿨어. 아침에 하나 적어야지 했는데 꿈이 신경 쓰여서 지금 왔다. 마저 이어서 써보자면. 같은 기생들에게 보살핌을 받아 자란 덕분에 나는 건강하게 잘 컸어. 외모도 말했듯 엄마를 닮아서 같은 방을 쓰는 언니들 사이에서 예쁨도 많이 받았고. 질투도 있었어. 좀 더 커서는 괴롭힘도 받았는데, 그래서 내 주변에는 믿을 사람이 없었어. 나는 유독 눈치가 빨랐고 철도 일찍 들어서 이빨도 손으로 뽑고.. 옷은 뭐 언니들이 가르쳐주면 매일 혼자 갈아입고 머리 손질이나 이런 것도 배우면 알아서 척척 다 했어. 그러다보니 언니들도 날 챙기는 게 소홀해졌고. 다른 방 기생들이 찾아와 날 괴롭혀도 말리지 않았어.
이름없음 2023/03/21 20:28:15 ID : Dy2LbCi4Lhs
방금 꿈을 꾸고 왔어. 잠이 든 건 내 의지는 아니었어. 여기에 글을 적으려면 좀 더 지식이 필요할 거 같아서 영화 몇 개를 찾아보는 도중에 잠이 들었어. 다시 제대로 이어가볼게. 내 전생은 조선 일제강점기로 혼란스러운 시대가 맞아. 난 조선 사람이고, 일패는 아니고 이패의 기생이었던 거 같아. 아직 대충 찾아본 거라 정확하진 않지만 궁궐에 들어간 기억은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까 아마 이패 문기가 맞을거야. 전생의 엄마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이름없음 2023/03/21 20:51:00 ID : Dy2LbCi4Lhs
글로 풀어내려니까 내 전생이 허황처럼 느껴진다..-그래서 쓰기 더 어렵다는 소리.- 어린 시절부터 나는 감정표현이 많은 편은 아니었어. 잘 웃지도 않고, 뭘 해도 반응을 안보였어. 그래도 무언가에 집중할 때 만큼은 분위기에 압도 당한다고 했어. 이제 좀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예쁘다는 말도,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나에 대한 것도 대부분 배동이 해준 말이야. 배동이란 말은 또렷하게 기억나. 걔가 나보다 못나진 않았어. 오히려 총명함과 눈치는 나보다 나았어. 배동이라는 말은 행수기생이 한 말이야. 그때는 왜 배동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썼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행수기생의 총애라 해야하나, 그런 걸 받았어. 이건 추측인데 내 엄마가 행수기생과 아는 사이였을지도. - 너무 소설이긴 한데.- 그래서 행수기생이 나에게 잘 대해줬어. 때로는 스승처럼, 부모처럼. 그래서 다른 기생들이 날 괴롭히고 수업이 어려워도 난 그 기생집에서 도망칠 생각을 못했어. 안 했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어. 다시 돌아와서, 행수기생은 날 돌보지 못할 때를 위해 나에게 배동이라며 내 또래 애를 나와 같은 방에 배정해줬어. "오늘부터 너와 함께 할 배동이란다." 이런 식으로 말하며 자신이 없을 때 날 챙겨줄거라 했어.
이름없음 2023/03/21 20:58:34 ID : Dy2LbCi4Lhs
나는 내 또래가 생긴 것에 낯설어 했지. 매일같이 졸졸 따라다니는데 말은 잘 안했어. 처음에는 얘도 낯설어서 그런가, 좀 소심한 편인가 했어. 그런데 어느날처럼 다른 기생이 날 괴롭힐 때 내 앞을 막더니 그 기생에게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뭐라 하니 그 기생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해지면서 도망갔어. 이후에 그 기생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 뭐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못 쓰는 게 아쉽다. 몇마디 안했지만 고작 그 말로 기생을 보내버릴 정도로 말을 잘 했거든. 약점 같은 걸 말했던 건가? 여튼 배동은 나보다 영리했어. 키는 나랑 비슷했고 전체적인 생김새는 수수한 편이었는데 언제나 단정했어. 그래서 나는 생긴대로만 이 아이를 판단했고..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아이구나 하며 그 이후 배동에게 마음을 열었어.
이름없음 2023/03/21 21:10:25 ID : Dy2LbCi4Lhs
나중에 물어보니 내가 너무 차가웠대. 조금이라도 손을 대면 날카로운 눈으로 자기를 찌를 거 같았다 했나. 내가 고양이상이었나봐.. 아 그리고 하나 생각난다. 주목 나무를 닮았다는.. 요즘도 주목 나무를 보면 배동이 해준 말이 생각나. 왜 주목 나무냐 하니까 열매가 맛있게 익은 걸 보고 달려들어 먹다가 독을 삼켜 죽을 거 같다 했나. 하여튼 접대하게 되면 남자 몇은 죽일 거 같다 했어. 나쁜 뜻은 아니고 그만큼 매력적인 덫 같다, 이런 뜻으로 말한건데. 그래서 내가 평범한 꽃이 아니라서 좋네, 뭐 이랬던 거 같다. 이때 대화는 신선하고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기억해. 근데 우리 이때 아마.. 초등학생도 졸업 안한 나이일거야..
이름없음 2023/03/21 22:26:16 ID : Dy2LbCi4Lhs
원래 바로 자려 했는데 자기 전에 하나만 더 쓸게. 배동은 내 수하를 자처하는 듯이 행동했어. 항상 나를 아가씨, 하고 불렀는데 나는 그게 불편해서 왜 그렇게 부르냐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았어. 나중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그 이후에 알게 되었지. 이 아이는 거짓말은 안하겠다고. 못할 말은 꺼내지도 않는 과묵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수업이 끝나면 배동과 늘 함께 다녔어. 씻을 때도 행수기생 도움으로 특혜를 받았는데 나랑 배동만 따로 씻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 친밀해졌어. 그런데 배동은 항상 위에 얇은 천을 입고 씻었는데 나는 얘가 부끄러움이 많은가보다 했어. 다른 언니들이랑 지낼 땐 옷 갈아입는 걸 봐도 아무렇지 않아서 그때 난 그게 이상하게 보였어. 그래서 왜 위에 천은 벗지 않냐고 물었는데 배동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만 빗겨주었지.
이름없음 2023/03/22 20:58:01 ID : Dy2LbCi4Lhs
과거 기억이 좀 뒤죽박죽이라 쓸 게 별로 없다. 그냥 요즘 시대랑 똑같아. 수업받고, 복습하고, 연습하고 갈고닦고... 행수기생이 내 첫 스승이자 마지막 스승이었어. 언젠가 나를 방으로 불러 이런 질문을 했어. "너는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니? 여기 계속 있으면 네 어미처럼 될 지 모르는데." 내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다 알고 있던 사실이라 놀랍지는 않았고. 나에게 직접적으로 묻는 건 그게 처음이었어. 질문보다는 무엇을 해야할 지 가르쳐주는 사람이었거든. 그날 처음으로 지금 내가 가고 있는 행선지에 대해 물은거야. 그래서 난 이렇게 대답했지. "여기서 나가도 저는 갈 곳이 없어요." "갈 곳을 마련해주면?" "저 혼자 살아야 하나요? 그럼 싫어요." "사람은 어차피 혼자 살아야 해." "하지만 지금 제 곁에는 스승님이 계시잖아요." 나는 행수기생을 스승님이라 불렀어. "당장 내일이라도 내가 없으면, 그럼 나갈거니?" 마치 날 내쫓으려는 것처럼 말했어. 거기서 난 약간 불안함을 느꼈지. 무언가 잘못 돼가고 있다고 본능적으로 알게 됐어. "누가 죽나요?"
이름없음 2023/03/22 21:08:38 ID : Dy2LbCi4Lhs
방 안이 순식간에 정적으로 맴돌았어. "아니야, 아무 일도 없을 거란다." 행수 기생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주고 방에서 내보냈어. 정말 이상했는데. 그날따라 묘한 불길함이 복도를 채우고 있었는데. 모두가 평소처럼 일상을 보내는 게 거북했어. 무서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거겠지. 나는 바로 배동에게 달려가 말했어. "너, 여기서 떠나야 한다면 나와 함께 갈래?" 행수어른은 분명 둘이라는 말은 없었어. 하지만 그 애는 꼭 데리고 가고 싶었어. 유일하게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뿐인 친구니까. "침착하세요, 아가씨. 무슨 일이 있나요?" 배동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어. 나는 또 그게 너무 불쾌하게 느껴졌어. "아무일도 없어. 그런데,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그러자 배동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어. 나처럼 이상함을 감지한 건 아니였던 거 같아. 그저 내 불안을 눈치채고 상황을 판단한 거 같아. "아까 행수어른께 가신 거 같았는데, 무엇을 듣고 오셨나요?" "나갈 수 있다면 그럴 거냐고, 혼자 가야 하냐니까 사람은 원래 혼자라고..." 아, 기억 났어. 내가 불안을 느낀 원초적인 이유. "근데 거기에 너는 없는 거 같은거야. 나만, 꼭 나만 어떻게든 보내려는 것처럼..." 행수기생은 왜 하필 나였을까? 나와 배동이 아닌 왜 나만을 집어 얘기했을까? "이상하잖아... 널 내게 보낸 건 스승님인데, 스승님이 널 두고 나만 얘기할 리가 없는데." 행수기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배동을 붙여줬어. 그래서 씻을 때도 나와 배동은 늘 함께였고.
이름없음 2023/03/22 21:17:32 ID : Dy2LbCi4Lhs
배동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짐을 싸기 시작했어. 그 애가 무엇을 눈치 챈 건지 그때 난 몰랐어. 침착하게 짐을 싸는 배동과 밖에서는 평소처럼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 이질적이었어. "지금, 뭐 하는거야?" 배동은 빠른 손놀림으로 보따리안에 몇 안되는 장신구와 옷가지를 넣어 나에게 주었어. "행수어른에게 가셔야 합니다." 심장이 정말 크게 뛰었어. 이때 느낌은 아직도 생생한데, 오로지 심장만 살아있는 것처럼 뛰었다고 해야하나.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이었어. "안돼, 너도 가야 해. 나 혼자는 못 가." 나는 아마 그때 부정하고 싶었던 거 같아. 코앞에 닥친 현실과 이별해야 한다는 상실을. "요즘 밖이 뒤숭숭하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던 현실을 결국 듣고 말았었지. "언제 들이 닥칠지 모릅니다. 행수어른께서도 그점이 염려되어 아가씨를..." "그러니 더욱 너와 함께 가야지!" "아가씨, 하나보다 둘이 더 잡기 쉽습니다. 흔적이 늘어날수록 꼬리가 길어집니다." 그때 배동은 나와 또래로 보이지 않았어. 나의 든든한 아군, 하나뿐인 친구, 배동. "그럼 오늘 밤만이라도 같이 보내게 해줘." 나는 절대 내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어.
이름없음 2023/03/22 21:27:00 ID : Dy2LbCi4Lhs
배동은 한숨을 내쉬며 알겠다고 대답했어. 우리는 그날 마굿간 같은 좁은 방에서 같이 잤어. 왜 거기서 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껴맞춰 보자면 미래를 짐작한 내가 미리 피해 있자고 그런 곳으로 데려가서 잤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라면 그랬을 거 같아.. 나는 배동이 자는 사이 어떻게든 데려갈 방법을 떠올렸어. 배동은 나에게 짐을 베게로 쓰라고 머리에 얹어주고 자신은 팔을 베고 자고 있었어. 행수기생에게 가야하는 건 불가피한 상황이니 그녀를 설득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 처음으로 좁고 춥고 무섭고 불길한 상상이 떠오르게 되는 곳이었어. 몸도 떨렸고 그래서 배동의 손을 꼭 잡았어. 그러니까 좀 안심이 됐어. 나의 안정감을 의인화하면 딱 배동 같을거야. 차분해지니까 갑자기 내가 너무 바보같이 겁먹었던 거 같더라고. 사실 행수기생이 한 말이 별 의미 없던 말 일수도 있는데 괜히 과대망상을 펼친게 아닐까. 덩달아 진지해져서 춥고 좁은 곳에서 자고 있는 배동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그래서 여기서 나가 방으로 돌아가자 하려 했어. 그렇게 방으로 돌아가서 잠을 자면 평소대로 내일이 찾아올거라 생각했어.
이름없음 2023/03/22 21:52:43 ID : Dy2LbCi4Lhs
배동을 깨우려던 때였어. 정말 기가막힌 순간이었는데, 밖에서 굉음이 들리며 사람들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어. 배동은 바로 일어나며 나를 찾았지. "아가씨, 방금..." "쉿. 조용히 해봐." 나는 짐보따리에서 비녀를 하나 꺼내 배동에게 하나 쥐어주었어. 물론 내 것도 하나 챙겼지. "일단 스승님께 가자." "아니요, 당장 떠나셔야 합니다." "스승님께 가야 대피할 곳을 알려주셔. 일단 들어가야 해." 우리는 침을 크게 삼켰어. 다시 들어간다니, 제정신이 아니었지. 겨우 나와놓고 적진 한복판으로 가서 개죽음을 당하겠다는 거랑 뭐가 달라. 배동도 그런 생각으로 나를 말렸지만 난 단호했어. "이미 이 곳으로 나온 순간, 하나가 아닌 둘이 된거야." 여기서 나만 떠나봤자 금방 잡힐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나마 안전한 곳이 안이라 생각했어. 밖에서는 여전히 싸우는 소리와 물건이 깨지는 소리, 기생들의 비명소리가 난무했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어.
이름없음 2023/03/23 17:58:41 ID : Dy2LbCi4Lhs
배동은 내가 준 비녀를 머리에 꽂고 내 손을 잡았어. "제가 아는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그런 곳을 어떻게 아냐고 물어볼 여유는 없었어. 나와 배동은 숨죽인 채 비밀통로를 통해 행수기생이 있는 방으로 갔어. 그때 처음 듣게된 총소리와 행수기생 방으로 가까워질 수록 커지던 비명이 생생해. 느낌이 안좋았어. 다시 심장이 크게 뛰었지. 발바닥에 나무 파편이 꽂혀서 피가 나는 줄도 몰랐어. 그런 고통을 가볍게 무시할 만큼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는 곳이었지. 배동의 손을 잡은 내 손이 엄청나게 떨렸던 거 같아. 나는 옷 안으로 비녀를 숨겨 놓았었어. 사람을 죽여본 적 없지만 피할 수 없다면 각오한 상태였어. 내가 죽든지, 그 상대를 죽이던지.
이름없음 2023/03/23 19:03:28 ID : Dy2LbCi4Lhs
우리의 긴장상태는 최고조였어. 전쟁을 간접적으로 겪는다면 이런 거 아닐까, 싶었어. 눈을 감고 싶었지만 현실을 피할 순 없었어. 그럼 영원히 이 현실로 돌아올 수 없을테니까. "잘 들어, 누가 죽더래도 우린 못 본거야." "...네." "여기서 보고 들은 건 다 잊어야 해." "아가씨, 설마..." 나는 배동을 벽장에 밀어 넣었어. 창호지로 덮여진 문은 뜯겨 나간 상태였고, 바닥은 나무 판자가 널브러져 있었어. 내 힘은 배동보다 쎄서 벽장에 밀어 넣는 건 어렵지 않았어. 바로 근처 바닥에 있던 판자로 미닫이 벽장을 걸어 잠궜어. 판자는 벽장 길이에 딱 맞고 두꺼워서 쉽게 열 수 없었지. "아가씨, 이러시면 안됩니다, 아가씨... 열으세요, 당장...!" "나는 널 잃고 싶지 않아. 조금만 기다려줘. 금방 다녀올게. 응?" 난 그때 처음으로 배동이 우는 소리를 들었어. 배동은 아가씨, 아가씨... 하며 숨죽이며 울었어. 그러지 않아도 밖에 소리 때문에 다 묻힐테지만 우리는 그만큼 긴장한 채 억누르고 있었어.
이름없음 2023/03/23 19:12:03 ID : Dy2LbCi4Lhs
배동은 나에게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 한건지, 기척을 숨기려고 그런건지는 모르겠어. 전자든 후자든 나도 같이 울고 싶어졌어. "잘 들어, 난 스승님께 가서 다 말할거야. 그리고 스승님을 설득해서 반드시 너랑 함께 갈거야. 그러니까 울지 말고 기다려. 여기는 이미 한 번 확인했으니 다시 오진 않을거야. 금방 올게. 약속해." 말하다 울컥해진 난 배동이 뭐라고 하는 소리를 무시한 채 행수기생이 있는 방으로 뛰어갔어. 눈을 감고 오직 감각에 의지해서. 혹여나 지금 내가 지나가는 길이 이미 누군가 죽어 싸늘하게 식은 곳이라 해도 난 멈출 수 없었어. 총이 연속으로 두 번 더 울렸는데 너무 긴장하고 불안하면 되려 차분해지는 느낌 아려나? 내 상태가 딱 그랬어. 그래서 행수기생 방 앞에 아는 얼굴 몇이 눈이 감긴 채로 있어도. 주변에 탄 내와 피냄새와 먼지 냄새로 뒤덮였어도 모든 걸 무시한 채 행수기생의 방 문을 열었어.
이름없음 2023/03/23 21:19:27 ID : Dy2LbCi4Lhs
"스승님...?" 내 목소리는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에 묻혀졌어. 발을 내딛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끔찍한 소리, 혈향으로 뒤덮인 코는 마비된지 오래였어. 밀폐되어 있어야 할 방안이 온갖곳에 칼자국과 총구멍이 가득했어. 그때 책상위에 있던 촛불이 땅에 떨어지고 불이 나며 주변 시야는 더 환해졌지. 처참한 장면이 눈에 생생히 들어왔어. 가운데에 앉은 채 쓰러져 있는 행수기생은 마치 끈 떨어진 인형 같았어. 주변에 간신히 소리를 내던 사람들도 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죽었어. 방 안이 고요해졌는데 밖은 여전히 시끄러웠어. 그 간극에 나는 또 이루말할 수 없는 역겨움을 느꼈어.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만 몇 번을 반복하고, 눈물을 흘려야 했어. 생리적으로 나오는 피식자의 눈물 같은 거였어.
이름없음 2023/03/23 21:23:43 ID : Dy2LbCi4Lhs
나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어. 착란이 일어날 만큼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곧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행수기생에게 가까이 다가갔어. 그녀는 화려하게 죽어 있었어. 꽃무늬가 가득한 옷과 꽃으로 가득한 장신구와 꽃같은 머리. 손에는 꽃무늬 은장도가 있었어. 칼날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붉은 매화로 물들어 있었어. 나는 거기서 주체를 할 수 없었던 거 같아. 겨우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끊어지며 터져버리고 말았어. 스승님이 죽었다, 모두가 죽었다. 안에서부터 난이 일어났구나. 스승님은 다 알고 있었구나. 모두를 지키려고 한 곳에 모아 놨었구나. 그래서 이 근처에만 사람들이... 사람. 이 근처에 없는 유일한 한 사람. 나는 그걸 깨닫고 다시 눈물을 닦으며 은장도를 챙겨 빠르게 밖으로 나왔어. 밖에 있는 배동을 데리고 도망가기 위해.
이름없음 2023/03/23 21:24:52 ID : Dy2LbCi4Lhs
배동은 여전히 벽장안에 있었어. 나는 손과 발이 피투성이인 채였고, 벽장안에서 피냄새를 맡은 배동이 숨죽인 채 말했어. "아가씨..? 괜찮으세요? 피냄새가 나는데.." 나는 우선 조용히 나무판자를 빼내고 벽장을 열어 배동을 꺼내줬어.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리고 긴장이 풀렸어. 아직 살아있다. 여기에, 나와 배동은 살아있다. 죽은 다른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그게 너무 안심이 되어서 울음이 터져 나왔어. "도망가야 해... 여기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자..."
이름없음 2023/03/24 12:55:54 ID : Dy2LbCi4Lhs
나는 배동을 껴안은채 계속 울었어. "여기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 가야해..." 배동의 손을 잡고 다시 밖으려 나가려는데 펑, 하듯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어. 내 어깨에서 피가 흘러 넘쳤고 나는 삐이- 하는 이명이 머리를 지배했어. 옆에서 놀란 배동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는데 내 몸은 그대로 기울어졌어. 이명 사이로 작게 탕, 소리가 한번 더 났고 난 더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어. 소리가 멀어지고 이명이 잦아드니 누군가 머리를 퉁 퉁 하며 내리치는 거 같았어.
이름없음 2023/03/24 17:49:26 ID : Dy2LbCi4Lhs
여기서부터 적을까 말까 고민 됐는데 여긴 어차피 창작소설판이고 좋을대로 읽으면 되니 그냥 적을게. 나는 그 이후 기절했어. 기절하는 느낌은 언제 잠이 들었지 하는 것과 비슷해. 나는 그 곳에서 미래인지 그저 허상인지 꿈인지 뭔지 모를 걸 봤어. 그 기억을 가지게 된 후 나는 좀 더 사람같지 않아졌어. 모든 걸 달관하고 해탈한 기분과도 비슷해. 그리고 눈을 떴어. 아, 아직 살아 있었구나. 그 생각을 하며 주변을 돌아봤어. 배동은 어디 있지? 아까 그 총소리는 뭐였지? 답은 얼마 안가 나왔어. 질퍽거리는 느낌이 손에서부터 타고 올라왔어. 피였어. 나는 그제야 내 왼쪽 어깨부근에 총상을 입었다는 걸 알았어. 왼쪽 어깨를 보며 스친 내 앞에 죽어있는 시체, 그리고 쓰러져 있는 배동. "어..? 어, 어..." 흐릿한 시야 사이 똑똑히 보였어. 배동의 손에 쥐여 있던 비녀와. "아니지..? 일어나 봐..." 머리에서 흐르는 피. "일어나 봐... 일어나 보라고! 눈 떠!"
이름없음 2023/03/24 17:56:12 ID : Dy2LbCi4Lhs
현실로 돌아온 나는 다시 혼란에 빠졌어. 어깨가 아픈 줄도 모르고 배동을 계속 흔들고 툭툭 쳤어. 하지만 배동은 미동도 없었어. 숨 쉬는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어. 아니, 애초에 그런 걸 확인할 겨를이 없었어. 분명 쓰러진 사람을 어떻게 깨워야 하는지 아는데. 그 순간이 다가오면 그 상황에 맞닥뜨리면 그게 쉽게 되지 않더라. 하나뿐인 내 사람이 죽어가는 걸 보며 침착할 수 없었어. "이름..." 시야가 뿌옇게 변했어. "이름은 알려주고 가야지.." 모든 게 나 때문에 벌어진 일 같았어. 그 아이를 끌고 나오지 않았다면. 하루만 더 같이 있자고 떼쓰지 않았다면. 불길함을 느꼈던 순간 바로 도망쳤더라면. "너의 이름도 모른 채 어찌 널 보내..." 진작 이름을 물어 봤었더라면. "란교, 입니다..."
이름없음 2023/03/24 17:57:22 ID : Dy2LbCi4Lhs
곧 꺼져갈 불씨처럼 아주 희미한 소리였어. 그러나 나는 그 아이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더 가까이 다가갔어. "란교.. 란교라 했지?" "예, 아가씨... 란교 입니다..." 아까보다 명확한 발음이었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거야. 나는 결국 참다 못해 눈물이 터져 나왔어. "괜찮아? 란교.. 란교야, 아프지? 내가 금방..." "아가씨..." "아무 말 하지 마. 지금은 가만히 있어..." 나는 어떻게든 그 아이를 업어 갈 생각이었어. 나는 힘이 세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을거라고, 그런 거짓 희망이 아니면 다친 팔로 무엇도 할 수 없으니까. 사람은 정말 간절하면 힘이 생기더라.
이름없음 2023/03/24 19:27:49 ID : Dy2LbCi4Lhs
일단 나는 내 옷 밑단을 찢어 피가난 부위를 지혈하려고 했어. 내 행동을 막은 나보다 작은 손이 아니었다면 말이야. "혹, 아가씨의 어머니를 기억 하시나요...?" 그때 나는 그 아이가 뭐라는지 잘 들리지 않았어. 손에도 피, 들춰진 팔에도 피, 온 몸이 정말 피투성이었어.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조용히 있어봐! 여기 지혈만하고 바로 냇가로 가자. 가만히 있어, 좀... 응?" "아가씨 어머니가 제 스승이었습니다..."
이름없음 2023/03/24 19:36:47 ID : Dy2LbCi4Lhs
나는 옷을 찢던 걸 멈추고 그 아이를 봤어. 간신히 숨을 내 쉬고 있는데, 그 품이 너무 작아 금방 사그라들거 같았어. "저를 구해주고 거둬서, 이곳으로 데려와,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셨습니다..." 이해가 안됐어. 이제와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 그게 지금 네가 죽어가면서 꼭 해야 하는 말인거냐고 그런 생각을 했어. "저는 원래 이름이 없었습니다... 제 이름은 아가씨 어머니께서 지어준 이름이에요..." 그제야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 같았어. "더 얘기하지 마. 제발... 알겠으니까..." 상체만 겨우 들어 올려 다친 부위를 확인했어. "그리고 이 이름은 원래 아가씨께 지어주고 싶으셨다고..." 머리는 찢어진 상처 말고 총상은 없었어. 안심하며 어깨까지 둘러보는데 가슴쪽이 축축했어. "란교라는 이름은 원래 아가씨의 이름입니다..." "싫어! 난 이름 같은 거 필요 없어! 그런 거 없어도 잘 살았다고!" 나는 가슴을 꾹 누르며 울부짖듯이 외쳤어. 그러면 안됐는데, 감정조절이 안됐어. "란교 아가씨, 만나면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었어요..."
이름없음 2023/03/24 19:43:19 ID : Dy2LbCi4Lhs
찢은 천을 묶는데 손이 덜덜 떨리는거야. 아직까지 온기는 둘인데 곧 하나가 될 거 같아서 너무 무서웠어. "제발... 끝나고 얘기해. 살아서 얘기하라고..." 왜 죽을듯이 말하냐고. 왜 그게 하필 지금 이 순간이냐고. 과묵하던 네가 그 얘기를 꺼내려는 이유가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었으면 했어. 우리 인생은 앞으로 한참인데 너는 한 걸음 물러나려는 듯 하냐고. "그때... 아가씨께서 저에게 이름을 물어봐 주셨을 때 죄송했어요..." 나는 듣지 않기로 했어. 묶은 천으로 지혈하려고 그 애의 옷을 벗기는데 나는 또 심장이 내려 앉는 기분을 느꼈어. "그 이름은 원래 제것이 아닌데... 아무 대답도 못해서, 감히 그 이름을 제가 가져서..." 그 아이가 항상 가리던 윗 옷 안에는 낙인이 찍혀 있었어.
이름없음 2023/03/24 19:45:10 ID : Dy2LbCi4Lhs
"너, 너 왜 이런 곳에 낙인이..." "아가씨, 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셔도 잊으셔야 합니다..." '잊어야 한다.' 그 말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왔어. 심장에 칼이 박히는 기분이었어. "아가씨가 제게서 가져갈 것은 원래 아가씨 것이었던 이름 뿐입니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어. "아가씨도, 아가씨 어머니도 모두 제겐 소중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멈추지 말고 나아가세요..." 사람은, 정말 간절하면 마지막 모든 것을 쥐어짜낼 수 있다는 걸. "란교야..." 그렇게 뼈져리게 느끼고 싶지 않았어.
이름없음 2023/03/24 20:54:47 ID : Dy2LbCi4Lhs
그때는 말 그대로 무아지경이었지. 태어난 이후로 애처럼 크게 울어본 건 그 날이 두번째일 거야. 정말 누구에게든 살려달라고 소리쳤어. 난 너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데. 너만이 내 편이였는데. 그 아이를 꼭 붙잡고 한참을 넋 놓고 울었어. 해가 뜨는 새벽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난 혼자 못 살아..." 아니 너 없는 세상에선 못 살아. 내가 네 이름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 너 없는 네 이름을 쓴 채 살 수 없어. 나는 옷 안에 챙겨놨던 은장도를 기억해냈어. 그리고 정말 순식간이었지. 은장도를 빼내서 손목을 그으려는데, 안에서 종이 하나가 나왔어.
이름없음 2023/03/24 21:01:12 ID : Dy2LbCi4Lhs
그 편지는 행수기생의 편지였어. '이 편지를 읽는다면 아마 난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겠지.' 나는 칼을 떨어트리고 또 눈물이 터져 나왔어. 정말 다 알고 있었구나. 너무 울어서 탈수가 올 정도였는데, 정말 어지러웠어. 편지는 아직 글을 다 못 뗀 내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고 간략했어. 그리고 내가 가야 할 장소를 알려줬지. 그 밑에서부터는 제대로 읽지 못했지만 그곳에 가 편지를 보여주면 알아 들을거라 했어. "나는 갈 곳이 생겼어..." 한참을 그 아이 손만 잡은 채 멍하니 있었어. 우습게도 배가 고팠고 목이 갈라져 아플 만큼 물도 마시고 싶었어. 씻고 싶었고 자고 싶었어. 살 욕구가 넘쳐났지. "여기서 너와 나는 헤어지는구나." 만약 그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왜 하필 너였을까. 왜 굳이 우리여야만 했을까.
이름없음 2023/03/24 21:34:31 ID : Dy2LbCi4Lhs
나는 다시 칼을 넣고 그 아이를 업었어. 평소에는 엄청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드니까 무거웠어. 근데 또 너무 차가운거야. 꼭 돌덩이를 운반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다시 눈물이 나왔고. 애처럼 울고 가다가 지쳐서 잠시 내려놓고 다시 업어서 냇가로 데려갔어. 피투성이인 머리카락을 씻기고 얼굴과 몸을 닦아냈어. 그리고 옷을 벗겨 몸을 닦는데 가슴팍에 상처가 총상이 아니라 자상이었어. 나는 그걸 보다 너무 놀라서 내 왼쪽 어깨 부근을 봤어. 내 상처도 터져 피가 흘러서 만만치 않았지만 총알을 빼내고 꿰멘 흔적이 있었어. 그리고 어디서 뜯어온건지 겨드랑이 사이로 천이 아주 칭칭 감겨 있었어. 그 아이는 아마 내가 쓰러진 사이에 치료를 했겠지. 그러다 발견되어서...
이름없음 2023/03/24 21:49:34 ID : Dy2LbCi4Lhs
나는 잡생각을 떨치고 붕대로 감은 천을 버리고 내 옷을 뜯어 다시 감아놨어. 그리고 그 아이를 마저 씻기고 옷도 대충 빨아 입혀준 뒤, 큰 돌 위에 눕혀놓고 나는 물을 마셨어. 배도 고팠지만 졸음이 먼저 쏟아지더라. 그 아이 옆에 누워서 그대로 잠들었어. 말도 못할 정도로 피곤하니까 눈만 감아도 잠이왔어. 꿈도 안 꾸고 자다 깼는데 저녁이었지. 나는 더 늦기전에 몸을 움직였어. 제대로 된 장례식은 못해줘도 그 아이의 무덤이라도 만들어주고 싶었어. 주변에서 뾰족한 돌을 찾아서 풀이 난 땅을 밤이 되도록 팠어. 어떻게 땅을 파야 하는지 몰라서 깊게 팠다가 그 애를 제대로 눕히지도 못하고 그랬던 게 기억나. 다시 \_/이런식으로 땅을 파고 경사진 부분을 이용해서 그 애를 아래에 놓고 나와 흙으로 덮을 수 있었어. 흙을 덮으며 나는 그애의 이름을 생각했어. 내게 자신의 이름을 주고 간 그애에게도 이름을 주어야겠다고.
이름없음 2023/03/24 21:58:41 ID : Dy2LbCi4Lhs
나는 그애에게 주었던 비녀를 무덤비 대신 꽂았어. 그애의 이름을 아무리 떠올려 봤지만, 내게는 하나뿐인 배동이야. 그래서 나는 평소 속으로만 불렀던 배동이라는 호칭을 이름으로 만들어줬어. 흙을 덮으며 이름을 떠올리는데 내가 아는 단어가 몇 없는거야. 꽃 이름 몇개 언니들에게 들은 게 전부인거야. 기생언니들이 대부분 꽃 이름을 가졌는데 그 이유가 자기들도 아는 게 그거뿐이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흔하고 널리 쓰이는 꽃 이름이 자신들의 이름이 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난 이 아이에게 꽃 이름은 주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 애는 그저 배동이야. 나에게 배동하면 그 아이야. 이게 내가 배동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인 거 같아.
이름없음 2023/03/24 22:06:27 ID : Dy2LbCi4Lhs
흐름상 오늘은 여기서 끊는 게 맞는 거 같아. 많이 쓰려고 했는데 눈도 아프고.. 내일 약속이 생겨서 일찍 자야할 거 같아. 다들 즐거운 금요일 보내. 글에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을텐데(읽어주는 사람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 어린애가 상처 치료는 어떻게? 아무리 치료를 했다지만 과다출혈로 죽지 않고 살 수 있던건지, 어째서 그동안 배동의 이름도 모르고 있던건지와 내 이름이 없던건지 등등 앞으로 계속 풀어나갈게.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줘.
이름없음 2023/03/25 14:14:55 ID : Dy2LbCi4Lhs
나는 배동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지쳐 잠들었어. 그리고 아마 다음 날 일거야. "얘야, 일어나보렴." 누군가 내 몸을 흔들며 깨웠어. 나는 배고프고 힘도 없어서 칭얼댔던 거 같아. "여기 계속 있으면 위험하단다." 그 말에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반사적으로 눈을 떴어. 일어날 힘은 없고 전날 밤 추워서인지 기침도 나왔어. 정체모를 사람이 괜찮냐며 나에게 물을 주셨어. 나는 그 물을 급하게 마시다 사례에 들렸어. "괜찮니, 얘야." 처음듣는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온 힘이 빠져나갔어. 그리고 손과 목에 감긴 염주를 보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게되었어. 안심이 되서 나는 또 눈물을 막 흘렸지. "얘, 울지마렴, 아이구..." 스님은 내 등을 토닥여주셨고 나는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울었어. 배가 고파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 스님은 작은 보따리 안에 있던 주전부리를 나에게 주셨어. 나는 그걸 울면서 받아 먹었어. 스님은 내가 진정하고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인내심있게 기다려주셨어.
이름없음 2023/03/25 17:45:38 ID : Dy2LbCi4Lhs
"이름이 무엇이니?" 나는 스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첫 인상으로 남아있는 건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거야. "없어요, 그런 거." "옷부터가 사연이 많은 아가씨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나는 피로 얼룩진 옷을 감추듯이 몸을 웅크렸어. 그러자 스님이 또 인자한 웃음을 지으셨어. "이 무덤은 네가 만들어준 것이니?" 나는 제대로 쌓지 못한 울퉁불퉁한 흙을 무덤이라 알아봐주는 것에 따뜻함을 느꼈어. "네, 맞아요. 저의 아주 소중한 친구가 잠들어 있어요." 슬프기도 하고, 전날 밤 일이 떠올라 우울해졌어. 그래서 말 끝이 무척 떨렸어. "좋은 곳으로 갔단다." "정말요?" "그럼, 네가 이리 무덤을 만들어준 덕분에 한 없이 떠났단다." 나는 그말에 안도하고 또 눈물을 터트렸어. 스님이 말씀하시니 더 신뢰가 갔고, 배동에 대한 내 마음도 저 무덤처럼 천천히 추억으로 쌓아지기 시작했어.
이름없음 2023/03/25 17:53:04 ID : Dy2LbCi4Lhs
"한데, 묘비를 세워주지 않았구나." 나는 눈물을 흘리다 말고 비녀를 가리키며 말했어. "저 비녀가... 묘비에요..." 스님은 그것을 보시며 골똘히 생각하시는 듯 하더니 냇가로 갔어.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돌을 깎는 도구를 꺼내 나에게 물었어. "네 소중한 친구 이름은 무엇이니?" "배..배동이요." "한자는 아니?" "몰라요.. 아직 글을 다 떼진 못했어요..." "으음, 그럼 한글로 써야겠구나." 나는 설마 하면서도 스님이 정말 거기서 돌을 깎을 줄은 몰랐어. 스님은 열심히, 빠르게 돌을 깎으시더니 반나절을 돌 깎는데만 시간을 쓰셨어. "이제 세워 놓자구나." 묘비는 예쁘지도, 크지도 않았어. 정말 조그만했고 급하게 주워온 돌이라 울퉁불퉁 했어. 근데 그게 또 무덤이랑 어울렸어. 나는 스님이 돌을 깎는 동안 열심히 흰 풀을 뜯어왔어. 토끼풀도 있었던 거 같아. 스님은 다시 친근한 미소를 지으시며 비석 옆에 예쁘게 세워주셨어. "그래, 그럼. 오늘 지낼 장소는 있니?" 나는 고개를 푹 떨구며 힘없이 저었어. 스님은 고민하는 듯 음, 하시더니 작게 손짓하셨어. "밥이라도 먹고 하룻밤 자고 가렴. 여기서 멀지 않단다."
이름없음 2023/03/25 18:05:22 ID : Dy2LbCi4Lhs
나는 처음 본 사람을 믿지 않아. 하지만 그건 기생집에서만 한정됐던 건지, 그 스님을 보자마자 제발 날 좀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데리고 가달라고 외치고 싶었어. 그런데 스님이 먼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나는 계속 애처럼 울기만 했지.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운 건 태어나서 두 번째야.. "그래도 돼요...?" "물론이란다." "나쁜 사람 아니죠...?" "허허허, 내 아는 민머리인 사람중에 나쁜 사람은 본 적 없으니 걱정 말거라." 나는 이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저 난 나쁜 사람 아니라고 장난 치듯 말하는 것만 알아 들었지. 나는 천천히 스님에게 다가갔어. 스님은 뒤늦게야 본 내 맨발에 어디론가 황급히 가더니 풀을 한가득 넣은 풀신(?)을 만들어 오셨어. 무슨 풀인지는 모르겠지만 줄기를 잡아당기니 발목에 신이 딱 맞았어. "잡상인이세요...?" 하고 말하니까 아까보다 더 크게 웃으시더니 손재주 좋은 스님이라 했어. "더 늦기 전에 묵을 곳을 찾자꾸나." 나는 배동말고는 사람 손 잡는 게 어색해서 스님의 옷소매를 잡고 걸었어. 내 걸음은 무척 느렸는데, 스님은 그런 날 답답해하지 않고 기다려주셨어. 그렇다고 날 안고 들고 간다거나 부축하거나 그러시진 않았어.
이름없음 2023/03/25 18:20:03 ID : Dy2LbCi4Lhs
그렇게 해가 질 무렵에야 어느 여관에 도착했어. 스님과 여자 여관주인은 아는 사이처럼 보였고, 여관주인도 나쁜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어. 여관도 조용하고 처음으로 본 깨끗하고 넓은 방은 온돌로 따뜻하고 아늑했지. 여관주인은 날 보자마자 씻을 체비를 해주었어. 욕탕에 물을 데워 내 상처를 피해 조심스럽게 씻겨주셨어. 다 씻고 주인방으로 가 어깨에 난 상처를 소독하는데 난 또 여기서 울고 말았어. 그동안 상처를 무시하고, 있는지조차 까먹다가 상처를 보니까 너무 아팠던거지. "이상하구나." 여관주인은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상처를 둘러봤어. "상처가 터졌었니?" "모르겠어요..."
이름없음 2023/03/25 18:24:51 ID : Dy2LbCi4Lhs
나는 아파서 제대로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여관주인이 뭐라하는지도 제대로 못듣고 상처를 치료하고 방으로 돌아왔지. 방에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가득했어. 고기는 없지만 맛있어 보이는 나물 무침과 죽이 놓여 있었어. "아까 막 가져왔는데 제때 잘 와주었구나." 나는 흰죽이 그렇게 맛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어. 죽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숟가락으로 막 퍼먹었는데 스님은 말 없이 내 숟가락위에 나물을 가득 올려 주셨어. 진짜... 나는 계속 울었어. 따뜻한 밥, 따뜻한 온기, 따뜻한 사람까지 모두 내겐 너무 낯설었어. 동시에 배동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온후함이었어. 스님은 내가 우는 동안에도 나물을 얹어주셨어. 그날 난 참 따뜻하고 포만감 넘치는 식사를 했어.
이름없음 2023/03/25 18:29:58 ID : Dy2LbCi4Lhs
"여기, 네 짐은 아까 여관주인이 따로 빼놓았단다." 밥을 다 먹고 상을 치운 후 스님이 내게 천에 묶여진 은장도와 비녀를 주셨어. "피는 내가 다 닦아놨는데 저 꽃은 물들어 빠지는데 좀 걸릴 거란다." 나는 천을 풀고 은장도를 꺼내 안에 있던 편지를 스님께 보여드렸어. "여기, 적힌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적힌 곳으로 가야하는데 글을 몰라서요.." 나는 스님에게 계속 민폐만 끼치는 거 같았어. 하루종일 도와주셨는데 쉴틈도 안주고 또 부탁을 한 게 죄송했어. 스님은 흐음, 하시며 편지를 읽기 시작했어. 내용이 많았던건지 스님은 오래도록 읽으셨어. 나는 다 읽으실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어.
이름없음 2023/03/25 20:46:57 ID : Dy2LbCi4Lhs
"잘됐구나." "...네?" 스님이 잠시만 기다려 보라며 나갔다 오시더니 종이 한 장과 먹물, 붓을 가져 오셨어. 그리고 지도를 그리시더니 점을 두 개 찍으셨어. "여기가 우리가 있는 위치란다. 그리고 편지에 적힌 주소는 이쯤 되겠구나. 마침 나도 이쪽에 볼일이 있던 참이라, 너만 괜찮다면 함께 가지 않으련?" 나는 어쩔 줄을 몰랐어. 내가 있는 위치조차 제대로 몰랐는데 스님이 가리킨 곳은 대충봐도 가까워 보이지 않았거든. "여기가 어디인가요? 한성인가요?" 나는 그때 당시 한성말고 다른 지역은 잘 몰랐어. 그래서 스님이 점을 찍은 곳이 한성일거라 생각했어. 스님은 다시 호쾌하게 웃으시며 지도를 더 크게 그리시더니 한성의 위치를 알려주셨어. "한성에 가고 싶니?" "아니요, 제가 아는 다른 지역이 거기밖에 없어서요..."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한성에 잘생긴 도련님이 많긴 하지... 뭐 이런식으로 날 놀리셨어.
이름없음 2023/03/25 21:26:04 ID : Dy2LbCi4Lhs
나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숙였어. 내가 무슨 출신인지 알고나 하시는 말인가 싶었어. "미안하단다, 나이가 들어 적적하다 사람을 만나면 이리 되는구나."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요 아니에요, 했지. "사실 내가 편지를 다 읽어 대충 네 사정을 알게 됐단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어. 그래서 일단 난 고개를 끄덕였지. 은장도에 새겨진 꽃에 남아있는 피를 보며 다시 눈물이 나려 했어. 스님은 은장도를 다시 가져가시더니 편지를 넣어주셨어. "여기서 네가 가려는 곳은 하루면 충분히 갈 수 있지. 하나, 네 그 몸으로는 사흘을 걸리겠구나." 사흘. 나 혼자 사흘이라는 그 긴 여정동안 헤맬 뻔 했던거야. 나는 그것이 섬뜩해져서 팔을 쓸어내렸어. "일단 여기서 쉬다 가자고 하고 싶다만, 널 기다리는 이가 있는 듯 하구나." 입을 꾹 다물었어. 배가 부르고 몸도 편하니 안심이 돼서 그런지 자꾸 울려 했거든. "눈 불어 터지겠구나." 스님은 날 달래며 오늘은 일단 늦었으니 자고 내일 마저 이야기 하자 하셨어. 근데 난 혼자 자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서워서 스님에게 말씀 드리니 여관 주인에게 말해보겠다 하시고 여관 주인이 날 데리러 오셨어.
이름없음 2023/03/25 21:45:38 ID : Dy2LbCi4Lhs
"편하게 지내다 가거라." 나는 여관 주인 옆에 마련된 내 침구를 보고 계속 감사하다 했어. "아이구, 됐어. 피곤할텐데 얼른 누우거라. 왼쪽으로는 눕지 말고, 알겠지?" 나는 그들의 걱정과 배려, 호의가 어색했어. 여관 주인은 시원시원한 성격 같았는데 정도 많은 사람이었어. "네에..." 이불 속에 눕는데 죄책감도 들고 밤이라 별 생각이 다 들어서 잠이 안 오는거야. 계속 뒤척이고 훌쩍거리면서 배동아, 배동아, 이랬던 거 같아. "오늘따라 잠이 안오네, 너도 그렇니?" "네에..." 나는 여관 주인에게 피해를 준거 같아서 다시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어. "이럴 때는 구전 이야기나... 아 이건 너무 옛날인가?" 여관 주인이 혼자 말 하며 웃는데 자장가를 듣는 기분이었어. "동화를 들려준다거나, 자장가를 불러준다거나 그러지." "네.." 나는 옛날에 언니들이 기생이 귀족에게 첩으로 시집 간 이야기를 그렇게 늘어놓곤 했어. 자기 전에 항상 자기들끼리 그렇게 수다를 떨었는데 그게 나에게는 소음이었어. "그런데 나는 들은 동화나 자장가는 없어서 말이다. 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네."
이름없음 2023/03/25 21:55:29 ID : Dy2LbCi4Lhs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도 돼." "네..?" "더 실컷 울고, 마음 아파하고, 세상을 원망해도 되고,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해도 돼." 왜 있잖아, 남들에게 쉽게 할 수 있는 위로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와닿을 때. "마음에 응어리가 남으면 병 나. 참으면 더 아파. 그러니까 그냥 쏟아내도 된다고." 여관 주인이 내가 안 우니까 머리를 콩 하고 때렸는데 정말 살살 쳤는데 그게 도화선의 불이라도 됐던 거 같아. 나는 다시 한밤중에 갓난아이처럼 엉엉 울었고 여관 주인은 그런 날 꼭 안아줬어. "내가 자장가는 못 배웠어도 위로는 신통하게 잘 하거든." 그러며 내 어깨를 토닥여주고 눈물도 계속 닦아주셨어. 생전 처음 느껴보는 품이었고, 그게 너무 낯설고 또 그리워서 마주 안았어. "삶이 지긋지긋해도 살거라. 내 존재가 뿌리채 뽑혀도 새 땅을 찾아야지. 네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건 너 뿐이야. 잠시 쉬고 싶으면 오고. 여긴 그러라고 있는 곳이란다." 여관 주인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장가처럼, 동화처럼 이야기 했어. 그때는 이해가 안 됐어. 그저 누군가의 온기와 목소리에 안정을 찾고 잠들 수 있었어.
이름없음 2023/03/25 21:57:23 ID : Dy2LbCi4Lhs
오늘은 여기까지(눈치..) 조회수 올라가는 거 쓰러 올 때마다 깜짝 놀라. 이런 글에 이렇게 많은 관심(?) 가져줄 줄은 몰랐어. 원래는 금방 쓰다 말겠지, 했는데 봐주는 너희들 덕분에 계속 쓰고 있어. 내일도 또 올게,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
이름없음 2023/03/26 11:44:59 ID : Dy2LbCi4Lhs
스스스, 사사사, 하는 불길한 풀소리가 났어. 바람이 아닌 누군가 만든 인위적인 풀소리.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깼어. 어두운 방은 조용했는데, 원인 모를 불안함이 나를 다시 덮쳤지. 나는 뒷간에 가는 척 방을 빠져 나왔어. 은장도와 비녀도 챙겼어. 한 명이라도 죽이고 싶었던 거 같아. 일종의 복수심이었지. 한 명만 죽이면, 나도 그 애에게 조금은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거 같았어. 그리고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나는 칼을 꺼내고 비녀는 옷 안에 숨겼어. 흐릿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 다가왔을 때, 나는 있는 힘껏 칼을 내리 찍었어. "란교야!!!"
이름없음 2023/03/26 11:50:33 ID : Dy2LbCi4Lhs
숨이 가득 찬 숨소리, 온 몸이 젖어 소름돋은 팔, 꽉 쥔 칼을 쥔 손을 맞잡은 더 커다란 손. 그 손은 무척 까칠했어. "허억...!" "정신이 드니? 괜찮아? 무슨 꿈을 꾼거야?" 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여관 주인은 연신 나를 달랬어. 내 심장은 뜨겁게 뛰었지만 몸은 차가워 계속 떨었어. 흥분을 주체 못하고 크게 내쉬는 숨소리는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 잠잠해졌어.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손만 벌벌 떨며 상체만 겨우 일으킨 상태였어. "주인 어른, 도망치셔야 해요." 내가 하는 말이 아니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보다 네 상태가 지금," "그자들이 올거예요."
이름없음 2023/03/26 11:59:59 ID : Dy2LbCi4Lhs
그때 내 눈빛은 꼭 텅 빈 공허 같았어. 현재를 바라보는 게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해. "...일단 옷을 먼저 갈아입자. 이러다 너 감기 걸리겠어." 여관 주인은 나에게 맞는 수수한 한복을 꺼내셨어. 물에 빠져 젖은 것 마냥 온 몸이 정말 땀투성이었어. 여관 주인은 물수건을 가져와 몸을 닦아내주고 옷을 입혀 주셨어. 머리도 손수 만져 주시고 잠시만 기다리라며 나가셨어. 나는 그때까지도 그저 멍했어. 머릿 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였어. 여기 더 오래 있어선 안돼. 곧 이어 스님과 함께 돌아온 여관 주인의 손에는 작은 봇짐이 있었어. "잠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모르겠구나." 스님은 너털 웃음을 지으시며 날 일으켜 세워줬어. 여관 주인은 봇짐을 내 어깨에 메주셨어. "여기는 걱정말고 스님과 함께 가거라." "아니요, 주인 어른도 가셔야..." "나는 여기를 지켜야지. 그래야 다음에 네가 왔을 때 반갑게 인사해 줄 수 있지 않겠어?"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어. 대문 앞까지 마중 나와주신 여관 주인에게 공손히 인사한 채 그곳을 떠났어.
이름없음 2023/03/26 19:22:45 ID : Dy2LbCi4Lhs
신발은 여관 주인이 옛날에 썼던 거라며 낡은 고무신 같은 걸 하나 주셔서 그걸 신었어. "저... 주인 어른은 괜찮으실까요?" "응? 허허, 당연하지. 저래보여도 힘은 나보다 세단다." 스님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 놓였어. 곧 해가 뜰 새벽이라 우리는 천천히 걸었어. 탕-!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갔고, 바람이 휘날렸어. 나는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어. 스님은 그런 날 안고 산으로 뛰었어.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스님의 목을 꽉 잡고 벌벌 떨었어. "조금만 더 가면 내가 아는 사찰이 나온단다. 조금만 버티거라..." 무겁지도 않은지 스님은 날 안고 어두운 숲 길을 빠르게 뛰었어. 나는 대답도 못하고 스님의 옷깃을 꽉 잡았어.
이름없음 2023/03/26 19:34:51 ID : Dy2LbCi4Lhs
체감은 30분인 거 같은데, 해는 아직 뜨지도 않았더라. 사찰에 도착하니 대문은 당연히 닫혀 있었어. 스님은 승려들이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다며 그곳으로 향했고, 아주 자연스럽게 안채같은 곳에서 따뜻한 차를 가지고 오셨어. "대추차란다. 마셔보거라." 나는 입에만 갖다대고 마시진 못했어. 춥고 몸이 간헐적으로 떨렸는데 무언가 먹으면 바로 게워낼 거 같았어. 스님은 어디론가 가시더니 모포를 가져와서 내 어깨에 둘러 주셨지. "아까 한 말 기억하니?" "네..." "그 여관 주인은 살아있을 거란다.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야." 난 알고 있었어. 강하다고 다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대답은 할 수 없었어. 식어가는 차만 홀짝 거렸어. "너는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느냐." 스님의 처음 듣는 낮은 목소리에 나는 놀라고 당황스러웠어.
이름없음 2023/03/26 19:42:08 ID : Dy2LbCi4Lhs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랐어. 혼란한 머릿 속에 내가 저 스님을 궁금해야 하는 이유를 억지로 생각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어찌 되어도 상관 없다는 듯 했잖니." 아까보단 부드러웠지만 스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어딘가 엄격했어. 나는 여전히 무슨 소리인가 했어. "네 소중한 친구는 좋은 곳으로 갔단다. 하나, 어찌 너는 그 아이를 놓아주지 못하고 따라가려는 것이야." 그때 스님의 얼굴은 무척 안타까워하는 얼굴이었어. "그, 그런 적 없어요..." 따라가려고 했다니. 나는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곳으로 향하려 하고 있지 않나. 스님의 말은 더욱 수수께기 같았어. 꼭 잘못한 아이처럼 스님의 눈치를 봤어. "너는 묻지 말고 퍼내야 할 산 사람이다. 죽은 사람처럼 너를 묻으려 하지 말거라."
이름없음 2023/03/26 19:51:22 ID : Dy2LbCi4Lhs
해가 점점 뜨기 시작했어. 나는 여전히 내일로 가고 있는데,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데. "왜 그 옆에 네 무덤까지 만들려고 하는 것이야." 무덤. 아, 난 추억을 쌓은 게 아니라, 내 지난 날을 부정하고 싶어 그곳에 같이 묻어두고 왔구나. 내 뿌리는 아직도 산 채로 뽑힌 그곳이 있구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어. "나... 이름 있어요..." 그래서 그 아이가 나에게 준 소중한 이름마저 거기에 묻어버린 거야. "제 이름은 란교고, 성도 한자도 모르지만... 어쨌든 란교에요..." "그래, 란교야." "그리고... 제 하나뿐인 친구는 저 때문에.... 아니, 모두 나 때문에..."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어. 가슴을 내리치며 차게 식은 대추차를 한입에 마셨어. "제가 알았는데... 무작정 도망치자 했어요... 도망칠 거였으면 그냥 갔어야 하는데... 배동을..." 나는 더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엉엉 울기만 했어. 스님은 내 찻잔에 따뜻한 대추차를 더 따라주셨어. 해가 완전히 떴고, 스님은 미소 지으셨어.
이름없음 2023/03/26 20:18:01 ID : Dy2LbCi4Lhs
"스님은 누구에요? 왜 저를 이렇게나 도와주세요?" 좀 진정하고 나서는 애처럼 스님에게 질문을 던졌어. 스님은 하나하나 다 대답해 주셨어. "나는 네 어미와 친분이 있는 사이란다. 그렇다고 널 도운 건 아니고, 그렇게 만신창이로 쓰러져 있으면 누구라도 널 구했을 거란다." "전 엄마에 대해 몰라요." 스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셨어. "성함은?" "몰라요..." "단자 양자 란다. 성은 나도 모르겠구나." "의기였나요?" "...알고 있었던 거구나." "아니요, 그냥 왠지 그럴 거 같았어요." 스님은 허허, 하며 헛웃음을 흘리시더니 모포를 덮은 내 어깨를 토닥여주셨어. "이 나라를 사랑하셨단다." "전 못할 거 같아요." "물론, 너도 많이 사랑했단다." 그 말에 조금 뜨끔했어. 분명 엄마가 남기고 간 내 어릴 적 그림은 갖고 있었지만 그건 이미 묻혀버렸으니까. "전 엄마를 소중해하지 않았어요.." 의기소침할 수 밖에 없었어.
이름없음 2023/03/27 13:37:45 ID : Dy2LbCi4Lhs
스님은 내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어 주셨어. 몸도 어느정도 진정됐고, 나와 스님은 다른 승려들이 슬슬 나오기 전에 사찰을 나와 다시 길을 걸었어. 나는 스님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서둘러야 할 거 같아서 조용히 따라갔어. "네 어미에 대해 더 궁금한 게 없니?" "저희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신지도 아시나요?" "...넌 어떻게 알고 있니?" "스승님께 성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렇구나." "아니죠?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거죠?" 그때 내 배가 눈치 없이 꼬르륵 소리를 냈어. 스님과 나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불 피울 재료를 모으고 내 봇짐에 있던 고구마와 감자를 구웠어. 불이 타닥하며 낙엽안에 들어있는 구황작물이 다 구워지길 기다렸지. "네 어머니는 왜군과 맞서 싸웠단다."
이름없음 2023/03/27 14:02:16 ID : Dy2LbCi4Lhs
"...잘 모르겠어요." "무엇이 말이니?"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요. 음, 엄마는 저를 늘 슬픈 눈으로 봤거든요." 스님은 병에 있던 물을 나에게 주셨어. 나도 모르게 말하면서 목이 막혔나봐. 물인줄 알고 받아 먹었던 게 냉침한 대추차였어. "저는 엄마가 후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그런 얼굴이었거든요." "너는 네 아비에 대해 모르는구나." "네, 맞아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어. 태어난 게 죄인 거 같았거든. 나는 내가 부끄럽고, 왜 태어난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던 거 같아. 유일하게 곁을 내준 배동을 특별하고 소중히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고.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단다. 너와 어미를 지키다 돌아가신 분이야." "얼굴은 모르세요?" "어디보자." 스님은 내 얼굴을 꼼꼼히 살피시더니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셨어. "코가 아비를 쏙 빼닮았구나. 너처럼 코가 살짝 휘어 있단다. 눈은 다행히 어미를 닮았구나. 네 아비는 눈이 좀 작았어." 그 뒤로도 아빠의 얼굴을 세밀하게 말씀해주시는데 조금 신기했지. 그림이나 사진은 따로 남아있는 게 없었지만 내 얼굴에는 남아있다는 거잖아.
이름없음 2023/03/27 15:13:36 ID : Dy2LbCi4Lhs
얘기를 나누다 우리의 식량이 다 구워져서 먹고, 흔적을 지우고 다시 움직일 채비를 했어. 나는 바깥을 나온 게 그때가 처음이잖아. 그래서 주변에 핀 꽃들이나 식물을 보기도 하고 가끔 한 둘씩 지나가는 평민을 보기도 했어. 마치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된 거 같았어. 그러다 주목나무가 있는 걸 봤어.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다가갔는데 스님이 내 등에 맨 봇짐을 잡아 끌었어. "그건 독이란다." "알아요." "...저걸 먹은 적이 있니?" 나는 그때 처음으로 스님에게 거짓을 말했어. "아니요.." 스님은 못미더운 표정이셨지만 가까이 가지 말라 한번 더 말씀하시고 다시 앞장서서 걸었어. "맹독인가요?" "...네 어미가, 아니. 아니란다. 맹독이니 혹여라도 만지지 말거라." 나는 주목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어. "제가 저 나무를 닮았대요." "응? 누가?" "배동이요." 그러자 앞서가던 스님이 걸음을 멈추고 날 돌아보셨어. "꽃말은 아니?" "아니요?" "'죽음'이란다."
이름없음 2023/03/27 17:58:57 ID : Dy2LbCi4Lhs
"그 아이도 꽃말은 몰랐을 거예요." 나는 태연하게 받아쳤지만 속이 울렁거렸어. "또 다른 의미가 있지. '명예'. 그 아이가 꽃말을 알았다면 그 뜻으로 알고 네게 말한 걸 거란다." 스님은 나와 배동 사이에 있던 일을 모르니 그렇게 말하는 거였겠지. 나는 대충 흘려 들었어. "그 아이는 제 몸종이나 다름 없었어요. 그 아이가 절 그렇게 볼 리가 없어요." 말하고 나니 다시 슬퍼졌어. 언제나 일방적으로 말을 걸었던 건 나였고, 배동은 거의 내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어. 그 아이는 작은 몸짓 하나, 말 한 마디 신경쓰며 나를 대했어. 나는 그걸 뒤늦게야 깨닫고 만거야. 마지막까지 그 아이는 나를 위한 말만 하고 갔어. 그 아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뭐였을까?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나에게 온 이유 말고도 하고 싶었을 말이 많았을텐데. 그 아이에 관한 건 여전히 수수께끼로 가득해. 하지만 난 그 아이가 내게 준 이름 말고는 모두 잊고 나아가기로 했었잖아. 잊으라는 게 추억으로 두라는 뜻인지 모르고 정말 묻어버렸지만, 언젠가 추억으로 둘 수 있는 날이 올거라고 생각했어. 어쩌면 살아가다 그 아이의 의중을 알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이름없음 2023/03/27 18:28:42 ID : Dy2LbCi4Lhs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했지만 결론은 그랬어. 스님은 말 없이 내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줬어. "하지만 배동에게도 저는 소중한 친구였을 거예요." 그제야 스님이 다시 활짝 미소 지으셨어. "물론이란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상처를 치료해주고, 이름을 주고 갔으니까. 분명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건 깨지지 않는 신뢰로 다져진 유대같은 거였어.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자꾸나." 스님을 따라 걷고 또 걷고, 그러다 간단히 배를 채우고 다시 걸으니 마을이 나왔어. 마을 중심가에는 주막이 있었는데 우리는 바로 그곳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어. "신을 새로 사야겠더구나." "예?" 기생은 신을 신을 일이 별로 없어서 안그래도 고무신이 불편했거든. 스님이 풀신을 만들어 주셨을 때가 제일 편했어.. 그래서 난 이대로도 괜찮다 하려 했지만 옷도 필요해보인다며 반 강제로 끌려갔어.
이름없음 2023/03/27 19:39:58 ID : Dy2LbCi4Lhs
이건 다행히 작은 일화로 넘어갔어. 스님과 내가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주막으로 돌아왔거든. 그때 내가 입고 있던 옷도 상태가 나쁘진 않았어. 대신 댕기를 하나 사서 머리를 묶었어. 그 전까지는 내 비녀로 머리를 올리고 다녔거든. 주막으로 돌아오니 나보나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언니가 있었어. 약재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내 상처를 치료하러 와준 분이었어. 스님이 따로 부른 건지 나는 그 언니를 따라 방에 들어갔어.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들었습니다. 잠깐 살펴보아도 될까요?" 나는 존대에 당황했어. "말씀 편히 하세요. 상처는 어깨 아랫쪽에 있어요." 나는 옷을 내리며 상처를 보여드렸어. 약방 언니는 상처를 보더니 약을 빻기 시작했어. "다행히 꽤 아물었네요. 앞으로도 큰 움직임은 주의하시고..." 뭐 대충 저런 말이었는데, 난 앞으로 다가올 통증에 이미 반 쯤 정신을 놓았어. "혹시, 상처가 한 번 터진 적이 있나요?"
이름없음 2023/03/27 19:48:48 ID : Dy2LbCi4Lhs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다행히 약을 바르기 전이라 똑바로 대답했어. 하지만 서로 존대하고 있다는 건 몰랐네.. "상처를 꿰멘 흔적이 있는데 살이 다 붙질 않아서요. 총상은 자칫하면 과다출혈로 위험할 수 있어, 빠르게 지혈을 해야 하는데..." "그런데요..?" "대부분 총에 맞아 제때 치료하지 못하고 총알을 빼내 과다출혈로 죽는 경우가 허다하거든요. 제대로 치료하셨는데 상처가 터지고 다시 치료한 흔적은 없어서요. 이러면 과다출혈로 위험하셨을 텐데 어떻게..." 약방 언니는 의심스러운, 약간은 경계하는 듯한 얼굴로 날 훑어봤어. "혹시 다친 부위가 또 있나요?" 나는 발바닥을 보여주었어. 그동안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미 아물거나 아직 딱지도 생기지 않은 상처가 여럿 있었어. "여기도 약을 발랐나요?" 전 날 여관에서 발바닥도 치료 했었어. 그래서 난 그랬다고 대답했어. "혹시 총상을 입고 언제 치료 하셨나요?"
이름없음 2023/03/27 19:57:33 ID : Dy2LbCi4Lhs
이단 심문을 당하는 느낌이었어.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애를 썼어. "아마도... 한 시진 안됐을거예요..." 근데 그럼 뭐하겠어. 총 맞자마자 쓰러진 애 붙잡고 털어도 나오는 게 없는 걸. 난 대충 아무 말이나 꺼냈어. 그러자 약방 언니가 새하얗게 질리더니 내 얼굴을 꼬집었어. "어떻게 살아있지...?" 아, 언니는 눈이 굉장히 크셨는데 내가 더 의문이 들게 했어. "그러...게요?" 결국 서로 멍청한 말만 쏟아냈어... "일단 약은 발라드릴게요. 그리고 상처는 바로 치료하신 거 같아요. 기억 안나신다니 하는 말씀이지만, 한 시진은 죽어요. 어떻게 해도 죽습니다." 너무나 단호한 약방 언니의 말에 괜히 또 주눅 들었어. 살아있는 게 죄처럼 느껴지는 그런 기분을 다시 느꼈어. 약방 언니는 약을 다 발라주고 큰 통증이 없으면 보름내로는 나을거라며, 균이 들어가지 않게 뭐뭐뭐.... 나는 와다다 쏟아붓는 말에 무서워서 네, 네 만 반복했어.
이름없음 2023/03/27 20:15:30 ID : Dy2LbCi4Lhs
약방 언니가 방을 나가고 나는 옷을 다시 입었어. 그리고 스님이 약과같은 걸 들고 오셔서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어. "아까 다녀간 여인은 이 마을의 약방 딸이라고 하더구나." "네.. 스님이 부르신거죠?" "음, 상처가 심했으니 봐달라 부탁해놨었단다." "저, 스님." "왜 그러느냐, 란교야?" 글로 쓰니 이질적이지만 스님이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신 건 이때가 처음이었어. 좀 당황했지만 내 이름에 나도 적응을 해야하니 의식하지 않고 넘어갔어. "제가 아무래도, 범인과는 좀 다른가봐요." "응? 허허, 어떤 부분이 말이니?" 스님은 반은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반응이었어. "제가 총상을 입은 여기," 나는 내 왼쪽 어깨 아래를 가리켰어. "첫날과 약 바를 때 말고는 아픈 줄 몰랐거든요." 보통 바느질을 하다 손에 찔려 피가 나면 아파야 하지만 난 대부분의 통증을 잘 느끼는 편이 아니었어. 상처가 나도 작은 상처는 하루면 아물었고, 큰 상처는 뜨거운 것에 데였을 때 한 번 있었는데 그때도 닷새 안돼서 나았어. "배동이 절 치료해주고 나서 통증을 느낀 적 없었어요. 상처가 한 번 터졌다는데, 그때도 그 애의 피인 줄 알았거든요..."
이름없음 2023/03/27 20:55:46 ID : Dy2LbCi4Lhs
스님은 가부좌를 하며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어주셨어. "평소에도 통증을 잘 못 느끼는 편이니?" "네, 그런 거 같아요." "여관 주인은 뭐라 했었는지 기억나니?" "아니요, 그때는 아파서 기억이 안나요..." 스님은 작은 한숨을 쉬시더니 골몰한 얼굴을 하셨어. 나도 같이 기억을 더듬는데 상처부위를 의식해서인지 점점 통증이 생겼어. 심장과 가까운 위치여서인지 상처부위가 쿵쿵 하는 느낌이었어. "일단 오늘은 자고 내일 의원을 찾아가보자꾸나." "네..." 스님은 인사를 하고 가셨고 나는 방에 혼자 남아 상처부위를 봤어. 아마 그때 처음 제대로 본 거 같은데 상처부위는 정교하게 꿰메져 있었어. 그 사이로 실밥이 터져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거기로 상처가 터진 거 같아. 근데 그 상태에서 상처가 아물고 있었어. 그래서 그 부분만 동그랗게 살이 뜯겨져 있었는데, 그게 꼭. "주목나무 열매 같아요."
이름없음 2023/03/27 21:02:38 ID : Dy2LbCi4Lhs
배동의 목소리였어. 언제나 침착하고 조곤조곤한 그 말투. "누구야...!!" 나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 치며 외쳤어. 주변을 둘러봤는데 아무도 없었어. 숨이 급격하게 찼고 손발이 떨렸어. 구석에 있던 봇짐에서 은장도를 꺼내 칼을 들었어. 헛것이 들렸다 하기엔 분명한 목소리에 나는 누군가 꾸민 일인가 했어. 생명의 위협을 느낀거지. 전날처럼 적이 오는 즉시 찌를 생각이었어. 숨이 점점 막혀오고 나를 비웃는듯한 웃음소리가 퍼졌어. 섬뜩하고 소름끼쳤어. "아아아아악-!" 나는 귀를 틀어 막고 소리를 질렀어. 왜 나한테 이런일이 계속 생기는 거냐고, 왜 하필 나여야만 하는 거냐고, 왜 배동의 목소리로 나를 괴롭히느냐고. 그리고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챘지.
이름없음 2023/03/27 21:04:08 ID : Dy2LbCi4Lhs
내 어깨를 잡은 건 약방 언니였어. "괜찮으세요...!?" 나는 여전히 환청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어. "누가 자꾸 웃어요..." 킬킬 거리는 오싹한 소리에 난 몸을 떨었어. "저 좀 보세요, 숨 크게 들이 쉬어요." 얼굴이 잡혀서 약방 언니와 눈이 마주쳤어. 약방 언니의 큰 눈 안에 벌벌 떨고 있는 아이가 보였어. "하나하면 들이쉬고, 둘 하면 내쉬는 거예요." 나는 등을 토닥이며 하나, 둘, 하는 소리에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어. 환청도 점점 잦아들고 가파른 호흡도 진정됐어. 몸은 여전히 떨렸고 오한이 들었지만 약방 언니가 이불을 가져와 덮여주었어.
이름없음 2023/03/28 14:13:21 ID : Dy2LbCi4Lhs
"대체 이게 무슨..." 약방 언니는 진정된 나를 붙잡고 상태를 살폈어. "언제부터 이랬나요?" 걱정되서, 그게 자기 할 일이니 물어본 거였겠지만 난 내 상처를 건드는 듯 물어보는 게 싫었어. "신경쓰지 마세요." "지금 상태가 어떤진 알고나 하는 말이에요?" "도와주신 건 감사해요, 그런데 이만 나가주세요." 나는 약방 언니를 밀어서 방에서 내보냈어. 밖에서 약방 언니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이불 속에 숨어서 칼을 꽉 쥐었어.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온 몸이 땀투성이었어. "스승님, 전 죽고 싶지 않아요..." 아니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배동과 함께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쓰러지듯 잠에 들었어.
이름없음 2023/03/28 14:19:41 ID : Dy2LbCi4Lhs
"미쳤어요!? 누가 이불 안에서 잠을 자요!" 언성 높은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산소부족으로 괴로워할 뻔했어. 은혜도 모르는 나는 약방 언니가 거슬리기만 했어. 자꾸 이상한 말이나 하고 날 귀찮게 한다고 생각했어. "날 좀 내버려 둬요...!" "이런 꼴을 하고 어떻게 내버려둬요!" 좋게 말하면 정이 많고 그런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 넓은 사람이었어. 약방 언니와 이불을 잡고 말싸움을 했어. 나는 절대 놓아주지 않으려 했고 약방 언니는 어떻게든 빼앗으려 했지. "사람이 눈 앞에서 죽으려는데 어떻게 그냥 두냐고요!" 나는 그 말에 잡고 있던 이불을 놓았어. 약방 언니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쓰러졌어. "당신이 뭘 알아요..." "이게 무슨..." "눈 앞에서 죽어가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제대로 된 한 마디도 못하고 떠내보내야 하는 그 상실감을!" 나는 또 어린 아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바닥에 머리를 댄 채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짜내며 울었어. "당신이 뭘 아냐고...."
이름없음 2023/03/28 19:01:36 ID : Dy2LbCi4Lhs
"왜 모른다 생각해요?" 쿵, 쿵, 크게 발소리를 내며 나에게 다가왔어. "내가 왜 약학을 배우는지 알아요?" 내 어깨에 떨리는 손이 닿았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그랬어요."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 손을 봤어. 나보다 조금 더 크지만 온갖 곳에 군살이 잡혀 있었어.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어서..." 더 고개를 들었어. 까진 무릎이 보였어. "눈 앞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보는 게 참을 수 없어서...!" 다시 고개를 더 들었어. 약방 언니의 얼굴이 보였고, 울기 직전 내 얼굴과 비슷했어.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서, 그래서 약학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왜 울..." 약방 언니가 내 얼굴을 잡고 날 끌어 올렸어. 뭐랄까. 땅 속에 생매장 된 나를 꺼내주는 느낌이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모르는 척을 해? 눈 앞에서 또 죽어가는데..."
이름없음 2023/03/28 19:13:23 ID : Dy2LbCi4Lhs
약방 언니 얼굴은 엉망진창이었어. 나는 잡은 칼을 떨어트렸고, 쨍그랑- 소리가 났어. 그 소리는 마치 내 안에 무언가가 금이 가는 소리와 비슷했어. "지금이라도 살려요." 속에서 알 수 없는 게 들끓는 거 같았어. "살리고 싶었잖아, 너도." 약방 언니의 눈물이 내 얼굴로 떨어졌어. 나도 우는 것 같았어. 눈물은 안나오지만, 약방 언니가 대신 울어주는 것 같았어. "그 소중한 사람, 잊지 말고 계속 떠올려요. 그리고 살려요. 당신이 살리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순식간에 나를 자기 쪽으로 당겨서 꽉 안아줬어. "죄책감에서 버둥거리지 말고, 나아가라고." 다시 한번 쨍그랑- 소리가 나면서 내 안에 무언가가 깨졌어. "왜... 저한테 왜 이러세요..." "너무 어려서요." 나는 살아온 지난 날 중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없던 날이 이때였어. 그간 터진 눈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울었어. "이렇게나 어린데, 혼자서 참아내고, 짊어지고 있잖아요." 약방 언니에게 나는 어떻게 비쳐진 걸까? 경계하고, 의심하고, 항상 날이 서 있어야 했던 날 한 눈에 알아볼만큼, 내 꼴이 얼마나 엉망이었던 걸까. 나는 약방 언니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어.
이름없음 2023/03/28 19:16:37 ID : Dy2LbCi4Lhs
"얼굴좀 씻고 올게요..." 나는 약방 언니보다 많이 울었어. 눈이며 코며 다 부어서 찬물로 식히기라도 하려고 나갔어. 씻으러 가는 길에 스님을 만났어. "아직 안 주무셨어요...?" "허허, 그러게나 말이다. 나이가 들면 잠이 줄어 든단다." 스님은 엉뚱한 소리나 하셨어. 나는 그렇구나 하고 씻으러 갔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스님이 날 불렀어. "란교야." "...네?" "잘 자렴." 나는 다시 목이 막혔어. 겨우 네, 하며 방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약방 언니가 옆에서 새 이부자리 까는 걸 봤지. "뭐, 하세요..?" 나는 당황했다가, 안심했다가, 다시 어이가 없었어. "잘 곳이 없어서요."
이름없음 2023/03/28 20:38:03 ID : Dy2LbCi4Lhs
"그러니까 왜 여기에..." "여기말고 다른 방은 다 남자들이거든요." 나는 할 말을 잃었어. 뻔뻔하게 내 옆에 누운 약방 언니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어. 그래서 나도 그냥 내 이불에 누웠어. "아까는 소리쳐서 미안했어요." 조용한 사과였어. "저도 밀쳐서 죄송해요." 난 반은 빈말이었어. 사실 안 미안했어. "거짓말하지 말고요." 바로 들통났지. 거짓말에 능숙한 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내가 이렇게 투명했던가? 의심이 들었어. "진짠데." 그래서 소심하게 덧붙였어. "그런데 왜 계속 존댓말 하세요?" 그리고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했어. 이 언니는 왜 계속 나에게 존대를 쓰는 걸까. 무슨 체면 차리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 "울컥하는 성격 고치려고요. 원래 좀 잘 터지는 성격이라." "그런 거 같긴 했어요..." "환자분도... 이름이 뭐예요?" "....란교요." 긴 침묵끝에 나온 내 이름은 아직도 낯설고 어색했어. 그리고 약방 언니가 처음으로 웃었어. 비웃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자기 이름을 그렇게 뜸들여 말해요." "언니 이름은 뭔데요?" "진설이요. 겨울에 태어났거든요." "설이 이름이에요?" "네, 외자예요."
이름없음 2023/03/28 21:11:32 ID : Dy2LbCi4Lhs
예쁜이름에다 약방 언니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그러다 내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 궁금해지기도 했어. 그 후에도 몇 마디 더 주고 받았는데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다. 어느 순간 잠에 들었고, 나는 또 악몽에 빠졌어. "아가씨, 아가씨..." 배동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나는 안개 낀 어느 들판에 있었는데, 무척 어둡고 습했어. 온 몸에 소름이 끼칠만큼. "아가씨, 아가씨..." 배동은 나타나지 않고 어디선가 계속 나를 불렀어. 나는 배동을 찾기 위해 한 발 걸어나가다 장소가 바뀌었어. 불타는 기생집에서, 내가 배동을 밀어 넣었던 벽장으로. "왜 저를 두고 가셨나요?" "허억...!" 총상에 고통이 느껴지며 난 잠에서 깼어. 고통이 심해질수록 호흡은 느려졌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어. "으윽으..." 감당하기 힘든 고통은 오히려 신음소리도 나지 않는 거 알아? 숨조차 가누기 힘들 정도로 아팠는데, 그정도 고통은 처음이라 어쩔 줄 몰랐어. 눈물도 나오지 않을만큼 온 몸이 경직됐어.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손가락을 깨물고 그랬던 거 같아. 그 소리에 약방 언니가 잠을 깬건지 놀라며 나를 일으켜 세웠어. "란교! 괜찮아요? 제 목소리 들려요!?"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어. "총상이..."
이름없음 2023/03/28 21:21:11 ID : Dy2LbCi4Lhs
약방 언니는 바로 내 왼쪽 어깨 부근을 확인했어. 하지만 멀쩡했어. "상처에는 이상이 없어요. 일단, 숨 좀 제대로 쉬어봐요! 애도 아니고, 숨도 못 쉬면 어떡해요!" 그 말에 괜히 울컥해서 고통보다 숨 쉬는데 집중했어. "그래요, 그렇게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세요." 호흡이 돌아오고 진정되고 알았는데 약방 언니의 손은 무척 떨려 있었어. 자다깨서 인지 목소리도 갈라져 있었고, 나만큼 안좋아 보였어. "이제 괜찮아요.. 내려 주세요.." 숨이 좀 트이니까 어지러웠어. 약방 언니는 날 다시 내려놓고 상처를 살폈어. "갑자기 왜 그랬던 거예요? 고통이 있었어요?" "네..." "전에도 이런 적 있어요?" "아뇨..." 대답만 겨우 내뱉었어. 약방 언니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이불을 가까이 가져와서 완전히 내 옆에 누웠어. "자는 거 보고 자야겠어요. 졸리니까 얼른 자요." 이상한 곳에서 사람 울컥하게 하는 언니였어. 나는 다시 자려고 눈을 감는데, 아까 꿈이 생각났어. "악몽을 꿨어요. 제가 잃은 소중한 사람이 절 원망하는 꿈.." 배동은 내가 원망스럽진 않았을까. 스님은 배동이 좋은 곳으로 갔다 했는데 난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왜 아직도 제자리인걸까. "어제도 그랬어요?" "네.. 근데 이렇게 아프진 않았는데..." 이건 벌일까, 죄책감일까. 어쩌면 평생 안고 가야하는 내 죄일지도 모르겠다고. 내 안의 배동은 여전히 나아가지 못하고 내 안에 머물러서 나에게 벌을 주고 있는 거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하다 다시 잠이 들었어.
이름없음 2023/03/28 21:27:55 ID : Dy2LbCi4Lhs
오늘은 여기까지. 전생을 쓰다보니 느낀건데, 굉장히 긴 성장물이 될 거 같다.. 난 로맨스 쓰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전생의 내 과거가 많이 암울해서 길어지고 있네. 그만큼 상처가 깊고 아팠다는 거겠지. 응, 맞아. 오늘도 쓰다보니 과몰입해서 여기서 멈췄어. 하하하.. 란교에게도 꽃이 필 날이 올거야. 그게 겨울을 딛고 일어나는 힘든 이야기가 되겠지만, 언제나 그랬듯 봄을 맞이할거야. 추천 눌러준 거기 당신, 고마워. 다들 안녕, 오늘도 잘 자.
이름없음 2023/03/29 11:40:48 ID : Dy2LbCi4Lhs
"아, 벌써 일어났어요?" 내가 일어났을 때 약방 언니는 이미 옷까지 다 갈아입은 상태였어. "설 언니도 빨리 일어났네요." 어제 대화하며 나는 약방 언니를 설 언니로 부르기로 했어. 나도 일어나서 이불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어. "나야 산에 약초 캐러 가야하니까요. 늦게가면 없어서요." 설 언니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어. 그러며 내 상태를 살펴봤어. "음, 어제보다 상태는 확실히 나아진 거 같네요." "그래요..." "원래 아침 잠이 없나요? 더 자요, 아직 해도 안떴어요." 나는 아직 깜깜한 창 너머를 봤어. "잠이 안와요. 그냥 일어나서 씻으려고요." 설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를 돌아봤어. 뭐랄까, 먹잇감을 찾은 눈빛이었어. "그럼 얼른 준비해요. 같이 산이나 타요." "네... 네?" "운동좀 해요. 어제보니 뼈랑 살밖에 없던데." 그래도 기생이라고 춤 배운 게 있는데 뼈랑 살 밖에 없다는 말은 날 도발하기 위해 했던 말 같아.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 붓는 격이었는데, 나는 아주 잘 탔어. "...일각만 기다려요."
이름없음 2023/03/29 18:42:51 ID : Dy2LbCi4Lhs
준비를 마치고 설 언니를 따라 산에 올랐어. 산 속은 너무 어둡고, 높이가 있어서 잘못 하다간 발목이 삐끗할 수도 있었어. 그래서 설 언니가 긴 나무 막대기를 주워서 그걸 잡으며 같이 올라갔어. 산을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나는 지쳤고, 결국 큰 바위에 앉아 설 언니를 기다리기로 했어. 그때쯤 해가 떴는데 설 언니는 저 멀리서 아주 날아 다녔어. 약초를 다 캐고 다시 내려올 때도 힘들었어. 이 날은 하루종일 온 몸에 근육통이 생긴 날이야. 안그래도 빈약한 몸인데 근육통까지 만들어버려서 책임지라니까 통증 완화에 좋다는 풀만 줬어. 그렇게 설 언니와 옥신각신하다 스님이 나오셨고 아침을 먹었어. 아침을 다 먹은 후에 설 언니를 따라 약방에 들렸어. 잠시만 기다려보라며 안에서 무언가를 하더니 작은 주머니를 하나 줬어. "수면에 도움을 주는 약이에요. 조제법도 같이 들어 있으니까 잘 챙겨요." 값은 스님에게 받고 스님은 수완이 좋다고 호쾌하게 웃으셨어. 나는 그 주머니를 한참동안 뚫어져라 쳐다봤어. "언니는 제가 불쌍하신가요?"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내 성격은 정말 은혜도 모르는 원수 같았어. 그때의 나를 조금 변명해보자면 그 질문은 왜 이렇게까지 나를 돕느냐,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이런 의미였어. 근데 그게 좀, 많이 직설적으로 나간거야. "네, 불쌍하죠. 란교가 과거의 나를 너무 닮았는데 어떻게 안 불쌍하게 생각해요?"
이름없음 2023/03/29 18:47:52 ID : Dy2LbCi4Lhs
나는 이번에는 설 언니를 보며 멍해졌어.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 입만 뻐끗거렸어. 설 언니는 내 머리를 헝크러뜨리더니 댕기를 풀고 머리를 다시 묶어줬어. "그러니까 나처럼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약학을 배우는 거니까요." "...고마워요." "오늘은 진심이네요?" "네... 진심이에요." 설 언니는 아주 크게 웃었어. 내 등을 아프지 않게 때리고선 나와 스님을 배웅해주며 이렇게 말했어. "잘 가, 란교야. 여기서는 보지 말고, 다른 곳에선 아는 척 할게!" 나는 마을을 떠나다 궁금해져서 스님에게 물었어. "왜 여기선 보지 말자는 거예요?" "아파서 오지 말라는 얘기 같구나." 스님은 작게 미소 지으셨고, 나는 그제야 그 뜻을 이해했어. 나는 다시 새로운 곳을 향해 걸어갔어. 무서움도 가득하고, 여전히 불안하지만 분명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었어.
이름없음 2023/03/29 19:24:08 ID : Dy2LbCi4Lhs
"스님, 제 부모님에 대해 알고 계신 거 같은데 제 이름 뜻이 뭔지도 아시나요?" 날은 좀 더웠고, 얼마 안 걸은 나는 궁금한 걸 하나씩 풀기로 했어. 가장 큰 궁금한 건 내 이름의 한자였고. "음, 사실 나도 네 어머니가 너를 낳았다는 소식만 들었단다. 태명은 나비였단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꽃과 나비야. 예쁘다는 이유로 쉽게 착취되고,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가장 연약한 것. 그래서 내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어. "왜 나비인지 궁금하지 않니?" "별로요." 심통스럽게 발에 굴러 다니는 돌이나 나뭇잎을 걷어찼어. "네 어미의 태명이 蘭(난)화 였단다." "네에." "가장 흔하고 어디든 있기에 그곳이 다 그 뿐이라 하더구나." "네...?" 스님은 가끔 말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었어. 내 나이에 맞게 해석해서 말해주면 될 걸 꼭 이해 안되게 말하셨지. 그때도 한번에 이해하지 못해서 뚱해 있다가 지나가는 나비를 보았어. "곧 여름이구나." "나비... 네요..." "보렴, 너와 내가 생각하는 게 다르지?" "어, 네에.." "단양도 그러했단다. 나비를 보면 여름이 아니라 널 떠올렸을 거란다."
이름없음 2023/03/29 19:29:51 ID : Dy2LbCi4Lhs
만약 스님이 내 태명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도 스님처럼 곧 여름이겠구나, 했을거야. 그보다 난 나비를 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냥 신기하다 하고 말았을 거야. "네 외할머니께서도 그런 의미로 난초와 꽃을 붙여 난화라 했단다. 꽃과 풀을 볼 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말이야." 엄마란 어떤 존재일까? 나를 열 달동안 품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심정으로 내 이름을 짓고, 어떤 마음으로 나를 바라봤을까. 나를 낳아도 기생집에서 키워야 했고, 의기이기에 돌봐줄 수 없던 그 심정은 어땠을까. 나는 그때까지도 엄마나 가족, 사랑에 대해서는 유난히 어려웠어. 나에게 가장 큰 난제였지. "엄마 태명은 난제로 하지." "음?" "저한테는 엄마가 너무 어려워요." "...네 어미는 경주 사람이었단다."
이름없음 2023/03/29 20:20:08 ID : Dy2LbCi4Lhs
갑자기 엄마 과거를 들려주시려 하길래 나는 고개를 저었어. "엄마 과거는 아직 알고 싶지 않아요." 스님은 목에 두른 염주를 만지며 어색하게 웃으셨어. "너라면 그렇게 말할 거 같아서 얘기하지 않았단다. 아직은 받아들일 게 많으니 버거운 거겠지. 음, 어쩌다 여기로 왔지?" "제 이름 뜻이요." 스님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시더니 나뭇가지를 찾아 흙 위에다 어려운 한자를 쓰기 시작했어. "蘭交(난교)." 나는 뜻도 모른 채 난교라는 단어만 듣고 이마를 찌푸렸어. "내 생각에는 아마... 이런, 끝까지 들어보려구나." "네.." 나는 입술까지 삐죽 내밀고 부루퉁한 얼굴이었어. "난초를 본 적 있니?" "기생집에 있을 때, 몇 번요." "언젠가 한 번 이런 말을 했단다. 자기는 난초가 너무 싫다고." 그 말에 란(난)이라는 한자는 이해가 갔어. 아, 난초 난을 란으로 쓴거구나. "제 태명이 난화였는데 난초를 싫어한다니, 네 외할머니에게 매를 많이 맞은 모양이더구나." 그리고 알게됐지. 이 성질과 성격이 유전 같다고.. "그래서 네 어미는 태명도 나비라 짓고 마치 한 쌍처럼 여겨주길 바랐단다." 꽃과 나비는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잖아. 그만큼 그 이름을 가진 누군가를 많이 떠올릴 수 있고. "단양은 란교 네가 어미와 딸로서 잘 지낼 수 있길 바란 거 아닐까 싶구나." 교는 사귈 교였어.
이름없음 2023/03/29 20:28:52 ID : Dy2LbCi4Lhs
심장이 저릿했어.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불쾌했지. 입술을 꽉 다물고 스님이 쓴 한자 뜻을 발로 벅벅 지워댔어. '너도 많이 사랑했단다.' 라고 말씀하셨던 그 사랑이, 내게 너무 버겁게 느껴졌어. "그냥 그렇게만 알아 두렴." 스님은 다시 출발하자며 나뭇가지를 버리시고 다시 앞장서서 걸으셨어. 엄마는 내가 자기와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란교라는 이름을 지어줬겠지만, 정작 엄마는 나와 친해질 시간도 갖지 못했어. 내가 엄마 유품에서 얻은 거라고는 내 어릴 적 그림 하나가 전부였어. 전부 엄마의 단면이고 작은 일부분에 불과했지. "제 이름을 바꿔야겠어요. 난제로. 전부 불투명하고 어렵고..." "음? 허허허! 그러지는 말거라." 나는 아까 스님이 그렸던 한자를 떠올렸어. 단순하면서 복잡한 한자. 내 이름도 단순하면서 그 뜻을 파고들면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했어. "난해로 바꿔야 하나..." 물론 농담조로 한 혼잣말인데 스님은 뭐가 그리 재밌으셨는지 계속 웃으셨어.. "처음보다 밝아졌구나."
이름없음 2023/03/29 21:10:32 ID : Dy2LbCi4Lhs
스님을 따라다니며 생각했지만, 스님은 나에게 있어서 햇살같은 분이었어. 말 없이 내가 억지로 짊어진 짐을 내려놓을 수 있길 기다리는 사람. 배려가 가득하고 은연중에는 보이지 않는 햇살같은 따뜻한 사람이야. 그래서 난 스님을 내심 좋아하고 있었어. "스님이 제 의부 해주면 안되요?" "응..?" "저는 기생하기 싫어요. 차라리 여승 할래요." "란교야," "배동도 없고 할 줄 아는 건 기예뿐이에요. 자립해서 먹고 살 능력이 없어요." 내 입으로 한심한 소리를 직접 하는 건 처음이라 더 비참했지. 아, 난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를 제대로 실감한거야. 앞서가던 스님이 뚝 멈추셨어. 나도 따라 멈췄는데, 스님은 또 엄한 얼굴이셨지. "아니이..." 스님과 그새 좀 친해졌다고 느낀 나는 실언을 한 걸 뒤늦게 깨달았어. "농이에요..." 그래서 스님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무마하려고 했어. 스님은 한숨을 폭 내쉬더니 나와 키를 맞춰 쭈그려 앉으셨어. "란교야, 네 어미는 경주에서 알아주는 기생이었단다. 하지만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곧 태어날 네 세상은 좀 더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의기가 되셨단다." 그건 나에게 억지였고, 모순이었고, 궤변이었어. "엄마가 죽었는데 제 세상이 어떻게 평화로워요?" 그래서 난 또 이런 돌직구를 던졌어..
이름없음 2023/03/29 21:22:16 ID : Dy2LbCi4Lhs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세상이 너무 미웠고 원망스러웠어. 세상. 내 입으로 이미 말한 내 세상은 엄마였어. 난 엄마를 그렇게 보고 있던거야. 스님도 그걸 알아차리셨는지 엄마 얘기는 더 꺼내지 않았어. "차차 생각하자꾸나." 그러며 스님은 다시 걷기 시작했고 나도 따라 조용히 걸었어. 낮이 유난히 길고 괜스레 얼굴에 열이 올랐어. 화가 난건지, 부끄러운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 일수도. 그래서 얼굴에 열이 올랐던 걸지도 모르겠어. 나는 손, 발이 차가운 편이라 볼을 만지며 열을 식혔어. 해가 완전히 하늘을 보고 살짝 기울 때까지 스님과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걸었어. 그렇게 걸으니까 어느새 배가 고파졌고, 찐 옥수수를 먹고, 다시 걸었어. 나는 침묵이 어색하고 너무 길어서 스님에게 먼저 말을 걸었어. "그럼 제 진짜 아빠는 뭐하던 분이셨어요?" 사실 아무 말이나 막 던진 거 같아. "음..." 스님은 한참을 뜸들이셨어. "투사였나요?"
이름없음 2023/03/29 21:54:21 ID : Dy2LbCi4Lhs
스님은 또 염주를 만지작 거리셨어. "제 일에는 날카로운 게 네 아비를 닮았구나." 그리고 말을 돌리셨지. "어깨 통증은 괜찮니?" 나는 스님이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거나,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일단 스님의 장단에 맞춰주었어. "어제 악몽을 꾸고 아팠는데 설 언니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그리고 뒤늦게 떠오르는 내 지난날의 민폐들.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건 나였어. 나는 다시 숙연하게 입을 꾹 다물었어. "그래서 아까 네게 그런 환을 주었구나." 스님은 이해가 간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셨어. "우리는 아마 내일 미시쯤에 도착할 거 같구나." 생각보다 하루 빨리 도착하게 된거였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좋아했다가, 마음이 어수선해졌어. "오늘 갈 곳은 그리 큰 마을이 아니란다. 어제처럼 잠시 묵었다 떠날 곳이라, 내일 도착해서 의원에게 가보자꾸나." "스님은 절 거기까지 데려다 주고 가실거죠?" "음, 그렇게 되었구나."
이름없음 2023/04/08 21:10:41 ID : Dy2LbCi4Lhs
나는 시무룩 해져서 입술을 쭉 내밀고 말 없이 스님을 따라갔어. 그러다 비가 왔고, 스님은 내가 감기에 걸릴까봐 날 안고 마을까지 뛰어가셨어. 나는 스님을 붙잡지도 못하고 빗소리에 파묻혀 울었던 거 같아. 그때는 이미 비를 많이 맞고 추워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어머! 몸이 너무 차갑네!" 날 안아든 한 여자의 말에 다시 눈을 떴어. "얘, 덕수야-사실 이름 기억 안나서 대충 아무 이름.- 물 좀 끓여서 가져와봐!" 누군가 내 옷을 벗기고 까끌까끌한 천으로 내 몸을 닦아냈어. 안되겠다며 날 안고 불 근처에 데려가 머리부터 말리게 했어. 나는 덜덜 떨며 또 악몽을 꿨어.
이름없음 2023/04/08 21:15:34 ID : Dy2LbCi4Lhs
친일파들이 마을에 숨어서 정보를 조달하고 있었고, 그 마을에 숨어있던 투사가 왜군과 싸우는 그런 꿈이었어. 투사는 온 몸을 꽁꽁 가려서 잘 모르겠지만 남성이었고, 총이나 칼같은 무기는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적발 됐을 때 몸을 피하다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어. 스님은 그 투사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지셨고 총에 맞아 쓰러지셨어. 여전히 비가 내렸고 앞은 흐릿해서 잘 볼 수 없었지만 '나'는 높은 곳에서 일련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어. 스님의 몸에서 빠르게 흘러내리는 피는 비에 씻겨 나갔어. 뿐만 아니라 다른 백성들의 피도 바닥에 흥건했어. '나'는 누군가에게 몸이 묶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어. 그대로 뛰어내려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었는데 손에 쥔 단도는 아무 쓸모가 없었어. 꿈은 거기까지였어.
이름없음 2023/04/08 21:22:17 ID : Dy2LbCi4Lhs
눈을 뜨자마자 마주친 사람은 푸근하게 생긴 중년 여성이었어. 주인이었던 거 같은데 내가 눈을 뜬 걸 확인하고 안심하시며 물을 떠오셨어.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건 온 몸이 타들어 갈 거 같은 추위였어. 몸은 너무 뜨거운데 또 너무 추워서 계속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어. 그러나 주인은 그런 내 행동을 막고 물을 마시게 했어. 물은 적당히 미지근했고 천천히 넘어오는 물을 숨도 안쉬고 마셨어.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주인은 내가 깨서 놀란 후에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어. "네가 란교지?" 나는 뜨거운 목을 붙잡고 대답하려 했는데 목이 너무 부어서 말이 안나왔어. "말하기 힘들면 고개만 끄덕여도 돼." 사실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끄덕였어. 주인은 약한 한숨을 내쉬더니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며, 하마터면 사경을 헤맬뻔 했다고 잔소리를 쏟아내셨어. 나는 그때까지도 꿈과 현실에 혼란이 온 상태여서 주인이 뭐라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 다만 절대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고 이불은 덮지 말고 추워도 참고 물을 자주 마시라며 한바탕 이런저런 말들을 하고 나가셨어.
이름없음 2023/04/08 21:32:02 ID : Dy2LbCi4Lhs
눈이 따갑고 아픈데도 잠들 수 없었어. 다시 같은 꿈을 꿀까봐 무서워서 눈에 더 힘을 주고 빗소리를 들으며 멍때렸어. 고개를 돌리니 내 짐이 있었어. 아마 저 안에 약이 있을텐데 하며 몸을 거기까지 끌고 갔어. 자고는 싶고 악몽은 싫어서 설언니가 만들어 줬던 그 약을 먹으려 했어. 짐을 풀어 약을 꺼내 먹으려던 순간이었어. 누가 갑자기 문을 벌컥, 아주 큰 소리로 다급하게 열었어.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짜증을 내려던 참이었어. 들어온 불청객이 누구든 쉴 수 있게 하지 않느냐고. 나는 악몽 때문에 기력을 소진한 참이었어. 근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순식간에 내 몸을 잡아끄는 힘에 나는 무슨 힘이 나왔던 건지 은장도를 챙겼어. 아마 본능적으로 그랬던 거 같아. 앞으로 닥쳐올 위협을 알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 같은 거 말이야. 날 안아 든 건 주인이었어. 뭔가 이상했어. 왜 난 안겨있는 거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스님은 왜 안보이는 거지? 난 너무 지친 나머지 내게 닥쳐올 앞날을 앞에 두고서까지 무시했어. 그 결과는 지난 기생집에서와 비슷한 쑥대밭이 된 집들. 난장판으로 휩쓸려진 식기와 가구. 멀쩡한 게 하나 없었어. 그걸 보며 느린 내 사고가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어.
이름없음 2023/04/08 21:38:54 ID : Dy2LbCi4Lhs
통곡하는 사람들, 잡히는 대로 휘둘러 부수는 손, 도망치다 부서진 조각에 걸려 넘어진 아이. 내 앞에 지옥이 만들어진다면 딱 그런 거 아닐까 싶었어. "마을 안은 위험하다!" 누군가 크게 외쳤어. 너무 처절한 절규라 정신이 번쩍 들 수 밖에 없었어. 혹시 경험해본 적 있는지 모르겠지만, 위협을 느낄 때 없던 힘이 솟아나는 거 같아. 그때 내가 딱 그랬거든. 나는 날 들고 있는 주인에게 내려달라 소리쳤어. "안 된다! 위험해! 저 산까지만 올라가자, 응?" 나는 최선을 다해 몸부림쳤고 주인은 거의 울것처럼 날 말렸어. 이게 어떻게 된걸까. 꿈이 반복되고 있나? 나는 환을 먹지 않고 잠들었던 건가? 하지만 꿈보다 생생했어. 강하게 내리는 빗소리에도 잠기지 않는 비명들. 총이 발사되는 소리. 아비규환 속 여실히 느껴지는 몸의 고통. 아, 꿈이 아니구나. 절규하고, 애원하고, 낙담하는 저들과 내가 있는 현실이구나.
이름없음 2023/04/08 21:53:35 ID : Dy2LbCi4Lhs
"놔주세요." "안 된다." 주인은 완강했어. "아주머니, 제 엄마 알죠?" 현실이라 깨닫자 이상하게 모든 게 침착해졌어. "...단이를 묻는 거라면 모른단다." 단이? 그게 누구지? "하지만 단양은 알지." "아주머니도 엄마와 같은 사람이죠?" 나는 주인의 슬프고 분에 찬 눈을 바라봤어. 주인은 내 손을 자기쪽으로 가져가고 동그라미를 그렸어. 그게 무슨 신호인지는 한번에 알 수 있었어. "스님이 죽을지도 몰라요." 내 갑작스러운 말에 주인의 눈이 날카로워졌어. 날 의심하는 거 같기도 했고,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나봐. 답답해진 나는 다시 소리쳤어. "스님은 도망치지 못하셨잖아요!" 주인은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는 듯 날 바라봤고 곧 망연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셨어. "가야돼요." 다시한번 단호한 내 말에 주인은 생각에 잠긴 듯 했어. 푸근한 인상이었던 주인의 얼굴이 한 순간에 일그러졌고 무언가 깨달은 눈빛이었어. "여기서 50보만 가거라. 네 걸음으로 50보란다. 왼쪽으로 돌아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 작은 오두막이 있으니 그곳으로 피신하거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어. 한 걸음 정확하게 세면서, 온 몸이 두방망이 치는 거 같았지만 살기 위해 뛰었어.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게 자꾸 시야를 가렸어. 발은 또 맨발이라 질척한 흙을 밟으며 힘겹게 한 걸음씩 달렸어. 뾰족한 나무가지를 간신히 피해서 겨우 오두막에 도착했어. 살림살이하나 없는 남자 성인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오두막안에 들어갔어. 나무문은 오랜 풍파를 맞은 건지 낡아 삐그덕 거렸고 창문은 뚫려서 비를 막아주진 못했어. 구석에 웅크려서 다시 속으로 숫자를 셌어. 그렇게 하면 이 고통도, 내가 겪고 있는 현실도 다 잊고 어딘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만약 엄마와 함께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한 번이라도 엄마를 불렀을까? 배동을 만났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번엔 정말 잘 해줄 수 있는데. 스님을 만나던 때로 돌아간다면 날 절에 데려가달라 했겠지. 편지는 찢어서 내가 먹어버렸을 거야. 그러다 숨죽여 울었어. 하염없이 나오는 눈물에 고개만 떨궜어. 참아야 해, 다 살아있을거야. 그래야 해.
이름없음 2023/04/08 22:05:44 ID : Dy2LbCi4Lhs
"당장 여기를 떠나자꾸나." 비린 냄새. 물 비린내 속에 조금은 역겹게 느껴지는 선한 혈향. 끈적한 뭔가가 몸에 달라붙고, 뜨거운 체온이 나를 감쌌어. 내가 익히 아는 스님의 몸에선 내가 알고 있던 무엇도 없었어. 은은하게 느껴지던 향냄새.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했던 구김없는 옷. 차분한 숨결, 그 무엇도. "...아주, 머니는, 요?" 말을 하기 쉽지 않았어. 대답해주는 스님의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졌어. 나를 구하려다... 거기까지 말하신 스님은 무언가 참는 듯 몸이 굳으셨어.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어. 나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 죽었다. 스님이 아는, 어쩌면 투사일 그 사람이 죽었다. 죄 없는 백성들이 죽었고, 한 마을이 풍비박산 났다. 스님은 그 이후 말 없이 날 꽉 안고 뛰셨어. 혹시나 전처럼 사찰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했지만 그런 요행은 없었어. "왜, 하필 저희에요?" 스님은 아무 말이 없으셨지만 내 머리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어. "왜 하필, 우리나라 예,요?" 왜 배동이 스승님이 엄마가 마을 사람들이... 말은 더 나오지 않았어. 시간속에 흐르는 건 내리는 빗물 뿐이었고, 내 기침소리는 빗소리에 묻혔지. 그날 생각했어. 신이 있다면 절대 내 편이 아닐거라고. 신이 있다면 반드시 찢어죽이리라고. 신이 존재한다면... 제발 이 나라좀 살려달라고.
이름없음 2023/04/08 22:09:57 ID : Dy2LbCi4Lhs
오랜만에 돌아왔어. 이유는 많지만 여기에 설명할 수 없어 한탄스럽다.. 갑자기 내 필력이 늘어난 거 같다면 그 사이 책을 많이 읽어서 그래. 안쓰던 상황묘사를 더 자세하게 하려고 노력하며 글을 썼다는 뭐 대충 그런이야기..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정도. 벌써 벚꽃이 다 졌더라고. 날이 따뜻해지면서 굳었던 몸도 활기를 되찾는 중이야. 다들 각자의 즐거운 주말 보내길 바라. 갑자기 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또 올게, 안녕.
이름없음 2023/04/09 11:36:41 ID : k4Gq6kqY5Pf
열병. 나는 한참을 앓았어. 목적지에 도착하고서도 제대로 눈을 뜨고 있던 적이 없었어. 기억은 이지러지고 뒤죽박죽이었어. 비는 어느새 그친 거 같았고 스님과 나는 엉망진창이었지. 간간히 들리는 목소리는 날 안심시키지 못했어. 나는 악몽과 현실을 오가야 했고, 많은 걸 보고 그걸 또 잊었어. 자기방어같은 거였나봐. "어디까지 기억하니?" 화려한 옷차림과 비싼 장신구들로 틀어올린 머리. 익숙한 천장, 낯선 목소리. "백유 언니..."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이었어. 제 이름은 백유라 하였고, 이 기생집의 나와 비슷한 또래였어. 나보다 나이는 5-6살 많았고 이곳에서 꽤나 인기있는 기생언니였어. "넌 앞으로 내 밑에서 일한거란다." 백유언니의 목소리는 굉장히 차분하고 품위있었어. 옷도 흐트러짐 없었고, 손끝까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자기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었지. "기생으로서요?" "왜, 싫니?" "네. 싫어요." 지긋지긋했어. 내가 기생이 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열은 가라앉았고 몸은 움직이는데 약간 불편할 뿐 평소랑 똑같았어. 다만 미미한 두통과 이마에 열꽃 같은게 나 가라앉지 않았어. "죽다 살아났으면서 불만이 많구나." 백유 언니의 목소리는 싸늘했어. 하지만 알 게 뭐야. 이미 여러번 죽을 뻔해서 더이상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어. 방안은 촛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는데,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어.
이름없음 2023/04/09 11:47:07 ID : k4Gq6kqY5Pf
"단이언니가 이 꼴을 본다면 퍽 좋아하겠구나." 또 단이. 엄마를 말하는 거겠지. 근데 왜 단이지? "우리 엄마 이름은 단양이에요." "이양단이란다." 단양은 단이 언니의 생일이고. 뒤이어진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어. 다 거짓이었구나. 내 이름이 란교이긴 한가? 배동은 알고 있었을까? 스승님은, 왜 엄마에 대해 언질하나 없으셨지? "혼란스러운 건 안다." 당신이 뭘 아냐며 째려보려 했지만 힘이 없었어. 한꺼번에 들이닥친 현실을 삼키는 것도 버거웠어. 머리가 지끈지끈 울렸고 나는 다시 눈을 감았어. 더 쉬라고 짧게 말한 백유언니는 조용히 나갔어. 발걸음 소리 하나도 일정하고 차분했어. 백유 언니가 나가고 밀려오는 생각에 잠겼어. 이제 나는 다시 기생으로서 살아야 하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스님은 당연히 떠나셨겠지. 그 주인은 살아있을까. 여기는 안전한 게 맞을까. 심장이 미칠듯이 뛰었지만 애써 무시했어.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미칠 거 같았어.
이름없음 2023/04/09 12:00:21 ID : k4Gq6kqY5Pf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어. 꿈을 꾸긴 한건지 머리가 멍했어. 어지러움을 호소하다 한켠에 놓아진 옷을 보고 갈아입었어. 머리카락은 부스스했지만 잘 정돈 되어 있었고 몸에서도 진흙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어. 작은 상에 올려진 짐은 그대로 였는데 종이가 하나 있었어. 열어보니 한글로 잘 지내라는 짧은 문장이 있었어. 이게 현실이구나. 담담하게 받아들인 나는 종이를 찢어서 초에 태웠어. 초는 종이를 먹어 더 활활 타올랐지. 나도 저렇게 죽었어야 했던 게 아닐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걸까. 엄마는 사실 무녀였나? 난 왜 그런 예지몽같은 이상한 꿈을 꾼걸까. 그 꿈을 꾼 이후로 꿈을 꾸지 않는 거 같아서 더 이상했어. 환과 제조법이 적혀있는 종이까지 확인을 마친 나는 세수라도 하려고 밖으로 나갔어. 복도는 넓고 싸늘했어. 아직 새벽이라 어두웠고 조용했어. 기생들은 아마 잠들었을 시간이라 나는 조용히 주변을 돌아다녔어. 내가 있던 기생집과는 규모가 완전히 달랐어. 미로처럼 넓고 복잡한 곳을 돌아다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을 발견했어. 이미 해가 뜨기 시작했고 나는 우물을 찾아 물을 퍼 세수를 했어. 바닥은 고운 흙으로 평평하게 잘 다져져 있었어. 주변에 심어진 나무와 작지만 잘 다듬어진 화단이 있었어. 나비가 꽃 위에 앉으며 날아다니는 걸 봤어. 여름이라고, 네 태명이 나비라고 했던 스님의 목소리가 머리를 맴돌았어. 그것도 거짓말이었을까.
이름없음 2023/04/09 12:07:30 ID : k4Gq6kqY5Pf
"여기는 단이언니가 가꾼 곳이야." 익숙한 목소리. 불친절하지만 또박또박한 발음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어. "난 엄마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어르신께서 널 나에게 보낸 이유이기도 하지." 나는 여전히 날아다니는 흰 나비를 바라봤어. 주위에는 회색나비, 노란나비 여러 나비가 날아다녔지. "단이 언니는 내 스승이었거든."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 내 옆으로 다가온 백유 언니의 신발은 예쁘고 붉은 꽃신이었어. 꼿꼿이 편 어깨와 전에 봤을 때보다 편안하게 내린 머리는 새벽의 배경과 잘 어울렸어. 백유 언니의 눈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어. "네 태명은 나비였단다." 아, 하나는 거짓이 아니구나. 감흥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백유 언니는 더 슬퍼하는 얼굴로 날 봤어. "넌 단이 언니와 정말 많이 닮았어." "알아요." "언니는 널 가지고 사흘 밤낮을 우셨어." 왜인지는 짐작이 갔어. 원치않는 임신이었겠지. 나는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꽃 위에서 날개짓하는 노란 나비를 봤어. "행복한데 불안하다고 하더라." 나비가 다시 날았어.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약하게 불었어. 사아아- 나뭇가지가 조용히 소리를 냈어.
이름없음 2023/04/09 12:22:08 ID : k4Gq6kqY5Pf
"서란교." 그게 내 본명이었어. 나는 백유 언니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어. 억누르는 것 같았지만 분노와 슬픔, 애증같은 것들이 보였어. 아, 배동아. 역시 난 태어난 게 죄인가봐. 그래서 신이 나에게 벌을 내리는 건가봐. 그래도 나는 네 몫까지 살아야 하는데. 아니, 죽어서 널 만나고 엄마를 만나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 왜 나에게 왔어? 후회하진 않았어? 내가 당신들을 죽였어? "네 아비와 단이 언니는 모두 독립운동가셨어. 이제는 고인이 되신 두분을 위해 내가 널 지킬거야." "왜요?" 뜬금없는 말. 순수한 물음. 거기서 뭘 본건지 백유 언니의 눈이 반짝였어. 흰자가 빨개졌지만 꾹 참는 두 손을 보며 나는 눈을 내리고 땅을 봤어. 내가 밟고 있는 이 땅도 누군가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곳 아닐까. "널 데려오라 서신을 붙인 사람이 나거든." "알아요." 나는 모든 게 심드렁했어. 뻔한 말, 뻔한 상황. "반항하거나 도망갈 생각이면 접거라. 그럼 난 더이상 너를 지키지 못해." 날 지키려는 이유는 엄마와 무언가 오갔거나, 정이 남아서겠지. 스승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나는, 엄마가 백유 언니에게 얼마나 잘해줬으면 나에게 이럴까 따위의 생각을 했어. "도망갈 곳은 없어요. 반항할 힘이, 글쎄요. 내게 그럴 자격이나 있나요?"
이름없음 2023/04/09 12:32:46 ID : k4Gq6kqY5Pf
"네 이름은 여기서도 서란교야.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다른 이름을 써도 돼." 사연없는 이 없고, 그 사연에 대해 깊이 묻지 않는 곳. 내가 아는 그런 곳은 기생집 뿐이었어. "난 지난 평생 이름없이 자랐어요. 그곳 기생 언니들은 날 언제나 소화라고 불렀어요." "신애는?" 신애? 그건 또 누구란 말인가. 그런 눈빛으로 백유 언니를 보니 기가 찬다는 듯 웃었어. 백유 언니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날 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침착한 가면을 썼어. "널 돌본 아이 말이다." 신애. 그게 배동의 이름이었어. 아, 정말 나는 무엇도 몰랐구나 백유 언니가 왜 웃었는지 알 것 같았어. 나도 웃고 싶어졌지만 간신히 올린 입꼬리는 엉망이었어. 백유 언니는 웃지 말라고 꾸짖으며 한숨을 내쉬었어. "가르칠 게 많구나." 백유 언니도 이정도 일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어. 연락이 끊겼던 걸까? 그래서 내가 그곳에서 얼마나 고립된 생활을 했는지 모르는 걸까? 나는 배동 이외에는 누구도 사귀지 않았고, 수업을 받고 방에서 생활하는 게 전부였어. "신애가 너에게 알린 게 하나도 없을 줄은 몰랐어." 낭패어린 눈을 보고 알았지. 배동은 나에게 처음부터 무엇도 알려줄 생각이 없었던 거구나. 나는 배동의 곁에서 그저 행복하고 그나이대에 맞는 시간을 보냈어. 배동은 어쩌면 나의 유년을 지켜주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던 건 혹여 어린 나이에 충격을 받을 게 걱정되어 나중에, 나중에 하다 그런 일이 벌어진거고. 추측을 마친 나는 백유 언니를 째려봤어. "배동은 잘못 없어요. 내가 알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몰라도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이름없음 2023/04/09 12:38:35 ID : k4Gq6kqY5Pf
배동이라는 말에 백유 언니는 다시 기막힌 웃음을 냈어. 전에 보았던 것보다 좀 더 사람다웠지만 그것대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 "배동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네 몸종이나 다름 없다는 소리야. 왜, 그애가 널 아가씨라고 부르기라도 했니?"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여전히 백유 언니를 따갑게 쳐다봤어. "기막히네. 그 여우같은 게 너에게 다 숨기고 접근했다는 말이지? 너도 참 어리고 어리석하구나. 잘도 뻔뻔하게 속였어.." 배동에 대해 막말하는 그사람이 싫었어. 당신이 뭘 안다고. 그 애는 내 어린 시절의 전부였는데. 당신이 뭔데 그 애를 멋대로 평가하느냐고. 하지만 사람은 참 간사해서, 내 주변은 사실 모두 거짓투성이라 생각할 때 어쩌면 배동도 나를 속이고 접근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어. 유난히 숨기는 게 많고 묵묵했던 아이. 그럼에도 나를 위해 살고, 나를 위해 죽은 아이. "절 살리다 죽은 친구에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 애는 원래 거기서 죽었어야 했어." 난 더이상 참지 않고 백유 언니에게 다가갔어. 뺨을 때리기 위해 높이 든 손은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큰 백유 언니의 손에 막혔지.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 널 구한 이들은 모두 단이 언니에게 은혜를 입은거야. 넌 신애가 아니라, 단이 언니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백유 언니는 점점 흥분하듯 언성이 높아졌어. 하지만 절대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 나는 그런 백유 언니의 태도를 보고 소리지르거나 화낼 수 없었어. 나만큼 백유 언니도 계속해서 참고 있었으니까. "엄마는 나에게 해준 게 없어요. 그런데 내가 왜 감사해야 해요?" "여기에 널 살려서 데려오는 일이 쉬운 줄 알았나 보구나. 단이 언니는 어떻게든 그곳에서 널 빼낼려 했어. 자신을 바쳐서라도!" 결국 소리지른 언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어.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 궤변이었어. 나는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소리낸 적이 없어. 차라리 현실을 받아들이고 참수를 기다리는 사형수면 모를까.
이름없음 2023/04/09 13:32:27 ID : k4Gq6kqY5Pf
언쟁이 끊이질 않으니 나도 백유 언니도 지쳤어. 백유 언니는 먼저 돌아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혼자 남은 난 아까 본 나비를 손안에 가두고 짓눌렀어. 손에 하얀 가루가 묻고 나비의 몸통은 찌그러지고 날개는 찢겨 나갔어. 나도 이렇게 되어야 했나. 헛숨을 들이키며 자기혐오로 뒤덮인 웃음을 내뱉었어. 손을 털어내도 남아있는 가루가 꼭 지울 수 없는 과거 같아서, 나는 다시 우물이 있는 곳으로 가 손을 벅벅 씻었어.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어. 안은 여전히 미로여서 방까지 가는데 한참을 헤메다 지쳐 쓰러지듯 누웠어. "신애야." 낯설었어. 그건 내가 아는 배동이 아니니까. "배동아." 답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나는 계속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어. 이양단, 이단양, 서란교... "식사하거라." 시간이 얼마나 흐른건지 벌써 중반시간이었나봐. 배고픔은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내가보기에도 너무 마른 몸에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었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유 언니의 얼굴에서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어. 원망이나 분노나 뭐 그런것들. 나도 별 생각없이 백유 언니를 따라 걸었어. 미로같은 곳을 제집처럼 자연스레 걷는 이를 보며 충동적으로 물었어. "언니 어머니는 이곳에 계시나요?" 백유 언니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날 돌아봤어. "이곳의 누주는 소향 언니야. 쌍나비 노리개를 착용하고 다니니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거야. 그 다음 행수기생은 나와 유림이. 유림이는 명기이니 곁에서 보고 배울 게 많을거야. 한 쌍의 비취 가락지를 끼고 다녀. 눈과 입술 옆에 점이 있어."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안내를 해주었지만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어. 백유 언니는 고저없는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 다시 어느 방으로 들어갔어. 원래는 접대를 하는 곳 같았지만 수십, 적어도 20명은 넘는 기생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끼니를 때우고 있었어.
이름없음 2023/04/09 13:48:11 ID : k4Gq6kqY5Pf
"어, 백유 언니다!" "어머, 언니 왜 이제 오셔요." "마저 먹거라." 나긋하고 친절한 말투였어. 백유 언니를 찾는 수십명의 기생들이 그 한 마디에 다시 각자 식사를 하기 시작했어. "나와 유림이는 25명의 기생들을 돌보고 있어 너를 포함해서 난 26명이란다.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이니 오늘은 다같이 모여 식사를 하기로 했어. 네 자리는 저쪽." 백유 언니가 가리킨 곳은 방의 중앙이지만 벽쪽에 가까운 자리, 상석같은 곳이었어. "저기는 백유 언니 자리 아닌가요?" 나는 많은 사람들을 의식하고 조용히 말했어. "나는 이미 내 방에서 식사를 끝냈어. 얼굴도 익혀야 하니 저 곳에 앉아." 명령이었지만 부드러운 말에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가 앉았어. 그리고 곧 밀물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혼이 한 번 나갔어. 어디서 왔냐고, 이름은 뭐고, 잘 하는 게 뭐냐고, 백유 언니랑 아는 사이냐 부터해서 끊임없는 질문에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더라. 대충 대답해주고 체하기 직전에 밥을 다 먹은 나는 몇 명의 이름을 가진 기생들과 더 대화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와 쉴 수 있었어. 그런 줄 알았어. "어, 언니가 왜 여기 계세요?" 다름 아닌 백유 언니가 내 동숙생이었지. 언니는 뭘 묻냐며 어서 앉으라는 듯 눈짓했어. "잘 알고 있겠지만, 입단속을 철저히 하거라." 자세히 방을 보니 일개 기생이 머물기에는 방이 너무나 좋았지. 애초에 그 방은 백유 언니의 방이었어. "내 입은 내가 알아서 잘 단속해요. 신경쓰지 마세요." "불필요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말고, 계속 캐묻는다면 무조건 모른다 해야 한다." 누가 나 따위에게 관심을 갖는다고.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평스러운 얼굴을 했지. "얼굴 펴. 겨우 며칠 평민 노릇 해봤다고 평민이라도 되는 줄 아니? 약점을 드러내지 말거라. 네 사소한 몸짓, 말투가 여기서는 트집잡기 좋은 먹잇감이 된다." 가르침의 시작이었어. 배동과 스승님이 무척 보고 싶은, 고난의 시간이었어.
이름없음 2023/04/09 13:52:07 ID : k4Gq6kqY5Pf
다음부터는 한 4년? 5년쯤 건너뛰고 이야기를 시작할게. 믿기지 않지만 이제야 기가 끝난 거 같아.. 아직 승전결 다 남아 있으니까 천천히 봐줬으면 좋겠어.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좀 풀렸지만 아직도 나, 란교에 대한 건 꽤 남아있네. 앞으로도 천천히 풀어볼게. 오늘 와서 이야기를 풀 수 있어 즐거웠어. 안녕.
이름없음 2023/04/13 16:10:36 ID : Dy2LbCi4Lhs
"4년만이구나." 시간은 늘 똑같이 흐르고, 네번째인지 다섯번째인지의 봄이왔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배동과 내가 만난 첫 해 봄에 우리는 뭘 하고 있었더라? 매화꽃을 꺾어 손질한 내 머리카락에 꽂아줬었던가. 처음 본 꽃을 자수에 새기고 댕기를 만들어 서로에게 선물해줬던가. 진달래의 꿀을 빨아먹고 꽃잎으로 전을 해먹었던가. 망각의 힘이란 어찌나 대단한지, 배동이 없는 시간은 괴로웠고 힘들어서 그때의 소중한 추억을 흐리게 하는데는 충분했어. "이제 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백유 언니가 봤다면 꾸중을 하고도 남을 차가운 목소리였어. 그 사이 내 목소리는 많이 성숙해졌고, 아직도 명기인 유림이 언니가 칭찬할 만큼 예쁘게 자랐어. 엄마가 이 모습을 본다면 뭐라 할까? 의미없는 질문이었어. "잘 지내셨나요." 그것도 의미없는 질문이었어. 겉치레에 불과한 안부였지. "란교 네가 어여삐 자랄 동안 못 찾을만큼 바쁘게 지내긴 했단다." "저는 이 얼굴에 불에 달군 부지깽이를 댈 뻔 했었죠." 나는 사실 내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어. 크면서 엄마를 닮아갔고, 그 이유로 늘 얼굴을 숨기고 살아야했어. 차라리 지울 수 없는 흉터라도 남기면. "아직도 항간에는 제 어미가 살아있는 줄로만 아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내가 말하는 항간은 다른 이들이었어. 엄마의 얼굴을 익히 아는 것들. 그 어린 날 붙잡지 못하고 살아남은 의기의 딸. "문득 옛일을 떠올리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곤 했었는데 말이에요." "무슨 뜻이니?" "그때 스님께서 제가 주목나무에 다가가는 걸 말리지 않으셨다면." 스님의 숨소리가 커졌어. "그날 그 냇가에서 절 구하지 않으셨다면." 내 목소리는 처음과 같이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고 잔잔했어. 그러다 웃었어. 얕은 웃음이지만 사람들은 내 그 웃음을 좋아하고는 했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져서 가질 수 없는 웃음이라나. "제가 어미처럼 되는 게 싫으셨나요?" 주목나무를 씹어 먹어 죽어야 했던 양단, 단양. 백유 언니는 그동안 나와 얽힌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어. 모든 걸 알고 나서야 나는 모든 걸 잃었다는 걸 깨달았어.
이름없음 2023/04/26 13:10:30 ID : RyGrbA1vbil
대청 마루 밑은 쌀쌀하지만 햇볕이 들면 선선했어. 정교한 무늬가 세겨진 찻잔 속 물이 흔들렸어. 바람이 불어왔고 얼굴을 가린 두루마기가 힘없이 펄럭였어. 찻물을 마시자, 그 어릴 적 스님께서 주셨던 대추차가 생각났어. "어떠한 의도를 갖고 물은 건 아닙니다." "알고 있단다." 스님은 헤진 옷만큼 목소리도 많이 안좋았어. 그 사이 주름이 늘어난 얼굴을 꿈쩍하지 않으려는 게 조금은 불쌍했어. "경주 서씨 도자 현자. 그게 네 아비 이름이란다." 서도현, 낯설고 그립지도 않은 이름을 뜬금없이 내뱉을 줄은 몰랐어. 이제와서 회포를 풀고 엄마와 아빠 이름을 알아내 기쁠리 없다는 걸 스님도 잘 알고 있었어. "부끄럽지만 내 하나뿐인 자식이기도 하단다." 큰 충격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그때는 놀랐어. 엄마와 아빠는 그 어떤 사진도 그림도 남기시지 않았어. 백유 언니조차 내 아빠에 대한 정보는 몰랐어. "그토록 반대했으나, 단양을 만나 사랑을 하고 널 가졌지." 어렴풋이 떠오르는 과거에 내가 한 말들이 부끄러워졌어. "그것도 모르고 저는 의부 해달라고 조른 거였군요." 눈을 들 수 없어서 찻잔만 바라봤어. 내 앞에 친할아버지가 있는 거잖아. 나는 지난 과거를 곱씹다 다시 스님을 살펴봤어. 그때 스님 얼굴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 스님은 그런 날 보다 한숨같은 웃음을 흘리셨어. "내가 밉지 않니?"
이름없음 2023/04/26 13:18:53 ID : RyGrbA1vbil
나는 오랫동안 고민해야 했어. 밉다라, 누군가를 미워한 적이 있었나? 나보다 먼저 죽은 엄마에게도 밉다는 감정을 느낀 적 없어. 그저 궁금증과 더 이상 내게 엄마는 없다는 슬픔 정도일까. 원망은 해본 거 같은데 연기처럼 증발했어. 그때 나에게 남은 건 정말 없었던 거 같아. "스님을 진심으로 좋아했습니다." 은연 중 갖는 기대조차 없었으니까. "미워하는 건 어려워요. 그 짧은시간 동안 스님을 좋아한만큼 미워할 힘이, 그때의 내겐 없었어요." 온전치 않은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고작 원망뿐이었어. 개인이 아닌, 세상과 외부의 적에 대한 원망. 그리고 나에 대한 원망. "미워해도 날 미워하는 게 편했습니다. 죄책감도 내가 짊어지면 그만이니까요." 모두들 그걸 걱정했어. 내가 안고 가는 게 보이니까. 그게 남들 눈에는 그렇게 위태로워 보였나봐. 오죽하면 한때 백유언니가 그랬어. '너만한 독종이 복수란 감정을 가지지 않아 다행이구나.' 복수도 힘이 있어야 하는거지. 일개 기생이 무슨 힘이 있겠어? 그리고 난 복수보다 설이 언니의 말처럼 누군가 지키는 쪽을 택하고 싶었어. 그럼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아도 되니까.

레스 작성
9레스읽는 사람들이 만드는 소설new 764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시간 전
5레스로판에 등장인물 이름 고증 어떻게 해?new 364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7시간 전
399레스첫문장/도입부 적고가는 스레 10354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8
906레스소설 제목 기부하는 스레 39303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8
6레스이과와 문과의 고백법 521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8
3레스웹소설에서 좋아하는 부분 각자 얘기하고 가자 1883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7
142레스'사랑'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해보자! 9490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7
347레스마음에 드는 문장 모으는 곳 37331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7
171레스패러디 소설 창작자+독자 잡담판 17080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5
5레스과거의 흑역사 쪼가리들을 읽어보는 스레 484 Hit
창작소설 이름 : 수치사하기직전 2024.04.14
3레스소설 주제 좀 추천해줄 사람..?ㅠㅠ 489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4
1레스어른이 되고 깨달은 것은 561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3
6레스너무 특이한 이름 별론가 704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3
3레스이런 설정 흔한가?? 700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3
1레스으헤헤 학교 간다 699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2
5레스소설 여주 이름 지었는데 평가 좀 785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2
65레스외모 묘사 최대한 맛깔나게 해주라… 13723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1
2레스미국 배경 로판 머리색, 눈색 758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1
3레스릴레이 소설을 써보자! 748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11
2레스내일 봐 1049 Hit
창작소설 이름 : 이름없음 2024.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