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괴담 2018/06/10 14:44:54

#1 이름없음 2018/06/10 14:44:54

구레딕에서 '빙글빙글빙글' 이라는 제목으로 썰을 풀다가 사라졌었던 한 레더야. 내 유아기에서부터 시작된 사건이 하나 있었어.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된 최근에야 이 일이 정리됐고, 누군가에게라도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져서 다시 스레딕을 찾아오게 됐어. 길고 좀 불쾌한 이야기지만 누군가가 들어줬으면 해. 구레딕에서 괴담판에 풀었던 이야기니까 이번에도 그냥 여기에 풀게. 조악한 기억력을 기반으로 쓰는 글이라서 유년기, 학생기 시절의 경험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줘. 신상 관련된 부분은 적당히 비틀게.

#2 이름없음 2018/06/10 14:45:39

일단 이 모든 사건이 시작된 유아기 시절부터. 난 어린 시절 굉장히 겁이 많고 소심한 아이였어. 또래 친구도 잘 사귀지 못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글을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일찍 깨쳐서, 말하기보다 읽기와 쓰기가 항상 더 능숙했어. 난 사교성이 없는 외톨이였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콕 박혀 보냈지. 부모님은 당연하게도 나를 걱정하셨어.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서울 근교의 나무가 많은 소도시였고, 근처에는 산과 계곡이 있어서 내 또래의 애들은 꺄르륵거리며 미친듯이 밖에서 뛰놀곤 했었어. 난 벌레랑 아이들을 무서워해서 밖에서 잘 놀지 않았지만 말이야.

#3 이름없음 2018/06/10 14:46:03

그리고 내가 다섯 살 무렵이였던 어느 날엔가 아버지가 앞집 살던 내 동갑내기와 나를 밖으로 내몰았어. 나가서 좀 놀라는 거였지.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 남자애는 당연하다는 듯이 날 두고 초등학교 남자애들 무리에 합류했고 난 꿍시렁대면서 가지고 나온 책을 읽었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기억해. 그 당시의 나는 몽상가였고 책벌레였지. 현실보다는 책으로 더 많은 경험을 쌓았고, 아직 픽션과 현실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나이였고. 무슨 이유였던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난 혼자 앉아있던 벤치에서 내려와서 어디론가 아장아장 사라져 버렸어. 아마도 정황상 토끼풀을 뜯으러 갔던 거 같은데 잘은 모르겠다.

#4 이름없음 2018/06/10 14:51:26

저녁을 먹을 때가 되어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니 온 동네가 뒤집어졌지. 그때까지는 아직 이웃들 간의 정이라는 게 있었던 시기니까. 어른들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온 동네를 뒤졌어. 퇴근하셨던 사서분께서는 일부러 도서관에 돌아가셔서 다시 도서관을 뒤지기까지 하셨어. 행여나 내가 그 안에서 잠이라도 들었을까봐. 내 부모님들께서는 겁에 질리셨고 날 따돌리고 계곡에 놀러갔던 앞집 남자애는 호되게 혼났다고 해. 이건 지금 생각해도 좀 미안한데. 그리고 오후 여덟시가 넘어갈 무렵에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셨어. 우리 집 뒷편의 쓰레기장에서.

#5 이름없음 2018/06/10 14:57:42

쓰레기장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고물 집하장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겠다. 이사를 가면서 사람들이 가구나 물건들을 두고 간 게 쌓인 곳이야. 낡은 침대나 옷장, 인형, 페인트, 비닐 천이나 심지어 찢어진 비닐하우스에 폐차까지. 그 위에는 풀이니 넝쿨이니 하는 게 잔뜩 자라서 어쩐지 세기말스러운 분위기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 우리 동네 애들은 거기서 엄청 놀았어. 부모님들은 위험하다며 말리셨지만 뭐 그 나이 애들이 부모님 말을 듣던가? 거기에는 동네 꼬마들이 만든 아지트가 제법 많았고 개중에는 내것도 있었어. 난 친구가 없었지만 아지트는 가지고 싶어했었거든. 침대의 뼈대에 낡은 천막천을 씌운 그건 5살짜리의 솜씨답게 굉장히 조잡했지만 나 하나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사이즈였어.

#6 이름없음 2018/06/10 15:01:48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날 발견한 것도 그곳이야. 처음에는 그냥 쓰레기 더미인 줄 아셨지만, 그 안에서 뭔가가 바스락대는 소리를 듣고 안을 들여다보셨다고 해.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깜빡거리고, 늦여름의 공기는 후덥지근하고, 모기는 날아들고. 그리고 그 안의 어두운 공간에 내가 앉아 있었대. 맨바닥에, 가슴팍에는 책을 끌어안고서. 아버지는 안도하고 나를 끌어내려고 하셨어. 근데 내 상태가 좀 이상했다는 거야.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하고 온 몸이 흙투성이였대. 그리고 무엇보다 팔에 모기가 몇마리나 앉아서 피를 빨고 있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이 계속 '빙글빙글'을 중얼거리고 있더래.

#7 이름없음 2018/06/10 15:06:05

어쨌든 아버지는 날 꺼내려고 내 아지트 천장을 걷고 나에게 손을 뻗었어. 그런데 아버지의 손이 닿는 순간 내가 비명을 질렀대. "하지마"와 "오지마"의 중간쯤 되는 비명이였다나. 난 순해빠진 꼬마였고 큰 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었어. 그런 내가 실성하듯 비명을 질렀으니 아버지는 많이 놀라셨대. 초보 아빠는 울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몸부림치는 날 껴안고 집으로 뛰셨다고 해. 난 그러다가 뻗어서 잠들었고, 살펴보니 애가 어디 아픈 것 같지는 않아서 일단 집에 데려와서 재웠대. 그리고 다음 날 나한테 어디 갔었냐고 조심스레 물어보니까, 난 빵 가장자리를 오물오물 씹으면서 "졸렸어"라고 태평하게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나.

#10 이름없음 2018/06/10 15:18:44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난 계속 꿈을 꾸었어. 하얀 벽의 원통형 건물이야. 벽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수없이 꽂혀 있고, 비어 있는 천장에서는 햇살이 비쳐 들어와. 건물 내부는 밝고 차분해. 벽면을 따라서 내려가는 통로가 있어. 건물이 원통형이라고 말했지? 그러니까 통로는 커다란 나선계단 형태지. 설명하기 좀 어렵네. 화장실 휴지의 심을 생각해봐. 그런 모양의 건물이고, 내부 벽을 따라서 완만한 경사의 내리막길을 맨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연결한다고 치면 그 내리막길은 나선계단처럼 빙글빙글 돌게 되지? 그런 꼴이라고 생각하면 돼. 꿈에서 난 그 건물 안에 있고, 그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고 있어. 그리고 뒤에서는 항상 뭔가가 쫓아와.

#11 이름없음 2018/06/10 15:19:17

현생을 잠깐 챙기러 다녀올게. 저녁에 잇겠습니다.

#12 이름없음 2018/06/10 15:19:32

>>8 앗, 들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