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언제 들어도 아파트 옥상의 금속 문은 열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럽습니다. 그 묵직한 소리에는 도저히 정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장담하건대, 아무도 이 소리는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을 열자, 제 시야에는 제법 낡은 철창과 누군가 남색 물통을 엎지른 것처럼 까맣게 칠해진 밤하늘이 보였습니다. 역시 작업을 하다 머리가 막힐 때에는 밤하늘과 독대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밤하늘은, 늘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의식중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버렸습니다. 제 눈앞의 시야가 흐려져 갔습니다. 흉한 세상은 뿌옇게 볼 때 특히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그대로 밤 11시의 정서에 취한 채로 벤치에 편히 늘어지듯 앉았습니다. 여름 밤바람은 여전히 후덥지근했습니다.
네온빛 도화지를 향해 동경색 붓을 들었습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담뱃갑을 꺼내 들려던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렸습니다. 이따금 이 시간대가 되면 옥상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규칙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나이도 잘 가늠이 가지 않았지만, 10대의 여자아이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이는 적당히 숏컷을 하고 있었고, 시선이 제법 예리했습니다. 아이가 입고 있던 면티에는 과격한 글씨체로 ' Hate this city ' 라는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매번 올 때마다 아이는 담배를 한 개비씩 물고 갔습니다. 저는 그런 아이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몰라도, 괜히 구면도 아닌 사이에 이래저래 훈계하기에는 어색했으니 말입니다. 들어온 아이는 제가 있음을 곁눈으로 확인하고서 저로부터 조금 거리를 뒀습니다. 저 역시 아이를 의식하려 하지 않고, 하던 대로 담배에 불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의식해서 의식하지 않고 있는, 기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을 붙이던 중, 아이가 더듬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습니다. 주머니를 몇 번 뒤적이던 아이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이쪽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얼핏 보니 아이는 라이터를 두고온 듯 보였습니다. 저와 시선이 마주친 아이는 잠깐 인상을 찡그리나 싶었지만, 이내 평소처럼 표정을 풀었습니다. 아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저와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대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 저기, 불 좀 빌려줄래요. " " 괜찮겠어? " 저는 지금이 말할때다 싶어 담뱃갑의 뒷면을 들어 보이곤 보란 듯이 경고문구를 가리켰습니다. 경고문구에는 노골적인 삽화와 함께 청소년에 대한 경계를 나타냈습니다. 아이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을 약간 불쾌해 하는 것마저 보였습니다. " 담배피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 아이는 제게 조금 몸을 기울여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가까이하며 말했습니다. 담배 연기가 아이를 스쳐 지나가는데도, 아이는 꺼리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이런 연기에 제법 익숙한 듯 보이는 아이에게, 저는 라이터 불을 켰습니다.
불이 붙는 순간, 아이의 얼굴에 주황빛이 드리웠습니다. 피부는 약간 핏기가 어린 흰색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흰색의 피부 사이로 드물게 빨간 흉터들이 보였습니다. 옥상의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나, 평소 아파트에서 마주칠 때에는 볼 수 없었던 흉터들입니다. 상처를 바라보는 제 시선을 느꼈는지 아이는 이쪽을 노려봤습니다. " 뭘 봐요. " " 잠깐 잡생각 좀 하느라. " 금방 불을 붙이고 나자, 아이는 저로부터 두어 걸음 멀어졌습니다. 괜히 머쓱해져 버린 저는 입에 머금고 있던 연기를 무심하게 툭 뱉었습니다. 순간 저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짧은 사이에 아이의 한폭의 얼굴에서 그림을 보았습니다. 얼굴에 남겨진 흉터들이 마치 흰색 도화지 위로 그어진 붉은 러프들 같았습니다. 형태만을 갖춘, 뚜렷하지 않은 그림. 저는 그러한 러프를 사뭇 좋아했습니다.
" ... 이봐요. 이보세요. " 제가 감상에 젖어있던 와중, 조금씩 아이의 목소리가 화면처럼 페이드 인 되어갔습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습니다. " 고맙습니다. " 그런 말을 바라고 불을 빌려준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가 그리 말하니 내심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는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였습니다. 제 기분을 티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순간의 짧은 정적은 담뱃재가 사락거리며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리게 하였습니다. 아이는 그저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늘로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는지, 혹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불타기 바쁜 별님들을 지켜보는지.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10분 정도 옥상에서 머무르다 내려갔습니다.
아이가 떠나간 후에도 저는 한동안 자리를 지켰습니다. 내려가는 아이와 혹시라도 마주치게 되면 어색해질 것 같아서, 아예 아이가 내려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재떨이가 딸려있는 금속 쓰레기통에 꽁초를 던져버렸습니다. 이윽고 저는 몸을 일으켰습니다. 제가 뜸을 들였기 때문일까, 계단에서부터 방으로 들어오기까지 아이의 흔적은 볼 수 없었습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메신저에 연락이 왔습니다. 주문했던 기타가 배송에 들어갔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앞으로 며칠 정도 더 느긋하게 기다리면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다리던 녀석을 제 손으로 직접 굴려볼 생각에, 기분이 한층 개운해졌습니다. 제 손으로 방에 들어간 저는 다시 방문을 닫아버렸습니다. 방음 부스에 갇힌 채로, 작업 중이던 악보를 다시 한 번 연주해보려 합니다.
1-2. " 저기... 엄마. 더는 이런 일로 전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몇 번 얘기했잖아. " " ... " " 내가 사는 곳 말 안 해줄 거야. 찾지 않았으면 싶어. ... 아니. 아빠도 못 본 지 오래됐다니까. " 너무나 성가시다고 느껴져서 억누르던 목소리는 조금씩 신경질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저 이 전화가 얼른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하염없이 그러한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간신히 전화를 붙들고 있는 채로, 몇 분 정도 더 흐지부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 싫다. " 간신히 전화가 끊기고 저는 제 심정을 곧장 입 밖으로 토해냈습니다. 지친 몸은 그대로 침대 위로 늘어졌습니다. 역시 스팸처리를 풀지 말 걸 그랬어요. 이제 엄마와의 대화는 신에서 시작해 신으로 끝나는 대화입니다.
제가 부모에게서 독립해 살게 된 것은 이제 3년, 정확히는 3년 반째 되어가네요. 이런 표현은 비약적이지만, 저를 낳게 된 것이 불행의 시작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두 분의 계획에 저는 없었다고 합니다. 자는 척을 하며, 어렸을 때 저는 그 말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집안 분위기는 급격하게 기울었습니다. 이런 균열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엄마가 큰 병을 앓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습니다. 물을 주지 않으면 식물이 시들어가는 것처럼, 엄마는 조금씩 색이 옅어져 갔습니다. 그런 엄마를 수발드는 아빠도 점점 지쳐갔습니다. 우울함만이 가득했습니다. 집안에서 울리는 언성은 차츰 높아졌습니다. 평소에도 썩 좋지 않은 두 분의 사이는, 완전히 남극처럼 변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멀어지다 엄마는 어느 날 종교에 눈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교회를 조금 열심히 다니는구나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조금씩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이 집에 자주 드나들고, 엄마는 부쩍 무언가를 사거나 외우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병이 나아져 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는 조금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너를 원하지 않았다는 두 분의 말을 조금씩 이해해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할머니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곧바로 저를 집안에서 꺼내셨습니다. 듣기로 당신께서 제 양육을 전부 맡을 테니, 부모님은 제게 간섭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이후로 두 분의 소식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얘기하는 것을 보아하니 두 분은 따로 산지 제법 오래된 모양입니다. 이후 할머니가 저를 두고 먼저 떠나시고, 저는 지금 이렇게, 혼자 서있는 방법을 연습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혼자 서 있는 것도 지쳐버릴 때, 저는 가끔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아무도 없을법한 늦은 시간, 불현듯 올라가서는 손목 위 비올라의 현을 키는 것. 마음 내킬 때 가끔. 제 옥상을 향한 발걸음에는 그런 일정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런 제 모호한 규칙성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눈에 자주 보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항상 저보다 먼저 옥상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덕분에, 제가 옥상에 혼자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습니다. 손목을 긋기 위해 가져왔던 커터와 손수건은 항상 주머니 안 깊숙이 숨어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 지금부터 저는 자해를 할 예정이니, 잠시만 자리를 비워주실래요? ' 라는 부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오늘도 그 사람은 저보다 먼저 와있었습니다. 옥상이 저만의 공간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저는 저만의 세계를 침략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기로 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괜히 붙어있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올라왔으니 한 모금 물고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저는 주머니를 뒤적거렸습니다. " ... 아. " 라이터를 두고 온 걸까요. 꽉 차있어야 할 주머니에는 담배 한 갑만 들어있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놀라는 소리를 내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고개를 돌렸습니다. 본능적으로 제 시선을 불을 찾다 그 사람에게서 멈춰 섰습니다. 아직 말도 섞어본 적 없는 사람인데. 괜히 말을 걸어보려 하자,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 ... 저기. 불 좀 빌려줄래요. "
제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담뱃갑의 뒷면을 제게 보였습니다. 삽화에는 잔인한 수술장면과 함께 자조적인 물음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삽화를 보고서 조금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지만, 지금의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상태였습니다. 어쩌면, 아직 망가질 몸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묘한 위안마저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정작 본인은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 경고를 하는 그에게 건성으로 맞받아치고, 저는 서로의 거리를 좁혔습니다. 한 손으로는 불지도 않는 바람을 막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가 피우는 담배 연기는 제 것보다 조금 더 독했습니다. 숨과 연기가 맞바꿔질 때, 가슴 한구석이 탁해졌습니다. 지금 피우는 담배가 익숙해지면 저것으로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라이터에 불이 들어오자, 손으로 가려 어두웠던 그와 저 사이는 한순간 밝아졌습니다. 담배 덕분에 밝아진 채로, 그는 일순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불이 붙은 후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순간 눈이 마주쳤습니다. 생각보다 그의 눈은 투명했습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수염을 밀면 깔끔할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뭘 봐요. " 너무 그렇게 초면인 사람을 쳐다보는 건 실례 아닌가요. 라고 말하려다, 이 대목은 참기로 했습니다. 저도 그를 잠깐 주시한 것도 있고, 그저 길게 말을 하기 싫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몇발자국 물러나며 거리를 뒀습니다. 한동안 저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질 동안 발밑으로는 희뿌연 재가 쌓여갔습니다. 결국, 오늘도 허탕입니다. 처음 목적이었던 독주에는 실패했습니다. 꽁초를 튕기려던 찰나 자연스럽게 제 손목으로 눈이 갔습니다. 답답할 때마다 손목 위로 수를 세고는 했는데, 이렇게 방해를 받다 보니 못 세본지 제법 되었습니다. 새빨갛던 선들은 제 피부색과 조금씩 동조되어가는 중이었습니다. 새로 그어진 선은 확실히 없었습니다. 그가 오늘도 제 시간을 방해한 덕분일까요. 옥상에 혼자 남아 자기 신세를 위로하는, 궁상맞은 꼴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 저기요. " 큰 맘 먹고 그를 불러봤건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제가 그를 두어 번 정도 더 부른 후에야, 그는 이쪽을 바라봤습니다. 저는 하려고 마음먹은 말은 하는 쪽이었습니다. 그가 느끼지 못하게 짧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살짝 그를 흘겨본 채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서, 저는 손을 주머니에 쑤셔넣었습니다. 몇 초 정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곤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었습니다. 여전히 폐 안 깊숙하게 답답했지만, 오히려 머리는 잔잔해졌습니다. 마치 모자이크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모자이크 속 별빛들이, 제 두 눈 너머로 조금씩 다가왔습니다. 저는 밝은 빛에 익숙하지 않아서,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저는 별빛에 취한 나머지 주저앉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얼른 옥상을 빠져나왔습니다. 옥상 계단을 내려오면서, 저는 무의식중에 혁오의 Tomboy를 흥얼거렸습니다.
" 다녀왔습니다, 파키라씨. " 문을 열고서, 저는 가장 먼저 테이블에 놓여있는 화분 속 식물에 인사를 했습니다. 파키라, 멕시코와 남아메리카 지역이 원산지인 관엽식물이었습니다. 수분을 좋아하지만 정작 물을 잔뜩 주면 뿌리가 썩을 수 있는 곤란한 식물입니다. 어쩐지 이런 까다로운 면에 동질감을 느껴버린 저는, 파키라씨를 집에 들여놓은 후로 지금껏 애지중지 키우고 있습니다. " 오늘도 그 사람이 먼저 있었어요. 매번 보는 건 아닌데, 가끔 귀신같이 먼저 와있더라. " 말을 이어가던 중 제 라이터를 찾았습니다. 챙겨간다고 하던 게 욕실 선반에 내버려뒀던 모양입니다. 저는 칫솔을 집어 들고 양치를 하면서 텔레비전을 미리 켜두었습니다. 집안이 조용하면 저는 왠지 무서워지곤 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양치가 끝나면, 파키라씨에게 제 신세를 한탄할 생각입니다.
2-1. 지하철을 탈 때마다, 저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는 합니다. 분주하게 역 안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안착한 뒤로는 내릴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지하철 안은 사람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서로는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 칸이 놓인 기분이 듭니다. 지금 만나러 가는 녀석에게 한 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 당연하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잖아. 그런 게 바로 거리감이야. " 그때, 녀석은 어깨를 으스대면서 마치 대단한 말이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정작 자신은 병상에 앉아있으면서, 자신감 만큼은 으뜸입니다. 저는 그런 녀석을 동경해서, 지금도 이따금 문병을 가고는 합니다.
기차가 살짝 흔들릴 때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울립니다. 불규칙적이게, 희미하게. 한 번씩은 분명하게.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 말의 노래와 덜컹거리는 소리가 겹칠 때는 은근한 음악 같기도 합니다. 저는 역에서 내린 후 바로 택시를 잡고 녀석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의 매끈하게 닦인 바닥을 밟자, 특유의 냄새가 코를 쑤셨습니다. 몇 번 와봐서 녀석의 병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혹시 몰라서 저는 접수대에 한 번 더 녀석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잠깐 문병을 왔다고 얘기하니 선뜻 호실을 답해주었습니다. 오늘도 문제없는 모양이었습니다. 병실에는 녀석과 나이 든 중년, 그리고 어린 꼬마가 입원해 있었습니다. 꼬마는 잠들었습니다. " 우와, 또 와줬네. 먹을 거 사왔어? " " 너 뭐 함부로 먹으면 안 되지 않아? " " 알게 뭐람. 짧은 인생은 만끽하지 않으면 안 돼. " 그 만끽의 결과가 이러함을 녀석은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 요즘도 음악 하고 있어? 너 대학교 때부터 계속 나한테 음악 한다고 얘기했잖아. " " 하고 있지. " " 잘 되어가? " " 저번에도 떨어졌어. " " 흐흐, 끈기가 있네. " 녀석은 백치같이 웃어대면서 침대 위로 고꾸라졌습니다. 알게 모르게 제가 음악을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주변에 몇 더 있겠지만, 제 입으로 직접 밝힌 사람은 녀석뿐입니다. 놀랍게도 녀석은 제가 음악을 한다는 것을 단 한 번도 발설한 적 없었고, 지금껏 그저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 봐라, 올해 내지 내년까지는 내가 하고 말 테니까. " " 어구, 그랬어요? " " 일찍 죽어라. 진짜. " " 그럴지도 몰라. 겁난다. 어쩌지? " " 죽을 것 같으면 불러. " 녀석이 죽는다는 건 실감이 나지 않았기에, 이런 대화도 가능했습니다. 확실히 수척해진 건 맞지만, 한참 같이 방탕하게 지낼 때의 녀석만이 가지고 있는 색깔은 여전히 선명했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이대로 호스를 연결해서 바람만 좀 불어줘도 녀석은 예전처럼 돌아올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병문안을 와도, 오히려 저는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 참, 너 요즘도 담배 피우고 그래? " 녀석은 대뜸 제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녀석이 입원한 후로 담배를 피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환자가 담배를 피운 다는건 자살행위지만, 왠지 녀석은 그런 건 개의치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담배를 피우지 않는 녀석이 의아했습니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 어. 한 개비 줄까. " "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너도 슬슬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 너도 병들어있잖아. 그런 말을 하고 녀석은 자신의 가슴 부근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 너보다는 건강해. 훨씬. " " 에이. 대학교 다닐 때 매번 네가 나보다 힘들어했으면서. " 괜히 이런 부분은 쓸데없이 잘 기억해냅니다. 저는 혀를 쯧 하고 차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이런저런 근황을 주고받았습니다. 다만, 녀석의 병원 생활은 일정하고 단조로웠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화의 8할을 제 근황이었습니다. 최근 있었던 일을 얘기했지만, 아이에 관한 얘기는 빼놓았습니다. " 최근에는 사람은 거의 안 만나는 거야? " " 만나고 싶은 생각이 딱히... 그냥, 숨이 막히잖아. " " 글쎄. 여러 사람을 만나보면 익숙해질걸. " " 천천히 생각해볼게. " 확실히 대학교 다닐 때보다는 사람 만나는 게 너무 뜸해졌습니다. 그때에는 사람을 만난다기보다,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사명감에 시달렸습니다. 억지로라는 표현이 잘 들어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두고 보니, 저는 막연하게 대학생활을 흉내 냈던 것 같습니다.
" 아니 뭐, 또 억지로 만나보라는 건 아니고. 네가 인간관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았거든. " " 무슨 말 하고 싶은건지 알아. " " 내 마음 알지. " " 까. " 오글거리는 말을 하는 녀석이 거북해져서, 저는 상스러운 제스쳐를 취했습니다. 중년 아저씨가 키득대는 것을 얼핏 들었습니다. 이미 깐 지 오래라는 말에 또 까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있는데, 이런 말은 자중하는 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고 저는 몸을 일으켰습니다. " 야. 그 뭐야, 악기 다루는 동네 할아버지 지금도 계셔? " " 어. 너 입원하기 전이랑 똑같던데. " " 그분께도 안부 좀 전해줘. 친절했잖아. " 저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몸 좀 챙기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녀석은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병원을 나와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갈 때랑은 다르게, 그사이 역은 한산해져 있었습니다. 저는, 녀석의 말을 곱씹었습니다. 녀석의 의도는 단순히 폐가 약하니 조심하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병들었다는 말은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동경의 끝에 늘 나 자신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결같이 쫓아가던 상대만이 남아있습니다. 저는 동경하던 녀석을 줄곧 쫓아가면서 녀석처럼 사람과 지내는 방법을 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녀석 없이 홀로 서보니, 그건 또 아닌 모양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저는 어쩌면 정말 병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오스카 와일드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처럼, 저를 대신해서 병들어갈 초상화라도 한 점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거리에는 잔잔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비를 피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급하게 비닐우산을 하나 사버렸습니다. 특유의 젖은 쇳냄새가 칙칙하게 올라왔습니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붉은 백라이트가 멀어지고, 가까워져 갑니다. 저는 아마자라시의 피아노 도둑을 들으며 걸어갔습니다. ' 마침 사람 눈을 피해 숨죽여 사는데에도 싫증이 나던 참이야. ' 노래를 너무 자주 들었던 나머지, 가사 중에서도 이 대목만은 우리말처럼 알아먹게 되었습니다. 멜로디와 함께 쵸-도 히토메오 하며 가사가 울릴 때면 입이 뻐끔거려질 정도였습니다. 신호등의 붉은 빛은 잠들고 파란 이가 걷는 칸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횡단보도 앞에서 몇 초 정도 서 있는 채로 사람들이 일순간 움직이는 것을 감상했습니다. 어쩐지 집으로 들어가기가 마냥 싫었습니다. 약 3번 정도, 그렇게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구경하다 들어갔습니다.
아파트 계단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복도를 걸어가려고 보니, 아이는 집 문을 열어젖힌 채로 밖에서 난감하다는 표정을 보였습니다. 스쳐 지나가듯 방을 보니, 거실 불이 완전히 꺼져있었습니다. 아마, 형광등이 나가버린 모양입니다. " 밖에서 뭐해. " " 불이 안켜져서요. " " 형광등을 갈아 끼우면 되잖아. " " ... 자랑은 아닌데요. 아직 혼자서 갈아 끼워본 적이 없어요. " " 오늘만 자고, 내일 사람을 부르면 되겠네. " 아이는 손톱 끝을 이로 질근 대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눈치였습니다. 제 말끝에 답을 못하는 것으로 보아, 어두운 걸 썩 좋아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 형광등은 사 왔고? " " 아, 네. ... 사기는 샀는데, 어두워서 어떻게 할지 감이 안 잡혀서... " " 줘봐. 넌 이걸로 안에 좀 비춰보고. " 저는 형광등이 들어있는 아이의 봉투를 받아들고, 아이에게 제 전화를 건네주었습니다. 아이는 일순간 앗, 하는 소리를 냈지만 큰 불평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빛을 비추는 대로 조심스럽게 걸어가서, 의자를 하나 밟고 올라가 형광등을 끼울 곳을 확인했습니다. " 불은 껐어? " " 네. " " 비추는데 미안하지만, 이거 좀 받아줘. " 끼워져있는 형광등이 잘 빠지지 않아서, 저는 조금 힘을 줬습니다. 낡은 형광등을 내려두고, 새로운 형광등을 끼워 맞췄습니다. 이래저래 확실히 고정된 것을 확인하고 아이에게 신호를 주자, 밝은 빛이 번쩍였습니다. 그건 빛이라기보다, 일종의 섬광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순간 문자 그대로 시야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의자에서 내려온다던 것이 그만 고꾸라지는 것으로 변해버렸습니다.
" 와... 괜찮아요? 사람이 이렇게 넘어질 수가 있어? "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들렸습니다. 테이블에 얼굴을 부딪혀버린 것인지 후끈거렸습니다. 이윽고 똑, 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조금씩 돌아오는 시야로 바라보니 핏방울입니다. " ... 뭐야. " " 그쪽 얼굴이 찢어졌어요. 무슨 동선으로 넘어진 거에요? " "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지. " 아이는 비릿하게 웃으면서 일을 만든다며 절 흘겨보곤 잠깐 서랍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자주 썼는지, 아이는 오래 뒤적이지 않고 연고와 밴드, 거즈를 가져왔습니다. " 찾는 게 능숙하네. " " 응. 제가 자주 덤벙대거든요. " 제가 바르겠다는 것을 아이는 한사코 말렸습니다. 지금 자신이 어느 부위를 다친 것인지 알고야 있냐는 말에, 저는 그만 말문이 막혔습니다.
보고 있어!! 스레주 문체 되게 좋다 ㅎㅎ
>>28 칭찬해줘서 고마워. 봐주는 사람이 있다니 기쁘다. 열심히 연재할게.
제가 따갑다는 티를 내며 인상을 찌푸려도 아이는 가만히 있으라고 제게 말했습니다. 면봉의 끝에 연고를 묻혀서 야무지게 펴 바르는 모습은 확실히 여러 번 해본 솜씨였습니다. 연고가 발라지는 동안 느껴지는 아픔을 회피하고자, 저는 신경을 다른 곳에 쏟기로 했습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아이의 집안에 관해서였습니다. 테이블 위로는 파키라가 담겨있는 화분이 보였습니다. 예전에 본인은 파키라를 키워보려다 물을 너무 많이 주는 바람에 실패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파키라는 무관심과 관심의 중간, 그 어딘가 정도만큼 신경 써줘야 합니다. 그런 까다로운 화분을 아이는 용케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 집안은 제법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새집처럼 깔끔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 만에라도 짐을 다 정리할 수 있을 수준이었습니다.
그 외에 특이사항이라면 딱 한쪽 방만 굳게 잠겨있는 정도. 보통 집에서는 오히려 자기 방만큼은 열어두고 지낸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예고하고 들어온 것도 아닌데 닫혀있는 방이라면, 평소에도 으레 닫고 지내는 방일 것 같았습니다. 행여 집안에 다른 사람이 함께 사는가 싶었지만, 이내 이 생각에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지내는것 치고는 굉장히 자유로웠습니다. 이 근거 하나가 제 확신을 다져놓고 있었습니다. 제가 혼자 이런저런 망상을 하다 정신을 차리니 아이는 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 저, 사람 생각을 대충 짐작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게 꽤 자주 들어맞거든요. " " 그런데? " " 그쪽, 제가 혼자 사는지에 대해서 생각했죠. " 순간 저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머니 속에 숨겨두던 정답이 적힌 종이를 들킨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 ... 뭘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어요. 이건 독심술 같은 게 아니에요. " " 내가 언제. " " 바보 같기는. 얼굴에 훤히 드러나거든요. " 아이는 제 의문에 대해서는 딱히 이렇다 할 정답을 내놓지 않은 채로 면봉을 쓰레기통에 넣었습니다. 저는 뭔가 실수한 기분이 들어서, 만에 하나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며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아이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심드렁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 밤에 혼자 담배 피우러 나온다고 사람을 그렇게 판단하다니. 나빴네요. " " 맞는 말이야. 방금 그 생각은 당장 취소할게. " " 마음대로 하세요. " 아이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썩 불쾌함은 느끼지 않는다고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대로 머리를 한 번 정돈하고, 어떠한 생각이 미친 듯 손가락 끝을 튕겨 소리 냈습니다. " 저기, 그쪽.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
스레주 글 진짜 잘쓴다!! 재밌어!!
>>33 반응 보여줘서 고마워. 꾸준히 써볼테니 앞으로도 재미있게 읽어줬으면 해.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전화번호를 교환하자니. 저는 지금, 거리낌 없이 친해지는 것인지 무서운 술수에 말려드는 것인지 헷갈리고 있습니다. 아이와 어느 정도 가까워지는 것은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이 쪽에서 다가오는 건 생각 밖이었습니다. " 오늘처럼 가끔 제가 손볼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부탁하고 싶어서 그런거예요. 이상한 생각하는 게 아니고요. " "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불러.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한정적일 거야. " " 근처에서 제가 알고 있는 어른은 그쪽뿐이라서요. ... 그럼, 이건 어때요. " 아이는 갑자기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서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서 보였습니다. 이걸 받아 적어라.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그쪽이 제 도움이 필요할 때, 이 전화번호로 불러주세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 " 허. " 제가 기가 차다는 말을 하려던 찰나, 아이는 말끝을 끊었습니다. " 대신, 제 도움을 받는다는 건 제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도와준다는 암묵적인 확인으로 받아들일게요. " " ... 뭐든지? " " 현실적이고 제가 가능한 선에서. 돈을 빌려달라, 그런 건 안돼요. " " 좀 더 개인정보를 신중하게 다루는 게 좋지 않아? 험악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 " 아니, 뭐. 그쪽을 믿는 건 아닌데, 겁나는 것도 아니라서요. " " 너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다. " " 제가 좀 그렇죠. " 이런 대범한 아이는 살며 처음 봤습니다. 아이의 전략이 어떻든, 제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휴대전화를 꺼내서 아이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자, 아이는 만족스럽다며 다시 자기 휴대전화를 가져갔습니다. 시간이 제법 늦어있었습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지금 이곳이 남의 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저는 슬슬 몸을 일으켰고, 아이는 나갈 때 밖에서 문 손잡이를 위로 돌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문이 잠기는 모양입니다.
"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 제가 문을 닫으려던 찰나, 아이는 일어나 현관에서 제게 그리 말했습니다. 또 이렇습니다. 아이가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오늘은 복도의 주황빛 불빛을 머금어서, 아이의 얼굴 윤곽이 희미하게 주홍빛에 가깝습니다. 저는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고서 문을 닫아 잠갔습니다. 문이 잠기자 그것을 알리는 음악이 짧게 몇 초 정도 흘러나왔습니다. 어느새 비는 그쳤습니다. 바깥의 높은 타워에서 빨간 시그널이 일렁거리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일이 한순간의 꿈같습니다. 마치, 방금 복도에서 자다 깬 기분입니다. 이대로 다시 문을 열어보면 아이는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그대로 제 방으로 돌아가서, 냉수로 목을 축였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관심이 생긴 모양입니다.
2-2. 또 이런 꿈입니다. 누워있는 제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올라타고 있습니다. 무언가의 얼굴은 계속해서 바뀌어 갑니다. 잠깐은 아빠였다가, 또 잠깐은 처음으로 좋아해 봤던 사람이거나. 거쳐 갔던 사람들의 얼굴로 계속해서 일그러져갑니다. 조금씩 그 형체는 그로테스크해져 갑니다. 마침내 무언가의 얼굴은 살바도르 달리의 전쟁의 얼굴처럼 망가집니다. 무언가의 두 손은 제 목을 부술 듯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의 죽지만 않을 정도로 숨을 덜컥이며 뱉었습니다. " 나는... " 무언가가 입을 열었습니다. 일제히 얼굴 구석구석에 붙어있는 입술이 달싹거립니다. 귓가에서는 삐-, 하는 음성이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다음에 무언가가 무슨 말을 할지 대강 알고 있었습니다. 제 두 귀를 틀어막고 싶었습니다. 필사적으로 그만하라는 말을 뱉으려 해봤지만, 그 말은 목구멍에서 머무르기만 했습니다.
" 지금 이럴 때, 웃는 네 모습을 너무도 사랑해. " 토마토가 뭉개지는 소리가 나며 무언가의 얼굴은 폭발했습니다. 이윽고, 제 시야는 검게 변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간신히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오한이 느껴집니다. 여름임에도 저는 이불을 끌어 잡고는 그 속으로 몸을 숨겨야만 했습니다. 몸의 떨림이 오랜 시간 멈추지 않았습니다. " ... 진짜 싫다. ... ... " 입에서는 상스러운 쌍욕이 밑도 끝도 없이 나옵니다. 분한 기분에, 주먹으로 침대를 몇 번이고 쿵쿵대며 내려치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자신의 팔자에 체념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감정이 있습니다. 한없이 비관하는 것으로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자기위로 삼아 자신의 신세를 처량하게 달관하려 해도, 더 암울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순식간에 이런 비극은 한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슬픔과 우울을 이해할 수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이불을 걷어내고 시야를 밖으로 향했습니다. 온 집안의 불은 꺼져있었습니다. 저는, 어두운 것을 사실 제법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무서워서 피하다 보니 생활 리듬은 불규칙적이게 됐습니다. 그렇게 잠을 낮에 주로 자고, 이른 저녁에 일어나게 된 것이 지금입니다. 그럴 때마다 일어날 때를 생각해서 불을 켜두고 자고는 하는데, 지금 그 불이 꺼져있는 것입니다. " 아... 어쩌지, 어쩌지... " 저는 급히 몸을 침대에서 튕기듯 일으켰습니다. 거실로 달려나가 형광등의 스위치를 똑딱거렸습니다. 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형광등이 나가버린 모양입니다. 저는 지레 겁을 먹어버린 나머지 곧장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문을 열고 아파트 복도의 불빛을 본 후에야 다급하게 뛰던 심장 박동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같은 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저를 피하고자 일부러 멀리 돌아갔습니다. 뭘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하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아주머니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런 아주머니를 개의치 않고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형광등을 사러 가야겠습니다. 거실을 제외한 나머지 방의 불을 모두 켜놓고, 저는 옷을 갈아입고서 다시 나왔습니다. 아파트에서 나와 도로를 걸어가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로등은 달님을 마주하기 위해서 다들 분주해 보였습니다. 제 발밑 아래 그림자는 점점 늘어져 갑니다. 어디서 사야 할지 마땅히 생각나는 곳이 없던 저는, 무작정 거리로 향했습니다. 적당히 큰 마트에서는 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마트에서는 집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것이 있었고, 저는 무리 없이 형광등을 살 수 있었습니다.
형광등을 사고 돌아오던 중, 악기를 취급하는 전문점에 눈이 쏠렸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있던 그곳. 전문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흰 백발에 풍성한 수염과 안경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신사 같은 이미지였습니다. 처음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우연히 할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던 것을 구경하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 오고 가며 들르다 보니 대화하기도 편해졌고, 아주 가끔은 할아버지의 기타 연주를 듣거나 연습해보기도 했습니다. " 할아버지. 잠깐 들러도 괜찮아요? " " 지금 시간대에는 사람이 없으니까. 얼마든지. " 안경 너머로 저를 가볍게 훑어보던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조금 신이 나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곳에 들어오면 마음이 너무나 편해집니다. 목제 악기들이 보기 좋게 정돈되어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뚜렷하면서 푸근한 오크 색상과 개성 있는 버건디색이 만들어내는 훌륭한 조합은, 이 전문점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일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 오늘도 기타 칠 거예요? " " 그랬으면 싶으냐? " " 응. 오늘은 무슨 곡이 좋을까 지금 생각중이에요. "
" 앤디 맥키의 Rylynn. 괜찮아요? " " 탁월한 선택이지. 누군가를 위로하는 곡은 지금껏 단 한 순간도 나빴던 적이 없어. " 할아버지는 익숙하게 기타를 집어 들어 허벅지에 받치듯 잡았습니다. 이윽고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하며, 음들은 하나 둘 할아버지의 손을 타고 엮이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현을 손가락으로 내려치거나 줄을 잡아 뜯는듯한 소리마저도 음정과 섞여 듣기 좋은 소리가 되었습니다. 작은 빗줄기가 상가를 찾아오고, 이내 빗소리가 후둑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아까 집 안에서 느꼈던 두려움을 잊어버릴 정도로, 한없이 노래가 좋았습니다. 돈이 모이면 기타를 사볼까. 진지하게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노래는 끝이 나고, 저는 잠깐의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 좋다. 저도 기타를 장만하면 그 노래부터 연습할래요. " " 열심히 해보도록 해라. 큰 기타를 네가 받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지만. " " 자신 있거든요. 애송이 취급하기는. " " 나한테 애송이가 아닌 사람은 먼저 간 할멈밖에 없어. 할멈은 나보다도 어른스러웠지. " " 할아버지가 그러면 어떡해요. 이미 다 늙은이 옹이 되어가면서. " 이런 만담 구도를 어디서 본 것 같습니다. 아마, 노인과 바다였겠죠. 제 말에 자신을 스스로 철이 덜 든 늙은이라며 자조하는 할아버지 덕분에 저는 잠깐 웃었습니다. 그렇게 몇 곡 정도를 더 부탁하고 나자 밖은 어두컴컴해졌습니다. 너무 늦었다 싶어서, 저는 먼저 일어났습니다. " 매번 느끼는 건데, 할아버지는 친구 같아요. 이 동네에서 할아버지만큼 편한 사람은 드물거예요. " " 늙은이랑 친구가 되어준다니 영광이야. " 할아버지는 기타를 조금 손보면서 보관함에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저는, 형광등이 들어있는 봉투를 들고 다시 아파트로 향했습니다. 그 어두운 집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자,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좋다 스레주 계속 써줬으면 좋겠어!
진짜 재밌다 스레주!! 필력 진짜 좋은것 같아
>>45 그런 말을 해줘서 고마워. 힘내서 계속 이어갈게. >>46 칭찬 들어서 좋다. 앞으로도 재미있게 읽어주기를 바라.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집안은 어두운 상태였으니까요. 어두운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참으로 피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 어두운 거실에서 혼자 버티며 전등을 갈아 끼우는 것.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합니다. 문을 열어젖히자, 집 안은 고요하고 한결같이 어둡기만 했습니다. 한 발만 내디디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저는 그리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방 안의 다른 불을 모두 켜자. 그리고 눈 한 번만 감고 거실의 어둠을 참아내자.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들어가려 하자, 들어본 목소리가 제 뒤에서 울렸습니다. 순간 하마터면 저는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당신이 올 때 인기척이라도 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정을 누르는 데에 저는 나름의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놀라는 기색을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불이 켜지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어두운 것을 두려워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뭔가, 제 약점을 스스로 밝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눈치가 있다면 불을 안 켜는게 아니라 못 켠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 형광등을 갈아 끼우면 되잖아. " " ... 자랑은 아닌데요. 아직 혼자서 갈아 끼워본 적이 없어요. " 이 말을 뱉을 때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형광등 하나도 갈아 끼우지 못한다니. 그것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인지하고 있던 저는, 이 순간 제법 창피했습니다. 뾰족한 수를 내줄 게 아니라면 그저 당신이 당신 갈 길이나 갔으면 싶은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그 사람은 직접 저를 돕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제게서 형광등을 샀느냐고 물어보고는 대뜸 제 손에 있는 형광등을 낚아채 갔습니다. 그 사람이 저를 도와주는 쪽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지라, 순간 저는 놀랐습니다. " ... 아. 저기. 그... " 제가 말을 다 이어가기도 전에 당신은 성큼성큼 제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뜻밖의 도움에 외부인이 집으로 들어온다는 건 생각도 못 하고, 그저 휴대전화로 집 안을 비추며 졸졸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의자를 하나 끌어와 밟고 올라서서 형광등을 여러 번 훑어봤습니다. 어떻게 끼우고 뺄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담배만 피우는 샌님인 줄 알았는데, 막상 그런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스레주 글 재밌게 읽고있어~ 글이 되게 읽기 편해서 좋은 것 같아ㅎㅎ
>>51 재미있게 읽고 있다니 다행이다. 칭찬받은 만큼 힘내서 써볼게.
" 비추는데 미안하지만, 이거 좀 받아줘. " 한동안 힘을 주는가 하더니 삐걱거리며 낡은 형광등이 빠졌습니다. 그것을 제게 건네주고서, 새 형광등을 집어 들었습니다. 거실에 빛이 한 줌도 없었던지라 그는 끼우는 곳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습니다.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구멍을 맞추다 마침내 형광등이 들어가며 찰칵, 고정되는 소리가 났습니다. " 불 좀 켜볼래? 잘 들어오는지 확인해보게. " " 아, 네. " 순간 번쩍이는 것을 보고 불이 들어온 것을 안 저는 기뻐했습니다. 이제 거실이 어둡다고 겁에 질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사실에, 저는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이윽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아슬아슬하게 의자 위에서 비틀거리다 쓰러지는 그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넘어지던 그를 잡으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 순간 그는 넘어진 뒤였습니다. 근처에 있던 테이블에 이마를 부딪치곤 아래로 쓰러졌습니다. 소리가 듣는 사람도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컸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고꾸라진 직후 몸을 일으켰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렸다거나, 기절해버린 건 아닐까 하는 괜한 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그는 넘어진 자신의 상태를 아직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습니다. 그의 손바닥 위로 빨간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너무 역동적이게 넘어진 그였기에, 저는 저도 모르게 그를 조금 비꼬듯 놀렸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런 발언은 실례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해야겠네요. 다행히도 상처는 길게 베였을 뿐, 깊지는 않았습니다. 이 정도라면 아프겠지만 연고를 바르는 선에서 해결될 것 같습니다. 혼자서 이래저래 다친 적이 많았던 저였기에, 약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 찾는 게 능숙하네. " " 응. 제가 자주 덤벙대거든요. " 그는 이런 제 모습이 신기한 듯 보였습니다. 보통, 자기 집 안에 연고가 어디 있는지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을 텐데. 그에게는 별일이 다 신기한가 봅니다.
제가 연고를 발라 줄 때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사실, 그가 그럴 때마다 내심 연고를 바른 면봉을 꾹꾹 누르듯 바른 것도 없잖아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옥상에 혼자 있던 제 시간을 방해한 벌입니다. 은근히 고소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그의 시야가 어느 한 곳에 꽂혀있습니다. 방향을 따져보면 아마, 제가 닫아두는 방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할머니와 지낼 때 쓰던 물건이나, 할머니가 자주 쓰던 물건들을 담아둔 방입니다. 안에 들어가면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서 저 자신이 꼴사납게 느껴지는 방. 독립한 이후로는 차마 짐들을 버리지 못하고 문을 닫아놓기만 합니다. 저렇게 빤히 보는 것도 티가 나는데. 대충 넘겨짚어서 남 생각을 떠보는 버릇이 있던 저는, 이번에도 으레 그렇듯 넌지시 물어봤습니다. " 저, 사람 생각을 대충 짐작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게 꽤 자주 들어맞거든요. " " 그런데? " " 그쪽, 제가 혼자 사는지에 대해서 생각했죠. " 그는 정답을 들킬 줄 몰랐는지 눈이 평소보다 커졌습니다. 둔하기는. 저는 다 쓴 면봉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렸습니다.
대충 그의 생각을 머릿속으로 추리해봤습니다. 그에게 제가 보인 모습은 대충 쓰레기를 혼자 버리거나, 바깥에서 혼자 장거리를 사 오거나 혹은 혼자 담배를 피우러 나오거나. 정확히는 담배를 피우러 간 것은 아니지만, 아무쪼록 혼자 있는 모습만 보였습니다. 이 시간대에 집에 아무도 없으니 그는 저를 혼자 산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딱히 이런 그의 생각에 마음이 상한 건 아니지만, 저는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마음이 상한 척을 했더니, 그는 그게 미안했던 건지 제게 자기 생각을 철회한다고 했습니다. 마음대로 하라며 애매한 대답을 해놓고 저는 마음속으로 실실 웃었습니다. 제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도와주는 그가 참 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부르면 곧장 달려올 수 있는, 그런 어른이 곁에 필요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도움이 얼마나 필요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있고 없고는 분명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언젠가 또 불이 나간다거나 할 때. 제가 무서워하는 일들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 그는 그런 사람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저는 대뜸 그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계속 보는중인데 보면볼수록 재밌다 ㅜㅜ 책으로 나왔으면 조켓다 나 바로살듯 !!!!
>>57 계속 봐주고 있다니 영광이야. 재미있게 읽어줘서 고마워.
예상했던 반응입니다. 그 사람은 이런 말을 하는 저를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보고 있었습니다. 제발 이상한 상상이나 하지 않기를. 일이 더 커질까 봐 저는 말을 늘여놓았습니다. " 오늘처럼 가끔 제가 손볼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부탁하고 싶어서 그런거예요. 이상한 생각하는 게 아니고요. " "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불러.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한정적일 거야. " 쉽게 번호를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행입니다. 번호를 쉽게 줬다면 그건 그것대로 제가 곤란합니다. 적당한 명분이나 호기심을 유발해야 합니다. 번호를 주는 게 정당하다고 느낄만한 반대급부적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저는 제 휴대전화 다이얼에 제 번호를 적고는 그 사람에게 제 번호를 드러냈습니다. " 그쪽이 제 도움이 필요할 때, 이 전화번호로 불러주세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 이쪽이 얼마나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사실 썩 중요한 사항이 아닙니다. 요지는 그 사람이 '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있다. ' 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대신, 제 도움을 받는다는 건 제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도와준다는 암묵적인 확인으로 받아들일게요. " " ... 뭐든지? " " 현실적이고 제가 가능한 선에서. 돈을 빌려달라, 그런 건 안돼요. " 저 뭐든지라는 말이 거슬려서, 저는 제한을 덧붙였습니다. 말로 하는 약속은 이런 걸 잘 정해둬야 후환이 없는 법입니다. 그 사람은 제법 고민하는 듯 숨을 죽이더니 저를 우려하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좀 더 개인정보를 신중하게 다루는 게 좋지 않아? 험악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 " 아니, 뭐. 그쪽을 믿는 건 아닌데, 겁나는 것도 아니라서요. " " 너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다. " 그 말을 끝으로 그 사람은 제 번호를 저장하기로 했습니다. 다행이다. 저는 그리 속삭였습니다. 오늘처럼 성가신 일도 선뜻 도왔으니, 다른 부탁도 아마 들어줄 것입니다. 들어줄 의향이 있으니 번호를 저장한 거겠지요. 앞으로 제가 위험해졌을 때, 경찰 말고 바로 부를 사람이 한 명 생겼습니다. 저는 그를 약간의 안전망 내지 잡다한 해결사 정도로 인식할 생각입니다. 물론, 그가 제 도움을 필요로 한 이후부터의 얘기지만요.
"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 문을 열고 슬슬 나가보려는 그 사람을 보고서 말했습니다. 긴말을 하기는 낯간지러워서, 그저 고맙다는 말만 던졌습니다. 덕분에 거실의 어둠을 걷어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밤 찾아올 악몽을 떨쳐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새벽 내내 빛이 들어오는 욕실에 틀어박혀서 덜덜 떨지 않아도 됩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 ... 얼른 들어가지 않고. 밤이 늦었어. " " 아. 저기... " 제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그는 문을 닫아 잠갔습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듣고 가는 게 예의일텐데, 나쁜 사람입니다. " ... 담배 피우러 갈 때, 불러도 괜찮은데. " 저는 짧게 혀를 차고는 될 대로 되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화를 기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행여 그런 모양새가 될까 봐 휴대전화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저를 수상하게 여겨 전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생각하며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돌아보니 괜히 이런 말을 꺼낸건가, 짧은 한숨이 무의식중에 흘러나왔습니다. 혹시 너무 겁먹어서 생각이 짧았던 건 아니었을까요.
3-1. 저녁. 밖에서 끼니를 대충 해결한 저는 알약을 집어 들었습니다. 간이 부쩍 안 좋아지는 바람에 약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갔다 온 곳도 병원이었습니다. 병원은 녀석이나 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새끼손가락 마디만큼 굵은 약을 여러 개 보면 이걸 삼킬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 이제부터는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상황이 제법 악화되었습니다. " " 아, 네... " " 그리고... B형 간염 항체가 없다고 검사 결과가 나오네요. 오늘이랑 한 달 뒤, 그리고 다섯 달 뒤 맞는 걸로 하죠. " 술, 담배, 기름진 음식 등. 의사는 간에 무리 되는 일련의 행동들을 읊어가며 가급적 금기시할 것을 제게 말했습니다. 다른 건 고사해도 담배는 쉽지 않을 텐데. 지금 느끼는 경각심이 워낙 미미해서, 금연에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로 친구라는 녀석이 병실살이를 하고 있는데도 별 느낌이 없다니.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저는 저 자신에게 놀랐습니다.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습니다. 오늘 주문했던 기타가 도착했다는 소식입니다.
아직 집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데. 제가 주문하던 곳은 택배를 구태여 경비실이 아니라 집 밖에 남겨두는 곳입니다. 몸집도 제법 크고 비싼 녀석이라, 집 밖에 기타를 놔두기는 영 불안합니다. " ... 아. " 아이를 부려 먹을 기회가 이렇게 생겼습니다. 저는 망설이지 않고 휴대전화를 들었습니다. 전화번호를 적어서 아이에게 전화를 걸자, 뜻밖에 전화는 금방 통했습니다. " ... 아. 그쪽. " " 지금 어디야. 집? " " 어, 응... 그런데요? " " 택배 좀 맡아줘. 지금 우리 집에 기타가 하나 놓여있을 거거든. " " 뭐 빠진 말 없나요. 남한테 부탁하는 건데. " 마음이 급한 것을 아이가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저는 기가 찼지만, 근처에 전화가 닿는 사람은 아이뿐인지라 도리가 없었습니다.
" 부탁해. 주변에 손 닿을 사람은 너뿐이라서 그래. " " 이히히. 그래요. 그쪽 분명 나한테 부탁한 거예요. " 천연덕스럽게 웃던 아이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안심해도 되겠죠. 그래도 얼른 기타를 만나보고 싶다는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계산하는 제 손은 바빠졌습니다. 이 근처 정도라면 걸어가도 될 정도였던지라, 저는 빠른 보폭으로 걸어갔습니다. 아파트가 보이려던 차, 아이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왔습니다.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첨부된 사진에는 제 기타가 아이의 집 안에 놓여있었습니다. ' 기타, 잠깐 만져봐도 될까요. 남의 물건이라 눈치는 보이지만. ' ' 내가 가기 전까지는 안돼. 기다려. ' ' 에이. ' 당연한 소리를 잘도 합니다. 아이가 김빠지는 이모티콘을 보냈습니다. 아무쪼록 목적지는 제집이 아닌 아이의 집입니다. 약 봉투를 외투 안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은 저는, 아이의 호수를 찾아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 누구세요... 그쪽이었구나. " " 기타는? " " 저기. 멋진 걸 장만했네요. " 아이는 자리를 잠시 비켜주고는 기타를 가리켰습니다. 저 녀석이구나. 실제로 인터넷상의 사진으로만 보던 것과는 감회가 달랐습니다. 기타 케이스의 잠금을 풀고 뚜껑을 열자, 경첩이 부드럽게 꺾였습니다. 연한 베이지색의 나무가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기타입니다. " 잠깐 의자 좀 빌려도 될까. " " 이것도 부탁인가요. " " 이런 식으로 나올거야? " 농이올시다, 하는 표정을 보이며 아이는 소파로 먼저 가서 편히 앉았습니다. 의자를 끌어와서 자리를 잡고 앉은 저는, 기타를 한번 잡아보았습니다.
나무로 제작된 포크 기타는 정확하게 생각한 만큼 무거웠습니다. 기타의 끝을 너무 조이지 않게 조율하고 나서, 기타를 몸에 제대로 고정한 채로 기타 현을 하나둘 튕겨보기 시작했습니다. 현악기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 그것은 현들이 이루어내는 화음과 푸근한 울림일 것입니다. 기타의 음이 마음 깊숙하게 스며들 때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 연주할 수 있는 곡, 있어요? " " ... 글쎄. 칼럼 그레이엄의 waiting? " " 좀 더 대중적인 걸로요. " 대중적인 노래라. 아이가 말하는 대중적인 노래, 그중에서 기타 노래를 꼽아보라면 영화에서 나오는 곡으로 범위가 좁혀집니다. 아이가 보았을 만한 음악 영화가 뭐가 있을까요. " 아담 리바인의 lost stars. 비긴 어게인은 봤겠지. " " 마크 러팔로한테 반할 뻔했어요. " " 응. 매력적인 배우야. " " 영화를 볼 줄 아는걸요, 그쪽. " 공감을 얻어서 기쁜지, 아이는 맨발을 방 안의 바닥 위로 타박거렸습니다.
" 그럼, 그 노래를 좀 연주해주세요. 새로 산 기타 시험도 해볼 겸. " " 부탁하면 생각 좀 해볼게. " " 나빴다. " 아이는 기운 빠진다며 소파 위로 늘어졌습니다. 싫으면 관두라며 제가 기타를 정리하려 하자, 아이는 짧게 앓는 소리를 내다 포기한 듯 바로 앉았습니다. " 부탁드릴게요. 저, 기타 소리 듣는 거 무척 좋아해요. " " ... 아. 어. 그래. " 아이는 가끔 공손하게 말할 때, 목소리가 차분하면서 나긋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고운 목소리입니다. 저런 목소리를 타고나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 ... 알았으면 빨리 연주해주세요. 그쪽, 가끔 얘기하다가 멍때리더라? " " 기다려.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던 거야. "
기다릴게
>>68 기다려줘서 너무 고마워,
Lost stars. 곡을 연주하기 위해 저는 초크를 손에 집었습니다. 코드를 F 메이저 7로 잡고, 초크를 현 위에서 부드럽게 긁어가기 시작합니다. 제목의 길 잃은 별들을 읊조리는 것처럼 Lost stars는 곡의 진행이 굉장히 서정적입니다. 그저 물 흐르듯, 우리가 놓쳐버린 시간을 묻는 곡은 천천히 걸어갑니다. 얼핏 보니 아이는 눈을 지긋하게 감고서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잠들어버린 건 아닐까 물어보려 했지만, 음악이 끊기면 그것대로 아이가 왜 노래를 끊느냐며 쏘아볼 것 같았습니다. 우선, 노래를 계속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 가느다란 목소리. 잠자코 듣던 아이가 지금 흐르는 곡조에 맞춰서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선 제 반응을 살피다 헤실 웃었습니다. 아이는 노래에 취해버린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아이의 노래가 썩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사실 제법 좋았습니다.
한 곡이 끝나자, 아이의 노래도 끝이 났습니다. 그제야 아이는 눈을 뜨고, 한숨 잘 잤다는 듯이 기지개를 켰습니다. " 어때. 제 노래 실력 쓸만한가요. " " 그레타에 비하면 좀 아쉬운 수준인데. " " 칭찬에 인색하네요. 좋다는 듯이 들어놓고선. " " 내가 언제? " " 표정에 다 드러나던데. " 아이가 장난기 없이 제 얼굴을 마주 보자, 저는 조금 낯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타를 연주하느라 이쪽의 표정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 못 하고 있었습니다. " 정말? " " 푸핫..! 후흐흐... 비밀이에요. 이 이상 말 안 할 거야. " 뭔가 놀림을 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애송이라고 생각하던 아이에게 한 방 먹었습니다. 저는 기타를 케이스에 넣으며 슬슬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 들어갈 거예요? " " 어. 애초에 기타가 어떤 기타인지 시험해보려던 거였으니까. " " 그렇구나. 기타 한번 쳐보고 싶었는데. " " 나중에. 무엇보다... 너희 집, 방음 처리가 안 되어있잖아. " 아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소리가 얼마나 새어나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옆집에 민폐를 끼치는 것은 실례입니다. 어쩔 수 없다고 아이는 체념한 듯 보였습니다. " 그럼 아저씨는 기타를 어디서 연주하는데요? " " 내 방에서. 방음 부스를 따로 설치했거든. " " 찾아가면 연습하게 해줘요? " " 생각 좀 해볼까. " " 긍정적인 검토 부탁할게요. " 제가 몸을 일으키자, 아이는 따라 나왔습니다. 문을 열고서, 저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 " 참, 너, 어지간한 부탁은 들어준다고 했잖아. " " 그랬죠? " " 나중에 불이 필요할 때, 나와서 불 좀 빌려줄래? " " 무슨 얘기를 하나 했다. " 얼마든지요. 아이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조용히 닫았습니다.
보고있어.
내 레스 무시하고 진행해도 괜찮아!
>>74 쭉 봐주고 있어서 고마워. 오히려 관심을 보여주는 레스는 환영이야. 글은 하루에 3~4개씩 쓰느라 리젠이 안되었던것 뿐이야.
4-2. 오늘은 늦은 아침에 일어나버렸습니다. 근 몇 달간 있어 본 적 없는, 너무나도 드문 일입니다. 최근 자는 시간이 낮에서 밤으로 조금씩 옮겨가다 생활 리듬이 지금처럼 바뀌게 된 모양입니다. 조용히 일어나서 커튼을 걷어내니 하늘은 투명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저런 색도 있었구나. 저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파키라 씨. 좋은 아침. 요즘 제가 좀 소홀했죠. " 저는 파키라 씨가 들어있는 화분을 들어서, 베란다의 그늘에 내려주었습니다. 그대로 베란다에서 바깥을 둘러봤습니다. 밤과는 다르게 주변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길게 뻗어있는 대로변. 그 사이를 바쁘게 지나다니는 차와 사람들. X자로 교차하여있는 횡단보도를 사람들과 자동차가 번갈아서 채워갑니다. 어쩐지,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낮의 세상은 분주합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말입니다.
" 파키라씨. " 불러봐도 파키라 씨는 대답이 없습니다. 그런 점이 파키라 씨의 장점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어설프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들어만 줍니다.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며 대화하는 사람들보다는, 최소한 파키라 씨가 더 나았습니다. " 저 해가 떠 있는 거리를 좀 돌아다니고 싶어졌어요. 다녀오겠습니다. "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서인지 파키라씨는 일순간 펄럭였습니다. 파키라씨는 제 말에 긍정해준 것 같습니다. 결심했다면 당장 이루는 게 좋습니다. 여름이 한 발짝 주춤한 지금이라면 그렇게 덥지도 않습니다. 오래간만에 가서 책도 몇 권 사오고, 애완동물 가게에서 토끼들 구경도 하는 것. 그게 오늘의 제 계획입니다. 얼른 씻고 나서 대충 편한 복장을 걸쳐 입은 저는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문을 열고 나서자, 상자에 버릴 종이, 신문 등을 담으며 나오는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잠깐 말이 없던 그는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습니다. 저도 모자를 한 뼘 정도 잡아 올려 눈인사를 했습니다. 그보다 좀 더 먼저 아파트에서 나온 저는, 아파트의 입구에서 그만 발이 굳고 말았습니다. 낮이라는 존재에 새삼스럽게 어색해졌습니다.
베란다에서 쬐던 것과는 햇빛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날이 더운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건 뭔가, 그것과는 좀 느낌이 다릅니다. 어색함이라는 단어가 몇 단계 심각해지면 지금의 제 상황과 비슷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나가서 길을 잃는 건 아닐까 싶은 쓸데없는 걱정마저 들었습니다. 종이들을 버리러 내려오는 그가 저를 한번 흘겨보고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 한 번 더 마주쳤습니다.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습니다. " 누구 기다리는거야? " " 아뇨. 뭐... 그런 건 아니에요. " " 그런데 왜 안 가고 있어. " " ... " " 어두운 것도 싫어하고, 밝은 것도 싫어해? " " 그런 것도 아니에요. " 이건 공포심 같은 무언가가 아니었습니다. 나가라면 나갈 수 있다며, 저는 얼른 아파트 입구로부터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발걸음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 그, 좀... 집에서 보던 거랑 밖이 너무 다르달지. 햇빛이 쨍쨍해서, 조금 부담스러운 거에요. " " 네가 부담스러워 하는 건 햇빛이 아닌 것 같은데. "
" 인파가 부담스러운 거 아냐? " " ... 으. " 남의 마음 속을 찌르는 건 제 역할인데. 이런 역전은 바란 적 없었습니다. 확실히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나마 밖에 다니던 것은 새벽 시간대라서, 사람이 한산했습니다. 그래서 딱히 사람과 마주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편하게 다닐 수 있던 겁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것을 안 해 버릇 하다 보니, 부대끼는 방법을 잊었다는 표현이 들어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지금, 어디로 갈 계획이야? " " 대로변으로요. 서점이나 조금 들릴까 해서. " " ... 그래? 나도 서점에 볼일이 있거든. 그러니까... " 지금이 기회입니다. " 부탁 하나만 할게요. " 부탁 하나만 하자. " 저희 둘은, 서로 같은 타이밍에 놀라는 소리를 냈습니다.
오늘도 잘봤어!
>>80 덕분에 나도 꾸준히 쓸 수 있어. 매번 너무 고마워.
그가 준비를 조금 해야 한다고 해서, 전 예상 시간보다 20분 정도 늦게 나왔습니다. 결국, 얼떨결에 저희 둘은 같은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혼자 걸을 때보다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금방이라도 가라앉아버릴 것만 같던 아스팔트 바닥이 잔잔해지는 기분입니다. 혼자 다닐 때는 모든 사람이 저를 쳐다볼 것만 같아 무서웠는데, 그러한 기분도 지금은 온데간데없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저는 대로변에서 많은 것들을 보았습니다. 반짝이는 물을 기세 좋게 뿜어대는 분수대, 그곳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 상가 앞에서 괴상한 춤을 추는 키다리 아저씨. 버스킹을 하는 아마추어들. 바쁘게 전단을 돌리는 사람들. 밤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전부 심술궂은 어둠이 가려놓았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다음 정류장 소리와 함께 버저음이 들렸습니다. 내려서 10분 정도, 서점에 도착했습니다. 서점의 안은 바깥보다 비교적 시원했습니다.
" 무슨 책을 찾을 생각이야? " " 그쪽은요?" " 이론 책 한 권이랑 언어의 온도. 그러는 너는? " " 아. 저는 그... 소설책이요. " " 그래. 그럼 먼저 볼일 끝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찾아오기로 하자. " 대충 이해했다는 듯 그는 먼저 자리를 비워 이론 책이 있는 책장으로 향했습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오늘 제가 사고 싶은 책은 바로 동화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바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딱히 그가 놀릴 것 같지는 않았지마는, 동화책을 산다는 말을 이 나이에 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8살이 어린이라는 꼬리표를 달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먼저 소설책을 찾기로 했습니다. 모에가라 작가의 `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 였습니다. 대충 초반부의 페이지를 아무 곳이나 펼쳐 보았습니다.
` 노력하면 꿈이 이루어질까요? ` ` 그 질문은 당신이 나폴리탄을 만들 수 있는지 묻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 ` 네? 네? ` ` 계통을 잘 밟아 노력한다면 필시 꿈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 하긴 아무리 계통을 잘 밟고, 노력을 쏟아 부어도 모두가 기억하는 배우가 되리라는 보장은 었었다. 누구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꿈을 이루지 못해도 잘 살아가니까. 이 대목을 읽고 나서, 저는 망설임 없이 책을 제 품 안에 넣었습니다. 책 겉표지에는 책의 홍보 기록을 작게 적어 보이며, 본문에 적혀있던 문장이 빨갛게 한 문장 적혀있었습니다. ' 이별은 그 어디로도 연결되지 않는 문이다. ' 그렇구나. 라며 간단하게 수긍한 저는, 다음 동화책을 찾으러 갔습니다. 어린아이의 뒤에서 가갸거겨 순으로 제목을 찾아가다 드디어 책을 발견했습니다. " 거꾸로 총을 쏜 사자, 라프카디오. " " ... 아. 아..? " 그는 이미 책을 다 고른 모양입니다. 어느새 제 뒤에서 제가 집은 책 제목을 읽고 있었습니다.
내일도 부탁할게!
>>85 기다려줘서 매번 고마워.
" 올 때는 인기척이라도 좀 내주세요. " " 놀라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 거짓말하기는. 기대했던 반응이라는 듯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염치가 없습니다. 그는 제가 품에 들고 있던 동화책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 두께를 보니 소설책은 아닌 것 같고. " " ... 뭐요. 동화책 무시해요, 지금? " " 아니. 확인해본 거야. 그림만 보고는 무슨 내용일지 감이 안 오거든. " " 사자가 사냥꾼에게 관심을 두다가, 그 사냥꾼을 잡아먹고 총을 얻는 이야기예요. " " 발상이 독특하네. " " 쉘 실버스타인의 책이에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 알아요? " 그는 그제야 알 것 같다는 소리를 냈습니다.
" 그래서. " " 사자는 총을 쏘는 방법을 배워요. 그렇게 사냥꾼들을 쏘기 시작하다가 사자는 서커스에 팔려가요. 재주를 부리면서 회의감을 느끼다 정글로 사냥을 나갔는데, 거기서 예전 사자를 만나게 돼요. " " 예전 사자를 쐈나? " " 으응. 아뇨. 예전 사자는 총을 쏠 줄 아는 사자, 라프카디오를 사자라고 말하고, 같이 사냥을 나간 사냥꾼들은 라프카디오를 사람이라며 쏘라고 재촉해요. " " 라프카디오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게 되어버렸구나. 그런데 이쯤 되면 내용을 다 아는거 아냐? 굳이 살 필요가 있을까. " " 아... 이거, 사이트에서 줄거리만 본 거예요. 흥미가 생겨서,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요. " " 그래. 그렇구나. 뭐... 그럼 다 고른 거겠지. " " 네. " 긴 대화가 끝나고, 저희 둘은 카운터에서 책을 계산했습니다. 동화책은 크기가 조금 큰 편이라서, 따로 다른 봉투에 집어넣어야 했습니다. " 돌아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야 했더라. " " 아뇨. 그, 저 아직 들러야 할 곳이 더 있어요. " 저는 큰 복합상가 건물을 가리켰습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얼떨결에 저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 남은 일은 혼자 볼 수 있지 않아? " " 안돼요. 혼자서는 아직 거리를 걸어갈 용기가 없어요. " " 거기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건데? " " 토끼를 보러가요. " 그는 재차 토끼를 보러 가는 거냐며 제게 물었습니다. 좀 뜬금없을 만도 합니다. 거리는 슬슬 낮 시간대가 되면서 사람이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사방에서 들리는 최신 가요와 시끄러운 노래가 뒤섞입니다. 쿵쿵거리는 비트 소리만 간신히 들립니다. 바닥에는 이따금 전단이 나뒹굽니다. 가운데에 있는 역의 출구에서는 사람들 수십 명이 1분 단위로 오고 갑니다. 낮이라는 건, 생각보다 무척 신나는 곳인 것 같습니다. 피곤해질 정도로 말이에요. " 상가 건물은 어디 있어? " " 저기. 앞에 보여요? 괴상한 조형물이 있는 곳. " 제가 손으로 가리키기도 전에 그는 눈치챘습니다. 나비의 몸통을 찢고 나오는 번데기가 조각된 그 동상은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재밌다,,
" 토끼... 토끼란 말이지. "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던 그였지만 마지못해 저를 따라왔습니다. 상가에 들어서서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구석에 제법 마련된 애완동물 가게가 보였습니다. 따로 관리하는 사람은 있지만 계산하기 전까지는 아크릴 창 너머로 마음껏 볼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괜히 동물을 놀라게 한다거나 심술을 부리는 사람 없이 이곳에 오는 많은 사람이 동물들을 보다 갑니다. 흰색의 북슬거리는 토끼가 방방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행복해집니다. 뭉쳐놓은 눈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만 같습니다. 이따금 깜빡이는 검은 눈마저 사랑스럽습니다. 저는, 문득 이런 토끼에 주저하던 그에게 물었습니다. " 토끼, 싫어하나요? " " 그런 건 아닌데, 예전에 토끼를 키운 적이 있거든. " 동물을 키울 것 같지는 않게 생겼는데, 의외입니다.
" 나름 잘 키운다고 키웠어. 정도 들었고. 그런데 6년 정도였을까, 토끼는 지쳤던 모양이야. " " 잠들었어요? " " 응. 좀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그래서, 지금 와서는 뭔가 토끼를 바라보는 것만도 좀 그래. " " 뭐어. " 저는 말끝을 조금 흐렸습니다.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말을 끊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어색해질 것 같았습니다. " 6년 정도면 잘 키운 거예요. 진짜로. " " 고마워. " " 그러니까 겁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해요. 키울 자신이 없다면, 이렇게 가끔 보러 오기만 하면 되니까. " 자기만족을 할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니까요. 그는 그렇구나. 라며 말하곤 제 옆에 쭈그려 앉았습니다. 서로 어느 색 토끼가 더 귀여운지, 10분 정도 실랑이를 했습니다. 결국, 정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도, 저도 고집이 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가던 길 상가에 있는 악기 전문점을 들르기로 했습니다. 그가 기타 현과 더불어서 몇 가지 장비를 살펴봐야 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선뜻 따라와 준 그였기에, 거절하기도 뭐했던 저는 마냥 따라갔습니다. 저희 둘이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제법 놀란 눈치였습니다. " 뭐냐, 너희 둘. 서로 아는 사이였던 게야? " " 어쩌다가요. " " 어쩌다가요... " 또 우연히 말이 겹쳤습니다. 저는 또 머쓱해져 헛기침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기타를 얘기하며 현을 좀 찾아달라고 했습니다. " 뭐랄까, 너희 둘 말이다. 다른 건 좋은데... 좀 둘이 붙어있으니 어둡달지. 떨어지라는 건 아니다만. " " 어두운 건 저 아이만이죠. 저는 양지가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할아버지. " " 뭐래요. 어두운건 그쪽이죠. 그쵸, 할아버지. " " 늙은이가 말실수를 했구만. "
ㅋㅋㅋㅋㅋ티격태격대는거 재밌다
>>94 재미있게 봐줘서 고마워.
" 그 녀석이 안부 전해 달래요. 잘 지내시냐고. " " 오냐. 그 녀석도 몸 챙기라고 전해다오. "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것 같았지만, ' 그 녀석 ' 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지라 저는 추측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주 얘기라도 듣는 것처럼 내심 흐뭇해 보였습니다. 이런 친분이 있었다니, 사람 관계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얘기가 끝나자 그는 현과 낡은 악보를 하나 건네받았습니다. 제목은 passion flower, 처음 보는 제목이었습니다. 굳이 인터넷에 있는 것을 쓰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남의 손때 탄 것을 더 좋아한다고 밝혔습니다. 새 물건은 날이 서 있어서 정이 잘 안 든다나. 낡아서 뭉툭한 것이 품고, 쓰기에 편하다고 모양입니다. 저는 불현듯 생각했습니다. 사람도 물건처럼 조금 낡은 편이 더 품기에 편할까요. 사람과 물건을 동일시하는 제게, 저도 모르게 조소를 보냈습니다.
" 오래간만에 반가웠습니다. 할아버지. " " 할아버지, 나중에 또 올게요. " 인사를 나누고 저희 둘은 밖으로 걸어 나와 갈림길에 섰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꽤 빨랐습니다. 한 건 별로 없었는데, 하늘은 푸른색에서 불그스름한 색으로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 따로 가봐야 할 곳이 있어. 이제 들어가도 좋아. " " 먼저 부탁한 건 이쪽이었는데. 그런 말은 제가 할 말 이예요. 그럼. " 중요한 말을 하기 전에 목을 가다듬고, 저는 고개를 꾸벅 숙였습니다. " 오늘도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저는 들어가 볼게요. 그쪽도 수고하셨습니다. " " 별거 아냐. 그보다, 너... 계속 그쪽이라고 부를 거야? " " 아. 응. 일단은요. " 그는 생각 못 했던 말을 들은 것인지, 몸을 제 쪽을 향한 채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 이름을 밝히면 안 돼요. 그냥... 뭔가 아직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 " 강요하려던 건 아니야. 방금 말은 잊어버려. " " 이해심이 깊군요, 그쪽. " " 당연하지. " 그는 새삼스러운 말을 들은 듯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자존감이 넘치는 캐릭터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사실, 이름을 물어본다면 밝힐 수도 있었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과의 거리감을 결정짓는 건 호칭과 이름입니다. 이름이 밝혀지는 순간, 사람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자력이 생긴 것처럼 끌어당겨집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당겨지다 일방적으로 부서지는 경험을 너무 많이 한 저였기에, 이제 이름을 밝히는 것은 은근히 겁이 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딱 지금 정도의 거리감이면 충분합니다. 반동에 튕기는 것은 지쳤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이런 제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챈 모양이었습니다. 다음 버스가 도착하자, 그는 버스 위로 올라섰습니다. 그대로 그가 손을 흔들어서 저도 모르게 품 안에 책을 들고는 손을 마주 흔들었습니다.
4-1. 저는 병원에 들어선 순간,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건강해 보이던 녀석이 침대에 지쳐서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넝마조각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을 것입니다. 지금 녀석은 말 그대로 너덜너덜한 상태였습니다. 저를 보자, 녀석은 복잡한 웃음을 지어보였습니다. 저는 애써 놀란 기색을 감추었습니다. " 상태가 엉망이네. " " 보시다시피. " " 얼굴이 노래졌어. 이런 만화 캐릭터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스머프였나. " " 바보 같기는. 보거스잖아. 보거스는 내 친구, 자주 보곤 했는데. " " 상태는? " " 죽어버리고 싶어. " 녀석이 죽어버리고 싶다는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 " 걱정하는 거야? " " 아니. 병실 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슬퍼할 테니까. " " 나밖에 없는데 뭘. " 정말이었습니다. 평소 저희를 지켜보던 아저씨도, 어린 꼬마도 없었습니다. 다만 꼬마의 자리에는 짐이 남겨져 있었는데, 아저씨의 자리에는 짐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묻기도 전에 녀석은 제 의문에 대해서 답했습니다. " 그 아저씨, 여기보다도 더 큰 병원으로 옮겨간다더라. 난 여기가 제일 큰 병원인 줄 알았어. " " 그랬구나. 너도 옮기지그래. " " 모르겠어. 그냥, 움직이고 싶지 않아. 이 정도 선에서 발악해보고, 아니면 푹 잘 생각이야. " " 미련은? " " 조금. 하지만 괜찮아. " 마음 한켠에선 기분이 상당히 불쾌했습니다. 어쩌면, 녀석은 죽음이라는 무언가를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도 살고 싶다는 티를 조금도 내지 않는 녀석이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아예 오랫동안 눌러앉을 심산으로 보호자용 의자를 끌어와 주저앉았습니다.
와...
" 할아버지는 잘 계시더라. " " 잊지 않았네. 고마워. " " 어, 응. 그럭저럭. ... 아, 맞아... 너, 혹시 쉘 실버스타인이라고 알아? " "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작가잖아. " " 거꾸로 총을 쏜 사자 라프카디오. 이런 책도 기억해? " 녀석은 잠깐 팔짱을 낀 채 고민하는 듯하다 알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알 사람은 알만한 동화인 모양이었습니다. 줄거리도 아이가 말한 것과 얼추 비슷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 동화에 빠진 거야? " " 그냥 주변에서 누가 읽길래. 나도 읽어볼까 생각 중이야. " " 동심이 부족했구나. 다 읽으면 나도 좀 빌려줘. " " 퇴원하면 빌려줄게. " " 의욕이 솟구치는걸. " 녀석은 빈약한 팔을 접어 올렸습니다. 근육 같은 건 쏙 빠져버렸을 텐데요. 그래도 제가 기다렸던 반응을 녀석이 적절히 보여줬던 터라 녀석이 죽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 너, 예전이랑 제법 달라진 것 같아. ' 지하철 안에서 잠들려던 순간, 머릿속을 맴돌던 그 말이 확 떠올랐습니다. 병원을 나오려 할 때 녀석이 제 등에 던진 질문입니다. 저는 녀석이 오글거리는 질문을 갑자기 던져서 제법 머쓱했습니다. " 사람이 앓기 시작하면 안 하던 말도 하고 그래? " " 그런가 봐. " " 너도 그래. 좀 바뀌었어. 병실 들어오면서. 소독약 냄새가 사람을 바꾸는 모양이지. " " 너도 집에서 잘 때 소독약을 옆에 놓아두고 그래? " " 아니. 가끔 혼자 술을 찾기는 해. " " 궁상맞다. 알코올이 문제구나. " 계속해서 그 대화가 리플레이 되기만 합니다. 보통, 저런 질문은 제가 자주 하고는 했습니다. 역할이 조금 바뀌었달지, 아무튼 사람은 아프면 기가 죽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심심해서 잡생각이 늘어난 걸까. 갈 때 MP3라도 하나 던져줄 것을 그랬습니다. 기차의 창문에는 한순간에 어둠이 밀려옵니다. 21세기를 뛰는 철마는 먼지 낀 터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 역 소리와 함께 익숙한 풍경이 창문 너머로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면서 제가 살던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오갈 때마다 실감하는 거지만, 역시 가깝지 않은 거리입니다. 분명 녀석을 병문안 가는 것은 제가 좋아서 하는 것인데, 이상하게 다녀오면 머릿속에 먹구름이 낍니다.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확실히 골치 아픈 먹구름. 장기를 둘 때 장군을 당한 기분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불쾌함을 걷어내려고 온종일 방 안에 틀어박힌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생각하는 법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벌써 저녁이 되었습니다. 저는 옷을 좀 더 얇고 편한 맨투맨으로 갈아입고,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웬일인지 오늘은 아이가 저보다 먼저 나와 있었습니다. 아이는 두 눈 가득 머금은 검은 호수에 도시를 담다, 시선을 돌렸습니다. 노골적이지 않을 정도로 낄낄대는 아이는 입가에서 뭉게구름을 뱉었습니다. " 지각이에요. " " 지각대장은 항상 너였는데. 슬슬 긴장해야겠네. " " 아. 장난해요? "
저희 둘은 난간에 기댄 채로 말이 없었습니다. 연기를 내뿜는 순간이 어느새 서로 같아져 있었습니다.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나서 꽁초를 양철통에 집어넣고는 옥상의 낡은 벤치에 주저앉았습니다. 페인트가 다 벗겨져 가는데도 여전히 다시 칠해지지 않고 있는 벤치. 보기 좋으라고 칠해졌던 페인트가 벗겨지고서야 벤치는 비로소 자신의 본질이 나무였음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투박한 벤치에서 화사한 색깔이 남아있는 부분은 구석구석 흔적 뿐입니다. 새삼 어떠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나름 같이 지내면서 정이 붙은 벤치입니다. 좋은 벤치는 좋은 그대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 생각이 많아보인다. 그쪽. " " 용하구나, 너. " " 저번에 제가 나쁜 버릇 있다고 얘기했나요. " " 얘기했었지. 지금 보니까, 진짜 나쁜 버릇인 것 같아. " " 맞아요. 혹시 제가 싫어졌나요. " " 아니. 아직은. " " 그렇구나. " 아이는 가벼운 걸음을 걸으며 제게서 조금 거리를 두고 벤치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학원때문에 힘든데 덕분에 꾸역꾸역 버티고있어 정말 고마워 오늘도 잘봤어
>>106 자주 찾아와주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 그래서.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 건가요. " " 글쎄. " 제가 무표정으로 말없이 바라보자, 아이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바라보는 순간에도 저는 생각 중이었습니다. 어떻게 말을 열어야 자연스럽게 제 고민을 해소할 수 있을까. 아이는 꽁초의 마지막 연기를 제 얼굴에 뱉었습니다. 저는 코앞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물러섰습니다. " 고약해. " " 그쪽이 또 넋을 놓고 있길래, 정신 좀 차리라는 뜻에서 해본 거예요. " " 빛이 바래가는 걸 지켜봐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 " 네? " 아이는 이런 질문은 생각하지 못했던 건지 멈췄습니다. 손에서는 꽁초가 떨어졌습니다. 외마디 앗하는 소리와 함께 꽁초를 다시 주워서, 아이는 꽁초를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습니다. 던지는 실력이 제법 좋습니다. 명중했습니다.
" 빛이 바래가는걸 지켜본다니. 무슨 뜻이에요? " " 그런 경험 있잖아. 내가 알던 무언가가 낡아가거나, 바뀌는 경험. " " 응. " " 보통 그런 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바뀌어서, 난 그런 순간을 싫어하지는 않았거든. " " ... 보기보다 진지한 구석이 있네요. " 아이는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두 발을 오므려 모았습니다. 말없이 두 팔로 다리를 모아서 제 말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제 막혀있던 말문이 트였습니다. " 그런데 오늘 그 순간을 봐버렸단 말야. 바뀌어가는 그... 과정을 말야. " " 정떨어졌어요? " " 아니. 그렇지만 앞으로 바뀔 것을 생각하니 조금 마주 보기 힘들어졌어. " 그것은 매정했습니다. 기억을 가공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했습니다. 기억 속 무언가가 예전보다 바래져 있다면 그저 ' 그땐 그랬었지. ' 라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억을 가공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남아있는 아련한 맛을 남겨둘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래져 가는 것을 중간에서 보는 순간 의미는 퇴색됩니다. 불안감이 가공을 막아섭니다. 그 순간부터 바래져 가는 것은, 추억이 되지 못하고 그저 낡아가는 무언가가 될 뿐입니다. 제 동경의 말로는 정해졌습니다.
와..마지막 말 멋있네
" 체념의 마법이 필요한 순간. " " 뭐? " " 체념해버려요. " 저는 어이가 없어 허,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그 말을 부정해버렸습니다. 저는 허무주의를 옹호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 ... 됐다. 너무 무거운 말을 꺼냈어. " " 나는 그걸로 꽤 여러 번 극복했는데. " 손사래를 치는 제 손을 아이가 깍지끼듯 맞잡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저를 주시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저는 순식간에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손에 힘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 바꿀 수 없거나, 바꿀 생각이 없다면 그냥 포기하세요. 그런 거 없어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 없어요. 정말로. " " 미안한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 " 바보같기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요. " 아이는 벤치에서 일어나며 맞잡은 손에 힘을 줬습니다. 그대로 아이는 체중을 뒤로 실었습니다. 이대로 넘어질 작정인 모양입니다. 저는 끌려가듯 일어서며 맞잡은 팔을 급히 제 쪽으로 잡아당겼습니다.
어색하게 잡아당겨진 아이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습니다. " ... 흐. 놓을까 봐 솔직히 조금 쫄았어요. " " 본능적으로 잡은 거야. 다치는 걸 방관하는 어른은 나쁜 어른이니까. " " 바로 지금 같은 거란 말이에요. " 아이가 잡은 손에 신호를 줘서, 저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서로 약속하지도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한 큐에 이루어졌습니다. " 눈앞의 저처럼 그게 위태로워질 때, 당신 본능이 반응한다면 잡아당기겠죠. 중요한 무언가는 그때 구해줘도 늦지 않아요. " " 내가 잡아당기지 않으면? " " 넘어지겠죠 뭘. 그런데 넘어져도 괜찮아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요. " " 비유가 억지스러워. " " 그러게요. 그쪽이 좋아하는 걸 밀쳤으면 좀 아귀가 맞았을 텐데. 그래도 반은 들어맞았죠? " 이 정도도 이해 못 하면 바보 어른이라며, 아이는 손을 놓고 그대로 양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습니다. 아이의 체념이란 건 이런 의미인 모양입니다. 지금부터 체념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해야 할까요. 그럼, 빛이 다 바랠 즈음에는 의지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까요.
기다릴겡
5-1. 이후,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났습니다. 먼저, 아이와 일종의 부탁을 주고받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서로 부탁할 때마다 이건 어디까지나 부탁이다, 라고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순간,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습니다. 들어보니 아이가 메시지를 보내놓았습니다. ' 그쪽 집에 있는 기타로 연습 좀 해도 돼요? ' ' 부탁하는 거야? ' ' 응. 부탁할게요. ' 저는 이내 마음대로 하라며 짧게 답했습니다. 읽음 표시가 사라지고, 아이는 정중하게 감사의 표시를 했습니다. 여기서도 드러났지만, 두 번째로 아이가 집에 놀러 오는 경우가 좀 잦아졌습니다.
딱히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는 조금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렇게나 첨예하게 사람을 경계하는 인상이었던 아이가 이리 쉽게 벽을 허물었다는 점에 놀란 것입니다. 한번은 왜 자주 집에 찾아오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답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 그냥. 이쪽 집에 있는 게 편해요. ' 집에 혼자 있으면서 자기 집이 불편하다니. 저는 의아했습니다. 외로움을 탈 성격은 절대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래저래 깊게 캐묻기는 성가시고, 저도 가끔 적적하지 않아서 좋으니 긴말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라진 점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제 앞에 앉아있던 의사는 읽고 있던 진단서를 넘기다 짧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 음주와 흡연을 절대적으로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본인께서는 간 경변이 진단되었습니다. " 그렇구나, 라고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를 수긍해버렸습니다.
병원을 나오고 나서야 시야가 탁 트였습니다. 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날씨는 어느덧 서늘해졌습니다. 의사는 앞으로 몇 번의 검사를 더 할 것이며, 간 경변은 진행을 늦출 뿐 완치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뭔가 묘해졌습니다. 후회된다거나 슬픈 것은 아니지만, 밀물처럼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저는 문득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더 이상 녀석은 문안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이렇게 가끔 몇 분 정도 전화만 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 웬일이야. 나한테 전화를 해주고. " " 저번 주에도 했잖아. 나 이제부터 의사가 술 끊으라고 하더라. " " 그러게 담배랑 술 좀 끊지. " " 그럴걸 그랬나봐. 아직은 실감이 잘 안나네. " " 그렇겠지. "
>>113 기다려줘서 너무 고마워. 앞으로도 꾸준히 써볼게.
볼때마다 생각하는데 글 잘써서 부러워ㅜ
잘보고있어 글 너무 예쁘다 자주 들를게
>>118 좋게 봐줘서 기쁘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고마워. >>119 예쁘다는 칭찬 고마워. 앞으로도 자주 봐준다니 더 신경써서 써볼게.
저는 아파트로 돌아가면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지금 제 앞에 닥칠 감정을 미리 이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 너, 처음 병원에서 진단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어? " " 나? 글쎄... " 잠깐의 짧은 침묵. 뒤척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습니다. " 살짝 쫓기는 기분은 들더라. " " 시간에? " " 나 자신한테. 나는 평소대로 지내고 싶은데, 계속 마음 한구석에서 달리라고 재촉하는 거야. 안 해본걸 빨리해보라고. " " 맞는 말 같은데. " " 나는 솔직히, 그러기 싫었거든. 그건 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거잖아. " 그렇게 즐기는 건 싫다. 녀석은 그 말로 자신의 기분을 정리했습니다. 녀석은 팔자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상황도 팔자라며 금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체념, 팔자처럼 자기 위안을 위한 방법들을 배워나가야 했습니다.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어깨 위로 차가운 것이 툭 떨어졌습니다. 하늘을 보니 여름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우중충해져 있습니다. 비가 오려는 모양입니다. 우산도 없던지라 저는 좀 더 걸음의 보폭을 넓게 잡았습니다. " 그럼 네 말은, 평소대로 지내야 한다는 뜻이구나. " " 응. 평소대로.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쭉 살아갔어.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 " 내 평소 대로가 뭔지 잘 모르겠어. " " 하고 싶은걸 뚝심 있게 하면 되잖아. 그런 건 네가 나보다 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 " 내가? " 순간 녀석은 희미하게나마 낄낄 웃었습니다. 마치, 자기만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 몇 년째 오디션 연습 중인 거. 그런 건 뚝심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 " " 너무해. 그런 말을 꺼내다니. " " 나는 그럼 쉬어볼게. 휴대전화가 너무 무거워. " " 미라가 되어버린 거야? " " 그럴지도 몰라. 그럼 안녕. " 전화는 그렇게 끊겼습니다. 아파트로 들어가기 전에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비를 약간 맞은 채로 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안경에 물방울이 져 있습니다. 안경닦이가 없어 옷으로 연거푸 안경을 닦아냈지만, 결국 물기를 깔끔하게 걷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아파트 계단을 올라서 복도 모퉁이를 돌려던 찰나, 저는 못 보던 아주머니와 부딪혔습니다. 얼핏 볼 때 나이는 30 후반, 내지 40 초반으로 보였습니다.
이렇다 할 말을 할 틈도 없이 그 아주머니는 제게 죄송하다는 말을 두어 번 하고는 급히 내려갔습니다. 딱히 죄지은 것도 아닌데. 아주머니가 내려간 후에, 저는 조용한 계단을 향해 죄송하다고 말을 했습니다. 다시 복도로 나와보니 아이가 문을 열고는 빼꼼 이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 설마 기다린 거야? " " 아니거든요. 복도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싸움이라도 난 건가 해서요. " " 그렇게 세게 부딪힌 적 없어. 기타 연습은. " " 아. Rylynn 연습했어요. 느리게 하면 조금은 칠 수 있게 됐다. " 자랑스럽다는 듯이 아이가 손가락으로 브이 표시를 만들었습니다. 들어가서 확인해보자며 제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는 안된다며 고개를 도리질했습니다. 제대로 칠 정도로 노력해서 절 놀라게 해주겠다고 아이는 그랬습니다. 제가 없을 때 연습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 모양입니다. 아이는 정중하게 제게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이번에는 저도 아이에게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의외의 반응에 아이는 조금 놀라서 멀뚱거리다 얼른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5-2.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저는 그대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차가운 바닥. 켜지지 않은 불. 어두운 이불 속에 갇힌 기분이었습니다. 그 아늑한 답답함이 좋아서, 이대로 있기로 했습니다. 최근, 엄마는 제가 사는 곳을 알아낸 모양입니다. 처음 집을 찾아왔을 때, 그 날은 잠에서 깬 채로 새벽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건만 저는 온종일 방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오기로 끝까지 버티고 버티다 눈이 짙게 충혈된 후에야 아침에 잠들 수 있었습니다. 작은 노크 세 번. 그 소리를 다시 듣는 게 싫어서 저는 최근 집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그 사람은 기타 연습을 하러 가고 싶다는 제 말에 흔쾌히 응해주었습니다. 연습을 하는 게 맞긴 하니, 마냥 핑계는 아니었습니다.
불현듯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두운 거실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저를 보채고 있었습니다. 직접 대면해서 제발 이러지 말아 달라고 말을 하면 어떨까요. 과연 그 상황에서 제가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엄마의 말 몇 마디에 홀려버려 엄마를 따라가지는 않을까요. 최근 제 일상은 모든 것이 불투명해졌습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 어른들은, 이런 일에 꿈쩍도 안 하던데. " 앞으로 엄마는 몇 번이나 더 저를 찾아올까요. 아예 어딘가에서 제가 나올 때까지 지켜보지는 않을까요. 불안감을 가득 머금은 풍선처럼, 제 기분은 위험할 정도로 허공에 떠 있었습니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서 불안합니다. 언제 떨어져 버릴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바람이 빠져 가라앉을 것을 알면서도 불안감과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결국 윽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작은 일에 너무 상처받으면 안 되는데. 벽에 기댄 채로 머리를 벽에 연거푸 들이받다 저는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채로 몸은 절로 웅크려졌습니다. 이대로 주민등록번호처럼 말소되었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순간, 똑똑 문 두드려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숨이 막혔습니다. 차에 치여버린 사슴처럼 불규칙한 숨을 뱉었습니다. 가슴을 부여잡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했습니다. " 악보 놓고 갔잖아. " 익숙한 목소리였습니다. 현관문의 렌즈로 확인해보니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제야 긴 숨을 내뱉었습니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잠깐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고 욕실로 향했습니다. 불을 켜보니, 처음 보는 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헝클어진 머리. 충혈된 눈. 누군가 붓을 들고 두려움을 갈아 넣은 먹을 제 얼굴에 칠해버린 모양입니다. 세수를 하면서 저를 되돌리는데 시간이 몇 분 걸렸습니다.
적당히 정돈을 끝내고 문을 열자, 그 사람은 악보를 건네려다 멈칫했습니다. 왜 악보를 주지 않고 버티는가. 설마 여기서도 부탁이니 뭐니 얘기를 하려는 건가. 저는 조금 인상을 구겼습니다. " 형광등은 저번에 갈지 않았나? " " 그냥. 꺼뒀어요. 자려던 참이었거든요. " " 어두운 걸 무서워한다며. " " 잘 때는 참고 자요. " 거짓말입니다. 저는 여전히 어두운 것을 무서워합니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어서 잠깐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 정말이야? " 그는 그의 것과 똑같은 제 악보를 돌돌 말아 제 머리를 툭 쳤습니다. 맞은 부위를 괜히 손으로 문대면서 저는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 아무튼, 그렇다니까요. " 제가 재빠르게 악보를 잡아채가도 그는 선뜻 악보를 내어줬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려던 참이었습니다. " 불 켜도 될까. 보는 내가 다 어두워지네. " " ...아, 아뇨. 지금은 조금 그래요. " " 집안 꼴이 엉망인가? 저번에 보니 이상할 정도로 깔끔했는데. " " 그런 건 아닌데... " 제가 말끝을 흐리자, 그는 저와 눈높이를 맞추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사람은 어른치고 가까이 다가와도 퍽 무섭지 않았습니다. " 최근 나에 대한 네 태도가 바뀌었다는 거 알고 있지. 좋은 뜻으로. " 저는 그 말을 깊게 해석하지도 않고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또 그는 넋 놓고 있습니다. 가끔 있을 때처럼, 제 얼굴을 유심하게 바라봅니다. 얼른 아무 말이나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어색함에 저는 신고 있던 슬리퍼를 바닥에 질질 끌었습니다. "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 " " 감이... 안 잡히는데요. " " 얼굴 때문이라면 불 켜도 괜찮은데. 그것보다, 불을 꺼도 울었던 얼굴은 충분히 보이거든. " " . " " 걱정 있어? " 엄마가 찾아올까 봐. 그래서 엄마를 대면해야 할까 봐 무서워요. 엄마와 대화를 나눌까 봐 무서워요. 엄마를 따라갈까 봐 무서워요. 엄마를 두려워하는 제가 무서워요. 이대로 영원히 혼자만 남게 될까 봐 무서워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서워요. 용기가 없어서 무서워요. 가족이라는 단어 때문에 피하게만 하는 죄책감이 무서워요. 그런 말들을 모두 억지로 삼켰습니다. 역한 비눗물을 삼키는 것처럼 버겁습니다. 말들을 삼키는 순간 눈시울이 찡해졌습니다. 괜히 창피하고 짜증만 납니다. 눈가 끝이 자꾸만 욱신거립니다. 저는 주먹을 옴팡지게 쥐고서 눈 끝을 계속 꾹 눌러댔습니다.
" 그쪽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 " 맞아. 누구라도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렇기는 한데. " 그 사람은 투박한 손으로 제 눈가를 지분댔습니다. 갈라진 굳은살들이 제법 거칠었습니다. 저는 최대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참아냈습니다. " 네가 해결할 때까지 도망치는 걸 조금 도와줄 수는 있지. " " ... 이렇게 울기만 하는데. 제가 어떻게 해결해요. " " 뭔가를 해결하고 싶어서 우는 건 아니니까. 우는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 저렇게 말한 데에는 어느 정도 따끔한 말을 듣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제 예상과는 다른 말에, 또 너무나 맞는 말에 저는 분해졌습니다. 얼굴을 퍽 받아치듯 묻어버렸습니다. 옷가지를 꽉 붙잡고 터지기 일보 직전이던 마음속을 게워내기 시작했습니다. 파키라 씨도, 그 사람도 말이 없었습니다.
6-1. 또다시 아침입니다. 예외 없이 아침은 돌아왔습니다. 어제 같은 일이 있었으면 밤에 자리를 양보해줄 만도 하건만, 부지런한 건 알아줘야 합니다. 어제, 아이에게서 사정을 얼추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전해 들은 내용으로 사정을 구성해보면 이러합니다. 현재 아이는 부모와는 따로 사는 중이며, 아버지 쪽과는 연락이 아예 닿지 않고 있다는 모양입니다. 그의 모친이 큰 병을 앓게 된 순간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나빠졌고, 모친은 종교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사정을 풀어나갔는데, 조심스럽게 생각하자면 부친은 모친과 아이를 강도 높게 학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학대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가 안쓰러웠습니다. 이후 어쩌다 할머니 손에 거두어져서 집에서 빠져나온 후, 사별하고 나서부터는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그의 모친이 주변에서 가끔 보이기 시작하더니, 한 달 전부터는 집에 찾아온다고 얘기합니다.
사정은 들은 후, 아이에게 계속 집에서 연습해도 좋다고 얘기했습니다. 조금 생각해보면, 이런 사정을 듣고 집에 오면 안 된다고 못을 박는 것도 제법 매정합니다. 아이는 반쯤은 감정에 복받쳐 얘기한 것이지만, 또 반쯤은 도움을 청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 지금은 고객님께서 통화할 수 없으니... " 녀석과는 통화가 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조언을 구해볼 만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녀석은 중환자가 된 것입니다. 다음번에 통화가 될 때는 직접 찾아가도 될지 물어보자고 생각하며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토마토와 달걀, 그 외 잡다한 채소가 다수입니다. 이것들을 대충 볶아먹으면 되겠습니다. 물을 냄비에 담아 뜨겁게 데우면서 토마토를 씻기 시작했습니다.
" 저기요. 그쪽. " " ... 허흐. " 순간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토마토에 칼집을 내던 저는 칼을 내려놓았습니다. 요란하게 덜컹 소리가 났습니다. 다행히도 베인 손가락은 없었습니다. " ... 허흐가 뭐예요. 허흐가. 푸하핫..! " " 올 때는 물어보고 오기로 하지 않았어? 어제 그렇게 울더니, 컨디션은 나아진 모양이네. " " 아... ... 그, 그거에 관해서 얘기하러 온 거예요. 갑자기 들어온 건 죄송합니다. " 저는 토마토에 칼집을 작게 내서 냄비에 거꾸로 얹어두었습니다. 잠깐 짬이 나자 손을 대충 수건에 닦고 꾸벅 숙인 아이의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 너무 공손하게 사과하지 않아도 돼. " " 습관이 몸에 베어버렸어요. ... 아니, 하려던 말은 따로 있어요. 그쪽, 수족관 좋아하나요? " "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 제법 뜬금없는 말이었습니다. 수족관을 좋아하느냐니.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보니 저는 수족관은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틀에 박힌 지극히 평범한 길만 걸어갔습니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이렇다 할 무언가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녀석을 동경한 나머지 억지로 제 몸을 망가뜨렸던 건, 그러한 저 자신에 대한 반발일지도 모릅니다. " 어쩌다 얻은 티켓이 두 장 있는데,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 " 부탁하는 거야? " " 부탁합니다. 저 수족관을 한번 가보고 싶어요. " " 그럼 냉장고에서 달걀 좀 두 개 정도 꺼내줄래. " " 저 아침 안 먹었는데. " " 세 개. "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대파 아랫부분, 마늘을 잘게 썰어 넣었습니다. 아이는 어느 정도 눈치가 있었습니다. 어느새 달걀을 풀어서 섞고 있었습니다.
" 오늘 날씨, 오후에 비가 올 수도 있데요. " 아이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일기예보를 보며 말했습니다. 지금 날씨는 이렇게 화창한데. 날씨의 변덕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다 먹은 식기를 싱크대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여러 번 울렸습니다. " 그럼 저는 준비하고, 우산 좀 챙겨올게요. " " 어, 응. 그래. " 아이가 나가고, 저는 우선 설거지 거리를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현관문 앞에서 이어폰을 귀에 꼽고 있었습니다.
차가 주차된 곳으로 내려가면서 아이는 말이 없었습니다. 이따금 흥얼거릴 뿐이었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질문하자, 아이는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습니다. " 무슨 노래 들어? " " 그레고리오. 후루카와 본점이 불렀어요. " " 후루카와 본점.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걸. " 문을 열고 자동차 시트에 자리를 잡자, 아이는 선뜻 뺐던 이어폰 한쪽을 제게 쥐여주었습니다. 그쪽도 빠지게 될 거라면서 아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노래의 가사는 느리게, 그래서 마음속에 천천히 와 닿았습니다. 언제 들어도 부담이 없을 사근사근한 노래입니다. 순간 읽을 줄 아는 문장이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순간 그 노래에 빠져버렸습니다. " 이게 사랑이야, 그레고리오. " " ... ... 헤. 일본어도 알아요? " " 조금. " 아이는 순간 멈칫했습니다.
수족관은 생각 이상으로 무척 거대했습니다. 이른 시간에 왔음에도 줄이 길어서, 저희 둘은 조금 기다려야 했습니다. 티켓을 교환하기 위해 기다리면서, 저는 이상한 점을 느꼈습니다. 아이는 같은 노래를 내내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에 익숙해져서 저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같은 노래를 계속 듣는 거 지루하지 않아? " " ... 아. 바꿔줄까요? " " 아니. 그런 건 상관없는데, 궁금해졌거든. " " 아아. 뭐, 그냥. 좋잖아요. 한 노래에 익숙해지는 거. 저는 금방 싫증 나지 않고 계속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좋다고 생각해요. " " 무언가에 싫증 내지 않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 " 좋아는 하되, 빠지지만 않으면 돼요. " " 어려운데, 그건. 이러나저러나 결국 거리감이라는 게 남게 되잖아. " " 그게 우리가 슬퍼하는 이유 아닐까요. " 대화가 산으로 가는데도 묘하게 성립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오묘한 대화 속에서 차례가 저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티켓을 확인한 담당자는 손목에 묶을 수 있는 질긴 재질의 팔찌를 건네주었습니다.
아쿠아리움 내부는 넓고 어두웠습니다. 특히 빛이 많지 않아서, 얼핏 보면 새벽 바닷속에 잠긴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굵고 투명한 유리창만을 경계로 아쿠아리움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유유자적하는 물고기들과 흐름 없는 물.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곳은 바다처럼 아름다웠습니다. 환경이 아름답다기보다, 은은히 떠다니는 물고기 그 자체를 아름답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아쿠아리움의 중앙으로 나오자, 매우 큰 원통형의 수족관이 보였습니다. " 어째서 상어는 저기 있는 물고기들을 안 잡아먹어요? " 문득, 아이는 수족관에서 같이 헤엄치는 상어와 작은 관상용 물고기 여럿을 가리켰습니다. 이상하게도 상어는 작은 물고기들을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서로 사이가 좋아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뭔가 부조리를 느꼈지만, 이런 광경 자체를 처음 봤던지라 그럴듯한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 저기 있는 물고기를 잡아먹을 이유도 없잖아? " " 배가 고프잖아요. " " 조련사들이 밥을 주겠지. " " 조련사들이 밥을 주지 않으면 잡아먹겠네요. " " 그렇겠지. 상어는 조금 외로워지겠지만. " 그렇구나. 라며 아이는 납득하고 통로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터널 형식의 통로는 유리로 감싸져 있었고, 그 위로는 푸른 물과 크기가 큰 물고기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습니다. 통행자들을 우려한 것인지 터널의 바닥에는 조명이 장치되어 있었습니다. 푸른 물과 밝은 빛이 만들어내는 그라데이션은 참 보기 좋았습니다. " 천천히 가. " " 얼른 가서 보고 싶잖아요. 처음 오는 건데. " " 그래서 천천히 가자는 거야. 오랫동안 있고 싶어서 그래. " " ... 아, 그래요? " 아이는 제 쪽으로 걸어와서, 발걸음을 맞추었습니다.
" 그쪽은 왜 진작 수족관에 가보지 않았어요? " " 너는? " "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거 아니에요. " 아이는 불만족스럽다며 바로 옆에서 어깨를 부딪쳤습니다. 한걸음 밀려나며 조금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바라봤습니다만, 아이의 표정이 더 짙어서 이내 기색을 거두었습니다. " 기회가 없었거든. " " 만들 수 있잖아요. 부모님께 졸라서 가자고 하거나. " " 나는 두 분이랑은 간극이 깊었어. 두 분 맞벌이 하셨거든. 늘 형이랑 비교돼서, 같이 있는 날에도 말 꺼내기가 쉽지 않았고. " " 미안해요. 역린을 건드렸나요? " " 네 역린도 건드릴 예정이니까 괜찮아. " 아이는 수긍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제 다음 말을 재촉했습니다.
'아이'랑 '나'랑 연인 관계야?아님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 거야?
>>142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좋아하는 감정은 어느정도 생기는 중.
쓰라린 기억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조금 먼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흐리멍덩한 기억. 먼지를 걷어내고 해상도를 조금씩 올려갑니다. 초점이 맞춰지면서, 눈앞의 페언트를 흘린 듯한 추상적인 형상은 조금씩 선명해져 갑니다. 두 손을 들어 보입니다. 어린 두 손은 아스팔트 바닥에 긁혀 피가 납니다. " ... 빨리 따라와. " 어머니는 빠른 보폭의 걸음으로 멀찍하게 먼저 걸어갑니다. 저런 보폭을 아이가 따라잡을 수 없다는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이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그 날 저녁, 어머니는 저를 바닥에 밀쳐 내팽개쳤습니다. 어머니와 저 사이의 간극은 약 5m 정도였습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저와 있을 때면 형과 함께 있을 때와 온도가 사뭇 달랐습니다. 어렸을 적의 저는 그런 두 가지 모습 중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피곤한 것이다. 그런데 형이 집에서 의젓한 모습을 보이니 그 피곤이 풀리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저는 그러한 일종의 위안을 스스로 학습했습니다. 형은 무척이나, 전형적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외향적이고, 활발하고. 때로는 사람들의 눈치를 볼 줄도 알았습니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온다거나, 이런저런 멋진 얘기들도 꺼낼 줄 알았던 형은 집안의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그러한 반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에, 늘 비교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부모님이 제게 거는 기대치도 낮았습니다. 그럼 그렇지, 라는 말로 저는 제게 닥칠 위험과 우울을 조심스레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형의 조명을 위해 음지에서 조용히 기생하는 삶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딱히 노력에 대한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저와 형 단둘이 있는 틈을 타서 저는 형에게 어떠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고등학생이고 형이 대학생일 때의 일일 것입니다. 질문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답은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 너 자신에게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돼. " " ...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형. " " 나도 잘은 몰라. 엄마가 좋아할 만한 아들을 흉내 내는 거지. " 어머니가 돌아오시자, 형은 귀신같이 밝은 인상으로 어머니의 짐을 거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형의 모습마저 칭찬하며 저를 없는 사람처럼 슥 지나갔습니다. 형을 따라 해야 할까. 따라 하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제대로 된 해답도 듣지 못해서, 오히려 그 답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정확히 1년 하고 4개월, 형은 뺑소니를 당했습니다. 구급차로 이송되는 도중 형은 숨을 거두었고, 저는 장례식을 치르느라 학교를 오랜 기간 쉬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서글프게 며칠 밤낮을 울고 계시던 어머니의 옆에서 저는 주저앉았습니다. 그런 제 옆에서 어머니는 불투명한 발음으로 형의 인간다운 모습을 하나하나 부르짖었습니다. 그것은 찬가에 가까웠을지도 모릅니다. " ... 미안해, 엄마. " " 너는 모를 거야. 너희 형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난 네가 형의 반만이라도 따라가기를 바랐었어. " " 앞으로는 달라질게. ... 정말이야. 노력할 테니까. " " 아무것도 아닌 양 말하지 마라. " 순간,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이어지던 무언가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양복을 입은 채로 저는 장례식장을 빠져나왔습니다. 이 주 정도 뒤, 저는 학교에 돌아왔습니다. 같은 반 녀석들은 딱히 의식하지 않는 척했지만, 이미 저와 녀석들 사이에는 묘한 거리감이 생겨있었습니다. 악의 없이 조심한다는 것이 그러한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졸업하고서 한동안 아르바이트를 구했습니다. 아버지와 홀로 상의한 끝에, 집에서 독립해 자취방을 얻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의 지원마저 끊고 완전한 독립에 성공한 것이 지금입니다.
재밌다! 스레주 연휴 잘 보내고 와 ㅎㅎ
맨첨부터 보다가 레스 안달았던얘인데 이번에 몰입하다가 조금 울컥했어, 추석 잘보내!
>>148 재미있다고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 스레더도 즐거운 연휴 보내. >>149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말을 들어서 기분 좋다. 스레더도 추석 즐겁게 보내기를.
이후, 독립을 하는 동안 집에서 여러번 전화가 왔습니다. 독립을 한다고는 했지만, 가족과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제게 불편한 친절을 베풀고는 했습니다. 그러한 친절을 받을 때마다, 저는 내장을 뽑아내는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저를 위한 친절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마, 본인에게 주어진 어머니라는 역할을 수행하는데에 묘한 사명감을 느끼는 모양이었습니다. 그것을 수행할 대상이었던 형이 없어지자, 이제 그 화살이 제게 향한 것입니다. 저마저 없다면, 어머니라는 역할이 부정되고 맙니다. 아이는 용케 제 말을 차분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말을 들으면 조금 불편한 티를 내거나, 어설픈 위로를 할 법도 한데 아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두 손을 깍지낀 채 그 위로 얼굴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단 한 번도 수족관을 가자는 얘기를 못 했다고요? " " 응. 딱 한 번, 형이 가자고 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안 갔어. " " 기회가 있었는데, 왜 거절했어요? " " 수족관에 대한 내 기억이 무너질까 봐. 상상이 되잖아. " 어딘지 모를 수족관. 그곳에는 분명 물고기가 가득할 것입니다. 형과 부모님 사이에 낀 저는 흰색 옷에 묻은 얼룩 같습니다. 선천적으로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으로 만들어진 거리감. 수족관에 가서 새삼스레 그러한 거리감을 맛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곳에 억지로 끼어드는 것이 저는 싫습니다. 그럴 바에 야는 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어땠을까, 라고 막연한 상상을 하는 것이 훨씬 나았습니다. 만약, 실제로 같이 갔었다면 즐거운 추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억하는 편이 불행을 직면하는 것보다 상책입니다. "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다. 불쌍하네요. 그 쪽은. " " 내가 불쌍하다고? " " 응. 꺾이다 못해 비틀어졌어요. 줄기가 땅속을 향한 나무 같아. " 아이는 어떤 감정을 느낀 것인지, 평소와는 색이 다른 미소를 입가에 띄웠습니다. 몸을 일으킨 아이는 제 어깨를 잡고, 문득 고개를 끌어당겼습니다. 한차례 아이가 볼을 맞부비다 놓아주는 순간, 저는 귀가 먹먹해졌습니다.
" 또 멍때린다. " 아이가 말을 꺼내는 순간 정신이 들었습니다. 뭐가 재미있는지 아이는 비릿하게 웃고 있습니다. 살펴보니, 저는 갈 곳 잃은 손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습니다. 얼핏 손을 피려 하니 얼얼했습니다. " 이게 무슨 짓이야. " " 장난 좀 쳐봤어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 " 물어본 건 너였잖아. " " 그래서, 싫었어요? " 전혀,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잠깐의 순간에 사람 온기를 느껴본 것은 간만이었습니다. 술기운에 취기가 오르는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거북하지 않고, 그것은 눈 녹듯 멀어지는 온기였습니다.
" 그쪽, 되게 재미있어요. 지켜보다 보면. 내가 진작 그쪽을 만났다면 어땠을까요. " " 별로 좋았을 것 같지는 않아. " " 남들이 보면 그렇겠죠. " " 그러는, 너는. 이제 슬슬 네 이야기도 말해줘야 되지 않아? " 저도 아이를 따라서 몸을 일으키니 아이는 저로부터 거리를 뒀습니다. 본인 입으로 옷톳토, 하는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치더니, 시선을 돌려 돌고래를 바라봤습니다. " 돌고래는 무척 지능이 뛰어나다고 그래요. 그래서, 자기감정을 이해할 수 있고, 우울함을 못 이겨 자살하는 돌고래도 드물게 있데요.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 " 제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해줄게요. 지금은 수족관을 즐기고 싶어요. " " 미루는 게 어디 있어. 비겁하게. " " 차분하게 정리해서 말하고 싶은걸요. " 아이는 뒷짐 진 채 백치처럼 가지런한 이빨을 보이며 웃었습니다. 먼저 그대로 걸음을 옮겨나가서, 저는 별수 없이 아이를 따라 좀 더 수족관을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수족관을 구경하는 것은 생각보다 제법 색다른 구경이었습니다. 저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말하길 본인보다 제가 더 구경에 집중했다고 했습니다. 사각형의 넓은 어항 안에서 열대어들이 여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던 중, 건너편에서 보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아이는 가볍게 헤실 웃고는 어항을 경계 삼아 입을 달싹였습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제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아이는 또 헤실 거립니다. 그대로 아이는 슥 멀리 걸어갔습니다. " 흐흐, 좋은 경험이었어요. 아쿠아리움에 오기를 잘했다 싶어요. " " 응. 나름 괜찮았어. " " 나름은 무슨. 혼자 10분 동안이나 넋 놓은 채로 가오리를 봤잖아요. " " 하지만 나폴거리는 게 보기 좋잖아. 그보다, 그걸 세고 있었어? " " 바로 옆에서 세고 있었는데. 홀딱 빠졌군요. "
" 좀 정리가 됐나? 얘기 말이야. " " 아뇨, 아직. " 제가 답을 보채자,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 차분해서, 꺼리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이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 잠잠했습니다. 편의점을 지나치려던 순간, 아이가 자동차의 창문을 소리 내서 두드리며 저를 불러세웠습니다. " 술 사 갈래요? " " 너, 나이가 괜찮던가. " " 그쪽이 사 와주세요. 술기운이 아니면 말을 못하겠어요 ." " 안돼. " " 그러지 말고. 저 술 마시는 거 이번이 처음 아니니까 괜찮아요. 아니면, 그쪽이 자신이 없는 건가요. " 저를 떠보려는 심상에 저는 브레이크를 걸며 차를 세웠습니다. 아이와 대화만으로 윤리적인 제 가치관을 떨구어 놓았습니다. 아이의 흉터를 보며 사랑에 빠져버린 저에게, 사실 이런 것을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편의점에서 적당한 주전부리와 수입 맥주를 몇개 사서 돌아오자, 아이는 봉투를 들여다보며 맥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방으로 들어와서 곧바로 맥주캔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는 먼저 좀 씻고 올 테니, 저에게도 씻고 있으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먼저 씻고 나온 후 30분 정도. 입이 심심해서 먼저 주전부리를 뜯으려던 순간 문이 열렸습니다. 아이는 아직 머리가 다 마르지 않은 채로 실례한다는 소리를 내며 들어왔습니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볼가에 닿아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서, 새삼스레 아이가 곱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청소년이 같이 술을 먹자고 하는 건데, 별로 놀라지 않네요. " " 놀랄 게 뭐 있어. " " 혹시 기대했어요? " " 아니. 기대 안했어. 괜한 걱정은 집어넣어도 돼. " " 혹시 몰라서 얘기하는데요. " 아이는 맥주캔을 열었습니다. 필라이트. 저는 별 감흥 없는 그 밍밍한 맛이 좋아하는데, 그것을 아이가 집어 들었습니다. 다른 맥주도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이는 저걸 제법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잘도 저런 어설픈 맥주를 좋아합니다. 제가 건배를 하자는 듯 아이는 맥주캔을 조금 기울이며 말했습니다. " 저 같은 애랑 장난쳐도, 별 재미 없을 거예요. 남들이 그러더라. " " 본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기나 해? " 제가 맥주캔을 튕기자 아이는 기세 좋게 한 모금 쭉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숨을 크게 뱉고, 아이는 말을 시작했습니다.
" 있죠. 저는 원래대로라면 두 분 계획에 없는 아이라고 그랬어요. 뭐랄까, 폭탄이라고 해야 하나? 되게 갑자기 생겨버린 아이였거든요. 그래도 우리 엄마는 나를 키워보려고 애썼어요. 아빠도 그렇지만. 그래도 암묵적인 분위기라는 게 있었어요. 내가 부담된다는. 그래서, 저는 집안에서는 말을 잘 안 했어요. " " 듣고 있으니까, 천천히 얘기해도 좋아. "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이어나갔습니다. " 그러다가 제가 10살쯤이었을까, 엄마가 무척 아팠어요. 무슨 병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주변인들이 손발을 많이 들어야 하는 병이래요. 원래부터 두 분 사이가 안 좋기는 했는데, 그때 아빠가 엄마를 무척 원망했어요. 저 계집애에다가 너까지 왜 그러냐고. 저는 제가 뭔가 잘못을 한 것 같아서 아빠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그때 처음 손찌검을 당했어요. 남자는 힘이 무척 세더라. 분명 아빠는 그때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그 이후로 계속 그랬어요. 매번 미안하데, 미안하면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
" 엄마가 입원하고, 집에서는 저랑 아빠랑 둘만 있었거든요. 가끔 아빠가 며칠 집안을 비우고. 하루는 새벽에 자다 깼는데, 배가 묵직한 거야. 올려다보니 아빠가 있었죠. 제가 휘둥그레해서 아빠를 부르니까, 갑자기 아빠가 목을 졸랐어요. 본능적으로 이건 뒤틀렸다, 싶어서 말은 해야겠는데 소리는 나오지 않고. 그때 아빠 표정은... 어땠을까. 공포영화 ' 바바둑 ' 알아요? 거기 나오는 귀신 얼굴 같았어요. " 저는 위로를 하는 데에는 무척 서툴러서,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한숨을 쉬며 맥주캔을 내려놓음으로써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 결국 아무말은 못했는데, 아빠 표정이 오락가락하더니 어느 순간 손이 풀려있더라고요. 아빠도 내려가 있고. 기억도 잘 안나요. 갑자기 절 안으면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그걸 밀치지 말아야 했던 것 같아요. 그 날부터 저는 아빠가 무서워서 집에 잘 안 들어갔어요. 집에 돌아가 봐야 뻔했으니까. 때리고는 미안하데. 그러면서 다음 날 뭘 사 들고 왔는데, 저는 그런 건 거들떠보지도 안봤어요. " " 그런 걸 받아들이면, 폭력을 용인하는 기분이 들 테니까. " " 정확해요. 그렇다고 폭력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지만요. "
" 그러는 사이 엄마는 용케 종교를 알게 됐나 봐요. 딱 봐도 사이비인데, 그게 그렇게 좋데. 자기를 품어줄 수 있어서. 어느 정도 퇴원할 정도가 되니까, 엄마는 그대로 사이비 종교에 푹 빠져버렸어요. 뭔가 부적이나 그림 같은걸 잔뜩 사오더라. 그럴 때마다 아빠는 점점 엄마 아니면 저에게 자기 불안감을 표출했어요. 엄마는 그런 소홀함에서 종교를 더 찾고. 일종의 루프처럼, 그게 반복되다 보니까 저 둘이 정말 가족일까 싶더라고요. " " 그렇구나. " " ... 그쪽, 이거 알고 있죠. " 아이는 문득 은근히 감추고 있던 손목을 보였습니다. 최근에는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흉터는 푸르스름하게 남아있습니다. 새삼 보면 아이는 나갈 때 손목이 가려지는 옷을 선호했는데,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 " 참, 나. 말이 돼요, 그게? 그쪽이 알면서 모르는 척해주는 게 좋았던 거예요. " " 그래서? " " 응. 그래서. 제가 몸을 함부로 다루던 게 14살부터였을 거예요. 그게 자기한테 독이 된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있다는 감각이 둔해져 버려요. 그렇게 지내다 우연히 할머니가 저를 찾았고, 제 몸을 보고는 잔뜩 울었어요. 저는 또 그때 제가 잘못한 걸까 생각했는데, 아무 말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거두어진 게 16살. 할머니가 먼저 가시고 혼자 살기 시작한 건 17살. " " 할머니께는... 적잖은 충격이었던 모양이야. " " 정말, 정말 그랬나 봐요. 급격하게 할머니는 쇠해졌는데... 그래도, 저 그 1년 동안 너무 즐거웠어요. 이런 게 가족이라면, 놓친 시간이 너무 아까울 정도로. " 아이는 잠깐 말을 멈추고는 저번처럼 두 손으로 눈을 지분 눌렀습니다. 아이는 눈이 시큰해질 때면, 저리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리자, 방 안은 침묵이 내리 앉았습니다. 오직 시계 초침소리만이 흐릅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아이였습니다.
" 나중에, 학교에 알려졌어요. 우리 엄마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고. 그때부터는 애들이 잘 놀아주지도 않아서, 괜히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랑 어울렸어요. 술 마시고, 담배하고. 치근덕거리면서 어른스럽다 어떻다 얘기할 때 기분 좋아했는데, 지금 보면 그것도 괜한 짓이었네요. 그쪽 나이 또래 사람이랑 사귀어본 적도 몇 번 있어요. 자려고 할 때마다, 내가 너무 무서워한다고 피하니까 슬슬 멀어졌지만. " 아이는 제 반응을 살폈습니다. 저는 어쩐지 아이가 하는 말에 모두 납득해버려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이는 벙찐 포정을 짓다, 헤실 웃었습니다. 어느 포인트에서 안심한 것인지 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 그래서 혼자 살다가, 우연히 그쪽이랑 접점이 생긴 거예요. 혹시 의도한 거예요? " " 아니. 시간이 겹친 건 우연이야. " " 그렇구나. 그래서, 감상이 어때요? " " ... 감상이라니? " 캔을 비우다 보니 아이는 조금 췻기가 오른 게 분명합니다. 아이는 대뜸 몸을 일으키더니 제 방향으로 기어오며 눈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 제 이야기를 들은 감상 말이예요. " "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는 거야? " " 부탁할게요. " " 부탁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 나는 너를 강하다고 생각해. 나보다도 더. " 그 말에 아이는 일순간 정지하더니, 이내 제 앞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습니다. 좀 더 말해보라며, 마시던 캔을 내려두었습니다. 저는 잠깐 말을 멈추고, 취기에 헛소리하지 않게 말들을 정돈했습니다.
" 경우는 다르지만... 아무튼, 너랑 나는 홀로 서야 했다는 점은 같잖아. 나는 그때, 다른 사람을 보며 견뎠어. 누군가를 동경해서, 그 사람을 쫓아가려 했지. 항상 그랬어. 맞서보려는 생각은 없이 마냥 그랬어. 그런데 너는 달라. " " 듣다 보니 조금 낯간지럽다. " " 너는 어떻게든 혼자 답을 찾아보려 했어.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 결과 네가 설령 조금 무너지고 망가진다 해도, 나는 그런 네 모습을 더 높게 사. " " 내가 망가졌어요? " " 누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망가져. 나도 그래. 너만 그렇다는 게 아냐. " " 그렇구나. " 아이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홍조를 띤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윽고 두 팔을 벌리며, 아이는 대뜸 제 품 안에 안겨들었습니다. 머릿속에서 뻥, 하며 무언가 터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무어라 하려던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술기운이 올랐음에도 아이의 몸은 되레 차가웠습니다.
품 안에서 뒤척이는 아이를 밀쳐내려고 하자, 아이는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습니다. 움직이기가 부담됩니다. 감각과 행동에는 조금씩 시차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 술김이에요, 술김. " " 그 술김이라는 핑계가 무섭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 " 나는 무섭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그쪽이 이런 걸로 책임을 피하지도 않을 것 같고. 내 말이 맞죠. " 아이는 그대로 고개를 들며 고개를 기울이곤 헤실 웃었습니다. 흰색의 얼굴에 져 있는 빨간 흉터들. 손목에 새겨진 아이가 혼자 견뎠던 횟수. 저는, 깨닫고 말았습니다. 아이라는 그림에 사랑에 빠진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혼자 견디고 있다는, 그림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동경이었습니다. 그러한 동경이 무르익어버린 것입니다. 눈을 마주한 채로, 숨만 내쉬며 머릿속 감정의 개화에 집중했습니다. 아이는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듯 옷깃을 꽉 붙잡았습니다.
" 예전에, 제가 그랬죠? 저, 남의 생각을 대충 짐작하는 버릇이 있다고. " " 응. " " ... 그러니까, 그쪽은 그래서는 안 돼요. " " 어째서? " " ... ... 말아. " 말이 들리지 않는다며 아이를 좀 더 가까이 끌어안았습니다. 아이는 입술을 지근 물다, 복잡한 표정으로 글썽였습니다. " 그랬다간, 이전보다도 더... 그 쪽에게 의지하고 말아. " " 아무래도 상관없어. " 긴말 없이 앉아있는 채로 몸이 포개어졌습니다. 얼굴을 묻은 아이는 말이 없고, 저는 아이를 재우듯 토닥였습니다. 다만 등을 토닥일 때마다, 아이는 이따금 훌쩍이는 소리를 내고는 했습니다.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에, 처음으로 공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7-2.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희미하게 빛을 내는 형광등이 보입니다. 찢어져서 날짜를 알 수 없는 달력. 구석에 나뒹구는 옷가지들. 텔레비전에서는 이런 분위기와는 대조되게, 화목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울음소리를 따라가자, 어린아이는 쭈그린 채로 고개를 무릎 속에 파묻고 있습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자, 저는 주저앉았습니다. 왜 우느냐 물어봐도 고개를 가로저을 뿐입니다. 위로하고자 손이 닿자, 아이는 몸을 움츠립니다. 그런데도 어깨를 토닥이자 아이는 얌전히 손길에 수긍합니다. 아이에게 결핍된 것. 지금의 제게서 결핍된 것. 그 순간, 텁텁한 소리가 나며 아이는 모래처럼 사그라듭니다. 급하게 끌어안아 보려 해도 무너지는 아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손안에 남은 건 황색의 모래 뿐. " ... 정신 차려. 괜찮아? 어디 아파? " 순간 저는 소스라치게 몸을 일으켰습니다. 시간은 아침 6시입니다.
" ... ... 어제 무슨 일 없었죠? " " 아무런 일도 없었어. 잠든 너를 옮기는 게 힘들기는 했지. " " ... 그렇게 안 무거워요. 오늘은 일없어요? " " 나, 오전 중에 병원에 가봐야 해. 겸사겸사 할 일도 있고. " " 어디 아픈가 봐요. " 그 사람은 잠깐 멈칫하고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 아, 응. 간이 안 좋데. " " 그런 사람이 술을 마셔요? " " 그러게. 아-, 졸리다. 나는 조금 더 잘 거야. " " 잠이 깨버렸어요. " 말없이 투박한 손이 머리맡에서 눈을 내리덮었습니다. 그러한 행위를 몇 번 하고서, 그는 저로부터 등을 돌리며 누웠습니다.
" 저기, 감사합니다. " " 오늘은 뭐가? " " 그냥... 제 억지를 받아줘서요. " 한숨을 짧게 쉬고서,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조금은 웅얼거리듯이 말해서, 듣기가 모호했습니다. " 내가 원해서 이러는 거니까,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 " 그래도. " " 정 고마우면, 9시쯤 포트에 물 좀 올려줘. 부탁할게. " 눈을 덮던 손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습니다. 머리가 산발이 되어 헝클어졌는데도, 기분은 새삼 좋았습니다.
저는 한 번 일어나기로 한 시간에는 분명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자신이 있다고 할지, 몸이 알아서 일어나고는 하니까요.' 정확하게 9시에 일어나서 포트 전원을 누르자, 그 사람이 시계를 보고는 신기하다는 소리를 냈습니다. " 정확하게 9시야. " " 어때, 제 생체시계 좀 대단하죠. " 이윽고 그가 먼저 씻으러 간 사이,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습니다. 이런 아침부터 전화하는 사람이 누구일지. 욕실까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직접 가져다줄까 했지만, 그건 저희 둘 사이에 너무 거추장스럽습니다. 저는 느긋하게 커피를 타면서 그 사람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 그쪽, 전화 오던데요. " " 누가? " " 저야 모르죠. " 그 사람은 전화 올 사람이 없다며 휴대전화를 들었습니다. 저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 제 몫의 커피를 들어 홀짝였습니다. 그 사람은 컵을 들어 올리려다, 잠깐 멈추다 다시 컵을 내려놓았습니다. 저런 반응은 처음입니다. 그 사람은 잠깐 당황하다, 한숨을 크게 푹 쉬었습니다. " 싫어하는 사람이예요? " " 아니. 있어. 좋아하는 사람. " " 애인이에요? " " 비슷하긴 한데 달라. " " 애인이랑 비슷한데 다른 게 어디 있어. 아, 잠자리에서만 보는 사이인가요. " " 네가 그런 말을 어떻게 알아? 그리고 절대 아냐. 좀 더 건전한 관계지. "
" 커피 마시고 있어. 전화하고 올 테니까. " " 응. " 아침 바람은 밤바람과는 다르게 차갑습니다. 열린 창문의 커튼이 나풀거리며, 쾌청한 찬바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잠깐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통화를 하며 밖으로 걸어나갔습니다. 포트에 물 좀 올려달라 해놓고, 커피는 마실 생각도 없는 모양입니다. 저는 커피를 마시며 잠깐 집 안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햇빛이 들어와서 집안의 아이보리색 벽지가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집안은 딱 혼자 살기에 적합할 정도의 가구만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빈공간은 없지만, 그렇다고 답답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절묘한 가구배치는 어쩐지 그 사람을 닮은 것 같습니다. 기타를 따라서 시선을 옮기니 반쯤 열린 그 사람의 방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잠깐만 둘러보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의 분위기는 어딘가 오묘했습니다. 지금이 창천의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방안의 분위기는 오후를 연상시켰습니다. 커튼의 촘촘한 틈 사이로 햇빛이 여과되어 호박색을 띠며 방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방의 벽면에는 방음처리가 되어있고, 앉은뱅이 의자를 중심으로 악보, 기타 등이 불규칙하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천천히 발로 마룻바닥을 지분대며 걸어가,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봤습니다. 의자는 바퀴가 달려있고 푹신했습니다. 그대로, 책상에는 여러 종이가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무언가 적혀있다가 구겨진 종이. 조심스레 펼쳐보니, 그것들은 모두 악보입니다. 그 종이들 사이에서 구석, 여러 장 겹쳐져 있는 악보집을 찾았습니다. 선이 난잡하게 그어져 있지만 분명한 악보입니다. 그것을 선들 사이로 촘촘하게 수놓아진 음표들이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악보에는 여러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그 중 가사 몇 구절이 눈에 들어와서, 저는 눈으로, 그러나 어느새 무의식중에 입으로 가사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 눈을 뜬 채로는 이상을 볼 수 없지만, 눈을 감은 채로는 현실을 볼 수 없더라. 저울질하는 척 버티다 팔이 저릴 즘 모든 걸 내려놓으면 어떨까. " 그 사람이 이렇게 간단하게 체념을 논할 줄이야. 저는 내심 놀랐습니다. 악보의 구성이 꽤 단조로워서, 저는 묘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잠깐 문을 열고, 아직 그 사람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확인한 저는 다시 돌아와 의자에 앉으며 악보를 걸었습니다. 기타를 집어 들고, 그 사람이 쓰던 곡을 조금만 음미해보려 합니다.
곡은 누구나 쉽게 귀에 익힐 만큼 단조로웠습니다. 정확히는, 음악의 전체적인 틀이 하나의 멜로디가 반복되는 곡이었습니다. 곡은 하이라이트가 한 소절만 완성된 채로 멈춰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 거칠게 그어진 선들이 보였습니다. 대충 짐작이 갑니다. 아마, 이 구절에서 머리를 쥐어 잡다 포기했을 것입니다. 저는 곡을 3번 정도 반복하는 동안 가사를 소리 없이 입술로만 읊었습니다. 그 사람의 곡은 화려한 기교가 없었습니다. 가사도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노래는 근 들어 오래간만에 느껴본, 듣기 위한 노래였습니다. 곡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쳐보고서 들키기 전에 방을 나오자, 그 사람은 느긋하게 테이블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 언제 왔어요..? " " 네가 내 비밀을 연습하고 있을 때. " " 죄송해요. 잠깐만 둘러본다던 게... 그렇지만, 덕분에 좋은 곡을 구경했어요. 맘에 들어서 몇 번씩 연습했던 거예요. " " 사람을 비행기 태울 줄도 아는구나. " 제 말이 끝나자, 그 사람은 제 머리를 두어 번 툭툭 쓰다듬고서 외투를 찾아 걸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연주하던 사이 옷을 갈아있었던 모양입니다.
7-1. ' 기억나? 네가 내게 얘기했지. 죽을 것 같으면 부르라고. ' 녀석의 목소리는 담담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느낌입니다. 죽는다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일련의 졸업처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기이하게도 녀석은 듣는 사람마저 안심시키고 있었습니다. ' 남은 얘기는 만나서 하자. 서둘러서 오지 마. 이번 주 내로 죽을 일은 없을 테지만, 널 보는 건 마지막일 거야. ' 휴대전화 속 갤러리를 둘러보니 녀석과 찍은 사진이 몇 장 없습니다. 녀석이 입던 맨투맨, 항상 고집하던 검은색 스냅백. 모든 것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피하며, 당연합니다.
전철을 기다리는 순간마저 길었습니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숲이 지나갑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면 저만치 멀어집니다. 긴 거리 전철을 타고서 달려가자, 녀석은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못 본 사이 수척해져 있어서, 처음에는 전혀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없던 생기가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 우와, 또 와줬네. " " 그렇지. 네가 와주길 바랐잖아. " " 짐 좀 들어줘. 이젠 도저히 들 힘이 없네. " " 퇴원이야? " " 그런 셈이지. 억지를 부렸어. 이제 좀 쉬고 싶다고. 병원으로서도 고마울걸? 곧 죽을 놈보다야, 살 가능성이 있는 놈을 앉혀두는 게 벌이가 되니까. " 잘도 고약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녀석의 짐을 받아들며 병원에서 몇 분 거리 카페로 향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인데, 녀석과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각자 몫의 커피를 받아들었습니다. " 뭔가 특별한 걸 기대했나? 그냥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 부른 건데. " " 아니. 이러는 편이 너다워. "
" 그래. 나도 그래서 널 부른 거야. 다른 애들이었으면 불편했겠지. 이런 놈이랑 어울리는 게. " "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 같아? " " 내가 의사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뭐, 직감 같은 거지. 머지않았다는걸 직감한 거야. " 녀석은 커피를 한입 홀짝이다 씁쓸하다며 가시적이게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하긴, 병원식만 먹다 보니 이런 감각은 오랜만일 것입니다. 간만에 만난것이니 밥이나 먹고 가자고 녀석이 먼저 제안했습니다. 병원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으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 앞으로의 예정은 어떻게 돼. " " 글쎄. 하고 싶었던걸 할 거야. 난 말이야, 겨울 바다를 가보는 게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 " 그때까진 살 수 있어? " " 그러게. 내 염원이었는데. 아직 겨울은 멀었으니, 난 끝내 겨울 바다를 보지 못할거야. " " 바보 같기는. 겨울 바다나 가을 바다나 같은 바다야. 밥 먹고 냉큼 달려가. " " 일단 오늘은 잠 좀 자고. " 익살스레 웃으며 녀석은 자주 갔던 백반식당을 가리켰습니다. 예전에 녀석과 자주 갔던 식당. 이곳에서 멀어진 후로는 가본 적이 없습니다. 간판의 글자가 낡고 비틀어져 있지만, 그 형체는 아직 온전히 남아있습니다.
갱신!!! 잘 보고 있었는데 어디 갔어 ㅜㅜ.
>>179 2주 정도 뜸해질 예정이야. 간간히 짬이 나면 올리도록 할게. 중요한 시기라서...
ㅜㅜ...
가게 안으로 들어갔을 때,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게는 그대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고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한결같은 모습은 시간을 거스르는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저희가 자리를 잡고 앉자, 가게 주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했습니다. " 무척 간만이구나. " " 이 녀석 드디어 퇴원했어요. " " 녀석이 아팠었나? 좀 수척해지기는 했는데. " " 늘 먹던 걸로 부탁드려요. " 한결같구나. 저희 둘을 바라보던 가게 주인은 앞치마를 두르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가게 주인은 무언가 잘못 알고 있습니다. 한결같은 건 가게뿐이었는데 말입니다. 녀석도, 저도 바뀌어가는데. 가게 주인은 그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 뭘 그렇게 뚱해 있어? " " 내가? " 제 물음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표정으로 의식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새삼스럽지만 녀석은 눈치가 빠릅니다.
" 오늘은 고민 상담이 없는 모양이지? 마지막 기회인데. " " 고민상담이라고 말하니까 되게 오글거려. " " 맞는 말 했잖아. 넌 자주 그랬어. " 저는 의자에 기대듯 몸을 뒤로 굽히며 두 손을 깍지꼈습니다. 털어놓자면, 저는 녀석의 조언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이라니, 뭔가 평소라면 엄두도 나지 않을 그런 것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램프의 요정이 들어주는 마지막 소원 같습니다. " 누군가 지금껏 혼자 억지로 버텨왔는데, 그 사람은 그런대로 잘 버티고 있어. 그럼, 내가 마음이 쓰인다고 그 사람을 돕는 게 맞을까? " " 너 좋으라고 돕는게 아니라면. 왜, 가끔 있잖아. 어설픈 동정심이나 죄책감 때문에 돕고는 자기 위로하는 사람들. " 그런 건 돕는게 아니지. 단호하게 녀석은 잘라내듯 말했습니다.
" 어설픈 동정심... " " 왜 그 사람을 네가 도우려 하는지를 잘 생각해. 차라리 이익때문이면 괜찮아. 그런데, 감정이 앞서서 돕는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거든. 이성적이지 않은 도움이 생길 수도 있어. " " 감정이 앞서면 돕지 말라는 뜻이야? " " 그런 말은 아직 안 꺼냈는데? 이성적이지 않은 도움이 마냥 나쁜 것도 아니거든. " 이윽고 저희가 주문한 백반이 나왔습니다. 테이블 위로 식기와 음식이 차려졌습니다. 녀석은 젓가락을 집어들었습니다. " 돕고 싶다면 그 사람을 도와줘. 감정에 좀 휩쓸려도 돼. 대신 목적이 희석돼선 안되겠지. 너는 그 사람이 지금도 나름 잘 버티고 있지만, 그런 짐을 덜어내기를 바라는거잖아? 그걸 잊으면 안 돼. 돕고 싶어, 라는 생각말고. 그 사람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해, 라는 생각에서 도와야 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게 느껴진다면, 이성따윈 집어던져. 도와줘. 네가 바란다면 말야. " 이윽고 반찬을 집어 우물거리던 녀석은 병원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며 끅끅 웃었습니다.
식당을 나왔습니다. 제가 녀석을 따라가려고 하자, 녀석은 기꺼이 말렸습니다. " 말했잖아. 나는 이제 집에 가서 푹 잘 거야. 네가 우리 집에 와도 할 일은 없어. " " 아쉽지도 않은가 봐. 날 못 본다는 게. " " 나? 나야 뭐. " 녀석은 말끝을 흐렸습니다. 녀석에게 있어서는 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항상 생각 없이 말을 하면서도 정곡을 찌르고는 하던 녀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굳은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 나중에 또 보면 되지. " " 지금 네 상태라면 나중을 기약하긴 어려울 텐데. " " 아니? 분명 또 볼 거야. 내가 부를 테니까. 그러니 안심해. " 녀석에게는 참 야속한 구석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 저는 강요하기를 관두고, 푹 쉬라며 손을 흔들고는 들어갔습니다. 녀석이 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일이면 녀석이 돌연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는 것이 되려 녀석답습니다. 그런 녀석의 종장을 망쳐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 길로 저는 병원을 향했습니다. 아직 다 하지 못했던 검사가 남아있었습니다.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습니다. 집에 있을 아이가 문자를 남겨둔 모양입니다. '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왔어요? ' ' 이제 곧 검사하려고. ' ' 결과 되게 궁금하다. ' 물음표를 크게 띄운 돌고래 이모티콘이 떠올랐습니다. 아이에게 이런 구석이 있었나. 순간 제 이름이 병원 로비 화면에 나타나면서 제 생각은 끊겼습니다. 고민 좀 해보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원장을 보러 들어갔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저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불투명했던 내용이 좀 선명해진 정도입니다. 저번의 충격 덕분인지, 이번에는 그리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곧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서, 막연하던 것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유전적으로 간이 나쁜데, 간 경변이 진행되면서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다. 간염 증상은 보이지 않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대충 그러한 내용이었습니다.
" 아직 복부가 팽창한다거나 황달 같은 증상은 없지만, 저혈당이 미묘하게 보이기도 하니까요. 지금부터 건강 관리를 꾸준히 하셔야 더 늦지 않습니다. " "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해보겠습니다. " 병원을 나오자 바람이 쌀쌀합니다. 낙엽이 쌀쌀하게 모이는 것이 가을이 온 게 틀림없습니다. 불과 한여름까지만 해도 술 담배와 친구 먹고는 했는데, 이제부터 관리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온 것이 느껴집니다. 병원을 나오며 휴대전화를 보니 답장이 와있었습니다. ' 알려줘도 좋은데. ' 딱히 답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라면 그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간 경변 소리에 호들갑을 떨면 피곤해질 것 같았습니다. 집에 가서도 물어본다면 그때 어떻게 털어놓을지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자, 조금씩 언성이 높아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와 아이가 있을 층에 오르니, 아이는 누군가와 말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익숙한 중년의 여성. 본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계단을 내려갈 때 말입니다.
7-2. 좀처럼 말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먹먹합니다. 물속에 빠진 것처럼 소리가 중간에 흩어집니다. 시야마저 뿌옇게 흐려지고, 손과 발끝이 차갑게 식어갑니다. " 잘 지냈니..? ... 잠깐이면 돼. 다른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 " 그 말에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 지냈느냐고요? 전혀, 그 반대였죠. 당신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마다 덜덜 떨기 바빴는데, 이제 와서 엄마는 저와 얘기를 나누려 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지금 엄마는 엄마라는, 어떠한 역할을 하려 열중임에 틀림없습니다. " 잠깐... 집에 들어갈까? " " 아니. " " 하지만 밖이 춥잖니. 널 보는 것만도, 엄마는 좋지만... " 말없이 엄마와 시선을 맞추었습니다. 대화에 정적이 흘렀습니다.
" 나는... ... 나는, 엄마 입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싫어. 내가 부르는 건 괜찮아. 그런데 엄마가 엄마라고 부르는 건 싫어. 엄마가 스스로를 엄마라고 인정하는 게, 그러니까... ... 그, 인정해버리면... 되어버리는, 예전 일들이... " " 선우야..? 얘야, 얘야... " " 이름으로도 부르지 마. 좀, 떨어져 엄마... 숨막히니까. " 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손에 힘을 줘 엄마를 밀쳤습니다. 머릿속이 아찔합니다. 거친 말로 호구새끼가 된 기분입니다. 잘못한 사람은 내가 아닌데, 왜 이다지도 마음이 답답한지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면 또 울어버릴 것 같습니다. 제 원망의 뿌리를 찾아봐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사실, 마음을 크게 먹고 용서해버리면 일이 해결될지도 모릅니다. 이대로 엄마를 안고, 왜 이제서야 왔느냐고 하면 어떨까요. 정말로 엄마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하느냐고. 네가 겪어온 불행을 이렇게 무마해도 되느냐는 말이 메아리칩니다. 이제, 어지간한 행복으로는 보상받을 수 없습니다. 그 정도로 닳고 녹슬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 자신이 바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용서해버리면. 그래서, 엄마에 대한 원망이 사라져버리면. 제 지난 시간에 대한 슬픔은 누구에게 뻗어야 하는지, 그 답이 필요합니다. 순간 손이 포개어졌습니다.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살갗. 몸 안을 비집고 차가운 기계가 들어오는 기분입니다. 따뜻하고 푸근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린 느낌이 듭니다. 저는 짝, 하며 살 부딪히는 소리를 내고 손을 떨쳐냈습니다. 엄마는 내심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한 걸음 떨어졌습니다. 제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오려던 것은 그 사람을 본 직후 멈췄습니다. 상황은 순식간에 마무리됐습니다. 엄마는 그 사람을 잠깐 바라보고, 그 사람은 조용히 엄마에게 꾸벅하며 인사를 했습니다. 서로가 인사를 나누고, 엄마는 먼저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그 사람은 복잡한 표정을 짓곤 자신의 집 안으로 고갯짓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