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괴담 2019/03/14 20:07:53

#1 ◆zVgnSE4K4Zd 2019/03/14 20:07:53

내 모든 것을 바치게 될 인형 이야기.

#5 ◆zVgnSE4K4Zd 2019/03/14 20:19:15

집 안에서 나의 취급은 방 안에 굴러다니는 먼지만도 못한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자신들이 낳아버린 물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내게 관심이 없다.

#6 ◆zVgnSE4K4Zd 2019/03/14 20:22:03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물은적이 있다. 주변에 부모에게 지나친 관심과 기대를 받는 아이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런 아이들보다는 너가 훨씬 행복하지 않겠냐고.

#7 ◆zVgnSE4K4Zd 2019/03/14 20:24:20

또 다른 누군가는 내게 욕을 했다. 주변에 각종 학대와 상처를 받는 아이들을 생각해 보라고. 아무 터치도 하지 않는 부모를 만난것은 오히려 큰 행운이 아니겠냐고. 이런 부모를 겪어본 적이 없는 너는 알지 못할것이라고.

#9 ◆zVgnSE4K4Zd 2019/03/14 20:28:58

그렇다. 그들의 말이 모두 옳다. 나는 다른 부모를 겪은 적도, 본적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불행하다고 말 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가 불행한 아이라는 말을 뱉어 본적이 없다.

#10 ◆zVgnSE4K4Zd 2019/03/14 20:34:57

나는 내가 불행한지 불행하지 않은지 잘 모른다. 마찬가지로 내가 슬픈지 슬프지 않은지도 잘 모르겠으며 내가 힘든지 힘들지 않은지도 잘 모르겠다.

#12 ◆zVgnSE4K4Zd 2019/03/14 20:39:45

하지만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감정이 하나 있다. 그 감정은 바로 공허함이다. 이 감정은 내가 처음 진심으로 사랑하던 것을 잃었을 때에 생겨났으며 내 옆에서 나와 같이 자라기 시작했다.

#13 ◆zVgnSE4K4Zd 2019/03/14 20:41:53

나는 그것과 같이 커 왔고 내가 충분히 자랐다고 생각했을 때 즈음에는 이미 그것은 내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자라있었다.

#15 ◆zVgnSE4K4Zd 2019/03/14 20:45:12

그것이 그렇게 커져버린 뒤로는 나는 나를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매분 매초 마음 속이 텅 비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너무나도 공허해 누군가가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텅 비어 껍데기만 남아버린 내 몸을 가득 채워주길 바랬다.

#17 ◆zVgnSE4K4Zd 2019/03/14 20:48:20

그래서 나는 악착같이 사람들을 잡기 시작했다. 많은 친구를 사귀고 연인을 만들었다. 나는 내 주변의 관계란 관계는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다.

#19 ◆zVgnSE4K4Zd 2019/03/14 20:50:32

하지만 관계를 맺어봤자 그들은 내 속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들 역시 텅 비어 있어서 그랬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 공허함이 너무 깊었던 탓일까.

#21 ◆zVgnSE4K4Zd 2019/03/14 20:54:11

그렇게 관계가 쌓이고 쌓일수록 내 겉표면은 더욱 더 단단해져 갔다. 그리고 내 겉면이 두꺼워지면 두꺼워질수록 내 속의 공허함은 더욱 더 깊어져 갔다.

#23 ◆zVgnSE4K4Zd 2019/03/15 22:56:26

나는 너무나도 지쳐 무의미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며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한 인형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인형은 정말로.. 정말로 아름다웠다.

#25 ◆zVgnSE4K4Zd 2019/03/15 23:05:49

내가 처음 그 인형을 만난 곳은 학교 앞 골목길이었다. 나는 그날도 역시 평소와 다르지 않게 머리와 마음이 텅텅 빈 채로 등교를 위해 학교로 걸어가고 있었다.

#27 ◆zVgnSE4K4Zd 2019/03/15 23:35:20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중 저 멀리에 있는 유리창 너머로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유리창 쪽으로 걸어갔다.

#28 ◆zVgnSE4K4Zd 2019/03/15 23:39:15

유리창 근처로 다가간 나는 시선이 느껴졌던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그 뿌연 유리창 너머에는 정말 아름다운 인형이 하나 놓여있었다.

#29 ◆zVgnSE4K4Zd 2019/03/15 23:45:52

내가 처음 그 인형을 보았을 때.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눈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거대하고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눈 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30 ◆zVgnSE4K4Zd 2019/03/15 23:50:27

그렇게 넋을 잃고 인형을 바라보고 있자니 인형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그 인형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인형이 그곳을 떠난 뒤에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31 ◆zVgnSE4K4Zd 2019/03/15 23:58:05

그 날 이후로 내 머릿속에는 그 인형 생각으로 가득 찼다. 밥을 먹다가도 그 인형이 생각나고 공부를 하던 중에도 생각이 났다. 또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데도 생각이 났고 심지어는 꿈에도 그 인형이 나오기 시작했다.

#32 ◆zVgnSE4K4Zd 2019/03/16 00:01:13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감정들이 온몸을 쑤셔댔다. 그 인형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 인형만이 내 텅 빈 마음을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3 ◆zVgnSE4K4Zd 2019/03/16 00:02:06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그 인형을 내것으로 만들기로.

#37 ◆zVgnSE4K4Zd 2019/03/16 13:27:01

일단 인형을 대뜸 가져갈 수는 없으니 살펴보며 천천히 알아가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그 가게 앞에서 시간을 보냈고 곧 그것은 내 일상이 되었다.

#38 ◆zVgnSE4K4Zd 2019/03/16 13:28:16

나는 매일매일 그 인형을 보러 갔고 그 인형은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그곳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것만 같았다.

#39 ◆zVgnSE4K4Zd 2019/03/16 13:42:14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끔 인형이 그곳에 없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고 가슴이 터질듯이 아팠다.

#40 ◆zVgnSE4K4Zd 2019/03/16 13:45:49

나는 그냥 그 인형을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그 인형은 내게는 한 줄기의 광명이며 내 영혼을 씻어주는 소금이었다. 나는 그 인형 덕분에 정말 정말 행복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41 ◆zVgnSE4K4Zd 2019/03/16 13:49:47

인형은 어째서인지 가끔 슬픈 표정을 짓고서는 앉아있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무나도 미안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미안해 진짜. 내가 꼭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42 ◆zVgnSE4K4Zd 2019/03/16 14:02:49

그러던 어느날 결국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그 인형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역시 나는 인형을 보기 위해 그 가게 앞에 있었다.

#44 ◆zVgnSE4K4Zd 2019/03/16 16:41:05

그 날 역시 나는 그 가게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중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가게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45 ◆zVgnSE4K4Zd 2019/03/16 17:00:36

그 사람은 키가 꽤 컸다. 그리고 구두를 신고 있었으며 갈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사람의 손목에선 은색의 시계가 반짝였다. 그 사람은 마치.. 마치 거대한 달 같았다.

#46 ◆zVgnSE4K4Zd 2019/03/16 23:56:57

그렇게 그 사람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선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곧바로 나의 인형에게 다가갔다. 그러고선 늘 그래왔다는 듯이 그 인형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47 ◆zVgnSE4K4Zd 2019/03/17 00:00:13

간지러웠다. 온 몸이 심하게 간지러웠다. 내 몸 위로 온갖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입을 열 때마다 손가락 끝이 간지러웠고, 나의 아름다운 인형이 가볍게 미소지을 때마다 가슴 한 가운데가 간지러웠다.

#48 ◆zVgnSE4K4Zd 2019/03/17 00:01:55

얼마 지나지 않아 간지러움이 사그라드려는 찰나 간지러움은 미칠듯한 고통으로 바뀌었다. 온 몸이 불에 타는 것 처럼 화끈거렸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49 ◆zVgnSE4K4Zd 2019/03/17 00:04:48

나는 한참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 쳤다. 그러다 문득 인형을 확인하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가게를 살펴보았지만 인형은 그 남자와 함께 사라지고 난 뒤였다.

#50 ◆zVgnSE4K4Zd 2019/03/17 00:06:44

그 날 밤은 악몽을 꿨다. 아주 커다랗고 새하얀 뱀이 내 다리를 먹어치우는 꿈이었다. 나는 죽기살기로 발버둥을 치며 손으로는 뱀의 머리통을 마구 내리쳤다.

#51 ◆zVgnSE4K4Zd 2019/03/17 00:08:10

뱀의 머리는 생각보다 쉽게 뭉개졌고 뭉개진 머리에서는 검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마구 흘러 나왔다. 그렇게 나는 다리를 잃고 꿈에서 깨어났다. 침대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52 ◆zVgnSE4K4Zd 2019/03/18 23:28:28

기분이 심각하게 나쁘다. 가슴이 답답하다. 뜯길만큼 뜯긴 손톱을 세게 물어뜯는다. 손 끝에서 아릿한 느낌과 함께 피가 배어 나온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토할것 같다.

#53 ◆zVgnSE4K4Zd 2019/03/18 23:31:47

너무 가슴이 답답해서 계획과는 다르게 아침 일찍 인형을 보러 나갔다. 심장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빠르게 물건들을 가방에 쑤셔 넣고서는 길을 나섰다.

#54 ◆zVgnSE4K4Zd 2019/03/18 23:33:33

한걸음 한걸음 가게에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더욱 크게 뛰기 시작한다. 빠르게 가게로 뛰어간다. 숨이 차고 속이 메스껍다. 저 멀리 가게가 보인다. 이제서야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55 ◆zVgnSE4K4Zd 2019/03/19 00:06:18

나는 가게 앞에 도착했다. 도착해서는 가만히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앉아있었다. 그런데 그 때 내 눈 앞에 그 남자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