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지 못했나보다. 꽤 오래됐지. 아마 지금쯤 19년이려나. 너랑 내가 친구였던 시간 말이야. 근데 뭐, 수년전까지만해도 우리는 말뿐인 친구였어. 사소한 농담은커녕 작은 스킨십조차도 하지 않았던걸로 기억해. 음, 그때였을거야. 내가 네 책을 온 힘을 다해서 뺏은 날. 너희 반 앞에서 네 이름을 부르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나를 기억하니? 넌 이어폰을 끼고 책을보며 내 목소리는 들은척도 안했잖아. 다 들렸을거라는걸 뻔히 알고있었는데.
손끝만 스치면 인연이라던데,
넌 인기가 많던 아이었고, 그런 너에게 큰소리칠수 있던 사람은 나뿐이었을거야. 심지어 너의 부모님조차 널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 네 친구들은, 성큼성큼 너의 교실로 걸어들어가는 나를 놀란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어. 네가 펴놓기만 하고 읽는둥 마는둥 하던 책을 겨우 빼았자, 그제야 너는 나를 귀찮다는 눈으로 보더라고.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비록 졸음이 가득 묻어난 눈동자였지만, 난 처음보는 네 그 눈을 절대로 잊지 못해
'..뭐.' 간단하면서도 자신의 의도를 손쉽게 나타낼수 있는 그 한 마디를 무시했더라면, 네 아름다운 눈에 순간 정신을 놓아 얼굴을 붉히지 않았더라면, 우린 서로를 증오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과연 우리가 추하지 않았을까.
너는 얼굴이 빨개진 나를 보고 한심하다는듯 조소를 날렸어. 너도 한낱 여자에 불구하다는듯이. 그 순간 정신이 확 들더라고. '난 너에게 화를 내기위해 네 교실로 들어온거야' 몇번이나 되내었는지 몰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너에게 소리를 질렀어. 주어와 목적어, 모두 빼놓은 상태로. 아, 후회된다. 뺨이라도 한대 때릴걸 그랬나봐. 네가 고의적으로 퍼트린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헛소문을 믿은 전교생덕에, 하루에도 몇번씩 걸레를 빨아야했거든. 입으로.
정신이 나갔었어. 눈에 뵈는게 없었어. 널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고, 진심으로 망치고 싶었어. 근데 그거 알아? 그때 우리가 만난지 14년째었어. 그 14년 동안 우리가 말을 제대로 섞어본 일은 아주 먼, 글자도 몰랐을때 네가 나한테 팔찌를 선물한 날과, 내가 너한테 소리지른, 이날 하루뿐이었어. 그날, 학교를 어떻게 마무리지었는지도 모르고, 종례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어. 내일부터 좆됐다. 이런 생각만 가득했었지. 그 생각 덕이었을까. 난 항상 가지고 다니던, 네가 줬다는 것조차 잊은 팔찌를 학교에 놓고왔었어.
솔직히 엄청 놀랐었어. 네가 착한척, 순진한척 온갖 척은 다 하며 우리집에 와서 팔찌를 갖다준건 둘째치고, 네가 그 팔찌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는게 충격이었어. 나도 기억하지 못했던 아주 오래전 일인데 말이야. 오빠와 단둘이 살던 그 집에서, 넌 우리 오빠가 권한 초콜릿을 매정하게 사양했지. 우리 오빠의 그 어정쩡한 자세와 민망한 표정을 난 아직도 기억해.
네가 간 후 오빠는 나한테 조심스레 말을 건넸어. 우리 동생, 다 컸네. 잘생긴 친구도 있고. 이대로 서있다간 눈물이 터질것만 같아서 황급히 방에 들어왔어. 오빠한테 너무 미안했어. 근데 웃긴게 뭔지알아? 그 와중에도 난 네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있었어. 난 멍청하게도 인터넷 소설처럼 그런 뻔한 전개를 상상했나봐.
다음날, 난 진짜 온갖것 다 각오하고 학교에 갔다? 근데 밤을 지새우며 했던 걱정이 무색할정도로 아무일도 없었어. 심지어는 인기가 아주 많던 여자애가 나한테 먼저 인사를 걸었어. 어벙벙하게 있다 겨우 손을 흔드는 내 어깨 위로 뭔가 무거운게 닿아왔어. 네 팔이었지. 하룻밤 사이에 회개라도 했는지 나한테 심할정도로 살갑게 구는 너에게 난 따지듯이 물었어
왜 이러냐고. 내가 너한테 잘못한거 있으면 그냥 말해달라고. 그랬더니 너는네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나에게만 소곤거렸지. -무슨소리야 네가 뭘 잘못했다고. 오히려 싹싹 빌어야 할 쪽은 나인걸?- 몸이 얼어붙었어. 그 뒤에 네가 덧붙인 한마디가 소름돋았거든. 난 네가 정말 좋아.
그 뒤로는 그냥 별일없는 하루하루였어. 나도 점점 너를 보는게 아무렇지 않았고. 음 하루는 자칭 네 여자친구가 별 볼일 없는 나를 찾아왔다지? '너 뭐야' 단 한 마디 설명도 없이 나한테 그러더라고. 네가 대체 어떤 존재길래 내 남친이 나한테 소홀해지냐고. 알고보니 너, 이리저리 내 얘기 많이 하고 다녔더라. 분명 넌 네 여자친구한테도 아무 생각 없이 내 얘기를 늘어놓았을테고, 여자친구는 다른 여자 이야기를 하는 너한테 화가났겠지. 아니, 정확히는 나한테.
어찌됐든 그 친구 덕에 너랑 내가 정확히 1년동안 떨어져있었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하나? 걘 나한테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쏟아부었고, 당시 15살이었던 여린 나는 도망치듯이 전학을 가버렸어. 오빠는 말없이 나를 꼭 안아주더라. 아마 학교폭력 뭐 이런걸로 생각을 했을거야. 16살, 중학생의 마지막 해에 난 다시 너를 만났어.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은 시간인데도 넌 많이 변해있었어. 예쁘게 생겼던 얼굴은 섹시하게, 얇은 목소리는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아, 컨셉까지 잡고있더라. '잘생기고 인성 좋은 모범생'. 역겨웠어. 15살, 너는 나뿐이 아닌 네 눈에 거슬리는 모든 이들을 괴롭히고 다녔잖아. 네 눈짓 한번으로 한 사람의 일년을 망쳤잖아.
처음에는 널 알아보지 못했어. 앏은 황금빛 안경에, 쑥 커버린 키가 너무도 어색했나봐.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며 급식을 먹는데, 빈 내자리 앞에 네가 털썩 앉더라. 내 친구들의 매서운 눈초리에도 아무말 없이 묵묵히 밥을 먹던 너는 나에게 한마디를 남겼어. ..오랜만이다. 순간 너의 얼굴에서 과거의 네가 보였어. 얼핏 보이는 접힌 눈꼬리가 너라는 걸 확실히 증명해주었고. 아마 지금부터가 너와 내가 보냈던 10대의 마지막 순간들 이야기지?
그 때문에 너와 나는 자연히 붙어있어야만 하는 시간이 늘어났어. 심지어 고등학교 3년내내 짝을 했고, 체육시간 같은 자잘한것도 함께할 수밖에 없었어. 물론 3년동안 우리가 나눈 말은 손에 꼽을정도로 적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넌 그때 나한테 진심으로 다가왔었던것같아. 뭐 내가 그걸 알았어도 너한테 심하면 심했지, 더 잘해줄일은 없었을거지만 말이야
재현아, 내 청춘을 무참히 앗아간 재현아. 이렇게 우리의 이야기가 끝이 날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조금 아팠지만, 커서 웃으며 나눌수 있는 추억으로 남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네가 그리워. 네가 보고싶어. 몇분이라도 좋으니까 네 목에 코를 박고 향기를 맡고싶어.
수많은 날들중 어느하루.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가, 우리의 미래를 산산조각낼 아이가 내 옆에 앉아있던 너에게 말을 걸었어. '재현아, 난 이수라고 해. 은이수. 옆은 누구야? 여자친구? 귀엽게 생겼네.' 걔는 귀찮다는 듯 연필을 돌리고 있는 너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고, 네 볼까지 만지작대며 온갖 애교를 부려댔어. 보다못한 내가 이수의 손을 잡고 내리자 금세 시무룩해지며 자리로 돌아갔지. 근데 있잖아 재현아. 지금까지도 난, 걔가 우리한테 순수한 마음으로 왔을거라고는 생각안해.
언제 한번은, 걔가 네 아이스크림에 본드를 넣은 적이 있었어. 조금도 아니고, 한통 반을 때려붓더라. 어떻게 아냐고? 봤으니까. 그 아이스크림을 몇 숟가락 먹은 너는 금세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어. 이상한 맛이 난다며 바로 버렸잖아. 솔직히 말해줘. 너 그거, 나 아니라는거 알고있었지? 그렇게 내 뺨을 때리면서도 말이야. 너 봤잖아. 은이수 머리카락에 묻은 본드. 우리사이에 아무리 대화가 없었다해도, 넌 나를 네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했어. 은이수가 우리에게 온 후로. 분명 그 전에는, 가끔이긴 하지만 이야기를 나눴잖아. 소소하긴 하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잖아.
근데 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따져물었어.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은이수랑 안사겨. 머리속이 뒤엉켰어. 왜 이수는 거짓말을 했지? 기재현 말이 거짓인가? 아니, 내가 이걸 왜 궁금해하지? 애써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대충 얼버무렸어. 너는 믿는 눈치더라.
열흘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아주 많은 일이 있었어. 일단 마저 풀게. 난 네 말이 믿어지지 않았어. 이수는 네 옆에서 팔짱을 끼며 가슴을 들이밀었고, 무뚝뚝했던 너는 예쁘장한 여자애의 애교에 넘어갔지. 솔직히 연인도 아닌데 자기야 여보야 등 애칭을 부르고 수위가 아주 강한 스킨쉽하고 다니지는 않잖아? 너는 걔랑 사귀지 않았어. 단지 너 혼자 마음에 품었을 뿐이지. 근데 기재현, 이수는 너 안좋아했어
내가 위에서 언급했었지? 네 강한 인상 덕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했다고. 은이수는 네 얼굴과 말투를 보고 네가 잘나간다고, 소위 말하는 일진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몇달이 지나도 일진은 커녕, 노는 아이들조차도 널 무시하니 은이수는 깨달았을거야. '시발 남자 잘못골랐다' 그때부터지. 은이수가 나랑 거리를 둔다고 네가 나한테 작게 말 걸었을때부터, 은이수는 다른 남자에게 콧소리 섞인 애교를 부려댔어.
>>38 응
너 참 나쁘다. 급한 내 목소리를 듣고 네 친구들과 한참을 깔깔댔을 네 모습이 눈에 훤해서 헛구역질이 나왔어. 끔찍하고 역겨웠지. 비록 몇 시간이었지만 너를 걱정한 내가 너무 싫었어. 끓어오르는 화를 삭히고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부들거리는 손을 주머니에 꽂았어. 그날, 나 혼자 집에서 밤을 새우며 울었다면 날 비웃을거니? 눈이 부어 학교에 지각하고만 나를 알았다면 불쌍한 눈으로 봤을거니? 아니, 애초에 넌 나를 걱정했을 거니?
다음날, 과장 하나없이 눈이 부어 앞이 보이지 않았어. 그런데 놀랍게도, 학교에 가지않은 나에게 네 번호로 또다시 전화가 오더라. 수십번이나. 세네번은 무시했지만 게속 울리는 진동에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받아야만 할것같았어. 그렇게 한숨을 쉬고 휴대폰을 들었지. 네 번호였지만 태형이 목소리가 들렸어.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둘뿐인 친구 중 하나였던 김태형 말이야. 기억나지? 하긴, 돈으로 우정을 사버린 김태형을 기억못하는게 이상하지.
태형이는 늘 그래왔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어. 가식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할만큼 따뜻한 중저음 목소리로. 음 아마 내가 태형이의목소리를 들었을때는 점심시간 쯤이었을거야. 태형이는 나에게, 네가 어제 널 밤 늦게까지 기다렸다고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였지. 이상한게 한두가지가 아니네.
넌 어제 내가 너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몰랐을거야. 만약 알았다면 김태형에게 거액의 돈을 주며 나를 속이라고 하지 않았겠지. 재현아, 내가 너한테 뭘 그리 잘못했니? 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길래 태형이한테까지 나를 거리두라 했니.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자꾸만 나왔어. 그래, 어디 한번 어떻게 지껄이는지는 들어보자 라는 마음으로 대답을 했어. 태형이의 입에서 마온 말은 정말 가관이더라. 아마 너, 날 끝없이 추락하게 만들기로 단단히 작정을 했었나봐? "야, 나 태형인데 재현이가 너한테 할말이 있대. 직접 보고 말하고 싶다 해서 전화도 내가 했다" 잘 기억을 나지 않지만 아마 이런 식의 말이었던것 같아.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면서 나를 창녀촌으로 부른 이유가 뭐야? 사실 이것도 순화해서 말한거지, 그때 김태형은 나에게 온갖 성희롱을 하며 큭큭댔어. 처음엔 안 갈 생각이었어. 네 생각을 뻔히 알면서도 네 지시대로 하는건 병신이지. 근데 생각이 달라지더라. 이미 너와의 관계는 위태로워졌으니, 다 포기한채로 어느새 신발을 신고 있었어.
넌 나와 눈이 마주치고, 바로 굳어버렸어. 아주 드물게 보여주던 너의 어벙한 표정을 보았지. 넌 급히 표정을 관리했지만 난 이미 보고말았어. 귀에서 목까지 붉어진 너의 얼굴을. 넌 바로 네 주위의 여자들을 보냈어. 널 노려보는 여자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말이야. "..나랑 대화하고 싶어서 온거지? 가자" 내 눈을 피하며 말하는 너를 따라 어딘가로 향했어. 뭐, 대충 짐작은했지만.
역시 얼마가지 않아 한 무인텔 앞에서 멈추더라. 넌 말을 더듬었어. ..들어가자. 아무말없이 카운터에서 키를 받고 너를 따라갔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316호. 넌 방에 들어가고, 나를 침대에 앉혔지. 넌 말을 꺼냈어. '..왜 이렇게 짧게 입고 온거야' 웃겼어.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
"하고싶은 말 있다고 들었어. 빨리 해주면 안될까? 나도 갈곳이 있어서" 내 말에 네 표정이 굳어갔지. 그러고는 말했어. "어디, 갈건데" 사실 딱히 갈곳은 없었어. 단지 니가 너무 미워서 그냥 그래서, 그뿐이었어. 넌 갑자기 내 손을 잡았어. 내가 너에게 잡힌 손을 빼려는 순간, 너의 눈빛이 바뀌어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