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을 주웠다. 꽤 두툼한 공책이다. 무게도 제법 나간다. 누구의 것일까. 이름을 찾아보았지만, 검은색 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혹시 주인이 찾을까 싶어 원래 있던 곳에 놓으려다 떨어트렸다. 펼쳐진 공책 속지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안내문이 적혀있다. {안내문} 이 공책을 주우신 당신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제 여기에 적힌 글들을 '모두' 읽으셔야 합니다. 글에 피드백을 달아도 좋고 중간중간 빈 속지에는 글을 적어도 좋습니다. 단, 장난식으로 쓰지는 말아 주세요. 공책이 너무 두껍다고 글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지 말아 주세요. 이 공책은 천 페이지이니 글은 천개를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짧은 글들이니 부담은 없을 겁니다. 또한, 공책의 주인은 게으른 사람이라 글을 적게 썼을 수도 있어요.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테지만 나는 널린 게 시간이니 이 공책 속 글을 모두 읽기로 했다. 가끔 글도 쓰면서.
주인이 누군지 모를 공책
발바닥이 모래 위에 가볍게 내려앉는다. 땅에서 온몸을 밀어낸다. 나는 듯이, 날고 싶은 것처럼, 뛰어올랐다 내려앉기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모래가 발에 밀려 올라가며 흙먼지를 일으킨다. 흙먼지가 발을 가린다. 부드럽고 분홍빛이 도는 혈색 좋은 발이 모래에 덮인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속도로 달려 나간다. 환희에 찬 것 같기도 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기도 하다. 즐겁겠지. 그것이 네가 태어난 이유, 너의 운명이니. 네가 결승선에 도착하자 모두가 환호한다. 환하게 웃으며 월계관을 쓰는 너는 이제 나만의 것이 아니다. 너는 이 시대의 영웅이다. 온갖 명성과 부를 거머쥔 채 불행해질 영웅.
무엇인가, 무엇인가. 너의 눈이 붉어지는 것이. 그대가 나의 손길을 피한다면야, 기꺼이 사라져 줄 맘은 충분하네만. 더 한 것도 묵묵히 받아들이니. 내 사라질 생각도 점차 사그라든다. 그대여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것인가. 대체 무엇인가. 너에게 그 눈빛을 심어준 것은.
춤을 춰요 아가씨. 맨발이라 발이 아파서 못 추겠나요? 자, 여기 있습니다. 이 구두가 바닥에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는 참으로 경쾌하지요. 사람들이 알아볼까 무섭다고요? 제가 예쁜 가면을 드릴게요. 아가씨 정말 잘 어울리네요. 옷이 초라해 보이나요? 다행히 제게는 옷이 아주 많답니다. 어떤 옷을 드릴까요? 밤이 되었다고요? 주인공이 보이지 않으면 소용없을 테니 불을 밝혀드리죠. 고풍스러운 샹들리에들, 소박한 등불들. 장신구가 없어 허전한가요? 당신의 머리엔 왕관을, 아 괜찮아요. 아가씨는 왕이니까. 손목에는 팔찌를, 손가락에는 반지를 괜찮아요. 생각만큼 무겁진 않을 거예요. 발목에는 발찌를 채워드릴 거예요. 춤을 춰야 하는데 음악이 없나요? 당장 악단을 불러드릴게요. 절도 있는 피아노, 서글픈 바이올린, 청아한 플루트, 장중한 첼로, 그리고 기타등등 모두 모였네요. 이제 아가씨만을 위한 음악을 연주할 것들이에요. 사람들이 없어서 외롭나요? 이렇게 박수를 다섯 번 치면, 봐요. 사람들이 금세 모였네요. 이제 춤을 춰볼까요? 그래요 아가씨, 어서 춤을 춰요
터질 듯 팽팽한 과육을 와락, 깨물었다. 입안 가득 과육이 들어온다. 나무에 조금 더 있었더라면, 볕을 조금 더 받았더라면, 농익었을 맛이다. 달큰한 맛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익어가면서 나던 향이 맴돈다. 열심히 우물거리는 양 빰이, 입술이, 손이, 끈적거린다. 베어 문 단면에서 즙이 흘러 고이다, 뚝뚝 떨어져 손을 타고 흐른다. 팔꿈치 부근까지 흘러내린 즙이 그 언저리에 맺혔다.
그 작은 움직임마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리수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포장을 풀고, 난 리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이즐넛 색 안락의자에 폭 파묻힌 채로 이따금 나를 바라보던, 날 보며 웃었던, 빛이 바랜 기억이 떠올랐다. 그게 언제였을까. 아니, 실제로 있었던 일이긴 했을까? 지금의 상황과 반대되는 아름답고 꿈같은 기억이라 어쩌면, 나의 상상력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이름도 없고 실체도 없는 분께 쓰려니 조금 망설여지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가 한 명의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거지요. 제겐 아주 중요한 문제죠. 당신은 바람 그 자체이니 저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곧 당신이 오겠죠? 이제 던질 테니 잘 받으시길.
그의 커다란 눈 속에 감정이 아른거린다. 아주 작은 움직임, 숨을 내쉬는 그 작은 움직임에도 숨어버릴 것만 같아, 나는 숨을 참았다.
제 음악이 아름다운 꽃이라면 전 한낱 뿌리에 지나지 않아요. 꽃에 비하면 뿌리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꽃에 이끌린 나비여, 깊이 파고들지 마시고, 관심을 거두고, 어서 떠나세요. 당신 속한 밝은 세상으로 가세요.
둥그렇고 커다란 쿠션이 해영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얼굴과 쿠션 밖으로 삐져나와 나무 바닥에 널브러진 다리만 제외하면, 해영의 거의 모든 부분이 반쯤, 쿠션에 잠겨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쿠션 뒤편으로 늘어져 고개를 돌릴 때마다 살랑였다. 따스하게 내려오는 햇빛에 해영은 노곤한 듯, 눈을 감고 몸에 힘을 풀었다. 부드럽게 지어지는 미소는 그녀의 만족감을 바로 보여주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방안에 남았다. 닫혔던 방문이 소리 없이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열렸다. 발소리를 죽이려 도톰하고 뽀송한 양말을 신은 평화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된 탓에 잘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최대한 사뿐히 밟으려고 애쓰며, 그는 해영의 곁으로 갔다. 해영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평화의 움직임은 점점 굳어, 마지막 한 걸음이 남았을 때,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굳어있는 채로 해영을 바라보던 평화는 그녀의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따라 지었다. 그러곤, 해영을 뒤로하며, 들어올 때보다 덜 조심스럽고, 더 신속하게 나갔다.
진실은 단두대의 칼날 마냥 날카롭고, 예리하며, 잔인하다. 진실이 씀뻑 베어버린 환상과 거짓말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수 많은 거짓 속에 진실은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가. 그대여, 자신만이 빛나고 자신만이 옳다 말하는 그대여. 허나 그것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그대여. 그대는 진실과 가장 맞닿아있다.
붉은 찻물이 가늘게 떨어져 새하얀 찻잔 속을 소용돌이치며 채운다. 간지럽게 달콤한 향. 차가운 금속 테이블에는 연한 분홍빛 작약 한 다발이 올려져 있다. 누가 올려두었을까. 전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나무와 바람의 합주곡에 소년의 얼굴 위 나뭇잎들의 그림자가 춤춘다.
안녕, 다들 안녕 첫 음은 설렘을 품고서 끝은 살짝, 올라가는 음으로 좋아하는 꽃을 닮은 미소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뻗어나가게 아쉬움을 드러내지 말고 안녕, 다들 안녕
창문을 열자 새하얀 커튼이 큰 소리를 내며 펄럭였다. 따뜻하고 오래된 공기 사이로 신선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익숙하던 질감이 낯설게 느껴지고 머리가 울렸다. 뺨은 식었다가 다시 끓어오르길 반복했다. 표면은 차고 내부는 뜨거웠다. 따스함이 사라진 그 자리에 서늘함이 들어왔다. 서늘함이 밀려난 곳에 뜨거움이 들어왔다. 창문을 닫았다. 창문을 닫은 손이 화끈거렸다.
춤을 춰요. 노래해요.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보여줘요. 당신은 아직 젊고 건강하잖아요. 그렇죠? 당신이 죽다니, 제가 잘못 본게 틀림없어요. 당신이 교수대에 오르다니, 그런 일은 없었어요. 내가 알아요. 당신처럼 착한 이가 또 있을까. 다른 이들도 봤어요. 당신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그 모습을 모두가 봤어요. 만약, 당신이 죄인으로 재판정에 소환되었다고 한들, 모두가 변호해 주었을거예요. 그래요. 이제 눈을 떠요. 오늘 날씨가 어떤지 내게 말해줘요. 그럴 수 있죠?
비단옷을 입지 않은 자들의 얼굴에 희망이 보였다. 저 희망은 누군가의 죽음에서 온 걸까.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