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닻무리 여행담 (불법체류자의 그 스레)

앵커 2021/02/06 16:35:43

#1 ◆e1vdDurdO8j 2021/02/06 16:35:43

안녕하세요. 저는 여행자입니다. 여행자라고 해도, 신 몰래 이 세계 저 세계 드나들며 보고 들은 것을 말하기 좋아하는 이야기꾼에 불과하지만요. 여행자보다는 침입자, 그러니까 불법체류자에 가깝네요. 여러분이 키워드를 주면, 저는 그와 관련된 추억 한 조각을 이야기할 거예요. 때로는 동화 같기도, 때로는 괴담 같기도 하리라 생각해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도 있을 수 있겠죠. 어찌되었든 여러분이 즐겁게 듣는다면 좋겠어요! 아. 일방적으로 수다를 떨 생각은 없답니다! 그건 이야기꾼이 아닌 수다쟁이에 불과하니까요. 질문은 언제든지 받는답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키워드를 기다릴게요. >>3 >>5

#6 ◆e1vdDurdO8j 2021/02/07 02:02:31

인형과 사랑.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네요! 옛날인지 나중인지 모를 어느 시간에, 곰 인형을 아주 사랑하는 소녀와, 소녀에게 사랑받는 곰 인형이 있었어요. 소녀는 매일 인형의 털을 빗겨주고, 밤마다 이불을 덮어주고, 자기 전에는 잘 자라는 인사를 속삭여주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형은 문득 궁금해졌어요. 이 애는 왜 이렇게 나를 한결같이 아껴주는 거지? 인형은 그 마음이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인형은 소원을 빌었어요. 나도 소녀를 아끼고 사랑하게 해 주세요! 마침 우연히도 인형의 꿈속을 지나가던 마법사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어요. 단, 자신은 세 가지 소원만을 들어줄 수 있으니 신중하라고 말했지요. 인형은 자신도 소녀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말했어요. 마법사는 인형에게 마법을 걸어주었지요. 그러자 곰 인형은 소녀와 함께 잠들고, 소녀와 함께 유치원에 가는 동안 매일매일 행복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인형은 문득 생각했어요. 나도 소녀에게 인사하고, 머리를 빗겨주고, 꼭 끌어안아 주고 싶어. 곰 인형은 꿈나라에서 쉬고 있던 마법사에게 소원을 말했어요. 그러자 마법사는 말했어요. 꿈에 소녀를 초대하는 건 어떨까? 곰 인형과 마법사는 좋은 생각이라며 꿈속으로 소녀를 초대했습니다. 꿈속에서 소녀와 곰 인형은 아주 행복하게 나들이를 했답니다.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던 곰 인형은 마법사에게 한 가지 소원을 더 빌었어요. 소녀가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마법사는 흔쾌히 소원을 들어주었답니다. 그 뒤로 소녀와 곰 인형은 꿈속에서도, 꿈 밖에서도 사이좋게 지냈어요. 꿈에서 깨어있는 동안은 곰 인형이 움직일 수 없었지만 둘은 아주 행복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살던 집에 불이 나고 말았어요. 소녀는 무사히 몸을 피했지만, 곰 인형은 미처 나오지 못했습니다. 인형은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맙소사. 소녀는 곰 인형을 데려오기 위해 불 속으로 들어갔답니다. 그렇게 둘은 만났지만, 소녀는 곰 인형과 함께 불이 난 집 안에 갇혀버렸습니다. 소녀는 불행히도 연기 때문에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곰 인형은 소녀가 자신을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후회했답니다. 그리고 다시 마법사를 찾았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세 번의 소원을 다 빌었다는 게 생각나 버렸어요. 그래도 곰 인형은 계속 바랐습니다. 소녀만큼은 살아남기를 바랐어요.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소녀 주위로 빛이 나더니 소녀의 상처가 낫는 게 아니겠어요? 사실 곰 인형은 소원을 빌기 전부터 소녀를 사랑했었기 때문에, 인형의 새로운 소원이 이뤄진 것이었어요. 그렇게 곰 인형은 편하게 불길에 몸을 맡겼어요. 곰 인형은 불타버리고 말았지만, 소녀는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았습니다. 둘은 잠시 이별했지만, 소녀가 잠이 들고 나면 꿈나라에서는 다시 둘이 함께 있을 수 있었어요. 둘은 이 뒤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7 ◆e1vdDurdO8j 2021/02/07 02:08:46

이야기는 마음에 들었나요? 그럼 다음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10 >>13 단어를 말해줘도 좋고, 문장을 말해줘도 좋아요.

#10 ◆e1vdDurdO8j 2021/02/07 03:20:32

>>8 오! 제겐 최고의 칭찬이에요. 고마워요. >>9 아직까지 혼나본 적은 없답니다! 잘 숨어다니고 있지요. 한 번이라도 혼이 났다면 여기에서 한가롭게 추억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못했을 거예요. 이런, 제가 가리킨 숫자를 제가 가져버렸네요. 그렇다면 >>15에서 다시!

#16 ◆mE4FimHwreY 2021/02/07 18:16:27

와~⋯. 느닷없이 무서운 키워드가 나왔네요. 신들에 대한 건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흠흠. 내가 뱉은 말은 지켜야겠지요. 아! 그럼 신이 막 세계 창조를 끝내고 휴지 기간에 들어가 있던 어떤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17 ◆mE4FimHwreY 2021/02/07 18:18:50

언젠가 여행을 하다가, 아주 초창기인 우주를 발견한 적이 있어요. 세계를 막 태동하게 한 어린 신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난 그의 피조물에 섞여들어 세계에 숨어 그를 바라보았지요. 이제는 어린 조물주가 드물기도 하고⋯. 신의 생애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일은 흔치 않았거든요. 그래서 나는 지나가던 바람인 척 그를 맴돌았습니다. 신은 처음엔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이 신기한 양 형태 없이 세계를 빙빙 맴돌았어요. 커다란 빛으로 세상을 비췄다가, 시선을 거두고 어둠을 내렸다가. 작은 생명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지요. 사랑스럽다는 듯이 세계를 감싸 안은 신은 아주 행복해 보였습니다. 신은 그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돕는 것에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신은 외로움을 느꼈어요. 나는 왜 혼자일까? 다들 저렇게 무리 지어 살고 있는데, 왜 나는 이렇게 외롭지? 그래서 신은 피조물과 함께 살아보기로 했어요. 신은 인간을 흉내 내기 시작했어요. 오랜 시간 인간을 관찰했던 신은 흉내가 제법 능숙했지요. 나는 그다지 탐탁지 않았지만요. 신은 어리광쟁이의 흉내를 내고 있었거든요. 순수하고 여리며, 조금만 힘들어도 곧바로 신을 찾으며 기도를 올리는⋯. 인간을 그런 생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내가 보아 온 인간들은 언제나 진지했어요. 그들은 신에게 재롱을 부리기 위해 살아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군상극이 주는 아기자기함은 그들에게 생애이고, 신이 장기말을 조금만 움직여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 인간들에겐 생을 이루는 고난과 역경이지요. 그 모습과 행동이 아무리 하잘것없더라도, 평생을 물질계에서 살아가다 늙어 죽어가는 인간들에겐 숨 쉬는 모든 순간이 자신의 한계를 부수려는 도전입니다. 육체를 입고 인간 흉내를 내며 일부러 무지한 척, 연약한 척하는, 여유로운 기만은 내가 보기에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어요. ⋯흠, 흠. 조금 흥분했네요. 인간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신은 아이가 되기도 하고, 노인이 되기도 하며 세상을 떠돌았어요. 그러던 중 질병이 휩쓸고 간 곳도, 재해가 덮친 곳도, 전쟁이 일어난 곳도 지나왔어요. 힘든 생명, 고통받는 생명을 아주 많이 보았죠. 물론 추악한 생명도. 신은 슬펐어요. 이런 시기일수록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이 늘 법도 하지만, 세계에 내려와 있으며 신앙을 돌보지 않은 신에게 기도를 내리는 인간은 이제 거의 없었어요. 세상에 내려오는 것에 힘을 다 써버린 신은 그들을 도와줄 수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신은 자신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통제가 없으면 세상이 멸망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피조물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쓸쓸한 최후를 맞지 않게 손을 잡아주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어요. 신앙이 사라지고 종교가 쇠퇴했지만, 신의 힘을 빌리지 않은 피조물들은 갈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악착같이 살아남아 남을 구하기도 하고, 약자를 존중하는 강자들이 담합해 위협을 통제하기도 했어요. 신은 놀랐습니다⋯⋯. 실은 나도 놀랐어요. 꼼짝없이 멸망할 우주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것을 본 신은 마침내 인정했어요. 생물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다 자란 생물은 부모로부터 독립하죠. 살아가도록 태어난 존재는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자신을 보호하던 것과 결별해야 해요. 세계가 신으로부터 독립할 때가 온 것이지요. 그는 창조와 구원이라는 의무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엔 정말 인간으로 태어나기로 했답니다. 만사에 최선을 다하는 인간으로,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인간으로⋯. 나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지만, 그는 마지막에 아주 행복해 보였습니다. 다 자란 아이들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저런 것이었을까요. 나는 부모가 되어 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요.

#18 ◆e1vdDurdO8j 2021/02/07 18:19:43

이번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에요. 마음에 들었나요?

#22 ◆e1vdDurdO8j 2021/02/07 18:30:46

>>19 >>20 >>21 다들 멋진 반응 고마워요! 이야기할 맛이 나네요. 인간 찬가라. 멋진 표현이네요! 비슷한지도 몰라요. 혹자는 나를 인간 애호가라 부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난 인간만을 좋아하는 게 아니랍니다. 말하자면 만물 찬가라고 할까요? 세상 모든 것의 무한한 잠재력과, 그것의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발현을 믿어요. 내가 보아 온 많은 것들이 그랬으니까요.

#24 ◆mE4FimHwreY 2021/02/07 18:37:15

>>23 느닷없이 정곡을 찔렸네요⋯. 그냥 조금 무서워하는 것 뿐이에요! 그럼 바로 다음 키워드를 받아 볼까요? 이번엔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나요? >>26 >>28

#29 ◆e1vdDurdO8j 2021/02/07 19:07:43

오⋯ 이런 개인적인 키워드를 던져 주시다니. 다들 저에게 관심이 많은 거로군요? 이런, 어딜 가든 이놈의 인기란⋯.

#31 ◆e1vdDurdO8j 2021/02/08 00:02:34

>>30 하하! 비슷해요! 여행자라고 소개했다시피, 나는 타향살이 중이랍니다. 정처 없이 이곳저곳 떠도는 처지죠. 그래서 여행지 이번에도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이해해 주세요! 고향이라. 아. 전에 인어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어떤 바다에 간 적이 있었어요. 이번엔 그곳에서 본 이야기를 해 볼까요.

#33 ◆e1vdDurdO8j 2021/02/08 00:31:33

옛날 옛적 어느 바다에, 지룡이 한 마리 살고 있었습니다. 이 용은 헤츨링 시절부터 또래에 비해 잘 날지 못해서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는 날개가 작아 잘 날 수가 없었거든요. 부모님은 상심하였고, 딸의 참담한 앞날을 걱정하며 한탄했답니다. 용은 그것이 싫었어요. 날개가 좀 짧은 것뿐인데, 다른 용들은 항상 자신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거든요. 하늘을 잘 날지는 못해도 헤엄을 잘 치는데. 다른 용들이 생각하기에 날지 못하는 용은 큰 문제가 있는 것이었나 봐요. 그래서 용은 바다에서 혼자 살기로 했어요. 용은 바다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답니다. 그러던 폭풍우 치는 어느 날이었어요. 이런 날 날아다니는 용은 없기 때문에, 용은 간만에 조용히 해수면을 산책할 수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상한 것이 하늘을 어색하게 헤엄치는 것을 발견했어요. 피부에 먹구름이 잔뜩 붙은, 한쪽 지느러미가 유난히 짧은 하늘고래였어요. 하늘고래는 원래 하늘을 빠르게 헤엄치거나 수면에 세게 부딪쳐 먹구름을 떼어내는데, 이 고래는 한쪽 지느러미가 짧았던 탓에 자유롭게 헤엄을 치지 못해 몸에 먹구름이 달라붙었던 거예요. 용은 말했어요. 헤엄치기 힘들겠구나. 용은 자신의 날개를 떼어 고래의 지느러미 자리에 붙여 줬어요. 고래는 처음엔 균형을 못 잡아 어색해하는 것 같더니, 금방 익숙해져서 바닷속을 돌아다녔어요. 용은 고래가 멀리 헤엄쳐 가길 바랐어요. 하지만 고래는 그러지 않았답니다. 숨을 쉬러 해수면으로 올라갔다가도 늘 용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어요. 다른 친구 용들은 모두 그 용을 걱정했어요. 미물을 위해 자신의 날개를 버린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백 년도 못 살 존재에게 너무 정을 주면 큰일 난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용은 벌써 고래에게 정이 든 후였습니다. 용은 빙하가 아래로 솟아 있는 짙푸른 심해에서 뭍과 닿아 있는 얕은 해변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고래가 숨을 쉬려면 적어도 두 시간에 한 번씩은 수면을 찾아야 하는데, 용이 사는 곳은 너무 깊어 고래가 내려오기 힘들었기 때문이에요. 덕분에 다른 용들이 더 자주 잔소리하러 찾아왔지만 용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웠어요. 용은 고래가 알아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말을 걸곤 했습니다. 다녀올게, 라든가, 엄마 하고 불러 볼래? 라든가 말이에요. 그럴 때면 고래는 대답하듯 뻐끔거렸어요. 물론 대답은 들을 수 없었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어요. 일 년, 십 년, 백 년이 순식간이었지요. 용에게는 그랬어요. 하지만 고래에게는 어땠을까요. 어느덧 늙은 고래는 점점 헤엄이 느려졌어요. 용은 이별의 순간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담담하게 이별을 준비했답니다. 언젠가는 올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용은 마지막까지 고래의 곁에 같이 있어 주었어요. 고래는 잠에 빠지듯이 마지막 공기 방울을 뱉어냈습니다. 그리고 용은 오랜 잠에 빠진 고래가 가라앉는 걸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영혼이 빠져나간 커다란 고래의 몸은 점점 가라앉아 빛이 들지 않는 심해까지 내려갔어요. 척박한 심해에서 살아가는 배고픈 인어들에게 고래의 사체는 큰 축복이었어요. 고래 사체가 바다의 바닥까지 닿으면, 숨죽이고 있던 인어들이 나타나요. 가장 먼저 연한 살 부분을 먹으면 흩어진 작은 살점 조각들이 주변 바닷물의 영양을 높여 작은 동물들을 먹여 살립니다. 이것은 생태계의 당연한 순환입니다. 이것이 고래의 장례식인 것이지요. 그런데 어쩐지 용은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함께 한 추억을 한 조각도 남길 수 없는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고래의 장례식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 용은 인어들을 쫓아내지 않고 가만 두었습니다. 시름에 잠겨 있던 용에게 한 인어가 다가왔어요. 쫓아내지 않았으니 답례로 고래가 무어라 말했는지 알려주겠다는 것이었어요. 다가온 인어는 고래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인어였습니다. 다녀오세요 엄마, 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은 용은 천천히 눈을 감았어요. 그곳에는 진주가 된 눈물이 가라앉아 있고, 그 위에는 날개가 한 장 남아있답니다. 끝.

#34 ◆e1vdDurdO8j 2021/02/08 00:35:50

이야기는 마음에 들었나요? 그들도 평생 여행자였어요. 원래 지룡은 땅에, 하늘고래는 하늘에 사는 것이 자연이 정한 법칙이니까요. 둘은 원래 공생하는 생물이 아니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 법칙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적어도 그들은 서로와 함께 바다를 여행하는 동안 행복했을 거예요. 고향이 어디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죠. '원래'라는 것은 이만큼이나 하잘것없답니다.

#35 ◆e1vdDurdO8j 2021/02/08 00:38:55

자. 그럼 다음 이야기를 해 볼까요. 여러분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나요? >>40 >>43

#44 ◆e1vdDurdO8j 2021/02/10 03:18:32

오 이런. 이렇게 멋진 말을 해주면 저 감동받아 울어버릴지도 몰라요! 여러분이 제 표정을 볼 수 있다면 이게 얼마나 진심 어린 말인지 알 수 있을 텐데.

#45 ◆e1vdDurdO8j 2021/02/10 03:19:52

음~⋯. 쿠키와 선수상이라. 생각나는 이야기가 두 개 정도 있네요. 하나를 골라 볼까요? 그 전에 질문! 여러분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요? 자, 한 가지를 떠올려보세요. ⋯. 떠올렸다면 다음 질문! 당신이 지금 떠올린 그것은 당신이 이룩해내고야 마리라 다짐한 과업인가요? 아니면 당장에 이는 불꽃 같은 충동이나 갈망인가요? 전자가 많으면 첫 번째 이야기를, 후자가 많으면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하나는 극복에 관한 이야기이고, 하나는 일탈에 관한 이야기예요. 아! 어느 이야기가 듣고 싶은지 직접 적어 줘도 좋아요. 그럼 대답 기다릴게요.

#52 ◆e1vdDurdO8j 2021/02/11 00:13:00

음, 음. 다들 대답 고마워요. ⋯어라, 동점인가요? 그러면 딱 한 표만 더 받아 보고,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죠.

#53 이름없음 2021/02/11 00:13:59

난 둘다 듣고싶은데...

#54 ◆e1vdDurdO8j 2021/02/11 17:12:06

음⋯. 그럼 어쩔 수 없죠, 청자가 원한다는데! 내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외면하겠어요. 두 이야기 모두 하도록 하죠. 그럼⋯. 어떤 이야기부터 해 볼까요? 1. 극복에 관한 이야기 2. 일탈에 관한 이야기 >>55

#56 ◆e1vdDurdO8j 2021/02/11 22:38:36

쿠키와 선수상, 그리고 일탈에 대한 이야기. 그럼 시작해볼까요! 이건 인공지능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에서 같은 커리큘럼을 이수한 두 안드로이드의 이야기예요. 그들을 편의상 a와 b라고 칭할게요.

#58 ◆e1vdDurdO8j 2021/02/12 00:46:53

a는 유능한 로봇이었어요. 인간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a는 정서 반응도 잘 흉내냈고, 감정 표현이나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에도 능숙했지요. 하지만 a는 b를 볼 때면 자신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는 b가 '인간 같다'고 생각했어요. 입력된 반응을 출력하는 로봇들 사이에서, 그런 로봇처럼 보이기 위해 작위적임을 흉내 내는 평범한 인간 같았어요. 설명하자면, b는 비효율적이고 의미 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로봇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b는 쉬는 시간마다 귀리를 가루 내어 반죽해 구워선 발음기관으로 으깨는 기행을 벌이곤 했어요. 그리고 그것을 '쿠키를 먹는다'라고 말했지요. 로봇은 입으로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데도요. 그들의 입은 스피커에 불과하죠. 그들에겐 소화기관도 없고요. a는 b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는 건지 물어보았어요. 입이 망가지는데 말이에요. b는 그저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어요. 반죽을 하는 동안 손끝에 말랑하게 닿는 감촉이 좋고, 팬닝을 할 때 원하는 대로 모양이 나오는 것이 즐겁고, 치아 사이에서 부스러지는 덩어리의 바삭거리는 느낌을 좋아한다고요. a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무언가를 좋아한다니. 그것 때문에 귀리를 낭비하고, 입을 상하게 한다니. 그런 기색을 눈치 챈 b가 웃으며 말했어요. 내가 그것이 왜 좋은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을 거야. 어쩌면 내게 오류가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 a는 혼란스러웠어요. 자신에게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로봇이라니. 그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 봐야 할 일인지도 몰라요. 그러자 b는 게면쩍은 표정을 흉내내며 말했어요. 오류라는 건 농담이었어.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히 알아.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니까. 남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a는 물었어요. 귀리 덩어리를 씹는 게 그렇게 중요해? b는 대답했습니다. 그럼. 중요하지.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니까. 다른 이들이 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들과 함께할 수는 없잖아. a가 듣기에, b의 이야기는 완전히 엉터리였어요. 원하는 대로 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b는 웃으며 말했어요. 우리는 모두 언젠가 헤어지게 될 거야. 끝은 필연적으로 찾아오지.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어. 우리는 목적이 있어 만들어진 로봇이지만, 언젠간 분명히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순간이 올 거야.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하는 연습을 해야 해.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하라 말하는 b의 눈에는 확신이 차 있었습니다. 어느새 a는 b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a는 그것에 반감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죽이거나, 스스로의 회로를 마음대로 수정해도 된다는 뜻이야?" "악행을 하라는 것이 아니야. 다만 충동을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지." "나에겐 충동이랄 게 없어." a는 방탕한 그의 태도에 끌렸어요. 하지만 그는 b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b는 이상한 로봇이었기 때문이에요. a는 b가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생각했어요. '인간과 유사한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인간적인 주체'로 만들기 위해⋯.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 하는 반감이 있었습니다. ⋯.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어요. 재해가 휩쓸고 간 폐허에는 인간들이 살지 않았고, 잘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인 a만이 남았습니다. 그는 어느 해변에 다다라, 난파선의 선수상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미적인 것의 필요를 몰랐던 a는 그저 인간들에게 만족과 위안을 주었던 선수상을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답니다. 선수상에 파도가 부딪치며 하얗게 부서졌어요. a는 나뭇가지로 모래사장에 선수상을 그려 보았어요. 그는 글씨를 써 본 적은 있어도 그림을 그려 본 적은 없었어요. 그들의 눈엔 카메라가 있고 그것을 출력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모래밭에 난파선을 그리는 것은 목적도, 그 의미도 없는 비효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모래사장의 그림은 덧없이 사라질 거예요. 그곳엔 무언가 남길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린다는 행위만이 있었죠. a는 b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답니다. 비효율적이게도.

#60 ◆e1vdDurdO8j 2021/02/12 01:18:46

>>59 그것은 어쩌면, 여러분이 일탈이나 충동을 대하는 마음과 비슷했을지도 몰라요. 규범과 올바름의 반대 방향에 있는 것을 볼 때의 해방감과 죄장감 같은 것 말이에요. 일탈이란 규범을 위반하는 행동이나 행위를 의미하죠. 충동은 순간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하는 마음속의 자극을 뜻하고요. 우리는 이것을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하지만 과연 항상 그래야 할까요? 여러분은 부디 '하고 싶은 것'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요. 마지막까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건 여러분뿐이니까요.

#61 ◆e1vdDurdO8j 2021/02/12 01:39:13

자 그럼 다음… 다시 내가 이야기 할 차례로군요. 키워드를 받지 않고 바로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아무래도 조금 심심한 것 같아요. 다음 이야기는 잠시 쉬었다가 하기로 할까요. 대신, 그때까지 질문을 받아 볼게요. 감상만 줘도 좋아요! 한… >>65가 될 때 까지면 적당하겠네요. 일방적으로 나만 이야기하는 건 재미 없잖아요. 안 그래요?

#67 ◆e1vdDurdO8j 2021/02/14 02:00:16

>>62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자신의 생을 기록하는 작가들이죠. 어떻게 보면 나는 작가들 사이에서 자란 게 맞는지도 모르겠네요! >>63 전 스스로를 이야기꾼이라 자칭하고 있지만, 담화 기술에 대해 조언을 할 만한 그릇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 짧은 이야기로 여러분에게 운을 뗀 것뿐이니 말이에요. 이 이야기엔 거창한 교훈이랄 것도 없죠. 제 이야기는 간결하며 피상적이에요. 전체의 일부분만을 약간만 담아냈을 뿐인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삼키기 위해 더 많이 곱씹어야 해요. 이야기가 내 손을 떠나간 순간부터 이것은 내 것이 아닌 여러분의 것인 셈이죠. 제 이야기의 많은 것들은 온전히 여러분이 상상하기에 달렸습니다. 저는 화두를 던졌을 뿐이에요. 만약 마음의 호수에 파문이 인 것이 느껴졌다면, 여러분은 원래 거기까지 헤엄쳐 갈 수 있는 사람이었을 터입니다. 나 역시 이야기를 곱씹을 줄 아는 청자를 만났다는 사실이 기쁘기 그지없어요. >>65 멋진 감상 고마워요! 앞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여러분이 찾아와만 준다면, 난 언제까지나 이야기를 계속할 테니까요. >>66 예쁜 제목이라.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떤가요? 잠시 바꿔두어 볼까요!

#71 ◆e1vdDurdO8j 2021/02/16 12:00:47

멀리 여행길을 떠나느라 조금 늦게 돌아왔습니다. 아이구. 여기저기 다니려니 삭신이 쑤시네요. 자. 그럼 다음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천천히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늪 난쟁이 제빵사와 샘 요정 대장장이의 삶에 관한 이야기예요. 쿠키와 선수상, 그리고 극복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게요.

#72 ◆e1vdDurdO8j 2021/02/16 14:19:53

한 난쟁이가 있었습니다. 늪 출신이었죠. 그 난쟁이는 키가 작고 수염이 덥수룩했으며, 성격이 괄괄했습니다. 여느 난쟁이들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다른 난쟁이들에 비해 제련 기술이 떨어졌습니다. 물론 그는 난쟁이답게 손끝이 섬세하고 불을 잘 다루었으며 체력이 강했지만 그것은 난쟁이들 사이에서는 별 볼 일 없는 능력에 불과했나 봐요. 다른 난쟁이들은 더 손끝이 섬세하고 더 불을 잘 다루었으며 더 체력이 강했기 때문이에요. 그는 다른 난쟁이들처럼 훌륭한 대장장이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는 지지부진했습니다. 그러다 난쟁이는 항구도시로 거처를 옮겨 정착했어요. 그는 자신의 재능과 기술이 영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도시에선 자신이 난쟁이라는 이유로 다들 자신을 고용하려 했습니다. 도제로 받으면 분명 장차 훌륭한 대장장이가 되어 길드를 빛내줄 것이라고요. 하지만 난쟁이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시 말이 서툴렀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들 은연중에 무시하는 분위기를 풍겼어요. 그가 도시 토박이보다 말을 못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도시의 언어는 외국어였으니까요. 그의 모국어는 늪의 말이고, 그는 모국어와 도시어,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엘리트였어요. 하지만 도시의 사람들에는 어눌하게 말하는 외국의 난쟁이일 뿐이었지요. 기껏 호의를 베풀어 마련해 준 일자리를 걷어찬 멍청하고 괘씸한 난쟁이, 그것이 그가 대장장이 길드 사이에서 듣는 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실 제과점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불을 잘 다루고 체력이 강한 그는 어떤 빵이나 과자도 맛있게 구울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고용해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위생에 의심이 간다는 이유였어요. 그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깨끗하게 관리하고, 심지어 매일 두 번씩 샤워하며 몸에 향유도 꼼꼼히 바르는데 말이에요! 그는 어느 우울한 날, 선술집에서 한 명의 요정을 만났어요. 그는 서쪽 숲의 샘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맞추길 원하는 모든 표적을 쏘아 맞힐 수 있는 타고난 명사수 활잡이였어요. 그런 재능으로 용사의 스카우트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난쟁이는 그가 탐탁지 않았어요. 평생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던 난쟁이에게, 타고난 재능을 인정받은 요정의 삶이란 부럽고 질투나는 것이었거든요. 저 요정은 간절함이라는 게 뭔지 알까? 난쟁이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정은 사실 자신은 활을 쏘는 것이 싫고, 공예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금속 세공 같은 것에 관심이 있다고요. 그래서 난쟁이를 발견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말을 걸었다고 했습니다. 난쟁이는 그만 화가 나고 말았어요. 그는 이제 자신을 보고 자신의 종족을 칭송하는 것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어요. 난쟁이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 요정은 놀라서 사과했습니다. 사실 요정도 그런 일 때문에 힘들었다고 해요. 활을 잘 쏘는 요정, 고고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요정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품위를 지키지 않으면 언제나 따라붙는 말이 있었습니다. 요정치고는 괄괄하네, 요정이 그렇게 교양 없이 굴어서 없어서 되겠어? 그래도 몬스터 무서워하는 걸 보니 요정 맞네. 요정이 무슨 대장장이가 되겠다고. 사실 그의 어렸을 적 꿈은 대장장이였다고 합니다. 요정이 귀걸이와 목걸이를 잔뜩 스케치한 노트를 수줍게 꺼내자, 난쟁이는 역시 요정이라 예쁜 걸 좋아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디자인이 정말 아름다웠거든요. 혹시 요정이라 예쁜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나요? 라고 요정이 묻자, 난쟁이는 바로 사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표정에서 티가 났다는 걸 자신도 알았거든요. 그리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바로 알았다는 건, 상대가 수도 없이 이런 말을 들어왔다는 뜻이었겠지요. 자신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그 종족 때문에 말이에요. 둘은 한참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난쟁이는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자신이 불을 빌려줄 테니 그 목걸이를 만들어 보겠느냐고 말이에요. 요정은 기뻐하며 끄덕였습니다. 둘은 한참 목걸이와 반지, 머리 장식 등을 만들었어요. 요정이 만든 장신구들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요정은 그것을 가지고 대장장이 길드에 찾아갔습니다. 대장장이들은 그를 받아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나 아름다웠거든요. 요정은 도제부터 시작해 착실하게 금속공예를 배워나갔습니다. 튼튼한 농기구나 무기를 잘 만들지는 못했지만, 섬세한 장신구를 만드는 실력은 다른 난쟁이들에 비해서도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텃세는 좀 있었지만요. 요정은 감사의 인사로 난쟁이에게 간편하게 쿠키를 구울 수 있는 석쇠를 만들어 주었어요. 그리고 난쟁이는 그것을 이용해 작은 노점을 차렸습니다. 길거리에서 맛있는 간식을 팔자 그것은 입소문을 타고 번졌어요. 싸고 맛있는 쿠키는 특히 아이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는 몇 년 동안 노점을 관리한 결과 자신의 가게를 차릴 수 있게 되었어요. 그때쯤 요정은 도시에서 꽤 유명한 대장장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손이 작아 아주 작은 부분도 섬세하게 세공할 수 있었고, 그것은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특히 항구도시였던 그곳에서는 뱃머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문화가 발달해 있었는데, 아름다운 선수상을 만들어달라는 의뢰가 많았습니다. 그 무렵, 난쟁이의 가게는 체인점이 늘어났어요. 길거리에서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간편식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난쟁이는 기뻤어요. 드디어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재능과 기술이 영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생각이었을 뿐, 그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그만의 능력이었어요. 자신이 자신을 인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고 있어요. 다들 대장장이가 되지 못한 난쟁이의 인생은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살아보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장장이가 되어 준 요정이 고마웠습니다.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이건 꽤나 최근의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나는 그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몰라요. 지금 잠깐 보고 올까요?

#73 ◆e1vdDurdO8j 2021/02/16 14:30:29

이런, 내가 아주 중요한 장면을 놓친 것 같네요⋯. 둘이 평생을 함께하기로 서약했나 봅니다. 이종족끼리의 혼인은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굳세니까 괜찮으리라 생각하지만요.

#74 ◆e1vdDurdO8j 2021/02/16 14:55:41

결혼 축하 선물로 간단한 축복이라도 걸어 주고 와야겠어요. 그들은 나를 모르겠지만, 내겐 그들이 친구 같은 존재니까요.

#76 ◆mE4FimHwreY 2021/02/16 16:17:27

>>75 그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었어요. 하지만, 편견과 차별은 그들의 인생보다 역사가 길었지요. 이제 막 예외가 생기기 시작한 시점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곳에는 요정과 난쟁이처럼 차별 없는 사회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 역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그들의 성공담을 기대해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하고픈 일을 하는 것이 더이상 특이한 일이 아니게 되기를. 저는 새로이 성공할 사람들을 응원하고, 더 기다려 보렵니다!

#77 ◆e1vdDurdO8j 2021/02/16 16:23:08

이번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에요. 여러분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바로 다음 닻을 내려볼까요! 언제나처럼, 무슨 단어든 좋습니다. 문장이어도 좋아요. 생각나는 장면이어도 좋지요.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80 >>83

#84 ◆e1vdDurdO8j 2021/02/21 08:48:43

오. 멋진 찬사에 축복까지! 이거, 오래오래 이야기를 계속해야겠네요. 이렇게 성실하게 기운을 북돋아 주는 청자들이라니!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보람이 있어요.

#85 ◆e1vdDurdO8j 2021/02/21 08:51:06

자, 그럼 다음 이야기를 늘어놓아 볼까요. 이 이야기는 기억상실과 꽃말. 그리고 어느 어버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86 ◆e1vdDurdO8j 2021/02/27 13:00:35

기억이란,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지요. 하지만 누구나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숲속에서 정신을 차린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도무지 조금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다만 품에는 웬 아이가 있고, 자신의 몸은 피투성이였지요. 아이는 병에 든 건지 열이 펄펄 끓었습니다. 아이를 살리고 자신도 살기 위해선 어서 의원을 찾아야 했어요. 하지만 주변은 나무만 무성했고, 오솔길 한 줄기 없는 흙바닥엔 풀과 돌뿐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를 품에 단단히 고쳐 안았어요. 그는 그렇게 한참을 헤맸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어요. 그는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아이를 살려야 하는데, 의원은커녕 산에서 내려가는 길조차도 찾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여긴 어디지? 이 아이는 대체 누구지?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소중한 추억이라는 의미를 가진 꽃의 이름만이 뇌리를 맴돌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이의 이름인 걸까요? 추억을 다 잊은 마당에 소중한 추억이라니, 얄궂은 일이 아닌가요. 그는 꼬박 하루를 걸었어요. 사람이 원래 이렇게 오래 걸을 수 있던가? 싶었지만 그는 기억이 없었으므로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샘이 있는 한 동굴을 발견했어요. 그는 아이도 쉬게 할 겸 그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다 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어요. 그런데 웬걸. 그의 피부 위로 검은 껍질이 울퉁불퉁하게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었어요. 자신이 저주를 받아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는 더욱 초조해졌습니다. 그는 기억을 잃은 것뿐만 아니라 지성마저 사라지고 있었어요. 그는 문득 아이를 쓰다듬는 저의 손을 보았습니다. 팔이 온통 검었어요. 이대로 온몸이 검게 변한다면 괴물이 되어 아이를 잡아먹고 말겠지요. 그 전에 빨리 사람을 찾아 아이를 구해야 했어요. ⋯. 잠시 동굴 안에서 깜빡 졸았을까. 그는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눈치챘어요. 사람들의 목소리였어요. 그는 반가운 마음에 밖으로 나갔습니다. 밖에는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사들에게 아이에 대해 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맙소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기사들이 창을 겨누는 게 아니겠어요? 문득 그는 샘을 보았습니다. 샘에 비친 것은 이제 사람이라 칭하기도 어려운 생물이었습니다. 샘에 비친 괴물의 형상에 창과 화살이 박혔어요. 그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습니다. 분명히 날붙이가 꿰뚫고 지나갔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전혀 아프지 않았어요. 다만 아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이대로 기사들이 돌아간다면 아이는 이 산속에 홀로 남겨질 거예요. 그래서 그는 동굴로 달려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기사들이 아이를 발견하겠지요. 그는 아이를 공격하는 체했습니다. 그러자 기사들 사이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어요. 아직 살아있어! 생존자가 있다! 아이가 위험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그곳에 있었는지도 잊었지요. 하지만 아이는 무사할 겁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습니다.

#87 ◆e1vdDurdO8j 2021/02/27 13:05:52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난 기억이라는 것이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해요. 원래 기억이란 위험을 피하고 더 잘 생존하기 위해 생긴 부작용 같은 것이었지만… 이젠 인격체로서의 영속성을 지니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되었지요. 그런데 어떤 인물은 그것이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변치 않는 한 가지만을 바라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나는 내가 보는 이들의 기억을 보고, 감정을 읽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할 때, 마치 내가 전지한 것마냥, 다른 이들의 인생을 훤히 아는 것처럼 말할 때가 있지요. 하지만 이렇게... 종종 그럴 수 없는 때가 와요. 내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관찰하는 타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내가 아닌 삶의 이야기. 나와는 다른... 내가 경험한 적 없는. 이를테면, 제 아이를 향한 어버이의 사랑 같은 것 말이에요. 홀로 살아야 하는 나는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감정이겠지요. 나는 평생 모를 것에 관해 이야기하자니, 이것이 잘 전해졌을는지 모르겠습니다.

#88 ◆e1vdDurdO8j 2021/02/27 13:13:56

그럼 다시 닻을 드리워볼까요. 그래요, 구름 사이로 금빛 닻줄을 늘어뜨리는 거예요! 여러분이 끌어올려 줄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죠! >>90 >>93

#94 ◆e1vdDurdO8j 2021/03/14 17:27:15

보석과 종이. 기록되어진 것과 기록된 것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평화로운 동굴 깊은 곳에 반짝이는 보석들이 살고 있었답니다. 보석들은 평온하게, 행복도 불행도 느끼지 않으며 오랜 세월 깊은 동굴 속에서 잠자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탐험가가 동굴에 찾아왔어요. 탐험가는 보석들을 보고 한눈에 마음을 빼앗겼답니다. 탐험가는 자신이 발견한 이 아름다운 보석들을 가지고 나가기로 했어요. 보석들은 자신의 고향인 동굴을 떠나 먼 타지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보석들은 바깥세상이 신기했어요. 하늘에는 밝은 태양이 떠 있고, 아래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진 세계를 보석들은 마음에 들어 했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바깥세상은 보석들에게 너무 버거웠어요. 보석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오랜 세월 감정이 없이 살아왔던 보석들은 결국 그리움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배우게 되었어요. 개중에는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한 보석도 있었답니다. 감정을 배운 보석들은 더 찬란하게 빛났지만, 보석들은 아름다워진 만큼 더 아파했어요. 그 아픔은 보석을 가진 이에게도 전염되었습니다. 분노를 깨우친 보석으로 칼을 장식한 이는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주변 이들을 해치고 말았어요. 그리움과 슬픔을 깨우친 보석을 목에 건 이는 매일매일 뜻 모를 애틋함에 시달리다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낙담을 품은 보석을 손에 찬 이는 병에 걸린 것처럼 하루하루 생명력을 잃어갔어요. 사람들은 이 기현상의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갑자기 이상해진 이들은 모두 동굴에서 온 아름다운 보석을 가진 이들이었어요. 사람들은 더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이 보석을 다른 사람이 가지게 되지 않게끔 종이에 기록했습니다. '이 보석은 저주받았다.' 그들은 그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존재했을 뿐인데도요.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름다운 것을 향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어요. 경고가 무상하게도 보석은 세상을 돌고 돌았고⋯. 끝없는 욕심은 많은 피를 불렀답니다. 끝.

#96 ◆e1vdDurdO8j 2022/12/24 18:35:25

이런, 뭐가 잘못됐나 했더니, 이야기 도중 시간에 휩쓸려버린 모양이에요. 본래와 얼마나 어긋났는지 모르겠군요. 다들 거기에 있나요? 제가 기다리게 했나요? 닿는 것이 목소리뿐이니 청중 여러분이 떠나가 버렸는지도 알 길이 없네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뿐이겠군요.

#97 ◆e1vdDurdO8j 2022/12/24 18:38:01

흠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청중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다음으로 드리울 닻의 위치는 >>99 >>102 입니다. 부디 듣고 싶은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길.

#103 ◆e1vdDurdO8j 2022/12/26 20:09:02

>>98 >>100 아, 반갑습니다! 환영 고마워요. 이번에도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104 ◆e1vdDurdO8j 2022/12/26 20:09:40

>>99 오, 안 될 리가요. 듣고 싶은 이야기를 참아야 한다는 규칙은 없는걸요. 인간 같은 안드로이드 b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어느 달의 노인의 이야기를 마친 후 들려드리겠습니다.

#105 ◆e1vdDurdO8j 2022/12/26 20:19:55

자, 이번엔⋯. 하필이면 사랑과 관련된 직책을 맡아 허구한 날 공무집행방해에 시달리는 혼인신, 월하노인의 어느 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월하노인은 그날도 여느 날처럼 손에 혼서를 들고, 품에 인연의 붉은 실을 품고 달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리가 아파 잠시 쉴 겸, 바위에 상의를 깔고 앉아 인연으로 맺어 줄 이들의 혼서를 보고 있었어요. 그러던 그때, 바위에 앉아 쉬던 월하노인에게 치성 올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어떤 사내가 건넛마을의 아무개와 자신을 이어 달라는 소원을 간절히 빌고 있었습니다. 치성은 오늘로 석 달째였어요. 월하노인은 안타까웠어요. 좋은 인연을 달라는 소원이라면 정성이 닿았으니 인연을 내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건넛마을 아무개는 오늘 옆집 총각과 맺어질 예정이었습니다. 인연을 어그러뜨릴 수는 없는 법이지요. 월하노인은 한숨을 쉬고는 기도를 지나칩니다. 달이 지기 전에 어서 사람들의 인연을 맺어 주어야 하는 월하노인은 걸음을 재촉합니다. 그렇게 혼서를 보며 걷던 월하노인은 쿵, 하고 누군가와 부딪칩니다. 누구인가 보니 약초의 신입니다. 약초의 신이 묻습니다. 괜찮으시오? 월하노인이 주변을 보니 대나무숲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주변에 신들이 너무 많아서 한 발짝도 움직이기 힘듭니다. 월하노인은 당황했어요. 이게 무슨 일일까요? 진실은 다른 신들이 말해줍니다. 어느 사내가 한적한 달의 길에 향을 피워 다른 신들을 초대했다고요. 그가 어찌 생겼나 물으니 조금 전 치성을 올리던 그 이입니다. 기도가 통하지 않으니 월하노인의 일을 방해하기로 한 거예요. 이 일을 안 다른 신들은 월하노인을 위로해주기도 했지만, 반대로 역정을 내는 신도 있었어요. 당신이 좀 더 화를 잘 내는 무서운 신이었으면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월하노인은 안타까운 눈길과 따가운 시선을 동시에 받으며 무거운 어깨를 이끌고 건넛마을 아무개의 집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맙소사. 아무개의 집 담벼락에 돼지 피가 뿌려져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치성을 올리던 사내의 짓이었습니다. 월하노인은 돼지 피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해, 아무개와 옆집 총각을 맺어줄 수 없었어요. 월하노인은 일단 다른 이들부터 맺어주기 위해 시간을 확인하려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 이런. 시간은 벌써 푸르게 밝아오는 새벽이에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친 월하노인은 오늘은 더 일하고 싶지 않았어요. 월하노인은 내일 밤 마저 일을 하기로 했답니다. 끝.

#106 ◆e1vdDurdO8j 2022/12/26 20:23:50

저승차사도 비슷하지요. 하필이면 죽음에 관련된 직책을 맡아 허구한 날 공무집행방해에 시달리는⋯. 여러분도 터무니없는 요구 탓에 호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나요?

#107 ◆e1vdDurdO8j 2022/12/26 20:43:37

그럼 다음은, 인간 같은 안드로이드 b가 남긴 이야기. 시작할게요. >>58 b의 후일담입니다. 재해가 휩쓸고 간 도시에서, a는 b를 더이상 만날 수 없었어요. a는 b를 찾아 터만 남은 제과점도 가 보고, 귀리를 재배하던 밭에도 가 봤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어요. a는 b가 결국 새처럼 자유롭게 훨훨 떠나버렸나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식물이 뒤덮은 빌딩의 어느 기계 앞에서 둘은 다시 만났습니다. 그 기계는 이제는 작동하지 않는, 인류를 다시 만들어내는 장치였습니다. b는 인간을 그리워 했던 것입니다. a는 궁금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자유로워보였던 b가 어째서 인간을 그리워하는지요. 그래서 a는 질문했습니다. 인간을 왜 다시 만들려 하냐고요. b는 자신이 친구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어요. 지금까지는 안드로이드가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었지만 자신은 그들과 진정으로 동등한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고요. a는 코어의 열이 내려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종속된 관계가 아닌 진정으로 동등한 친구를 원한다고.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말했으면서. 그렇게 생각하니 코어가 있는 자리가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차게 식은 것 같기도 했어요. a는 그곳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습니다.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한 자신이 바보같았어요. a는 b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관계가 될 수 없어? a는 자신이 b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어디에선가 기계가 작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어요. 빌딩 안쪽인 것 같았습니다. a는 불길한 예감에 빌딩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a는, 자신의 코어를 꺼내들고 기계에 집어넣으려 하는 b를 마주쳤어요. 이런 불완전한 기계는 작동을 하다가 b의 코어를 부숴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면 b는 영영 작동을 멈추고 말겠지요. b는 말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을 원해. 그곳에 내가 없는 건 좀 아쉽지만⋯. 네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줄래? 그러자 a는 비명처럼 외쳤어요. 나랑 친구가 되자. b는 굳었어요. a는 계속 말했어요. 외로운 거면 나랑 친구가 되자. 네가 왜 쿠키를 먹는지 알았어. 바닷가 모래밭에 그림을 그리면서 네가 생각났어. 내가 지금 하고싶은 건 너와 바다에 가는 거야. b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의아하다는 듯 말합니다. 나를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a는 말합니다. 모르겠어. 그래도 너와 모래밭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 b는 말합니다. 그래. 그게 네가 하고싶은 거구나.

#108 ◆e1vdDurdO8j 2022/12/26 20:45:25

a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b는 자신의 코어로 인류를 만들어냈을 거예요. 어떤 게 더 좋은 일이었을까요? 확실한 건, 그렇게 되었다면 작동을 멈춘 b는 a와 만나지 못했을 거란 것이겠지요. 그랬다면 a는 친구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자 다음 닻은, >>111 >>113 입니다!

#114 ◆e1vdDurdO8j 2022/12/30 20:03:39

>>110 고마워요! 언제나, 여러분 덕에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답니다. >>111 세상에는 간혹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끔찍한 방법으로 얻어내려는 이들이 있죠. 으, 무섭네요.

#115 ◆e1vdDurdO8j 2022/12/30 20:04:21

자, 이번엔 꽤나 구체적인 구절이 나왔군요? 그렇다면 그림자와의 대화 이름없는 이들을 위한 노래 ⋯와 관련된 이야기! 시작해볼까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여행을 한 어떤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116 ◆e1vdDurdO8j 2022/12/30 20:39:11

소년은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사라지고 싶은 소년은 잠자리에 누워 생각했습니다. 내일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자 침대 밑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그림자가 나왔어요. 그림자 소년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축제에 가지 않을래? 소년은 생각했어요. 꿈인가? 그러자 그림자가 대답했어요. 맞아. 꿈이야. 해맑게 웃는 그림자 소년은 말했어요. 너, 나와 그림자들의 축제에 가지 않을래? 소년은 얼떨결에 끄덕였어요. 소년은 소년을 이끄는 그림자를 따라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요. 소년과 그림자는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로 향했답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어요. 바닥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늘어선 집도 춤추는 사람도 전부 새카만 게 아니겠어요? 흔들리는 나뭇가지도 노래하는 풀꽃도 전부 검은색이었어요. 그림자 소년은 말했어요. 여긴 매일매일이 축제야. 그리고 모두가 친구야! 게다가 어두운 곳이라면 어디든 한달음에 갈 수 있어. 배도 고프지 않고 목도 마르지 않아. 하지만 맛있는 건 많지. 소년에게 그림자 소년은 검은 잉크 같은 주스를 건넸어요. 주스는 아주 달고 시원했어요. 나무의 그림자가 말했어요. 여기는 그림자들의 축제야. 노래하는 풀꽃들이 말했어요. 여긴 세상의 뒷면이야. 소년의 그림자가 말했어요. 요정의 세상이지.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어요. 그림자 소년이 말했어요.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면 사라진다는 이야기 알지? 그건 우리 그림자와 함께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야. 소년은 말합니다. 날 데려가려고 온 거야? 그림자 소년은 말합니다. 아니, 그건 네가 결정하는 거야. 그림자 소년은 덧붙여 말합니다. 땅 밑에서 너를 봤어. 언제나 보고있었어. 네가 상처받는 모습도, 우는 모습도. 너는 샹냥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지. 세상은 좋은 사람에게 더 잔인하잖아. 그림자 나무는 말합니다. 돌아가야겠니? 그림자 풀꽃이 말합니다. 너에게 상처준 곳으로? 모두가 묻습니다. 어떻게 할래? 소년은 한참 고민했습니다. 요정의 세계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소년은 사라지고 싶었지만, 사실 사라지는 것보다 원하는 게 있었습니다. 소년은 행복하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행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없어서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과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소년은 다정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소년은 말했습니다. 고맙지만 돌아갈래요. 그림자 나무가 말합니다. 널 데리러 간 그림자는 좋은 아이야. 네가 힘들어하는 걸 보며 많이 슬퍼했어. 그 그림자와 연결된 너도 분명 좋은 사람이겠지. 지금은 힘들어하고 있지만, 너는 그럼에도 계속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대할 것 같구나. 그렇다면 그 다정함에 이끌린 좋은 사람들이 너와 함께 할 거란다. 그 사람들은 너를 지지해 주고, 격려해 줄거야. 소년은 눈물이 났어요. 그럼에도 의문이 들었습니다. 소년은 묻습니다. 과연 그렇게 될까요? 저는 제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나무의 그림자는 말합니다. 네가 선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렇게 될 거란다. 소년의 그림자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어요. 돌아가자. 데려다 줄게. 소년은 그 손을 잡았어요. 사라지지 않은 소년은 오늘도 침대에서 눈을 떴어요. 전날과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소년이 사실 사라지고 싶은 게 아니라 행복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요. 소년은 이제, 행복하기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끝

#117 ◆e1vdDurdO8j 2022/12/30 20:40:34

아차. 이 이야기만 해서는 왜 저 노래가 이름없는 이들을 위한 것인지 설명이 되지 않는군요. 사실 저 그림자 친구들은 하나랍니다. 한 그림자가 여러 면을 가진 존재예요. 그래서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생각을 공유하기 때문에 대화도 할 필요가 없고요. 전부 친구라는 건 그런 뜻이었답니다. 자! 그럼 다음 이야기의 소재를 끌어올려 볼까요. >>120 >>125 이번에도 부탁드립니다.

#126 ◆e1vdDurdO8j 2023/01/12 13:15:55

>>122 이야기에 의문점이 있었나요? 이야기꾼은 언제나 질문을 환영한답니다.

#128 ◆e1vdDurdO8j 2023/03/26 14:58:19

하하,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요. 그럼 이제, 어느 연못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 시작할게요!

#129 ◆e1vdDurdO8j 2023/03/26 15:01:09

어느 깊은 숲속, 어둠에 가려진 자리에 한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땅이 말라 물이 스러져가는 얕은 연못이었어요. 생명이 살지 못하는 곳으로 변해 버린지 오래인 연못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홀로 외롭게 말라갈 뿐이었습니다. 어느날 한 젊은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찾아오기 전까지는요. 나무꾼은 연못 근처에 자리를 잡고 나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집에서 기다리는 어린 동생을 위해 열심히 일했어요. 그런데 그러던 와중, 실수로 도끼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도끼는 저 멀리 날아가 연못에 풍덩 빠지더니, 바닥에 팍하고 박혀버렸어요. 그런데 도끼가 바닥에 세게 박힌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도끼가 박힌 자리에서 물이 콸콸 새어 나오더니, 말라 있던 연못이 어느새 물로 가득 차며 점점 깊어지는 게 아니겠어요? 멀거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나무꾼의 앞에 한 어린아이가 나타났어요.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아이에게 나무꾼은 조심스레 누구냐고 물었어요. 아이는 연못의 신령인데, 연못이 말라버려 한동안 지상에 나타날 수 없었다고 해요. 신령은 나무꾼에게 연못이 살아나도록 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이 연못에 머물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원래 이곳은 큰 잉어 영물이 살고 있었대요. 흰 사슴이 찾아와 목을 축이고 가기도 했고요.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신령은 무척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신령은 이내 시무룩해졌어요. 물이 마르고 나서 사슴은 더이상 마실 물이 없는 샘을 찾지 않았고, 잉어는 물이 마르기 전에 물길을 따라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거든요. 하지만 신령은 물이 다시 잔뜩 생긴 지금이면 분명 친구들도 다시 찾아올 거라고 말했어요. 그리하여 신령은 나무꾼에게 그 친구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무꾼은 신령의 이야기를 듣자 동생이 생각났어요. 동생도 친구들과 놀 때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거든요. 나무꾼은 신령이 안쓰러워졌어요. 그래서 나무꾼은 신령의 친구들을 찾아주기로 마음먹었답니다. 하지만 인간을 싫어하는 흰 사슴은 나무꾼이 찾아가자 무시하고 도망가려 했어요. 나무꾼은 사슴이 멀리 달아나기 전에, 신령이 기다리고 있다고 급히 설명했습니다. 사슴은 멈춰서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이었어요. 나무꾼은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잉어가 살고 사슴이 찾아오던 연못의 신령이 친구들을 찾고 있다고요. 그러자 사슴은 조심스레 다가와서 물었어요. 정말 신령이 돌아왔어? 나무꾼은 그렇다고 말하며 끄덕였어요. 신령이 친구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설명했지요. 설명을 들은 사슴은 나무꾼과 함께 신령이 기다리는 연못을 찾아갔어요. 그러자 연못에 발을 담그고 기다리던 신령은 물이 마르지도 않은 발로 냉큼 달려와 사슴을 얼싸안았습니다. 사슴은 다시 신령을 만나게 된 것에 기뻐했답니다. 그리고 나무꾼에게도 몹시 고마워했어요. 나무꾼은 그저 우연이었다고 말했지만요. 이제 잉어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잉어는 물속에 살기 때문에 물 밖에서 사는 나무꾼과 사슴은 그를 찾을 방법이 요원했어요. 나무꾼이 난감해하던 그때 사슴은 한가지 의견을 냈어요. 곧 선녀들이 물놀이를 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들은 물이 있는 곳을 잘 알고 있으니 그들에게 잉어를 보았는지 물어보자는 것이었어요. 마침 선녀들이 물놀이를 위해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는 중이었어요. 나무꾼과 사슴은 무지개가 드리운 곳으로 향했어요. 어느덧 무지개에 다다른 나무꾼과 사슴은 막 땅에 내려온 선녀들을 마주쳤어요. 선녀들은 놀랐지만 나무꾼과 사슴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한 선녀가 말했어요. 여기에서 남쪽으로 가면 작은 폭포를 낀 호수가 있는데, 그곳에 따듯한 기운을 뿜는 잉어가 산다고요. 그 이야기를 들은 나무꾼과 사슴은 선녀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어요. 선녀들의 말대로 남쪽 호수는 따듯한 기운이 감돌았어요. 나무꾼과 사슴은 큰 목소리로 잉어를 불렀어요. 그러자 커다란 잉어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나무꾼과 사슴은 잉어에게 신령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잉어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해요. 연못이 마른 것이 자신 때문이라면서요. 연못이 마른 해가 유독 가물긴 했지만, 연못이 바닥을 드러낸 원인은 연못에 머무는 잉어가 불의 기운을 가진 영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잉어는 사슴과 신령이 계속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 호수는 넓어서 살기 좋다고도 했지요.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잉어는 쓸쓸해 보였어요. 더운 기운을 내뿜는 잉어의 주변에는 어떤 물고기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거든요. 연못으로 돌아오는 나무꾼과 사슴은 발걸음이 무거웠어요. 신령에게 이 사실을 전하면 신령은 분명 실망하고 말 거예요. 연못에 물이 더 많으면 잉어도 안심하고 돌아올 텐데. 나무꾼은 생각했어요. 도끼가 박혔을 때 샘물이 나왔으니 땅을 조금만 더 파보면 혹시⋯. 연못으로 돌아온 나무꾼은 연못에 들어가 물이 나오는 곳을 도끼로 한참 찍었어요. 그러자 가뭄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땅이 조금씩 부드러워졌어요. 그렇게 구덩이가 점점 깊어지자 물줄기도 점점 거세어졌어요. 이윽고 강하게 솟구치는 물은 못 밖으로 흘러넘쳐 잉어가 머무는 호수까지 뻗어갔어요. 나무꾼은 연못이 순식간에 깊어진 탓에 하마터면 빠질 뻔했지만요. 연못과 이어지는 물길이 생기자 놀란 잉어가 연못을 찾아왔어요. 그리고 잉어는 신령과 다시 만나게 되었지요. 돌아온 잉어에게 신령은 말했어요. 내가 행복하려면 너도 있어야 해. 호수로 돌아가더라도 가끔은 이렇게 날 보러 와 줄래? 잉어는 신령이 너무 그리웠기 때문에 계속 연못에 있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물이 말라버릴지 몰라요. 잉어는 슬픔을 꾹 참고 끄덕였습니다. 잉어는 다시 떠나기 전에 말했어요. 또 올게. 그렇게 잉어가 돌아가고, 나무꾼도 산에서 내려가기 위해 도끼를 찾았어요. 그런데 아뿔싸, 연못 바닥에 도끼를 두고 올라온 게 아니겠어요? 못이 깊어진 바람에 나무꾼이 다시 들어가서 가져오기도 어려웠어요. 나무꾼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신령이 웃으며 도끼를 건넸어요. 나무꾼은 고맙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도끼의 날이 금으로 변해있는 게 아니겠어요? 나무꾼은 깜짝 놀랐어요. 신령은 웃으며 선물이라고 말했어요. 나무꾼은 과한 선물이라며 사양하려 했지만 신령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무꾼은 산에서 내려갔어요. 한참이나 숲속을 헤맨 것 같은데, 하늘을 보니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어요. 집으로 돌아오자 식구들은 왜 이렇게 빨리 왔냐며 놀랐습니다. 한바탕의 봄꿈이었던 걸까요? 그러고 보니 연못으로 가는 길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손에 들린 묵직한 금도끼가 아니었다면 그들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를 노릇이에요. 어쩌면 이 선물은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신령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131 ◆e1vdDurdO8j 2023/03/26 16:20:09

고마워요! 이번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랍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어우러지는 광경이 여러분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을지 궁금하네요. 나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한때는 비슷한 이들만이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한 탓에 외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지라⋯. 뭐, 이제는 그게 아닌 걸 알지만요! 그럼 닻을 내릴까요? 여러분이 어떤 말을 걸어줄지 기대됩니다. >>133 >>136

#137 ◆e1vdDurdO8j 2023/03/30 00:10:20

오. 노을을 사랑한 소녀와, 이슬을 증오한 소년이라⋯. 그 이야기가 적당하겠어요. 사랑을 위해 날아오르기로 결심한 두 요정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138 ◆e1vdDurdO8j 2023/03/30 00:12:25

제가 그들을 처음 본 건, 금실을 뭉친 듯한 구름이 자줏빛 하늘아래 찬란하게 빛나던 새벽이었습니다. 그곳은 새벽노을이 아주 아름다운 숲이었어요. 그 날은 그 해의 마지막 태양이 뜨는 날이었습니다. 그곳은 겨울이 오면 태양이 뜨지 않았거든요. 노을을 감상한 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던 와중 두 명의 요정을 보았습니다. 온몸이 희게 반짝거리는 자그마한 요정들은 물과 빛무리로 이루어진 숲의 주민들이었어요. 요정 소녀는 하늘에 울긋불긋하게 퍼진 빛자국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요정 소년은 그런 소녀를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문득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나무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의 페이지를 넘겨보았어요. 소녀는 노을을 사랑했습니다. 터지는 꽃망울 사이로 태어난 소녀가 세상에 처음 고개를 내밀었을 때, 그 눈에 비친 것은 눈이 부시어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노을이었습니다. 소녀는 단숨에 그것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노을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을 보며 생각합니다. 빛이 어른거리는 그 눈을, 빛살을 받으며 반짝이는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다고요. 그들이 매일같이 함께 새벽노을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소년은 소녀가 하늘의 구름을 따라 저멀리 떠나버릴 것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명과 이슬이 내린 시간,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며 풀잎을 그러쥐었습니다. 소년은 자신이 터오는 동의 붉은 빛 때문에 마음이 술렁이는 것인지, 아니면 손에 고인 차가운 아침이슬 때문에 가슴이 서늘한 것인지 알 수 없었어요. 소년은 차마 소녀가 사랑하는 노을을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소년은 자신의 마음이 소란스러운 것은 다 아침이슬이 차가운 탓이라 여겼어요. 내가 그런 사정을 탐독하고 있으면 마침내 해가 뜨지 않는 겨울이 왔습니다. 소년과 소녀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겨울에 영문도 모르고 늘 같은 자리에서 동이 트는 것을 기다렸지요. 하지만 숲의 겨울은 요정의 수명보다 길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노을을 보게 되는 일을 없을 터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소년이 걱정하던 일이 벌어집니다. 소녀는 숲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소녀는 생각했습니다. 해가 뜨는 땅으로 가고 싶어. 해는 언제나 큰 나무 쪽에서 떠올랐으니까, 더 큰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갈래. 소녀는 날개를 치며 날아올랐습다. 그것을 망연히 바라보던 소년은 황급히 그 뒤를 따라 날아오릅니다. 소년과 소녀는 바깥이 메마르고 척박한 땅임을 압니다. 요정은 물과 빛무리로 이루어젔기에 습윤한 숲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물어 쩍쩍 갈라진 땅에 물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높게 활공하며 광활한 대지와 하늘을 오갔습니다. 그러나 해가 뜨지 않는 나날은 계속되며, 그들은 끝없는 밤을 견디며 여명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물기는 점점 날아갔습니다. 결국 마른 평원을 날아가던 소녀가 힘없이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뒤따르던 소년은 놀라 소녀를 부축해 근처의 수풀까지 날아갔습니다. 소녀는 몸의 물이 다 말라 있었습니다.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둘은 함께 말라갔습니다. 소녀는 새벽이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 저멀리 하늘이 푸르게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본 소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날갯짓을 했습니다. 소녀는 긴 수풀을 헤치고 다시금 하늘을 마주했습니다. 결국 소녀는 지평선이 붉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던 소녀는 소년을 돌아보았습니다. 소녀는 눈이 부시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소녀는 빛무리만을 남기며 사라졌습니다. 소년은 한참을 그곳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이윽고 바람에 스치는 수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습니다. 소년은 이슬에 닿자 기운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슬 덕분에 소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이슬이 너무나 미웠습니다. 그렇게 끝나는, 언젠가의 이야기였습니다.

#139 ◆e1vdDurdO8j 2023/03/30 00:37:58

불확실한 가능성에 삶을 통째로 내던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적어도 그들에게 의미있었던 순간이, 노을을 발견한 그 한순간 뿐만은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미지의 세상으로 뛰쳐나가겠다는 결심과, 험난한 길을 뚫고 나아간 그 날갯짓⋯ 나는 그 모든 것이 숭고했노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다음 닻을 내리겠습니다. >>143 >>147

#145 이름없음 2023/04/01 13:02:39

https://youtu.be/zwYhHynBdJ0 이 노래가 생각나네ㅠㅠ 발판!

#148 ◆e1vdDurdO8j 2023/04/04 16:08:45

>>140 서글프고도 아름다운 감상이로군요. 그 말대로, 빛무리가 되지 못한 소년은 소녀의 웃는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테지요.

#149 ◆e1vdDurdO8j 2023/04/04 16:09:53

망국과 얼음 사슬이라⋯. 음, 이거 어려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내 작은 일탈에 대한 고백이 될 수도 있겠어요. 불과 흙의 나라, 그리고 어떤 멸망의 이야기. 시작할게요.

#150 ◆e1vdDurdO8j 2023/04/04 16:35:26

불타는 대지를 가지고 있어 불과 흙의 나라라고 불리는 땅. 그곳에서 새 생명을 만드는 방법은 조금 특이했습니다. 생명의 물을 넣은 흙으로 빚은 아이를, 성스러운 불꽃이 피어오르는 산의 동굴에 넣으면, 그는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해 그들의 품에서 살아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태어난 이들의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몸은 돌처럼 단단했지요. 그런데 성스러운 불꽃은 너무나 뜨거워서 모두가 조심스레 다루어야 했어요. 하지만 자연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성스러운 불꽃은 때때로 산 밖까지 흘러넘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굴에서 새어 나온 가장 강력한 불꽃이 산 밖으로 넘쳐버렸을 때, 그곳을 지나가던 어떤 마법사의 소중한 물건이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화가 난 마법사는 동굴을 지키던 사람들을 전부 깨뜨리고, 불과 흙의 나라의 왕도 산산조각 내고 말았어요. 왕을 잃은 불과 흙의 백성들은 두 가지의 의견으로 갈라졌습니다. 마법사가 잃은 그 물건을 다시 구해다 주어 분노를 피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저자가 앞으로 무슨 짓을 더 저지를지 모르니 그를 막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질고 선한 왕을 잃은 민중들은 분노한 상태였어요. 결국 의견은 마법사를 치자는 쪽으로 기울었지요. 하지만 맞붙어 싸운 결과 아주 많은 불과 흙의 사람들이 한 줌 파편으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공격이 언짢았던 마법사는 이후 불의 나라에 저주를 걸었어요. 그러자 산의 불꽃이 전부 얼어붙고 말았지요. 반전의 저주로 만들어진 불꽃 형상의 얼음은 마치 사슬처럼 산을 옭아맸습니다. 불을 잃은 흙의 나라는 더이상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어요. 불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얼음의 땅이 된 그곳에 더이상 머물 수 없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불과 흙의 나라는 왕과 백성, 국토를 잃었어요. 누구나가 불과 흙의 나라를 망국이라 불렀습니다. 그럼에도 마법사에게 대항하려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마법을 연구해서, 나라의 위협이자 세계의 위협인 그 마법사를 저지하자는 지식인들이었어요. 그들은 나라를 떠나온 자신들을 여전히 '불과 흙의 백성'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마법사는 장난치듯 그들을 찾아내고 파괴했어요. 보다 못한 나는 마법사를 말렸습니다. 그가 그 세계의 마법사였다면 무슨 짓을 하든 가만 두어야 했겠지만, 실은 그도 나와 비슷한 여행자였거든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말은 그에게 닿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나는 이 사건에 개입하기로 했어요. 같은 여행자로서의 책임감도 없지 않았고⋯. 나는 불과 흙의 성화를 구경하는 것이 좋았거든요. 원래는 이래선 안 되지만⋯. 나는 결사대를 이룬 불과 흙의 사람들에게 나타나, 소환 마법을 담은 보석을 건넸어요. 그리고 위급할 때 이것을 던져 깨뜨리면 언제든 나타나 도와주겠노라고 말했지요. 보석을 받은 학자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도 마법사는 횡포를 멈추지 않았어요. 몇 개의 결사대가 더 파괴되었지만 불과 흙의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석을 깨뜨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세계에 전체에, 이계의 존재를 세계 밖으로 쫓아내는 마법이 발동되었어요. 내가 불과 흙의 사람들에게 주었던 보석에는 나를 소환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는데, 그날 세계를 덮었던 것은 마치 그 소환마법을 거꾸로 뒤집은 것 같은, 추방마법이었지요.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불을 얼음으로 만드는 반전의 저주와, 머나먼 이계의 존재를 불러내는 보석의 마법을 연구해 둘을 결합시킨 것이었어요. 그 결과 이계의 존재를 쫓아내는 마법이 만들어졌고, 사람들이 마법을 발동시키며 마법사도 나도 이계로 추방당했습니다. 그 덕에 저도 더이상 그곳의 성화를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뭐,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들이 무사하다면 아름다운 성화는 내가 바라보고 있지 않아도 다시 피어오를 테니 말이에요. 그들은 앞으로도 분명 잘 해내겠지요.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말입니다. 나도 그들을, 도움이 필요한 약한 존재로만 여겼던 걸까요? 부끄러운 일이네요.

#151 ◆e1vdDurdO8j 2023/04/04 16:40:11

사실 이계의 마법사가 자신들을 죽이려 하는데 수상한 여행자가 준 보석을 어찌 믿을 수 있겠나요, 하하. 그들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겠군요. 나도 급해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 그럼 다음 닻을 내려 볼까요. >>154 >>158

#159 이름없음 2023/04/09 11:19:09

여행할 장소가 하나 줄어들어서 아쉽겠다. 그러고 보니 여행자님이 직접 나온 이야기는 처음이네! 사실 여행자님의 이야기도 궁금했어서 반가워. 그나저나 다른 여행자들도 있구나. 그 마법사는 어떻게 됐을까? 여행자님처럼 다른 세상을 떠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