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딜루션

창작소설 2021/09/11 11:39:04

#1 이름없음 2021/09/11 11:39:04

“날 좀 죽여 줘.” 그렇게 말하는 낯짝이 고백이라도 하듯 달아올라 있었다.

#2 이름없음 2021/09/11 11:39:27

“… 무슨 헛소리야? 내가 범죄자인 줄 알아?” “설마! 절대 아니지. 아니야. 그런 생각 안 했어.” 대단한 실수라도 저지른 양 황급히 내젓는 고개. 반듯하게 잘린 머리칼이 움직임에 맞추어 이리저리 흔들린다. 하늘이 담긴 눈동자는 이질적이도록 투명했다.

#3 이름없음 2021/09/11 11:40:08

“네가 와 주기를 기다렸을 뿐이야. 너라면 반드시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봐, 결국 네 발로 걸어오게 됐잖아. 그렇지?” 무려 일 년을 함께한 사이인 터. 그럼에도 나는 이 애가 이렇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다.

#4 이름없음 2021/09/11 11:40:40

“보고 싶었어, 앨리스.” 펜을 든 소녀의 각막에 너덜너덜한 내 모습이 비쳤다. 기이한 미소를 머금은 그 애가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된 식칼을 고쳐 쥐었다.

#5 이름없음 2021/09/11 11:42:17

“너,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 “사람이란 게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지. 이런 성격이 뭔데? 지금 네 눈에 보이는 나? 그거라면 완전히 틀렸어. 나는 처음부터 이랬거든.” “상황이 미쳤다고 사람까지 미치면 안 되는 거 모르냐? 적당히 하고, 좀….” “너야말로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 뭐?"

#6 이름없음 2021/09/11 11:43:10

“내가 널 몰라? 성급하고 충동적인 이윤정. ‘원래의’ 너라면 지금 나랑 시간 낭비하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환장하게도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어디까지나, 예전의 나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7 이름없음 2021/09/11 11:43:29

“나의 앨리스, 완벽한 앨리스.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 좆 같은 앨리스 타령 좀, 네가 날 얼마나 안다고.” “적어도 지금의 네 마음은 알지. 왜냐하면 너, 전부 알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 산뜻하게 이어진 대답에 목이 콱 막혔다. 나는 대답 대신 새카만 눈으로 그 애를 노려보았다.

#8 이름없음 2021/09/11 11:45:01

그래, 이 모든 게 네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악몽이지. 찢어지는 비명, 유리창에 덕지덕지 묻은 혈흔들이 여즉 생생한데도 눈앞에 선 모든 비극의 원흉은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날 죽이고 싶지 않아?” 나는 식칼을 든 반대쪽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차갑게 식은 머리에는 단 하나의 명제만이 떠올랐다.

#9 이름없음 2021/09/11 11:45:12

이 애를 죽여야 한다. 지금, 여기서.

#10 이름없음 2021/09/11 11:45:46

“그래, 그래, 그래…! 앨리스, 그거야!” 빌어먹을 앨리스, 빌어먹을 원더랜드. 피범벅인 몰골로 동급생을 향해 날 선 칼을 들고 달리는 모습이 악귀와 다를 바가 없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11 이름없음 2021/09/11 11:46:03

그래, 좆 같은 원더랜드. 그 일은 뱀이 모래 위를 기듯 빠르고 조용하게 일어났다.

#12 이름없음 2021/09/11 11:47:01

* * * (1)

#13 이름없음 2021/09/11 11:47:37

발단은 교내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하나의 글이었다. ― 살아갈 의욕도, 이유도 없는 당신에게. 매일 밤, 오늘과 다른 내일을 기대하며 잠에 들지는 않나요? 세상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도피할 단 하나의 기회를 드립니다! 검고 흰 자유의 세상, 친애하는 원더랜드로부터.

#14 이름없음 2021/09/11 11:48:07

“… 뭐야, 이거.” 나폴리탄 괴담? 광고? 나는 본문을 몇 번이고 확인하며 눈을 깜빡였다. 시시껄렁한 잡담이 주를 이루는 곳이긴 해도 이런 류의 글은 또 처음이다.

#15 이름없음 2021/09/11 11:48:36

이 사이트는 명색이 학교 커뮤니티인 만큼 드문드문 업데이트 되는 글들도 비교적 클린한 축에 속했다. 누가 관리하는지도 알 수 없는 마당에 비방성 내용을 올리는 멍청한 학생은 없는 탓이다. 그러니까, 최악을 감수하고까지 이런 글을 올렸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16 이름없음 2021/09/11 11:48:52

“확실히 그럴싸하긴 하네. 지원자 뽑으면 손이라도 들고 싶게….” 문제가 있다면, 이 글 어디에도 그 기회를 활용할 방법이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일까. 잠시나마 진지하게 여겼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어진 댓글 창에는 온갖 조롱이 가득했다.

#17 이름없음 2021/09/11 11:49:23

- 고3? ㅋㅋㅋㅋ 공부나 해 - 관리자님~ 얘 신상 까 주면 안 돼용? - 알아서 뭐 하게 ㅋㅋㅋㅋ - 걍 ㅈㄴ 웃기잖아 지가 무슨 신인 것처럼 글 써 놨는데 까 보니까 일반인이면 ㅋㅋㅋㅋㅋㅋ

#18 이름없음 2021/09/11 11:49:42

“그럼 그렇지.” 정곡을 찔린 얼굴로 나는 댓글 창을 닫았다. 글의 첫 문장에 갖다 놓은 마우스 커서가 깜빡였다.

#19 이름없음 2021/09/11 11:50:05

“확실히 동화 같긴 하네. 판타지 소설 도입부 같기도 하고….” 나는 실없이 웃다가 문득 숨을 삼켰다. 분명 흔해 빠졌어도 나 역시 그런 류의 구원을 바라던 때가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도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게.

#20 이름없음 2021/09/11 11:50:25

그러니까, 그건 정말 충동적이었다. 정말 낚시라고 할지라도 호응해 주는 편이 여러모로 좋지 않겠는가. 그런 합리화로 무장한 나는 다시금 댓글 창을 열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21 이름없음 2021/09/11 11:50:47

― 데려가 주세요. 혹여나, 정말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22 이름없음 2021/09/11 11:51:31

“…….”

#23 이름없음 2021/09/11 11:51:38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24 이름없음 2021/09/11 11:52:31

“… 뭐야.” 예상은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그대로. 방문 너머의 요란한 소리가 이제 그만 허상에서 깨라고 어르는 듯하다. 그럼 그렇지, 하며 나는 기대감 어린 낯을 지워 냈다. 한 시간째 이어폰 너머로 침투하는 날카로운 소리들을 한데 모아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25 이름없음 2021/09/11 11:52:56

“중학생 때도 안 하던 행동을 하고 있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잠이나 빨리 잘 것이지.” 나는 노트북을 닫고 꾸역꾸역 침대 위에 올랐다. 눈을 감으니 밖의 소리가 더 선명했다.

#26 이름없음 2021/09/11 11:53:14

― 작작 좀 마시라고! 당신 때문에 미치겠어. 알아? ― 씨발, 누구는 안 그렇대? 나는 하루하루가 괴로워, 이 집구석 때문에. ― 닥쳐, 닥치라고! 남 인생을 망쳤으면 책임을 져야지! 네가 싸지른 새끼는 어떻게…. 두꺼운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썼다. 늦여름의 더위에 땀이 배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27 이름없음 2021/09/11 11:53:53

전쟁이 멈춘 이 나라에서도 나는 언제나 최전방에 서 있다. 불운하게도 이 전쟁은 내가 첫 숨을 내쉬기도 전부터 시작되었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다. 저 글대로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어. 이내 서서히 소리들이 멀어지며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잠들기 직전, 무심결에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28 이름없음 2021/09/11 12:00:56

* *

#29 이름없음 2021/09/11 12:01:23

꿈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도륙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즈음 눈앞에는 대뜸 장도가 있었고, 뜻대로 휘두르는 감각이 좋아 멈추지 않았을 뿐 별다른 이유도 없이 벌인 행동이었다. 살점과 내장들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추락하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나는 눈을 깜빡였다.

#30 이름없음 2021/09/11 12:01:41

‘이거… 꿈인가?’ 자각할 수 있는 꿈이 있다며 들어본 기억이 났다. 힘이 풀린 손에서 피와 오물이 붙은 장도가 떨어졌다.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몰아쉬는 숨 사이로 해방감과 구역질이 느릿하게 흘렀다.

#31 이름없음 2021/09/11 12:02:06

― 브라보! 낭랑한 미성이 귀에 박혔다. 지척에서 들린 음성에도 나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32 이름없음 2021/09/11 12:02:49

침대에서 잠을 청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 꼴이다. 자다가 칼이라도 맞은 게 아니면 현실보다는 꿈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살육의 흔적이 가득한 주변은 시간도 알 수 없게 어두웠다. 발치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액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33 이름없음 2021/09/11 12:09:50

나는 칼을 쥔 모양대로 움푹 꺼진 손바닥을 문질렀다. 촉감이 생생했다. ‘이딴 꿈까지 꿀 정도면 진짜 정신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34 이름없음 2021/09/11 12:12:29

헛웃음이 났다. 내가 처한 게 정상인이 버틸 수 없는 환경이긴 하지. 그래도 직접 확인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기에 나는 약간 비참해진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35 이름없음 2021/09/11 12:36:40

달리 꿈에서 깨는 방도가 있나. 갑작스레 찾아온 두통에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내 귓가에 또 다시 앳된 목소리가 속삭였다. ― 왜 기뻐하지 않아?

#36 이름없음 2021/09/11 12:37:18

기뻐해야 하나? 해방감이 들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전례 없던 상황이 불안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음성은 즐겁게 덧붙였다.

#37 이름없음 2021/09/11 12:37:40

―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기는 무의식의 영역이거든.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네 마음대로. 부디 즐기길 바라, 이상…. 분명 저 음성, 어디선가….

#38 이름없음 2021/09/11 12:37:52

빠르게 점멸하는 의식과 함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어 알 수 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시야가 뒤바뀌었다.

#39 이름없음 2021/09/11 18:22:33

* *

#40 이름없음 2021/09/11 18:22:52

“이번 주에 벌써 세 명째래.” 반의 누군가가 느리게 속삭였다.

#41 이름없음 2021/09/11 18:23:07

교실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고개를 틀어 확인한 아이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첫 번째는 삼 반 모채빈이었잖아. 두 번째는 일 반 현다영. 그리고 세 번째….” “야, 안 닥쳐?”

#42 이름없음 2021/09/11 18:23:25

왼편에서 새된 소리가 났다. 두 손 가득 국화꽃을 든 이연우가 그렁그렁한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있었다. “죽은 애들 번호 매기니까 좋냐? 씨발, 너는 눈치라는 게 없어?”

#43 이름없음 2021/09/11 18:23:41

나는 잠자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 한 귀퉁이가 폴리스 라인으로 막혀 있었다. “어제까지 같은 교실에 있던 애가 죽었다는데, 아무 감정이 안 느껴져?”

#44 이름없음 2021/09/11 18:24:10

그 꿈을 꾼 지도 꼭 일주일째. 다음 날 확인해 본 커뮤니티의 글은 신고 누적으로 지워져 있었다. 남은 한 줌의 미련마저 완벽하게 떨쳐 낸 나는 다시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딱 하나만을 제외한다면 모든 게 예전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45 이름없음 2021/09/11 18:24:24

정확히 그날부터, 누군가가 죽기 시작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46 이름없음 2021/09/11 18:24:39

‘… 우연이라고? 정말?’ 오늘 아침, 운동장에서 몸이 뒤틀린 시체가 발견되었다. 옥상에서 떨어졌다고 하는 그 애는 내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죽은 자리가 중앙 문 바로 앞인 탓에 거기 놓인 ‘다온 여고’ 라는 석비 아래 피가 흥건했다.

#47 이름없음 2021/09/11 18:25:19

“멀쩡히 살아있던 애들로 괴담 만들지 말고 애도나 하라고, 그냥…. 다 우연일 테니까.” 죽은 애의 절친이던 이연우가 작게 흐느꼈다.

#48 이름없음 2021/09/11 18:25:33

이어 곳곳에서 터진 희미한 울음소리가 반을 휘돌았다. 가득 차도 텅 빈 것만 같은 내부가 불안감과 착잡함으로 들끓었다.

#49 이름없음 2021/09/11 18:25:58

“아니, 근데… 이상하잖아. 왜 우리 학년만 죽어? 고3도 아닌데?” “그럼 다른 학년도 죽길 바래?” “그 말이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연우가 소설 쓰지 말라잖아!” “씨발, 그럼 너는 이연우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말하는 꼴 봐라, 미친 새끼.”

#50 이름없음 2021/09/11 18:47:17

불현듯 모든 게 갑갑했다. 나는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 따가운 아침 햇살이 머리를 덮었다.

#51 이름없음 2021/09/11 18:47:32

그렇게 가물가물한 정신을 수마에 내맡기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꿈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52 이름없음 2021/09/11 22:44:19

* * *

#53 이름없음 2021/09/11 22:44:34

서걱. 손짓 한 번에 무엇인지도 모를 것들이 잘려 나갔다. 살점이 갈리는 소리가 끔찍할 법도 한데 손에 감기는 느낌이 그저 좋을 뿐이었다.

#54 이름없음 2021/09/11 22:44:49

… 꿈에만 오면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이 이리도 강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한 차례 더 검을 휘둘렀다. 무언가의 잘린 단면에서 따끈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55 이름없음 2021/09/11 22:45:10

‘아, 튀었다.’ 이제는 자각몽 아닌 자각몽에도 제법 익숙해진 터.

#56 이름없음 2021/09/11 22:45:23

처음 깼을 때는 생생한 꿈의 내용에 퍽 당황했다. 이후 이것저것 검색해 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이는 없었다. ‘진지하게 상담이라도 받아 볼까 했지.’

#57 이름없음 2021/09/11 22:45:46

실상 내용이 꺼림칙할 뿐이지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묵혀 두었던 스트레스가 풀리며 숨통이 조금 트인 것이 특징이랄까.

#58 이름없음 2021/09/11 22:46:02

잔 것 같지 않은데도 피로는커녕 씻은 듯이 개운하다. 하물며 꿈과 현실도 의지대로 오갈 수 있는 상태인 터. 이쯤 되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나 있는 단점은 이거란 말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속으로 말할 수 있어서 상관은 없다만….’

#59 이름없음 2021/09/11 22:46:21

그리고 그 음성. 첫날 귓가에 아른거렸던 목소리는 이후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넘기기에는 무언가 찜찜한 게 사실이지.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었다.

#60 이름없음 2021/09/11 22:46:41

‘… 어?’ 무언가 이상했다.

#61 이름없음 2021/09/11 22:46:58

이 꿈에서, 나는 한 번도 근처의 풍경을 본 적이 없다. ‘원래 이것보다 어둡지 않았나? 어둡다기보다는, 꼭 안개가 낀 듯이….’ 직후 기다렸다는 듯 시야가 맑아졌다. 현실인 듯 깨끗한 풍경은 생동감이 넘쳤다.

#62 이름없음 2021/09/11 22:47:15

문득 든 호기심에 나는 장도를 내려놓고 아래를 살폈다. 가까이에 낯익은 교정이 보였다. ‘우리 학교?’ 내 허리 정도 되는 위치에 차례로 교문과 중앙 문이 있다. 정교한 미니어처인지 내가 커진 것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63 이름없음 2021/09/11 22:47:35

나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한 발 뗄 때마다 핏자국과 뭉개진 형체들이 달리기 트랙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 하필이면 찜찜하게 학교에 있다고?’

#64 이름없음 2021/09/11 22:47:57

질퍽, 질퍽. 걸음을 옮겨 중앙 문 앞에 도달한 나는 무릎을 꿇고 유리문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안은 온통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65 이름없음 2021/09/11 22:48:14

꿈에서도 여기까지는 구현할 수 없던 걸까. 자연히 중앙 문 옆의 석비에 시선이 갔다.

#66 이름없음 2021/09/11 22:48:30

⌜다온 여자 고등학교⌟ 그 아래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그대로였다.

#67 이름없음 2021/09/11 22:50:24

… 핏자국?

#68 이름없음 2021/09/11 22:50:38

순간 잊고 있던 것이 퍼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어 초기화한 핸드폰을 백업하듯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범람했다.

#69 이름없음 2021/09/11 22:50:53

― 이번 주만 벌써 세 명째래. 첫 번째는…. ― 왜 우리 학년만 죽어? ― 커뮤니티, 글, 삭제. ― 그날, 시체, 우연?

#70 이름없음 2021/09/11 22:51:14

‘… 아.’ 왜 이걸 잊고 있었지?

#71 이름없음 2021/09/11 22:51:29

커뮤니티의 글을 본 날, 괴이한 꿈을 꾸기 시작한 날. 그리고 죽은 세 명의 아이들.

#72 이름없음 2021/09/11 22:51:39

… 정말 우연일까?

#73 이름없음 2021/09/11 22:51:56

나는 앉은 모양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체육관의 긴 창문에 내 모습이 비쳤다. 허리에 아슬하게 닿는 검은 생머리, 일자로 잘린 앞머리. 머리칼만큼이나 검은 눈동자에, 입고 있는 옷은….

#74 이름없음 2021/09/11 22:52:17

그래, 본 기억이 있다. 과하게 사랑스럽고 대중적인 어느 동화의 겉표지에서. 파란 칼라 원피스 위로 덧대어진 흰색의 에이프런, 기억을 지나가는 작은 금발 소녀의 이름. 인지하자 의지와는 무관하게 입이 열렸다.

#75 이름없음 2021/09/11 22:52:34

“앨리스.” 쉽사리 나오는 목소리에 당황도 잠시, 직후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다.

#76 이름없음 2021/09/11 22:52:53

― 원더랜드는 앨리스를 환영합니다! 온통 암흑인 주위에서 키득대는 속삭임이 귓전을 울렸다.

#77 이름없음 2021/09/11 22:53:07

… 그래, 그 목소리다. ‘존나, 이게 무슨….’

#78 이름없음 2021/09/11 22:53:20

나는 어느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곳곳에 피가 튄 모습은 섬뜩한 광경을 자아냈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창백한 볼. 거울 위에는 흐릿한 네온으로 유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79 이름없음 2021/09/11 22:53:37

― 단 하나의 원더랜드, 나가는 방법은 스스로만이. 아무래도 그 커뮤니티의 글이 뇌리에 깊게 박힌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더랜드라는 단어가 꿈에까지 나올 일은 없을 테니까.

#80 이름없음 2021/09/11 22:53:57

깨고 싶다, 깨고 싶다. 나는 주문처럼 말을 외었다. 그러자 이내 서서히 의식이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81 이름없음 2021/09/11 22:54:36

당황스러운 전개가 펼쳐졌대도 꿈의 통제는 아직 유효한 듯했다. 다행이라 안도하는 마음이 성급히 치솟았다. ― 건투를 빌어…. 앨리스.

#82 이름없음 2021/09/11 22:54:49

이 음성의 주인은 누구일까. 물음을 입밖으로 내기도 전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또 한 번 시야가 뒤바뀌었다.

#83 이름없음 2021/09/11 22:55:09

“…….”

#84 이름없음 2021/09/11 22:55:49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아직도 꿈속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85 이름없음 2021/09/12 15:48:55

* * *

#86 이름없음 2021/09/12 15:49:13

의문하기에 앞서, 나는 먼저 잠들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학교였지. 조례도 하기 전이었고, 누구 죽었다고 단체로 울던 중이었고. 시간은 대략 아침 여덟 시 반 정도였을 건데….’

#87 이름없음 2021/09/12 15:49:31

따갑게 비치는 햇살이 창가 자리의 비애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목도한 하늘이 온통 검었다.

#88 이름없음 2021/09/12 15:50:02

‘스트레이트로 야자 시간까지 잤다거나. … 아니, 미쳤냐. 내가 아무리 잠이 많아도….’

#89 이름없음 2021/09/12 15:50:18

뒤이어 나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아냈다. 전원 버튼을 눌러 켜자 흰 화면이 보인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잠금 화면이 아니고…

#90 이름없음 2021/09/12 15:50:42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91 이름없음 2021/09/12 15:50:54

말 그대로 희기만 한 화면이.

#92 이름없음 2021/09/12 15:51:22

어쩌면, 정말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주변이 보였다. 잠들기 직전과 똑같이 전부 제 자리에 앉아있는 반 아이들. 아무래도 태평하게 자고 있던 건 나뿐인 모양이다.

#93 이름없음 2021/09/12 15:51:42

“윤, 윤정아.” 옆자리에서 들린 가는 음성.

#94 이름없음 2021/09/12 15:52:00

“너, 핸드폰 작동돼?” 목소리에 묻어난 희망이 적나라해 안쓰러울 지경이다. 나는 말을 건 아이의 명찰을 보며 대답했다.

#95 이름없음 2021/09/12 15:52:14

“안 되던데.” “아, 나랑 다른 애들도… 아까부터 안 되어서. 다 먹통인가 봐, 어떡하지….” “전부?”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분명 밝았는데 지금은 밤이고, 선생님도 안 계시고…. 다 방금 정신 차렸거든, 단체로 다른 세상에 온 게 아니라면 이게….”

#96 이름없음 2021/09/12 15:52:37

아이, 윤겨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다. 꼭 호랑이 앞의 토끼 같은 얼굴.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충동적으로 마음에도 없던 말을 불쑥 건넸다.

#97 이름없음 2021/09/12 15:52:51

“괜찮겠지.” “… 어?” “학교잖아. 여기에 한두 명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든 뭐든 올 거야, 금방.”

#98 이름없음 2021/09/12 15:53:04

내가 내고 있음에도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다. 이내 윤겨울의 얼굴이 서서히 원래의 낯빛을 되찾았다.

#99 이름없음 2021/09/12 15:53:22

“그, 그렇겠지? 학교니까….”

#100 이름없음 2021/09/12 15:53:38

말 한마디에 즉각 반응하는 게 퍽 신기했다. 내 옆자리에 저런 애가 있었던가. 워낙 주변을 차단하며 살던 터라 나는 반 아이들 대부분의 얼굴을 몰랐다. 애초에 알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101 이름없음 2021/09/12 15:54:04

“너, 진짜 침착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윤겨울이 고개를 푹 숙인다.

#102 이름없음 2021/09/12 15:54:27

“나는 떨기나 하고,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당연한….” “아니야, 너…. 진짜 멋있어, 윤정아.” 담갈색 머리칼 옆으로 언뜻 보이는 붉어진 얼굴.

#103 이름없음 2021/09/12 15:54:43

이어진 말에 전신의 솜털이 오소소 섰다. “… 미친.”

#104 이름없음 2021/09/12 15:54:56

“응?” “아, 내가 이런 말에 면역이 없어서, 좀….” 그렇게 서서히 긴장이 풀어질 찰나.

#105 이름없음 2021/09/12 15:55:10

“꺄아아아악!”

#106 이름없음 2021/09/12 15:55:24

별안간 평온을 찢는 긴 비명 소리가 온 복도를 울렸다.

#107 이름없음 2021/09/12 15:55:36

“뭐야, 지금?!” 당황한 몇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108 이름없음 2021/09/12 15:56:15

“… 일 반 쪽에서 난 소리 아니야?” 학교에 우리 말고도 더 있었다고? 아슬한 시선들이 허공에서 오가는 터.

#109 이름없음 2021/09/12 15:56:29

“얘들아, 잠시만.” 직후 앞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

#110 이름없음 2021/09/12 15:56:43

소리가 들린 앞문 쪽으로 이연우가 대담하게 걸음을 옮겼다. 맞다, 쟤 반장이었지.

#111 이름없음 2021/09/12 15:57:00

“야, 야! 연우야, 문 열려고?” “밖에만 좀 보게. 별거 아닐 수도 있잖아.” “야, 그래도!” “어차피 다른 애들도 학교에 있으면 전부 모이는 게 좋지 않아?”

#112 이름없음 2021/09/12 15:57:18

“윤, 윤정아.” 겁에 질린 얼굴로 윤겨울이 몸을 바싹 붙였다.

#113 이름없음 2021/09/12 15:57:30

나는 잠자코 이연우의 뒷말을 기다렸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간 크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쟤뿐이니까.

#114 이름없음 2021/09/12 15:57:44

“핸드폰도 안 터지고, 여기서 가만히 할 수 있는 건 없어. 선생님도 불러야 하고.” “그렇긴 한데, 비명소리가 너무….” “상황만 볼게.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문 닫을 거야.”

#115 이름없음 2021/09/12 15:58:07

이내 다수가 수긍하는 분위기로 기울어진다. 암묵적 동의를 얻은 이연우가 문을 열었다.

#116 이름없음 2021/09/12 15:58:22

불안감 어린 교실에서 드르륵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117 이름없음 2021/09/12 15:58:33

그리고 정적.

#118 이름없음 2021/09/12 16:00:27

“이연우, 밖에 뭐 있어?”

#119 이름없음 2021/09/12 16:00:40

…….

#120 이름없음 2021/09/12 16:00:50

“연우야?”

#121 이름없음 2021/09/12 16:01:04

이연우가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이상하게도 그 찰나가 아주 느리게 보였다.

#122 이름없음 2021/09/12 16:01:21

“얘, 얘들아.” 밖에….

#123 이름없음 2021/09/12 16:01:34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 순간, 이연우의 목이 허공을 날았으므로.

#124 이름없음 2022/02/04 00:26:08

와 우연히 발견해서 읽어봤는데 너무 재밌다ㅠㅠ 스레주 더 써주면 안 될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덕후라서 읽는 내내 행복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