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좀 죽여 줘.” 그렇게 말하는 낯짝이 고백이라도 하듯 달아올라 있었다.
앨리스 딜루션
“… 무슨 헛소리야? 내가 범죄자인 줄 알아?” “설마! 절대 아니지. 아니야. 그런 생각 안 했어.” 대단한 실수라도 저지른 양 황급히 내젓는 고개. 반듯하게 잘린 머리칼이 움직임에 맞추어 이리저리 흔들린다. 하늘이 담긴 눈동자는 이질적이도록 투명했다.
“네가 와 주기를 기다렸을 뿐이야. 너라면 반드시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봐, 결국 네 발로 걸어오게 됐잖아. 그렇지?” 무려 일 년을 함께한 사이인 터. 그럼에도 나는 이 애가 이렇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보고 싶었어, 앨리스.” 펜을 든 소녀의 각막에 너덜너덜한 내 모습이 비쳤다. 기이한 미소를 머금은 그 애가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된 식칼을 고쳐 쥐었다.
“너,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 “사람이란 게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지. 이런 성격이 뭔데? 지금 네 눈에 보이는 나? 그거라면 완전히 틀렸어. 나는 처음부터 이랬거든.” “상황이 미쳤다고 사람까지 미치면 안 되는 거 모르냐? 적당히 하고, 좀….” “너야말로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 뭐?"
“내가 널 몰라? 성급하고 충동적인 이윤정. ‘원래의’ 너라면 지금 나랑 시간 낭비하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환장하게도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어디까지나, 예전의 나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나의 앨리스, 완벽한 앨리스.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 좆 같은 앨리스 타령 좀, 네가 날 얼마나 안다고.” “적어도 지금의 네 마음은 알지. 왜냐하면 너, 전부 알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 산뜻하게 이어진 대답에 목이 콱 막혔다. 나는 대답 대신 새카만 눈으로 그 애를 노려보았다.
그래, 이 모든 게 네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악몽이지. 찢어지는 비명, 유리창에 덕지덕지 묻은 혈흔들이 여즉 생생한데도 눈앞에 선 모든 비극의 원흉은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날 죽이고 싶지 않아?” 나는 식칼을 든 반대쪽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차갑게 식은 머리에는 단 하나의 명제만이 떠올랐다.
이 애를 죽여야 한다. 지금, 여기서.
“그래, 그래, 그래…! 앨리스, 그거야!” 빌어먹을 앨리스, 빌어먹을 원더랜드. 피범벅인 몰골로 동급생을 향해 날 선 칼을 들고 달리는 모습이 악귀와 다를 바가 없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래, 좆 같은 원더랜드. 그 일은 뱀이 모래 위를 기듯 빠르고 조용하게 일어났다.
* * * (1)
발단은 교내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하나의 글이었다. ― 살아갈 의욕도, 이유도 없는 당신에게. 매일 밤, 오늘과 다른 내일을 기대하며 잠에 들지는 않나요? 세상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도피할 단 하나의 기회를 드립니다! 검고 흰 자유의 세상, 친애하는 원더랜드로부터.
“… 뭐야, 이거.” 나폴리탄 괴담? 광고? 나는 본문을 몇 번이고 확인하며 눈을 깜빡였다. 시시껄렁한 잡담이 주를 이루는 곳이긴 해도 이런 류의 글은 또 처음이다.
이 사이트는 명색이 학교 커뮤니티인 만큼 드문드문 업데이트 되는 글들도 비교적 클린한 축에 속했다. 누가 관리하는지도 알 수 없는 마당에 비방성 내용을 올리는 멍청한 학생은 없는 탓이다. 그러니까, 최악을 감수하고까지 이런 글을 올렸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확실히 그럴싸하긴 하네. 지원자 뽑으면 손이라도 들고 싶게….” 문제가 있다면, 이 글 어디에도 그 기회를 활용할 방법이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일까. 잠시나마 진지하게 여겼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어진 댓글 창에는 온갖 조롱이 가득했다.
- 고3? ㅋㅋㅋㅋ 공부나 해 - 관리자님~ 얘 신상 까 주면 안 돼용? - 알아서 뭐 하게 ㅋㅋㅋㅋ - 걍 ㅈㄴ 웃기잖아 지가 무슨 신인 것처럼 글 써 놨는데 까 보니까 일반인이면 ㅋㅋㅋㅋㅋㅋ
“그럼 그렇지.” 정곡을 찔린 얼굴로 나는 댓글 창을 닫았다. 글의 첫 문장에 갖다 놓은 마우스 커서가 깜빡였다.
“확실히 동화 같긴 하네. 판타지 소설 도입부 같기도 하고….” 나는 실없이 웃다가 문득 숨을 삼켰다. 분명 흔해 빠졌어도 나 역시 그런 류의 구원을 바라던 때가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도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게.
그러니까, 그건 정말 충동적이었다. 정말 낚시라고 할지라도 호응해 주는 편이 여러모로 좋지 않겠는가. 그런 합리화로 무장한 나는 다시금 댓글 창을 열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 데려가 주세요. 혹여나, 정말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 뭐야.” 예상은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그대로. 방문 너머의 요란한 소리가 이제 그만 허상에서 깨라고 어르는 듯하다. 그럼 그렇지, 하며 나는 기대감 어린 낯을 지워 냈다. 한 시간째 이어폰 너머로 침투하는 날카로운 소리들을 한데 모아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중학생 때도 안 하던 행동을 하고 있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잠이나 빨리 잘 것이지.” 나는 노트북을 닫고 꾸역꾸역 침대 위에 올랐다. 눈을 감으니 밖의 소리가 더 선명했다.
― 작작 좀 마시라고! 당신 때문에 미치겠어. 알아? ― 씨발, 누구는 안 그렇대? 나는 하루하루가 괴로워, 이 집구석 때문에. ― 닥쳐, 닥치라고! 남 인생을 망쳤으면 책임을 져야지! 네가 싸지른 새끼는 어떻게…. 두꺼운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썼다. 늦여름의 더위에 땀이 배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쟁이 멈춘 이 나라에서도 나는 언제나 최전방에 서 있다. 불운하게도 이 전쟁은 내가 첫 숨을 내쉬기도 전부터 시작되었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다. 저 글대로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어. 이내 서서히 소리들이 멀어지며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잠들기 직전, 무심결에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 *
꿈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도륙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즈음 눈앞에는 대뜸 장도가 있었고, 뜻대로 휘두르는 감각이 좋아 멈추지 않았을 뿐 별다른 이유도 없이 벌인 행동이었다. 살점과 내장들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추락하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거… 꿈인가?’ 자각할 수 있는 꿈이 있다며 들어본 기억이 났다. 힘이 풀린 손에서 피와 오물이 붙은 장도가 떨어졌다.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몰아쉬는 숨 사이로 해방감과 구역질이 느릿하게 흘렀다.
― 브라보! 낭랑한 미성이 귀에 박혔다. 지척에서 들린 음성에도 나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침대에서 잠을 청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 꼴이다. 자다가 칼이라도 맞은 게 아니면 현실보다는 꿈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살육의 흔적이 가득한 주변은 시간도 알 수 없게 어두웠다. 발치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액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칼을 쥔 모양대로 움푹 꺼진 손바닥을 문질렀다. 촉감이 생생했다. ‘이딴 꿈까지 꿀 정도면 진짜 정신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헛웃음이 났다. 내가 처한 게 정상인이 버틸 수 없는 환경이긴 하지. 그래도 직접 확인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기에 나는 약간 비참해진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리 꿈에서 깨는 방도가 있나. 갑작스레 찾아온 두통에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내 귓가에 또 다시 앳된 목소리가 속삭였다. ― 왜 기뻐하지 않아?
기뻐해야 하나? 해방감이 들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전례 없던 상황이 불안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음성은 즐겁게 덧붙였다.
―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기는 무의식의 영역이거든.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네 마음대로. 부디 즐기길 바라, 이상…. 분명 저 음성, 어디선가….
빠르게 점멸하는 의식과 함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어 알 수 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시야가 뒤바뀌었다.
* *
“이번 주에 벌써 세 명째래.” 반의 누군가가 느리게 속삭였다.
교실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고개를 틀어 확인한 아이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첫 번째는 삼 반 모채빈이었잖아. 두 번째는 일 반 현다영. 그리고 세 번째….” “야, 안 닥쳐?”
왼편에서 새된 소리가 났다. 두 손 가득 국화꽃을 든 이연우가 그렁그렁한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있었다. “죽은 애들 번호 매기니까 좋냐? 씨발, 너는 눈치라는 게 없어?”
나는 잠자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 한 귀퉁이가 폴리스 라인으로 막혀 있었다. “어제까지 같은 교실에 있던 애가 죽었다는데, 아무 감정이 안 느껴져?”
그 꿈을 꾼 지도 꼭 일주일째. 다음 날 확인해 본 커뮤니티의 글은 신고 누적으로 지워져 있었다. 남은 한 줌의 미련마저 완벽하게 떨쳐 낸 나는 다시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딱 하나만을 제외한다면 모든 게 예전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정확히 그날부터, 누군가가 죽기 시작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 우연이라고? 정말?’ 오늘 아침, 운동장에서 몸이 뒤틀린 시체가 발견되었다. 옥상에서 떨어졌다고 하는 그 애는 내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죽은 자리가 중앙 문 바로 앞인 탓에 거기 놓인 ‘다온 여고’ 라는 석비 아래 피가 흥건했다.
“멀쩡히 살아있던 애들로 괴담 만들지 말고 애도나 하라고, 그냥…. 다 우연일 테니까.” 죽은 애의 절친이던 이연우가 작게 흐느꼈다.
이어 곳곳에서 터진 희미한 울음소리가 반을 휘돌았다. 가득 차도 텅 빈 것만 같은 내부가 불안감과 착잡함으로 들끓었다.
“아니, 근데… 이상하잖아. 왜 우리 학년만 죽어? 고3도 아닌데?” “그럼 다른 학년도 죽길 바래?” “그 말이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연우가 소설 쓰지 말라잖아!” “씨발, 그럼 너는 이연우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말하는 꼴 봐라, 미친 새끼.”
불현듯 모든 게 갑갑했다. 나는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 따가운 아침 햇살이 머리를 덮었다.
그렇게 가물가물한 정신을 수마에 내맡기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꿈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 * *
서걱. 손짓 한 번에 무엇인지도 모를 것들이 잘려 나갔다. 살점이 갈리는 소리가 끔찍할 법도 한데 손에 감기는 느낌이 그저 좋을 뿐이었다.
… 꿈에만 오면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이 이리도 강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한 차례 더 검을 휘둘렀다. 무언가의 잘린 단면에서 따끈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아, 튀었다.’ 이제는 자각몽 아닌 자각몽에도 제법 익숙해진 터.
처음 깼을 때는 생생한 꿈의 내용에 퍽 당황했다. 이후 이것저것 검색해 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이는 없었다. ‘진지하게 상담이라도 받아 볼까 했지.’
실상 내용이 꺼림칙할 뿐이지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묵혀 두었던 스트레스가 풀리며 숨통이 조금 트인 것이 특징이랄까.
잔 것 같지 않은데도 피로는커녕 씻은 듯이 개운하다. 하물며 꿈과 현실도 의지대로 오갈 수 있는 상태인 터. 이쯤 되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나 있는 단점은 이거란 말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속으로 말할 수 있어서 상관은 없다만….’
그리고 그 음성. 첫날 귓가에 아른거렸던 목소리는 이후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넘기기에는 무언가 찜찜한 게 사실이지.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었다.
‘… 어?’ 무언가 이상했다.
이 꿈에서, 나는 한 번도 근처의 풍경을 본 적이 없다. ‘원래 이것보다 어둡지 않았나? 어둡다기보다는, 꼭 안개가 낀 듯이….’ 직후 기다렸다는 듯 시야가 맑아졌다. 현실인 듯 깨끗한 풍경은 생동감이 넘쳤다.
문득 든 호기심에 나는 장도를 내려놓고 아래를 살폈다. 가까이에 낯익은 교정이 보였다. ‘우리 학교?’ 내 허리 정도 되는 위치에 차례로 교문과 중앙 문이 있다. 정교한 미니어처인지 내가 커진 것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나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한 발 뗄 때마다 핏자국과 뭉개진 형체들이 달리기 트랙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 하필이면 찜찜하게 학교에 있다고?’
질퍽, 질퍽. 걸음을 옮겨 중앙 문 앞에 도달한 나는 무릎을 꿇고 유리문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안은 온통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꿈에서도 여기까지는 구현할 수 없던 걸까. 자연히 중앙 문 옆의 석비에 시선이 갔다.
⌜다온 여자 고등학교⌟ 그 아래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그대로였다.
… 핏자국?
순간 잊고 있던 것이 퍼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어 초기화한 핸드폰을 백업하듯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범람했다.
― 이번 주만 벌써 세 명째래. 첫 번째는…. ― 왜 우리 학년만 죽어? ― 커뮤니티, 글, 삭제. ― 그날, 시체, 우연?
‘… 아.’ 왜 이걸 잊고 있었지?
커뮤니티의 글을 본 날, 괴이한 꿈을 꾸기 시작한 날. 그리고 죽은 세 명의 아이들.
… 정말 우연일까?
나는 앉은 모양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체육관의 긴 창문에 내 모습이 비쳤다. 허리에 아슬하게 닿는 검은 생머리, 일자로 잘린 앞머리. 머리칼만큼이나 검은 눈동자에, 입고 있는 옷은….
그래, 본 기억이 있다. 과하게 사랑스럽고 대중적인 어느 동화의 겉표지에서. 파란 칼라 원피스 위로 덧대어진 흰색의 에이프런, 기억을 지나가는 작은 금발 소녀의 이름. 인지하자 의지와는 무관하게 입이 열렸다.
“앨리스.” 쉽사리 나오는 목소리에 당황도 잠시, 직후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다.
― 원더랜드는 앨리스를 환영합니다! 온통 암흑인 주위에서 키득대는 속삭임이 귓전을 울렸다.
… 그래, 그 목소리다. ‘존나, 이게 무슨….’
나는 어느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곳곳에 피가 튄 모습은 섬뜩한 광경을 자아냈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창백한 볼. 거울 위에는 흐릿한 네온으로 유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 단 하나의 원더랜드, 나가는 방법은 스스로만이. 아무래도 그 커뮤니티의 글이 뇌리에 깊게 박힌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더랜드라는 단어가 꿈에까지 나올 일은 없을 테니까.
깨고 싶다, 깨고 싶다. 나는 주문처럼 말을 외었다. 그러자 이내 서서히 의식이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당황스러운 전개가 펼쳐졌대도 꿈의 통제는 아직 유효한 듯했다. 다행이라 안도하는 마음이 성급히 치솟았다. ― 건투를 빌어…. 앨리스.
이 음성의 주인은 누구일까. 물음을 입밖으로 내기도 전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또 한 번 시야가 뒤바뀌었다.
“…….”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아직도 꿈속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 * *
의문하기에 앞서, 나는 먼저 잠들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학교였지. 조례도 하기 전이었고, 누구 죽었다고 단체로 울던 중이었고. 시간은 대략 아침 여덟 시 반 정도였을 건데….’
따갑게 비치는 햇살이 창가 자리의 비애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목도한 하늘이 온통 검었다.
‘스트레이트로 야자 시간까지 잤다거나. … 아니, 미쳤냐. 내가 아무리 잠이 많아도….’
뒤이어 나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아냈다. 전원 버튼을 눌러 켜자 흰 화면이 보인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잠금 화면이 아니고…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말 그대로 희기만 한 화면이.
어쩌면, 정말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주변이 보였다. 잠들기 직전과 똑같이 전부 제 자리에 앉아있는 반 아이들. 아무래도 태평하게 자고 있던 건 나뿐인 모양이다.
“윤, 윤정아.” 옆자리에서 들린 가는 음성.
“너, 핸드폰 작동돼?” 목소리에 묻어난 희망이 적나라해 안쓰러울 지경이다. 나는 말을 건 아이의 명찰을 보며 대답했다.
“안 되던데.” “아, 나랑 다른 애들도… 아까부터 안 되어서. 다 먹통인가 봐, 어떡하지….” “전부?”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분명 밝았는데 지금은 밤이고, 선생님도 안 계시고…. 다 방금 정신 차렸거든, 단체로 다른 세상에 온 게 아니라면 이게….”
아이, 윤겨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다. 꼭 호랑이 앞의 토끼 같은 얼굴.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충동적으로 마음에도 없던 말을 불쑥 건넸다.
“괜찮겠지.” “… 어?” “학교잖아. 여기에 한두 명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든 뭐든 올 거야, 금방.”
내가 내고 있음에도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다. 이내 윤겨울의 얼굴이 서서히 원래의 낯빛을 되찾았다.
“그, 그렇겠지? 학교니까….”
말 한마디에 즉각 반응하는 게 퍽 신기했다. 내 옆자리에 저런 애가 있었던가. 워낙 주변을 차단하며 살던 터라 나는 반 아이들 대부분의 얼굴을 몰랐다. 애초에 알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너, 진짜 침착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윤겨울이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떨기나 하고,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당연한….” “아니야, 너…. 진짜 멋있어, 윤정아.” 담갈색 머리칼 옆으로 언뜻 보이는 붉어진 얼굴.
이어진 말에 전신의 솜털이 오소소 섰다. “… 미친.”
“응?” “아, 내가 이런 말에 면역이 없어서, 좀….” 그렇게 서서히 긴장이 풀어질 찰나.
“꺄아아아악!”
별안간 평온을 찢는 긴 비명 소리가 온 복도를 울렸다.
“뭐야, 지금?!” 당황한 몇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일 반 쪽에서 난 소리 아니야?” 학교에 우리 말고도 더 있었다고? 아슬한 시선들이 허공에서 오가는 터.
“얘들아, 잠시만.” 직후 앞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
소리가 들린 앞문 쪽으로 이연우가 대담하게 걸음을 옮겼다. 맞다, 쟤 반장이었지.
“야, 야! 연우야, 문 열려고?” “밖에만 좀 보게. 별거 아닐 수도 있잖아.” “야, 그래도!” “어차피 다른 애들도 학교에 있으면 전부 모이는 게 좋지 않아?”
“윤, 윤정아.” 겁에 질린 얼굴로 윤겨울이 몸을 바싹 붙였다.
나는 잠자코 이연우의 뒷말을 기다렸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간 크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쟤뿐이니까.
“핸드폰도 안 터지고, 여기서 가만히 할 수 있는 건 없어. 선생님도 불러야 하고.” “그렇긴 한데, 비명소리가 너무….” “상황만 볼게.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문 닫을 거야.”
이내 다수가 수긍하는 분위기로 기울어진다. 암묵적 동의를 얻은 이연우가 문을 열었다.
불안감 어린 교실에서 드르륵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그리고 정적.
“이연우, 밖에 뭐 있어?”
…….
“연우야?”
이연우가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이상하게도 그 찰나가 아주 느리게 보였다.
“얘, 얘들아.” 밖에….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 순간, 이연우의 목이 허공을 날았으므로.
와 우연히 발견해서 읽어봤는데 너무 재밌다ㅠㅠ 스레주 더 써주면 안 될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덕후라서 읽는 내내 행복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