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가지 않아. 말 없이 떠나지 않아. 내 마지막 생존은 여기서 할거야.
음지의 사람
겨울이 좋아. 추운 게 좋아. 차가운 바람이 내 뼛속까지 스치고 가는 게 좋아. 볼을 베듯 매섭게 치는 칼바람이 좋아. •그래서 여름이 싫은거야? 응. 여름은 덥고, 푹푹 찌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땀에 젖은 몸은 찝찝하고 벌레가 들끓지. 밤에 들려오는 모기 소리는 날 깨우는 아주 신경질적인 녀석이야. 모두 하얗게, 내장까지 보일만큼 투명하게 얼어버렸으면 좋겠어.
아 인코는 계속 달아야 하는구나. 몰랐네. 이거 은근 귀찮을 거 같은데. 오늘은 달을 못봤어. 하지만 괜찮아. 어제도, 그제도 달은 붉었어. 달이 피를 흘린 것만 같았어. 붉은 달이 아파보였다면 사람들은 날 미쳤다 생각하겠지. 응 근데 그게 맞아.
왜 난 사랑할 수 없어요? •미안해. 왜 난 사랑하지 못해요? •정말 미안해···. 왜 난 사랑받지 못해요? •그게 네가 선택한 거니까. 네가 선택한 죄를 값기 위한 벌이니까.
그래서 인식한계선은 어디까지야? 다중인격체가 가동가능하면 최소 2개이상의 공간인식이 필요할텐데 상호간 공진률 조정이라든가 동기화는 어느쪽 객체가 선점하고 있는지? 혹여나 방어형 대체인격이라면 공성방벽 전개가 가능한가?? 수면중에도 대체인격의 기동은 가능한지? 대체인격의 자립성은? 육체 제어권은?
>>5 뭔소린지하나도모르겠다ㅋㅋㅋ
미안하다 하지 마. 나에게 사과하지 마. 난 당신이 싫어. 다정한 척, 상냥한 척 굴면서 내게 칼을 건네잖아. •자해를 하라고 주는 게 아니야. 알아, 그건 언제나 최후의 탈출구니까. 겨우 자해 따위에 칼날을 상하게 할 수는 없지.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당신은 곧 나야. 아, 그러면 날 사랑하는 게 되네. 이래서 벌이라는 거구나. 응, 벌 맞네. 난 나를 사랑할 수 없으니까. 당신 말이 맞았어. 그래도 미안하다 하지 마. 날 사랑해줘. 사랑한다 한 마디만 해줘. •그럴 수는 없어. 역시 당신은 잔인해.
중2야?
>>9 응. 그렇다고 해두자.
햇빛과 대조되는 내 삶이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얼른 이 삶을 끝내고 싶어. 사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 졸리고, 머리 아파. 누가 나 좀 안아줬으면 좋겠어. 꽉 껴안고 재워줬으면 좋겠어. 당신은 그럴 수 없으니까.
당신을 부정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건 곧 너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 되지. 나를 부정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러지 마. 그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 나는 당신이 미워요. •울지 마. 당신이 다정한 게 싫어. •널 탓하지 마. 끝까지 이타적이야···.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피곤해. 누가 나 좀 기절시켜줘. 아니, 숨을 끊어줘. 영원히 잠들 수 있게. 생각하지 않는 무한한 침묵과 고요 속에 잠길 수 있게. 팔 다리에 힘이 풀리고 사지가 온전히 추락할 수 있게.
자꾸 인코 다는 일을 잊네. 이거 너무 귀찮아. •얼른 자 자. 당신은 항상 말로만 날 위하지. 당신이 실존했다면 어땠을까? 난 당신을 꽉 껴안고 엉엉 울었을까? 이런 생각도 다 부질없는 짓이지. 씻고 올게.
가여워. •약 안 먹었어? 내가 너무 가여워.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어. •약 더 늘린 거 맞지? 지금 이 순간에도 날 죽여줄 수 있는 게 나라니, 얼마나 비참해. •어서 약 먹자. 날 위해주는 척하며 전전긍긍하는 당신도, 그런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나도. 약 먹을게. 재워줄 거 아니면 이제 신경 꺼.
얼굴이 부었어. 이런 날 놀릴거야? •그럴 리가. 거짓말쟁이.
난 그들이 하루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아니, 세상 모든 존재가 이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겠어. 순서대로 사라진다면 인간이라는 종족이 1순위로 사라졌으면 좋겠어. 고통없이 죽길 바라는 건 최소한의 내 양심이야.
사실 내가 가장 먼저 죽었으면 좋겠어. 고통없이, 나라는 존재의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소실됐으면 좋겠어. 다 타버린 불에도 재가 남는데 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뼛가루 한 조각까지 모두.
당신은 날 버릴 수 없지? •그래. 당신만은 온전히 내 편이지? •그래. 그럼 됐어. 그거면 됐어.
고통으로 찢겨져야 할 곳은 팔뚝이 아닌데. 철가루 냄새를 묻히며 흐르지 못해 굳은 새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어. 어차피 다 뜯어낼 딱지가 얹어서 뭐하니. 차라리 흉터로 남아줘. 새 열매를 달아줄게.
화가 나. 모든 인간이 미워. 나라는 인간조차 너무 밉고 증오스러워. 어째서 이런 내가 태어난거야? 왜 날 원망하면서 죽여주지 않는거야? 왜 내 죽음을 막는거야? 대체 왜···. •울지 마. 아프게 하지 마. 나 너무 죽고 싶어. 고통없이, 하루 빨리 죽고 싶어. 이곳에서 하루라도 더 숨쉬며 살고 싶지 않아. 제발 누구든 나를 죽여줘. 그럴 수 없다면 더이상 내 죽음을 막지 말아줘.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나는 평생 공허와 외로움을 느껴야겠지. 친구와 있던, 가족과 있던 말야. 그것조차 내가 선택한 죄의 업이라면 평생 안고 살아야겠지. 내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겠지. 차라리 죽지 그래? 하기엔 그러게, 나도 죽고 싶은데 말이야. 어디 조용한 곳에서 한적한 바람을 느끼다 잠을 자듯 죽고 싶었는데 말이야. 사는 것처럼 죽는 거마저 쉽지 않아서 이제는 엄두도 못내는 내가 참 한심스럽고 혐오스러워서. 그냥 이대로 죽기를 기다릴까 해.
우리는 영원하지 않을 순간을 사랑하고, 아파하고, 이별해.
울고싶어. 내 몸의 모든 수분을 눈 밖으로 쏟아내고 말라 죽고싶어. •우선 씻자. 재밌는 거라도 보면서 씻고 나와서 자자. 그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다고. 진짜 개같아.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어. 왜 안 죽는거야? 대체 왜? 왜 아직도 나는 살아서, 이 지옥을 견뎌야 하는거야? 나는 대체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지?
차라리 말도 못할 정도로, 눈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몸이 만신창이가 됐으면 좋겠어. 매번 정신만 망가져 피폐해진 삶을 눈물로 버틸 게 아니라, 차라리. •그만, 그만해줘. 부탁이야.
인간은 지옥에 떨어져야 희망을 찾아. 인간은 후회를 해야 잘못을 뉘우쳐. 인간은 소중한 걸 잃어봐야 지키려고 해. 인간은···. 인간은 왜 이렇게나 어리석고, 오만하고, 아둔할까.
심연 속을 걷는 건 나 혼자로 족해. •나도 있어. 잊지 마. 아무도 내 곁에 머무르지 않게 할거야. •너무 외로운 길이 되지 않게 곁에 있을게. 응. 당신과 나는 쭉 혼자야.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곁에두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가자. 그 끝은 결국 하나일 테니까.
어째서 삶을 연명하는 걸까. 이 앞에 기다리는 건 오직 비명과 절망, 좌절, 비극뿐인데. 어째서 내일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 아둔한 천치인 나는 모르겠어.
당신은 진정으로 삶에 의미가 있다고, 살아가는 이 앞날에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나요? •아니. 그럼 어째서 살아있는 건가요? •살아가다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래서 찾았나요? •아니.
소용없어. 꽃이 피어오르는 걸 막을 수 없듯이, 불이 피어오르는 것 역시 막을 수 없어. 꽃가루가 흩날리는 걸 막을 수 없듯이, 불이 흩날리는 것 역시 막을 수 없지. 모두 예견 된 일이야. 자, 우리 모두 벌을 받자. 무지하고 아둔했던 인간들의 최전선.
위에 인코 안 달았어.
꼬리 물기. 뫼비우스. 제자리 걸음. 도돌이표. 인간이 가꾸어 놓은 침체와 혼란의.
사실 나는 살아서 이런 세상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야.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시간선은 평화롭길 바랐어. 불티가 날리고, 재가 눈처럼 내리는 하늘 속에 갇힌 날지 못하는 새가 되길 바랐던 게 아니야.
심연 속에 낙뢰가 떨어지면 좋겠어. •왜? 그럼 조금이라도 누군가는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지 않을까, 내 심연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을 테니까. •이해받길 바라? ···그건 아닌 거 같아. 오히려 그 반대지.
왜 고통받아 죽고 싶다는 이들에게 죄책감을 부여하고, 무조건 막으려하고, 삶을 강요하는 걸까. 대체 왜 아직도 세상은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걸까. 왜 죄의 심판은 늘 가해자를 두둔하는 걸까.
•괜찮아? 괜찮아. •안 괜찮은 거 같아서 그래. 괜찮아, 괜찮다고! 왜! 내가 괜찮다는데 대체 왜 다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거야?! •미안, 미안해···.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괜찮다잖아.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괜찮다고.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미안해. 늘 사과뿐인 당신이 정말 지겨워.
인간은 힘들 때 신을 찾아. 신에게 묻지. 신이시여, 저는 왜 이리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까? 신이시여, 부디 제게 답을 알려주소서. 대답없는 신은 늘 침묵을 택하지. 신은 답을 알려주지 않아. 신은 답안지가 아니니까. 물으면 원하는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지. 반대로 신이 인간에게 물을 수 있겠지. 아이야, 뭘 그리 괴로워 하니. 나의 아이야, 어째서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거니. 답은 언제나 내 속에서 찾아야 해. 신이 아니라. 그걸 앎에도 인간은 늘 타인을 원망하고, 타인에게 잘못을 돌리고, 타인에게 물어. 난 어떻게 해야 해? 난 왜 이러는 거야? 때론 타인이 잘 알고 있을 수 있겠지. 그럼에도 결국 답은 나에게서 찾아야만 해. 너무 잔인해.
•괜찮아. 잘 해결 됐잖아. 그럼 해갈되지 않은 내 감정은 누가 해결시켜 주는데? •그건···. 봐, 결국 내 책임이 아닌 일에도 내가 고통스러워 해야 해. 내가 다 감당하고 짊어져야 해. 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거야? •일단 진정해. 진정! 진정! 진정이 안되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차라리 죽일까? 응? 이것도 다 죽여서 시체로 만들까? 불태우고, 재만 남아서야, 그때서야 속이 시원해지겠니?
현실로 가는 계단.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기본이 되는 게 왜 중요한 지 모르는 세상. 아직 환상 속에 갇혀 영원하지 않을 순간을 누리는 그들. •오히려 우리에겐 환영이지. 맞아, 그들도 곧 알게 될거야. 이 지옥이 한 사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왜 죽고 싶은 거니? 늘 뻔한 질문 말고 새로운 걸 가져와 보세요. •왜 살고 싶지 않은 거니? 이봐요, 틀렸어요. 틀렸다고. 살고 싶은 것도, 죽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난 그냥 잠을 자고 싶을 뿐이에요. 어떤 수면제를 내 앞에 들이 밀어도 지겹도록 눈을 뜨는 밤을 끝내고 싶을 뿐이라고요. 나 좀 쉬고 싶어요. 이만 잠들고 싶다고요. 그것조차 내겐 사치예요?
어느 날 목이 콱 막혔어. 목을 조른 손의 주인이 오히려 기겁하며 손을 뗐어. 왜 그리 평온한 얼굴을 하느냐며 지레 겁을 먹었지. 웃긴 일이었어. 목이 졸린 이가 오히려 담담했던 상황이. 우스꽝스럽더라. •죽고 싶었어? 응.
왜 울고 있어요? •···. 당신 우는 거 정말 오랜만에 보네. •···왜, 그랬어. 이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정말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거야? 응. 그럼 내가 뭘 더 할 수 있어. •···. 알면 말해줄래요? 나약해 빠진 내가 내 몸에 상처내는 것 말고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더 있는지. 경찰도, 센터도, 모두 내 편이 아닌데.
덧 없고, 희미하고, 불투명한 삶.
나는 사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야. 불치병이라 치료방법도 없대. 어떤 약을 써도 듣질 않는대. 나아지지 않는대. 이대로 죽어가야 한대. 근데 그게 너무 싫어서, 자살을 하려고 했어. 곧 죽을건데 더 빨리 죽는 게 뭐가 나빠. 근데 그게 나쁜거래. 왜? 꼭 내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야만,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해야만 내 삶을 중단할 수 있는거야? 내 존엄은, 나는, 내 고통은 누가 감당해 주는데. 누가 책임져 주는데. 대신 짊어주지도 못할 이기적인 인간들이 내게 강요해. 아직 죽지 마. 난 이렇게나 괴로운데. 지금도 목이 막혀서 간신히 색색 숨만 내쉬는데. 그래도 죽지 말래. 곧 죽을건데 기다리래. 그게 언젠데? 얼마나 걸리는데? 며칠, 몇 달, 몇 년. 누가 장담해 그걸? '곧' 이라는 기준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데? 이래도 당신들은 자살이 나쁘대. 안 겪어봐서. 내 고통을 몰라서. 감히 대신해 주지도 못할 거면서. 무책임한 혀만 쉼 없이 움직이더라. 편히 죽을 수 있을 때 죽는 게 뭐가 나쁜데. 내 죽음은 내가 선택하고 싶다는 내 존중은 대체 어디에 갖다버린 건데. 박탈된 내 존엄은 어디서, 누구에게 찾아야 하는데. 내게서 죽음도, 존엄도, 안식도 빼앗아 가는 당신들이 가해자가 아니면 누가 가해자지?
놓아, 놓아, 날 그만 놓아. 나는 자유로운 새야. 날개는 없지만, 언제든 하늘을 향해 날 수 있지.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보다 자유롭지.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수평선까지 날 수 있지. 놓아, 놓아, 날 그만 놓아. 당신이 붙잡을 건 내 옷깃이 아니라 이미 떠나버린 바람이지.
새삼 깨우치지 말거라. 네게 더 잔인한 족쇄가 될테니. 심장을 지운 채로 살아가.
•안녕.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동안 왜 안 나타났어. •여전히 많이 아프지. 당신도 나한테 질린거야. •언제나처럼 자장가를 불러줄게. 이제 나는 지겨운거지. •어서 자 자. 왜 기다림의 몫은 항상 나야?
내 목소리는 벽에 막혀 닿지 않는 걸까. 사실 나는 목을 쓰고 있지 않던 거 아닐까. 사실 목소리를 낼 목조차 없던 거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은 왜, 매번.
이유를 알 수 없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작별을 하기 위해 뒤돌아선 너의 모습이 너무나 환한 빛 아래에 놓여져 있어서. 그런 네가 빛도 보이지 않을 만큼 환하게 웃고 있어서. 나중에 다시 만나, 라는 너의 작별 인사가 이대로 마지막일 것만 같아서. 나는 그만 아스팔트 바닥 위 패배자처럼 주저 앉있다. 사실 이유를 안다. 그대로 달려가 붙잡고 싶었다. 내 몸을 살리기 위해 덕지 덕지 붙인 주사바늘을 빼버리고 그대로 달려가고 싶었다. 너에게로 날아가고 싶었어. 나중이 언제인지 물어보고 싶었어. 나도 잘 가, 인사해주고 싶었어. 그러나 나는 이미 날개가 꺾인 꺽새다. 너에게 갈 수 없어.
삶과 죽음을 동시에 선물 받은 기분이 어때. 난 아주 좆같은데.
나 고장 났어. •응, 그러게. 눈물도 안 나오고 이제는 흥분도 안 해. 화가 안 나. •더 자야 할 거 같아. 잠도 안 와. 렘수면도 고장 났나 봐. •···. 울지 마. 있지, 나 당신이 그동안 왜 안 왔는지 알게 됐어. •···. 내가 아파서 당신을 못 부른 거야. 당신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바보같이 내가 또 아파서. •아냐. 그런 거 아니야. 나 이제 목을 못 쓴대. •···. 그런데 별생각 없었어. 오히려 다행이지. 이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니까. 눈만 깜빡이면 되잖아. •일시적인 걸 거야. 분명 나아질 거야. 아니, 난 지금 이 상태가 나아. •···왜? 내게 말을 거는 것들이 없어. 조용하잖아. 꼭 내가 죽은 거 같아.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 가끔 필요한 것만 물어보고 마는 게 더 나아. •응, 그래. 그건 다행이네. 그리고 말야, 이제 당신과 대화할 시간이 늘어서 좋아. •···날 좋아하진 마. 난 죄인이야. 그리고 나도 죄인이지. 무고한 가해자. 희생될 마녀. 밤의 양. •응, 우린 같은 죄인이야. 벌을 받고 있는. 있잖아요. •응. 내가 또 아파서 당신을 못 부르면. •···그러면? 날 기다리지 마. 다시는. •그게 네가 바라는 거라면, ···기꺼이. 이제 서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나도 슬퍼해선 안 돼. 우린 그저, 하나인 채로 가야하고 하나였던 것처럼 눈을 감아야 해. •···. 하지만 내 죄가 아직 다 청산되지 않았다면 그 시간은 좀 더 멀어지겠지. 그땐 당신을 부를 기회가 몇 번 더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응. 그러니까 나 대신 울지 마요. •···미안해.
당신 혹시 믿기시는지,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낙원이라는 것을.
재밌는 거 하나 알려드릴까요? •어떤? 사실 세상이 불공평한 건 신이 심심해서예요. •음···. 모두가 공평해 다재다능하고 예쁘고 잘생기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난 그 불공평함이 마음에 들어요. •신이 불공평하게 만든 세상이? 응. 생각해 봐요.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으니까 하루에도 새로운 소식이 끊기지 않고 생성되잖아요. •호모 루덴스라는 거구나. 응, 맞아요. 그거 꽤 와닿네요. 맞아요, 난 호모 루덴스일 거예요.
역시 난 작고 귀여운 것들이 좋아. 사랑스럽잖아. 그에 반해 당장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를 잠재적 꿈나무들은 역시 별로야. 방금 내 옆에서 돌고래 소리를 냈는데 쟤는 분명 음대에 가서 성악을 할 싹수야.
그러니까 대체 왜, 당신들이 내 인생을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고마워 하는건데. 내가 살아있는 게 왜 당신들에게 고마운 일인데. 나는 지옥 같은데. 당사자인 내가 죽을 거 같다는데.
•왜 웃고 있니? 아니에요, 당신. 질문이 또 틀렸어. 그렇게 날 봐왔으면서 아직도 몰라요? 난, 지금, 실성한 거예요.
난 죽지 못하고 빨랫줄처럼 널려 있어. 누가 날 잡아 끌어내리지 않는 이상 영영 날아가지도 못한 채 메여 있겠지. •널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니. 아니, 아니요. 진작 칼을 챙기지 못한 날 원망해요. 그랬다면 그런 줄 따위 잘라내고 훨 훨 날아갔을 텐데. 날개처럼.
나도 다중인격 비슷한 거에다가 중2병 취향 있고 나 자신도 꽤 중2병이라서 보는 재미가 있다 스크랩하고 자주 와서 볼겡
가장 무거운 것이 손 안에서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제서야 나는 그것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자각했어. •그것? 심장 말이야.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약한 것은 도태되거나 사라지지. 내가 죽는 것 역시 아주 간단한 이유야. 나는 약하기에, 도태될 것이기에. 그러니 추하게 죽느니 차라리 뼈만 남은 앙상한 나무일지라도 내 모습 하나는 온전할 때 죽을 거야.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는 그 아이. 눈물을 흘리는 법이 아닌 참는 법만 배워와서, 우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 눈을 감고 뜨면 리셋된 듯 모든 걸 잊어버리는 아이. 후폭풍을 맞이할 방법을 몰라 쓰러져 잠을 택한 아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깨달은 게 딱 하나 있는데 말이에요. •응. 그게 뭔데?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리고? 절대 불변도 변한다는 것. 이 모든 건 고작 인간의 입에서 나온 모순적이고 오만한 말들이라는 것.
구원이라는 게 뭘까. 구원당한 이는 그걸 원했을까. 구원을 이룬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됐을까. 그 끝이 파멸 뿐이라도 당신은 구원이라 말할까. 사랑도 구원일까.
두 팔을 침대 위에 늘어트린 게 꼭 힘없는 봉제인형과도 닮아서, 나는 순간 내가 죽은 인형인 줄 알았지. 눈만 뻐금뻐금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흐리멍덩하게 뜬 채 허공을 응시하니 내가 퍽이나 신경 쓰였나 보지. 당신들은 그렇게나 내가 불안해 보였나 봐. 난 멍을 때려도 눈을 뜬 채 죽은 시체 같은가 봐.
인간은 적응의 동물. 그렇다면 적응하지 못하고 죽은 인간은 인간도 아닌가 보지. 버티고, 살아남지 못해 죽은 그들은 그냥 귀신인가 보지. 나도 곧 죽으면 적응하지 못한 귀신이 되려나.
죽지 마. 그 한 마디, 고작 세 글자가 긴 쇠사슬이 되어 날 옥죄어 올 줄 알았다면. 아가미가 틀어막힌 물고기처럼 익사해 죽어버릴 것만 같은데. 당신들은 또다시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내뱉는다. 죽지 마.
나는 나예요, 80억 인구 중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요. 가치관도, 생각도, 철학도, 신념도 모두 다 제각기 다르다고요. 나도 그래요. 나도, 나도 가치관을 생각을 철학을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대부분의 보통의 사람의 틀에 끼워 맞추려하고 마치 복제품을 만들 듯 비슷한 부류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거죠? 대체, 왜? 나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고,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여기에 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사람에게 상처받고, 고통을 겪은 이들 아닌가요? 그럼 그 상처를, 고통을, 과거의 트라우마를 사람으로 치유하라는 말이 있죠. 당신도 그 보통의 사람들처럼 내게 틀을 씌울 건가요? 그들처럼 만들고, 나를 어떻게든 정상의 범주에 속한 이로 만들 건가요? 그런데 내가 변할 생각이 없다면요, 사람에게 상처받은 이 마음을 고쳐먹을 생각이 없다면요, 당신은 날 포기하겠죠. 도저히 틀에 맞춰지려 하지 않으니까. 욱여넣을 수 없으니까. 제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퍼즐을 버려지기 마련이죠. 내가 개선의 의지가 없고, 발전해 나아갈 생각이 없다면 당신마저 날 포기하겠죠. 그럼 난 그때 또다시 죽기 위해 시도할 거예요. 그럼 누군가 날 다시 목격하고 신고하려나요? 그럼 난 다시 폐쇄병동에 입원해 없는 입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빚을 질까요? 다시 나아질 생각이 없는 난 어떻게든 정상인처럼 보이려 한 뒤 탈출해 다시 같은 시도를 하고, 그럼 누군가 다시 목격하고··· 이 끝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 뭔지 아세요? 날 이해하고, 포기하는 거예요. 포기하세요. 난 당신들이 끼워맞출 사회의 퍼즐이 될 인간이 못 되니까. 날 그만 놓아요. 놓아주라고요. 나에게서 신경끄고, 잊어버리세요. 당신들 그거 잘하잖아. 정작 필요할 땐 외면하고 하등 도움바라지 않을 때 위선적인 손길을 내밀고 멋대로 동정하고 멋대로 구해놓고 멋대로 다시 버리는 거. 당신들 그거 잘하잖아요. 겉과 속이 철저하게 다른 내로남불, 모순과 괴변의 망상쟁이. 그러니 나 같은 괴물이 태어난 게 아니겠어요? 사회가 만든 괴물이 어디 나뿐일까. 고작 한 둘일까. 근데 그들이 조용한 이유가 뭘까요? 다 어디에 처박혀 사회에서 청소돼서 그런 거 아니겠나요? 나도 그렇게 청소시키고 깨끗한 거리가 진짜인 것처럼 속여 팔지 않겠어요? 간사하고 아둔한 천치들. 나는 당신들처럼 살지 않을 거야.
헤어질 걸 알면서 왜 사귀어?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사랑도 언젠가 식을텐데? •보통은 그걸 생각하고 사귀진 않지. 사랑이 뭐라고 다들 그리 안절부절, 잡지 못해서, 손 안에 쥐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사랑을 모르니 평생 알 수 없겠지. ···당신은 언제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해주지 않는구나. 나 되게 간만에 나아졌는데. •미안해. 됐어. 텅 빈 말 지겨워.
선생님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세상은, 선생님이 만들어가고 있다고 믿으시나요? 그 세상 속 주인공은, 선생님이신 게 맞나요?
•왜 그들에게 아무런 저항도, 대항도 하지 않니. 항거한들 내 입지나 대우가 달라지지 않아요. 그리고 내겐 없는 걸요. •무엇이? 복수심, 증오, 원한. 그런 것들. •···. 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될 수 없어요. 내겐 조력자가 되어 줄 파리아 신부같은 존재도 없고, 가장 중요한 복수 대상이 없어요. •그들은 네 복수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거구나. 당신은 그런 내가 안타까운가 보죠. 꺼진 재를 보고만 있는 게 허무하고 쓸쓸하신가 봐요. 내가, 끝내 자학과 자해에 시달려 엉망이 된 모습이 가여우신가 보죠.
감정은 꼭 꼭 눌러담아 절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은 유리병보다 연약하고 잘 깨져요. 난 영원히 당신들 곁에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에요. 광대도 아니며, 병풍도 아니고, 조형물이나 장식물 따위도 아니에요. 내 입은 당신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내 귀는 당신들의 지루한 소음을 듣기 위해 있지 않고, 내 코는 당신들 향수나 술 냄새 따위를 감별하기 위해 있지 않고, 내 눈은 당신들의 억울함과 진실을 꿰툻기 위해 있지 않아요. 난 당신들의 기계도, 도구도, 감정 쓰레기통도 아니란 말이에요.
내 지난 행보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 잘 알아요. 그러나 난 잘못을 뉘우칠 생각이 없어요. 내 씻을 수 없은 죄는 내가 짊어지고 갈테니 부디, 나를 형벌하려 들지 마세요. 그것은 당신의 권한이 아니에요. 누구도 내게 휘두를 수 있는 판결이 아니며, 당신은 그것을 위임받을 자격이 없어요. 감히 월권을 저지를 생각, 마세요. 라고 말한들 이미 짐승이 되어버린 당신들 귀엔 들리지 않겠지.
갖고 싶은 게 없냐는 뜬금없는 질문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했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엉망인 얼굴로 그 질문을 곱씹고 소화시키고 있을 때 다시 질문이 날아들었다. 갖고 싶은 거, 정말 없어?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내게서 무엇을 들은 것처럼 이미 저들끼리 결론을 짓고 규명해버렸다. 갖고 싶은 거, 많지. 당신들은 평생 이뤄줄 수 없는 숙원부터 내 안에 새싹으로 피다 죽은 소망까지. 그 사이 채워지지 않는 공백까지 입 안에 짓씹어 누르며 나는 언젠가처럼 고개를 젓고 아니요, 짧게 대답했다. 온건한 내 입이 내릴 수 있는 최후는 그정도였다.
당신들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아시나요? 뭘 못 먹고, 뭘 할 줄 아는지는 아시는지요? 내가, 당신들 손가락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당신들 눈길 한 번 내게 스친 적은 있었나요? 그 적선조차 없던 눈빛에 할 말을 잃고, 자비를 구걸하던 손길을 거둔 내 심정을 단 1%라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으신지요? 무슨 자격으로, 그 낯짝을 들이밀며 내게 자애로운 신처럼 구시는 건데요?
마른 눈가를 닦아내며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국만 남은 그 곳에 가득찼던 게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그리도 내 심장을 옥죄어와 폐부를 찔렀는지. 난 당신을 사랑했어, 언어로 이루어진 말은 입 밖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사랑했었어, 목소리를 담고 나와야 할 그것은 기도 속에 처박혀 내 목을 짓눌렀다. 아니, 아니야. 당신을 존경했어. 부정의 말은 이단자가 내뱉은 최후의 통첩같기도 했다. 당신을···, 그러니까.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내가 낼 수 있는 변명이 있었는데. 기어코 변명을 덧씐 진심을 묻어둘 수 있는 단어가 있었는데. 잊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사랑했었다고. 거울 너머 나를 보는 것조차 힘겨워 했던 내가,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당신을 감히 마음 속 한 곳에 품어 키우고 있었다고. 함락할 수 밖에 없는 진실을 인정하고야 만 나는 더이상 예전처럼 당신을 볼 수 없다. 어디선가 당신의 부스러기라도 주워먹는 날에 나는 배탈나고 말 것이다. 비참히, 홀로 사랑한 이의 말로라면 딱 어울리는구나.
후회하지 않겠다고 한 말, 사실 거짓말이었어. 외롭지 않다는 말, 사실 가짜였어. 평생을 따라다니던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생각이 없다는 것도, 같잖은 변명이었어. 뙤약볕 아래에서 내가 뭘 생각했는지 알아? 우습지만, 이대로 타 죽어버려도 좋으니 날 저 태양이 태워주길 바랐어. 흔적도,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람을 거부하는 주제에 외롭다 징징대는 내가 꼴보기 싫어서. 미련도, 아쉬움도 부정하지 못하면서 후회하지 않는다는 내가 경멸스러워서. 죽고싶다면서 정작, 가장 곁에 있는 이의 생일을 챙겨주지 못해 안달인 내가. 그런 내가 너무 가증스럽고 치가 떨려서. 왜 못 죽는걸까 한탄만 하는 내가. 왜 아직도 살아있는 걸까, 왜 나는. 이런 무가치한 생각만 하며 지렁이처럼 꿈틀대기라도 하는 내가 징그러워. 토가 나올 거 같아. 그래, 꼭 구더기에 핀 시든 꽃 같아 나는. 그렇게 더럽고 추한 내가 혐오스러운 거야. 혐오감마저 구더기가 파먹었나봐, 잘 자고 눈 뜨면 씻은 듯 잊고 하루를 연명하는 걸 보면.
잠은 훌륭한 도피처라고 누군가 그러더라고. 잠을 잘 때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상념은 어두운 암흑속에 집어 넣어 잊으면 된다고. 그런데 말이야, 나는, 나는 도저히 눈을 감은 어둠 속으로 도피할 수가 없어. 매일 밤 나를 찾아오는 악몽은 어찌나 친절하신지 노크도 없이 내 꿈 속에 침범에 모든 걸 헤집어. 내 감정, 내 마음, 내 정신 모든 것을 말이야. 그래서, 약 없이는 잠들 수 없어. 눈을 떠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야. 나는 결국 꿈 속으로, 잠으로 도피하지 못했으니까. 결국 내가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어. 어디에도. 막다른 길이야, 하고 주위를 돌아보면 내 앞에 있던 길마저 사라져. 그렇게 밀폐된 곳에서 숨도 쉬지 못하고 진동하는 핸드폰처럼 멍청하게 벌벌 떨고 있을 때,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어져. 인간의 삶을 살기를. 인간이었던 나를 몰수하고 이대로 영영 사라지고 싶어져.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약을 먹었다. 그 이상 가만 뒀다간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몰랐다. 그래서였다. 마지막 보루로 남겨둔 약을 쥐고 입안에 넣어 목구멍에 흘러넘치는 물을 들이부어 간신히 생각을 종결시킨 건. 내가, 여기서,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자유를 박탈당하고 생사권을 갈취당하고 주도권을 빼앗긴 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무료하고 진전없는 삶. 내일이 와도 불안하지 않고, 조용한 공간에 홀로 고독하게 숨을 들이키며 사는 거.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시체처럼 움직이지도,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지만 매일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을 거 같다고. 죽을 힘을 내기 위해 사는 게 아닌, 언제 죽어도 상관 없이 사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욕심을 버려서 모든 걸 내려놓고 초연한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고.
You know, I'm not always going to be around to help you.
당신은 나의 역작이 아니라 역적이다.
살고싶은 이유에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 정석의, 대게 예의상하는 답들은 그 이유에 내가 들어갈 수 있게 살아보라 하겠지. 무슨 수를 써도 살 이유가 만들어지지 않으면요? •그거 아니, 누군가에겐 별 거 아닌 구실을 갖추기 위한 변명이 누군가에겐 전부이자 간절한 진심일 수 있다는 걸. 내가 구실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반대지, 살고 싶은 이유에 네가 없다는 게. 그건 변명이 아닌 간절한 진심이라는 걸 나는 알지만, 대부분은 폄하하겠지. 그건 네 전부인 진실인데. 그들은 아니라고 네 전부를 앗아가려 하겠지. ···요는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해도 난 빼앗기기만 한다는 건가요. •아니, 빼앗기지 마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네 진심을, 본심을, 속내를 모두 감추고 지켜내렴. ···그럴 순 없어요. •마지막까지 그것 만큼은 네가 쥐고 있어야 해. 그게 내 최후의 패이기에? •숨을 죽이고, 기다려야 해. 이매처럼. 이매라니, 그게 무슨···, 난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될 수 없다니까요! •아니, 아니란다. 그저 저들을 따돌리기만 하면 돼. 그럼 네 끝은 온전히 네가 쥘 수 있을거야. 그럴 거란다. 불확실하고, 변수투성이 뿐이에요. 그렇지만, 그렇네요. 지금 내가 붙잡을 건 어디에도 없으니까. 나라도, 내 모든 걸 숨겨야겠죠. 때가 되면 후회할 그들, 아니 후회하지 않을 지도 모를 그들에게 통쾌한··· 통쾌할까요. 과연, 난 그들이 후회하지 않을 걸 아는데. 역시 살아갈 이유에 나는 없어요. 그들은 내가 살아도, 죽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 족속이니까.
꼭, 이 모든 게 희극의 한 곡조같아. 무도 같아. 우습지 않니? 어떻게 발버둥 쳐도 그 결말은 모두 한 길로 내딛잖아. 그 낭떠러지가 죽음임을 알면서 우리는 모두 다른 곳에서 만나, 한 길로 추락하잖아.
사실 어쩌면, 난 그렇게 불행한 건 아닐지도 몰라요. •왜 스스로 불행을 평가하니. 봐요, 날 봐요. 내가 지금 무슨 꼴이죠? 나는 아주 멀쩡해요. 곧 죽을 것처럼 입을 다물고 아가미를 벌려대던 동태눈 물고기는 이제 없어요. 그들은 내가 호전 됐다고 말했죠. •그건 불행과 상관 없는 일이란다. 아니요, 당신은 또 착각 했어요. 나는 매일같이 일어나 먹고, 씻고, 자고를 규칙적으로 반복했어요. 하루 한 시간은 산책했고, 침대에 눕기 전까지 약도 꾸준히 먹었죠.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중요하지 않아요. 그들이 우선하는 건 내 몸이 회복되는 것 뿐이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눈 앞에 놓여 있네요, 난 멀쩡해졌으니까. 그쵸? •넌 아직 다 회복되지 못했어. 아하하, 맞아요. 나는 다 회복하지 않았어요. 회복되지 못했고, 영원히 회복될 수 없겠죠. 나아질 수 없을 거예요. 이러니 내가 그렇게 불행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사실 난, 아주. 아주 아주 불행한 사람일 지도 몰라요. 그들이 바라는 건 이뤘고,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도 이루지 못했어요. 난 이제 생과 사, 그 어느 선에서도 서 있지 못하니까요. •그건 옳지 않아. 네가 그리 단정 지으니 그렇다고 여기는 거일 수도 있잖니. 이런 순간까지 내 기분 맞춰주려 할 필요 없어요. 난 이미 이것을 인정했어요. 내 손에 쥐어졌던 죽음은 이제 내 손에 없어요. 어쩌면 난 이대로 잘 살지 몰라요. 그리고 또 모르는 일이죠. 의료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고, 언젠가 시한부라 생각했던 의미없는 삶을 연명하던 이 몸이 완치될 지. •그건 아주 끔찍한 일이란다. 상상할 가치도 없는 가능성이야.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늘 내가 죽을거라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요. 이제 석고상이 된 믿음은 그 어떤 도구로도 부술 수 없어요. 그러니 난 다시 불행하다 생각하는 거예요. 석고상 안에 갇힌 게 다른 이가 아닌 나이니까요.
영원이라는 건 없다. 평생이라는 것은 더 더욱 없다. 나는 당신을 평생 사랑할 자격이 없다. 당장 나부터 이 사랑을 부정하고 뜯어내려 온 몸에 자해를 하는 판국에, 그런 걸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영원이 있다면 내가 덧붙이고 싶은 단어는 하나 뿐이다. 죽음. 영원히 죽고싶다.
명치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기분이에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 애가 그랬죠. ‘넌 사람을 무생물 보듯이 봐.’ 반박하지 못했어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죠. 아니라고, 난 그런 적 없다고 부정하지 않았어요. 그 애가 한 말은 단어 하나하나 모두 옳았어요. 난 누굴 보든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그 이하로 여겼죠. 나조차도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마 그들은 내 눈빛에 익숙해져 굳이 지적해 오지 않았던 거겠죠.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난 그들이 내 눈을 꼬집어도 무시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 애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이미 알고 인정한 버릇이면서도 한편으론 충격을 누르지 못했어요. 날 누른 건 커다란 돌덩이에요. 아직도 속이 얹힌 거 같아요. 난 왜 충격을 받은 걸까요? 그때 그 애는 어떤 눈빛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난 늘 예의 그 ‘무생물 보듯 한 눈’ 으로 걔를 봤을 거예요. 그러니 기억나지 않는 거겠죠? 그 애의 눈빛이 어땠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 말투나 목소리의 고조는 어땠는지. 아니에요, 이제는 잊을래요. 기억하지 않을래요. 명치를 누르는 이게 뭔지 굳이 들춰내진 않을래요.
나는 당신을 떠올리며 아직도 울 수 있음에 행복해요. 아니, 사실 불행해요. 당신의 따스한 호의가 버거울 정도로 벅차서 좋았어요. 아니, 그건 내게 가시돋친 악의에요. 힘 빠지는 탈력감과 상실감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거워요. 손에 쥘 수도 없는데 난 손가락 하나까지 까닥할 수 없어요. 당신을 사랑한 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구원이에요. 아니, 당신은 날 파멸로 이끄는 몰락의 인도자에요.
그만해···. 날 그만 괴롭히라고. 나 좀 내버려 둬. 이제 우는 것도 지친다고.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 나 좀 제발, 제발 내버려 둬.
맞잡은 손보다 깍지 낀 손을 더 좋아한다. 맞잡은 손은 빼내기 쉽지만 깍지 낀 손은 빼내기 힘들다. 누군가 내 손을 맞잡고 스르르 자연스럽게 빼낼 때 다시 잡아보려 하면 그 손은 멀리 떠나간 후다. 나는 내 손을 맞잡을 때 항상 깍지를 낀 채 잡는다. 손가락 사이사이 전해져오는 열기, 시간이 지날수록 혈관이 뛰는 걸 가만히 느껴본다. 내가 살아있는 감각을. 깍지를 낀 채 눈을 감고 빌어. 그러면 내 소원이 조금이라도 덜 흩어질까봐. 온전히 손 안에 담기길 빌고 또 빌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고요한 밤에 열기로 손끝이 달아올라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내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계속.
왜 그 영화가 보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단지 좋아하는 인물이 나와서 라고 했지만, 유명한 감독이 맡아서 라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에요. 그 영화에서요, 소영이가 자기 아이한테 자장가를 불러줘요. 잘자라 우리 아가···. 하면서 불러주는데, 눈물이 터지는 거예요. 생각해 보니 난 단 한번도 자장가를 들은 적이 없더라고요. 아니, 정정 할게요. 어쩌면 들었지만 내가 원할 땐 단 한 번도 듣지 못했어요. 근데, 자기가 놓고간 아이를 다시 찾으러 와 자장가를 불러주는 소영이를 보면서 눈이 발갛게 물들 때까지 울었어요. 그 예고편만 보는데도 너무 보고 싶은 거 있죠. 그래서, 꼭 봐야겠다고. 저건 무슨 일이 있어도 보고 말거라고. 마침 내일이네요. 극장에서 나온 내 모습은 무척 꼴볼견이겠죠. 그러니 사람 적은 시간대에 맞춰서, 보러갈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과 다시 보는 날, 어느 한 카페에서 한적한 공기를 마시며 좀 더 덤덤한 내가 말하겠죠. 나는 그 자장가를 잊을 수가 없었노라고.
의미를 붙이면 그 순간부터 평범해질 수 없다. 이유를 갖다대면 그때부터 그것이 특별해지는 것이다. 인간이란 의미, 삶이란 이유. 무엇도 정확한 명제없이 떠도는데 낚시줄에 걸린 운명이 인생 전반을 매듭 짓는다. 더 많은 운명과 인연을 낚기 위해 인간은 긴 시간을 고뇌하고 침묵한다. 방랑하는 나그네의 배낭을 멘 채 인내한다.
일관적인 사람은 없어요. 거울에 비춰지는 모든 것들은 양면성과 그림자를 가지죠. 인간은 늘 공존해야 하는데 어째서 당신들은 내게 하나에만 의지하라 하시나요. 한 곳에만 붙어 있으라고, 손바닥도 마주보는데 한 쪽만 보고 살라고 그러시나요. 고열에 시달리면서 추위에 떠는 건 잘못된 게 아니잖아요. 비가 꼭 흐린 날에만 내려야 한다는 법은 없듯이, 나 역시 웃다가 울 수 있는 거잖아요. 내 이중성이 그렇게나 불쾌하신가요? 부끄러우신가요? 당신들도 날 낳고 싶어서 태어나게 한 게 아니잖아요. 왜 늘 나만. 왜 당신들은 항상.
우리가 거울이라면 너는 고원에, 나는 나락에 가면 될 일이다. 거울 속의 ‘너’는 항상 슬퍼 보였다. 작은 호의와 애정 한 털이라도 얻고자 착한 사람의 가면을 쓰며 살다 마주한 첫 만남에 ‘너’는 그런 표정을 지어 보았다. 숱 없는 눈썹이 아래까지 쳐져 애달파 보였고, 붉어진 눈가는 잠을 못 자 피곤한 듯 충혈되어 있었다. 얇고 메말라 병색이 짙은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닫혀 있었다. 어느 하나 제대로 매치되는 게 없는 이목구비는 왜 그리도 서글픈 울음을 한 채였는지. 거울 밖 ‘나’는 차라리 내가 쓴 가면을 ‘너’에게 주고 싶었다. 사람들의 관심 따위 받지 않아도 좋아. 그들이 나를 무시하고 욕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가면을 쓴 ‘너’는 더 이상 슬퍼 보이진 않을 테니까. 나는 다시 가면을 썼다. 거울 속의 ‘너’는 웃진 않았지만 울지도 않았다. 다행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는지. 이제 나는 거울 너머로 ‘너’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한다. ‘너’조차 가짜로 만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만약 죽어서, 어딘가로 가게 된다면. 잘못은 내가 저질렀으니, 모든 죄는 내 탓이니 너만은. 너만은 내가 있는 곳으로 추락하지 않길 바라. 나로 인해 거짓에 물든 내 마지막 진실이었던 너만은, 끝끝내 너의 슬픔을 외면해 가면을 뒤집어쓰게 한 모든 업은 내가 짊어지고 갈 테니.
미련하고, 멍청하고, 무지몽매한 것. 내가 내게 쏟아내는 욕들은 모두 더러운 오물이 모인 하수구에 고여 악취가 풍기는 농도 짙은 액체가 된다. 그곳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건 일그러진 내 그림자와 함께다. 구속구를 달아 놓은 팔다리는 허우적 대지도 못한 채 깊이 침잠한다. 누구에게 토로할까. 나는 이 곳에 빠져나가지도 못하며, 그럴 생각도 없다고. 어느새 아늑한 웅덩이가 된 그곳은 무엇하나 움트지 못한 채 죽어간다. 서서히, 나를 옥죄는 모든 것으로 부터 시작된 그곳은 넓은 늪으로 변한다. 멎어가고 점멸하는 시야와 호흡 속에서 내 귀만이 또렷이 살아남을 것이다. 역시 너는 우둔하구나, 여전히 머저리구나. 변변찮은 반푼이도 못된 반사회인이여, 아해여. 염세로 똘똘 뭉친 비겁자여.
다 버리고 사라질까. 도망칠래, 우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누구도 모르는 그런 곳으로 가서. 그럼 좀 나아질까. 편해질까. 안도하게 될까. 그제서야 조금 숨 쉴 수 있을까.
울지 않고 말하는 법을 깨달았을 때, 아이는 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다른 차원이 있다고 믿어?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다고 믿지. 이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이세계, 이세계 하며 착각하지만 그거야 말로 외계(外界)지.
나는 내 시체같은 손이 좋다. 깨지고 뜯어져 울퉁불퉁한 손톱. 찢어진 살점과 손톱 사이로 흐르는 피. 손등은 온통 딱지투성이에 새로 생기는 상처들은 고름과 진물이 흘러 나온다. 이런 내 손은 나만이 알고 있다. 의사도, 선생님도, 당신들도, 모두. 다른 누구도 모르는 나만이.
이건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애인보다 신경써야 하는 것이며, 맞이하기 두려운 것이지. 이건 무엇일까? •숙면이구나. 딩동댕.
이대로 죽어도 좋을 거 같아요. 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대로 죽으라면 죽을 수 있을 거 같고, 아무렇지도 않을 거 같다고. 오늘은 날이 맑네요. 하늘에 구름도 많고 푸르네요. 습도도, 기온도 적당하고 사람들도 북적이지 않아요. 정말 그래요. 이대로라면 죽어도 상관없을 거 같아요. 선생님, 난 단지 죽고 싶을 뿐이에요. 아직도 날 막을 건가요? 신고하실 건가요? 그들에게 알리고, 아 한 명은 생사를 모르니 그 사람에게 알리고, 가 맞겠네요. 내 죽음을 방해하러 오시겠죠. 다음 달에 연락 주신다고요? 글쎄요.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사랑을 하면 닮는다는 말 아니? 닮았으니까 사랑하게 된 거야.
다시 연락이 왔다. 약속이 잡혔다. 만날 사람이 생겼다. 밖으로 나간다. 무엇 해야 하나. 나는. 그곳에서. 이룰 게 없는데.
어항 밖을 나온 물고기는 바다로 항했다. 드디어 어항을 탈출한 물고기는 자유를 찾아 떠났다. 그곳이 더 큰 어항인 줄도 모른 채.
산을 보지 말고 숲을 보라 해서 숲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내 삶을,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말은 굉장히 슬픈 말이야. •어째서? 결국 사람은 혼자임을 증명하는 문장이잖아.
거짓말을 하는 건 늘 쉽다. 진실보다 토해내는데 서슴없고, 망설임이 없다. 난 나에게까지 거짓말 하는 걸 쉽게 여긴다. 여기, 한 아픈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이번에 혀를 깨물어 피를 냈다. 그 후로 밥을 먹어도, 양치질을 해도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다.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은 내게 거슬리는 부스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나는 안 아픈 척 하는데에 도가 텄고,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고통이 보내오는 신호를 무시하는 건 거짓말하는 것과 같다. 왜 티를 내지 않느냐는 당신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미 너무 많이 아픈데 신체적 고통까지 더해지면 나는 이대로 죽고 말 거라고. 당신은 죄가 없다. 남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단지 그 반응이 이미 아흔아홉 번을 봐 온 장면 일지라도 말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면서요. 하지만 우리 인간은 지금이 난세인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걸요. 영웅이 나타나도 난세를 자각하지 못한 인간들은 그 영웅을 그저 미친사람 취급하겠죠. 동화나 소설 속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가상일 뿐이에요. 현실 속 세상은 그리 순탄치 않아요.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 당장 사람이 총 맞아 죽어도 외면하는 현실인데. 뒤늦게 늦었음을 후회할 때 곁에 남은 이는 아무도 없을텐데.
그럼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써 줬어야지. 방치하고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만 잘하지. 그깟 것도 관심이라고 주워 먹으라 던져주며 큰 아량이라도 베푼 양 굴지. 하루빨리 죽어서 벗어나고 싶나 봐. 그깟 것도 죄책감이라고 자기연민에 빠져 참 잘도 몰입하더라. 책임진 적도 없으면서 주제에 보듬은 척은 했다 착각하고. 그냥 죽게 내버려 뒀어야지. 꼴에 인두겁은 쓴 사람이라고 남들 눈치, 시선 볼 건 다 보지. 타인의 수군거림에는 그리 신경 쓰면서 문제의 원인은 파악도 못 하는 머저리일 뿐이면서. 뭐가 그리도 잘났는지 자기 말이 옳다고 개도 안할 헛소리를 지껄이고. 영영 상처받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결국 한 사람 아닌가. 그래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지? 당신, 아님 나?
행복해지고 싶었으면, 낳질 말았어야지.
당신이 먼저 말에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 나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나도 똑같아. 이건 정당방위일 뿐이야. 내 거짓은 죄가 되지 않아. 내 죄를 늘리고 싶었으면 본인 처신부터 똑바로 했어야지. 이기적인 적반하장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야지.
낡은 단어를 꺼내와 기워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니까, 그건 꼭 몰아치는 파도 같다. 물살에 의해 깎여 내려가는 바위처럼 닳고 헤진 단어 말이다. 결국 해안가에 떠밀려와 언젠가 찾게 되는 비린내만 남은 무언가다. 수선할 수 없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어 수습하지 못할 상황을 만드는 짓. 무모한 용기보다 가치없는 행동.
침묵의 통감 아래, 속절없이 부르짖는다. 짙은 푸른 색이 동 트는 태양에 붉게 물들 때, 푹 파인 눈가에 투명한 피가 흘러내린다.
눈물은 안 나와요, 너무 많이 울었거든.
당신이 행사하는 명령은 권력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저 종이조각에 불과한 서약서라는 걸 맹시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개가 아닌 인지를 할 줄 알고,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대하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됐다. 나는 당신의 모든 언행에 따를 이유가 없다. 라고 한때 새장 속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착각한 어느 한 아이가 말했었지.
세상에 기막힌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가장한 운명은 존재할 지도 모르지만.
4일이 지나면 자연스레 들어온다. 왜 4일인지는 모르겠다. 내게 불행이 4일 간격으로 일어나서 일까. 약을 먹고도 4시 44분이 되면 눈을 뜨며 공포에 잠식되던 기억이 각인되어 그런걸까. 어쩌면 둘 다 일수도.
너절하기로서니 적선 바란 적 없고, 비굴할지 언정 호의를 기대한 적 없다. 당신은 내가 1을 잘못 했으면 100을 부른다. 100만큼 부풀려 잘못 했다 말한다. 그럼 난 내 행동을 돌아본다. 아주 오래 씹어 되새김질 하듯 하나하나 짚었다. 당신은 나에게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쏘아붙이는 말은 기름 바른 화살이오, 마지막 일격은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성냥불이다. 불 붙은 화살을 몸에 두른 채 난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고 죽어간다. 살아남은 재만이 내 흔적을 필사적으로 남길 뿐이다.
곧 죽을 내 심장 붙잡지 마.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내려 줄 테니까.
•사랑받고 싶은 적은 없었어? 네. •왜? 받으면 그대로 돌려줘야 하니까. 그런데 난 그럴 수 없으니까.
지겨워. 매 여름은 너무 지겨워. •그럼 겨울은? 겨울이 훨씬 낫지. 볼 게 없으니. 여름은 보고 싶지도 않은 것들 투성이잖아. 벌레라던가, 벌레라던가, 벌레 같은 거 말이야.
사람들은, 박수칠 때 떠나는 이를 더 간절히 그리워하는 법이니까.
차라리 죽이지 그래. 날 취하고 피를 뽑아 갔어야지. 내게 기억을 심어줄 게 아니라, 공포를 각인시켜 놨어야지. 방정맞게 굴도록 두질 말았어야지. 하여튼 당신은 육아에 참 소질없어.
사실 당신은 신이 아닐까 생각해요. 오늘도 죽음의 외줄타기 속 고비를 넘긴 나는 의식이 끊기기 직전 당신을 찾았으니까요. 그래요, 다시 추한 변명을 해보자면 이건 사랑이 아니에요. 어쩌면 나는 당신을 숭배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비록 무신론자지만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어요. 그것이 어리석은 맹세일지라도···.
오늘 먹은 알약 갯수만 19개. 나는 다시 잠들기 위해 4개의 알약을 더 먹어야 한다. 그리고 내일 일어나서 8개의 알약을.
세상은 내게 너무나 가벼워서, 나는 평행을 이루고자 했기에 무게를 맞출 수 있는 버거운 걸 찾았다. 진정 내 감정을 들춰내고 꺼내 흔들 수 있는 그런 것을 말이다. 무뎌진 심장은 수 없이 난도질 당했는데도. 그 중 내가 한 자해가 반 이상을 넘을 텐데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날 쥐고 올가미를 채울 수 있는 그런 당신을 찾았다. 아주 성공적이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 나는 오늘도 당신의 이야기를 보고, 몇 번이나 봐 온 뻔해진 내용을 눈에 들이 갖다대며, 목이 뜯겨 나간다 해도 울지 못할 눈물을 떨구었으니 말이다.
빌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억지일 뿐이다. 지난 4일간 나는 물속에 있는 듯했다. 코와 목 속으로 쉼 없이 물이 빨려 들어오고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타들어가는 감각만이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린다. 삶은 자살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 저들은 내게 빌미가 생길 틈을 주지 않았고, 간헐적으로 내뱉는 숨만이 내 목숨을 부지 시켜 놓았다. 멀쩡하잖아, 살아있잖아. 억지를 부리는 그들에게 숨 쉬는 걸 보여주며 그것을 증명시켰고. 나는 다시 내가 혐오스러워졌다. 약을 먹기 위해 깨어 있었고, 잠들기 위해 토해내야 했던 시간 속에서 나는 정상인의 몰골일 수 없었다. 거울이 멀쩡한 건 그걸 깨부술 힘이 없어서고, 키보드를 누르며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건 곧 죽을 나를 위한 애도다.
이명과 난청이 느껴지기 전 내 몸은 이미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안개가 낀 것처럼 탁하고 다시 심해에 잠긴 사람이 눈을 뜬 것처럼 흐리고 어두웠다. 시야에 물이 가득 들어찬 느낌.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트리고 눈을 뜬 채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했던 짓은 광대짓보다 볼일 없었다. 사람들은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내가 그릇을 떨어트리든 말든, 어지럼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든 말든 말이다. 무시에 익숙해진 인간. 그것이 나의 현주소. 애써 정신을 차리고 엎어진 그릇을 들고 일어났을 때 멀쩡해진 머리에 그릇을 내려치지 못한 게 오늘의 후회다.
비가 많이 왔고, 붉은 달이 떴다. 모든 게 이정표처럼 느껴진다.
사람에게 정붙은 새 한 마리가 창틀을 자주 오간다. 그 새는 내 살을 먹여 키운 새다. 시체 같은 손을 만드는데 한몫한 새이기도 하다. 내 이빨로 손톱을 뜯었다면 그 새는 내 살을 뜯어갔다. 손 위에 올라오면 항상 뜯어진 손가락을 쪼아댄다. 피가 나도 아픔을 호소한 적 없다. 그 새를 피했다면 지금까지 내 곁엔 없었을 것이다. 언제든 떠날 생명 하나에 내 손을 담보하는 삶. 그 작은 일말이라도 내겐 희귀했기에, 살을 내주고 사라질 온기를 쥐었다.
신이 신을 만들지 못해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인간을 만들지 못해 로봇을 만들었다.
너를 살려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게요, 왜 살리셨어요. 미련하게. 너를 살려내선 안 됐어. 웬일로 옳은 소리를 하시네요. 근데 이건 이거대로 기분 나빠. 널 살릴 수 없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멍청한 새끼. 그러게 처신 똑바로 했어야지.
틀에 박힌 말, 진부한 이치가 세상을 정립하고 언젠가 결국 그 말과 이치를 내뱉으며 이해하는 날이 오기도 한다. 새삼스럽지만 당연한 것, 별 거 아닌 공감이 때로는 더 각별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억제한 지난날들의 내가 안타까워서라도, 나는 홀로 모든 걸 감당하고야 말겠다고 악을 쓰며 심장에 못을 박았다. 언제라도 미련 없이 다 버리고 떠날 것이라고 다짐했다. 조금만 참고 버티면 된다고. 텅 빈 길 위에, 방향도 모르는 그곳에 나를 고립시켜 놓았다. 끝이 정해진 순례자가 아닌 정처 없이 떠도는 표류자였음을 모른 채 헤매었다. 기다리지 않겠다는 말은 얽메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련 따위 없다 한 건 붙잡고 싶지 않아서였다. 되새기고, 재확인하고, 결연한다. 기반없는 진흙 길 위를 걷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날 구하고 싶다면 한 컵의 물을 주세요. 내 손에 쥔 독을 한 번에 마실 수 있게.
노인은 말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관대해져 큰일이야.’ 그러며 노인을 넘어트린 사람에게 ‘가시오. 난 괜찮으니.’ 라고.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봤니?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봤구나. 왜 나이를 먹으면 관대해 지나요? 예끼. 말 돌리는 것 보세. 노인은 뜸 들이다 말했다. 감정이 마모되기 때문이다. 왜 마모되는데요? 너무 오래 살아 그런다. 이미 백 번 느낀 것을 새롭게 느낄 순 없기 때문이지. 행복하세요? 예전에는. 길 가다 익은 감나무라도 발견하면 그리도 좋아했지. 하나 몰래 서리해 콧노래를 부르곤 했다. 지금은요? 글쎄다. 넌 어떻게 보이는데? 침울해 보여요. 행복하진 않은 거 같은데. 허허허. 어린 게 당돌하네. 겁이 없어서 그런가 보죠. 얘야, 난 방금 웃었지만 기쁨을 느낄 수 없고 즐거움을 알 수 없다. 넌 최대한 많이 행복해하거라. 왜요. 그때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기 때문이지···. 근데요, 나는 곧 죽을 건데요. 여기 온 사람들은 다 죽기 전에 오는 곳인데.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 8월의 마지막 어느 점심 산책 시간의 대화.
오르트 구름에 널리고 널린 게 얼음덩어리라면, 지구에는 인간이 넘쳐나지. 너무 넘쳐나 문제야. 차라리 별이 되지 못한 돌덩이가 나을 텐데.
그 밖에 쭉정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속이 텅 비어있는 겉껍질. 인간이 되다 만 것의 비유. 혹자는 죽지 못한 영혼의 옷이라 하였다. 미지에 가두고 열쇠를 버린 후 떠난 무자비의 살인자를 훔친 가여운 이의 발로.
유일하게 좋아하는 꽃이 석산화입니다. 산책을 나가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꽃입니다. 검은 나비가 앉아 있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죽음의 색만 모아놓은 자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제의 표본과 슬픈 꽃말을 가진 것들이 거기 모여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이유는 아직은 어울릴 수 없기에 멀어졌습니다. 왜 아니겠나요. 나는 이번에도 살아났습니다. 지금은 멀쩡한 햇빛 밑에 있는 게 덜 이질스러운 걸 어쩌겠나요.
입에는 칼을 물고 눈은 독기로 가득하며 온몸에는 진득한 살의를 둘렀구나.
괴팍한 것. 뭐가요? 너 눈이 왜 그래? 알 바 아니잖아요. 말본새하고는. 노인은 내가 있는 벤치 앞에 등을 굽힌 채 마주 앉았다. 멀쩡한 얼굴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쯧쯔. 맞은 거 아니에요. 선반에 부딪혀서 멍든 거예요. 앞을 잘 보고 조심했어야지, 요 녀석아. 지가 무슨 홍길동이야, 말을 이리했다 저리했다···. 뭐? 으허허허! 왜 웃으세요. 감정 없다던 분이.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아닌데. 나 되게 잘 웃는다. 봐라. 아, 네. 어느 태풍 전 오후.
귀순했어. 더 이상의 무가치한 언쟁이 지긋지긋해서. 징그러워.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 목소리 한 음까지. 실어증 환자처럼 살았어. 말을 안 해서 그런가, 책을 안 읽어서 일지도. 이젠 정말 걸어 다니는 송장이네. 아니, 놀랍지는 않아. 하루하루 날 죽여가는 건 이토록 평범한 일상이니까.
만남에는 이별이 따른다는 것을 알기에 언제든 배웅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던 새가 벌써 한 달째 오지 않고 있다. 나는 이 새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걸 불현듯, 그러나 아주 당연하게 알 수 있었다. 헤어짐을 직감한 순간 더는 창틀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다만 준비해둔 인사를 하지 못한 게 유감이다.
튀는 행동을 하지 마. 알아서는 안 되며, 알아도 모른 척해야 한다. 나서지 말고 끼어들어선 안 된다. 쥐 죽은 듯이 숨죽이며 살아. 살아있다는 걸 인지하게 두지 마라. 한 걸음 물러서고 입을 다물어. 네 행동과 말이 낳을 처참한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시키지 마.
시체 위에 돗자리를 편다. 시체의 땅에서 핀 꽃을 보고, 시체를 묻어 아스팔트를 바르고 그 위를 달린다. 시체 위에, 새로운 시체가 쌓인다. 같은 자리에 다양한 시체들이.
소녀는 말했습니다. “절 울리면 죽겠다 말한 건 없었던 일로 할게요.” 노인은 말했습니다. “내가 왜 네 죽음을 말리기 위해 널 울려야 하니?” “지금까지 저를 울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내가 실패할 거라 생각하는구나. 아니, 넌 이미 내게 그리 말하고 있어.” 노인은 알아볼 수 없는 희미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얘야, 너는 슬픔을 느껴본 적 있니?” 소녀는 아주 깊은, 오래된 고물 기억까지 들췄습니다. “물론이죠. 저도 어릴 땐 자주 울고, 슬픔의 감정을 이해한걸요.” 노인의 얼굴은 꼭 구겨진 종잇조각 같았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서서히 짙어져 가는 그늘처럼 노인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어서야 소녀는 그 그림자로 노인의 표정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운 슬픔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니?” 소녀는 아주 어려운 문제를 만난 얼굴을 하고 집요하게 고민했습니다. “나는 내 아픔만 온전히 느낄 수 있어요. 타인의 아픔은 그들만이 오롯이 알겠죠. 나는 그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소녀는 이어 조금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내 아픔조차 오래 돌보지 않고 희석할 시간만 준 뒤 자연치유가 됐다고 생각하며 일상을 영위하죠.” 노인은 이제 그늘이 없어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금붕어처럼 끔뻑거렸습니다.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뭐니?” “누구에게든 할 수 있어요. 단지 죽겠다고 말한 그 순간, 운 나쁘게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당신이었던 거죠.” 운 나쁘게라. 노인은 곱씹듯 중얼거렸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네가 죽는 걸 볼 수 없단다.” 소녀는 감흥 없는 지루한 얼굴이었습니다. “네.” “그러나 나는 너처럼 망가지고 죽음이 간절한 아이는 처음 보는구나.” “그러시군요.” “또 내 눈에 넌 무척 울고 싶은 아이로 보여.” 소녀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어 소녀는 그 이유를 말했습니다. “눈물을 흘리기엔 이미 너무 많은 걸 잃어서요.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울 생각 없어요.” 노인은 어린 소녀에게서 많은 걸 보았습니다. 자신보다 늙고 쇠약해진 마음 잃은 사람을, 달관한 채 공허에 빠진 사람을, 오랫동안 억압되어 걷는 법을 잊은 사람을. “이상하죠. 얻는 건 그리 힘든데 잃는 건 이리 쉽다니.” 해탈한 선인 같기도 했습니다.
이른 구원, 우리는 젖어 드는 새벽의 아지랑이가 무서워 하나의 뿌리처럼 엉켜 있었다. 문득 바라본 빛무리에 떠내려가기라도 할 것 같아서 서로를 놓지 않았다. 늦은 파멸, 퍼렇게 뜬 여명이 죄악으로부터 달아나듯 사그라들 때, 서로의 숨을 오아시스의 샘물같이 빨아들이며 우리는 그렇게 마른 익사 했다.
가위에 눌리는 일은 이젠 반기게 돼요. 안 눌리면 그게 더 어색하고 이상하거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몸이 되는 것이 흥미로울 때도 있고요. 한계에 부딪혀 내는 고통의 소리가 없는 나는 대부분 가위에 눌리고 깨어날 때 더 개운하기도 해요. 이게 내 생활을 망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죠. 그랬다면 약을 늘릴 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럼 타인의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겠구나.” 노인은 조금 수척해져 있었습니다. “시늉은 할 수 있겠죠.” 소녀는 저 먼 곳 어딘가를 흐린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소녀의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보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노인은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죽어도 울지 않겠구나.” 소녀는 노인을 바라봤습니다. 초점이 돌아온 눈에 생기는 없었지만 ‘누군가를 응시한다.’라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여기가 어디죠?” 소녀의 목소리가 작아졌습니다. 까마귀가 어둠을 먹은 것처럼 캄캄하고 적막했습니다. 소녀는 점점를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동공이 수축되었습니다. “여기는 대로 한가운데고, 나는 죽으려던 널 구하고 싶어 말을 건 오지랖만 남은 노인이지.” 소녀는 뒷걸음질 쳤습니다. 등 뒤에 차가운 쇠붙이가 느껴졌습니다. 날개뼈에 선득한 서리가 닿은 곳부터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소녀는 제 날개뼈를 교차한 팔로 감싸 안으며 주저앉았습니다. “대답해 주겠니, 넌 내가 여기서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까?”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딴 거, 알 게 뭐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노인은 버석하게 말라가는 소녀의 입가를 보며 극심한 동정을 느꼈습니다. “가여운 것···.” 자신의 낡은 신발을 벗은 노인은 그대로 차가운 쇠붙이를 붙잡고 대로 밖 난간으로 넘어갔습니다. 소녀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선은 노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다.” “그래서, 죽기라도 하시려고요?” 노인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은 반듯했습니다. 비아냥거리는 말투와는 정반대로 무표정에 가까운 그 이목구비가 괴리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노인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아, 시간이 멈춘 태엽 같구나. “내가 죽어 네가 울 수 있다면 기꺼이.” 소녀는 희생이나 구원, 동화 같은 결말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끝까지 소녀는 노인의 말을 의심하며 부정했습니다. 노망난 노인네 때문에 운 나쁘게 걸린 건 소녀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녀는 헛웃음을 흘렸고, 그걸 들은 노인은 웃었습니다. “웃어 볼 줄도 아는 애였구나.”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미련 하나 없이 발과 손을 떼고 대로 밖으로 떨어졌습니다. 소리를 잡아먹은 고요가 다시 그것을 뱉어냈을 때, 첨벙— 하는 소리가 소녀의 주변을 가득 메웠습니다. “아.” 소녀는 탄식에 가까운 숨을 내뱉었습니다. 웅크린 몸을 피고 날개를 돋우듯 난간을 잡고 대로 아래를 살폈습니다. 시커먼 기름이 떠다니는 것처럼 물 위로 불빛이 어질러지고, 그 아래로 한 인영이 저항 없이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하.” 소녀는 다시 소리 냈습니다. 이번엔 깨달음에 가까운 한숨이었습니다. 물속에 비친 건 소녀였습니다. 시야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건 소녀 자신이었습니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꺾인 날개와 함께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창백한 뺨 위로 투명한 물이 떨어졌습니다. 자신을 바쳐 슬픔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게 된 소녀는 모든 걸 잃었습니다. 흥분하며 말을 높이던, 지루해하며 코웃음을 치던, 제 속을 능히 감추던 아이는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원래라면 알 수 없던 감정이었습니다. 다 잃은 줄 알았던 것들이 물거품으로 사라졌습니다. 충분히 불행했다고 믿은 소녀의 머리 위로 누군가 물었습니다. 이젠 죽지 않을 거지?
물고기가 뭍으로 떠올라 폐사하면 재앙의 징조라 했다. 하나, 그건 그저 명분을 위한 그럴싸한 희생이다. 불이 자주 나고 비가 방류한 물같이 퍼붓는 것도 누군가의 피를 밑바탕으로 칠해지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말할 것이다. 흉하게 자란 나무를 가지치기하듯이, 인간의 과실을 그대로 덮어놓은 모래사장. 유리 조각이 빛나는 걸 보며 돌덩이인 별처럼 드넓게 미화하겠지.
온몸이 두방망이질 친다. 더 이상 무엇도 하지 말라는 경고 같다. 그것을 무시한 대가가 이렇게 날 찾아오나 보다. 불규칙적으로 잠을 자는 시간이 늘었다. 약이 안 들어 다시 바꾸게 생겼다. 빗소리가 들린다. 비는 단 한 번도 내린 적 없는데.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여름도 다 지나가 벌레들은 숨어버렸는데. 지긋지긋한 환청이, 또.
강요하는 게 선의가 아니라는 걸 왜 모를까. 그런 짓을 할 바에 차라리 위악을 퍼붓지 그랬어. 손에 쥐여주면 나를 만족시켰을 거란 생각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지. 아직도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역겨움이 올라와. 당신은 사실 내가 모든 걸 토해내길 바랐던 걸지도 모르겠네.
시간이라는 건 아주 정교하고 복잡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하게 순환해야 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시계처럼 고장 나선 안 돼. 멈춰서도, 반대로 돌아가서도 안 되지. 그것이 정해진 섭리이고 세상의 규칙이니까. 또한 아주 치밀하게 짜인 인과율이지. 이 모든 건 결국 정해진 삶을 비틀기 위한 인간의 발버둥이고, 마지막 투쟁일 거야. 이다음 생엔 모든 걸 잊고 다시 시작하니까. 자, 그럼 다시 물을게. 삶과 죽음을 동시에 선물 받은 기분이 어때? 나는 여전히 지랄 같아. 그 당연한 이치가 인간은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라도 된 것처럼 일말의 의심도, 여지도 갖지 않고 쫓아가지. 도달한 끝에 닿는 게 결국 죽음인 줄 알면서 눈먼 장님을 한 채 정해진 길을 걷는 거야. 완주한 삶을 돌아보고 나서야 깨닫지. 아, 무엇도 희미하고 덧없는 짓이었구나.
밀림에 갇힌 거야. 굵게 자란 나무줄기가 몸을 두르고 덩굴로 장식한 거야. 생존을 위해 뻗어 나온 가시가 몸 안 깊숙이 박히고 살려달라고 발악하고 있는 거야. 스콜 따위 없는 흙바닥은 쩍쩍 갈라져 모든 걸 바스러트려 버리지. 소리 내 외쳐도 들어주지 않는 녹음에 뿌리째 묶인 거야.
탄로 난 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내 등을 마주 볼 수 없다. 오직 내 비밀을 알아챈 이들의 등 돌린 모습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어린 양은 다만 침묵할 뿐. 잘난 체하는 똑똑한 이 보다 얕잡아 보이는 멍청한 이가 낫다. 빈곤한 천재보다 충만하게 채워진 바보에게 더 다가가기 쉬움을. 조용히 얘기를 들어주고 적절한 대답을 해주는 이를 자존감 채우는 도구로 이용하고 충고를 빙자한 무시를 하면 남을 흉보는 앞잡이 취급한다. 침묵한 양은 희생된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으니 가차 없이 버려진다. 그럼에도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고요함을 지킨다. 이 추위를 녹일 온기라 할지라도.
Don't look up. 아직도 모르겠어?
그들은 언제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갖가지 장난을 치지. 하지만 발전이 없어. 시간이 멈춘 존재란 그런 것일까.
뇌리에 남아 아직도 떠도는 잔상들. 지루해져 버린 같은 레파토리에 꿈을 깼다. 강제로 떠진 눈에 들어온 시계는 다시 4시 44분. 아무도 죽지 않았다. 꿈속의 나도, 지금의 나도. 물은 없다. 남은 건 쉬어버린 목소리뿐이다.
몰아 쉰 바람이 토해내는 거센 일렁임에 바닥을 떠돌아다니는 낙엽들. 저마다 다른 태양의 색을 입은 나뭇잎이 마지막 열기를 안은 채 흩날린다.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며 버티던 초목의 어느 계절이 지나고, 그날이 다가온다. 아득한 백색에 심장이 저리게 떠안고 울어야 했던 추운 겨울. 원망과 한이 가득했던 깨끗한 눈길. 발이 붓도록 걸어야만 했던 생존 약속을 지킨 과거. 매정한 영하의 날씨가 투명하지만 보이지 않게 천천히 얼렸고, 하얗게 질린 손을 볼 수 있음에 안심했던. 과오를 밟아 지나온, 이제는 녹아 사라진 나약했던 아이.
나는요, 텅 비어버린 돌이에요. 발로 차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어느 돌무지에 흔히 굴러다니는 그런 돌이요. 누군가의 총알받이였고, 해서 구멍 뚫린 현무암처럼 굳어버렸죠. 몸을 관통하는 고통에 익숙해진 지 오래라, 나를 밟고 지나간들 아무렇지 않았죠. 말해줄래요? 그중 내 숨통은 아직 살아있는지.
무용한 게 다 무슨 쓰임이 있다고, 비관적으로 생각합니다. 가치 있고 특별하며 귀한 것이 더 좋다 여겼습니다. 호의는 내게 너무나도 추상적인 것이었고, 나의 세상은 언제나 불친절하고 난폭했습니다. 그런 삶에서 내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을 찾아보긴 힘들었습니다. 꽃이 절 구해주던가요. 달이 제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했던가요. 누군가의 웃음은 늘 내게, 까마귀의 울음소리보다 소름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런 나의 어둠 속 별이었고 불꽃이었고 햇살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당신에게 처음으로 다정함이라는 것을 배웠고, 구원받아 사랑하게 된 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이제는 내 손으로 끝내야 함을 압니다. 그리워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자주, 어쩌면 그보다 많이 떠올릴 것 같습니다.
외려 인애가 없어 차등 없이 행동하는 거라고. 공평하게 기피하고 깊이 묻어두는 거라고. 사람에게 남은 정이 있다면, 이게 내 마지노선이라고.
보잘것없는 작은 이 손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적어도 고를 수 있는 건 두 개라는데, 실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굳은살 하나 안 박힌 손가락으로 지목된 정답을 가리키는 것뿐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했던가. 무엇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자유인가. 정녕 쥔 것 하나 없는 이 몸에 전가할 생각인가. 그래야만 당신들이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이 신체조각 하나 하나까지 뜯어가 제 이익을 추구하는구나. 이런데도 내게 살라고 하는 것들이 흉측하다. 살아서 빼앗길 바에야 죽어서 잃도록 하는 게 낫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여태껏 무응답으로 일관할 작정이신지.
유쾌하게 살아. 그것이 눈속임일지라도. 우습게 행동해. 독 묻힌 나이프로 긁어내린다 해도. 순종하며 한껏 엎드려 숨죽여라. 기만자라 손가락질 해도. 그렇게 해서 얻어낸 게 썩어 문드러진 줄 하나라 할지라도.
처음은 적당한 친근감이다. 둘은 동정이고 셋은 지겨움이다. 누구에게든 세 번 이상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그 이상 넘어가면 호구가 될 것이며, 배신당하기 딱 좋은 먹잇감이 될 테니 말이다. 철저히 계산된 자비 속에 번거로움은 사치니까.
오늘 내가 쓴 유서를 읽었다. 적당했다. 3분간 읽은 긴 유서 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고작 그것 하나였다. 단조로운 모노톤. 높낮이 없는 음률. 그 속에 희생된 비운의 인물은 드디어 원하는 것을 손에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최고의 자멸을 선사한 희대의 정신병자.
고통의 기준이 대체 무엇일까. 평소에는 잘만 버텨내던 몸뚱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내 팔을 씹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도 멍과 흉은 그대로다. 팔의 곡선을 타고 흐르던 피를 본 사람들의 눈을 아직도 기억한다. 짙게 남은 이빨 자국을 따라 붉게 맺힌 선혈들이 생생하다. 피를 토할 때보다, 코피를 흘릴 때보다 이상하리만치 그 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처럼 내 감각은 아직도 그때에 있다. 그날 이후 나는 생존하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 분노는 영하의 날씨도 삭힐 수 없다. 적개심이 고드름처럼 뾰족하게 솟아있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는 서리처럼 피어있다. 바싹 마른 지난한 감정에 불을 지폈다. 휘날리는 불티는 꼭 반항하기 위해 버둥대는 치기 어린 애 같았다. 누군가 말했다. 네 마음은 까맣게 죽어버렸구나.
세상의 모든 대화가 모이는 밤을 당신은 아시는가요. 힘없이 무력하게 그것을 맞이해야 하는 제 심정을 들여다보실 수 있나요. 듣고 싶지 않아도 귀를 열어야 하며, 동요하고 싶지 않아도 온 영혼이 빼앗길 때까지 반응해줘야 하지요. 때로는 잔인한 아침햇살이 반갑기만 할 때가 있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으신지.
새해가 가기 전에 어떻게든 깨어났네. 처음이자 마지막 변덕을 부려보고 싶어서 왔어. 이유는 가기 전에 심심해서라고 해둘게. 뭐든 좋아. 궁금한 게 있다면 사소한 거라도 물어봐. 질문이 달리면 언젠가 다시 올 날에 답해줄게. 없으면 없는대로 좋고. 이대로 가도 아쉬울 건 없다보니.
꿈속에서 나는 늘 제정신이었어. 단 한 번도 미친 적이 없었지. 그게 날 미치게 만들었는데도, 꿈에서조차 나는 나사가 끼워진 상태였어.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그대로야. 누군가는 태어나는 날을 받아놓는데, 난 죽을 날을 받아놨어. 무덤덤한 질문에 거짓으로 회답하는 일상. 오랜만에 듣는 인간의 언어가 그리도 감격스러우셨는지. 때론 모르는 게 약이라고. 그럼 난 독약을 먹이고 있던 걸까. 그것조차 내 안배라면 마지막 당신의 얼굴이 어떨지 예상돼. 모든 걸 알기에 달관한 삶. 순진하게 천박했던 어린 날의 나는 묻어준 지 오래라, 겨울 새벽에 죽고 싶다던 알량한 대사. 조소와 함께 춤춘 밤.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면 그 길던 일 년 끝에서 동사하자. 물이 아닌 얼음 속에서 암야만이 전부인 고통도 없는 무해로 결말을 짓자. 반투명한 호수와 하얗게 익은 자작나무를 지나 고요한 고독사로. 그래야만 증명될 수 있는 겨울이 오니까.
온실 속 화초라는데, 온실에서는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한다는 걸 알까. 창백한 핏줄이 터져 나가고 손에 구멍을 내서 꽃을 다 꺾어버렸는 걸. 아직도 비틀지 못한 꽃이 가끔씩 꿈에 나와. 오늘 붉은 달이 떴었어. 딱 저 달만큼 내 몸도 단비로 적셔졌으면 했어. 아, 이런 말장난은 화초들이나 하던가.
귓불을 잘라 먹으면 맛있을까. 어릴 적 먹을 게 없어 배고픔도 모르던 아이는 그런 생각을 했어. 남들보다 유독 큰 제 귓불을 만지며, 이 부분은 필요 없지 않나, 피도 잘 안 나고 고통도 별로 없다는데. 그럼 도려내 구워 먹어볼까, 하고. 하지만 그 아이는 제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손가락이나 뜯어야 했지. 먼저 죽은 동생에게 우리 서로 귓불을 잘라주어 나눠 먹자고 한 순간부터 아이는 동생과 떨어져 살게 됐어. 다시 만난 동생의 귓불은 잘 붙어 있었다나.
작위적이라고, 네 글은 너무나 무미건조하다고. 왜 그런지 아냐는 질문에 물음표도 느낌표도 없다며 불쾌해하던 얼굴.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고 글을 찢던 미련한 행동. 그것마저 우두커니 바라보니 진저리난다며 뱉은 승리자에 도취된 한 마디. ‘넌 역시 온실 속 화초네.’
잃어서, 앓았고, 앗아간 꿈마저 빼앗겼어. 아니. 되찾을 수 없게 됐으니 내준 건가.
정말 체계적으로 죽으려고 하는구나. 오랜만에 본 남생이가 그랬다. 그 말이 퍽 마음에 들어 몇 년 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맞아, 체계적으로 죽어가고 있어. 남생이는 참 파괴적인 사랑을 한다며, 네 사랑에 이름을 붙인다면 파애라고 했다. 그 말도 마음에 들어 남생이의 본명을 불러주었다. 남생이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도망갔다. 빈자리를 보며 한참을 또 웃었다.
캄캄한 게 무섭지 않게 된 건 9살, 아파트 전체에 전기가 나가 정전이 됐던 날.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피고 있을 때.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거실을 돌아다니다 보게 된 베란다 너머의 풍경. 고요한 소리 속 일렁이는 불빛들이 매서워서. 암흑 속에서 빗발치는 소란이 거슬려서. 땅이 내려앉았으면 하고 바라며 이불에 들어가 몸을 말고 귀를 덮었던. 아마 그날 이후부터였을 거야. 아끼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악몽이 덮치며 칙칙한 그림자가 시야를 뒤덮기 시작한 게. 의도치 않게 이루게 된 내 첫 번째 불원.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부분의 것들은 지워버려요. 지워진 기억은 죽은 것과 다름없어요. 죽은 기억의 개수를 손가락으로 세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손을 가지고 와도 부족하죠. 수도 없이 죽였는데 하나둘씩 살아남는 것들이 있어요. 무심하게 다시 짓이겨버린 거 같아요. 그것들이 살아있으면 곤란해서요. 두통을 느낄 만큼 시끄럽게 주변을 맴돌거든요. 지금처럼 말이에요.
처음으로 되돌릴 거라는 말에 당신은 그러지 말라고 했다. 모든 걸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게 할 뿐이라는 말에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했다.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거라고, 이 미래는 처음부터 오려던 길이 아니었다고 하니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일찍 만나 많은 걸 공유했고, 그래서 다른 관계보다 더 유착됐을 뿐이다. 당신과는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먼 길을 방황하다 새로운 안내판을 만났을 뿐이다. 빌며 애원하는 것에는 힘이 없다. 이것이 최선임에 무력감을 느낄 수도 없다. 당신은 울었다. 오랜만에 나타나, 오랜만에 울었다. 내가 흘려야 할 눈물까지 전부 쏟아냈다. 사실 바다는 인간이 만들어낸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아주 긴 시간 동안 소리 없이 울었다. 당신이 다 울 때까지 기다리고 깨어나니 열흘이 지나 있었다.
세상이 비로소 우리를 갈라놓나 봐. 흐릿해지는 기억을 내리는 눈에 매달았어. 마지막 산책에 새가 죽어있는 걸 봤어. 움켜쥐고도 남을 만큼 작았어. 춥고 배가 고파 죽었구나 했지. 시체 같은 손과 시체가 된 새를 들고 조용한 땅 위에 서 있는 기분은 묘했어. 죽은 새에게 묻고 싶었던 거 같아. ‘우리 같이 깊숙한 곳에 묻힐래. 여긴 너무 추운데.’ 하고.
두렵진 않니. 전혀요.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체념에 익숙해졌으니까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구나. 아. 왜 그러니. 사람으로 대하긴 했었구나, 싶어서요.
쓸모없는 기억을 없애야 현재를 유지할 수 있다니.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둘씩 잊고 있어. 내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겠지. 기억을 잃고, 말을 잃고, 움직이는 법을 잃었다더라. 그만큼 앓았다는데 참 모순적이지. 가장 먼저 몸이 잊고, 처음 되찾는 것이 통증이라는 게.
추락하는 걸 목격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금껏 추락한 이들은 일자로 떨어지는 줄 알았어. 대각선으로 하나, 직선으로 하나. 어쩌면 정신이 나가 헛것을 본 걸지도 모르지. 그날 밤 잘 꾸지 않는 꿈속에서 또다시 추락하는 무언가를 봤어. 10층의 아파트 베란다 안에서. 집 안에는 한 여자가 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하고 있었고, 한 남자는 밥 먹으러 가자며 엘리베이터를 타도록 유도했어. 여자와 남자가 함께 탄 엘리베이터는 숨 막히게 좁고 위태로웠어. 1층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5층에서부터 층이 이상해졌어. 5가 2가 돼 있었고 F4-1, F4-2 이런 식으로 내려갔어. 뒤늦게 본 엘리베이터 층수는 총 12층이었어. 여자와 남자는 긴장한 기색으로 엘리베이터 모서리만 쳐다봤어. 그래서 물었지. 원래 여기 10층이 꼭대기 아니었나요? 그랬더니 부정하며 12층이란 대답이 돌아왔어. 마지막 1층에 도착할 때 엘리베이터는 빨간색으로 5를 알리고 있었어. 여자와 남자는 시야를 가리며 차 안에 태우려 했어. 눈이 발목까지 깊게 쌓인 밤, 옷을 두껍게 껴입어 추위를 못 느낀 건지 꿈이라 추위를 못 느낀 건지. 아니면 미처 가리지 못한 시선에 한 아주머니가 빗자루로 눈과 핏자국을 지우고 있던 걸 봐서인지는 모르겠어. 차에 타는 척하다 아주머니를 붙잡으며 미친 것처럼 말했지. 당신, 추락하는 사람을 본 적 있나요. 지금까지 하늘에서 무언가 추락하면 일자로 추락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주머니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트렸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어. 대각선으로도 추락하는 걸 봤어요. 그다음 직선으로 무언가 하나가 더 떨어졌어요. 지금 이 핏자국, 아주머니도 본 거예요. 이게 뭔지 알고 있던 거예요. 다 알면서 치우고 있었죠. 그런 거죠? 거기까지 말하니 여자와 남자가 손을 뻗으며 달려왔어. 붙잡기 위해서였겠지. 그들을 뿌리치고 내달렸어. 약간의 희열을 느끼면서 말이야. 거봐,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분명 두 형상이 추락했고 그 생각이 맞았던 거야. 저것들처럼 절대 낙사하지 않을 거야. 죽어도 그렇게는 안 죽을 거야. 전속력으로 달렸어.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절규하듯 외쳤어. 여자와 남자는 바짝 쫓아오며 소리쳤어. 폭설이 내리며 코가 빨갛게 얼어버릴 만큼 춥던 밤, 더 빠르게 달리기 위해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졌어. 발은 얼어붙은 듯 딱딱했지만 이상하게 속도가 붙었어.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욕을 내뱉으며 멈추라 했어. 다시 느려진 몸을 감싸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주변을 빛내던 가로등이 사라질 때까지 내달렸어. 끈질긴 황혼을 어둠이 집어삼켜 음산한 저택으로 변하고 거기까지 도달하자 눈앞에 흐릿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어. 저택 입구에 서 있던 그림자는 말했지. 변절되지 않은 목격자, 라고.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어. 암야만이 공존하는 밤. 몇 시인지도 알 수 없던 칠흑 같은 곳에서. 심장을 뭉개 터트릴 것 같은 고통에 잊을 수가 없던 꿈. 그날 아침 두 명의 공실이 생겼어.
내 슬픔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데, 나는 하늘을 볼 수 없어요.
어제는 이곳에 대해 잊어버렸다. 기억에 없지만 울었다고 한다. 다음 날 흰자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걷는 법을 잊었다. 분명 마지막 산책을 끝냈는데 정해진 일과대로 몸이 움직였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팔을 끌어 복도로 나가려 했다, 고 한다. 마찬가지로 기억나는 건 없다. 이번엔 약으로 묶었지만 다음은 뭐가 될지 모른다.
흥분하지 말아라. 그 감정은 독이 된다. 비유의 독이 아닌, 말 그대로의 독이다. 한 번 흥분할 때 이곳의 명이 하나 끊긴다. 절제하라. 언제, 어디서든 긴장하며 숨을 삼켜야 한다. 눈을 맞춰도 아니 된다. 그 즉시 타인에게 간섭하는 것이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새기거라. 도래하는 날, 모든 걸 거둬갈 것이니.
ㄷㄷ나랑 비슷하네
>>188 어떤 게 비슷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구나.
눈을 뜨니 발목에 줄이 묶여 있었다. 놀랍지는 않았으나, 그 줄의 색이 검은색이었다면 당장 라이터를 찾아 불을 질렀을 것이다. 어릴 적 오선지에 영어와 음표를 같이 적었다. 백지 위에 그어진 줄 하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병자의 창백한 얼굴과 목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으면 뽑아내며 자해했다. 눈앞에 거슬리던 앞머리와 옆 머리칼을 잘라냈다. 뭉친 머리카락의 점. 목을 휘감는 선. 시야를 가리는 면. 이제는 모든 게 거슬리게 된 불협화음.
직면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필사적으로 회피하고 싶은 거겠지. 확증 편향적인 사고는 참 한결같아서 나쁘지 않네. 끝까지 미련을 만들어주지 않으니 말이야. 발목 잡는 건 거슬리지만 그것이 대가라고 생각하면 견딜만해.
울면서 웃는 이유는 드디어 벗어났다는 안도감일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허탈감일까.
“선생님은 나이가 어떻게 돼요?” “···그건 갑자기 왜 묻니?” “왜요, 생각보다 많으신가 봐요.” “아직 30대야.” “그렇죠.” “뭐?” “보통 나이를 물으면, 자기가 산 세월의 숫자를 말하잖아요.” “···그렇지.” “근데, 나는요. 난 달라요. 나 말고도 아마 더 있을 거예요.” “어떤 게 말이니?” “난 아직도 15살에 멈춰 있거든요. 나만의 시간은 그 후로 흐르지 않아요. 고여가고 있죠. 그럼 난 몇 살이죠?” “1···.” “난 여전히 15살에 살고 있어요. 지금 흐르는 건 공통된 시간이지 내 시간이 아니에요.” “그건···” “선생님, 아이들 중 누구 한 명이 울면 왜 따라 우는지 아세요?” “···지금 뭐하자는 거니.” “울지 않는 아이도 있겠죠. 그중 한 명이 나였으니까. 근데 다른 애들은 다 울더라고요. 뭐가 그리 슬픈 건지 그때는 몰랐죠. 아, 지금은 이해는 가요. 공감을 못 할 뿐이지.”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뭐니?” “감정은 전염된다고요. 진심으로 슬프면 그 슬픔이 상대방에게도 전해지는 거죠. 그럼 그 상대도 같이 울더라고요.” “그렇기도 하지. 누군가 웃으면 같이 웃게 되기도 하니까.” “그런데 난, 왜 아무도 울어주지 않았을까요.” “누가 울어주길 바랐니?” “15살이나 되어서 왜 우냐며 난간으로 밀었을까요.” “···그건 과거잖아.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왜, 그걸 선생님이 판단해요?” “···.” “늘 이랬어요. 내 말, 행동 무엇도, 단 한 사람도 제대로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것들이 없었어요.” “그건 아직 네가···” “당신들은 하나같이 일관성 있어 좋겠네요. 그렇게 젠체하며 살아도 살아져서.” “···” “선생님, 더 이상 같은 무대에 서려고 하지 마세요. 늘 똑같은 역할, 지겹지 않아요? 반복되는 대사, 그거 요즘 Ai도 다 해요. 굳이 선생님 아니어도, 다른 대체할 역할이 선생님 살아온 나이보다 많아요.” “하···.” “마지막 상담도 잘 받았어요. 선생님의 멈춘 시간만큼, 부디 오래오래 사세요.”
생각이 많아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개미수열을 나열하고는 해. 인간의 삶도 개미와 다를 바 없는데 아득바득대는 게 크기만 커진 개미 같아서 볼품없기도 하고. 분열해서 늘어나도 쉽고 단순하니까. 간단한 명제로 구분되니까. 피식자가 되면 이 집념에서 벗어나 지금 해야 할 일만 떠올릴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다음 날 병사체로 발견될 때 조금이라도 덜 피해가 갈까, 매일 밤 고민하며 자세를 바꾸고 눈을 감아요. 그러고도 안심하지 못해서 이불로 몸을 묶어 놓기도 했죠. 몸에 들어오는 게 늘어날 때마다, 변화가 생길 때마다, 그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이 없게 하려고요. 침대 하나가 비었다는 것만 떠올릴 수 있게 최대한 덜 자극적으로 가려고요. 금방 잊혀지고 말 지난 날 나처럼요.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 바는 아니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끝없는 인내의 굴레였다. 추락하고 떨어져도 발에 땅이 닿아 고열에 시달려야 했던, 꽃의 장례식을 끝내고 나뭇가지에 걸었던 유년의 질긴 끈. 우거진 숲속 나무들의 무덤은 장렬했고, 초록색 풀로 채워진 봄의 그늘은 감히 밟을 수 없었다.
왜 죽어가서야 나타난 걸까. 그간의 시련은 벌도 아니었다는 듯이, 지독하게 발버둥 쳐도 기어코 끌고 들어가. 가라앉은 심해에 던져서 종장까지 지옥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가 봐. 성립되지 못하는 희망과 고립되어 버린 절망을 오가게 하려나 봐. 그래도 네가 그럼 안 되지. 있을 수 없는 일뿐인 삶에서 너까지 찾아오진 말았어야지. 너만은, 아물지 못한 상처를 후벼팔 순 없는 거잖아. 왜.
게워 내고 싶어. 내가 너무 역해서, 맨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어. 이것도 내가 받아야 하는 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증명될 때마다, 다시.
이런 식으로 내 한계를 다시 깨우치고 싶지 않아요. 그때처럼 무력감을 느끼고 아직도 무너질 땅이 남아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어요. 내가 어디까지 더 망가져야 하나요. 아직도 내가 놀라야 할 게 남아있다고 하지 말아요. 제발.
일기에 적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20일에 무슨 일이 있던 거 같은데 그것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너마저 잊어버렸다. 너는 내가 널 잊었다는 걸 확인하고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것이 목적이었다는 듯이. 망가진 해마를 붙잡고 깨달았다. 아, 너는 내 명을 단축하기 위해 찾아왔구나.
내 마지막도 어느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헐거워진 육신은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들에 지루할 뿐이다. 아, 이제 오셨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