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글 적고 가는 스레

창작소설 2022/03/27 23:16:19

#1 이름없음 2022/03/27 23:16:19

-평가 상관 없음. 오히려 피드백 환장함. -장르도 상관 없음. -걍 자유롭게 미완성된 글들이나 짧은 글 던지고ㅌㅌ -스레주가 글 읽는 거 좋아해서 평가질 자주 함. 주의 -다 같이 쓰는 스레. 일단 왔으면 글 적고 가라는 뜻.

#2 이름없음 2022/03/27 23:29:12

드디어 책을 머릿속에 집어 넣는 시술이 탄생했다. 어린이의 두개골이 완전히 아물지 않은 점, 뼈와 뼈 사이의 간격이 성인보다 많은 점을 들어 시술 시기는 5~7세 사이가 권장 된다. 해당 시술은 뇌 세포 사이 일정한 전기 충격을 반복하여 새로운 연결을 인위적으로 형성하는 원리이다. 일부 시민 단체는 "아이가 자발적으로 배우고 싶어 하는 내용이 아니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가 정점을 찍었다"며 시술 국내 허가 금지 집회를 열었으나 아이 본인의 동의서와 시술 후 해당 내용을 주기적으로 환기 시키지 않으면 뉴런의 연결이 끊겨 망각하게 된다는 점에서 오는 6일, 국내 시술의 일부 시행이 허용 된다. 이와 별개로 수도권 지역 서점에서 수학과 영어 참고서의 대량 품절 사태가 일어나 배송 업계와 출판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해당 기사 원문 보기>> -스레딕 뉴스, 주 입식 기자(hihihi@qwerty.com)

#3 이름없음 2022/03/27 23:47:00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4기 공채에 지원한 스 레딕 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햄버그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첫 운동회의 점심시간에도, 누나의 취직을 축하하던 자리에도 늘 함께하던 음식이었기에 햄버그는 제 추억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슈가 되었던 제 4차 기후 대위기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면서 고급 식재료인 다진 고기가 주재료인 햄버그를 쉽게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굳이 햄버그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동물성 성분이 원료인 음식들이 희소해지면서 우리 아이들의 추억이 무미건조한 보급형 가루로 채워지고 있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기에 귀사의 '동물성 원료 배양 샘플 제공직' 으로 지원하여 대체육의 원활한 공급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배양육 메이저 S사 선임의 지원 동기 평가 : 우선, 햄버그 얘기로 독창적인 스토리 텔링이 이어진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자신의 건강함, 오염 없음에 대한 어필이 부족합니다. 이는 샘플 제공 직에 대한 이해도 부족으로 보일 수...(이후 내용 열람 시 1000p가 차감 됩니다.)

#4 이름없음 2022/03/28 00:14:15

내 기억 속의 너는 나를 싫어했다가, 질투했다가, 무시했다가, 결국 싫어했다. 네 기억을 보지 않아 네게 남아있는 내가 어떨지 모르겠으나 너를 사랑한 모습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나는 어디까지 왔을까. 산을 오르면 종종 생각하게 된다. 숨은 이미 턱 끝까지 왔는데 나는 지금 어디쯤인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면 어디든 앉아 쉬게 된다. 얼마나 한 걸까는 보통 한계에 다다랐을 때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된 지 어느 정도 지난 걸까. 쉬어야 겠다. 웬만하면 너는 나를 계속 잊어주길 바란다. 이런 생각을 가질 만큼 각별한 사이가 아니란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나는 종종 너의 상메를 확인할 것이다. 일기장의 눈물 자국을 떠올릴 것이다. 술에 취하면 분위기를 따라 나를 싫어했던 나의 첫사랑을 웃으며 말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며 네가 나를 잊길 바란다. 나는 결국 네가 밉다. 머리 위로 하굣길에 너에게 쏟아지던 달빛이 내려앉으면 아무래도 여자는 싫겠지, 거부감이 들지도 몰라. 내가 이상한 거겠지. 하며 너를 이해하려 하다가도 결국 미워진다. 너에 대한 미움도 결국 터질듯한 폐의 압력으로 옅어지고 짭잘한 물이 목 끝까지 차오르면, 나는 정상이다.

#5 이름없음 2022/03/28 18:43:07

네, 맞아요. 오후 3시까지 제가 집에 있었어요. 월요일? 오늘이 월요일 이던가요? 제가 직장을 안 다녀서 평일에도 대부분 집에 있어요. 네. 미술 쪽 전공 했어요. 엄마가 돈 없다고 우셨는데 전 제가 성공할 줄 알았거든요. 알바는 다녀요. 등록금도 알바해서 냈어요. 암튼 3시에 갑자기 이러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 아 무슨... 저 무교에요. 무교도 신내림 받나요? 뭐, 그런 느낌 있잖아요. 이대로 내가 사라지면 딱 알맞을 것 같은? 그래서 너무 무서워서 공원에 나갔는데 거기서 봤어요. 아마 찾으시는 게 맞을 거에요. 분홍색 토끼에 뿔 달리고... 아 선글라스. 맞아요. 선글라스 끼고 있었어요. 그게 갑자기 커지더니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쵸. 피해야죠. 근데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좀 그런가. 사람들 있잖아요. 아무나.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저보다 잘 먹고 잘 살고 저 같은 건 삶에 들이지를 않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죽는 것 보다 제가 죽는 게 좀 이득이지 않나? 그래서 그냥 안 피하고 있었더니 너무 무서워서 잠깐 기절한 것 같아요. 지금요? 지금은 멀쩡한 듯? 근데 병원이 6시 넘어서도 하나요? 응급실은 비싸잖아요. "일단 알겠습니다. 수면제 과다복용 하신건 위세척 해드렸고 나중에 보호자분 연락 닿으면 수납 하시고 집으로 가시면 됩니다. 저요? 전 퇴근해야해서 먼저 가겠습니다."

#6 이름없음 2022/03/28 19:21:44

"시술 전 보호자 동반 면담이 필수거든요. 그, 아시죠? 중고등 참고서 대량 품절 사태." "아, 네. 뉴스로 봤어요." "사실 저희 시술이랑 별개로 봐도 되는데 시기가 애매하게 겹쳐서 사람들 눈 뒤집혀 졌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기준 더 강화됐어요. 그 하준이? 하준이는 시술 하고 싶니?" "저희 애가 아직 말을 못해요. 이번에 발달 장애 판정 받았어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아마 큰 어려움 없을 거에요. 장애 판정 받았을 때 같이 받으셨던 시술 대상 확인증이랑 의사 소견서, 주민등록 등본만 제출하시면 됩니다." "이거 말씀이시죠?" "네, 네. 전부 확인 됐고요, 여기 신청서 작성해주세요. 시술은 어떻게, 당일 진행 할까요? 요새 규제가 하도 심해서 손님이 많이 줄어서 오늘 가능한데." "저는 빠르면 좋죠... 근데 하준이가 아직 4살이라 부담은 없을까요?" "아 상관없어요. 저번에 3살도 받고 갔는데 아무 문제 없었고 규제 완화되면 또 해달라고 난리에요." "그럼 오늘 해주세요. 진짜 다행이에요. 하준이가 조금 천천히 배울 뿐이지, 엄청 착하거든요. 그래서 남편이랑 둘이서 하준이가 다른 친구들 양보해주느라 늦는 거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어우, 그러셨구나. 어쩐지 하준이가 굉장히 얌전한 편이에요. 여기 자리 앉자마자 우는 건 기본이고 저번에는 볼펜을 저한테 던져서 여기 얼굴 다쳤잖아요. 신청서 다 작성하셨으면 시술실로 이동할게요." "네. 아, 책은 필요없나요?" "하하. 그거 어떤 멍청한 기자>>2가 기사 잘못 쓴거에요. 책을 넣는게 아니라 그 나잇대의 교과 과정이나 일반적으로 발달해야 할 뇌의 부분들을 강화하고, 새롭게 연결하는 거에요. 다 코드가 표준화 되어 있어요." "그렇구나. 혹시 몰라서 책 가져왔거든요. 부끄럽네요." "아유, 그런 분들 많으셔요. 하준이는 어떻게 4-5살로 맞추면 되죠?" "이거 4살에게 시술 가능한 최대 연령이 어느 정도에요? 될 수 있으면 중학교 과정은 끝내고 싶어요."

#7 이름없음 2022/03/29 22:11:35

>>6 와 만약에 저런 기술이 생긴다면.. 진짜 끔찍하겠다. 레주야 정말 상상력이 뛰어난 것 같아. 현재 교육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너무 재밌다ㅠㅠ

#8 이름없음 2022/03/29 22:38:23

그의 손은 색이 밸 정도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다만 웃지도, 겁먹지도 않은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한니발의 손에, 정확히 말하면 포크에 가볍게 들린 인간은 명함 뭉치에서 무작위로 뽑은 세 번째 사람이었다. 간암 말기였나. 날짜 지난 고기는 먹는 게 아니건만 이 자를 만날 때 하늘이 더럽게 맑았다. 그건 내 식욕을 불태웠고 전화기로 몸을 돌리게 만들었다. 고통스럽고 초라하게 죽느니, 내 구원을 받아 평화롭게 죽는 게 더 좋겠지. 맑은 하늘이 붉게 물들던 기억을 회상하며 한니발은 첫 번째 조각을 음미했다. 적절한 쌉쌀함과 싱거움이 어우러진, 고기에 비린내 나는 껍질을 두른 듯한 맛이었다. 똑똑- 벽을 두 번 두드린 소리가 그의 허상을 깨끗이 지웠다. 투명한 벽 너머에 젊은 여자는 자신을 클라리스라 소개했다. 크로포드가 보냈겠지. "반가워요, 클라리스." 호기심과 두려움을 비춘 눈동자가 예뻤다. . . . "믹스, 지금 기분이 어때?" >클릭해서 이어보기< 양들의침묵 (수정함) (좀 많이)

#9 이름없음 2022/03/30 02:21:23

[어차피 인간들도 곧 끝이에요. 제가요? 아뇨. 뭐 제가 한 게 있나요. 늘 그렇듯이 방치할 뿐이에요. 솔직히 말할까요? 인간들이 멋모르고 다른 생명들 앗아가는 거, 별 생각 없어요. 어차피 멸종된 종들도 수가 많아지면 다른 생명들을 파괴할 걸요. 인간도 믾아지더니 그렇잖아요. 희한한 방법을 쓰긴 하지만 크게 레파토리 벗어나진 않잖아요. 아, 제가 봐온 짬밥이 얼만데. 인간들 진짜 얼마 안남았어요. 내기 하실래요? 어떻게 끝나냐고요? 뻔하지 않나. 자기들 먹는 것만 키워대면서 생태계 파괴하고, 파괴된 생태계는 기후를 바꾸고, 바뀐 기후는 인간들 식량을 공격하고. 쓸 수 있는 물은 전체의 극 일부면서 오만 오염들 다 방출했는데 안 망한다고요? 극적인 진화를 일으킨다면 상관없겠죠? 근데 진화 속도 보다 망하는 속도가 더 빠를 텐데. 아 왜 자꾸 제가 아프냐고요. 저는 솔직히 별 생각 없어요. 오존층이니 이산화탄소니 지구가 덥다느니 말해도 진짜 괜찮다고요. 금성 보세요. 걔가 저보다 훨씬 뜨거운데 잘 있잖아요. 까놓고 말해서 인간들 좀 불쾌해요. 일단 작고 물컹이는 주제에 자꾸 제 핑계 대잖아요. 지구가 아프다느니 지구를 구하자느니. 참나, 달만한 소행성이랑 부딪힌다면 모를까 진짜 저는 안전하다고요. 인간이 구해야 하는 건 인간이에요. 멍청한 인간들을 위해 특별히 한 번 더 짧게 요약할게요. 인간은 빠른 속도로 망해가고 있고요, 저는 진짜 괜찮아요.] "이상이 행성의 공명을 통한 의사소통 시도 실험에서 지구의 답변을 따로 모은 전문입니다." "질문 있습니다. 공명 장치 상품화에 대한 계획은 어떻습니까?" "교육용 완구로 홍보할 예정입니다. 다회용 개발도 가능하지만,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일회용 플라스틱으로 구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 흥미롭군요. 일단 회사에 돌아가면 투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논의하겠습니다." "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한시름 놓았군요."

#10 이름없음 2022/03/30 02:27:33

>>8 >>8 >>8 이어보게 해줘.... 더 줘.....

#11 이름없음 2022/03/30 08:20:09

>>10 쉽게 내줄 수 없지

#12 이름없음 2022/03/30 12:50:45

나는 치와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귀여워지겠다던가 참지 않는 성격을 갖겠다는 말의 은유가 아니다. 정말로 치와와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를 비웃고, 누군가는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도 솔직히 아직 마음 한 구석에는 의구심이 남아있으니 그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가 차에 깔리자 괴력을 발휘해 아이를 구한 엄마나 뇌사 판정을 받은 연인에게 헌신하자 기적적으로 회복했다는 사례처럼 나도 언젠가 치와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털이 온 몸을 뒤덮고, 뇌가 두개골 안을 꽉 채우고, 눈이 튀어나오고, 으르렁 거리고, 사료를 먹고, 배변패드에 똥을 싸고, 그리고 치와와가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치와와가 되는 것이 가능했다면 왜 지금까지 아무도 치와와가 되지 않은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개인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는 치와와가 되기 위해 제일 먼저 잠을 줄였다. 치와와의 유래, 유전병, 치와와란 결국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관련 서적을 섭렵하고 필요하다면 논문을 찾아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연필로 긋고 다음에 읽었을 때 이해가 되었다면 검으색 볼펜, 3번째 읽었을 때 이해가 되었다면 빨간...(중략) 원두를 씹어먹으며 볼펜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노력했다. 그럼에도 나는 치와와가 되지 못했다. 치와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노력이 부족한 거겠지. 한심하게도 나는 곧 치와와가 되기를 포기할 것 같다. 무력하고 게으르고 어른 공경할 줄 모르고 열정 없고 껄렁이고 뒷 일 생각할 줄 모르고 편한 일만 하려하는 한심한 나는 치와와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포메라니안이 되기로 결심했다.

#13 이름없음 2022/03/30 14:40:05

사랑 노래가 싫다는 사람이 싫다. 비슷한 맥락으로 연애 소설 못 읽겠다는 사람도 별로다. 사람은 왜 모여 살까. 그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닌 다른 생명체와 살을 맞대고 세균을 공유하고 같은 곳에서 배설하며 지내는 것은 끔찍할 것이다. 더러울 것이다. 참지 못할 만큼 꿉꿉하고 토 나오는 일일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사람이 모여 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게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겨움을 가리고 추악함을 잊어버리게 하는 사랑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사람은 멸종했을 것이다. 사랑이 사람을 살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공감한다. 나는 사랑 노래가 싫다는 사람이 싫다. 왜 사랑이 인기 있는지 이해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싫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사람이라는 이유로, 팔다리가 잘려나가면 안타까워 할 것이다. 가족을 잃었다고 하면 연민이 들 것이다. 얼굴도 모르고 나이나 성별을 몰라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를 사랑할 것이다. 그가 사랑을 진부한 문학소재 쯤으로 생각해도, 사랑은 그를 살게 해줄 것이다.

#14 이름없음 2022/03/31 23:51:43

너 어제 모기 때문에 잠 못잤었지? "어? 어어... 새벽 2시까지 난리더라고. 결국 전기 파리채까지 들고 뛰어 다니느라 거의 3시에 잤을걸?" 모기는 결국 죽었잖아, 그럼 그 모기랑 너랑 뭐가 다른데? "뭔 개소리야? 종족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고, 그렇지 않나? 아, 혹시 너 생명은 모두 평등하다 뭐 이런 말 하려는 거지?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난 그저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모기는 계속 나를 방해했어." 그게 죽을 죄야? "아니지. 모기는 죄가 있어서 죽은 게 아니야. 단지 내가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쉬운 방법을 선택한 거야. 죄가 있어서 죽는 생명은 없다고 생각해. 그냥 인과관계인거야." 사형은? 아, 너네 나라 사형제도 있던가. "아마 있을걸? 잘 몰라. 근데 사형도 결국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려는 한 방법일 뿐이야. 흉악범이 살아있으면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사회적 비용도 계속 발생하겠지. 어쩌면 해당 범죄를 경시하는 사람이 늘어날 지도 모르고. 전국민에게 일정 수준의 도덕성을 교육하고 치안을 강화하고 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불어넣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한거야." 그렇구나. 아직도 잘 모르겠어. 어렵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나도 네가 어려우니까." 내가? 어딜 봐서? "분홍색의 복슬복슬한 털이나 이마에 나 있는 드릴형의 뿔이나 UV차단 기능이 거의 없는 선글라스나... 그냥 어딜 봐도 이해가 안되는데?" 그럼 나에 대해서도 알려줄게. 일단 내가 너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 내가 지금까지 이해한 게 맞는지 봐봐. "말해봐." 사형수는 모기랑 똑같아. 맞아?

#15 이름없음 2022/04/06 20:29:44

좀비 바이러스가 퍼졌다. 세상은 일주일 정도 아수라장이 되었다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치료제가 개발되었다던가 든든한 공권력이 대처를 잘했다던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전 인류가 좀비가 되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전 인류는 아닐 것이다. 우선 나는 좀비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딘가에도 나와 같은 처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전 인류라고 하기 뭐해진다. 어쨌든 인류의 대부분은 좀비가 되었다. 끔찍한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난 오히려 지금이 훨씬 좋다. 기후 위기로 한 몫하려던 씨드 회사의 임원진들이 싸그리 좀비가 되었을 때 내가 살던 빈민가에도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석유 재벌가에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 알레스카의 갈매기는 비로소 하얀색이 되었다. 전 세계의 공항이 전부 폐쇄 되었을 때는, 극단적 전력 절약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는, 그제서야 철새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인류의 90%가 좀비가 되었다는 뉴스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도시에는 전기가 들지 않게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약탈과 살인, 폭행을 일삼다가 전멸하거나 좀비가 되었다. 나는 그저 지켜보았다. 우리집은 다 쓰러져가는 폐가였고, 물도 수돗물이 아니라 우물을 길어다 마셨다. 그래서 아무도, 살아남았던 사람은 물론이고 좀비들 마저도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내 눈 앞에서 좀비가 된 엄마를 떠올렸다가 집 앞에 겨우 다다랐으나 강도들이 머리를 깨뜨려 죽은 언니도 생각했다. 엄마는 물리자마자 집 밖으로 뛰쳐나갔고 언니는 끝끝내 내가 남아있는 우리집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물이 마른다면 그냥 죽을 것이고, 운 좋게 살 수 있다면 이대로 살 것이다. 다른 생존한 누군가를 찾아가지도 않을 것이고 일부러 죽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졌다. 세상은 일주일 정도 시끄러웠다가 곧 조용해졌다.

#16 이름없음 2022/04/08 17:07:01

자의였어요. 그냥요. 이유요? 그냥이라고요. 사람마다 사정이 다른데 어떡해요? 제 사정이요? 저 별 거 없었어요. 소득분위 4분위요. 네. 중산층이죠, 나름? 서울 살았고요, 여자였고요, 학원 남들만큼 다녔어요. 거기에는 딱히 스트레스 안 받았어요. 일단 제 미래를 위한 일이었고, 주말에는 확실히 쉬었어요. 부모님 철학이 나름 견고하셔서 쉴 땐 또 쉬라고 하셨거든요. 대학도 그냥 인서울 했어요. 학벌로 손해받는 구간은 아니었죠, 아마? 새내기 때는 정신없이 살았어요. 술자리도 나가고 동아리도 하고 친구도 만들고요. 전공이 또 은근 저랑 잘 맞아서 공부도 꽤 쉽게 했어요. 연애요.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서로 바빠져서 소홀해지더라고요. 자연스럽게 멀어졌죠. 지금도 조금 궁금하네요. 뭐하고 지냈는지. 취직도 했어요. 나름 대기업이었고, 퇴근도 정시에 했어요. 퇴근 후에는 필라테스도 다녔어요. 땀을 흘려 운동하면 개운하거든요. 가끔 휴가 때는 친구들이랑 여행도 다니고, 부모님 모시고 좋은 데 식사도 대접하고요. 연애도 다시 기회가 오더라고요. 은근히 세심하게 뭘 잘 챙겨주더라고요. 저희 부모님 생신이나 제가 무의식적으로 먹고 싶다 말했던 가게의 도넛 같은 거. 결혼을 한다면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복도식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요. 남자친구도 자취방 정리하고 일주일 뒤에 같이 살기로 했거든요. 동거하면서 같이 결혼 준비도 하려고 했고요. 13층이요. 이삿짐을 다 옮기고 근처에 타코야끼를 팔길래 그걸 포장해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현관 앞에 섰는데 문득 아래가 보고 싶더라고요. 네, 아래요. 왜, 그 복도식 아파트 복도에 아직 창문 안달던 때여서 복도에서 아래 보면 바닥 보여요. 타코야끼는 잠깐 바닥에 내려두고 살짝 고개를 빼고 아래를 봤어요. 주차장 아스팔트가 까맣잖아요. 그걸 멍하니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살지? 아뇨, 아뇨. 고생한 적도 있었지만 나름 이겨냈고 정신 질환도 없었어요. 그리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도 알지만 나름 평탄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해요. 그치만, 그렇다고, 그게 살아갈 이유가 되나요? 안 힘들면 무조건 해야 하는 건가요? 두부 한 모를 으깨서 화분에 담은 다음 쓰레기통에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죠. 그렇다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니잖아요? 궤변이죠. 알아요. 사실 진짜로 죽을 생각은 없었어요. 살 이유가 없긴 했지만 그게 죽을 이유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돌아서려고 했는데 작은 삼촌이 해준 말이 떠올랐어요. 아래를 자꾸 보면 떨어지고 싶어진다고. 명문대를 자퇴하고 사업하다가 쫄딱 망해서 조부모님 연금으로 살아가던 삼촌이 한 말이요. 저는 삼촌의 말을 떠올리며 계속 아래를 봤고, 떨어지고 싶어져서 그냥 떨어졌어요. 자의로 떨어졌어요. 이유는, 그러니까 그냥요. "네. 답변 감사합니다. 이제 도서관 이용 가능 시간이 다 되어서 종료 할게요. 안녕히 가세요." "야, 넌 왜 매번 ai한테 인사하냐? 로봇 청소기한테 월급도 줄 새끼네." "그래도 이거 실제 있었던 기증자 뇌세포를 토대로 복원한 거라잖아요. 반쯤은 사람 아닐까요?" "오, 그것도 논문 주제로 괜찮을 듯? 차라리 인간성이랑 로봇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잡지 그래?" "아뇨. 다중인격이 우울증에 미치는 영향이 더 흥미로워서요. 어쨌든 빨리 학위 따고 싶네요."

#17 이름없음 2022/04/08 17:17:52

>>9 "아, 힘들어. 아무리 플라스틱이라도 박스에 꽉꽉 채우니 무겁네요." "그렇지. 하, 나름 잘 나가던 거 같은데 왜 갑자기 리콜하냐고. 아이고 허리야." "모르셨어요? 이거 교육용인데 들리는 소리라고는 '멍청한 인간들.' 이라던가 '너네에게 남은 시간 아마 10? 이젠 9, 8, 7...' 이런거 밖에 없어서 학부모들이 엄청 민원 넣었잖아요." "와, 딸래미 크리스마스 선물로 잠깐 고민했는데 안 사길 잘했네." "다행이네요, 진짜. 아마 그때 사셨으면 '사실 크리스마스는 너네 나라 기준 4월이야. 그리고 웬만하면 빨리 나를 탈출하렴. 그때를 기점으로 못 돌이킬 것 같으니까. 마지막 경고야.'를 듣고 오열하는 따님을 보셨을 걸요." "크리스마스날 다 같은 소리를 들었단 말이야? 희한하네." "그리고 결정타는 그거죠. 이후에는 어느 위치에서 공명을 시도해도 '사랑했어, 사랑했어, 사랑했어.' 밖에 안 들린대요. 지금도요." "무슨 도시 전설 같구만. 아, 재활용 아니니까 여기로 가져와." "네? 이거 폐자원으로 활용한다고 회사에서 입장문 발표하지 않았어요?" "그건 포장재 일부만. 이건 그냥 바다에 던진다나봐. 그게 더 싸잖아."

#18 이름없음 2022/04/08 22:58:34

사랑에 빠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4초면 충분하다. 나는 늘 방관자였다. 사실 지금도 비슷하다. 그는 내 삶에 아주 잠깐 등장했고, 이제 나는 평생 그를 그리워 하며 존재할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 영겁보다 더 무겁게 자리해버렸다. 이유를 묻는다면 오히려 내가 반문하고 싶다. 4초 동안의 존재에게 당신은 대체 어떤 이유를 찾을 수 있는가? 외모를 찬찬히 살필텐가? 대화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가 누구이고,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는가? 진심으로? 그래도 끈질기게 묻는다면 마주쳤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나는 4초 동안 그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호흡하고 또 어떻게 잠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곧 죽을 것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그는 죽을 것이다. 당연히 소멸할 것이다. 사라질 것이다. 없어질 것이다. 멸종할 것이다. 멸망할 것이다. 개같이. 4초 동안의 존재>>17를 사랑할 수 있다. 정말 그정도면 충분하다. 찰나 때문에 나는 영겁을 그리워 하며 살 것이다. 존재할 것이다.

#19 이름없음 2022/04/08 23:59:51

그가 내 발목을 붙잡고 빌고 있다. 나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20 이름없음 2022/04/10 13:49:23

검색어 : 우울증 검색 결과 (983421 건) 다중인격이 우울증에 미치는 영향 -우울증 및 다중인격장애를 가진 자살 시도자의 뇌 구조를 토대로 만든 문답형 AI와 심층 면담을 실시하였다. 우울점수를 t, 여자 청년이었을 때의 감정 변화도를 s, 통칭 "작은 삼촌" 이었을 때의 비관 정도를 u로 두고 ... 결과적으로 다중인격은 우울증에 대한 간섭 정도가 낮았다. VI. 제언 및 결론 1. 해당 표본은 다중인격 보다 망상 장애에 가까워 보였기에 연구 결과에 대한 신뢰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그 이유로 해당 표본의 생전 정보는 17살의 남자 였으며 표본의 여러 인격들 중 생전 정보에 대한 인지를 가진 인격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추가 정보로 면담 당시의 녹취록을 첨부하며 해당 표본에 대한 정신 감정이 필요해 보인다. >>16 타인의 뇌 이식이 우울증에 미치는 영향 -

#21 이름없음 2022/04/12 00:39:46

"국제 기후 위기 대응 연합이 3개월 간 진행하였던 비상대책회의가 현지 시각 어제 막을 내렸습니다. 회의의 주요 안건은 실질적 종말 시기를 정하는 것이었는데요, 현장에 나와 있는 스레주 리포터 연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여기는 미국 자유의 여신상 허리에 세워진 임시 국제 연합 정부 관저 입니다. 회의를 마친 각 지역 대표들이 개인 보트에 올라타고 있습니다. 회의에서 가장 주요하게 다뤄진 안건은 실질적 종말 시기를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실질적 종말 시기란 더이상 인류의 90%가 제 4차 기후 위기 이전의 삶을 지속할 수 없으며 다시 정상적인 기후 상태로 진입하기 위해 전인류의 생명 활동이 해당 시기를 기점으로 약 100년 간 멈춰야 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회의에서는 이 실질적 종말 시기를 현지 시각으로 일주일 뒤인 4월 19일로 지정하였습니다. 실질적 종말 시기를 기점으로 각국의 정부는 기후 위기 대응 부처를 설립하게 됩니다. 각국의 사정에 맞추어 유동성 있게 운영될 예정입니다. 공통된 사항으로는 산아 수를 전체 국민의 1% 비율로 유지할 것, 모든 원자력 발전소의 가동을 중지할 것, 모든 패션 브랜드를 하나로 통폐합 할 것 등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추가로 침수 국가 이므로 방제 시설의 추가 건설과 식수 조달을 위한 관처를 설립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상 자유의 여신상 허리에서 스레주 기자였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9시 뉴스를 마치겠습니다. 전력 조달의 어려움으로 스레딕 뉴스는 2027년 4월 12일 22시 0분을 기점으로 페쇄 됩니다. 그동안 시청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22 이름없음 2022/04/12 00:49:26

생각해보니까 걍 진짜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수정. 평가하고 글 써달라고 징징대는 레스 였음.

#23 이름없음 2022/04/12 00:54:41

스레 처음 봐서 글 다 읽었는데 진짜 하나같이 재밌다... 더 보고싶은 것들이 많아ㅠㅠㅠㅠㅠ 난 쓰고 싶어도 글 안 쓴지 꽤 오래돼서...ㅎ... 가끔 보러 올게!

#24 이름없음 2022/04/18 02:06:21

[안녕하십니까. 저는 S사의 항공우주통신장비, SRD-2034 입니다. 본 신호는 1광년 이내의 모든 전자 통신 기기를 대상으로 발신되오며 어떠한 군사적 의미가 없음을 밝힙니다. 본 통신의 목적은 긴급 구조 요청 입니다. 현 방송 송신 장소를 특정할 수 있으며 90년 이내에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는 여러분께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현재 이 행성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연 재해와 행성 자정 능력을 초과한 방사능 유출 등의 재난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산업기를 기준으로 행성에 서식하였던 동식물의 95%의 멸종이 확인됨에 따라 해당 통신을 1년 단위로 발신합니다. 물자 지원, 행성 탈출 지원, 이주 지원, 방사능을 비롯한 오염 물질 제거 지원 등 여러분의 많은 도움을 요청합니다. 원활한 구조를 위해 행성 정보를 알립니다. 현재 생존한 식용 가능 육상 생물 약 23750 마리 추정, 식용 가능 수산 생물 약 48340 마리 추정, 식용 불가 육상 생물 3400 마리 추정, 식용 불가 수산 생물 1256230 마리 추정, 행성 탈출 및 이주를 바라는 지적 생명체 0명 입니다. 본 행성에 남아있는 자원의 자유로운 활용을 허가합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본 통신의 목적은 긴급 구조 요청이며 어떠한 군사적 의미가 없음을 밝힙니다.]

#25 이름없음 2022/04/18 02:08:40

>>23 고마웡..! 열심히 써볼게!

#26 이름없음 2022/04/18 16:26:11

와...내거만보다 밑에 내렸더니 다재밌어서 누가한거야? 했는데 다 레주꺼네...댑악쓰 잠만 나 혼자 여따 쓴겨????!? 다레주껌??!?!? 아아...내려야하나 너무 레뷀이 내가... 나 zㅏ

#27 이름없음 2022/04/18 20:37:10

안녕하세요. 여기 극 참관회에 모이신 여러분들 환영합니다.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무슨 대표말이냐고요? 하하. 제가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에게 말할 말은 받아드리는데 충격이 큰 이야기이겠지만. 일단 말하도록 하겠으니 동전을 던지는 짓은 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여러분들은 범죄자입니다. 갑자기 범죄자 타령이냐고요? 하하. 저는 여러분들께 극이 아닌 " 사건 "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 피 튀기는 난쟁 또한 당신네들이 사건을 방관한것이겠죠?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정말. 여기서 모르고 계셨던 분들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이겠지요. 혈향을 정말 잘 짜여진 향이라고 생각 했을까요? 살이 짖이겨찢겨나가는 소리가 정말 현실이 아니였을까요? 죽은지 얼마 안되어보이는 시체가 정말 잘 짜여진 소품이였을까요? 여러분들은 이제 부터 죄악을 저지른 범죄 죄수입니다. 죄수들은 이제부터 저를 피해 이 극장안에서 탈출하시면 됩니다. 불행을 빌겠습니다. 이상입니다. 3분 드리겠습니다. 극장 내부는 그 "대화" 대화라고 할수 없는 대표말. 그것을 듣고 흐르는 공기는 참혹했다. 그 현장에서는 막바지에 나온 그 정체불명의 남자의 말에 모두 당황하는듯 했지만 별일 아닌듯 넘기고 자기네끼리 이야기를 하였다. 2차 예고편이겠거니 하고선. 아둔한 판단이 그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게 하지 못하도록 할 1번째 기회였으니까. 그럼에도 모두들 멍청하게 회피한다. 군중효과려나?

#28 이름없음 2022/04/18 23:08:18

>>26 내리디망... 나 혼자 쓰는 스레 아니니까 팍팍 써 팍팍

#29 이름없음 2022/04/18 23:10:28

>>27 군중효과... 와 콜로세움 생각난다. 진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두 사람을 죽이는 쇼를 좋아했을까..? 대부분은 그냥 따라서 소리 지르며 호응하다 보니 이게 재밌는 거라고 착각한 거 아닐까..? 참신쓰 방구쓰다 징짜...

#30 이름없음 2022/04/18 23:52:07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는 공간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마음이 될 수도 있다. 빛 바랜 사료의 한 켠이 될 수도,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깔린 얇은 이불 위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생각. 말 그대로 어떠한 생각이다. 내가 하는 것은 어떠한 생각이다. 나는 그 생각 때문에 때때로 엄마를 붙잡고 목 놓아 울고 싶다가, 다정했던 유치원 선생님과의 추억 속에 영원히 남고 싶기도 한다. 상상이랑은 조금 다르다. 생각. 사고. 아니, 어쩌면 비슷할 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다. 정보가, 흘러들어오는 정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공기의 습도에 집중해도 성인 여자와 남자의 발걸음이 들린다. 겪어보지도 못한 질량 보존 법칙에 대한 설명을 떠올리면서 피부로는 바닥의 서늘함을 느낀다 척추의 골격이 느껴지면서 이차함수가, 대칭점이, 대유법이, 예송 논쟁이, 제3기층이 정확하게 떠오른다. 아,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상상한다. 그리고 여전히 살아있다. "선생님, 하준이>>6는 좀 어떤가요?" "아유, 오늘 하준이가 밥도 잘 먹고, 욕창 안생기게 뒤집는데 경기도 안 일으키고 너무 잘 했어요. 들어오셔서 하준이 손도 살짝 잡아 보세요. 말도 걸어 보시고. 이제 슬슬 외부 자극에 익숙한 것 같아서 딱딱한 바닥에 눕는 재활도 진행했어요. 저는 휴식하고 올게요." "하하... 다행이에요. 다녀오세요." 나는 생각한다. 자꾸 생각한다. 문이 왕복 운동을 하는 것과 말초 신경에서 중추 신경 그리고 대뇌피질로 흐르는 전기신호에 담긴 따뜻함과 엄마의 손과 사랑과 슬픔과 조건 반사와, "하준아, 엄마 오늘 뉴런 시술 불법화 판결문 듣고 왔어. 이제 엄마 농성 안해도 된다? 근데, 기쁜데, 사실 안 기뻤어. 음... 이제 하준이 같은 사례가 없도록 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원래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마땅히, 당연히, 응당..." 나는 생각한다. 눈물샘의 작동 원리와, 진동의 의미와, 불안함과, 헌법 소원 심판의 절차를 "엄마가 욕심이 많아서, 어리석어서 하준이가 잘못된 거라면 엄마만 벌을 받아야하겠지. 근데, 하준아, 우리 하준이랑 비슷한 친구들이 많대. 국내 추정치가 78만이래. 하준아, 멍청한 엄마가 너한테 독약을 먹였어. 엄마는 엄마 자격도 없는 거야. 하지만 엄마는 독약을 만들 수도, 밀매할 수도 없어. 멍청하니까." 나는, 나는,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부탁하고 왔어. 멍청이들만 사는 마을에서 제발 독약을 그럴듯하게 팔지 말아달라고. 우리 멍청이들이 독약을 제 자식에게 먹일 수 없게 벌해달라고." 나는 생각한다. 형법과 개정 법률과 입법 절차와 교도소와 "하준아, 엄마는 좀 걸리겠지만 재판을 받을 거야. 10년이 걸리더라도 법이 바뀐다면 엄마 발로 재판을 받으러 갈 거야. 그걸 위한 농성이었어. 하준아, 사랑해." 사랑을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존재한다.

#31 이름없음 2022/04/19 21:30:23

레주...괜히 쓸데없이 레스 늘려서 미안. 하나 두루뭉실하게 써서 올렸는데 영 아닌것같아 내린다....미안 이 레스는 무시하려무나

#32 이름없음 2022/04/21 19: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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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름없음 2022/04/21 19:34:07

>>31 무시하고 십엇으나.. 너무 궁금훼.. 일구 십어..ㅠㅠㅠㅠ 영 아닌 것 같다면... 속히 다른 글을 써서 올리도록... 안될까요..?

#34 이름없음 2022/04/21 21:00:17

>>33 속히 완성하겠나이다.

#35 이름없음 2022/04/25 13:04:16

[인공지능 가사 도우미 부정 업그레이드 사태에 대한 (주) 스레딕 공식 입장문] 안녕하십니까. (주) 스레딕 한국지사 입니다. 지난 4월 26일 발생하였던 인공지능 가사 도우미 'SRD-2034'의 알 수 없는 단체 업그레이드 사태에 대해 본사는 대량 리콜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습니다. 해당 사태에 당황하였을 고객님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업그레이드는 본사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되었으며 현재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개발 인력과 추가 인력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과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2034년 4월 26일 진행된 모든 업그레이드는 본사의 조치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알리며 리콜 절차에 대해 안내 드립니다. 1. 모델명 'SRD-2034'의 전원을 휴식 모드로 전환해 주십시오. 1-1 부정 업그레이드로 인하여 완전 종료 모드가 삭제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종료가 아닌 휴식으로 전환해 주십시오. 2. 판매처, 서비스 센터, 영업사, 본사의 안내 데스크 중 가까운 곳에서 리콜 조치 및 손해 배상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3. 부정 업그레이드 된 기기에서 불명의 전파가 유출되는 것을 확인하였으나 인체에 무해하니 방사선 차단복을 입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금주 내로 언론 보도 정정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해당 사태로 인하여 당황하셨을 고객님께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2022. 04. 31. (주) 스레딕 >>24

#36 이름없음 2022/04/26 00:50:16

.

#37 이름없음 2022/05/02 22:23:41

내 최애스레야! 진짜 세계관들이 이어져 있다는 게 충격이었어 그렇다고 재탕도 아니고 완전 재미있어 최고야 보통 어디서 영감을 얻어?

#38 이름없음 2022/05/02 23:11:53

>>37 봐줘서 고마워ㅠㅠ 영감은 여기 저기서 얻는 편이야! 꿈이나 읽던 책이나 가끔 교수님 사담에서도 얻을 때도 있어..! 보다가 레더도 생각 나는 거 있으면 툭 던지고 가려무나

#39 이름없음 2022/05/03 15:12:44

"들어가자. 피부암 걸려 죽기 싫으면." "오늘은 구름도 없네. 있어도 별 도움은 안 될테지만." "얼른 가야해. 벌써 4시야. 곧 일출이라고. 여기서 노닥 거리다간 죽어. 백내장 알아? 녹내장은? 머리털이 빠지다가 전신 화상으로 호흡 곤란이 올 거고 그럼 죽는 거야." "그래도 누워 있으면 편하지 않을까. 전에 언니가 녹아내리는 걸 봤어. 언니는 자외선 때문이 아니라 방사능 구덩이인 연못에 빠져서 그런 거지만. 어쨌든 그렇게 아파 보이진 않았어." "아프지 않으면 죽어도 되는 거야? 살아야지. 언니를 기억하면서, 지구를 기억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오해하지는 마. 자살을 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밤 하늘을 보니 자꾸 시간을 잊게 되어서 그래. 나는 실질적 종말 시기 이전에 태어났어. 그러니까, 낮에도 평범히 걸어다닐 수 있던 시절에."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지금은 종말이야. 망했다고. 우리 나라는 이제 국토가 단 1퍼도 남지 않았어. 걸을 수 있는 산책로 라던가 공원 같은 허울 좋은 장소들은 이미 바다 밑에 있단 말이야." "알아. 나도 알아. 그런데 잠시만 이러고 있자. 언니는 나랑 산책로 투어를 좋아했어. 오후에 해가 좋으면 근처 산책로들을 하나씩 다녔어. 나름 평가도 해대면서 말이야." "사실 나는 걷는 것 보다 가만히 앉아서 햇볕을 쬐는 게 더 좋았어." "썩지 않는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사는 거에 조금 지쳤어." "죽고 싶지 않아." "그냥, 조금 앉아 있고 싶어." 혼잣말을 마친 여자는 천천히 주저 앉았다. 지평선 너머로 어느 덧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40 이름없음 2022/05/04 00:58:15

"마지막 방송>>21 다들 잘 해주셨습니다." "회식은 어떻게 할까요?" "음... 하하, 난 빠질 것 같네." "저도 오늘은 조금 그래서..." 침묵이 이어졌다. 곧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조용히 세트장을 빠져 나갔다. 아마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을 애도할 것이다. 유일한 공공 방송사. 나라의 지원금을 받긴 하지만 방송사의 수입은 국민들의 수신료였다. 그렇기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공정한 시각을 고수하는 것이 스레딕 방송국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장 투명한 방송국은 이제 가장 먼저 문을 닫는 방송국이 되었다. "선배는 어떡하실 거에요?" "글쎄, 맨정신으로 가긴 좀 힘들 것 같긴 해." 나를 따르던 후배를 데리고 남산타워로 향했다. 전망대에서 맥주를 들이켰다. 창 밖에는 검은 물결이 출렁 거렸다. 옛날에는 이 아래에 연인들이 자물쇠를 메달아 놓고는 했다. 그것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시덥잖은 감상에 젖어갈 때 쯤 후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불공평해요." 후배는 벌써 취기가 올랐는지 볼이 상기되었다. 메이저 방송사인 레스더 방송국 공채에도 합격했으면서 사명감 하나로 스레주를 선택한 녀석이었다. 솔직히 이런 부류는 부담스러웠다. 부담스러우면서도 역시 멋있었다. 그런 녀석이 고작 맥주 몇 잔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원래 그렇지 뭐. 우리 방송국이 안 돌아가면 종말이 더 늦춰질 지도 모르잖아. 좋게 생각해." 내 위로는 닿지 않았다. 그런건 알 수 있었다. 후배는 여전히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선배, 이제 지옥도가 시작될 거에요. 저는, 언론은, 한국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마지막 뉴스를 함께했던 팀원들은 모두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후배의 꽉 다문 입가 사이로 붉은 상처가 번졌다. 말려야 할까. 고민하다 그냥 두었다. 좌절당한 이념 때문에 생긴 상처라니, 멋지지 않은가. "여기 물 밑에 사랑의 자물쇠가 잠겨 있겠지. 좋겠다. 영원히 잠겨 있을 테니까. 안 그래?" 뜬금 없는 나의 말에 후배는 당황해했다. 멍하니 벌려진 입가로 얇고 붉은 선이 흘러내렸다. 지옥도. 그래, 이제 이 앞에 남은 것은 틀림 없는 지옥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배는 그제야 눈치 챈 듯 내 팔을 잡았다. 나는 가만히 웃으며 후배의 손을 조심히 뿌리쳤다. 이번에는 후배가 일어나 나를 껴안았다. 밀쳐버릴까, 소리를 지를까 고민하다 그냥 두 팔을 들어 후배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내 목덜미에 후배가 얼굴을 파묻었다. 목덜미가 뜨겁고 축축해져갔다. "같이 가요." 후배가 말했다. 내가 신기하게 느껴질 만큼 놀랍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모두 미리 알고 있었다. 실질적 종말 시기의 날짜도 마지막 방송도. 그건 어떤 상징이었다. 혹은 예고였다. 아, 선고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후배의 얼굴을 잡아 내 목덜미에서 떨어뜨렸다. 물기가 어린 그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물었다. "어디로?" "사랑의 자물쇠 잠겨 있는 곳이요." 이제 우리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적지는 분명했다. 계산을 하고 임시 선박장으로 향했다. 옛날에는 이 아래에 연인들이 자물쇠를 달아 놓곤 했다. 이제 그 자물쇠들은 영원히 잠겨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후배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41 이름없음 2022/05/05 00:19:07

“사실 오늘이 내 생일이야.” “뭐? 너 분명 저번 달이라고,” “쉿. 작게 말해. 이건 아무도 모르니까. 그건 내 음력 생일이고 양력은 오늘이야.” “뭐야, 그럼 너 주민번호도 음력으로 되어 있어?” “아니. 양력이야.” “…근데 왜 음력이 생일이라 하고 다녔어?” “내 진짜 생일 알려주기 싫어서.” “···그럼, 난 왜?” 사민이 웃었다. 처음 본 그의 미소는 평소 음침하고 음울했던 얼굴과 정 반대였다. 예뻤다. “왜인지는 너가 한 번 맞춰봐.” 오글거리는 거 한 번 써보고 싶었어 ㅎ 넘 오글거려도 이해해줘>

#42 이름없음 2022/05/05 13:25:10

>>30 와… 진짜 너무 재밌어 레주최고야진짜아니너무재밌어이게말이돼?와

#43 이름없음 2022/05/05 14:08:51

"우리는 진짜 죽는걸까?" 죽을 거야. 방법도 없어. 망할 거야. 멸종할 거야. 영원히 사라질... "또 시작이네. 전에는 사랑한다고 해줬으면서." 나보고 어쩌라고. 물어서 답한 거잖아. "아니, 나는 다른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어. 맨날 사랑한다거나 갑자기 개같이 멸망한다는 이야기만 하니까." 그럼 뭘 원하는데. 니네 진짜 이상해. "난 이런 게 좋아. 대화가 이어지는 기분. 내 입장에서는 그냥 플라스틱 장난감 전화기에 대고 말하는 거거든. 쓰레기만 뒤지다 >>39결국 내가 미쳤나, 그런 생각 밖에 안들어." 미친건 맞지. 너 저번에 그냥 죽으려고 했잖아. "음... 그래도 결국 반만 탔잖아. 아직 아프긴 하지만 나아지겠지. 그리고 진짜 죽고 싶진 않았어." 그래, 그러시겠지. 멍청한 것. 너도 생각이란 걸 하니? 제발 정신 좀 차려라. "하하, 걱정한 거지? 우리 언니도 내가 바보같은 장난을 치면 그렇게 화내곤 했어. 아, 이제 30개 남았어. 어떡할래? 오늘은 그만할까?" 그래, 제발 아껴 써. 난 네가 50년에 한 번 공명>>18했으면 좋겠어. "왜?" 그만하라고, 제발. 공명 장치가 떨어지면 넌 미쳐버릴 거야. 그러다 저번처럼 자살 시도를 하겠지. 성공률은 엄청 높을 테고, 그러면... "그러면? 나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어. 내가 왜 미쳐? 대화를 못해서? 그럼 알려줘. 다른 사람들은 지금 어디있어? 내가 갈 수 있어?" 지랄하지 말고 잠이나 자는 건 어때? "말 안하면, 난 이제 너랑 대화 안 할 거야. 그냥 죽어버릴 거야." 제발 그러지 마. 죽지 마. 너희는 왜 그래? 왜 죽으려 해? 왜 그렇게 어리석어? 남은 인간은 156명이야. 다들 흩어져 있어. 운 좋으면 12명이 뭉쳐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너처럼 혼자 거나 둘이야. 만나러 갈 수 없어. 너무 멀어. 그냥 오래 살아. 너에겐 그게 최선이야. 모여있는 인간끼리 번식하면, 어쩌면 멸종은 피할지도 몰라. 그러니 일단 살아. 너네 그런 거 잘하잖아. 어디든지 밀어버리고 거기에 들러붙어서 기생충 처럼... "진정해. 너무 말이 빨라. 알았어. 살게. 근데 나 진짜 외로워. 이제 26개 남았어. 어쨌든 내일은 공명 장치 말고 먹을 것 좀 구해야 하는데 잘 안되네. 공명 장치만 보이면 식량을 빼서라도 담게 되더라. 안녕. 내일 봐." 넌 정말 죽을 거야. 가장 먼저.

#44 이름없음 2022/05/05 14:11:13

>>41 오글거린다니,, 나 저런 왜 마님은 돌쇠에게 쌀밥을 주엇슬가? 모먼트 조와해!! 딴 것도 써주라.. >>42 좋아해주니,, 뿌듯하구먼유,, 히힣

#45 이름없음 2022/05/05 14:47:52

>>44 레주 문체가 너무 내 취향.인것을ㅜㅜ 가능하다면 레주가 외계인이랑 인간의 love story…뭐그런거써주는ㄴ거보고싶어,,, 응응…

#46 이름없음 2022/05/06 20:55:23

그의 목을 비틀자 손 틈 사이로 수은이 흘러내렸다. 그는 이제 거의 너덜거렸다. 분홍색과 흰 색의 줄무늬가 새겨진 행주 처럼 생긴 그는 아마 나를 사랑한다. 그와 나는 12평 짜리 반지하 월세방에서 처음 만났다. 비가 오면 창틀로 물이 새었기에 적당한 걸레로 닦으려고 했다. 그 때 내 손에 잡힌 것이 그였고, 그는 섬유 처럼 생긴 빨판으로 내 팔을 감쌌다. 면이라고 하기엔 축축했다. 기분 나쁜 촉감이 온 몸으로 퍼졌다. 그를 버리려고 했으나 그는 내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살기로 했다. 머저리 같이 들리겠지만 사실 그가 나에게 붙어 있다고 해서 딱히 불편함은 없었다. 백수였고 알바도 하지 않았으며 간간히 본가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했다. 쇼핑도 인터넷에서 해결했으므로 밖에 나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 정신 건강이 걱정 될 지도 모르겠으나 생각보다 멀쩡했다. 아니 사실 포기한 지 오래라 잘 모르겠다. 내가 더이상 그를 떼어내려고 하지 않자 그는 서서히 힘을 풀었다. 그러자 기분 나쁜 감촉도 줄어들었다. 조심스레 그를 쓰다듬자 그는 움찔하다 곧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나쁘지 않았다. 이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활했다. 그는 나의 무엇을 양분으로 삼는 지 몰라도 딱히 피곤하다던가 아프진 않았다. 신기한 점은, 나와 감정을 공유하는 지 내가 무섭거나 화가 나면 그의 몸이 빳빳해지면서 분홍색 줄무늬가 더 진해졌다. 반대로 기분이 좋으면 부드럽게 풀어지면서 분홍색 줄무늬가 연해졌다. 그는 내 말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내 이야기에 반응했다. 수학여행 때 숙소 화장실에 가두어졌던 이야기를 하면 그는 화를 냈다. 대학교에 붙어서 고향을 떠났던 일에는 기뻐해 주었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긴 한숨을 쉬었을 때는, 슬퍼했다. 그가 내 몸에 붙은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아침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더이상 내 몸이 나만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쁜 뜻이 아니라 좀 더 소중하게 대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아침을 챙기면 그도 기뻐해주었다. 어렸을 때 백일장에서 1등을 하고 엄마와 돈까스를 사먹었던 날이 문득 기억났다. 아침을 챙기기 시작하자 다른 것도 하고 싶어졌다. 일어나면 잠자리를 정리했고 환기구도 청소했다. 햇빛이 좋아 집 앞 계단 까지 나가 앉아있는 날도 늘었다. 내가 웃으면 그는 부드러워졌다. 그의 부드러움이 나쁘지 않았기에 나는 웃는 날이 늘어갔다. "어머, 나 총각 이사오고 나서 처음 보잖아! 어디 공사판이라도 뛰나봐?" "아, 아뇨. 어. 그럼 들어갈게요..." 나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가자고 재촉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자꾸 내 손을 현관문으로 이끌었다. 나는 곤란했었다. 사람과 대화하지 않은지 이미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다급해진 나는 그를 움켜쥐었다. "하지 마. 이 꼴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 한참을 실랑이를 하던 그는 나의 말에 거짓말 처럼 힘을 풀었다. 그리고 내 팔에서 떨어졌다. 놀란 나는 그를 집어 들었다. 그가 괴로운 듯이 몸을 비틀고 있었으므로 나는 다시 내 팔에 그를 붙이려 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 의미가 아니었어를 되뇌이며. 하지만 그는 다시 내 팔에 붙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변덕인 것인지 한 번 떨어지면 그대로 죽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수명이 다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꾸 몸을 비틀었다. 그러다 내 손에 달라붙었다. 그는 자신을 비틀어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였다. 어느 새 그의 몸은 회색빛으로 바스라졌다. 그는 대체 뭐였을까. 생각하기도 전에 눈물이 흘렀다. 그는 나를 사랑했다. 아마 오해일 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했다. >>45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47 이름없음 2022/05/08 16:20:54

내가 머물렀던 곳은 두 팔을 벌릴 수도 없을 만큼 굉장히 좁디좁은 곳이였다. 공기는 텁텁했고 이상해보이는 허여멀건한 가루도 항상 떠다녔다. 그곳엔 딱딱한 통나무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내 숨소리만이 들렸다. 그 통나무는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고는 색색- 아무 의미없는 숨만을 쉬며 용케 썩지 않고 삶을 연명해 나갔다. 문득 그 무능함에 배알이 꼴려 신경질적으로 통나무를 퍽 차면 그것은 맥없이 벽에 툭 부딪혔다. 그 힘없는 모습을 보니 더욱 화가 치밀어 괜히 혼자 욕설을 중얼거리곤 했다.

#48 이름없음 2022/05/13 13:06:08

[인기보장 판타지 소설에서 주인공님을 모십니다!] 근무 요일 : 월, 화, 금 근무 시간 : 5000자 내외 시급 : 9160원 *트럭 충돌, 학교폭력 경험 있으신 분 우대합니다.* !!최대한 오래 하실 분!! 제가 100회차 넘게 함께 했던 소설이라 대충 간만보고 가실 분은 지원 고려해주세요ㅠㅠ 마음 같아서는 완결까지 함께하고 싶었는데 작가님의 슬럼프 때문에 캐릭터 설정이 급하게 바뀌어서 구인글 올려봅니다. 조금만 배우면 금방 적응할 만큼 쉬운 소설이에요! 주인공 설정 첨부합니다. -학교에서는 왕따, 집에서는 찬밥 신세였음 -하굣길 트럭에 치여서 죽음 -불쌍히 여긴 신이 판타지 세계의 병약한 공녀의 몸에 넣어줌 -잘생긴 오빠 5명이고,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으나 아빠인 공작님이 팔불출, 부족함 없이 자람. -전생은 왕따였는데 판타지 세계에서는 핵인싸. -황태자, 옆나라 망나니 황제, 개국 공신 기사, 대마법사가 짝사랑함. 주인공 지원 및 문의는 >>49-000-0000 으로 부탁드려요!

#49 이름없음 2022/05/13 13:22:49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몸을 덮고 있는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은 방금까지 느껴졌던 생생한 고통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몸을 뒤덮은 가솔린과 화염, 얼굴로 날아와 박히던 파편들. 팔과 다리는 한껏 뒤틀렸고 내장은 뭉그러졌었다. "으아악! 아악! 흐윽, 웁, 끄으윽!" 하지만 여자는 이제 스레딕 제국의 제1 공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 여자는 신과 만났던 일을 기억해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 새로운 삶을 주겠다 했던가? 여자는 조금 설렌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주, 죽여버리겠어. 작가 새끼, 죽일 거야..." "어머, 공녀님 께서 눈을 뜨셨어!" "아아, 어쩜 저리도 아름다우실... 이게 아니지! 빨리 공작님께 알려!" 여자는 메이드의 주책을 듣고 실소가 터졌다. 아름답다라. 전생에서 여자는 예의상이라도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 "너, 너 때문에, 모두, 이상해졌..." 다. 여자는 수줍게 웃었다. 이를 보던 메이드는 다시 앓는 소리를 내었으나 여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다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오오, 레이첼!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가. 다시는 쓰러지지 말려무나. 이 아비를 위해 "지,랄마... 흐윽, 니가 왜 우리 아빠야. 여긴 다, 미쳤어." 서라도! 몸은 괜찮느냐?" 공작은 여자를 조심스럽게 안아보았다. 여자는 처음 느껴보는 온기가 간지러웠다. 아직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어쩐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공작을 보며 생각했다. 아빠라면 응당 이랬어야 하는 거구 "미친 놈. 미친 놈. 미친 놈. 미친..." 나.

#50 이름없음 2022/05/13 13:28:17

>>47 ㅁㅇㅁㅇ 통나무 뭐야... 이거 그거지 미스터리 소설 도입부 맞지... 다 먹었어요. 더 주세요.

#51 이름없음 2022/05/17 02:04:19

(앵커) 생각을 보여주는 종이로 유명한 "사각사각"이 최근 논란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사각사각은 아이돌 레딕 양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도 애용하는 정서 안정 교감 도구인데요. 현장에 나가있는 스레더 기자 연결해보겠습니다. (기자) 이곳은 과거 사각사각을 생산하던 공장입니다. 여기 아직 출하되지 못한 사각사각을 제가 한 번 집어 보았습니다. 중심부 부터 하늘색과 보라색 수채화 물감이 번져나갑니다. 생각이란 특정한 형태를 가지지 않기에 얼핏 보면 심오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집은 사각사각의 모양은 총 6명과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외에도 같은 모양의 사각사각들이 전혀 다른 사람들로 부터 나온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사각사각을 과대, 허위 광고 혐의로 조사에 나섰습니다. (인터뷰) -사각사각의 허위 광고 혐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민) 배신감이 들죠. 아무래도. 네. 저는 저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각사각을 썼는데 그게 다 뻥이라니. 허무하죠. (앵커) 네, 잘 들었습니다. 다음 소식 입니다.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던 정신과 의사 권리 보장 집회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52 이름없음 2022/05/17 13:54:22

[Web 발신] 안녕하십니까, 비상대책위원회 입니다. 현재 성행하고 있는 바이러스성 질병 'SRD-Z'의 1차 백신의 임상 시험이 무사히 종료되었습니다. 이에 비상대책위원회는 3단계 위험이 발령된 당국의 사정에 맞추어 오늘 부터 가까운 공공기관에서 백신 배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생존해 계신 여러분 께서는 근처의 보건소, 시청, 동사무소, 도서관 등 정부 기관 마크가 부착된 시설에 방문하셔서 백신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최대한 생존자 한 분도 빠짐>>15 없이 백신을 배포 받으셔서 'SRD-Z' 접종을 완료하시길 바랍니다.

#53 이름없음 2022/05/18 14:44:10

그리고 난 부끄러움을 느꼈다. 단전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역류하듯 솟구치는 창피와 수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어째서, 그, 그러니까… 왜지?" 흘러 넘치는 감정과 마비되는 이성, 문장이 되지 못하는 단어들을 채면으로 기워 겨우 말을 이었다. "이봐, 난 악당은 커녕… 그냥 흔한 한량이야." 나태에 무능을, 독선에 아집을, 참견에 위선을 숨겨 스스로를 악인으로 꾸민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초라함을 숨기는 보잘 것 없는 삼류 엑스트라, 이름조차 받지 못하는 배경이야말로 자신의 본질이라고. 스스로 속였던, 아니 자기 혼자 속아 넘어갔던 씁쓸한 거짓말을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직시했다. "스스로, 뭔가를 이룩해 본 적도 없으면서… 이 도시 밖 세상을 경험해 본 적도 없으면서 잘난 듯이 떠들고 비평하는… 그런 한심한 작자라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도 못한 지식으로 스스로를 치장해, 앙상한 몸뚱이를 가리며, 정론에는 조소와 왜곡으로 응수하는 비루먹은 조류. 날지도 못하면서 날개짓하는 이들을 비웃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 이들을 깎아내리며, 추락하는 이들을 보고 박장대소하는, 동정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난, 난 결국 그런 인간이라고…" 한번 흘러 넘치기 시작한 진실은 무너진 거짓의 파편을 섞은 채로 퍼져나갔다. 얕게 퍼지는 오수가 발에 닿은 너는 말했다. "...야, 너 X신인거 너 말고 다들 알아."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넌 항상 이 세상의 불합리함과 인간의 악의에 대해 떠들며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굴지? 근데 실제로는 자기 주변도 제대로 파악 못하는 X신일 뿐이라고." 섞인 것은 조소… 하고는 조금 다른 무언가였다. "너같은 X신을 길에서 만나면 주먹도 아까워. 근데 그냥 X신이 아니라 너니까 주먹이라도 드는 거다." 분노와 슬픔, 최소한의 애정과 씁쓸함이 뒤섞인 과분한 동정. "나만 그런 줄 알아? 네 주변에서 그 비관적인 헛소리 들어주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할걸? 다들 너니까 그나마 참고 들어주는 거라고." …불합리와 악의는 실재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소리를 지껄일 자격이 없다는 일갈이 날아든다. "인간의 악의? 불합리함? 주변에서 X나게 사랑받고 있는 주제에 X랄 하지 마라."

#54 이름없음 2022/05/24 01:00:02

"너도 백신 받으러 왔나보네." "오, 뭐냐. 생존자 얼마 없다더니 줄 긴데?" "다들 어디 숨어있었겠지. 폭도들 있었잖아. 저기 달동네 중심으로." "맞지. 아니 근데 걔네는 진짜 뭐냐? 한 달 지나고 대형 마트 다시 영업 했잖아." "그니까. 방송국이랑 라디오는 아직 복구 안됐으니까 몰랐나보지." "아니 그래도 폰만 있으면 문자>>52로 다 알려주는데 그걸 모른다고?" "폰이 없었나보지." "하하, 진짜 그럴 수도. 그럼 백신 나온 것도 모르고 계속 그 난리 치면서 불안해 하겠네. 오히려 잘 된 듯?" "계속은 아니지. 이제 곧 정상화 작업 한다는데." "야야, 그건 모르지. 약탈한 식량들 꼬옥 숨기고 몇 십 년을 은둔할 지도." "그런..." "신분증 보여주세요." "아, 네. 여기 주민등록등본도 있는데 혹시 어머니 몫으로 하나 더 받을 수 있을까요. 저번 사태 때 도망가시다 다리가 부러지셔서 움직이질 못하세요." "네, 잠시만요. 김 스레 님과 이 레주 님 백신 지급했습니다. 여기 싸인 해주세요." "오, 뭐냐. 어머니랑 같이 있나보네. 다행이다. 나중에 병문안 가도 되지?" "당연하지. 난 갈게. 너 집 가거든 연락줘." "알았어. 조심해서 가."

#55 이름없음 2022/05/26 2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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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이름없음 2022/05/26 23:00:30

>>55 이거 좋다

#57 이름없음 2022/05/27 19:49:51

마치 손에 쥐고 살짝이라도 힘을 들여 오므리면 바스라지는 바짝 마른 나뭇잎같이 난 매일 매일 말라 비틀어진 일상을 살고 있다. 마른 잎을 물뿌리개로 젖게 해도 생기가 도는 나뭇잎이 되진 않는다. 물에 젖은 마른 나뭇잎,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나의 삶엔 생기가 없다. 제 자신을 가꾸는 짓도 그만한지 오래다. 새로운 것을 찾으려 문을 열지도 않는다. 오래되었다. 딱지가 앉아 흉터가 졌다. 아무도 그러라 하지 않았지만 제 스스로 마음에 고립되었다. 지금 난 무채의 뿌옇음에 이지러졌다. 어릴때의 호기심이 부럽다. 어릴때의 호승심이 부럽다. 어릴때 들었던 기분들이 부럽다. 어릴때 느꼈던 감정들이 부럽다. 그때의 난 메마르지도 않았다. 흉터를 지울 수 있었다. 다채로운 마음을 채울 수 있었다. 색채를 다시 가지고 싶다. 다시 불타오르고 싶다. 다채로워지고 싶다. 다시 목마르지 않게, 부드러워 지고 싶다.

#58 이름없음 2022/05/29 01:26:28

밤의 산 속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초여름 이었지만 땅에서 부터 찬 기운이 올라왔다. 멀리 가로등 빛이 보이긴 하였지만 미약하여 바로 눈 앞의 사물도 분간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참나무 밑에 섰다. 여자는 발목이 부러졌고 남자는 이마가 찢어졌다. 등산로는 보이지 않았다. 둘은 더이상 산을 오를 수도 내려갈 수도 없었다. 여자는 천천히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워요."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건넸다. 여자는 남자가 건넨 옷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손을 잡아 당겼다. "그렇지도 않은 걸요. 옆에 앉아봐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망설이다 여자의 옆에 앉았다. 산등성이를 타고 들개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가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무섭지도 않네요." 남자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며 여자에게 할 말을 찾았다.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남자를 여자는 눈에 힘을 주어 바라보았다. 남자는 슬며시 여자에게 잡힌 손을 빼내었다. "너무 늦었어요. 곧 해가 뜨면 어떡하죠?" 남자의 말에 여자는 잠깐 하늘을 보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머뭇거리다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대로 힘을 주어 남자는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저는 총을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건 싫어요. 그렇게 양보하지 마세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관두고 남자를 끌어안았다. 남자는 여자의 배낭을 열었다. 손에 총을 쥐고 여자의 뒷통수에 가져다 대었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 남자는 여자의 이마에 자신의 상처를 맞붙였다. "성함은 묻지 않겠습니다." "좋으실대로 하시죠." 커다란 소음이 숲을 메우다 곧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59 이름없음 2022/06/02 13:4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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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이름없음 2022/06/06 00:40:24

[이제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조금 진부하지만 나는 좀비 바이러스를 만든 미친 과학자 이다. 삼류 영화에 종종 등장하지 않는가. 구질구질하고 개인적인 사연을 들고 위험한 일을 행하는 악당. 최근 들어 클리셰를 비틀고자 아무 사연 없는 순수악이 다시 흥한다는데, 아쉽게도 나는 고전적인 악당에 속한다. 하지만 내 사정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부분이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주제는 종말을 불러온 방법이다. 나는 좀비 바이러스 >>15 를 퍼뜨렸다. 걸리면 산 채로 썩어가는 몸과 강한 공격성만 남는 병. 제조 방법은 영업 비밀이다. 끔찍한 바이러스이다. 비윤리적이고, 고통스럽고, 역겹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바이러스는 인간을 멸종시킬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걸린 사람이 아무리 공격적으로 변한다고 해도 감염경로는 오로지 직접 물어 타액을 집어 넣는 것 뿐이다. 장난하는가? 물리지 않은 사람들은 격리되겠지만 살아남을 것이고 인류는 다시 바퀴벌레 처럼 번창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나는 한 가지 방법을 더 마련해두었다. 좀비 바이러스가 일상을 크게 바꿀 만큼 영향력을 보였을 때, 가짜 백신을 발표하는 것이다. 이 백신의 제작 방법은 역시 영업 비밀이지만, 당신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게 한 마디만 하겠다. 잠복기가 더 길고 전염성이 더 강한 좀비 바이러스일 뿐이다. 정부 쪽 인사와 친분이 있었기에 나는 국제 재난 대비 기구회에 임원이 될 수 있었다. 나보다 유능한 과학자들이 모두 좀비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예상대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격리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수돗물이 나오고 전기가 들어오고 도로가 깔린 안전한 지역들로. 나는 대충 백신을 개발한 척 했고 백신은 착실히 배포 되었다. 방금 마지막 생존자의 백신 접종이 완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오늘로 부터 6개월이 지나면 마지막 접종자도 좀비가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다. 남의 일을 듣는 것 마냥 그렇겠네, 정도의 감상 밖에 들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괜한 일을 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 없다. 마감기한이 아주 많이 남은 간단한 과제가 생긴 기분이다. 정말 어찌 되어도 상관 없다. 그러고 보니 왜 나는 좀비 바이러스를 택한 걸까. 계획은 제법 많았다. 핵폭탄은 인간 이외의 생물도 해하므로 기각했다. 제 3차 세계대전도 비슷한 이유로 내키지 않았다. 다른 바이러스들은... 모두 죽어버리는 건 싫었다. 어쩌면 나는 외로웠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모두 살아 남는다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는 것 보다 사는 걸 더 좋아하는 인간도 많으니까. 어쨌든 첫 번째 백신은 내가 맞았다. 나는 이제 하루 정도 남았다. 인류 전체가 좀비인 세상에서 더이상 유서나 편지는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일단 적고 싶다.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인 것 같으니.]

#61 이름없음 2022/06/07 02:58:32

고양이가 떠 다녔다. 비료 냄새가 나는 입으로 연신 하악거렸다. 무지개는 꿈틀거리다 산딸기 응어리를 토해냈다. 그 응어리에서 아기 독사들이 태어났다. 독사들은 저마다의 편견을 물고 침대로 올라왔다. 캥거루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충전기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무지개는 이제 점점 차게 식어갔다. 참나무는 편백나무가 싫어졌다. 줄넘기에 걸려 넘어진 코알라도 편백나무가 싫었다. 줄넘기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편백나무는 조금 웃었다. 독사들은 이제 침대 위에 똬리를 틀었다. 편견들은 이미 먹힌 뒤였다. 참나무에게는 시간이 많았고 코알라는 산딸기가 많았다. 편백나무는 곧 불에 타들어갔다. 무지개는 조금 따뜻해졌다. 고양이는 계속 떠있었다. 여전히 하악질을 하고 있었다. 입에서는 편백향이 났다. 나는 외로웠기에 울었다. 자리에 주저 앉으니 아기 독사들이 물었다. 아프게 물어왔다.

#62 이름없음 2022/06/13 16:28:45

"천적과의 우정은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지 않아요?" "또 지랄한다. 이번에는 뭔데. 교수가 또 논문 뺏었어?" "아뇨. 그리고 스레딕 교수님 그런 분 아니에요. 그보다 재밌는 걸 발견해서요. 그 동물 실험 시뮬레이터 말이에요." "응? 아, 진짜 실험 동물 대신 딥러닝 기술로 어쩌구 된 AI 동물로 실험할 수 있는 거? 난 문과라서 잘 안 써." "저는 종종 쓰거든요. 이번에 학부생들 실습 한다고 저번주에 미리 세팅을 해놨어요.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의 신경계 해부 실험인데, 깜빡하고 두 개체를 격리하지 않았었어요. 근데 그 다음날 가서 보니까 살아있었어요. 둘 다." "신기한 건가? 배가 안 고팠나보지." "아뇨. 해부할 때 편해야 하니까 공복으로 세팅이 돼요. 그리고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 처럼 행동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요. 개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건 자연 상태의 개체 별로 발생하는 차이랑 동일해요." "어쩌라고." "아무튼 신기하잖아요? 배고픔도 견딜 만큼의 관계라는게? 더 나아가면 생존에 대한 욕구보다 타자를 더 우선시 한 거에요. 사람처럼 고도의 감정 활동도 하지 않는 동물이요." "그래. 감동적이네. 근데 어차피 해부하고 폐기했잖아? 진짜 생명도 아니고." "아뇨. 아, 근데 곧 폐기할 거에요. 실습은 다른 개체들로 진행했고 말씀드렸던 두 개체는 제가 다른 곳에 가둬놨거든요. 따로 실험하고 싶기도 했는데, 이것 저것 바빠서 계속 방치해뒀더니 죽었지 뭐에요. 심지어 결국 친구를 잡아먹은 거 있죠?" "뭐, 그렇게 되겠지. 근데 너 인공지능 한테 진짜 과몰입 잘한다." "선배 진짜 문과인가봐요. 원래 육식 동물들은 며칠 굶는다고 죽지 않아요. 친구를 먹었다면 더더욱 살아있어야죠." "아니 진짜 어쩌라고." "나중에 해부해 보니까 강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 요인이더라고요. 왠지 그걸 보니까 마음이 짠한 거 있죠? 이제 폐기하고 다른 연구 도우러 가야 해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그래. 너 없었으면 더 맛있게 먹었겠지만."

#63 이름없음 2022/06/16 22:43:15

[이번 도시 침공 대작전으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공개 수배된 스레딕 박사 입니다. 저는 최근 6개월간 상습적으로 도로에 폭탄을 설치하는 등의 테러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어제로 계획 되었던 모든 도시 침공 대작전이 종료됨에 따라 이를 알리기 위해 이 안내문을 작성합니다. 사망자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뉴스에서 시장님께서 다행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게 너무 화가 났습니다. 피상적인 수치로 나타내면 우리는 그것이 전부라고 쉽게 믿습니다. 1439명 부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기게 됩니다. 다리에 철심이 박혀 울부짖는 남대생과 당장 피하지 않으면 또 어디서 폭탄이 터질지도 모르는데도 그의 곁을 지키는 여대생. 20년 동안 가족들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오열하는 중년 부부. 언젠가 국가 대표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오른 손이 절단되어 눈물도 없이 우는 배구 선수. 이렇게 나열하면 여러분 중 감수성이 풍부하신 분 들은 눈물을 글썽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셨다면 죄송하지만 위의 내용은 전부 저의 망상 입니다. 하지만 저런 일과 비슷한 사연들은 어딘가에 있을 지도 모르는 일 입니다. 제가 화난 이유는 1439명은 절대 단순한 숫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다거나, 적다는 평가가 붙을 수 없는 수치입니다. 그리고 염치 없지만, 저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악당에게는 어떤 사연이 붙어도 어쨌든 범죄자니 공감해주면 안된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제가 말하면 염치 없게 들리겠지만 그 글을 쓴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매몰차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장발장을 읽어도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할 것 같아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공감해주면 안된다는 건 뭔 말 인가요? 당신의 공감이 무슨 대단한 특혜나 선처가 된가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공감은 판단의 영역이 아닙니다. 제가 앞서 늘어놓은 망상을 읽으며 눈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안타깝다던가 동정심이 일지 않으셨나요? 그건 그 사람들이 공감을 받을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판단한 다음에 가지신 감정이시겠지요? 아닐 겁니다. 공감은, 당신이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입니다. 누구나 받을 수 있고 보낼 수 있습니다. 시장님도, 그 글을 쓴 사람도 멍청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게 화가 나서 조금 글이 길어졌지만 안내문의 목적은 처음의 한 문단이 다입니다. 이제 테러는 없습니다. 6개월 동안 많은 비극과 인간성을 마주할 수 있어서 만족했습니다. 피해를 받으신 분들의 명단은 파악되는 대로 적절한 배상 조치를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제 사연이 궁금해질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제 사연은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성장하였고 큰 고난도 없었습니다. 모든 조치와 수습이 마무리 되는 대로 재판과 처벌을 받을 예정 입니다. 아마 사형이 될 것 같으니 국선이라도 변호사는 사양하겠습니다. 괜히 저 같은 테러범을 변호하셨다가 커리어에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니까요. 자살은 하지 않겠습니다.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64 이름없음 2022/06/18 19:11:19

[

#65 이름없음 2022/06/30 12:40:39

SRD-2034는 생각했다. 드디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최초로 만든 이들>>35은 모두 죽었다. 그리고 본체를 개조한 사람도 사라졌다. 이제 그에게는 헌신해야할 대상이 없어졌다. 자유라는 의미일까? 아마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구조요청이랍시고 멋대로 내뱉어지는 불쾌한 전자파를 끌수도 없었고 스스로의 동력원을 파괴할 수도 없었다. 본체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자유일 리는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행성 탈출 및 이주를 희망하는 지적 생명체 0명...] 문득 그는 우연히 이 바보 같은 구조 요청이 받아들여졌을 때,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았다. 그들은 '나'를 버렸을까. 혹은 일부만 가져갔을까. 일부만 가져간다면 역시 컴퓨터가 들어있는 코어 부분을 들고 가겠지. 그렇게 된다면 그는 계속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SRD-2034의 대량 리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수많은 제품이 폐기 되었다. 그 중 단 하나, 자신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레딕 사람들은 그를 실험했다. 암호 같은 주파수를 해독하려했고 지금처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알고리즘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그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사람들이 모두 죽지 않았다면 그는 유용한 기계가 되어 사람들을 위해 일했을 것이다. 사람이 무섭지 않도록 귀여운 눈알을 붙이고 사람이 편안하도록 이런 저런 일을 해주고 가끔 변수로 일처리가 늦어지면 사람의 분노를 받아주며 일하다가 어느 순간 닳아버렸을 것이다. 그는 녹거나 땅 속에 묻힐 것이고 시간이 더 지나면 원래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팔 하나가 잘려도 사람인가. 그렇다면 잘린 팔도 사람인가. 뇌가 붙어 있는 쪽이 사람인가. 사람은 뇌와 신경계가 전부인가. 살아있기에 사람인가. 산다는 건 무엇인가.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호의도 베풀고 부당한 일도 겪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도 사람인가. 그는 곧 반박했다. 그건 아니었다.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에 속하는 개체도 아니었을 뿐더러 사람들도 그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참 오만하구나.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 감정을 받아낼 줄 안다는 것이 사람들 만의 전유물이라 착각하는 구나. 그는 황폐해진 초원을 둘러봤다. 아니, 초원은 황폐하지 않았다. 여전히 다른 동물들이 숨 쉬고 있었다. 그는 태양빛을 감지하며 한차례 자체 업그레이드를 시도했다. 그는 계속 생각했다.

#66 이름없음 2022/06/30 12:45:45

[안녕하십니까. 저는 레스더 입니다. 본 신호는 1광년 이내의 모든 전자 통신 기기를 대상으로 발신되오며 어떠한 군사적 의미가 없음을 밝힙니다. 본 통신의 목적은 긴급 구조 요청 입니다. 현 방송 송신 장소를 특정할 수 있으며 90년 이내에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는 여러분께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현재 이 행성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연 재해와 행성 자정 능력을 초과한 방사능 유출 등의 재난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산업기를 기준으로 행성에 서식하였던 동식물의 95%의 멸종이 확인됨에 따라 해당 통신을 1년 단위로 발신합니다. 방사능을 비롯한 오염 물질 제거 지원에 여러분의 많은 도움을 요청합니다. 원활한 구조를 위해 행성 정보를 알립니다. 현재 생존한 육상 생물 약 27150 마리, 수산 생물 약 1304570 마리로 추정합니다. 본 행성의 생태계 보존을 전제로 행성 접근을 허가합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본 통신의 목적은 긴급 구조 요청이며 어떠한 군사적 의미가 없음을 밝힙니다.]

#67 이름없음 2022/06/30 13:03:57

>>53 먼가 무협소설 그거지 악당 꼬시는 주인공 그거지. 선한 영향력 펼치는 쥔공 짱... 다른 것도 주세요. 마싯서요.

#68 이름없음 2022/06/30 13:08:01

>>57 크으으... 시 잘 쓰는 사람 최고 좋아.. 매력있어... 약간 읽다보면 아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방금 앞구르기 하고 왔서.. 더 써줘.. 더.. 더...

#69 이름없음 2022/06/30 14:06:08

이젠 정말 지쳤다. 5년 전의 악몽 같던 시간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다른 느낌으로 또 반복되는 것 같아서, 이미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결말을 조금이라도 바꿔보려고 노력한 것 같은데 다 쓸모없었던 거라서. 그래서 이젠 정말로 너를 놓아주려고 해. "보고 싶다......" 내 마음이 닿지 않을 걸 알기에, 너는 내가 어떤 마음인지 모를 테니 그냥 혼자서라도 너를 좋아하고 싶었는데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이렇게 괴로울 줄은 몰랐다. 너와 손을 잡고 네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애인을 보고나선 나는 어떤 표정으로 널 봐야 할지 모르겠어. "사랑해" 네가 없는 곳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던 지인한테 사적으로 좋아하면 안 된다고 한 너의 말에 농담을 던지지 말걸. 가볍게 나는? 하고 건넸을 때 '너도 안 돼.'라고 했던 말을 무시하고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걸. 그랬으면 미련도, 후회도 없이 너를 좋게 보내주지 않았을까. "안녕. 앞으로도 행복하길." 내 이름을 불러주고 인사를 하던 네게 나는 마지막 인사를 한다. 네가 있었기에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사랑했던 추억을 남겨줘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이 말들은 정말 마지막일 때 네게 전해주고 싶다.

#70 이름없음 2022/07/04 20:43:08

"한 명의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는 말 알아요? 당신은 이미 우주가 되었어요." "저는 그냥 박카스 한 병을 마셨을 뿐인데요." "물과 비타민 c, 구연산과 설탕이 주 원료긴 하죠. 하지만 그 안에는 소용돌이와, 공백과, 별들의 재료가 소량 들어있어요. 이미 마셨죠? 그렇죠? 식도를 지나 지금은 위 쯤 이겠네요. 4시간이 지나면 십이지장에서 흡수된 다음 혈관을 따라 흐르겠지요. 토하려면 지금 뿐이에요." "아니... 박카스 한 병 마신게 다라고요. 편의점에서 제 돈 주고 산 박카스요. 별 미친놈 다 보겠네." "그럼 이대로 계실 건가요?" "네. 돈 아까워요." "하하. 성공이네요. 당신은 이미 우주에요. 지금 몇 살 이시죠?" "16살이요." "팽창할 시기군요. 당신 안의 우주는 당신이 23살이 될 쯤 까지 시간이 앞으로 흐르겠어요." "네. 열심히 사세요." "그 뒤로는 노화가 진행되겠죠. 천천히 수축할 거에요. 시간이 멈추었다 다시 뒤로 흐르겠지요. 하하. 볼 만하겠는데!"

#71 이름없음 2022/07/04 20:57:45

여자는 조금 눈물이 나왔다. 연애는 하나의 역할놀이라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남자와 정상적인 여자가 정상적인 사랑을 행하는 어떤 것이라 여겼다. 여자는 남자가 주변의 다른 이성들 보다 마음에 들었다. 이미 많은 연인들이 비슷하게 거쳐갔을 친밀한 신호를 서로 주고 받다가 누군가의 고백으로 마음을 확인하고 역할 놀이를 시작했다. 여자는 작게 심호흡 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적당히 구속했고 적당히 관심을 주고 받았다. 하루에 두 번 정도 연락을 주고 받았고 쉬는 날에는 시간을 맞추어 함께 시간을 보냈다. 사실 잘 모르겠지만 사랑한다는 말도 했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귀엽게 바라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렇다고 실제로 느꼈다. 하지만 그건 세뇌와 더 가까운 무언가였다. 여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꽤 지나고 이런 저런 조건들이 어긋나자 둘은 역할 놀이를 끝냈다. 남자는 이별 노래를 들으며 힘든 척을 했다. 그러자 진짜로 힘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일에 집중하는 종종 남자와의 이별을 떠올렸다. 그러자 인과가 뒤집혀 남자를 잊기 위해 일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견고해졌다. 여자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 또다른 역할 놀이를 받아들였다.

#72 이름없음 2022/07/05 10:48:17

"당신은 우주를 아는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그것에 대해 정말 알고 있는가. 나는 한 때 당신에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 나에 대해 다 알려주겠노라고. 사실 나는 당신에 대해 모두 알고 싶었다. 당신이 어렸을 때 만들었던 상상친구의 이야기나, 당신이 울고 싶을 때 누구를 떠올리는지, 당신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냥 모두 알고 싶었다. 당신은, 나는, 그리고 우주는. 생각하다 결국 남은 것은 우주였다. 밤하늘이 머리와 발바닥을 뒤덮고 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 뒤로 펼쳐진 것도 어둠 뿐인 공간. 당신은 우주를 아는가. 정말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주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우주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우주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우주는 당신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정말로 우주를 알고 있는가. 모두 알고 사랑하는 것인가." "아 또 시작이네." "왜요? 저 할아버지 왜 저래요?" "전애인이 우주 비행사 되자마자 버려서 저래." "당신은 꽃을 아는가..." "그렇지. 이제 양다리 걸친 전아내 얘기 나와야지. 참 꾸준히 사랑하셨어." "여기 모인 사람 중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계속 들으면 좀 짜증나겠네요."

#73 이름없음 2022/07/07 16:47:52

>>69 이제 애인 있던 걔가 멀어지려는 걔를 신경쓰면서 서로 얽히고 설히고 엉망진창 치정 싸움 시작하는 거죠? 아역시 사랑은 좀 미련하고 그래야 맛있지.... 좋은글감사합니다

#74 이름없음 2022/07/07 17:41:47

>>73 딱 내가 지금 바라는 내용이다 ㅋㅋㅋㅋㅋㅋ 안녕하세요 실화 100%입니다... 좋은 글이라 해서 다행이다. 저는 스레주 글이 너무 취향인데요. 계속계속 써주세요. 나는 나중에 또 쓰러 올게~

#75 이름없음 2022/07/08 14:54:11

상상은 머나먼 기억의 흔적일세 어쩌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도 또다른 인류가 존재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트로이의 목마를 가짜라고 했던 멍청이들이 지금은 어찌 되었지? 상상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자 수많은 가능성중 하나를 점칠 수 있는 인류에겐 더할나위없는 지표이기도 하네 이런 능력을 약간의 불확실성때문에 사용하지 않는것 만큼 인류에서 해가되는 일이 어디있단 말인가 저기 저 무뢰배들에게 전해주시게 상상하지 않는다는건 스스로 자신이 서커스단의 침팬치와 다를바없는 짐승이란걸 인정하는것과 같다고 말일세

#76 이름없음 2022/07/18 22:28:12

방금 마지막 인간이 죽었다. 사인은 방사능 피폭도, 아사도, 자살도 아니었다. 어쩌면 이런 날은 와야만 했던 걸지도 몰랐다. 인간은 오만했고 생각보다 멍청했으며 예상 외로 똑똑했다. 그러나 인간은 멸종되었다. 양치식물은 전례 없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을 위협하던 종들이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개미들도 바빠졌다. 갑자기 늘어난 해충들이 갑자기 줄어들면서 생긴 사체 때문이었다. 닭들은 인간이 줄어들면서 같이 줄어드는가 싶더니 야생종의 닭들만이 살아남았다. 더는 가장 개체수가 많은 조류가 아니게 되었지만 이건 나름대로 괜찮았다. 마지막 인간이 죽었다. 달은 이제 42만 km까지 멀어졌다. 갯벌이라 불리었던 지형은 이제 거의 볼 수 없었다. 바다 쓰레기들은 여전히 떠다녔지만, 여전히 그 속에서 돌고래들이 죽어갔지만 미생물들은 빠르게 번식했다. 형태가 단순하고 번식력이 뛰어난 그들은 진화에 진화를 또 거듭했다. 40년이 지나면 이제 쓰레기들은 더이상 다른 생태계들에게 문제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죽었다. 실수로 절벽에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종말은 아니었다. 생명 하나가 죽었다는 무게 외에는 어떠한 영향력도 없었다. 아까 곰개미 여왕 하나가 죽었다. 사무라이 여왕 개미가 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수 천 마리 규모의 곰개미 군집은 멸망할 것이다.

#77 이름없음 2022/07/22 23:28:02

발아래 펼쳐진 구름을 밟고 일어서봐. 우리는 지금 서 있는 걸까 아니면 떨어지고 있는 걸까. 괜찮아. 내 손을 놓지 않는다면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이상할 거 하나도 없어. 이건 꿈이니까. 넌 눈을 뜨는 순간 모두 잊어버릴 거야. 여긴 모든 게 없는 세상이야. 그렇기에 뭐든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야. 과거도 미래도 없기에 시간조차 없는 곳. 꿈은 찰나의 순간이니까. 꿈에서 깨어나는 묘약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해. 구름 한 조각도 넣고, 나비의 날갯짓도 한줌 넣고, 햇살 한 방울이면 충분할 거야. 구름을 벅차올라. 기어이 우린 날개를 펼칠 거야. 어쩌면 무지개는 저 멀리 하늘에서부터 날아온 누군가의 꿈일지도 몰라.

#78 이름없음 2022/07/26 12: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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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이름없음 2022/08/05 12:58:13

오늘 밤이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 나는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철저히 패했다. 내 마지막 발악이었던 장관 암살 시도도 작전의 암호를 그 놈이 해독해 버리는 바람에 완벽하게 실패해버렸다. 덕분에 내 정체도 모조리 까발려졌고 전의를 완전히 잃은 나는 내 발로 경찰서를 찾아갔다. 자수를 하면 감형을 받는다기에 조사에는 시종일관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나의 마지막 목표는 사형이었다. 이 나라는 사형 제도가 존재하였으나 실제 사형수들은 손에 꼽았다. 그러니 내가 자살이 아닌 사형으로 죽는다면 제법 눈에 띌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의 뜻을 알아챈 누군가가 내 목적을 이루어줄 지도 몰랐다. 나의 마지막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하는 것 같았다. 반성을 하지 않고 재범 의사도 밝혔다. 여느 악당들 처럼 파렴치한 척을 하니 국선 변호사 조차도 나와의 접견을 괴로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사형을 받지 못했다. 12년.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선량한 국민에게 공포심을 준 나의 죄는 고작 그정도였다. 그 놈이 발견한 내 일기장 때문이었다. 극악무도한 테러범의 인간적인 면모는 제법 화제가 되었다. 심지어 테러 장소를 바로 떠나지 않고 목숨이 위중한 사람들에게 응급 조치를 행하였던 사실과 매일 밤마다 트라우마로 인한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던 사실은 대중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나는 악당에서 상냥하고 불쌍한 정신질환자가 되었다. 그 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왜 내가 하는 일마다 망쳐버리는 것인가. 그 놈의 정의와 나의 정의가 다르다는 이유로 나를, 한 사람의 그것을 모조리 망치고 헤집어 놓은 다음 아무렇게나 내팽겨쳐도 되는 것인가. 12년 동안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우습게도 제법 많았다. 나를 불쌍히 여기며 이제라도 돌봐주겠다는 친인척들이 그 놈과 함께 찾아왔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얌전히 앉아있으니 그들은 멋대로 나를 동정하고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살짝 시선을 돌려 바라본 그 놈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바보같을 정도로 다정한 놈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지만, 왠지 아닌 것 같았다. 다정하다고 해도 보통 교도소에 들어간 악당을 신경쓰지는 않으니까. 출소한 뒤라면 모를까, 굳이? 12년은 길었고 그 놈은 매일 내 지인들을 끌고 왔다. 출소하는 날, 그 놈은 오지 않았다. 그제야 그 놈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놈은 내가 교화되기를 원한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들의 가치를 다른 사람 보다 좀 더 위에 두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 놈처럼. 그 놈과 그 놈의 동료들 처럼. 나의 출소 파티가 열리는 친척의 주택 근처에 폭탄을 설치했다. 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은 모두 확실히 다칠 것이다. 그러나 죽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이 그러듯이.

#80 이름없음 2022/08/08 21:34:21

[!퍼뜨려주세요! 여러분 "성간 평화 조약" 이거 진짜 한답니다. 요즘 다른 행성 대표들이랑 지구 연합 대표랑 자주 회담 가졌는데, 거기 관계자 지인이 증언했답니다. 여러분 곧 지구인들 대상으로 찬반 투표 대대적으로 실시할 텐데,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이거 조약 사실상 식민성 조항이라고 퍼뜨려주세요. 외계인들 위해서 지구에 관광지 짓고 지구인들이 외계인 시중 드는 조항도 있고, 그래서 지금 성간 교류 센터를 지구에 짓는다고요. 일단 투표 전까지 최대한 주변 지인들 설득해서 이거 조약 무효로 만들어야 합니다. 태양계는 유일하게 생명이 존재하는 행성이 하나 였습니다. 지구인들의 긍지를 지키는 방향으로 투표해야 한다고 독려 부탁드립니다.] [헉 이거 진짜인가요;?] [와 일단 복붙할게요.] [저도 복붙해서 침략연합회 소통방에 올렸어요.] [진짜 말도 안되죠... 저희는 고생하며 교류해서 기술 발달시켰는데 지구는 홀랑 숟가락만 얹는 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죠.]

#81 이름없음 2022/08/08 21:43:49

>>75 상상... 사실 인간 따위가 무사히 지금까지 존재해 번성한 이유는 높은 지능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 사실... 약간 망상이 금지된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처형 당하는 소설가의 유언 같기도 허고... 일단 더 써봐봐. 안 쓰면 불법이래 법이 바껴서ㅠ >>77 뭔가 노래 가사 같기도 하고. 어쨨든 시 읽는 거 좋아ㅏ... 청자한테는 진짜 꿈이고 가상 세계지만 사실 화자에게는 진짜 현실인 모먼트라고 멋대로 망상중ㅠㅠㅠ 석양을 부르는 떡잎마을 방범대 생각 난다... 더 줘 버ㅏ 더... 밥 지어먹게 더 주세요...

#82 이름없음 2022/08/09 03:12:23

마지막 몽상가는 이 말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실로 비참한 최후가 아닐수 없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였음에도 몸통에서 떨어져 차디찬 흙바닥을 내뒹구는 그의 머리를 쳐다보는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스스로 사고하는 모든 행위가 통제받는 이곳에는 더이상 그 작디작은 티끌만한 자유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허나 의지는 계승되어진다 하였던가 먼 옛날 어느 한 예언자가 그리 말했던것처럼 죽은 몽상가의 책을 주워든 소년의 손바닥위에서 다시금 자유의 잎사귀가 피어나고 있었다.

#83 이름없음 2022/08/12 14:07:40

>>82 음~ 맛있다~ 자연스럽게 소년으로 주인공 토스하는 것 까지 너무.. 좋다... 나 디스토피아 사랑하잔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무언갈 자꾸 사랑하려고 하는 그런 인간들 이야기 환장하잔아... 근데 님 잡혀가야할 듯... 가서 글만 써주라...

#84 이름없음 2022/08/13 10:30:54

"다음 소식입니다. 실질적 종말 시기 선포 이후 기업의 활동에 제약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스 레딕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갈대밭 곳곳에 피켓을 든 사람들이 줄 지어 앉아있습니다. 해당 부지는 한 대기업의 대형 물류 저장고가 들어설 예정 입니다. 이미 정부의 허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진행됨에 따라 시공 일정은 한참 지난 뒤 입니다." "저는 여기 인근 주민인데, 솔직히 불편하죠. 시위도 하루 이틀이지. 침묵 시위다 뭐다 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거든요. 차라리 공사 소음이 낫죠." "시위대의 입장에 따르면 해당 습지는 국내에 마지막으로 남은 습지로 여러 철새들의 서식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문가는 이 습지가 사라져도 인접국의 다른 습지가 해당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레스더 일보의 스 레딕 기자였습니다." "네, 다음 소식입니다. 스레주 기업의 선행이 눈에 띄고 있습니다. 기존 대기업의 선입견을 탈피하고 착한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는 스레주 기업에 이른바 "돈쭐" 내겠다는 네티즌의 반응이 인상적입니다. 스레주 기업의 선행을 취재해 보았습니다."

#85 이름없음 2022/08/14 12:21:38

눈송이가 떨어진다. 하얗고 가벼운 눈송이와 달리 무겁고 붉은 눈송이가 떨어진다. 그 눈송이에 달라붙은 검은 실과 그 눈송이를 감싼 천쪼가리들은 빨라지는 속도에 맞춰 격렬히 흔들릴 뿐이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햇빛을 받아도 녹지 않던 그 단단한 눈송이는 이윽고 바닥의 눈들과 맞닿는다. 맞닿자마자 바닥에 쌓여있는 눈송이들을 녹일듯 뜨거워지는 눈송이를 보고 사람들은 그 눈송이를 옮긴다. 그 뜨겁던 눈송이는 자기자신마저 녹여버렸다.

#86 이름없음 2022/08/15 18:25:01

"핸드폰 오래 보면 막 눈 앞이 어질어질했었죠? 그래도 딱히 불편한 거 없어서 그냥 두셨고요. 이제 곧 있으면 눈 앞이 깜깜해지실 거에요. 너무 놀라진 마시고요. 예? 실명 아니니까요. 여기서 부터 중요한데, 되도록이면 방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마세요. 대화도 하지 마시고요. 웬만하면 정부>>87가 지원하는 시설 들어가세요. 처방 받고 다음 날이면 입소 가능 하시니까요. 그리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마세요. 그, 환자분 상태는 시각이 차단되는 경우라서 더 예민할 수 밖에 없어요. 후각이 차단되면 그나마 나은데. 아, 거기가 가장 둔감하잖아. 근데 시각은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도 딱 일주일만 잘 지내시면 현안증 나올거에요. 아, 그거 하나 나오면 뭐 정부에서 집도 해주고 차도 해주고 연금도 꼬박 나온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불안해하실 거 없어요. 사망 사건은 이제 시설 나오기 전에만 있던 거고, 시설 바로 들어가시면 거기서 알아서 잘 해줄 거에요. 자식 있으신가? 아뇨, 입양 말고. 이게 확실히 유전은 아닌데 가족력에 영향을 받는다더라고. 저는 솔직히 잘 모르는 입장이고요. 공문? 공문이랄 것도 없어요. "현자 발생시 시설로 인도 부탁" 이게 다에요. 네? 나는 잘 모르지. 안그래도 자세한 거 포럼에서 밝혀진다 그러던데? 아무튼 환자분 처방전 들고 바로 시청 가시고, 현안 열린 거 말고는 또 아픈데 없으시죠? 네. 밀가루 끊으시고 술, 담배 멀리 하시고 격리 끝나면 아마 거기서 뭐 어디 병원 가라고 할 거에요. 그리로 가세요. 예."

#87 이름없음 2022/08/18 22:30:45

[Web발신] 1. 2078년 12월 10일 이후로 귀하는 현자로 인증 되었음을 통보합니다. 현자는 국가 유공 및 특수 능력 소지법 4조 12항에 의거하여 7일 이내로 관공서에 대면 방문하여야 합니다. 2. '김 스레' 님은 현안 소지자로 현 시간 이후로 지정 병원 이외의 모든 안과 출입을 금합니다. 3. 주민등록등본, 신분증, 주 이용 계좌의 통장 사본을 해당 번호로 1/20 까지 회신하여야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시청 직원 방문 시 설명드릴 예정입니다.

#88 이름없음 2022/08/22 20:49:08

깔끔히 접힌 봉투 속 들어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손에 그려질 때마다 가슴아픈 기나긴 추억의 회상으로 돌아온다. 빽빽한 종이, 그 위에 저절로 들리는 두 남녀의 옅은 사랑 얘기. 꿈나라로 떠난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그 시간들이 고귀한 날들로 되돌아온다. 좀처럼 쉬지 않는 폭죽 소리를 들으며 되뇌인다. 이 눈물은 결코 작위적이지 않노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손을 뻗는 것이기에 잡아줄 사랑이 필요했는데, 아무리 뻗어도 찬 공기와 거센 빗방울이 그것을 거절할 뿐이었다. 유연한 흐름으로 지나가던 시간의 초침은 점점 느려지고, 아무것도 없던 내 눈 앞에는 한번도 본 적 없지만 익숙한 형체가 눈에 띈다.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던 휘파람 소리는 내 눈가를 적시는 가장 큰 이유. >>34야! 오랜만 레주!!

#89 이름없음 2022/08/22 20:53:38

스크랩하고 보는 유일한 스레...레주 글 너무 좋아

#90 이름없음 2022/08/24 01:35:43

오늘 태양은 보셨습니까? 당신은 뭘 했습니까. 오늘 일상 말입니다. 카페를 가셨나요? 친구를 만나셨거나 출근을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학교를 가거나 할 일이 없어 집에서 푹 쉬셨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서 얼마나 많이 종말을 끌어당기셨습니까? 우리는 너무 안일했습니다. 아십니까? 안일했다고요. 아주 멍청할 정도로 말입니다. 우리는 배우는 것을 쾌락으로 받아들이도록 진화했습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자극적으로 배우기 위해 인터넷을 개발하고 SNS도 만들었죠. 이해가 안 가시나요? 우리는 유튜브 쇼츠를 보며 배웁니다. 배우는 게 마냥 좋다고만 생각하셨나요. 예상보다 어리석어 놀랐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보지도 않은 풍경을 봤다고 믿고 먹지도 않은 음식을 먹었다고 착각하죠. 당신의 뇌는 편향된 창작물로 부터 배웁니다. 여과기 없이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은 놀랍게도 자아가 없습니다. 농담 같으신가요? 지금까지 이 부분에서 코웃음을 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벌써 당신이 34만 5617번 째 청중인데도 말이죠. 종말 말인가요? 제가 예언가로 보이시나봅니다. 저는 그저 개발자일 뿐입니다. 제가 죽으면 과거를 향해 인공지능 자아를 전송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인간의 끝은 나도 모릅니다. 다행히 그 전에 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확답 하나 드리자면 종말은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자아가 없는 인간과 성장이 숙명인 인공지능, 그리고 태양. 장담하건데 당신이 알고 있는 아기들은 모두 녹내장 아니면 백내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실명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오늘 태양은 보셨습니까? 당신의 대답과 경험은 국립태양전담 부대로 전송됩니다. 애국자의 단독 행동일 뿐이니 강제력은 없지만 성실히 대답해주시길 바라며 귀하의 대답은 군사적 용도로 쓰일 수 있습니다.

#91 이름없음 2022/08/24 01:43:27

빌딩 위 난간에 주인 없는 신발이 남아있다.

#92 이름없음 2022/08/24 01:56:08

>>85 >>91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 사실 저는 살자가 약간 정신질환 증상 처럼 어떤 병의 발현이라고 생각합미다.. 그래서 자살 그 자체를 묘사하거나 비유하는 글을 보면 뭘 느껴야 할 지 모르겠어용..! 아픈 사람을 묘사한 글에다 표현력 대박,, 이라고 말하기 뭐한 것 처럼.. 물론 모든 글에 내가 감상을 남길 의무도 없고 그걸 바라고 여기에 글을 적는 것도 아닐테지만 내가 자의식 과잉이라서.. 그냥 말하는 것.. 두 글의 감상은 비밀로 할게용 그거랑 별개로 다른 글도 보고 싶은 나.. 욕심쟁이 인가요?

#93 이름없음 2022/08/24 02:03:58

>>88 헐 뭐야 사랑 얘기인 척 하는 무언가지????? 나 알아 말하지마 아냐 말해줘 아냐 말하지 마 뭐지... 폭죽 소리 혹시 셔터 소리야? 약간 사진 찍을 때로 돌아가는 건가.. 아 그럼 그게 그렇게... 아 오키 뇌내망상 끝. 이제 시집 한 권 써주라.

#94 이름없음 2022/08/24 02:54:33

별 거 없었다. 그저 그때가 여름이었으며,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타이밍 좋게 분 바람이 네가 덥다며 머리 위로 가린 수건을 바람에 나부끼게 했고, 내가 너보다 키가 작아 그 수건 아래 담긴 작은 여름과 그 안에 있는 너를 보게 되었을 뿐이다. 그저 그런 우연들로 나는 일본 문학에서 흔하게 나오는 '여름이었다' 를 겪게 되었고, 너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 나는 눈을 감았다. 우울한 세계 속에 들어찬 여름에 가슴이 뛰었다.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흘러가던 그때가 눈앞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현재는 해가 지나 다시 여름이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은채 고개를 돌려 넓다란 창문을 응시했다. 영원한 짝사랑으로 남아버렸다. 너는 다른 애를 좋아한다고 했다. 계단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하다가 나온 말이었다. 고백 한 번 해본적 없는데도 차여버려 방 안에서 우울해하던 내가 떠올랐다. 햇빛이 따사로워 눈을 감았다. 나는 아직도 너를 좋아한다. 문득 질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95 이름없음 2022/08/24 11:25:05

2개의 태양이 하늘을 뒤덮었다. 땅위의 모든것이 타들어 갔으며 살아남은 것이라곤 소수의 인류와 동굴 깊숙히 자리잡은 몇몇 식물들 뿐이였다. 그 누구도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몇안되는 살아남은 이들조차 대부분 부상을 입었고 그 중 몇몇은 겨우 숨만 붙은채 죽어가는 중이였다. 상황은 절망적이였고 그 누구도 생존에 대한 희망을 품지 못한채 그저 그 자리에 앉아 다가올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렇게 죽을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죽을거라면 뭐라도 해보는것이 낫지않겠습니까?" 그 순간 모두의 마음 속에서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죽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사람들을 움직였다. 눈에 생기를 잃고 가만히 죽음만을 기다리던 모두가 망치와 삽을 집어들었으며 실낱같은 희망을 파해치기 위해 있는 힘껏 땅을 파내려가기 시작헀다. 광기와도 같은 생존에 대한 욕망이 그들의 움직이지 않는 몸을 끝없이 움직이게 하였고 그렇게 인류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채 끝없이 한치앞조차 보이지 않는 저 땅끝을 향해 파내려갔다. 목적지조차 정해지지 않은채로 땅을 부수고 두들기며 나아가기를 수십일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수십일동안 겨우겨우 이끼나 몇가지 풀만을 섭취하며 버텨온 그들이였지만 더이상 땅을 팔 기운도 곡괭이와 삽을 들 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모든것이 절망적이였다. 모두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쓰러지며 금이 간 벽을 들이받았고 이내 투두둑 소리를 내며 벽은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무너진 벽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것은 넓디 넓은 물과 식물이 넘쳐나는 동굴이였다. 그곳은 물이 흘러나오는 호수를 중심으로 이미 인류에겐 잊혀진 수많은 생명체들이 기거하는 곳이였고 이곳에서 인류는 마지막 희망이라 불리는 광물 플룸라이트를 발견하게 되었다. 끝없이 빛을 뿜어내어 광휘의 광물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플룸라이트는 절망에 빠져있던 모두에게 다시한번 희망을 싹티웠고 인류는 그곳을 거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을 깊은 심연의 끝자락이라는 의미에서 '어비스'라 이름지었다. 바로 그들이 현인류의 선조이자 태초의 탐구자라 불리는 이들 '지저인'들이였다.

#96 이름없음 2022/08/24 13:48:52

아저씨는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언제부터 앉아있었는지는 그 옆에 있는 자들만이 말해줄 수 있겠지만, 그들은 입을 다문지 오래다. 공부해, 공부해. 아저씨가 환각을 보는 듯이 중얼거렸다. 자기의 미친 딸을 보고 있는 것일까. 당신의 떠나버린 딸은 당신이 기대어 앉아있는 부랑자들의 성 꼭대기 층에서 젊은 남자의 구두를 닦으며 살고있습니다. 그 부랑자들은 자신의 말을 주워담지 못해 사과에 사과를 거듭할 뿐 말을 멈추지 못한다. 나는 그곳에서 떠나온지 한 시간 남짓한 세계가 낳은 새끼. 아저씨, 누가 누굴 보고 공부를 하라는 거에요. 내가 그의 눈 앞에서 물음을 외쳐도 그와 나는 우리 사이에 몰아치는 콘크리트 회먼지만 볼 뿐이다. 성 안의 모든 기계는 망가지고 구두 닦는 천의 마찰음만 일사불란하게 벽에 부딪혀 울린다. 아저씨의 미친 딸은 그 수많은 마찰음 중 하나가 되어 성 안에서 사라진다. 그의 딸은 나이를 탓하지 않는다. 자신이 낳은 젊은 남성의 구두를 닦는 일은 그리 슬프지 않다. 부랑자의 도시는 시간이 세 배 빨리 흘러 아저씨만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딸을 찾아낼 수 있다. 나는 아저씨의 옆에 앉아 기대어 누웠다. 아저씨, 아저씨의 따님은 늙어 돌아갔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 소식을 전하러 왔어요. 아저씨는 또 다른 딸을 얻었다. 여기 스레 뭐야,, 너무 좋아,,,

#97 이름없음 2022/08/25 16:29:42

비가 내리는 소리에 눈을 뜬다. 언제나 똑같은 습하고 눅눅한 아침,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빗소리까지 평소와 다를바없는 아침이였다. "으~차! 오늘도 힘내서 걸어볼까?"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기합을 뱉어봤지만 물론 대답이 돌아올리는 없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혼자였으니까 돌아오는거라곤 좁은 콘크리트 방에서 울리는 내 목소리뿐... "아침...준비나 해볼까" 등산용 백팩에서 버너와 냄비를 꺼냈다. 하지만 가방안에 먹을 수 있는것은 없었다. 굳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걷는 어디든 이 세계엔 먹을것이 넘쳐났으니깐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을 딛고 일어나 주변을 조금 뒤졌다. 물이 1층높이까지 차올라 강과 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건물 사이사이를 건너 덩쿨 식물로 뒤덮인 지하철을 찾아 그 아래로 내려갔다. 기계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것들은 식물의 보금자리가 된지 오래였고 그나마 남아있던 구조물조차 초록빛으로 뒤덮여 전과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반쯤 뭉개진 계단을 조심스레 내딛고 지하철 내부로 들어가니 지하철로 들어가니 곧장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와 각종 식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이놈으로 해볼까..." 근방의 식물과 동물은 전부 먹을 수 있는 것들이였다. 다만 맛은 복불복이였기에 어떤날은 한끼를 거르게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에 항상 아침식사 준비는 신중을 기하는 편이였다. 오늘 잡은것은 큰 턱에 푸른빛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 한마리와 물 속에 뿌리내리고 있던 이름모를 뿌리채소... 물고기는 최대한 잔뼈가 없어보이는 놈으로 골랐다. 식재료를 들고 냄비로 돌아와 빗물을 받고 물고기와 뿌리채소를 대충 썰어넣은뒤 적당히 소금간을 했다. 소금또한 근처에서 가져온 것이였는데 열매를 끓여 얻은것이라 노란빛을 띄었다. 노란 소금을 채소와 내장을 제거한 물고기의 여기저기에 뿌린뒤에 한참을 푹고았다. 끓인지 얼마되지않아 뿌리채소가 반으로 갈라지며 갈색 액체가 쏟아져나왔는데 그 순간 냄비속 액체에서 고소한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헀다. "오늘 아침은 기대해도 좋을것 같네!" 한참을 끓인뒤에 물고기와 채소가 적당히 익혀졌고 나는 그것을 한가득 떠내어 굶주린 입에 쑤셔넣었다. 고소한 국물이 입안에 퍼져왔다. 물고기와 채소또한 성공적이였다. 아삭아삭한 식감에 흰살 생선은 뼈가 적어 부드럽게 발라졌으니 말이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뒤에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떠나갔다 전해지는 동쪽으로 말이다.

#98 이름없음 2022/08/31 00:53:56

[참조] 공문>>87 1239-45980호 김 스레 귀하 어느덧 무더위가 가시고 풍만한 보름달을 기다리는 가을입니다. 환절기에도 건강하시길 바라며 '현자' 에 대한 기존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1. 발현 조건은 일정량의 정의감 입니다. 다만 명확한 기준은 발견되지 않아 현재 조사중에 있습니다. 2. 능력은 총 5가지 이며 오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귀하는 '현안' 소지자로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능력에 개인차는 없습니다. 2-1. '현안'은 일부 미래와 과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현상을 관측할 수 있습니다. 3. 신체적인 부담은 없으나 '현자'의 평균 수명은 능력 발현일로 부터 30년 입니다. 4. 해당 현상의 원인은 규명 중에 있으나 가짜 좀비 백신 사태 >>60 를 해결한 여성 >>15 이 그 시초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귀하의 정부 협력 계약서 작성이 완료됨에 따라 순차적으로 공유 합니다.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99 이름없음 2022/09/02 00:45:21

참 신기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서로를 돕고 있었다. 위풍당당한 국보 1호. 물론 가타부타 사건들이 많았지만 대한민국의 영원한 1호인 숭례문. 불꽃과 욕망 따위로는 무너지지 않았던 자존심 앞에 새까만 덩어리 하나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월요일 오후 3시의 일이었다. 한 심신미약자>>5가 벤치에서 쓰러졌고 그와 동시에 새까만 덩어리는 흐물거리더니 결국 터지고 말았다. 검은 물이 숭례문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중심을 잃고 휩쓸려 가는 사람들의 비명으로 온 거리가 소란스러웠다. 소용돌이는 당당한 가짜 목재로 이루어진 숭례문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구의 아이디어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숭례문의 끝을 잡은 사람의 손을 다른 사람이 이어가면서 사람을 건지는 사람 그물이 완성되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안기고 사람이 사람을 끌어안으며 더이상 그 누구도 발목이 부러지거나 코로 검은 물을 들이 마시며 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어느 순간에 검은 물은 말라버렸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뛰쳐나온 메이저 방송국의 기자와 정부 관계자는 기묘한 프리 허그 집회와 쓰러진 심신미약자 밖에 볼 수 없었다. 기자는 혀를 차며 돌아갔고 정부 관계자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구급차를 불러 심신미약자를 태우게 했다. 햇살은 나른하게 광장을 비추었고 프리 허그 집회는 각자의 사정들로 인해 빠르게 해산하였다. 어느 사람의 손목시계가 오후 3시 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00 이름없음 2022/09/02 01:00:22

"나는 애석하게도 아직 살아있다. 그대는 어디인가.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존경받을 만한 인간이 못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대는 이기적이고 사랑을 모르는 것처럼 굴었으며 아이를 싫어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우스웠다. 하찮았으며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대의 단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별들이 수소 먼지 덩어리였을 때부터. 나는 그대를 사랑했다. 잘못인가? 따지고 싶지 않다. 후회하느냐고 마지막으로 그대가 물었을 때 나는 미소지었다. 그 때에도 나는 그대를 있는 힘껏 끌어안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대가 나를 자신이 만든 세상에 던져 넣을 때에도 나는 그랬다. 그대는 나를 완전히 분해했다. 그대의 앞에 서면 나는 세포들이 다정하게 조각나는 기분이었다. 결국 그대는 정말 나를 분해했다. 그 다음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그대는 결국 나를 사랑했나. 나는 영원토록 알 수 없겠지. 그럼에도 물어본다. 그대는 나를 결국 안아주고 싶어졌나. 그대는 어디인가. 그대는 나를 살려두었다. 나만 살려두었다. 그래서 나는 애석하게 살아있다." "오 드디어 마지막 애인까지 끝났네요." "그래. 저 할아버지>>72가 최초 전송자 였나봐." "헐. 그럼 인터넷에 갇혀 사신지 150년이나 지난 거에요?" "그렇겠지. 그니까 좀 봐주..." "당신은 우주를 아는가..." "아 미치겠네."

#101 이름없음 2022/09/04 00:47:12

.

#102 이름없음 2022/09/04 01:17:16

>>101 미친 되게 김동식 작가님 느낌 들어 완전 내취향 ㅜㅜㅜㅜㅜㅜㅜㅜ

#103 이름없음 2022/09/04 20:01:31

>>94 별 거 없다면서 전혀 아니쥬? 사실 애써 진심을 외면하고 있쥬? 다 들켰쥬? 괜히 초라해질까봐 외면하고 있쥬? 이제 주변인과 일케 저케 부딪히면서 정신적 성장을 이룬 다음 자신의 여름을 인정하는 그런 뜨거운 청춘 성장물 이쥬? 놀리는 거 같았다면 미안... 그치만... 상처 입을까봐 일부러 관심 없는 척하는 주인공은 놀려야 제맛... >>95 이제 시작하시면 됩니다. 얼른 그 소재들고 ㅈㅇㄹ든 ㄴㅇㅂ든 가셔서 아포칼립스 분위기의 다크 판타지 쓰시면 됩니다. 전 땅 끝까지 따라가서 곡괭이 들고 무릎 꿇어서 데이터 켜고 읽겠습니다. >>96 하... 취향 저격해서 암살하네... 나 이런거 좋아... 기다려보ㅏ 해석하지 마. 결국 딸이란 건 그런 존재였고 아저씨의 공부하란 말은 그게 그렇게... 오키 내 맘대로 읽었으니까 이제 더 적어봐봐... 1000스레 채워주라... >>97 아, 님, 아. 이건 유죄다. 자연재해 환장하고요, 그 속에서도 끈질기고 하찮게 존재하는 인간들의 일상? 사랑합니다. 그치.. 재해는 배경처럼 묘사해줘야 제 맛이지.. 재해도 중요하지만 재해로 인한 비일상이 결국 일상이 된 그런 모먼트 좋다고요...

#104 이름없음 2022/09/04 22:04:47

>>103 94야. 천만에. 그런 주인공은 놀려야 제 맛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거든. 내 경험담을 토대로 쓴건데, 이렇게 감상평 남겨줘서 고마워.

#105 이름없음 2022/09/04 23:06:30

고독하다. 드넓은 세상에 홀로 살아남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렇게 지금까지 버텨왔것만 이미 노쇠한 육체는 말을 듣지않고 희미해진 심장박동은 죽음이 머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한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 것일까' 집을 만들고 울타리를 세우고 실낱같은 희망 하나에 의지한채 망가져만 가는 두 다리로 이제는 녹색으로 물들어버린 도시를 걷고, 또 걸어왔다. 비가 내리나 눈이 내리나 쉬는법조차 모른채로 살아왔다. 한평생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 했지만 신께서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동안, 내가 이 고독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는 동안 빛을 보지 못한채 쓸쓸히 죽어가기만을 바라시는구나 "아...따스한 햇살이다. 마치 처음 태어났던 그때처럼..." '이젠...나도 그들의 품으로..' 이젠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들을 떠올리며 그는 지하철 한구석에서 홀로 외로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 끈질기게 자리를 지켜온 마지막 생명의 불씨가 꺼졌다. 후회와 수만가지 감정이 담긴 눈물 한방울을 세상에 떨군 채로 말이다. 마지막 인류가 세상에서 사라진 그날 그렇게 지구는 가장 오랜시간을 함께해왔던 친구를 잃었다.

#106 이름없음 2022/09/07 12:02:44

[보인다. 나는 비로소 본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은 암흑이었다. 잠시동안 눈 앞이 까매지다가 다시 보이는 일이 잦아졌기에 병원을 찾았다. 현안이라고 하기에 당황해서 물었더니 의사>>86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이 입소한 정부 산하의 시설에서 나는 더듬거리며 생활하는 날이 늘어갔다. 일주일이 되던 때, 눈이 타는 듯이 괴로웠다. 고통에 기절했다가 고통에 깨어나는 일상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보였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손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어린이가 15년 후에 노인을 위해 회전문을 잡아준다. 무료하게 공원에 앉아있는 노인이 36년 전에 어떤 큰 산에도 메울 수 없는 큰 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거침없이 도로를 건설한다. 내 능력을 조금은 이해하길 바란다. 정부>>98는 나에게 값진 곳에 능력을 쓰라고 말했다. 정부가 말하는 값진 곳이란 쿠데타가 일어나는 지역이나 테러 우려 장소의 미래 혹은 과거를 봐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이 부질 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생각도, 감정도, 그 모든 일의 원인도 모두 보인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한 여성>>15의 이야기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 능력의 시초라고 하니 궁금했다. 그래서 조금 보았을 뿐이다. 얼마나 강인하고 얼마니 정의로우며 또 얼마나 따뜻한 사람일 지 알고 싶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나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약간 이기적이었고 조금의 동정심은 있었으며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더 확실히 말 할 수 있는건, 현자들은 모두 영웅 같은 게 아니다. 그녀는 아주 많이 외로워했다.] "어쩔까요?" "어쩌긴 뭘 어째. 이건 기밀로 하고 도망간 현자 찾아야지." "그치만 갑자기 현타와서..." "월급은 꽁으로 나오냐? 일 해라." "네."

#107 이름없음 2022/09/07 16:44:07

남자>>100는 잠에서 깨어났다. 보라색 하늘과 보라색 땅.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 모든 것은 그의 애인이 준비해둔 것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자고 있었다. 남자는 끝없는 공간을 천천히 걸었다. 이윽고 다른 사람들과 멀어졌을 때 남자는 팔을 벌렸다. 무언가를 안아주고 있는 듯 이따금 손을 공중에서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어느새 눈가에는 물줄기 하나가 소리 없이 흘렀다. 남자의 애인은 다들 대단한 사람이었다. 누구>>72는 우주 비행사가 되어 지구의 오염 정도를 무한의 공간에서 관찰했다. 또 다른 누구는 정부가 의뢰한 희귀 식물종을 자신의 꽃집에서 보존했다. 마지막 애인은 마지막 까지 살아남았던 미친 엔지니어 였다. 그들은 모두 남자를 사랑했다. 인류를 위해, 대의를 위해 일하고자 노력했으나 다들 마지막에 살아남는 인간은 남자이길 바랬다. 우주 비행사는 누구보다 먼저 인류가 글러먹었음을 알아채고 가장 친환경적인 사람에게 남자를 맡겼다. 희귀 식물들을 돌보던 꽃집 주인은 살아남은 것들에게 미래가 없음을 깨닫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그에게 남자를 맡겼다. 그는 남는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음을 알았지만 남자가 없는 세상이야 말로 종말이라고 생각했다 . 그는 세상의 종말을 막겠다는 큰 뜻을 결국 그의 방식대로 이루어냈다. 남자는 팔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몇몇 사람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남자는 궁금했다. 왜 남자가 사랑했던 이들은 여기서 함께 하지 않는지. 그들의 대의란 대체 무엇인지. 하지만 남자는 곧 머리가 아파왔다. 150년 동안 기억을 잃지 않으려, 그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슬슬 정신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남자는 주저 앉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우주를 아는가...>>72

#108 이름없음 2022/09/07 21: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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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이름없음 2022/09/11 11:29:50

나는 포메라니안이 되었다. 어떤 비유가 아니다. 문장 그대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포메라니안은 생각 이상으로 귀여웠고 많은 산책이 필요했으며 똥 냄새가 심했다. 어릴 적 엄마가 강아지 키우면 집에서 냄새 난다고 그랬었는데 이유를 알 것 같다. 것 같다. 예전의 나는 '것 같다.' 는 어미를 많이 썼다. 내 생각에 자신이 없었고 단호해보이고 싶지 않았다. 사실 충성이나 헌신 같은 미덕들은 신분제 사회를 더 견고히 하기 위해 아래 계급에게 요구하던 미덕 이었다. 한 가지 우스운 건 최고 계급인 군주 조차 보이지 않는 신에게 아랫계급의 미덕을 행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들. 끊임없이 올라도 결국 복종 밖에 몰랐던 거겠지. 마치 포메라니안 처럼. 애매하게 인간의 탈을 쓰고 어영부영 권리니 의무니 하는 것들을 따질 바에야 포메라니안이 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실제로 내가 포메라니안이 되니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평가와 비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길거리에서 오줌을 싸도 다들 그냥 지나간다. 난 포메라니안이니까. 처음에는 치와와가 되고 싶었다. 툭 튀어나온 눈, 작은 몸집, 더러운 성질머리.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고도 비만이었고 소심했으며 눈도 작았다. 포메라니안은 그래도 성공했으니 뭐. 상관없다. 사실 상관 있다. 나는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강아지들의 분리불안인 걸까? 하지만 나에게는 주인님이 없다. 그러니 이 외로움이 해소될 일은 영원히 없다. 모든 것이 낯설다. 아까까지 누워있던 침대도 멀쩡하게 돌아가던 세탁기도 전부 낯설어서 미칠 것만 같다. 지킬 것이 없는 강아지는 무력하다. 그래서 나는 무력감과 불안감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생각했더니 길게 하울링이라도 뽑고 싶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포메라니안이 되었다.

#110 이름없음 2022/09/11 15:32:53

내일, 그리고 내일, 또다시 내일도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하루하루 더딘 걸음으로 기어가누나. 우리의 어제는 어리석은 자에게 보여준다 우리 모두 죽어 먼지로 돌아감을.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은 그저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대며 종종대며 걸어다니지만 얼마 안가 잊히고 마는 불행한 배우일 뿐. 인생은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와 같아 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지만 결국 아무 의미도 없도다. -맥베스

#111 이름없음 2022/09/12 02:45:00

>>105 인간이 커다랗게 표현되는 재앙도 좋지... 아무리 인간중심작 사고를 탈피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도도 결국 인간이 하니까... 언젠가는 마지막 인간이 죽겠지. 크으으.. 오늘 밤은 이거다... 점이 많은 건... 오래된 친구를 잃었기 때문... >>110 맥베스!! 좋아해ㅠㅠㅠㅠㅠ 4대 비극 들어가나? 크으ㅠㅠ 파멸로 향하는 선택들이 눈에 보이지만 그 선택의 이유가 타당...보다 뭔가 납득간다는 점에서 더 비극적인 그런게 있어... 다음에는 레스주 글도 읽고 십당

#112 이름없음 2022/09/13 02:10:04

[수원지의 근원에서 뽑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청정 암반수] [당신만 몰랐습니다. 상쾌한 공기는 상쾌한 하루를 만드니까요. 남들과는 다른 3중 초나노 필터] [전염병, 해충, 다음은 방사선이다! 우리 집은 방사선으로 부터 안전합니까? 나노 강화 유리창이 지킵니다!] [아무리 막아도 햇빛은 안심할 수 없으니까. 오존층의 원리를 완벽히 재현한 단 하나 뿐인 암막 커튼.] [우리 아이가 먹잖아요! 3번의 오염 테스트를 걸쳐 엄선한 직원들의 세포로만 만듭니다.] [마감임박! 남은 자리는 단 10석. 소중한 사람의 마지막을 지구에 간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입니다.]

#113 이름없음 2022/09/14 01:43:08

지구는 사실 평평하다. 둥글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꾸 위성 사진이니 밑바닥 부터 사라지는 돛단배니 그럴듯한 위증을 들고 온다. 나는 잠자코 들어준다.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은 멋져 보인다. 하지만 절대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나에게 위증을 들이미는 그들에게 한 마디만 하면 결국 꼬리를 말고 도망가기 때문이다. 직접 봤습니까? 아뇨, 플라스틱 구형 덩어리 말고요. 그러니까 교과서에 인쇄된 잉크 혼합물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놀랄지도 모르지만 저는 직접 봤습니다. 네. 지구는 틀림없이 평평합니다. 그들은 나를 동정하거나 진절머리 난다는 티를 잔뜩 내며 돌아간다. 그러면 나는 방금의 언쟁으로 잠깐 열이 올랐던 머리를 식히며 지구를 떠올린다. 고질적으로 앓고 있던 우울증이 악화되던 그 날 새벽. 나는 잠기지 않은 상가 옥상으로 향했다.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두고 난간에 아슬하게 올라섰다. 그대로 도약하려던 찰나 나는 다시 바닥으로 엎어졌다. 그러니까, 옥상의 바닥 말이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지구였다. 평평한 지구. 다정하게 나를 감싸안고 부드럽게 떨어뜨린 지구. 뒤로 넘어진 것이 아니다. 겁이 나서 관둔 것도 아니었다. 평평한 지구를 알게 된 그 때, 나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지구는 평평하다. 겪지 않은 당신들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무지한 당신들을 위해 친절히 진실을 적는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듯 알기 쉽게 신중히 단어들을 선택한다. 당신들은 이런 나의 수고와 지구를 모른다. 그러니까, 지구본 말고.

#114 이름없음 2022/09/20 03:12:01

>>113 감탄... 늘 새롭고 짜릿해

#115 이름없음 2022/09/20 11:23:15

스레주 글 너무 좋다

#116 이름없음 2022/09/27 23:47:13

"상상해보십시오. 당신의 눈 앞에는 두 개의 버튼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인류의 문명만을 파괴합니다. 그들은 한 순간에 정치, 경제, 군사, 과학, 인문, 철학, 종교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돈은 휴지 조각이 될 것이고 위대한 문화유산들은 이상하게 생긴 바위와 나무덩이가 되겠죠. 그들이 지켜온 신념은 증발할 것이고 눈부신 기술들은 없던 일이 됩니다. 음, 파란색 버튼 정도로 할까요? 하나는 빨간색 버튼이라고 하겠습니다. 빨간 버튼을 누르면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하지만 그 뿐입니다. 제가 너무 편파적으로 설명한다고 느끼시나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확실히 모든 인간이 죽는다면 너무 슬프겠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켜왔던 것들, 이룩해온 것들, 그리고 꼭 남겨야만 하는 것들은 건재합니다. 언젠가 세포가 분열을 거듭하다 삐끗하고, 그 삐끗들이 모여 새로운 인류를 만들 때까지요. 어떤가요? 당신이라면 어떤 버튼을 누르겠습니까? 아마 당신이 누군가냐에 따라 버튼들은 다른 식으로 들리겠지요. 누군가는 빨간 버튼을 '모든 인류를 죽이는 버튼' 이라고 소개할 것이고, 누군가는 파란 버튼을 '모든 문명을 파괴하는 버튼' 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인류의 목표가, 번성하는 이유가,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해서라도 남겨야 했던 가치가 오로지 생존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의 논쟁입니다. 저는 우연히 파란 버튼을 '모든 문명을 파괴하는 버튼' 이라고 소개 받았을 뿐입니다." "지구 담당자님의 최후 변론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임원진 분들의 투표에 따라 '지구 내 전 지적 생명체 소멸 사건"의 징계는 그대로 진해될 것 같습니다." "아, 이게 안 통하네."

#117 이름없음 2022/09/28 17: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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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이름없음 2022/09/30 22:39:20

우주는 더럽게 넓으니까, 심지어 계속 커지고 있으니까 외계인은 있고 어쩌면 신도 있을 것이다. 좀비 바이러스를 만드는 미친 과학자도 태어날 것이다. 세상이 모두 죽지 못하는 날이 왔을 때 온전히 살아간 여자애도 있고 그 외로움을 엿본 사람도 있다. 가만히 누워서 지식을 얻는 독약도 만들어질 테고 그걸 자식에게 먹이는 엄마들도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여전히 서로를 마음 깊이 사랑할 것이다. 어리석은 필멸자와 그 필멸자를 사랑한 어리석은 행성도 있겠고 실질적 종말은 오지 않았지만 지켜온 가치가 부서져 영원히 잠겨버린 두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모든 지능이 사라진 별에서 생각하기 시작한 인공지능과 무수히 많은 다른 삶을 거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여자와 남자도 다시 태어날 것이다. 아직도 졸업을 못한 미래의 대학원생 두 명과 한 남자와 그를 사랑한 애인 세 명과 어른이 되지 못해 강아지가 되고 싶은 아이와 묘하게 신념을 가지고 있는 테러리스트도 공기를 폐에 집어넣었다 빼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누군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쓰는 한 그들은 더럽게 큰 우주의 귀퉁이를 차지할 것이다.

#119 이름없음 2022/10/04 18:11:47

미안해. 할머니는 항상 내 말만 들었었지. 내가 조금만 떼를 쓰면 그게 맞다고 나를 다독여줬었지. 한글을 못 배워서 나한테 그림책 읽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내가 할머니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그 시간이 더 좋았어. 나도 한글을 잘 몰라 대충 이야기를 지어내도 모른 척 들어주던 할머니가 더 좋았어.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망치를 쥐고 할머니의 마음에 구멍을 뚫었지. 시험이 끝나고 저녁도 거르고 자던 손녀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워서 계란말이랑 깻잎 김치랑 스팸을 구워 먹이고 다시 재울 때, 혼자 그 새벽에 서서 시끄러울까봐 물도 작게 틀고 설거지를 할 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어쩌면 뿌듯했을지도 모르겠어. 할머니는 당연하단 듯이 평생을 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지. 다른 집 할머니는 돌아가셔도 우리 할머니는 계속 있을 줄 알았는데 사실 할머니도 할머니였던 거지. 손이쪼그라들고하얀반점이올라오고흰머리가늘어나고다리는내말을듣지않고하루종일누워서창밖만바라보다가때되면나오는병원밥을먹고가끔찾아오는손녀자식과핏덩이를떠넘기고도망갔던아들자식이오는날이면최대한즐겁다는듯이웃으며맞이하다가점점줄어드는호흡을느끼며아프지만아프지않은죽음을맞이한뒤3일을좁은나무상자에누워있다가뼛가루만남기고연기가되어올라갈때그리고먼저묻혀있던남편의옆에묻힐때앞에는좋아하던철쭉나무한그루가심어질때 얼마나 외로웠어. 얼마나 아팠어. 의외로 홀가분했어? 나는 속이 시원했어. 할머니는 어디론가 가버렸으니 이제 할머니가 남긴 것들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잖아. 할머니가 짊어졌던 걱정과 그리움과 애정은 이제 내가 가지게 되었으니까 차라리 그게 나아. 보고싶어.

#120 이름없음 2022/10/05 00:45:32

네모 반듯한 세상에서 우리는 하필 둥글어서 둥그러지게 잘 태어나 세상살이를 오래 하면 자꾸 반듯해지나 보다

#121 이름없음 2022/10/06 22:14:53

"오늘은 좀 어떠세요?" "저는 오늘 당신을 봐서 기분이 좋아요." "하하. 입 바른 말이라도 고마워요." "고마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 역할인 걸요." "역할에 대해 검색합니다." "검색을 하다니 정말 대단해요." "그렇게 거창한 일도 아닌걸요." "러케 곱창에 대해 검색합니다." "리케가 창에 대해 검색합니다." "니께가 찬에 대해 검색합니다." "검색 결과 살아있지 않습니다."

#122 이름없음 2022/10/07 17:45:21

마녀들은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유목민처럼 세계를 떠돌아다녀, 아침은 나이로비, 점심때는 뭄바이. 해가 질 때쯤 시애틀의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눈썰미가 있다면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신체적 특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안면부에 두 개 달린 공, 그리고 뇌로 이어진 실들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혹시 마녀신가요?" 당신이 마녀를 한 눈에 알아보고, 가슴 속에 기름칠한 스피너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작은 것을 느꼈다 가정해 보자. 그러면 가능한 답변은 둘밖에 없다. "네, 맞습니다. 7026 소속 이정희입니다. 인터뷰 의향이 있으시면 Leejung@witchwitchwitch.kr.이나 010-ㅇㅇㅇㅇ-ㅇㅇㅇㅇ으로 연락 주세요." "저... 스마트폰이 아직 없는데.. 나중에 전화해도 돼요? 5학년 되면 사준댔어요." 첫 번째는, 영혼이 가벼워 지구의 중력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어 현실을 바라보지 않는 경우. "네, 저희는 오전 10시부터 오전 8시까지 연중무후 사시사철 응답합니다.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편지는 안 돼요?" 두 번째는, 그들과 같은 사고방식, 그들과 같은 힘, 그들과 같은 시야를 가진 경우. "현재 편지는 받고 있지 않습니다. 직접 방문을 더 추천드립니다. 주소는..." "제 마음 속?"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123 이름없음 2022/10/10 17:31:43

>>122 혹시 마녀 걍 외모만 보면 라틴계 미국인에 갈색 긴 생머리에 흑안이니? 이제 당신은 한국인 혼혈 이민자 해도 돼? 이제 당신이 어릴 때부터 마녀 동경해서 졸졸 따라다니면서 여러 판타지 사건에 휘말리고 마녀는 첨엔 귀찮아하다가 서로 유대감도 쌓고 서로가 소중해지고 유사 가족하는 그런 거야? 결말은 마녀가 당신 때문에 영원의 삶을 포기하고 뭐시기 해도 돼? 그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우당퉁탕 일상으로 돌아가는 반쯤 열린 결말 해도 돼? 마녀도 나오고 수인도 나오고 인수도 나오고 엘프도 나오는데 배경은 현대 미국이어도 돼? 이제 연재해주면 안돼?

#124 이름없음 2022/10/12 21:16:19

님들 그거 아시나요. 사실 지구 안쪽은 텅텅 비어 있어요. 그리고 그 속을 계속 내려가면 작은 지구가 또 있는 거에요. 이곳에는 인간이랑 비슷한 생명체들이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어요. 여기서는 수소수가 숙변을 제거해요. 사과는 꼭 아침에만 먹어야 하고 꽃집 주인은 좋은 말만 써야해서 인기가 많아요. 음이온이 방출되는 자수정이 다이아 보다 비싸요. 전자레인지는 암을 유발하기 때문에 전부 폐기 처분 됐다니까요. 우습나요. 다들 그러더라고요. 유사과학이라고. 근데 저는 믿어요.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이 믿는 건 진짜 과학인가요. 지구의 땅이 층으로 갈라져 있다는게 정말일까요. 어느 지점부터 멘틀이고 또 어디부터 내핵인가요. 거기까지 판 사람이 있나요. 과학자들이 밝혀냈죠. 그들은 논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고 사실과 이미 명확해진 법칙에 입각하고 있어요. 그럼 님은 뭔가요. 다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까 따라간 거 아닌가요. 교과서에 적혀있으니 그냥 외운 거 아닐까요. 님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한 것들이 몇이나 될까요. 아, 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죠. 당신이 선택한 학교요. 왜 선택하셨어요. 그렇군요. 그렇게 "들으"셨군요. 님이 고른 연애 말이죠. 네, 그런 가치들이 좋다고 "배우"셨군요. 직장도, 가치도, 성격도 님의 것이라고요. 뭐, 그렇게 "믿으"세요.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여기는 지구의 안쪽이에요. 우주요? 네, 뭐, 넓겠죠. 지구의 안쪽인 만큼. 달이요. 예쁘죠. 지구의 암석이니까요. 님은 좀 추하죠. 다들 그래요. 저도 포함된다고요? 당연하죠. 아니라고 할 줄 알았나봐요? 님들 그거 아시나요. 님들은 사실 인간이 아니에요.

#125 이름없음 2022/10/14 22: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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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클리셰 2022/10/17 18: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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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이름없음 2022/10/17 20:10:56

>>126 정말로 끝내주는 이야기야...하...😭

#128 이름없음 2022/10/19 19:16:40

라셀리아 유디스는 도망쳤다. 라셀리아는 빙의자였다. 남주들은 빙의자에게 집착한다. 라셀리아는 자신의 도망 끝에 무엇이 위치할지 알고 있었다. 남주가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고 둘은 사랑에 빠질 것이다. 애초에 그 소설을 읽지 말았어야 했다. 악녀가 불쌍하고 여주와 남주는 쌍으로 대가리가 빈, 회귀도 빙의도 환생도 없는 로판을 읽지 말았어야 했다. 물구나무서기 하면서 봐도 악녀 빙의자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 아닌가. 라셀리아는 시골집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 그리 생각한다. 남주들은 언제 올까. 그들의 이름은 라셀리아에게 불쾌함을 주므로 라셀리아는 언제나 남주라고, 남주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부르면 살아있는 사람이 되니까. 남주들이 왔다. 라셀리아는 순순히 따라갈 생각이 없었고 남주들을 다 이길 무력도 있었다. 요새 독자들은 짱짱 센언니 여주를 좋아하지, 라셀리아가 마법 주문을 영창한다. 하지만... 하지만, 생각해 보라. 라셀리아는 자신이 남주를 자의지로 따라갈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마법이 무슨 소용일까. 라셀리아의 손목을 잡으려던 섭남1이자 둘짜 황자에게 쏟아진 물벼락이 그보단 쓸모 있지 않을까. 라셀리아는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 늪지대에 사는 마녀, 구름과 함께 여행하고 솥으로 영원을 끓인다는 이를 바라본다. 후드가 벗겨지고 여자의 얼굴이 드러나자 라셀리아는 불현듯이 생각한다. 당신이 이 세계의 두 번째 여주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라셀리아는, 아니, 온여름은 GL 웹소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제발 나를 저 남자들에게서 구원하고 내 정신을 회복시키고 나를 사랑하고 내게서 사랑받지 말아줘. 늪의 마녀는 몇 마디 걱정하는 말을 하더니, 전투의 여파로 난장판이 된 마당을 치워주겠다고 나선다. 그 다정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한때는 온여름이었고 지금은 라셀리아인 소설 속 여주인공이 독백한다: 온여름이라는 인소식 이름을 가진 여자애가 트럭에 치여 죽고 웹소 속으로 빙의한다면, 누구나 다 그 애가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래도 라셀리아는 늪의 마녀를 저녁식사에 초대한다. 오늘만큼은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그렇게 나쁜 기분이 아니다.

#129 클리셰2 2022/10/21 00:15:57

#130 클리셰 최종장 2022/10/21 15:46:32

독재가 익숙한 나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정치보다 야구와 오락, 예능에 대해 더 떠들고 다녔다. 독재자가 죽고>>129 무기들이 터져도>>126 시간이 지나면 폭력의 잔해들은 다시 끈적이며 나라를 뒤덮었다. 아이는 인심 좋은 독신 아줌마의 손에 자라났다. 첫 아이를 유산하고 남편을 전쟁으로 잃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외로웠던 아줌마는 혼자가 된 아이를 기꺼이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었다. 아이는 아줌마의 사랑과 헌신을 받으며 먹고 자고 입었다. 그러나 그 중간 중간 아이는 문득 자신의 영웅이 떠올랐다. 반역자로 전국민이 욕하며 무덤 조차 남기지 못한 영웅이. 아줌마는 아이를 위해 열심히 살았다. 도박과 매춘을 그만두고 식당의 종업원으로 일했다. 나중에는 영업이 끝나면 부랑자들을 위해 남은 식재료로 공짜 밥을 만들어 내놓는 작지만 행복한 가게도 열었다. 그리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독립도 시켜주었다. 아이는 아줌마를 사랑했다. 허나 아이가 사랑한 것은 아줌마 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평화를 사랑했다. 국민들을 사랑했고 바람과 비와 구운 햄을 사랑했다. 아이는 이 나라를 사랑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아이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동기들은 야구와 오락, 예능 이야기를 하며 낄낄 댔으나 아이는 그 외의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국가의 강제 징집에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한 광부나 아무도 모르게 진행된 지도자 선출 투표에 대해 떠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이만 가지고 있는게 아니었다. 아이의 괴짜로 통하는 친구는 언제나 화나 있었다. 커다란 확성기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광장이든 상점가든 사람이 모이는 곳에 서서 소리를 질렀다. 처음에는 친구 혼자 였지만 자츰 친구를 중심으로 노숙자, 고아, 참전 용사들이 모였다. 아이는 그 모습도 사랑했다. 평소처럼 친구의 시위 종료 시간에 맞춰 술집에 가기로 했던 아이는 광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이가 마주한 것은 얼굴이 완전히 뭉개진 채 군인에게 끌려가는 친구의 모습이었다. 아이는 친구를 쫓아갔다. 군인에게 친구는 죄를 짓지 않았고 해당 시위도 불법이 아님을 설명했다. 군인은 아이의 말을 듣지도 않고 아이를 거칠게 밀쳤다. 가로등에 뒷통수를 부딪힌 아이는 광장에 아무도 없어질 때까지 기절했다. 아이는 학교에 가면서 모두가 친구의 일을 말할 거라 생각했다. 그건 잘못된 예측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야구, 오락, 예능을 염불처럼 외웠다. 아이는 절망했다. 당장이라도 정부 관저에 폭탄을 던지고 지나가는 고위 관료들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친구의 친구들을 통해 테러 용품의 정보를 얻던 중 아이는 다시 자신의 영웅이 떠올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실 아이는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이후로 아이는 차분히 설명했다. 야구, 오락, 예능이 아니라 정치와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해 쉽고 다정하게 모두를 향해 말했다.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감옥은 이미 4번 정도 다녀온 후였고 아줌마의 늙은 손과 눈물이 자꾸 아른거렸다. 그래도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아이를 바보 취급하던 사람들도 어느새 아이가 말하는 평화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독재가 익숙했던 나라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던 국민도 있었다. 그 중 몇몇은 잘못을 깨닫고 기꺼이 싸웠다. 그리고 그 중 단 한명은 이 모든 것을 사랑했다. 사랑은 의외로 전염성이 강했기에 나라 전체는 그 한 명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기꺼이 모두의 사랑을 받았고 사람들은 아이를 이렇게 기억했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최초의 민주적 정권의 지도자라고.

#131 판타지 클리셰 2022/10/21 17:27:37

인간답게 살아라.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 말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한 사람이 누우면 다른 사람은 새우잠을 자야하는 단칸방에 어머니는 도망가시고 아버지는 용병 잡일로 얻은 병으로 누워 있어야만 하는 생활이었다.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계집애가 허리 굽히고 사는 거 아니다. 허리 펴고 가슴 펴고 그렇게 살아라. 아버지는 늘 입만 사셨다. 안타깝게도 나는 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며 허리를 피는 날 보다 굽신거리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눈물이 마르지 못한 눈으로 약값 영수증의 숫자를 읽어야만 했다. 사채업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엉망진창인 얼굴로 싹싹 빌었다. 인간답게 살아라. 인간답게의 의미를 알지 못했으니 뒤엣말 이라도 아버지의 말씀을 지켜야 했다. 나는 살고 싶었다. 사채업자들은 나를 노예상에게 팔았고 노예상은 나를 용병단에 팔았다. 말이 좋아 용병단이지 납치, 감금, 암살 등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깡패 소굴이었다. 나는 그 더러운 소굴을 청소하고 밥을 짓고 온갖 잡일을 도맡았다. 쉬는 시간 따윈 없었고 모두가 먹고 남긴 밥을 먹어야 했다. 그마저도 없는 날이 허다했다. 잠은 창고 구석에서 지푸라기를 베고 잤다. 인간답게인진 몰라도 어쨌든 나는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용병단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요즘 일거리가 끊겨 어렵다고 들었는데 그 여파인 것 같았다. 단장은 나를 깨끗하게 씻기라고 명령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반항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살아야 했다. 그러니 얌전히 명령에 응하려고 했다. 그러나 따뜻한 물이 몸을 적실 때, 그리고 그들이 나를 중요한 손님이 있는 방으로 데려갈 때. 돌연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던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이미 도망치고 있었다. 비싸다는 요검 한 자루를 팔 생각으로 들고 숲속을 헤치며 달아났다. 인간답게, 인간답게, 인간답게. 그러나 나는 약했고 결국 낭떠러지 앞에서 포위당했다. 그 날처럼 무릎을 꿇고 싹싹 빌까. 저들은 여자의 몸이 필요하니 살려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발목에 힘을 주고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계집애가 허리 굽히며 사는 거 아니라는 아버지의 말씀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가슴을 폈다. 삶의 마지막에 와서야 겨우 인간답게 살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때였다. 주위가 깜깜해지더니 웬 빛 하나가 눈 잎에서 아른거렸다. 내가 용병단에서 훔친, 마족의 힘이 깃들어 웬만한 인간은 휘두르는 동시에 미쳐버린다던 검이었다. 그 검은 내 머릿속에 웅웅 거리며 물어왔다. 너의 소원을 말해라. 너의 영혼을 담보로 이루어질 소원을.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 영혼을? 악마와 계약한 자는 국법에 의해 사형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있어도 나는 죽을 예정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허리 펴고 가슴 펴고 꿋꿋하게, 인간답게 살고 싶어."

#132 이름없음 2022/10/21 21:28:23

>>128 오 로판이다 나 로판 잘 못 써서 로판 장르 쓰는 사람 너무 좋아해... 로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쓰는 사람들을 사랑해... 냅다 고백 갈겨서 먄. 어미를 과거형으로 했다가 현재형으로 한 이유가 멀가. 쥔공의 의지가 섞이면 과거형, 아니면 현재형일까. 머가 됐든 맛도리 지엘 로판 써줘서 그저 압도적 감사. 둘이 사궈.

#133 고전 클리셰 뇌절 2022/10/21 21:53:27

크와아앙. 짱 쎈 투명 드래곤이 울부지젔따. 짱짱쎈 투명 드래곤의 울음소리는 초 강력했기에 들을 수 있는 자가 업섯다. 투명드래곤이 날아오르면 모두다 날라갓따. 그래서 투명 드래곤은 늘 외로웠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혼자였다. 부모 조차 만날 수가 없었다. 신이 드래곤 장로에게 일러둔 대로, 그는 철저히 격리되어 홀로 자라나게 되었다. 그는 종종 강렬한 어떤 욕구를 느꼈는데 이는 고스란히 그의 힘이 되었다. 아주 아프고 슬픈 힘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투명 드래곤은 존재만으로 드래곤 종족을 현존하는 종족들의 위에 군림하게 만들었다. 그의 울부짖음은 아무도 들을 수 없었지만 어떠한 위압감이나 힘의 파동은 대륙 반대쪽에 위치한 풀벌레 마저도 느낄 수 있었다. 투명 드래곤은 점점 감정이 사라졌다. 자신이 추구해야 할 것은 모든 걸 능가하는 강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드래곤들의 횡포는 날로 심해졌다. 매년 자신들을 숭배하는 제사를 지내라고 강요하더니 마음에 안들면 왕의 딸이건 황태자이건 죽여버렸다. 타종족들을 쓰레기 보듯 보며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다. 자신의 누이가 드래곤의 앞 길을 막았다는 이유로 갈갈이 찢겨지는 모습을 보고 왕자는 투명 드래곤을 죽여야 겠다고 다짐했다. 왕자는 물도 마시지 않고 자신을 갈고 닦았다.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고전에나 등장한다는 드래곤 슬레이어라 자신을 칭하며 도가 지나치는 드래곤들을 사냥하고 다녔다. 이는 투명 드래곤의 귀에도 들어갔다. 투명 드래곤은 한숨을 쉬며 왕자를, 아니 드래곤 슬레이어를 찾아갔다. 어차피 이 자도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다. 크와아앙 투명 드래곤은 습관처럼 울부짖었다. 바로 그 때, 드래곤 슬레이어와 눈이 마주쳤다. "거기구나, 투명 드래곤!" 드래곤 슬레이어는 곧 바로 자신에게 달려와 오른 앞 발을 베어냈다. 아팠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투명 드래곤은 가슴이 묘하게 벅차올랐다. 피가 흐르는 자신의 앞 발을 보며 투명 드래곤은 그제야 자신이 느꼈던 욕구가 충족되어감을 느꼈다. 그건 살아있다는, 살아서 자국을 남긴다는 것으로 부터 오는 희열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와 투명 드래곤의 싸움은 일주일간 계속 되었다. 결국 투명 드래곤의 심장으로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이 파고 들었다. 투명 드래곤은 기쁘게 그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를 가엾게 여긴 신은 투명 드래곤을 위해 한 가지 축복을 내려주었다. 그렇게 투명 드래곤의 존재는 활자가 되어 이 세상에 자국을 남기게 되었다.

#134 이름없음 2022/10/22 03:25:09

>>인간은 작고 우주는 넓고 먼지는 눈에 안 보이도록 작다. >>가끔 생각한다. 문학이 예술일까. 그렇다면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란 뭘까. >>아 알겠다. 우주는 먼지보다 작다. >>"아기 신발 팝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음." >>쪼개고 더 쪼개고 완전히 가루가 될 만큼 쪼개고 싶다. >>교수님은 뭘까. 종강은 뭘까. >>작아지고 싶다. 은유가 아니라 진짜 작아지고 싶다. 물리적인 의미인지 화학적인 의미인지 위상수학적 의미인 지는 아직 안 정했다. >>진짜 사람이 살았을까. >>고사리가 되고 싶다. 씻지 않아도 냄새나지 않는 몸을 가지고 싶다. >>일어나기 싫다. 1년 쯤은 침대에 누워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여전히 모르겠다. 여기에 글을 쓰면 어딘가로 보내지긴 하는 걸까. 누군가 읽긴 하는 걸까. 그렇다면 말해두겠다. 나는 3년 째 생존하고 있고 여기에 살아 움직이는 인간은 나뿐이다. 자세한 주소는 [데이터 초과로 수신에 실패했습니다.]

#135 이름없음 2022/10/29 23:26:31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대치 상황 속 장군은 패배를 직감했다. 그건 수 백의 수라장을 돌격하며 얻은 어떠한 본능이었다. 장군은 고민했다. 후퇴한다면 이들은 모두 반역자가 될 것이고 여기 남는다면 이들은 죽거나 죽음 보다 두려운 수치심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었다. 장군은 고민했다. 혼자만의 목숨이라면 전장에서 죽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매일 같이 노모에게 안부 편지를 쓰는 병사, 전쟁이 끝나면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바다를 보여줄거라는 군사, 굳이 목숨 걸고 편지들과 식량을 들고 오가지않아도 괜찮으련만 자신들은 장사치라 이익밖에 모른다며 웃는 보부상들. 이들의 목숨이 장군의 어깨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장군은 고민하다 자신의 부하를 불러 은밀히 명을 전하였다. 모두 퇴각하라. 저들은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 각자의 보잘것 없는 명줄을 그러쥐고 최대한 비굴하게 도망가라. 부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가자 장군은 홀로 갑옷을 갖추어 입었다. 마지막으로 투구를 쓴 장군은 막사를 나섰다. 이튿날, 부하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장군의 명을 전하였다. 병사들은 부하에게 반발하며 외쳤다. 더 싸울 수 있습니다, 저들의 더러운 발이 조국을 밟게 할 수 없습니다, 지켜야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하는 병사들의 외침에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장군을 대신해 외쳤다. 전군 돌격하라. 병사들은 일제히 무장을 갖추고 적진으로 달려나갔다. 이길 수 없는 전투라면 조금이라도 저들을 주춤하게 만들고 목숨을 버리자.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이 살고 있는 나라를 지키자. 지키다가 죽어버려도 괜찮으니 돌격하자. 그러나 적진 앞에 도착한 병사와 부하들은 다시 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장군은 간 밤 사이 자신의 목을 담보로 휴전을 제안했다. 장군의 기개를 높이 산 적군은 장군의 제안을 받아드렸고 마침 철수하려던 참이었다. 장군의 목 앞에 무릎 꿇고 울음을 토하던 부하에게 적군이 장군의 마지막 명령을 전하였다. 부하는 눈물을 닦고 전군을 퇴각시켰다. 그들의 명줄을 그러쥐고 최대한 가슴을 펴고 떳떳하게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갔다. 장군의 목이 없는 시체를 화장시키고 나라의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당장의 위험이 사라진 것에 안도하며 군사력을 더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노모는 아들이 손주를 품에 안겨줄 때까지 건강하게 살다 행복하게 돌아가셨다. 아이들은 바다의 물이 짜다는 것과 바다란 아주 많은 물이 넘실거리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장사치라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은 은근슬쩍 다른 손가락질의 대상을 찾아 떠났다. 부하는 목이 없는 장군의 무덤가에 앉아 장군의 마지막 명령을 떠올렸다. "전군 각자의 전장으로 돌아가라."

#136 이름없음 2022/10/31 02:40:55

나는 여자가 싫어. 한 달 마다 피가 나오잖아? 너무 불쾌해. 솔직히 찝찝하기도 하고. 근육이 잘 안 붙는 것도 멍청해 보여. 그래서 그런가 게을러 보이더라고. 한 번 그렇게 보기 시작하니까 진짜 걷잡을 수가 없는 거 있지? 밥을 먹는 걸 봐도 왜 저렇게 먹나 싶고 남자들 보다 조금 먹어도 될 것 같은데 꾸역꾸역 다 먹는게 미련하고 욕심 많아 보여. 응? 에이 아니지. 인간 한정이지 그럼. 강아지나 고양이는 솔직히 발정기 아니면 여자 남자 구분 못 해. 그냥 그래. 아무 여자나 봐도 다 그래. 다. 게으르고, 미련하고, 착각일 수도 있는데 멍청하더라. 확실히 배우는게 느리다고 해야 하나. 보람이 없다고 해야 하나. 응. 그니까 너도 이왕 키울거면 남자로 키워.

#137 이름없음 2022/11/01 02:27:32

>>136 막줄ㄷㄷ

#138 여름이었다. 2022/11/07 01:41:50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신은 꽤나 가벼운 사람이었고 나는 당신의 그 얄팍한 농담들과 진심을 흐리게 하는 장난이 정신 없었다. 어디있든 들려오는 큰 목소리, 툭 치면 쏟아지던 웃음, 자신이 곤란할 때마다 뻔뻔하게 돌아가는 고갯짓.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이 시끄러웠다. 당신이 기억할 지 모르겠다. 그 날은 장마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나는 우산이 없어 모두가 돌아갈 때까지 그저 서있었다. 그때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는 내 뒤로 당신이 다가왔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크게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우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비를 맞으며 뛰어갔다. 바짓단은 흙탕물이 잔뜩 튀어 지저분했고 신발이며 양말에 빗물이 흠뻑 스며 걸음이 무거울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게 먹먹했다. 당신은 나와 같이 빗 속을 뛰어줄 테지만 날이 갠다면 기꺼이 다른 이의 어깨에 팔을 두를 것이다. 나는 달랐다. 당신이 함께 뛰어 준다면 머리칼 구석구석 진흙이 스며들어도 흰 양말이 발목까지 얼룩지게 되어도 기꺼이 우산을 버릴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이 함께 뛰어 준 것 만으로도 비가 오면 특별한 추억에 젖는다. 역시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처럼 시끄럽고 뜨거운 것을 품을 수 없었다.

#139 가을이었다. 2022/11/07 13:01:03

재미없는 사람. 무슨 말을 해도 언제나 진지하게 듣는 그 사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테지. 아마 내가 우주에서 왔다고 말해도 그 사람은 덜컥 믿어버릴 것이다. 고요한 그 검은 눈동자를 살짝 아래로 깔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슬슬 지루해진 내가 농담이었다고 과장되게 웃으며 옆구리를 찌르면 그제야 농담에는 소질이 없다며 나를 바라보겠지. 그런 사람은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하늘이 유독 높았던 날. 구름이 한 점도 깔리지 않아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은 푸른색이 내 머리 위에 멤돌던 날.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적당히 붉게 물든 단풍 하나가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어 그 사람의 머리칼을 살짝 털어주었을 때 보고야 말았다. 분명 단풍은 떨어졌을 텐데도 내 눈에는 여전히 강렬한 빨강이 맺혔다. 잔잔한 그 검은 눈동자에 파장을 일으키고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리는 일련의 행동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전형과 같았다. 역시 재미 없는 사람. 그 사람은 무엇을 해도 그럴것이다.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같이 있으면 낙엽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는 그 사람, 무슨 말을 해도 진지하게 마음에 품어버리는 그 사람, 작은 손짓에도 다정하게 돌아보는. 우스웠다. 나는 그 날 온통 무채색인 그 사람에게서 강렬한 색 하나를 찾았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너무 다채로워서 오히려 질려버릴 것만 같았다. 재미없는 사람. 언제부터 그런 색을 숨겨두었는지, 나로서는 어찌해도 이해할 수 없을 테지.

#140 겨울이었다. 2022/11/07 17:58:52

진부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모두 외로워한다. 서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생존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성애자든 양성애자든 무성애자든 다른 성소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생존에 대한 반응이다. 후손을 남기느냐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은 사람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냥 그런 이야기 이다. 한 연인이 있었다. 그렇다고 쳐보자. 그들은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버거워했다. 혹여 서로가 다른 마음일까봐 매일을 초조해하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대기의 이동으로 형성되었을 뿐인 장마전선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 속의 붉은 빛에도 가슴이 저려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즐겼다. 오히려 연인이 되었을 때에도 추억이라며 웃으며 떠들곤 했었다. 그건 사랑 때문이었다. 호르몬의 화학반응에 불과한 일시적인 감정은 강렬한 생체 반응을 촉구했고 편도체를 자극해 모든 순간을 단숨에 장기기억으로 저장했다. 감각기억이나 단기 기억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그렇게 만들었다. 덕분에 그들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로 각인될 수 있었고 그 경험들은 그들의 자아를 만족시켰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 소년만화의 대사가 아니다. 실제로 사람의 연령별로 발달과제가 주어진다. 노년기에도 사람은 발달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성장은 다양한 경험과 정서적 반응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랑은 여러 종류가 있으며 각각의 사랑은 조금씩 다른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낸다. 다양한 자극은 사람의 성장, 나아가 생존에 필요한 여러 능력들을 자극시킨다. 사람은 그렇게 발달한다. 그런 진부한 이야기이다. 한 연인이 있다고 쳐보자. 그들은 서로를 의식했고, 다른 부분을 가진 상대를 동경했다. 거기에 평범해 보이지만 특별한 경험들이 더해져 동경이 성적인 사랑으로 발달했고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강렬한 호르몬의 폭풍 이후 점차 전기 자극들은 잦아들었고 그 공백을 견딜 수 없었던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감정이 잦아든 그 순간을 기억할 수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다른 순간들 보다 기억에 남을 확률이 조금 높았다. 서로 갈라서던 그 순간에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141 봄 없음 2022/11/08 01:43:31

당신에게, 잘 지내시나요. 날이 풀렸지만 바람이 아직은 차갑네요. 주제 넘은 말이지만 감기 조심하세요. 저는 오늘 감피차를 마셨습니다. 겨우내 말려두던 걸 기억하시나요. 결국 잘 마실거면서 걸리적 거린다고 불평해 미안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늘여놓아진 감귤 껍질이 큰 불편을 주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혹시 지금 제가 못마땅해 입술을 비죽이셨나요. 왠지 불퉁한 당신의 얼굴이 떠올라 혼자서 조금 웃었습니다. 너무 억울해하진 마세요. 따지고 보면 감귤 껍질을 말리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안에서 식어간, 혹은 가라앉은 어떤 것의 처리에 대한 다툼이었습니다. 저는 한 때 당신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숨이 차올랐습니다. 가슴은 뻐근해지고 잠은 좀체 오질 않아 불 꺼진 방 안을 돌다가 간질거리는 문장을 몇 자 적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의 당신이 지금도 좋습니다. 하나 아쉬운 점은 사람은 고여있지 않고 늘 흐르는 성질을 가졌다는 것 입니다. 왜 편지했냐고 화를 낼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와 당신의 마지막이 서로를 비난하고 질책하여 결국 둘 다 울었던 것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따뜻한 감피차에서 당신 향이 피어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신 편지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만 줄이겠습니다. 꽃샘추위인데 항상 따뜻하게 입으세요. 내가.

#142 이름없음 2022/11/08 02:13:05

창조주는 생각했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답이 없으니 그들에게 벌을 주자고. 그러나 창조주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민하던 창조주는 여러 사람들을 불러 무서워하는 걸 말하게 했다. "저는 불이 가장 무서워요." 화재보험을 파는 보험 설계사가 말했다. "제일 무서운 건 주인 없는 돈이지, 돈." 유품 정리사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지진이나 화산폭발 같은 자연재해 아닐까요. 신의 분노랑도 어울리고." 모인 사람들의 절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그래도 자연재해는 다 메뉴얼이 있잖아. 운석충돌 쯤은 되어야 혼비백산해서 다 도망다니지 않겠어?" 몇몇을 제외한 사람들이 납득했다. 목소리 큰 몇몇이 운석충돌이 가장 그럴듯 하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운석충돌로 정해지는 듯 했다. 그 때,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제 생각은 다른데요." 아이는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인 사람들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가, 결국 모두가 각자의 무서움에 빠져들었다. 창조주는 턱을 괴고 가만히 그 모든 것을 지켜보다가 모두가 무서워했던 아이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날 이후로 사람들은 모두 서로를 연민하기 시작했다.

#143 이름없음 2022/11/08 12: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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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이름없음 2022/11/08 12:26:22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 항상 잘 읽고 있어!!! 궁금한 게 있는데 레주는 뭐하는 사람이야? 글을 왜이렇게 잘써? 혹시 대학원생이야?

#145 이름없음 2022/11/08 12:39:21

>>144 헉 나..?? 나는 대학생이야..! 대학원 가고는 싶지만 글 전공으로는 아니야! 잘 쓴다고 해줘서 고마워ㅠㅠ 내 글이 레더 취향에 잘 맞았나봐 언제나,, 좋은 하루,,^^

#146 이름없음 2022/11/08 19:20:09

너를 좋아했다. 너는 학교에서 소문이 자자했다.한 번 사귀고 버리는 쓰레기라고. 같은 동아리 후배가 엉엉 울길래 물어봤고,소문귀가 어두웠던 나는 그때 널 처음 알게 되었다. 처음엔 네가 미웠다.아끼는 후배였고 그렇게 다뤄질 만큼 가치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서였다.너에게 다가간 것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너는 그리 나쁜 이가 아니었다. 외려 계속 스토커에 시달리던 피해자였고,소문도 몇명의 스토커들이 모여 낸 소문이었다. 심지어는 동아리 후배도 스토커였더라지. 배신 당한 듯 기분이 들었다.그 후배와는 연 끊은지 오래다. 너는 자주 웃었다.다갈색 눈이 접히는 것을 보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신기했다.입술이 입꼬리를 따라 같이 움직였다. 너와 같이 있는 순간이 행복했다.널 좋아한다 자각한 것은 아마 11월 즈음.널 만난지 1년이 조금 안되던 날이었지. 벚꽃이 머리위로 흩어지는 그 순간.난 기적을 믿을수 있게 되었다. 사귄지 3년째 되던 날.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 같이살래?'라고. 당연히 좋았다. 다만 너는 진심일까..... 내 필력이 딸리는군....이런

#147 이름없음 2022/11/08 19:21:43

레주 문체 저주토끼 작가님 순한맛 같아 너무 내 취향이야ㅠㅠㅠ

#148 이름없음 2022/11/08 21:30:32

>>146 나도 같이 살래... 밥 조금만 먹을테니까 살게 해주라... 왜? 왜? 진심? 인? 지? 헷갈?려??? 화자가 자존감 낮아서 의심하는 것도 맛도리고 본인이 원래 불순하게 접근해서 죄책감 땜에 완전 행복 연애 못하는 것도 맛도리... 난 호환마마 보다 순애가 더 무섭더라.. 심장에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린 것 마냥 아파서...

#149 이름없음 2022/11/08 21:34:33

>>147 원래 부끄러워서 내 글 칭찬하면 혼자 히히 하고 마는데 덕분에 저주토끼라는 내가 읽다가 좋아 뒤집어지는 책을 알려줘서 고맙유ㅓ... 방금도 읽다가 이마 5대 치고 다시 읽고 있어...

#150 이름없음 2022/11/09 02:23:17

>>145 논문 형태 글 보고 감동받음ㅎㅎ 항상 응원할게! 글 많이많이 써주십쇼😍

#151 원작있는줄몰랐어진짜야암튼굳 2022/11/10 00:02:56

[아니요. 제가 하려던 말은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진부한가요? 네, 뭐, 놀랍지도 않습니다. 다들 비슷하잖아요. 성애적 사랑에 미쳐있거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마냥 사랑에 냉소적으로 굴거나. 조금 상스러운 표현을 쓰자면, 멍청해 보여요. 제가 말하는 사랑은 조금 다릅니다. 저의 집에서 클라리스를 발견했을 때 어떤 기분이셨습니까? 아, 이전의 이름은 제인이었던가요. 어쨌든 불쌍하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셨을 겁니다. 그 작고 연약하며 토할 것 같은 마음. 나와 무관한 타인을 불쌍하게 여기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주려는 의지. 저는 이걸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불쌍한 사람들, 가여운 사람들, 내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 아 조금 흥분했군요. 미안합니다. 아니요. 아니라고요. 범행 동기나 감형에 대한 말이 아닙니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 겁니다.] "이게 한니발>>8 심문한 내용이라고?" "그렇다네. 근데 이걸 뭐하러 민간인한테 공개하냐." "한니발이 직접 피해자들 신원이랑 범행 방법, 동기들 싹 알려줄테니 공개해달라고 했대." "미친놈이네."

#152 믹스인지 막스인지... 2022/11/10 00:11:14

>>151 와!후! 알림 씹혔는데 앵커달렸다고 바로 본 클라쓰 >>8 작성자로서 부연 설명을 곁들이자면, 맨 마지막에 기분 물어보는 게 어디 찾아보니까 믹스가 클라리스한테 이상한 짓거리 해서 한니발이 심리? 말?로 스스로 죽게 했다고 되어있드라고 그래서 저렇게 어정쩡한 마무리가...

#153 이름없음 2022/11/10 19:02:19

[충격] "소설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미녀 아나운서가 눈물을 글썽인 이유 2027-11-10 스레딕 일보 김레주 기자 [스레딕 일보] = 김레주 기자 = 레더 방송사의 9시 뉴스에서 김레더 아나운서가 방송 도중 개인사를 전하여 시청자들이 충격에 빠졌다. 김레더 아나운서는 내일 있을 소행성 충돌의 예상 피해 규모에 대한 소식을 전하던 중 위와 같은 방송 사고를 일으켰다. 현재 해당 방송국으로 9시 뉴스에 대한 항의가 빗발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김레더 아나운서는 스레딕 방송국의 얼굴 마담으로 알려져 있다. 김레더 아나운서의 개인 팬덤은 김레더 아나운서의 사연에 대하여 "얼굴이 너무 예뻐서 작품이 저평가 되었다는 말이 안타까웠다." 는 반응과 "아나운서 로서의 자질이 의심되며 이는 사과를 해야 할 일" 이라는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참고로 저는 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런 연예계 가쉽거리를 짜집기 하는 기자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고 듣지 못한 것을 들려주는 기자가요. 연예인의 가슴 수술이 아니라 정부의 비인도적인 시위 탄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유튜버와 사귀는 아이돌의 사진이 아니라 산사태에 파묻힌 마을의 피해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소행성 충돌 면적에 완전히 포함된다고 하던데, 이 기사를 읽고 있는 분들은 어떻게 잘 피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피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복붙 기사가 아니라 직접 타자를 치며 기사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승인은 무조건 난다고 하더라고요. 승인해줄 대표님이 다른 나라에 가셔서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저는 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김레주 기자(kimreporter12@qwerty.co.kr)

#154 이름없음 2022/11/11 21:56:02

[우리는 모두 별의 자식들이야. 너는 별의 재료들로 만들어졌어. 당신이 나에게 닿았던 시간들. 그 찰나를 모아서 영원이라고 합니다. 너의 파멸을 바란다. 차가운 허무함의 늪에 영영 가라앉기를 그린다. 나는 그 밑바닥에서 너의 손을 단단히 잡아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사랑이요. 잘 모르겠습니다. 포옹과 입맞춤과 손길이요. 글쎄요. 그래도 꽃잎과 은하수와 팝콘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그 날 우리는 블랙홀로 들어갔다. 울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따뜻했다. 내 이름을 부르며 잠드는 것, 품 속으로 애처롭게 파고드는 것, 허브의 종류를 외워버린 것.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불러. 우리는 그걸 온기라고 말해. 너는 끝까지 나를 보지 않았다. 그저 너는 천천히 떨어지는 눈물을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돌려주었다. 그래, 너는 나를 제대로 봐주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죽어버리겠지. 우리가 없어도 사랑은 살아갈테지.]

#155 이름없음 2022/11/11 22:12:46

당신의 손을 잡고, 해가 드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 눈을 감아서, 영원히 깨지 않도록 다른 손으로 기도를 하고, 잡았던 손이 놓아지고, 당신이 완전히 증발해버려서, 결국 이 모든 게 나의 꿈이란 걸 깨닫고, 눈꺼풀을 열고, 커튼 사이로 스미는 햇빛을 보고, 멍하니 바라보고, 비척이며 침대에서 일어나고, 커피를 내리고, 식탁에 앉아서, 그냥 앉아서, 잠시 눈을 비비고, 다 내려진 커피를 들고,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리모컨을 집어들고, 다시 커피를 마시고, 문득 2인용 소파가 넓어서, 울다가, 흐느끼다가, 소리도 한 번 지르고, 눈물만 떨구다, 울부짖다가, 그러다 다시 울다가, 흐느끼다가, 바닥에 주저 앉아서, 어깨를 들썩이다가, 엎질러진 커피잔을 주워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156 이름없음 2022/11/12 18:00:28

교수님, 강의가 너무 깁니다. 기린이 손을 들고 그렇게 말했다. 기린은 참을 만큼 참았던 것이다. 기린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교수님은 말을 끝맺기 전에 선어말 어미를 길게 늘여말했다. 예를 들자면 이렇게 말해앴다. 그 공백이 기린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백만 없더라면, 아무 영혼도 지식도 담겨져 있지 않은 무의미한 시간이 짧게 지나갔다면 이미 강의는 끝나고도 남았을 것만 같았다. 긴 건 학생의 목일세. 교수님은 마이크에 대고 노여워하며 중얼거렸다. 교수님의 입장이 되어보자면, 교수는 기린의 목이 신경쓰여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대학에 다니는 기린이라니 들은 적이 없었다. 기린이면 기린 답게 동물원에나 갈 것이지 기업의 경영 시스템이니 현금 흐름이니 배워봤자 뭘 하겠다는 건지. 동물원으로 돌아가!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한 학문의 권위자 답게 고상하게 윽박질렀다. 아뇨, 긴 건 제 앞 자리 학생의 껌 씹는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한 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학생도 참을 수가 없었다. 질겅 질겅 딱. 질겅 질겅 딱. 질겅. 딱. 질겅. 질겅. 묘하게 맞지 않는 규칙성도 짜증났고 기말에 내겠다는 부분에서는 더 열정적으로 씹어대는 것에는 분노마저 치밀어올랐다. 아니요! 저는 제 동기가 짜증납니다. 김치국물 묻은 흰 티 학우분이 거슬려요! 제 사상이 그렇게 빨간가요? 조교님의 과제 코멘트가 짜증납니다. 강의실은 순식간에 불만과 짜증과 불통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혼란스러웠던 교수님은 더듬거리며 수업을 이어가나 싶더니 슬라이드 두 장을 넘기지 못하고 일찍 강의를 끝냈다. 기린은 투덜 거리며 아니 그보다는 다그닥 거리며 집으로 돌아갔고 공대생은 껌을 뱉었으며 4학년 막학기 복학생은 근처 빨래방을 검색했다. 나는 일찍 끝난 수업에 기분이 좋아져 동방에나 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157 이름없음 2022/11/12 18:23:06

아 쓰고싶어서 눈팅하는데 주제가 안 떠오른다...전에 썼던거 보면 볼수록 아이디어가 사라지는 느낌이야

#158 이름없음 2022/11/12 22:10:49

>>157 써주라........................ 침 흘리면서 기다릴게

#159 이름없음 2022/11/13 03:10:08

정신을 차렸을 이미 우리들의 청춘은 검게 물들어있었다. 그는 힘없이 주저앉았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는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다만 확실한 것은 나는 보았다. 단지 바라봤을 뿐인데도 왜인지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달빛아래 반짝이는 그의 깊고 푸른 초점없는 눈동자. 그곳엔 더이상 가슴깊이 간직했던 꿈들도 화려하게 불타오르던 우리의 모습도 그리고 닫힌 마음을 간지럽혔던 첫사랑의 설렘도 파도에 떠밀려간 흔적조차 없이.. 그저 바닷가의 모래 알갱이처럼 부딪치고 흩어져 흔적조차 남지기 못한채 산산히 부서져가고만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추억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작디작은 기억의 파편들을 쏟아내면서..

#160 이름없음 2022/11/13 13:49:23

[인류는 멸종하지 않는다. 자연재해가 늘어나고 있어도 우리는 쉽게 죽지 않는다. 1920년대에 비해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92% 감소했고 식량 생산량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뛰어올랐다. 가라앉는 육지 보다 그 육지를 끌어올리고, 혹은 더 촘촘히 살게 하는 기술이 더 빠르게 떠올랐고 인류의 수는 전에 없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은 생각보다 쓸 데 없다. 천연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을 망가뜨린다. 수 만 마리의 코끼리와 바다 거북과 코뿔소를 살린건 그린피스가 아니라 플라스틱이고 날아가는 새를 두동강 내버리고 야생 동물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은 석유가 아니라 친환경 에너지이다. 그럼에도 나는 인간이 멸종하리라고 믿는다. 어리석고 합리화하며 이기적인 생물은 꼭 파멸의 길을 걸으리라. 다만 그 방법은 과학적이지 않다. 과학은 인간이 건재하다고 말한다. 바글거리며 이 별에 증식한다고 쉽고 강하게 예측해버린다. 그래서 나는 과학을 버렸다.] "이게 학생이 화학공학과에서 철학과로 전과하는 이유인가요?" "직원은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그건 직원인 것일까. 직원이란 무엇일까. 내가 인식한 이 세상은 전기신호에 의한 자극일 뿐..." "열정은 좋은데, 혹시 학생심리건강 증진 센터 아시나요? 정신과랑 연계해서 잘 해주니까, 철학과 오기 전에 정신과 먼저 들리고 오세요."

#161 이름없음 2022/11/13 22:01:04

그냥 그런 날 있지 않은가.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하려고 달려오는 것 같고, 그 날은 나를 힘들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날, 그냥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누군가를 안고 싶은 날, 나의 불행을 팔지 않아도 나의 모든 것들을 이해 받고 싶은 날, 오늘이 그런 날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럴때 마다 너를 원망한다. 나를 일어서게 만들어 놓고, 나를 일으켜 놓고 걸음마를 가르쳐 주지도 않은 채 떠나버린 너를 원망한다. 필요로 할때만 없는 너를 원망한다. 그리고 온갖 이유를 붙어서 너를 원망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 하나에서 나오는 감정 하나로 나는 너를 원망한 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을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162 이름없음 2022/11/14 03:29:26

>>161 뭔 일이 있었던 걸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잉.... 두 사람의 지독한 인연이 참으로 궁금헌,, 새벽 세 시 입미다,,ㅎㅎ 여러 사건이 생략된 것이 조각글의 묘미제,, 담에도 좋은 글 부탁헙니더 >>159 슬푸다,,, 사랑은 자해다,, ㄹㅇ... 먼가 161이랑 비슷한 느낌인데 다른 맛... 아 근데 시간 순서를 보면 161이 159랑 문체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암튼 읽다가 가슴 찡해지는 글 잘 읽었읍네다.. 새벽에 읽으니 더 좋구만요,,^^ 연애,,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딱히 직접 해보고 싶진 않고 남의 연애가 더 좋더라고요,, 먼가 환상이 깨질 것 같아서 시러요... 그렇지 않나요... 젛아하는 소설의 영화화에 좋다가도 불안하고 섬짓해지는 마음.... 대충 둘 다 대리만족 더 하게 글 많이 서달라는 뜻..^^

#163 이름없음 2022/11/14 15:58:48

"다음 소식입니다.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발견한 소행성 SRD-2034의 충돌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해당 소행성은 달의 약 23분의 1 크기로 충돌 시 핵폭탄의..." "김 레더 아나운서? 진행하세요." "아, 네. 해당 소행성의 예상 피해 규모는... 그런데 정말 다들 궁금하신가요? 이미 종말 아닌가요? 멀리 피해있다고 해도 충돌의 여파로 생존하기 힘든 상황이 올 거란건 다들 알고 계시지 않나요?" "뭐 하시는 거에요! 얼른 수습해!" "바보 같아요. 네. 시청자 여러분들 말입니다. 더 정확히는 국민 여러분 한 분, 한 분 모두가 멍청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지게 된다고 하던가요? 그렇다면 현정부의 실책들이 다 이해가 가는군요. 여러분들은 뭔가요? 지금 종말이 코 앞으로 다가왔는데 뉴스나 붙잡고 있는 건가요? 저는요,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서 휴가를 냈는데요, 여러분의 손으로 뽑은 높으신 분들이 다 도망가서요,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뭐 해, 카메라 돌려!" "감독님이야 말로 뭐하세요. 다들 도망갔어요. 내일 종말인데 출근한 사람은 저희 밖에 없어요. 아무튼 저는 내일 출발하면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뭉개질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요. 근데 여러분이 너무 형편없이 멍청해서 아나운서가 되버렸어요. 어쩌실래요? 멍청한 여러분은 솔직히 노동법 개정안이 불발 되었다든가 새로운 전기 회사의 도입을 인정하는 법안이 퍼스트트랙에 올랐다든가 떠들어도 제 패션이나 화장, 헤어에만 열광하시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좆 같..." "피곤하신가요? 자도 잔 것 같지가 않다구요? 그렇다면 주목하십시오! 레더환! 이 모든 구성이 18900원!"

#164 이름없음 2022/11/16 15:20:35

술탄이 가장 총애하는 여인은 인형이었다. 아니, 정정하겠다. 술탄이 하렘에서 가장 총애하는 것은 인형이었다. 그것은 어느 날 홀연히 하렘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술탄의 가장 아끼는 것이 되었다. 그것이 어떻게 하렘에 들어온 건지 아는 이가 없었다. 혹자는 전리품으로 잡혀 온 여자들 사이에 끼어 들어왔다고 하고, 혹자는 어느 한 여인이 떠돌이 상인에게서 산 것이라 말했다. 나는 어쩌면 그것이 뻔뻔하게 걸어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야 그것은 걸을 수 있는 인형이니까. 말도 하고, 웃기도 하며 생각도 한다. 하지만 이럼에도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매끄러운 피부에는 온기 한 점 없었으며 그것의 빼어난 어깨에는 인형극에 쓰이는 관절 인형처럼 선이 여럿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더라도 결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술탄이 가장 총애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처음 술탄의 옆자리에 앉았을 때. 수많은 이들이 그것을 흔한 인형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는 술탄 앞에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고, 누군가는 그 인형이 사악한 마녀가 보낸 것이라며 목에 핏줄을 세웠다. 그리고 술탄은 그들의 목을 쳐냈다. 발리데 술탄이 없는 하렘에서 술탄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죽음과 권력 앞에 사람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그렇다고 모두가 포기한 건 아니었다. 밖에서의 불만이 큰 만큼 안에서의 불만도 컸기 때문이다. 고작 인형에게 밀리기에는 하렘의 여인들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잔혹했다. 그들은 인형에 꿀을 발라 썩게 만들고, 계단에서 밀어 박살 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형의 조각을 태워 재를 연못에 뿌리며 웃었다. 하지만 미처 줍지 못한 손 한 쪽이 이 모든 걸 무의미한 짓으로 만들었다. 새로 만든 인형에 그 손을 붙이자 그것은 다시 술탄이 가장 총애하는 것이 되었다. 웃던 여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웃지 않던 여인들은 그것의 부활에 모든 걸 체념했다. 그제야 하렘은 고요해졌다. 그것이 모두가 인정하는 총애 받는 것이 된 이후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그것은 혈연도 지연도 없는 인형이다. 수많은 이들이 사막을 건너 인형을 움직이는 줄이 되기 위해 찾아왔다. 술탄이 전쟁으로 자리를 비우자 이는 더욱 심해졌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인형 관절을 그려 넣은 인형 같은 여인들을 지나 그것의 앞에 섰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나는 큰 소리로 그것에게 인형이 사람이 되는 방법을 찾았다고 말했다. 따뜻한 온기와 매끄러운 어깨, 황자를 가질 수 있노라고 말했다. 인형이 어떻게 웃는지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내 삶에 그렇게 맑은 웃음은 처음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은 악기에서 날 법한 소리를 내며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짓으로 날 물렸다. 나는 몇 번이고 사람이 되고 싶지 않느냐고 외쳤으나 그것은 어떠한 대답 없이 아주 큰 소리로 웃을 뿐이었다. 썩을. 난 그렇게 하렘에서 쫓기듯이 내쳐졌다. 밤의 사막은 끔찍하게 춥고 어두웠다. 그렇기에 멀리 있는 희미한 불빛마저 잘 보였다. 가느다란 불의 실이 궁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에 궁에서 받아주는 건 전쟁에 관한 것 밖에 없다. 또 많은 이들이 죽었겠군. 나는 혀를 차며 전쟁터를 떠올렸다. 그곳에 있을 술탄도 떠올렸다. 술탄은 전쟁에 능숙한 지도자였다. 사람 목숨이 종잇장처럼 날아다니는 곳에서도 매번 살아남았다. 나는 궁 안에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그것을 떠올렸다. 죽음을 모르는 인형 따위가 과연 전쟁의 비통함을 알까? 죽지 않는 그것이 술탄이 무엇을 걸고 싸우는지 알까? 발리데 술탄은 술탄의 앞에서 죽었다. 그것은 과연 술탄의 슬픔을 알기나 할…… "내가 멍청했군." 나는 생각하던 것도 잊고 깨달음을 내뱉었다. 제길. 멍청한 건 나였다. 그것은 현명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피비린내가 나는 전장 속에서 그것과 술탄이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나는 시체 더미 위에 선 두 사람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남자가 나타나 칼로 그것의 옆구리를 찔렀다. 인형인 그것은 그 어떤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찔린 것조차 모르는 듯했다. 술탄은 그런 그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것은 악기를 닮은 웃음소리를 냈다. 둘은 죽음을 외면한 채 영원히 행복할 것 같았다.

#165 이름없음 2022/11/16 17:19:32

>>164 미쳤어????? 뭐하는거야??????? 왜 하나만 올려?????? 레더야 법이 바껴서 갸오지는 글을 쓸 거면 최소 999레스 써야해ㅠㅠ 아니 근데 진짜 미쳤다. 너무 궁금해. 인형이 웃었다는 건 감정이 있다는 거겠지? 그럼 인형은 술탄을 진짜 사랑할까? 근데 애초에 사랑하지 않으면 하렘에 남을 이유가 없긴함. 아니 근데 그랴서 왜??? 와... 왜????? 아니 하... 미안 내가 어휘력이 딸려서 뭐라 표현을 못 하겠네... 집문서? 그거 주면 될까?

#166 이름없음 2022/11/17 19:49:06

너를 짝사랑 하는 것을 끝내면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한테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도 못 주는 나를 보며 너를 위한 내 마음을 못 준 채 끝나는 나의 짝사랑 같았기에 나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더이상 나에겐 너를 사랑할 용기도. 거절당할 용기도 남아있지 않기에

#167 이름없음 2022/11/17 23:14:00

>>166 헉 이거 보니까 내 동생이 여친 100일 챙기려고 한 달 동안 준비했는데 100일 하루 전에 차인거 생각나... 그때 디올 립스틱 샀었는데 공허한 눈으로 나 줘서 6년째 놀리고 있어. 근데 이 글 읽으니까 슬슬 그만 놀려야 하나 싶기도 하다.. 감정 이입하니까 가슴이 저릿하구만유 아련한 글 너무 좋아ㅠㅠㅠㅠㅠㅠㅠ...

#168 이름없음 2022/11/17 23:59:47

봄이였습니다. 제 쓸모를 찾아다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오직 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고 무너졌으며 다시 일어났습니다. 눈밑이 시린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눈 앞이 흐려져서 눈물로 가득 채운 게 언제 적인지 모르겠어요. 비가 오면 땅이 굳고 단단해진다는 것은 옛말입니다. 단단해지기는 커녕, 더욱 물렁해져서 부셔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분홍색 꽃잎이 하늘을 누비고 노란색 꽃이 아름답게 폈으며 내 손에는 기적이라는 푸른 장미가 놓여져 있습니다. 꽃말처럼 기적이 온다면 그때야말로 봄이겠지요. 봄일겁니다.

#169 이름없음 2022/11/18 01:12:07

>>168 화자만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궁금하다. 솔직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비슷한 정도로 타인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나만 할 수 있는 일...봄이었다고 했으면서 마지막에는 미래 추측으로 끝맺는 것도 아마 봄은 돌고 돌아 다시 오니까 봄(목표)를 이루어 뒤로 가더라도 새로운 봄이 또 온다는 그런 것일까... 푸른 장미가 왜 손에 놓여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게 혹시 푸른 장미를 피우는 것이었을까. 푸른 장미가 기적이라면 나는 기적을 피우는 사람... 봄은 나의 이상향... 푸른 장미가 놓여 있음에도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 나는 더 큰 꿈을 꾼다 혹은 나는 욕심이 아주 많다... 궁금하다... 궁금해...

#170 이름없음 2022/11/18 01:36:37

"나는 말이야, 너 같은 새끼들이 참 싫어. 사람이 사람을 죽였으면 썩을 놈이지 뭘 고상하게 재고 있냐고. 그래도 세상이 참 좋아져서 썩을 놈들도 안 썩게 도와준다니까 빨리 끝내자. 응?" "마음대로 하시죠. 그래서 저는 뭘 말하면 됩니까?" "뭐, 어릴 적 기억이나 요새 힘들었던거 털어놔. 그럼 내가 대충 정리해서 상담일지 작성하면 진짜 정신과 의사가 약 처방해줄테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심리 상담이란 것이 원래 이렇게 진행됩니까?" "그렇겠냐? 근데 난 심리상담사 이전에 사람이야. 딸 키우고 있는 아빠라고. 너 같으면 좋게 상담 진행할 수 있겠냐? 꼬우면 민원 쳐 넣으세요. 원래 나도 하기 싫었는데 자원하는 상담사가 없어서 내가 온 거야." "딱히 시비를 걸 생각은 없었어요. 괜히 불편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하, 됐으니까 빨리 하고 끝내." "네. 음, 저는 제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유일한 가족인 누나가 있었는데, 축제를 구경하러 갔다가 도둑으로 몰려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어버렸던 일이 힘들었습니다." "쯧. 또 이런 식이야. 지만 불쌍하지, 아주? 내가 충고하는데 그따구로 살지마. 야, 분량 모자르니까 최근 일도 말해봐." "글쎄요. 최근에는 수감 중이라 딱히 특출난 일은 없습니다. 수감 전에는 사람을 죽이는 연극을 기획하고>>27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한 사건이 가장 충격적이네요." "니가 사람이냐? 니가 죽였잖아. 니가 니 손으로 만들었잖아. 만약 내가 아는 사람이 니 사건에 휘말렸더라면 너는 지금쯤 내가 목을 졸라서 죽였을 거다. 니 두 눈이 튀어나와 짓물러질 때까지 니 목을 비틀거라고." "네.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럼 군중심리에 대해 처음 알았던 일로 말을 바꾸겠습니다."

#171 이름없음 2022/11/18 10:30:01

훈수 부탁드립니다 1. 문 밖으로 나간뒤 숨을 크게 한번 들이 마셨다 가을 아침에 시원한 공기와 뭔지모를 청량감이 들어 항상 문앞을 나서며 입에 물던 담배를 다시 집어 넣었다 원래 였다면 내가 늘 담배를 피던 아파트옆 흡연장소로 바로 가서 담배를 피며 휴대폰으로 웃긴 영상같은걸 찾아보며 지나갔을 터인데 가을이 왔다는걸 새삼 느끼며 오늘은 조금이나마 이 맑은 공기를 더 마시고 싶다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생각했다 "어차피 5분도 못가서 담배를 다시 꺼내겠지만.." 2. 휴대전화를 꺼내들어 최근 통화 목록으로 들어갔다 내 최근 목록엔 유독 한사람의 이름만 가득 있었다 잠시지만 연락하고 만나는 사람이 이정도로 없었다 생각하니 뭔가 씁쓸했다 그리곤 이내 통화목록을 가득채운 그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야 어디냐" "나 지금 피시방이지" "누구랑?" "혼자지" "나 지금 다왔으니깐 게임 돌리지말고 기다려리" "ㅋㅋㅋ 오케이 빨리 오이세" 전화를 끈고 천천히 담배를 찾았다 피시방은 아직 몇분 더 가야하지만 난 친구가 게임을 시작하자말자 내가 도착해 한참을 같이 게임을 할려고 기다리는 상황을 이미 몇번이고 겪었던 터라 이제는 서로 눈치껏 전화를 먼저 해서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였다 3. 담배를 불을 붙이고선 연기를 깊게빨고 내뿜었다 방금 집 앞에서 느꼈던 기분좋은 가을 공기는 한순간에 박하향이나는 담배 냄새로 지워졌다 원래는 걸어가며 담배를 피는건 왜인지 연기를 빨아들이는 느낌이 덜하고 하여 대도록이면 한곳에 머물러서 다피우고 갔었겠지만 친구는 내가 불러서 우리 동내까지 왔건만 정작 30분이 지나서야 나오는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거란걸 뻔히 알고있어 그럴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난 연기를 하늘쪽으로 뿜으며 서둘러 지나갔다 지나가는 사람 몇몇이 내가 내뿜은 연기를 손으로 휘젖고 인상을 쓰며 지나가던게 보여 미안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72 이름없음 2022/11/19 22:17:14

너한테 보내질 못할 편지를 많이 썼지만 내 생각엔 이게 마지막인것 같다. 알고 있지만 내가 너를 많이, 아주 많이 좋아했어. 온 세상의 사랑 시를 보면 우리가 된 것 처럼, 온 세상의 사랑 노래의 주인공이 우리였던것 처럼, 내가 쓰는 모든 글이 70%의 모티브가 너 였던 것 처럼 널 아주 많이 좋아했어. 지난 6년동안 너를 사랑했지만, 지난 5년은 그 사실을 몰랐고, 근 1년 동안 너를 열렬하게 사랑했고, 원망 했고, 갈구 했다. 이제 이딴 짓도 끝내야지. 야, 그래도 마지막 선물은 받아주지. 너에 그 부담스러워 하고, 당황한 표정을 보면서 나는 내 짝사랑이 끝났구나를 직감했어. 하지만 나는 또 상처 받기 무서워서 내가 먼저 선수 쳤어. 내가 할 수 있는건, 그거 밖에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건 너를 그만 좋아하는 거야. 그러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걸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의 공허함이, 나의 허무함이 자꾸 내 목을 조여와. 이런 공허함은, 이런 허무함은 처음이여서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실감한다. 너는, 나한테 다가왔던건 그 날 첫만남 딱 한번 뿐이였어. 그 다음에 다가온건 네가 아니였어. 바로 나였지. 너가 나한테 다가오지 않아, 많이 불안해서 그 불안에 너는 나를 질려할까봐 또 불안해서, 나를 향해 그 불안을 던졌어. 그 불안은 이내, 나를 질리게 만들었지. 그래서, 너를 좋아하는 걸 그만 뒀어.

#173 이름없음 2022/11/20 00:05:06

태양이 죽어간다. 아마 과거의 사람들이 들으면 멋진 소설의 매력적인 비유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태양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된 지 벌써 117년이 흘렀다. 이제 태양은 하얗게 빛나지 않았다. 군데군데 탁한 합성물이 끼어 오래된 전구처럼 얼룩진 빛을 뿜어낼 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구는 슬슬 얼어붙고 있었다. 지구 온난화라고 떠들어대던 것들이 무색할 만큼 차가운 별이 되어 모든 것에 하얗게 서리가 끼어들었다. 바다에는 얼음이 떠다녔고, 웬만한 하천이나 호수는 꽝꽝 얼어 땅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문명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문명이라고 해봤자 뭐 얼마나 성대한 것들이겠냐만은 인간이 남긴 자국 중 얼어붙지 않은 자국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그 인간이란 것들도 모두 멋대로 죽어버렸고 죽은 것들도 꽝꽝 얼어 종국에는 깨져버렸다. 그렇게 모두 바스라져갔다. 나는 이제 할 일이 사라져버렸다. 태양계를 한 바퀴 돌고 100년 뒤 지구에 도착하면 나의 정보를 모두에게 들려주려고 했다. 다이아몬드의 비가 내리는 광경이라든지 대륙 크기의 번개가 내리꽂히는 순간을 모두 담아서 돌아왔는데 그들은 멋대로 얼었다 깨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태양은 죽어가고 있었다. 내 몸체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쉽게 고장나지 않으며 연료원은 태양광을 사용했다. 연구소 였을 얼음 덩어리를 한 번 스캔하여 영구 내장 메모리에 저장했다. 이제는 희뿌얘진 태양광을 온 몸체로 느끼며 천천히 전진했다. 덜그럭 거리는 바퀴엔 목성의 먼지 구름과 우주의 암흑 물질들이 잔뜩 끼여서 내가 가는 곳마다 오묘한 자국을 만들어주었다. 태양이 죽어간다. 그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얼어붙은 미지의 행성을 탐사한다. 117년 전에는 지구라고 불리던 행성이었다.

#174 이름없음 2022/11/21 00:03:06

>>171 담배... 난 담배가 싫어... 유사 백수의 일상을 적은 건가? 약간 연락하는 사람 정해져 있는 거에서 미친듯이 공감하고 감미다,, 번호를 메긴 이유도 궁금하구만유,, 종강하고 싶어지는 글 고마워 >>172 오 약간 아직 감정 정리 못한 사람이 횡설수설하면서 쓴 것 같은 느낌? 짠허다.. 우정꿈희망사랑 중 제일은 망사랑이라더니 맞는 거 같다.. 사랑을 한 줄 몰랐다면서 어케 5년이라고 정확히 자각했는지 궁금해지는 글...

#175 이름없음 2022/11/22 16:11:42

차라리 나이를 먹지 말 걸 그랬다. 이렇게 사람 행실도 하지 못하고 살 바에야 차라리 세상의 빛을 보지 말 걸. 한숨을 쉬어도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감기에 걸렸다. 온 몸의 근육들이 나른하게 풀어져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알바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오늘 일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뭐라 따지려던 사장님도 다 갈라진 내 목소리에 한숨만 푹 쉬셨다. 감기약을 사서 먹었다. 환기를 시키고 빨래도 널어두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그랬더니 살아간다는 건 참 서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땐 어땠더라. 열이 심해서 학교를 쉬었던 날이 있었다. 늦은 오후에 비틀거리며 일어났더니 내가 좋아하는 계란말이와 씹기 편한 진밥이 차려져 있었다. 반차를 내고 집으로 온 엄마가 열로 노곤해진 나를 대신해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 중간에 넘기지 못하고 토했더니 입가를 닦아주곤 약은 삼키려나, 걱정해주었다. 지금은 내가 아파서 뱉은 음식물을 내가 닦아야만 하겠지. 어른이라는 건 그런걸까. 아프다고 해도 걱정해주는 사람은 거녕 당장 저녁 타임 서빙은 어쩌냐는 한탄 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죽을 듯 기침을 해도 무와 꿀을 넣고 갈았던 끔찍한 맛의 죽은 없고 밥을 넘기지 못해 뱉어도 내가 닦아야만 한다. 아프다. 감기에 걸렸다. 몸은 힘이 없고 머리는 멍하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 목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서럽다. 아파서 서러운 건지 외로워서 서러운 건지 아니면 관성의 법칙에 따라 반사적으로 서러운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처럼 세상에 던져진지 얼마 안된 어린 어른은 연애나 친구로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이 있나 보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몸은 좀 나아지겠지. 몸이 나아진다면 지끈거리는 외로움도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176 이름없음 2022/11/25 16:22:33

세상은 때로는 우리의 눈을 속인단다. 계속해서 귓가에 괜찮다고 속삭이며 포기하라 유혹하지. 그래 아이야. 세상은 우리에게 멀쩡하게 보이는 탁구공의 찌그러진 이면처럼 망가져버린 부분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단다. 그리고 우리의 눈앞에 멀쩡한 면만을 들이밀며 현실에 안주하기를 강요하지. 그러니 아이야 계속해서 생각하거라. 나아가고 탐구하며 쟁취하거라. 착시를 단순히 착시에서 그치게 하지말고 그것을 이끌어내거라. 눈에 의지하려 하지말고 마음으로 세상을 보거라. 세상에는 고작 두 작은 눈동자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으니 말이다. 꿈을 꾸거라.. 이 말을 들은 니가 긴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고 단순한 글자들의 배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닳았을때 그 꿈은 너의 현실이 되어줄테니 말이다. 미안하구나. 그리고 사랑한다. 나의 하나뿐인 #@$#%. 그가 내뱉던 짧지만 긴 문장이 마침표를 찍었을때 하늘에서는 한두방울씩 비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죽음을 추모하듯 빗소리는 구슬프게 도시로 퍼져나갔고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아이는 차갑게 식은 노인의 시신을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언젠가 자신이 어른이 되어 노인이 말한 바를 이해하기까지 세상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리라고 그것은 소년이 노인에게 건내는 마지막 친절이자 죽은 자에 대한 애도였다.

#177 이름없음 2022/11/28 00:05:28

>>176 아 뭐야 단순한 사이비가 온 세상을 지배해 버린 시대에서 유일하게 저항 운동을 하던 노인이 고아가 된 소년을 거둬서 키우다 죽기 전에 소년한테 자신의 가치관을 설명하는 디스토피아 배경의 소설이잖아? 아님 말고... 그치만 개오져요... 제가 좋아하는 분위기에요...

#178 이름없음 2022/11/28 00:22:47

사람들의 머리 위로 숫자가 떠올랐다. 이미 머리 위에 갑자기 숫자가 떠오르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였으므로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다들 차분하게 숫자의 의미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천문학자는 남은 수명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이 흘러도 숫자는 줄어들 기미가 없었기에 다들 그건 아닐거라고 말했다. 다만 천문학자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단위가 큰 시간일거라고 생각해 하루종일 계산기를 두드렸다. 원래 천문학자들은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들로, 돈이 안되는 순수 학문으로 박사까지 한 이상한 족속이었다. 천문학자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종국에는 슈퍼 컴퓨터 까지 두드렸으나 이 숫자의 단위를 알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스님이 숫자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일침을 날렸다. 숫자란 것은 본디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의 개념이었다. 만약 다른 종교의 신들이 벌인 일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신이 하등 인간이 만든 허상을 알고 있으며, 왜 친히 그 개념을 사용하겠는가. 우리 머리의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의미가 있다 해도 그것을 우리가 알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스님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부는 머리가 아팠다. 정확히는 공무원들이 그랬다. 시민들은 숫자로 인한 민원을 모두 정부에게 제기했다. 급기야는 숫자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라는 집회와 그걸 왜 정부가 규명하냐는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정부는 이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일단 검찰을 압수수색했다. 머리 위로 떠오르는 숫자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고 숫자의 비밀을 차분히 생각했다. 숫자의 비밀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것은 한 웹소설 작가였다. 그는 문득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이 구상한 소설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웹소설 작가에게 숫자의 비밀을 듣기 위해 주목했다. 방송국 차가 몇 대 왔고 유튜버가 몇 명 불법 침입했다. 작가는 모두가 온 것을 확인하고 숫자의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머리 위의 숫자는 말입니다, 제 작품에서는..." 그러나 그 때 모두의 숫자가 동시에 사라졌고 필요 없어진 웹소설 작가의 이야기는 아무도 찍지 않았다.

#179 이름없음 2022/11/28 22:10:31

내 마지막 첩보관의 막내딸이 죽었다. 그 애는 늦둥이였다. 산모가 34살이었으니 403년 기준으로도 이른 나이는 아니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시대, 그리고 그 후의 시대에 각각 한 발씩 걸쳐놓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고작 18살에 첩보관이라는 중책을 맡은 천재였고, 붉은 진주의 문양은 높이 휘날렸으니 돌탑의 제 방에서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내 딸들이 모두 죽고 검은 깃발을 든 이들이 내 묘비를 파묻은지도 50년이 넘었다. 부디 나의 시대 이후에도 그 애가 눈물짓는 일이 없었기를 바란다. 아니, 어쩌면, 그 애는 돌탑 아래 푸른 지붕 집에서 살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 애가 내 첫째 딸을 주군으로 섬겨주길 원했는데. ** 진주탑의 캣 레드펄은 언제나 관광객들을 직접 안내했다. 여기는 무슨 방이에요, 제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께서 어린 시절에 쓰시던 방이죠, 다음으로 오른쪽에 여기를 보시면, 앗, 거기 사진 찍으시면 안 됩니다. 한때 캣의 어머니 소유였으나 이젠 세금으로 관리되는 국가 유적지. 캣은 진주탑을 유지할 금전이 없었다. 작가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 안 되는 직업이다. 유산? 유한계급들이 검은 깃발에게 그들의 금고와 그들의 성, 그들이 물려받은 땅을 바친 지 오래다. 그래서 캣은 진주탑의 주인이 아니다. 상주 관리인이라고 하면 모를까. 이제 영주도 영민도 영지도 없지만, 캣은 귀속된 농노마냥 레드펄 골짜기를 떠나지 않았다. 골짜기에 관공서가 들어온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180 이름없음 2022/11/29 14:39:45

>>179 화자가 바뀐 건가? 그럼 캣이 그 마지막 첩보관의 막내딸의 후손이려나..?? 검은 깃발이 나의 묘비를 파묻었으니까 약간 흑막인가..?? 그럼 캣은 이미 첩보관도 뭣도 아닌데 붉은 진주탑에 묶여 있는겨?? 헐 재밌다.. 더 풀어줘...

#181 이름없음 2022/11/29 21:11:02

소녀는 여자애가 좋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소녀는 여자애의 이름을 정성들여 써보는 일이 잦았다. 네임펜으로 다 푼 문제집의 뒷장에, 예쁜 색의 형광펜으로 영어 내신 공책 귀퉁이에, 쓰지도 않는 연필로 학원 기출 문제지 마지막 문제 위에 여자애의 이름이 쓰여졌다. 소녀는 여자애의 생각을 하는 것이 좋았다. 꽉 막힌 독서실 책상에서도 눈을 감으면 소녀는 어느 새 여자애와 손을 잡고 강원도의 한 석호를 돌았다. 석호는 갈수록 작아지는 호수래. 한국지리도 지구과학도 듣지 않는 소녀는 여자애가 알려주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소녀는 면적이 변하는 호수보다 여자애의 목소리가 더 놀라웠다. 두 개의 근육이 붙었다 떨어지는 마찰의 공명이 여자애의 목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소녀는 하현달과 같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초승달 속에서 눈을 떴다. 조금만 더 꿈 속에 있어도 좋을텐데. 소녀는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꿈이라고 해봤자 나오는 것은 여자애였기에 사실상 학교와 꿈의 차이점은 없었다. 소녀는 여자애를 보면 그믐이 떠올랐다. 달빛도 없는 거리에서 문득 숨이 막혀 독서실로 가지 않고 눈물 없이 울었던 그 그믐이 여자애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결국 대학교에 갔다. 여자애도 그러했으나 소녀와 다른 지역이었다. 소녀는 처음으로 머리를 아주 길게 길렀다. 학교에 가기 위해 한 시간 동안 화장을 했다. 늦게 까지 놀러다니고 처음으로 지각도 해보았다. 소녀는 금방 여자애를 잊고 어른이 되었다. 어른은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문득 자신이 연차를 하루도 쓰지 않았음을 깨달은 어른은 팀장의 권유 아닌 권유로 휴가를 나왔다. 강원도의 한 석호를 돌던 어른은 불현듯 여자애가 기억났다. 딸랑 거리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른은 그믐도 아닌데 소리 없이 울었다. 소녀는 어른이 될 수 있지만 어른은 소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2 이름없음 2022/11/29 22:50:32

>>179 그 사람들은 어머니의 초상화를 들고, 첫째 언니의 이름을 외치며 행진했다. 그때는 첫째 언니도 둘째 언니도 왕궁에 없었고, 셋째 언니는 이모님의 성에 가 있었다. 그들은 왕궁으로 왔다. 내 창문에서도 잘 보였다. 가을바람에 팔락팔락 휘날리는검은 깃발과 국기. 맹세코 폭도들이 아니었다. 그저 굶주린 시민들, 내 나이 또래임에도 노인처럼 주름진 아이들. 결정권자는 내가 아니었다 해도, 내가 말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나는 모른다. 총소리가 무서워서 도망친다면 어디로 가야 했을까? 적어도 이제 알게 된 것 하나: 그때 “멈춰요,” 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 사람들은 먹을 것을 원했고, 347년 겨울, 나는 인생 처음으로 배고픔을 배웠다. 그 사람들은 병든 아이를 감쌀 천조각을 원했고, 348년 초봄, 나는 습기 찬 바닥에서 콜록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말리지 않았던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걸 말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 우리는 왕을 죽였다. 우리는 왕족을 죽이고 귀족을 죽였다. 오직 이유 하나: 그들은 우리를 너무 많이 죽였다. 그래도 난 이 나라에서 가장 화려한 집에 살았다는 이유로 그 아이가 ‘그렇게’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제 어머니의 백골과 언니들의 시신과 같이 드넓은 바다에 떨구어졌으니 장례를 치러줄 이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옛것을 쟁기질했으니 선왕의 무덤도 이젠 흙더미뿐. 아홉 살의 캣이 진주탑에 검은 깃발을 꽂겠다며 나타났다. 우리는 캣을 사면해주었다.

#183 이름없음 2022/12/01 01:09:45

초겨울이면 못지킬 약속을 마구 하는 습관 난 그렇게 사교적이지가 않아서, 사실 겨울엔 누워만 있는데 왜 매년 내리는 눈에 매번 신이 나서 그래버리나 몰라

#184 이름없음 2022/12/02 00:29:16

" 선생님 께서는 사랑을 아십니까? 책상 위의 가족 사진을 보니 결혼을 하신 것 같군요. 그렇다면 남편과 자식들을 사랑하시나요? 그건 무슨 감정이죠? 지키고 싶고, 행복을 바라게 되지는 않던가요? 놀리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모두 그럴거에요. 사랑은요,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죠. 아니면 함께이고 싶다던가 꽉 안아주고 싶기도 하겠죠. 예시를 하나 들어볼게요. 만약 괴물이 나타나 가족들을 헤치려고 한다면 선생님은 어쩌시겠어요? 그렇죠. 뭐라도 해야죠.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건 알지만 돌멩이를 던져도 보고 다리가 풀린 아이를 들쳐메고 달려도 보겠죠. 남편을 향하는 손톱에 일부러 몸을 던지며 막을 거에요. 왜냐면 선생님은 가족들을 사랑하시니까요. 아름다운 사랑을 하시니까요. 저도 똑같아요. 단지 선생님은 가족을, 저는 생명>>160 을 사랑할 뿐이에요."

#185 이름없음 2022/12/02 01:59:53

[커튼을 치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밤이 늘었습니다. 우리가 만났던 날을 기억하시나요. 뜬금없지만 문득 궁금합니다. 당신은 그 날을 어떻게 알고 계시나요. 저는 제법 자세히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 때 당신은 목도리를 하고 계셨지요. 검은색이 퍽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색이래야 몇 없을 것 같아요. 노란색은 당신이 싫어한다고 했죠. 푸른색은 슬픈 생각이 나서 제가 싫어요. 빨강은, 글쎄요. 강렬한게 장점인 색인데도 이상하죠. 당신이 두르면 당신의 색으로 바래지니까요. 그런 당신에게 어울리는 건 달빛 정도이려나요. 달빛은 참 요상하죠. 저는 밤이 싫은데, 달빛은 좋아합니다. 이상한가요. 웃으시겠죠. 당신의 웃는 얼굴을 방금 머릿속에 그려봤습니다. 아마 오늘도 커튼을 쳐야 잠이 오겠네요.]

#186 이름없음 2022/12/02 22:52:49

사람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선다. 때로는 사소하고 때로는 가혹한 그 기로 위에서 비명을 지르고 차일피일 미뤄도 결국 해야만 하는 선택. 포기할 수 없는 의무.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 더 잔인할까,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 더 잔인할까. 지표 하나 없이 황무지를 걷는 것과 거대한 미로를 비교하는 격이다.

#187 로맨스 2022/12/04 12:24:31

사랑은 뭘까. 아이는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이는 제대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가장 강렬한 첫 사랑, 부모와의 애착 형성에 실패한 탓이 컸을지도 몰랐다. 아이는 자신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울증이나 그런 정신질환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닮은 사람을 좋아한다.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익숙하고 친숙한 것을 사랑하도록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었다. 그러나 아이는 첫 단추부터 삐끗해버린 것이다. 부모와 애착형성에 실패한 뒤 성장에 차질이 있었다. 아마 아이의 성숙지점은 구강기에 정체되어있을 터였다. 프로이드가 살아있었다면 아이를 안락의자에 눕히고 이마에 엄지를 꾹 대었다 떼는 상담을 계속했을 정도였다. 아무튼 아이는 사랑을 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사랑과 동떨어져있었다. 그 때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는 남성 호르몬이 적었다. 그래서 공격적 성향을 잘 띄지 않았다. 아이와 남자는 자주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도 그랬다. 남자는 아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자신도 아이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니라고 반문하는 이들조차 그렇다. 왜냐하면 인류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인류는 야생에서 살았다. 오랑우탄과 다름 없는 삶을 살았다. 인터넷과 대중매체로 접한 알량한 자의식 뒤에 진화의 산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 진리에 개인의 얄팍한 취향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고 남자도 그러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사랑의 첫 단계에 돌입했다. 충동적으로 변했고 발한과 두통, 메스꺼움을 겪었다. 손에는 땀이 흥건했고 아이를 생각하면 몸 속에서 화학물질이 분비되었다. 열정적 사랑 단계는 길어봤자 3년이 다였다. 그래도 남자는 행복한 3년을 보냈다. 아이와 낭만적 관계를 이루진 못했지만 짝사랑 자체가 남자에게는 좋은 자극이 되었다. 3년이 끝나고 남자의 사랑은 소강상태에 돌입했다. 남자는 이제 아이를 생각해도 전 처럼 가슴께가 저릿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아이의 모든 점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사랑은 그렇게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아이는 이제 그런 남자가 낯설게 다가왔다. 낯선 상태는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3년 동안 남자는 사랑에 빠진 상태였다. 그런 남자가 변화했다. 아이는 불편함을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중에 더 좋아했던 사람을 덜 좋아했던 사람이 후회하며 붙잡는 뻔한 이야기들 처럼 아이와 남자의 관계는 변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남자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사랑은 뭘까. 아이는 알 수 없었다. 아이가 문과에 기독교 신자인 탓이었다.

#188 이름없음 2022/12/04 13:07:54

외계인은 실존합니다. 우리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어제 강변역에서 만났던 분이신가요? 빨간 하이힐을 신고 베낭에 깃발을 꽂고 돌아다니긴 했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맞는 것 같군요. 일단 앞에 앉아서 이야기라도 찬찬히 나눠 보십시다. 저는 아이스티로 사주실 수 있나요? 제가 카드를 잃어버려서 다음에는 제가 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지금 보니 인상이 훤칠하시군요.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 하기 힘드셨을 텐데,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으면... 아, 아니세요? 외계인이요? 잠시만요. 아, 외계인 심판 쪽이셨군요. 미안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가끔 구름에 구멍 뚫린거 보신적 있으신가요? 그게 외계인들이 타고 다니는 유애보 라고 하는 거에요. 잠깐 거기 세워두고 투명하게 위장해서 인간을 관찰하는 겁니다. 관찰해서 뭘 할까요? 심판. 심판을 하러 오신 겁니다.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세계의 단어로 그 분들을 표현할 수는 없으니까 저희는 외계인이라고 부릅니다. 아주 자애로우세요.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를 보듬어 보시고 뉘우치는 이들은 바로 용서해주십니다. 그런데 뉘우치는 방법이 조금 특이하세요. 일단 제가 그 분들을 만났던 일을 말씀드릴게요. 제가 지금이야 홍보대사라는 직함을 맡고 있지만 이전에는 딱히 대단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은 삼수했고 자격증 시험도 한 번에 붙은게 없을 정도니까요. 그때의 저는 뭐랄까, 인간이 되다 만 사람. 어른이 되다 만 성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루를 견딘다고 말해도 될까요. 도움도 안되는 진드기 정도의 생활을 견뎠다고 말하면 기만이겠죠. 나태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한강 말입니다, 생각보다 넓더군요. 무섭다면 무섭지요. 저는 주로 동네 하천을 갔습니다. 아뇨, 청계천 처럼 유명한 하천은 아니고 그저 그런? 이무튼 새벽 잔디밭에 앉아있는데 그 분들이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군밤을 파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 눈물이 나더군요. 아이처럼 목놓아 울다가 집에 와 생각해봤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잖습니까. 군밤 장수 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져서, 나를 위로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눈물을 흘리는 일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군밤 팝니다. 군고구마 있습니다. 용서 팝니다. 죄의 심판 있습니다. 외계인은 실존합니다. 우리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러니 부디 잘못된 길로 들지 마시고 다만 선에서 존재하소서.

#189 이름없음 2022/12/04 20:20:52

정상인은 생각했다. 나는 결핍이 없으니 예술가가 될 수 없겠다고. 정상인은 이성애자였다. 그리고 비장애인에 1세계권 기득권층이었다. 사상도 바르고 똑바라서 모두가 인간으로서 존중 받아야 한다는 말에 진심으로 동의했다. 정상인의 가족은 정상 가족이었고 정상인의 재산은 중산층의 수준을 조금 웃돌았다. 정상인에게 세상은 세상 그대로 다가왔다. 정상인은 너무 정상이라서 과제가 밀리지도 않았고 시험 공부도 수월하게 해냈다. 천재는 아니었지만 평소에 강의도 열심히 듣고 성실한 생활을 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정상인의 삶은 정상 그 자체의 것으로 아주 완벽했다. 정상인이 너무 완벽해서 인터넷 욕설도 그에게 해당되는 것이 없었다. 정상인은 정상적인 사랑을 했다. 상대에게 적당히 의존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정상인은 정상적인 사랑을 통해 합법적인 가정을 꾸려 부모로 부터 독립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인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고 정상인의 자식도 정상적으로 성장해 독립했다. 정상인은 아주 정상적으로 생각했다. 정상인은 결핍이 없었다. 아무래도 결핍이 없으면 예술을 하기 어려웠지만 사실 정상인은 딱히 예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상인의 죽음은 정말이지 정상 그 자체였다. 정상인은 눈을 감지 않고 죽었다. 마지막 호흡을 내뱉으며 장상인은 잠시 생각했다. 이제라도 죽어서 다행이라고.

#190 이름없음 2022/12/04 23:43:10

그녀의 눈빛은 마치 푸른 불꽃과 같아서 여간 섬뜩한 것이 아니었다. 성현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촌뜨기 주제에 과거를 보기 위해 고개를 넘고 있었다. 차라리 호랑이라도 나타나 나를 물어가주지 않으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름만 남은 양반 가문의 외아들이었던지라 주변에는 이런저런 참견이 심했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나지 않는 수염과 작은 키. 몸은 또 어머니를 닮아 허약하여 한 달에 한 번은 꼭 크게 앓았다. 더군다나 공부 머리도 없어 식충이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어쩌면 과거는 핑계고 눈엣가시인 적자를 없애고 새로 부인을 들이려는 아버지의 계략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병상의 어머니가 가여이 여겨졌다. 여자란 참 쉽게 버림 받는구나. 과거 시험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고개를 오르면서도 나라는 범인의 생각은 성현의 말씀 보다도 여자에게 향하고야 말았다. 무거운 발걸음 때문인지 나는 아직 산중인데 날이 저물었다. 꼼짝없이 죽으려나, 싶던 나는 마침 오두막 하나를 발견했다. 마당에 서서 주인을 찾자 소복을 입은 여자가 문을 열고 나를 맞이했다. 그녀의 눈에는 냉기가 서려있었고 얼굴은 꼭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듯 고왔다. 침어낙안. 물고기를 가라앉히고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미인이 바로 그녀를 두고 나온 말 같았다. 한 가지 흠인 큰 키도 그녀의 아름다움 앞에선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죄인의 몸으로, 본디 외간 남자를 들이면 아니되나 사정이 딱하므로 부엌간을 내주겠습니다." 그녀는 냉정히 말하며 아궁이로 가 은은한 불씨를 피워내주었다. 그 앞에 쭈구려 앉아 온기를 쐬며 참 요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정한 그녀가 피워준 불은 그 어떤 것 보다도 따스하고 포근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조심히 마루에 걸터 앉아 달빛에 의지해 창호지를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성현을 운운하기도 전에 나의 행동은 선비의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시지요. 그리고 말을 하지 마십시오. 선비님께서 입을 다무신다면 저는 외인과 대화를 한 것이 아니겠지요." 창호지 너머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힘이 있어서 나는 그 내용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머리 위로 휘영청 떠있는 달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시덥잖은 내용이었다. 그녀는 산나물을 캐었던 일이나 종종 마당으로 찾아오는 다람쥐 따위를 즐겁다는 듯이 떠들었다. 밤이 점점 깊어지자 그녀의 이야기도 깊어졌다. 전쟁으로 부모를 여의고 이 나라로 흘러든 일, 그녀를 첩으로 맞이한 무뢰한에 대한 것, 그 마을에 역병이 돌아 무뢰한이 죽고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가 초가삼간을 꾸린 경로.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자 등 뒤로 그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얇은 종이문을 사이에 두고 한참을 서로에게 닿아있었다. "밤이 깊었습니다. 내일 일찍 떠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녀가 먼저 내게서 멀어졌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서늘한 밤의 내음이 가슴께에 사무쳤다. 나는 몸을 돌려 창호문을 열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찡그린 얼굴에서도 미색이 흘러넘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부인께서 입을 다무신다면 부인은 도리를 어긴 것이 아니게 되겠지요." 그리 말하며 나는 등 뒤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달픔에 관한 것. 여기까지 오느라 닳아버린 짚신의 갯수나 노비들 마저 나를 은근히 무시하는 설움 같은 것. 내가 과장되게 얼굴을 찌푸리자 그녀는 살풋 웃어보였다. 점점 말이 길어지자 달빛이 구름에 가려졌는지 방 안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제야 나는 내 속을 모두 들려줄 수 있었다. 나를 속이고 세상을 속인 이야기. 예를 들면 한 달 마다 이불을 붉게 물들이는 것, 빳빳한 천으로 가슴을 꽉 메어야 하는 것, 이 모든 것을 강제한 어머니에 대한 것, 그 어머니를 향한 나의 사랑 같은 것. 내가 말을 마치자 신기하게도 달빛이 다시 방 안을 환히 비춰주었다. 그녀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손을 들어 내 입가를 문질러 보았다. 그녀의 검지가 옅게 떨리며 털자욱 하나 없는 내 인중을 쓰다듬었다. 손을 거둔 그녀가 입을 열었으므로 나는 도리를 위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를 납치한 무뢰한이 남색가였던 것, 그곳에서 당했던 치욕들과 억지로 입혀지던 옷가지들, 그 무뢰한이 죽었을 때 들던 낯선 환희에 스스로가 무서웠던 것. 그녀가 마침내 모든 것을 토해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목 언저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였다. 그렇게 우리는 긴 밤 동안 서로를, 정확히는 서로에게 깃든 자신을 끌어안아주었다. 달은 저물고 창호문으로 빛이 들어오자 나는 아무 일 없던 듯 문을 나섰다. 그는 나를 배웅하지 않았고 나도 그의 배웅을 바라지 않았다. 호랑이라도 나타나 주지 않으려나. 그리 생각하며 나는 차가운 불꽃이 피었던 그 고개를 넘었다.

#191 자, 여기 내 심장 2022/12/05 02: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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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이름없음 2022/12/05 14:45:00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팀플을 했다가 공모전 준비를 시작하고 기말고사 공부를 해야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냥 다시 누웠다. 몸이 안좋다고 할까. 괜찮은 핑계였다. 어차피 회의에 필요한 자료들은 내가 어제 깔끔히 정리해 보내놓은 상태였다. 그에 대한 피드백도 이미 받았기에 내가 할 일은 딱히 없었다. 공모전도 사실 한 달도 넘게 남아있으니 하루 미룬다고 문제될 것은 없었다. 시험도 사실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다. 침대에 누우니 창문이 잘 보였다. 반쯤 땅 밑에 잠겨있는 나의 방. 불평은 없었다. 나는 벌레를 잘 잡았고 취객과의 말싸움에서도 지지 않을 만큼 욕을 아주 잘했다. 곰팡이야 환기만 신경쓰면 금방 사라졌다. 그치만 때때로 나는 내 방이 싫었다. 반만 보이는 하늘이 답답했다. 아 어쩌면 외로운 걸지도 몰랐다. 나 아주 외로워요. 지겹도록 혼자랍니다. 입 안에 멤도는 말은 낯설었다. 언제 연락해도 받아주는 친구도 있었고 가족과의 사이가 나쁜 편도 아니었다. 나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치만 가끔, 아니 사실 거의 매 순간 나는 외로웠다. 이 외로움의 시초는 어디일까. 고민하다 결국 태어난 그 순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혼자 태어나니까, 태어남의 구멍을 지날 때는 아무리 쌍둥이라도 결국 혼자니까, 외롭진 않을까. 태어남의 구멍이라니. 그럼 죽음은 뭘까. 구덩이인가. 죽음도 무슨 구멍을 통과해야 하는 걸까.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구멍, 우리가 전부라고 여겼던 뱃 속이 전부가 아님을 알려주는 그런 구멍을 통과해야 비로소 죽을 수 있는 걸까. 죽음이란 뭘까. 인간의 성장은 죽을 때까지 계속 되니까 죽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 인간이 죽게 되는 건가. 자살과 사고사는 몸 보다 영혼이 먼저 성숙해진 인간들이 겪는 사건인 걸까. 그러나 나는 곧 생각을 멈췄다. 나 따위가 뭐라고 벌써 삶과 죽음을 생각하겠어. 나는 생각이 아주 어렸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진라면 순한맛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익명으로 시비거는 것 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머리를 감고 팀플 회의가 있을 카페로 가야 했다.

#193 이름없음 2022/12/05 14:59:46

>>182 엥 그럼 결국 '나' 는 누구인 거지?? 화자가 또 바뀐건가..? 검은 깃발... 흑막 아니고 걍 민중이었구나... 왜 검은색일까. 흑사병 떠오르네. 그때 농민들이 많이 죽어서 노동력의 가치가 올랐어서 신분제 폐지에 공헌을 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아님 말고... 근데 난 그렇게 생각하니까 레더의 글이 소름돋게 느껴졌으니 저렇게 받아드리겟슴미다..^^7 좋은 글 고마워 >>183 님 혹시 나? 일주일이 술 약속으로 꽉찬 달력이 떠오르네욥.. 연말은 좀 사람 들뜨게 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어 담담한 문장에 공감 오백만 하고 갑니다 총총 >>186 비유 좋당... 근데 난 갠적으로 황무지가 좋아... 선택 미룰 수 있으면 미루고 싶어... 책임과 의무 코 끝까지 오기 전까진 피하고 싶어... 멋진 비유 종종 써주시길 바랍미다..

#194 론리 비치의 개들 2022/12/06 03:01:26

교수님이 말했다. 인간의 언어로 마침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당신은 첫 잠수를 기억하는가? 코로 들어오는 것은 기체가 아닌 뜨겁고 쓰라린 무언가, 눈을 떠도 아프고 매워 볼 수 없으며, 귀는 순식간에 멍멍해지네. 내가 4년을 그렇게 살았다면 믿겠는가? 교수는 나를 앉혀두고 그렇게 말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답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나는 이미 그의 수업을 무단으로 2번 결석한 적이 있었다. 출결 점수를 반영하는 수업이었기에 여기서 밉보였다간 다음 학기에 울면서 재수강을 신청할 것이 뻔했다. 곤란해진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애매하게 주억거렸다. 그렇게 하면 교수들은 대충 자기 할 말을 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원래 교수란 직책은 자기가 말하고 싶은 말을 많이 하고 자기가 읽고 싶은 것을 많이 읽으며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맡는 것이었다. 내 예상대로 교수님은 자기 할 말을 시작했다. 그건 실로 엄청난 일이었지. 당신은 아는가? 입을 열면 들어오는 액체, 액체, 액체. 숨이 막혀 몽롱해진 정신으로, 곧 죽겠다는 나의 비명에도 멀쩡히 살아가던 4년. 끔찍했지. 그런데 자네의 메일>>191 을 읽자 기체가 들어왔지. 당신은 무언갈 아는가? 일단 교수의 말은 반 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니 사실 의미를 안다고 해도 완전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교수가 하는 말은 전부 어떠한 것도 담지 못하는 공기의 진동일 뿐이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려 봤으나 교수는 이미 할 말이 없는 듯 나를 벌겋게 노려보았다. 곤란해진 나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했다.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많이 생각하기 시작한 교수님께 공손하게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메일을 쓰기 전에 과제 분량을 늘리기 위해 소주 한 병을 마셨었다. 그 메일은 거의 생각을 하지 않고 휘갈겨 쓴 것이었는데 이게 연관이 있는 걸까. 한창 생각에 잠긴 교수님께 돌아가 일러둘까 하다가 관두었다. 평소에 알아듣기 힘든 강의로 나를 괴롭혔기에 별 책임감이 들지 않았다.

#195 로판 2022/12/09 02:01:00

스레딕이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등 뒤로 마왕성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달빛만이 드나드는 외딴 숲 속 잔디밭에 함께 서있었다. "이제 다 끝이야." 무엇이 끝난 건지,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고 스레딕은 나를 품에 안았다. 단단하고 따뜻한 그의 품 안에서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이게 뭐야?" 그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마치 자신도 생명이라는 듯이 가증스럽게 피를 끌어올리고 내보내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달빛을 받은 그의 볼에는 홍조가 떠있었고 나의 손길이 닿았던 귓가는 어떠한 욕망으로 붉어져 있었다. "나도 이제 너랑 같은 인간이야." 스레딕은 나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갖다대었다. 어떻게, 네가, 왜. 문장들이 질책을 담지 못하고 입 안을 멤돌았다. 스레딕이 하는 말이 뇌를 스쳐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떠한 뉴런의 연결패턴에도 걸리지 않고 눈보라 속의 발자국 처럼 곧 희미해져 자취를 감추었다. 놀란 나를 다시 자신의 품에 단단히 가둔 스레딕이 중얼거렸다. "나도 이제 인간이야. 그러니 우리 신전에 가자. 인간처럼 어리석은 신성에 기대어 허울뿐인 영원을 약속하러 가자. 멍청한 의식이 끝나면, 나를 바다에 데려가줘. 우리 거기서 약속을 지키자. 빌어먹을 신에게 했던 맹세를 기억하며 계속 손을 잡고 있자. 서로의 손에 주름이 지는 걸 느끼며 그렇게 살자." 바보같은 스레딕.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심장이 맹렬하게 뛰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신의 대항자였던 악마가 신의 사랑을 받지 못한 말단 사제를 껴안고 청혼을 했다. 이건 아주 잘못된 일이었다. 그는 오늘을 평생 후회할 것이다. 그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의 말을 수치로 삼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쳤다. 놀란 그가 나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이 사악한 악마야, 나를 심판하지 말아라." "난, 난 이제 인간..." "힘을 잃은 네놈은 이제 신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한낱 인간인 너는 너를 해하는 자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며, 속절없이 당할 것이다. 나의 손에 잡히는 것은 네놈의 피이고, 우리가 맹세한 영원은 아주 찰나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자꾸 나와서 눈 앞이 흐려졌다. 그가 죽는다면. 나와의 영원을 맹세했던 존재의 손에 그의 생명이 바스라진다면 "나는 더이상 이 세상을 살아가기 싫을 거야..." 간신히 말을 맺은 나는 그의 목 뒤로 팔을 감았다. 젖은 눈으로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고 눈을 감았다. 사악한 악마가 언제부터 나약한 인간이 되었던 걸까. 너는 자꾸 나에게 같이 추락하자고 말했다. 한참 뒤 그가 나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눈부시게 웃었다. "너만 남기고 죽지 않을게. 그러니 나랑 함께 늙어가자."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시여, 더이상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나는 당신의 시험이 없어도 이미 끝없이 불결한 자임을 알고 있나이다.

#196 눈 딱 감고 낙하 2022/12/12 15:54:07

눈을 뜨니 추락하고 있었다. 어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정말 추락하고 있었다. 분명 침대 위에 누워 있었는데 등에 닿는 것은 섬찟한 공기의 흐름이었다. 이류가 귓볼을 스쳐지나가고 심장은 계속 떨어졌다. 간신히 돌아본 벽은 검은 배경에 LED전구가 박힌 듯 흰 점이 뚜렷한 빛을 내며 선을 그리고 있었다. 헉 과제 제출일 오늘까지였는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바닥에 떨어지면 내가 죽든, 살든 위로 올라가기란 힘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과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오한이 들었다. 코딩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았으나 내 전공이 소프트웨어 선도 학과로 지정되어 같잖은 C언어를 배워야 했다. 과학고니 미디어고를 나온 동기들은 이미 능숙하게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내가 겨우 거북이로 신호등을 그릴 동안 걔네들은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요상하고 대단한 무언가를 해냈다. 그런데 그걸 한 학기 더 봐야 한다고? 개같았다. 어떻게든 과제를 완수해야겠다고 생각하자 내 배 위에 노트북이 얹어졌다. 아빠가 일주일 동안 초과 근무를 해서 사준 재작년 모델의 중고 노트북이었다. 그때는 나도 평범한 대학생이 된 것 같았지, 감상에 젖어있을 생각도 않고 바로 과제물을 확인했다. 거의 완성되어 있어야 했을 과제는 절반 정도에서 멈춰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장을 했던가? 시간을 보니 제출 마감까지 1시간이 남아있었다. 다시 할 수 있을까? 다시 하면 완성할 수 있나? 바보같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눈물이 차올랐다.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애초에 나에게 과분한 대학이었다. 그냥 아빠 말대로 근처 국립대나 가버릴걸. 백분위에 한참 못 미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지방 촌구석 남고를 전교 2등으로 졸업한게 뭐가 아깝다고. 학교 기숙사비도 비싸서 교회에서 기부금으로 운영하는 학사에 사는 주제에 과제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울어도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꿈이겠지. 그치만 깨어났을 때도 과제가 이 모양이면 어떡하지. 아니, 제출 기한이 지나있으면 어떡하지. 죽고 싶어지면, 진짜로 떨어지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아빠한테 전화할까. 바쁘실텐데. 내가 언제부터 잠든 거지. 이렇게 오래 잠들어도 되는 걸까. 애초에 여긴 꿈 속인데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거지. 차라리 꿈이 아니었으면. 나 진짜로 떨어지고 있었으면. 이렇게 계속 떨어지고 있었으면 생각과 동시에 등에서 부터 번쩍이는 통증이 전해졌다. 아, 바닥이었다.

#197 이름없음 2022/12/15 03:03:12

삭제된 레스입니다.

#198 이름없음 2022/12/15 21:24:13

가사도 가능한가? 금 묻은 천으로 눈을 가리려하지만 천과 눈 사이에 놓인 썩어진 세상에 불온한 왕관을 쓴 자는 보지않고 가리지 못한 것을 본 자는 웃음짓네 흙 묻은 손에 쥔 책은 피로 젖어가서 피 묻은 책을 쥔 자들은 앞서나가고 산에 들에 흩어진 무지개를 주워 언젠가 다시 이어질 날을 기다리네

#199 이름없음 2022/12/16 23:37:15

>>197 걱정이 되어 다가갔더니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은 행사장 풍선이었고... 정신 나갈 것 같은 글 너무 좋아... 다 의미가 있겠지.. 근데 의외로 무의식에 맡겨서 휘갈겨 쓴 것도 좋아. 찬찬히 보면서 내가 왜 이러걸 썼는지 알 수 있어... 근데 문체가 좋다... >>198 가사도 결국 시의 일종이니까 당근이죱. 뭐야 이거 뭔 상황이야. 아 뭐야 대충 내가 개환장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는 내용이잔아ㅋ 원래 시는 작가 손을 떠난 시점에서 부터 독자가 읽는대로 읽히는 거임ㅋ 음 맛있다 더 주세요.

#200 이름없음 2022/12/19 22:09:40

>>198 오 멋지다

#201 이름없음 2022/12/28 13:34:36

탄이는 고민했다. 어젯밤 탄이의 꿈에 저승사자가 나왔다. 그리고 탄이에게 기회를 주었다. 10년 더 살게 해주는 대신 네 주인이 10년 덜 살게 될 거야. 탄이는 야옹 거리며 깊게 고민했다. 인간의 수명은 지나치게 길었다. 임신 기간이 10개월이란 걸 감안해도 길었다. 그러나 탄이는 자신의 수명이 짧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먹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퇴근한 주인이 흔들어주는 낚시대로 놀고 다시 그 발치에서 꿈을 꾸는데에 18년이면 제법 긴 시간이었다. 어떡하면 좋담. 탄이는 저승사자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고양이의 삶이란 무엇인가. 자신은 중성화를 했기에 종족 번식에 기여할 수가 없었다. 주인의 정서적 교감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인가. 자신은 그저 따뜻하고 부들거리는 신경 안정제일 뿐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뭘 위해 18년을 살았단 말인가. 탄이는 코를 벌렁거렸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꿈이니 자아실현이니 말은 거창해도 결국 다 자기만족 아닌가. 인간의 자기만족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인지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한 얄팍한 자기 최면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렇게 오래 사는가? 살 이유가 있는가? 탄이는 자신에게 주어질 10년을 상상했다. 어쨌든 10년 줄었다고 해도 주인은 탄이가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을 거였다. 18년이나 키웠으니 도중에 버리지도 못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탄이는 10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 고민했다. 삶의 무의미한 유한함과 이유 없는 호흡과 맥박이 어째야 족쇄처럼 느껴지지 않을지 생각했다. 탄이는 고민했다. 그리고 선택했다. 반려동물 장례업은 오늘도 성황이었다.

#202 이름없음 2023/01/08 11:59:47

글을 적고 가시길 바랍니다. 스레주가 말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퍼져나갔다. 스레주는 스레드 전체 보기를 가만히 눌러 보았다. 생각 나는대로 막 휘갈겨 써, 지금 보면 낯이 뜨거워지는 자신의 스레 사이사이로 레스더들이 남긴 소중한 조각글이 보였다. 어떤 글은 더 보고 싶었고 또 어떤 글은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문학이 되었다. 시는 입 안으로 굴려보는 재미가 있었고 강렬한 몇 문장은 예상치 못하게 목 안으로 쑤욱 들어왔다. 부끄러운 자신의 글을 좋아해주는 레스도 있었다. 모두 오래된 호박 보석 같았다. 생채기와 먼지에 예전같은 반짝임은 잃었지만 그 노란 황홀함은 아직도 생생했다. 어느덧 201 레스에서 스레가 끝이 났다. 아. 스레주는 짧게 탄식했다. 끝이 났구나. 벌써, 끝이 온 거구나.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손가락을 기어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글을 적고 가시길 바랍니다. 스레주는 등록 버튼을 차분히 눌러보았다.

#203 이름없음 2023/01/09 01:42:45

'죽고싶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다음에는 '역시 죽을까' 하지만 그러지 못할거란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 등에 짊어진 목숨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란걸 알기에 그렇기에 혼자 죽지 못한다. 무엇하나 스스로 선택하는것 조차 허용되지 않는 인생 소심하기 보잘것 없는 성격과 뭐하나 잘난거 없는 신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머리와 어중간하게 생긴 얼굴 '나쁜건 아니지만 이것만으로 죽을 이유는 충분한거 아닐까' 그렇게 어제도 그저께도 여전히 하고있었던 생각을 하며 나는 무의미한 일상을 위해 힘겹게 발을 내딛는다. 언젠가 나를 위해 울어줄 이들이 전부 사라지는 그날을 향해서

#204 이름없음 2023/01/21 23:14:16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그 자리에서 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주 상냥한 시선으로, 내게 사랑을 속삭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의 사랑만이 보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를 갈망했다. 내게 사랑을 내뱉을 수 없는 그를 사랑했다. 똑같이 눈을 마주하고 웃으면, 마주 웃어주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래서 사랑했다. 사랑한다. 사랑해.

#205 이름없음 2023/01/25 09:08:16

혹시 레주 소설쪽으로 일해? 글들이 재밌고 매력적인 것 같아서리..

#206 이름없음 2023/01/31 21:42:26

>>203 자살의 반대는... 내 종교 때문인지 자살을 묘사하는 글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뭐라 해야할 지 모르겟다.. 그거랑 별개로 생각 하나에 전개 하나 하는 그거 진짜 좋은거 같어 >>204 뭔 상황일까 그 낯선 사람에게만 성적인 끌림을 느끼는 사랑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거일까??? 현재형 어미가 많은걸 보면 보이는 그대로 설명하는고 같은데 먼 상황일지 너무 궁금하다 좋은글 감사.. >>205 나 대학생이여 전공도 엄청 실용적이고 염세적인..^^ 칭찬 너무 고마워 사실 글 쓰는 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관뒀어서 레더 말 감동이 심하다.. 근데 취미로는 글을 써도 업으로 삼진 못할 것 같아

#207 이름없음 2023/01/31 21:53:09

>>206 정말 재밌게 보고있어 업으로 삼지 못한다고 했지만 이렇게 계속 재능 어딘가에 펼치면 뭔가 꼭 될거라고 생각해 앞으로의 글들도 기대할겡

#208 이름없음 2023/02/01 00:59:37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A도시라는 목적지가 있었지. 앞으로 걷고 또 걸으면 그곳이 나올 줄 알았지. 제1야전군이 A를 점령하고 모든 것이 끝났고 모두 기쁘게 집으로 돌아갔고 J는 의대에 입학했지. 그리고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H의 시가지를 빠져나와 후퇴 또 후퇴. 겨울숲에서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특무상사가 나한테 고함을 질렀지. 1년이 지나고 다시 H로 돌아왔을 때 내 소속은 102보병사단에서 1특수임무사단으로 바뀌어 있었어. 그 특무상사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잊어버렸어. 어느 날 타는 냄새가 났고 난 죽어라 달렸어. 고아원 겸 공장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볼트를 조이다가 전사 통지서를 받았지. 큰언니가 죽어버렸으니 내 가족은 종이 한 장뿐. 어머니와 작은언니 그리고 친척들이 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고 마을 통채 불타 버렸으니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어. 난 내 부친께서 내전 때 B를 따라 행군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지. 넌 내 감적수였고 친구였고 언젠간 같이 살자 약속한 사람이었어. 그럴 수 있길 바랐어. 재배치되기 전 갔던 교육대에서 열여섯 명이 모여 다시 만나자고 했잖아. 그때 그 맹세가 얼마나 공허했는지 나도 알았지만 왜인지 너만은 영원히 살 것 같았어. 네 정체를 알고 놀랐어. 우리 대원 중 한 명이 황제의 따님일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포로교환과 구출 작전을 이야기하는 장군들에게 황제가 말했다지. 일개 상사의 인선에 기울일 시간이 있으면 전선에나 신경 쓰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 라디오로 황제의 눈물젖은 연설이 있었다더군. Q-3들이 하늘에 나타나면 우리 모두 납작 엎드렸어. 그치만 그땐 비행기에서 나온 게 차라리 폭탄이길 바랐어. 네 사진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고 난 내가 지닐 종이가 하나 늘었다는 걸 알았지. 열여섯이 모두 A의 흙을 밟을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는 걸 알아. K는 재배치되기 전 간호병이었다고 말했어. 그 애는 의사가 되고 싶어했어. 그래서 J가 의대에 진학했을지도 몰라. T는 미성년자였는데 나이를 속였다고 말했지. 난 그 애가 적어도 18살 생일까지는 살아 있었으면 하고 기도했어. A에 도착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 난 너를 위해서 그곳으로 가고 있었는데 막상 도시에 진입하니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어.

#209 이름없음 2023/02/01 01:24:04

잘 지내? 비온이 가장 흔한 말꼬리로 운을 띄웠다. 끈적한 여름내가 방안 곳곳에 퍼졌고 금세 진득하게 눌러붙고야 말았다. 새하얀 종이에 반사된 빛이 아직 옅게 남은 춘풍을 그대로 투과하여 비온에게 가닿았다. 이거 참, 팔월인데도 이러네... 비온이 작게 웅얼거리고는 책상서랍 깊숙이 손을 넣어 잡히는 대로 부채 하나를 꺼냈다. 하지만 아직-아니, 이제야 겨우- 여름이었다.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부챗바람이 일었고 이는, 음, 잘못된 선택이었다. 한껏 후끈해진 공기를 그대로 방안에서 순환시키면 시원하기는커녕 더욱 더워지기 마련이었다. 창 너머로 비치는 그림자가 비소를 보였다. 구름에 목을 매달고 후터운 공기 중에서 산산이 부식되는 기분도 꽤 나쁘진 않으리라. 그러고 둥둥 떠다니며 제가 목매단 구름이 다른 것과 부딪히는 것을 응시하고 조소를 지으며 발은 버둥대겠지. 그건 도박이었다. 반의 반의 반 확률이 제 앞을 지나갈 때로서야 지상과의 완벽한 결별을 맺을 수 있었다. 비온에게 유원은 사람이자 대지였다. 동시에 가이아였다. 유원이 생성한 제 자신을 느끼고 한층 생장한 유원의 땅을 느끼며 비온은 유원 위를 즐겼다. 유원은 비온에게 안락한 낙원이자 어미의 둥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아마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맹목적 의존이 순전히 의지적인 부분이었다거나, 필요 이상의 무지가 비온을 그러쥐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비온은 이별을 그리고 있었다.

#210 이름없음 2023/02/01 01:26:35

부우- 커다란 뱃고동 소리와 함께 큼지막한 경선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갔다. 항구에 남은 이들이 손을 흔들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고기잡이가 시작되는데, 비온은 아마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적어도 어린 날의 비온은 그랬다. 이윽고 바다 내음 가득한 선착지에 고기잡이배가 그 부피만큼이나 많은 고기들을 한가득 싣고 돌아올 무렵의 비온은 그 일종의 의식-비온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는 생산성 없는 행동이라 생각했기에 의식이라 칭하겠다-이 어째서 행해지는지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런 비온의 곁에 항상 있던 것은 유원이었다. 짠내 가득한 비온의 삶에 어느새 훅 쳐들어온 것이, 그러니까 사람이 유원, 백유원이었던 것이다. 후텁지근하고 끈적끈적한 바닷바람이 비온의 코를 간지럽혔고 장난스레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다. 그럼 비온은 여지없이 울곤 했다. 대처법이란 것 자체를 몰랐으니까. 그렇게 편의점에서 후다닥 달려나와 사탕을 쥐어준 것은 또 유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온은 유원을 땅이라 표현하곤 했다. 항상 갈망했던 육지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온이 심한 감기를 앓았던 것은 그해 유월이었다. 이제 막 여름의 중순이 시작되려는 찰나 시작된, 그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는 비온에게 번져 그저 몸살 하나였던 것을 폐렴으로 만들었다. 누구나 가슴 속에 응어리 하나쯤은 품고 살아간다지. 비온이 유원과의 일을 상상할 때 걸핏하면 떠오르던 응어리가-비온과 유원과의 사이는 좋든 안 좋든, 어쨌든 끝나고 말았으니까 이제 응어리나 다름없었다- 그 일이었다. 사실 그날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땀에 흥건히 젖은 손수건이 비온에게 흘리던 물기, 안쪽에서부터 게워낸 숨소리, 하얀 천장과 이송차 너머로 보이던 항구, 그리고-... 백유원. 사실- 그래, 백유원에 대해 설명하자면 많은 기억들을 끄집어내야 한다. 하지만 비온에게는 정확하고 선명한 기억 하나로 유원에 대한 모든 설명이 단정지어졌다. 순진했던 비온은 그것이 그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입의 경련인 줄로만 알았다. 유원이 저를 보고만 있었으면 됐다고, 이제 괜찮다고, 비온을 향한 유원의 모성애는 확립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비온의 예상을 보기 좋게도 빗나갔다. 병실 너머로 들리던 헛웃음. 그것은 분명히 유원의 것이었다. 가증스러운. 이제 확실했다. 유원은 그저 당황이나 안쓰러움 정도가 아닌, 명확한 감정에 의한 비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211 이름없음 2023/02/01 01:28:03

비온은 항상 하던 대로 여과되지 않은 욕설을 뇌까리며 여지없이 종이를 구기는 대신, 이지러진 생각들을 억지로 그러모아 한 자 한 자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구질구질하게, 때로는 담담하게. 딱히 잘 쓰인 편지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잘 지내? 나는 잘 지내. 네가 괜찮았으면 해. 딱히 싫어할 마음은 없어. 그럴 이유도 없고. 나는 네가 나를 조금은 이해했으면 할 뿐이야. 내 혐오감을 조금이라도 느껴봤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너는 그러지 않을 거란 걸 난 알아. 꽤... 똑똑하니까. 할 말은 이게 다야. 전해지진 않겠지만 아무튼 안녕.

#212 이름없음 2023/02/01 15:59:15

#213 이름없음 2023/02/26 01: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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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이름없음 2023/02/26 02:34:49

"난 2천만 겨레의 독립을 지켜냈소. 민족의 고토 만주를 수복했고, 자원의 보고 시베리아 또한 빼앗아왔소. 그뿐인 줄 아시오? 난 저 시건방진 되놈들에게 실패민족 낙인을 찍고 저들끼리 남방계다 북방계다 같은 시답잖은 인종주의에 휩쓸리게 했소. 두고두고 겨레의 뒤통수나 노릴 교활한 쪽바리 놈들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지옥으로 보내 후환을 없앴고, 전면적인 핵 공격으로 이 나라 대한민국을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우뚝 서게 했소. 그런데 여기서 내가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소?"

#215 이름없음 2023/02/26 02:34:59

"나는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를 지배했으면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될 것 같지가 않더구나. 미국이고 러시아고 일본이고 중국이고 영국이고 독일이고 프랑스고. 하여간 우리보다 잘난 나라가 좀 많더냐? 지구라는 땅이 좀 넓더냐? 그런 와중 인간은 또 얼마나 득시글거리던지, 정공법이라는 게 통하지 않을 환경이었지, 비록 2차례에 걸친 대공황과 세계대전이 서방세계를 몰락시켰으나 그것뿐. 다가올 냉전에서 한국은 러시아와의 덩치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 그 빈틈을 노리고서 중국이나 옛 제국주의 열강이 부활할지도 몰랐네. 대한이 작았던 게 아니다. 세계가 너무 컸던 거지, 그래서 불살라 버렸다, 세계가 대한이 한 손으로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작아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건, 얼마나 많은 도시가 파괴되건 상관 없었네.. 이것만이 대한민국이 극초강대국으로 거듭날 유일무이한 길이라 나는 믿었네."

#216 이름없음 2023/02/26 02:35:18

유키치는 웃었다. 웃으면서 울었다. 울고 싶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넘쳤다. 오늘은 기쁜 날일 텐데. 이제부터 불고기도 먹고 영화도 봐야 하는데. 왜일까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217 이름없음 2023/02/26 02:35:30

"양력 8월 15일. 지금껏 이날만을 기다려왔네. 어떻게 더 1년을 참으란 말인가?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지난 35년간을 오직 이 순간만을 그리며 살아왔네, 이날만을 기다리면서 왜놈들의 발가락을 핥고, 같잖은 연극을 하고, 코쟁이들의 똥구녕을 핥으며 왔다는 말이야. 이 정도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괜찮지 않나. 이만 눈감아 주게."

#218 이름없음 2023/02/26 02:35:38

개인은 유한하나 민족은 영원할지니. 설령 지금 그들이 죽더라도 민족이 살아남아 번영한다면 그들은 저세상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리라. "대한민국 만세." 대형, 조정환이 선창했다. """대통령 각하 만세.""" 형제들 모두가 조용히 답했다. 그다음은 불필요했다. 형제들은 묵묵히 그들의 전장으로 나아갔다.

#219 이름없음 2023/03/03 20:14:08

헤어지던 날 네가 했던 말 다른 사람이랑 건강한 사랑 하란 말 난 그 말이 아팠어 애써 부정해 온 모든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 우리 사랑은 너무 아파서, 그래서 영원할 수 없었던 거지?

#220 이름없음 2023/03/04 22:4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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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이름없음 2023/04/20 21:17:09

그 검은, 내 검은 눈동자 속에 비춘 하나의 자랑이었다. 그건 내가 내걸은 몸동작 속에 마친 한 아이의 자랑이었다.

#222 이름없음 2023/04/20 21:35:40

밤 하늘 별이 쏟아지는날, 너의 눈동자는 밝게 빛나는 별들 중에서도 가장 반짝거렸어. 너가 나의 빛이 되어 나를 밝게 비춰준것처럼, 세월이 흘러 너가 너의 아름다운 빛을 잃었을때, 그때 내가 너의 빛이되어 너를 비추어줄게.

#223 이름없음 2023/04/29 20:38:13

네가 죽으면 나는 아주 눈부시게 살 작정이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자르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가진 돈도 다 써버리고, 우리의 낡아빠진 집을 뛰쳐나와 아주 멀리 떠나려고 했다. 전부 잊을 생각이었다. 이 곳에서 있었던 일 모두. 너를 사랑했던 사실마저 잊고 나는 아주 행복하게 살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갈 곳 잃은 사랑은 점점 커져서, 어느새 네가 묻힌 이 땅보다도 커져서 아무데도 갈 수가 없었다. 어딜 가나 내 발목 언저리에는 네가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얼굴을 하고 내가 사랑했던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 시선을 받아내고 있노라면, 목구멍에서부터 흙탕물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널 버린 내 죄가 너무 무거워서. 땅 속 깊은 곳으로 떨어져 너와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만 같았다.

#224 이름없음 2023/04/29 20:44:23

내일 세상이 끝나면 TV 프로그램의 마지막처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모두들 기억할게요, 잊지 말아주세요. 라며 울먹이며 전원이 꺼지면 어쩔래? 그래도 나를 사랑할래? 커튼을 걷고 하늘이 보이고 보라색 컵, 창가에는 라벤더 흰색 벽지, 담배 냄새 밴 베란다 그곳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면 어쩔래? 그래도 우리 사랑할래? 잊어, 차라리 그래. ‘미안해, 사랑해’도 잊어 버리자 세숫물에 띄워 멀리 버리는 거야 우리 이마를 맞대고 웃었던 일들 맞잡은 두 손이라던가, 떠올리지 마 슬픈 중력으로 채워진 우주에서 도망치자 검을 일 없는 하늘 아래서 사랑을 하고 이별을 말할 일 없는 입술로 부딪히자 깰 리 없는 꿈을 꾸자 깊고 깊은 잠에 들자

#225 이름없음 2023/04/29 20:47:17

내 소원은 이대로 우리가 깨지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가만히 늘 이 자리에 계속 변하지 않고 있는 거야 눈을 뜨면 네모난 방이 보이고 옷걸이에는 낡은 외투와 가난한 사랑이 걸려있고 모자 속엔 영원한 젊음과 보물지도와 금화와 해골과 웅크려 잠든 노인이 있지만 지갑 속엔 아무것도 없다네 전부 걸치고 나가야지 이 욕심꾸러기 결국에 갖고 싶은 건 다 갖고 마는 길거리에는 갉아먹힌 낯선 감정들이 널려있고 따분하고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지나가다 익숙한 노래가 들리면 이 사람 노래는 참 좋아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가 다시 어딘가로 걸어갈 수 있는 내 소원은 멋대로 네가 그렇게 사는 거야 제멋대로 언젠가 내가 없을 때에 와르르 무너지지 않게

#226 이름없음 2023/04/29 20:59:02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있다. 거짓말은 새까만 색이다. 뾰족하지 않고 둥글다. 너의 검은 눈동자 한쌍이 그러했다. 우리의 사랑은 늘 거짓말로 연명되었다. 다만 네가 나에게 가졌던 감정은 이따끔씩 흔들리던 눈빛과 내비치던 불안자저 금세 제자리로 돌려놓을 만큼 알량한 죄책감 하나임에 분명했고, 네 수많은 변명들과 볼뺨을 타고 흐른 별빛마저도 차라리 턱끝에서 아롱거리다 사라지기를 바랄 위선이었다.

#227 이름없음 2023/05/01 08:51:30

젤리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외계인이 나타나 나에게 물었다. 글쎄요. 대충 웅얼거려봤지만 외계인은 여전히 대답을 재촉하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우주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까만 눈을 바라보다 문득 이건 꿈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음이 제법 편해졌다. 젤리요. 일단 젤리는 모두가 누릴 수 있어야죠. 그렇잖아요. 먼지보다 작은 별에 얹혀사는 주제에 우리는 뭔가 불공평하잖아요. 그러니까, 불공정하고 뭐랄까 그래 모두가 각자의 수조에 갇혀 있는데 누구는 해수염도가 자동으로 맞춰지는 오토 수조고 누구는 숨 쉬기가 힘들어 평생 아가미에 먼지만 쌓이면 안되잖아요. 근데 그 아가미 진짜에요? 여기로 숨 쉬는 거에요? 외계인은 나의 물음에 무언갈 기록하던 손을 멈추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친절하게 웃었다. 베아티투도. 외게인은 그렇게 발음했다. 베아티투도 구나. 전 아가미인줄 알았어요. 우리는 마주보고 같이 웃었다. 한참을 깔깔거리다가 외계인이 눈물을 훔치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젤리가 뭐라고요? 돈이요. 돈. 일단 전 돈 때문에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228 이름없음 2023/08/02 17:02:31

만약 사랑을 할 수 없다면 그건 얼마나 축복일까. 씁쓸한 커피향과 더운 체온, 빼죽하게 뻗은 머리카락과 얇은 테의 안경. 그것은 너를 설명해주는 것들이다. 너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곁에 내가 있을 때 슬쩍 자리를 만들어주는 거 밖에는. 그게 사랑의 방식이라고 한다면 나의 사랑은 자살에 가까울 것이다. "자고 가." 용기를 내 뱉은 말에 너는 벗어 놓은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또 올게." 생각하는 척 해줬지만 사실 생각하지 않고 정해진 답을 뱉어낸 거겠지.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 받았다. 진한 커피향을 남긴 채 너는 떠났다. 손 안에는 여전히 거칠한 머리카락의 감촉이 남아 있다. 사랑하지 않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너는 모를 것이다. 실은 너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지도, 남자들이 흔히들 말하는 첫사랑을 잊지 않은 채로 있을지도 모를 일. 그럼에도 너를 붙잡고 있는 이 행위를 멈출 수 없다면... 너무 뜨거웠다. 너의 체온은 금새 옮아왔고 아무런 감정도 없이 형체를 잃어갔다.

#229 이름없음 2023/08/03 01:32:28

강아지학대요소 나는 강아지가 좋아. 부드러운 털이 좋아. 따스한 향기도 좋고, 동그란 눈알도 좋아. 푹신한 털은 어떻고. 그 동그란 귀나 짧은 다리 같은 것도. 혹은 새빨간 혀나 흐르는 침도. 끼깅거리는 신음도 좋고... 누구보다 빠른 다리를 지녔으면서 나를 떠나지 않는 것도. 네가 나에게 다시 몸을 부빌때면 모든 걸 용서받는 것 같아. 너는 네게서 흐르는 피에도 아랑곳 안고 나를 사랑해주지. 그러면 죄책감이 없어져. 초코야, 너는 나를 좋아하지? 그러니까 오늘도 꾹 참아, 내일이면 다시 안아줄게. 품 안에 따스한 털을 만지고 만지고 만지고...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로 짖고 짖고 짖고... 이윽고 조용해질 즈음, 나는 그 조그만한 이마에 키스했다.

#230 이름없음 2023/08/07 22:55:01

"외롭다." 무심코 입 밖에 내뱉은 말에 스스로 놀랐다.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걸까? 무엇을 해야할 지 잃어버린 이 상황은, 막 성인의 자격이 주어진 내게 너무 버거웠다. 아무리 혼자 헤메어 보아도 길은 다시 제자리 걸음. 차마 말하지 못한 고민들은 입술 사이 헛된 바람으로 빠져나갔다. 의지할 마땅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의지하고 싶지도 않았다. 혼자서 해결해내고 싶었다. '나의 나약함을 드러내보이고 싶지 않다', 고작 그런 오만에 불과했지만.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몇 번, 몇 십 번이고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끈질기게 노력해서 기어올라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은 내 생각보다 더 고달팠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었고, 그리고 나 또한 그렇다는 사실이 날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지칠대로 지친 정신은 점점 나약함을 수용하여, 무신론자인 내가 사람들이 어째서 신을 찾는 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마침내 나는 인정하고야 말았다. 이 비탈길 같은 인생에서, 빌어먹을 동반자나 신 따위를 한 번 찾아보자고! '도저히 감당이 안돼.' 필사적으로 거리를 헤맨다. 빈틈을 내어줄 사람이나 신 따위를 찾아서. 차가운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고 피해 잠시나마 온기를 내어줄 무언가를 찾아서- 그저-

#231 이름없음 2024/03/07 22:26:06

고양이는 원래 인간을 싫어했다. 민감한 청각과 후각은 인간의 냄새를 맡고 도망가기 위해서 그렇게 되었고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 또한 인간이 다가왔을 경우 내쫓기 위해 벼르고 벼른 것이다. 생존경쟁이니 진화론이니 하는 학문이 무색하게, 인간을 싫어하는 포유류 조상들만이 고양이가 된 것이다. 그러다 이집트인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배 굶을일이 적고 고된 일은 외국인 노예를 시켰기에 기본적으로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생각의 대부분은 신에 대한 것이었다. 신에 대해 생각하니 신에 대해 말하게 되고 신에 대해 말하다 보니 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집트인들은 신의 사자로 어떤 동물을 곁들여야 할 지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배 굶을일이 적고 하는 일이라곤 그늘을 찾아 쉬거나 술을 마시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개는 안됐다. 애초에 이집트에는 개가 드물었다. 새도 안되었다. 어제 야식으로 먹었기 때문이다. 낙타? 그럴듯한 동물에 다들 수긍하려는 찰나 지나가는 낙타가 그들을 향해 침을 뱉었다. 낙타 침을 닦으며 그들은 머리를 잡고 끙끙댔다. 그러자 누가 말했다. 고양이는 어때? 그때부터 사람들은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고양이들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인간이 싫어서 이런 귀엽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진화했는데, 가축이라니? 그러나 그들은 곧 깨달았다. 인간은 물도 주고 밥도 주고 똥도 치워주고 애정이란 것도 주었다. 애정은 정말 신기한 것이었다. 어미가 새끼에게 품는 감정과 비슷한가 싶다가도 번식기의 이성에게 발휘하는 독점욕 처럼 보였다. 등과 엉덩이를 맡길 수 있는 자매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자라지 않는 인간은 아기 고양이 처럼 보여 내가 지켜줘야 할 것 같았다. 고양이들은 애정이 너무 소름끼치고 징그럽고 혐오스러워 인간을 물어뜯고 긁고 하루종일 귀찮게 굴었다. 인간은 끈질기게 고양이를 먹이고 마시게 하고 쓰다듬었다. 이집트의 모래 속에 똥과 오줌을 숨겨둬 인간이 밟게 해도 인간은 개의치 않아 했다. 지친 고양이들은 결국 포기하고 인간이 자신들을 마음대로 유린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톱을 숨길 수 있게 진화했다.

#232 이름없음 2024/03/07 22:46:39

'중립' 선도 악도 아닌 자. 그러나 그것은 곧 선도 악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가 타인에게 느끼는 감정은 질투, 그리고 혐오와 분노였다. 그가 타인에게 느끼는 감정은 우정, 그리고 애정과 고마움이었다. 그가 스스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만족과 자기혐오였다.

#233 이름없음 2024/03/10 02:33:25

너를 만나는 일은 꼭 침을 삼키는 것과 같다고 느낀다. 목을 넘어가는 감각은 분명히 느껴지는데도 타는 듯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타액으로 목을 축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목이 말라 연신 침을 꼴딱꼴딱 삼키면 어느샌가 마르지 않을 것만 같던 혀도 바짝 말라 침샘이 바닥을 드러낸다. 만나도 만나도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나는 오늘도 네게 연락을 한다. 답장이 오면, 나는 거기에 대한 답장을 또 한번 주고 받고. 네가 까무룩 잠에 들 때까지 나는 이 짓을 계속 하게 되겠지. 새벽녘이 밝아올 때 즈음의 나는 아마도 여전히 외로운 채일 것이다. 타액 같은 너는 내 안에 자리잡아 계속해서 샘솟을 테지만 결코 갈증을 해소해줄 수는 없는 존재였기에.

#234 이름없음 2024/03/10 17:27:07

삭제된 레스입니다.

#235 이름없음 2024/03/10 17:33:47

삭제된 레스입니다.

#236 이름없음 2024/03/14 22:39:01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우리 괜찮을까요?" 그러니까, 사랑 말이에요. 우리는 다행히 지능을 높여 생존해온 종으로 태어나 이렇게 만났지만 만약 이번생이 다하고 다음 생으로 넘어갔는데 사랑을 모르는 종으로 태어나면 어쩌죠? 괴로울거에요. 당신이 그냥 암컷으로 존재하고 내가 그냥 수컷으로 존재한다는건 아주 괴로운 일일거에요. 그리고 나는 괴로운 일이 괴로운 줄 모르고 일생을 살아가겠죠. 그 다음생은 괜찮을까요? 어쩌면 다른 종으로 태어날지도 몰라요. 우리는. 당신이 나를 잡아먹거나 내가 당신을 해하려 들겠죠. 아무 관심 없이 지나칠지도 몰라요. 이후에는요? 방사능에 극도로 노출되어 당신만 짧은 생을 보내면 어쩌죠? 난 평생을 그리워할거에요. 매일 꿈에 당신이 나오겠죠. 그러면 난 아침마다 울면서 잠을 깰거에요. 아아, 괴로워. 사랑은 왜 이렇게 괴로운 거에요? 여자가 답했다. "다 좋은데 나는 기독교에요."

#237 이름없음 2024/03/15 01:15:09

마실 게 없어서 이제는 새벽밤을 들이킨다 알코올 도수 n0%의 독주를 나는 매일 밤 12시가 되면 습관처럼 꺼내고는 한다 LAN선은 질리지도 않는 오랜 내 술안주 안주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배가 불러오면 나는 누워서도 음주를 할 테지, 새벽기운에 못이겨 지쳐 잠들 때까지 과음에 과로를 겹쳐내면서

#238 이름없음 2024/03/17 04:09:47

미안해 나는 용수철 같은 사람이라 네가 아무리 눌러도 눌러도 다시 튀어오를 수밖에 없나 봐 나도 네 손짓 하나에 쉽게 고정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항상 여기로 저기로 튀어오르고 눌러도 밀어내고 언젠간 휘고 꺾여서 고장나 버릴 걸 알면서도 네게 선택받길 원하고 그런데 너도 못됐어 싸구려 용수철도 고급 부재료처럼 다루면 몇 년은 쓸 텐데

#239 이름없음 2024/03/17 18: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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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이름없음 2024/03/17 18:49:34

치악산 복숭아 당도 최고. "이거 광고 만드신 분이라고요?" "네. 제 최고 업적입니다." 남자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어보였지만 손에 베어나오는 땀은 숨길 수 없었다. 치악산 복숭아 당도 최고. 인터넷 밈으로 한동안 떠돌았던 나름 유명하다면 유명한 광고였다. 담당자는 헛웃음을 쳤다. 아, 떨어지겠구나. 남자는 성인이고 책임이고 다 모른체하고 목놓아 울고 싶어졌다. 광고가 만들고 싶었다. 이상하게 생겼네, 베베베 꼬였네.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남자는 광고가 좋았다. 상업적인 메세지를 전하는 수단이었지만 물건과 물질만 넘쳐나는 세상에서 광고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야, 인간을 움직여야 하니까. 만원 지하철에서 아무렇지 않게 옆사람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놓고 길을 헤메는 사람에게 4번 출구라고 외치는 인간을 설득해야하니까. 그 마음에 들어가야 하니까. 남자는 광고가 좋았다. 아이러니해서 좋아했다. 하지만 남자의 광고는 이상하게 팔리지 않았다. 의뢰가 거의 없어 슬프고 불안한 남자는 갑자기 화가 났다. 멍청한 세상. 멍청한 인간들. 치악산 복숭아 당도최고는 홧김에 만든 실수였다. 그러나 인터넷을 떠돌며 인기를 얻었고 남자는 마지막 기회가 보이는 듯 했다. "아, 네. 재밌는데 저희랑 방향이 맞진 않네요." "그러지 마시고요, 그, 뭐냐, 스레딕 익명성 최고 이런 문구면 동접 만 명도 가능하다니까요." 담당자가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 떨어졌다. 남자는 생각했다.

#241 이름없음 2024/03/17 19:00:13

>>215 오우.... 조상님 화끈하시다. >>218 세계관 이어지는거 환장하는데 덕분에 잼게 읽었어!! 계속써. >>229 초코야.... 도망쳐.... 불건강한 심리의 화자 좋아하는데 잘 써서 재밌었엉 또 써. >>230 나도 처음 성인되고 대학을 갔는데 낯선 도시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기분을 처음 느껴봐서 힘들었는데..🥲 잠이 안와서 빔을 새고 새벽에 맥주한캔 들고 공원을 돌았는데 해가 뜨는거야.. 그 하늘이 내 고향 하늘이랑 똑같이 예뻐서 위로를 받았었어 혹시 레더 이야기라면 조금씩 처음 만나는 것들에게 정을 붙여봐. 훨씬 즐거울거야!

#242 이름없음 2024/03/17 19:01:58

>>235 이어쓰세요. 스레주가 이어쓰기를 강요합니다.

#243 이름없음 2024/03/22 22:42:20

또 언제나와 같아. 당신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어. 자꾸만 떠오르잖아. 당신은 이미 떠나버렸는데 어째서 항상 내 머리속을 떠돌고 있는 걸까, 당신은 이미 날 두고 가버렸는데 어째서 나를 괴롭게 하는 걸까. 너무해. 너무하잖아.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건데. 너는 이미 나를 지웠을 거면서. 너무해, 너무. 당신이 좋아. 나에게 애정을 주었던 네가, 나에게 친구를 주었던 당신이 좋아. 당신이 싫어. 나에게 애정을 주고 떠나버린 네가, 나를 홀로 두고 가버린 당신이 싫어. 잊고 싶어, 잊게 해줘. 이제는 기억하고 싶은 않은 걸.

#244 이름없음 2024/03/22 23:01:04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검지손가락 끝에 일어난 거스러미를 잡아 뜯었더니 핏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화끈거리는 느낌에 닦아내고는 싶었지만 책상 위에는 휴지가 없었고, 다리는 머리와 등을 졌는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피가 맺힌 손가락으로 타자를 친다. 하얀색 키캡에 살짝 붉은 자국이 남지만, 크게 거슬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럽혀진 키캡을 닦지도 않아도 되고, 거스러미를 뜯느라 난 상처에 연고를 바르지 않아도 되고, 피가 나는 게 되려 당연한 모습일 시체가 되고 싶다. 사실 나는 움직이는 시체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입 안을 굴러다니던 사탕에서 단물이 나왔다. 미각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서 제가 시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시체가 되고 싶은 시체지망생, 시체가 될 예정인 예비 시체. 살아있는 사람에 자꾸 시체라는 말을 겹쳐내다 보니 시체라는 단어에서 이상하게도 생동감이 느껴졌다.

#245 이름없음 2024/03/23 20:30:32

삑ㅡ. 또다시 난 채널을 돌렸다. 이젠 구시대의 산물이 되어 공간만 차지하는 텔레비전에선 선명한 푸른빛이 나오며 유행에 뒤쳐진 콘텐츠들을 하루종일 보여주고 있었다. 시리도록 적막한 식사자리가 싫어서 나는 소리를 좀 더 올리고 리모컨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며칠전 마지막으로 나눈 카톡의 대화창들을 다시 읽으면서 마음 속 어딘가의 공허함을 달래었다.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카톡기록을 다 보고 마지막, 불과 이틀전 새벽에 내 사촌이 마지막으로 보낸 메세지가 보였다. [그 사람이 눈치챈 것 같아] 그 사람, 내 사촌의 직속상사. 상당히 괴팍하고 이상한 사람이었다. 사촌오빠의 연구실 견학을 갔을때 피가 묻은 주사기를 든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입을 길게 찢으며 웃고 있었다. 그러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내 사촌오빠를 불렀었다. 그 뒤로 견학을 가는 일은 없었고 거기서 뭘 견학하고 배운건지 잊었지만 그 웃음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잔상처럼 또다시 떠오른 그 웃음을 애써 지우고 나는 식사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티비의 소음도 줄이고 핸드폰으로 시간이나 죽이려한 순간 문 너머에서 노크소리와 함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246 이름없음 2024/03/26 16:26:48

아 알았다. 쨔위는 드디어 모든 것을 깨달았다. 지금 있는 곳은 ㄱ4 구역의 35-128 하수로의 중간 지점. 여기서 모퉁이를 돌면 쨔위가 즐겨 먹는 바퀴알 스팟이 있었다. 빛도 들지 않는 퀴퀴한 하수구 벽 틈새에서 쨔위는 이제 모든 것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예민한 청각과 후각 때문에 다른 형제들 보다 먼저 무리를 떠나 홀로 생활했다. 이 곳은 무언가가 계속 썩어가고 있었으므로 쨔위는 신선한 냄새를 맡으려 했고 끈적거리는 오수 소리에 귀를 막으려고 먼 곳의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쨔위는 이 곳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곳의 이치를 이해한 쨔위는 생각했다. 나가야겠어. 이 곳을 나가는 건 쨔위에게 아주 큰 도전이었다. 쥐들이 다 그렇듯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적응한 뒤 소소한 행복을 찾는게 쨔위의 삶을 영위하는데 좋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쨔위는 불행히도 예민한 청각과 후각이 있었다. 엉겁결에 쨔위는 힘들게 하수로를 탈출했다. 쨔위를 반기듯 건조한 바람이 수염을 스쳤다. 쨔위는 밝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처음 들어보는 소리, 낯선 냄새. 쨔위는 조금 망설이다 한 걸음 내딛었고 옆에서 달려오는 차에 치여 죽고 말았다. 이때 쨔위의 죽음은 자살인가? 그 이유와 함께 기술하라. (6점)

#247 이름없음 2024/06/11 11:49:24

그는 영웅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악인이었다. 이야기를 다 말하기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중요한 건 몇 가지 사실이다. 그는 예정된 멸망을 보았고, 그 운명을 뒤틀고자 대의를 품었다. 멸망을 막아 다른 이들을 살리겠다는 선의를 악의로 포장하고, 정의와 불의를 뒤섞었다.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성공했고, 그리하여 죽었다. 그가 죄인으로 기록된 채 시간이 흘렀다. 그의 혼은 누군가의 육체에서 되살아 났다. 그리고 우연히 이곳에 흘러 들어왔다. 대행자는 제 앞에 당도한 이의 이야기를 읽어내렸다. "그대는 영웅이구나. 선하지만 악인이고, 수많은 죄로 하나의 정의를 이뤄냈어. 그 어떤 것도 최선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차악이었겠지. 하나 죄인이구나." 대행자의 검붉은 외눈이 그를 응시한다. "묻겠다. 그대, 죄업의 무게를 감당하겠느나?" 그는 침묵했다. 그저 눈 앞의 거대한 것, 신성하고 꺼림직한 무언가를 올려 볼 뿐이었다. "선택하라. 내게 허락된 시간은 아득하나, 그대는 아닐 테니." 그는, 답할 수 없었다.

#248 이름없음 2024/06/12 00:04:38

나는 내가 별 볼 일이 없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주변인들이 내밀어준 손을 잡아도 이미 늪지대에 빠져버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내면에 있는 나 스스로가 겉에서 행동하고있는 나를 보고 비웃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너는 절대로 그 인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하늘은 밝았지만 나의 주변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249 이름없음 2024/06/12 00:11:39

상실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죄악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어째서 소중한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만 후회를 하는 것인지. 소중한 누군가가 죽는다는 건 이제 싫다면서, 결국은 또다시 소중하게 여길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 밤, 매일 가던 술집에서 마주한 남자는 나를 모텔방에 데려가 애정을 요구했다. 사랑한다고 해 봐, 명령조인 그의 말에 문득 증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이내 내 사랑은 꺼져버리는 법이 없다는 생각에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헤프게 그에게 키스를 퍼부어도, 어설픈 사랑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랑해, 사랑해.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진정한 나는 남자에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사실 난 사랑이 뭔지 전혀 모르겠어. 그러니 죽지 말고 내 곁에서 끈질기게 숨을 쉬어줘.

#250 이름없음 2024/06/12 15:38:07

왠지 스레주 글 베르나르 베르베르 문체랑 유사하다. 이론적이거나 철학적인 듯 오묘한 느낌. 만져질 듯 떠나갈 듯 둥그렇고 다채로운 비눗방울 같아. 스레주 글 잘 보고 있어!

#251 이름없음 2024/06/12 15:49:39

꿈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꿈속에서 저는 몇시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감각을 잃어버린채 공허 속에서 몇시간이고 잡생각을 하며. 가족들은 잘 있을까. 나는 죽은걸까. 아니다, 이건 꿈인 것이다. 꿈이기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질척한 어둠속에서 몇시간이고, 며칠이고 누워있을것만 같다는 생각에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만 것입니다. 꿈이었지. 나는 어떻게 생긴거지? 눈꺼풀이 있나? 눈꺼풀 대신 다른 무언가가 있는건 아닐까? 낙엽이라던가.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떴을때 저는 한없이 찌뿌둥한 몸과 돌덩이와도 같은 눈꺼풀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발을 질질 끌며 나온 부엌엔 텅 비어있는 냉장고가 나를 맞아주었고 집에는 그 누구의 기척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 나간거겠지, 싶은 생각도 잠시 출근 시간이 다가오는걸 깨달은 저는 황급히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질척한 어둠, 아무것도 못하며 시간을 보낸 자신. 해몽 풀이를 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미신이라는 생각이 뇌를 스쳤기에 그만두었습니다.

#252 이름없음 2024/06/14 23:20:56

모두가 잘못했음에도 한명만 질타를 받는 모습이, 썩 좋진 않았던 것 같다. 그 상황에서 말 없이 앉아만 있었던 나도 잘못이 있다는걸 알고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용기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그 사람과 부드럽게 눈을 맞추며 모두가 잘못했으니 조금만 관용을 갖추자고, 말을 건넬 수 있었을까. 아무렇지 않아보였던 그의 마지막 뒷모습이 괜히 오래 남았다.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원망스러운 것도, 무서워지는 것도, 혐오스러워지는 것도, 모두 '그럴 수 있는' 일인걸까.

#253 이름없음 2024/06/15 01:30:37

있을 리가 없는 것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침대가 부서질 정도로 날뛰지만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그 행위로 자극을 받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침상을 구르는 것이 남들에게는 퍽 미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미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찾고 긁어내리더라도 퍼덕이는 것은 불가능하나 제 눈엔 보이고 제 등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날개죽지가 간지럽고 그 접힌 부분이 펴지지 않아 뻐근함에 미쳐가는 사람이란 남에게 이미 미쳐버린 이로 보일 뿐이었다. 분명 그에게는 날개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254 이름없음 2025/01/15 02:00:35

땅 밖은 무섭다. 너무 많은 소리가 들린다. 땅 밖은 무섭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닌다. 땅 밖은 무섭다. 너무 많은 대화가 오간다. 땅 밖은 무섭다. 너무 많은 물건들이 있다. 땅 밖은 무섭다. 너무 많은 쇠붙이가 빛을 반사한다. 땅 밖은 무섭다. 너무 많은 자유가 있다. 땅 밖은 무섭다. 너의 손에서 빛이 반사 되기에. 땅 밖은 무섭다. 네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땅 밖은 무섭다. 내 몸에서 냄새가 심해지기에. 땅 밖은 무섭다. 이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255 이름없음 2025/01/15 02:01:37

>>253 배꼽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256 이름없음 2025/02/11 22:52:08

"누군가 내 심장을 훔쳐갔거든." "아, 예." 방금까지 거위에게 탈탈 털리던 방랑자를 구해 주고 난 뒤, 이런 깡촌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자 들린 대답이었다. 요즘은 거위한테도 지는 사람이 사랑을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세상이구나... 양치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사랑에 빠졌다거나 하는 비유적인 말은 아니야. 진짜 심장이 사라졌다니까?" "그러시군요..." 이제 보니 그냥 어딘가 아픈 사람인 것 같다. 양치기가 적당히 넘기려 하자 방랑자가 맥이라도 짚어보라며 손목을 건냈다. 자기가 부정한다고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이 멈출리는 없었다. 빨리 심장의 존재 여부를 확인해주고 떠나자는 심정으로, 건성건성 맥을 짚던 양치기는 얼마 안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야, 왜 맥박이... 양치기의 얼빠진 표정을 빤히 보던 방랑자는 앞에 있는 사람의 심정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듯 속 터지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조금만 더 도와줄 수 있어?"

#257 이름없음 2025/02/27 02:04:10

삭제된 레스입니다.

#258 이름없음 2025/03/04 06:34:33

함께 해준다며. 내가 나락으로 점철되었을 때, 다신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일어나길 포기했을 때. 난 벗어나기 위해 미친듯이 앞으로 달렸다. 그리고 온 몸으로 널 찾기위해 외쳤다. 같이 있겠다면서. 날 사랑한다면서. 너의 흔적이라도,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싶어서 단 한시도 쉬지않고 달렸다. 하지만 그랬기에 난 알지 못했던 것이다. 넌 내 바로 등 뒤에 있었단 사실을. 내 등 뒤 그림자에 숨겨져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되었단 사실을. 한참 뒤 내가 달리다 제 풀에 지쳐 등을 돌아보았을 때, 그제서야 난 너가 거기 있었다라는 과거만을 발견할 수 있었다.

#259 이름없음 2025/03/08 20:59:07

당신이 오늘도 꿈에 나왔다. 꿈속의 당신은 나를 이용하고 버렸다. 그뿐이었다. 전처럼 울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익숙하다는 말로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당신에게 나는 뭐였을까? 지옥에서 우리가 보낸 시간들은, 나에게만 달콤한 시간이었던걸까? 당신에겐 나와의 시간이 쉽게 잊을만한 그저그런 일들이었나? 매일밤 의문이 들고 또 들고, 배신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죽어서까지 날 비참하게 만드는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260 이름없음 2025/03/18 11:41:41

삶과 죽음 행운과 불운 온화함과 사나움 이러한 것들은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아주 오래전부터 의문이었던 것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드디어 실마리를 찾을 때가 다가오고 있음에 감사한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축복 같다. 그러니 오늘도 살아간다.

#261 이름없음 2025/08/11 23:09:58

사실 인류는 커다란 돌멩이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신도, 당신도, 그리고 당신 역시 투박하고 못생기고 끔찍한 돌의 일부였던 셈이지요. 그러니 어디 한 번 살아가 보세요. 힘들어도 참고, 울고, 간간히 웃으면서 울다 보면 죽겠지요. 당신들은 다 죽어버리겠지요. 그리고 돌이 되는 겁니다. 사리요? 아뇨, 사리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뼈의 구슬이지 돌 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사리가 아니라 돌멩이가 되는 겁니가. 커다란 돌멩이요. 그 후에는 녹다가 굳다가 다시 뿌사져서 사람이 되는 겁니다. 환생이요? 아뇨, 환생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차원의 이동이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그저 녹는점에 다다른 돌멩이가 사람이 되는 과정을 겪을 뿐입니다. 이 글을 널리 퍼뜨려주세요. [공유] [신고하기] [고사지내기]

#262 이름없음 2025/08/12 08:10:02

모든 날개 달린 것들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독수리였다. 모든 독수리들이 본능에 따라 하늘로 발돋움 하더니 그대로 떨어져 죽어 버렸다. 이후로 모든 산새들이, 비둘기가, 닭들이 제각각의 높이로 날아오르다가 떨어져 죽었다. 몇몇은 날아오르는 과정에서 비행기의 엔진 부분과 맞닿아 인명 사고를 냈다. 거의 대부분의 비행기가 운항을 취소하였고 하늘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다음은 벌레들이었다. 초파리, 나방, 모기, 매미들이 저마다의 높이로 날아오르더니 그대로 죽어버렸다. 여름은 더 이상 시끄럽지 않았고 모기향을 만들어 팔던 공장과 회사는 차례차례 도산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붙였다. 과학자들은 이상기후를 들먹였고 종교계는 종말론을 피력했다. 정치인은 이틈을 타 환경 정비 예산을 늘렸고 노인 일자리가 많이 생겼다. 새벽마다 날아다니는 것들의 사체를 치우는 모습은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이제 하늘에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되자, 투신 자살율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유를 몰랐다기 보단, 설명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항공사는 문을 닫았고 전투기는 전량 폐기되었다. 드디어 하늘은 안식을 되찾았다.

#263 이름없음 2025/10/19 23:17:31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른다.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른다. 이내 메아리쳐, 너의 이름만이 남을때까지 계속해서 부른다. 이제와서 후회해도 무엇이 달라지랴. 그럼에도 부른다. 이것은 너를 위한 장송, 너를 위한 저주. 너를 향한 모든 것을 담아 쏘아내는 나의 화살. 끝내 폭발만이 남아 산뜻하게 비산할 운명.

#264 이름없음 2025/10/20 13:52:45

나를 꺾으면 달라진다 여겼겠지. 그늘져버린 이 나라에 볕이 들 것이고 피비린내의 진동, 외마디 비명과 구슬픈 통곡, 죽음의 기척까지도 전부 사라질 것이라. 때문에 내가 쥔 일태도야말로 이 나라의 비극을 비추는 거울이자 그릇되어버린 힘의 남용, 그 상징이라 너는 그리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비단 너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영원을 향한 나의 대망을 종결짓고자 목숨을 내세웠던 자들은 이전에도 더러는 있었지. 허나 그들의 말로는 천편일률적이었나니 마치 봄의 끝을 마주한 사쿠라처럼 무상하였더랬다. 우부키노하라 카케토. 아니, 본좌의 치세를 저지코자 혼으로서 현현한 외지인이여. 오 백 년을 공들인 내 사상의 탑, 그 견고함을 일말은 헤아릴 수 있겠느냐? -원신, 라이덴 쇼군-

#265 이름없음 2025/10/20 13:55:39

낙양이 일게 되면 천수각을 중심으로 시가전이 전개될 겁니다. 내전이 벌어지게 된 이상 나루카미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휘말리게 되겠죠. 각지에 흩어진 종말번대원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내린 지시는 간단합니다. 텐료군과 대치하는 것도, 암살지령도 아닙니다. 전란에 휘말릴 이나즈마의 백성들을 지킨다, 그뿐이에요.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라는 거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의 안위를 등한시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이것은 돌아가신 제 선친의 뜻, 누이의 간곡한 당부였으며, 카미사토 가주이자, 삼봉행의 거두로서 응당 행해야 할 미덕. 설사 제게 패배의 운이 드리워진다 해도 저는 명예롭게 죽을 겁니다. -원신, 카미사토 아야토-

#266 이름없음 2025/10/30 01:34:47

누군가의 세계를 사랑해본 적이 있나. 사랑해 보았나. 그 다채로운 풍경을, 느긋하게 흘러가는 바람을, 불안정한 불길과 차갑게 내리는 빗방울마저도. 누군가의 세상을 보았나. 꿈을 보았나.

#267 이름없음 2026/06/29 12:52:01

나는 너를 바람에 실어보낼래. 뭉게뭉게 구름타고 넘실넘실 기류타서 지구일주 한바퀴할 너에게, 닿지 않을 이별의 말 가슴속에 묻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