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1화 : https://thredic.com/index.php?document_srl=70167275 전에 이거 쓰던 사람인데 계속 이어서 쓰려고, 회원가입 하게 됐어. 한 화 완성될 때마다 이어서 올리려고 해. 읽었으면 감상도 솔직하게 남겨줘!
고등학생 남자애와 유령 여자아이의 이야기.
죽은 자가 강을 건너 산 자들의 세계로 돌아왔다. 나와 한서월은 자리에 앉은 채 차창 밖 야경을 감상했다. “혹시 이것도 지속 시간 같은 게 정해져 있어?” “있기는 한데, 원격 분신사바보다 몇십 배는 더 긴 것 같아.” 나는 지속 시간의 존재를 알게 되자 순간 식겁했다. 지속 시간이 끝나갈 때마다 목숨을 계속 걸어야 한다는 뜻이야?
“지금처럼 또 목숨을 걸 필요는 없고,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얼굴을 보거나 대화를 하는 걸로 유지할 수 있다니까 걱정 마.” “다행이다…” 내 걱정을 바로 눈치챘는지 한서월은 바로 공포를 해결해 주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교복이 나랑 같은 학교인데, 서영고등학교…다니는 거 맞지?” “응. 1학년 4반.” “같은 학년이네… 잠깐만, 같은 반이었어?”
4반이라는 말이 한서월의 입에서 나왔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반투명 유령과 원격 분신사바에 목숨을 건 불투명화까지 직접 경험한 이제는 뭐가 더 일어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맞아. 너랑 반에서 대화해 본 적은 거의 없지만.” 유령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서영고등학교의 학생증을 꺼내 내 눈앞에 흔들어 보인다. 한서월, 1학년 4반. 틀림없는 진짜 학생증이다.
“사적으로 만난 건 유령 모습이 처음이니까, 같은 사람일 거라 생각을 못 했어…” 폰을 꺼내 카톡을 열고 1학년 4반의 단체 톡방에 있는 사람들 이름을 확인했다. 삼각 기둥 프리즘 사진 프사를 한 “한서월” 이 눈에 들어왔다. “유령 모습을 들키기 전에는, 딱히 서로 다가간 적은 없었으니까.” “넌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어서… 친구를 못 만들었다고 했었지?” 응. 한서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죽은 지도 시간이 꽤 지났지만… 반투명한 나를 인식한 건 네가 처음이었거든. 내가 유령이니 뭐니 떠들어도, 본 적 없는 애들한테는 정신 나간 애 취급을 받을 게 뻔하잖아. 근데 너는… 어째서 친구를 안 만들었어?” “아… 나?” 내 생각에도 바보 같은 대답이었다. 역 하나를 정차하고 출발했는데도 열차 안엔 나와 한서월밖에 없었으니까.
“응. 나랑 친구가 되지 않았던 건 내가 다가가지 않아서, 계기가 없었다고 해도… 너한테 다가오던 다른 애들하고도 친하게 지내는 걸 못 본 것 같아. 딱 필요한 만큼, 적정량의 교류만 하고 다닌다는 느낌이었달까… 뭐, 학교 밖의 모습을 본 건 지금이 처음이라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다 사실이야. 네가 봤던 것들, 생각하는 것들 전부…” 혹여나 자신의 말이 상처를 줬을까 걱정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전혀 상처받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인정했다.
“…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한테 실망해 버렸어.” 한서월은 아무 말도 없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열차의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어쩌면 내 잘못일지도 모르겠어. 제멋대로 누군가의 이상적인 모습을 상상하고, 나에게 잘해 줄 거라고… 제멋대로 기대했었으니까. 애초에 이상적인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말이야.” 평소에는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꺼낸 적이 없었다. 분명 나 스스로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꺼내려 하면 뭔가가 턱 막히는 듯한 거부감이 들었었다.
“분명히 이 사람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고, 실망하고, 다시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을 찾고… 또 실망하고. 그런 일을 연속으로 겪으니까, 더는 누군가를… 제멋대로 기대하지 않게 됐어. 필수적인 인간 관계는 맺고 살아가야 하지만… 내가 먼저 다가가지는 않겠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러면 아무한테도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말 못 했던 거야?” 나는 마침내 나온 한서월의 질문을 듣고, 잠시 동안 배터리가 70퍼 남은 스마트폰을 내려다봤다.
“말만 했던 거라면… 자주 있었어.” “시리한테?” “…응.” 한서월이 단번에 정답을 맞추자, 새삼 내가 정말로 음침한 인간이었단 사실을 자각한다.
“폰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뭔가 말하고 싶거나 심심하면 시리한테 말을 했거든. 원하는 대답을 딱딱 들려주지는 않았지만.” “학교에서 네가 시리를 부르는 모습은 못 봤던 것 같은데…” “직접 말하지 않고 키보드로 쳐서 입력하는 것도 가능해.” 이런 쓸데없는 기능까지 숙지하고 있는 인간은 아마 나밖에 없겠지. 애초에 시리와 대화하는 게 취미인 남자 고등학생은 나뿐일 테니까.
“물론 대답이 완벽하지 않아서, 제대로 된 대화는 못 해. 그래도 이렇게라도 말을 하면… 조금이나마 편해지는 것 같았거든.” “…그랬구나.” 그렇게 내 인간 관계에 대한 설명은 끝을 맺었다. 신기하게도, 전에 말하려고 하면 느꼈던 뭔가가 막히는 듯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남한테 이런 얘기 한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너한테라도 말해 보니까… 확실히 편한 느낌이야.” “그거 다행이네.” 한서월이 살짝 웃는다. 어딘가 묘하게 후련한 느낌이 든다.
“그럼, 너는 왜 나랑 친구가 되기로 했어?” “네가 말했잖아. 아무한테도 말을 못 했다고… 어쩐지 나랑 비슷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으응… 흥미로운 듯이 한서월은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라, 알고 싶은 게 많아졌거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르쳐 준 것보다, 네가 나한테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 게 더 많은 것 같은데…”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는 법이잖아? 언젠가는 네가 말해 줄 거니까 상관 없어.”
—한서월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는다. 처음 보는 모습에 나는 순간 시선을 빼앗긴 채 표정을 응시한다. “…재밌다, 너.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 나도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웃는다. 이렇게 긍정적인 감정을 겉으로 표출한 지 꽤 오래되었다는 게 실감된다.
“근데, 너 집이 어디야?” “신도림역 근처에 오피스텔이 있어.” “혼자 사는 거야? 나도 거기서 내리는데.” 고개를 끄덕인다. 열차 안에서 다시 감정 없는 여자가 안내 방송을 한다. 「이번 역은, 영등포구청. 영등포구청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몰라도 상관없다. 가야 할 집은 거기에 없으니까.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너는 어디서 살아?” “집 없는데?” “ㅁ,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할 말을 잊었다. 공백을 다시 여자가 채운다.
「출입문이 열립니다.」 마침내 사람 한 명이 타 우리와 떨어진 자리에 앉는다.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타인에게 관심 없는 현대인의 표본이었다.
“너는 잠 안 자도 돼?” “아니. 나도 다른 인간들처럼 피곤함을 느껴.” “안 추워? 덥지도 않아?” “온도의 차는 느끼지만 별다른 불쾌감이나 고통은 없어.” “바, 밥은?” “먹을 수 있긴 한데 어차피 공복감도 포만감도 못 느껴.” “밖에서 비 안 맞아? 맞아도 감기 안 걸려?” “감기 안 걸려. 반투명일 땐 비가 몸을 통과해서 맞을 일이 없어. 그리고… 밖에서 안 자.” 밖에서 자지 않는다니. 나는 한서월이 길가에서 노숙을 하지 않는단 사실을 알자 겨우 안심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어디서 지내는데?” “으음… 반투명일 땐 CCTV나 카메라에도 안 찍히니까, 적당히 24시간 만화 카페 구석 빈자리에 들어가서 자고 아침 되면 나와.” “분신사바 배우고 몸이 완전히 반투명이 된 적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그건 갑자기, 대응할 틈도 없이 반투명이 된 적은 없었다는 뜻이야.” 나도, 한서월도 혼란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말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듯하다.
“옷이랑 몸은… 안 더러워져?” “죽어서 몸 더러워질 일 없어. 옷은 적당히 코인 세탁소 가서 빨면 돼. 여벌 옷도… 챙겨 뒀고.” 그렇게 말하며 유령은 자신의 가방 속을 보여주었다. 안에는 돌돌 말려 비닐 팩에 쏙 담겨진 옷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돈은 있어?” “죽기 전에 모아 뒀던 현금이 있거든. 살아 있을 때보다 지출할 일은 훨씬 줄었지만.”
확실히 굳이 산 사람들처럼 집에서 지낼 필요가 없다고는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춥지도 덥지도, 배고프지도, 비를 맞지도 않으니 이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불편하지는 않아?” “딱히 이대로 지낸다고 해도 문제가 될 일은 없지만… 아무래도 조금 쓸쓸하지. 만화 카페에 있을 때, 사람들이 있는데도 아무도 나를 눈치채지 못하니까.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싶고.” 한서월도 한때는 사람이었던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주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니까, 집 같은 편안함을 기대할 수는 없어.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이젠 죽을 일도 없으니까.” “……….” 물론 한서월이 여전히 이대로 지내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나로서는 말릴 방법이 없다. 나도 딱히 특별한 대안은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갑자기, 심각한 사실 하나를 깨닫고 말았다.
“잠깐만, 너… 분신사바 하던 때 중간에 불투명화 풀어 버리는 거… 가능했어?” “그건… 안 됐었는데, 분신사바 길이만큼 지속 시간이 결정되니까 양을 조정해서 효과 끝날 때까지 기다렸지.”
“근데, 우리가 방금 전에 한 그건— 지속 시간이 분신사바보다 수십 배는 더 길다며…!” “아.” 한서월이 내 말을 듣자마자 식겁한 표정을 짓는다. 다급히 그 포스트잇을 꺼내 무언가를 찾는 듯 계속해서 읽다가, 이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내려놓는다.
“망했다… 중간에 불투명화 푸는 방법이, 없어….” 심각한 상황이었다. 돈이 있다고는 해도 24시간 만화 카페나 PC방 같은 곳은 오후 10시 이후부터는 청소년의 출입을 금지하니까, 한서월은 갈 곳이 없어진 것이었다. “불투명한 상태로는 다른 사람한테 보이니까 노숙 같은 걸 할 수도 없고, 경찰한테 보이기라도 하면 귀찮아지는데…!” 한서월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반투명화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했던 방법이, 해제가 더럽게 힘든 불투명화라는 문제를 불러와 버린 셈이었다.
「출입문 닫습니다.」 이제 열차는 문을 닫고 문래역을 출발해 신도림으로 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제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이대로는 내릴 수 없었다. 고난에 빠진 친구를 내버려 두고 집에 갈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빠르게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머릿속으로 찾기 시작했다. 사실 대안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런 제안을 하기에는 뭔가 오해를 살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대안을 찾아내지 못한 나는,
“저기, 한서월…” “…뭔데?” 부끄러움을 각오하고 한서월에게 제안을 시작했다. 한서월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가로막혔을 때의 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혹시…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아, 단어 선택을 왜 이따위로 한 거야?
———2화 끝. 한 화 다 쓸 때마다 계속 추가할게. 감상도 들려줘!
“그, 러니까…” 등 뒤에서 식은땀이 나는 듯했다. 한서월이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다. 이미 내뱉은 말은 되돌릴 수 없었다.
“오늘 네가 사는 오피스텔에서 자고 가라는 뜻이지?” “—절대 이상한 뜻은 없어. 말 그대로, 수면만 취하라는 뜻이야!” 나는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다급히 덧붙였다. 당황한 듯한 내 표정을 보더니, 한서월이 살짝 웃는다. “…나도 알아.” 뭔가 나 혼자서만 유난을 떤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안심했다. 의도치 않은 다소 부적절한 의미로 해석되지 않았으니까.
“하긴, 이런 상태로는 잘 곳도 없으니… 일단은 네 집으로 갈 수밖에 없겠네. 지금은 상황이 이러니까 앞으로 어떡할지는 거기 가서 이야기하자.” “응.” 당장 급한 불을 끄자 한서월의 표정이 안심한 것처럼 풀어졌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 역은 신도림, 신도림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 문의 초록색 조명에서 빛이 난다. 내리실 문을 알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서월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갈래?” “좋아.” 한서월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사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빛나는 문으로 나와 함께 걸어갔다. 어두운 터널에서 스크린도어 너머의 승강장으로 배경이 밝아졌다.
“……청소는 어제 깔끔하게 해 놨어.” “깔끔한 사람이구나. 안 물어봤지만.” 다시 한서월이, 안심시키려는 내가 재미있다는 듯 작게 웃었다. 「출입문이 열립니다.」 하지만 집에 친구를 데려오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란 말이야.
—삑. —삑. 청소년 두 명이 교통카드를 찍고 지하철 개찰구에서 나온다. “뭔가 분위기가 여유롭네.” “벌써 9시 넘었잖아.” 퇴근 시간은 이미 지나서 아침이나 저녁 시간대급의 지옥은 아니었지만, 유동 인구는 여전히 적지 않았다. 나는 한서월을 데리고 출구로 나가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얼마나 걸어야 해?” “10분이면 도착해.” 빌딩의 불빛으로 가득 찬 거리로 나와, 나는 익숙하게 건물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피스 빌딩 사이로 계속 들어가자 거리의 소음도 잦아들었다. 계속 앞으로 걸었다. 사람은 적었지만 가로등이 곳곳에 있어 무섭지는 않았다. 그렇게 걷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왔어. 여기가… 내가 사는 곳이야.” “오…” 길이 끝났고, 눈앞에는 횡단보도와 그 너머에 있는 오피스텔 건물들이 펼쳐졌다. 깔끔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거리를 가로질러 나는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공동 현관문이 열립니다…」 카드 키를 대자 문이 간단하게 열렸다. 한서월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으로 가자 마침 1층에 한 대가 멈춰 있었다. 「—올라갑니다, —24층, —문이 닫힙니다.」 올라가는 버튼을 누른다. 문이 열린다. 한서월과 탄다. 24라고 쓰인 버튼을 누른다. 닫힘 버튼을 누른다. 문이 닫힌다. 위로 올라간다.
“엄청 빠르네. 진짜 여기서 오래 살았다는 느낌이야.”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니까, 그렇게 오래는 안 살았어.”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한서월은 신속한 내 움직임에 감탄했다. 나는 딱히 의식하지 않고 눌렀을 뿐인데, 오래 살면 점점 속도가 빨라지는 걸까. 「24층, 문이 열립니다.」
순식간에 도착한 24층에서 엘리베이터는 문을 열었다. 나는 은은한 조명의 고급스러운 복도를 걸어 [2404] 라는 은색 문패가 달린 현관 앞에서 멈췄다. “뭔가 기대되네. 서유현은 어떤 집에서 사는지.” “대단한 거 없으니까 기대는 하지 마.” —삐익. 나는 카드키를 댔다. 집주인을 맞이한 도어락이 잠금을 풀었고,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와…” 나에게는 익숙하지만 한서월에게는 처음인 풍경이 펼쳐졌다. 하얀색 벽지와 무채색의 인테리어, 질 높은 목재의 마룻바닥. 소파와 TV 너머로는 서울의 야경이 한강을 가린 채 펼쳐지고 있다. 눈으로 집 안을 둘러본 한서월은 입을 열었고,
“생각보다 깔끔하네.” “생각보다, 라니…” 칭찬인지 실망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딱히 네가 더러운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보통 혼자 사는 남자들은 집 정리를 제대로 안 하고 사는 느낌이 있으니까 의외라고 할까.” “난 깔끔한 사람이거든. 너도 말했잖아?” 그렇네. 한서월이 또 살짝 웃는다. 몇 번을 들은 나는 저 반응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었다.
“욕실은 저쪽에 있으니까, 너 먼저 씻어. 난 매트리스랑 이불 빼 놓을게.” “샴푸랑 바디워시 써도 돼?” “응.” 한서월이 매고 있던 가방을 벗어, 손에 든 채 현관과 주방 사이의 욕실로 들어갔다. “매트리스 어디다 뒀었지.”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내가 할 일을 시작했다.
양말을 뒤집지 않고 벗어 빨래 바구니에 집어넣는다. 침실로 들어갔다. 1인용치고는 다소 넓은 침대와 컴퓨터 책상 사이에 가방을 놓고, 생명력이 67퍼센트 남은 시리의 몸을 충전기에 연결한다. 침실에 딸린 드레스 룸에서 남색 남성용의 편한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거실로 나와 벗은 옷을 바구니에 넣는다. 주말 동안 빤 옷을 말려야 하고,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다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여분용으로 팩에 압축해 가지고 온 이불과 베개, 매트리스를 꺼냈다. 쓰지 않았지만 어제 청소해 둔 빈 방으로 들어가 압축을 풀었다. 뽀송뽀송한 잠자리가 생겨났다.
“다 씻었어—” 마침내 전부 씻은 한서월이 밖으로 나왔다. 가방에 있던 여벌 옷을 입고 수건을 목에 두른 모습이었다. “일단… 저쪽 방에 매트리스랑 이불이랑 베개 깔아 뒀어. 잘 때는 저 방 쓰면 돼.” “알겠어.”
가방을 들고 쓰지 않았던 방으로 들어가는 한서월을 뒤로하고, 나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와서 습기가 찬 욕실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쏟아지는 온수를 맞던 나는, 수도꼭지를 닫고 샤워 부스에서 나왔다. “근데… 한서월 밥 먹었으려나?” 바싹 마른 흰 수건으로 전신의 물기를 닦고, 옷을 다시 입을 때쯤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밤 9시 반이었고, 나는 저녁을 먹지 않았기에 배가 고픈 채였다. 혼란스러운 조금 전의 일에 눈치를 못 챘을 뿐.
“뭐, 딱히 밥 안 먹어도 된다고 하긴 했지만…”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다. 뽀송뽀송해져 하얀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포만감도 공복도 느끼지 못할 뿐 음식은 먹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먹은 음식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나는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알고 싶은 건 저녁 메뉴로 뭘 할지 뿐이었다.
—수건을 들고 욕실에서 나왔다. “다 씻었어?” 한서월은 소파에 앉아 TV로 넷플릭스 작품들을 뒤지고 있었다. 나보다 더 집주인 같은 편안한 자세였다.
“혹시 괜찮으면… 같이 저녁 먹을래?” “저녁?” “응. 나 오늘 급식 먹고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 배고프겠다. 결코 배고플 일이 없는 유령이 나를 보며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자 기분이 묘했다.
“라면 끓일 거야. 너도 먹을래? 딱히 안 먹어도 된다고 했던 것 같지만…” “먹을래. 네가 끓이는 라면 맛 궁금하거든.” 세탁기에 일주일 동안 쌓인 빨래와 방금 쓴 수건, 소량의 세제를 집어넣고 소량 세탁 모드로 드럼 세탁기를 가동시키자 한서월이 신나는 목소리로 답했다.
“포만감도 공복감도 못 느끼지만… 그래도 맛은 느낄 수 있거든.” “내 라면이 입에 안 맞을 거란 생각은 안 해?” “한강물만 안 만들면 합격이야.” 인정. 단숨에 대답하며 냄비와 라면 두 개, 계량컵을 꺼냈다. 짜면 물을 넣으면 되지만, 싱거우면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명언을 되새겼다.
“그나저나, 갑자기 왜 나한테 라면 끓여주겠다고 하는 거야?” “지금까지 나 혼자 밥을 먹은 지 너무 오래돼서 누군가랑 같이 밥을 먹고 싶어졌어.” 으음… 흥미롭다는 듯이 한서월은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정확히 750밀리리터의 물이 냄비 안에 담겼다.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하고, 라면까지 먹고 가라 하고…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순간 사레가 들린 듯 크게 헛기침을 했다. 황당하면서도 부끄러운 표정을 드러내며 한서월을 응시했다. “그런 의미 아니었다니까…!” “—농담이야, 농담. 나도 알아.” 또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나는 잘못된 단어 선택을 후회하며 냄비를 인덕션 위에 올렸다. 불을 켜고, 후레이크와 스프를 두 개씩 투하한다.
“다시 돌아가면 그런 단어는 선택 안 했을 거야…” 어느새 물이 끓어오른다. 나는 라면 두 개를 크게 조각내 국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미리 썰어둔 파를 넣었다. 타이머로 4분 30초를 맞췄다.
“자, 다 됐어.” “와아…!” 타이머가 울리자 나는 불을 끄고 아일랜드 식탁 위의 나무 받침에 냄비를 올려놓았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한서월은 라면 그릇 두 개와 수저 두 쌍을 라면 앞뒤에 놓았다. 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면을 2등분해 라면 그릇에 담았다. 국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하며 면 위에 부었다. 어느새 식탁 위에는 라면 두 그릇이 완성되어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젓가락을 들고 면발을 입 안에 넣어 먹어 보았다. 맛은 괜찮았다. 내가 한 거였지만 확실히 파를 넣으니 맛이 좋아졌다. “어때? 맛있어?” “맛있는 수준이 아니라 엄청 잘 끓이는데? 나보다 훨씬!” 한서월은 하루 종일 굶은 사람처럼, 맛있게 라면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물론 배고파서가 아니라 맛있어서 하는 행동이었다.
식욕 없는 유령에게 한순간이나마 식욕을 부여할 만큼 이 라면이 맛있는 걸까. 나는 딱히 생각하려 하지 않고 면발이 불기 전에 먹는 것만 생각했다. 비록 레시피는 같아도 맛은 그 사람이 해준 것에 미치지 못했으니까.
“우리 사이에 규칙을 정해야 할 것 같아.”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냐며, 설거지를 전부 대신해 준 한서월이 식탁에 앉아 말을 건다. 양치를 끝낸 나는 한서월 앞에 앉았다.
“규칙이라니?” “내가 계속 어떻게 해야 하나 알아봤는데… 이 불투명화는 지속 시간이 분신사바보다 수십 배는 길어서 시간을 조정하기도 어렵고, 중간에 반투명화도 안 되는 데다, 해결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당분간은 내가 이 집에서 지내야 할 것 같거든.” “아…”
별 방법이 없었다. 한서월이 말한 대로 우리는 해결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고, 전처럼 만화 카페에서 밤을 보내는 것도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한서월이 있을 곳은 여기가 유일했다. “괜히 학교에서 소문 나는 건 싫으니까 같은 집에서 사는 건 비밀로 하자.” “응. 같이 등교나 하교를 하면 역시 의심받을 테니까…” “학교에 갈 때랑 돌아올 때 시간차를 두면 될 것 같아.”
한서월은 청소년들의 하찮으면서도 치명적인 무기를 차단하기 위해 수를 썼다. 한 명이 집을 나가면 8분 후에 남은 사람이 따라서 나가는 것으로. 중간에 만나지는 않고 학교에서만 만난다. 하교할 때도 마찬가지로, 종례 후에 먼저 가는 사람이 말해 주고 똑같이 8분이 지난 후에 남은 사람이 따라서 나간다. 역시 중간에서 만나지는 않으며, 누가 먼저 나갈지는 주마다 돌아가며 바뀐다.
“이러면 누군가가 같은 건물로 들어가는 걸 봐도, 한 명밖에 보지 못할 확률이 높으니까 같이 산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야.” “그럼 다음은, 집안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한서월의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누구 하나만 집안일 다 하는 건 좀 그렇지?” “응. 그래서 요리랑 일반 쓰레기 버리는 거하고 욕실이랑 화장실 청소는 내가, 설거지랑 분리수거하고 거실 청소는 네가 했으면 하는데… 괜찮아?” “좋아. 살아 있을 때 별명이 인간 식기세척기였거든.” 잠깐, 한서월은 뭔가가 빠졌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물어본다.
“빨래랑 방 청소는?” “그건 각자 하는 걸로. 빨래 바구니는 각자 방에 하나씩 놓을 거야. 같이 산다는 거 들키면 안 되니까 네 옷은 실내 건조대에만 너는 게 좋겠어. 각자 쓰는 방은 알아서 스스로 청소하고. 사생활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 는…” “이것도 주마다 돌아가는 걸로 하자. 뒤에 나가는 사람이 버리는 걸로.” “응. 그게 좋겠어.”
나는 한서월에게 같이 살기 위해 알아 둘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집의 구조나 건물 구조, 음식물 처리기의 사용법, 쓰레기 버리는 곳과 요일, 집 비밀번호, 공동 현관 비밀번호 같은 것이었다. “쓰레기는 어제 다 버렸으니까 오늘은 나갈 필요 없어. 여기, 현관 키야.” 쓰레기 버릴 때도 쓰는 거야. 내 설명을 듣고 한서월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키를 소중히 보관했다.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스마트폰에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전부 글로 적었다.
“지금까지 이 많은 걸 혼자 다 했어?” “아마, 그랬을 거야.” 엄청 힘들었겠네. 한서월의 말에 나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그래도— 이제 내가 있으니까 훨씬 편해질 거야.” “너도 혼자 살았었어?”
나는 능숙한 설거지 솜씨를 떠올리며 한서월에게 물었다. 한서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거의 그랬지. 같이 사는 사람이 있긴 했어도… 딱히 도움을 받은 적은 없었거든.” 어딘지 살짝 어두워진 목소리와 표정이 느껴졌다. 내가 살짝 긴장하자,
“하지만 괜찮아. 너는 확실히 스스로도, 남도 제대로 챙길 수 있는 사람 같으니까.” 한서월이 당당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해 준다. 나는 묘하게 칭찬받은 기분에 마음이 약간 들떴다.
“앞으로 잠시 동안 같이 살게 됐으니까… 잘 부탁해, 서유현.” “응, 나도… 잘 부탁해. 한서월.” 여전히 집 안에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하지만 공허하고 외로웠던 예전의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3화 끝. 중간에 적어도 괜찮으니까 감상 꼭 들려줘.
>>73 이런 오타를 내다니ㄷㄷ 알려줘서 고마워. 수정했어!
참고로, 아이들 이름 한자는 서유현 : 徐幽玄 한서월 : 韓曙月 이야. 이상하지는 않겠지…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나는 불길하게 밝은 창밖의 햇살을 느끼자마자 재빠르게 일어났다. “미친. 지각이야? 몇 신데—!” 스탠드 탁자에 올려진 아이폰을 켰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잠금 화면이 나타났고,
[토요일] 시간보다 요일을 먼저 인식하고 나서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일 감각도 잊어버리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발매를 기다리던 소설 마지막 권, 한정 초판본을 얻어 들뜬 채로 집에 돌아가고 있던 게 떠올랐다. 최고의 금요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기억났다. 어서 돌아가 밥을 먹고 실컷 게임을 하다 푹 자고 주말을 맞이할 생각에 행복해 있었던 것까지 전부 기억났다.
한서월을 만나기 전까지는. 난생 처음으로 유령을 보고, 목숨을 걸어 유령을 불투명화시키고, 갈 곳이 없어져 버린 유령 한서월을 데려와 같이 살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단 하룻밤 사이에 일어났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꿈을 꾼 건 아니겠지?” 서유현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었고, 꿈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꾸는 인간도 아니었다. 뭐라고 생각해도 상황을 해결할 수 없었기에 나는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일어났네?” 일어나자마자 거실에서 폰을 하고 있는 한서월을 본 내 심정을 구하라고 한다면, 몆 점이 배점될까? “나 얼마나 잤어?” “지금 시간이… 10시 30분이네.” 잠에 든 건 새벽 1시쯤이니 9시간 30분을 잔 것이다.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배가 고팠다. 식탁의 토스트기에 식빵 두 개를 넣어 구웠다.
내 일상은 하룻밤 만에 변해 버렸다. 평소처럼 주말의 집엔 사람 한 명밖에 없었지만, 나 혼자는 아니었다. 어제부터 전혀 유령 같지 않은 유령 소녀가 이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으니까.
“잠깐만. 너, 얼굴 하나도 안 부었네?” “……? 부을 이유가 있어?” “보, 보통 산 사람들은 저녁이나 야식으로 라면이나 떡볶이처럼 매운 거 먹으면 다음날 아침에 얼굴 붓지 않아?”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자 한서월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외친다.
“—너 혹시 지금까지 라면 먹고 얼굴 부은 적 없어?!” 유령을 보기라도 한 듯이 놀라는 한서월의 목소리를 들으며 구석에 세워진 전신 거울을 보았다. 신장 179센티미터 남자 고등학생의, 붓기 따위 1도 없는 슬림한 얼굴이 비쳤다.
“…붓는 거였어?” “진짜로 없는 거야? 가족들 라면 먹고 부은 것도 본 적 없어?” 가족. 그 말을 듣자 순간 불쾌감이 느껴졌지만, 이내 사라졌다. 나는 야식으로 매운 것이나 라면을 같이 먹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떠올렸다. 딱 한 명.
“형도 아마… 라면 먹고 부은 적 없을걸.” “진짜? 다른 가족들은?” “잘 모르겠어. 같이 야식으로 매운 거 먹어 본 가족이 형밖에 없거든.” 그렇구나. 엄청난 유전자네… 한서월은 그렇게 감탄하면서도 더 이상 가족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다.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그 일을 최대한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띠잉. 전부 구워진 식빵이 기분 좋은 벨소리와 함께 토스트기 위로 튀어올랐다. 접시를 꺼내 토스트 하나를 올리고, 사과 잼을 펴발랐다. “나도 하나만 먹어도 돼?” “응. 먹어.”
한서월은 유령이라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었지만, 자기가 먹지도 않은 음식의 그릇을 설거지한다는 건 뭔가 불합리한 것 같았다. 그래서 어제 원한다면 한서월에게 같이 밥을 먹어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한서월은 찬성했다. 사람인 척 하려고 죄다 맛이 비슷한 급식만 먹느라 지쳤는데 마침내 제대로 된 요리를 먹어볼 수 있게 됐다면서.
“근데 전부터 신경쓰였던 게 있는데… 네가 먹은 음식은 어디로 사라지는 거야? 유령이니까 산 사람처럼 소화 기관 같은 것도 없는 거잖아.” 어음… 달달한 사과 맛의 따끈따끈한 빵을 씹어먹는 한서월은 잠시 고민하더니,
“나도 잘 모르겠어. 대충…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소멸하는 게 아닐까?” “뭐, 확인할 방법도 없으니….” 굉장히 추상적인 추측이었지만 증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화는 싱겁게 끝을 맺었다. “아.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 “뭐가 궁금하실까?” 뭐든지 대답해 주겠다는 듯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한서월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제 자기 직전에 뒤늦게 깨달은 의문을 말했다.
“유령은, 죽었기 때문에 몸이 더러워질 일이 없다고 했잖아?” “응. 그렇지.” “그러면 어제 샤워는 왜 한 거야? …내가 하라고 하긴 했지만.” 아, 그거? 한서월은 내 의문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몸이 ‘스스로’ 더러워질 일이 없는 건 맞아. 땀 같은 분비물이 날 일도 없고, 때가 쌓일 일도, 화장실에 가야 할 일도 없으니까. 전에도 말했듯이 반투명한 상태에서는 비도 몸을 통과해서 젖지 않고.” “하지만 내가 불투명한 상태에서는 산 사람들처럼 똑같이 물리 법칙을 적용받거든. 산 사람들처럼 비에 젖고, 먼지 같은 걸 맞기도 해. 사실, 먼지나 물기 같은 것도 반투명화로 바뀌면 전부 떨어져 나갔었지만… 이젠 불투명화를 풀 수도 없게 되어 버렸잖아.” “그렇구나.”
이 모든 원흉은 반투명화 상태로 전환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설계된 불투명화 때문이었다. 이런 불합리한 방식을 만들어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져 나는 입을 열었다. “근데… 어제 그 불투명화 포스트잇이랑 분신사바 메모장은 누가 준 거야?” “아니. 아직 반투명일 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방치돼 있던 걸 얻었어.” 개연성은 전혀 없는 편의주의적 전개였지만, 현실에 유령이 등장한 것부터가 개연성이 없으니 따지는 걸 포기했다.
“그래도… 이 포스트잇은 누군가가 쓴 게 확실해. 확실히 사람이 적은 필체거든.” 한서월은 포스트잇을 식탁 위에 올려 나에게 보여주었다. 유려하면서도 명확하게 글자가 구분되는 필체가 노란 정사각형 위에 정갈하게 쓰여 있다. “누구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나는 마침내 토스트를 전부 먹었고, 한서월도 접시를 비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서월이 접시 두 개를 가져가 싱크대 안에 넣었다. 공복감은 사라졌지만 배는 채워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어제 일이 실감이 잘 안 나.” “기억은 나지?” “응. 너한테 시리랑 대화한 거 털어놓은 것까지도 전부…” 어째서 한서월 앞에서 그런 말이 술술 튀어나왔는지,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지 죽을 위기를 넘긴 후의 고양감 때문이었다고 난해한 소설을 읽는 독자처럼 추측해야 할까.
“걱정 마, 적응하는 건 순식간이야.” “그 말 뭔가 무서운데….” 유령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자 뭔가 무서웠다. 한서월은 재미있다는 듯이 또 웃으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햇빛이 비치는 창 밖으로 실외 건조대에 걸어 놓은 내 옷들이 비쳤다. 어젯밤에 걸었기에 아직 마르지 않았다.
“오늘은 주말이니까, 적당히 뒹굴거리면서 게임이나 해야지.” “나도 넷플릭스나 보려고.” 이제 곧 복각할 0티어 딜러의 가챠를 위해 월정액 과금 보상을 수령하고 일일 퀘스트를 깨야 하며, 미리 육성 아이템들까지 파밍해 둬야 한다. 오늘치만 다 모으면 레벨부터 특성까지 전부 만렙을 찍을 수 있을 테니까. 컴퓨터가 있는 내 방으로 가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고,
—띠링. 스마트폰 알림음이 울렸다. “내 폰 아닌데.” 한서월의 말이 들리자마자 나는 시리의 몸을 집어 전원을 켰다. 잠금 화면 상단에 방금 전의 알람이 표시되어 있었다.
[서민호 오늘 시간 됨?] “뭐야, 갑자기…?” 카톡을 보낸 것은 형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나랑 여동생 빼고, 부모와 연락도 안 하는 사람이었다. 군대 가고 전역한 후로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놀라며 답장을 보냈다.
[되긴 되는데] [나한테 연락도 잘 안 하더니 갑자기 무슨일] 노란 말풍선 밑 1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 하얀색 말풍선이 떴다.
[헉] [우리 유현이] [왜 이렇게 까칠해졌어? 형이 같이 안 놀아줘서 삐졌어?] [흙흙] 여전히 사람 속을 긁는 저 빡치는 말투는 1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라데이션처럼 번지는 분노를 참으며 답장을 보냈다.
[술 마셨음?] [왜 갑자기 개소리를 하시는지]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이 낼 수 없는 속도로 답장이 도착했다.
[술은 안 했고] [조별과제 팀원 하나가 잠수타서] [며칠동안 걔 대신해서 분량 채워 완성하느라 죽는줄알았다] 고생이네. 나는 묘한 동정심을 느끼며 답했다.
[그 인간 이름 확실히 뺐지?] [ㅇㅇ] [그럼 됐고] [언제 어디서 만나게?] [이제 과제도 끝이라 시간 충분해서] [난 언제라도 상관없음] [강남역에서 보자] [맛있는거 사줄게]
나는 고민 없이 바로 답장을 보냈다. 서민호가 사주는 밥이라면 무조건 정답이니까. [30분 후에 출발함] [11시 40분에 만나]
폰을 끄고 나는 즉시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몸을 씻었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방으로 들어가 머리를 말리고, 깔끔하게 빗질을 한 후에 가장 세련된 옷과 은색 손목시계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어, 어디 나가?” “응. 형 만나러.” “그래. 잘 다녀와—” 한서월은 형이 누구인지도 묻지 않고, 작별 인사를 했다. 여전히 넷플릭스 드라마를 고르고 있었다. 사적인 관계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한서월은 쿨하게 집을 지켜주도록 하지.” 참견하기 좋아하는 인간 같은 대사를 친 유령은, 아무것도 참견하지 않고 집을 나가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만화 카페에서 살았다고 했던가.
나는 일일 퀘스트와 레진을 쓰는 것까지 전부 끝내고 난 후에 스마트폰의 게임을 껐다. 갑자기 생각난 것이지만, 원래 씹덕이란 인간들은 ‘창문을 반만 닫아 주세요’는 일본어로 말하지 못하면서 ‘우리들의 꿈은 여기에 있으니까 모두 힘내자’는 순식간에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씹덕들이 일본어를 잘 한다는 자신감에는 근거 따위 없는 것이다.
「이번 역은, 강남, 강남 역입니다—」 「まもなく、江南、江南駅ですー」 차라리 지금 들리는 안내 방송이 방구석 오타쿠들보다 일본어를 훨씬 잘 할 거라 생각하며 내리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출입문이 열립니다.」
‘나는 또 왜 이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무래도 기분 나쁜 혈육을 오래간만에 만나려니 온갖 잡생각이 든 모양이다. 나를 밥으로 사려고 하는 거냐며, 날 모독할 셈이냐고 꾸짖기에는 너무 맛있는 외식이니 어쩔 수 없지만 약간 귀찮은 건 사실이다. 순백의 티셔츠 위에 약간 오버핏인 순백의 셔츠를 걸치고, 새까만 바지와 은색의 3만원짜리 손목시계를 착용한 남고딩이 개찰구를 통과했다.
—삑. 밖으로 나온 서유현의 눈앞에는, “왔는가, 동생이여.” 형이라고 불러주기엔 좀 많이 한심한 대학생 서민호가 손을 흔들었다.
“……에휴.” “뭐야, 왜 갑자기 한숨?” 유일하게 봐줄 거라고는 키가 185센티미터인 점과 평균보다 약간 나은 외모뿐인 인간이 나를 내려다본다. 저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끼자 익숙한 귀찮음이 느껴졌다. “아무튼, 오늘은 이 형이 마음껏 쏠 테니 감사하며 떠받들도록.” “빨리 데려가기나 해.” 오케이. 저 생각 없어 보이는 밝은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이 뒤집혔던 게 떠올랐다. 한동안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았던 탓에 잊어버린 익숙한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전역하고 나서 톡 하나 안 보내지 않았었나.” “복학하고 나서 여러가지로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었어. 유현이, 같이 안 놀아줘서 삐졌어?” “그 말투 한번만 더 쓰면 집에 간다.” 넵. 서민호는 곧바로 얌전해졌다. 하지만 나는 기대하지 않았다. 한 10분 정도만 지나면 원래대로 날 놀려댈 게 뻔하니까. 멀쩡하게 작동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나저나, 그 조별과제 잠수 탔다는 인간이 언제부터 빠진 건데?” “아마 기억상으로는… 초반까지는 성실히 참여했던 것 같은데 중간에 중요한 부분 맡기고 난 후부터 연락이 안 되더라.” “죄질이 아주 나쁘구만. 지금도 연락 안 되는 거고?” “1이 사라지지가 않네요~” 목소리는 웃고 있었지만 표정은 열불이 나는 듯 입가가 비틀려 있다. 서민호가 보여준 폰의 카톡 창에는 수많은 노란 메세지들이 1과 함께 쌓여 있었다.
“솔직히 마지막에, 마지막에라도 연락 받아서 미안하다고 하면 이름 정도는 넣어주려고 했거든? 근데 마지막 제출 시간까지도 연락이 없더라. 그래서 그냥 이름 빼버린 채로 제출 완료.” “잘했어.” 서민호는 거리를 걸으며 번화가 쪽으로 계속 향했다. 익숙한 길인지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수 일 동안 커피랑 몬스터 빨아제끼면서 불철주야로 작업하게 만든 대가는 치뤄야지, 안 그러냐?” “인정.” 자세히 올려다보니,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전히 용서를 할 수가 없는 듯이 뭔가 중얼거리고 있다. 오랜만에 서민호가 딱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밥은 어디서 먹을 건데?” “이 근처에 괜찮은 수제 돈까스집이 있거든.” “오…” “걱정하지 마. 형이 데려간 곳들 중에 맛없는 데 하나라도 있었어?” 아마도 없었다. 서민호가 유현을 데려간 곳은 전부 하나같이 맛집이었고, 유현의 취향마저도 완전히 저격했으니까. 어떻게 그런 곳들만 콕콕 집어서 찾아내는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 도착했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민호는 어느 건물 앞에서 멈춰섰다. 하얀 흑백의 간판 위에, 깔끔한 글씨로 [ 伊沢—いざわ ] 라고 쓰여 있다. 간판 오른쪽 구석의 [ 수제 돈까스 전문점 이자와 ] 가 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가자 깔끔한 인테리어의 테이블과 의자들이 보였다. 점심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이 좀 있었다. 서민호가 이끄는 대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자 직원이 메뉴판 두 개와 물병을 가지고 왔다.
“자, 마음껏 고르도록.” 멋진 척을 시작한 혈육을 무시한 채로 나는 메뉴판을 넘기기 시작했다. 가장 괜찮아 보이는 카레 돈까스와 우동 세트를 고른 뒤 서민호에게 말했다. “카레 돈까스 우동 세트 먹고 싶어. 사이다 시켜줄 수 있어?” “동생이라서 특별히 해 주는 거다?”
서민호는 바로 호출 벨을 눌렀다. 직원이 주문을 듣기 위해 다가오자, 서유현이 익숙하게 봐 온 사회성 있는 듯한 인싸의 태도로 말했다. “카레 돈까스 우동 세트 하나하고, 등심 돈까스 우동 세트 하나랑 사이다랑 콜라 각각 하나씩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서유현은 절대로 따라할 수 없는 저 여유로운 미소와 목소리 뒤에, 이토록 사람을 열받게 하는 본성이 숨어 있으리라고 직원이 예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생 놀려먹는 거 참 좋아하는구나…“ “그래도 형밖에 없지? 밥도 사주고 말이야.” 내가 한탄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자, 변함없이 서민호가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따지고 들지 않았다. 이제 가족이라고 할 만한 유대가 있는 사람은 형이랑 여동생 뿐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현서 만나러 통 못 갔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 “지난 주에 가 봤어.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더라.” “…다행이다.” 서현서의 이야기가 나오자 통통 튀던 태도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계속 이어질 듯한 침묵을 깬 것은 직원이었다.
“주문하신 카레 돈까스 우동 세트, 등심 돈까스 우동 세트, 사이다와 콜라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은 식탁 위에 음식과 음료를 올려놓고선, 나와 서민호의 자리에서 떠나갔다. 나는 젓가락을 집으며 말했다.
“잘 먹을게.” “많이 먹어. 적어도 180은 넘어야지?” “신발 포함하면 181이야!” 다시 사람 속을 긁어놓는 평소의 태도로 돌아온 혈육을 뒤로하고, 나는 밥을 먹는 데 집중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일본식 카레라이스 위에 올려진 돈까스 조각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확실히. 맛있긴 하네…” “그렇지?” 맛있었다. 한순간이나마 서민호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까지 드는 맛이었다. 밥도, 카레 소스도, 고기도, 우동 면과 국물도 전부 완벽했다. 확실히 맛집 고르는 능력은 인정해 줘야겠구나. —띠링.
기분 좋게 생명 유지 활동을 완료하려는 도중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폰에서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무슨 일이지. 이런 시간에 갑자기 날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폰을 켰다. 전원이 켜졌고, 알림이 표시되었다.
[한서월 유현아]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
———4화 끝. 감상이랑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