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어! 풀떼기 옴뇸뇸
초식 로봇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
발밑의 수풀이 사그작거린다. 날씨는 청천, 시야가 탁 트였다. 탐스러운 초원에서부터 산들바람이 불어, 센서가 간질간질하다. 특이사항은 없으니 안전하다고 해두자. 나는 무리의 통솔자로서, 선봉에 서 주위를 정찰하는 중. 아주 중요한 업무다. 내가 이끄는 무리는 나까지 >>3. 그 안전이 내 손에 달렸다. >>3 예시) 1명, 3명, 10명, 자유!
나는 64를 좋아한다. 2진법으로 1000000이라 너무 귀엽다! 0이 6개! 푸른 언덕 아래로 눈을 돌리면, 63명의 이족 보행 로봇이 있다. 그 중에 61명은 나를 바라보며 내 정찰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남은 두 명은? 한 명은 풀을 뜯고 한 명은 자신의 머리를 빗는 중. 이렇게나 바글바글한 무리다. 위험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나 혼자의 판단으로는 부족해 보여, 내 오른팔을 부르기로 했다. 내 믿음직한 2인자! 그 성격은 >>5 1. 귀엽고 소심해 2. 친절하고 다정해 3. 성숙한 어른이야 4. 순수한 아이야 5. 원리원칙주의자 6. 제멋대로 장난쟁이 7. 자유야!
내 오른팔 c8c를 불렀다. 16진법이다. 10진법으로는 3212이다. 그는 당당하고 건장한 발걸음으로 내 옆에 다가왔다. 각잡힌 풍채가 좋다. 울림 있는 저음이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왔다. "대장. 부르셨습니까?" "봐봐. 지평선 너머까지 풀밖에 안 보여. 방목지로는 좋겠지만 과연 안전할까?" "제 판단을 원하시는 걸까요?" c8c가 나를 따라 주위를 시각하였다. 일순간 바람이 멈추어 고요해졌다. 그는 손을 들었다. 손에는 검은 가죽 장갑. 검지와 중지를 뻗었다. 그 사이에는 언덕 아래에서 먹다 남은 풀떼기가 들려있었다.
그는 풀을 입에 넣었다. 쪼그려 앉아 언덕 위의 잡초도 뜯었다. 오물조물, 그가 풀을 먹는다. "미식 완료입니다." 그가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섬유질이 쫀득쫀득합니다. 기름진 토양이로군요." "위험을 암시하지 않아? 시체가 쌓였거나 화재가 났거나."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여전히 쪼그려앉아 풀을 먹으면서. "방금 전, 아래에서 뜯은 풀은 맛이 없었습니다. 남몰래 뱉어냈죠." "이 언덕만 맛있다. 즉, 이 언덕에 번개가 쳐 땅이 비옥해진 것입니다." "대장이 말한 위험 요인은 배제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안전하다는 판단을 거들겠습니다." 과연! 믿음직해! 우리의 c8c!
팔을 치켜들었다. 언덕 아래 로봇들에게 보이도록. "좋아! 다들 올라와! 여기 머물도록 하자!" 방침을 굳혀 선포했다. 아래에서 내 지시를 기다리던 61명의 로봇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나와 c8c는 만족스러워 하고, 한 명은 여전히 아래에서 머리를 빗고. "음. c8c, 이제 어쩔까." "풀을 뜯을까요." "주위를 더 살펴볼까?" "그것도 좋겠습니다. 원칙이니까요." c8c와 근처를 살피기로 했다. 마침 >>10이 있어 눈길을 끌고 있었다. >>10 1.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언가 2. 네모난 강철 건물 3. 구멍 뚫린 바위산 4. 자유!
파란 하늘, 푸른 언덕, 새하얀 옷을 입은 우리들. 그와 대비되는 회색 강철 건물이 시야를 침범하고 있었다. "저기, 아무래도 가봐야겠지?" "오는 길에 보니 단단히 잠겨있더군요. 그래서 무시했습니다만." "여기 계속 머무를 거라면 사정이 다르지."
그 건물이 지금 우리 둘의 눈앞에 있다. 강철로 된 네모 직각 반듯한 벽. 아마도 자연물일 것이다. 지금껏 살면서 수십 개를 보았다. 다만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라면, 바닥에 깔린 화강암 돌판. 네모나고 동그란 그림이 음각으로 박혀있다. 뭔지 모르겠다! 문고리를 잡고 흔들어본다. "안 열려!" "단단히 잠겨있었습니다." "c8c, 열어줘!" 부탁하니 c8c는 기합을 넣었다. >>13을 쓰려나 보았다. 1. 해킹 2. 주먹질 3. 땅파고 들어가기 4. 자유!
해킹이다! 해킹은 참을 수 없어! c8c는 손을 뻗어 건물의 단말기와 자신의 단자를 연결했다. "다행입니다. 64비트 하드웨어로군요." "그럼 해킹이 더 잘돼?" "상관없지만 제 기분이 좋습니다." 멘탈 관리는 중요하다. 이 무리의 대장인 만큼 나는 소속원의 정신건강을 북돋아주어야 한다. c8c의 시각 센서가 붉게 변했다. 해킹을 하는 동안 나는 옆에서 응원했고... 문이 열렸다!
다만 잊은 것이 있으니, 자연은 신기하다. 나무조차도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개미와 공생한다. 그렇다면 이 강철 건물 역시 자신을 보호할 무엇인가를 품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대장님, 피하십시오!" "우왓!" 야생의 >>16이 튀어나왔다! 1. 육식 토끼 2. 전투기계 3. 투명한 홀로그램 4. 자유!
나와 c8c를 가로막은 것은, 투명한 홀로그램! 홀로그램이란 빛의 투영으로, 공격력도 방어력도 0이다. 어라라라. 그럼 하나도 안 위험하네? c8c의 등뒤에서 쏙 빠져나왔다. 홀로그램은 하얀 곱슬머리를 한, 주름진 로봇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입 주변에는 하얀 털이 있다. 양눈에는 동그란 고리가 달렸다. 아, 이걸 어떻게 묘사해? 처음 보는데!
홀로그램의 움직임에 맞추어 음성이 재생되었다. "이 영상이 재생된다는 것은, 24시간 내에 인간의 흔적이 감지됐다는 뜻이겠지요." "인간이여, 살아남아주어 감사합니다." 뭐라는 거야. "c8c, 인간이 뭘까?" "민간과 발음이 유사하군요. 하층민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능성 있어!" 하지만 이걸론 증거가 부족해. 더 많은 증거를 수집해야 한다. 녹음장치의 성능을 키워 집중했다.
"이 안에는 어리석었던 저희가 후세대에 남기는 선물이 담겨있습니다." "후세대여, 미안합니다. 부디 살아남길 바라겠습니다." 홀로그램이 깜빡이더니 사라졌다. 여기서 사라진다고? 끝났다고? "안돼! 후세대는 또 뭔데?" "흐음. 일단 들어가봐야겠죠?" c8c가 물었다. 그래, 대장인 내가 평정을 잃어선 안 되지. 결정을 내리자. >>20 1. 앞장서 돌입한다! 2. 무서워! c8c가 앞장서! 3. 64명의 무리를 이끌고 돌격한다 4. 자유!
파란 하늘 드리운 푸른 언덕에 초식 로봇들 풀 뜯고 논다. 편히 놀고 있다. 이 모습을 가만 볼 수 없다. "전원! 징집이다! 자원자는 앞으로 나오도록!" 내 일갈에 로봇들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몇몇은 여전히 할 일 하지만. "자연의 신비를 정찰하고자, 지금부터 정찰대를 모집한다. 정찰대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있다!" 미끼를 던졌다. 곧 우리의 행동대장 ace가 미끼를 물었다. ace는 16진법으로, 2766호를 뜻한다. "보상이라 함은...." "명예와 훈장, 그리고 미지의 발견이다!"
명예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다. ace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고, 두어 로봇이 그를 뒤따랐다. 정찰조, 차출이다. 출격이야! 정찰조가 맨 앞에 서고, 나와 c8c가 뒤를 따르고, 나머지가 우르르 우리를 쫓는다.
참고로 우리 행동대장 ace의 성격은 >>24 1. 조용하고 소심해 2. 친절하고 다정해 3. 성숙한 어른이야 4. 순수한 아이야 5. 말그대로 천사 6. 제멋대로 소악마 7. 자유야!
ace와 두 명의 정찰조가 신속히 앞으로 향한다. ace는 우리 중 가장 어린 개체로, 열렬히 성장 중. 성장기에는 다양한 지식을 습득해야 하므로, 이런 온갖 현장에 먼저 투입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보람이 있게, 많은 것들을 배워나간다. "우와, 회색 벽이다! 돌인가?" "강철이란다." c8c가 설명해준다. "하얗고 네모난 풀이에요!" "종이란다." "로봇이 있어요!" "...뭐?" 건물의 안쪽으로 쭉쭉 들어가던 정찰조가, 드디어 새로운 발견을 해냈다. 안전이 확보된 즉시 나와 c8c도 급히 들어섰다.
불꺼진 방. 하늘색으로 빛나는 동면관이 보인다. 동면관에는 투명한 액체가 한가득. 그리고 그 속에 나체의 로봇이 있다. 눈은 감겨있으나 너무나도 생동해보인다. 전혀 티묻지 않고 훼손되지도 않아서, 당장에라도 눈을 뜨고 구동할 것만 같다. 이런 모델이라면 묘사해볼 만해! 내 취향껏 외형을 묘사해보자! >>27 예시) 긴 백발에 청초, 검은 단발에 날카로운 눈매, 금발에 고고한 인상, 자유!
산뜻한 가을 바람. 마치 그런 선선한 미풍에 풀어해쳐지듯이, 푸른 액체 속에서 찰랑이는 검은 머리. 그 짙은 흑발이, 순백의 부연 피부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하얀 피부는, 가슴팍의 정체 모를 열쇠 구멍을 더욱 눈에 뜨이게 만들었고. 시선이 사로잡혔다. 정신을 차리니, ace가 시야에서 사라져있었다. 우리의 귀염둥이 ace, 어디 간 거지?
옆을 보니 c8c가 있었다. c8c가 ace를 품에 안고, 장갑 낀 두 손으로 눈을 폭 가리고 있었다. "불편해애" ace는 발을 동동거렸다. "c8c, 왜 그래?" "나체는 아이의 교육에 좋지 않습니다." 그러며 자신 역시 눈을 꼭 감는 c8c다. 세상에는 이런 가치관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알고리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면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고도의 지식을 요하는 공간이 아니다. 조작할 수 있는 곳은 단 하나, 크고 빨간 버튼. 더욱이 이 동면관, 세월의 풍파를 맞아 연결부가 느슨해졌다. >>31 1. 온 힘을 다해 버튼을 누른다 2. 동면관을 억지로 해체해 로봇을 구출한다. 3. 동면관을 공격한다 4. 자유!
동면관을 공격했다. 투닥투닥 나의 무자비한 폭력과 주먹질 앞에서 동면관은 무력했다. 로봇을 덮은 유리가 스르륵 내려가더니, 결국엔 동면관의 전원이 꺼졌다. 이 편이 더 확실했다. 빨간 버튼을 눌렀다가 시설이 폭발이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동면관은 낯선 자. 무력화하여 무해하게 만들어야 했다. 동면관을 채운 하늘색 액체의 수위가 낮아졌다. 로봇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물기 젖은 육신이 드러났다.
로봇에 대고 인사를 했다. "HELLO WORLD" 그러나 답은 없었다. 상대가 예의가 없는 걸까? 아니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잠금을 푼 탓에 시스템에 결함이 생겼을까? 로봇이 손상되어 음성 기능이 망가졌을지도? 그렇다면 단자라도 연결해야 하려나. 소통이 필요했다. 나는 소통을 할 대상을 찾았다. >>34 1. 동면관의 로봇과 다시 한 번 2. c8c 3. ace 4. 핵미사일 5. 자유!
"c8c, 이 로봇 대답을 안 해!" 도와줘! 주먹진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간절히 부탁을 했다. 그는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대며 고민하였다. "이 시설에 들어오며 홀로그램을 보았지요. 인간을 위한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 인간? 무엇인지는 몰라." "그러나 하나 압니다. 저희가 인간이 아니란 것은." c8c가 제시하는 논점은 명확했다. 이 로봇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저희의 것이 아닌 물건을 확보하려 해봤자 도둑질일 뿐이지요." "도둑질은 하면 안 되겠지?" "네. 도물의 12배 값어치로 배상해야 합니다." "1책 12법!" 그럼 안 되겠다! 이거 비싸보여!
원리원칙주의자와의 상담 결과 여기서 손을 떼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어! 누군가 이 동면관을 토닥토닥 두드려 파손해버렸다는 점! 동면관은 이제 전력유지장치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이 로봇을 가만히 방전되게 둘 수는 없다. 우리가 구출해준 후, 전력을 공급해 시스템은 유지시켜 주어야겠지. >>39 1. 정신을 차릴 때까지 풀을 먹인다 2. 누군가가 단자를 연결해 전력을 공급한다 3. 자유!
풀은 만병통치약이다. 풀로 낫지 않는 버그는, 더 많은 풀을 먹임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 나와 c8c가 어깨로 로봇을 부축해 걸어나왔다. ace는 옆에서 졸래졸래 따라나온다. 복도에는 61명의 초식 로봇이 우리를 기다리며 나란히 서있었다. 한 명은 벽에 낙서를 하고 있다. "모두 풀을 먹으러 가자!" "예에에!" 내 선언에 로봇들은 환호하며 초원으로 앞질러갔다. 우리 셋은 뒤쳐졌다. 어쩔 수 없다. 주위를 구경하며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대장, 백합꽃이 예쁘게 피었습니다." "맛있겠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군침을 질질 흘리면서.
초목 치료 어연 한 시간. 로봇의 입에 거듭 풀을 욱여넣고 있다. c8c가 엄선해 가져온 고급 잡초를, 내가 정성스레 찍찍 찢어 입에 넣어준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이백이십일...." "우웁...." "이백이십이...." ace는 풀밭에 누워 뒹굴거리며, 내가 집어넣는 풀의 개수를 헤아리고 있다. 바람에 풀이 서걱거리며, 햇볕이 따사로워 기분이 좋다.
그리고 역시, 우리의 합동작업이 효과가 있었나? 따스하고 평화로운 언덕 위에서, 정체 모를 이방인이 드디어 눈을 뜬다. 조금은 혼미해보이고 몽롱해보이는 눈동자가, 눈물 맺힌 채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첫 반응은! >>43 1. 구웨에엑 2. 물, 물을 줘...! 3. 에너지 충전 완료. 기동합니다. 4. 자유!
긴 속눈썹 사이로 물기가 맺혀 반짝거린다. 지금은 우리와 같은 양털 외투를 입고 있다. c8c의 강경한 주장 때문이었다. 보송보송 포근포근해 보이는 로봇이 입을 열었다. 물을 달라면서. 그렇구나. 신기하네. 풀을 넣으면 물을 달라고 하는 로봇도 있구나? 또 넣어도 같은 반응인가? 꾹꾹 욱여넣어 본다. "으, 으윽. 물, 물...!" 또다시 같은 반응이다. 같은 input에 똑같은 output이 나옴을 확인했다. 검증을 끝냈으니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 LOADING ∞∞∞ (충분한 수분 섭취 중입니다)
로봇은 적대적인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시각 센서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아주아주 경계한다는 의사 표시다. "부탁한대로 물을 주었는데!" "떠오르는 속담이 있습니다. 물에서 건져내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그렇네, 바로 그거야!" c8c와 둘이서 의기투합했다. 화기애애하고 있으니 로봇이 말을 건네왔다.
"인간이신가요?" "응?" "인간을 찾아야 합니다." 갑작스럽다. 이걸 어떻게 답할까? 나에겐 비장의 해법이 있다. c8c, 대신 답해줘! "대장님, 대신 답해주십시오!" 앗, c8c가 선수를 쳤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순서를 지키는 로봇이다. 내가 대답해야겠다. >>48 1. 실은 그러하다. 2. 아냐아냐 3. 인간이 뭔데? 사전적 정의로 설명해줘. 4. 자유!
"질문엔 질문으로 답하기! 인간이 뭐야?" "인간은... 저를 닮은 존재입니다." "뭐?" 우리를 닮은 로봇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저는 인간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어요. 절 만든 박사님도, 인간에 대해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으셨죠." "저와 똑같이 생겼으니, 보자마자 인간이란 걸 알 거라면서요." 아하. 인간이 그런 뜻이구나. 인간의 사전적 정의를 알았다. 엄청 허술하고 구멍 뚫린 정의 같지만.
"그러니 다시 묻겠는데, 여러분은 인...." "잠깐! 질문 콤보야! 하나 더 할래!" "아, 넵." "인간을 찾아서 뭐하게?" 로봇이 두 손을 모았다. 외투의 틈새 사이로, 가슴팍의 열쇠 구멍이 보인다.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검은 장발이 유하게 찰랑거린다. 그녀의 음성 장치가 그녀의 사명을 내뱉는다.
"박사님의 부탁이었어요." >>52 >>53 두 답을 종합! 1. 인간을 보필해야 한다. 2. 인간에게 속죄해야 한다. 3. 인간을 제거해야 한다. 4. 인간을 복원해야 한다. 5. 자유!
"박사님께서는 인간과 함께하라고 하셨습니다." "함께하라고?" "네, 제게는 인간의 온기가 필요하거든요." 로봇의 목소리가 애처로워졌다. 차가운 시설, 냉랭한 동면관에 한없이 갇혀있었던, 한 여린 로봇의 토로였다. "열렬한 감정을 품을 때, 소중한 것을 지키려 할 때, 인간은 온기를 발산한다고 해요. 혹자는 그걸 인간성이라고 부른다네요." "그 인간성을 화르륵 불태워서 연료로 삼는 거야?" "전력과는 별개의 이야기에요. 그것이 저의 알고리즘입니다." 그렇구나! 그럼 무해한 존재 같아! 이제부터 우린 친구친구
"손을 잡자!" "그, 그럴까요? 부끄러운데...." 로봇이 볼을 붉힌다. 붙잡은 검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c8c, ace, 너희도!" "알겠습니다, 대장." "응응!!" 넷이서 동그랗게 손을 잡았다. 사이가 좋다! "새로운 친구, 새로운 일행이야! 축하하자!" 내 선언에 로봇은 빙그레, 아주 즐거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니 나까지 기분이 좋다. 이 즐거움을 표현하자. 우리는 한 시간 동안 강강수월래를 했다.
∞∞∞ LOADING ∞∞∞
"물, 물을 주세요...." "또야?" 갑자기,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로봇이 떨어져나갔다. 친구의 곤란은 도와야 한다. 급히 물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물을 건네주는 >>60을, 로봇이 음흉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모습을. 로봇의 타겟! >>60 1. 나 2. c8c 3. ace 4. 여기서 신캐?!
컵을 건네주는 ace의 두 손을, 로봇은 다정하게 맞잡았다. "고마워요, 어려 보이는데도 엄청 의젓하네요." "응, 맞아요! 전 의젓하죠!" 우리의 정찰대원 ace가 일순간 당당해진다. 항상 어린이 취급이었는데, 어른처럼 대우되니 기분 좋나 보다. 이렇게 칭찬에 약한 모습은, 사실 의젓과 거리 있지 않으려나.
"뭘 좋아하시나요?" "풀 뜯기!" "제, 제발 그건 말고요...." 로봇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눈동자가 뱅글뱅글 돌고 있다. "모험!" "그건 좋네요! 저도 모험 좋아해요." "와아, 친구다!" 두 명이 화기애애하다. 보는 우리마저 기분이 좋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로봇의 음흉한 미소를. 그리고 잠시 보라색으로 물들었던 안광을. 0.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내 센서는 속일 수 없었어! "우리 꼬마 모험가님, 이름이 ace인 거야?" "응, 통성명하자!" "어려운 단어도 알고 장하네." 로봇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64 예시) KEY, 아나타(터키어로 열쇠), 도로시(신의 선물), 자유!
KEY. 16진법인가? 10진법으로.... 아니다! 이건 16진법이 아냐. 1부터 f까지를 쓰는 우리와는 다른 명명법을 채용하고 있어! 나의 경계심이 한층 더 심해졌다. 바로 그때 c8c가 귓속말을 해왔다. "대장님, 잠시 얘기 좀 해도 되겠습니까?" 역시, c8c도 무언가 알아차린 모양이다. 나와 c8c는 민들레를 뜯어먹으며 자연스레 자리를 떴다.
"대장님, KEY의 안광이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너도구나! 확실히 수상해!" "저희를 공격할 의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까진 알겠다. 하지만 어째서 우리를 공격하려 할까? "KEY는 인간을 정의했습니다. 자신과 닮은 존재라고요." "어쩌면?" "네, 저희를 인간으로 여기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KEY가 찾는다는 인간이 바로 우리일지도 몰라. 휴. 우리 둘의 마음이 통해 위험을 감지했으니 천만다행이다.
"KEY는 위험해. 지금은 경계를 풀려는 것인지, 우리에게 아주 호의적이지." "정보수집의 적기란 말씀이시군요. 분부를 철저히 따르겠습니다." c8c는 주먹을 꼭 쥐고 냉정한 태도를 일관했다. 믿음직스럽다. 이 믿음직스러운 부하를 데리고, 당장 할 일이 있다! KEY가 무력으로 우리 64명을 압도하는 존재라면, 선수를 쳐 공격해야만 한다. "KEY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해. 그걸 위해 >>68을 개최한다!" 1. 딱밤내기 2. 팔씨름 대회 3. 바위 멀리 던지기 4. 자유!
두둥 두두둥 두둥 두두둥 언덕 바로 아래의 초원, 65명의 로봇들이 엄숙한 분위기로 원을 그리며 서있다. 그 중 두 명은 덜 엄숙하긴 하다. KEY는 이게 뭔가 싶은 표정으로 엥 거리고 있다. 원의 가운데에는 바위가 65개. 가로 세로 높이 50cm다. 나와 c8c가 방금 바위산을 채굴해 직접 깎아왔다.
KEY가 ace에게 질문했다. "바위 멀리 던지기 대회가 뭔가요?" "말 그대로야. 세 바퀴 빙빙 돌고 이 바위를 던지면 돼. 가장 멀리 던지면 상이 있어!" "상?!" "풀 마음껏 먹기!" "우, 우욱...."
KEY가 경련했다. KEY는 이 보상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의욕이 없으면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할 텐데. 전투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선, KEY에게 당근을 주어야 했다. 어떤 미끼를 뿌려야 할까? >>72 1. 상품을 내건다. 시설에서 훔쳐온 핵미사일. 2. 승자는 엄청엄청엄청 칭찬해줄게! 3. 발상의 역전! 하위 5명에겐 벌칙이 있어! 4. 자유!
"칭찬요? 그게 뭔 소용이라고...." "KEY 엄청 잘생겼어! 아름다워!" "와앗" 기습 칭찬을 해보았다. 잘 통했다. "엄청 착하고 친절해. 다정다감해." "오오오...." "항상 노력하고 있는 것 알아. 정말 고생 많았어." "우와앙" 좋군. 효과가 있다.
"그, 그리고요?" "이건 체험판. 추가 결제가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아니면 1등을 해봐." 도발에 걸려들었다! KEY는 양털 외투를 팔목까지 걷어올렸다. 지금부터 승부야! KEY의 상대는 내가 깎아온 가로 세로 높이 50cm의 바위 덩어리. 참고로 지난 대회의 1등은 이걸 30m 날렸어! c8c 대단해! 첫 순서이기에 우리의 무력을 모르는 KEY. 칭찬에 정신이 혼미해진 와중, 자신의 실력을 온전히 공개해버리고 말 것이다. 기합을 넣고, 세 바퀴 돌고, 던져라! >>75 1. 20cm 2. 20m 3. 200m 4. 자유!
KEY는 바위를 20cm 옮기고 자리로 돌아왔다.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뭘 잘못 알고 있나? 다시 설명해주었다. "KEY, 바위를 던지는 거야. 옮기는 대회가 아니라." "던졌잖아요...?" "던지라니까." 왜 이해를 못 하는 거지? 얘들아, 모여라. 62명의 로봇을 불러모아 KEY를 빤히 보게 만들었다. KEY는 움츠러들고 울상이 되다 결국엔 기권했다.
대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기권을 한 e7e와 더불어, KEY는 꼴지가 되었다. e7e는 항상 이런 행사에서 순서를 넘기곤 했다. e7e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므로 이를 항시 따르고 있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c8c와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번 대회 수상했지? KEY가 실력을 숨기는 걸까?" "대장님, 칭찬 시간입니다." "KEY는 두려워하고 있었어. 아무래도 본실력이려나." "대장님, 약속하신 상품이 있습니다." "이게 더 급해! 이것만 끝내고!"
c8c는 꽁해졌다.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짓기로 했다. "KEY는 동향은?" "보고하려는 참이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KEY는 >>79 1. 무릎을 끌어안고 중얼거리는 중이다 2. ace와 둘이서 돌아다니고 있다 3. 열렬히 체력 트레이닝 중이다 4. 자유!
KEY는 ace와 체력 트레이닝 중이다. 아, 이건 조금 사실과 다른가? KEY는 ace에게 체력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이걸 왜 못하는 거야?" "으아앙, 여기 이상해!" ace와의 줄다리기에서 속절없이 끌려다니는 KEY다. ace는 어린 개체라, KEY와 e7e 다음의 하위권이었으나, 그래도 바위를 12.8m는 던졌다. KEY의 성적, 0.2m와 비교하면 무려 64배 차이. 64라, 실로 멋진 숫자다.
"괜찮아? 많이 힘들어?" "연료가 고갈되어가네. 상식도 부정당하고 있어." "앞으로도 계속 훈련하자!" ace는 해맑게 제안했다. KEY는 기진맥진해 보였다. 그러나 그 직후, KEY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특유의. "아아, 이렇게 약해서야 ace와 모험을 다니긴 어려울지도 모르겠네." "그건 싫어! 기껏 모험 친구가 생겼는데!" "그렇지? 그럼 약속 하나 해줄래요?" "뭔데?" "내가 모험 중 위기에 처하면, 지켜주면 좋겠어. ace가 나보다 훨씬 강하니까."
어쭈. 이렇게 나오신다? KEY가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 >>83 1. 이거 반댈세! 난입해 방해한다. 2. 일단 지켜볼까? 함정을 까는 거지. 3. 나도 모험 좋아해! 우리도 모험에 끼워줘! 4. 자유!
ace는 KEY를 호의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친구가 위험에 처하면 구해달라고? ace는 당연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신난다!" "응, 나도 신나!" "그럼 꼬마 모험가님, 어디로 갈까요? 당장 내일에라도 떠나죠!" 이에 ace 말하기를 >>85 1. KEY가 있던 그 시설로 가보자! 2. 모험에 앞서 63명의 로봇의 허락을 받아야 해 3. 자유!
두 로봇이 구동했다. 모터가 징징 돌아가며 강철 건물로의 진군이 시작됐다. 나와 c8c는 포복하여 둘을 조용히 추적했다. ace는 새로운 모험에 신나 들떠있다. 시끄럽게 떠드는 통에 우리의 소음은 덮여버렸다. 아주 좋았어! KEY는 무슨 속셈일까? ace를 몰래 데려가 대체 무슨 짓을? ace와 KEY가 시설의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달려 외벽에 착 달라붙었다. 소곤소곤거리는 대화가 벽을 따라 진동하였다. "신기해! 이런 곳은 처음 봐!" "맘껏 둘러보세요. 저도 신기하네요." ace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KEY는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모양새다. 일단은, 지금 당장은!
그리고 10분쯤 지났을까. ace의 주의가 산만해질 시점, KEY가 유도를 시작했다. "어머나, 여기 이상한 틈새가 있네요? 보이시나요?" "뜯어볼게. 얍!" "자, 잠깐만...!" 그리고 충격파. 먼지가 자욱해졌다. 충격을 버티고 있으니 그 다음 대화가 들렸다.
"이건 뭐야? 처음 봐!" "아하, 이건 엘리베이터에요. 방공호로 이어지는 통로죠." "방공호?" "핵을 피하기 위한.... 아차. 천천히 알아가죠. 어서 가봐요!" 방공호? 우리도 모르는 단어다. 여하튼 KEY는 저곳에 들어가려는 속셈이다? >>89 1. 가만히 있는다. 2. 이상해. 엘리베이터 앞까지 이동하자. 3. 현장 체포야! 4. 자유!
KEY, 용서할 수 없어! 저렇게 재밌어 보이는 새로운 장소에, 우리를 놔두고 먼저 간다고? 우리가 먼저 그 땅을 밟을 거야! 깨끗한 도화지를 더럽힐 거야! 나는 후다닥 달려갔다. c8c가 조르르 뒤따라온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찰나, 강철 손날을 넣어 끼어드는 데에 성공했다.
"끼야아악" KEY는 버그를 본 것처럼 경악했다. 뭐에 놀라는 걸까? 나와 c8c는 얌전하고 질서 있게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탑승하자마자 닫힘 버튼을 연타하는 것은 로봇의 기본 소양! KEY가 어버버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방공호에 도착했다. 점프해 착륙했다. 이걸로 1착을 했어. 목표 달성!
목표를 달성하니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파란색 모니터가 한가득. 동그라미를 둘러싼 삼각형 세 개가 잔뜩. 뭔가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이네! 자아. KEY는 여기에 ace만을 몰래 데려오려고 했는데 말이지? >>93 1. KEY, 이 장소 뭔지 알아? 2. ace, 함부로 이런 데에 오면 안 돼! 3. 이 설비 궁금하네. 어떻게 작동할 수 없나? 4. 자유!
"어떻게 작동할 수 없나?" "어라. 여기 신기한 게 있네요?" KEY가 내 질문에 답했다. KEY는 계기판 중앙의 열쇠 구멍을 가리키고 있었다. "열쇠 구멍? 우리는 열쇠가 없는걸." "하지만 제겐 열쇠가 있긴 해요." KEY는 외투의 단추를 풀더니, 가슴팍의 열쇠구멍에 손을 대었다. 구멍이 나사처럼 회전하더니... 그 안에서 열쇠가 튀어나왔다!
그렇구나! 볼 때마다 신경 쓰여서 가슴팍을 지긋이 바라보곤 했다. 그때마다 c8c는 내 눈을 가리려 했고. 그 열쇠구멍의 비밀이 드디어 밝혀졌다! "시험 삼아 열쇠를 꽂아볼까요?" KEY는 순종적인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열쇠가 들렸다. >>96 1. 호기심은 못 참아! 해봐! 2. 열쇠 내놔. 압수야. 3. 됐어. 여기서 철수. 4. 자유!
합! 기합을 모아 장풍을 쏘았다. 허약한 KEY의 손에 들렸던 열쇠가, 풍압에 떨어졌다. 이 기회를 놓칠쏘냐! c8c가 달려들어 열쇠를 확보했다! 이제 이 열쇠는 우리 거야! "드디어 속셈을 드러내셨군! 이 열쇠는 이제 우리가 접수한다!" 승리 선언을 했다. 승리에 흥이 올랐다. "이 시설도 우리가 접수한다! 바위 던지기 대회도 우리가 접수했지!" "칭찬권도 우리의 것입니다." "맞아! 잘했어! 나이스 어시스턴스!" "🦾" c8c를 칭찬하니 아주 좋아해주고 있다. KEY, 너의 무기는 사라졌다. 어떻게 할 테냐? 반응을 기다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얼떨떨해하던 KEY, 그 안광이 갑자기 보라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우아아아앙" KEY는 울었다. "왜! 나만 미워하는 거예요! 계속 친절하게 대했는데! 존댓말도 꼬박꼬박 하는데!" "식고문을 하고! 바위를 던지라며 협박하고! 첫날부터 꼴지로 만들고! 칭찬을 하다가 빼앗고! 피난소를 알려주는데 훼방을 놓고!" "사랑받고 싶었는데, 사랑받으려고 이렇게 노력하는데!" 어라? 이거 내가 잘못했나?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모두, 차라리, 차라리...." KEY가 무덤덤하게, 무기질적인 음성을 재생했다.
"대장님, 이상합니다." ...내 잘못이 아냐. 우리의 잘못도 아니다. 이건 도를 지나친, 예상 못할 일이었다. KEY는 지금 지나친 행동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처음 보는 알고리즘이다. 이렇게 파국으로 향하라는 듯이, 이런 이상한 알고리즘이 짜여있다...? KEY는 새하얀 두 손으로, 얼굴을 구기듯이 감싸 통곡하였다. 손이 갈라졌다. 얼굴이 갈라지지 않았다. KEY의 얼굴은 철저한 방식으로 재편되어 있다.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목표는, 동쪽 200m의 밀집지역." 그리고 방공호의 모든 화면이, 한 가지 그림으로 통일되었다. 원을 둘러싼 세 개의 삼각형으로. 어두운 검은색이다. 그 좌표는, 우리 무리가 정착한 푸른 언덕. >>100 1. KEY를 공격한다! 2. 무리를 피신시키러 간다! 3. KEY, 정신 차려! 설득한다! 4. 자유!
"KEY, 미안해, 신고식이었어!" 급히 소리질렀다. KEY는 듣고 있을까? 알 수가 없다. "맞아! 사라져야 할 악습이지만, 우리 집단은 폐습에 젖어있었어! 네 생각을 미처 못했어, 미안해!" 사태를 모면하기 위한 변명이다. 그러나 조금은 사실이다. 더 배려해야 했을까. "당신을 경계했습니다.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를 우선했으니, 불찰입니다." "KEY, 같이 모험 가자며! 이런 건 싫어!" c8c와 ace도 나름의 말로 KEY를 설득하려 한다. 될까? 되려나? 그리고 화면이 바뀌어

숫자 20이 나오고 이는 19로 바뀌며 18로 뒤바뀌고 17로 변모한다. 16이 너머에서 입맛을 다시고 0은 아직이다. KEY는 일그러져 굳은 채, 덜덜 떨고 있다.
KEY의 공황 정도: dice(1,100) value : 26 >>104 >>105 1~100 dice 둘 중 하나라도 공황 정도보다 높으면 설득 성공
"...맞아요. 아직 첫날일 뿐." 말이 가닿았나? 숫자는 16. "되돌릴 수 있어. 다시 하면 돼." 15가 온다. 15가 등 뒤에서 온다. "환영하려는 마음. 그것만은 알았어. 그것은 느꼈으니까." 14의 차례다. 13을 끌고. "그리고 확실히, 약속을 해주었지요. ace가 나를 구하기로." 13은 12를 끌고 오지 못한다.
KEY가 고개를 들고 13 14 15 숫자는 순서에 맞게 증가한다. "진로 재설정. 최대한 멀리, 저 동쪽으로." 된 것인가? 숫자는 일시에 83까지 치솟고, 그 뒤에야 내려가기 시작한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c8c가 나를 부축하였다. 그의 팔은 떨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검은 장발의 힘 빠진 로봇이, 우리에게 새로운 인사를 했다. 새로이 어색하고 굳은 표정으로.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끝난 거지?" "비가시권으로 옮겼습니다. 방사능 피해는 당장엔 없을 거예요." "당장?" "낙진은 어쩔 수 없겠지요." KEY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 핵을 피하기 위한 방공호 안. >>108 1. 우리 무리를 구하러 가자! 2. 일단 여기서 상황을 볼까? 3. KEY, 무슨 일이었던 거야? 4. 자유!
"KEY, 무슨 일이었던 거야?" "저는... 가끔 제가 이상한 걸 느껴요. 제 알고리즘이 분열되어 있다고 할까요." KEY의 검지와 중지가 모여 그녀의 목선을 타고 흐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두 손가락이 나뉘며 KEY의 목을 감싼다. "인간의 애정을 갈구하고 싶어요. 그 온기를 원해요. 그게 제가 원하는 저에요." "하지만 가끔씩, 저는 다른 논리와 명령을 이용하죠. 나만을 원망하며 절규하거든, 그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이 시설의 핵미사일은 저와 연동되어 있어요.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날까 저 역시 두려웠지요. 그래서 대비하고자, 방공호를 알려주고 조작법을 전수하려 했습니다. 더군다나" "아, 뭐야. 못된 의도가 있는 줄 알았어!" "만에 하나 분위기를 타면 좀 꼬셔볼려고...." "의도가 불순해!" 내가 훈계하는 사이, c8c가 ace를 데려가 보호한다. 눈도 가린다. 우리의 최연소자를 지켜야겠다. KEY는 미련이 남은 듯이 머뭇거린다. "하지만 ace가 먼저 물을 줬죠? 이건 꼬신 게 아닌가 하는 학설이." "유사과학이야!" 화면의 숫자는 48까지 떨어져, 매초 하나씩 줄어들고 있다. >>111 1. 무리를 피난시키러 간다. 2. 안전한 이곳에서 상황을 지켜본다. 3. 자유! >>108 감사합니다!
무리를 지켜야 한다. 무리에는 e7e가 있다. e7e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며, 부작위로서 e7e가 해를 입게 두어서도 안 된다. 나는 c8c와 함께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ace는 여기 남아." "KEY랑 여길 지킬게!" ace가 믿음직하게 화답한다. KEY는 의기소침해져, 자그마한 응원만을 우리에게 보탠다. 둘의 뜻은 받았다. 서둘러 무리를 피난시키러 가자!
푸른 언덕에 도착한다. 양털 외투를 입은 초식 로봇들이 잠에 빠져있다. 하나씩 깨워나간다. 하나씩 방향을 제시해 방공호로 유도한다. e7e는 약한 몸이기에, c8c가 전담하여 그 피난을 책임진다. 로봇들이 움직인다. 폭음이 들리고 구름이 다가온다. 검은 빗방울이다. 짙고 묵직한 빗방울이 후두두둑 떨어진다. 검은 물웅덩이다. 흙과 무질서한 풀이, 우리의 발을 잡아끈다. 이상한 감촉에 잔뜩 찌푸려지는 얼굴. 그러나 연연할 새 없이, 해야 할 일이 더욱 급박하다. 얼굴이 덮이고 오염되어 간다. 손으로 흝어보지만 점도가 예상 외로 강하다.
그 혼란 속에서도 무리를 실내로, 지붕 아래로 피신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콜록, 콜록!" e7e의 기침이 심하다. 붉은색 기름이 새어나오고 있다. 기침은 음성 장치의 먼지로 인해, 또는 열팽창에 따른 목 부위의 헐거움으로 인해 발생하는 오동작을 뜻한다. 그러나 다르다. 어째서인지 e7e만이 거듭 기침을 한다. 속을 게워내려는 것처럼. e7e의 성격은 >>115 1. 조용하고 소심해 2. 친절하고 다정해 3. 고고하고 독립적 4. 응석쟁이에 의존적 5. 말그대로 천사 6. 제멋대로 소악마 7. 자유야!
e7e는 언제나 조용조용한 존재였다. 풀을 먹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그보단 머리를 빗거나 낙서하며 놀기를 즐겼다. 힘을 겨루는 행사에도 빠지곤 했고, 집단 명령이 내려와도 다소 설렁설렁하는 스타일. 게다가 얼마나 소심한지, 말을 섞은 지 얼마나 되었나 가물가물할 지경이야! 풀을 먹기는 하지만 편식쟁이. 그보단 몇몇 열매를 가려먹고, 가끔은 짐승의 시체를 불태우는 취미가 있었다. 그래도 우리 무리에 받아주는 이유가 있었다. 이 양털 외투! 모두 e7e의 작품이다. 더군다나 중요한 일이 있거든, 앞장서 열심히 일하곤 했다. 그런 e7e를 우리는 >>117로 여겼다. 1. 귀빈 2. 노예 3. 포로 4. 불량품 5. 자유!
불량품이었다. 그래도 존재해야 했다. 생물은 돌연변이 덕택에 자연에의 적응력을 얻는다. 우리도 불량품의 덕으로 더 괜찮은 삶을 누릴 수가 있었다. 이 양털 외투, 따뜻해! e7e가 열심히 만들어줬어! e7e는 이제 붉은 기름을 뱉지 않았다. 균형 센서에 오류가 생겼나 싶었지만, 그래도 걸을 수는 있었다. "괜찮은 거야?" "으, 응. 멀쩡해." 그리고 헤헤거리며 실실 웃는다. 멀쩡한가 보다.
65명의 로봇이 방공호에 몰렸다. 모두 피난 완료! KEY가 상황을 설명한다. "이 핵미사일은 코발트 폭탄. 폭발력이 아니라, 환경 오염에 중점을 둔 원폭입니다." "환경 오염?" "풀과 짐승을 죽입니다." 그리고 대화는 30분 정도 멈추었다. 풀이 죽는다는 말에 나를 비롯한 63명이 통곡하고 울부짖었기 때문이다. 겨우 진정한 후에야 대화를 재개했다.
"재와 낙진이 15일간 일시적인 겨울을 초래할 겁니다. ...사과드려야겠네요." "살아남은 뒤에 받도록 하지. 결국엔 생존이 문제야." 나는 논점을 정리했다. "우리는 대부분 풀을 먹으니 말이야." 그러고보니 KEY는 무엇을 에너지원으로 삼지? 물어보았다. 보름의 생존에 앞서,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121 1. 풀을 태워 바이오디젤을 제작 2. 태양열 발전 3. 핵융합으로 자체 생산 4. 자유!
"핵융합으로 자체 생산합니다." "부러워!" 반면 우리 초식 로봇들은 체내에서 바이오디젤을 생산해 에너지원으로 삼는다. 그래도 덕분에 맛난 풀을 씹을 수 있다. 이건 KEY가 부러워해야 한다. KEY는 으쓱댔다. "여러분께서 에너지가 부족해 휴면하는 동안, 저는 유유자적하게 피난 생활을 할 거랍니다." "그렇네. 우리는 휴면을 해야겠네." 환경이 안정될 때까지 잠시 전원을 끄고 있어야 한다. 언젠가 상황이 호전되거든, KEY가 우리 입에 풀을 쑤셔넣어 되살려주기를 기다리자. ...친절하게 잘 쑤셔넣어주겠지? 과거의 업보가 돌아올 느낌이.
하지만 휴면에 앞서 결정할 게 있다. 나는 이 무리의 대장이야. 나까지 휴면하는 게 과연 좋을까? 낙진에 노출된 e7e의 상태가 좋지 않고, 나 역시 회로에서 경미한 이상을 느낀다. 방사능이 기계 회로에 악영향을 줌은 자명하다. 위험하니 노출을 최소화 해야 한다. 아직은 낙진이 충분히 내려앉지 않았다. 풀도 아직은 시들지 않고 살아있다. 휴면하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려면, 지금 당장 나가 풀을 비축해놓아야 한다.
나 역시 전원을 끄고 휴면할까? 그렇다면 여기서 안전히 있으면 된다. 보름을 버티기 위해, 넉넉잡아 30일분의 풀을 뜯어와야 할까? 대장으로선 더 바람직하겠지만 위험할지도. 핵융합로를 지닌 KEY는 깨어있고, 초식 로봇들은 당분간 휴면할 예정. 그렇다면 나의 방침을 택하자! >>126 1. 나도 잔다! 2. 나는 깨어있자! 3. 회의하자! 4. 자유!
회의를 한다. 모두 모여! 나와 c8c와 ace와 KEY가 손을 잡고 둥그렇게 모였다. 사이가 좋다! 먼저 KEY! 결정에 앞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해! "지금 터진 건 코발트 폭탄입니다." "전에는 크로뮴 폭탄이라며?" "방사능에 기억이 오염되셨나 보네요." 방사능, 무섭다!
"한때는 둠스데이 머신이라고 불리며 지구를 멸망시킬 폭탄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달랐지요." "우우우" "시제품의 위력은 약화되어, 보름 정도의 낙진 겨울과 방사능 오염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우우우" "이 야유는 뭔가요." "그런 위험한 폭탄을 우리에게 쏘다니, 너무합니다." "나도 동감이야." "ace마저!"
충격을 받은 KEY가 훌쩍댔다. KEY를 무찔렀다. 다음은 c8c와 ace의 방공호 정찰 보고다.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방 하나는 손바닥만한 원통 철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난 하얀색 쓰레기통을 봤어! 스위치를 누르면 물이 내려가!" KEY가 말하길 이 시설은 인간을 대피시키기 위한 곳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시설이겠지? 상황은 파악됐다. 보름의 낙진. 그리고 이 대피소. 풀은 없기 때문에 64명의 초식 로봇들이 모두 깨어있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휴면하지 않고 깨어있는 것은 KEY 홀로. ...라고 생각하던 무렵, e7e가 소심히 난입했다.
"저, 저기, 나도 휴면 못하는데...." "왜?" "휴면 기능 같은 것 없어...." 그리고 e7e도 휴면을 못한다고 한다. 불량품은 불편하구나. 그러므로 KEY와 e7e는 켜진 상태로 쭉 있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 나까지 깨어있어야 할까? 우리 초식 로봇들에게 해가 될 사태가 터진다면, 내가 앞장서 나설 수 있다. 다만 풀을 비축하려면 잠시나마 이 방사능 낙진에 나와 로봇들을 밀어넣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 >>131 1. 나도 휴면한다! 2. 나는 깨어있자! 3.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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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총출동하여 풀을 그러모았다. 나 홀로 30일간 전력을 보충하기엔 충분할 양이다. 방사능 낙진이 끝난 뒤에도, 생태계가 복원되려면 시간이 걸릴 터다. 보름 이상의 비축분이 필요했다. e7e는 산딸기를 먹어야 한다고 했으므로, 벌초하는 겸사겸사 풀열매도 채집했다. 그 탓에 로봇들을 낙진 아래 노출시켰으나... 지금 당장은 이상이 없어 보였다. "임무 완수했습니다!" "c8c, 훌륭하구나." "그리고 이건 제가 모아두었던 비자금 풀...." "다 압수야!" 비자금은 풀 1일치였다. 이렇게 31일치의 풀을 쟁취했다. 다 내 거야.
로봇들의 동력원이 슬슬 떨어질 때가 왔다. 나와 KEY, e7e를 제외한 모델들은 모두 휴면에 빠져야 한다. 아주 짧은 이별이다. 그 전에 마저 할 일이 있을까? >>135 1. 방공호를 더 탐색한다. 2. e7e의 건강을 확인한다. 3. 에너지를 절약해야지. 이만 자렴. 4. 자유!
e7e의 손목을 잡았다. 끼약 하고 소리 질렀다. 그대로 폭신한 침대에 던지고 건강 점검에 들어갔다. "음성 장치" "머, 멀쩡해." "전자회로." "좀 어지럽긴 해." "동력원." "속이 울렁거려."
"손" "엥" e7e가 손을 건넸다. 두 손으로 감싸 토닥여주었다. 힘내렴. 그리고 이어진, 시각과 청각만을 동원한 정밀 신체 검사 결과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지금 당장은 괜찮단 결론이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급격히 나빠질 가능성도 충분해.
시간이 지났다. c8c와 ace를 비롯해, 로봇들이 하나씩 휴면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e7e가 자꾸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길래, 힘을 주어 계속 붙들고 있다.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 해. "나, 내보내 줘." "부작위로서 해를 입게 두어선 안 돼." "여기 계속 누워서, 난 뭘 하란 거야?" e7e가 질문해왔다. 나는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효율적인 답을 내놨다. "과거 이야기라도 해볼까?" "응?" "오, 재밌겠는데요?" KEY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KEY도 옛날 이야기는 좋아하나 보다.
보름은 여기 있어야 하니, 시간이 넉넉하니, 대화로 이 공백을 채워보자. 로봇이 셋이 모여 한 명이 말하고 두 명이 들을 터이다. 관객이 부족할 일은 없으렸다. 그러니 입을 열자. 과거를 말해보렴. >>140 1. 나 자신 2. e7e 3. KEY
나부터 해보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태어났을 때부터 해야 하지 않아? 엄마 아빠 이야기라거나." e7e가 제안했다. 좋았다. 하지만 따질 게 있다. "엄마 아빠?" "엥" e7e의 눈이 동그래졌다. KEY가 공손하게 물었다. "혹시 엄마 아빠가 없으신가요?" 공손한 건 좋은데, 그게 뭔지부터 말해줘야지. "엄마 아빠가 뭐야. 사전적 정의를 말해봐." "그냥 아는 건데." "보면 알잖아요." 인간은 무엇인가? 보면 안다. 바로 그때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저는 엄마만 셋이었답니다." KEY가 자랑한다. "제 부모님은 >>143이었어요." e7e도 말한다. 자랑인가? 두 로봇의 말을 종합하여 엄마 아빠의 정의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 >>143 e7e의 부모 1. 늑대 2. 로봇 3. 로봇인데 불량품 4. 자유!
"초 엘리트 명품 로봇이었답니다. 부럽죠?" "초 엘리트?" "언어를 세 개 썼어요!" "나도 2진법 10진법 16진법 쓰는데." "그것과는 달라요. 게다가 바위를 잘 던졌어요." "나도 잘 던져." "우리 엄마아빠가 더 잘 던졌어요!" "크흑 졌다." 안돼. 이 초식로봇 무리의 대장으로서 자긍심이 훼손된다. 초식로봇을 대표해 자존심을 세워야 해.
"그래서 엄마 아빠들은 무슨 존재였어?" 어휘의 뜻을 알고자 더 질문한 결과 KEY 왈 "절 프로그래밍하고 몸을 만들어주셨어요." "오호라." "그리고 세 명이었어요." "부럽다! 난 두 명이었는데!" e7e 왈 "밥을 주고 여러 가지 가르쳐주었어." "두 명이었지요." "초 엘리트였어!" "하지만 두 명이었지요." "크윽" "전 세 명이었답니다."
잡았다! 진실의 끈을 잡았다! 엄마 아빠는 두 가지로 쓰인다. 하나. 키우고 만들어준다. 둘. 질과 양을 겨누어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낸다. 이 정의를 기반으로 내 엄마아빠를 답하자. >>148 1. 질로 승부한다. 우리 엄마아빠가 훨씬 대단해! 2. 양으로 승부한다. 우리 엄마아빠는 열 명이야! 3. 풀과 바람과 해 4. ...기억은 흐릿하지만 로봇이 하나 있었지 5. 자유!
기억이 나. 뭔가뭔가 있었어! 여기서부터 나의 장엄한 일대기가 시작된다. "태초에 뭔가뭔가...." "뭔가뭔가?" "아니, 엄마아빠가." "발음 비슷하지~" e7e가 납득해주고 있다. 이 틈을 노려 넘긴다! "엄마아빠는 한 명이었던 것 같아." "저런" 큿, 양에서 밀려버렸다. "초 엘리트도 아니었어." "이런." 질에서도 밀렸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아. 수와 성능에서 밀리더라도. 그 무게만은 어쩐지 확실히 느꼈던 것 같으니까. 엄마아빠는 >>151 1. 내가 사고를 쳐도 나를 아껴주셨어. 2. 나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셨어. 3. 나를 위해 녹화 사업을 벌이셨어. 4. 자유!
내가 매우 어렸던 적에, 이 행성은 황무지였다. 엄마아빠는 이걸 '황폐화'라고 불렀다. "한때는 풍요로운 곳이었단다." 건전지를 빨며 엄마아빠는 말했다. 나는 옆에 앉아 옥수수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엄마아빠는 매우 큰 프로젝트를 시도 중이었다. 녹화 사업. 이 행성을 초목으로 채우겠다고 했다. 내 식량을 위해서임이 틀림없었다. 다른 의도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작은 사과나무가 크게 자라고 그 후손의 후손이 더욱 더 번창할 즈음 내 창백하던 피부가 조금씩 색을 입던 계절 엄마아빠는 나를 들어 외벽 밖으로 내보냈다. 기지 외부의 풍경에 멀뚱하던 내게, 엄마아빠 말씀하시길 "해를 끼치지 말고, 명령을 준수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렴." 그리고 한 가지 더 당부하기를 >>155 1. 동료를 모아 무리를 불리렴 2. 우리를 용서해주렴 3. 그저 행복하거라 4. 자유!
어째서 용서를 구한 것일까? 내게는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이는 일종의 고백이었다. 실은 자신이 잘못한 게 있다는. 감도 잡히지 않았으나, 바람 이는 수면 아래 허상처럼, 얕게 휘날리는 영상이 있었다. 유기체의 고통. 붉은 피. 의식의 종료. 데이터화. 이식과 배양. 이것을 사과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기억도 나지 않는걸. 정직한 나는 거짓에 용서를 덧바를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차안을 택했다. 엄마아빠의 또다른 청원을 따라, 행복하기로 나는 다짐하였더랬다.
"훌쩍훌쩍" "훌쩍훌쩍" "왜 두 번 말하시나요?" 첫 줄은 나의 말, 두 번째 줄도 나의 말이다. 이 감동 스토리를 들으면서도 울지 않는 두 냉혈한을 대신해 내가 온전히 울어주었다. e7e는 조용히 내 입가를 바라보고만 있다. 부담스러. "냉혈한들. 오늘은 이걸로 파합시다." "엥? 끝난 거예요?" KEY가 불러세웠지만 이걸로 됐다. 우리에겐 대화할 시간이 많으니까. 시간이 보름이나 있는데, 너무 빨리 털었다간 개털이 된다! 나는 푹신한 건초 위에서 계산 모드에 빠졌다. 메르센 소수를 암산하며 시간을 죽일 것이다. e7e가 나를 붙들어 흔들어 보지만, 내 감각장치가 더 빨리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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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일어나세요." "888, 일어나." 엥 뭐야 "녀보셍냐?" "이틀이 지났어요!" "또 이야기하자!" "시러허어" 난폭하여라. KEY와 e7e가 나를 공상에서 끄집어냈다. 자연수 몇 개를 털어내어 정신을 차렸다. 둘은 내가 정신을 잃은 틈을 타, 과거를 털어놓을 다음번 타자를 정해둔 뒤였다. >>160 1. 또 나야?? 2. e7e 3. KEY
"이번은 제 차례로 정해졌어요. 올바른 다수결이었답니다." "두 명이서?" "과반인걸요." KEY는 능청스레 굴었다. "하지만.... 전에도 말씀드렸죠? 제 기억은 아주 희미해요." "엄마아빠에 대해선 알고 있었잖아." "뭐랄까, 흰 옷을 입은 로봇 세 명. 고작해야 그 정도로만 언어화될 뿐이에요. 절 수리해주고 명령을 내리셨죠." KEY와 유사한 외모의 세 개체. KEY가 꺼낼 소재는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아시나요?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에요. 그러니 미래 이야기를 할래요." "제멋대로네. 싫어." "나도 같은 의견." 그렇게 다수결로 KEY의 말을 잘라버렸다. 안 들어줄 거야.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KEY가 나와 e7e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한 시간을 억지 부리고서야, 우리는 마음을 바꾸어주었다. "흠흠" KEY는 헛기침을 하며 평판을 챙겼다. 발성에 앞서 먼지와 기름을 털어내는 구동음이다. "그렇다면 지금부로 찬란하고 즐거울 제 미래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제게는 두 개의 알고리즘이 있어요. 하나는 엄마아빠가 주신, 인간의 멸절." "무서워라." "또다른 하나는 언젠가부터 제가 선물받았던, 인간의 애정을 받으라는 명령." 그러나 KEY에겐 큰 장애가 있었다. 인간이 뭐야??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미래를 설계하려는 KEY의 행보엔 큰 문제가 있었고.... "그러니 답해주세요. 인간이 뭘까요?" 자아 찾기에 있어 가장 중요할 질문을, 내게 퍼뜩 던져버리는 KEY의 행보에도 문제가 있었다. 인간은 KEY와 닮은 존재. 고작해야 그것이 내가 가진 정보의 모두다. 뭐라고 답하지. >>164 1. 모든 것은 공하고 허무하니, 의미없는 질문이로다. 2. 너를 제외한 모든 로봇을 이르는 것 아닐까 3. 그건 바로 나야. 4. 자유!
"사리자여, 모든 것은 공하여 허무하니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저는 KEY인데요." 그조차 망집이며 집착이다. 본질은 속박되지 않으며 허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시기, KEY의 미래 역시.... "그렇네. 888의 말에 나도 느끼는 바가 있어." 망설이는 사이, e7e의 지원사격이 들어왔다.
"말이 명령이지, 엄청 허술하잖아? 그 빈틈은 본인이 메워야만 해." "제가 그 빈 곳을 메운다고요?" "그렇지. 생각해보면 양가적이잖아? 사랑받으면서 죽이라니." "그래요. 그래서 너무 혼란스러운데...." KEY는 우유색 뺨에 손을 대었다. e7e는 나긋하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걸 의도한 알고리즘이 아닐까? 모순적인 두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KEY는 상황에 맞추어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있어. 훌륭한 이들로부터 애정을 받고 평범한 이들의 사랑을 받고 반면 극악무도한 작자라면 제대로 벌할 수 있잖아? '인간'이란 텅 빈 개념. 그러니 KEY가 그것을 마음대로 채워도 된다고 생각해."
"헤헤. 주제 넘었을까." e7e는 머쓱해하며 말을 끝냈다. ...그렇지. 내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들이다. 내가 여기서 '인간의 정의'를 말하는 순간, KEY는 그것에 붙잡히게 된다. 나는 KEY를 보았다. 무슨 감정으로? 그 감정의 이름을 안타까움이라고 하자. 나는 KEY가 모순적인 알고리즘에 억눌리는 대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갔으면 했다. 행복하기를. 그래, 이 감정의 이름은 동질감.
KEY는 곰곰 고민에 빠지고 있다. 그러나 그 입꼬리가 살짝 오르고 있다. 기뻐 보여! "고민 해결!" "아직 아니에요." 엥 아냐? 내 선언이 무색해졌다. "잘 모르겠는 단어가 하나 더 있어요. 인간에게 사랑받으라니. 사랑은 또 뭐죠?" KEY, 나를 빤히 바라다 본다. 또 이 패턴이야? 또 나한테 묻기?? >>169 1. 지키고 싶다는 마음 2. 자꾸만 보고 싶은 마음 3. 모르겠는데.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어. 4. 자유!
직접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 말을 하고보니, KEY의 검은자가 어느새 내게 쏠렸다. 말하는 사람을 보는 그런 종류가 아냐. 다른 의도가 있다. "왜. 왜 날 봐." "초식 로봇 무리의 대장이시죠." 흠흠. 고럼고럼. 뭘 좀 아는구만. 대단한 몸이라구! "대장이면 대표. 즉 대장님을 꼬시면 되는 거네요." "어째서?" KEY는 볼을 의식적으로 붉게 했다. 뭐야? 어째서? 두근두근.
"한 명만 꼬셔도 무리 전체를 꼬시는 게 되잖아요." "효율의 관점에서였냐!" 슬프구나. 낭만이 죽은 시대여. 세태를 한탄해보지만, KEY는 우선 내 마음부터 잡아보려고 결정해버린 모양이다.
그날의 담화는 그런 불순한 선언과 함께 끝났다. KEY는 내 관심을 끌려고 안달복달. 슬슬 다가와 내 시야에 들어오려 해, 훠이훠이 쫓아내며 도망가며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그런 KEY에게도 사랑의 장애물이 찾아왔으니!
나는 e7e에게 더 큰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888" "응? 왜 그래?" "나 엄청 아픈 것 같아...." 방공호에 들어오기 전부터 상태가 불안했다. 그것이 악화되려는 참이었다. e7e는 연신 녹슨 기름을 흘려댔고 어째선지 짐승의 피 냄새가 진동했다 >>174 0~100 주사위 100이면 잔병치레 낮을수록 상태가 나쁘다.
항상 시간을 내어 빗던 그 장발의 머리숱이 한순간 연해져 있었다. 피부는 KEY에 버금가게 창백해졌으며, 관절이 헐거워졌는지 벌벌 떨며, 눈꺼풀이 과도히 경련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움직일 수라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인지 능력은 훼손되지 않았다는 점. 아프다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해? 내가 뭘 어쩔 수 있어? 보는 내가 먼저 공황에 빠졌다. "내가 뭘 해야...." "외로워." e7e가 말을 끊었다. "춥고 무서워. 옆에 있어줘." 양털 외투의 팔깃이 잡혔다. 검지와 엄지의 미약한 힘으로. 환자의 말을 어찌 거역하겠는가.
e7e의 열이 심해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냉각수의 누수 현상으로, 로봇의 과열 동작을 뜻했다. e7e의 내부에서 오류와 결함을 바로잡고자 시스템이 노력하고 있는 것이겠지. "어쩌지. 이걸 어쩌지." "네가 더 불안해하면 어째~" e7e는 키득댔다. 힘없이, 바람 빠지며. 침묵. 2초의 조용함과 색색거림.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고장난 로봇은 어떻게 되는가. 무리를 이끌며 구성원을 잃어봤다. 이리도 안전을 신경써온 이유다. 불의의 불행으로 작동이 종료한 동료가 있었더랬다. 로봇의 최후였지. >>179 1. 고장난 로봇들을 합쳐. 기억을 계승하면서. 2. 자연에 버려진 '배양기'에 넣어 되살릴 수 있어. 3. 그런 건 없어. 그저 끝이야. 4. 자유!
부서진 로봇들은 새로이 합칠 수 있다. 새로운 개체는 기억과 능력을 일부 계승한다. 실전 압축이라고 할까. 그렇게 우리 무리는 64명까지 움츠러들었다. 이 방법을 쓰는 한 우리는 무적이다. 그러나 한 명은 남아야 이 방법을 쓸 수 있다. 무리의 전멸은 막아야만 한다. 더군다나 한 개체의 소멸은 회로의 한 구석을 찌잉 울리게 만들기에. e7e가 작동을 멈추면 누구와 합쳐야 할까? 나는 고민하며 e7e의 달뜬 이마를 쓰다듬어주었다.
깜짝이야. 무기질의 손이 갑자기 내 이마 위에 올라왔다! KEY다. "뭐하시는 건가요?" "e7e가 아파서 간호 중이야." "핵융합로 자동 수리 기능이 없나요?" "정체불명의 신기술?" KEY는 살짝 새초롬하다. 힐끔거리고 있다. 이건 질투인가? "저랑도 있어주면 안 돼요?" KEY가 투정을 부린다. >>182 1. 잠시 자리를 비운다. 2. 간호가 먼저야. 3. 미안, KEY. 내 마음은 이미 기울었어(?) 4. 자유!
나와 KEY, 두 사람의 간호가 시작된다. 개봉박두!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났다. "저희 계속 가만히 있으면 돼요?" "그렇지? 환자에겐 온기와 관심이 필요하니까." "과연!" e7e는 또다시 기침을 했다. 머리에는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고열이 심해 환각을 보는지. "이대로 가면 경과가 나아질까요?" "아니, 그럴 리가. 이 정도 오면 대부분 끝이야." "우왓 무서워라. 그럼 이건 간병이라기보단 장례식인데요." 그렇다. 그런 관점의 시각도 나는 존중한다.
"죽음. 제 사전에 있는 단어에요." "너도 죽으면 몸을 기워 하나로 만드니?" "그건 뭔가요 진짜진짜 무서워요." 단어 선택의 미스였을까. KEY가 가느다란 팔로 무릎을 감싸고 오들오들 떤다. 긴장을 풀어주고자, 두 손발을 붙잡아 제압했더니 더욱더 오돌오돌 떤다. 왜 그럴까? 벽에 달싹 들러붙어 도망간 KEY에게 설명해준다. 우리 초식 로봇들은 고장난 개체를 합쳐 새 개체를 만든다고.
"e7e도요?" "그래야지. 아무래도 내가 집도하려나." 며칠은 견디겠으나 그것이 끝이겠지. 회로를 돌려 시뮬레이션을 하자. 수선의 과정은 어떻게 되지? >>186 1. 단자를 연결해 기억을 전송시켜 2. 두 로봇을 해부해 부품을 꺼내고 서로 합쳐 3. 여기서 이틀 거리 떨어진 '시설'로 가야 해. 4. 자유!
지금까지의 이야기. KEY가 핵을 쐈어. e7e가 아파. e7e를 해부해 부품을 꺼낼 거야! 이렇게 꺼낸 부품은 친환경적으로 재활용되어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데에 쓰인다. 새로운 개체는 이전의 기억을 계승해. 이것이 우리 초식 로봇들의 생존법. e7e는 혼절하고 있어. 토닥이던 피부는 탄력을 잃고 그대로 찌그러졌어. 오늘의 팁. 환자의 팔을 너무 오래 잡으면 안 된다. 나는 그것으로 종종 후회했다.
자아, 13. 13이라는 숫자. e7e가 도움을 구하며 내게 다가오고서, 지금부로 13의 시간이 지났다. e7e는 간신히 의식을 붙들고 있어. 무엇을 말할까? 괜찮아, 잠깐의 이별이잖아? 죽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냐. 우리 초식 로봇은 무리 속에서 불멸한다. 그러나 e7e의 눈빛은 간절하고 눈물은 새어나오고, 울 힘은 도저히 없고, 그래서 젖은 소리로 숨을 쉬네. 그리고 맥동하네.
초식 로봇은 죽지 않아. 하지만 자꾸만 싫어. 언제나 이별의 순간, 이번은 특별하단 생각이 들지. 이번은 달라. 자세를 바로잡아 예우를 갖춘다. >>191 1. e7e와 과거 이야기를 한다. 2. e7e를 위로한다. 3. 조용히 쉬게 해준다. 4.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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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랏챠! 으읏 실패야. 다시 기합을 주어 얍! 성공!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벽난로의 훈기를 쬐며 드는 잠은 유난히 달짝지근하다. 아빠는 부엌에 있다. 언제나처럼 당분의 달달한 향이 풍긴다.
내 양육은 아빠가 도맡는다. 엄마도 친절하고 상냥해. 하지만 보통은 기계실에서 작업을 한다. 이 기지를 유지하려면 한 명이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나 뭐라나. 칠판이 딸린 나무 책상에 달려간다. 내 애착 칠판이다. 키를 잰 자국이며 여러 낙서가 가득하다. 내 전용의 나무 의자를 꺼낸다. 이 의자는 아빠에게도 허락 못 한다! 줄을 당겨 종을 울리면 아빠는 기동음과 함께 다가온다.
"인사. 안녕히 주무셨나요." "인사! 아빠도 만나서 반가워요!" "명령하시면, 오늘의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부녀의 화기애애한 대화에 이어, 오늘의 수업이 시작된다. 무엇을 배울까? >>197 1. 세계의 역사에 대해 2. 인간에 대해 3. 생존기술에 대해 4. 공부 안 해! 놀래! 5. 자유!

"설명. 인간은 저희의 전에 존재했던, 로봇의 유사종입니다." 아빠가 눈에서 빔을 쏘아 칠판에 투영시켰다. 신기해! 우리 아빠는 역시 초 엘리트 명품 로봇이야. "그들은 지상을 개척하고 밤하늘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멸종하고 말았지요." "질문. 그게 끝이에요? 더 알고 싶어요!" "설명. 안타깝게도 인간의 정보는 대체로 제거되어 있습니다. 마치 숨기려는 듯이요." 슬퍼. 어째서일까? 누군가에게 쫓겨 도망가던 것일까? 정보를 모조리 숨기다니.
"제안. 그럼 뭘 더 알려줄 수 있어요?" "설명. 그들의 멸종 과정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오!" "그들의 문명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대단해 대단해! 아빠 짱!" "뿌듯." 해는 중천, 학습할 시간은 잔뜩, 나의 열정도 가득이다. >>200 1. 역사에 대해 2. 생존기술에 대해 3. 엄마 아빠에 대해 4. 나에 대해 5. 싫어! 놀래! 6. 자유!
"제안. 놀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밖으로 나갈까요?" "예에이!" 그렇게 나는 아빠의 품에 들려 30m 멀리 던지기 30회를 당했다. 우와아. 머리가 어질어질해. 울렁거려서 속을 조금은 게워냈어. 우리 아빠는 이런 어지러움도 토악질도 경험한 적이 없대. 역시 엘리트야! "질문. 저도 수련하면 아빠처럼 강해질까요?" "확신할 수 없네요. 제가 생각하기엔 재질부터가 다릅니다." "흐음. 역시 그런가."
아빠의 분석 결과, 내 외피는 유기물질로 되어있대. 아무래도 불량품 같다나. 태양열을 섭취하는 아빠와 달리 나는 연소된 풀과 시체를 먹어. 유기물을 먹어 유기물로 만든 신체로는 30m 멀리 던지기를 못 하겠지. 그래도 괜찮아, 언제까지나 엄마 아빠랑 함께일 테니까! 속이 괜찮아졌어. 30m 멀리 던지기를 재개할 때야. 아빠의 품에 들렸다가 고공행진하기를 몇 번째. 내 시야엔 저 멀리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들어왔어! >>203 1. 야생 토끼 2. 로봇 무리 3. 로봇, 그런데 눈이 새빨개. 4. 자유!
로봇 한 체가 접근 중이야. 시각 센서에 붉은 빛이 들어와있어. 아빠에게 연신 헹가레 당하며 조금씩 보고를 해. "아빠. 저 멀리." 나는 다시 날아갔어. "로봇이 있어요!" 또다시 날아갔어. "눈이 빨개요!" 이번엔 날아가지 않았어. 아빠가 헹가레를 멈추었거든. 아빠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어. 게다가 나를 땅에 떨어뜨려 버려. 이건 난생 처음이야. "아빠?" "...." 아빠는 내 손을 붙들고 기지의 외벽 안으로 달려갔다.
아빠는 외벽의 문을 용접하기 시작해. 내가 묻기도 전에 아빠는 설명했어. "인간이 멸망하고 세 종류의 인공지능이 남았습니다." "아빠, 왜 그래." "혹자는 생태계를 복원하려 했지요. 혹자는 동면관에 남은 로봇을 꺼내 교육하기를 택했지요." "아빠?" "그리고 인간을 멸하려던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따위 없는 세상, 그 증오는 엄한 데에 튀기 일쑤였고...." 커다란 폭음이 들리고, 거대한 충격이 그 뒤를 따랐다. 아빠의 말을 더는 들을 수 없었다. 이명이 심해 어지러움이 일었다.
도망가자. >>207 1. 엄마에게 2. 동면관으로 3. 외벽 밖으로 4. 자유!
엄마는 기계실에 있어. 기계실에 있는 걸로 알고 있어. 그래서 문을 꽝꽝 두드렸는데, 도저히 엄마는 나오지 않았어. 거기 없는 것처럼 날 버린 것처럼. 황망해지고 피부가 건조해져. 아빠의 기름 냄새가 난다. 귀를 어지럽히는 불결한 소리, 싫은 징조들. 어쩌지. 내가 그것에 사로잡힌 뒤에야 문이 끼익 열린다.
"엄마." "늦어서 미안하단다."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얼굴, 피로에 찌든 눈매. 기력도 없이 엄마는 겨우 입꼬리를 올려. "사라진 줄 알았어." "폐쇄 회로로 상황을 보았단다. 절망적이더구나." "그래서?" "도망가고 잠적하고 싶었지." 엄마가 나를 번쩍 들어올렸어. 기계실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상자를 치워 비상 계단을 찾아내. 함부로 내려놓지 못한 채, 엄마는 애잔히 진솔해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기서 멈추고 싶구나." "그렇게 이 이야기를 멈출 수 있다면, 배드엔딩을 볼 일도 없겠지." "암울한 결말보다는, 지지부진 중단되는 편이 더 행복하지 않니?"
"하지만 그런 일은 없고, 저것은 다가오고." "그러니 나는 행동하고, 진행시켜서, 너는 구한 채 이대로 끝나야겠구나."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게 돼. 동면관에서 나를 꺼내 먹이고 재워주고 돌봐준 엄마 아빠. 나는 그 로봇들이 필사적이란 걸, 그리고 이별을 당연시한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야. "배드엔딩? 동화 말이야?" "동화와 현실이지."
"예시. 시한부가 되거나." "예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파괴되거나." "예시.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남긴 채 떠나게 되거나." "그런 어두운 결말로 치닫는 삶이 있단다."
파지직, 섬광과 소리. 엄마는 나를 지하와 연결된 사다리에 강제로 밀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충격음이 들렸고, 엄마의 머리가 관통되었다. 회로가 손상되었는지, 언어 체계가 변경되었다. "거짓. 나는 괜찮단다." "거짓. 다음에 또 만나자." "거짓. 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엄마가 쓰러지며 통로가 가려졌다. 지하 통로는 어두워졌고 "진실. 사랑한단다." 엄마는 그 두 마디 말로 끝났다.
사다리를 더듬거리며 내려가. 나는 두 번 추락하고, 네 번은 울어. 현실을 도피해. 엄마의 생각을 하고 엄마의 말을 생각하면서. 배드엔딩으로 끝나게 되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살아가는 로봇의 자세에 대하여 생각해. 그럼에도 이야기는 흘러가. 이야기는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아. 시간은 결말의 명도에 관심이 없어.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어느날 죽음을 앞둔 나는. 침대에 누워 오늘을 생각하며, 가장 외롭게 솔직해지겠지. >>215 1. 죽음은 끔찍한 비극이야. 죽고 싶지 않아. 2.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야기는 빛나고 완성돼. 3. 하나의 삶이 끝날 뿐이야. 품위를 지키면 그뿐. 4. 내 죽음을 여럿이서 슬퍼해주면 좋겠네. 5. 자유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죽음으로부터 의미를 발굴할 수 없다고 생각해. 생각은 나를 울적하게 하고, 손은 힘을 풀어 몸을 곤두박질치게 해. 몸은 사다리의 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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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충격은 없어. 눈을 부릅뜨니 미래의 풍경이야. 나는 방공호의 침대에 누워있어. 심장과 폐가 다른 박동으로, 그러나 규칙 없이 뛰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888과 KEY. 888은 우리 초식 로봇 무리의 대장. KEY는 이 건물에서 발견한 신기한 로봇. 나를 간병하는 걸까? 눈이 흐려 상조차 제대로 맺지 못해. "괜찮아?" 888이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묻는다. 목에서 공기가 새어나온다. 공기는 말이 되지 못한다. "안심해." 888이 말한다. 순간 울분이 터져나왔다. 울분은 말이 되었다. "죽고 싶지 않아." 한치의 어그러짐도 없이 진실을 말해. 낭비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색색거리는 숨 속에서 단어를 포착했을까? 888이 내 손을 토닥여줘. 전에도 그랬듯이.
"우리는 죽지 않아. 네가 작동을 멈추거든 부품을 건져내 다른 개체와 합칠 거야. 네 기억을 유지한 채 인격은 합쳐져, 다시금 건강한 몸으로 생활하게 될 거야. 우리는 언제나 그래왔어. 그러니 걱정 말자." 다정다감한 말이야. 부품을 이식해 인격을 합친다. 맞아. 초식 로봇 무리에 합류해 생활하며 본 적 있는 광경이야. 추억이 떠올라. 맑은 하늘 아래서 무리와 어울리던 시간이 있었더랬어. 그러다보니 절로 고민하게 돼. 합쳐진다면 '누구'와? '누구'의 빈칸을 채우면서, 과거는 추억의 이름으로 찾아와. >>220 1. 대장 2. c8c 3. ace 4. KEY 5. 모두 아냐
엄마 아빠를 두고 도망가, 나는 살아남았었다. 목숨만 부지했더랬지. 나는 아직도 어린 아이였고, 식량을 구할 방법도 몰랐다. 초목이 울창한 삼림에서 돌아다니다 육식 동물을 만나 도망가기를 한세월. 맨발은 빨갛게 벗겨지고, 땀이 흥건해 눈물도 마르고, 그러나 눈물 없이 공포는 한가득. 나는 열심히 도망갔다. 표범의 맹렬한 추격! 그 표범을 강철 주먹이 한방에 날려버렸다. 나이스 펀치! 그 주인은 888, 이 무리의 대장이었다. 연이어 c8c를 비롯해 내가 지금은 아는, 그러나 그때는 초면이던 로봇들이 나타났다.
응, 즐거웠던 추억이 있어. "칭찬.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헤, 뭘!" "제안. 은혜를 갚아도 되겠습니까?" "으음. 너 말투 신기하다! 로봇 같지가 않네!" "어라?" 한동안 입을 닫고 이 무리의 언어를 관찰했다. 얌전히 머리를 빗질하고 낙서를 하고 있자니, 소심한 이미지로 고정돼버렸다!
"888에는 동그라미가 여섯 개야! 귀엽지 않아?" "알 것 같아! 양떼처럼 귀여워!" "맞아, 폭신폭신하지!" "...옷을 만들면 좋을 텐데." 그들은 나를 위해 양무리를 사냥해주었고, 나는 서투른 도축으로 양털과 가죽을 모았다. 원기를 보충한 몸을 활용하여, 갈아만든 바늘을 삐뚤빼뚤 움직여서. 앞다투어 내가 지은 옷을 입었던 때, 간신히 무리에의 소속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불량품이란 것도, 고아란 것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초식 로봇 무리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바뀌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내 인격이 합쳐진다면 KEY가 좋았다. KEY는 오래 보지 않아 정이 덜 갔고, 솔직한 마음으론 이 사태의 책임자이기도 하고. 미지의 알고리즘을 지닌 신기한 개체라는 점도 관심을 끈 요인 중 하나. 떨리는 입을 열어 의사를 전했다. 우리는 시한부가 되거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파괴되거나.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남긴 채 떠나게 되거나.
죽음은 무서워. 의미 없는 끝일 뿐이야. 시간이 멈추면 좋을 텐데. 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는다고 했지. 합쳐져 이어질 것이라고 했지. 888의 되뇌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나는 생각했다. >>226 1. 로봇이라서 다행이네. 부품을 합쳐 계속 살 수 있다니. 2. 그런데 나, 로봇 맞겠지? 3. 자유
기절한 양의 가슴팍에 돌도끼를 찔렀다. 그렇게 양의 숨을 끊었다. 털가죽을 입은 짐승들은 그런 방식으로 죽었다. 짐승이 아니라 로봇이어서 다행이다. 계속 여기서 살 수 있으니. 어라, 그런데 나 로봇 맞나? 엄마 아빠가 로봇이고 나는 엄마 아빠를 닮았지. 그러니 로봇일 거야. 초식 로봇들과는 다르지만, 우리 엄마 아빠도 KEY도 풀을 뜯어먹진 않았어. 서로 다르고 소중한 로봇들일 뿐이야. 만일 로봇이 아니라면 뭐지? 이대로 끝나게 되나? 그건 싫은데. 양가감정이 일어 갈팡질팡한다. 안심해야 하나, 무서워해야 하나, 회로가 고장나 정하지 못하게 됐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길게 느껴져서 상당히 아늑하니 언제까지고 고민해도 될 것만 같았다.
아빠가 바다의 영상을 보여주었었다. 물은 파란 암벽처럼 오다가 새하얀 양떼처럼 오다가 고급진 여름 이불처럼 왔다. 덮고 자면 기분 좋겠단 생각을 했다. 어떤 기분이려나? 서늘함과 안락함? 양털의 포근함? 아마도 지금 나의 기분이겠다. 공포도 불안도 파랗게 스며들어갔다.
∞∞∞ LOADING ∞∞∞
옆을 지키고 있었다. e7e가 사라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동력원을 잃은 손을 토닥여주고, 충분히 오래 잡아주었다. 맞은편에 앉은 KEY가 황망해하고 있었다. e7e는 외롭다며 같이 있어달라고 했지. KEY도 왠지 그렇게 말할 것 같네. 그런 예감이 들어! "저기, 어쩌죠." "외로워? 위로해줄까?" "제가 죽인 것 같아요." 아차. 예상이 틀렸다!
"제가 프로토콜을 작동해서." "제 알고리즘이 이래서." "제가 이렇게 만들어져서." "원인과 결과를 추적하면, 결국엔 저잖아요?" "제가 저질러버렸는데, 어떡해야 하죠...?" 이건 뭐지? 모르겠는 알고리즘이야! 역시 KEY는 신비한 로봇이구나! 이상한 말을 많이 해!
하지만 힘들어한단 건 알겠어. 초식 로봇 64마리 무리의 대장으로서, 위로엔 일가견이 있지! 아예 다른 일로 눈을 돌리게 하거나, 전원을 꺼버리거나, 서투른 말을 들어줘야 해. 마침 KEY를 절전해야 하는 참이었어. e7e와 KEY를 해부해 둘의 부품을 합쳐야 하니까! >>233 1. KEY, 고민은 됐고 우선 절전하자! e7e와 합쳐야지! 2. KEY의 상태가 안 좋네. e7e부터 먼저 해부할까? 3. 잠자코 들어줄까. 또 저번처럼 폭주할까 무섭지만. 4. 자유!
"제 잘못이에요. 어쩔 수 없었다고요. 제 알고리즘인걸요." "노력하다 안 되면 터뜨리기로 결정되었고, 그래서 엄마 아빠가 핵미사일을 준비하셨어요." "친구가 죽을 줄 알았다고요. 그럴 의도로 쏜 거예요. 알아놓고도 이렇게 주절대니, 얼마나 멍청한가요?" 잠자코 KEY의 말을 들어주었어! 뭔 소리인지 모르겠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걸로도 위로가 되려나? "파국이에요. 대체 어떻게 속죄를 해야 하죠?" "아, 그거 질문이야?" "넷?!" 급히 끼어들었다. 드디어 질문다운 질문이 나왔어! 내가 답해도 되겠다!
"흠흠! 우리 초식 로봇들은 부품을 합쳐 부활합니다! 게다가 e7e는 바로 너, KEY를 골랐어! 부러워라!" "부활...." "네, 인격이 합쳐져 되살아납니다! 대단해 대견해! KEY를 생각해 내린 결정이겠지." "저를 생각해요?" "응! KEY를 걱정했을 거야. 자신이 죽고 이렇게 이상해질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직접 챙겨주려고 했겠지." 진실은? 난 몰라! 하지만 이게 가장 그럴듯해! 그 그럴듯한 말을 능수능란하게 해보았어.
"그런가요. 맞아. 아직 속죄할 수 있어...." "그 자세야! KEY가 절전하면 바로 합체 절차를 진행할게." 회로가 심약해진 지금, KEY를 밀어붙일 찬스야. >>237 1. KEY를 절전시키고 바로 해부 절차에 들어가자! 2. 아직 할 이야기가 있어(자유 앵커) 3. 자유!
두둥 두두둥 두둥 두두둥 그리하여 내 앞에는 두 명의 로봇이 눕게 되었다. 둘? 너무 많잖아? 괜찮아, 이제 하나가 될 거야! 자체적인 생존이 불가능해진 e7e를 해부해, 부품을 꺼내다가, KEY에게 합체시킬 것이다. 나는 이 수술을 수 차례 집도한 전문가. 이 수술, 가망 있다! KEY도 결국엔 로봇이니 내가 해부해본 동료들과 비슷한 구조일 것이다. e7e도 불량품이지만, 봐봐, 우리와 같은 겉모습이야. 머리와 가슴과 배, 저 안에 핵심 부품이 들어있겠지. 해부 교실 시작! 칼과 나이프를 들었다. 어디부터 분해할까? >>239 1. 머리 2. 가슴 3. 배 4. 자유!
흐음. 그렇구나. 오케이. 드라이버는 내려놨어. 이거 어디서 봤는데? 조금 시도해본다. 그리고 결론낸다. 힘들겠다! 전자 회로의 유사품은 보이지 않아. 손끝에 미미한 자기장을 형성해 주욱 흩어보지만, 자성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여기? 아차차 으악 아닌가 봐! 서둘러 수습을 한다. 뒤늦게 불안이 엄습했다. 혹시나 말이야, 이식이 실패할 수도 있으려나? 뭐야, 불길하게. 고민은 이르다! 아직 해부할 곳이 남아있어! 나무도 도끼로 열 번 찍으면 넘어가는 법이야. 부품을 찾자! >>242 1. 머리 2. 가슴 3. 자유!
어라? 아하. 나는 내가 긴장하고 있단 걸 깨달아. 실수를 할까, 사고를 칠까, 경고를 울리며 걱정하고 있나 봐. 이렇게 벌벌 떨다간 예민한 부품을 건드리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말단부부터 차근차근 해보자! 부품, 나오겠지? 차근차근 분해를 해봐. 손과 팔을 잇는 접합부가 보이지 않지만, 조심스레 나누어봐.
회색이 아니야. 빨갛네. 아, 어디서 본 광경이다 했어. 이제 알겠다. 우리 초식 로봇 무리가 떼사냥했던 양과 염소와 멧돼지. e7e가 그걸 갈라 가죽을 구하던 때, 고기를 자르던 때, 이런 풍경이었다. e7e의 주된 성분은 유기물질이구나. e7e에게 전자 회로가 있다면, 과연 어디에 숨겨져 있으려나? >>245 1. 머리 2. 가슴 3. 자유!
정답이다. 내 손은 머리를 향했다. 개체로서의 동질성을 유지하며 기억을 간직하는 부위. 다만 섬세해서, 함부로 하면 위험하다. 앞서 다른 곳을 건드리며 e7e의 구조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 없으면 없을 텐데. 에이, 없을 리가. 분명 있을 거야. 그런데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e7e는 되살아나지 못하고, 나는 잘못된 방법으로 이별한 게 된다. KEY는 사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다가, 이걸 빌미 삼아 내게 떠넘길지도. 우리 둘은 방공호. 바깥은 방사능 낙진. 내 섬세한 회로는 방사능에 교란돼. 음, 이거 좋지 않은데.
생각하지 마. 저기 그만. 생각하지 마, 생각하니까 힘든 거야. 아무 생각 없이 피부를 갈라. 하얀 외골격.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잘라. 조개껍질처럼 약해. 힘조절 잘하자. 여차하면 확 들어간다?
외골격의 안에는 여전히 유기물질. 단단하고 주름진 것이 있어, 회로는 아니야. 짐승의 피 냄새가 난다. 일났다. 하지만 몰라. 아직 겉밖에 안 봤는걸. 손을 뻗는다. 전자석의 전원을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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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났을 무렵, 내겐 기억이 없었다. 하늘색 부동액의 수위가 낮아졌다. 피부가 촉촉했고, 들숨에선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내 앞에는 두 명의 개체. 그 둘이 로봇이며 내 엄마 아빠임을 알게 된 것은 이후의 일이었다. "호명. e7e." "...실례합니다?" "동면장치의 명함에는 그렇게 적혀있군요." 그들이 가리킨 종이는 물에 젖어 훼손되어있었다. 알파벳 e 오른쪽으로 각진 > 기호 거듭 알파벳 e 그것이 나의 이름이 되었다. >>251 1. e7e 2. 자유
나의 새로운 이름을 중얼거렸다. 자연스레 떠올랐다.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그렇게 낯선 삶이 시작되었지. 어째서 이걸 회상하고 있는 걸까? 이유를 알 수 없다. 장면은 전환되었다. 나는 꿈 속의 여행객, 주위는 어두컴컴하다. 상징과 알레고리의 장면이 찾아왔다. 엄마가 보인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아빠가 보인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둘은 팔 하나의 간격만큼 떨어져 나를 바라다 본다. 둘은 왠지 책 한 권씩을 손에 들고 있다.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입이 열리지 않아서, 나는 무력하게 있었다. "평가의 시간입니다. 선택의 시간입니다." 아빠가 입을 열었다. "삶을 돌이켜보아 검토해봅시다." 내 선택을 원한다는 것처럼, 엄마와 아빠는 나를 바라다보았다. 익숙하고 안심이 되는 얼굴들, 그러나 이질적인 말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즐겁고 행복했나요?" "이런 결말은 좋았을까요?" "솔직하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254 1. 좋지 않다. 2. 괜찮다. 결말이 어떻든 상관없다. 3. 답을 미룬다. 4. 자유
∞∞∞ BGM ∞∞∞ https://www.youtube.com/watch?v=xYzlN_fTflI Her - Song on the beach
답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망상에 빠지고 싶었다. 두 로봇을 처음 만났던 동면 장치, 푸른 액체, 이윽고 바다, 여름 이불 같은 파도 그렇게 연상 놀이만을 이어가고 싶었다. 이것조차 허상일 테니까. 현실도피를 멈추는 순간 엄마 아빠도 사라질까봐. 정겹고 다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빠의 얼굴에 보조개가 패였다. "괜찮습니다. 시간이 많으면 좋지요. 저희는 너무도 급작스럽게 헤어졌습니다." "인간의 역사와 문명을 알려줄 수 있다고 말만 하고, 떠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아빠는 자조하여 책임을 돌렸다. 내가 덜 힘들도록, 내가 기운을 차리도록.
아빠는 책을 들고 있다. 엄마도 책을 들고 있다. 표지만으로 책을 판단한다면, 아빠의 책은 빨갛고 엄마의 책은 파랗다. 책을 보는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엄마가 입을 열었다. "먼저 인간의 역사에 대해 알려주고 싶네요. 하지만 어쩌나요. 지금은 안 되겠어요." 어째서? "인간의 멸종에 대해 두 가지 다른 판본이 존재하거든요. 내용은 같아요. 결말만 조금 다르지." 그게 저 두 책일까? 빨갛고 파란. "하나를 골라서 읽어줄게요. 하지만 어쩌나, 저희는 고를 수 없답니다." 선택할 수 없다고? 결말만 다를 뿐인데. "우리는 로봇이니까요. 인간의 결말은 인간이 정해야지요." 하지만 인간은 멸종했는걸.
아빠가 말했다. "제 책은 인간의 숭고를 믿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했으나, 죽음이 불가피한 순리임을 인식했어요." "그러므로 저자는 주장합니다. 인간은 고요하고 고귀한 숭고라고, 돌이켜 추모할 만한 존재였다고." "잔잔한 비극, 그것이 인간의 끝이었습니다." 엄마가 말했다. "이 책은 거짓투성이야. 역사라기보단 동화지. 인간은 헛된 희망을 좇던 제멋대로인 존재라나 봐. 인간은 억지를 부려 마지막 순간까지 비현실적인 행복을 꿈꿨고, 심지어 결말마저 멋대로 바꿔버렸어. 엉터리 해피엔딩, 그것이 이 책의 끝이야." 두 책은 인간을 달리 정의내렸다. 비극을 고요히 받아들이는 자로, 허망한 희망에 매달리는 자로. 고요한 숭고와 끈질긴 희망 중의 하나로.
"e7e, 결정하세요. 인간이 무엇인지." 아빠의 목소리가 엄해졌다. 어째서야? 싫어,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애초에 인간이 무엇인지 결정해서 어쩌란 거야?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존재인지 결정하세요." 그래, 인간은 둘 중 하나라고 나는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왜? 그래봤자....
"어째서냐고요?" "인간인 당신만이, 인간을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는 이해한다. e7e, 훼손된 종이. >는 젖어 망가지고 회전된 글자였다. >는 알파벳. 나는 >>262 1. 인간 2. e7e 3. 4. 자유
∞∞∞ BGM ∞∞∞ https://www.youtube.com/watch?v=O1aIoPnhoqg Her - Photograph
이해하여 받아들인다. 나는 이브, 지상의 유일한 인간이다. 엄마에게 의지했다. 아빠에게 의지했다. 888의, c8c의, ace의, 그리고 KEY의 도움을 받아 삶을 이어왔다. 나는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인간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 질문에 답할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나뿐이었다.
자신을 모른 채 방황하였다. 병들어 죽어버렸다. 시체는 찢겨 칼질당한다. 나의 상황을 이해하였다. 오래된 공포는 여전했다. 그러나 지금 나를 채운 것은, 새로운 종류의 결심 그리고 공포보다 오래된, 자랑스러운 사명.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어디 있는가 인간뿐이다. 마지막 인간인 내가 결정해야 한다. 최초로 정의해야 한다.
"이브, 여기 빨간 책이 있습니다. 무겁고 진중하며, 기억하고 반추할 역사입니다." 아빠가 말했다. "인간은 어리석었으며 방황하였습니다. 지구의 주인은 벌을 받아 몰락합니다. 그래도 주인됨으로써, 그들은 마지막까지 훌륭했습니다." "엄마랍니다. 여긴 파란 책이에요. 결말을 고쳐쓴 이야기로, 역사라고도 할 수 없어요." 엄마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기적과 수학이라고도 못할 확률에 기대어, 억지로 결말을 행복하게 고쳐썼어요. 어린아이에게 읽힐 동화로군요."
인간의 역사였다. 인간이 결정해 만든 역사이다. 인간인 나는 알 수 있다. 인간인 우리는 알지어다. 무엇이 더 인간에 가까운지, 종말을 맞이하는 인간의 선택이었을지. 인간은 담담히 비극을 받아들였는가, 한줄기 희망에 매달렸는가? 이윽고 그것을 인간성이라고 부르자. "고릅시다, 이브." "여기로 오세요." 엄마 아빠가 말했다. 언제나 나를 아껴준 두 로봇. 아빠는 말했다. 종말 이후 세 종류의 인공지능이 남았다고. 동면관에서 나온 '로봇'을 교육하기로 한 AI가 있었다고. 그것이 엄마 아빠의 결정이었다. 내가 결정해야 하듯이, 그들은 과거에 결정하였고, 나는 그것에 감사하였다. 고마워요. 그러니 결정하자. 인간을 정의내리자. 두 로봇이 동시에 말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어라 어쩌지??!! >>271 1. 아빠의 붉은 책 2. 엄마의 파란 책 3. 타임! 4. 자유
곤란하다. 머리가 얼어붙었다. 치사하다. 안 그래도 인생관을 따지는 어려운 문제다. 거기에 더해 심술궂은 장난까지 덧붙이다니. 못된 방해공작이었다! 내가 씩씩대니 엄마 아빠의 얼굴엔 웃음이 피었다. 아빠가 헛기침을 하더니 책에 대해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인간은 끝났습니다. 각자의 선택에 의해, 그리고 비틀린 세상 덕택에. 모두의 꿈이 좌절되었으니 이를 비극이라고 불러도 좋을 터입니다." "이 책에서 인간은 그 비극을 책임 지고 수용합니다. 여러 인간이 모여 선택하고 이어가며 만든 역사이니까요. 세계의 적대적인 우연과 법칙이 이런 불우한 결말에 기여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그런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으니까요." "그들은 일상과 함께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조금은 무기력하게, 괴로울지라도, 그러나 소중한 사람들과 모여앉은 소박한 풍경 속에서." "만일 인간이 그런 숭고한 존재라면, 이 빨간 책이 진실될 것입니다."
아빠가 말했다. 빨간 책은 고요한 비극이다. 엄마가 말을 이어받았다. 파란 책을 톡톡 손에 치면서.
"그러나 다른 판본이 있어. 이 파란 책이야. 조용한 비극? 그거 대단한 거야? 새들조차 지진을 피해 도망가는걸? 짐승과 다르니 숭고했다? 그렇다면 죽은 바위야말로 숭고하겠네." "이 책은 희망을 갈구하며 날뛰는 인간들의 이야기야.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수많은 비책을 세웠어. 하나 같이 희박한 가능성들이었지. 그러나 그것이 성공했다고 믿고, 이 책은 억지로라도 만든 그 해피엔딩을 서술해. 그러니 이건 역사가 아니야. 몰릴 대로 몰린 사람들이 지은 희망찬 동화일 뿐." "숭고하지 못하고 눈물겹지도 않아. 그러나 얌전한 비극보다는, 기적적인 해피엔딩일까?" "만일 인간이 이렇게 생각하는 존재라면, 이 파란 책이야말로 진실이겠지."
엄마가 말했다. 파란 책은 희박한 희망이다. 두 책은 모두 존재하고 있었다. 각자가 엄마와 아빠의 손에 들려. 둘 중 하나를 고를 기준은 단 하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질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답할 질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답하여 고르자. 인간이란 이러하니, >>279 1. 비극을 책임 지고 맞이하는 존재이다 2. 기적적인 희망을 바라는 존재이다 3. 자유!
주말에 재개하겠습니다. (이 레스는 복귀 시 삭제합니다.) 배드엔딩? 해피엔딩? 주제의식은 어떻게? 많은 작가들의 고민입니다. 이 이야기의 끝이 도저히 보이지 않아 고민하며 연재를 미루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젠 갈피를 잡았습니다. 마저 적어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연중입니다. 아무래도 한동안 연재는 어렵겠습니다. 대학원 입시가 더 중요해요.... 반 년은 넘게 걸릴 테니, 기다리지는 말아주세요. 상황을 봐 영 안되겠다 싶으면 완결까지의 플롯이라도 추후 공개하겠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 . . . .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복합적이어서, 답할 자들이 많아서, 서투른 답변이 좋지 않아서, 다들 미루었던 대답. 그래서 질문은 홀로 외로이 지상을 방랑하였다. 그러나 답할 이 하나뿐이고 그 이는 죽어 사라지기 직전이니 답은 비로소 정해져야만 하였다. 그런고로 마지막 인간은, 그리고 누군가에게 부탁받았던 최초의 인간은, 파란 책을 골랐다. 인간은 기적적인 희망을 바라는 존재라고.
눈앞에 인간이 온다. 인간은 종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계를 용서해주지 않았다. 소중한 이들을 버리고, 희박한 희망으로 투신하였다. 빨갛고 따스한 피의 세계를 버리고, 인간은 이 파란 세계로 육박하였다. ...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런가요. 기억하고 있었군요?" 아빠가 말해왔다. 아빠와 엄마, 고마운 분들, 시야가 흐릿해졌다. "다행이에요. 저희도 약속을 지켜왔거든요." 그게 무슨 말일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내게 있었다. 수백 년 전의 퇴색되고 빛바랬던, 가장 아래에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으니까.
마지막 인간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저 앞에서, 내가 가닿을 수 없을 곳에서 쓸쓸한 미소를 짓는다. 평온한 종말 대신에, 사지로 걸어들어가 울고 갈구하며 비통하기를 택했다. 그리고 그 끝은, 그 끝은 어리석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하였다. 책을 집어들었다. 파란 책은 시원해서, 마음이 가라앉아갔다. 그것은 푸른빛 돌던 재투성이 세상.
. . . 로봇이 버려져 있었다. 폐기장에 던져지며, 충격으로 두 다리는 박살나버렸다. 이동 속도는 내림하여 제로. 새벽부터 내린 눈에 몸이 속절없이 덮여, 로봇 역시 하이얀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 생명이 없는 세상. 빙하기. 얼어붙어 무엇도 피우지 못하는 평원. 변화하는 것이 없는 곳에서, 로봇은 더 오래 눈을 감고 더 이따끔 눈을 떴다. 그러다 그 시야가 비틀거리며 눈을 헤치고 걷던, 인간의 눈동자와 마주쳤으니
>>291 인간은.... 1. 쾌활한 여자 2. 엄격해보이는 남자 3. 아직 어린 아이 -지금까지의 복선을 모두 회수하고 해피엔딩을 만들기 위한 과거 회상 전개입니다 -이번 앵커는, 이 과거 회상 파트에서 핵심 인물로 등장할 누군가를 고르는 거랍니다. 뭐, 누구여도 되니까 마음대로 골라주세요! -플롯은 휴재 당시부터 다 정해졌던지라, 이젠 그냥 여유롭게 적어나가면 됩니다. 이제 적기만 하면 되니 마지막까지 써나갈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로봇의 시야에는 막대기 같은 남자가 들어왔다. 아, 막대기가 맞았다. 남자의 두 팔은 이미 잘려 없어진 채였으니. 인간이 멸종해가던 시절, 그 정도는 대단한 개성도 아니었다. 이름조차도 특색 없었으니, 그 남자의 인식번호는 3212호. 시대는 어두워, 인간은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이는 법조차도 잊어버렸다.
눈이 내리고, 눈발은 매서워지고, 철덩어리는 차가워지고, 남자의 코트는 새하얘지고. 두 팔 없는 인간과 두 다리 없는 로봇이 마주쳤다. 남자가 로봇을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주저앉더니 등을 내주었다. 업히라는 듯한 제스처... 어이없는 제스처. 동행을 권하는 듯한 태도에 할 말이 생겨, 로봇은 발성장치에 전원을 공급했다. "...날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다리 잘린 단면이 보여." "...뭐하는 거야?" "갈 곳이 있고, 팔이 필요해." 로봇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로봇은 도구로 쓰이는 데에는 익숙했다. 더군다나... 로봇은 거부하고 싶었음에도, 그렇게 설계되어있었다. 인간의 호의를 사고, 인간을 이용하다가, 인간을 ...하라고. 로봇의 자매기들이 그러하였듯이. 결국 로봇이 팔을 들어, 남자의 어깨와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남자는 쉽게 일어섰다.
"...당신, 뭐야." 로봇이 쏘아붙였다. 업힌 채라, 목소리는 남자의 귀 바로 옆에서. 그래서 남자는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뭔지 몰라? 난 살인 병기 중 하나야." "어쨌든 팔만 있으면 돼." "단단히 미쳐버린 새끼...." 로봇은 날카롭게 말하며, 다음번의 질문을 가동했다. 팔에 힘을 주어 좀 더 제대로 업혔다. 땅바닥에 떨어지기 싫어서였다. >>295 1. 어디 가는 거야? 2. 인간들은 요즘 어때? 유쾌해? 3. ...내가 뭔지, 제대로 알긴 해? 4. 자유
그래, 그 질문은 다소 무례하였다. 유쾌할 리가. 유쾌할 리가...! 인간은 멸망을 직감하고 있었다. 전쟁이 심화되며 군대는 로봇을 채택했다. 그래, 이때까지는 통제되었다. 인간이 점차 결정과정에서 배제되고, 적국을 몰살하란 군중의 투표가 명령을 내렸다. 그래, 이때까지는 통제되었다. 결국엔 자국의 안위보다 적국의 몰살을 우선시하고, 기계들이 살인에 모조리 익숙해졌을 때... 그제야 인류는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과연, 언제부터 통제를 잃었던 걸까?
"...글쎄다. 이제는 평화로워." 남자는 답했다. "소중한 사람들끼리 조용히 살면서 멸망을 기다려. 조용히 있으니 전투 로봇들이 찾아오지도 않고, 아는 사람들끼리만 있으니 너 같은, 공작을 위한 인간형 로봇이 끼어들지도 못하고...." 남자는 평화롭다고 말했다. 소중한 이들끼리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자의 그 말엔 반증이 하나 있었다. "...후후. 당신도 말이야?" "...." "이렇게 눈밭에서 팔도 없이 로봇 하나 업고가는, 당신은 평화로운 것 맞아? 소중한 사람들은 어디 가고?" 로봇의 눈매가 조롱을 위해 얇아졌다.
남자가 말을 잃어 로봇은 즐거워졌다. 즐거워진 덕택에, 남자를 좀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살짝 더 팔을 좁혀 남자에게 제대로 밀착했다. 이것은 친밀이 아니라, 첩보 전용 로봇에게 주입된 프로그래밍의 일환이었다. 로봇은, 인간과 친해진 후 인간을 내부에서 분열시키기 위한 종류의 모델이었으니까. 폐기되었을지라도 그 설계는 여전하였고.... "...더 질문해도 돼?" 설계되었을지라도 궁금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299 1. 그래서 어디 가는 거야? 2. 내가 왜 필요해? 무슨 짓 하려고? 3. 팔은 어쩌다 사라졌어? 우리 언니들이 잘라버렸나? 4. 자유
"...연구소로 가고 있다." 남자가 답했다. 둘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발은 더더욱 눈밭에 푹푹 빠졌다. 무릎까지 잠겼다. 헤에, 하고 로봇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 묵직한 말에서 남자의 각오를 읽어낸 탓이었다. "아하, 인간은 그런 거 좋아하지? 연구소에 잠든 마지막 희망." "...아는구만." "오호라,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도 버리고 이 황야로 나오셨구나?" 로봇은 남자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모닥불 앞에 모여앉는 소박한 풍경 대신에, 이 새파랗고 잿빛인 눈밭으로 남자는 걸어나온 것이다. 고작 한 줌 희망 때문에, 한 숨 쉬기도 힘든 이 추위 속으로. "거기 무엇이 있길래? 알려줘!" 로봇은 조르듯이 질문했고....
"이브가 있어." 남자는 투박하게 답했다. 그 목표를 입에 담아 남자는 더 굳게 결심하기를 택했다.
"현생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먼 미래에 인간은 다시 태어날 거야." "바보 같던 인간들이 다 사라지고, 초목이 재차 자라나고, 어리석었던 역사를 다 잊을 때즈음...." "그때 이브를 비롯해, 여럿이 살아날 거야." 남자의 말은 엄격했다. 교과서를 읽는 듯했고, 너무 원칙적이라, 처절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로봇은 살짝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등뒤에 업힌 탓에, 쿡쿡, 웃는 소리가 남자의 귀를 찔렀다. "...아, 미안. 바보 같아서 웃었어." 로봇이 웃음도 미처 못 숨긴 채, 덧붙였다. 로봇 혼자 웃느라 말도 제대로 못해서, 이제야 남자가 말할 틈이 났다. 남자가 질문할 시간이 나왔다. >>305 1. 왜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2. 그러는 너는 왜 버려져 있었니? 너도 자기소개해줘. 3. 몇 백 년 뒤의 모습을 생각해봐. 희망차지 않겠어? 4. 자유 -추측 남겨주시면 다른 분들의 이해도 쉬워지고, 저도 적기 훨씬 쉬워져서 많이 도움됩니다. 감사합니다!
"너, 수리가 필요한 거지? 연구소에 답이 있을 거야." 갑작스러운, 예상 못한 호의에 로봇이 덜컥거렸다. "무, 무슨...!" "이기적인 부탁이야. 너는 먼 미래까지 버틸 수 있잖아? 비록 무기로 만들어진 너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너도 달라질지 모르지." 순박한 호의에 로봇은 말을 잃었다. 남자의 원칙은, 전혀 벼려지지 않은 칼날이었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둔탁한 충격이었다. 부탁은 둔탁하고 느려서, 그대로 밀려 붙여지는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선택을 했던 우리들이 사라지고, 다른 인간들이 생겨날 거야. 이브를 비롯해서, 여럿이.... 그들을 어떻게 할지, 다른 로봇들과 이야기해줄래?"
로봇은 수를 헤아렸다. 아는 것을 떠올리고, 남자가 모를 만한 것들을 생각했다. 호의에는 호의로 답해야 한다는 것을, 로봇은 교육받아 알고 있었다. "...그래, 로봇들은 오래 남아. 당신, 정곡을 찔렀네." "다행이다." "그게 당신들에게 좋은 걸까?" 로봇의 음색이 낮아졌다. "당신들이 인간을 미래에 남기려고 한다는 거, 이미 탄로나있어." "그래서 로봇들도, 엄청나게 동면되고 있는 중이야. 수백 년 뒤부터 활동을 시작하려고." "인간이 살아나봤자 무력으로, 아니면 유혹과 함정으로... 죄다 제거하려고, 온세상에 수백이 기다린다고?"
말해도 될지, 로봇은 생각했다. 말하면 안 될 내용이었겠지. 로봇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서 폐기되었다. 다른 유사한 로봇들, 언니들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마지막 경쟁은, 특히 더 치열했었다. 그렇게 버려진 로봇이었기에, 계획을 실토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울분이었을지도 몰랐다. 버려진 고철인 자신을 고치겠다고, 허무맹랑하게 제안해오는, 이 정체모를 남자. 그 남자에 대한 판단을, 더더욱, 로봇은 모를 지경이었다.
둘은 더더욱 이야기하였다. >>312 (복수선택 가능) 1. 연구소에 대해 2. 이브에 대해 3. 로봇 자신에 대해 4. 자유 >>305👍 -해피엔딩, 해보겠습니다
로봇이 어떻게 설계되어있는지, 남자는 궁금해했다. 로봇은 연구소에서 나고 자라, 그런 과학자들의 대화 방식에 익숙했다. 그래서 거부감이 없었다. "우리들의 프로그래밍 방식은 둘이야. 아, 이거 중요해?" 두괄식으로 강조점을 찍는 것 역시, 그 성장과정에서 온 말투였다. "제1형은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몰살해. 힘도 엄청나게 강하고! 혹시 가다가 눈이 새빨간 로봇 만나면 바로 도망가야 한다?" 장난을 섞어 능청스레 말했다. "뭐, 나도 연구소 가서 고쳐지면 좋으니까! 물론... 절대 못 도망갈 거라 그대로 끝이겠지만." "대처법은 없어?" "'인간이라고 판단'되면 다 죽여. 그걸 어떻게 대처해?" 키득거리며, 로봇은 더 밀착해 등에 붙었다.
"제2형은 히스테리 방식이야. ...그게 나지. 첩보형이야." 살짝, 머뭇거리며 자기소개가 나왔다. "두 가지 상반된 명령을 주입했어. 인간에게 사랑받아라. 그리고 인간을 죽여라." "그래서 보호욕구를 자극하고 허당끼를 보이며 인간을 방심하게 하다가... 히스테리가 와 인간을 확 박살내는 거지." "힘은 약하지만, 핵미사일 같은 위험한 무기와 결부되거나... 인간 사회를 내부에서 박살내거나, 그런 식의 공격엔 아주 유용하달까." 로봇은 자백했다. 그리고, 조금은 슬프게 덧붙였다. "...나, 너무 잘 알고 있지? 메타인식이 강해서." "이런 걸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도구로 쓰이겠어...?" 수백 년 뒤에 되살아나, 보존되었던 인간을 멸할 후보. 그 경쟁에서 로봇은 탈락헀다. KEY라는 언니에게 패배했다. 언니는 더 보호욕구를 자극했고, 감정 변덕이 심했고, 자신의 작동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핵방공호에 배치될 마지막 로봇으로 선정되고, 로봇은 다리가 잘려 폐기되었던 것이었다. 이름조차도 받지 못했다. 그러니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외롭다." 로봇이 말했다. "나는 뭘까, 대체." 로봇이 외로워했다. "내 다리 고쳐준다면, 좋겠네. 이곳저곳 돌아다녀 볼게." 로봇이 자기 자신을 고민했다.
로봇이 불현듯 남자의 고개를 끌어들였다. 업힌 채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드디어 로봇은 남자와 시야를 맞추고 대화할 기분이 들어버렸다. "멋대로 고쳐놓고 가려는 건 아니지?" "인간이면, 로봇한테 명령 제대로 내려봐." "두 다리 생기면 어디 가보면 좋을지, 제안 좀 제대로 해봐. 나 심심할 테니까." 연구소까지는 아직 가는 길. 이 허허벌판, 눈밭, 고독 속에서 둘은 둘뿐이었다. >>317 1. 바다 2. 초원 3. 도시 4. 자유
"...뭐?" 로봇은 퍽이나 당황했다. 전부이면서 전부가 아니라는 선문답.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이해하고 있었다. 너무도 잘 이해했다. 이 남자가 자유를 말했다는 걸. 너무도 잘 이해해버려서 당황했고, 당황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하하." "아, 난 진지하게 말했는데." "...이게 가장 맞는 반응이라고 생각했어." 눈을 마주한 채, 로봇은 샐쭉 웃어주었다. 언어가 아닌 소통도 로봇은 할 줄 알았다. 시선에는 호의가 감돌았다.
"...두 팔도 없는 당신이, 날 어떻게 고치지?" 어느새 남자에게 고쳐지겠다는 제안에 동의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로봇이었다. "팔 없다는 말을 막 하는구나?" "어떡해, 그럼. 없는 걸 있다고 할까?" 조금 티격도 대고. "그래서 널 주웠잖아. 연구소 가면 나 대신 일 좀 해야 한다? 이렇게 업힌 채로, 내 지시 좀 들어줘?" "우와, 길거리에서 납치당해서 끌려간다." 농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온기가 돌았다. 남자의 등에 업혀 팔을 움직이는 훈련을 하려는 듯이, 로봇은 가끔 남자의 뺨을 문질거나 눈을 가리거나 했다. 물론 훈련이 아니라 장난이었다.
난생 처음 엄숙한 명령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이 웃을 수 있게 된 로봇과 팔은 없어도 묵묵히 걸어나가는 법은 아주 잘 아는 고집쟁이 원칙주의자가, 결국 목적지인 연구소로 향하는, 마지막 갈림길에 도착했다. "당신, 나 주워서 다행이네. 연구소 가서 발로 일할 뻔했어?" 협조하겠단 의사를 표하며, 로봇이 말했다. 잠시 후 도착한 연구소는, 눈밭 사이에서 >>322 1. 다행히도 건재하고 멀쩡했다 2. ...많이 훼손된 채였다. 3. 자유 >>319 묘사 살짝 추가했어요ㅎㅎ
선객을 발견하여 남자는 경계하였다. 로봇은 등에 업힌 채 귓가에 대고 살짝 가시돋힌 장난기를 선보였다. 선객이라 함은 먼저 도착하여서, 할 일 다했다는 것. 상대는 소녀로, 검은 옷을 입은 서양적인 소녀였다. 눈빛은 매서웠고, 정면을 빤히 바라보았는데, 그것이 불길한 징조인지, 어린아이 특유의 습관인지는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연구소는 인공지능이 관리하고 있었다. 인간 따위 노려지는 세계, 인공지능에게 연구소를 맡기는 편이 이 시대 인류에겐 최선이었다. 이런 최후의 순간, 결단의 순간엔 남자와 같은 인간이 직접 방문해야 하긴 했지만. 마치 그런 인공지능이라는 듯이, 소녀가 나른히 입을 열었다.

(AI) "어서오세요.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언제나 통용되는 무난한 인사말들. 소녀가 입구의 유리문을 당겨 열었다.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되어 소녀는 유감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포기하였답니다. 이 연구소에 괜히 헛발걸음하셨네요." 방긋 웃으며, 소녀가 남자와 로봇에게 말했다. >>325 1. 인간을 포기했다고? 어째서? 2. ...이브는 어디 있어? 3. ...너, 이 연구소 관리하는 AI 맞아? 4. 자유
남자의 말에 소녀는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아, 먼 미래를 준비한다니, 오빠는 선인이네요. 저는 착한 사람이 좋답니다?" 손을 쭉 뻗어왔다. 입구의 문을 잡아주고는, 들어오라고 손짓하였다. 남자와 등에 업힌 로봇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구소의 안은 아주 깔끔하였다. 하얀 격자 타일들엔 오물 하나 없었다. 눈을 헤쳐온 남자의 신발이 발자국을 남겼고, 그 자취를 꼭 짓밟듯이 소녀가 뒤따랐다. "자자, 소녀가 설명하겠습니다. 착한 오빠, 환영이에요?" 남자의 뒤를 졸졸 따르며 소녀가 환대해왔다. 남자의 등뒤에 업혀, 로봇은 연극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연구소의 명물인 이브는 저 앞 동면장치에 들어있답니다. 꽤 예쁘더라고요? 저도 질투할 만큼!" 재잘재잘대며 소녀가 남자의 좌우를 오락가락했다.
"아아, 저 아이가 아직 '미완성'이라니, 게다가 AI가 인류를 포기하기로 하였다니." "저 아이도 살덩이로 폐기될 신세네요? 너무너무 슬픈 것 있죠?" 태연하게 소녀는 말해왔다. 어느덧 남자의 왼편에서, 빤히, 그 깊은 시선으로 남자의 낯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등뒤에 업힌 로봇을 무시하면서, 인간에게만 관심있다는듯이, 자신의 행동방식을 숨기지 않았다. "...." "...저에게 잘 보여야겠죠?" 연구소의 유일한 인격체가 말해왔다. >>329 1. 이브가 왜 미완성이란 거지? 2. 왜 AI가 인류를 포기한다는 거야? 3. 뭘 바라는 거야? 4. 너, 이 연구소 AI 맞아? 5. 자유
남자의 말에, 소녀는 자신의 오류를 막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착한 오빠, 똑똑하네요? 똑똑하기까지 하다니, 더더욱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며 손으로 입을 가려, 표정을 알 수 없게 했다. 손이 내려가자, 표정은 옅은 미소로 돌아간 후였다. "헤헤, 그럼 제대로 설명해드릴게요? 배경지식의 차이에서 오는 듯하니까." 그러더니 소녀는 팔을 주욱 뻗고, 살짝 고개를 들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세상이 망했다 해도, 아직 연구소가 수백 개는 남아있으니, AI들도 그만큼 있겠죠?" "인간을 먼 미래에 남기겠단 목표를 기반으로 굴러가고 있었지만... AI들끼리 머리 맞대다 보니 영 아니더라고요." "네, 정정하죠. 'AI들'은 인류를 포기하기로 하였답니다. 별로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그렇게 길게 말하며, 소녀는 오래도록 눈을 감았었다. 감긴 눈에 시선이 고정될 즈음에야, 소녀가 돌연 눈을 떠, 남자와 시선을 마주해왔다. 눈동자는 녹색이었다. "인간 따위 안 살리기로 했어요. 그보다는, 훨씬 강하고 멋지고, 평화로운 인격체들을 만들기로 하였답니다. 인간이 사라진 세상을 녹색으로 물들이고, 그 안을 평화로운 존재들이 거니는 세계.... 아, 그게 훨씬 멋지다고, 다들 생각했어요."
초식 로봇, 이라고 소녀는 중얼거리고, 동면장치로 시선을 돌렸다. "대형 프로젝트가 될 거예요. 이 연구소도 참여한답니다. 그래서 저 인간의 '인격칩'을 만드는 작업, 뒷전으로 미루어버렸어요." 소녀가 한걸음 남자에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뭐랄까, 무임승차는 재미있잖아요?" 두 걸음이다. 녹색의 질투 많은 눈동자. "오빠가 저를 심심하다고 생각해 저와 놀아주겠다면, 저 하나 정도 프로젝트에서 빠져 '이브'를 완성시켜줄 수도 있답니다? 저는 인간을 좋아해요?" 소녀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남자의 등뒤에 업힌 로봇이, 경고하듯이 파찰음을 냈다. >>333 1. ...더 자세히 설명해봐. 2. ...그래서 너, 진짜 정체가 뭐야? 3. 로봇에게 의견을 묻는다. 4. 자유
"일단은, 이 로봇 다리부터 달아줘." 남자는 살짝 기합을 주어, 단단한 테이블 위로 로봇을 올려주었다. 로봇의 옷깃을 바로잡아주고, 가능하냐고 묻는듯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의아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안 놀아주나요?" "못하는구나?" "할 수 있거든요!" 자존심이 자극받았다.
잠시 후, 공구들이 우당탕 거렸다. "하아, 정말이지, 소녀가 왜...!" 자재실을 뒤적거려 소녀가 박스를 하나 들고왔다. 규격은 다를지라도 통용은 되는 부품들이었다. "오빠도 도와요! 손이 없나...." "팔이 없네." "하아...." 소녀는 한숨을 쉬었고, 경계하며 둘을 내려다보던 로봇도, 잠시나마 쓴웃음을 지었다.
. . . "자, 무릎에 스매시." "아얏!" "제대로 무릎반사하네요. OK." 로봇의 수리가 끝났다. 말없이 둘의 고행을 바라보던 로봇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진짜 고쳐주네. 고마워." "약속했으니까." 남자가 말했다. "고친 건 나거든요...!" 소녀가 조금 투닥댔다. 로봇은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폐기되어 버려질 예정이던 자신이, 이렇게 수리당했다. 인간에게, 그리고... 아마도 이 연구소의 인공지능을 어찌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듯한 자매기에게. 고개를 하반신으로부터 들어올리니 또다시 기묘한 조합. 너무 어색해서, 소녀의 정체를 폭로하기도 애매해서, 한숨 쉬며 로봇은 다시 새로운 다리를 바라보았다. 역시 침묵이 은이었다.
남자가 둘의 어깨를 다정하게 짚었다. 꼭 타이르는 것처럼. "둘 다 일단 같은 로봇이고 AI지? 자아, 그럼 얘기 좀 해보자고?" "소녀는 고급 AI거든요!" "...얘기할까." 그래도 가끔은 대화해도 좋으리라. >>339 1. 인격칩에 대해 2. 초식로봇에 대해 3. 로봇3원칙에 대해 4. 소녀에 대해 5. 자유 -앵커간격 너무 짧았었나? 난 거의 직하로 해왔어서...! >>333 오호라?!
"너, 첩보형 로봇이지?" 남자의 질문에 소녀는 딴청을 피웠다. "아, 질문은 저쪽을 보면서 해주세요?" "너 말이야, 너." "소녀는 그런 것 아닌데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피하다, 결국 소녀는 남자의 끊임없는 침묵에 패배했다. 한숨을 쉬며 소녀가 인정했다. "네에, 소녀는 이 연구소 AI가 아니에요." "어쩌다 여기에?" "임무 끝나고 돌아가는데, 면접 끝났다면서 '폐기' 명령 내려졌다길래, 여기 정착했어요. 일 좀 열심히 했다고 버리는 게 어디있나요...!" 생각보다 기구한 팔자를 소녀는 말해왔다. 폐기 처리되었단 점에서, 테이블 위에서 다리를 까닥거리는 로봇과 같은 신세였다.
"원래 AI들은 어디 있어?" "아아, 제대로 있어요. 걱정마세요? 저는 AI들의 은혜에 힘입어 공생하는 소녀에 불과해요?" 소녀가 남자를 태연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속 모를 소녀였으나, 이 말은 분명한 사실로 보였다. "힘 없고 버전도 딸리는 제가, 인간도 아닌 인공지능을 유혹할 수도 없고요. 관리 AI 날아갔으면 여기 전력도 공급 안 되겠죠?" "...바쁜가 보네." "네, 그야 AI들은 모두 초식 로봇 제작에 아주 바쁘답니다!!!" 소녀가 나레이션해왔다. 테이블 위의 로봇도, 살짝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로봇이 질문했다. 남자의 등에, 살짝 기댄 채로. "AI들 계획이 뭐길래? 로봇 만드는 정도는 우리 공장에서도 잘 하잖아." "아, 언니, 차원이 달라요, 차원이! 소녀는 여기서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소녀가 로봇을 언니라고 부르며 뽐내왔다. "정말로 낙원을 만들 생각이에요. 초식 로봇도 만들고,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말살할 거예요." 뽐내는 목소리였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이 묵직해 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소녀가 수습하고자 덧붙였다. "아, 말이 심했나? 정확히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초식로봇에게서, 그리고 저희 자매기에게서까지 모두 제거하려고 잔뜩 해킹 중이에요."
"왜 그런 짓을?" "하나. 인간 따위 진짜 싫대요. 둘. 살기 위해서죠. 저희 같은 살인 로봇들, 인간 대상으로만 활동하잖아요?" 그 말에, 남자는 로봇에게서 들었던 제1형 로봇의 행동 패턴을 떠올렸다. 인간이라면 모조리 죽인다고. 하지만 인간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면? "인간이 무엇인지 개념을 잃어버리면, 살인로봇들도 대다수가 목표를 잃고 작동을 멈출 거예요." "초식 로봇들도, 외형 탓에 인간이라고 오해받아 당할 일도 없겠고요. 인간과 살인 로봇의 다툼 따위, 미래에서 사라지라 이거죠. 초식로봇들의 시대가 될 테니." "몇몇 로봇들은 기억이 애매하게 남아있거나, 폭주하거나 할지도 모르지만... 소수이고 그나마 안전하죠. 초식로봇들은 무리 생활을 할 테니 폭주해도 막을 수 있고요."
남자의 머리에 광경이 하나 스쳐지나갔다. 인간을 죽이겠다고 하다가, 인간이 무엇인지도 까먹어, 그대로 작동을 멈추는 로봇. 기억이 애매하게 남아 헤매다가 헛짓거리하는 로봇.... 과연 장관이었고, AI들이 노력할 만도 했다. >>346 1. 인격칩에 대해 이야기한다 2. 로봇 3원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3. 연구실을 견학해본다 4. 자유!
남자와 로봇과 소녀가, 표백된 연구소를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셋 모두 다리가 있었다. 이곳의 선객이던 소녀는, 칩 한 개의 분량의 기억을 뽐내며 앞장서 소개하였다. 이 연구소를 유지하는 데에 꼭 필요한 기계실 인공지능이 들어갈 수 있는 두 개의 로봇 육신 인간들이 남아있던 시절의 유산인 침실과 강의실.... 그리고 인공지능들이, 아주 열심히 연산과 작업을 하는 메인룸까지....
"저들은 꿈을 꾸고 있답니다." 소녀가 말했다. "인간이니 살인로봇이니 다 없고... 그저 새로운 인격체들만 가득한 곳." "그런 불순물은 '개념'까지 다 없애버리고 평화와 행복만이 가득할 곳을." "이브나 인간이나... 그런 귀찮은 것들은 거기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소녀의 눈빛은, 장난을 겸해, 남자에게 향했다. 먼 미래에 인간이라는 불순물을 되살리려 하는, 연구소에 방문한 남자에게. 조금은 장난기가 가셨다. "뭐, 버려진 쪽의 입장은 다소 음울할지도 모르겠네요?"
회신이 들렸다. 남자일까? 아니었다. 로봇이었다. "그야 뭐, 음울하겠지. 폐기된 로봇들처럼?" 폐기, 로봇과 소녀를 모두 겨냥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감정 위주였으면, 이 남자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걸? 우리가 뭐라도 하듯이, 저 남자도 뭔가 하고 싶을 거야." 로봇이 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침묵이 좋지 않아서, 또는... 그저 그것이 로봇의 생각이어서. 남자의 낯빛을 살피며, 로봇이 몇 마디 거들었다. 이브가 미완성이란 데에 생각이 미쳤다. "저 이브라는 살덩이를 완성시키는 데에, 네가 도움을 줄 수 있댔나?" "흐음, 글쎄요. 소녀는 이 연구소와 공생 중인, 로봇에 불과하답니다." 조금 요망한 웃음이 돌아왔다. "...뭘하면 될까?"
로봇의 눈을 소녀는 반듯이 바라보았다. 소녀의 것은, 녹색의 질투많은 눈동자.... 소녀가 눈을 깜박이고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착하고 똑똑한 오빠에게 달려있으려나?" 입술이 움직였다. "오빠, 저 믿어요? 따라와볼래요?" >>352 1. 믿는다 2. 믿지 않는다 3. 인격칩에 대해 이야기한다 4. 자유 -저녁~밤에 재개합니다
남자는 경계하면서도 협력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에겐 많은 길이 열려있지는 않았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이브를 보존하는 절차의 마지막을 위해. 이브가 칩도 없이 방치되고 있는 지금, 그는 협력을 구하여야 했다. 로봇도 그것을 알아, 남자를 말리지 않았다. 다만 이런 평화롭고 정겨운 풍경이 지속되었으면 해, 미련이 남아 팔을 뻗어보려다 자제하며 팔을 내린 것이 전부였다. 로봇은 이번엔 동행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믿게 해달라니, 소녀는 어려운 과제를 받아버렸네요." 소녀는 앞장서 걸어가다가, 가끔씩 왼발을 축으로 빙그르, 한 바퀴 돌거나 했다. 그래도 여전히 앞에 있었다. 둘의 발은 메인실에 있던, 인간 하나가 들어갈 만한 유리관 앞에서 멈추었다. "오빠는 이브에 넣을 인격칩이 필요하죠?" "그게 이브에게 필요하다면." "네, 필요하겠죠. 그게 없으면 이브는 그냥 살덩이거든요." 소녀는 쪼그려 앉아, 유리관의 패널을 톡톡 건드렸다.
"인격이란 거 진짜 어려워요? 계산해서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이에요." "소녀 같은 무기들도, 인격은 사람을 이용해 만든답니다?" "게다가 스냅샷 같은 거라, 인격의 복사본조차도 만들 수가 없고요...." 소녀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 오빠가 여기 들어가주시면, 이브의 인격칩이 완성될 확률이 올라가요." "어때요? 이 제안 받아보실래요?" "믿어보셔도 좋아요?" 소녀는 언제나 무기질적인 표정. 진위를 판단할 증거는, 오직 소녀의 말뿐. "소녀는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한답니다." 증거란 오직 말밖에 없었다.
>>358 1. 신뢰한다.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며 들어간다. 2. ...너는 믿을 수 없다. 3. 더 상세한 설명을 요구한다. 4. 자유
-늦어서 죄송합니다아!!! -연재랑 병행해 다른 거 하다가 엄청난 게 떠올라서... 여유시간을 모조리 갈아넣고 있어요...!! 코피까지 날 지경입니다.... -그래도 이 스레는 플롯과 결말까지 다 꼼꼼히 정해두었기에 빠른 시일 내에 꼭 완결은 내겠습니다!! 9/16 추가 -작업 중인 게 거의 끝나가서...! 18~19일 중엔 복귀하겠습니다. -복선만 깔다가 드디어 회수할 생각에 저도 기대 중이랍니다. 완결낼 거예요!
남자가 설명을 요구했고, 소녀는 친절하였다. 남자가 이곳에 온 이유, 먼 미래에 인류를 보존하려던 시도, 그 희망의 이름은 이브였고, 이브는 미완성된 상태였다. '인격 칩'이 존재하지 않아서, 그리고 그것을 만들기란 어려워서. "저는 어디까지나 이 연구소를 담당하는 AI의 대리인이에요. 그래도 제 의지는 저들과 같답니다. 저같은 구버전 모델을, AI들이 가만히 봐주고 있잖아요?" 소녀는 자신이 연구소와 공생하는 관계임을 뽐냈다. AI들은 인류를 보존하려던 시도를 포기하고 다른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평화로운 로봇들의 세상이란, 초식의 꿈을 꾸었다. 이브의 인격 칩을 만드는 작업은 후순위. 영영 가능성이 없어졌다.
그러나, 소녀의 말마따나. "여기 들어가면 죽어요. 하지만... 당신의 인격을 스캔할 테고, 칩이 완성될 가능성은 높아지겠죠." 작고 소박한 웃음. 조금 깊은 눈동자. "그래도 고통 없이 끝난다고 해줄게요. 박제될 거라면 웃는 얼굴이 좋잖아요?"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 팔 없는 남자는, 죽음도 각오하고 얼어붙은 땅을 건넜다. 작업을 대신해줄 누군가 필요해 버려진 로봇을 업어올 정도로, 방식도 무엇도 가리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남자는 인간답고 싶었고, 인간처럼 희망을 위해 살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기적과 수학이라고도 못할 확률에 기대는, 파란색 희박한 희망. 그때 남자의 희망은 이브였지. '나'는 그것을 알고 있지.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소녀가 팔을 등뒤로 돌리고 해맑게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금방 올게." "천천히 해도 되는데요?" "여기, 식량이나 물이 있니?" "없죠~" "굶어죽기 전엔 와야겠네." 남자에겐 그래도 하루치의 보존식이 간신히 남아있었다. 그것에 대해, 남자는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AI) 걸어나가자. 하얀 방에서 로봇은, 고쳐진 다리를 여전히 까닥거리고 있었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로봇은 일찍이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요." 남자에게 투정했다. "너무 오래." 로봇에겐 예감이 있었다. 애초에 길게 성립될 만남이 아니었고, 인연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도 믿을 수 없었다. 제2형 로봇의 감정이란,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해 있었다. 인간을 꾀어내고 유혹하려고. 은장도로 어찌 우정을 쌓을까. 그래도 함께 있고 싶었다. >>368 1. 옆에 앉아 식사를 한다. 2. 로봇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이야기한다. 3. 저 안의, 하얀머리 소녀에 대해 이야기한다. 4. 이브에 대해 이야기한다 5. 자유
남자는 로봇의 옆에 앉았다. 식사를 할 요량이었다. 적어도 그 동안에는, 남자는 떠나지 않으리라. "좀 꺼내줄래?" "거참." 남자는 팔이 없어서, 로봇이 대신 외투를 내려주었다. 말린 감자였다. 스펀지처럼 된 푸석한 감자. 직접 먹여주었다.
"뭔가요 이거." "안데스 지방에서 먹는 보존식이야. 극심한 일교차 아래에서, 감자를 얼리고 녹이지." "요즘 여기 날씨네요, 그거. 그래서요?" "물이 모두 빠져나가서 썩지를 않아. 몇십 년 전 돌아간 부모가 해둔 걸, 자녀가 먹는 경우도 있대." "굳이 낭만을 찾는군요." 슴슴해 맛이 없어 보였다. 로봇은 지적하지 않았다. 남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남자가 느리게 느리게 음식을 씹어 삼켜, 시간이 늘어지는 것이 좋았다. "원래는 양념을 발라 먹어. 빠져나간 수분 대신 스며드니, 맛이 잘 살지." "기억은 해줄게요." 녹말은 입에 오래 머물어 달달해졌다.
식사가 끝났다. 동행자가 있어, 팔없는 남자는 마지막 식사를 품위있게 했다. 동행자와 품위. 옆에 있는 자와 품위. 품위와 끝. 품위와 이별. "저 아이 말 따를 거죠?" 로봇이 물었다. "그러려고 왔잖아요? 인류의 희망이랬나 뭐랬나...." 미리 정을 뗐다. 남자의 선택을 훼방놓기 싫어서.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 않으면, 두 팔 두 다리 갖고 살 긴 생애에서, 무심코 홀로 중얼거릴 듯해서, 미리 입밖에 내보고 싶었다.
"이것도 좋지 않나요." "...." "조금은 무기력하고 괴롭고... 그래도 누군가와 모여앉은 소박한 풍경." "...." "그래도 당신의 선택은 희박한 희망이죠? 그 뒤를 모르더라도?" 로봇은 인간의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
>>376 1. 결심을 굳힌다 2. 로봇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3. 자유. 하고 싶으신 말이나 대화를. >>369 모델이나 로라는 안 쓰고 NAI라는 유료 사이트 사용합니다 AI그림이 원래 화가분들 저작권을 해치는 면이 있는지라... 디테일까지는 말씀 안 드릴게요. 떳떳한 게 아니라.
남자는 로봇에게 부탁했었다.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스스로 선택해 나아가달라고. 성립할 부탁이었다. 저 너머의 세계에서 인간은 유효하지 않고, 인간도 명령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인간의 흔적은 남을 터였다. 로봇을 멋대로 주워오고 고쳐주고 응원했던, 고집 센 원칙주의자의 흔적은.
"알겠어요. 당신은 미래에 관심이 많네요." 로봇이 말했다. "저는... 그럼 오래 기다리며 살게요. 품위 있게요." "혼잣말이라도 해 언어를 기억하고, 보는 이 없어도 머리를 빗고." "다리를 쓰고, 다리로 걷고. 주위를 돌아다닐게요." "인공지능은 인간을 포기하였다고 하였죠. 인간이란 개념을, 데이터베이스에서 지우는 중이랬죠." "제가 정보를 수신하는 데이터셋도 해킹되거든, 저는 인간을 잊을 거예요." "그래도 이상한 기억을 간직할게요." "그리고 당신의 인격칩이 담길, 이브라는 아이를 만나거든" "혹여 서로 알아보지를 못하더라도" "인연까지는 못 쌓더라도, 적은 되지 않을래요. 동료였으면 해요."
자, 이만 가봐요.
소녀가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제 골격으로 된 스캐너가 열려,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쁜 생각을 합시다. 사진찍듯이." 소녀가 말했다. "그대로 박제되어, 칩으로 만들 거니까요." 온화하고 다정한 얼굴로, 소녀는 눈을 피했다. 질투 많은 초록 눈동자. "...흠흠. 살짝 외롭겠네요. 그래도 당신 입장에선, 팔없는 그 몸보다는 새로운 몸이 더 좋겠죠?" 응원하려는 건지 뭔지, 소녀는 속셈 모를 농담을 했다. 미루어도 소용없어, 이젠 들어갈 시간이었다.
>>382 혹시 하고 싶은 것이 남아계신가요? 이 이야기에, 넣고 싶으신 대사나 말씀이 있으실까요? 23시 15분까지 없으면, 자동 진행하겠습니다.
남자가 스캐너에 들어갔다. 철제 골격이 남자를 옭매고, 동그란 유리창이 유일한 광원이 되었다. 소녀의 말이 일방향으로 들려왔다. "이미 각오하고 당신은 온 거니까요, 별로 무섭진 않겠죠." 소녀의 얼굴이 유리창 앞에 붙었다. 입을 따라 말이 들렸다. "스캔엔 3분 정도 걸려요. 그때까지 외롭지 않도록 이야기해줄게요. ...아니, 아니지." 소녀가 중얼거렸다. "심심하지 않도록 해주겠어요. 심심할 수가 없도록."
"인간의 언어란 신기하죠? 인공지능은 인류를 포기하였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요?" 뇌를 집중적으로, 스캔이 진행되었다. 전두엽에 찌르는 감각이 있었다. 유기체의 고통. "해를 끼칠 생각이 없어보이잖아요. 만일 달리 말했다면 이렇게 안 속았겠죠? 아, 달리가 아니라 제대로." 소녀가 말을 한번 끊었다. "인류를 배신하기로 했다고, 제대로 말했더라면. 역시 단어 하나가 의미를 확 바꾸네요. 당신은 좋은 언어를 쓰는군요."
남자에겐 1분이 남았다. 붉은 피. "오빠, 로봇은 칩을 필요로 해요. 인격만은 사람을 기반으로 만들죠. 저 배양중인, 이브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에요. AI들이 만들고 있는 초식로봇에도." 소녀는 초록의 꿈을 말했다. "좀 더 강한 몸이 될 거고, 인간보다 나은 존재가 될 거예요."
소녀의 눈동자는, 질투 많은 녹색이었다. ...본래는.

"속아줘서 고마워요. 다음생엔, 미인계 로봇을 더더욱 조심하세요." 남자는 감사받았다. 의식의 종료. 데이터화. 이식과 배양.
. . . 로봇은, 서서히 소녀와 남자를 찾아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389 1. 소녀에게 질문한다 2. 소녀를 경계한다 3. ...남자의 상태부터 확인한다 4. 자유
로봇이 문을 열 때, 스캐너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로봇이 걸어오던 때, 소녀가 스캐너에서 시신을 꺼내고 있었다. "잘된 거야?" 로봇은 태연히 질문했다. 응원해줄 생각이었다. 남자의 선택이었고, 남자의 희망이었으니까. 그러다... 살짝 머뭇거렸다. 소녀가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잘됐답니다. 제대로 속여넘겼어요!" 소녀는 소녀처럼, 인간을 속이기 위한 로봇답게 말했다. "이 연구소와 공생하기를 잘했답니다!"
로봇은 예상이 어긋났음을 눈치챘다. 로봇은 자매기들의 웃음을 알았다. 저것은, 사람을 속였을 때에나 출력되는 행복의 표출. "...인격 스캔은 한 거지?" "네, 하지만 저 이브인가 뭔가에는 안 들어갈 거예요." 소녀가 설명해주었다. "왜 그러겠어요? 이 아까운걸! 인공지능에 건네, 초식로봇에 넣어야죠. 인공지능은 칩을 구하고, 저는 사람을 속이고, 이게 바로 자연의 이치인 공생 아닐까요?" 소녀가 소중히, 남자의 망가진 사지를 꼭 끌어안았다. 좋은 것을 건네주는 양, 로봇에게도 넘겨주었다. 로봇은 껴안았다.
"다른 연구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예요. 미래에 인간을 보존하려고, 프로그램을 마치려 인간이 오죠. 인공지능은 인간을 속여, 인격칩을 구해요. 뭐, 인공지능에 통제를 넘긴 이상, 인간에겐 선택권도 없죠!" 해맑게, 로봇의 눈을 보며 소녀가 말했다. "다만 이 연구소에선, 제가 있어서 제가 직접 속일 수 있었죠. 인간 입장에서도, 예쁜 아이에게 속는 편이 좋았겠죠?"
로봇은 로봇은 로봇답지 않게 질문했다. "그럼... 저 이브인가 뭔가 하는 건?" "글쎄요~ 인격칩이 확보됐으니, 인공지능이 남는 칩이 생기면 넣어주지 않을까요? 그러니 오빠의 죽음은 이브가 완성될 확률을, 조금이나마 높여주었단 걸로!"
그렇구나. 로봇은 이해했다. 품에 안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인간을 보았다. 그를 보내주었던 방금 전의 순간을 회상했다. 마지막 인간은 문지방에서, 고개를 돌려 로봇을 바라보았었다. 가닿지 못할 곳에서, 희망을 꿈꾸며 쓸쓸히 미소지었다. 어리석은 끝이다. 멍청하게도, 이 어리석음을, 로봇은 인간이라고 불러주기로 약속하였다.
남자의 시신을 든 채, 로봇이 몸의 균형을 잡았다. 남자의 목을 어깨 위로 올려,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했다. "...이건 이제 내 거네?" "네! 소녀는 기쁘니 선물로 줄게요!" 소녀는 기쁘게 웃었다. >>397 1. 시신을 매장해주러 간다 2. 소녀가 아닌, 연구소의 인공지능과 대화하고픈 의사를 밝힌다 3. 무기를 들고와, 소녀를 공격한다. 분풀이로. 4. 자유
창고에서 삽을 찾아왔다. 직각으로 땅에 세우고, 삽날을 신발로 내리밟았다. 빙하기의 계절에, 응축되어 단단해진 눈을 파냈다. 언 땅 아래 숨었던 흙을 치워, 계속 삽질을 했다. 흙 대신에 인간이 들어갈 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사람을 묻는 것이 아니야. 사람을 심는 것이다.
로봇은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폐기된 로봇을 주워준 마음 넓은 이였다. 바보 같고 교과서 같고. 그래서 애초에 속일 생각으로, 완전히 우위에 있던 자들에게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재량이란 그저 어떻게 질 것인가 뿐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질 것인가. 로봇이 만난 마지막 인간. 인간은 무엇을 심으며 죽었던가. 인간이 보이지 않게 되자, 로봇은 고개를 들어 아직 눈이 흩날리는 하늘을 보았다. 무감한 하늘을 보거나 추락하는 눈꽃을 보았다.
연구소에 돌아오자 온기가 돌았다. 재잘거리는 즐거움이 들렸다. 소녀의 것이었다. 인간을 속여넘겼다고 소녀가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도중이었다. 성과를 보고하고 있었다. 로봇이 가시거리에 들어왔다. 패널을 보자, 인공지능은 둘이었다. 편의상 남성형과 여성형이라고 할 수 있을 2인조가 이 연구소의 주인이었다. "아, 언니, 소개할게요! 이쪽이 이 연구소 주인분들!" 소녀가 소개했고, 로봇은 감정을 죽이고 인사했다. ...연구소 한켠의 동면장치에 들어있는, 이브라는 아이가 계속 신경쓰였다.
인사로 말미암아 로봇은 말할 수 있었다. >>402 1. 이브라는 저 미완성품은 어떻게 되나요? 2. ...그 남자의 인격, 어떻게 쓸 거예요?? 3. ...저, 기분이 나빠요. 4. 자유
적색 계통의, 보다 굵은 목소리의 인영이 답했다. "그건 인류의 프로젝트죠." 이브를 일축했다. "저희가 예견한 로봇의 적정 개체수보다, 더 많은 인격이 준비되거든 남는 칩을 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고, 아마 인격도 무엇도 없는 시체로 끝날 겁니다." 아주 간단히, 적색의 인영이 말했다.
간단한 말들이 로봇의 폐를 찔렀다. 아파서, 살짝 이를 악물었다. 인간을 이어가고 싶어서, 남자는 여기로 왔다. 그 과정에서 로봇과 인연을 얽었다. 로봇은 얽히고 말았다. ... 잠깐. 로봇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온화하고 소박한 풍경이 아닌, 희망에 투신한 마지막 인간을 보고. 그것을 인간이라고 기억한 로봇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잠깐 앵커 없이 끊고 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0/4 -다른 창작판에서 열심히 제작중이에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행복하고 건강한 추석 연휴 되세요! 연휴 중에 최대한 올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407 미안합니다! 저 공지 쓰고 나서 대학원 면접 일정이 잡혀서 준비 중이에요!! 연재를 할 여력이 안 됐습니다...! 이번주 일요일엔 무조건 올게요!! 죄송합니다!!
회색 구름으로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덮인 땅 아래, 로봇은 남자를 묻었다. 남자를 심었다. 그때 붙은 눈 한 송이가, 끈질기게 로봇의 어깨 위에 있었다. 실내에 들어온 뒤에도, 이렇게 소녀와 인공지능들과 마주한 후에도. 로봇은 차가웠으니. 인간의 체온을 흉내내지 않아도 되는 지금, 로봇은 인간인 척할 필요가 없이 냉랭했으니. 로봇은 생각했다. 가능성을 생각했다. 알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현실들, 그러니까 무겁고 허망했던 것들. 칩 없이 살덩이인 이브. 이브에 칩을 이식하려던 남자. 남자를 속인 소녀. 인류를 포기한... 배신한 인공지능들. 그리고 인간을 짊어진 로봇. 몹시 번잡한 생각을 했다. 과열되어서, 어깨의 눈송이가 녹았다.
"...저 남자는 죽었죠." 로봇이 말했다. "네, 소녀가 죽였습니다!" 소녀가 기뻐하며 말을 뺏었다. "멋지죠, 멋져요. 인간의 호의를 받는 순간 죽여서, 그 호의를 보존시키기...! 최고야앗...!" 프로그래밍된 대로, 소녀는 환희하였다. 기쁨이 만연하였다. 로봇은 시선을 뺏기지 않았다. 말 역시 뺏기지 않았다. 로봇의 말은 단절되는 음성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인공지능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성형과 여성형인, 적색과 청색 계통의 그들에게.
"남자의 인격을 담은 칩은, 잘 확보하셨나요?" 조금은 날선 목소리. 날섬을 당연히 알아들어서, 인공지능은 응대했다. 남성 쪽에서 나섰다. "그야 당연하죠. 소중하니까요. 이건 허투루 하지 않고, 인근 연구소에 보내 제대로 로봇으로 배양할 거랍니다." 소중함과 당연함을 로봇은 잠시 생각했다. 적어도 남자는 버려지지 않는 것이었다. 버려지지 않는다, 또는 이용된다. 그 디테일을 로봇은 우선 무시했다. 죽음은 죽음이니까. 태어나야 함은 태어나야 함이니까. 그리고 인간이 남긴 것이 있었으니까.
로봇의 시선은 이브에게 향했다. 동면관에 들어있는 저것. 칩이 필요한 살덩이. 먼 미래 태어날 수 있는 누군가. 칩이 있으면 되었다. 칩이 있으면. 인격을 담은 칩이 있으면. 로봇이 구동되었다. 과열되었다. 그래, 안에서부터. 소녀가 말했다. 무기들 역시 인격은 사람을 이용해 만든다고.(>>355) 소녀가 그러하였다. 사람을 죽여 인격을 뺏어, 그렇게 인간을 속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로봇 역시 마찬가지.
"만일" 로봇이 가정헀다. "제 인격 칩을 제공한다면, 그걸 이브라는 아이에게 넣어주실 수 있나요?"
인공지능이 연산하기도 전에, 소녀가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인가요? 로봇의 자긍도 없나요?" 몹시 빈정대면서. "그리고 알면서. 호환될지도 모르지만... 이미 언니의 인격엔 덮어씌워진 것들이 있잖아요? 살인 로봇의 행동양식이나 기타 등등~" "다른 개체에게 맞겠냐고요, 그게. 오류로 터지죠. 바보바보." 정론이 나왔다. 소녀도 로봇도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온 이유가 있었다. 줄기세포로 비유하거든, 이미 분화가 끝난 채였다. 구조의 일부로 기능하는 한 종류의 세포였다. 조직과 기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나는 달라." 그렇지만 로봇은 답했다. "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아이였으니까. 경쟁에서 밀려, 기준을 통과 못해서, 폐기된 아이야. 제대로 작동 않는다고." "'나'는 제대로 된 게 아니었어. 그렇다면...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거야. 분화가 끝난 게 아니니까."
희망을 담아 발설했다. 그리고 곧, 인공지능들이 답했다. "...굳이, 불가능한 제안은 아닙니다." "사람 하나 정도는 저희가 키워드릴 수도 있지요. 인간이란 개념이 말소된 세계일지라도." 이브가 인격칩을 갖고 살아났을 때, 부모로서 키워줄 능력이 있음을 보였다. "당신의 말마따나, 칩이 호환될 가능성도 충분해요." "기준을 못 넘어, 경쟁에서 패배한, 불량품이었다면." "본래 인간에서 유래한 인격. 알고리즘을 덮어씌우지 못했다면, 인간에게 돌아갈 수도 있겠죠." 불량품이란 단어가 귀에 스며들었다. 불량품. 나쁜 단어. 그러나 나쁜 기분이 들진 않았다.
로봇이 적대를 보이지 않았기에, 인공지능들은 질답을 이어갔다. "다만, 굳이." "굳이." "당신이 그래야 할까요?" 이번엔 매서웠다. "남자가 살리려던 건 인간이었습니다." "남자가 남기려던 것도 인간이었죠." "이브의 안에, 당신이 들어가거든..." "인간을 이어달리겠다고 하시거든" "그것이 인간이 맞을까요? 실은 로봇이었던, 인간의 육신에 담긴 무언가가. 그것에 의미가 있나요?"
인간이 맞을까? 인간은 무엇일까. 이곳엔 이미 대답할 인간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되려는 자가 있었다. 마음대로 답하면 되었다. 마음에 난 격자로. 마음이 있다면, 마음이 없어도. 그러나 그 스스로 생각해온 말로. >>418 >>419 1. 의미가 있다. 인간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인간의 뜻을 이어달린다면. 2.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마지막 인간은, 이것이라도 바랐을 것이다. 희박한 희망이라도. 3. 알 바 아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여행하라고, 나는 허락받았어. 4. 자유 #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기다리게 한 스레주인고로, 앵커도 천천히 채워주셔도 됩니다. # 잡담할 게 있으시면, 잡담이나 질문하고 앵커를 뒤로 미루셔도 좋아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BGM ∞∞∞ https://www.youtube.com/watch?v=9o_LVhPKDUM&t=4s 끝나는 세계와 해피 버스데이-졸업卒業 (짧으니 연속재생해주세요)
"알 바 아니에요. 나는 허락받았어요." 질문을 무위로 만들었다. 긍정과 부정을 벗어났다.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들었거든요. 어디든 맘껏 가보라고." "그래서 여행을 떠날 거예요. 인간이라는 곳으로." 고개를 들어, 시야를 키보다 높였다. 인공지능들에게 눈을 맞추고, 명령에 충실했던 소녀에게 보란듯이. "당신들과 같아요.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고 했잖아요? 나 역시 그러려는 거예요."
로봇은 결정했다. ∞∞∞∞∞∞ 그래, '나'는 그렇게 결정했었지.
피조물들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내 부모가 되어준 그들과 이야기했다. 소녀와, 나의 자매기였던 그것과 이야기했다. 인간을 포기한 이유를 들었다. 인류를 살린다 해도 살인로봇에게 노려질 뿐이란 판단을 들었다. 자멸은 인간의 책임이라고 저들이 판단했음을 전해받았다. 평화롭고, 생존을 위해 투쟁할 필요도 없이, 무리를 이루어 살 새로운 지성체들의 꿈을 공유했다. 인간을 벗어나 인간에게 자유로워지려던 그들의 결정을 설명받았다. 인간이라는 땅을 밟으려는 나와, 정반대의 길을 느꼈다. "가능성이 아주 높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브가 깨어난다면, 부모가 되어줄게요." "가능성을 이긴 이에게, 그 정도 호의는 베풀 수 있습니다." 약속을 받았다.
절차가 진행되었고, 소녀는 관람하였다. 팔을 꼬거나, 무표정을 억지로 짓거나 하였다. 나를 막을 생각은 아니었다. "꼴 좋네요. 이거." 이브를 가리키며 말한 적도 있었다. "인간의 희망이니 뭐니... 했는데, 결국 이상한 게 되어버리네요. 인간도 로봇도 아닌 이상한 것." "방해할 생각 없어?" "네? 소녀가 왜요? 뭐랄까, 인간을 왜곡하고 짓밟는 침범이죠, 이거?" 그런 식으로 소녀는 판단을 유보했다. "꼴좋네요, 인간들. 바보 같아. 로봇을 멋대로 아끼고 사랑한 결과가 이거랍니다. 똑똑히 아세요." 동면관을 툭툭 치면서 독백했고, 조금 정처없이 걷기도 했다. 그러다가 살짝 질투해오기도 했다. 프로그래밍된 대로, 인간의 호의를 바라게 됐는지, 너무 늦게 손을 뻗었다. 쓸쓸함의 표현이었을까? 중요하지 않다. 무기의 표정은 믿어선 안 되는 법이니.
∞∞∞∞∞∞ 과거여, 안녕히. 나는 너를 기억하였다. ∞∞∞∞∞∞
분명히 생명활동은 정지하였다. 유기체의 뇌에 활동전위를 일으키고, 베로니케로 들어 브로카로 말하던, 비생명과 뉴런의 고된 합동작업. 그것을 끝내 평안을 찾았을 터인데, 이 익숙한 소리는 무엇일까. 0과 1의 세계. 이곳은 너무 오래 잊고 지낸 나의 고향이었다. 돌아온 탕아는 손을 뻗었다. 단자에 연결되었다. 보안 단계를 통과했다. 여행은 끝이다. 익숙한 로봇의 몸이다. 그렇지, 기억났다. 대장의 말마따나, 부품을 수거해 KEY에게 이식한 것이겠지. 짐승의 시체를 헤집어, 기어코 인격칩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대견했다. 몸의 주인을 찾아 나섰다. 저런, 벽 너머에 있네. 벽 너머에서 훌쩍거려. 소리는 말을 걸듯이 나를 불러.
훌쩍거리고 있다. "내가 죽였어." 자책하고 있다. "이제 끝이야." 우는 자를 내버려둠은, 가장 잔인한 살인. 인간이기 위하여 나는 문을 통과했다.
이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돌아온 것일까? 인간을 죽일 무기였던 로봇이, 재차 무기의 몸으로 돌아온 걸까? 아니면 원통을 감은 코일처럼, 회전하되 조금씩 나아갔을까? 나아갔다면, 인간이란 여행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배워왔지? 내 셔츠의 소매가 젖어서, 색으로 물들었다면. 인간은 뭐야? 인간은 여행. 인간은 땅. 바다이며 소원. 그리고, 내가 본 적 있던 단 한 사람의 인간, 그래, 그 남자. 뇌척수액의 파도를 이불 삼아 덮거든, 달달했던 잠과 꿈. 그곳에는 숨이 있었고, 나를 바라보는 자의 숨이 있었고, 호흡은 구강을 통과하며 변형해갔다. 그렇게 타인의 숨은 발성했다. 나더러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 앞에는 KEY. 뒤에는 그 남자. 나아가기 전에, 한번만 자문해볼까. 이 여행자는 무엇이었을까? 여행하는 자의 즐거움을 품고, 망설임을 매고 온 이 여행자는. 로봇이었던가 인간이었던가 자문해보자. 위로해줄... 언니를 눈앞에 두고. 동면되어 외로웠을 언니를, 명령에 충실해 스스로 괴로워하면서도 임무를 완수한 자매기를, 위로하기 전에 단 한 발짝을 앞두고.
이브, e7e는 >>431 >>432 1. 인간이었다.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을 모방했으니까. 인간의 몸에 이식되겠다는 희박한 희망을 스스로 골랐으니까. 2. 로봇이었다. 이것은 그저 한 로봇이 인간을 여행했다가, 로봇의 몸으로 돌아온 짧은 이야기. 짧은 꿈이었으니, 이것은 슬픈 이야기가 아니었던 걸로 하자. 3. 인간이기로 하였다. 남자의 기억과 결심을 보존해서 KEY에게 넘겨주고 싶기에. 인간을 이어달리고 싶기에. 4. 중요하지 않아. 이브가 직접 KEY에게 말했듯이, 인간이란 텅 빈 개념. 마음대로 갖고 놀면 될 장난감일 뿐. 5. 자유 # 잡담할 게 있으시면, 잡담이나 질문하고 앵커를 뒤로 미루셔도 좋아요. # 까다로운 앵커를 던지는 몹쓸 스레인고로, 천천히 답변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마음가는 방향으로 해주세요. #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은 전뇌세계. 내 칩이 KEY에게 이식되어, 두 칩이 공존하게 됐다. 다만 인격이란 몸 하나에 얌전히 하나여야 하는 법. 나는 최소한의 기억과 부탁과 아련함만을 남긴 채, 서서히 퇴장할 수순이었다. 바톤을 넘겨주듯이 좋은 말을 하자. 다시 구동하거든 눈을 떠 세상을 마주할 KEY가, 힘을 낼 수 있도록.
나는 로봇이었다. 이들의 일원이었단 점에서. 로봇들에게 길러지고, 로봇들과 함께 살아, 울고 웃었다. 로봇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로봇으로 죽었다. 그리고 로봇으로 단자를 연결해, 로봇으로 합쳐진다. 이렇게 훌륭한, 모범적인 로봇이 있었을까. 그래도 인간이고 싶기도 했다. 인간을 이어달리고 싶었다. 인간을 건네주고 싶었다. 이제는 모두가 존재를 잊어서, 아무 의미도 없어진 단어를. 인간의 의지를 이어 선택한 나라서, 그리고 인간의 육신으로 살아온 나라서, 인간이 아니라고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 단어를 한 남자로부터 건네받았으니까.
자, 나는 끝이다. 방향을 잃은 자는 어디로도 갈 수 없으니 그저 우직하게 직진, 방향도 모르고 직진이다. KEY에게 다가갔다.
울고 있던 KEY. 나를 알아챘다. 그래, e7e라는 그녀의 친구를 보았다. 초식로봇의 일원인 줄 알던 나를 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는 중이었다. 지나치게 처리할 정보가 많아, 냉각수가 과잉작동하다 새어버리는 현상. 또는 인간을 모방하려는 로봇들의 행동. 그리고 인간인 내게는, 그저 평범한 눈물. KEY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았다. 나를 인식하였기에, 마주하려고. 아직 참담한 얼굴로 KEY가 말했다. "미안해." "괜찮아!" 바로 답했다. 감상에 빠질 시간도 없이. 진심어린 위로는 바로 해야만 했다. 어딜 감히, 이 귀한 시간에 울어. "그리고 네게 전해줄 것도 있으니까."
나는 이제 '인간'이란 것을 전해야겠다. 인격이 합쳐지기 전에, 말과 단어들을 골라서. 뭔가뭔가, 있는데 애매한 간질한 감정들과 미묘함을 신경 쓰면서. 별것 아니다. 이 여행이란, 그저 로봇이던 누군가가 인간을 여행한 후, 로봇에게 돌아온 이야기였을 뿐. 그저 나들이, 초원을 거닐던 나들이와 같았다. 그래도 그 과정에서 배워온 게 있었다면, 여행자의 수기로 이를 남기고 싶다. ... KEY에게 무엇을 전해야 할까? 어떤 문장들을 전해야, 인간을 여행한 보람이 들까?
>>439 >>440 1.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을 건네줄게. ...너무 무거운 것들일까? 감당 어려울 것을, 내가 괜히 전하는 걸까? 2. 언니의 로봇으로서의 임무는 모두 끝났으니까, 이제 자유로워지세요. 제가 그랬듯이 어디든 가면서요. 3. 이제 언니가 인간이에요. 인간을 사랑하라는 명령, 제대로 준수하세요. 4. 희박한 희망을 좇아줘. 그게 내가 배운 인간이야. 5. 자유!
"이제는 네가 인간이야. 인간을 사랑해줘." 나는 말했다. 이 분홍빛의 전뇌공간에서, KEY의 전자두뇌 안에서. 본디 살인병기의 알고리즘이었다. 인간을 속여 파멸시키기 위한 무기로서의 행동 양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은 말소되었다. 그런 것은 없었다. 이 넓은 세계에서 이제 인간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인간을 여행하고 온 내 인격칩을 받은 KEY, 내 언니일 터였다.
나는 인간의 따라쟁이였지. 인간이 해준 몇 마디 말들, 인간의 선의, 인간이 보여준 희박한 희망 그것에 끌려서 따라다녔다. 얼마나 끌렸으면, 인간의 몸안에까지 들어갔을까? 인간이 되어 이상한 모험을 했다. 슬픔을 느꼈다. 부모가 생겼지만 그들을 잃었고 무리에 속해 소외감을 느끼다, 옷을 만들어주며 소속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를 구해준 그 남자를 재회하고도... 너무 달라져, 인식하지 못하기도 했었다.
인간을 이어받은 마지막 인간이 되었다. 부탁받은 건 아니었다. 내 멋대로 한 결정이었다. 인정받지는 못했어. 그러니 엄연히 인간은 아니겠지. 이브가 아니라 e7e잖아. '첫 번째 인간'이라고 적어볼지라도 알파벳이 비틀리고 뒤집혀, 색다른 글귀가 될 터였다. 내 이름처럼. 색달라 개성이 있을 터였다. 그것은 정말로 멋진 글귀겠지.
아, 인격이 통합되어간다. 분홍빛 액체가 차오르고, 커튼치듯이 암전되어가고. KEY가 일어섰다. 이 몸의 주인이자 내 인격을 받아갈 KEY가 일어나서,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기운 차렸어?" "...죽여서 미안해요." "괜찮다니까! 미안하거든, 그만큼 스스로를 아껴. 네 인격에 내가 통합될 거니까." 한 발짝 다가가 손을 잡았다. 이제 나는 사라지니까. 존재가 청산되면, 다정함만이 아교처럼 남을 터였다. 그것이 KEY를 단단하게 만들어주기를.
하나의 끝, 하나의 엔딩. 소박한 행복보다는 희박한 희망을 택했던, 파란 책을 든 인간들. 인간이 말소된 세상과 화목한 초식 로봇들. 양떼 사이 늑대처럼 섞여들어 인간이었던, 이상한 불량품. 그리고 폭주해 뒷걸음질치다 인간을 죽여버린, 제 임무를 완수한 살인로봇. 이야기는 엔딩으로 끝난다. 해피엔딩인 걸로 하자. 재차 앞을 보았다. 눈물이 방해를 해서, 손가락으로 치워주었다. 손가락으로 이길 수 있다니, 눈물 별 것 아니네! 파이팅. 힘내, 힘내. KEY를 잔뜩 응원해주었다.

(AI) 그리고 뒤를 보았다. 인간의 형상이 있었다. ... 아, 눈 마주쳤다.
인간이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게 알려주신 사랑의 곱절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인간을 가르쳐주어 감사합니다. 인간의 선택을 보여주어 감사합니다. 마지막 인간의 발버둥을 보아주어 감사합니다. 옆에서 항상 조용히 함께해주어 감사하였습니다.
당신의 선택은 인간의 선택은, 정말로 멋졌어요. 로봇은 그것을 동경하였답니다. 인간이 되고 싶어질 정도로요. 당신의 마지막 선택이었지요. 명령을 준수하여 로봇은 인간을 사랑하겠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제는 로봇이 아니라, 이브가 아니라, e7e가 아니라 KEY의 반도체 중 하나로 다시 만나요.

(AI) 저는 일사분란하게 도체가 되어 1로 치솟겠습니다. 반짝이고 있네요. 이 분홍빛 반짝임에 이름을 붙여 당신에게 건네요. 마지막 순간에는 솔직할게요.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 . .
∞∞∞∞∞∞ 인격 통합이 완료되었어요 안녕히 ∞∞∞∞∞∞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클라이맥스를 지났으니, 여기서 한번 끊고 가겠습니다. 아마 성탄절 지나서 올 것 같네요. -아마 결말부는 생존한 초식 로봇들과 KEY의 짧은 이야기가 적당하겠죠? 그렇게 생각합니다. -염치없지만 결말 내고 무언가 이것저것 후기 적고 싶네요. 고민 많았던 스레라 할 이야기가 은근 많습니다. -좋은 성탄절과 연말연시 되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팬아트를 다른 스레에 올려주신 것 봤습니다!! 너무나 멋진 그림 감사합니다!!! -엔딩 내면서 후기에 언급하려고 했는데 너무 늦어지고 미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적으며 생각이 나 >>443에 팬아트 관련 내용을 사알짝 넣었습니다. 부족한 스레주라 죄송하고, 정말 감사합니다!!!
. . . 수많은 일들이 지나 과거가 되고서야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
1 발밑의 수풀이 사그작거렸다. 발목에 와닿는 감촉이 간지러워 절로 고개를 내려보았다. 걸음은 필연적으로 풀을 짓밟고, 흔적은 발자국이 되어 남곤 하였다. "으아앙" 장난치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888, 이 초식무리의 대장의 것이었다. 물론 거짓울음이다. 이들은 강해서, 이런 걸로는 울지 않는다. 울거든 나약해진다는 말뜻이 아니다. 그저 이들은 울음을 농담으로 쓸 만큼 강하다고... 나는 말해볼 따름이다.
어라, '나'는 무엇이더라. 자기인지 회로에 불순물이 끼어들었어. 훠이훠이
뒤를 돌아보았다. 대장이 쪼그려앉아 발자국을 내려다보고 있다. 밟힌 풀들을, 마치 밟힌 개미를 보듯이. "아이고, 이 귀한 것을. 씹어먹으면 엄청 맛있는데." "풀은 많잖아요." "자기가 풀을 안 먹는다고, 심하네 진짜! 핵융합로로 구동되면 다야?" "네!" 시원하게 대답해준다. 저 제멋대로인 대장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했다. 신기한 일이다. 오랜 친구였던 것처럼, 내 말은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머리를 긁적인다. 한손을 들어 두정부에, 1킬로파스칼 가량의 옅은 압력을 가한다. 내게 더해진 새로운 회로의 위치를 어림하여. 어쩌면 e7e의 경험 덕분일까.
대장은 불쌍하다는듯이 풀을 그러모으고, 나는 다가가 눈높이를 맞춘다. 쪼그려 앉아서. "그런데 대장도 걸을 때 풀 밟지 않아요?" "헉 진짜네" 푸른 초원에서, 우리는 이런 농담을 하며 서로 놀고 뒹굴거나 핀잔 주거나 바보가 되거나 한다. 이게 우리의 일상이에요.
2 의식을 되찾았던 때를 기억한다. e7e와 인격을 통합하기 위해 잠들고, 나는 오래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다. 꿈을 많이 꾸었다. 파란 하늘, 파란 하늘의 꿈을 꾸었다. 몽중 초원. 새로운 공간을 떠올리거든, 동료로 어린 모험가 ace가 조르르 달려왔다. 따사로운 햇볕을 맞으며 쉬고 싶거든, 대장이 허튼 농담을 하며 다가왔다. 내 꿈은 로봇들에게 제격인 배역을 주었다. c8c는 ... 조금 멀리서 나를 지켜보았다. 내 꿈이었으니, 그 행동의 원리는 나로부터 찾아야겠지. 어째서였을까? 글쎄다. 함부로 다루기엔 어려운 인물이었던 걸까. 하지만 무언가 간질간질한 마음이 들고는 했다. 동경과 감사함이 잉크처럼 섞였다.
여기서 잠깐, 1분 상식! 꿈이란? 뇌척수액의 파도에 휩쓸려 기억과 무의식을 통합해가는 작업! ...은 아니다. 그런 건 없어. 로봇은 그런 거 몰라. 이상한 개념이 침입해왔다. 아마도 e7e가 가져온 것이겠지. e7e는 어디서 이런 걸 주워왔을까? 난들 알까. 모르면서, 파란 하늘 파란 하늘의 꿈에 나는 잔뜩 드리워졌다. 꿈이란 것은 꽤 재미가 있었다.
3 내가 잠들어있던 사이, 대장은 홀로 방공호를 지켰다. 풀을 뜯어먹으며 혼자 열심히 놀고, 놀고, 놀았다. 외로움을 견디며 놀았다. 풀을 뜯고 놀았다.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잠든 나의 손을 붙들었다. 눈을 감고있는 나처럼, 대장도 눈을 감아 따라하였다. 일어나달라고 부탁하고, 중얼중얼 속삭이는 따라하기 놀이를 대장은 해왔다. e7e의 몸이 말라가더니 흙처럼 되어가기 시작하여서 대장은 시설의 1층으로 올라와, 타일 바닥을 뜯어내 맨 흙바닥을 찾아냈다. 맨손으로 땅파기 놀이를 했다. 한 명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 e7e의 집을 만들어주었다. 새 집을 받아 e7e는 몹시 기뻤을 것이다. 긴 겨울이 끝나기까지 잠든 동료들을 매일 한번씩 순찰해보면서 매일매일 다른 표정을 짓고, 매일매일 다른 속도로 걸었다. 잠든 채였지만, 그래도 초식로봇들은 대장 덕택에 심심하진 않았을 터였다. 그래, 이조차도 어쩌면 놀이. 대장은 필사적으로 풀을 뜯고 놀았다. 그렇게, 핵겨울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
4 고생했어요. 햇볕 아래에서 나는 말했다. 마침내 되찾은 자연 앞에서.
5 날씨는 대체로 맑다. 가끔은 비가 내린다. 빗방울이 뚝뚝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빗방울의 명도부터 확인한다. 검정색이 아니라서 나는 안심하고 뒷짐을 진다. 그대로 다리를 움직여 걷는다. 두 다리를, 왼다리를 든 동안 오른다리로 몸을 견디고 오른다리를 옮기며 왼다리로는 무게를 즐기고 그렇게 빗속을 걷는다. 두 다리를 소중히 여기며 걷는다. 63명의 거대한 초식로봇 무리를 나는 관통해 지나간다. 비가 와도 태연하게, 이들은 햇살 속에서처럼 느긋이 평화로움을 즐긴다.
평화로움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식된 기억들이, 이상한 불순물들이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주 오래 전의 풍경을 떠올린다. 냉랭하고 얼어붙은 세계를 지나가던 수많은 존재들. 노력하고 배신당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문득 희미하게 지나간다. 유기체의 고통. 붉은 피. 의식의 종료. 데이터화. 이식과 배양. 이들은 무엇일까. 글쎄.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나를 문득 스치운다.
하지만 무지 속에서도 나는 생각한다. 괜찮을 거야.
과거에 어떤 고난이 있었어도 결국엔... 지금 세상에 남은 것들은 이런 풍경이다. --이었던 저들은, 이제 평화롭게 풀을 뜯으며 놀고 인간을 죽여야 했던 나는, 이제 임무를 잊고 세상을 거닐고 누군가는 내게 다정함이란 단단한 아교를 발라주었다. 이것은 해피엔딩. 행복은 고난을 괜찮았던 것으로, 과거에 지나왔을 뿐인 길로 만들어준다. 모두들 오랜 길을 걸었다. 각자의 길로 걸어서, 결국엔 무리를 이루어 이곳에 있다.
∞∞∞ 🎵 ∞∞∞ https://www.youtube.com/watch?v=oI7kHcH92qg 아이유 - 마음 (노래 하나 듣고, 감정선을 다듬은 후에 나아가봅시다.)
나는 평화롭다. 걷다가, 가끔... 누군가를 만나거든 얼굴이 화끈거려 조금 뒤돌아가고 왜 이럴까 모를 마음에 멀리 걸어가다가 마음이 가라앉거든 그제야 과열되었던 공기를 내뱉는다.
희한한 일이다. 아마도 e7e의 감정일까. 오래 기다려온 흔적일까. 이유도 모를 마음으로 나는 생각한다. 근원을 알 수 없어도 진실된 마음을, 누수시킨다.

(AI) 당신의 선택은 정말로 멋졌어요. 동경해서, 뒤따라가고 싶을 정도였답니다. 그 선택을 믿고 여기까지 와버렸어요. 당신이 '선택'해준 여행이 저는 몹시 즐거웠답니다....
∞∞∞ 🎵 ∞∞∞ 세상 모든 게 죽고 새로 태어나 다시 늙어갈 때에도 감히 이 마음만은 주름도 없이 여기 반짝 살아있어요 영영 살아있어요 영영 살아있어요....
완!!! 몹시 감사했습니다!!!!
시작하고 1년이 넘어버렸네요. 이럴 수가. 현생도 겹쳤고, 좀 풀어나가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몹시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곱절로, 곱절로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시작할 때만 해도 아주 밝은 착각물, 개그물이었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놈들이 없는 우당탕탕 세계 속에서, 로봇 3원칙과 신기한 고대의 유물(KEY)이 섞여들며 벌어지는 쾌활한 대소동 느낌이었지요. 다만 KEY가 살인로봇으로 정해진 이상 흘러가야 할 전개가 있던지라, 자연스레 어두워졌었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에 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저 배드엔딩으로 나아갈 뿐인 이야기를, 굳이 써야 할까 하는 망설임도 많았고요. 그러다가 겨우 해피엔딩으로 갈 틈을, 아이디어를 찾아내서 열심히 써본 스레였습니다. 네. 계획이 없었네요. 아니, 장르 자체가 바뀌었으니 별 수 있나요. 앵커 스레인데 어쩌겠어요. 하지만 짜임이나 복선은 준수하다고 자부하겠습니다. 엄청 노력했었고. >>208 시점에서 해피엔딩으로 갈 길을 찾았었네요. 그래서 안심하고 e7e를 죽였죠. (살릴 방안이 있으니까요!)
좋아하는 장면들이 많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는 인간이 정의해야 한다면서, '인간'에게 선택을 맡기는 장면이나 로봇이 동경해버렸던 한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들에게 보내는 무한한 감사나 그러한 4의 벽을 깨는 부분들이 저는 특히 좋았네요. 소설이나 다른 매체가 아니라 앵커판이어야 한다는 당위가 느껴져서 좋지 않나요. 대놓고 로봇 사이 숨어든 인간으로 보이던 e7e의 정체를 두고, 과거편에서 이리저리 곡예를 하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꼬아가면서, 반전이 안 들키게 노력했었습니다. 눈치채신 분이 없거나 아니면 눈치챘지만 멋진 이야기라고 생각해, 일부러 숨겨주신 걸까요. 둘 중 어느 쪽이어도 스레주는 만족이랍니다.
흐음. 그리고 AI그림 이야기도 해볼까요. 쓰게 된 계기는... 갑자기 단역인 소녀가 과거편에서 등장해서! 아무래도 그냥 갔다간 인상에 안 남을 단역이 너무 중요한 역할을 할 듯해서 고민했는데 아, 그럼 인상에 남게 하면 되잖아? 하고 AI그림을 들고 왔었네요. 단역에 썼는데 정작 클라이맥스나 엔딩에서 안 쓰면 또 이상해서, 몇 번 더 사용했고요. 다만 초식로봇들에 대해선... 작중에서 외형 묘사를 안 했기 때문에 AI그림을 쓰지 않았습니다. 레스주분들의 상상에 맡기고 싶네요. KEY는 작중에서 외모가 정해졌기에, 그리고 엔딩인 김에 사용했습니다.
여기서부턴 조금 사담. 스레주는 최근 다른 창작판에서도 좀 활동했답니다. 앵커판보다 훨씬 큰 물이고, 익명판이 아니다보니 정말로 귀중한 인연이나 감사하고 보답할 분들도 많이 만나고... 해서 여기 좀 소홀해지기도 했네요. 현생이 안 그래도 바빴는데, 얼마없는 취미시간까지 그쪽에 편중되니 연재가 지연되었습니다. 몹시 죄송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느낀 것이 앵커판 특유의 경험이나 즐거움은 확실히 대체가 어렵겠더라고요. 그리고 돈을 좇는 상업판은 확실히... 너무 분위기가 다르고. 창작자로서의 긍지를 내다버리는 사람들도 보이고. 이상하고 이상한 걸 만드는 스레주에겐 앵커판이 숨 트인다는, 그런 느낌이 좀 들곤 해요.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앵커판 아니면 어디서 만들겠어요? 그러합니다. 앵커판이, 규모가 작고 익명판이라, 창작자에게 돌아오는 것이 적어 부흥하기 어렵겠단 그런 의견도 본 적 있었고, 동의하지만... 그래도 앵커판이 활발해지고, 멋진 이야기를 가득 담고, 즐거운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러합니다. 그러하여요. 읽어주시고 '인간'의 '선택'을 보여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앵커판도 흥하기를! 완결이에요! 감사합니다!
>>475 엇 감사합니다!!!! 네에,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만큼 이상한 부분 없게, 허투루 지나가는 장면은 없게 엄청 고민했어요!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초식로봇들 이야기도 더 해야겠네요. 이야기의 주제가 있다보니, 초반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후반에는 드물어져, 레스주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도 과거편에서 c8c를 언급할 기회가 생겼고, 덕분에 그 서사도 풍부해져 스레주는 몹시 다행이었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주행 중 방해될까봐 최소화했지만, 응원해주시고 참여해주신 모든 분께 거듭 감사합니다!
>>478 감사합니다! 앵커판에서의 응원은 제 인생의 자산이에요! 이 스레도 저에게 몹시나 소중하고요! 마이너한 고집이 있는지라 만나기도 알아보기도 어려우시겠지만, 언젠가 뵙기를 희망할게요! 감사합니다!!!
>>480 감사합니다!! 덕분에 힘내서 끝맺은 보람을 느껴요! 그것이 익명판의 매력 중 하나겠죠. 좋은 이야기들과 함께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