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18/12/23 08:27:57 ID : QoGnyMja5U4 1
뭐 좀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다른 판에는 딱히 어울리지 않는것 같아서 그냥 여기다 말할게. 어쩌자는건 아니고 그냥 생각나서 적어봐. 제목에서처럼 난 수의사였어. 과거형이지. 난 어릴때부터 고양이를 키웠고, 동물이 너무 좋아서 아픈 아이들을 치료해주고 싶다는 명목하나로 수의사까지 된거지. 아픈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거 같았지만 나 손으로 치료해주고 돌봐준뒤에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는 애들을 보는게 정말 내 삶의 원동력이었어. 진짜 그 광경을 보려고 살아가는 정도일만큼. 버려지고 아픈 애들을 구조해서 치료해주고 주인을 찾아주기도 했어. 잘 안될때도 있었지만 많이들 주인을 만나서 떠나갔지. 물론 좋은 주인을 만나기는 한건지, 혹시 또 버려져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건 아닌지 무척이나 걱정했지만 후에 아이가 아프다며 헐레벌떡 뛰어오던 주인분을 보고 안심하던 때도 있었지. 하지만 정말 힘들었던건.... 안락사였어. 알다싶이 한달동안 주인을 찾지 못한 애들은 안락사를 당하게 돼. 처음엔 한마리 한마리 안락사 시킬때마다 정말 많이 사과하면서 울었어. 가끔 차마 안락사를 시키지 못하고 선생님께 안락사를 시켰다고 정보를 처리해놓고는 몰래 집에 데려와서 따로 주인을 알아보기도 했었어.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고... 날이 갈수록 내 손에서 안락사 당하는 아이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어. 난 진짜 내가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가는 쓰레기가 된 느낌에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고 정말 매일밤 울었던거 같아. 근데 어느날 무덤덤해지더라. 무덤덤...이라기보단 점점 그 아픔과 고통에 무뎌지더라. 전만큼 미안하지도 않고 전만큼 울지도 않고 그냥 미안해 한마디로 넘어가고 있엇어. 가끔은 일이니까 어쩔수 없지 라며 자기위안을 하기도 했어. 문득 이런 나를 돌아보게 되었더니 너무 무서웠어. 이러다가 정말 생명에 가치를 못 느끼는 인간이 되어버리는걸까, 하고. 애들한테도 너무 미안했고, 나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것 같아서 너무 무서웠어. 점점 많은 아이들을 내 손으로 목숨을 끊어버리면서도 더 이상 그렇게까지 많이 아프지도, 미안하지도 않은게 너무너무 무서웠어. 덕분에 조금씩 완화되던 우울증은 급격하게 다시 나빠져서 거의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버려서, 난 바로 일을 그만둬야 했어.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서 근처 편의점에도 나가지 못하고 원래 키우던 애들도 차마 제대로 마주할수가 없어서 결국 떠맡기듯이 부모님네 맡겼었어. 그렇게 개고양이들을 수도없이 죽인 손으로 차마 내 아이들을 쓰다듬고 밥주고 할수가 없어서. 그래서 정말 몇달간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어. 자살을 생각한적도 있었어. 나는 살린 아이들을 보며 느낀 보람보다 죽인 아이들을 보며 느낀 죄책감이 컸으니까. 더 버틸수가 없어서.
2 이름없음 2018/12/23 08:31:05 ID : QoGnyMja5U4 0
그렇게 집에 틀어박혀 있는동안 가족이랑 친구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어. 같이 수의사로 일하던 분들도. 일을 안하니 난 당연히 돈이 부족해졌고,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대신 조금씩 돈을 쥐어주면서 자주 와서 요리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는 식으로 도와줬었어. 진짜 내가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났지...... 덕분이라고 할까 약도 먹고 상담도 받으면서 조금 상태가 나아지면서 점점 밖에도 나갈수 있어지고 급한데로 근처 편의점 알바라도 구해서 일하고 그랬어. 지금은 평범한 사무직! ㅎㅎ 고양이들도 다시 데려왔고.... 오히려 안락사 위기에 처한 애들을 몇마리 더 입양해서 살고 있어.
3 이름없음 2018/12/23 08:31:54 ID : QoGnyMja5U4 0
뭐가 어찌됐건..... 지금이야 나름 잘 살고 있지만 잔짜 힘들었고.... 수의사 되고 싶은 친구들은 꼭 이런것도 생각해두고 신중히 결정해줬으면 해.....
4 이름없음 2018/12/23 09:52:07 ID : oY79a1a3zQk 0
좋은 글 고마워 레스주. 나는 수의사를 지망하는 고2야. 자퇴해서 재수학원에서 공부중이구. 사실 나도 불안해.. 내가 정말 아이들을 치료할수 있을까 라던가 레스주처럼 안락사시킬 수있을까 같은 문제들... 수의사를 포기할 수 없는 너무 큰 이유가 있는데, 사실 내가 공부한다고, 노력한다고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미안해 잡담뿐이라서.. 레스주 진짜 힘들었을거같아. 고양이랑 강아지들.. 너무너무 사랑해서 수의사가 되었을텐데, 내손으로 죽이는게 일상이 되어버린다니... 그래도 그건, 레스주 잘못이 아니라는거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 죽은 아이들도 분명, 마지막까지 그들을 위해 눈물흘려준 레스주에게 감사하고 있을거야. 파이팅!
5 이름없음 2018/12/23 10:43:22 ID : wk07gqi1iry 0
원래 그렇더라...동물관련된 일을 하다보면 어딘가 무덤덤한 사람이 아니면 다들 그런 일 한 번씩 겪게되는 것 같아
6 이름없음 2018/12/23 12:23:28 ID : QoGnyMja5U4 0
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원래는 나름대로 수의사 지망생들에게 조언이랍시고 글을 올렸는데 오히려 위로를 받으니 꽤나 당황스럽네. 물론 좋은 의미로. 어쩌면 나도 그냥 조언이라고 가정해서 내탓이 아니라는 위로를 듣고 싶었던걸지도 모르겠다. 고맙고, 레스주도 꿈을 꼭 이루고 앞으로 행복하기만을 바랄게. 맞아. 게다가 나는 원래 나 자신이 꽤나 무덤덤하다고 생각했거든.... 잘 놀래지도 않고 감정의 변화라고 할까 이런것도 적은 데다가 뭐든지 빨리 식었으니까. 하지만 생명을 내 손으로 죽이는 일은 무덤덤하고 뭐고 하는거랑은 그냥 차원이 다른 거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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