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twMqi65aml 2019/02/03 10:10:24 ID : Bfargrula78 11
이른 새벽이었는지 초저녁이었는지, 뿌연 하늘에 연한 빛이 퍼져있었어.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연신 뒤돌아 재촉하는 네 모습이 기억나.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퍼지고, 빨리와 어서 와, 내 이름을 불렀었지. 네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붕붕 진동하는 걸 알았기에 돌아가야 한다고 너를 말렸지만 사실은 네 뒤를 따라가는 게 기뻤어.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총총총 걷는 널 따라가면서 불안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어. 어느 건물 앞에서 올라가자고 까딱까딱 고갯짓 하며 웃기에 올려다보니 호텔이었어. 난 심장이 덜컹 떨어져서 작은 계단에 풀썩 주저앉았지. 심장은 쿵쿵 뛰고 다리가 쭉 풀렸었어. 네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고 왜 이러냐며 우는 소릴 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었는데. 들켰나, 그렇게 티를 냈었나, 네가 갑자기 왜이러나, 미쳤나....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데 너는 그냥 웃었어. 진짜 안 들어가냐고, 여기까지 와서 자기를 민망하게 할 거냐는 네 말에 겨우 고개를 들었어. 높은 굽에 예쁜 까만 워커, 넉넉한 품의 코트, 되는대로 휘날리는 바람에 조금 부스스한 긴 머리카락, 신나서 웃는 미소.
2 ◆mtwMqi65aml 2019/02/03 10:27:11 ID : Bfargrula78 0
진짜 미쳤나, 싶었는데 키스는 좋은데 다른 건 싫으냐는 네 말에 벌떡 일어서서 네 손을 잡고 척척 걸어 들어갔었지. 아하하- 크게 웃으면서 단순하다고 내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쓰다듬는 네가 얄미웠어. 얼른 나를 놀리며 웃는 네 입을 다물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미안하고 난감하고 기쁘면서 우쭐하기도 하고 또 엄청 쑥스러웠어. 체크인 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내내 소리 내 웃는 너 때문에 괜히 내 얼굴이 새빨개졌었어. 그래도 기분은 좋았어.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이 스쳤지만 기분은 붕붕 떠오르고 있었어. 긴장도 되고 흥분도 되고. 요전에 네 생일에 마셨던 보드카가 생각났어. 케이크를 안주로 오렌지 주스를 섞은 보드카가 생각보다 잘 넘어가서 홀짝홀짝 비워버렸을 때 그 기분. 가슴 안쪽이 따뜻하고 심장이 쿵쿵 뛰어서 부양되던 그때. 너랑 몇 번째인지 모를 잔을 부딪치며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그때. 술 한잔 마시지 않았는데 똑같았어.
3 ◆q2E5WqrArBt 여자 2019/02/03 10:50:58 ID : Bfargrula78 0
네가 입 맞춰 올 때면 조금 화가 나는거 알았을까. 너와의 키스는 정말 행복하고 기분 좋은데. 너는 이걸 어떻게 익혔을까, 하는 생각에 불쑥 질투가 나거든. 딱 한 번 키스가 너-무 기분 좋은데 그게 맘에 안 든다는 티를 냈을 때, 너는 뭐 이런 어린애 같은 소리냐는 표정이면서도 내 응석을 받아주었지. 너는 매번 그랬어. 익숙하고 능숙하게 나보다 한 걸음씩 먼저 우리 관계를 쌓아갔어. 일상에서 너를 이끌고 잔소리하며 일으켜 세우는건 난데 정작 우리의 관계는 모두 네가 먼저 첫 돌을 올렸지. 유치찬란한 고백도, 애정표현, 스킨십 그 전부. 나는 네가 올린 첫 돌 위에서 나무를 깎고 세웠던 거야.
4 이름없음 2019/02/03 15:45:50 ID : apO5VdQsjgY 0
대박....보고있어 글 잘쓴다....
5 ◆mtwMqi65aml 2019/02/04 00:29:57 ID : tdA5cLcFeMi 0
잠을 이루지 못 했었어. 조심스럽고 아찔한 시간 뒤에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다 금새 잠든 너를 보며 불안했어. 네 머리를 쓰다듬고 손 끝을 매만져 봐도 도통 현실 같지 않았어. 잠들면 네가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 괜히 울었어. 눈물은 끝없이 흐르는데 정확한 이유를 몰랐어. 슬픈지 기쁜지 불안한지 행복한지 괴로운지 아쉬운지.... 알 수 없었어. 잠든 너를 흔들어 깨워서 입 맞추고 다시 네 몸의 향기를 맡고 싶었어. 그 향기에 나를 파묻고 싶었어. 그 향기를 나로 채우고 싶었어. 그래야 네 모든 시간에 내가 남을 수 있을 것 같았어. 조금 후회했어. 이 호텔에 발들 디디지 말아야 했다고. 나보다 조금 낮은 네 체온을 알아서 더 욕심이 생겼어. 기쁨에 움츠러드는 네 손가락 끝, 재촉하고 몰아치는 네 눈빛, 평소보다 진한 네 입술을 알게 돼서 내 욕심은 터져버렸어. 매시간 팽창하는 우주가 돼버렸었어. 네가 이 끔찍하게 이기적인 욕심을 알게 되면 더는 웃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불안했어. 그리고 그런 너를 알아서 행복했어.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계속 울었어.
6 ◆mtwMqi65aml 2019/02/04 01:02:18 ID : tdA5cLcFeMi 0
너는 날 침착하고 담담한 사람이라고 말했었지. 너는 그 아찔했던 첫 날 이후 종종 진한 키스로 날 끌어당기곤 했는데, 난 반 정도는 가벼운 키스로 대답하며 화제를 돌리곤 했어. 그 반응이 맘에 들지 않아서 기분 나빠진 너를 달래느라 진땀 흘리적도 많아. 원래 담담하긴 했지만 아주 곰 같다고 짜증 냈었지. 그 순간 나는 자글자글 끓는 욕심을 삼키고 있었어. 너를 속박하고 싶었어. 너를 물어 뜯고 싶었어. 네가 무서워해도 너를 내 품에 안고 전부 내 것이라고 새기고 싶었어. 네 모든 시간이 나만을 원하길 바랐어. 네 시간이 나의 시간과 똑같이 겹쳐지길 바랐어.
7 ◆mtwMqi65aml 2019/02/05 00:33:29 ID : Bfargrula78 0
너와 함께 보낸 풍경을 떠올리면 전부 겨울이야. 분명 봄 여름 가을의 너도 알고 있는데 눈을 감으면 네 주위는 온통 겨울이야. 터틀넥 니트에 똑 떨어지는 코트 차림이 잘 어울렸기 때문일까. 손발이 차가우면서도 장갑을 싫어하던 네가 곧잘 내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오던 것이 기뻤기 때문일까. 너를 처음 알아보게 된 날은 정말 힘든 날이었어. 연휴가 계속되는 달이어서 계속 겹치는 일정. 인파에 치이는 날의 연속이라 예민해져 있었어. 그날은 유독 화가 치밀어서 누구든 한 명만 걸려라, 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경찰서를 가도 좋으니까 누구하고든 싸우고 싶은 날이었어. 답답한 속을 달래러 식사보단 차가운 음료를 들이켜려 찾았던 카페. '조금 앉아서 쉬고 가세요' 네가 그랬을 거야. 내 표정이 무척 좋지 않았던지 너는 빈 테이블을 가리켰지. 몇 번 출퇴근길에 들렀던 카페이긴 했지만, 스태프에 관심이 없어서 그 때 널 처음 봤어
8 ◆mtwMqi65aml 2019/02/05 01:28:55 ID : Bfargrula78 0
싸가지 없는 년- 내 첫인상이지? 걱정하는 네 말을 끊고 음료를 재촉했으니까. 준비해 준 음료도 채가듯 가져갔으니 당연해. 너는 카페를 나서는 내 뒤에다가 콱 넘어지라고 악담을 했었다고 했었어. 네 첫인상은 쓸데없이 오지랖 넓은 인간이었어. 그리고 잊었지. 후에 업무 중 얼굴을 다쳐서 조퇴하고 카페에 들른 날 보고 넌 매우 놀랐다고 했어. 나도 커피 위에 산처럼 쌓인 휘핑크림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 착한 걱정을 해 준 널 뿌리쳐서 다쳤던 걸 거야. 잘 다쳤구나 싶기도 해. 지금도 흉터가 남아있는 상처였기에 네가 내 이름을 물은 거니까. 아, 그 휘핑크림 결국 쓰러져서 반도 먹지 못했던 것, 기억하니.
9 ◆mtwMqi65aml 2019/02/05 02:10:03 ID : Bfargrula78 0
네가 해 준 첫 키스도 이 흉터 위야. 기분 좋게 취한 상태로 연신 내 이름을 부르며 파고드는 바람에 난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뻔했어. 정말 조심조심 네 허리와 어깨를 잡고 떼어내면서 난 죽을 것 같았어. 내 이름 또 내 이름, 부르고 또 부르고. 부름에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덜덜 떨리는 것 같고, 널 어딜 어떻게 잡아 말려야 하는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했어. 너를 받아 안느라 푹 기댄 쇼파에서도 네 향기가 나고 쇼파에서 등을 떼면 네 온기가 맞닿아오고. 헤죽헤죽 웃으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너는 너무 예쁘고. 콱 끌어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내 팔은 네 위에서 둥둥 떠다녔어. 불쑥, 왼쪽 눈썹에 촉촉한 느낌이 닿아서 튀어 오를 듯 놀랐지. 많이 아팠냐고 갑자기 울먹거려서 네가 정말로 많이 취한 걸 알았어. 네 바늘, 뼈가 보일 정도로 찢어졌던 상처. 일 센티만 아래에 부딪혔으면 눈을 다칠 뻔한, 흉터로 남은 상처. 아팠어? 묻는 네가 참 예뻐서 응, 대답밖에 못 했어. 사실은 아프지 않았어. 치료받을 때도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어. 네가 흉터가 된 상처에 입을 맞추고 핥아주었을 때가 훨씬 아팠어. 심장이 쪼그라들어 피가 돌지 않는 것 같았어.
10 이름없음 2019/02/06 10:27:21 ID : xRwnu7866lA 0
스레주 글 정말 잘 쓴다!
11 ◆mtwMqi65aml 2019/02/06 22:04:49 ID : Bfargrula78 0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인연을 바란 적이 없어. 과거에도 현재에도 변하지 않았어. 남을 돌보지 않고 내 처신만 신경 쓰는 사람이라 언제나 무리 밖에 있었지. 호불호도 확실해서 미워한 것을 찾지 않아. 지금도 내가 속한 무리에는 언제나 작은 신경전이 있어. 그래서 내가 먼저 연락한 것이 신기해. 늦은 퇴근, 배가 고팠고 너는 식사를 했을지 궁금했어. 여러 가지 메뉴를 혼자 생각한 뒤에야 통화 할 수 있었어. 이미 퇴근해서 귀가했다는 네 말에 크게 아쉬웠고, 네 집 근처에서 함께 식사하자는 초대에 들떴어. 관악산 줄기의 네 집과 북한강 하류의 내 집은 왕복 1시간 반, 밀리면 2시간. 그런데도 네게 줄 머핀까지 사서 급하게 갔었지. 네가 기다릴까 봐 네가 배고플까 봐.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맨얼굴이라고 푸슬푸슬 웃는 너를 보고 기뻤어. 소주를 한 잔씩 곁들여 백순대를 먹었지. 살짝 알딸딸해져서 집에 귀가하니 자정이 넘었었어.
12 ◆mtwMqi65aml 2019/02/06 23:14:59 ID : Bfargrula78 0
널 만나고 난 뒤에 이직을 고민한 적도 있어. 스캐줄 근무와 특근 때문에 휴무는 월 4-5일, 특수한 달은 3일 정도라도 쉬면 다행이고. 피곤하지만 급여는 높아서 만족했었어. 그런데 널 만난 뒤에는 화가 났어. 도통 맞출 수 없는 일정. 미뤄지는 약속과 계획. 점점 더 예민해졌어. 후배들을 힘들게 했어. 안 그래도 깐깐한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되어갔으니까. 네가 불쑥 와준다고 했었어. 저녁 약속이 두세 번 미뤄지고 나서 네가 만나러 오겠다고 했어. 네가 근처 만화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근무 내내 초조했어. 근무일지를 체크할 때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지도 못 했고, 리시버를 귀에 꽂은 채로 튀어나갔을 정도로 급했지. 어서 와-, 만화책을 흔들며 반기는 널 보고 좋아해! 말하고 싶었어. 좋아서 미안하고 반가워서 눈물이 찔끔 났지. 나 너 좋아하는데! , 이 말을 꿀꺽 삼키고 밥 먹자고 맛있는 것 먹자고 내가 쏜다고 네 손을 잡아끌었어.
13 이름없음 2019/02/06 23:20:41 ID : U0pTU1DxTSF 0
보고있어ㅠ 이 스레,,,내 인생 스레가 됐다,,,
14 ◆mtwMqi65aml 2019/02/07 00:13:51 ID : Bfargrula78 0
너의 손을 잡고 뺨과 입술에 키스할 수 있게 된 후에, 네가 물었었지. 원래 편견이 없었느냐고. 굳이 나누지 않고 살았어. 사람에 끌리거나 끌어당기는 성격이 아니라서 관계를 계획한 적이 없어. 그냥 네가 좋아졌고 보고 싶어서 핑계를 만들고 만나러 가고, 그때의 감정에 충실했던 거야.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네가 기뻐했을까? 약 1년. 우리가 처음 만나서 내가 네 앞에서 엉엉 울었을 때까지 걸린 시간. 술을 즐기지 않는 나 대신 너는 맛있게 술을 마셨어. 소주 맥주 과일주 칵테일 양주 와인, 종류 가리지 않고 크게 취하는 일도 없이 홀짝홀짝 가볍게 넘겼지. 널 따라서 한 잔 두 잔 넘기다 보면 내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았지. 넌 얼마나 마셨다고 벌써 취하느냐고 웃고 놀렸지. 그때도 취했었어. 늦여름이었어. 우리는 어찌어찌 휴가를 맞춰서 어느 강가의 펜션이었어. 강바람을 안주 삼아 홀짝홀짝. 먼저 취해 버려서 테이블에 반쯤 누워있던 내 손을 네가 꽉 잡았어. 너는 내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모 영화의 흉내를 냈어. 알아듣는 게 늦어서 그냥 넋 빠져 있었더니 네가 크게 웃었어. 다시 물었었어, 널 좋아하느냐고. 엉엉 울었지. 눈물 콧물 다 빼면서 좋다고 울었어. 미안하다고 좋아한다고 울었어. 취기에 엉망으로 울었지. 술이 깨고 나니 어린애 같은 내가 죽을 만큼 부끄러웠어.
15 ◆mtwMqi65aml 2019/02/08 05:56:03 ID : Bfargrula78 0
요 며칠간 잠은 얕고 꿈은 깊었어. 자주 깼지만, 매번 꿈을 꾸고 계속 너를 만났어. 익숙한 너와 낯선 네가 번갈아 머물다 갔어. 아쉬워서 자꾸 다시 눈을 감았지. 너의 조각들을 이곳에 나열하는 동안 흐려졌던 시간은 선명해져.
16 이름없음 2019/02/09 00:43:55 ID : mtxPfSFa09y 0
ㅠㅠ 글 너무 잘 읽고 있어 계속 써줘 스래주!
17 ◆mtwMqi65aml 2019/02/09 07:46:28 ID : Bfargrula78 0
왼쪽 눈가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와이셔츠 깃엔 아직 핏방물이 그대로 남아있던 그 날. 통성명하고 상처의 이유까지 나누었을 때. 넌 표정이 많은 사람이었어. 우리 모두 사람을 상대했지만 나는 딱딱했고 너는 웃음이 많았지. 트레이에 쓰러져 거의 먹지 못한 휘핑크림을 네가 더 아쉬워하며 다시 오라며 맛있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었지. 카페의 음료가 다 거기서 거기- 맛있어 봤자지, 입속말하면서도 웃었어.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날아갔었어. 나중에 들렀을 때 주문하지 않은 크림 카스테라가 같이 나왔어. 내 것이 아니라고 했더니 너는 휘핑크림 대신이라고 얼른 가져가라는 손짓을 했지. 폭신한 카스테라와 부드럽고 달콤한 크림, 맛있었어. 커피까지 다 넘기고 나니 잘 먹었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어. 카스테라의 값을 갚기로 했어. 처음엔 작은 병 음료. 병 음료는 또 작은 쿠키가 되고, 쿠키는 스태프 모두를 위한 초콜릿이 되었어. 초콜릿은 베이글이 되고, 베이글은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되었어. 카페 모두와 눈이 익었고 우리는 가볍게 인사하게 되었지.
18 ◆mtwMqi65aml 2019/02/10 03:12:33 ID : Bfargrula78 0
마음만큼 많은 선물을 하지 못했어. 꽃, 영양제, 옷, 악세사리 등등 어울리겠다 필요하겠다, 생각했지만 네가 원하지 않을까 봐 챙기지 않았어. 내가 건네도 되는지 고민하며 지나친 꽃들이 수백 송이. 선물을 건네고 받을 나와 네 관계가 무서웠어. 추가 갑자기 무거워지면 천칭은 기울 거야. 반대편에 놓인 구슬은 떨어져 깨지겠지. 균형을 잡고 내 감정을 알아가야 했어. 약속과 만남의 빈도, 건네는 말, 종종 주고받는 메시지- 자연스럽고 신중했어. 너를 모르는 만큼 나 자신도 알 수 없어서 많은 잠을 설쳤고 맘은 어지러웠어. 흩어지는 생각을 주워 담으려고 했지만 집중하지 못했어. 천칭이 휘청휘청 기울다가 멈추기를 반복했어. 어느 겨울 저녁, 3주간의 연속 근무를 끝내고 후줄근하게 퇴근하던 날. 겨우 잡은 삼일 반의 휴무 중 하루는 집안일, 하루는 무작정 잠만 자겠다고 다짐하며 인파를 헤쳐가던 날. 카톡카톡- 며칠 만에 받은 네 메시지는 내 안부와 일정을 물었어. 한창 나와 너를 낯설어하던 중이었지만 부스스 미소가 흘렀어. 너는 게를 먹자고 했어. 스티로폼 박스 안에 담긴 대게 몇 마리. 삶을 거라고, 오는 길에 소주와 레몬을 사 오라고 했어. 신이 났어. 급하게 삼성역을 가로질러 빠져나갔어. 달리듯 몰 안으로 바디버터를 샀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부터 선물해볼까 생각만 했던 것이었어. 선물용 포장을 주문하며 무척 들떴었어
19 ◆mtwMqi65aml 2019/02/17 10:43:23 ID : Bfargrula78 0
머리를 물들였어. 2월, 올해 겨울은 힘들지 않았고 봄이 금세 보여. 파란색? 보라색? 고민하다가 붉은빛의 주황색을 골랐어. 이건 너의 색이지. 웃지 않는 네가 낯설어서 아무 대답도 못하고 얼어붙었던 그 날, 너의 색. 굵은 컬에 단풍 같은 색, 부드러운 것이 좋다며 오래 공들이던 결 좋은 머리카락. 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네 머리카락의 반짝임만 좇고 있었어. 그 단풍을 내 머리에 옮겼어. 짧게 정리한 머리를 흩으며 샵을 나서면서 부스스 웃었어. 보고 싶다. 네 앞에서는 담백하려 노력했어. 서 있는 모습, 말하는 소재, 과하지 않은 예절. 네게 처음 보였던 모습을 지우기 위해 무던히 애썼지. 너무 뻔한 모습이라 너도 금세 눈치챘을 거야. 그래서 더 끌어당겼던 거지? 난 가벼운 키스에도 정신없이 달려들었으니까. 너를 말리고 달래다가도 네 향기가 진해지면 그 부드러움을 탐하느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웃는 네 목소리와 떨림도 전부 갖고 싶어서 두 팔을 넓게 벌려 끌어안았어. 담백하려 노력했지만 언제나 욕망뿐이었어.
20 ◆mtwMqi65aml 2019/02/21 00:36:38 ID : Bfargrula78 0
일상엔 언제나 네가 있어. 하지만 넌 어디에도 없어. 우리의 관계를 명확하게 한 적이 없었지. 각자의 일상과 맡은 역할, 사회의 인식 등이 서로를 있고도 없는 관계로 만들었어. 너를 만나러 가면서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다른 이유를 말해야 했어. 너는 책이 되었다가 액세서리나 옷이 되기도 하고 러닝머신도 됐어. 너에게 나는 어떤 이름의 시간이었을까. 미래를 생각하기엔 참 흐린 관계라서 너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은 참 허무했어. 마주 잡았던 온기가 꿈 같아서 한동안 그 근처에서 머물거나 밀리는 도로를 천천히 돌아본 적도 있지. 행복한 신기루였어.
21 ◆mtwMqi65aml 2019/03/07 02:25:51 ID : Bfargrula78 0
애정은 약점이 돼. 마냥 편안하고 기쁘지는 않아. 나는 뿌리가 없는 인생이라서 언제나 고민은 혼자만의 것이었어. 괴롭거나 힘들지 않았어. 외로워질 때도 있었지만 당연했어 너를 만나서 고민이 괴로워졌어. 힘들어, 슬퍼, 괴로워, 괜찮지 않아, 우울해, 외로워, 곁에 있어 줘. 네 앞에서는 대부분 괜찮아, 별거 아니야, 아무 일 없었다고 했지만 괴로웠어. 어를 만나고 부를 이름이 생기면서 내 삶에 큰 약점이 생겼어. 지금도 그 약점이 남아있어. 뒤척이고 꿈을 꾸고 외로워서 슬프지.
22 ◆mtwMqi65aml 2019/03/07 03:00:34 ID : Bfargrula78 0
너도 이렇게 외로웠을까? 나는 이제야 내 외로움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어. 부평초 같은 삶은 외로움이 가득했지만, 그것을 허기로 느끼고 많은 것을 씹어 삼켰던 과거의 내가 안타까워. 가끔 너와의 모든 것을 후회해. 너의 온기를 몰랐다면 내 외로움을 가늠하지 않아도 될 텐데. 인사하고 돌아서는 너도 나처럼 뒤돌아보고 공허하고 두근거렸길 바라.
23 이름없음 2019/03/07 11:12:43 ID : 2rfe7AnWja4 0
문창과세요....?ㄷㄷㄷㄷ
24 이름없음 2019/03/08 15:48:31 ID : mMjg5gi65dU 0
글 한자 한자가 너무 따뜻하고 소중해서 천천히 곱씹어 읽었네 쓰니 글에 담김 쓰니의 사랑이 넘친다
25 ◆mtwMqi65aml 2019/03/08 17:08:45 ID : RB803u65cLc 0
제비꽃을 좋아해. 작게 피지만 보랏빛이 선명하고 줄기가 곧아. 비가 지나간 뒤 흙 구석에 물방울 맺힌 꽃송이와 잎사귀를 보는 것을 좋아해. 제비꽃다발을 손에 꼭 쥐고 뛰놀던 어린 시절을 기억해. 폭신한 시간이었어. 조금 더 따뜻해지면 제비꽃이 필 거야. 작은 흙무덤이나 묵은 잔디 위에 제 보라색을 피우겠지. 너는 그 제비꽃을 되뇌게 해. 먹고 사는 것을 위해서 앞을 보느라 긴장했던 시선을 내리고 발 주위에 있는 것을 돌아보게 해. 따뜻한지 차가운지 비가 내리는지 노을이 지는지 살피게 해. 작지만 좋아했던 것을 떠올리게 해. 네가 내 공간에 어리는 것만으로도 숨을 깊게 쉬고 쿠션에 등을 기대. 카페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한 문장을 적고 출입문을 살펴. 이 카페에는 곧 작고 곧은 내 제비꽃이 필 거야. 폭신한 시간이 시작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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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레스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197 Hit
퀴어 이름없음 19.03.07 0
6레스내 성 정체성 좀 알려조라,,, ;^; 241 Hit
퀴어 이름없음 19.03.0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