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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2/10/10 01:00:09 ID : a07apO3xxyK
여중 여고에는 동성애자들이 많다고 하지.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여자들만 있는 환경에서 티 나기가 더 쉽기도 하고, 그런 만큼 정체성 혼란을 더 쉽게 경험할 수 있어서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나도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그런 정체성 혼란을 겪은 적이 있어. 오늘 고등학생 때 친구들을 만나서 술 한 잔 했는데, 나를 정체성 혼란에 빠뜨린 친구(A라고 할게)이야기가 나오길래,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그때 썰이나 풀어보려구.
이름없음 2022/10/10 01:00:41 ID : a07apO3xxyK
그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나한테 동성애자는 팬픽 속의 존재였어. 혐오감은 없었지만, 오히려 현실감이 없는? 그런 이미지였지. 그런데 고3이 되고 나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지. 나를 좋아해주는 친구가 생겼거든. 그게 A였어. 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의 반 친구들이 A가 나를 특별하게 대하는 걸 알게 되었어. A는 짧은 머리에 잘생겼었고, 공부를 곧잘 했고, 교우 관계도 좋았어. 소위 말하는 인싸에 가까운 친구였지. 나는 따돌림을 당한다거나, 친구가 없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지극히 평범했어. 성적도, 외모도, 교우관계도. 그래서 A가 나한테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게 처음에는 되게 신기했어. A의 친구들도 "A가 스레주하고 친해지고 싶은 게 보인다", "A가 스레주한테만 잘 해준다"하고 얘기 했었고, 어린 나이에 그게 한편으로 싫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동 수업을 할 때 항상 같이 다니고, 야자 시간에 옆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점심 시간에 매점도 같이 가고 하는 사이가 됐어.
이름없음 2022/10/10 01:03:29 ID : s6Y8o7xO5Xz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2/10/10 01:03:44 ID : a07apO3xxyK
점점 친해지고 나서 A는 남자친구가 하면 매너 좋다고 칭찬 받을 법한 행동을 나한테 자주 했어. 내가 살던 주택가가 조금 위험한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야자 끝나고 나서 항상 집 앞까지 데려다줬어. 내가 생리통이 심했는데, 그럴 때마다 핫팩을 데워서 가져오고, 초콜릿을 엄청 사먹이고, 기분 괜찮은지 살펴주고 그랬어. 지금 생각해보면 눈치를 못 챈 게 웃긴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게 연애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어. 일단 A가 커밍아웃을 한 적이 없기도 했고, 여고에서 친구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건 일반적인 일이다보니 그게 연애 감정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 같아.
이름없음 2022/10/10 01:04:14 ID : a07apO3xxyK
5월 중순 즈음 되었을까. 나랑 중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B라고 할게)가 어느날 쉬는 시간에 나를 부르더라고. 그때 내가 같이 다니던 무리는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었어. 나머지 둘(C, D라고 할게)은 다 A의 친구라서 친해지게 된 거였고, B랑은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여서 제일 친했지. B는 두 달 넘게 지켜보면서 A가 동성애자인 것 같고,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했어. 그러더니 그렇게 계속 받아주면 이상하게 소문이 날 거라고, 조심하라고 얘기하더라. 그때만 해도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둘러댔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쿵 내려 앉았어. 반 친구들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 앞이 하얘지더라.
이름없음 2022/10/10 01:05:05 ID : a07apO3xxyK
그날은 그렇게 혼자 쓸데없는 걱정스러운 생각에 휩싸여서 야자를 하는 둥 마는 둥 딴 생각만 잔뜩 했지. A는 그것도 모르고 옆에서 어디 아프냐, 졸리냐, 피곤하냐 하면서 걱정하더라고. 그렇게 야자를 마치고 여느 날처럼 A는 나를 데려다줬어. 근데 그때 왠지 모르게 심술이 나더라. 그래서 네가 남자도 아니고 왜 맨날 나를 데려다주냐고, 네가 그렇게 행동해서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쩌냐고 말이 막 함부로 나오더라. 좀 우습지만 말을 하면서도 A가 이제 나를 안 챙겨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들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언젠가부터 A의 행동을 즐기고 있었거든. A가 애인처럼 나를 다정하게 챙겨주니까 챙김 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느낌?
이름없음 2022/10/10 01:05:20 ID : a07apO3xxyK
A는 당황한 걸 감추고 불편했냐고 묻더라. 나는 주절주절 이상한 변명이나 했어. 나는 불편하지 않은데 반 애들이 이상하게 보면 어쩌냐, 부담스럽다 같은 말들을 늘어놓았지. 그러니까 A가 갑자기 옆에서 나란히 걷다가 내 앞으로 한 발 앞서가서 나를 돌아보더라. 그러더니 상처받은 얼굴로 미안하다고 하더라. 뻘소리지만 시고르자브종 같이 생긴 얼굴로 축 쳐저서 물으니까 죄책감이 들더라. 그러더니 A는 나한테 좋아하면 안 되냐고 물었어. 앞으로 귀찮게 안 할테니까 좋아하게 해 주면 안 되냐고. 마음 속으론 부정했지만, 그날 밤 얘가 나를 연애 대상으로 좋아하고 싶구나 깨달았던 거 같아. 근데 애써 모르는 척을 하고 "친하게 지내자는 거지?"하고 되물었어. 그때 나는 너무 소심해서 나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이 나는 게 너무 싫었거든. A는 그제야 피식 웃으면서 "그래. 친구로 내가 혼자 좋아할게"라고 하더라. 좀 오래된 일인데 이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서 아직도 그때 분위기가 기억나네.
이름없음 2022/10/10 01:06:23 ID : a07apO3xxyK
그렇게 평소처럼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그 다음날부터 A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챙겨줬어. 내가 친구들 시선을 신경쓰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애들이 오~하면서 놀리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마다 "스레주는 나 싫어하는데 내가 쫓아다니는 거야" 이런 말도 했었어. 그때마다 나는 "내가 언제 싫어한다고 했어"하고 민망해했고, A는 "노력하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하면서 애들 앞에서 유쾌하게 받아 넘겨줬어. 그렇게 해 준 덕분에 A의 대놓고 하는 짝사랑 프레임이 만들어졌고, 애들은 그런 A를 자주 놀렸어. 나는 별 탈 없이 학교 생활을 했지. 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 한편으로는 "나는 이성애자다.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A가 나한테 표현하는 애정을 기다렸어. 꼭 물질적인 게 아니더라도, 친구들 앞에서 나랑 제일 친하다고 티내주는 것도 좋았고, 저렇게 좋아한다고 거침없이 말해주는 표현들에 설렜어.
이름없음 2022/10/10 01:06:35 ID : a07apO3xxyK
시간은 흐르고 A와의 사랑? 우정? 그런 감정은 점점 커졌어. 이게 표면적으로는 A가 나한테 일방적으로 표현하고, 나는 부끄러워하던 관계였는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도 점점 커지게 되더라.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A에게 가지는 감정은 우정, A가 나에게 가진 감정은 우정 비슷한 사랑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판단을 의심하게 되는 사건이 많이 발생하기 시작했어.
이름없음 2022/10/10 01:10:47 ID : a07apO3xxyK
첫 번째 사건은 6월 모의고사 즈음해서 일어났어. 아까 이야기했지만 A는 공부를 곧잘 하는 편이었고, 나는 중위권 정도의 성적이었지. A는 그날도 나한테 페레로로쉐 세 개를 가져다주면서 시험 잘 보라고 해주더라. 시험 끝나고 녹초가 되어서 가채점을 해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나는 기대했던 성적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았고, A는 평소 성적도 나쁘지 않았는데 기대보다 훨씬 좋은 점수를 받았더라고. 나는 알 수 없는 질투와 부러움이 섞여서 "재수 없는 새끼" 하면서 A한테 칭얼댔고, A는 또 씩 웃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같이 공부하자고 하더라. 얘는 농담을 잘 안하고 하는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거든. 집에 가는 길에 진짜로 같이 그룹 과외를 하자고 하더라.
이름없음 2022/10/10 01:11:09 ID : a07apO3xxyK
A는 고1부터 친했던 C랑 같이 매주 2회 그룹 영어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들어오라는 거였지. A랑 C는 공부도 잘했고, 영어 성적도 매번 1등급이었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같이 공부하는 게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을 거야. 그래도 나는 엄마를 졸라서 그 과외 그룹에 들어가게 됐어. 제일 큰 이유는 C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어. C는 엄청 예쁘고, 몸매도 좋고, 공부도 잘 하는 엄친딸 자체였어. A랑 C는 절친이었고, 내가 모르는 A의 많은 것들을 C는 알고 있었어. 나는 알게 모르게 C에 대해서 질투를 했고, A가 C랑 더 친하면 어쩌나 하는 상상에 사로잡히곤 했어.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짓인데, 고등학생 때는 그런 생각들을 종종 하게 되잖아. 그렇게 같이 과외를 받게 된 다음부터, A는 엄청나게 기뻐했어. 이제 과외할 때도 같이 있을 수 있다면서 좋아하는 걸 보니까 내가 뭐라고 이렇게 좋아해주나 싶다가도 기분이 좋았어.
이름없음 2022/10/10 01:11:26 ID : a07apO3xxyK
웃긴 게 사람이 그렇게 매순간 사랑받고 예쁨받다보면 은근한 자만심이 생긴다? 나는 C가 보는 앞에서 A가 나를 챙겨주고 좋아해주는 걸 즐기기 시작했어. 내가 너보다 A랑 더 친하다는 사실을 C한테 과시하고 싶기도 했고, A가 나를 눈에 띄게 더 잘 대해주면 좋겠다고 못된 마음으로 바라게 됐어. 이런 나쁜 마음이 커져가니까 마음 한켠에서는 불안감도 생기고 경쟁심도 생기더라고. 당연히 중요한 순간에 공부는 하나도 되지 않았고, 온 신경이 친구관계에 쏠리게 됐어.
이름없음 2022/10/10 01:11:32 ID : a07apO3xxyK
그러던 어느날 C가 과외가 끝나고 놀던 중에 A 앞에서 갑자기 울어버리더라. 왜 스레주한테만 잘 해주냐, 친구로서 너무 섭섭하다, 스레주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같이 놀 때 소외감이 안 들게 해야 할 것 아니냐 하면서 엉엉 울었어. A는 놀라서 C를 안고 토닥이면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고 해주더라. 진짜 쪽팔리는데 나는 그때조차도 너무 질투가 났어. A가 C를 안고 달래주고 있는 상황에도 너무 화가 났고, C가 경쟁자로 느껴지고 그러더라. 그때 감정이 우정이었든 사랑이었든 감정에 미쳐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아.
이름없음 2022/10/10 01:12:01 ID : a07apO3xxyK
A는 워낙 다정했던 애여서 C가 그런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많이 놀라했어. 그리고 그날 엄마한테 전화해서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얘기하더라고. C랑 A는 엄마들끼리도 친한 사이라 쉽게 허락을 받았는데, 나는 허락을 받지 못했어. 그래서 나 혼자 집으로 돌아가게 됐지. 그리고 그날은 유일하게 A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은 날이 되었어. 생각해보면 그때 A가 나한테 정말 잘해줬었던 게, A는 과외가 끝나고 매번 밤마다 나랑 같이 버스를 타고 우리 집까지 데려다줬어. 자기는 밤산책 하는 걸 좋아하고, 버스 타는 것도 좋아한다고 하면서 매번 20분 거리 우리 집까지 같이 가줬다가, 다시 20분을 버스를 타고 돌아갔지. 근데 그날은 A가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만 데려다주더라. 나는 그게 너무 섭섭하고 억울해서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서 내내 울었어.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미웠는지 몰라. 마음 속에는 A가 C랑 더 친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불을 지폈고, 그날 밤 거의 잠을 못 자고 등교를 했던 거 같아.
이름없음 2022/10/10 01:12:21 ID : a07apO3xxyK
그렇게 등교해서는 하루 종일 A한테 짜증을 냈어. 나도 친구 사이에 이렇게 질투가 나는 내 마음을 알지 못하겠고, 너무 혼란스러웠는데, 그게 짜증으로 표출되더라고. A는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냐 하면서 내 기분을 맞춰주려고 애썼어.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C가 서운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C한테도 신경 써주는 것처럼 보였어. 그럴 때마다 내 불안감은 증폭되어서 A한테 더 짜증스럽게 굴고, 못되게 굴었어. 단 거 먹고 싶다고 했다가, A가 매점에서 초콜렛을 사다 주면 먹지도 않고 책상에 올려둔다거나, A가 톡톡 건드리면서 "기분 안 좋아?"하고 물으면 피곤하다고 하면서 엎드려서 자는 척을 하고 그랬어. 그러면서도 A가 계속 나한테 붙어서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근데 A는 그럼 좀 자라고 하면서 담요를 건네주더니 C한테 가더라고. 그 상황에 나는 또 질투가나고, 질투하는 내 자신이 너무 찌질해보여서 더 화가 났어.
이름없음 2022/10/10 01:13:10 ID : a07apO3xxyK
그때 이 감정은 우정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아. 그러면서도 내가 동성을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엄청난 혼란을 겪었어. 나는 평생을 이성애자로 살아왔고, 여자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봤거든. 그렇게 매번 짜증을 내고, 질투하고, 토라져있는데도 A는 변함 없이 나를 달래주고, 기분을 살펴주고, 좋아해줬다? 그래서 나는 영영 얘가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얘는 영영 나를 좋아할 거라고 그런 치기 어린 생각을 했었지.
이름없음 2022/10/10 01:13:20 ID : a07apO3xxyK
잠깐 추억팔이 하려던 건데 너무 길어졌네. 읽어주는 사람 있으면 더 써볼게.
이름없음 2022/10/10 01:20:59 ID : PhapRvhhvDz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2/10/10 01:37:09 ID : a07apO3xxyK
A에 대한 감정이 사랑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두 번째 사건은 한여름에 일어났어. 아까 같이 다니던 내 친구B가 이상한 소문 날 수도 있다고 조심하라고 나 불러서 이야기했다고 말했잖아. 이번 사건은 이 친구랑 관련해서 일어났어. 사실 B는 A를 탐탁지 않아 했어. 여자가 남자처럼 행동한다느니, 너한테 그렇게 행동해주면 너가 설레할 줄 아는 게 보기 싫다느니, 레즈인 건 상관 없는데 자기는 안 좋아하면 좋겠다느니 이런 말들을 종종 하고 다녔거든. 물론 A 앞에서는 못했고, 나한테만 저런 식의 뒷담을 했어. 그런데 내 감정도 같이 깊어지면서 어느 순간 이런 말들이 참을 수 없어졌어. 그래서 B랑 카톡을 하다가 크게 싸우게 됐어.
이름없음 2022/10/10 01:39:27 ID : a07apO3xxyK
감정이 격해진 B는 스레주 너도 레즈비언이냐, A랑 놀면서 애가 이상해졌다 이런 말을 했어. 그 중에 내 역린을 건드린 말이 있었는데, "너도 은근히 즐기고 있지?"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A와 C의 관계를 질투했던 것, A에게 툴툴대면서도 애정을 받고 싶어 했던 것, A 앞에서 일부러 기분 안 좋은 척 하면서 챙김 받으려 했던 것 등 내 스스로 혐오하고 있던 내 행동들이 주마등 스치듯이 지나가더라. 바보같고 멍청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듣고도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걸 주장하는 데 급급했어. 한편으로는 A 그런 애 아니다, A는 좋은 애다, 다정하고 착한 애라서 네가 오해하는 거다 이야기하면서 A를 변호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설령 A는 레즈비언일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라고 얘기하면서 비겁하게 도망쳤어. 그렇게 카톡을 치는데 손이 덜덜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더라.
이름없음 2022/10/10 01:41:26 ID : a07apO3xxyK
다음날 학교에 가서 B를 어떻게 봐야 할지, A한테 이 사실을 어떻게 숨겨야 하는지 머리가 지끈거렸어. 물론 내가 비겁해서 아무런 갈등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맞지만, 또 A가 상처를 받을까봐 조심스럽더라고. 같은 반에서 함께 생활하던 B가 뒤에서 그런 이야기를 지껄인 걸 알게 되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 얘기를 들은 걸 알게 되면 A가 너무 속상해할 것 같았어. 이건 진짜 등신같은데, 그렇게 A가 속상하게 되면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불안하기도 했어. 그래서 나는 최대한 A, C, D가 이 사실을 모르게 하려고 애썼어. C, D한테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어. 일단 C, D가 B랑 크게 친하지 않았었고, 고3이라 같은 무리끼리 급식 같이 먹는 정도의 활동만 같이 했었거든.
이름없음 2022/10/10 01:54:23 ID : a07apO3xxyK
근데 A는 뭔가 이상한 기류가 있다는 걸 눈치 채더라. 나한테 항상 예뻐해달라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말을 붙이고, 내 무릎에 누워서 장난치고 그랬었는데, 이번엔 정색하면서 물어보더라고. 무슨 일 있는 거 안다고, 다 얘기해보라고. 나는 죽어도 얘기 못한다고 아무 일도 없다고 잡아 뗐어. 그러니까 A는 어울리지 않게 화난 표정으로 말해주기 싫으면 됐다고 궁금하지도 않다고 하면서 자리로 돌아가버렸어. A는 그날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엎드려서 잠만 잤어. 나중에 들어보니 자는 척을 한 거라고 얘기는 했지만. 하여튼 내가 툭툭 건드리고 장난을 치려 해도 받아주지 않더라고. 그날은 하루종일 내가 A의 기분을 살피게 됐어. 그러다 보니까 A가 그동안 얼마나 나한테 신경을 썼을지, 내가 같잖은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심술부릴 때 얼마나 피곤했을지 알겠더라.
이름없음 2022/10/10 01:54:33 ID : a07apO3xxyK
A가 나한테 화가 나 있는 동안 내 마음은 지옥이었어. 그때 이건 우정과는 다른 감정이라는 걸 제대로 깨달은 것 같아. 다시 예전의 다정했던 A를 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솔직히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근데 그 이야기를 하면 A가 상처를 받을 게 분명하고. 또 억울해지기도 했어. 나는 A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B와 싸운 이야기를 비밀로 하고 있는 건데, A는 그것도 모르고 얘기 안 해준다고 삐친 거라고 생각하니 억울하더라고. A는 내가 심술을 부릴 때마다 와서 풀어줬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또 기분 나쁜 티를 냈어. 너만 화낼 수 있냐, 나도 화낼 수 있다고 하면서 냉전 선언을 해버렸지.
이름없음 2022/10/10 01:58:25 ID : a07apO3xxyK
주변 친구들이 오히려 난리가 났어. 알콩달콩 유사 커플처럼 지내더니 오늘은 왜 따로 다니냐고, 둘이 싸웠냐고 막 물어보더라. 나는 내가 잘못해서 A가 화가 났다고 얘기하면서 다가오는 친구들한테 볼맨소리를 했어. 그러다가 선즙필승을 시전해버렸지. 진짜 양심에 손을 얹고 울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근데 A가 나를 봐주지 않는 게 너무 속상했어서 눈물이 나더라. 내가 우니까 자는 척 하고 있던 A가 갑자기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한테 오더라. A는 왜 우냐고, 울지말라고 하면서 휴지를 쥐어줬어. 그리고 우는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엎드려 있는 내 귀에 대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하고 사과하더라. 사실 A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나를 둘러싸고 있던 애들은 오오~화해했다 하면서 웅성거렸고, 나는 일이 이렇게 일단락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의도치 않게 내가 울어버렸으니, A는 더이상 이 일에 대해서 내게 묻지 않을 거고, 그럼 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
이름없음 2022/10/10 02:14:03 ID : Xs3vjAqjfU0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2/10/10 02:15:09 ID : a07apO3xxyK
진짜로 A는 하루를 보내며 그 일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았어. 대신 그날은 어김없이 나를 데려다주는 길에 근처 놀이터 벤치에 잠깐 앉아있자고 하더라. 원래 A는 내 옆에 앉아서 쉴새 없이 떠들던 애였거든?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예쁘다고 하거나, 내가 샴푸 하나만 바꿔도 향 바꿨네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내던 앤데, 그날엔 그냥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앉아 있더라고. 오히려 내가 당황해서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았어. 아무말이나 막 하는 나를 쳐다보면서 A는 간간히 미소를 지었어. 그렇게 적막 속에서 A는 "잠깐만 누워도 돼?"하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A는 내 무릎에 누워서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조용히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어.
이름없음 2022/10/10 02:15:21 ID : a07apO3xxyK
한참 뒤에 A가 일어나더니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묻더라고. 혹시 자기를 미워하냐고, 자기의 행동이 여전히 싫고 부담스럽냐고 그렇게 물었어. 알고 보니까 A는 B가 호모포비아이고, 자신의 행동을 싫어하는 걸 다 알고 있었더라고. B는 A랑 절친인 C랑 D한테도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고, C랑 D가 그 사실을 A한테 알려줬었더라. 더 마음이 아팠던 건 그때 B가 말을 전하면서 "스레주는 레즈비언 아니라고 하더라. 그런 거 안 좋아한다. 근데 A가 괜히 애인인 척 해서 부담스러워 한다"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더라고. C랑 D는 그 얘기를 A한테 전해줬고, A는 그것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 고생을 했던 거지. 너무 놀라서 나는 펄쩍 뛰면서 내가 너를 왜 싫어하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얘기했어. 그러자 A는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니 그럼 됐다며 고개를 푹 숙이더라. 불편하게 안 할 테니 미워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눈이 너무 슬퍼보여서, 그날은 내가 A를 놀이터 앞에서 버스정류장까지 다시 데려다줬어. 버스를 타고 축 처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그게 그렇게 속상하더라.
이름없음 2022/10/10 02:27:52 ID : a07apO3xxyK
그 소동이 있고부터 A는 정말로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처럼 행동했어. A는 전처럼 많은 애정표현을 하지도 않았고, 반 애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플러팅 하는 행동도 멈췄어. B 같은 애들에 의해서 소위 '남자같은 행동'이라고 명명되는 모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기 시작한 거야. 그때는 여름이었고, 나는 냉방병에 잘 걸리는 체질이라 A의 겉옷을 자주 빌려 입었거든. 원래 A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추워하면 겉옷이나 담요를 건네 줬는데, 그런 일도 드물어졌어. 체육 시간이 끝나면 항상 나한테 캔 음료를 사와서 건네주곤 했는데, 그때부터는 다른 애들 음료수도 같이 사오더라고. 마치 모두의 것을 챙겨오면서 내 것도 챙겨준다는 듯이 음료수를 건네주더라. 매일 같이 데려다주던 집도 "같이 가줘도 돼?"하면서 물어보더라고.
이름없음 2022/10/10 02:32:20 ID : a07apO3xxyK
내가 왜 이렇게 기가 죽어 있냐고, 눈치 보지 말라고, 내가 뭐 잘못했냐고 달래도보고, 애교도 부려보고, 사과도 해봤지만 A는 쉽게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았어. 사실 부담스럽고 불편했던 건 초반 잠깐이었지, 나는 이미 그 애의 다정함에 익숙해진지 오래였거든. 그게 한 순간에 사그라드니 미칠 것 같았어. A와 스레주 사이를 이렇게 만든 B가 미칠듯이 미웠고, B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A에게 전해준 C, D에게도 화가 났어. 또 전해들은 말을 듣고 혼자 마음 고생하고 아파했을 A한테도 화가 나더라.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진짜 화를 내야 하는 대상은 B인데, A한테 섭섭한 마음이 더 커져갔어. 나는 그때 이미 A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고, 또 내가 여성을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혼란을 겪어는데, 그걸 몰라주고 내가 자기를 미워할까봐 오해하고 걱정까지 한 A가 너무 미워졌던 거지. 그렇게 그런 못난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고, 결국 어느 늦여름 나는 절대 저지르면 안 되었을 그런 짓을 저지르게 돼.
이름없음 2022/10/10 02:34:56 ID : nCqkre5dUY1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2/10/10 02:48:51 ID : Xs3vjAqjfU0
이런 썰 너무 좋아...더 주세요...
이름없음 2022/10/10 03:32:55 ID : TQlg1veJWry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2/10/10 03:36:21 ID : xyJXvA6rvwn
ㅂㄱㅇㅇㅂㄱㅇㅇㅂㄱㅇㅇ
이름없음 2022/10/10 03:36:29 ID : xyJXvA6rvwn
ㄹㅇ…
이름없음 2022/10/10 09:40:43 ID : 8rs04E05TQt
ㅆㅂ.. 더 줘... ㅈㅂㅠㅠㅠㅠ
이름없음 2022/10/10 13:07:25 ID : 1g1u8mLe6nX
ㅂㄱㅇㅇ,,,더주세요ㅠㅠㅠㅠㅠ
이름없음 2022/10/10 16:19:52 ID : rwE7huq3WnW
ㅂㄱㅇㅇ.. 빨리 더 풀어줘요 …
이름없음 2022/10/10 21:57:33 ID : q47y5asmLgo
왜...어디간거야 왜 안써주는거야 왜.....
이름없음 2022/10/10 22:04:58 ID : i62NxPbhcMq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2/10/10 23:40:21 ID : vh89xPiqqp8
미쳣나바 보고있어 너무 좋아...
이름없음 2022/10/11 22:04:37 ID : a07apO3xxyK
헐 이렇게 많이 봐줄 줄 몰랐네. 너무 늦어서 자러 갔었어. 이야기는 거의 끝나가니 더 풀어볼게.
이름없음 2022/10/11 22:08:55 ID : a07apO3xxyK
A가 평소에 잘 해주던 애정표현을 자제하니 매일 매일 말라가는 것 같았어. A는 매순간 조심했고, 그러면서도 쾌활한 성격은 유지하고 있었지. 나는 이제 A가 나 말고 다른 친구들에게 더 다정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어. 질투심은 심해져만 갔어. 유일하게 마음이 편한 시간은 A와 함께 하교하는 시간이었어. 다행스럽게도 A는 여전히 나를 집까지 데려다줬어. 학교에서와 달리 학교길에서는 언제나 다정함을 유지한 채로 나를 데려다줬어. 우리는 예전보다 자주 놀이터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고,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곤 했어. 때론 집에서 왜 이렇게 안 들어오냐는 전화가 올 때까지 벤치에 앉아 있곤 했지. 이렇게 거리가 멀어진듯 다시 가까워진듯 하는 시간이 지나 시간은 가을로 향해가고 있었어.
이름없음 2022/10/11 22:13:01 ID : a07apO3xxyK
그러던 어느 밤, 놀이터 벤치에 앉아 A와 나는 약속을 하나 했어. 거창한 건 아니었고, 어디서나 있을 법한 그런 약속이었지. 바로 9월 모의고사가 끝나면 함께 혜화에 가서 놀자는 거였어. 보통 고등학생들이 놀듯이 쇼핑도 하고, 카페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기로 했지. 물론 고3이 9월 모의고사를 치고 놀러 다니는 것은 사치라고 얘기하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어. 그 날만큼은 신나게 놀기로 그렇게 약속했지.
이름없음 2022/10/11 22:21:57 ID : a07apO3xxyK
모의고사 날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어. 고3의 시계는 상대적으로 빨리 가더라구. 그리고 그 날 나는 A와 영영 헤어지게 돼. 가채점이 끝날 때만 해도 그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야. A는 역시 좋은 성적을 받았고, 나도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6월 모의고사 때보다는 한층 오른 성적을 받을 수 있었어. 우리 둘은 놀러가는 데 좋은 기분으로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사건은 A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에 벌어졌어. 모의고사를 칠 때, 우리 학교 애들은 보통 체육복을 입곤 했거든. 여고에서 애들은 치마로 가린 채로 훌렁훌렁 옷을 갈아입곤 하는데, A는 특이하게도 그런 걸 못견뎌했어. 왜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아마 A가 가슴을 치거나 엉덩이를 치는 등 여고생들이 하는 이상한 장난들도 질색팔색 했던 걸 보면 같은 맥락이지 않았을까 싶어.
이름없음 2022/10/11 22:25:41 ID : a07apO3xxyK
여하튼 그렇게 A가 옷을 갈아입으러 화장실에 간 사이, B, C, D가 꺅꺅 거리면서 난리가 난 거야. (B의 뒷담 사건 이후로 B는 나랑은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무리에 있긴 했어. A가 자기 때문에 친구 사이가 나빠지는 게 싫다고 나한테 부탁하기도 했었고, 고3이라 누굴 튕겨내고 하는 데 우리 모두가 큰 관심이 없기도 했었거든.)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C의 남자친구가 C를 데리러 왔는데, 친구 둘과 함께 왔다는 거야.
이름없음 2022/10/11 22:26:21 ID : wk7cIIFeL83
ㅂㄱㅇㅇ 동접인가봐
이름없음 2022/10/11 22:27:15 ID : xRBbBbveHzW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2/10/11 22:30:59 ID : a07apO3xxyK
내가 C는 엄친딸이고,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애였다고 했잖아. 그래서인지 얘는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어. 걔(E라고 하자)는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남고를 다니고 있었지. 여고에서 남자친구가 있는 애는 부러움의 대상이거든. 남고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래서 남고에서 E의 친구들이 여소를 시켜달라고 졸랐고, 기어이 E를 따라가겠다고 해서 얘가 남자애 둘을 데리고 C를 데리러 오게 된 거지.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B랑 D는 자기가 가겠다고 하면서 화장을 시작하고 난리가 났어. 나는 수능도 안 친 고3이 남친은 무슨 남친이냐고 하면서 애들을 놀리고, 한편으로는 잘 갔다 오라고 얘기를 해줬어.
이름없음 2022/10/11 22:33:22 ID : wk7cIIFeL83
새로고침 이렇게 눌러본 적이 없다
이름없음 2022/10/11 22:37:41 ID : wk7cIIFeL83
어디갓아...
이름없음 2022/10/11 22:39:20 ID : a07apO3xxyK
근데 C가 갑자기 나한테 "스레주랑 같이 가면 좋겠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알고보니 E가 C한테 같이 다니는 친구들 사진을 받아서 자기 친구들한테 보여줬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얘기를 했던 거지. 나는 당연히 안 된다고 했지. A랑 선약이 있고, 예전부터 같이 놀러가기로 했었다고 얘기했어. 그랬더니 B, C, D가 지금 A랑 노는 게 문제냐고 하면서 면박을 주더라고. 지금 남자친구가 생길 수 있는 기회인데 왜 빼냐고 하더라. 그러더니 자기들이 A한테 말해주겠다고, 스레주가 남자친구 생길 기회인데 A도 가로막지는 않을 거라고 얘기하더라. B는 한 술 더 떠서 너는 레즈비언 아니라고 했지 않냐고, 놀러 가라고 얘기하더라고. 아마도 C가 나랑 가고 싶다고 해서 열이 받았거나 뭐 그랬겠지.
이름없음 2022/10/11 22:41:27 ID : wk7cIIFeL83
;; 안가면 레즈비언인건가
이름없음 2022/10/11 22:43:35 ID : a07apO3xxyK
그때 A가 돌아왔고, B, C, D는 한 목소리로 지금 난리 났다고 떠들기 시작했어. 왜 이렇게 화장을 하고 있냐고, 너네도 남자친구 생겼냐고 농담조로 묻는 A에게, D가 "우리 곧 남자친구 생길 거다"라고 이야기를 하더라. 그러더니 내가 말릴 새도 없이 E의 친구가 스레주 좋다고 했다고, 여소 시켜달라고 했다고 얘기하면서 오늘 선약 깨는 거 어떠냐고 물어보더라. 나는 그때 A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나를 데리고 가 주기를 기대했어. 근데 A는 분위기를 보더니 나한테 나지막한 목소리로 "네가 결정해"하고 말하더라. B, C, D는 한 목소리로 '남친! 남친!'을 외치고 있었고, 나는 A를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어. 실제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지 모르지만, 그 시간이 나한테는 수천 년 같았어. 그때는 왜 그렇게 바보같이 무서운 게 많았을까. 그날 내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아직도 많이 후회스러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분위기를 살피던 A는 한 마디를 던지고 나가더라. "그래, 놀러 가."
이름없음 2022/10/11 22:44:32 ID : tulcspalg3S
아.......ㅠㅠㅠㅠ
이름없음 2022/10/11 22:47:28 ID : a07apO3xxyK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나도 마음이 너무 불편했어. 그날 C, D와 남자 무리들과 함께 홍대에 가서 상호가 기억나지도 않는 싸구려 파스타집에서 밥을 먹었는데,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체했다는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돌아와서 A한테 엄청나게 전화를 했지. 카톡도 몇 십 개를 보냈던 거 같아. 그런데 A는 전화를 받아주지도, 카톡을 읽어주지도 않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혜화로 다시 가봤지만 당연히 A는 없었고, 그날 나는 길거리에서 엉엉 울었어. 집에 가서도 울음이 멈추질 않아서 왜 그러냐고 묻는 엄마한테 모의고사를 너무 못 쳤다고 둘러댔지.
이름없음 2022/10/11 22:50:40 ID : wk7cIIFeL83
아ㅠㅠㅠ스레주야........ 망설임 없이 A에게 갔어야 했어
이름없음 2022/10/11 22:53:58 ID : a07apO3xxyK
그 다음 날 A도 나처럼 퉁퉁 부은 눈으로 등교했더라. 그게 너무 미안해서 나는 또 눈물을 참느라 애써야 했어. 아마 A는 나보다 더 많이 상처받고 더 아파했겠지. 지금도 그게 너무 미안해서 이렇게 가을 바람이 불 때면 A 생각이 나. 여하튼 그날부터 A는 나와 철저하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더라. 당연한 일이었겠지. 또 나뿐만 아니라 모든 친구들과 철저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어. 아침에 학교를 와서 야자가 끝날 때까지 문제집만 들여다보거나, 아예 엎드려 있었어. 점심도 먹지 않았고, 친구들한테는 배 안고프다고 자고 싶다고 얘기하더라. 내 카톡은 읽음으로 바뀌었지만, 어떤 답장도 오지 않았어. A는 잘 해오던 영어 그룹 과외에서도 빠져 나갔어. 과외 선생님께 남은 시간은 혼자 공부하며 복습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더라고.
이름없음 2022/10/11 22:55:37 ID : wk7cIIFeL83
내가 다 후회스럽다
이름없음 2022/10/11 22:57:34 ID : a07apO3xxyK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A는 서서히 다른 친구들과는 말을 하기 시작했고, 친구들을 웃겨주기도 하고, 맛있는 걸 사다주기도 하는 예전의 모습을 조금씩 찾아갔어. 그런데 여전히 나한테는 한 번도 웃어주지 않더라. 모든 게 내 잘못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또 서운하고 슬퍼서 A한테 내 나름대로 엄청 매달렸어. 춥다고 옷 벗어달라고 칭얼대보기도 하고, 집에 데려다달라고 하기도 하고, 얘기 좀 해보자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울기도 했어. 그럴 때마다 A는 내 말을 씹지는 못하겠는지 항상 "미안"하고 교실을 나가버렸어.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나도 A한테 말 거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게 됐지. 그때 칭얼거리면서 말하지 말고 곧바로 사과를 했으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나는 아직도 그게 종종 후회가 돼.
이름없음 2022/10/11 22:58:26 ID : wk7cIIFeL83
혹시 이야기가 끝나게 되면 말해줘
이름없음 2022/10/11 23:00:27 ID : a07apO3xxyK
그렇게 고3의 시간은 흘러 흘러 수능 날이 가까워졌어. 수능이 다가오면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은 극도로 예민해져서 무슨 일이 아니더라도 침묵을 지키게 되거든. 수업 시간은 다 자습시간으로 대체되고, A도, 나도, 다른 친구들도 조용히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만 내는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이 되었지. 수능 하루 전인가 이틀 전인가 예비소집?을 했던 것 같은데, A랑 나는 같은 학교로 가게 됐어. 반 친구들 중 절반 정도가 같은 학교였고, 자기가 수능칠 학교를 미리 답사해보는? 차원이었던 거 같아.
이름없음 2022/10/11 23:03:26 ID : rwE7huq3WnW
필력 개좋다 …
이름없음 2022/10/11 23:04:46 ID : a07apO3xxyK
A와 다른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그 학교를 찾아 가는데, A는 일부러 나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손잡이를 잡고 서더니 이어폰을 꽂아 버리더라. 나는 그게 또 서운해서 울었고, 버스에 탄 반 친구들은 우르르 A한테 가서 이제 좀 그만 하라고, 화해 하면 안 되냐고, 자기들이 더 불편하다고 하면서 스레주 운다고, 달래주라고 하더라. 원래도 반 애들은 그런 말을 종종하곤 했는데, A는 그때마다 나 때문에 우는 거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 교실을 나가거나 엎드려버렸거든. 그래서 나는 그때도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어. 그런데 A가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니 얘기 좀 하자고 하더라.
이름없음 2022/10/11 23:06:29 ID : wk7cIIFeL83
헐헐헐헐 개설레 설렐 부분이 맞는건지 모르겠지만 심장 쿵쾅쿵쾅 난리났겠다 마지막 기회다
이름없음 2022/10/11 23:07:35 ID : wk7cIIFeL83
레전드 가보자고
이름없음 2022/10/11 23:09:34 ID : a07apO3xxyK
한편으로는 A가 드디어 나를 봐 줬다는 기쁨이, 한편으로는 A가 무슨 말을 할 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나를 감쌌어. 그래도 그때 나는 무슨 말을 하든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A는 예비소집이 끝나고 교문 앞에서 보자고 하면서 버스에서 먼저 내렸어. A가 나를 용서해주겠다고 한다면,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수능 만점을 받았을 때보다 더 기쁠 거라고 혼자 망상도 했었어. (어차피 만점같은 거 받지 못할 성적이었음) 다행인지 불행인지 A와 나는 같은 교실에서 수능을 치게 되지는 않았어. 나는 내심 아쉽기도 했지만, 또 내 존재가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 A의 수능을 방해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어.
이름없음 2022/10/11 23:22:18 ID : a07apO3xxyK
그렇게 A를 교문 앞에서 만났는데, A가 나를 보고 "오랜만에 얘기하네" 하더라.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제 A가 나를 용서해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동안 너무 얘기하고 싶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어. 그러니까 눈물이 확 쏟아지더라. 원래 내가 이렇게 울면 A가 어쩔 줄 몰라하면서 달래주거나 휴지를 찾아주거나 그랬거든. 근데 A는 엄청 차가운 표정으로 "알아"라고 하더라. 그때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실감했어. 내가 더 뭔가를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더라. 그래서 그 순간이 너무 무서워져서 주저 앉아서 엉엉 울면서 나도 슬펐다고,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던 거 맞는데 너무 힘들었다고 A한테 막 기대려고 했어. 그게 내 마지막 몸부림이었어. A는 몸을 한 발 뒤로 빼면서 "이렇게 될까봐 수능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잘 참고 있던 건데, 다 망했네"하면서 상자 하나를 주더라. 그러더니 수능 전날 이렇게 울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 어쩌냐고 하면서 보조 가방에서 후리스를 꺼내서 내 무릎에 덮어주더니 "그건 돌려줄 필요 없어. 버려" 하고 가 버렸어. 그게 A가 나한테 준 마지막 다정함이었어.
이름없음 2022/10/11 23:24:29 ID : wk7cIIFeL83
정말 따뜻한 사람은 그만큼 차가워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네
이름없음 2022/10/11 23:25:37 ID : rwE7huq3WnW
.
이름없음 2022/10/11 23:27:11 ID : wk7cIIFeL83
상자는 뭐가 있었을까
이름없음 2022/10/11 23:27:56 ID : a07apO3xxyK
집에 와서 열어 보니 수능 잘 치라고 빵집에서 파는 찹쌀떡 같은 거 있잖아. 그런 상자에 모찌 두 개가 들어있었어. 그때 당시에 딸기모찌가 한창 유행했었거든. 내가 A랑 친하게 지낼 때, 맨날 딸기모찌 먹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사왔었나 봐. 그걸 보고 또 한참 울었고, 안에 들어 있던 쪽지를 보고 또 한 바탕 울었어. 난 그 쪽지를 아직 버리지 못했어.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 하도 많이 봐서 외웠다ㅋ "스레주에게 그동안 없는 사람처럼 대해서 미안해. 그날은 내가 너무 비참해서, 그렇게 안 하면 견딜 수가 없었어. 미워했고, 미워할 건데 네 잘못은 아닌 걸로 하자. 그러니 이제 신경 쓰지 마. 수능 잘 쳐. A가."
이름없음 2022/10/11 23:28:57 ID : wk7cIIFeL83
하ㅏ........ 끝까지 다정하고 난리다 이밤에 울것같다
이름없음 2022/10/11 23:36:48 ID : a07apO3xxyK
"신경 쓰지 마"라는 말에서 오는 그 무심함 때문에 멍해져서 눈물만 나더라. 예전의 A는 말만 신경 쓰지 말라고 해 놓고, 신경 써달라는 티를 온몸으로 내던 애였거든. 근데 저 말을 읽으니까 이제 진짜 우리 사이는 끝났구나 싶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 사람이 너무 아프고 슬프면 한참을 멍하게 있게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렇게 우리 사이는 끝났고, 내 수능 점수도 조져졌고, 나는 일찌감치 재수를 결심하고 방학 때부터 재수학원 종합반에 들어갔어. (A는 시험 잘 쳐서 인서울 상위권 대학에 정시로 들어갔음)
이름없음 2022/10/11 23:37:22 ID : a07apO3xxyK
어쨌든 나는 수능을 조지긴 했지만, A 덕분에 내가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고, 비로소 바이로 정체화를 하게 됐어. 그후로 재수학원에서 남자친구도 사귀어보고(이러니까 또 수능 조졌지), 대학 와서는 퀴어 동아리에서 언니도 두 명 사귀어보고 그랬어. 그래서 그때의 기억을 많이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가을 바람이 부니까 어김없이 A 생각이 나네. 나는 아마도 그때만큼 나를 다정하게 바라봐주던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아. A도 많이 자랐을 거고, 아마 A는 나를 미워할 필요가 없을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겠지? 어쩌면 나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고. 그래도 A가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라도 나를 한 번은 다시 만나준다면 좋겠다. 그때의 미숙함을 사과하고 싶어지는 밤이네.
이름없음 2022/10/11 23:37:37 ID : a07apO3xxyK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이렇게 많이 읽어줄 줄 몰랐는데, 다들 봐줘서 고마워!
이름없음 2022/10/11 23:38:16 ID : wk7cIIFeL83
신경 써주지 곧 레전드 가겠다
이름없음 2022/10/11 23:39:32 ID : wk7cIIFeL83
잘 읽었어 실시간으로 새로고침 누르면서 재밌게 본 스레는 이게 처음이다 이러니까 또 수능 조졌지 보고 피식 웃었다 글 재밌어 정말
이름없음 2022/10/11 23:41:16 ID : a07apO3xxyK
재밌게 봐줘서 고마워! 읽어주는 사람 있어서 글이 더 쭉쭉 써졌나봐
이름없음 2022/10/11 23:42:35 ID : rwE7huq3WnW
실시간으로 스레 본거 처음인데 진짜 레전드다 글 무슨 웹소설 뺨치게 잘쓰고 여름이었다 재질이라 완전 신나게 읽었어 진짜 스레딕에서 본 것들 중 탑3에 드는듯 .. 나중에라도 둘이 다시 만나게 된다면 조금 더 나은 관계로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랄게
이름없음 2022/10/11 23:44:10 ID : a07apO3xxyK
할머니가 되어서라도 좋으니 한 번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 읽어줘서 고마워! 좋은 밤 되길
이름없음 2022/10/12 01:50:43 ID : 9bbg40oE62L
와… 이게 맞아? 나 진짜 눈물나
이름없음 2022/10/12 07:22:41 ID : wk7cIIFeL83
레전드 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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