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약간이라도 진보하고 싶어서

일기 2018/03/14 17:45:16

#1 이름없음 2018/03/14 17:45:16

어린 시절에는 내가 뭔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성인이 될 무렵에는 이미 대단한 일을 해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였다. 20살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상처받기 쉽고 말 잘 못하는, 내 감정을 정리하는 법조차 모르는 그냥 꼬맹이다. 여전히 게으르고 여전히 겁이 많다. 현실도피성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를 좋아한다. 여느 젊은이들과 같이 세상의 형태에 화를 내지만, 그것을 바꾸기 위해 뭘 어떻게 해야겠다고 결심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외국에 나가 일할 줄 알았다. 그리고 행복하고 멋지게 살 줄 알았다. 내가 동경했던 사람들을 보며 언젠가 저렇게 되겠노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사람들 역시도 결국에는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와 함께 내가 결코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 역시도 알게 되었다. 대학에 합격했다. 원하는 대학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서울 내 4년제, 그럭저럭 명문대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대학이다. 새로 산 옷을 입고 새로 산 가방을 매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이제는 뭔가 새로운 세상이 내 눈 앞에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내가 그곳에서 알게 된 것은, 결국 그곳에서도 나는 '나'일 뿐이라는 사실이였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2 이름없음 2018/03/14 17:49:58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아마,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아이의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고, 주위에서도 계속 산타는 없다고 수근거렸을 터다. 하지만 계속 조용히 마음 속에는 믿음을 품고 있던 꼬마가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 된 거다. '산타는 없다'라고. 결국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다. 산타는 전에 그랬듯이 여전히 계속 없을 것이다. 꼬마 역시도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래도 뭔가 허하다. 문턱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뭔가 목표를 달성한 순간, 그 문턱을 넘은 순간 무력감이 몰려오는 현상이다. 나는 대학에 오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지금 공허함을 느낀다. 내가 노력한 게 결국 이런 것 때문인가 하는.

#3 이름없음 2018/03/14 17:56:54

나는 어린 여자이며, 여자대학에 다닌다. 공격받기는 완벽한 대상이다. 그리고 나한테 여대생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순간부터 나는 이 사회의 미소지니를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난 최근 생전 처음으로 남녀차별의 타깃이 되었고, 그 즉시 끔찍한 공포가 몰려왔다. 그건 그 생각없는 언어와 그 사람의 표정 때문만은 아니였다. 그 순간 직감적으로 내가 앞으로 이런 취급을 자주, 언젠가 둔감해질 때까지 자주 받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도무지 이 사회를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내가 꿈꾸었던 미래가 가로막힐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선배들은 계속 싸우고, 바꿀 것이며, 우리는 남녀차별이 종식되는 순간 그 과도기에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물 안 잔잔한 파도만 알고 있던 개구리는 처음으로 바깥 숲에 내던져졌고, 아직 이 세상이 그다지 상냥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공포라는 것은 우울하다.

#4 이름없음 2018/03/14 18:03:06

무력함, 절망감, 공포. 분노나 증오라는 감정보다 먼저 두려움이 찾아들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난 원래 남을 잘 미워하지 못하니까. 내가 착하다거나 그딴 이유 때문은 아니다. 증오라는 감정은 본래 최소한의 자존감이 뒷받침되어야 나올 수 있는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서, 분노할법한 그 상황에 대해 나의 책임보다는 그 사람의 책임이 더 크다고 믿을 수는 있어야 한다는 거다. 내 바닥을 치는 자존감은 그런 걸 허락하지 않는다.

#10 이름없음 2018/03/15 01:26:17

내일부터는 게으르게 살지 않아야지... :3

#14 이름없음 2018/03/16 00:51:08

>>13 어... 보는 사람이 있었구나! 그렇게 말해 주니까 뭔가 기쁘면서도 많이 쑥쓰럽네... 으음, 내가 표현을 덕지덕지 바르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영 글이 매끄럽지 못한 것 같더라고. 사실 저건 감성포텐 터져서 갈겨쓴 흑역사야... ;-; 조금씩 고쳐보려고 해.

#15 이름없음 2018/03/16 01:00:26

대학수업은 재미있다. 내가 사회학을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즐거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미디어는 어떻게 사회와 상호작용하는가? 인간은 사회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게 되는가? 분명 내가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문용어로 정리하고, 그 흐릿한 개념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를 배우는 것은 정말 즐겁다. 무우우울론 내 이런 감정이 무의식적인 쇼비니즘에 어느 정도 기인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뭐 괜찮아, 실제로 잘난 척만 안 하면 되잖아! 내 무의식의 저열함이 내 행동을 바람직한 쪽으로 교정해 준다는 게 조금 웃기다. 하지만 사회학을 배우고 있으며, 이후 언론계나 NGO 쪽으로 진출하고 싶은 내가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큰 고민이다... 아직도 친한 친구가 없어. 그냥 내 일만 열심히, 잘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도록 하자. 내 잣대로 남을 정의하지 말 것, 말하기보다는 들을 것, 내 의견이 틀렸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을 것. 항상 기억하자.

#16 이름없음 2018/03/16 01:01:27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나뭇가지에 매우 옆은 노란색이 도는 것을 보았다. 봄이 오려나 봐.

#17 이름없음 2018/03/16 01:09:14

겨우내 잘 벼린 칼마냥 날카롭고 매서웠던 바람이 말랑해졌다. 겨울비와 봄비는 그 냄새부터 다르다. 봄에는 항상 가슴이 설레온다. 누렇게 말라버린 풀잎 사이로 여린 새싹이 고개를 들고, 그렇게 하나 둘 솟아나는 연둣빛 잎사귀들을 신기해하다 보면 어느샌가 세상은 밝게 빛나는 연녹색으로 물들어 있겠지. 옛날 사람들은 분명 봄을 보며 신의 존재를 믿게 되지 않았을까. 모든 것이 잠들어버렸던 땅이 깨어나는 모습은 현대인의 시선으로도 충분히 경이롭다. 우리 집 뒷편에는 야생 제비꽃 군락이 봄마다 피어난다. 올해에도 그 보라색 물결은 올 것이다. 제비꽃은 매년 피지만, 그 꽃이 피어나는 순간은 항상 짧아서 보는 이에게 아쉬움을 남기게 한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이 내가 봄을 기다리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사시사철 피어있는 꽃에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나.

#18 이름없음 2018/03/16 01:29:37

나는 내가 동경하는 투사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유약하고, 내가 꿈꾸었던 예술가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투박하고, 그렇다고 다른 뭘 잘 하는 것도 아니였다. 애매한 재능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없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많이 아쉬우니까. 내가 미술을 그만두었던 건 반쯤은 충동적인 결정이였다. 내가 그 당시 충격에 빠져 있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건 변명거리가 될 수 없으리라. 그래도 그 이후로 잘 이겨내 왔다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물어본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에 이렇게나 우울해질 수 있을지는 몰랐다. 평생 살아왔던 길, 그리고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길에서 튕겨져 나온다는 게 이런 감정을 수반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사실 처음으로 실감했다. 난 미술을 포기했구나. 이 감정이 혼란인지 공포인지 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낯선 영역에, 어쩌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아 버렸다. 진한 홍차를 마신 것처럼 입 안이 쓰다. 안 그래도 유약하고 겁 많은 나는 늘 그랬듯 겁에 질려 있다. 이미 지나간 수많은 어제들은 후회되고 앞으로 가야 할 앞날은 두렵다. 지금 내가 달리 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현실에 충실한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리라. 감정은 마음 속에서 낡디낡은 명주실처럼 빙빙 꼬여 얽힌다. 본디 그 하나하나에 이유와 이름이 있었겠지만, 이젠 복잡하게 헝클어진 수많은 감정들이 한데 뭉뚱그려져 '한없는 비참함과 우울함'이라는 애매하고 울적한 덩어리로 변해버렸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배부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나는 분명 지난 1년간 제법 인상적인 일을 해냈고, 진득한 아쉬움은 남을지언정 설정해 두었던 목표를 이루었음은 분명하니까. 내 이성은 내가 나 자신을 한심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비참한 기분을 느낄 합당한 이유도 물론 없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입맛은 쓰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많이 슬프다.

#19 이름없음 2018/03/16 01:32:23

그리고 오늘 밤까지 우울해한 뒤에, 내일은 맛있는 커피를 먹을 생각이다. 그러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겠지. 그 뒤에, 밝은 마음으로 고민해 보도록 하자. 괜찮아. 아직 스물이다. 이젠 어리다기보다는 젊다고 불러야 하는 나이지만, 내게 아직 수많은 시간이 허락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분명 나에게 맞는 길이 있을 거야. 괜찮아. 딱 오늘 밤까지만 우울해하자. 실컷 자기동정과 모순, 끝없는 자학에 빠졌다가 오자. 그리고 내일은 혼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하자.

#20 이름없음 2018/03/16 01:42:21

막연했던 동경이 현실에서 나아가야 할 길로 나타난 순간 꿈 하나를 포기했음을 깨달은 순간 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부끄럽게 여겨진 순간 그냥 모든 것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어진 순간 에휴. 유우니 소금사막에 정말 가보고 싶다. 항상 그 꿈을 꿨었다...

#21 이름없음 2018/03/16 01:52:52

이성으로는 감성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궤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난 아직 굉장히 미성숙한가 봐. 감정을 꾹꾹 누른다거나 합리적이고 건조한 선택을 한다거나,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그냥 지금은 우울해할래 :( 딱 여덟 시간만.

#23 이름없음 2018/03/30 02:39:38

오랜만에 일기다. 난 많이 어리다. 그걸 얼마 전에 제대로 알았다. 난 아직도 내 감정을 다룰 줄 모른다. 기쁨을 속에 끌어안고 내 안을 환하게 밝히는 법도, 분노를 잘 조절해 효과적인(하지만 치명적이지 않은) 무기로 만드는 법도, 슬픔을 삭혀 단단한 결정으로 굳혀내는 법도 모른다. 내 감정은 단편적이고 한없이 가볍다. 한 순간 강렬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내 행동은 크게 변한다. 정말 어린아이 같다.

#24 이름없음 2018/03/30 02:41:03

건강하게 화낼 수 있는 법을 배우고 싶다. 착한 아이 콤플랙스가 정말 너무 심각하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무슨 말을 할 줄 모른다. 다만 상대방이 내 의중을 파악해 주기를 빌 뿐이다. 정말 어린애 같다. 오히려 거리가 조금 있는 상대에게는 내 의견을 건조하고 깔끔하게 피력할 수 있는데.

#25 이름없음 2018/03/30 02:42:15

학교에서 파는 브라우니 쿠키의 평가가 좋아서 사 왔다. 가족이 마음에 들어해서 많이 기뻤다. 표정을 숨기는 법도 잘 모르다보니, 동생이 그렇게 좋냐고 엄청 놀려댔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어.

#26 이름없음 2018/03/30 02:42:37

남미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건 내 오랜 꿈이다.

#27 이름없음 2018/03/30 02:43:34

Skillet 노래 정말 좋아. 신념과 용기에 대한 노래가 많아서 항상 응원이 된다.

#28 이름없음 2018/03/30 02:45:18

과... 과제해야 하는데... 영타가 느려서... ;-;

#30 이름없음 2018/03/31 00:42:15

>>29 안녕. 좋게 봐줬다니 기쁘지만 어쩐지 내가 사기를 친 느낌이야... 난 치열하지 않아, 나처럼 게으른 사람 없다구? :-: ㅎㅎㅎㅎ예쁜 말 고마워. 이 스레에 공감가는 말이 적혀 있었던 걸까, 내가 적은 레스들 중 어떤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내 안의 울적함이 아니라 사소한 기쁨에 공감했던 것이기를 바랄게. 레스주도 오늘 하루 수고했어. 더 나은 내일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좋은 밤 되기를 바라.

#31 이름없음 2018/03/31 00:46:19

수강 철회 깜빡하고 못했다아아아아아아아아!! 열두시까지라고 알았는데... 설마 여섯시까지였을 줄은...!! 이 교양을 안고 가야 한다니... 1학년 1학기 학점은 곱게 접어 하늘 위로 날아가게 생겼네. 안 그래도 선배들이 경고했는데. 여기 모인 너희들은 분명 너희 고등학교에서는 상위권이였을 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너희가 기본 스탯이고 더 잘난 사람들 많을 거라고... 니들이 고등학생 때 그래왔듯 A 당연히 받을 거라는 기대는 접으라고 했는데...

#32 이름없음 2018/03/31 00:55:18

내가 존경하는 친구가 사과를 받아줬다. 기억도 제대로 못하던 일이였지만 어쨌든 사과해줘서 기쁘고, 고맙다고 말했다. 기쁜 건 내 쪽이야. 무지는 죄의 이유는 될 수 있겠지만 면죄부는 될 수 없다는 걸알고 있어. 내가 생각 없이 휘두른 무지를 용서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