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스레더즈에서 제3장과 외전까지 연재되었으며 사이트와 함께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제0장과 제1장을 찾았으므로, 기억을 되살려 나머지 내용도 복구할 요량으로 스레를 세웁니다. 앵커판에서 연재되었던 이상, 이 글은 저뿐만 아니라 저 외의 참가자들과 함께 만들어졌음을 알립니다. 설정 오류를 메우는 등의 이유로 내용이 기존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하로는 제2장부터 연재됩니다. 이하 링크의 제0장과 제1장부터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https://www.evernote.com/shard/s399/sh/9be6d940-2861-4aef-b13f-22ea5bce937c/6399a3b14b3d7897dc74d6a324881353 (제0장 + 제1장)
합창, 수감된, 넥타이를 푼
+제2장 야구공이 있는 풍경 "...나." "일어나." "이새벽, 일어나. 오늘 파티를 열어야지." 새벽은 눈을 뜹니다. 머리맡에 익숙한 나무의 감촉이 느껴집니다. 무릎에 담요가 덮여 있습니다. 바람이 환한 빛처럼 교실에 가득이 번집니다. 분필 가루가 포말을 머금은 바닷물처럼 휘몰아칩니다. 새벽은 창문으로 눈을 돌립니다. 텅 빈 운동장이 보입니다. 해변도 아니고, 소금기 없는 공기는 말랐으나, 친근한 목소리에 새벽은 부력을 느낍니다. 책상 앞에 학생이 서있습니다.
새벽은 바로 꿈임을 직감합니다. 그는 산타처럼, 또는 산타의 자루에 숨어 그를 뒤쫓는 아이처럼 분명히 하늘을 날고 있었으므로. 학생은 얼음이 녹듯이 느린 새벽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티를 냅니다. 새벽이 묻습니다. "누구야?" "자다 깬 줄 알았더니 죽었다 살아났냐. 숨쉬는지 잠시 확인을 안 했더니 이런 불상사가." 학생이 팔짱을 끼지만, 방어적인 태도가 무색하게 웃고 맙니다. 장난기가 가득합니다. 소년의 겁먹은 목소리를 흉내냅니다. "도와줘, 누나. 길 잃었어." "어릴 적 일이잖아!" "봐아. 기억하잖아." 학생이 목소리를 얻은 공주처럼 폭소합니다. 교정의 고요함이 몸을 낮춰 절합니다. 새벽은 턱을 굅니다. 학생을 모를 리야 없습니다. 삼 년 전에 새벽의 옆집에 이사온 친구로 계속 어울려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은 그보다 더 오래 되었는데, 그들은 칠 년 전, 새벽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같은 놀이공원에서 같은 시간에 미아가 된 전적이 있었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사람 사이로 점점 더 걸어들어갔더니, 놀라워라, 때마침 터진, 과자들보다 더 수많은 색깔과 수의 폭죽에 눈이 뺏겨 그들은 폐관 즈음에야 심장이 화덕에 밀쳐진 부모에게 손이 잡혀 헤어졌지요.
"왜 여기야?" 새벽은 상자에 갇혀 매립지에 온 곰인형처럼 맥락이 낯섭니다. "전원 안 들어왔니. 110볼트에 꽂힌 헤어 드라이어 같다. 짐작해봐." "기억이 안 나는걸." "난 좀 더 넓은 의미로 말한 거야. 평일인데 여기 있을 이유가 뭐 있겠어?" 조금씩 기억이 돌아옵니다. 그들은 학생이 없는 등교길을 따라 학생이 없는 교문에 다다랐습니다. 그날이 개교기념일이었음을 머리보다 발이 먼저 알았지요. 하지만 칼을 뺐으면 하다못해 다른 칼이라도 베어야 한다며 학생은 새벽을 데리고 교문을 넘어갔습니다. 졸렸던 새벽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한숨 잠을 청했습니다.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새벽은 입가로만 웃더니 책상에 머리를 대고 눕습니다. 학생은 새벽이 조는 줄로 알고 칠판을 탕탕 칩니다. "평소와 다르네. 정체를 밝혀! 넌 필시 새벽이로 분장한 외계인이렸다." "그렇다는 증거는?" 새벽이 고개를 살짝 듭니다. 학생이 걸어오더니 자신만만하게 새벽의 상의를 잡습니다. "숨어들어오겠다면 사전준비가 철저했어야지. 우리 학교 넥타이가 아냐! 옆 중학교의 넥타이지!" 학생은 새벽의 넥타이를 풀더니 교탁 위에 던집니다. 새벽의 잠이 달아났음을 확인하자, 학생은 교탁 뒤로 성큼 걸어가더니 분필을 잡습니다. 줄을 그어 칠판을 둘로 나누고, 중앙보다 조금 위에 정형적인 문을 그리더니, 팔을 치켜 올려 맨 상단에 글자를 적습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고, 학생은 우리뿐이니, 이 학교는 우리 거야." 학생이 힘을 주어 흰 글씨를 눌러씁니다. 대문자로 생일 축하를 적습니다. "오늘은 우리 동생 생일이야! 우리, 세계 최고의 멍청이들끼리 머리를 모아 최고의 생일 잔치를 만들자! 왼쪽에는 준비물을, 오른쪽에는 무엇을 할지를 적는 거야." 대차대조표 같은, 하루 더 움직여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보이는 것만 같은 두 개로 나뉜 칠판을, 새벽은 응시합니다.
"교실에서 하겠다면, 책상과 의자로 왕좌를 만드는 것이 어때?" 새벽이 순서를 양보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듭니다. "채택! 집에서 이불을 들고 와서 장식해야겠다!" 학생의 손이 글씨를 남기고 움직입니다. 궁전, 그 밑으로 PNE 케이크와 폭죽을 적습니다. "우리 동생은 불꽃놀이라면 사족을 못 써. 쥐불놀이는 위험하겠으니 이걸로 만족하자." 학생은 끙 소리를 내더니 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양머리처럼 감습니다. "케이크 자르고 불꽃놀이라면 너무 심심한데." "학교 전체가 무대이니 추격전이 제격이겠다." 학생은 새벽의 말을 듣고 교실 한복판으로 걸어갑니다. 새벽과 하이파이브를 칩니다. "채택! 우리 동생에게 딱이야. 경쟁심이 강하니까." 그렇게 칠판이 채워집니다. 둘은 완성된 선과 문과 글자와 계획을 응시합니다. 지켜졌으면 좋을 그림들입니다.
"하지만 이불을 들고 와야 한다면." 새벽이 말을 흐립니다. 그들의 아파트는 학교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신선한 5월일지라도 그런 고행은 사람들의 눈을 너무 사로잡습니다. 칠판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며 빙빙 돌던 학생이 휴대전화를 높이 꺼내듭니다. "도움을 청하자. 여명 오빠한테 전화할게." "여명 형한테? 수업이 있을 시간이야." "내 부탁이면 수업도 빼고 와줄 거야." 학생이 표정에 신자 같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신호음이 들리더니 덜컥 남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쌤. 오늘 저희 좀 도와주세요." 여명은 학생의 과외 선생입니다. 새벽은 학생이 전화를 하는 모습을 단지 바라봅니다. "그래요. 오빠가 올 필요는 없고 저희가 그쪽으로 갈게요. 점심 때 갈 테니 뭐 좀 사주시고요. 좋아요. 다음 수업도 잘 부탁드려요." 예의 바른, 또한 거리를 벌리는 인사로 학생은 통화를 마칩니다. 새벽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함박 웃음을 짓습니다. "잘 됐어. 나가는 김에 밥먹고 장보고 오자. 여명 오빠도 파티에 참석시키고. 오후 4시에 운동장이 개방되니 그때 짐 가지고 들어오면 제격이겠네."
새벽은 '장을 본다'는 말을 들으니 문득 무엇인가가, 생일잔치에서 빼놓아선 안 될 무엇인가가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선물이 없었구나. 마침 추격전이고 하니 운동화가 어떨까 싶은걸." 학생은 어느새 교탁 위에 올라가 다리를 가위질하듯이 흔들고 있습니다. 내려오기가 귀찮은지, 학생은 분필을 잡지 않고 대답합니다. "채택! 우리 동생과 이미지가 겹쳐. 달림으로써 마음의 구멍을 잊으려 드는 폭주열차지." "썩 나쁜 성격은 아닌 것 같네." "도넛의 구멍은 도넛일까?" "하루키구나. 네가 준 책 읽었어. 구멍 없이 도넛을 먹을 수 없다면 도넛이겠지." 새벽의 지식은 대부분 학생이 알려준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학생은 지루해졌는지 다리를 흔들기도 그만둡니다. 박자를 맞추는 짓조차 아주 지루할 때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멸망하면 좋겠다. 나는 타자이고 타자는 지옥이니까." 학생이 허공을 올려다봅니다. 꺼진 조명입니다. 학생은 조심스럽게, 쓸쓸해지지 않을 속도로 교탁 위에 눕습니다. 교실 뒤쪽으로 돌아눕습니다. 새벽은 시야를 낮춥니다. 자신보다 앞서 쓴 사람들이 흔적을 남긴 책상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더럽혀야만 흔적을 남길 수 있나 봅니다. 학생은 점심 때까지, 잠시 쉬자고 말합니다. 누운 채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작지만 확고한 발성입니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노래가 계속됩니다. 시작을 말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하나, 끝을 말하기 위해선 이 네 단어로 충분합니다. 새벽은 책상 위의 선들을 봅니다. 갑자기 슬퍼집니다. 이곳이 꿈인 줄을 알고 있으므로. 지금 자신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학생이 현실에서는 죽었음을 믿지 않지만 짐작하고 있으므로. 부정하지만 죽었음을 상정하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금요일에 사태가 발발했을 때, 자신이 학생을 놔두고 도주해버렸으므로. 새벽은 엎드립니다. 무릎 위의 담요는 전혀 흩뜨리지 않고. 학생은 새벽을 깨우지 않습니다. 두 팔을 짚어 교탁 위에 앉더니, 이번에는 칠판을 보고 노래를 거듭할 뿐입니다. 같은 곡조를 다른 가사로. 여명을 만나러 이 교실을 떠날 때까지. 이것은 필시 새벽의 꿈입니다.
오... 갱신!
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스레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 이거 열심히 따라갔던 레스더 중 한 명인데 이거 날아가버렸을까봐 너무 걱정했는데 ㅠㅠㅠ 뒷부분 날아갔구나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복구할 수 있길 바랄게 진짜진짜로 재미있게 봤었고 앞부분이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스레더즈 진짜.... 백업시간도 안주고....... 스레주 힘내고 응원하고 있어...!! 고마워!!!!
기억해주셔서,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이전에 본 적이 없으신 분도 참여해주셨던 분도 모두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독립기념일이라고 근처 산에서 불꽃놀이가 열렸는데, 취재 가야겠다 생각만 하고 기껏 밤이 되니 치안이 걱정되어 못 갔네요. 소설 내에서 생일잔치 때 불꽃놀이 장면을 적는 것으로라도 추후에 만족해야겠습니다.
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행복한 꿈에서라면 자는 것이 악몽보다도 두려운 일입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꿈은 뒤집힌 상자의 유리잔처럼 깨지는 일이 잦으니까요. 잠을 자도 사라지지 않는 세계라면 그것은 악몽입니다. 그런 까닭에, 눈꺼풀을 열었을 때 바깥 풍경처럼 학생이 있는 교실이 보이자, 새벽은 내심 기뻤습니다. 잠을 자지 않고 눈을 감고 있던 학생과 일어서 교실을 떠납니다. 아직 굳게 닫힌 교문 철창을 넘습니다. 목적지는 학교와 상점가가 있는 도시 서쪽입니다.
대학으로 가는 길에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교복을 입고 정오에 외출을 하고 있자니, 규칙을 어기고 있지 않음에도 영화 페리스의 해방에서와 같이 일탈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인파에 쓸려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새벽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말 그대로의 햇빛입니다. 하루동안 밤 속에서 불을 밝히며 견뎌왔던 새벽에게는 의미를 가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길이 분주합니다. 낮은 자신이 지기 전에 모든 일을 끝마치라고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것만 같습니다. 호손 효과가 처음 발견됐던 실험도 그랬지요. 빛이 강할수록 성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관찰될 때 더 성실해집니다. 새벽이 앞서 가는 학생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놀이동산에서 만날 때만 해도 여러모로 더 어려보이던 학생은 이제 새벽을 끌고 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를 잠시나마 잃자 한번도 뺏긴 적 없는 것처럼 슬퍼하던 그녀의 부모는 별거하고 있습니다. 서쪽으로 걸어가면 그림자는 옆으로 늘어집니다. 발치의 짧은 그림자를 꾸준히 보다, 새벽은 가끔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잔상을 하늘에 새깁니다. 학생은 심심할 때면 새벽에게 끝말잇기를 걸었다가, 발걸음이 빨라지면 멈추기를 거듭합니다.
둘은 대학의 정문을 지나갑니다. 자동차가 주차된 선 없는 공터를 둘이 지나갑니다. 여명은 학교 도서관 안에 있다고 합니다. 새벽이 걱정합니다. "전화를 하는 것은 꺼려지네." "들어가면 되지. 자주 드나들어 사서 직원과 아는 사이야. 나만 믿어." 학생에 끌려 새벽은 강제로 나무 그늘을 밟고 갑니다. 정문에서 학생이 사서에게 익숙한 듯 손을 들어 인사를 합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일행이에요." 새벽이 따라가려 합니다. 사서도 문을 열고 있으나, 학생은 장난스럽게 새벽을 밀칩니다. "아니에요. 나 혼자 찾아올 테니까 가만 있어." 학생이 열람실로 향합니다. 새벽은 멀뚱멀뚱 서있습니다. 점심시간이라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쪽으로 비켜섭니다. 사서 직원은 학생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이미 알고 있는지 수긍하는 표정으로 웃습니다. 학생과 여명이 곧 내려옵니다. 반대편 문으로 가고 있어, 새벽은 급히 건물을 반 바퀴 돌아갑니다. "아, 새벽이구나." "안녕하세요, 여명 형. 들었다시피 생일 파티에요." "주인공은 우리 둘 다 모르는 사람인가?" 여명이 자신과 새벽을 지시하며 학생에게 묻습니다. "제 동생이니, 오고가며 보았을지는 몰라도 사실상 초면이지요." 학생이 둘을 바라보며 뒤로 걷습니다. " 준비나 빨리 끝마치자고요. 식사가 먼저고, 생일 선물을 사면, 마지막으로 쌤 집에서 이불 좀 빌려와야해요." "이런. 오랜만에 기숙사에서 집으로 가는데, 가족들은 다 나가있을 시간대잖아." 여명이 한숨을 쉽니다. 가족을 등한시하는 자신이 미안한 듯합니다.
정오, 어느덧 그림자가 밟힐 것을 신경쓰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시간대가 되었으므로, 셋은 서둘러 점심 식사부터 하기로 합니다. 학생의 주도로 버거킹에 들어갑니다. 체면이 있는지라 여명이 지갑을 꺼냅니다. 여명부터 차례로 주문을 합니다. "와퍼. 단품으로요. 콜라도 됐어요." "불고기 와퍼요. 물론 세트에요." 학생이 끼어듭니다. "간단히 와퍼 세트로 주세요." 새벽이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일행이에요." "아니에요." "또 이러기야?" 새벽이 학생을 찌릅니다. 여명이 빨대를 뽑더니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감자튀김을 트레이에 쏟아 탁자 한복판에 모읍니다. 간단한, 식사 속도를 늦추기에는 충분한 잡담이 시작됩니다. 새벽과 학생이 정한 준비물을 여명이 읽습니다. 궁전, PNE 케이크, 폭죽, 이불, 그리고 운동화. 여명의 손가락이 종이를 가리킵니다. "다 좋은데, 이 PNE 케이크란 대체 뭐냐?" "Price not economic! 비싼 케이크요!" 학생이 곧장 답합니다. "왜 이렇게 줄임말을 쓰니. 물론 간결함은 통속적인 미덕이지만." 여명이 불평하더니, 학생의 동생에 대해 묻습니다. 학생은 뒷담화를 시작하려는지 힐끗 미소를 짓습니다.
아우구스틴 노래도 오랜만이다ㅠㅠㅜㅜㅠ행복해!
기억해주셔 감사합니다. 이 스레 이후로 제게도 아우구스틴 노래는 특별해졌습니다. 스레딕에 온 것도 소설 '악령'에서 그 노래가 나온 탓에 기억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중학교 2학년. 2003년 5월 23일 출생." 학생이 동생의 신변을 읊습니다. "수학을 잘해요. 전에 확실한 지식에 매달리는 것은 소통을 바라는 욕망에서 온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그제야 그랬구나, 싶더군요." "하긴, 실험과학이란 놈은 칼 전에 말을 꺼내자고 만들어졌어. 그게 역사야." 여명이 동조합니다. "동생이래도 남이잖아. 그렇게 속을 잘 알겠어?" 새벽이 궁금해 묻습니다. "걔 마음이야 동화책처럼 쉽게 읽혀." 학생이 말합니다. 빨대로 음료를 휘젓습니다. "자기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고 해. 성적도 좋고 운동도 잘하지." "천재인 편이야?" 새벽이 되묻습니다. "아니. 노력의 결과야. 혀를 뱀의 것으로, 심장을 석탄으로 바꾸는 수준의 노력. 한 번 잘한다고 소문이 나면 변화할 여지가 없어져. 끝까지 일관된, 간단한 사람이 되어버리지." 새벽은 학생이 말한 이미지를 그려보려 합니다. 그 나이라면 이해되지 못함을 자랑거리로 여기는 일이 흔한데,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걸까요. "누구나 신비로운 부분이 필요한데. 만들어내지 않아도 이미 밤 같은 부분이 있는데. 말만 듣자니 너무 불을 밝히려 하는 것 같구나." 이미 식사를 마친 여명의 말입니다. 학생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탕진되지 않으니, 걔는 걔대로 죽 살아가면 돼요. 고등학생이 되면 바뀔 거니까. 그게 이치죠." 학생이 말을 거둡니다. 그대로 이만 의자에서 일어설때까지 입을 다뭅니다. 새벽이 감자를 집을 때마다 학생을 훔쳐 봅니다. 어째서인지 슬퍼보입니다. 감자 튀김이 바닥나며 난 구멍으로 듬성듬성 빨간 트레이가 보입니다. 감자가 사라지자 구멍도 사라집니다.
셋은 망설임 없이 대형마트로 갑니다. 여명이 폭죽을 찾으러 올라간 사이 새벽과 학생은 케이크를 살핍니다. 학생은 새벽이 고민하던 시간에 시식용 빵을 뜯어먹다가 곧장 고구마 케이크를 고릅니다. "중학생 입맛에 괜찮겠어? 초콜렛이 적당할까 싶었는데." "그건 네 입맛이고. 우리 자매 입맛은 이쪽이야. 초콜릿이라니, 귀여워라." "나이도 같으면서." "그래봤자. 네 입맛은 나보다 삼 년은 뒤떨어졌어." 둘이 투닥대며 여명이 내려올 에스컬레이터로 걸어갑니다. 여명은 장난감 폭죽을 여러 종, 캔디 가게에 들어간 아이처럼 안고 있습니다. 밤의 불꽃놀이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기대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나 봅니다.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제의를 하는 것만 보아도요. "나도 참가해야겠지. 불을 붙여야 하니까." "라이터라면 동생이 갖고 있어요. 담배는 안 피지만." 학생이 말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니. 불을 붙이는 쪽이 문제야." 여명이 투정을 부립니다. "아예 생일잔치도 하지 말고 선물로 하나, 짜잔, 개당 만 원짜리 생일잔치를 주지 그러니. 이벤트 회사에 있을 테니." "제 기억이 맞다면 갖고 있다는 거니까. 혹시 모르니 와주세요." 학생이 거리감 없이 말합니다. 미래의 일이라면 너그러워지는 사람 마음입니다.
마지막 준비물은 왕좌에 쓰일 이불입니다. 운동화와 폭죽, 케이크를 들고 상점가 근처의 아파트로 갑니다. 여명이 집열쇠로 문을 엽니다. 숨기 위해서가 아니라 덮기 위해 쓰일 이부자리를 한바탕 꺼냅니다. 최대한 얇은 이불을 위주로 고르지만, 부피가 상당합니다. 무거운 꿈이 아닌 거추장스런 꿈이 쉽게 포기되듯이, 현관으로 들고나오는 것마저도 주체스러운 모양입니다. "힘내세요." 새벽이 말합니다. "새벽아, 너 정말 인성이 나쁘구나. 같이 들어준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니." 학생이 장난을 치며 현관까지 걸어온 여명에게서 이불 일부를 넘겨받습니다. 새벽이 한 손으로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들고 다른 손으로 이불을 머리 위에 얹습니다. 정전기 덕분에 엉망이 될 머리가 벌써부터 눈에 선합니다.
열린 교문 옆으로 경비 직원이 빗자루질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이 먼저 성큼성큼 다가갑니다. "들어갈게요. 생일 축하 협회가 열려요." 경비 직원은 느리게 반응합니다. "상관은 없는데, 너무 시끄럽게 굴지만 말아." "교실 좀 뒤엎을게요." "내일 수업에 지장 없도록만 뒷정리 잘해. 돈도 안 주면서 일을 떠넘기기 일쑤라니까. 참, 술 먹지 말고. 감시하러 갈 테니." 학생은 고개로 여명을 가리키며, 보호자가 있으니 걱정 말라 당부합니다. 교실로 들어갑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주인공을 들이기 위한 준비가. "중요한 준비물을 빼놓은 것 같은걸." 새벽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케이크에 첨부된 생일칼도, 운동화와 같이 포장된 신발끈도 다 확인한 뒤에 한 말입니다. 여명이 툭 말합니다. "생일선물이 셋이 아니라 하나라 그런가?" "아참." 이렇게 놀라는 새벽을 학생이 한심하게 쳐다봅니다. "그게 아니지. 사람을 안 불렀잖아." "임금 노동자?" "주인공 말이야. 우리 동생." 교탁 위에 걸터앉아, 이번에도 전화를 높이 꺼내듭니다. 번호를 누르며 고민을 말합니다. "무슨 핑계로 부르지. 외계인 사냥이라 하고 분장한 둘을 쫓을까. 아니, 과학 밖에는 워낙에 관심이 없으시니 이를 어쩌나." 하지만 그 새에 전화가 연결되어 버립니다. 학생은 혀를 차더니 통화를 시작합니다.
"안녕, 우리 동생." 수화기 너머로 말합니다. 상대의 반응이 불퉁한지, 학생의 어조가 머쓱해집니다. "에에이, 저녁이나 먹자고." "안 내려가는 줄 알거든요. 너 오늘 집에 있잖아." "불만이 너무 많다, 너. 식사나 하자니까. 응? 내 얼굴 봐서." "보기 싫구나. 그러지 말고." 흥정이 시작도 전에 난관에 봉착했나 봅니다. 쩔쩔매던 학생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승부수를 던집니다. "내가 한가하게 이러는 줄 알아? 이유가 다 있어. 자매 간의 서열을 정하자." 이 단어가 먹혀들었나 봅니다. 상대는 자신을 더 성가시게 하지 말라는 어투인 것 같았으니까요. 학생은 교탁에서 내려와 사정 없이 돌며 사방에 총을 헛쏘는 시늉을 합니다. 총을 쏘는 시늉과 구별이 되지는 않지만요. "맞아. 앞으로는 귀찮게 안 할게. 네가 이기면 오늘이 마지막이 되지. 내가 이겨도 바뀌는 건 없고. 밑지는 장사라니까." 네가 질 리가 없다니, 학생이 상대의 말을 웃음을 섞어 따라합니다. 나름의 자극이 된 모양입니다. "흐음. 좋아. 아, 콧노래 아니거든. 우리 학교 알지? 2학년 1반 교실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저녁 6시에 와!" 전화가 끝나자마자 학생이 손을 높이 듭니다. 기지개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동작입니다. 비로소 새벽은 이것이 회상이 아닌 꿈임을 확실히 깨닫습니다. 한 달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나, 그때에 학생의 동생은 지방에 내려간 탓에 파티에 오지 못했습니다. 기억이 아닌 꿈입니다. 비극은 희극으로 반복될 수 있습니다. 한 철학자가 꼬집었듯, 비극은 정당한 두 측이 모두 양보하지 않음에서 성립하니까요. 지금으로부터 이어질 꿈이 희극이 될지는 순전히 앞으로의 선택에 맡겨져 있습니다. 꿈에서 깨도 후회하지 않을 각오를 미리 할 시점입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불로 덮인 책상과 의자는, 바닷속 괴물처럼 오르려는 사람을 휩쓸 것 같으나, 여명이 보증하는 바 굳건합니다. 세 사람이 이곳을 오르는 경쟁을 해도 안전할 것이라 자부합니다. 여명은 케이크와 운동화, 그리고 폭죽 더미를 이불 밑에 숨깁니다. 그대로 들어가려는 여명을 학생이 붙듭니다. "어디 가세요?" "추격전이니 숨어야지. 나는 뛰는 것이 질색이다." "저도 연기는 질색이에요. 무엇을 한다? 두 사람이 시합을 한다. 그런데 한 명이 위치를 안다면 무슨 소용이죠?" "그 말은 즉." "뛰세요." 학생이 여명보다 앞서 걷더니 교실의 앞문을 활짝 엽니다. "도망칠 곳이, 제가 찾으러 갈 곳이 많이 남았어요." "교실의 문은 다 잠겼을걸. 복도나 뛰어다니는 시합이 무슨 재미이니." 여명이 항변합니다. 새벽이 두 손을 꼭 쥐고 여명을 응원합니다. 하지만 학생은 주머니에 손을 넣습니다. "궁전이 만들어질 동안 손놓고 있지는 않았답니다. 경비 직원께 마스터키 두 벌을 빌려왔죠. 뭐, 교무실은 안 열리니 시도도 말고요." 둘은 얼떨결에 열쇠를 받고 맙니다. 동의한 격이 되어버립니다. 새벽이 시계를 훔쳐봅니다. 벌써 약속시간인 6시가 다 되어갑니다. 미룰 수가 없습니다. "가야죠." 학생이 말합니다. 여명과 새벽은 입이 많은 것처럼 한숨을 쉬더니 입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갑니다.
"항상 자신만만하다니까." 여명이 말합니다. "어느 돌이 움직일까 예상하고 있는데, 체스의 규칙을 모두 알아와선 수를 두는 느낌이죠." 둘은 중앙계단에서 둘로 갈라집니다. 새벽의 목적지는 컴퓨터실입니다. 의자를 빼내 데스크톱 밑으로 숨어듭니다. 어둡습니다. 우산 안에서처럼 시간 감각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시간은 흐릅니다. 어느덧 약속 시간이 되었는지, 한 층 위에서 다짐이 들려왔으니까요. 학생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없는 사람처럼 숨어있던 새벽은 화들짝 놀랍니다. 필시 동생의 것이겠죠. "더 이상 장난에는 안 놀아나. 낮잡아 보이는 기분이 어쩐지 알아야 안 이러지." 소리가 사라지자 빛도 한층 줄어듭니다. 검은 커튼이 물들어갈 때, 갑자기 컴퓨터실의 문이 열립니다. 빛이 새어옵니다. 학생도 동생도 아닌 경비 직원입니다. "누구 있니?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주렴." "아, 안녕하세요." 새벽이 기어나옵니다. "문을 잠구어야 하니 너무 늦게까지 있지는 마렴. 그나저나 무엇 하니?" "...생일잔치요." 진실입니다. "교실에 가니 웬 책상이 괴물처럼 쌓여있고, 넌 여기 숨어있고, 그런데 잔치라고?" "그렇네요." 새벽이 생각해도 어색합니다. 그때 직원 뒤에 실루엣이 보입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좀 잡혀주세요!" 학생입니다. 새벽은 서둘러 앞문으로 도망칩니다. "그러니까 지금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주겠니." "네. 잡혀주시면요." "생일잔치라던데." 직원이 엉거주춤 걸어가며, 바지춤에 달린 열쇠와 소지품을 점검합니다. 채하가 친절히 설명해줍니다. "네, 그러니 잡혀주셔야 해요." "요즘 생일잔치는 이렇구나. 하긴, 이런 날에라도 고독이 필요한 걸까." 경비 직원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다, 어느 새에 수긍합니다. 어찌 되었든 잡혀갑니다.
새벽이 새로 숨은 장소는 음악실입니다. 커버로 쌓인 장구를 드러내고 다행히 먼지가 적은 수납장 안에 들어가 문을 닫습니다. 열쇠가 바닥에 부딪혀 소리를 냅니다. 음악실 근처에서 언쟁이 들립니다. 학생과 동생의 목소리입니다. 새벽은 놀랍니다. 뛰쳐나와 둘을 살펴보기보다는 더 몸을 좁혀 앉습니다. "반칙이야! 왜 여기 선생이 잡혀와?" 동생의 목소리입니다. 학생은 능청스럽습니다. "홀수로 만들어야지. 그래야 승부가 나잖아. 승부 내기 싫어?" "규칙을 자기 멋대로 만들잖아! 항상 그래." "그러면 네 점수에 보태." 학생이 말합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가, 동생의 얼빠진 반응이 들립니다. "너무 가볍잖아." "일 점인걸." "아니, 태도가 너무 가벼워. 그래도 서열을 정하는 자리인데." 동생이 투덜대어 보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명백히 자신에게 좋습니다. 발소리부터 들립니다. "그래. 그럼 내가 한 명만 찾아도 이겨. 열심히 해, 언니." 곧이어 식은 목소리가 가라앉습니다. 학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숨가쁜 걸음, 이윽고 음악실 문이 열립니다. 방음이 되지 않는 음악실의 문이 닫힙니다. 새벽은 수납장 너머에서 인기척을 느낍니다. 저쪽도 이쪽의 인기척을 느낄까요.
갱신!
주말 동안 오지 못했네요. 모래, 수요일 밤에 다시 올 것 같습니다. 한국 시각으론 목요일 4시겠네요.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새벽, 너 보여. 나와 봐." 학생의 목소리입니다. 새벽은 악령의 장난에 길을 잃은 사람처럼 수납장 안에 더 단단히 숨습니다. 학생은 멈추어 서 주위를 둘러봅니다. 실패도 성공도 없다는 것처럼. 학생은 마침 눈에 들어온 피아노의 덮개를 엽니다. 떨어지지 않는 빗물이 맺힌 우산을 흔들듯이, 음이 톡톡 떨어집니다.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아 학생이 음을 반복해서 칩니다. 음성이 잘못 들어온 춤곡처럼 섞입니다. "돈마저 연인마저 잃었네 아우구스틴.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한 곡조를 끝내자, 태엽이 그만큼만 감겼다는 듯 학생은 재빨리 음악실을 나갑니다. 새벽은 꿈에서 꺨 것만 같은 예감에 숨을 더 죽입니다.
다시 음악실의 문이 열립니다. 문이 열리면 안 되는 게임입니다. 새벽은 수납장의 보이지 않는 입구를 바라봅니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학생의 동생입니다. 그녀가 멈추어 서 음악실을 한 바퀴 둘러봅니다. 그러더니, 수납장 옆에 꺼내어진 악기들을 보고, 새벽을 향해 발을 옮깁니다. 수납장의 문이 열립니다. 눈이 마주칩니다. 새벽은 이미 예감을 했었음에도 어느 정도 놀랍니다. 학생의 동생은 당연한 일을 받아들이는 듯 수납장의 두 문을 더욱 활짝 엽니다. 침침한, 불이 꺼진 교실이지만, 어떤 사람의 얼굴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어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찾았다." 학생의 동생이 예의 바르게 말합니다. 수납장에서 새벽을 끌어냅니다. 갇히지 않았으나 나올 수 없던 새벽은 드디어 찌뿌둥하던 몸을 폅니다. "...이름이 뭡니까?" 음악실에서 나오며 학생의 동생이 묻습니다. 냉정한 태도입니다. 새벽은 자신의 이름을 말합니다.
동생이 셋 중 둘을 찾았으므로 동생의 승리입니다. 교실 문이 개선문인 것처럼 동생이 당당히 1반 교실로 들어갑니다. 새벽은 개선문 앞 술집에서 나오는 사람처럼 비틀댑니다. 꿈에서도 졸릴 수 있다니, 습관은 대단합니다. 언니는 이미 도착해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교실 한복판에 우뚝선 왕좌를 봅니다. 책상과 걸상이 이불 밑에 감추어진 하나의 커다란 의자를. 언니가 경비 직원에게 말합니다. "이제 가셔도 좋아요. 정산은 끝났으니." 경비 직원은 새벽과 여명에게서 마스터키를 돌려받고 자신의 자리로 떠납니다. 언니가 짝, 손벽을 칩니다. "이제 축하를 해보자." "말 안해도 시작하거든." 동생이 따지고 듭니다. 외롭지 않을 때 땅을 보므로 외로울 때는 하늘을 보는 사람처럼, 동생은 언덕 같은, 이불에 덮인 보좌를 응시합니다. 그러더니 조심해서, 형태의 견고한 부분에만 발을 딛으며 조심스럽게 위로 올라갑니다. 발을 단단한 나무에 꼭 붙인 채로. 그 사이에 여명은 이불을 들치고 넣어두었던 물품들을 꺼내듭니다. 새벽이 교탁 위를 한 번 더 깔끔히 닦습니다.
동생은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갑니다. 위험 없이는 고귀함이 없음을 아는 듯, 그녀는 자신의 육체에 무책임하게 털썩 꼭대기에 앉습니다. 의자 세 개를 늘어놓아 앉을 자리는 넓습니다. 균형을 잡느라 한동안 발 밑만을 쳐다봅니다. 안심하고서야 눈을 들고 불평하듯이 묻습니다. "그래서, 이제 뭐야?" "우리를 보면 돼." 언니가 말합니다. 등을 돌리고 들고 있던 것을 숨기던 여명이 케이크를 교탁 위에 놓습니다. 언니는 준비해놓았던 생일 초를 서둘러 케이크 위에 꽂습니다. 큰 초 하나에 작은 초 다섯 개입니다. 여명은 라이터를 들어, 생일초 여섯 개와 양쪽에 늘어선 양초 두 개에 차례차례 불을 붙입니다. 융통성 없게 하나씩. 때문에 생긴 긴 시간의 공백을, 동생은 깊은 침묵으로 되메웁니다. 불이 꺼진 교실이 초 하나의 분량만큼 점차 밝아집니다. 불을 다 붙인 여명이 어정쩡한 자세로 돌아섭니다. 케이크의 HAPPY BIRTYDAY가 적힌 부분을 노을이 앉은 방향으로 돌립니다. 노을에게는 보이지 않을 거리지만. 여명이 부끄러운지 학생에게 소곤댑니다. "나, 노래는 정말 못 한다? 조그맣게 부를 거지만 알아듣을 거라고 믿어." 여명은 그렇게 말하고도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노래를 부릅니다.
동생은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열한 가지 그림자는 교실 뒤쪽으로, 관객들로부터 멀리 향합니다. 큰 초도 작은 초도 양초도, 똑같이 어두운 그림자를 만듭니다. 곧 다가올 체념은 왜 그리움의 모습을 하고 겨우내 버텼던 달력을 찢을까요. 빛을 향하고 있어 고개를 돌려도 얼굴이 어두워지지 못합니다. 한없이 부끄러워하며, 동생이 이미 해가 진, 그리고 해가 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나 노래는 듣지 않을 방도가 없습니다.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박노을. 생일..." 꿈이 멈춥니다. 현실로 돌아갑니다.
새벽이 눈을 뜹니다. 나무의 감촉이 느껴집니다. 날벌레가 햇살 밑의 먼지처럼 날아다닙니다. 숲입니다. 새벽은 담요를 덮고 나무 판자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옆에는 놀이공원에서 왔던 롤러코스터 조각이 보입니다. 새벽이 정체 모를 사람에게 잡혀 탔던 그 롤러코스터입니다. 그 위에 마녀모자를 쓴 여자가 앉아있습니다. 막 잠에서 깬 모양입니다. 아직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심한 기시감을 느끼며 새벽이 망설입니다. 조용히 일어서 그녀에게 걸어갑니다. "너, 누구야?" 불확실해지기 위해 묻습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집니다. 여자는 나무가 자라듯이 얼굴을 내보입니다. 새벽이 아는 사람입니다. "나야. 채하. 따뜻하고 빛나는 노을." 이게 꿈인가요, 생시인가요. 마녀모자를 썼던 채하는 감기기운에 재채기를 하더니, 말을 마저 잇습니다. "네 옆집에 사는 친구. 어릴 적 놀이공원에서 같이 미아가 됐던 친구. 네가 좀비 사이에 버리고 갔던 친구. 노을이의 언니." 감기 기운에 목소리가 조금 바뀌었으나, 새벽은 기시감이 풀린, 물에 풀려 녹은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은 보다시피 마녀로 활동 중이야." 하지만 평소와 바뀐 것이 없다고, 평소처럼 전능감을 타고 날아다니던 모습과 그대로라고, 새벽은 속으로 중얼댑니다.
"어떻게 꿈인 줄 알았어? 우리는 정말로 한 달 전, 개교기념일에 등교했잖아." 채하가 즐겁게 말을 건넵니다. 새벽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물론 생일잔치를 하자고 네가 말했고, 준비도 끝냈지만, 정작 네 동생이 안 왔잖아." 채하는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끼려다가, 수갑 때문에 손을 교차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려놓습니다. "그렇지. 노을이는 못 왔지. 지방에 내려갔으니까. 바뀌었지. 그러니 주마등이나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꿈인 줄을 직감했겠구나." 새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대뜸 묻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남은 거야?" 채하는 지금 자신의 모습 외에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는 듯 어꺠를 으쓱댑니다. 호연이 채웠던 수갑이 찰랑입니다. "지금은 밤이야. 잘 시간이지. 살아남은 이야기는 아침에 하고, 지금은 밤답게 완벽히 살아가도록 하자." 채하는 롤러코스터 좌석에 다시 털썩 눕습니다. 이러니 몸살이 날 법도 합니다. 채하의 말이 영 틀리지 않았으므로, 새벽은 다시 나무 판자로 돌아갑니다. 자신이 쓰러져 자고 있던. 누우며, 새벽은 말도 안 되는 발상을 합니다. 이미 끝났던 꿈이 이어질지 모른다고. 현실에선 주인공이 오지 못해 불발했던 생일잔치가 성사된 만큼, 꿈에서만 일어난 일이 계속 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생각을 하며, 어느새 문을 열듯 정신을 잃습니다.
새벽은 눈을 뜹니다. 꿈이 이어집니다. 눈앞에 초들이, 그 너머에 왕좌 위에 올라선 노을이 보입니다. 노을은 앞머리를 긁적이며 표정의 반을 가립니다. 채하가 빵칼을 꺼냅니다. 여명이 수저를 꺼내다 말합니다. "케이크를 자르려면 촛불을 꺼야겠지." "그래. 식사를 하려면 누군가 내려와야겠네." 둘은 동시에 위를 올려다봅니다. 노을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고도에서 내려가며 버리려는 모양입니다. 일어서더니 조심해서 단단한 책상을 찾아 발을 딛습니다. 채하와 새벽이 밑에서 기다리다 노을의 손을 잡고 내려오는 일을 거듭니다. "알아. 빨리 끄라는 거지." 노을이 손부채질을 하려는지 팔을 걷습니다. 채하가 만류합니다. "소원을 떠올리면서 불어." "이루지 않기 위해서나 소원을 비는 거지. 이룰 소원이면 안 빌어도 돼." 노을의 손을 붙잡고 있던 채하는 갑자기 웃음이 만연해져선, 뒤로 돌아가더니 노을의 등을 떠밉니다. "그래.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네. 빨리 불이나 끄고 케이크나 먹자." 등이 밀리자 반항심이 든 모양입니다. 노을은 교탁 양편에 손을 짚더니, 입바람으로 생일 초 6개를 끕니다. 양초만이 생일 잔치 현장을 밝힙니다. 촛불을 끄는 노을을 보며, 여명과 새벽과 채하는 희미하게 웃습니다. 그녀가 소원을 빌었을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새벽이 케이크에 발을 담갔던 초를 꺼냅니다. 초는 뿌리를 잃습니다. 이들은 제 몸도 다 태워보지 못한 채, 이렇게 10분 남짓 타오르다 모조리 버려지는 운명이지요. 교탁 한구석에 생일초를 치우고, 새벽은 조심해 고구마 케이크를 여덟 조각으로 나눕니다. 노을은 새벽의 등 뒤에 서 케이크가 나뉘는 모습을 빤히 바라다봅니다. 노을의 시선에 민망해져 새벽은 서둘러 케이크 자르기를 마칩니다. 새벽과 노을을 남기고 여명과 채하가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 이불 밑에 숨었던 운동화와 폭죽 세트를 꺼내옵니다. 노을은 선물이란 티가 확 나는 운동화보다도, 아직 터지지 조차 않은 불꽃놀이에 더 흥미가 동한 모양입니다. "불꽃놀이야?" "그래. 학교는 우리가 세를 냈어. 하늘도 곧 세를 내줄게." 노을은 과장된 칭찬을 하는 대신 총총걸음으로 교탁 옆에 붙습니다. 플라스틱 숟가락을 들더니 케이크 한 조각을 한 움큼 떠먹습니다. 미소를 짓습니다. 불꽃놀이와 케이크에 대한 반응을 한 번에 하는 성싶습니다.
머지않아 넷은 식사를 마칩니다. 케이크가 사라집니다. 유일한 광원이던 양초 두 개가 점차 짧아집니다. 적은 수가 모인 자리에는 활기보다도 고요가 어울리는지, 넷 중 누구도 교실을 빛으로 시끄럽게 채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스위치는 방치됩니다. 노을은 책상 한 개를 이불에서 빼내 그 위에 걸터앉습니다. 여명과 채하는 폭죽을 나눠듭니다. 운동장에 폭죽을 설치하러 나간다고 합니다. 둘의 족음이 교실에서 복도로 빠져나갑니다. 새벽은 따라나서려다, 생일잔치의 주인공인 노을을 홀로 두기가 마음에 걸려 교실 안에서 미적댑니다. 봄의 저녁은 봄 같지가 않아 나갈 의욕이 줄어듭니다. 노을은 가만히, 고민에 잠긴 것처럼 턱을 괴고 꾸준히 앉아있습니다. 새벽을 고의로 무시하는 것처럼. 이런 어색함이 겸연쩍어 새벽은 이제야 교실 앞의 스위치를 떠올립니다. 대화 거리가 생기기를 바라며 교실의 불을 켭니다. 양초 두 개가 순식간에 빛을 잃습니다. 노을은 화들짝 놀라 잠시 눈을 가립니다. 실뚱머룩한 얼굴을 든 노을은, 이제야 칠판이 눈에 들어온 모양새입니다. 생일 잔치의 준비물과 순서가 보란듯이 적혀있습니다. 광원이 양초 두 개뿐일 때에는 미처 보이지 못했습니다. 고민 이외의 무엇인가에 이제야 감흥이 생겼나 봅니다. 노을이 일어섭니다. 칠판 쪽으로 향합니다. 새벽은 교실의 문 쪽에 기대어 서있습니다. "언니는 가끔 무섭다니까. 내가 이걸 못 알아볼 줄을 다 알아채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을은 칠판을 만집니다. 하얀 선으로 갈라진 좌우. 그리고 중앙의 위편에 그려진, 어울리지 않는 하얀 문. 손에 닿지 않는 것은 언제나 잃을 수 있습니다. 노을은 어떤 본뜻에서였는지, 위로 팔을 뻗습니다.
문 틈새로 저녁의 햇빛이 들어옵니다. 노을은 놀라 뒤로 물러섭니다. 아무리 거리를 두더라도 새로운 것의 신비는 가시지 않음에도. 새벽은 이곳이 꿈이므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음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놀란 채로 노을의 손끝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필로 그려졌을 하얀 문이 벌컥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풍경은, 새벽이 사춘기 특유의 결백함을 빌려, 결코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던 것입니다. "아는 곳이야." 새벽이 말합니다. 노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시겠지요. 저희 도시의 놀이동산이니." 침착한 노을의 답변에 새벽은 말문이 막힙니다. 의표입니다. 분주한 사람들, 시원스럽게 핀 튤립, 돌아가는 회전목마, 이들을 보자면 틀림없이 단순한 놀이공원일 뿐입니다. 새벽은 7년 전, 새벽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채하와 만났던 놀이공원을 자신도 모르는 중에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그곳이라는 보장이 없음에도. 비록 새벽의 꿈이라고 할지라도. 새벽이 칠판의 열린 문을 빤히 쳐다보자, 노을은 거리감을 두려는지 더욱 뒤로 물러섭니다. 새벽은 노을에겐 자신이 초면이니 이런 태도가 당연하다 여깁니다. 어제 보았던 활기찬 모습과는 다른, 완전히 가라앉은 모습이 어색할지라도 말입니다. "관심이 있으신가 봐요?" 노을이 빈정댑니다. "마치 발 뻗을 자리를 찾듯이 바라보시네요."
새벽은 대답도 겁도 없이 열린 문 뒤로 팔을 넣어봅니다. 새벽의 팔이 저녁 햇빛에 물듭니다. 공간이 이어져 있습니다. 다리를 내딛어보려 하자, 문은 칠판만큼이나 커지더니 생일잔치에 대해 쓰인 모든 글씨를 잡아먹고 맙니다. 노을은 문이 열렸을 때 놀랄 기력을 모두 소진했는지, 식은 얼굴로 조금씩 비꼽니다. "식후에 약 먹듯 떠나실 생각이에요?" "아직은." 새벽이 답합니다. "파티 주인공만 남기기 꺼려져. 그러니 폭죽 설치하러 운동장에 내려가지도 않았는걸." 노을은 머리를 오른쪽으로 기울입니다. 왼쪽 머리에 묶은 꽁지가 미끄러져 턱을 가립니다. "혼자 가기는 싫다는 건가요." "말이 그렇게 되네." 새벽은 수긍합니다. 노을이 촛불을 끄듯이 입바람을 붑니다. 물론 한숨입니다. "전 불꽃놀이 전에야 오면 되니, 목숨으로 딱지를 치듯 떠나보죠." 새벽은 채하가 말하던 노을의 성격을 떠올립니다. 절실한 소통을 위해 확실한 지식에 매달린다고 하였죠. 눈앞의 이치를 벗어난 장소에, 자신은 초면인 사람과 들어가는 상황은 그 묘사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어쩌면 생일은 하루 치의 희망을 품게 하는 날일까요. 내가 아는 것 너머에 나를 아는, 심지어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하던, 삼 일 이상 가지 않던 우리의 희망을.
새벽과 노을은 어쩌다 같은 길을 가게 된 사람처럼, 따로따로 저녁의 놀이공원으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분주하고 서로 다른 목적지를 지녔음에도 일사분란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제 하루를 놀이공원에 대피해 보냈으므로, 새벽은 몇 번 들렀던 놀이공원의 길을 나름 파악합니다. 그들이 걷고 있는 이곳은 관람차 앞에 펼쳐진 넓은 광장입니다. 눈앞에는 고개를 들어야만 눈에 다 들어오는 관람차가 수레바퀴처럼 서서히 돌고 있습니다. 행선지가 없는 새벽과 노을은 사람들의 길을 방해하지 않고자, 꼭 붙어 길 한복판으로 비켜섭니다. 마침 비어있던 벤치에 둘은 앉습니다. 관람차를 향하는 방향입니다. 그리고 새벽은, 아주 익숙한 장면을 발견합니다. 삼인칭 시점의 광경이 눈에 익었을 리야 없음에도. 유년기의 기억 대다수가 삼인칭으로 재구성됨을 생각하면, 시각은 의외로 눈만의 소유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10살 남짓되어 보이는 두 아이가 관람차에 오르는 줄에 서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시간이 쓰이는지 너무나도 명쾌한 광경입니다.
표현력 갓갓... 날아간 뒷부분 다시 써주기까지 할줄은 몰랐는데 고마워 ㅠㅠ
읽어주셔, 과분한 응원을 주셔 감사합니다. 다시 쓴다고 해도 이미 내용을 기억하는지라, 무리 없으면서도 글쓰기 연습하기에는 좋네요. 귀중한 앵커가 날아갔음은 아쉽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비둘기가 땅에 내려앉았다가 발길을 피해 도망갈 만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두 꼬마 앞의 줄이 줄어들었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 둘을 보더니 묻습니다. "부모님은?" "쉬고 계세요." 관람차 안에서 어른이 필요할 만큼 위험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아르바이트생은 그들을 순순히 안으로 들입니다. 한바퀴 돌고온 관람차의 문을 열고, 가족을 꺼낸 후, 두 꼬마를 서둘러 태웁니다. 앞서 가던 소년이 소녀에게 손을 내밉니다. 소년이 소녀보다 키가 조금 더 크나, 그럼에도 동갑으로 보일 만큼 소녀는 당찬 인상입니다. "채하야, 어서 타." "알거든." 무심하게, 눈을 평소보다 오래 깜빡이며 소녀가 올라탑니다. 문이 닫힙니다. 밖에서만 열릴 관람차의 문이 닫힙니다. 새벽과 노을은 관람차 쪽을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벤치에 앉아있던 노을이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립니다. 중얼거리는 말이 손에 모여, 새벽은 되물어야만 했습니다. "이건 악몽이야." 노을이 말합니다. "왜 그러는 거야?" 새벽이 되묻지만, 노을은 밑을, 바닥이 호수라면 관람차가 비쳤을 돌덩이들을 내려다볼 따름입니다. 새벽은 속이 탑니다. 넘치지 않는 말재주를 힘껏 짜냅니다.
"아참. 내 이름 모르고 있겠구나. 이새벽이야. 이름은 네멋대로 불러줘." 기껏 찾아낸 단어가 이러한 것들입니다. 한 박자 뒤늦게 고개를 든 노을은, 입이 보이지 않음에도 피식 웃는 것 같습니다. "불편하면 반말해. 불편하면 존대말도 시켜. 채하와 말을 놓고 지내다 보니, 동생이라고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었네." 새벽의 장광설을 노을은 그저 듣습니다. 하늘의 빛이 점차 짙어집니다. 노을이 행인들에게 시선을 줍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지, 노을은 목 부근에 놓였던 두 손을 포개 내립니다. 차분히 단어를 뱉습니다. 들리지 않습니다. 새벽이 되묻습니다. 노을은 머리를, 거절을 뜻하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저으며 일어섭니다. 철제 구조물을 손가락질합니다. "우리도 관람차를 타자." "흥미가 동했어?" 새벽이 묻습니다. "아니. 줄이 짧으니까." 두 손을 맞잡고 있던 노을은 자신의 손목을 매만집니다. 어느새, 종이로 만들어진 자유이용권이 의복인 양 매달려 있습니다. 둘은 관람차를 바라다보며 걷습니다. 안내방송이 들립니다. 미아를 찾습니다. 인상착의를 말합니다. 외동이어 부모의 관심이 절박하오니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저녁의 경치는 너무도 황홀합니다. 새벽과 노을을 홀린 듯이 길거리에 발자국을 남깁니다. 노을과 새벽이 관람차에 들어갈 차례가 되자, 새벽은 위를 올려다봅니다. 어린 시절의 자신과 채하가 탔던 관람차가 꼭대기에 올라갔을 시간이라 생각하며. 초등학교 4학년이던 시절, 미아가 되었을 당시의 놀이공원에 발을 딛게 된 것은 대체 어떤 연유에서 일까요. 잠시 공상에 빠지며 새벽은 노을의 부축을 받아 관람차에 오릅니다. 아르바이트생이 밖에서 문을 닫습니다.
새벽은 압니다. 한바퀴를 도는 데에 이십 분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어색하지 않게 관람차에 앉아있을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상대가 편하지 않을 때라야 상대를 자세히 보는 법입니다. 새벽은 반대편으로 시선을 향합니다. 노을은 왼편으로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은은한 햇빛이 새어 들어옵니다. 햇빛이 닿는 곳마다 먼지가 반딧불처럼 제멋대로 날아다닙니다. 철제 바닥을, 노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신의 신발을 새벽은 봅니다. 먼지가 보이지 않는 구간입니다. 그러나 어째선지 자신이 불안정한 공중에 발을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만큼이나 견고한 대지에 서있다는 인상을 풍기는 풍경입니다. 옅은 바람에, 풍경처럼 관람차도 새벽도 노을도 딸랑 흔들립니다. "저기 범퍼카가 보이네." 먼저 말을 꺼내는 영광은 노을에게 돌아갑니다. 새벽은 노을의 시선을 재빨리 쫓습니다. "즐겨?" "우리집에는 자동차가 없거든. 그래서 자동차가 가끔은 비행기 같아." 노을이 말합니다. "지인을 안 데리고 가면 민망해서 못 타겠던걸." 일행이 아닌 사람과 부딪힐 때의 부끄러움을 떠올리며 새벽이 힐끗 웃습니다. 노을도 따라 소리 없이 웃습니다. "가끔 언니와 오기는 하지만, 공중을 날아다니기를 즐기는 사람이라 내가 항상 져주곤 해. 탄 지 3년은 넘었지." 할 말이 많나 봅니다. 그러나 새벽에게 할 말은 아닌가 봅니다. 관람차가 올라갈수록, 같은 꿈을 보기 위해 노을은 고개를 더 숙여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좀 타자. 이 관람차에서 내리면." 새벽은 노을의 말에 말없이 동의합니다. 어찌 된 일인지, 노을이 제안하지 않았어도 서로 말없이 동의했을 만큼 당연한 수순으로 느껴집니다.
다시 둘은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안전 벨트가 필요할 만큼의 위험 없이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니, 불공평한 장사 같습니다. 결국 노을이 감탄을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맙니다. "경치가 좋다." "엄밀히 따지자면 경치에 반사된 빛이 멋진 거지만." 새벽의 말에 노을은 갑자기 시무룩해진 티를 당당히 냅니다. "그럴 거면 빛이 멋지다 하지 말고, 그 빛을 보는 자기의 뇌가 아름답다고 하지 그래." 책망이지만 부정적인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신비는 가격표가 붙지 않았을 뿐이지, 분명히 필수적인 것이겠지요. 관람차가 막 사분의 일 지점을 지납니다. 과거의 채하와 새벽이 탄 관람차가 정확히 반대편에, 저울처럼 매달려 있을 것이라 새벽은 어림합니다. 뒤를 돌아봅니다. 이번에는 노을이 궁금증 어린 시선으로 새벽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막 떠올린듯 말합니다. "여기에는 튤립이 예뻐." 사실입니다. 놀이공원에서는 매년 3월에서 4월 사이, 튤립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꽃이 지면 튤립 구근 캐기 행사도 한정적으로 진행됩니다. 축제가 열리는 꽃밭이 바로 새벽이 바라보는 방향입니다. 그것 때문에 연상한 것인가 하고, 새벽은 어림짐작합니다. 노을이 계속 이릅니다. "튤립이 좋아. 얽힌 일화를 좋아하거든." "그리스 신화 거야?" 노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람 무덤이지." "역시나." 그 말 대로라면, 놀이공원은 매년 장례식을 여는 셈입니다.
꽃 하나를 과학은 생식기관이라고, 신화는 무덤이라고 말하니, 언젠가는 번식도 하지 못하면서 신화가 이름을 붙이지 못한 꽃만이 순수한 꽃으로 대접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꽃이 필요한지는 모든 무용한 상상이 그렇듯이, 둘째 치고요. 노을이 이야기꾼 노릇을 합니다. 두 손을 의자에 짚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여인에게 세 명의 구혼자가 찾아왔어. 물론 선물을 가져왔어. 다 비슷한 사람들이었으니, 조금이라도 차별화가 필요했겠지." 선물을 줄 능력이 못되는 구혼자가 쫓겨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새벽은 마음속으로만 생각합니다. "첫째는 왕관을 쓰게 해주겠다고 했어. 둘째는 보검을 휘두르고 다니게 해주겠다고 했어. 셋째는 황금을 안고 살게 해주겠다고 했어." 그러더니 노을이 오묘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야기를 멈출 요량인가 봅니다. "자, 새벽.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 처음으로 새벽의 이름이 불렸습니다.
"내가 골라야 할까. 시합을 붙여서 정하고 싶네." "으음." 노을은 허를 찔렸는지 입을 가로막고 곰곰히 생각에 들어갑니다. 입으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튀어나올까 몸을 사리고 있는 걸까요. 결국 이렇게 핀잔을 줍니다. "하지만 능력주의도 완벽하지 않아. 무엇이 능력인지 결정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지." 우리는 완벽하기보다는 책임을 덜 질 해결책을 종종 고른다고 말하고 싶어지지만, 중학교 2학년에게는 어떤 해답도 이르다 생각되어, 새벽은 웃으며 확답을 아낍니다. 궁금증이 동해 묻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에서는 어떻게 골랐어?"
"모두 거절했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를 원했기 때문에. 여자는 왕관과 보검과 황금을 받는 대신에, 자신이 그들이 되기로 했어. 그래서 왕관과 같은 꽃을 피우고, 보검과 같은 줄기로 서고, 황금과 같은 뿌리를 내리는 튤립이 되었지." 노을이 수줍게 웃습니다. 바닥이 철제가 아닌 땅인 양 애정 깊게 바라봅니다. 새벽은 노을이 이 일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감상을 남깁니다. "바라는 대신에 스스로 그것이 되었구나." 비록 무덤의 형태를 띄었을지라도. 특이한 무덤입니다. 매년 성장하고 번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라던 것의 모양만을 옮겼을 뿐, 완전히 새로운 생물이 되었다는 점에서.
후련해졌는지 노을이 한층 풀린 표정으로 튤립 공원 쪽을 바라다봅니다. 새벽은 이전에 노을과 했던 대화가 떠올라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튤립이 좋아, 관람차가 좋아?" "물론 튤립이지. 새벽은 반대지만." 앞서 노을이 한 질문에 새벽이 한 대답이었지요. 새벽은 웃으며 나름 설명할 길을 찾습니다. "왜 그럴까. 관람차는 바퀴를 얼마나 돌려도 그 관람차지만, 튤립은 지고 다시 피면 튤립이 아니라서?" "...안에 든 사람은 다르잖아." 노을이 나섭니다. 튤립에게도 변호가 필요하겠지요. "튤립을 보는 사람도 다르니, 수치로만 따지자면." 새벽은 자신의 대답에 더욱 확신을 가져 갑니다. 다시 찾아오겠다면 달라지지 않은 채 오는 편이 좋겠지요. "으음. 새벽의 기준에 따르자면 해와 달도 튤립보다 좋겠네."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고무줄의 변덕스러움을 알기에 노을은 너무 건강할까요. 그러나 새벽은 노을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그렇네. 튤립보다는 좋겠나봐." "하지만 날씨는 매일 달라지지. 노을이 지는 순간도 매일 달라지고. 그러니 노을보다 관람차가 좋다고 말했구나." 노을의 목소리가 물을 뿌리지 않은 조화처럼 말라있습니다. 새벽이 앞을 봅니다. 노을은 해가 지는 곳을 바라봅니다. 산소를 찾아 문 밖으로 달려드는 화염처럼 불콰한 햇빛이 초승달 옆에 보이는 둥근 그림자처럼 관람차의 나머지 부분을 채웁니다. 어여쁜 정경입니다. 새벽은 보이는 것을 말하기로 합니다.
"방금전에, 관람차에 들어온 빛에 감탄할 바에는 뇌를 사랑하라고 했잖아?" 노을이 새벽을 힐끔 쳐다봅니다. 별 말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쓸쓸하잖아. 역시 관람차보다는, 광원보다는 경치 자체에 감탄해야 하나봐." "그 말은 곧?" "관람차보다는 바깥 풍경이 어여쁘네." 노을은 양팔을 허리 옆에 붙입니다. 일몰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말합니다. 책망의 뜻이 담기지 않은 책망의 언어를 써. "말을 왜 바꿔. 관람차가, 모닥불이 좋다며."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는 것처럼, 러시아 인형이 두 개로 늘어나듯이 별 변화 없었다는 것처럼, 관람차는 계속해서 조용히 돌아갑니다.
새벽은 문득 미심쩍어집니다. 지금 이것이 새벽의 꿈이 맞을까요. 꿈을 이어서 꿀 수 있다면, 최소한 지은 것이라도 허물어지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겠지요. 그러나 왜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채하는 새벽의 꿈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러나 왜 노을은 이토록, 새벽이 모르는 노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새벽은 자신이 꾸었던 악몽들을 떠올립니다. 그때 느끼던 두려움을 알 것 같습니다. 괴기한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자신의 꿈에 자신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감정이었습니다. 노을이 문득 새벽을 곁눈질합니다. 새벽이 거리낌 없이 웃습니다. "같은 말이어도 다를 때가 많구나." 노을은 크리스마스 전의 아이가 눈물을 대하듯이 말을 얌전히 참습니다. "현실에서 이것이 현실이라 말하는 건 심각할 때뿐인데, 꿈에서는 이것이 꿈이라고 언제 말해도 어색하지 않으니." 노을은 눈을 감더니 팔짱을 낍니다. 그때, 수면에 밀쳐진 것처럼 온몸에 충격이 가해집니다. 말보다 빨리 전해지는 무엇을 듣듯이. 새벽과 관람차가 들썩입니다. 충격을 줄이려 몸을 감싸안았던 새벽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다시 눈을 뜹니다. 노을은 조용히 바닥을 내려다볼 뿐입니다. 관람차는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갑니다. 노을은 새벽이 모르는 표정을 짓습니다.
지금부터 잠시, 관람차 바깥이 이야기됩니다. 운동장입니다. 폭죽을 설치하러 내려갔던 채하가 교문 근처 자전거 보관대 위에 걸터앉아 여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운동장의 앉기 좋던 놀이기구가 채하는 어쩐지 그립습니다. 불편해지면 하늘을 보게 되나 봅니다. 폭죽을 밝히기 좋을 정도의 어둠입니다. 교정은 어두우나, 교실 하나에만 불이 켜져 있습니다. 생일잔치가 열렸던 2학년 1반 교실입니다. 새벽과 노을이 필시 저 안에 있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채하가 불안감을 따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용합니다. 채하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눈을 찌푸립니다. 교실에서 나오는 빛에 이물이 섞여 있습니다. 저녁 햇살과 같은, 교실에서 나올 리가 없는 색이. 채하는 떠올리고 맙니다. 생일잔치를 준비할 적, 칠판에 분필로 문을 그렸지요. 손을 하얗게 만들어 가며. 채하가 좋아한 문양이었을 뿐이나, 이것은 채하만의 꿈이 아닙니다. 다른 요인이 얼마든지 끼어들 수 있습니다. 채하는 감시받는 사람처럼 생각을 숨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채하는 거의 옳은 추측을 했습니다. 새벽과 노을이 교실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갔으리라. 채하는 운동화의 발등으로 모래를 내려찍습니다. 채하에게 무한정 좋지만은 않은 전개입니다. "악역을 도맡아 볼까." 채하가 혼잣말을 합니다. 말을 한 뒤에 으레 그러듯 주위를 돌아봅니다. 교문 밖에서 터덜터덜 돌아오는 여명을 발견합니다. 두 손이 가득합니다.
조금 노파심이 듭니다. 어디서부터 신발을 잘못 신겼을까요. 그러나 여명 앞에서 평소대로의 태도를 되찾습니다. 평상시의, 수풀 밑에 가려진 아스팔트 길을 걷는 정찰대 같은 자신만만함을 두릅니다. "라이터나 구해오라 했더니, 품에 그건 뭐예요?" 채하는 바닥에 엎드려 있던 폭죽 다발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며, 여명의 품에 들린 상자에 대해 캐묻습니다. 여명이 자연스럽게 답합니다. "바주카포야." "어째서요. 아니, 그보다 어떻게 구했어요." 채하가 평행대 위에서처럼 말을 더듬습니다. "마트에서 팔더라고. 저렴했어." "시장경제가 일 안하네." 채하가 한숨을 쉬다가, 문득 눈을 반짝이며 교정을 올려다 봅니다. 저녁 햇빛이 새어나오는 교실을.
"설치할 줄 아나요?" 채하가 여명의 팔을 붙듭니다. "폭죽처럼 설치하면 되잖니?" "그래요. 90도로 쏘아올려 90도로 내려앉는다면, 세상에 전쟁은 없겠군요." "농담이야. 물론." 채하는 주저앉아 운동화 끈을 한 번 더 묶습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일찌감치 포기합니다. 그보다는, 교실로 올라가 새벽과 노을을 끌고올 필요가 있겠지요. 일어난 채하는 여명이 운동장 한복판으로 걸어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바주카포와 빨간 스위치를 전선으로 잇고 있습니다. 채하가 총총걸음으로 달려가 묻습니다. "핵 발사 버튼 같네요." "바주카 발사 버튼은 돼." 여명이 돌아봅니다. 어둑한 밤이나 표정에는 꾸민 기색이 없습니다. 채하의 말이 당황합니다. 꿈인 줄을 알면서도 단어는 마음대로 골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구했어요?" "사은품으로 주더라고." "아니, 꿈이라도 너무하잖아요. 쌤은 너무 잘 속아요." 여명은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설명서로 목에 맺힌 땀을 닦습니다. 일어섭니다. 짜잔, 누구나 쏠 수 있는 바주카포 완성입니다.
"라이터로 불 붙일 필요는 없어." 여명이 주머니에 손을 넣습니다. 그가 외출을 한 원래 목적은 이것이었지요. "알거든요." 핀잔을 주더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교정을 올려다봅니다. 항공모함에 전투기가 내려앉을 때 보이는 전광판처럼, 오직 한 칸에만 불이 들어가 있습니다. 채하가 바주카포를 집어듭니다. 묵직합니다. 차갑게 질렸습니다. "쌤, 제가 반동을 견딜 수 있을까요." 반작용을 고려하고 살아오지도 않았으면서, 채하가 괜히 묻습니다. 여명은 옆에 멀뚱히 서있습니다. 역할이 잠시 끝난 태엽장치처럼. "꿈이니 괜찮지 않니." "역시나 알고 계셨군요." 채하가 쓸쓸히 웃습니다. 그러나 여명에겐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겠니. 꿈에서라도 반동을 생각하지 않고 해봐. 너는 늘 우선순위를 올바로 찾아냈잖아."
여명이 채하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채하는 여명이 없는 듯 행동합니다. 여명에게 들리지 않게 중얼거립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마. 여차하면 무너진단 말이야. 있을 곳으로 돌아와." 채하가 바주카를 조준합니다. 발로 빨간 버튼을 밟습니다. 순간, 채하가 반동으로 땅에 닿기도 전에 학교 건물에 폭파음이 들립니다. 벽이 무너집니다. 2학년 1반 교실이 있던 자리에, 쌓아올린 왕좌가 있던 자리에 연기와 먼지가 들어섭니다. 스프링클러가 작동합니다. 이사를 온 윗집처럼 부서지는 소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연기가 검은 밤 중으로 흩어집니다. 채하는 쓰러진 채 위를 올려다봅니다. 여명이 팔다리를 내리고 앉습니다. "후련해졌니?" 여명이 묻습니다. "아니오. 저 두 명이 돌아올 때까지는 불안하죠."
지금부터 다시, 관람차 안의 이야기입니다. 관람차는 문제 없이 돌아갑니다. 바람에 흔들리기에 관람차는 너무도 묵직한가 봅니다. 노을이 흥겹게 다리를 좌우로 흔듭니다. 박자에 맞추어 노래를 나긋하게 부릅니다. "오월이라 단오날에 수리치떡은, 해보단도 더 뜨거워 혼자 못 먹네. 오라버니, 오라버니, 젓가락 줄까. 잘 불어서 씹어 삼켜 먹어야 하네." 서정주의 단오노래입니다. 시이므로, 노을은 자신에게 익숙한 민요 곡조를 붙여 부르는 것에 불과하겠으나, 새벽은 그것이 원래 있던 민요라 무의식중에 여깁니다. 캔 같은 관람차 안의 평평한 바닥에 둘은 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요. 그때였습니다. 몸을 움츠리는 느낌이 들더니, 둘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집니다. 무너진 하늘이 갈라지지 않은 땅에 부딪혀 내는 것과 같은, 하나 하나가 묵직한 굉음이 사방에서 들립니다. 철제 봉을 잡고 균형을 잡은 새벽이 비명을 지릅니다. 몸을 낮추고 있던 노을은, 진동이 진정되자 조심스레 일어서 창문 밖을 내다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구까지를 내놓고 노을이 입을 다뭅니다. 바깥의 풍경에 말을 잃었나 봅니다. "왜 그래, 노을아?" 새벽도 조심스럽게 머리를 돌립니다. 문과 하나인 창문을 봅니다. 신기하게도, 방금 전까지 옆에 보이던 롤러코스터의 노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진귀한 경험이로군요.
일설에 의하면, 꿈은 외부의 현실로부터 잠을 지키는 역을 맡는다고 합니다. 집에 진실로 불이 나면, 꿈은 그 안에 화염을 키워 우리가 밤잠을 설치지 않도록 도와주지요. 이 화염이 정말 소중한 것을 침범하지 않는 한, 꿈은 지속됩니다. 새벽이 본 것은, 운동장에 있던 채하가 보았던 검은 연기와 흡사한, 몽실몽실한 구름입니다. 새벽은 혹시나 싶어 밑을 내려다봅니다. 놀이공원이 보입니다. 놀이공원이 통째로 한눈에 들어옵니다. 관람차가 땅에서 뽑혀나와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노을이 고개를 새벽을 향해 돌립니다. 둘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노을이 반쯤 본정신을 잃습니다. "와하. 이거 난다, 날아." "노을아, 정신 차려!" "와하." 새벽도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노을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와하." 새벽도 충격에 거의 실성하나, 그 틈에 노을이 안정됩니다. 침착하게 새벽의 양어깨를 붙잡고 흔들어 새벽의 빠져나간 혼을 넣습니다. "새벽, 너도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어서 살 길을 찾은 사람처럼 호랑이굴에 들어가자." 새벽은 노을의 말이 이해 안 되는 것이, 자신의 정신이 나갔기 때문인지 잠시 고민합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노을의 말은 사실입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요.
나왔다 와하 ㅋㅋㅋㅋㅋ 실시간으로 봤을때 엄청 웃었는데!!
전에 이 장면을 거칠 때 달렸던 반응이 기억났습니다. 제가 썼던 것은 어떻게든 다시 적는다 해도, 사라지고 만 반응에는 그저 속절없네요. 할 수 있는 한 성심성의껏 계속하겠습니다.
노을은 계속해서 바깥을 내려다봅니다. 붉은 하늘이 점차 보랏빛이 되어갑니다. 새벽이 짓는 미소를 노을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름의 해답을 찾았나 봅니다. "관람차 문은 열리지 않아." "다른 문은?" 새벽이 되묻습니다. "여기서 들어왔던 방법으로 나갈 수 있겠지." 노을이 치마 주머니에서 하얀 분필 조각을 꺼냅니다. 흔적을 남기려면 더럽혀져야 함을 나타내는지, 노을의 검지와 엄지 손가락에 하얀 가루가 묻었습니다. 노을은 그려보자, 라 중얼대더니 바닥에 직사각형을 그리고, 초콜릿처럼 줄을 그어 칸을 나눕니다. 그리고는 새벽처럼, 관람차의 좌석에 털썩 앉습니다. 보존되어야 할 현장을 지키는 경계처럼 보이던 비뚤배뚤한 선들은, 둘이 놀이공원에 들어왔던 때처럼 일시에 커지더니 바닥을 덮어버립니다. 문이 아래로 열립니다. 물 같은 하얀 유체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새벽과 노을의 신발이 담깁니다. 젖지도 않은 채 불순물의 모양에 맞추어 모양을 바꾸고 있을 뿐입니다. 노을은 선물 받은 운동화가 아까운지, 오른발을 들어 좌석 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습니다. "선을 그어도 어떻게든 되는구나." 노을이 중얼댑니다. 새벽이 노을의 어꺠를 두드립니다. "떠날 거지?" 노을은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이번엔 하얀색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이라면 마땅히 이래야 하겠지요. 문은 창문이 아닙니다. "새벽은 갈 생각이지?" 새벽은 너머가 보이지 않는 문 대신 노을을 지켜봅니다. 노을이 꿈 속의 인물이라 여기면서도 그녀의 의사를 물으려 드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느 한 명이 동의해야 경사를 미끄러지듯이 진행되겠다 싶어 새벽이 기어코 고개를 끄덕입니다. 눈을 질끈 감고.
새벽의 실책이었습니다. 양팔이 잡힙니다. 눈을 뜨자 이미 떨어지는 노을이 보였습니다. 탄력 있게 폴짝 뛰었는지, 반신이 이미 바닥을 통과해 있습니다. "가자." 노을의 말도 추락합니다. 새벽은 꼼짝할 새도 없이 문으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벽이 아닌 모든 곳으로 이끌립니다. 노을과 새벽은 주위를 돌아봅니다. 형형색색, 그 외에 묘사할 방도가 없습니다. 몸이 감속됩니다. 둘은 햇빛처럼 안전히 땅에 내려앉습니다. 먼저랄 것 없이 위를 올려다봅니다. 색색의 구름이 떠다니는 한낮입니다. 색색의 빛이 노을과 새벽의 구름자를 여러 개로 나눕니다. 사람이 없는 길거리입니다. 이 도시의 유명한 디저트 카페 앞입니다. 기울어진 필기체로 간판이 멋들어지게 쓰여 있습니다. 유리문에는 닫혔다는 팻말이 걸려있습니다. 멀리 오토바이 위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울며 털을 고르고 있습니다. 경계하는지 눈을 매섭게 향하지만, 밤이 아닌 이상 무섭지는 않습니다. 노을이 새벽의 옷깃을 붙잡습니다. 디저트 카페를 가리킵니다. 새벽이 가자는 뜻이냐고 확인하기도 전에 총총거리며 보도블록을 밟고 있습니다. 상가 앞 입간판에는 분필로 케이크 그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천천히 가." "고양이는 움직이잖아." 새벽은 붙잡히지 않았으면서도 서둘러 노을을 따라갑니다. 주위를 돌아봅니다. 유일한 생명체인 고양이는 오토바이의 푹신한 시트 위에 발자국을 찍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것이라면 바람에 날리는 모자 같은 구름뿐입니다. 노을이 밀치는 유리문도 움직입니다. 노을이 뒤집는 원목 팻말도, 새벽이 놓은 유리문도 움직입니다. 노을이 들어올리는 메뉴판도 움직입니다. 가게 안에 없는 누구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카페 안에는 두 사람뿐입니다. 진열장에는 완성된 조각케이크가 정성스럽게 잘려 놓여있습니다. 노을이 카운터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이스티 분말이 있습니다. 노을이 새벽에게서 주문을 받습니다. "할 줄 아는 메뉴는 복숭아 아이스티가 있어."
새벽은 진열장 위에 손을 얹고 이름을 하나씩 읽어봅니다. "노을과 같은 메뉴로. 노을은 고구마 케이크 먹지?" "그럼. 우리 가족 입맛은 거의 비슷하거든." 새벽이 손잡이를 잡고 문을 밉니다. 떠나는 기차처럼 벌컥 열립니다. 새벽은 많은 조각 케이크 중 고구마 무스가 들어간 것을 고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생크림과 초콜릿이 층을 이룬, 보기에도 말랑말랑한 접시를 고릅니다. 접시 두 개를 저울처럼 들고 탁자로 걸어갑니다. 그새 노을은 주전자를 올려둔 채, 손으로 잡기에 좋은 모양의 유리잔에 얼음을 카랑카랑 쏟아넣습니다. 꼬마처럼 조그만 숟가락과 냅킨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새벽은 부엌으로 들어옵니다. "꿈에서는 살이 안 찌겠지." 새벽이 설탕통을 집어들며 혼잣말을 합니다. 노을이 볼을 부풀리더니 빈정댑니다. "난 꿈이 아냐." 그걸 증명하려는지, 노을은 행주로 손을 감싸고 주전자를 듭니다. 화분에 물을 주듯 유리컵에 살짝 붓습니다. 공백은 찬물을 부어 메꿉니다. 얼음은 후회 없이 자라는 나무처럼 딸랑대며 흙과 같은 색을 입습니다. 컵을 감싼 손에 맺힐 물방울이 벌써부터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을과 새벽이 의자를 꺼내 앉습니다. 케이크와 아이스티 두 개씩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먼저랄 것 없이 인사를 합니다. 새벽이 초콜릿 케이크를 한 스푼 떠 입에 넣습니다. 텁텁한 가루가 목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집니다. 앞니 뒷편에 케이크 시트가 달라붙습니다. 달콤하되 씁쓸하지 않은 크림이 천천히, 뿌리에 물이 스며드는 속도로 녹습니다. 새벽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습니다. 둘은 음식에 열중합니다. 조용합니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놀란 새벽과 노을이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Jeff Bernat의 groovin입니다. 둘은 낯선 것의 틈입에 과민반응하지 않고, 꿈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웃으며 받아넘깁니다. "많이 듣던 노래네. 채하가 여기에 끌고오곤 했거든." 새벽이 말합니다. "제목은 몰라?" "그러게. 모르는 채로 있었구나." "뭐를 몰라. 가사는 알잖아." 케이크를 삼키느라 잠시 뜸을 들이다, 노을이 묻습니다. "영어는 알잖아." "이 정도 청해능력은 안 돼."
노을은 잠시 망설이더니 제안을 합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하는 것도 아닌 할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번역해줄까? 덮어 씌워서." "호의는 고맙지만 원래 노래 가사가 안 들리잖아." 새벽이 손사래를 칩니다. 하지만 이윽고 그것도 나름의 풍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벽이 발끝을 박자에 맞추어 흔듭니다. 노을은 이웃을 찌르지 않고 장미가 자라나듯, 투명한 목소리로 영어 노래 위에 자신의 문장을 붙입니다. "왼쪽으로 둘, 오른쪽으로 둘, 우리 같이 손가락을 튕기며 밤이 되어도 계속해요. 내가 당신에 맞추듯이 당신은 내게 맞추어요. 무도장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춤을 추자고요." 노을은 틈틈이 아이스티를 머금으며 새벽을 위해 번역합니다. 새벽은 부탁한 자가 으레 그래야 하듯, 지루하다는 기색도 없이 노을의 번역을 듣습니다. 노을의 목소리에 노래가 들리지 않게 되는 순간에마저도. 노래 한 곡이 끝납니다. 새벽과 노을은 비운 접시와 컵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습니다. 벽의 자리에 걸린 유리창에는 아직도 색색의 구름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불순물이 다이아몬드를 분홍색으로 만드는 원리와 같다면, 대체 어떤 먼지가 구름에 대해 그런 모험을 한 것일까요.
노을은 원목 팻말이 걸린 유리문을 바라봅니다. 안쪽에는 닫힌, 바깥에는 열린 나무 조각. 노을은 뒤돌아 새벽을 바라봅니다. "어디로든 가자. 여기만 아니라면." 새벽은 노을에게서 분필을 건네받습니다. 노을의 손과 같은 흔적이 남아버립니다. 손을 하얗게 만들어가며, 새벽은 유리창 위에 분필을 긋습니다. 어떤 자국도 남지 않았으나 일시에 하얀 문이 만들어집니다. 어두운 학교의 마루가 그들 앞에 보입니다. 둘은 발을 내딛습니다. 꿈이므로, 아무 책임도 없이 가볍게. 꿈속에서 가장 꿈 같은 존재는 다름 아닌 자신이겠지요. 새벽과 노을은 매캐한 냄새를 맡습니다. 동시에, 이곳이 그들이 처음 떠나왔던 2학년 1반 교실 근처의 정경과 매우 흡사함을 발견합니다. 매연을 빼내기 위한 용도인지 복도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지만 말입니다. 노을이 재채기를 합니다. 교실로 보이는 방 안에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천쪼가리가 캐리어에 들어간 짐들처럼 정신 없이 쌓여있습니다. "뭐야. 이상한 곳으로 와버렸네. 당장에 떠나자." 새벽이 말합니다. "응. 그렇지. 이런 곳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확인할 건 확인하고 가야겠다." 노을이 방실방실 웃으며 창가로 걸어갑니다. 검은 운동장이 보입니다. 그 밑에서, 노을은 매우 익숙한 얼굴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하입니다. "언니!" 노을이 외칩니다. 자신의 왕좌가, 한 번 올라가보았던 왕좌가 사라졌다는 좌절감 때문이었을까요.
이제부터 다시, 운동장에서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채하는 구멍이 난 학교를 바라봅니다. 별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꿈임을 자각하기도 했고, 책임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었습니다. 채하는 어떤 변화가 생기기를 기다립니다. 이쪽의 일이 문을 매개로 저쪽을 방해했듯, 저쪽에서 새로 일어난 일도 이곳에 영향을 미치겠지요. 채하는 교문을 향해 앉은 방향을 돌립니다. 경비 직원이 뛰어오고 있습니다. 안쓰럽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저는 마트에서 바주카를 사 학교에 날렸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모른다는 거구나." 채하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다음으로 추궁을 받는 사람은 여명입니다. 채하는 턱을 괴고 기둥 두 개로 만들어진 문을 봅니다. 경비 직원 너머로 인파가 느껴집니다. 구름처럼 몰려드는 그들을 보며, 채하는 새벽과 노을이 사람이 많은 곳에 갔거나, 아니면 하늘로 치솟았겠다고 짐작합니다. 옆 중학교에서 자습활동을 하다 나온 중학생들입니다. 그들이 난생 처음으로 부서진 학교를 보더니 앞다투어 감탄을 내뱉습니다. 채하는 서둘러 그들의 수를 셉니다. 서른 명 남짓입니다. "언니, 언니가 부쉈어요?" 가장 어려 보이는 학생이 묻습니다. 채하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경비 직원이 돌아옵니다. 채하는 학생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경비 직원을 피합니다.
여명은 그들을 관조하더니, 일어서 운동장에 폭죽을 설치하기 시작합니다. 학생들이 여명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채하에게 묻습니다. "여기서 무엇 있나요?" "축제야. 너희들은 무엇 했니?" "자습이죠. 선택하는 사람 한에서요. 저녁을 주거든요." "고등학생 되면 안 해도 되겠죠." 채하는 그들을 내려다보다, 웃으며 자조합니다. "중학생이라니. 커봤자 나처럼 될 텐데." "이렇게 축제를 열 수 있잖아요?" "축제가 열릴 때마다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걸." 채하의 말에 학생들이 또다시 여명을 바라봅니다. 운동장을 끝까지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교실을 떠나고 보니 흥에 들떴는지, 학생들은 도저히 해산하려 들지 않습니다. 채하는 남몰래 교정을 올려다보다, 노을과 새벽이 곧 돌아오리라 믿고 마음을 놓습니다. 이 이상 할 수 있을 일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그들을 행사에 참가시킬 생각입니다. "자, 밤이 무르익었다. 축제답게 무엇을 해야 할까?" "술?" 가장 어려 보이는 학생이 말합니다. "힘내라, 공교육." 채하는 운동장으로 걸어가 여명과 함께 설치된 폭죽의 배치를 확인합니다. 여명은 이유 없이 슬퍼 보입니다. 곧 터질 화려한 음색과 색상의 불꽃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겠다 미리 선언하는 것만 같습니다. 채하가 감사인사를 하지만 여명은 쓸개즙을 삼킨 사람처럼 조용히 비닐봉지와 이미 한 번 쓰인 화약을 정리할 뿐입니다. 채하는 멋쩍어져 들뜬 학생들에게 천천히 돌아갑니다. 노을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 그때였습니다. 채하는 활기를 되찾습니다.
"쌤! 지금이에요! 불 붙일 준비를 해주세요!" 채하가 여명을 부른 뒤, 교정 쪽으로 걸어갑니다. 두 손을 나팔 모양으로 만듭니다. 외칩니다. "잘 왔어! 이제 불꽃을 쏘아 올릴게!" "교실이 왜 이 난장판이야!" 메아리처럼 더 작은 소리가 되돌아옵니다. "라이터가 작동하나 확인 좀 해봤어! 내려올 거면 빨리 내려와!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봐야지, 옆에서 보려고?" "여기에 있을래!" 노을의 고함에 채하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듭니다. 그래요, 이 번잡한 운동장에 사람을 더 끼워넣을 필요는 없겠지요. 자기 앞의 관중들에나 집중하도록 합시다. 채하는 중학생들에게 돌아갑니다. 노을의 옆에 새벽이 달라붙습니다. 노을은 눈을 크게 뜹니다. 무너진 왕좌를 빤히 바라봅니다. 아직 건재한 책상 하나가 있습니다. 말이 건재하지, 모서리는 그을음을 먹었고, 불이 만든 재와 불을 끄려 내려온 물이 늘어붙어 표면은 진득진득합니다. "어디 앉아서 보자." "조끼라도 깔고 앉자." 새벽이 교복 윗옷을 벗습니다. 책상 위에 벽지처럼 바릅니다. 풀은 더러워지기 쉬우므로, 더러운 것만이 장식에 쓰일 수 있습니다. 노을은 창문 밖으로 숨을 내쉽니다. 몇 년 간 불꽃놀이를 보지 않았습니다. 총과 같은 폭발음이 쏘아올려지면, 사람들이 환영하듯 카메라 플래시를 쏘아올리던 광경을 보던 때도 내겐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속이 답답해졌습니다. 무너진, 유리조각마저도 부서져 열린 창틀이 매섭습니다. 노을은 폭죽이 터지지 않은 공중을 올려다봅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립니다. 강 같은 밤 속에서, 노을은 휘날리는 것 같습니다.
봄은 파랗고 여름은 불콰하고 가을은 창백하고 겨울은 어둡다 하여, 청춘이라 불리는 나이인데도, 짙은 파랑인 하늘만이 시야에 들어오다보면, 노을은 파랑을 제외한 모든 색이 자신에 속한 것만 같아집니다. 봄을 제외한 모든 계절이. 이제 피워올릴 것이 없어진 지금으로서 남은 의무라고는, 그나마 남은 것을 긁어모아 이름을 붙여주고 못된 것들을 열심히 미워해주는 것밖에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노을은 허무를 삼킵니다. 공중으로 말을 건넵니다. "언니는 정말 싫어. 언니가 다섯 살이 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좋아해본 적 없어." 새벽이 그 말을 듣고 있습니다. 노을이 앉을 자리를 데우며, 노을의 뒷모습을 보며. 지금의 노을은 부서져 열리지도, 부서져 깨지지도 않고, 그저 부서질 것 같습니다. 위태로운 노을을 새벽이 부릅니다. "불꽃놀이 좋아해?" "많이. 불보다 더 좋아해." "튤립보다 더 좋아해?" "어쩌면. 하지만 꽃이라면 장미가 더 좋아." 노을이 돌아섭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가, 이름표가 잡아뜯긴 조끼가, 선물받은 날에 한에서는 더러워지지 않을 운동화가, 동시에 새벽을 향해 돌아섭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 대사가 좋거든. 장미가 이름이 바뀐다 해서 그 아름다움이 가시겠어요?" 새벽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가 나를 장미라 부르는데, 만일 나의 본 이름을 알았더라면. 이 시구도 좋아해." "어느 시인이야?" "잊었어. 언젠가 이름을 알고 싶네." 노을이 쓸쓸하게 고개를 내립니다. 무엇도 둘 사이에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소리는 들어옵니다. 노을의 뒤편에서 폭죽이 터집니다. 예고도 없던 폭음에 노을은 울상이 되어 바람이 오는 쪽을 바라봅니다. 물기가 어렸던 얼굴이 한순간에 시원해집니다. 파란 밤이, 하얀 색을, 검은 색을, 빨간 색을, 그리고 파랑이 아닌 모든 색을 맞이합니다. 스탠드와 층 두 개를 뛰어올라, 새벽과 노을이 있는 교실의 바로 앞에서 터지고 있습니다. 하나가 터지면 하나가, 다시 하나가, 밤을 밤으로 놔두지 않고 달라붙습니다. 이 튀어오르는 소리 하나만으로도 언제나 이 교실을 느낄 수 있으리라, 노을은 미래에게 약속합니다. 왜 불꽃놀이를 좋아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느낍니다.
튀어오릅니다. 하늘로 올라갑니다. 언제라도 기억에서 불러올 수 있도록, 명쾌하고 확실하게. 채하는 중학생들을, 영화를 다시 보며 관객의 반응을 즐기는 열성 팬처럼 지켜봅니다. 그러다 보니, 채하는 튀어오르는 불꽃을 등지고 있습니다. 가장 어려보이던 중학생이 묻습니다. "언니, 왜 안 보는 거에요?" "즐길 사람은 내가 아니거든. 저 위에 있어." 빛을 등진 채하의 표정은, 채하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쉽사리 파악되지 못합니다. 색색의 빛이 튀어나올 때마다, 채하는 상대적으로 어두워 보입니다. "이게 내 일이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과는 남한테 가지." "힘들잖아?" 중학생이 다시 묻습니다. 불꽃놀이를 무시하고. 채하를 바라보며. 채하는 별나다는 듯 답합니다. "걱정마렴. 이게 내 임무야. 너도 이렇게 될 거란다." 채하는 경쾌하게 모래를 박차며, 폭죽을 등지고 조금씩 나아갑니다. 등을 지고 길을 밝히는, 가스등을 밝히는 지난 세기의 가로등지기처럼. 채하는 성취감을 느끼며, 어서 꿈이 끝나기를 고대할 뿐입니다. 역광, 빛이 아름다운 역광입니다.
불을 모조리 붙인 여명은, 철창 가까이 서 담배에 불을 붙입니다. 그러나 무슨 변덕인지, 꽁초를 손에서 놓더니 짓뭉개기 시작합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독사라도 잡듯이, 신경질적으로. 폭죽이 터질 때마다 여명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심장박동 한 번의 시간만큼도 살지 못한 담배 연기보다도, 더 흐릿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내 어리석음의 증거가 없어지기를, 여명은 바랍니다. 어서 꿈이 끝나기를. 노을은 새벽이 앉았던 책상에 앉아있습니다. 새벽은 좁은 자리를 공유합니다. 폭죽은 높이 올라오지 못합니다. 냄비에 거품이 일듯 금방 터져버립니다. 앉은 자리에서는 보기가 힘듭니다. 노을이 불평합니다. "불꽃이 잘 안 보여." "소리가 들리잖아. 그래도 소리라도 들려야지." "안 보이면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는 모습을 보자면, 완전히 염증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장난감 폭죽이 거의 다 터졌습니다. 공백이 찾아옵니다. 노을이 읊조립니다. "지금 폭죽 개수, 새벽이 나이네." 그 순간 한 개 더, 늦게 쏘아올려집니다. 노을은 성급했습니다. "새벽, 열아홉 살인 걸로 하자." "그건 무리야." 새벽이 웃습니다. "그게 뭐 대수라고." 노을은 자신이 덜 섬세했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실패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해보고 싶습니다. 실패를 기꺼이 할 수 있을 어치의 자유를 가지고 싶습니다. 노을은 한계가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꿈이므로, 환상이므로, 환상의 존재 이유는 자유 외에 그 무엇도 아니므로. 노을은 다른 사람의 눈을 향해 눈을 돌립니다. 그러나 하려 했던 말은 입에 걸렸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노을은 주머니에 넣은 분필을 억울하다는 듯이 꼭 쥡니다. 밀쳐집니다. 꿈에서 밀쳐집니다. 꿈이 끝나고 있습니다. 꿈이 닫힙니다. 문조차도 사라집니다.
새벽은 눈을 뜹니다. 노을은 눈을 뜹니다. 습관적으로 자신의 꿈노트를 집어듭니다. 예지몽을 꾸게 된 이후로, 해석을 위해 빠짐없이 메모를 하고는 했습니다. 기억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지만 펜을 들 기력이 없습니다. 노을은 손에 힘을 풉니다. 꿈노트마저 관람차의 바닥으로 굴러떨어집니다. 손에 포근한 요가 닿습니다. 담요를 좌석 한 구석에 밀어넣으며, 노을은 중얼거립니다. 평소와는 달랐다고. 역시나, 아무리 잠을 자도 밤입니다. 이 밤은 끝날 기색이 없습니다. 노을은 창을 보다, 창 밑에 달린 손잡이를 붙잡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갇혔음을 깨닫습니다. 문에 괴었던 턱은 치워져 있습니다. 어젯밤 마녀가 찾아온 후, 노을은 탈출을 시도할 수 있다는 이유로 관람차에 갇혔습니다. 외부에서만 열 수 있으니, 노을은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갇힌 신세인 것이지요. 노을은 한숨을 쉽니다. 비를 맞을 일이 없으니 우산은 지금처럼 간이집을 만드는 용도로만 쓰입니다. 시간을 떼울 물건으로는 새벽이 준 퍼즐이 있으나, 빛 한 줄기 없는데 어떤 각오로 퍼즐을 바닥에 쏟겠나요. 관람차가 텅텅 울리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관람차가 치솟을 일은 없습니다. 노을은 인기척을 느낍니다. 앞머리를 정돈합니다. 노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노을이 잠에서 꺠어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바깥에서 문을 엽니다. 가스등불을 든 호연입니다. "경찰 씨." 노을이 호연에게 달라붙습니다. 호연은 실소합니다. "기분 전환하러 가자. 내일 웃으며 새벽을 맞아야지." "이상한 꿈을 꿨어." "예지몽이었니?" "아니. 기억이 잘 안나. 불꽃놀이를 본 것 같아. 차암, 다음 점심 때는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일찍이 부결된 제안이지만, 호연은 노을을 위로하는 데에 신경을 쓰기로 합니다. 둘은 불이 밝히는 철제 계단을 같은 발걸음으로 내려갑니다. 옆으로 휑한 꽃밭이 보입니다. 튤립이 피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구근마저도 없겠지요. 바람에 날아온 꽃씨나 자랄 겁니다. 어쨌거나 꽃이 자랄 거라고 생각하자, 노을은 풍경을 보며 들었던 비관이 조금씩 허물어짐을 느낍니다.
"계획이 실패해서 조금 슬펐어.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불안하기만 했단 말이야. 그런데 마치 세계 전체가 준비한 것처럼 길이 확고히 보이니까, 거기로 뛰어가야겠다고 느껴졌어." "그런 말 하지 마." 호연이 말을 자릅니다. 노을은 호연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제야, 호연이 자신을 구하고 오는 길에 가족 둘을 잃었음이 기억납니다. 철창 너머로 내민 팔에 저항하지 않고 붙잡혔던 때를, 호연이 떠올리고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단발이 책에 끼우지 않은 가름끈처럼 휘청댑니다. 가스등불을 더 강하게 잡습니다. "함부로 죽는다는 말 하지 마. 나는 혼자니까 부디 내버려두지 말라고. 그 잘난 꿈이 너한테 무엇이 되라고 시키든간에, 나부터 먼저 봐. 꿈은 숨을 안 쉬고 난 숨을 쉬어. 제발."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고, 미안하다고 호연이 부끄러워합니다. 가스등불을 든 손으로 머리를 긁습니다. 그림자가 길게 뽑힙니다. 가늘어진 팔 다리의 그림자가 낭창낭창거리며 땅 위를 오갑니다. 노을은 뒷말을 삼킵니다. 그렇게 느꼈으나 무엇인가 잊어버렸다는 직감이 들어, 더 오래 있어야만 할 것 같다고. 내가 모르는 것이 지상에 남았고 그것은 분명 좋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고. 노을은 밤의 놀이동산에서 배려를 배웁니다. 낮의 놀이동산에선 배운 적 없는 것입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호연과 노을은 계단을 모두 내려왔습니다. 밤은 기약이 없습니다. 이 밤에 한 약속이라면 마치 평생을 갈 것만 같습니다. 밤이 가득합니다. 낮보다 몸무게가 갑절로 나갈 것 같습니다. 노을은 무겁게, 고심하는 시늉을 합니다. "츄러스 천막으로." 새벽과 여명의 숙소입니다. 호연이 얼이 빠져 되묻습니다. "거기는 왜?" "식욕이 생겼어." 좋은 전조구나, 호연은 츄러스 천막에는 여명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노을의 말을 따릅니다. "왜 들어오시려 하십니까." "순찰중이에요." "이 안에는 저밖에 없는데요." 여명밖에 없음을, 순찰에서 돌아온 지 채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졸도할 지경일 여명임음을 알면서도, 둘은 천막에 다다랐습니다. 호연과 여명이 천막의 입구 천을 붙잡고 대치하고 있습니다. 노을이 달려들어 몸으로 천막을 뭉개려 합니다. 천막의 높이가 낮아집니다. "아악. 미안해. 열게!" 눈이 퀭한 여명이 보입니다. 순찰을 나갔다간 터벅터벅 걷던 도중 어느새 좀비가 되어도 아무도 모를 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아직 순찰 나갔던 복식 그대로, 옷조차 갈아입지 못한 차림입니다. 일단 천막을 열었으나, 여명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호연도 모르고 있습니다. 여명이 묻습니다. "그래서, 뭐 하러 오신 건가요."
호연이 노을을 돌아봅니다. 오자고 말했으니 이유는 정해두었겠지요. 그러나 노을도 역시 멍해있는 상태입니다. 이 인분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됨을 느끼자, 노을은 일시에 정신을 차립니다. 발작하듯이 외칩니다. "츄러스를 내놓아라!" "저, 저기, 이거 장난이죠?" 여명이 호연을 보며 묻습니다. 천 한쪽을 꼭 붙잡은 채입니다. 호연은 망설이다 맞장구를 칩니다. "노을이의 말대로야! 츄러스를 내놓아!" "꺅." 여명이 뒤로 물러섭니다. 얼떨결에 호연과 노을은 천막 안으로 들어섭니다. 땅을 짚던 여명은 천막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밀가루 포대를 찾습니다. 그것을 두 진상, 노을과 호연 앞에 진상합니다. "여기에 어린 강도께서 찾으시는 츄러스가 있을 겁니다." "와, 정말이야?" 노을이 환하게 웃습니다. "숨겨놓은 츄러스가 없는지 보아야겠다. 가방을 압수수색하마." 어느새 노을보다 더 신이 나버린 호연입니다. "...네." 여명은 두 손 두 발을 모두 내려놓고, 피곤에 지쳐 이부자리로 기어 들어갑니다. 자신이 이 일을 내일 아침에 기억할지조차도 가물가물한 상태입니다.
아포칼립스에 츄러스라니. 그러나 공무원 시험 준비에, 합격하고 나서부터는 주주주야비야비야비의 암호 같은 교대근무를 하다보니, 츄러스를 먹기는커녕 그것을 파는 공간 자체를 한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호연은 여명이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며, 노을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츄러스처럼 생긴 야구방망이를 찾았어!" 노을이 방망이를 꺼내 조심스럽게 휘두릅니다. 낚싯대처럼 낭창거립니다. 호연은 쓴웃음을 짓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들고가면 새벽이가 야구를 못하잖아." "글쎄. 앗, 이거 내가 준 모자야." 노을이 울상을 짓습니다. 노을이 준 모자가 가방 뒤편에 놓여있습니다. 순찰을 갈 때 쓰지 않았군요. 그리고 쓰지 않은 채로 납치까지 당해,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게 되었군요. 노을이 모자의 울분을 대리합니다. 호연이 동조합니다. "어머. 이건 새벽이가 나빴는걸." "벌로 야구공과 글러브도 들고가야겠다." "...어라? 응. 그래." 호연은 얼떨결에 노을이 넘겨준 글러브와 공을 손에 들고 맙니다. 둘은 여명이 엎드려 뒹구는 천막을 조용하게 빠져나옵니다. 야밤의 완벽범죄가 완성됩니다.
호연은 자신의 품을 안절부절 못하며 내려다봅니다. 이것들을 서둘러 쓰지 않았다간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캐치볼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범퍼카 앞 공터가 낙점됩니다. 조금 긴 여로를 걷습니다. "옛날에는 선생을 꿈꿨는데." 호연이 경찰복을 내려다봅니다. 시선이 얄궂습니다. "지금 직업에 만족해. 꿈을 이루는 이야기도 아니고,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종말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더라고." "선생이라. 그랬으면 멋졌겠네." "그러게 말이야. 이제는 그런 꿈 없지만. 시간이 아까워. 사범대까지 갔었는데." 노을이 이유를 묻습니다. 호연이 노래를 중얼거립니다. 노을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사라진 놀이입니다. "옛날에 말이야, 마리아가 살았는데, 마리아가 마리아를 좋아했단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마리아가 말이야, 마리아가 죽었는데 말이야. 마리아가 몇 번 나왔는지 말이야, 한 번 맞춰보란 말이야." "뭐야 그런 정신 빠지는 문장은." 노을이 지체 없이 핀잔을 줍니다. 호연이 두 손을 들더니 허탈하게 웃습니다. 예시가 더 필요할까요. "이래서 안 된다는 거야. 어릴 때는 몰랐는데, 난 세대 차이를 엄청 강하게 느끼더라고. 지나갔음을 느낄 때마다 진이 빠져. 선생을 못 할 체질이지."
도착합니다. 노을을 세워두고, 호연은 몇 발 자국 더 걸어가 바닥에 가스등불을 내려놓습니다. 던지는 공을 잡을 수 있도록, 놓친 공을 뒤쫓을 수 있도록. 노을은 호연이 거리를 벌리는 동안 자기 등 뒤의 그림자를 가지고 놉니다. 팔을 듭니다. 그림자는 팔을 듭니다. 노을이 기뻐 웃습니다. 그림자는 웃지 않습니다. 노을은 하얀 숨을 들이쉽니다. 기억을 해보려 합니다. 자신이 꾸었던 꿈은 무엇이었던가요.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한 것만 같습니다. 숨겼던 것을 거의 털어놓았던 것만 같습니다. 노을이 잠시 눈을 반짝입니다. 그러나 곧 실소로 바뀝니다. 심도 있는 대화라니. 꿈에서 어떤 논의를 펼치든, 그것은 공상에 불과합니다. 불안에 휩싸입니다.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리라, 누구에게도 알아차려지지 못하리라,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신을 열심히 꾸미는 예언가가 되리라. 남의 말을 들어도 남이 들어줄 말은 하지 못합니다. 공을 받되 받을 수 있도록 던지지는 못합니다. 생각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이어집니다. 새로운 생각의 입가에 더 많은 피가 묻습니다. 더 큰 생각은 더 큰 비관을 뱉어냅니다. 현실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 노을은 "노을아, 받아." 호연의 말에 노을은 놀랍니다. 얼떨결에 공을 받습니다. 노을은 공을 되던집니다. 호연은 안정적인 자세로 공을 받습니다. 한 걸음씩 더 뒤로 물러섭니다. 원래 서로가 서있던 위치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갈 때까지.
한사코 뒹굴거리던 새벽은, 뒤늦게야 잠에서 벗어납니다. 나무 판자 위에서 뒹굴고 있는 상체를 발견합니다. 하체는 빠져나와 있습니다. 담요도 신발에나 걸린 이 모습은, 불의의 습격을 받아 겉치장이 벗겨져 버린 왕궁과 엇비슷합니다. 쇄골 즈음에 손을 가져다댑니다. 짧은 넥타이가 만져집니다. 파국 이후로 돌아왔구나, 새벽은 침을 삼킵니다. 롤러코스터 쪽에서 채하가 비틀대며 걸어옵니다. 손이 묶인 것만으로도 위태로워진다는 점에서, 우리의 균형 감각은, 그리고 거기에 의지하고 사는 우리는 얼마나 허약한지요. "잘 잤어?" "채하, 너도 같은 꿈을 꾼 거야?" 새벽은 평소라면 말도 안 될 질문을 던집니다. 마녀 모자를 쓴, 정말로 마법을 쓰는 마녀 앞에서 이상한 말이 무엇이 있겠나 싶지만 말입니다. 새벽의 기대에 어긋나게도, 채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녀니까. 내 꿈에 남을 초대하기야, 내 꿈에 내가 초대받기보다 쉬운걸." 너무 많은 정보가 한 번에 들어와, 새벽은 혼란스럽습니다. 채하는 나무 판자에 걸터앉습니다. 옥상의 난간에 무게를 실은 듯 불안한 자세입니다. "어색할 것 없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나도 안 지 별로 안 됐는걸."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어." "넌 이해할 수 없어. 네가 건강한 한은." 채하는 웃더니 벌떡 일어섭니다. 손짓을 할 수 없으므로, 오로지 말로 의사를 전달해야 합니다. "따라와. 하나는 하나로 있으면 되지만, 둘이 모이면 더 여럿을 찾아 모여야 해."
모자가 있는 곳에 머리카락이, 목동이 있는 곳에 거위가 가듯이, 새벽은 채하의 뒤를 밟습니다. 담요는 나무 판자 위에 다시 개어져 있습니다. 채하는 조심해서 롤러코스터 위에 올라탑니다. 그러던 와중에 마녀 모자가 떨어지지만, 채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낙하하던 도중인 모자를 공중에 띄워 머리에 내려앉힙니다. 간단히 없어지는 신비는 신비라기보다는 상술에 가깝겠지요. "사람이 있는 곳으로?" 채하의 뒤편에 탄 새벽이 말을 냅니다. 채하는 잠시 골똘히 고민합니다. "공중을 한 바퀴 돌다가, 우리 학교로 가자." "학교?" 새벽이 얼빠진 듯 되묻습니다. "거기 사람이 있어?" 그렇게 묻는 것도 당연한 것이, 겉으로 보았을 때는 생존자가 있을 수 없는 환경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도로가 꽉 막혀 있었습니다. 빛이 닿지 않는 공간은 보지 못하고, 막힌 공간은 듣지 못하며,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람은 차라리 기억 속에 남은 사람만큼이나 허구입니다. 채하는 수갑을 찰랑거리며 기지개를 펴더니, 굳은 목소리로 답합니다. "내 기억으로는." 묵직한 쇠덩어리가 둥실 떠오릅니다. 새벽과 채하는 도시 위로 올라갑니다.
롤러코스터가 밤하늘을 가릅니다. 요새 증발한 물이 없어, 구름 한 조각 없이 청명합니다. 별이, 지금은 사라진 야경보다 덜 아름다운 별이 총총합니다. 채하는 제 흥에 겨워 노래를 몇 소절 뽑아냅니다. Jukebox the ghost의 show me where it hurts입니다. 반주가 없다보니 산문시를 읊는 것도 같습니다. "열쇠는 시동을 끄기 위해 있어. 차에서 벗어나다 네게 넘어졌어. 물을 차례구나, 내가 무엇을 잘못했니. 내가 잊은 것 중 무엇이 잘못이니. 넌 울기 위해 멀리 보았어." 새벽은 침묵합니다. 자신이 겪은 일이 무엇인지 정리하기에도 박찹니다. 집으로 도망친 일, 생일잔치를 한 일, 구출된 일, 납치된 일, 재회한 일. 불꽃놀이를 본 일과 생일잔치를 한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인 겁니다. 현실과 바람을 구분해야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봐. 금방 왔어." 채하가 뒤를 돌아봅니다. 어느덧 고등학교의 상공입니다. 새벽은 밑을 내려보았다가 자신의 발끝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어쩌다 보니, 역병에 걸려버린 사람들만이 바글바글합니다. 공중의 두 사람을 발견하더니 고함을 지릅니다. 합창이 시작됩니다. 새벽은 귀를 막습니다. 새벽을 향해 채하가 웃습니다. 새벽에겐 들리지 않을 말을 합니다.
순간 소음이 사라집니다. 새벽은 겁을 먹은 아이처럼 고개를 듭니다. 모두가 사라져 있습니다. 땅에 묻히지도, 불에 타지도 않았는데, 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없어져 있습니다. 채하가 안타까운 웃음을 짓습니다. "장례도 없었네. 바쁘니 별 수 없었어." 새벽은 신발에 돌이 들어간 듯 꺼림칙하지만, 애써 그런 느낌을 억누릅니다. 자연스럽게 말이 터져나옵니다. "신통하네." 놀이공원의 철창 너머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지요. 필시 채하의 짓이었을 겁니다. "신 같은 소리는 평소에나 했어야지. 난 신 싫어." 채하가 핀잔을 줍니다. 새벽은 신통의 어원이, 신이 아니라 자기수양임을 애써 밝히지 않습니다. 채하와 새벽이 탄 롤러코스터가 2학년 1반 근처로 접근합니다. "거기, 창가쪽이야!" 순간, 장대가 둘을 겨냥해 날아듭니다. 채하가 몸을 숙여 장대를 피합니다. 이번엔 정말로 당황한 모양입니다. 새벽은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두컴컴한 교실을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뭐야. 채하잖아." 교실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새벽은 어디선가 들어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복도에서 한 번쯤은 사사로운 대화를 엿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채하가 교실 안으로 손을 흔듭니다. "사람을 태우러 왔어. 오늘 안으로 캠프파이어를 할 거거든." "뒤에는 누구야?" 새벽의 선배로 보이는 학생이 짖궂게 묻습니다. 새벽은 교실 안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앞문과 뒷문이 책상과 의자로 막혀있습니다. 사람은 총 다섯입니다. 네 명은 이 학교의 교복을, 다른 한 명은 옆 중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습니다. 노을이 다니는 그 중학교입니다. 새벽은 이들이 좀비 사태 와중에도, 어떻게든 은신처를 만들었구나 싶습니다. "대단하네. 어떻게 안전지역을 확보했어?" "채하 덕분이지." 처음에 채하를 알아보았던 그 학생이 답합니다. "난 편의점에 있다가 사람들을 피해 교문 앞까지 도망쳤거든?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집어들더라고. 참나, 하늘을 나는 채하였지. 그대로 1반 교실에 잡혀왔어." 새벽은 말을 잃습니다. 채하의 목덜미를 바라봅니다. 채하가 작게 웃습니다. "내가 만든 안전구역이야. 나 혼자 말 없이 도망갈 수는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안전한지 확인하고 이 학교를 떴지."
편의점에서 왔다던 학생은 채하와 일면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새벽이 학생의 이름을 묻습니다. "설기. 뭐, 올해 와서는 등교도 안 했지만." 출석부의 깨끗하던 이름입니다. 아마도 가출을 해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지요. 설기는 새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봅니다. 작년 운동회 때 같은 팀에 속했던 것도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얼굴만 알고 지내던 사이가 대학에서 유일하게 아는 지인이 되었다고 하여 친밀해지지는 않듯이, 그들은 서로 데면데면해하다가 눈을 피합니다. "여하튼, 우리와 갈 사람이 필요해. 자청해봐." 채하가 롤러코스터를 위 아래로 흔들며 자원자를 받습니다. 선배 같은 학생이 되묻습니다. "우리를 어디로 보내려고?" "놀이동산. 경찰들과 기술자들이 살고 있어. 식량도 넘치고 게다가 내가 살고 있지!" 새벽은 채하가 아직 놀이공원에 입주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핀잔을 주려다가 맙니다. 교실에서 적대감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별로. 꼭 데려가야 한다면 저 둘이나 데려가." 새벽이 작년에 같은 반이던 동급생이 설기와, 그와 함께 있는 남중생을 가리킵니다. 지금 보니, 이 학교 학생인 셋은 한편에 뭉친 한편, 설기와 남중생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채하는 배에서 배로 건너가는 병사처럼, 몸은 롤러코스터에 둔 채 창턱에 팔을 굅니다. 둘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남중생의 이름을 묻습니다. "연화에요. 설연화." 남중생은 머리 속에서 순서가 꼬였는지, 우선은 말을 뱉고 그 다음에 몸을 떱니다. 설기가 남중생의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그를 안심시키는 데에 도가 튼 모양새입니다. "이름이 별 거야. 이름 들킨다고 해서 죽지는 않거든."
새벽은 구출되던 당시 학교에 들러 외쳤던 문장들을 되짚습니다. 내일 다시 구출작전을 펼치겠다고 알렸지요. 그 말을 이들이 들었을까요? 설기는 고개를 도리질합니다. "좀비들은 너무 시끄럽게 굴잖아. 사람 소리가 안 들릴 만큼이나." 들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 선언이 헛되었나, 약간 씁쓸해하던 새벽에게 채하가 조용히 말합니다. "걱정마. 내일 구출작업이 있을 테니까." 평소처럼 자신만만해하고 있습니다. 기차가 다음 역에 멈출 것이 당연하다 말하는 승무원 같습니다. 새벽이 대하던 채하는 항상 이런 태도를 견지했지요. 새벽은 달라지지 않은 무엇인가에 종류를 알 수 없을 안심을 느낍니다. 채하는 이미 갈 사람이 둘로 정해졌다는지, 벌써 롤러코스터를 창가에 주차하고 있습니다. 설기가 망설입니다. "저기, 내가 꼭 가야 해?" 하긴, 둘이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세 명이었지요. 새벽이 연화에게 말을 겁니다. "시설 꽤 좋아. 뭐가 무서운 거야?" "대화를 시작하고 3분도 안 되어 끌려가는 조급함이요." "아참." 사실입니다. "참. 그러고 보니, 둘이 아는 사람이 놀이공원에 있었구나." 채하가 중얼거립니다. 설기도 연화도 그 말을 놓치지 않습니다. "누구야? 너라고 하면 화낸다." "일단, 네 오빠." 채하가 설기에게 말합니다. 새벽은 민기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민기의 여동생은 가출을 해, 학교 외에는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고등학교로 차를 몰았다고요. 채하는 연화에게 고개를 돌립니다. "네 친구도 한 명 있어." 들떠있던 연화는 순식간에 표정이 식습니다. 설기가 그랬듯이, 자신의 가족이 있기를 바랐겠지요. 설기가 연화의 두 손을 포개 잡고 쓰다듬습니다.
"...가죠." 연화가 설기에게 떨어진 옷을 건네듯 나긋하게 말을 냅니다. 설기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궁상은 안 떨어? 날 보고 싶었다거나." "잔뜩 그랬어." 채하가 직접 민기를 본 적도 없으면서 즉답하는 것을, 새벽은 또다시 넘깁니다. "그럼 보러 가야겠다. 연화야, 조심해서 올라타." "저도 알아요." 넷이 롤러코스터에 줄줄이 앉았습니다. 남은 셋은 교실에서 운동장을 내려다 봅니다. "완전히 비었구나." 한 명이 말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지." 새벽의 동급생이 주저합니다. 채하는 공중으로 치솟기 직전, 사람 두 명의 자리를 채운다는 듯 문장 둘을 던집니다. "식당에라도 서둘러 가봐. 너희 식량 떨어졌잖아." 넷이 탄 쇳덩이가 밤하늘로 치솟습니다. 행선지는 놀이공원입니다.
튤립이 없는 튤립공원 상공에 조심스럽게 롤러코스터가 접근합니다. 속도감에 익숙하지 않은지 얼굴에 거의 핏기가 가신 연화를 설기가 어르고 달래고 있습니다. 연화는 괜히 반발하지 않습니다. 어리광을 피울 상대란 나이차가 큰 형제자매뿐이고, 형제자매에겐 반발해보았자 최소한의 만족감도 느낄 수 없으니까요. "어떻게 날아다니는 건지, 신기하기도 해라." 설기가 이전의 새벽과 비슷한 말을 합니다. 채하가 냉정하게 비꼽니다. "언제는 엘리베이터 원리를 알고 탔어?" 그새에 롤러코스터가 속도를 줄이며, 겨우 멈춰 뭉쳐있던 모래를 공중으로 흩뿌리며 흙더미 위에 착륙합니다. 민기가 쉬고 있는 남자 숙소는 범퍼카와 회전목마 사이에 있습니다. 일행 넷은 관람차를 관통해 로터리를 지납니다. 관람차의 문은 닫힐 것이 두려운지 조심해서 턱이 괴여 열려있습니다. 민기의 숙소 번호를 그들은 모릅니다. 새벽이 직원 숙소 1호의 문을 두드립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이 나옵니다. 번갈아서 순찰을 돌고 있으니, 아직 잠에 빠지지 못한 사람이 하나쯤은 있었겠지요. "민기 형 숙소 좀 알고 싶어서요." "옆에 옆이야." 나온 남성은 눈을 반쯤 감고 말합니다. 그러더니 1초 정도, 눈을 번쩍 떴다가 감습니다. 놀람이 지나갑니다. "너 분명 납치됐다며." "리저렉션." 옆에 숨어있던 채하가 중얼댑니다. 남자가 천천히 쓰러집니다. 새벽이 문을 닫습니다. "왜 리저렉션이 기절시키는 주문이야. 근본 없어." "시끄러워." 설기의 참견에 채하가 노골적으로 귀를 막습니다.
새벽이 문을 두드립니다. 누구야, 하는 민기의 발음이 거진 뭉개집니다. 그러나 문을 연 민기의 얼굴은 거의 생생합니다. 저녁 동안에 잠을 잔 덕분인가 봅니다. "어라. 너 새벽 아냐." "민기 형. 돌아왔어요." 민기는 문에 걸었던 체인을 풉니다. 손잡이를 다시 잡은 민기는 주위를 살핍니다. "그 말은 곧." "마녀도 왔죠." 채하가 새벽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순간, 어둠속에서 무엇인가 번쩍입니다. 일행이 동시에 뒤로 물러섭니다. 민기가 식칼을 꺼내들었습니다. 문짝을 방패로 몸을 숨깁니다. "나머지는 누구야?" "나야. 바보 오빠 같으니." 설기가 투덜대며 앞으로 걸어나옵니다. 연화가 만류하려 들지만, 설기는 겁도 없이 민기의 손을 잡더니 칼을 떨어트립니다. 땅에 박힌 칼을 설기는 들더니 벽 저편으로 밀어버립니다. "마녀가 칼에 죽으면, 어? 천사도 칼에 맞아 죽겠네, 응?" "아는 사람이야?" 마녀를 알고 있냐니, 이상한 질문이지만 설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새벽이 대답을 대신합니다. "노을이의 언니에요." 민기는 태엽을 감아도 돌아가지 않는 시계를 보듯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마녀모자를 쓴 채하를 지켜보더니, 간단히 단언합니다. "그러면 네가 채하구나." "...네?" 채하가 당황합니다.
새벽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노을이 언니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던가요? 노을은 최대한 자신의 정보를 숨기려 들었습니다. 게다가 민기는 노을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거리를 벌리곤 했습니다. "어떻게 알았어요?" 채하가 발작하듯이 캐묻습니다. "삼 년 전까지 너희 아파트에 살았거든." 새벽과 여명을 구출하던 때 민기가 말했지요. 그가 말을 계속합니다. "너희 옆집이었어." "지금의 제 집이네요." 새벽이 말합니다. 새벽은 삼 년 전 그 아파트로 이사를 와 채하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노을은 보지 못했지요. "너희 자매가 둘 다 그 아파트에 있던 때에 바로 옆집에 있었으니, 당시에 있던 소동 덕에 너희 이름은 알게 됐어." "그럼." 채하가 망설입니다. "노을이에게 적대적이었던 것도?" 새벽이 장단을 맞춥니다. "아는 사람이 예언자를 표방해봐라. 웃기지 않겠어? 골려줄 요량으로, 가명을 부탁할 때 실명을 말해줬지. 보니 나이가 어린 쪽이다 싶었지만 이름이 노을인지 채하인지 헷갈려 두 이름 다 제안했어. 놀라더니 자기를 노을이라 부르라 하더군. 그러면 뻔하지. 넌 남은 쪽이니 채하야." 민기의 장광설을 채하는 얌전히 듣습니다. 마녀 모자를 꼭 눌러 씁니다. "...아하. 그랬군요." "보아하니 동생 덕분에 비밀이 털렸네." 설기가 키득키득 웃습니다. 채하는 곤란도 기쁨처럼 잠시 오고 가는 것이란 듯이, 태연하게 민기에게 길을 묻습니다. "저희는 입주자이니 등록을 해야겠죠. 안내를 하세요." "명령조라니. 너희 자매는 참. 하나가 예언가일 때는 웃기다 생각했는데 다른 쪽은 아예 마녀일 줄이야." 민기가 팔짱을 끼고 채하를 곁눈질하다가, 설기와 그 옆의 남중생이 눈에 밟히는지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일행이 다섯이 되었습니다. 다섯 명은 졸래졸래 본부인 기념품 가게로 몰려갑니다. 어떻게 다섯마저도, 이런 무질서함을 연출할 수 있을까요. 채하와 민기가 자꾸 선두를 경쟁합니다. "길을 안내해달라더니." "잘못된 길을 갈 때 잡아달라고요. 동생이나 챙겨요. 걱정도 안 돼요?" 채하의 질책이 옳았으므로, 민기는 설기를 따라 뒤쳐집니다. 설기는 칼부림과 자신이 모르던 이야기에 혼이 나간 연화를 또 다시 어르고 있습니다. 어른의 어원이 된 얼우다와 어르다는, 받침대 하나만큼의 차이밖에 지니지 않습니다. 민기가 설기더러 다치지는 않았냐고 난리를 피우고, 설기는 설기대로 민기를 피하며 동선이 뒤죽박죽이 됩니다. 옳은 길을 향하는지 확인할 유일한 감독역을 맡은 새벽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 해보지만, 채하는 한 번도 길을 잃지 않고 기념품 가게까지 다다릅니다. 평상시에 다녀봤던 길이, 좀비 사태가 발발했다고 하여 미로가 되지는 않으니까요. 마침 본부에는, 호연이 노을과의 산보를 마치고 본부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노을은 일찌감치 관람차로 배웅해준 뒤였습니다. 풍경이 딸랑거리자 호연과 서장이 경계 태세를 취합니다.
기껏 선두를 잡았던 채하는, 층계를 오를 때 쯤에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늑장을 부르고 있습니다. 민기와 설기, 연화가 둘을 추월해 들어갑니다. "새로운 사람 합류했어. 우리 동생이랑 지인이야." 민기가 호연과 서장을 부릅니다. 설기와 연화가 총총거리며 들어옵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호연이 손을 들어 반갑다는 의사를 표하려 들 때, 새벽이 들어옵니다. "다녀왔습니다." 새벽이 졸린 음성을 내뱉습니다. "좀 웃으면서 인사해라." "학교에선 안 저랬는데." 민기와 설기가 핀잔을 줍니다. "이쪽 의자에 앉으세요." "잘 왔어!" 호연이 새벽을 반깁니다. 서장은 의문 나는 데가 있나 봅니다. "자네 납치 당하지 않았던가?" "아참, 그랬지! 돌아온 거야?" 호연이 서장의 말을 듣고서야 호들갑을 떱니다 이번에는 마녀 모자를 젖힌 채하가 한껏 꾸민 맵시로 들어옵니다. "저도 왔어요." "이쪽에 앉으시면 돼요." 연화가 내민 의자 쪽으로 채하가 동선을 바꿉니다. "덜렁이." "모자 좀 벗어라." 설기와 민기는 이번에도 채하를 놀립니다. "좀 쉬어." "그래, 편히 쉬다 가." 호연이 새벽의 말에 맞장구를 칩니다. "잠깐, 자네는 그 마녀잖아?" "아참, 그랬지! 정체를 밝혀요!" 서장보다 한 박자 느린 호연입니다.
소동이 일단락됩니다. 채하는 호연 앞에 서 수갑을 찬 두 손을 내밉니다. "어서 풀어줘. 난 경찰이 믿을 만한 사람이야." "노을이 언니에요." 새벽이 말합니다. 호연은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냅니다. "노을이라면 믿을 수 있지." 기어코 채하의 수갑이 풀립니다. 채하는 털레털레 자리로 돌아갑니다. "소개가 필요한 시간 같은걸." 호연이 분위기를 잡습니다. 민기가 선수를 칩니다. "여기 얘는 내 동생이고." "얘도 제 동생이에요." 설기가 연화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뭐?" 민기가 당황합니다. "왜 그래, 오빠?" "형, 왜 그래요?" 연화가 설기의 장단에 맞춥니다. 민기가 할 수 없이 따릅니다.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죠." "우리 동생 똘똘해라." 설기가 연화와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앞장서 양측의 민기와 연화와 어깨동무를 합니다. 키 차이가 크게 나는 삼중 어깨동무가 완성됩니다. 채하가 풀린 한 손을 갈비 앞으로 갖다댑니다. 호연이 입을 열려던 채하를 만류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지 못하니까. 새벽, 너 데려갔던 저 사람은 누구야?" 새벽은 잠자코 고민합니다. "나쁜 사람인 줄 알았지만 노을이의 언니였고 제 친구였던데다가 민기의 가족도 구했던, 알고 보니 영 나쁘지만은 않은 마녀?" "그건 뭐야." 채하가 불평합니다.
서장이 빙그레 미소를 짓습니다. 호연을 바라다 봅니다. "그거야,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지 않나?" "네?" "얼핏 봐선 나쁜 줄 알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던 사람." "동생?" 민기가 답합니다. "오빠?" 설기가 답합니다. "누나." 연화가 답합니다. 호연은 셋의 답을 모두 피합니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민이군요." "경찰은 시민을 위해 존재해." 자기소개의 마지막은 이름을 밝히며 끝납니다. 연화와 설기, 채하의 이름이 공개되자 호연이 옆자리 앉았던 민기의 옆구리를 콩콩 찌릅니다. "내가 길거리 취객이냐." "들었어? 채하래." "들었지." "네가 차에서 말했던 이름이잖아." "그 아파트 주민이랬지? 삼 년 전이지만 봤던 사이야." "삼 년이면 얼굴 많이 바뀌었을 텐데." "노을은 알아봤거든. 알고서 실명을 말한 거야." "짖궂구나." "못됐어." 설기가 한 마디 보탭니다. "풀이 죽었을 노을이의 심정을 생각해보라고요." 채하가 다섯 마디를 보탭니다. "진짜 못됐어." 설기가 두 마디를 더 보탭니다. 민기가 말립니다. "그만해라. 두 손 든다."
서로가 누구였는지 털어놓았으므로, 무엇이 되어갈지 논의해볼 시간입니다. "우선 숙소를 배정하세. 내일 아침이면 호연이 찾아가 할 일을 알려줄걸세." 서장이 뜸을 들이더니 머리를 긁적입니다. "이 도시 시민이라면 놀이공원은 와봤을 테니, 길 안내는 필요도 없겠군. 종말 상황의 대피처가 익숙한 곳이라니, 좋지 않나." "종말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죠." 설기가 몸을 좌우로 흔듭니다. "둘로 나누어야겠지? 채하 양과 나머지 셋으로." "왜죠?" 민기가 되묻습니다. "가족끼리 있어야 편하잖아요." 연화가 고민도 않고 말합니다. "역시 우리 동생, 똘똘하네." 설기가 다시 연화와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민기가 끙 앓습니다. 현재 호연의 숙소인 본부 앞 게임센터에는 채하가, 사무소에는 민기와 설기, 연화가 배정됩니다. 민기는 짐을 빼게 생겠다며 꿍얼거립니다. "밤이 늦었으니 가세나." 서장이 벌떡 일어섭니다. "잠깐만요. 캠프파이어에 대해 할 말이 있어요." 채하가 가로막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그 주제에 대해 노을과 말해왔던 새벽과 호연, 민기가 일시에 채하를 바라다봅니다. "동생이 제안한 것 말인가? 그보다 그런 것도 알고 있군. 도청장치라도 심어놓았나?" 서장이 허털웃음을 짓습니다. "들으셨을 텐데요. 전 근방의 좀비를 없앨 수 있어요. 안전 문제는 확실히 보장되죠." 서장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다른 사람들을 둘러봅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 힘들었을 테니 쉬러 가게." 엉거주춤 일어섰던 사람들이 기념품 가게를 빠져나갑니다. 그때 채하가 사람들을 부릅니다.
"저기요, 궁금증을 채워도 될까요?" "뭔데?" 태도가 유해진 호연이 관심을 보입니다. "저희 동생, 노을이에 대해 여기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호연과 민기, 새벽이 곰곰이 생각합니다. "죽이 잘 맞고 좋지." 호연이 답합니다. "의심스럽기야 하지만, 노을이라서가 아니라 연기를 해서 그런 거야." 민기가 답합니다. "수상쩍어도 대화하다보면 즐거워." 새벽이 답합니다. 채하는 나름 수긍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궁금했거든요. 그럼 다들 잘 자요." 츄러스 천막으로 돌아가려던 길, 연화가 새벽을 붙잡습니다. "어, 노을이랑 잘 아시던 것 같아서요." "참. 혹시 네 친구야?" 새벽이 관심을 보입니다. 채하가 말하기를, 연화의 친구가 이곳에 있다고 했지요. 마침 노을과 연화는 동갑입니다. "맞아요. 듣자하니 제가 알던 모습과 다른 것 같아서요." "...다르겠지." 새벽은 꿈에서 보았던, 좀비 사태 이전의 노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채하에 따르면 완벽을 추구한다 하였고, 정이 없어 보이기도 하였지요. 놀이공원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영 다릅니다.
"네가 아는 모습은 어땠는데?" "작년 반장이었어요." "아, 그 느낌이었어." 새벽은 음악실에서 처음 봤던 노을의 모습을 묘사할 한 단어를 비로소 찾습니다. 새벽이 노을과 면식이 있는지 모르던 연화는, 그런가 보다 하고 말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초등학생 때도 알았거든요. 그때는 또 달랐어요." "어땠으면 그런 말을 다 해?" "조숙했어요. 어릴 때는 키가 엄청 컸어요. 그러다가 거의 안 자라게 됐죠." "그게 끝?" "성격도 딴판이었죠. 지금은 모든 과목에도 운동에도 최소한의 선이 있다는 듯 최선을 다하지만, 그때만 해도, 지금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느낌을 풍기고 다녔거든요." "언제가 기점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요. 여름방학 이후로 사람이 변했더라고요. 그런데 여러분이 말하는 노을이는, 마치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해서요." 새벽은 고민합니다. 무엇인가를 더 잘하기 위해 애쓰던 노력을, 지금은 예지몽을 믿고 신비를 연출하는 데에 쓰는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이전과 비슷함에도, 어떤 단절이 있었던 것만 같습니다.
"으음. 뭐야, 뭐 하는 거야?" 설기가 연화를 뒤에서 붙듭니다. "노을이에 대해 뒷담화하던 거야?" 호연이 끼어듭니다. "그런 것 아니에요." 새벽이 부정합니다. "앞으로 그럴 때는 나를 꼭 끼워주도록!" "노을이에게 이를 거에요." 새벽이 놀리듯 말합니다. 실책입니다. "그래. 어서 노을이를 찾아가." 기회를 잡은 설기가 장난을 칩니다. "대화하다보면 즐겁다며." 호연이 새벽의 말을 따라합니다. "수상쩍어도 찾아가고 싶을 만큼 말이야." 설기가 논조를 더합니다. 남을 놀리는 데에 특화된 남매입니다. "참. 연화야, 저 넥타이 많이 안 봤니?" "아. 저희 학교 넥타이네요. 그런데 제 것보다 짧아요. 뭘까요." 호연의 물음에 연화가 의문스러워 합니다. 그러더니 새벽을 빤히 바라봅니다. 새벽이 부담스러운지 눈을 감습니다. "저 자러 가요. 그만 놀리세요." "선물 받은 모자 쓰고 다녀. 노을이가 화내더라." "세상에. 선물까지 받았어?" "어디까지 선물로 받으려고요?" 연화마저 동참합니다. 새벽은 자기 편이 없다고 한숨을 쉬며,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뒤로 합니다.
점차, 설기의 입가에 걸려있던 냉소가 커피를 홀짝이듯이 사라집니다. "옛날엔 생각 없이 잘만 놀렸는데, 이젠 좀 힘들구나." "늙은 거야." 호연이 말하더니, 채하의 잠자리를 마련하려 먼저 게임 센터로 향합니다. 설기와 연화가 앞서가던 민기를 따라 사무실로 발걸음을 서두릅니다. 새벽은 바깥에서 본 츄러스 천막이 약간 기울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고속으로 날아다니다 보니 직선과 곡선이 두루뭉실해진 것일까요. 새벽은 자신의 눈을 탓하며 안으로 들어갑니다. 밀가루 포대가 웬일인지 한가운데까지 옮겨져 있고, 자신의 소지품은 흩어져 있습니다. 눈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집니다. 여명은 자고 있습니다. 여명이 멀쩡하다면 다른 문제는 없겠지요. 새벽은 마음을 놓습니다. 그떄 누군가가, 얼마 전에 다녀온 침입자와는 영 다르게 천막을 푹푹 두드립니다. 노크인 모양입니다.
새벽이 천막을 젖힙니다. 털털 바퀴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다름 아닌 끌차를 밀고 온 설기입니다. "누구 실어가려고?" "호연 언니가 말하기를, 밀가루가 있더더라고?" 새벽은 뒤를 돌아봅니다. 누구 짓인지, 방 한가운데데 보란듯이 내놓아져 있군요. "밀가루는 무슨 일이야?" "내일 츄러스를 해먹기로 했어. 분위기만 봐서는 캠프파이어가 성사될 기운이 들거든." 그러더니 머리를 긁적입니다. 괴로움 없이도 표정이 지어집니다. "안 된다 해도 나쁠 건 없잖아? 캠프파이어를 하든 안 하든, 단 걸 먹으며 기운을 차리자." 새벽과 설기가 힘을 합쳐 밀가루 포대를 끌차 위에 올립니다. 설기가 끌차를 뒤로 돌립니다. 둘은 손을 내보입니다. 말 없이 작별을, 푹 잘 것을, 재회를 인사합니다.
천막이 폐쇄됩니다. 새벽이 바닥을 더듬으며, 여명을 피하며 자신의 요를 찾아 집어듭니다. 지폐처럼 바스락거립니다. 분수대에 던져지는 동전처럼 새벽은 바닥 위에 푹 고꾸라집니다. 그러나 새벽의 숙면을 소음이 가로막습니다. 민기의 음성입니다. "야밤중에 왜 이리 멀리 왔어?" "낮에는 멀리 못 가잖아." "말 돌리지 마. 위험하게 혼자 돌아다니고 그래?" "뭐가 걱정이야. 평소에도 이러고 다녔어." 새벽은 설기가 가출했었음을 떠올립니다. "밤의 살기에 옷을 껴입고, 옷 벗기려는 사람들한테 맞서 살에 멍 입히면서 버텼거든." "이게 꼭 한 마디를 안 지지." "한 마디 져주면 너무 기고만장해지는 바보가 있거든." "그러고 보니 너 다친 거야? 약부터 바르자." "남한테 보이지도 않는데 뭐가 문제야. 걷는 데 문제 없거든." 민기와 설기가 한동안 말다툼을 하며 천천히 천막에서 멀어집니다. 다시 조용해지자 새벽은 뒤척입니다.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자 여명이 앉아있었습니다. 새벽은 깜짝 놀랍니다. "나쁜 꿈을 꿨어." 여명이 말합니다. 어둠에 가려 그의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새벽은 여명에게 보이지 않을 입을, 역시나 열지 않습니다. "끝까지 널 옆에서 도울게. 넌 내 동생이고 제자니까." 새벽은 연두처럼 연하게, 고맙다고 말합니다. 여명이 쓰러지더니 등을 돌리고 눕습니다. 새벽은 한동안 정면을, 천으로 막힌 하늘을 바라다봅니다. 여느 때와 같이, 지키지 못할 약속만이 난무하는 밤입니다.
오후 내내 논문을 들여다봤더니 눈이 못 버티겠네요. 오늘 글은 여기까지. 어림하여, 지금까지의 분량이 원고지 200매를 넘겼습니다. 외전을 빼고 전체의 삼 분의 일 가량 복구했다고 생각하니, 아직 원고지 400+a매가 남은 셈이네요. 가능한 한 간결하게 적으려 했는데, 600매면 작은 판본으로 300페이지 책이 나올 분량이었죠. 갈 길이 멀다 싶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노을은 열린 관람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잠에 빠져듭니다. 놀이공원에 누가 새로 들어왔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노을은 예지몽이 아닌 꿈을 꿉니다. 캠프파이어가 열리기 전까지,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역사적으로 이런 시간은 동화나 비극적인 신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잠시 동화가 이야기됩니다. 한 소녀가 포치에 앉아 동화책을 읽고 있습니다. 표지가 뜯겨나가 표지만 보고도 판단될 수 없게 된, 처절한 책입니다. 회색 평원에서, 그녀를 입양하고 맞이한 아주머니는 역시 회색입니다. 넓지만 볼 것은 없고, 다가오는 것을 앞서 알 수 있지만 오는 것은 허리케인뿐인 평원에서, 소녀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책을 낭독합니다. 강아지는 소녀가 책을 내려놓기를, 그리하여 책을 껌처럼 물어뜯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주머니는 젊은 만큼 아름다웠던 때 이곳에 살기 위해 왔다. 젊음도 아름다움도 태양과 바람이 가져갔다. 빛나던 눈과 입에는 잿빛만이 남았다. 말라비틀어져 웃을 일도 없었다. 고아 도로시가 왔을 때, 아주머니는 아이의 웃음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곤 손을 심장 부근에 올려야만 했다. 그리고는 또 재잘거리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가득찬 눈으로 도로시를 바라보곤 하던 것이다. 아저씨에 관한 장을 읽으려던 때, 갑자기 누군가가 소녀와 개를 낚아챘습니다. 그리고는 둘을 관람차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부탁하듯이 외쳤습니다. 소녀가 볼 수 있던 것은 후광을 가리던 인간 같은 형체뿐이었습니다. "여기 가만히 있어라! 허리케인이 몰려온다!" 문이 닫혔습니다. 문은 잠겨 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녀와 개는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관람차가 회전합니다. 하늘로 치솟기 시작합니다. 땅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문과 벽과 문이 다름 없어질 때까지.
큰 충격과 함께 소녀는 잠에서 깼습니다. 푹신한 개가 아니었다면 위험할 뻔했지요.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옵니다. 더 이상 어둡지 않습니다.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문이 벌컥 열립니다. 소녀는 난쟁이들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긴, 그러나 챙이 없는 모자를 비롯해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쪽 마녀를 물리쳐 주셨군요! 죽이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소녀는 관람차에서 나옵니다. 구두 두 짝이 관람차 밑에 깔려 있습니다. 난쟁이들이 구두를 벗겨 태우려던 것을, 소녀는 만류합니다. 자신의 낡은 구두를 벗고 새로운 구두를 신습니다. "저는 이제 어디로 가면 되나요? 집으로 가려고 하는걸요." 난쟁이들은 입을 다뭅니다. 그러나 작은 노파가 총총거리며 나타납니다. 그녀가 든 칠판에 하얀 분필로 글자가 적힙니다. "당신을 에메랄드 시로 보내라고 합니다." "어디인가요?" "모두가 초록색인 장소이지요.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살고 있습니다. 도움을 얻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 혼자서요? 저는 평범한 소녀인걸요." 그녀의 말에 먼치킨들이 웃음을 짓습니다. 노파가 말합니다. "이곳은 요술의 땅이에요. 동물도 말을 하는 마법의 땅, 오즈랍니다." 소녀의 개가 호응하듯이 흥겹게, 멍 짖습니다.
노파는 칠판을 들여다보더니 정합니다. "당신은 분신술을 쓸 수 있군요." 소녀는 짧은 노력 끝에, 자신의 분신을 만납니다. 소녀가 분신을 들여다봅니다. "너는 내 그림자를 닮았구나." 소녀는 분신을 동쪽 마녀를 감시하기 위해 남겨둡니다. 난쟁이들의 호응을 받으며, 소녀와 개는 에메랄드 시로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여행답게, 소녀는 여러 일행을 만났습니다. "나는 탐욕이 없어. 그래서 무엇도 할 수 없어." 사자가 소녀의 앞에 섰습니다.. "나는 자존심이 없어. 그래서 무엇도 할 수 없어." 나무꾼이 소녀의 옆에 섰습니다. "나는 상상력이 없어. 그래서 무엇도 할 수 없어." 허수아비가 소녀의 뒤에 섰습니다. 에메랄드 시로 들어가기 전, 수문장이 그들에게 초록 안경을 건넸습니다. "이 도시는 너무 밝습니다. 안경 없이는 눈이 멀어버리죠. 그래서 모두의 안경은 잠겨있답니다. 방문객을 빼고는요." 안경을 쓰고 다섯 일행은 도시로 들어섭니다. 모든 것이 초록색입니다. 구름마저, 디저트 가게마저 초록색입니다. 가게 안에는 학생 두 명이 빨대로 아이스티를 마시다,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집니다. 일행은 곧장 직진해 오즈의 성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위대하며 잔인한 오즈다. 너는 누구이며, 왜 하필이면 나를 찾아다녔는가?" 거대한 머리에서 음성이 울려퍼집니다. 소녀는 꿈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오즈가 묻습니다. "그 구두는 누구에게서 약탈했느냐?" "동쪽 마녀를 물리친 대가로 난쟁이들에게서 받았습니다." "이마의 자국은 무엇이냐?" "노파에게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왜 이곳에 머물지 않느냐?" "아름답고 찬란하나, 어쩔 수 없습니다. 전 되돌아가야 합니다." "너는 동쪽마녀를 죽였다. 그만큼 강하지 않느냐?" "제 자유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즈는 소녀와 일행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 땅에서는 받기를 바라기 위해 먼저 주어야 한다. 서쪽 마녀를 죽여라. 그녀는 이제 이 땅에 남은 유일한 악한 마녀다." "나는 마녀를 죽일 만큼의 욕심이 없어." 사자가 말합니다. "내게는 일을 미루지 않을 동기가 없어." 나무꾼이 말합니다. "내게는 계책을 떠올릴 상상력이 없어." 허수아비가 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소녀와 함께하겠다고 말합니다. 개를 앞세워 그들은 서쪽 땅으로 나아갑니다.
수문장에게 초록 안경을 반납합니다. 서쪽 마녀에게 어떻게 가냐고 소녀가 묻습니다. "길은 없습니다. 갈 사람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녀가 찾아올 겁니다. 그녀는 당신들을 노예로 만들려고 단단히 벼를 것이 뻔하거든요." 정말이었습니다. 머지 않아 마녀가 늑대들을 이끌고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소녀의 개가 늑대와 마주했습니다. 마녀가 혀를 찼습니다. "이런. 하나는 어리고, 하나는 말을 못 듣고, 하나는 의욕이 없고, 둘은 의욕이 없고, 셋도 의욕이 없구나. 노예로 쓸 수가 없지 않니." 그러더니 일행을 타이르기 시작합니다. 이 길을 돌아, 길이 없는 곳이 아니라 길 있는 곳으로 가지 않겠냐고. 사기꾼 오즈를 잡으러 가지 않겠냐고. 잠시 후, 일행과 마녀는 수문장을 물리친 채 도시로 들어섰습니다. 초록색인 줄로만 알았던 도시는 알고 보니 형형색색이었습니다. 색색의 구름이, 색색의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마녀는 이 도시가 초록색인 것은 안경 때문이라 일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외치기를, 우리는 해방군이라고. 그들은 그대로 성으로 들어갑니다. 마녀와 일행, 그리고 오즈는 대치합니다. "위대하지 않으나, 잔인한 오즈." 마녀가 오즈를 부릅니다. "모두 끝났다. 모두 끝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안경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오즈가 자신을 속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유지했음을 알았습니다. 성으로 몰려오는 그들을, 마녀와 소녀는 막아섰습니다. "우선 동화를 끝내도록 하자." 마녀가 말했습니다.
소녀는 오즈의 행방을 정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오랜 토론 끝에, 오즈는 노동 교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구시대의 잔재들을 제 손으로 파괴하게 되었지요. 양손, 그리고 나무 방망이만으로 말입니다. 소녀는 구두를 땅에 두 번 부딪히며, 자신은 되돌아갈 것이라 말했습니다. 소녀는 연기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되돌아간 것일까요. 그러나 추측뿐입니다. 서쪽 마녀는 오즈의 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시를 초록색으로 칠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초록 안경 따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해방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건물들이, 모든 하늘이 초록색으로 보이지만 말입니다. 오즈의 성에는 매일 사람들이 출근해 초록 연기를 굴뚝으로 피워냅니다. 사자는 욕심을 얻었습니다. 이제 사자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게 사자가 바란 탐욕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무꾼은 자존심을 얻었습니다. 이제 누구와도 말을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무꾼은 더 이상의 자존심을 바라지 않습니다. 허수아비는 상상력을 얻었습니다. 이제 적을 친구로 믿을 수 있습니다. 적을 적으로 여길 만큼의 상상력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감시하던 소녀의 분신이 사라지자, 동쪽 마녀는 눈치를 보더니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난쟁이들에 의해 잡혀버렸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생명만을 연장하게 되었습니다. 오즈는 오늘도 나무 방망이를 듭니다. 캉캉, 불꽃놀이 같은 소리가 이어집니다. 벽돌이 빠집니다. 시멘트가 빠집니다. 못이 빠집니다. 먼지가 일어섭니다. 건물을 하나 무너뜨리면 다음 건물을 무너뜨립니다. 시계가 역행하듯, 북쪽에서부터, 서쪽으로, 남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그리하여 오즈가 마침내 동쪽에 다다랐을 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소녀가 타고 온 관람차만이 남았습니다. 오즈는 철제 구조물을, 관람차를, 바퀴살과 같은 철골을 방망이로 내리칩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관람차가 허물어집니다.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자유의 몸이 되어, 오즈는 동쪽 마녀의 면회를 신청합니다. 당신이 마침내 왔습니다. 동쪽 마녀는 당신을 바라봅니다. 먼지로 가득 찼군요. 말을 해보세요, 먼지를 내뱉어도 저는 들을 자신이 있습니다. 눈을 뜨세요, 눈동자의 자리에 먼지가 찼더라도 저는 눈을 돌리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공 같은 기침을 합니다. 그러더니 정면을 바라봅니다. 유리창 너머로, 저는 당신의 손이 있는 자리를 더듬습니다. 그곳에 심장이 놓인 것처럼. 노을 당신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당신은 고꾸라집니다. 의자 밑으로 떨어집니다. 저, 동쪽마녀는 일어섭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면회의 끝을 알리는, 당신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립니다. 마치 경보음 같습니다. 오래 전, 파국이 왔을 때 울렸으나, 이제야 도달한 음성처럼 빛납니다. 당신을 바라보며 저는 힘 없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당신이 죽었으니 축제가 열릴 것입니다. 당신이 죽었으니 더 많은 희생양은 필요 없겠지요.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역사적으로 이런 시간은 동화나 비극적인 신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저, 동쪽 마녀는 한숨을 쉬더니, 오래전에 시작한 이야기를 입에 담았습니다. 옛날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더라고요. 한 소녀가 포치에 앉아 동화책을 읽고 있었더라고요. 표지가 뜯겨나가, 표지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게 된, 처절한 책이었더라고요.
노을이 눈을 뜹니다. 꿈에서 깨어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감각이 생생합니다. 이상합니다. 오늘만 해도, 예지몽이 아닌 꿈을 벌써 두 개나 꾸었습니다. 혼잣말이 흘러나옵니다. "기분이 이상해." "그렇지?" 노을의 앞에 채하가 나타납니다. 노을은 답하려다 말고, 온몸이 굳어버립니다. "왜 여기 있어?" "그러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뭐 하려고 왔어?" "불 좀 피우려고. 준비는 끝났어. 넌 네 마지막 꿈을 따르면 돼." 채하가 웃더니 관람차를 빠져나갑니다. 노을은 혼이 나가버립니다. 채하를 뒤따라왔던 새벽이 관람차 문을 두드리더니 들어옵니다. 어깨를 잡고 흔들어 노을의 혼을 다시 집어넣습니다. 노을의 눈동자가 무딘 도끼처럼 새벽을 향합니다. "새벽씨이번엔모자쓰고왔네혼내주려했는데." 아직 부족한가 봅니다. 노을을 더 뒤흔듭니다. 열 번 찍힌 나무처럼 노을의 정신이 확 돌아옵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 그보다 새벽 씨 돌아왔네?" "마녀가 채하였고, 채하는 내 친구였고, 캠프파이어가 통과됐고,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했어." "머리 안이 꼬이는걸. 꿈도 괴팍한 걸 꿨는데." 새벽이 노을의 꿈에 관심을 보입니다. 노을이 다리를 꼬고는 기억을 되짚습니다. "나는 동쪽마녀였어." "그래?" "언니가 탄 관람차에 깔렸다가 감옥에 갇혔어." "채하는 노을에게 무슨 의미인 거야." "새벽 씨는 늙어서나 면회오더니, 내 앞에서 늙어죽었어." "어째서 나까지."
"아이고. 바보 커플 나셨네요." 관람차 문 뒤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노을이 흠칫 놀랍니다. 설기가 얼굴을 빼꼼 내밉니다. "너도 서둘러 잠깨. 듣고 보니 네가 밀어붙인 행사라며?" "누구세요?" "네 언니 친구야. 너처럼 네 언니 싫어해." 경계감을 보이던 노을이, 그 말 한 마디에 확 풀어집니다. 설기를 환영하고 나섭니다. "똑똑한 사람이네." "그럼. 잘난 척하지만 빈틈이 많아. 날 구출해주면서 우리 베이스캠프에는 식량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 많았거든. 허탕을 친다니까." "예시를 들지 않아도 언니는 바보야." "그래, 바보야." 설기가 웃습니다. 새벽은 노을이 한쪽에 밀어둔 담요를 정리합니다. "어디 나가자." 새벽이 제안합니다. "잠 깨는 데에는 산책이 최고지." "데이트예요?" 설기의 뒤편에서, 새로운 인물이 끼어듭니다. 설기가 등을 굽힙니다. 연화가 업혀 있습니다. 노을이 연화를 알아봅니다. "넌 또 왜 여기 있어?" "구출됐어?" "우리 언니는 바보지?" "어... 잘 모르겠어." "넌 내 적이야." 노을이 토라집니다.
새벽이 노을을 데리고 관람차를 빠져나옵니다. 캠프파이어를 할 아침이 되었으나, 여전히 사방이 어둡습니다. 새벽이 관람차 계단을 내려가며, 설기에게 묻습니다. "연화는 왜 그러고 있어?" "아, 얘?" 설기가 열두시의 시계탑처럼 뻣뻣하게 서 한 번 뜀뛰기를 합니다. 설기의 등에 업힌 연화가 깜짝 놀랍니다. "침대에서 떨어졌거든. 널바닥에 자다 침대에 가니 잠버릇을 주체할 수 없었나봐." "참. 츄러스 만든다더니." 새벽이 어젯밤의 일을 기억합니다. "맞아. 오빠가 식당에 갔어. 조리원들이 만들어주신 츄러스 갖고 곧 오실 거야. 캠프파이어 때 나누어 줄게. 기대해." 노을의 눈에 기쁨이 스칩니다. 곧 있을 캠프파이어, 곧 만날 사람들, 곧 이루어질 꿈. 검은 밤과 노란 등, 통행 금지를 연상시키는 배경이 노을을 스쳐갑니다. 새벽과 노을이 내려갑니다. 노을은 외줄의 끝에 다다른 사람과 같은, 복잡한 표정을 짓습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텅텅거리는, 길쭉하게 뽑힌 노을의 그림자는 그리스의 설화를 연상시킵니다. 전장에 나가는 연인의 그림자를 벽면에 따라그린 여인이, 그리스 최초의 화가가 되었다던 전설을. 글과 그림과 그리움은, 벽면에 새긴다는 점에서 같은 어원을 지닙니다. "아참." "왜 그래요, 누나?" 연화가 설기에게 묻습니다. "저 애들, 우리 말 하나도 부정 안 했어."
채하는 아마도 여명을 만나러 츄러스 천막으로 갔을 것입니다. 새벽은 같은 동선을 잡습니다. 노을에게 꿈에 대해 묻습니다. "나 말고는 누가 등장했어?" "새벽이 형이랑 민기랑 경찰 씨, 그리고 빌어먹을 언니." 새벽은 노을의 말을 애써 교정하지 않습니다. 말을 돌립니다. "채하를 정말로 싫어하는구나." "엄청 싫어해. 내가 두 살이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좋아해본 적 없어." 채하가 다섯 살일 때입니다. 둘 중 누구도 멀쩡한 기억을 가지지 않았을 때인데, 우리는 왜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남을 꺼려할까요. 노을이 증기기관차처럼 한숨을 푹푹 내쉽니다. 새벽을 앞서가더니, 마구 짜증을 냅니다. "내가 잠든 새에 일이 너무 많이 생겼어. 멍청한 예언가라니. 이대로라면 내 신비가 날아가버려." "넌 신기해." 새벽이 노을의 지나친 고민에 웃음을 짓습니다. "아니거든. 다 끝났어." 노을이 새벽을 보며 뒤로 걷습니다. 새벽이 쓴 모자를 빼앗아듭니다. 양팔로 잡은 모자를 머리 위로 들어올립니다. 노을의 위에 UFO가 떠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노을이 UFO에 잡혀가는 척, 으아아 소리를 냅니다. "도와줘. 내 신비가 다 날아가." 새벽은 모자를 잡습니다. 노을에게 모자를 씌워줍니다. 흔들리던 노을의 꽁지머리가 얼굴에 착 달라붙습니다. 땀이 많이 난 모양입니다. 노을은 모자를 새벽에게 되돌려줍니다.
둘은 잠시, 오스트리아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무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카푸친 납골당, 성 슈테판 성당, 그리고 성 아우구스틴 성당에 심장과 유골이 나뉘어 보관된, 역사의 토막살인의 현장에 대해서요. 노을은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거기는 왜? 마르가리타 같은 유명인 때문에?" "외국이니까. 해외여행을 못 가봤어." 새벽이 천막 근처에서 여명을 만납니다. 새벽이 유쾌하게 손을 듭니다. 그러나 여명은 복잡다단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뒤에는 채하가, 축제를 앞두고 짓기 마련인 타이머 같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여명 형?" 새벽이 묻습니다. "놀음은 그만 하도록 하자." 여명이 새벽을 냉정하게 물리칩니다. 새벽은 잠시 멈칫합니다. 잠시 표정이 일그러집니다. 그러나 과민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줄을, 새벽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노을은 눈치를 살피더니, 새벽의 뒤편으로 총총거리며 물러섭니다. "더 머뭇거리지 말자. 소원팔찌를 돌려줘." 여명이 새벽에게 손을 내밉니다. 새벽은 자신의 손목을 봅니다. 여명이 생일 선물로 준, 소원팔찌를 차고 있습니다. 지금 보니, 새벽은 얼마나 선물을 많이 받았던가요. 새벽이 머뭇거립니다. 노을은 눈치를 살피더니, 무엇인가 깨달은 모양새입니다. "내놓으라고 해. 보니까 자기도 하나 갖고 있었네. 선물을 줄 거면 다 줬어야지." 새벽이 노을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바지 주머니에 넣은 여명의 손목에, 구슬로 된 팔찌가 얼핏 보입니다. 여명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한 손을 여전히 새벽에게 내밀고 있습니다.
"글쎄. 뭘 복잡하게 정리하려 그래. 그냥 없던 셈 쳐. 어서 캠프파이어에나 가자." 채하가 끼어듭니다. 열성을 품고 있습니다. 이런 일 따위야 금방 넘겨버리고, 얼른 일상의 궤적에 돌아가자는 투입니다. 무슨 신호였을까요. 새벽은 손목에서 팔찌를 쓸어내립니다. 엮인 구슬들이 땅바닥에 떨어집니다. 새벽이 팔찌를 주워듭니다. 묻은 모래를 털어냅니다. 여명에게 건넵니다. "...고맙다." 붕대로 감긴 듯, 작게 여명이 중얼댑니다. "이걸로 모두 정리하도록 하자." "...저야말로." 새벽이 감정이 씻겨나간 목소리로 답합니다. 누구도 동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평소라면 절대로 동요하지 않던, 채하가 굳은 눈으로 둘을 바라봅니다. 자신만이 빠져나간 세계의 단면을 바라봅니다. 그 이상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노을입니다. 노을이 불안해져, 눈을 감듯이 채하를 부릅니다. "언니, 왜 그래?" "...아냐." 채하가 부정합니다. 새벽은 눈이 침침합니다. 밤이 물처럼 가득합니다. 짓눌리는 것 같습니다. 옷을 털면 밤이 빠져나올 것 같습니다. 불투명해, 바로 옆에 선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약속도 허물어질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새벽은 채하의 탈선을 생생히 느낍니다. 항상 자신만만하게 처신하던 그녀였으므로.
채하가 여명을 건물에 들어갈 때 밀치는 문처럼 피합니다. 뒤로 물러섭니다. "먼저 가세요. 쌤. 저 사무실에 가볼게요." "도와줄까?" "아니오. 시계가 필요해서 그래요. 먼저 가든지 하세요." 채하가 빠져나갑니다. 여명은 새벽과 노을이 서먹한지, 천막에 들렀다 가겠다고 전합니다. 개운하지 않은 채로, 새벽과 노을이 캠프파이어 장소로 향합니다. 노을이 점쳤던 곳입니다. 관람차 앞 광장입니다. "지금 일에 무슨 의미가 있었지?" 새벽이 묻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을 새벽은 도저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사자가 모르면 어쩌란 거야." 노을이 핀잔을 줍니다. 그러더니 성큼 새벽을 앞서갑니다. 새벽은 순간 고립된 기분을 느낍니다. 누구의 심정도 넘겨짚을 수 없습니다. "새벽 씨는 새벽 씨만 생각해." 노을은 그렇게 말하나, 새벽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광장의 한편에는 꼭 녹였다 굳힌 것 같이, 얼기설기 쌓인 장작들이 가득합니다. 호연과 경찰 셋이 노을과 새벽을 맞이합니다. 호연이 팔을 높이 듭니다. 구멍을 판 뒤, 그 안에 우물 정 모양으로 장작을 쌓아올리는 중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양만 보아서는 타오르기보다는,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한 구조물인 것만 같습니다. 호연이 장작을 가리킵니다. "다 채하가 가져온 거야." "언니가?" "마녀랬잖아." 새벽이 노을에게 설명합니다. 노을이 시무룩해집니다. "이 근처 좀비도 다 없애버렸어. 안전 걱정은 사라졌지." "좀비가 없었을 때도 우리는 항상 위험했는걸. 경찰 씨가 실업자가 안 됐잖아." 노을이 억지를 부립니다. 호연이 웃습니다. "인류 모닥불 협회가 어찌되었든 창립되겠네." "협회." 노을이 눈을 번쩍입니다. 새벽은 노을이 기운을 차린 듯하자, 내심 안심합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무얼 해야 할까. 노래라도 불러야 하나?" "정석적이네." 노을이 답합니다. 호연이 심술궂은 얼굴을 합니다. "왜 캠프파이어 때는 노래를 부르는지 알아?" "어째서야?" "불을 보면 죽고 싶어지거든. 그걸 잊기 위해서라도 노랫말로 도망쳐야 해." 호연은 네모나게 장작을 쌓기를 계속합니다. 노을은 조용해집니다. 새벽의 손을 잡고 적당한 자리를 물색하며 주위를 돌아봅니다. "불을 보고 싶지?" 노을의 물음입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새벽은 머리를 조악댑니다. 멀리서, 츄러스 상자를 든 채 걸어오는 민기와 설기, 연화가 보입니다. 새벽은 멈추어 서서, 이곳이 적당하겠다고 말합니다.
캠프파이어의 시작입니다. 호연이 우물에 기름을 끼얹습니다. 불이 붙여집니다. 땅을 피해 도망가는 풀처럼, 불길이 맹렬하게 손을 뻗습니다. 불티가 튀어옵니다. 주위가 환해옵니다. 오랜 밤 중에 너무 강한 빛을 보자, 사람들은 일시에 눈을 찌푸립니다. 네모난 모닥불은 꼭 목이 잘린 시체 같습니다. 새벽은 빛을 등져 밝음에 익숙해진 뒤에야,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새벽의 바로 옆에 노을이 앉아있습니다. "하아." 노을은 마치 아마추어 천문학자 같습니다. 근로기준법의 순풍에 올라타, 일 년에 단 15일 주어지는 유급휴가를 써 어디 산에서 별을 관측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배가 난파하고 가족의 유산 문제에 불려가고 스파이들로부터 외국의 왕족을 지키느라 14일을 허비해 버렸습니다. 나름의 성과도 얻고 인연도 얻었지만 휴가 마지막 날, 별을 보겠단 목표는 아직 분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망원경을 트렁크에 넣고 산으로 갔습니다. 마침 8월, 페르세우스 유성우의 날입니다. 망원경을 물고 간 멧돼지를 잡고, 근처의 영화 촬영팀마저 쫓아냈습니다. 지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어. 이 정도면 하늘도 내 정성에 탄복하고 유성우를 줘야 해. 소원은 빌지 않을게. 그런 하찮은 이유가 아냐. 난 정말 별을 보고 싶어. 이렇게 아마추어 천문학자는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은 하루종일 흐렸습니다. 새벽이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이런 이야기를 짤 만큼 심려 깊은 몸동작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모닥불 협회 창립을 앞두고 그런 못된 표정을 짓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호연도 새벽과 같은 낌새를 느꼈는지 노을의 팔을 붙잡습니다. "깜짝 놀랐잖아요!" 노을이 기겁합니다. 비밀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처럼. "혹시나 해서 마지막으로 물을게, 노을아." "우리 사이에 거리 벌릴 필요 없는데. 경찰 씨." "너, 어젯밤에 우울하던 건 가셨어?" 호연은 고층에서 야경을 내려다볼 때처럼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새벽이 관심을 보입니다.
"노을, 무슨 일이야?" "그저, 뒤숭숭한 꿈을 꿨어." 노을은 말을 줄이려 합니다. 대화에 구멍이 나는 것만 같습니다. 호연의 말투가 순식간에 험악해집니다. 노을은 한 번, 자신의 꿈을 맹목적으로 따른 전적이 있습니다. "어젯밤처럼, 네가 좀비에게 물려야 한다는 꿈은 아니지?" "그런 거 아냐." 노을은 갑자기 다짐한 듯한 목소리를 냅니다. "난 이제 꿈을 안 믿어. 완벽하게 박살났는걸." "나를 봐서라도 꿈을 따르지는 마." 노을은 입을 다뭅니다. 새벽을 흘끗 봅니다. 대화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 채하가 뒤에 멀찍이 떨어진 채 새벽을 호출합니다. 노을은 가녀린 팔을, 새벽을 향해 뻗었다가 접습니다. 채하는 모처럼 들떠있습니다. 시계를 번쩍 치켜듭니다. 사무실에 들른다더니, 벽에서 시계를 떼어왔나 봅니다. 못에 거는 용도였을 고리가 달랑거립니다. "새벽, 봐. 시계 구했어." "그거 자랑이야?" "시간은 중요하지. 태양의 그림자에서 기원했던 시계가, 밤에도 똑딱 잘도 돌아가네? 10시 5분 전이야. 5분." 채하의 음성이 떨리고 있습니다. 잠시 대화가 끊깁니다. 새벽은 모닥불 전체를 조망합니다. 채하와 새벽 앞에 노을이 앉아있고, 여명은 반대편에서 불의 상단을 하염없이 보는 중입니다. 호연과 경찰 셋이 경비를 섭니다. 민기와 설기, 연화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츄러스를 쥐여주는 중입니다. 민기의 등에는 호연의 어린 동생이 업혀있습니다. 설기가 새벽과 채하를 부릅니다.
"단 것 좀 먹어. 너희 너무 지쳐보인다." "안 지쳤어." 채하가 말합니다. 설기가 이해한다는 듯 웃습니다. "축제를 준비하느라 너무 애를 써서, 정작 축제를 못 즐기면 안타깝잖아." 너희의 노력을 안다며, 설기가 또 다시 웃습니다. 새벽은 시계를 붙든 채하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는 즐기는 장소가 아냐." 채하가 답합니다. 설기는 듣지 않았다는 듯 새벽과 채하에게 츄러스를 내밉니다. 새벽과 채하가 앞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나 츄러스를 받는 사람은 새벽뿐입니다. 채하는 양손에 붙든 시계를, 그 안의 바늘을 노려봅니다. "3분 전이야." 새벽은 그제야, 자신이 노을 근처까지 걸어왔음을 깨닫습니다. 노을이 채하에게 말을 겁니다. "저기, 언니. 모닥불 좋네. 특히 시작하는 모닥불은." 채하가 노을을 바라봅니다. 그들 앞으로 상사화 같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상사화는 꽃대궁이 진 후에야 잎을 내는데, 모닥불은 불꽃이 진 이후에 무엇을 낼까요? 빛을 쬔 채하의 얼굴이 새벽에게 생생히 보입니다. 새벽은 모종의 체념을 느낍니다. 그것의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노을은 비에 씻긴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말을 잇습니다. "언니, 미워해서 미안해." 채하는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것 같은 무심함을 가장합니다. "계속 말해봐." "언니가 오컬트 얘기하는 것 진짜 싫었어. 우주인이니, 마법이니. 근데 그건 언니가 마녀 같은 이상한 사람이라 그랬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한 것 같아."
채하는 노을을 빤히 바라봅니다. 간파되기 앞서 간파하려는 때 흔히 나타나는 성급함을 취합니다. "그래. 넌 오컬트 싫어했지. 남과 나눌 수 없으니까." "아니, 그런 이유가 아냐. 낯선 것이, 형태가 없는 것이 싫어서가 아냐. 특히 그 우주인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어." 새벽은 채하의 눈에서 원망과 비슷한 색채를 읽습니다. 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한 것이었다는, 명령을 받은 사람의 억울함이. "난 밤하늘이 밤하늘이면 좋겠어. 왜 거기에 사람을 집어넣고는, 이윽고는 밤하늘을 적으로 여기는 거야?" 노을이 위를 바라봅니다. 새벽이 노을의 시선을 쫓습니다. 별이 가득한, 소원을 빌어도 들어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밤하늘입니다. 별의 길입니다. 불은 높이 타오르지만, 별을 파묻을 만큼의 밝음은 내지 못합니다. 사람에 든 기억의 비율만큼, 하늘 속에 어둠이 섞여듭니다. 채하는 답하지 않습니다. 대치 상황이 이어집니다. 채하는 갑자기 마녀 모자를 눌러씁니다. 채하의 얼굴이 다시 가려집니다. 고개를 내린 채하는 다시, 벽에서 떼온 시계를 바라봅니다. 새벽은 어찌 처신할지 몰라 순간 답답해집니다.
이때 동아줄이 내려옵니다. 우리가 답을 찾는 곳은 늘 타인입니다. 호연이 분위기를 띄우려듭니다. "이럴 때는 노래지. 누가 노래 좀 불러봐. 거기, 새벽." 이런, 새벽이 지목당합니다. 철로 된 동아줄에 머리를 맞은 꼴이 됩니다. 모두의 시선이 새벽에게 쏠립니다. 새벽이 머뭇거립니다. 공중에 버려진 새벽의 손에, 다른 손이 마주칩니다. 채하의 것입니다. 채하가, 마녀 모자를 눌러쓴 채하가, 깨질 것 같은 목소리로 권합니다. "같이 불러줄게. 곡명은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호연이 되묻습니다. "외국 노래야?" "한국어로 번역해 부를게요. 좀비 아포칼립스에 딱 맞는 노래예요. 시체 구덩이에 들어가고도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시인 이야기거든요." 소원을 위해 흔들리는 생일 케이크 위의 초처럼, 채하의 목소리는 떨림에도 불구하고 나름 강단이 있습니다. 새벽은 조금 안심합니다. 채하가 오늘 아침부터 이상한 태도를 보이던 것이 영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습니다. 채하가 앞장서 강, 약, 약의 세 박자 박수를 칩니다. 노래 앞에서 활기를 되찾습니다. 채하가 멋대로 번역하여 새벽에게 알려주었던 그 노래가, 캠프파이어 위로 울려퍼집니다.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돈마저 연인마저 끝났네 아우구스틴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코트도 지팡이도 진흙 속에 뒹굴고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노래가 즐겁게,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이어집니다. 똑같으면서도 중독성 있는 박자가 퍼집니다. 채하는 앞장서 즐겁게 민요를 부릅니다. 새벽과 자신의 노래에, 타인의 목소리가 섞여들었음을 깨달을 때까지. 노을이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채하가 번역한 그 가사로. 새벽이 순찰 전에 노을에게 가사를 일러준 적이 있음을, 채하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노래가 멈춥니다. 채하가 손뼉을 그만둡니다. 채하의 두 손이, 꺼진 불처럼 떨어집니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음에도, 채하의 시선이 노을을 향해 떨어짐이 느껴집니다. 노래를 웅얼거리던 노을이 채하를 돌아봅니다. 잠시, 불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들립니다. "네가 어떻게 이 노래를 알아?" 채하의 목소리가 떨립니다. 부정된 사람처럼. 손에 땀이 아닌 피가, 타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처럼. "그야 가르쳐줬으니까." "조심했는데. 너한텐 넘어가지 않도록." 서쪽 하늘에는 깎여나간 손톱 같은 초승달이 긁혀있습니다. 제일 먼저 이상을 눈치챈 사람은 민기였습니다. 민기가 삽을 집어듭니다. "불을 끄자." 호연과 여명이 합류합니다. 연화가 민기의 등에 업혀있던, 호연의 동생을 들어올립니다. 갓난아기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사이렌 같은 울음이 떨어집니다. 새벽의 시선이 채하에게 떨어집니다. 채하는 바닥에서 시계를 집어들었습니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10시야."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호연과 여명, 민기 셋이 흙을 모닥불로 집어던집니다. 구덩이를 메웁니다.
"새벽 씨." 새벽의 허리 높이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노을입니다. 새벽이 노을의 옆에 앉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제부터 준비한 행사였을 텐데. 갑자기 허락된 행사였는데. 협회가 창립된다고 했는데. 왜 화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분위기가 침울할까요. 한껏 멋을 내고 성장한 사람들의 모습이 무색해집니다. "무서워. 날 여기 있게 해줘." 노을이 옆에 앉은 새벽을 향해 왼손을 뻗습니다. 새벽이 그 손을 잡습니다. 땀이 나있습니다. 대체 무엇을 걱정한 것일까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새벽은 손에 힘을 줍니다. 손이 둘인 것은 각자 자신과 남을 돌보기 위해서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노을과 새벽은 꺼져가는 모닥불 방향으로 앉아, 뿌리를 내리는 씨앗처럼 잠자코 위를 올려다봅니다. 밤하늘에서 모닥불의 영역이 소각됩니다. 빛이 사라집니다. 우물 모양으로 쌓인 나무에, 빨간 불똥이 죽지 않고 살아남습니다. 모래로, 흙으로, 뼛가루 같은 가루로, 불이 진정됩니다. 이윽고는 분수대 위에 세워진 동상과 같은, 검은 덩어리만이 남습니다. 불이 진화됩니다.
어둡습니다. 온 세계에 그림자가 덮힙니다. 경찰 한 명이 비상용으로 들고온 가스등불을 엽니다. 등대처럼 빛이 몇 줄기 쏟아집니다. 노을과 새벽의 뒤에서, 가느다란 말이 들립니다. 둘이 동시에 뒤를 돌아봅니다. 채하입니다. 호연 옆에 서있습니다. 장신인 호연의 목 부근에 대고, 채하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모두 망쳤어요." "진정하렴." 호연은 채하의 약한 모습이 처음이지만, 서투르지 않게 채하의 모자를 토닥입니다. "제가 다 망쳤어요." 호연의 옷깃에 눈물이 스며듭니다. 응석을 부리는 아이 같습니다. 호연은 어찌할 줄 몰라합니다. 채하는 호연에게서 떨어집니다. 울음은 여전합니다. 커튼의 주름처럼, 단정치 못하게 어리광이 접힙니다. 채하는 휘청이며 모닥불 쪽을 바라봅니다. 노을과 새벽을 향해, 채하의 눈이 매섭습니다. "박노을." 채하는 익숙한 이름처럼 노을을 부릅니다. "왜, 언니?" "너는 내 그림자에 불과해." 채하가 단언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채하는 앞으로 걸어갑니다. 바닥에 떨어진 시계의 유리가 깨져있습니다. 이제 바늘은 보호받지 못합니다. "나는 이만 갈게." "기다려!" 뒤따라온 새벽이 급하게 외칩니다. 그러나 채하는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내일 보자.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롤러코스터에 올러탄 채하가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채하의 두 다리가 허공 위에서 오르고 내립니다. 새벽은 채하를 망연자실한 채 볼 뿐입니다. 스노볼 안의 세상처럼, 보이지만 잡히지 않습니다.
불은 꺼졌습니다. 사람들은 흩어졌습니다. 캠프파이어는 망가졌습니다. 협회는 없었습니다. 실내에 박혀있던 새벽은, 저녁이 되어서야 야구방망이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의 행선지는 자이로드롭입니다. 다리미로 다려진 듯이 표면이 매끈합니다. 전파탑처럼 굳건합니다. 새벽은 야구방망이를 듭니다. 자신의 몸이 아파오는 것에, 뼈가 울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철제 구조물을 계속해서 가격합니다. 불꽃놀이와 같은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탕, 탕, 탕. 열아홉 번을 기어코 채우고, 새벽은 야구방망이를 내던집니다. 바닥에 주저앉습니다. 소리를 듣고 호연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난리냐고 묻습니다. "소리라도 들려야죠." 호연이 되묻습니다. "불꽃이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 소리라도 들려야죠." 새벽의 말에는 뼈가 없습니다. 어두컴컴한 낮 한가운데에서, 팔찌가 사라진 새벽의 팔이 뚜렷한 이유 없이 앙상해 보입니다. 비틀거리며 다시 실내로 들어간 새벽은, 다음날, 6월 28일 새벽 4시까지, 그 안에 잠자코 있었습니다.
이제 제3장의 시작입니다. 오늘 적은 부분은 흔적이 남아 있어 비교적 쉽게 복구했습니다. 이제 전체의 40% 가량입니다. 이미 한 번 사라졌던 글을 읽어주셔 감사드립니다. 이 인물들의 끝까지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써주는 수고해줘서 나도 감사해 XD!! 재밌게 읽고 있어!
감사합니다:) 이미 내용을 아시더라도, 새로 적으며 전에는 없던 상징을 집어넣고 있기도 하니, 찾아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내일 스카이다이빙 다녀옵니다. 밤 늦게 돌아와 접속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3장 '스노볼' 눈을 뜹니다. 낯선 천장입니다. 머리가 아픕니다. 얄궂은 이마를 쓸어올리며 새벽이 상체를 듭니다. 강박적으로 모자를 씁니다. 고개를 들리니 창문에는 금이 가 있습니다. 새벽의 그림자가 금 위로 겹쳐집니다. 문은 열려 있습니다. 새벽은 일어서 밖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슬레이트가 텅, 슬픈 소리를 냅니다. 울림은 곧잘 슬픔으로 번역됩니다. 세계는 텅 비고, 도망칠 곳은 사라진 꼴이 영락없이 엇비슷합니다. 새벽의 발이 길을 잃습니다. 새벽도 길을 잃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둡습니다. 길을 가리는 검정은 어둠이 아닙니다. 새벽은 공원의 찬 기온을 느낍니다. 밤에 시간이 멈춰버린 지금으로선, 지저귀는 산새도 뒤척이는 구름도 없습니다.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길에 갇혔습니다. 길의 출구를 찾아야 합니다. 계단을 내려다봅니다. 이대로 지하까지, 개 세 마리를 지나 지하까지 내려가면 좋을 텐데. 그러나 내리막은 땅 위에서 멈춥니다.
새벽의 첫 행선지는 관람차입니다. 열려있습니다. 모든 열린 것은 비어 있습니다. 내부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노을의 짐의 윤곽이 느껴집니다. 노트와 퍼즐, 우산이 있습니다. 새벽은 그곳에서 야구방망이와 공, 글러브 또한 발견합니다. 그러나 관람차는 비어있습니다. 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새벽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홀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노을은 관람차를 이미 나갔습니다. 새벽은 관람차의 좌석 위에 손을 올립니다. 온기가 느껴집니다. 새벽은 이곳을 숙소로 잡았던 노을을 떠올립니다. 노을의 열에 들떴던 분자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열을 식힐 목적인지, 새벽은 자신의 야구 방망이를 손으로 흝습니다. 흠집이 나있습니다. 이 이상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벽은 문을 빠져나옵니다. 층계를 내려갑니다. 내리막보다는 오르막을 더 단단히 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바람대로 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새벽의 다음 행선지는 사무소입니다. 민기, 설기, 연화의 숙소입니다. 문이 이번에도 열려있습니다. 새벽이 손잡이를 잡으려던 무렵, 문이 안쪽으로 벌컥 열립니다. 방 안에서 촛불의 빛이 튀어나옵니다. 빛을 연화가 가리고 있습니다. 연화는 베개를 든 채로 멈추어 서 있습니다. 역광 속에서도, 연화의 볼을 먹어치운 눈물 자국이 보입니다. "악몽을 꿨니?" 새벽은 답하지 않기 위해 묻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듭니다. 문을 밉니다. 문이 둘 사이에 끼어듭니다. 새벽은 방금 전의 장면을 복기합니다. 뒤편에는 설기가, 이불을 덮고 있었습니다. 민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역광만이, 내용보다도 형식만이 기억에 남습니다. 새벽은 침을 삼킵니다. 뒤돕니다. 문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밀어도 활짝 열려버릴 겁니다. 그러나 문은 열렸어도 방은 닫힌 것만 같습니다. 외부에서 항상 열 수 있지만 실은 폐쇄된 공간인 관람차와 비슷합니다. 떠나던 새벽의 신발에 덩어리진 바퀴들이 부딪힙니다. 깨진 시게입니다. 채하가 버렸던 그 시계입니다. 새벽은 덩어리진 시간을 집어듭니다. 사무실의 외벽에 못이 걸려있을 리 없습니다. 새벽은 벽면에 시계를 비스듬히 기대놓고, 다음 행선지를 찾습니다. 언제까지 길에 갇혀야 할까요.
본부 앞은 깔끔했습니다. 인류가 멸망하고, 다시 번성해 멸망할 시간이 흐른 뒤라면, 어느 도시라도 이와 같은 평평함을 지닐 것입니다. 얼어붙은 바다와 같은 휑함을 기념품 가게 앞에서 봅니다. 도망치듯 본부 안으로 들어갑니다. 서장이 차를 홀짝이고 있습니다. 서장은 새벽에게 머그컵이 있는지 묻습니다. 서장의 뒤로 늘어선 선반에는 텀블러와 머그컵이 잔뜩 진열되어 있습니다. 새벽은 노을에게서 하나를 선물받았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들고오지 않았다고 털어놓습니다. 서장은 유감을 표합니다. 서장이 새 컵을 꺼냅니다. 그 위로 주전자를 기울입니다. 차가 눈물처럼 쏟아집니다. "한 잔 하게나." 서장이 권합니다. 숨마다, 서장의 몸이 들썩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새벽은 예의 바르게 거부하고 유리문을 나갑니다. 들어올 때와 같은 풍경이 울립니다. 본부 앞의 게임센터에는, 새벽이 모르는 경찰이 있었습니다. 채하도 호연도 없습니다. 경찰은 새벽에게 말을 걸지 않습니다. 새벽은 경찰을 모릅니다. 그의 경찰복만을 알 뿐입니다. 천막을 돌아 봅니다. 핀볼 기계와 오락기들이 가득합니다. 과연, 이런 것들을 젖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런 커다란 천막을 지었군요. 새벽은 한때 자신이 꾸몄던 방을 떠올립니다. 채하를 떠올립니다. 채하를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채하는 자유분방했습니다. 수업시간에도 문자를 보냈고, 시험 전날에도 뛰어다녀 새벽을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채하는 미래를 모래처럼 하찮게 여기고, 그보다는 수집에 열정을 보였습니다. 채하는 새벽의 방을 창고로 빌렸습니다. 음반, 중고책, 원두. 새벽은 채하의 취미를 꺼리지 않았습니다. 채하가 천을 깁듯 만든 새벽의 벽이, 지금 이 게임 센터와 비슷하게 여겨집니다. 안이 아무리 휘황찬란해도, 천쪼가리에 의해 지탱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허술한지요. 새벽은 뒤로 돌아 나갑니다. 길의 출구를 찾지 못한다면, 놀이공원의 출구에라도 가보아야겠지요.
출구에는 사람들이 몰려있습니다.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웅하기 위해서입니다. 차의 전조등이 켜져있습니다. 노을은 저 차의 이름을 팔라다라 지었습니다. 새벽은 잠옷 위에 조인 넥타이를 한 번 더 강하게 조입니다. 모자를 바로 잡습니다. 차 옆에는 민기와 호연, 여명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호연이 새벽에게 다가옵니다. 새벽은 호연이 어색합니다. 새벽은 자신이 기억상실에 걸렸는지 의심합니다. 호연에게, 자신이 누구이고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장난을 겸해 말합니다. 호연은 즉각 화색을 표합니다. 새벽은 고개를 흔들며, 호연의 기대를 박살냈단 이유로 더 큰 죄책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호연은 길에서 빠져나갑니다. 차로 들어갑니다. 여명더러, 어서 들어오라 재촉합니다. 여명은 새벽에게 나중에 보자고 말합니다. 새벽의 두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쌉니다. 양 팔목에 소원팔찌가 소리를 냅니다. 백구십에 달하는 거구가 새벽 앞에서 쓰러집니다. 새벽은 감정을 자제하며 여명을 바라봅니다. 여명의 손이라는 껍질에 앉힌 새벽의 손에, 여명의 눈물이 못다한 말처럼 스며듭니다. 놀이공원의 철문 앞에 선 두 경찰, 차에 탄 호연과 민기, 그들을 배웅하러 나온 다섯 남녀, 모두가 눈을 돌립니다. 보지 않으니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곳에 대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배기가스가 놀이공원에 버려집니다. 세 명이 탄 차가 패잔병처럼 도시로 빠져나갑니다. 전조등이 멀어집니다.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쉴 시간입니다. 새벽은 첫 행선지던 관람차로 돌아갑니다. 좌석에 앉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양초를 든 연화입니다. 관람차 안에 앉은 새벽을 보고, 연화는 놀라 손을 치켜들었다가 양초의 뜨거움에 다시 놀라고 맙니다. 새벽은 무덤덤하게 연화를 지켜봅니다. 새벽이 온 이유를 묻기도 전에, 연화는 종이가방을 들여보입니다. 연화가 머뭇대던 통에 다시 말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노을한테 배달왔어요. 세면 도구와 잡다한 것들이에요." 연화는 새벽의 맞은 편에 종이가방을 올려둡니다. 크게 숨을 들이쉽니다. "전 설기 누나께 들은 대로 전해드릴게요. 노을이가 숨바꼭질을 신청했대요. 놀이공원 안에 있겠다고 해요." 연화가 새벽의 반응을 살핍니다. 조심스럽습니다. "새벽 형이 걸어다니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제가 이 말을 전한 건, 저도 새벽 형이 돌아다니기를 원한단 거예요." 새벽은 연화를 먼저 보냅니다. 맞은 편에 놓인 종이가방이 사람인 것처럼 예를 갖추다가, 한 박자 늦게 관람차를 빠져나옵니다.
이제 쉴 시간이 아닙니다. 정처 없이 걷던 와중에, 새벽이 설기와 마주칩니다. 설기는 놀이공원과 어울리지만 밤과 아포칼립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있습니다. 다른 손에는 밤과 아포칼립스에 어울리는 대신 놀이공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양초가 들려 있습니다. 새벽은 조소합니다. 설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물품입니다. 그러나 그 웃음마저 곧 질식합니다. 설기가 피크닉 바구니를 뒤적이더니 종이로 감싼 밀가루 막대기를 건넵니다. 새벽은 멀뚱히 쳐다봅니다. 설기가 직접 설명해줍니다. "츄러스. 설탕은 절약했어. 하지만 조미료 없이도 바삭한 식감이 있잖아." 설기는 허술한 매듭 같은 새벽의 손에 츄러스를 억지로 쥐여줍니다. 저녁을 굶은 새벽을 위한 배려로 보입니다. 설기가 한탄을 합니다. "여명 오빠도, 호연 언니도, 오빠도 너무한걸. 도망친 사람을 쫓는다고 너 혼자 내버려두다니." 설기는 마치 자신을 남겨지지 않은 것 같은 태도입니다. 설기는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빙글 돌아섭니다. "뭐 먹고 싶다면 식당으로 와. 호연 동생도 볼 겸. 잘 때는 귀엽거든." 새벽은 설기가 멀어지게 합니다. 요기를 마치고 식당으로 걸어갑니다. 그제서야, 설기도 식당을 목적지로 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식사 시간이 아닙니다. 식당에는 설기가,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연화가 호연의 갓난 동생을 안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입니다. 그들이 새벽을 알아챕니다. 새벽은 의자를 꺼내 그들 옆에 앉습니다. 조곤조곤, 그들의 말투는 손가락을 넣었다간 친절이 묻어나올 만큼, 새벽을 향한 배려로 짙게 칠해져있습니다. "우리라도 그래야지. 영화를 봐, 괴물이 인질을 잡아가면 일가족이 나서잖아." "허락을 받아야겠죠." 연화가 설기의 말에 답합니다. 그러면서도 새벽을 계속 훔쳐봅니다. 그에게는 훔칠 기쁨이 남아있지 않음에도. "될지를 모르겠는걸. 담판은 지어봐야겠어." "그렇죠. 구불구불하니 위험해요." 연화는 모처럼 안심한 목소리를 냅니다. 빛깔이 강한 식탁 위에 연화가 호연의 동생을 내려둡니다. 호연의 동생이 깨어나더니 울음을 터뜨립니다. 팔다리를 버둥거립니다. 자신을 가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 더욱 크게 우나 봅니다. 조리실 안에서 직원이 포대기를 들고 나옵니다. 아기의 팔다리를 감싸 보 안에 가둡니다. 주체할 수 없는 몸 때문에 울 일은 없어지겠지요. 그러나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직원은 뚱한 표정을 짓더니, 설기와 연화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기를 조리실 안으로 들고 갑니다. 설기는 감사인사를 합니다. 인사가 가능합니다. 새벽은 멀미를 앓는 것처럼 식탁 위에 엎드립니다. 연화가 새벽을 바라봅니다. 산보를 그친 것이 못내 아쉽나 봅니다. 그러나 설기가 연화를 잡아끕니다. 새벽은 눈을 감습니다. 균형감각이 시각과 다를 때에는 무엇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새벽은 어지러움에 맞서는 비법을 떠올립니다. 완전히 기울어지다 결국은 빗방울처럼 줄 밑으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새벽은 눈을 뜹니다. 새벽과 팔 한 개만큼 떨어진 곳에서, 노을이 구슬을 손에 들고 탬버린처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오케에서와 같은 화려함도 무절제함도 없습니다. 노을의 동작은 수수하고 절제되었습니다. 가루가 소리도 없이 떱니다. 그때마다 요란함이 아닌, 눈이 쌓이는 소복함이 태어납니다. 노을의 손에 들린 것은 스노볼입니다. 소리도 요란함도 없이, 공 속의 세계가 뒤집어집니다. 흔들리고 복잡해질수록, 스노볼 안의 세계는 아름다워집니다. 노을의 입이 열립니다. 새벽이 일어난 것을 눈치챘나 봅니다. "신기하지 않아? 우리가 스노볼에 할 수 있는 것이란, 깨부수거나 흔드는 것뿐이야." 새벽은 자신의 가방에 들어있던 스노볼을, 자신이 자는 사이 노을이 들고갔나 보다고 넘겨짚습니다. "우리는 스노볼에게 무력해. 그런데 이 풍경은, 우리 맘대로 되지 않으면서도 어쩜 이렇게나 눈물겹게 어여쁜지." 노을은 스노볼을 흔들고, 가라앉는 눈을, 수족관을 채운 물고기의 시체인 양 바라봅니다. 스노볼을 테이블에 내려둡니다. 노을이 생각을 정리합니다. "새벽 씨, 인류 최초의 살인을 알아?" 새벽에게 건네는 노을의 소리로 된 손은, 칭찬을 할 때처럼 다정합니다.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벽은 고민도 없이 답합니다. "카인과 아벨인가?" 노을은 볼에 보조개를 띄웁니다. 잔에 담긴 샴페인에 잔물결이 이듯, 노을의 꽁지머리가 찰랑거립니다. 빨대를 무는 때처럼 얼굴을 새벽을 향해 뻗습니다. "과학적으로 말이야. 이과면서 말이야. 관심 없어?" 새벽은 고개를 내젓습니다. 듣고 싶다는 뜻입니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이 이름이 맞을 거야. 난 외울 필요 없는 이름 외우기를 좋아하거든. 다른 이름을 외우지 않기 위해." 노을은 의자를 뒤로 뻅니다. 다리를 꼬는 모습이 보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두개골을 찾았어. 같은 자리에 상처가 두 번이나 났대. 옆에는 규암으로 된 돌도끼가 발견됐어. 약 40만 년 된 살인이야." "인간인 거야?" "그럼. 규암은 근방에 없었거든. 무역으로 얻은 거야. 말을 할 줄 알았단 거지." 새벽은 엎드립니다. 곁눈질로 노을을 봅니다. 식당이 고요합니다. 조리실에도, 식당 밖에도 아무도 없으리라는 착각이 들게 만듭니다. "어째서 죽였을까?" "아마 장례의식이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죽였다고?" 새벽은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노을이 정정합니다. "다른 이유로 치명상을 입었을 거야. 그대로 사람을 잃게 생겼겠지. 그럴 수 없어서, 귀하게 여겨왔던 규암으로 돌도끼를 만든 후 의식을 치른 거야. 두개골을 깨 뇌를 꺼낸 거지. 아마 뇌를 보존했거나, 씹어삼켰을 거야.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야." 정적이 흐릅니다. 둘은 서로를 기억할 사람들처럼 침묵하고 있습니다. 잠자코 있던 새벽이 팔을 뻗습니다. 노을 앞의 스노볼을 가져오려 합니다. 하지만 노을의 손이 빨랐습니다. 노을은 일어섭니다. 의자를 집어넣습니다. 발이 하나인 의자가 사람보다도 더 굳건히 서있습니다. 노을은 가벼운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나갑니다. "최초의 살인은 애도를 위해서였어.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스노볼과 함께 노을이 식당을 빠져나갑니다. 새벽이 일어섭니다. 노을의 뒤를 쫓습니다.
식당 밖은 흰, 텅 빈 공간입니다. 탕, 탕, 타당. 총소리도 아닌 야구공을 치는 소리도 아닌 괴음이 들립니다. 폭발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새벽은 꿈에서 노을과 같이 관람했던 불꽃놀이가 떠오릅니다. 어둠 속에서 그런 소리도 있어야 버틸 수 있지, 새벽은 노을에게 그리 말했습니다. "언니를 이젠 이해할 수 있어."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새벽은 목소리를 뒤쫓습니다. 신호등처럼 눈밭에 채하가 서있습니다. 채하의 발치에 작은 플라스틱 눈사람이 버려져 있습니다. 플라스틱 돔이 두 동강 났습니다. 하늘은 속을 숨길 햇빛이 고갈되자 검게 속을 드러내었는데, 채하의 발을 눈이 묻어놓았습니다. 눈이, 점차 붉어집니다. 채하의 입이 열립니다.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아니. 너에게 물을게. 넌 숭고한 희생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해?" 새벽은 눈을 감더니 가볍게 고개를 젓습니다. 자유가 곤란하지 않을 수 없듯이 의무는 숭고할 수 없다고 새벽은 생각합니다. 채하는 말 없이 고개를 조악댑니다. 새벽이 노을의 행선지를 묻습니다. "노을은 내 그림자야. 항상 나와 있어." 새벽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묻습니다. 채하는 누그러집니다. 자신의 발치를 보며 도리어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눈앞의 사람마저 이해하지 못하잖아? 그러니까, 스노볼이 장식의 기능을 하지 못하면, 쏟거나 박살내버리잖아?" 새벽이 식당에서 한 걸음 멀어집니다. 채하의 말은 쥐어짜인 것 같습니다. 땀 같은 눈이 땅에 고입니다. "스노볼을 보고 위안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인데도, 스노볼을 버리잖아." 새벽은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땅이 요동칩니다. 새벽은 꿈이 깨지는 것을 느낍니다.
채하는 눈을 뜹니다. 학교입니다. 2학년 1반입니다. 설기와 연화가 어젯밤 구출되자 이곳에는 학생 세 명만이 남았습니다. 채하는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들은 채하의 말에 순순히 따랐습니다. 채하가 학교 근방의 좀비를 없애, 이 일대는 잠정적으로 안전지대가 되었으니까요. 마녀인 채하로선 간단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람이었음을, 자신이 돕는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던 사람임을 잊는다면 마법을 쓰기야 쉬웠습니다. 맥베스의 세 마녀처럼 나이차가 도드라지던 그들은 감사인사를 하고 떠났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물이 임하듯 어디론가 갔을 겁니다. 책상으로 만든 침대 위에 올라간 채하는, 일어서지 못하고 잠결에 버둥거립니다. 위를 향해 중얼댑니다. "내 잘못이 아냐. 이런 일이 일어난 건 내 능력밖의 일이었어. 난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다고." 그것이 동시에 최악의 선택지였을지라도. 채하는 독백합니다. 그러나 독백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채하가 급히 이불에서 나옵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옵니다. 손에는 식칼이 들려있습니다.
채하가 책상 위에 두었던 양초에 불을 붙입니다. 실루엣에 색이 들어갑니다. 채하는 민기를 알아봅니다. 낯빛에 경계심이 가득합니다. 민기가 주위를 둘러봅니다. 채하는 도망갈 길을 찾습니다. 위협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더 생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민기가 다가오자 말립니다. "위협하지 마요. 어차피 전 갇힌 신세인걸요." "갇히기는. 뒤에 창문이 있잖아." 민기가 쏘아붙입니다. "네가 날 줄 아는 건 안다고." "올라탈 것이 없으면 무리에요." 채하가 마녀모자를 꼭 눌러씁니다. 채하는 창밖을 힐끔 내려다봅니다. 어제 타고 온 롤러코스터는 운동장에 정박해있습니다. "행여나 뛰어내릴 생각은 하지 마. 바깥에는 여명이 있거든. 더 보기 싫지?" "그렇네요." 채하는 고개를 비틀어 뒷문 밖을 내다봅니다. 사람이 한 명 더 보입니다. 틀림없이 호연일 것입니다. 화단과 복도, 두 길은 막혀있습니다. 설움에 채하의 눈꺼풀이 내려앉습니다. 교실에는 세 사람이 있을 뿐인데도 말로 호랑이를 몇 십 마리 뽑아낸 것처럼 분위기가 묵직합니다. "그래요. 잡아가요. 항복합니다." 그 말을 듣고 호연이 들어옵니다. 채하에게 또 다시 수갑을 채웁니다. 체포됩니다. 채하는 호연의 뒤를 따라 졸레졸레 교실을 빠져 나갑니다. 교정 밖에 그들을 놀이동산으로 데려갈 차가 마련되어 있을 겁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 민기가 나가는 채하를 불러세웁니다. "잠깐만. 네가 들고 온 것들은?" "알아서 들고 내려오세요." 팁을 남기고 식당을 떠나는 것처럼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채하는 교실 바닥을 눈으로 휘젓습니다. 양초는 그것이 만든 음영만큼 교실을 환히 밝힙니다. 그러나 채하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몰라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기보다는 어둠에 지지 않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여명이 정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채하는 여명을 무시합니다. 수갑 찬 손으로 뒷문을 열더니 가장 안쪽에 앉습니다. 호연은 차 바깥으로 다리를 내어둔 채 시트에 걸터앉습니다. 민기가 내려오기를 기다립니다. 민기는 채하가 쓰던 담요만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나머지는 어디 있냐고 호연이 묻기도 전에, 민기가 선수를 칩니다. "내가 들고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왜 나한테 맡긴 거야." "무거우니까요." 채하가 웃습니다. 호연이 눈치를 줍니다. "시끄러워. 그래, 그럼 내가 갈게." 잠시후 모두가 차 안에 탑니다. 민기가 운전대를 잡고, 여명과 호연이 채하의 양쪽에 앉아 도망치지 않도록 막습니다. 채하는 머리가 아픈가 봅니다. "저는 좀 잘게요." "내가 들어갈 때도 자고 있더니만." 민기의 핀잔입니다. "바늘에라도 찔리면 좋을 텐데.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안 그래주려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뜻하는가 봅니다. 호연이 안전벨트를 맵니다. 출발하자고 권합니다. 자동차가 운동장을 빠져나갑니다. 모래가 뭉쳐지지 못한 채 도시의 사람들처럼 흩뿌려집니다.
식당에서는 새벽이 눈을 뜹니다. 호연의 동생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들립니다. 무엇을 그리워하기 위해, 무엇을 일찍이 배격하기 위해 이토록 요란하게 우는 것일까요. 기계처럼 뻑뻑한 몸동작으로 기지개를 펴더니 새벽은 벌떡 일어섭니다. 연화와 설기의 대화를 떠올리자니, 그들은 지금쯤 본부로 갔을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새벽의 어림짐작이 맞았습니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설기와 연화가 서장 앞에서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나무는 모름지기 열 번씩 찍어야죠." "그래. 알겠네. 슬슬 시동을 걸까." 설기의 말에 답하던 서장이 새벽을 빤히 쳐다봅니다. 새벽은 서장의 모습이 흐릿합니다. 선명해도 별 상관 없었을 겁니다. 지금의 새벽은 무관심과 광적인 관심 사이를 왕복하는 지경입니다. 그러더니 꾸벅 의식이 끊겼다가 돌아옵니다. 연화가 일어서 새벽을 부축합니다. "눈도 게슴츠레 떴더니, 역시나 졸고 있었네요." "안 잤어." 새벽이 연화에게 몸을 맡깁니다. "자기가 깨어있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죄를 짓지 않은 이상은." 연화가 새벽을 실은 채 문을 열려 바둥거립니다. 설기가 일어서 문을 당깁니다. 서장은 의자에 버티고 앉아 떠나가는 그들을 봅니다. "준비를 끝내면 바로 오게. 다음에는 새벽까지 넣어 담판을 짓지." 새벽은 관람차까지 실려옵니다. 장판처럼 좌석 위에 깔립니다. 새벽을 정자세로 눕히고 설기와 연화는 손을 탁탁 털며 계단을 내려갑니다. 스테인리스가 텅텅 울립니다. "올라올 때만 해도 이런 소리가 나진 않았었죠?" 연화가 묻습니다. "손이 비어서 그런 거야. 주위에 민감해진 거지." 설기가 답합니다. 발을 모으고 뛰어 지상을 밟습니다. 돌을 걷어차며 연화를 기다립니다. 연화는 텅텅, 소리를 감상하며 천천히 두 발로 떨어집니다.
새벽은 누군가 자신의 뺨을 치는 것을 느낍니다. 눈을 뜹니다. 사방이 하얗습니다. 현실은 월요일부터 계속 밤에 가라앉았으므로, 이것이 꿈임은 추론할 이유조차 없습니다. 채하가 눈밭에 서있습니다. 새벽은 발치를 내려다봅니다. 스노볼도, 붕대를 감았어야 할 상처도 없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식당에서 꾸었던 꿈과 이어졌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새벽은 채하를 바라봅니다. "꿈은 잠을 지키기 위해 있다고 하던데, 왜 이런 꿈만 꾸는지 모르겠어." "난 네 꿈의 등장인물이 아냐. 좀 예의를 지켜." 채하가 쏘아붙입니다. 새벽은 그 말에 별 의의를 두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꾸는 꿈이란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채하는 문을 향하기 위해 새벽을 등집니다. 백묵으로 네모난 상자를 그립니다. 문이 생겨납니다. 분필에서 떨어져 나온 분말과 흩날리는 눈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채하가 새벽에게 손을 내밉니다. "한 번 더 가자. 잊기 위해서는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을 써야 해." 문 바깥은 검습니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새벽은 문 너머의 시간대가 다름 아닌 어제 열렸던 캠프파이어임을 직감합니다. 그러나 채하의 손을 피하지 못합니다. 손을 잡기도 전에 앞으로 몇 발짝을 걸어갑니다. 문을 넘기 전에 채하가 소곤댑니다. "참. 너 예전에 나한테 고백을 한 적이 있었지." "거절됐지만. 뭐, 중학생 때였고." 이 년은 된 일입니다. "너한테 일말의 호감을 품은 적이 있었어." 호감이 일말이라는 수식어와 같이 쓰이던가요. 희망, 후회, 가능성과 쓰이지 않던가요. 새벽은 머뭇거립니다. 채하가 말을 잇습니다. "그래. 2017년 6월 26일부터 27일까지였어. 기억해." 그저께와 어제입니다. 오늘은 28일입니다. 새벽이 오한을 느낍니다. "그것, 전혀 이해 안 돼." "그래, 그거야. 날 이해하지 말아." 새벽과 채하는 문턱을 넘습니다.
새벽과 채하는 공중에 떠있습니다. 어제 있었던 풍경이 그대로 보입니다. 모닥불이 꽃처럼 피어오르고,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벽은 그중에서 시계를 든 채하만이 유별남을 확인합니다. 태도부터 감정까지, 눈치챌 수 있을 모든 것이. 관람자인 새벽과 채하가 아니라, 당사자인 그들을 새벽과 채하로 부를 시간입니다. 노래가 불립니다. 노래가 식습니다. 불이 불어납니다. 민기와 여명, 호연에 의해 불이 식습니다. 주위가 어두워집니다. 채하가 호연을 붙잡더니 울음을 터뜨립니다. 모두, 어제 일어났던 일입니다. 반복됩니다. 채하는 호연에게서 떨어집니다. 울음은 여전합니다. 커튼의 주름처럼, 단정치 못하게 어리광이 접힙니다. 채하는 휘청이며 모닥불 쪽을 바라봅니다. 노을과 새벽을 향해, 채하의 눈이 매섭습니다. "박노을." 채하는 익숙한 이름처럼 노을을 부릅니다. "왜, 언니?" "너는 내 그림자에 불과해." 채하가 단언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채하는 앞으로 걸어갑니다. 바닥에 떨어진 시계의 유리가 깨져있습니다. 이제 바늘은 보호받지 못합니다. 새벽은 자신이 잡고 있던 노을의 손이 식는 것을 느낍니다. 노을은 시계에서 분리된 바늘처럼 땅으로 떨어집니다. 새벽이 받아들 새도 없었습니다. 뒤통수에 모래가 묻습니다. 땅에 닿은 전신에서 힘이 풀리더니 표정마저 죽어버립니다. 새벽은 노을의 맥을 집습니다. 심박이 잡히지 않는 것을 새벽은 자신의 실수 탓으로 여깁니다.
채하는 계속해서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갑니다. 채하 앞에 새벽과 노을이 있지만 않았다면, 새벽은 그 풍경에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겁니다. 새벽은 노을의 손을 더 꼭 붙잡습니다. "머리 좀 식히자. 손은 놔. 잠시 데려가야겠어." 새벽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노을의 등에 팔을 받쳐 일어서려던 채하가 새벽을 반히 바라다봅니다. 말이 걸리기도 전에 호연의 호통이 들립니다. "무슨 짓이야. 손 들어." "손 들려고 이러는 거예요. 정리될 필요가 있거든요." "헛소리하지 말고. 실탄은 아니지만 다치기엔 충분해." "거칠어졌네요." 채하는 주위를 돌아봅니다. 도망로를 찾나 봅니다. 호연 외에 온 경찰은 세 명뿐이라 구멍이 많습니다. 그때 채하는 자신의 팔에서 노을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새벽이 노을을 가로채더니, 현장을 빠져나갑니다. 뛰어나가는 새벽을 향해 채하가 손을 뻗습니다. 더 이상 관망할 수 없게 되었는지, 호연이 다리를 겨냥해 고무탄을 발사합니다. 왼 다리에 탄을 맞은 채하가 허물어집니다. 땅을 짚은 채 채하가 짐승 같은 비명을 지릅니다. 새벽은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채하가 노을을 데리고 가선 안 된다는 것만은 곧바로 느껴 알 수 있었습니다. 새벽은 건물을 굽이굽이 피해 달립니다. 추격할지도 모를 채하의 시야를 가리고자 합니다. 모퉁이를 돌던 길에 새벽의 모자가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그러나 동화에서처럼 모자를 쫓을 시간도 언덕을 오를 시간도 없습니다. 새벽은 무작정 채하를 피해 달립니다. 관람차 쪽에서 무거운 철덩이가 박차오르는 굉음이 들립니다. 캠프파이어가 열렸던 장소입니다. 새벽은 머뭇거리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볼 기력은 없습니다. 행동의 지침이 되는 것은 종종 추상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새벽은 한참을 달립니다. 새벽은 머리 위로 폭발하듯 날아오는 형상을 느낍니다. 고개를 들어올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처 보이기도 전에 일찍이 새벽을 앞서버립니다.
앞에서 요란하게 땅이 뒤흔들립니다. 뿌리를 박고 서있던 나목이, 뿌리만 남기고 떨어져 나갑니다. 곤두박질친 가지들이 변호할 새도 없이 부러집니다. 새벽의 다리가 얼어붙습니다. 새벽이 주저앉습니다. 노을을 든 채입니다. 나목을 직격한 것은 롤러코스터입니다. 새벽과 채하가 타고 온 그 롤러코스터입니다. 노을과 새벽이 도망치고 있을 위치를 겨냥했나 봅니다. 조금만 더 빨리 뛰었다가는 저 목재 같은 앙상한 꼴이 되었을 겁니다. 그 위에는 채하만이, 밤하늘의 달처럼 홀로 앉아있습니다. 채하가 일어섭니다. 새벽을 향해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옵니다. "노을은 이대로는 위험해. 내가 데려갈게." "이해가 안 돼." 잠시라도 멈추어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채하의 늘어진 왼 다리는 계속해서 땅에 끌립니다.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노을이를 살려야 해. 지체할 시간이 없어. 어서 넘겨." "농담이지?" "그럼. 농담이야." 채하가 킥킥대며 웃습니다. "농담이 있어야 버틸 수 있지." 얼어붙은 새벽에게서 채하가 노을을 넘겨받습니다. 애증 어린 눈으로 자신의 품을 바라봅니다. 노을은 미동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거야. 너도 날 곧 이해할 거니까." 마지막 말을 넘기고 채하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비틀거리며 롤러코스터로 돌아갑니다. 정신이 돌아온 새벽이 뒤늦게나마 뛰어갑니다. 롤러코스터가 공중으로 떠오릅니다.
"나는 이만 갈게." "기다려!" 뒤따라온 새벽이 급하게 외칩니다. 그러나 채하는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내일 보자.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롤러코스터에 올러탄 채하가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채하의 두 다리가 허공 위에서 오르고 내립니다. 새벽은 채하를 망연자실한 채 볼 뿐입니다. 스노볼 안의 세상처럼, 보이지만 잡히지 않습니다. 호연은 제때가 지나 달음박질쳐왔습니다. 엎어진 새벽과 새벽 같은 나목을 봅니다. 묻습니다. "노을은 살아있지?" "모르겠어요." 새벽은 바닥에 엎어진 채로 한동안 꼼짝도 않습니다. 호연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가능했을 방법들을 떠올립니다. 결국은 채하를 놓치고 말았으리라는 비관에 이르고 말면서도. 하늘에서, 새벽과 채하는 그 광경을 내려다봅니다. 새벽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원망하듯이 채하에게 묻습니다. "대체 무슨 의도였어?" 채하를 자신의 꿈의 등장인물로 여기므로, 그녀가 정답이 아닌 듣고 싶은 말을 할 줄을 알면서도 사람을 대하듯 채하를 대합니다. 채하는 어깨를 으쓱입니다. "무슨 의도?" "저런 짓을 한 의도. 또 이 광경을 보게 한 의도." "말해주려고 지금 네 꿈에 온 거야." 채하는 자신이 새벽의 꿈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백묵을 꺼내듭니다. 다시금 문을 쓱싹하고 그립니다. 이번에 보이는 문 너머는 그나마 밝습니다. 채하가 환하게 웃습니다. "내 의도를 찾으러 가자."
그 시각, 채하는 차 안에서 푹 곯아떨어졌습니다. 잡혀오는 중이니 사형수의 노래라도 불러야 할 판인데도, 정말로 곤히 잠들어있습니다. 호연은 걱정이 되는지 조수석에 앉은 노을의 팔을 자꾸 매만집니다. 몸이 완전히 식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의식만을 잃었을 뿐인가 봅니다. 지금 이 상황만 해도 목숨이 위험함은 사실이지만요. "왜 이런 짓을." 여명이 참담한 얼굴로 밖을 내다봅니다. 그러나 밖은 충분히 어둡습니다. 여명은 도로가 아니라, 창문에 반사된 자신과 채하를 보고야 맙니다. 결국은 눈을 감습니다. "고등학생이라면 입시 스트레스지." "장난할 마음 아니거든." 호연이 민기에게 거칠게 답합니다. "그게 아니면 너무 이유가 많아." 호연은 그 중 자신이 채하를 납득할 이유가 몇 개나 될지 생각합니다. 더불어 자신이 누군가를 납득한 전적이 있었는지도. 가늠을 포기하고 호연은 조수석에 쓰러져있는 노을을 친애하며 쓰다듬습니다. 어제 언니에게 붙잡힌 후 학교에 방치되었던 그녀를. 자신이 업고 막 차에 태웠던 그녀를. 손가락에 계속 메마른 머리카락이 걸립니다. 빗자루 같습니다. 호연은 모든 것이 쓸려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새벽은 채하의 손에 잡혀 꿈 속의 문을 통과한 참이었습니다. 새벽이 걸어갑니다. 그러나 채하는 멈춰서더니, 새벽을 향해 발길질을 합니다. 새벽이 엎어집니다. 모래가 만져집니다. 그들이 다니던 학교의 운동장입니다. 밝은 일광에 새벽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러던 중에도 채하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립니다. "원한이 많거든. 알아서 빠져나와. 헤매다 보면 진상을 알게 되겠지." 새벽이 놀라 뒤를 돌아봅니다. 채하는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히죽 웃습니다. 그들이 들어왔던 문으로 뒷걸음질칩니다. 뜻밖의 일을 당해 어리둥절하던 새벽을 남겨두고 채하가 학교를 떠납니다. 새벽은 자신이 학교에 홀로 남겨졌음을 깨닫습니다. 새벽은 고개를 들어 교정을 바라봅니다. 비명이 들려옵니다. 젖은 것 같은 비명이, 검고 붉은 비명이 들려옵니다. 외마디 소리들이 번잡해지더니 소란으로 번져갑니다. 새벽은 이 울음을 알고 있습니다. 2017년 6월 23일, 좀비 사태가 발발했던 때의 학교입니다. 새벽은 저 교실 한복판에 있었지요.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된 고드름처럼 학생들이 창문으로 떨어집니다. 얼어붙었던 새벽은, 생존욕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섭니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가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죽는 순간 꿈이 끝난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합니다. 누구를 도울 수는 없었을까 저렴한 죄책감을 품던 새벽은, 이번에도 죄책감을 택합니다. 고민할 새도 없이 겁에 질려 교문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학교 외부라 하여 안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이러스가 아닌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한 발생이던 탓에, 사태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감염자가 속출합니다. 새벽은 내리막길을 질주합니다. 상가에서 멀어지고, 집이 있는 주택가에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지난 금요일의 좀비 사태 때 새벽의 도주로이기도 하였습니다. 새벽은 잠시 부주의해집니다. 모퉁이를 돌던 사이, 그 앞에 멈춰있던 시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시체가 새벽을 향해 두 손을 뻗습니다. 자신이 씹은 사람을 기억할 것도 아니면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둔탁한 타격음이 들립니다. 시체가 나가떨어집니다. 반사적으로 바닥에 나자빠졌던 새벽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듭니다. 한 학생이 가방을 휘둘렀는지 휘청이고 있습니다. 학생이 새벽에게 손을 내밉니다. "어서 가자!" 새벽은 손을 잡고 일어섭니다. 학생의 주도 하에 질주합니다. 막판 스퍼트를 내는 선수처럼 전력을 다합니다. "근처에 우리 아파트가 있어! 도망치자!" 새벽은 학생을 빤히 바라봅니다. 아는 사람입니다. 노을입니다. 아마 꿈속의 인물인 탓에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노을의 생일파티가 무산되었으므로 현실에서 둘이 처음 만났던 것은 26일, 월요일이었습니다. 새벽은 면식이 없는 자신을 끌고 가는 노을에 의문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달음박질과 박자를 맞춥니다. 노을의 언니인 채하는 새벽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새벽은 노을이 중학교 근처의 외진 아파트에, 채하와 별개로 살고 있었음을 알아챕니다. 꿈인 만큼 어디까지가 진실일지는 알지 못함에도, 새벽은 필사적입니다. 만전을 다하며 그들은 아파트 단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누가 끌려간다고 말할 새도 없이, 그들은 앞다투어 아파트의 유리문을 깨다시피 엽니다. 노을이 가방을 뒤적입니다. 열쇠를 꺼냅니다. 열쇠에는 왜 이리 용도가 많을까요. 시동을 끌 뿐만 아니라 바깥을 감금하는 역할도 하니.
겨우 노을의 집에 들어온 새벽과 노을이 한차례 숨을 가다듬습니다. 질식할듯 색색거리다, 노을이 균형을 잡고 일어섭니다. 가위로 포장을 뜯어 생수병을 꺼내옵니다. 둘은 중독될 것처럼 물을 들이킵니다. "만세. 세상이 망했어." 정신을 먼저 차린 노을의 단발마입니다. 새벽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허탈하게 웃음을 짓습니다. 동공이 동전처럼 커져 있습니다. 노을은 문을 이중삼중으로 꽁꽁 잠급니다. 새벽은 베란다 쪽을 봅니다. 잠시나마 안전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 정도로 단단히 막았으니, 아빠는 못 들어오겠지." 새벽은 노을이 빼둔 의자에 앉습니다. 식탁에 두 손을 올립니다. 자신이 없는 듯이 자꾸만 혼잣말을 내뱉는 노을이 의아합니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위악일까요. 그렇다면 방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못된 짓이 됩니다. 새벽이 말을 겁니다. "자기소개라도 하자." 노을은 자신이 들인 외부인을 빤히 쳐다보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갑니다. 크레파스를 꺼내옵니다. 중학교에 올라온 이후로 쓰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여있습니다. 자주색 크레파스를 꺼냅니다. 도화지는 없나 했더니 크레파스가 벽지를 가릅니다. 하얀 벽지가 순식간에 칠판이 됩니다. "박노을이라고 불러. 튤립, 장미, 신, 모닥불, 폭죽, 범퍼카, 모험을 좋아해." 모두가 이전에 노을로부터 들은 그녀의 취미입니다. 새벽은 주위를 돌아봅니다. 작은 집입니다. 화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튤립이나 장미가 없네?" "아빠가 싫어해서 그래. 학교 화단에 심고 있어." 노을이 크레파스를 식탁 위에 던지고는 자신도 의자에 앉습니다. 토라진 듯 식탁에 엎드렸다가 금세 기운을 되찾습니다. "이렇게 종말이 오다니, 너무 좋아." "아직 종말이 확정되진 않았어." "종말이 아니면 내가 종말로 만들 거야." 노을은 새벽에게 크레파스를 건넵니다. 자기소개를 권하는 줄을 새벽은 이해하고, 단순히 말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새벽의 이름과 잡다한 정보를 들은 노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노을이 아버지와 산다는 사실로부터, 새벽은 채하가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음을 떠올립니다. 가족이 둘로 나뉘었나 봅니다. 이혼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말입니다. 새벽이 크레파스를 쓰지 않음이 확실해지자, 노을은 토라진 낌새를 보이더니 크레파스를 집어듭니다. 자신의 방으로 되돌려놓으려는지 닫았던 방문을 엽니다. 하지만 크레파스를 되돌려놓지는 못합니다. 나무 문 뒤로 보인 것이 자신의 방이 아닌 하얀 빛이었으므로. 새벽은 그것이 꿈의 배경을 옮길 때 쓰던 그 문잉믈 직감으로 알아차립니다. 노을은 얼떨떨한 기색을 보입니다. 손가락으로 공간을 찔러보더니 그곳이 어디론가 이어짐을 눈치챕니다. 얼이 빠져 새벽에게 묻습니다. "왜 이런 것이 생겼지? 좀비 하나로는 세계를 없애기 부족한가?" 연화가 증언했던 노을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입니다. 예지몽이 없었다면 노을은 종말을 이렇게 받아들였을까요. 크기도 알 수 없는 상황을 마주쳤을 때, 가장 손쉬운 처세는 자신 있음을 연기하는 것입니다. 새벽은 말을 돌립니다. "좀비로부터 숨어드는 데 현관문 한 짝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려나." "들어가보고 싶네." 노을이 말합니다. 새벽이 의자에서 일어섭니다. "무섭지도 않아? 현실이 아닐 텐데." 새벽을 바라보는 노을의 눈매가 또렷합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습니다. 새벽이 스스로 우문을 했다고 느낄 만한 분위기입니다. "내가 행동하는 장소가 현실인걸." 자신이 꿈을 꾸는 줄을 알고 있으므로, 새벽은 자신의 상황에 크게 연연치 않습니다. 노을의 뜻을 따릅니다. 노을이 새벽의 옷 소매를 붙잡더니 빛을 향해 발을 옮깁니다. 새벽은 잠시 고민합니다. 채하가 자신을 좀비 한가운데에 밀어넣은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꿈을 꾸게 한 데에는 어떤 저의가 깔려있을 겁니다. 이 문이 생겨난 것은 고의를 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배경과 인물이 꿈이라 생각하는 데에서 오는 허무함을, 새벽은 의혹과 열의로 덮습니다. 그것이 섣불리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을 만들더라도.
그런 걱정거리가 한 순간에 소음에 휩쓸려 날아갑니다. 새벽은 번잡한 주위를 둘러봅니다. 문을 통과하여, 좀비를 피해 도피해있던 노을의 아파트를 벗어난 후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감을 잡는 데에 새벽은 꽤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입니다. 높낮이가 다른 버스와 승합차들이 주차장을 메웠습니다. 사람들은 차가 아닌 자신의 발로 행선지를 찾아 움직입니다. 새벽은 자신의 바지 주머니께를 더듬다가 돈이 든 것을 눈치챕니다. 고등학교에 떨어졌을 때 바뀌었던 복장인 교복에, 초록 지폐 한 장이 구겨져 들어있습니다. 노을을 찾아 상가를 거닐다, 새벽은 군것질거리를 몇 점 삽니다. 호두과자와 감자구이를 손에 든 채 노을을 찾아 주위를 알짱거립니다. 그러나 새벽을 먼저 찾은 사람은 노을입니다. 노을이 팔을 뻗어 새벽의 어깨를 두드립니다. 노을 옆에는 다른 일행인 연화가 서있습니다. "어느 시간과 장소인지 알겠어?" "작년에 있던 수학여행이네요." 노을이 답합니다. 그러더니 연화를 돌아봅니다. "인사해. 이새벽이야. 인사하세요. 제 반 친구 연화에요. 속이 안 좋다고 해서, 버스에서 내려 산보 좀 시키고 있었어요." 겸사 널 찾으러 다니면서, 라 노을이 덧붙입니다. 영영 떨어졌는가 걱정했다는 말과 함께. 위장에 번데기가 매달렸는지 파리한 연화에게 새벽이 감자조림을 내밀지만 거절당합니다. 노을이 오물거리며 감자조림을 먹습니다. "경주로 가는 길이었어요. 중요했던 날이니 기억나네요." "쉬는 시간이라면 곧 버스를 다시 타야겠네?" "아참." 노을이 휴게소에 매달린 시계를 쳐다봅니다. 천장 전망대에 앉아 노닥거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노을은 기절하다시피 엎드려있던 연화를 깨워 계단을 내려갑니다. 그러다 새벽을 바라봅니다. 따라오라는 의사가 연해에 내리쬐이는 등대처럼 명확히 전해집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게 될 때까지, 최대한 동행하자고요."
연화가 버스에 올라탑니다. 담임교사가 걱정을 하며 물을 건넵니다. "잘 쉬게 했어요. 한 시간은 바벨탑처럼 거뜬할걸요." 노을이 빳빳하게 경례를 하며 뒤이어 올라탑니다. 담임교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건넵니다. 새벽이 뒤이어 올라탑니다. 물을 건네려던 담임교사의 손이 멈칫합니다. "고등학생인가요?" "경주 가던 학생이에요. 노을이 언니 친구고요." 담임이 노을을 찌릅니다. 노을이 동조합니다. "바보 같아서 낙오했대요. 좀 도와주자고요." "이러기야." 어찌되었든 새벽은 비었던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앉은 노을이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더니 새벽에게 보여줍니다. 어디까지 오려고요, 라고 적혀있습니다. "경주에 가야 문이 있겠지. 기다리자." "전 괜찮지만 많이 지루하겠다 싶어서요." 노을은 진행 중이던 카드게임에 새벽을 합류시킵니다. 한바탕 카드 게임과 수다가 계속됩니다. "노을이는 어떤 애야? 지인으로서 궁금해." 새벽이 묻자 노을 옆에서, 카드 두 개를 든 학생이 답합니다. "반장이란 건 들어서 아시겠죠." "어쩌다 보니." 현실에서의 연화가 어젯밤 말해준 사실이지만요. "항상 모든 일에 열심이에요. 폭주열차. 책갈피를 안 쓰고 책을 다 읽는 타입." "그렇지. 두 번째 꽃부터는 죽이지 않고." 한 명이 들어옵니다. "영화를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듯이 보고." 한 명이 더 보조를 맞춥니다. 노을이 얼이 빠져 괴상한 비유들을 해명합니다. "작년에 영화감상부, 올해에 원예부라 그래요." 단순히 동아리에 속했다 하여 그런 인상 비평을 받지는 않겠지만요.
버스가 경주 외각에 근접합니다. 새벽은 잠에 빠지지 못하고 계속 뒤척입니다. 노을은 영화부 부원이던 학생과 수다를 나눕니다. "다가오는 것들이 엄청 좋았어. 상영회라도 하면 기꺼이 다시 보러 갈래." "고전 영화야?" 자신보다 영화를 더 잘 알던 학생의 태도에 노을은 의아해하다가, 그것이 2017년에 개봉된 영화임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서둘러 무마합니다. "아참. 책 제목을 헷갈렸네." 딴전을 부리던 노을이 앞 좌석의 새벽을 톡톡 쳐 깨웁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합니다. 목소리에 부끄러움이 묻어있습니다. "미래에서 온다는 짓, 정말 할 게 못 되네요." 늦은 저녁에 경주에 도착합니다. 새벽의 숙소가 없는 이상 이곳에 더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숙소에 숨어들어가 자는 대신, 그들은 어딘가로 통하는 문을 서둘러 찾습니다. 학생들과 떨어져 주위를 헤매던 새벽과 노을은, 기어코 숙소 뒤편에서 흰 문을 찾아 그 안으로 발을 옮깁니다. 이 곳이 아닌 어디론가 가기 위하여.
새벽의 머리가 나무에 부딪힙니다. 새벽은 뒤로 나자빠집니다. 바람이 통하는 널바닥입니다. 정신을 추스린 채 새벽이 주위를 살펴봅니다. 한여름입니다. 자신이 그늘에 있다 싶더니, 팔각 지붕이 덮인 정자입니다. 옆에는 풀이 무성하고, 저 앞에는 내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개천 양 옆으로 포장된 산책로가 젓가락처럼 뻗어있습니다. 새벽은 주위를 돌아봅니다. 근처에는 노을이 없습니다. 일어서려다 말고, 새벽은 자신의 복장이 그대로임을 알아챕니다. 긴팔을 입은 채 무더운 햇볕 속으로 발을 들이자니 거부감이 듭니다. 새벽은 조끼를 벗고 팔을 걷으며 잠시 시간을 보냅니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노을이 발을 내딛습니다. 노을은 위화감을 느낍니다. 자신을 내려다봅니다.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습니다. 더불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초등학교 때 이사를 하며 버린 옷입니다. 강물은 거울 노릇을 하기에는 탁합니다. 보는 대신 키를 어림하고 얼굴을 만지며, 노을은 자신이 초등학생 때만큼 어려졌음을 깨닫습니다. 게다가 이 배경은 3년 전, 2014년임이 영락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잊겠나요. 자신이 이곳에 버려진 것으로 보아, 근처에는 노을이 찾는 그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과거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양, 노을은 굳은 걸음으로 산책로를 방황합니다. 머지 않아 앞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발견합니다. 밀집모자를 쓴 채하와, 모처럼 내려온 산책로에서 길을 잃은 새벽입니다. 그러나 새벽은 3년 전의 모습을, 중학생 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 새벽이 자신과 같이 온 새벽인지 아닌지를, 노을은 부딪혀 확인해보려 합니다.
"안녕하세요." 노을이 둘 사이에 끼어듭니다. 인사만으로 사람이 얼마나 놀랄 수 있는지 증명하려는지, 채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봅니다. 비대칭한 긴 옆머리가 찰랑거립니다. 새벽은 낯선 사람을 마주할 때 두르는 예의를 적당량 보이고 있습니다. 노을은 이 새벽이 자신과 같이 온 그가 아님을 확신합니다. 순간 장난기가 입니다. "어머.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이죠?" "아, 맞아. 둘이 알아?" "그럼요. 동생이니까. 웬일인지 날 저기 떼놓고 갔지만." "가만 있으라니까, 왜 여기로 왔어." 채하가 매섭게 묻습니다. 그러나 노을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언니를 믿고 순종적이던 초등학생이 아닙니다. 2014년 여름, 새벽은 채하와 노을이 살던 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새벽과 채하는 중학교 2학년, 노을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동네를 처음으로 돌아다니던 새벽은, 강 근처 산책로에서 마침내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앞에 나타난 사람이 채하였습니다. 채하는 새벽을 아파트까지 안내해주었고, 그들이 이웃집에 살 뿐만 아니라 4년 전 놀이동산에서 같이 미아가 된 전적이 있었음을 알아채 새벽에게 전했습니다. 새벽과 채하의 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노을은 그 흐름을 깨고 싶어집니다. 새벽에게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같이 가요." "잠시 뒤에 따라오라고 했잖아. 말 진짜 안 듣네." 채하가 노을을 노려봅니다. 노을은 말 없이 눈을 감고 그들을 따라갑니다.
"어머니와 둘이서 산다고 하더니." 새벽의 물음에 채하가 무감하게 답합니다. "가족을 보일 거라면 깜짝 파티처럼 알리고 싶어서. 말로 전해지면 감흥이 없잖아." 채하의 말에 노을이 속으로 웃습니다. 채하는 노을이 거추장스러운가 봅니다. 마음을 굳혔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냅니다. "네가 산책하고 싶대서 와준 거잖아. 넌 좀 돌아다니다 와." "둘이서만 가다가 길을 잃으면 어떡해. 같이 가줄게." 채하는 말없이 휴대전화를 엽니다. 노을은 가소롭다는 표정입니다. 채하는 신경질적이 됩니다. 이마에 주름이 집니다. 새벽이 둘의 눈치를 봅니다. "나 때문에 불편해?" "아니. 더워서 그래." 채하는 협박이 통하지 않자 귀찮아졌는지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넣습니다. 노을은 더욱 활짝 웃음을 지으며, 어찌 되었든 둘을 졸레졸레 따라갑니다. 뭉쳐가던 셋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요란스럽던 대화를 듣고, 정자에서 산책로로 나온 새벽입니다. 새벽은 익숙한 얼굴들에 놀랍니다. 3년 전의 자신과 채하입니다. 그러나 3년이 어려져 초등학생 때의 모습을 한 노을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노을은 새벽을 반깁니다. 새벽은 노을을 바로 알아보지는 못하면서도 손을 들어 화답합니다. 3년 전의 새벽은 새벽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3년 전의 채하는 새벽을 보더니 잠시 굳습니다. 새벽이 채하에게 말을 겁니다. "저를 아세요." 채하는 평탄한 대답을 내뱉습니다. 새벽은 머뭇거립니다. 비교적 최근에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하더라도, 새벽에게 채하는 항상 굳건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단절에 혼란스러운 사람은 새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때를 노려, 노을이 3년 전의 새벽을 잡아챕니다. "언니. 더우니까 머리 아프지? 이 사람은 내가 아파트까지 안내해줄게." 노을은 말을 내뱉고 난 뒤에야 동정을 살핍니다. 채하는 피가 굳은 것처럼 멍하니 있습니다. 노을은 3년 전의 새벽을 붙잡고 산책로 옆에 난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산책로에는 새벽과 채하만이 남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흐르는 강 옆에서 그들은 서로를 마주봅니다.
새벽은 깃발처럼 먼저 채하를 향합니다. "뭔가, 내가 방해를 해버린 것 같네." "그러게요." 채하는 평정을 되찾습니다. "이상해서요. 마치 꿈인 것처럼." 채하는 손수건으로 목에 감긴 땀을 닦습니다. 그늘을 찾아 둘은 옆으로 이동합니다. 강을 내려다봅니다. 나무 열매가 상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몸 괜찮아?" "어느 정도." 채하는 일단 새벽에게 존댓말을 합니다. 새벽은 바람조차 일지 않는 공중을 응시합니다. 읽힐 것이 없는 더위입니다. 새벽은 자신의 3년 전을 떠올립니다. 이곳에서 길을 잃었다가 채하를 처음 만났지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던 때에도 채하를 만났음을 알게 되었더랬지요. 노을이 새벽을 데리고 갔으니 기억과는 달라졌습니다. 기억을 변주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새벽은 허탈감에 빠져 떠난 노을의 쪽을 바라봅니다. 경사 때문에 도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노을이도 못 됐네. 언니 좀 데리고 가지." 새벽의 한탄에 채하가 과민하게 반응합니다. "...네?" "아. 동생 말이야." "노을이라니요." 채하의 말에 새벽이 의아해합니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는지 몰라 둘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새벽이 문득 위를 바라다봅니다. 착각이 아닙니다. 정말로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세찬 비에, 새벽과 채하는 놀라 나뭇가지 밑으로 몸을 밀칩니다. 새벽은 어둠 속에서도 주위를 살핍니다. 한동안 꿈에 있었더니 암순응이 풀렸습니다. 때문에 근처에서 터벅터벅 발걸음을 내던 장본인도, 시간이 꽤 걸려서야 알아차립니다.
그들에게 걸어오는 사람은 마녀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체격이 작습니다. 새벽은 그 골격이 방금 전에 보았던, 초등학생 때의 노을과 흡사하다고 느낍니다. 마녀 모자 밑으로, 노을이 피식 웃습니다. "나는 언니를 노을이라고 불렀어." 비가 내리치는 와중에도 그 음성만은 똑똑히 들립니다. 새벽은 분명 채하를 겨냥하고 있을 발언이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언니, 나의 노을 언니." 마녀모자를 쓴 노을의 입가가, 초침처럼 천천히 올라옵니다. 순간,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더니, 새벽은 그대로 꿈에서 밀쳐집니다. 등에 식은 땀이 붙었습니다. 새벽은 관람차 좌석에서 일어섭니다. 거친 숨을 내쉽니다. 말이 되지 못한 호흡이 무참히 형체를 잃습니다.
채하는 자동차 뒷좌석 한가운데에서 눈을 뜹니다. 노곤하게 기지개를 펴려다, 제 손목에 걸린 수갑을 깨닫고 절제합니다. 옆에서는 호연이 계속 노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채하는 시선을 돌립니다. 여명은 창밖으로 몸을 돌린 채 눈을 감고 있습니다. "슬슬 산길인가 보네요." 채하는 운전자인 민기에게 말을 겁니다. 민기는 무시하려다가, 결국은 답을 하고 맙니다. "그렇지. 놀이공원에까지 가야 하니까." "말을 하는구나." 호연이 옆에서 끼어듭니다. 여전히 노을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노을이를 깨워주면 좋을 텐데. 그럴 시간에." 적대감과 같은 무게의 애원이 들어가 있습니다. 채하는 무심합니다. 그러더니 속닥, 음절을 중얼거립니다. 자동차 램프가 깨집니다. 왼쪽이 먼저 깨지더니, 이윽고 오른쪽마저 박살납니다. 민기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선잠에 들었던 여명도 꺠어납니다. 주위가 어둠에 휩싸여 있습니다. 자동차에 달린 조명이 모두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전기는 빛이 되지 못하고 잠에 빠집니다. 민기가 말이 막혀 앞을 쳐다봅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입니다. 옆은 까마득한 절벽입니다. 아무리 길을 잘 안다해도 이 상태로 운전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밤은 일말의 낮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안 됐네." 채하가 중얼거립니다. 장난기를 넘어선 악의마저 느껴집니다.
산길은 낮이었던 밤처럼 어둑합니다. 주위에는 아무 광원도 없습니다. 차에 깔린 것처럼 빛 한 줄기도 틈입해오지 못합니다. 민기는 열쇠를 잡았다가, 시동을 끄지 못하고 손을 내립니다. 운전대를 돌릴 것도 아니면서 괜히 꼭 손에 쥡니다. "열쇠는 시동을 끄기 위해 있는 거야." "시끄러워." 채하의 농담을 호연이 가로막습니다. 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들을 충분히 골려먹을 수 있음을 깨달았나 봅니다. 수갑이 찰랑거리는 소리만이 들립니다. "빛만 있다면." "아무리 외웠어도 이 길을 무작정 가는 건 무리야." 호연과 민기는 방책이 떠오르지 않으면서도 말을 뱉고 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곳에 가만히 있자는 것 외에는 개진할 의견조차 없습니다. 호연은 지닌 물품이 무엇 있던가 더듬어봅니다. 별다른 소지품은 없습니다. 단지, 새벽과 여명과 노을을 구출하고 오던 날 가져가 내려놓지 않은 기름 한 통이 트렁크에서 출렁거릴 따름입니다. 호연은 논의해볼 가치도 없음을 알면서도 의견을 개진해봅니다. "불을 질러 길을 밝혀볼까?" "기각이야." 어이가 없는지 민기의 목소리에서 바람이 빠집니다. 풍선을 묶듯이 호연이 강하게 나섭니다. "문제는 둘이잖아. 길이 안 보이고 나가면 좀비가 있다. 둘 모두 해결할 유일한 방안이야." 물론 호연도 타개책이 없기에 이런 주장을 해본 것에 다름 아닙니다. 모두가 동의한다 해도 실제로 행해볼 생각은 없습니다. 불을 붙여 좀비를 피해 길을 가봤자, 기껏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가요. 산불이지요. 놀이공원에 도착하는 것이지요. 화마도 놀이공원에 도착해, 겨우 맞이한 도착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겠지요.
아무도 호연의 말에 답하지 않습니다. 옹호도 비판도 소용 없는 말놀음에 불과하니까요. 갈 곳 없는 차만 계속 진동합니다. 그 진동 속에 사람의 말이 뛰어듭니다. "좋다." 채하입니다. 호연은 무시하려 들지만, 채하의 이어진 말에 관심을 보입니다. "산불이 날까봐 걱정이지? 그 정도야. 내가 손을 봐줄게." "도와준다는 거야?" 호연이 화색을 표합니다. 민기가 야유합니다. "지금 자동차를 부순 것도 너 아냐?" "의심이야. 계속 날 의심하는구나." "지금 이득을 볼 사람은 너밖에 없거든." "나도 빨리 놀이공원에 도착하고 싶어. 앞으로 일어날 일이 중요한걸." 민기는 입을 앙다뭅니다. 그러더니 돌다리를 두들기듯 묻습니다. 긴장과 신중함이 날개처럼 균형을 잡습니다. "진심이야? 어떻게 산불이 나지 않게 막을 건데?" "돌아다니던 좀비도 마법처럼 없앴는걸. 산불이 나지 않게 불을 가두면 끝이잖아." 끝이지, 하고 호연은 채하의 말을 메아리처럼 자그마하게 따라합니다. 모종의 불안을 느끼며. 채하는 머리를 기울여, 마녀 모자로 호연의 볼을 콕콕 찌릅니다.
"안 갈 거야?" 호연은 채하의 형체를 바라봅니다. 표정도 경계도 없이 대화만을 건네는 사람 같은 형태를. 호연은 붓을 꺾듯이 결국은 결심합니다. 일어섭니다. 트렁크에서 기름통을 꺼냅니다. 차문을 엽니다. 주위에 좀비가 돌아다니지는 않는가, 한껏 자신을 타이르면서. 기름이 모닥불처럼 통 속에서 이리저리 출렁입니다. 호연은 차의 뒷편에 기름을 뿌립니다. 경사로를 따라 액체는 그들이 내려온 길을 거슬러 내려갑니다. 호연이 라이터를 떨어트립니다. 불이 번집니다. 주위가 삽시간에 환해집니다. 호연은 암순응이 완료된 눈을 타이르며 서둘러 차 안으로 뛰어듭니다. 민기가 차를 출발시킵니다. 은은한 빛이 주위를 밝힙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보입니다. 아직 정신을 잃은 노을이, 모두를 외면하는 여명이, 기대감에 부풀어있는 채하가 보입니다. 새로운 빛이 끼어듭니다. 민기가 차를 급히 멈춥니다. 놀이공원에서 내려오는 차가 있습니다. 두 차가 손뼉처럼 서로를 마주합니다. 헤드라이트가 민기를 밝힙니다. 민기는 그 차 안를 운전하는 사람이 서장임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더 타고 있음을 확실히 느낍니다. 그들의 등장에 호연이 침묵합니다. 그들을 구하러 내려왔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불을 질렀을까요. 그들을 따라 내려갔으면 될 것을. 이제 문제는 산불입니다. 호연이 채하를 보채듯이 바라봅니다. 그러나 채하는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호연이 급박해집니다.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지른 불은 아니지만." 호연은 잠잠히 채하의 모자를 들어올립니다. 채하는 고개를 흔들며 답합니다. "걱정 말라니까. 놀이공원에 도착하면 바로 해결해줄게."
약 10분 전, 잠에서 깨어나 본부로 돌아온 새벽을 설기와 연화는 서둘러 맞이했습니다. 식당에서부터 논의하고 서장과 합을 맞추어, 채하와 노을을 데리러 떠난 민기와 호연, 여명을 마중나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서장은 이미 놀이공원 입구에서 차를 마련해놓은 뒤였습니다. 새벽은 설기와 연화에게 이끌려 조수석에 짐짝처럼 밀어넣어진 후, 설기와 연화의 격려를 받으며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민기와 호연, 여명이 타고 갔던 그 차를 마주칩니다. 노을이 팔라다라 명명했던 그 말을. 새벽은 조수석에 타고 있는 노을을 발견합니다. 안전벨트가 매어진 것으로 보아 숨이 남아있나 봅니다. 뒷좌석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던 설기가 의혹을 내밉니다. "차 뒤편이 환하네? 무슨 일이래?" 그러나 물을 새가 없습니다. 차의 전등이 모두 깨져있습니다. 안내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장은 차를 유턴합니다. 서행합니다. 팔라다가 뒤따라 옵니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 서장은 일정한 속도로 능숙하게, 놀이공원으로 그들을 안내합니다. 설기가 문득 말을 꺼냅니다.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사실 연화는 제 동생이 아니에요." "그랬겠지. 돌림자부터가 달랐잖나." "낯선 사람과 있기 싫었어요." "가끔은 사실보다 더 진실인 것이 있지." 사실은 공예와 같은 어원을 지닙니다. 사실보다 더 진실인 것이 있겠지요. 설기를 향해 뒤를 돌아보던 새벽이, 비탈길의 풍경에 화들짝 놀랍니다. 나무마다 불이 옮겨붙고 있으니까요. 메마른 탓인지 그 속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입구에서 기다리던 경찰들이 철창을 엽니다. 진군해오는 연기 탓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추 알아차린 눈치입니다. 차에서 내린 서장과 새벽이 서둘러 뒤따라 오는 차로 달려갑니다. 민기가 차문을 엽니다. "노을이는 구했고 채하는 데려왔어요." 그러더니 자신이 온 길을 바라봅니다. 말문이 막히나 봅니다. "보다시피 산불이 났지요. 헤드라이트가 꺼졌어요. 채하가 불을 질러 길을 밝히면 자신이 산불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했죠." "약속을 어겼나?" 서장이 눈을 갸름히 뜬 채 묻습니다. 민기는 뒤통수를 긁습니다. 간지럽다기보다는 제스처의 형식을 띤 것 같습니다. "글쎄요. 놀이공원에 오면 손을 쓰겠다고 말하더군요. 이제 검증할 일이죠." 호연이 채하를 데리고 내립니다. 여명이 그 뒤를 따라옵니다. 새벽과 설기, 연화가 힘을 합쳐 노을을 차 밖으로 꺼냅니다. 경찰들이 미리 들고온 간이 침대에 노을을 눕힙니다. 새벽이 뒤를 돌아봅니다. 당사자 모두가 모였습니다. 말을 꺼내면 돌이 구르기 시작할 겁니다. 돌을 밀어버린 사람은 이번에도 채하입니다. "불이 예쁘구나." 마치 어제 꺼진 캠프파이어라도 된다는 듯이 채하가 심미적인 발언을 내뱉습니다. 심미는 퇴폐의 변명입니다. "다른 할 말은 없어?" 설기가 따집니다. "약속대로 불을 꺼야지." 호연의 재촉을 채하가 말립니다. 채하가 가지런히 모은 두 손 위에서, 수갑이 딸랑거립니다. 채하가 입을 엽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잠시만 동화를 이야기해보자." 해가 산에 추락한 것처럼 그들이 온 뒷편이 온통 환해졌습니다. 채하는 역광을 받고 사람들을 향해 서있습니다.
"여러분.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채하는 보이지 않는 입으로 말을 겁니다. 눌려도 자국이 남지 않겠다 싶을 만큼 뻣뻣이 선 채하는, 줄에 묶인 동상을 연상시킵니다. "죽음과 전쟁과 기아와 역병이 내려와 지상이 불에 타오르다. 익숙한 비유지?" 익숙히 전해듣던 종언의 이미지입니다. 사람들이 종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종말은 오지 않겠으나. "종말 말이야?" 새벽이 되묻습니다. 채하는 새벽을 봅니다. 시선이 오래 머물다 떨어집니다. "맞아. 죽음에 의한 역병 탓에 기아와 다툼이 일어났지." "그건 신화지. 지금 네 행동과 무슨 상관이지?" 민기가 날카롭게 찌릅니다. 채하가 문장에 웃음을 섞습니다. "노을이는 자기를 아카바울이라고 불러달랬지. 바울은 종말을 알리는 편지를 썼어. 모두 노을에게서 시작한 거야." 그리고는 짐짓 진지하게 말을 내뱉습니다. 평탄함을 가장합니다. "협박을 받았다고 생각했어. 예지몽을 꿔 세계를 어지럽히는 꼬마가 있다. 질서를 망가뜨리고 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아이는 죽어야 한다. 네가 그 일을 맡아라." 채하가 문장을 끝마칩니다. 새벽은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속으로는 적잖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채하의 말뜻은 명확합니다. 노을이 질서를 어지럽혀 자신이 그녀를 죽이는 역을 맡았다. 단순한 설명이 아닙니다. 설득입니다. 노을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이곳의 모두에게 허락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결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두를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채하가 원하던 대로 되지는 않으려나 봅니다. 민기가 끼어듭니다. "웃기고 있네. 이건 전염병이 아니거든. 팔 잡혔다고 감염되는 역병이 있냐?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지." 새벽이 정신을 차립니다. 호연도 합류합니다. "노을이를 죽인다니, 언니로서 할 말이야? 정신 차려. 뭔가 마법을 쓰니까 대단한 존재라도 된 줄 알아?" 호연의 말투가 배수진에서처럼 격해집니다. 새벽은 호연이 노을이 누운 간이 침대 바로 옆에 서있음을 깨닫습니다. "다시 생각해봐. 자기 동생을 죽이라고 하는 신이 어디 있어? 넌 잠시 정신이 나간 거야." 채하는 치지 않는 피아노처럼 침묵합니다. 화마에서 피어오른 먼지들이 세월처럼 채하의 모자에 내려앉습니다. 채하는 새벽을 바라봅니다. 확인하듯이 묻습니다. "다른 사람은 무시해. 단순히 순수한 감상을 들려줘봐. 어떤 결론이 맞겠어? 아이야, 미래야?" 추상명사를 맞이하자 새벽은 순간 고민이 헛되었다고 느끼고 맙니다. 새벽은 불길을 봅니다. 더 밝아질수록 역광을 맞는 채하는 더 내려앉습니다. "노을이야." 새벽이 답합니다. 채하는 예감했다는 것처럼 주위를 바라봅니다. 모두가 그녀를 향하고 있습니다. 적대감과 당혹이 버무려져서는. 균열이 생겼습니다. 새벽은 채하와 사람들 사이에 어떤 틈이 생겼다고 느낍니다. 완전히 갈라져 버렸다고. 틈을 넘어 채하의 울먹임이 전해집니다. "나한테 왜 그래. 왜, 그랬던 거야." 아무도 함부로 나서지 못합니다. 채하의 수갑에 갇힌 두 손이 꼼지락거립니다. 세례를 받았으나 수건은 받지 못한 사람처럼 벌벌 떱니다. "언니. 왜 나는. 언니. 언니." 채하가 더듬습니다. 단어마저 곧 나누어집니다. 말이 아닌 음절을 내뱉습니다. "무서워. 언니. 노을 언니. 억울해." 단발마 같은 단어들을 내지르더니 채하는 다리가 잘린 가구처럼 앞으로 퍽 고꾸라집니다. 타닥, 불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공백을 채웁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채하가 아닌 서로를 마주봅니다. 여명이 다가가 채하를 흔듭니다. 채하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채하가 끄겠다고 약속했던 산불은 놀이공원을 향해 맹렬히 전진해오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여명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립니다. 새벽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오더니 팔을 붙잡습니다. 범퍼카 근처의 남자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주위를 둘러싸던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놀이공원 각지로 퍼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새벽의 발걸음은 늦추어져야 했습니다. 연화가 새벽을 불러세웁니다. 새벽이 자동차 쪽을 봅니다. 간이 침대 위에서 노을이 일어서 있습니다. 현기증이 심한지 머리를 부여잡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야?" 일어나니 캠프파이어는 사라져 있고 언니는 쓰러진데다가 산불이 북소리처럼 다가오고 있으니 그런 질문을 할 법도 하겠지요. 하루가 통째로 날아갔음을 알리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하지만 사태를 정리하기가 급합니다. 연화와 설기가 피로해하는 노을을 보듬는 동안, 새벽은 사람들을 깨우러 여명과 민기를 뒤쫓아 달립니다. 상당한 거리를 달음박질치다보니 사람은 단순히 즐기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자연스레 원망이 들고 맙니다. 페인트로 칠해진 철제 구조물들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불길 덕분에 이들은 환하지만 머지 않아 폐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우구스틴을 기리며 분수 위에 세워졌으나, 나치에 의해 철거되어 군수물자가 되어버렸던 동상처럼, 행복하지 않은 왕자가 되고 말겠지요. 여기서 탈출해야 합니다. 연기가 밀려오기 전에 서둘러야 합니다. 서장이 급히 수를 셉니다. 놀이공원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수의 머리가 모였습니다. 제일 처음 모였던 경찰들은 최대한 물자를 챙겼습니다. 그러나 놀이공원에 남긴 상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울타리로 보호되던, 음식과 물이 풍족하던 넓은 땅을 버릴 때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세계의 종말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완결로서 부족한 데가 없습니다.
차량 열 대를 모두 동원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지체할 수 없습니다. 차량에 사람들이 차오르고, 열쇠가 시동을 켜기 위해 돌아갑니다. 호연과 노을이 의식을 잃고 쓰려져있던 채하를 부축해 차에 태웁니다. 호연이 운전대를 잡고, 여명이 조수석에, 새벽과 채하와 노을이 뒷좌석에 탑니다. 창문처럼 문이 닫힙니다. 철창이 열립니다. 차량들이 놀이공원을 줄줄이 빠져나갑니다. 새벽이 탄 차, 팔라다는 헤드라이트가 깨져버렸으나 불길이 타오르는 이 현장에선 더 적은 빛이면 모를까, 더 많은 빛은 필요 없습니다. 내려가던 중에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놀랍니다. 최근에는 구름이 바다의 포말보다도 적던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었으니까요. 호연이 운전대를 꼭 잡습니다. 불길이 꺼지는 효과가 일부 있겠으나, 기름으로 시작된 불인 이상 어떻게 될지 감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검은 연기가 거미줄에 몰려드는 죄인들의 손 같습니다. 차량들은 거미줄 위의 이슬처럼 나란히 굽은 산길을 내려갑니다. 마침내 산을 빠져 나왔습니다. 앞장인 차에 탄 서장이 창문을 열어 뒤에 소리를 지릅니다. 명령이 하달됩니다. 목적지는 고등학교입니다. 호연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인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안전거리를 유지합니다. 유원지에서 빠져나가기 직전, 서장에게 학교에 좀비가 없어져 안전했음을 보고한 참이었으니까요. 산을 빠져나왔다면 불을 쳐다볼 차례입니다. 거대한 모닥불입니다. 어제 미봉되었던 캠프파이어가 되살아난 것만 같습니다. 비 때문인지 불이 서서히 소화됩니다. 검은 연기가 정체됩니다. 좀비는 불에 뛰어드는 습성을 지녔었으니, 저런 큰 불이라면 근방의 좀비들이 모두 몰려들었을 것임이 틀림 없습니다. 위장에 들어간 것처럼 모두 타버리고 말았겠지요. 엎질러진 납골당에서와 같이 뼛가루가 가득하겠지요. 산불이 양초라도 되는 것처럼 새벽은 잔잔히 합장을 합니다. 모래 같아진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자신의 부모님도, 노을의 부모님도, 여명의 동생도 저 안에 있을지 모릅니다. 덩어리가 아닌 뼈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뼈로 지탱하려 들었던 인생은 어떤 꼴이 되고 마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격려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대로 등을 돌리면 되는 것일까요. 새벽은 자는 것처럼 엎드립니다. 울음을 터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차 안의 사람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량 행렬은 도로에 안전히 진입합니다. 호연은 근처에 몰려든 좀비가 한 구도 없음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주민이던 사람은 이 차 열 대에만 남은 것일까요. 그리 생각하니 쓸쓸해집니다. 백미러로 실내를 흘낏 봅니다. 새벽을 그대로 놓아둡니다. 노을과 채하, 새벽, 그리고 여명이라. 이런 배치라면 자신은 짝을 잃은 떡잎처럼 고독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절 외롭게 만드는 조합이네요." "왜 그래, 경찰 씨?" 노을이 호연을 걱정합니다. 자신의 말이 심한 무게로 느껴졌을까 걱정되어, 호연은 과장되게 부정의 표시를 취합니다. "다들 형제자매인데 나만 혼자니까. 우리 동생 데리고 올걸." 호연의 대학생인 동생은 죽었고, 늦둥이인 아기는 연화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뒤따라오는 차에 있습니다. 학교에 도착해서야 동생을 다시 안을 수 있겠지요. "틀렸어요." 노을도 새벽도 여명도 아닌 목소리가 들립니다. 채하입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지는 않았나 봅니다. 잠꼬대입니다. 호들갑스럽게 놀라 상체를 들었던 새벽은, 서둘러 자신의 눈물자국을 뭉갭니다. 노을은 몸을 동그랗게 맙니다. "많이 졸려." 유언을 내뱉는 것처럼 힘없습니다. 노을이 잠듭니다. 하루 동안 먹은 것이 없으니 힘이 완전히 빠져버렸나 봅니다. 식음을 거의 전폐했던 것은 새벽도 매한가지입니다. 새벽도 눈을 감습니다. 강 너머에서와 같이 몽롱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역시 쓸쓸하네요." 여명이 가로등을 보며 말합니다. 꺼져있습니다. 모아놨던 태양광 에너지가 다 떨어졌을 시간입니다.
새벽은 눈을 뜹니다. 놀이공원입니다. 낮입니다. 봄입니다. 튤립공원입니다. 튤립이 공책 속의 종이처럼 무성합니다. 공들인 것처럼 가지각색입니다. 빛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다고 하여 빛이 싫은 것은 아닙니다. 주위를 돌아봅니다. 꿈이라면 나름지기, 아는 사람이 출현해야 합니다. 아니라면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은 노을을 만납니다. 방황하나 봅니다. 방금 전 막 실신에서 돌아왔던 때처럼 행색이 엉망입니다. 새벽이 노을을 불러세웁니다. 노을은 새벽을 바라봅니다. 환한 낮이니 차림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노을이 맵시를 다듬으려다 한심한 듯 손을 내려놓습니다. "내 꿈인데, 뭐하고 있는 거야." 새벽은 입을 다뭅니다. 이틀 전에도 비슷한 꿈을 꾼 기억이 납니다. 새벽과 노을이 같은 꿈을 꾼다고 착각할 정도의 우연입니다. 노을은 새벽에게 말을 거는 대신 조심스럽게 튤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싱그러운 냄새가 납니다. 새벽은 거리를 두고 노을을 따라갑니다. 그러던 노을이 갑자기 멈추어섭니다. 아예 자세를 낮추고 수풀 뒤로 숨어버립니다. 새벽은 노을 근처에서 노을의 행동을 따라합니다. 노을은 노을과 비슷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벽은 뒤늦게 알아챕니다. 노을과 채하와 비슷한 두 사람이 튤립 구근을 캐고 있습니다. 대략 일 년 전의 모습일까요.
노을은 구근을 캐다가 양파망에 옮겨 담습니다. 튤립을 좋아해 매년 구근 캐기 행사에 참여한다고 하였지요. 즐거운지 열심입니다. 일찍이 일어난 채하는 노을을 내려다 보다 뒤로 발을 옮깁니다. "슬슬 가자. 식사한 뒤에 돌아가자고." "벌써?" 노을이 애원합니다. 채하는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작년에 못 준 생일선물로는 충분하잖아." "그치만." "또 그런다." 채하가 휴대전화를 집어듭니다. 노을이 멈칫합니다. 채하는 웃으며 주머니를 채웁니다. 시간만 보기 위해서였다던 듯이. 노을이 일어서 옷에 묻은 흙을 텁니다. 채하가 앞서 가고 노을이 뒤따라갑니다. 노을은 채하의 그림자를 남몰래 콱콱 밟습니다. 그 광경을 노을과 새벽은 지켜보던 도중이었습니다. 노을이 둘에게 보이지 않도록 멀리 돌아갑니다. 새벽도 자세를 낮춘 채 노을을 따라갑니다. 새벽은 노을이 울상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어둠 속에서 상대의 감정을 읽는 연습을 하다보니, 이런 밝은 빛 속에서는 감정의 줄기를 잡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은 과업이 된 것만 같습니다. "못된 언니. 내가 언제까지 입을 다물 줄 알고." "무슨 일인데 그래?" 새벽이 묻습니다. 노을은 힘겹게 입을 뗍니다. 이것이 꿈이라 생각하는 탓에 마음이 동했나 봅니다. 새벽은 꿈의 등장인물에 불과한 노을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말할 리 없음을 알면서도, 스스로 어리석게 느껴질 만큼 진지한 자세로 듣습니다. "새벽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많아. 예를 들어 언니는 중학교를 안 나왔어." 새벽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채하는 옆 지역의 중학교를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눈앞의 노을은 꿈의 등장인물에 불과하다고 단언합니다. 마침 노을도 입을 다뭅니다. 못 다 떨어진 바위 같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하긴. 안 믿는구나. 나도 바보 같아. 꿈에 대고 무슨 바람을 가진 거야." 노을이 속절없이 중얼댑니다. 갑자기 새벽의 가슴팍을 치기 시작합니다. 새벽은 당황하여 뒤로 물러섭니다. "꿈이면 내 말을 좀 들으라고. 그래야 내 꿈이잖아." 새벽은 순간 어떤 균열을 느낍니다. 채하와 새벽은 분명 같은 꿈을 꾼 적이 있었지요. 여러 명이 꿈을 같이 꾼 적이 있었지요. 그렇다면 노을과 자신이 꿈을 같이 꾸는 것 역시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네에서처럼 뒤로 밀쳐지는 느낌이 듭니다. 새벽은 눈을 감았다 뜹니다. 꿈이 깨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깨지지 않았습니다. 새벽은 공중에 떠있습니다. 밤입니다. 아래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새벽은 직감합니다. 어제 있었던 캠프파이어 현장입니다. 새벽의 옆에는 노을이 있습니다. 이전에 채하의 손에 끌려 공중에서 이 장면을 한 번 더 보았을 때와는 달리 새벽은 안심합니다. 노을이 죽었다 생각하였기에 애통한 반응을 보였으나, 노을이 돌아왔으니 과거를 무리 없이 돌아볼 수 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그제야 새벽은 다른 점을 찾습니다. 노을이 홀로, 외롭게 서있습니다. 마녀모자를 쓴 채로, 세례를 받은 것처럼 온통 젖어서는. "안돼." 새벽은 노을을 향해 급히 몸을 돌립니다. 새벽과 함께 공중에 떠있는 노을은,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새벽이 노을에게 괜찮냐고 묻습니다. 노을의 손을 잡고 두드립니다. 노을은 새벽에게 사실을 고합니다. "전에 꾸었던 꿈이야." "캠프파이어잖아? 꿈꾸었다니." "이 꿈을 꾸었어. 새벽이 납치당한 직후에." 노을은 눈을 감습니다. 새벽이 말을 걸어도 등을 돌리며 피합니다. 싫다는 고함만을 계속합니다. 그 소리는 밑의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못합니다. 새벽은 무력감을 느끼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봅니다.
노을, 채하, 새벽, 여명, 호연, 민기, 설기, 연화, 호연의 늦둥이 동생과 경찰 셋. 어제 열렸던 캠프파이어와 같은 구성입니다. 그러나 분위기만은 확연히 다릅니다. 마치 저 중앙에서 타오르는 것이 장작이 아닌 귀중한 유품이라도 된다는 듯이. 호연은 울고 있고, 채하는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습니다. 호연의 동생의 울음소리가 주위를 가릅니다. 경고한다기보다는 성가신 느낌만을 줍니다. 그들 모두의 관심이 쏠린 곳은, 모닥불을 바로 등지고 서있는 노을입니다. 노을의 옆에는 기름통이 놓여있습니다. 마녀모자를 쓴 채 자신의 치마 언저리를 내려다봅니다. 표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다리만 보이지 않는다면, 그 안에 사람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을 모양새입니다. "이게 내 일이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과는 남한테 가지." 노을이 말합니다. 그 뒤에서 불길이 맹렬히 타오릅니다. 불티가 시계소리처럼 번집니다. "그래. 내가 죽어야 세계가 돌아간다니 어쩌겠어." 노을이 말합니다. 불길이 타오릅니다. "내 꿈이니까. 내 꿈을 지켜야지." 노을이 말합니다. 불길이 타오릅니다. 노을이 고개를 듭니다. 잿빛이던 옷 한복판에서 노을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노을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합니다. 불이 노을을 잡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던 노을이 새벽을 발견합니다. 채하의 옆에 쭈그려 앉아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짓습니다. 노을은 새벽을 원망합니다. 이해하기 쉬운 표정을 지었다면 저주할 수 있었을 것을. 그리하여 너무도 평범한 악담만을 새벽에게 남깁니다. "새벽 씨는 새벽 실격이야." 역광, 빛이 아름다운 역광입니다. 노을의 얼굴이 명확히 보이지 않습니다. 따뜻하고 빛나는 모닥불이 세를 불립니다. 노을을 집어삼킵니다. 그제야 노을의 표정이 보입니다. 비명을 지릅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모두가 눈을 돌립니다. 오직 채하만이 노을을 끝까지 응시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노을이 사라집니다. 노을을 없앤 사람들만이 남았습니다.
새벽과 노을은 공중에 떠있습니다. 지상에서 별을 잡을 수 없듯 그들은 사람들을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노을은 겁에 질려 울고 있습니다. 악몽이 깨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꿈이 지키려는 것은 잠이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꿈에게서 내팽개쳐 진 노을을 새벽이 부릅니다. 안심시키려 합니다. "저건 꿈에 불과하잖아." "나한텐 아무것도 없어. 예지몽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걸." "악몽일 뿐이야." "그게 현실에 그대로 적용됐는걸. 꿈에서 보였지만 놀이공원에 없던 세 사람이 다음날 아침에 나를 찾아왔어. 모두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단지 노을이 불에 뛰어들지만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새벽은 자신이 모르던 새에 일어난 일을 듣고, 관절이 굳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어. 끝난 거야." 노을은 새벽의 말에 답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타죽는 모습을 메아리처럼 한 번 더 보고 말았으니 제정신이 아니겠지요. 새벽이 들이쉬던 숨이 멈춥니다. 그네에서 반동을 받을 때처럼 상체를 떠미는 압력이 느껴집니다. 새벽은 눈을 깜박입니다. 꿈이 꺠집니다. 호연이 운전하는 차로 돌아옵니다.
새벽이 고개를 돌립니다. 노을도 거의 같은 순간에 눈을 뜬 것 같습니다. 몽롱해합니다. 속눈썹이 눈에 들어갔는지 눈을 비비고 있습니다. 눈물자국이 나있습니다. 속눈썹 때문입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자각이 있던 새벽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학교 근방의 도로에 들어섰음을 알고서야 터지듯이 묻습니다. "혹시 튤립 공원 꿈 꿨어?" 노을은 조용히 고개를 돌립니다. 새벽을 응시합니다. 그럴 듯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벽과 노을은 서둘러 자신들이 알던 정보를, 벽에 핀으로 메모지를 꽂듯이 정리해나갑니다. "채하는 자기 꿈에 남을 초대할 수 있다고 했어." "지금 꿈도?" 노을이 확신에 차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의 두 꿈에는 모두 채하가 출현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꿈을 두 번이나 꾸게 했다면 꿈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단 뜻일 거야." 새벽이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노을이 화들짝 놀랍니다. 생각이 총알처럼 머리를 지나갔나 봅니다. "예지몽." 노을이 말합니다. "언니가 만든 꿈에 나를 초대한 거야.:" 노을은 점차 자신의 발상에 확신을 더해갑니다. 노을에게 특정한 꿈을 꾸게 한 후, 그것에 맞추어 현실을 바꾸어 나가면 그것이 다름아닌 예지몽이겠지요.
새벽과 노을은 둘 사이에 끼인 채하를 내려다봅니다. 채하는 의식불명인 상태입니다. 어떤 답도 내놓지 않습니다. 진전이 되지 않습니다. 새벽과 노을은 방금 전의 꿈에 대해 머리를 맞대어봅니다.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새벽의 물음에 노을이 머뭇거리다 나름의 해답을 내놓습니다. "두 개 다, 내가 겪었거나 꾸었던 것들이야. 새벽만 모르던 장면들이지." 노을이 납치된 후 놀이공원에서 방랑할 때 새벽은 비슷한 꿈을 꾸었습니다. 채하는 말했습니다. 자신의 의도를 알려주기 위해 새벽에게 여러 꿈을 종횡무진하게 만들겠다고. 채하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만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무엇인가 숨겨져 있단 것 외에는 무엇도 알 수 없습니다. 새벽은 논의를 포기하고 시트 위에 털썩 쓰러집니다. 차 안의 논의가 막히거나 말거나, 차량 행렬은 빨대 속의 스무디처럼 이동해 학교에 진입합니다. 좀비가 없는지 확인하며 선봉이 내린 후, 뒤따라온 차들이 바리케이드처럼 교문 근처에 세워집니다. 채하가 좀비를 없앴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지, 학교 내부는 꽤 안전지대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서둘러 제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흩어지고 뭉칩니다.
호연도 노을도 내립니다. 채하는 원래 그랬다는 것처럼 포근히 눈을 감고 있습니다. 새벽은 채하를 홀로 두지 못해 잠시나마 그 옆에서 머물기로 합니다. 사람들 몇 명이 차 근처로 찾아옵니다. 호연에게 산불이 난 경위에 대해 묻습니다. 호연은 손을 꽉 쥡니다. 그러나 비밀은 손에서 빠져나갑니다. 짜이는 것처럼 진실이 알려집니다. 중간에 조명이 박살났고, 채하가 안전을 보장하겠으니 불을 지르라 충동질했고, 채하는 이렇게 기절해버렸다고요. 실제로 불을 지른 장본인은 자신이라 말하기를 빼놓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의 적의는 이미 뭉칠 곳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우선 돌아섭니다. 채하가 아직 잠들어있기 떄문이 아니라, 그녀가 깨어나지 않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녀 때문에. 좋던 숙소를 잃었네."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호연은 쓸쓸한 눈으로 모래를 내려다봅니다. 자갈이 많이 섞여있습니다. 새벽은 차문을 닫고 차 안에 남아있습니다. 시동이 꺼진 차가 불이 꺼진 창문처럼 허합니다. 열쇠는 꽂혀있습니다. 본래만 해도 경운기처럼 바퀴를 돌려 출발하던 차체입니다. 움직이기 위한 것인 주제에, 왜 열기 위한 것과 같은 도구를 쓰는지요. 새벽은 가방을 정리합니다. 깨지지 않은 스노볼이 눈에 들어옵니다. 좀비를 유인할까 두려워 돌려보지 못했던 오르골을, 원판 아래 태엽을 만지작거려 봅니다. 태엽이 돌아가는 짧은 시간 동안은, 외부의 무엇도 방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을 지키려면, 혼란스러운 지금은 태엽을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신심을 유지하려면 사려해야 합니다. 새벽의 선택이 옳았습니다. 차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요.
새벽이 문고리에 손을 올립니다. 밖에서도 동시에 손잡이를 움켰습니다. 노을이 문을 엽니다. 새벽이 몸을 낮추어 동행자들을 확인합니다. 민기와 설기, 그리고 새벽이 얼마 전에 보았던 2학년 학생입니다. "말 섞은 지가 참 오래되었구나." 민기가 말합니다. "안 그래도 바쁘니 내일까지도 모일 일 없겠다 싶었는데, 정말 유쾌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그러며 민기는 자신이 데려온 학생의 어깨를 툭툭 칩니다. 2학년 1반 교실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마도 채하에 의해 잠시 내쫓겨 더 위의 교실을 점거하고 있었나 봅니다. 자신이 불려온 사연을 아직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낌새입니다. "채하와 설기와 아는 사이라, 같이 면식이 있는 우리가 전담해 같이 움직이게 됐어. 그러니 자연스럽게 채하 얘기를 하게 됐지." "동생 학교 생활엔 정말 관심이 없어서." 설기가 훼방을 놓습니다. 민기가 손을 휘둘러 설기의 말을 흩트립니다. "채하가 옆 도시의 중학교에 다녔다고 하더라? 내가 아는 사실과 달라 맞추어보니, 내가 모르는 새에 더 큰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 "뭐. 맞아. 언니는 중학교를 안 다녔거든." 노을이 맞장구를 칩니다. 새벽은 그들을 멍하니 지켜봅니다. 그 뒤에 무슨 사정이 튀어나올지 종잡기가 힘듭니다.
"머리를 많이 굴리셨나 보네요." 새벽이 호응을 합니다. 말을 잇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오셨어요? 아니면 채하를 보러 왔나요?" "새벽 씨를 보러 왔어." 노을이 시선을 피합니다. "내가 허락했어." 그들과 계속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강을 넘어버릴 것이 눈에 선합니다. 그것이 새벽에게 이로울지 해로울지 알지도 못하면서, 장바구니에 통조림을 담듯 배경지식도 무엇도 없이. 새벽은 자세를 바로 합니다. 노을과 민기의 발언을 내치지 않습니다. "언니는 중학교를 안 나왔어. 그런데도 새벽 씨를 속였지." 노을이 말합니다. "네게 일찍이 말했지만, 나는 어린 쪽이란 것을 알면서도 이름을 헷갈렸어." 민기가 말합니다. "내가 두 살이 된 이후로는 언니를 좋아해본 적이 없어." 노을이 이전에 했던 말을 한 번 더 합니다. 낡은 책을 전등 밑에서 펼치는 것처럼. 충분히 즐겼는지 민기가 새벽에게 묻습니다. 노을에게 허락을 받았다 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정말로 노을 고유의 가정사이니까요. "새벽, 3년 전 노을의 집에선 유전자 검사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냐?"
새벽은 노을과 채하의 부모가 지금 별거 중임을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새벽의 옆집에서 채하와 함께, 노을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지요. "바람을 폈나요? 그래서 이혼을 하고?" "새벽 씨. 막장드라마 많이 봤지." 노을이 반박합니다. 그렇다면 더 복잡한 사연이 묶여 들어가있는 것일까요. 모자에 머리카락을 구겨넣듯, 사암에 모래가 응축됐듯. "그럼 왜 따로 사는 거야?" "감정 싸움이 극으로 치닫기에는, 경멸과 무시 몇 초면 충분한걸." 노을이 풀죽은 목소리로 답합니다. 새벽은 머릿속에서 기억들을 나열해봅니다. 외동이라 관심이 절박하오니. 7년 전 놀이공원에서 들었던 미아 찾기 방송이었습니다. 분명히 채하를 찾는 것이었겠지요. 연화가 전하기를, 노을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키가 매우 컸으나, 거의 자라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꿈에서 보았을 때 노을은 항상 새벽을 초면인 것처럼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비밀을 가진 것처럼, 억울해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만날 때만 해도 채하는 새벽보다 어려보였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재회한 이후로는 새벽을 끌고 다녔습니다. 3년 전 강변공원에서 처음 만났던 무렵, 채하는 노을을 남기고 자신을 만났습니다. 왜 노을을 그늘에 박아두었던 것일까요. "유전자 검사 결과는?" 새벽이 마지막으로 확인합니다. "친자였어." 노을이 답합니다. 소송이 아니더라도 친자검사를 하는 경우가 분명 있었더랬지요.
"실종 아동 찾기." 새벽에게 노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집안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 못마땅한가 봅니다. 그러나 단어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새롭게 별자리를 그려야 합니다. 모든 선분이 사라집니다. "채하가 실종된 연도는 언제였어?" "2004년. 언니가 5살이던 때였어." 노을이 두 살이던 해입니다. "채하가 돌아온 것은?"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을 새벽이 합니다. 새벽이 아는 답을 노을이 합니다. "3년 전. 그러니 그때 친자 검사를 했지." "놀이공원에서 나와 만난 채하는?" 노을이 답하지 않습니다. 새벽의 팔을 잡습니다. 허리를 굽힙니다. 새벽과 눈높이를 맞춥니다. "없어진 언니의 이름을 물려받았어.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남은 딸 한 명에 모든 관심을 뺏겨버릴 테니까. 우리 언니는 없던 사람처럼 될 테니까. 그래서 노을이던 이름을 개명했어."
설기가 둘을 빤히 쳐다보다 옆에 서있던 학생의 목에 팔을 두릅니다. "가자." "어?" "우리 있을 곳이 아니다." "맞아. 어서 가라." 민기가 학생의 등을 떠밉니다. 설기가 민기를 잡아챕니다. "네 역할도 끝났거든. 어서 교내 수색에나 합류해." "하." 민기가 허탈해져 뒤로 물러섭니다. 굳은 것처럼 서있는 새벽과 노을을 남기고 떠납니다. 새벽은 역으로, 자신이 세계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왜 날 모르는 척했어?" 버티다가 내놓은 말이 그것입니다. 노을이 답합니다. "부모님의 비밀을 알고 있었어. 여덟 자리 숫자의 돈 같은 것. 집이 무너지는 건 막고 싶었어." 그걸 빌미로 입막음을 당했던 걸까요. 하지만 노을이 지키고 싶어하던 집은 결국 조각나고 말았습니다. "별 일 없었어. 최대한 밖에 소문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막았지. 옆집은 사정을 알았나 보지만." 노을은 적적한 눈빛으로 오두커니 섭니다. 줄이 매달린 가을 나무 같습니다. "내 이름을 언니에게 돌려줬어. 모두가 이름을 되찾았다고 말하더라. 그리고 언니의 말에 따라 새벽을 모르는 척했어. 그러려니 했어. 별 것 아닌 요구였는걸. 협박을 과하게 한다 싶었지. 옆집에 이사올 줄도 몰랐는걸. 언니가 새 친구 쉽게 사귀는구나 싶었지." 새벽은 아직도, 다리만을 돌린 채 차 안에 앉아있습니다. 노을이 답답하다는듯이 새벽의 양어깨를 꽉 잡습니다.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는 돌을 씹는 것처럼, 마녀를 태울 장작을 패는 것처럼 또박또박 발음합니다. 새벽의 숨이 거칠어집니다. "언니는 마녀야."
"새벽이 오기도 전에 새벽이 이사올 줄을 알았어. 아빠 엄마의 개인적인 비밀을 사진까지 찍은데다 휴대폰에 넣어다녔어. 버스터미널에서 경찰에게 수습되었을 때 망설임도 없이 우리집을 지목했어. 실종되었던 당시의 기억은 하나도 안 난대. 내 이름과 경험을 마치 모자처럼 들고가고는 새벽 씨에게 내 행세를 했어. 놀이공원에서의 기억은 하나도 없으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상하지도 않아? 난 놀이공원에서의 일, 한 번도 말한 적 없어." 노을이 해일처럼 자신을 쏟아냅니다. 새벽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던 이상함을 묵묵히 듣습니다. 어떤 반응도 노을을 되려 자극하고야 말겠지요. "내게 예지몽을 꾸게 한 사람은 틀림없이 언니야. 그럼 뭘 알았단 거야? 좀비 사태가 일어날 줄을 알았어. 밤이 멈출 줄을 알았어. 경찰 씨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았어. 놀이공원에 설기와 연화가 올 줄을 알았어. 언니가 내게 꿈을 하게 하고 그것을 실현한 거야. 이 사태의 원인은 언니야." 노을이 새벽의 양어꺠를 더 단단히 움킵니다. 그것이 문고리, 또는 손잡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을이 간절한 표정을 짓습니다. 무덤덤한 새벽이 못내 답답함이 틀림없습니다. 전해지지 않습니다. "꿈으로 나한테 알려주기만 한 것도 아냐. 나한테 명령을 했어. 내가 좀비에게 저항하지 않게 했고, 내가 모닥불에 자원해 뛰어드는 장면을 두 번이나 보여줬어. 그러며 내게 꿈을 믿으라, 꿈을 따르라 했어. 이보다 더 한 악의가 어디 있어? 한 번 들통나니까 너무도 심각한 악기잖아?" 노을이 들이쉬지 못했던 숨을 몰아쉽니다. 노을의 이마가 땀에 번들거립니다. 노을이 오른손을 새벽의 무릎 위로 올립니다. 흥분을 몸 밖으로 내쫓습니다. 그러나 노을은 이 흥분을 품고 갈 당위를 갖고 있습니다. 의문이 해명되지 않았습니다. 채하는 아직도 새벽의 뒤편 시트에 엎질러져 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새벽은 끝까지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앞으로 팔짱을 낄 따름입니다. 노을은 실망한 눈으로 새벽을 바라봅니다. 억울한가 봅니다. 새벽은 꿈에서 자신을 믿으란 말을 여러 번 했는데, 마치 둘이 다른 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력하게 앉아있습니다. 노을이 새벽에게서 손을 뗍니다. 악담이 감정싸움과 합쳐지면 얼마나 무익한지를 알고 있으므로, 노을은 최대한 조용히 돌아섭니다. 차문이 고장난 것처럼 활짝 열려있습니다. 노을의 마지막 말이 그 사이로 파고듭니다. "너무해. 새벽 씨는 새벽 실격이야." 새벽만이, 기절한 채하 옆에 남습니다.
새벽은 다시, 태엽이 감기지 않은 오르골 속의 눈사람처럼 차 안에 가만히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또 창문을 두드립니다. 갑자기 앞문이 열립니다. 새벽이 낯을 듭니다. 호연입니다. "신고 받고 왔어. 노을이를 괴롭혔다지?" "잡혀가면 30분 동안 격리될 수 있나요." "서비스로 한 시간은 더 줄 수 있어." 호연이 말장난을 멈추고 새벽을 걱정스럽게 내다봅니다. 어제부터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새벽이 넋을 놓지는 않을까 걱정되나 봅니다. "침묵은 싫지. 무엇인가 얘기해봐." "제가 얘기해야 하나요." "취조실에서 경찰이 자기 사정을 얘기하니. 난 들어주는 편이야." 새벽은 조수석에 앉은 호연을 멍하니 지켜봅니다. 그러더니 화제를 찾습니다. "호연 누나. 오는 길에 쓸쓸하다고 하셨죠?" "그랬지. 그 차에서 나만 형제자매가 없었으니까." "저도 홀로였기는 매일반이에요."
호연은 새벽의 말에 의아함을 표출합니다. 목 주위를 긁습니다. "진실로는 말을 섞기 싫다 이거지? 좋아. 거짓 놀음을 해볼까." 그러며 자세를 바로 잡습니다. 희미한 웃음이 새벽을 통과해 지나갑니다. 지프가 한 번 기우뚱합니다. "그 말은 곧, 여명이 네 형이 아니란 건가?" "네. 아니에요. 애초에 집조차 다르거든요." 새벽의 집은 주택가에 있습니다. 여명의 가족이 사는 아파트는 꿈 속에서 생일파티를 준비할 때 방문해보았듯이, 마트 근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정을 모를 호연은 자신이 아는 방면으로 접근해보는 수밖에 달리 없습니다. "그러면 뭔가 이상해지는걸." 호연이 뜸을 들이다 새벽의 거짓을 뒤집어보려 합니다. "너희 형제는 6월 25일에 생일파티를 했을 텐데." "그래요. 다름 아니라 그게 이상했죠." "왜? 생일초도 멀쩡히 아홉 개였다며." 호연은 연도로 새벽의 나이를 역으로 연산해봅니다. 만 열일곱, 올해로 열여덟. 큰 초 하나와 작은 초 여덟.
"생일초를 케이크에 꽂았죠. 자. 이상하지 않나요. 사태가 발발한 건 금요일 아침이에요." "그래. 누가 모르겠니." "자. 그러면 생일준비도 금요일에 끝났겠죠." 새벽이 다리를 꼽니다. 근처를 지나던 바람에 새벽의 모자가 하느작댑니다. 무심코 답을 하려던 호연은 수상한 점을 찾습니다. "일요일에 쓸 케이크를 금요일에 샀다고?" "아니오. 금요일에 쓸 케이크를 금요일에 샀죠." "네 생일이 원래 23일이었니?" "아니오. 25일이 맞아요." 새벽이 키득댑니다. 이 이상 숨겨도 의미가 없을 비밀은, 믿을 만한 사람에게 털어놓는 편이 좋습니다. 호연이 마른 세수를 합니다. "그런 거니. 아파트 근처에 있다가 사태가 터지자 급히 네 집까지 도망쳤구나." "아니에요. 여명 형은 상가에 있었어요. 자기 집 근처였죠."
"그러면 서둘러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 않나?" "그러게요. 하지만 저희 아파트까지 왔죠. 게다가 제가 사는 5층에까지." "너 때문에?" "그건 아니었어요." 호연은 손을 내저어 새벽의 말을 우선 정지시킵니다. 길이 묘연하지만 자력으로 돌파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날 생일이던 사람과 여명이 찾으러 간 사람은 동일인?" "맞아요." "네가 받은 선물도 원래 네 것이 아니었고?" "제게 선물할 요량으로 부탁한 선물도 있었지만, 저한테 와서는 안 됐죠." "그렇다면 네 지인이구나. 네 생일 때 선물을 주려 했다면." "그렇죠. 제 취미는 온전히 제 것이 아니니까요. 야구 정도면 몰라도. 특히 책을 수집하는 취미는 친구를 따라한 거였어요." 존재감 없이 옆 차문에 기대어있던 채하가 움찍댑니다. 호연이 시선을 채하에게 뺏깁니다. 새벽은 마음을 놓습니다. 이제 한가한 선문답에 시간을 뺏길 필요는 없겠지요. "채하니." "네." 새벽이 쓸쓸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축하를 받았어야 할 사람, 여명이 걱정스러워하며 도시를 가로지르게 했던 사람은, 지금 이전과는 완전히 단절된 모습으로 힘없이 누워있습니다. 꺠어난다고 하여도 사람들의 적의와 묻지 못한 책임을 받게되겠죠.
"그렇다 치면, 왜 연기를 했니." 호연은 먼저 물어놓고는, 또다시 손사래를 칩니다. 좋은 답을 얻기는 쉬워도 좋은 질문을 받는 것은 드문 경험이죠. 이 경험을 날리지 않기로 합니다. "설기와 연화 같은 이유였나? 아는 사람들끼리 숙소를 쓰려고?"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새벽은 밑을 내려다봅니다. 맨바닥을 가리는 시트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스노우볼도 수레바퀴 아래서도, 채하를 위한 선물이었죠. 야구 물품은 채하가 제게 주려고 사달라고 부탁했던 거였죠." 새벽은 망설입니다. 하지만 여명은 더 이상 환상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겁니다. 채하가 찾아왔던 날 형제 연기를 끝내자고 부탁했으니까요. 새벽이 결심을 굳힙니다. "여명에겐 동생이 있었어요. 구출되던 때 여동생이 없다고 말했으니 남동생일 거에요." 새벽이 말소리를 줄입니다. 행여 날카롭기라도 할까봐. 작다면 오래 남을지라도 상처를 입히지는 않으므로. "자외선 팔찌는 동생이 만들었던 거였죠. 두 쌍을." 하나를 새벽의 생일날 그에게 주었습니다. 놀이공원에 오기 전부터 환상을 망치질하듯 만들어왔지요.
새벽은 사람을 떠올립니다. 동생 대신에 지인을 선택했던 사람을 떠올립니다. 실패하고 이웃집에 머물게 되었던 사람을 떠올립니다. 준비한 케이크와 선물을 엉뚱한 사람에게 허비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잃은 동생 대신 같이 사는 유일한 동거인을 동생이라 속였던 사람을 떠올립니다. 결국은 누구도 얻지 못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선물은 허비되었고 성과는 없었습니다. 호연은 이 사안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환상입니다. 물론 가끔 환상이 부족하다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 높은 시야를 가질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환상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환상입니다. 쓰러진 자를 대체할 더 많은 대체품, 잘려나간 나무 대신에 마주할 더 높다란 불뿐입니다. 호연은 동생이 거금으로 기타를 사놓고는 외치던 궤변을 떠올립니다. 피카소가 말하길 예술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깨닫게 하는 거짓이라 하였습니다. 거짓말쟁이였지만 길거리에서 불타던 모습만은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을 만큼 장광이던 아이였는데. 만일 자신도 동생이 사라진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질합니다. 숨을 들이쉽니다. 호연은 다리를 밖으로 돌립니다. 나가 앞문을 누르듯이 닫습니다. 새벽이 기대어 앉던 뒷문을 엽니다. 쓰러지던 새벽을 다시 차 안으로 밀어넣고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기운이 빠진 새벽이 허탈하게 웃습니다. 더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아직 새 거짓을 만들지 못했으므로. "호연 누나. 뭐하나요." "거짓말 잘한다. 우리 동생." "여명 형 같은, 설기 같은 소리를 하네요." 새벽이 핀잔을 줍니다. 호연은 한껏 기지개를 펴며 교정 쪽을 바라봅니다. "노을이가 2학년 1반 교실에서 기다린대.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가봐." 새벽은 사람이 있는 건물을 바라봅니다. 노을이 있습니다.
"중요한 얘기를 지금 와서야 하시네요." "중요한 애기를 전해듣기 위해서지." "이렇게 될지도 몰랐으면서." "새벽이 슬슬 자기 비밀을 말해줄 시간이 됐다 싶었어." 새벽이 뚱한 내색을 숨기지 않습니다. 몸을 이미 돌린 꼴이 토라진 것도 같습니다. "진짜로요?" "거짓인지 알아맞혀볼래?" "쳇."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받은 새벽이 운동장을 박차며 계단을 향해 속도를 더합니다. 노을을 무감하게 대했던 잘못을 달래야 합니다. 사람들이 화단에서 손전등을 들고 수색중입니다. 좀비가 남지 않았나 확인하나 봅니다. 새벽은 그들을 지나쳐 정문으로 들어서려 합니다. 그때 누군가 운동장을 가로지릅니다. 호연입니다. 호연이 스탠드 부근에 있던 서장에게 무슨 의사를 전달합니다. 새벽이 멈추어 서장이 올라오기를 기다립니다. 일 층에 다다른 서장이 새벽을 포함한 사람들에게 방금 도착한 소식을 전합니다. "채하 양이 일어났다는군." "채하?" "마녀." 몇 사람이 동시에 답합니다. 사람들이 운동장으로 서둘러 몰려갑니다. 서장은 모든 사람들이 빠지지 않도록 경찰들의 이름을 일일히 부르며 그들을 멈추어서게 합니다. 새벽은 밑을 내려다봅니다. 어두컴컴한 모래 사이에서, 사암과 같은 사람의 형태가 보입니다. 모자를 보아 틀림없이 채하입니다. 새벽은 위를 올려다봅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입니다.
새벽은 계단 위로 올라갑니다. 추격전을 할 때 달렸던 그 길로. 노을이 오늘에 와서야 처음으로 밟아보았을 계단으로. 창문에서 보면 운동장에서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복도에 다다르니 민기와 설기, 연화가 쓰러져 있습니다. 물을 나누어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새벽이 민기에게 무슨 일인지 묻습니다. "안을 봐라." 말하고 민기가 쓰러집니다. "너 때문이야." 설기가 말을 보태고 또 쓰러집니다. 유일하게 남은 연화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새벽에게 얼른 들어가보라 재촉합니다. 새벽은 창문이 가리어진 앞문을 엽니다. 의자입니다. 책상입니다. 늘어져 있는 대신 거대한 삼단 케이크처럼 쌓아올려져 있습니다. 새벽은 이것이 꿈에서 준비했던 노을의 생일파티와 유사한 광경임을 알아챕니다. 골격을 숨기던 형형색색의 요가 비록 지금은 없음에도. 노을은 그 맨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생일의 주인공이던 노을에게, 왕좌라고 말하며 앉혔던 자리입니다. 그러나 장식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지 올라선 노을은 친숙하고 위태해 보입니다. "새벽 씨가 준비해줬던 그곳이야." 여명과 채하도 같이 힘을 썼지만요. 그리고 이번 것을 만든 사람들은 지금 복도에 거진 쓰러져 있지만요. 새벽이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노을은 자신의 깜짝파티가 성공한 것이 마음에 드는 눈치입니다. 교탁 위에 양초 두 개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노을의 기쁨이 환하게 전해집니다.
"전에 내 첫 예지몽을 말했지." 노을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차분히 포개고 있습니다. 교실의 가장 높은 곳에 앉은 노을은 신전의 사제처럼, 또는 그곳에서 타오르던 불처럼 보입니다. 새벽은 고대의 철학자가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신에 대한 모독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 신은 없다. 둘, 신은 우리에게 간섭하지 않는다.셋, 우리가 공물을 바치면 신은 반드시 들어준다. 새벽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느낌을 받습니다. 그 문장에 신이 아니라 사람 각자, 특정해서 노을이 들어가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 같습니다. "관람차에서 언니와 내가 싸우는데 같이 있던 세 명이 모두 언니 편을 들었어. 담임선생님과 엄마와 새벽 씨가 모두. 주제는 이상했어. 언니가 누군가를 지칭할 때 '씨'를 절대 쓰지 말라는 거야. 난 반발했어. 나이가 들 때까지 그런 호칭은 안 쓰겠지만 금지하지는 말라고. 그런데 모두 언니 편을 들던 거야." 노을이 숨겼던 예지몽의 나머지 부분이 드러납니다. 새벽은 노을의 말투가 왜 그랬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노을이 웃습니다. "언니한테 쌓인 것이 많았나봐. 그런 꿈을 꾸다니. 게다가 꿈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그래서 언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언니에게 투정을 많이 부린 것도 알겠지만, 언니는 캠프파이어에서 내가 화해를 요청할 때도 날 배신했어." 새벽은 답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비겁함을 알면서도 끼어들지 못합니다. "왜 바뀌지 않을까." "우리는 바꾸기 보다는 지키기 위한 존재니까?" 선문답의 꼴이 되었습니다. 해답을 찾지 못한 둘은 그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창문 밖으로 회색 연기가 피오르고 있습니다. 이 높이에서 불꽃놀이를 보았었지요.
네 시간이 지났습니다. 기어코 정신을 차린 민기와 설기, 연화에게, 노을은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민기가 반발했습니다. "우리는 요리사가 아냐." "하지만 노을이 말하니 기꺼이 배워볼게." 연화가 답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건 겁쟁이지." 설기가 민기의 양어깨를 붙듭니다. 민기가 울상이 됩니다. "너희들 나 괴롭히는 거지." "아니야. 케이크잖아." 설기가 진지하게 말합니다. 구겨졌던 민기의 표정이 잠잠해집니다. 그동안 노을과 새벽은 떠돌며 사람들의 일을 거들었습니다. 교무실에 있을 때 연화가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나름 케이크를 완성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생일 잔치를 시작해야 합니다. 미루지 맙시다. 여명이 껐던 양초를 켭니다. 새벽, 노을, 여명, 민기, 호연, 설기, 연화, 모두가 교실에 모였습니다. 연기가 열린 문을 따라 복도로 흘러갑니다. 새벽은 눈을 감고도 발자국 소리를 느낍니다. 교실로 들어오는 채하의 소리를. 진행을 맡은 노을이 생일초를 꺼냅니다. 새벽이 자신의 생일잔치 이후 지금까지 챙겨놓았던 생일초입니다. 작은 초 여덟 개를 대칭으로 꼽습니다. 큰 초를 양초에 갖다댑니다. 모든 초에 불을 붙입니다.
모두가 박수를 칩니다. 여명이 박수를 칩니다. 노을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자고 지휘합니다. 여명은 노래 실력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내립니다. 작을 목소리가 벌써 눈에 선합니다. 노래가 시작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박채하. 생일..." 노래는 끝나지 못했습니다. 울음이 터진 여명이 나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문을 닫고 나갔습니다. 노을은 문을 다시 반쯤 엽니다. 축제를 계속합니다. "생일 선물을 주어야겠죠?" 그러나 선물을 준비한 사람은 새벽뿐인가 봅니다. 새벽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스노볼을 꺼냅니다. 태엽을 감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빛이 나고, 오르골이 돌아가고, 눈이 내립니다. 그 작은 구 안에서. 내리는 눈이 뒤집힌 연기인 것만 같습니다. 모두가 잠시 침묵합니다. 불이 꺼지고 소리가 줄어든 뒤에야 노을이 환영합니다. "언니. 축하해. 원래 언니가 받았어야 할 선물이야." 이미 호연과 새벽에게서 전말을 전해들은 노을입니다.
생일 잔치가 끝납니다. 참석자들이 조용히 교실을 떠났습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교문 앞의 바리케이드를 보강해야 합니다. 새벽과 노을은 책상 위에 걸터앉습니다. 왕좌의 맨 아랫단입니다. 불꽃놀이를 보았던 높이입니다. 케이크 위에는 생일초가 여전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작은 초는 수명을 다했습니다. 큰 초만이 타고 있습니다. 아직 소원 한 개가 남아있습니다. 저 초가 꺼지기 전에 저 초를 불어 끄면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바람이 초를 끌 때까지 기다립시다. 양초가 타 생긴 기운만이 바람의 방향을 알립니다. 새벽과 노을은 꾸준히 교탁을 바라봅니다. 너무 조용하다 싶으면 태엽을 돌립니다. 닫힌 세계, 밖으로 나오지 않을 세계가 변합니다. 빛이 주위를 둘러쌉니다. 꺼지기 전까지 둘러쌉니다. 꺼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노볼 안의 눈사람은 유리가 깨지지 않는 이상 모래 같은 눈만을 알고 살 것입니다. 오르골 소리에 의존해도 너무 조용할 때면 화제를 꺼내듭니다. 새벽은 아우구스틴 동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염병 속에서도 살아남은 시인의 동상입니다. 강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속에서 군수물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둘은 행복한 동상의 결말에 대해 이야기를 짓습니다. 이번에는 사암으로 만들어져 해체되지 않을 거라고, 사실 군수물자가 아니라 한 직업인의 칼이 되었다고, 사실 레지스탕스의 총이 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고. 그러나 무엇이 사실일지는 모릅니다. 아직 반쯤 닫아놓았던 뒷문이 벌컥 열립니다. 새벽과 노을이 놀라 몸을 돌립니다. 호연입니다. "일하러 가야지." 태연하게 말했던 호연이 앞을 봅니다. 양초가 꺼지지 않은 것을 봅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호연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드나들 길을 열어두기를 잊지 않습니다. "아직 시간이 안 됐구나. 좀만 더 있어." 나가는 호연은 얼굴을 고의로 숨깁니다. 노을이 바닥을 내려다봅니다. 노을의 얼굴에 그늘이 집니다.
"이런 이치구나." 노을이 말합니다. "언니를 위해 새벽 씨의 생일잔치를 열었어. 새벽 씨를 위해 내 생일잔치를 열었어. 이제 나를 위해 언니의 생일잔치를 여는구나." "수레바퀴처럼." 새벽의 말이 구릅니다. "누군가는 깔려죽었겠지." GOOD END 1. 수레바퀴 아래서
>>197에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새벽은 가던 길을 돌아 운동장으로 내려옵니다. 인파를 뚫고 그 맨 앞에 섭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호연이 분주해 보입니다. 채하는 차를 등지고 서있습니다. 차 안을 살펴보는 척 사람들의 눈길을 피합니다. 지프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뒤로 물러나 보실래요." 채하가 소곤거립니다. 사람들은 한시에 조용해집니다. 몇몇 사람들이 뒷걸음질을 칩니다. 채하는 바로 옆에 서있던 호연에게도 물러가라는 손동작을 합니다. 얼굴이 드리워진 그늘이 도드라집니다. 새벽은 의아함을 느낍니다. 역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갑니다. 고개를 들어 새벽을 바라다보는 채하의 눈빛엔 낙관이 한 점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불안해집니다. 새벽이 호연에게, 몸을 피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무엇을 하려고?" "그야 차는 훌륭한 연료니까." 새벽은 채하가 자폭을 시도하려 했음을 알아챕니다. 채하는 고분고분합니다. 원망과 수치, 회한과 자책이 넓게 펼쳐집니다. 자포자기한 심정인 것 같으면서도 정처 없는 결의가 엿보입니다. 이런 결말에 이를 것이었다면 없는 편이 좋았을 자유를, 감히 내치지 못하고 위태롭게나마 서있습니다.
이틀 전에 다쳤던 다리를 아직도 접니다. 곤란한 기침이 터져나옵니다. 제대로 쉬지도 먹지조차 못했으니 몸상태가 좋지 않음이 당연합니다. 채한느 자신의 저는 다리를 보며 생각에 빠집니다. 유치원 시절에는 연극 무대에 올랐었는데.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도록 각광을 받고, 다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시하는 각본을 달달 외웠는데. 거짓말을 목발로 삼아 여기까지 왔구나. 연기는 끝장난 채로. 새벽이 또 다시 걸어옵니다. 채하는 자신의 생각이 움직이는 길을 봅니다. 피식 웃음을 짓고 맙니다. 새벽을 참으로 미워하였지요. 악의를 가득 품고 살았지요. 무력하게, 그러면서도 멍청하게 버텨왔지요. 사람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간직할 수는 있다면, 자신은 대체 무엇을 지켜온 것일까요. 채하의 눈앞에까지 걸어온 새벽이 묻습니다. "왜 그래?" 채하는 답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말하는 순간 새벽이 자신을 이해할까봐. 위로할까봐. 그러면 자신이 마음을 놓아버릴까봐. 종래는 피해자 행세를 하며 잘못을 덮어버릴까봐. 지금보다 더 못된 인간이 되어버릴까봐. 그러나 목은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하나인 목은 외로워 자꾸만 진실을 토로하려 듭니다.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다만 한 사람에게라도 비밀을 털어놓으면 안 될까요. 그러는 것이 그토록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요.
채하는 고개를 옆으로 틉니다. 호연이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호연은 계속 노을의 편이어야 합니다. 돌렸던 고개를 그대로 앞으로 옮깁니다. 새벽이 보입니다. 희망을 걸어보려 합니다. 채하가 손을 뻗습니다. 새벽의 어깨를 잡습니다. 부탁합니다. "내가 밉지. 하지만 삼십 분만 시간을 줄 수 있어? 값은 치를게." 새벽은 주위를 돌아봅니다. 자신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꾸로 자라는 고드름처럼 자리를 가만히 붙들고 있습니다. 호연이 한숨을 쉬더니 나섭니다. "자리를 비울 때가 아니에요. 인생에는 살아갈 때와 증언할 때가 있죠. 지금은 주위 경계를 철저히 해야 할 시점이에요. 잘못하면 몰살이죠." "이런 처지가 된 것이 누구 때문인지." 목소리가 들립니다. "대신 생존자도 합류시켰고 안전한 공간도 만들어졌죠. 잠시만 시간을 줍시다." 호연의 말에 결국 모두가 흩어집니다. 스탠드에 선 서장이 그들을 재촉합니다. 안심하며 호연은 뒤를 돌아봅니다. 봉에서 빠져나온 커튼처럼 새벽과 채하가 운동장 위로 허물어집니다. 호연이 놀라 그들을 흔듭니다. 미묘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채하의 이마를 짚은 호연이 혼잣말을 합니다.
새벽은 눈을 뜹니다. 익숙한 공간입니다. 놀이공원입니다. 레일을 따라 휩쓸리는 사람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릅니다.관람차가 천천히 돌아갑니다. 따뜻한 저녁입니다. 모두 다른 목적지를 지녔음에도 질서정연하게 사람들이 이동합니다. 인파로부터 비켜서 온갖 소리를 듣습니다. 외동인 두 아이를 찾는 방송에서부터, 두 꼬마의 재잘거림까지. 새벽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길 반대편에 채하가 있었습니다. 새벽이 채하에게 걸어갑니다. 채하는 새벽이 도착하기도 전에 발을 뗍니다. 채하가 새벽을 이끄는 꼴이 되었습니다. 조용히 둘은 마지막 햇빛이 내려앉는 흙먼지 위로 신발을 얹습니다. "나는 꿈을 만들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어. 하지만 아무 꿈이나 만들 수 있는 건 아냐. 내가 체험해본 일을 기반으로 해야 해." 말하며 채하가 새벽을 돌아봅니다. 새벽은 멈추어섭니다. 멈춘 둘을, 돌 앞에서 휘어가는 물처럼 인파가 자연스럽게 피해갑니다. "네가 요근래 들어 꾼 꿈은 모두 내가 만든 거야. 내 경험이란 거지. 현실에서 직접 경험했단 것은 아니지만." "노을의 예지몽도?" "맞아." 채하는 마녀모자를 들어올리더니 벗어버립니다. 떨어졌던 모자는 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어 저 멀리 날아갑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채하가 겪지 않았는데도 꿈의 배경이 된 장소들이 있었잖아." 새벽은 채하의 말에 숨을 죽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꿈 속에서 들렀던 장소에는 어디가 있던가요. 고등학교, 새벽이 미아가 되었던 놀이공원, 노을의 집, 노을의 수학여행지, 새벽과 채하가 처음 만났던 산책로, 그리고 노을이 불타오르던 캠프파이어. 그러나 채하가 경험하지 않았을 것들이 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나와 만난 건 노을이었어." "알아챘구나. 노을이 말했지?" 채하가 웃습니다. "넌 그때 실종되었어." "채하는 실종됐지." 채하가 말을 받습니다. "그리고?" "노을이가 수학여행을 간 버스와 숙소도." "그렇지. 게다가 거기에는 노을이의 반 친구들도 있었지? 채하가 걔들과 같은 반이었을 리는 없으니." 새벽은 자신이 꿈속에서 만난 노을과 겪었던 일을 채하가 이상하리만치 잘 알고 있는 것이 미심쩍습니다. 그러나 다음 의문점을 제시하는 데 열을 올립니다. "노을이 불타오르던 캠프파이어도." "그럼. 노을이는 살았으니까."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잖아." "아니. 일어났어." 채하가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그리고 곧장 표정이 굳습니다. "예지몽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야." 새벽이 말을 잇습니다. "노을이 말하길, 바다에서 내가 보트를 타고 상어들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꿈이 있다고 했었어." "새벽이 그런 경험이 없다면 나 역시 없었겠지." 채하가 답합니다. 전혀 숨기는 기색이 없습니다. 배를 감싸쥐고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희미하게 웃습니다. 뒤돌아서 다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새벽이 채하를 뒤따라갑니다. 인적이 묘연한 천막으로 걸어갑니다.
둘은 막사 안으로 들어갑니다. 천막은 어둡습니다. 채하가 빔프로젝터를 켭니다. 흰 화면이 바람에 물결치는 천막 위를 뛰놉니다. 채하가 그 앞에 병을 세워둡니다. 병이 조명이 됩니다. 채하가 뒤돌아 새벽을 마주봅니다. "하지만 다른 사례들은 왜 이상하지 않을까? 그야 당연하겠지. 내가 채하로 살았으니, 채하의 기억을 갖는 건 당연해." 채하가 천천히 벽면을 따라 걷기 시작합니다. 걸음이 가지를 치듯이 느릿합니다. 채하는 자신의 말을 계속합니다. "하나도 이상한 건 없다고 생각해봐. 내가 노을의 기억을 갖는 것이 당연할 가능성도 있겠지. 어떤 사례일까?" 채하는 새벽을 바라보는 대신 발걸음을 지속합니다. 새벽은 채하를 지켜봅니다. 채하가 유도하고자 하는 결론은 너무도 낮고 속이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물이 고이듯이 의도치 않았는데도 답을 찾고야 맙니다. 새벽이 입을 엽니다. "넌 노을이야?" 확신을 하지 못하면서도 말을 내뱉고 맙니다. 채하는 여전히 새벽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그저 순순히 고개를 조악댑니다.
채하가 말을 시작합니다. 시계반대방향으로 천막을 빙빙 돌며. 오른손으로 벽면을 쓰다듬습니다. 손이 분필자루를 잡을 때와는 정반대로, 까맣게 더러워지고 말겠지요. "나는 노을이었어. 지금의 노을과 똑같이 행동했어. 좀비 사태가 일어났고 예지몽을 꿨지. 놀이동산에 가 새벽을 만났어." 채하는 기억을 더듬습니다. 벌써 3년 전의 일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어. 난 캠프파이어 날 죽었어. 꿈에서 너희가 보았던 노을이 나야. 언니가 모두를 설득했지." 6월 27일에 죽었지요. 언니가 설득했던 모두에는 새벽 역시 들어있었습니다. 채하는 새벽을 좋아했던 날을 떠올립니다. 6월 26일부터 27일. 언니에 대한 반감에서 피어올랐을 감정일 뿐이라고, 채하는 조소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낮의 버스 터미널에 있었지. 경찰에게 넘겨졌어. 거울을 보고야 알았어. 내 모습은 삼 년 전,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언니의 모습과 닮았구나." 채하는 떠올립니다. 자신의 모습이 언니와 완전히 같음을 눈치채고 말았던 때를. 그리고 집을 묻는 경찰에게, 자신은 실종됐으며 집은 어디라고 호수까지 정확히 말했던 그 파출소를.
채하가 한숨을 내뱉습니다. 이제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할 차레입니다. 어리석던 나날들에게 작별을 하는 대신 짓밟아버리고 싶습니다. "타임 패러독스는 알지? 근본 없는 반복 패러독스라고 생각했어. 그저 내가 기억하는 언니의 행동을 따라하면 됐어." 채하가 노을을 죽입니다. 노을은 삼 년 전으로 돌아와 채하의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노을을 죽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시간여행을 다룬 많은 작품에서 택하는 소재이지요. "동생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신은 없다고 했지? 있더라. 시간이야. 두려웠어. 내가 언니와 다르게 행동하면 회복불가능한 큰일이 벌어지고 말까봐."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처럼 존재가 지워지거나, 아니면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일이 일어날까봐. 그래서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언니가 자신에게 했던 일을, 자신이 동생에게 반복하기. 삼 년 전에 자신의 이름을 뺏어갔던 가증스러운 언니를 모르는 척 따라하기. "모두 내가 겪었던 바와 똑같이 진행됐어. 그런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왜일까. 다른 결말로 와버렸네. 노을은 나처럼 죽지 않았어." 채하는 잠시 걸음을 늦춥니다. 아랫입술을 깨뭅니다. 과거를 떠올릴 때 되풀이되던 고통이 기억납니다. 자신은 마녀모자를 쓰고 타죽었습니다. 그런데 노을은 왜 죽지 않은 것인가요. 달라질 수 있는 현실이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요. 자신이 당했던 괴롭힘과 놀림을 그대로 노을에게 전했는데, 이런 상황을 맞아버린다면 대체 어떤 당위성을 확보할 수나 있는가요.
"도망쳤어." 묘목을 심듯 발을 옮깁니다. 다른 발을 옮깁니다. 채하는 강조해 말합니다. "너무 당황해서 도망쳤어. 지금까지 내가 쓴 삼 년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더라. 학교로 도망쳐 하루 고민을 해보았어. 그제야 다른 생각이 들었어. 아, 중요한 건 노을이 죽어 다른 세계의 채하가 되는 것이구나. 그러니 내가 꾸었던 꿈들이 짜맞추어 지더라고." 채하는 뜸을 들이더니 쏟아냅니다. 여전히 새벽을 보지 않습니다. "내가 왜 첫 순찰 날 죽던 예지몽을 꾸었을까? 그날 죽지 않았음에도. 그때 언니가 노을이던 시절이 있었겠구나 싶어졌어." 책상 위에 불편하게 누워, 콜록거리며 겨우 떠올린 발상이었습니다. "나는 첫 순찰 때 살아남았으니. 언니는 나를 그 다음 날 죽인 거야. 이유야 간단하지." 가변역사와 불가변역사. 오직 중요한 일만이 보존되면 됩니다. 중요한 사건만 되풀이되면 됩니다. 지켜지면 됩니다. "노을은 죽어 다른 세계의 채하가 된다. 그렇다면 노을이 죽는 일만 반복되면 됐던 거야. 그래서 나는 머지 않아 불타 죽고 말게 된 거지."
채하는 발작하듯 웃어보려 합니다. 그러나 흥이 돋우어지지 않습니다. 무미건조하게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계속해갈 뿐입니다. 어조도 외견도 신경쓰지 못하고 다만 진실을 말하는 데에만 집중하며. "노을은 죽어 다른 세계의 채하가 된다. 이것만이 진실이야. 지금까지 무수히 반복되어 왔을 테니까. 나도 언니에게 죽었고, 언니도 언니의 언니에게 죽었겠지. 이게 계속되었겠지." 벽면을 긁던 채하가 멈춥니다. 천막을 잡아 뜯으려 합니다. 그러나 천은 질깁니다. 무게를 맡긴 채 숨을 고릅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생각해?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어. 3년을 언니처럼 살아왔어. 이제 와 달리 살아갈 수는 없었다고." 채하의 목소리에 습기가 차오릅니다. "새벽 네가, 내가 실제로 겪었던 바와 달리 소원팔찌를 넘겨주기 전까지, 난 언니의 전철을 충실히 밟아왔단 말이야." 여러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모조리 떠오르기도 전에 터집니다. 다만 모르겠다는 한 마디만이 머리를 헤집고 다닙니다. 어리석었습니다. 반복되었으니 반복되어야 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에, 과학의 탈을 쓴 미신에 속아 삶을 허비해버렸습니다. 자신이 겪었던 짓을 그대로 동생에게 물려주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을 때 자신은 열다섯 살에 불과했다는 것 외에는 변명할 거리조차 없습니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노을이 커서 채하가 되고 채하는 노을을 죽인다. 그것 외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침묵을 고수할 수는 없습니다. 해야 할 말은 해야 합니다. 채하가 결국에는 새벽을 바라봅니다. 새벽은 지금까지 계속 채하를 지켜보는 중이었습니다. 최대한 당당해 보이려 애쓰며 채하가 입을 엽니다. "동정하지는 마. 난 이 결말을 골랐어. 내가 언니를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고 착각한 것에 불과해. 나를 버리고 산 죄값을 받으면 그뿐이야." 새벽은 생각합니다. 마녀 모자를 쓰지 않은 채하를 본 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삼 년을 모자 없는 모습만 봐왔는데, 어쨰서 근래 이틀을 보았을 뿐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되어버리고 말았을까요. 새벽은 채하에게 다가갑니다. 그러나 함부로 입을 열지는 못합니다. 대체 무엇을 말해야 말이 흉기가 되지 않을까요. 지금으로선 위로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산불을 일으킨 것 외엔 아직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고 일러주어야 할까요. 그 중립적일 말이 왜 이토록 기울어진 것 같을까요. 그러나 그 모든 고민이 무색해집니다. 새벽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말을 꺼내고 말았습니다. "힘들었지. 고생 많았어." 채하는 바닥을 내려다봅니다. 서럽게 울음을 터뜨립니다. 장애물이 없어 채하의 머리카락도 표정도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맙니다. 병 한 개 분량의 빛 안에서 새벽은 채하를 간간히 위로합니다. 채하의 어리석음은 유별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 정도의 어리석음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고. 방향지시등이 꺼진 것처럼 어둠이 찾아옵니다. 새벽은 밀쳐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눈을 감습니다. 눈을 뜹니다. 꿈이 깨집니다.
양호실입니다. 새벽은 몸을 돌립니다. 노을과 호연이 입구 근처 의자에 앉아있었습니다. 건너편의 침대에 누운 채하가 보입니다. 채하도 막 잠에서 깨어난 모양입니다. 채하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봅니다. 수갑이 풀려있습니다. 자는 새에 호연이 풀었나 봅니다. 호연은 일어난 둘을 발견합니다. 채하가 누운 침대 옆에 섭니다. 간결히, 정말 용무밖에 없다는 것처럼 묻습니다. "괜찮니? 열이 나더구나." "절 미워하셔야죠." 채하가 말합니다. 호연이 고개를 도리질합니다. 채하의 눈에 빛이 감돕니다. "어른이거든. 싫어하는 상대도 좋아하는 상대처럼 대할 수 있어." 채하가 쓴웃음을 짓습니다. 손을 내려다봅니다. 양초 같은 노을의 시선을 피합니다. "많은 것은 바라지 않으마. 그래도 이유만은 듣고 싶구나. 어쩌다 마녀가 됐니? 왜 노을을 죽이려 거짓말을 했니?" 호연이 칼을 빼어들듯 묻습니다. 채하는 천천히 반응합니다. 거짓말을 생각하나 봅니다. 그러더니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는지, 한 단어씩 또박또박 뱉어냅니다. "전 계속 마녀였어요. 무수히 많은 시간을 채하로 살아오며 노을이를 죽였어요. 노을을 죽이면 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갔죠. 채하이기 전의 시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에요." "그렇다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줄은 알지?" 호연이 뒤에 노을을 감추고 묻습니다. 노을은 새벽을 바라봅니다. 새벽은 씁쓸하게 손을 흔듭니다. 새벽으로서는 간섭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채하의 선택이라면. 채하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입니다. "네. 우리는 자유로워야만 하니까요." 채하를 덮은 이불은, 악의 한 톨도 막지 못할 만큼 얇디 얇아 보입니다. 새벽이 눈을 돌립니다.
호연과 노을이 양호실을 나갑니다. 새벽이 일어나 신발을 신습니다. 채하에게 다가갑니다. 채하는 풀이 죽은 얼굴입니다. "노을일 적에는 호연 언니에게 의존했어. 경찰 씨, 경찰 씨 부르며 따라다녔지. 나는 모닥불에 타죽도록 내버려두었으면서도 노을이는 잘만 지켜주는구나. 나도 노을이었는데." 채하의 말에는 원망보다도 회한이 가득합니다. 어리광을 부리는 느낌이 강합니다. 새벽이 묻습니다. "왜 진실을 안 말했어?" "나를 안타까워할 수도 있잖아. 차라리 이쪽이 더 나아." 채하는 하얀 이불을 내려다봅니다. 언니로부터 배웠던 노래들을 떠올립니다. 죽기 직전에야 개사된 가사 전체를 알 수 있던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에서부터, 엘루이즈의 미성년, 그리고 show me where it hurts까지. 거의 모든 가사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창단원 같다는 마지막 것의 가사만을 빼면. 하지만 하루 사이에 모든 것이 뒤집혀버렸습니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이 거짓인 것만 같습니다. 채하는 고개를 듭니다. 문이 열려있습니다. 새벽이 양호실을 나갔습니다. 새벽이 호연과 노을을 따라잡습니다. 새벽이 숨을 돌립니다. 호연이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멈추어 뒤돕니다. "전할 말이 있어?" 있습니다. 채하가 거짓말을 했다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그러나 채하가 말하지 않은 것을 자신이 말할 권리가 있을까요? 단지 채하가 일러주었단 이유만으로? 새벽은 망설입니다. 노을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호연 누나는 항상 노을이의 편이 되어주세요."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호연이 풋,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럼. 안 그래도 그러고 있잖니." 채하로 개명되었던 노을이 다시 개명되기 전까지, 잠시나마 동생은 채하로, 언니는 노을로 불렸을 것입니다. 채하가 보여준 꿈 속에 명백히 있던 장면이었지요. 새벽은 지금의 채하 역시 한때는 노을이었다 이르는 대신, 이런 차선책만을 고릅니다. 뒤돌아섭니다. 노을이 새벽을 부릅니다.
"잠시 뒤에 생일파티를 열 거야. 준비를 부탁해놨어. 2학년 1반 교실로 언니를 데리고 와." "파티?" "언니 생일파티를 못 했잖아. 지난 토요일이었는데." 노을이 웃으며 답합니다. 생일잔치에 참석하기 전, 새벽은 잠시 교정을 돌아다닙니다. 창가에 기댄 여명을 만납니다. 담배를 피지 않는데도 세상에 정신을 뺏긴 모습입니다. 여명이 새벽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잔치가 있다는 말은 들으셨죠?" "내가 가서 뭐하겠니." 여명은 창밖으로 말합니다. 목소리가 쓸쓸해집니다. "미안했다. 멋대로 동생 노릇을 시키고, 멋대로 내버려서." 새벽은 답하는 대신 여명의 어깨를 주무릅니다. 여명은 퀭한 눈으로 밤을 쳐다봅니다. 눈에 의아함이 서립니다. 그러나 교내는 충분히 혼란스러우니 괜히 말을 더 보탤 필요는 없겠지요. 여명은 달도 없는 밤을 봅니다. 그러더니 생일 잔치가 어디서 열리냐고 묻습니다.
교실로 가니 복도에 민기와 설기, 연화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교실 안쪽을 보니 왕좌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셋이 혹사하고 말았나 봅니다. 새벽이 그들을 천천히 교실 안으로 유도합니다. 셋은 교실에 들어옵니다. 벽에 나란히 기댑니다. 노을과 채하가 서로 데면데면해하며 주위를 돌아봅니다. 문이 열립니다. 호연과 여명이 케이크를 들고 왔습니다. 새벽이 가방을 뒤져 생일초를 꺼냅니다. 채하의 나이에 맞추어 초를 꽂습니다. 여명이 양초에 불을 붙입니다. 양초 두 개를 양쪽에 세웁니다. 불이 환하게 타오릅니다. 채하가, 호연이 급조한 고깔모자를 씁니다. 모자가 떨어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 채하를 보며 웃으며, 나머지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합니다. 생일 축하 노래가 시작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박채하. 생일..." 아기 울음소리에 노래가 끊겨버립니다. 일행이 놀라 일제히 시선을 돌립니다. 앞문에 서장이 아기를 안고 와있습니다. 호연의 늦둥이 동생입니다. "서장님, 조심하시지!" 호연이 탓합니다. "아니에요." 채하가 조심히 호연을 말립니다. "전 오히려 기쁘니까." 선물을 줄 시간입니다. 새벽은 가방을 뒤지다가 머그컵을 꺼냅니다. 노을이 새벽에게 달려듭니다. "내 선물이잖아!" "마음이 담겼잖아." "마음은 나도 줄 수 있거든." "네 마음을 대신 전해주잖아." 쳇, 노을은 삐져서는 호연 뒤로 총총 숨어듭니다. 머그컵을 손에 든 채하가 새벽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선물을 돌려받았다고 이릅니다. 삼 년 전에 주었던 선물을 이제야.
생일 잔치가 끝났습니다. 2학년 1반 창틀에는 롤러코스터가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선두에는 채하가 탔습니다. 그 뒤로 호연과 여명이 타고 있습니다. 도시를 순찰하는 용도입니다. 서장의 부탁 떄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채하가 끼친 피해는 불을 낸 것 하나뿐이니, 그 불을 서둘러 진정시키고 그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우면 된다 하였습니다. 채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채하가 지도를 내려다봅니다. 호연과 상의합니다. "우선 불부터 끄러 가죠. 그 뒤에는 도시 전역을 돌며 좀비를 없앨 거에요." "이런 능력이 있으면 진작에 썼어야지." "도와달라고 안 했는데 나타나는 영웅은 교만하죠." 옆에서 설기가 끼어듭니다. 아직 출발을 하지 않았습니다. 민기와 설기, 연화, 서장이 창가에 나란히 서 그들을 배웅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설기의 말에 호연이 웃음을 터뜨립니다. 채하는 나아갈 길을 봅니다. 하늘이 보입니다. 별빛이 총총합니다. 웃기지 않나요. 사람을 세울 수도 없고 손으로 잡아챌 수도 없는 머나먼 공간입니다. 소원을 아무리 빌어도 망가뜨립니다. 어두워 표정을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요. 마치 스노볼처럼 간섭할 수도 없는 저 세계가 왜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도 용서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질까요. 잘못된 바람을 가졌던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일까요. 채하는 자신이 제기했던 의문을 떠올립니다.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요. 그러나 현실에서의 잘못은 현실에서 고쳐야 할 것입니다. 관념 속에서, 자신만이 만족하는 답변을 내린다면 차 안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가로등 밑에서 찾는 격이겠지요. 채하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쉽니다. 형태도 없는, 채하가 아닌 것이 채하를 채웁니다. "가볼까요." "나 데려가!" 채하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립니다. 굉음에 호연의 늦둥이 동생이 또 놀라고 맙니다. 서장의 품에서 다시 울음을 터뜨립니다. 서장이 급히 아기를 어릅니다. 문가에 서있던 노을이 잠시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옵니다. 아기를 내려다봅니다. "울지마." "자연스러운 거야. 내버려둬." 설기가 말합니다. 채하를 향해 돌아봅니다. 어서 노을의 말에 답하라는 압박이 느껴집니다. 채하가 노을을 보며 말합니다. "어서 가자." 노을이 롤러코스터 위에 올라탑니다.
롤러코스터가 출발합니다. 행선지를 모를 경로를 따라갑니다. 학교에는 사람들이 남습니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봅니다. 그 밑 층 교실에는 새벽이 있습니다. 역시 하늘을 바라보는 중입니다. 노을이 막 나갔던 문으로 바람이 쏟아집니다. 교실에, 새벽은 잠옷을 입고 서있습니다. 끝을 맞을 때에야 적합할 맑은 공기입니다. 이틀 이상 해가 뜨지 않았을 때에만 허용될 경계 없는 어둠이 운동장을 채웁니다. 떠난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어둠엔 무게가 없으니, 버거워하며 소리를 지를 이유 역시 없습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새벽은 듣습니다. 속으로 낭독한 구절을 잊을라 금세 입밖으로 냅니다. 새벽 기도를 하는 간절함이 비칩니다. 하늘에는 떠나가는 사람밖에 없으나, 별 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자장가 같이 고요합니다. 또박또박 정확한 음정을 찾습니다. 모두 끝났음에도 자라날 뼈가 있다는 듯 조용히 울려퍼집니다. 새벽은 귀를 연 채 눈을 감습니다. 잠에 눌려 점차 중얼거림이 작아집니다. 노래가 끝났습니다. 잠에 빠지는 새벽의 위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라. 저쪽이 밝아오는걸." "산불이야. 바보 오빠." "아니. 동서남북. 저긴 동쪽이잖아." "서쪽이거든. 여기가 오른쪽이야." "아니야. 해가 뜬다니까. 사흘 전의 노을 이후로, 처음 찾아오는 새벽이야." 설기와 민기는 끝까지 승강이를 벌입니다. "그래봤자 밤은 또 오거든요." "이제 버티는 법을 알잖아." GOOD END 2. 스노볼
제3장이 끝났습니다. 기억 탓에 예전과 많은 부분이 바뀌었네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 있던 설기와 민기의 대화는, 올리기 직전에야 기억해냈습니다. 읽어주셔서, 그리고 이 이야기를 만들어주셔 감사합니다. 내일부터 짧은 외전을 적고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제?장 '소원팔찌' 1 선물로 책을 받았다. 수레바퀴 아래서. 막 배포했던 게임에 나온 장면을 따라했음에 틀림없다. 새벽은 이런 데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속에는 모르는 문장이 연필로 적혀 있었다. 신은 인간을 듣지 못한 척한다, 고. 어디서 베껴왔느냐 따지니 시에서 따왔다고 자백받았다. 최백규의 시이며 제목은 '너의 18번째 생일을 축하해'라 하였다. 검색해본 뒤에야 진짜인 줄을 알았다. 잔치를 정리하고 침대에 눕자 동생이 내게 덤비어 왔다. 이틀 후는 일요일이었으며, 그 이전에 새벽의 생일이었다. 놀이공원에 가자며 투정을 부리던 동생을, 옆집에 살던 새벽을 데려와 겨우 말렸다. 노을의 친구까지 넷이 놀러가기로 확약을 했다. 노을의 친구의 이름은 연화인데, 나는 착각해 게임 상의 이름을 월하라 잘못 입력한 전적이 있었다. 노을이 반응을 알려주었다. 머리카락이 떨어지듯 소소히 자책하며 수정을 끝내고서야 의문이 들었다. 노을에게 물었다. 자기를 허락도 없이 게임에 넣은 것엔 별 말이 없었느냐고. 노을은 답했다. 어차피 이름만 빌렸을 뿐이 아니냐고. 자기 전에 한 번 더 게임을 켜보았다. 조악한 창작물이다. 납치를 막지 못했을 때와 누적된 점수가 얼마 이상일 때는 배드엔드가, 산불이 났을 때 노을을 고르지 않으면 노멀엔드가, 그 뒤로는 굿엔드가 나오게 만들었다. 연필로 그린 것 같은 웃음을 지어봤다. 꺼진 화면에 비치는 나는 그림자와 닮았다. 노을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림자에게 고백해 보았다. 내 시야에서 사라진, 그리하여 달라졌을 사람들을 많이 보고 싶다. 말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처럼 공중에 번지더니 떠나 버렸다.
2 모두가 자유이용권을 손목에 찼다. 노을의 소개로 연화를 만나기는 처음이라 점잖은 태도를 취했다. 노을의 말에 따르면 연화는 내가 만든 게임에 많이 파고들었다 했다. 게임 상에서 노을과 새벽이 7년만에 서로를 찾는 건 어린왕자가 거친 일곱 별의 비유냐고, 어린왕자 영역본에 딱 두 번 나오는 tie와 주연 세 명의 관계는 일부러 연동시킨 것이냐고 물어 나를 당황시켰다. 아니라는 답변을 듣더니 왜 굳이 어린왕자를 패러디했는지 물었다. 내가 적은 것이 아니므로 내가 작품을 모두 알지는 않는다고 조용히 타이르는 수밖에 없었다. 나들이는 나름 쑬쑬했다. 기념품 가게에 가 돈을 탕진했다. 중간에 엇갈리기도 하였다. 그 탓에 관람차에 올라 보이지 않는 새벽과 노을을 찾아야 한적도 있었다. 관람차 안에서 연화는 게임 이야기를 했다. "오래 걸렸죠? 일 년보다 많이?" "더." "왜 만든 건가요?" "노을이의 열네번째 생일 선물로 주고 싶었어. 늦었지만. 생일선물이 아닌 선물이 되고 말았지." "그게 일주일 전이었군요." "뭐. 내 생일이 오기 전에만 주면 됐으니. 아슬아슬하긴 했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사람들이 25일을 걸어다녔다. 그중에 범퍼카를 기다리는 줄을 선 새벽과 노을을 기어코 찾았다. 찾고도 내려가기까지, 문이 열리기까지 20분을 꼬박 기다려야 했다. 관람차는 느리게 돌아갔다.
3 "어쩌다 이런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내가 만들지 않았어. 우연이야. 다른 사람들이 내게 준 것을, 내가 내 밖으로 돌려주었을 뿐이야." 게임이 아니더라도 많은 것이 비슷한 논리를 가지겠지. 식사를 먼저 마친 노을과 새벽이 야구공과 글러브를 갖고 먼저 일어섰다. 관람차 앞의 넓은 공터에서 캐치볼을 하겠다 하였다. 둘의 손목에는 기념품 가게에서 산 소원팔찌가 자유이용권 위로 흔들렸다. 매듭이 끊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던, 아주 튼튼하게 만든 팔찌였다. 둘은 문을 잡아주며 나란히 떠났다. "행복해. 일 하나를 끝마친 탓이기도 하고, 별 일 없이 매일매일이 흘러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다는 사실이 가장 커." "저 둘은 잘 지냈죠. 알겠지만, 금요일에 비가 왔을 때는 저 형이 노을을 배웅나왔더라고요." "내가 부탁했어. 노을은 우산을 종종 잊으니." 쇠 포크를 냅킨 위에 올려놓았다. 색이 짙어졌다. 일어날 시간이 되었으니 동물원 쪽이나 둘러보아야겠다 공상하며 지갑을 뒤지고 있으니, 갑자기 연화가 내게 짐짓 진지하게 물어왔다. "게임 설정에 조금 구멍이 있어 보였어요." "난 최선을 다했어." "언니가 동생을 죽이고, 동생은 다른 세계의 언니가 된다는 설정이죠?" "그게 반복되지." "동생이 예지몽을 꾸는 것은 언니가 꿈을 만들었기 때문이고요." "언급했지." "언니가 그 꿈을 만드는 것은 그 장면을 예지몽으로 간접 체험했기 때문이라 했어요." "맞아." 연화가 스탠드처럼 턱을 괴었다. 손을 찌르려는 물레를 쳐다보는 어린 황족처럼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난 물을 들이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4 "동생을 죽이는 언니는 한때 동생이었어야 해요. 영원히 거슬러 올라가죠." "시작점을 알 수 없다는 거구나." 잠잠한 척하지만 꽤 큰 설정오류라고요, 라며 연화는 턱에 괸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찔렀다. "일렬로 늘어서면 문제가 생기죠. 뭐, 게임 속의 이야기라 말하는 거지만, 설정오류를 해결할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요." "그런 방법이 있었니?" 나는 잔잔하게 놀랐다. 조금 추워 가게에서 사들였던 퍼즐상자를 꼭 껴안아야 했다. "원형이라면 문제가 없죠." "원형이라고?" 꼭 관람차처럼. "네. 선형이면 끝이 있어야 하니 무한히 거슬러 가야 하잖아요? 하지만 원형이면 많은 세계가 필요하지도 않아요. 네 개면 해결돼요." 연화가 종업원에게 부탁해 영수증과 볼펜을 받았다. 뒷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굿엔드가 아닌 엔딩이 총 세 개였죠. 납치되는 엔딩. 불에 타는 엔딩. 노을이 숲속의 공주처럼 영원히 잠드는 엔딩." 연화는 나침반 같은 원을, 그리고 동서남북 네 방향에 네모를 그렸다. 시계반대방향으로 1부터 4까지 번호를 매겼다. "세계 1은 배드엔드1이 일어난 세계라 하죠. 세계 2는 배드엔드2가 속한 세계. 세계3은 노멀엔드로 끝난 세계." 나는 말없이 잠자코 들었다. 연화가 머뭇거리더니 참견했다. "참. 노멀엔드가 그냥 엔드로 표시되더라고요. 번호도 무엇도 없이. 고치셔야죠." 고개를 떨어뜨리듯이 끄덕였다. 연화는 볼펜을 손에서 놓았다. 나를 바라보았다. 질문을 바라는 것 같았다.
5 "그렇다 치자. 정말로 해결이 되기는 하는구나." 시작점이 없다. 한정된 세계만으로도 무리 없이 돌아간다. "굿엔딩은 이 루프에서 벗어나는 결말이 되네." 옅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간단하고도 명료한 해법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마리가 될 수 없음은 알고 있다. 나는 따지고 드는 대신에, 왠지 모르게 기대에 찼던 자신을 비웃으며 그렇구나, 하고 손을 저었다. 연화는 나를 보더니 볼펜을 다시 집었다. 아직 더 적을 것이 있나 보다. "더 흥미로운 가설도 있어요." 나는 그제야 빈칸을 보았다. 세계4에 대한 설명은 아직 없었다. 세계1의 동생은 세계2의 언니가, 세계2의 동생은 세계3의 언니가, 세계3의 동생은 세계4의 언니가 되는 구조다. 저 빈칸을 채우지 않고 이리 뜸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궁금스러운 표정을 짓자 연화는 말할 기력이 나나 보았다. "이전 세계의 동생이 다음 세계에 있을 일을 간접체험하기만 하면 되죠. 그 수단이 꿈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꿈이 아니라니." "흥미롭다고 한 이유가 여기 있어요. 재미삼아 하는 것이지만 우리 이야기거든요. 세계4는 우리가 있는 여기에요." 나는 세계3과 세계4를 이은 곡선을, 개미를 눌러 죽이듯 지긋이 내려보았다. 연화는 시계를 고칠 때처럼 조심스러워 했다. "세계4의 동생은 예지몽을 꾸지 않아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체험할 방법을 갖고 있죠."
6 "간접체험이라면." "네. 게임이죠." 말을 줄였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식당에 들어왔다. 연명하기 위하여. 난 수확되지 않은 과실 같이 종이 위에 뚝뚝 떨어졌다. 연화는 볼펜을 지시봉처럼 들고 설명했다. "세계3의 동생은 죽어 세계4의 언니가 되었다. 해피엔딩을 바라며 굿엔드를 넣은 게임을 만들었다. 루프에 갇혔던 언니를, 그리고 무수히 많았을 노을을 추모하기 위해." 연화는 침을 삼키듯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 게임도 비극의 일부였다. 해피엔드를 단지 꿈꾸기만 했으므로 실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세계4의 노을은 사고로 죽어 세계1의 언니가 되었고, 게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 우리는 시간에 역행하는 수레바퀴처럼 계속 앞뒤로 밀려간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비틀었다. 그러더니 너무도 진솔한 웃음을 지었다. "어때요? 쯔꾸르 게임 뒤에는 뒤풀이 방이 있잖아요. 후일담인 척 넣어보는 거예요. 요즘 게임은 다 이렇게 경계를 부수죠." "난 지금 결말이 좋다고 생각해." "재미인걸요. 현실도 아닌걸요." 악의가 없는, 오히려 나를 도우려 드는 행위였다. 아득하였다. 너는 내가 적은 세계에 어떤 권리도 없다고 말하려다, 그가 자신을 게임에 쓰는 것에 동의했음을 깨달았다. 난 그에게 작은 빚을 졌다. 궁금해져 물었다. "참. 난 널 무단으로 넣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왜 화를 내기는커녕 이렇게 열정적이니?" "누구나 창작물 속의 인물이 되어보길 꿈꿔요." 단지 그뿐일까. 종이 위에 떨어진 내가 일부러 낸 흠집처럼 뭉그러졌다.
7 연화를 먼저 놀이공원 입구에서 떠나보냈다. 등산을 가셨던 부모님을 데려왔다. 게임과 달리 모두가 같은 집에서 배려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보다 더 나은 행복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폐관시간이 이만 다가왔다. 부모님은 경찰서로 가셨다. 난 새벽의 가족과 동행해 저녁을 얻어먹고 그의 집에 갔다. 잠시 머물게 될 것이었다. 새벽은 어쩌면 내일, 우리가 증언을 하러 나가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미 간단한 사정을 모두에게 전한 후였다. 화장실에 간다고 야구글러브를 벗어놓고 자리를 비웠다고. 이것보다 더 자세히 할 말이 없는데 대체 무엇을 더 증언해야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새벽은 방을 나갔다. 나는 모처럼 고마울 것을 찾았다. 난 내 표정을 볼 수 없다. 이것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8 문을 열고 나왔다. 문짝이 속눈썹처럼 거칠거칠해 눈살이 찌푸려졌다. 거실에는 새벽의 일가족이 모여 퍼즐조각을 짜맞추고 있었다. 사람도 조각도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퍼즐판 위로 좁게 길이 나있었다. 거의 다 끝난 참이었다. 무엇도 보탤 것이 없을 것임에도 뒤늦게 합류했다. 몇 조각 남지 않자 새벽의 아버지가 퍼즐을 고정하자고 말했다. 일가족이 덤벼들어야 해결될 퍼즐을 또 뭉개지 말고, 아예 액자처럼 전시해버리자고 했다. 모두가 동의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퍼즐 한 조각이 끝내 보이지 않았다. 옷가지를 다 들어보아도 없었다. 가운데에 뻥 구멍이 나버리고 말 지경이었다. 발상이 떠올랐다. 우리집으로 갔다. 노을이 쓰던 크레파스를 찾았다. 종합장을 한 장 뜯어 돌아왔다. 커버의 그림을 참조하여 비워진 조각을 그렸다. 가위로 잘라 빈칸에 채우니, 가짜인 티가 역력히 나면서도 꽤 볼만 하였다. 퍼즐은 그대로 고정됐다. 한 조각이 가짜 조각으로, 내가 그린 조각으로 채워졌다. 몇 시간만 있으면 벽면에 안심하고 걸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일단 과업 하나를 달성했으므로 모두가 웃어보았다. 그 새에 더 큰 것을 잃어버리진 않았는지를 고의로 잊으면서. 아무도 못과 망치를 찾지 않았다. 어서 접착제가 마를 시간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대로 퍼즐이 고정되어버리기 전에 실종된 노을이 돌아와야 했다. 그러면 이곳의 모두가 서둘러 집을 뛰쳐나오는 통에, 저 퍼즐은 다시 엉망이 되리라. 그래서 다시 맞추어야 하게 되리라. 시간이 흐르고 접착제는 굳어갔다. 내가 그린 가짜 그림이 포함된 채 정겨운 산과 강의 풍경이 메말라갔다. 새벽이 문득 말을 걸었다. 다시 게임을 만들어볼 것이냐고.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나는 답했다. 난 진실을 속에 품은 거짓이 아니라, 단순한 거짓을 만든 채 만족했을 뿐이었다.
8.1 퍼즐이 굳었다. 벽에 걸린 퍼즐은 아름다웠다.
어림잡아 14만자. 결국은 끝났네요. 이제야 원래대로 돌려놓았네요. 설정비화가 남아는 있으나 여기에까지 올릴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마음 가시는대로 완결된 이들의 세상살이를 돌아봐 주시길 바란다는, 마지막 설정비화의 문장만으로 압축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제0장, >>10의 '승패를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승리한 것일까요'는 기형도의 '노을'을, >>20의 '뼈가 자라는 소리'는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첫 설정비화에서 이들을 밝히며 노을의 이름이 결정되기도 전에 노을이 불린 것과, 허공의 아이들과의 공통점이 많다는 점이 신기하다고 말했었죠. 제 것이 아닌 글은 돌려놓습니다. 깔끔히 정리할 시간이지요. 혼자가 아닌 여럿이 모여 적히는 이야기가 어떤 모양일지 궁금했습니다. 본 적이 없는 플롯을 적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선물 받은 제게 과분한 글을 드디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놓습니다. 이전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인물들의 나흘살이에 참여해주시고 읽어주셔 감사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드디어 끝이 났네요 여기에서 다시 보게되어서 반갑고 어리둥절하면서 엄청 기뻤어요! 천천히 정독해야지 ㅠㅠㅠㅠ 감사합니다!
갱신
진짜 열심히 참여했었고 다시 적느라 수고했어 고마워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을게 앵커판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https://www.evernote.com/shard/s399/sh/a3f80604-09ae-4357-93eb-bc97fcae7773/0b0ee745dd19f2f8295c8a9c833c4a38 재연재 1주년 기념 외전입니다. 16000자 분량입니다.
스레더즈 앵커판에서 연재가 끝난 지 2주년, 그리고 이곳에서 2장부터 다시 쓴 지 1주년 기념으로 적은 단편입니다. 외전(>>222 ~ >>229)에서 이어져요.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 만든 이야기인데, 열린 결말이라 하더라도 배드 엔딩의 냄새를 풍긴다는 점이 사뭇 마음에 걸려왔습니다. 이렇게 끝나선 안 됐어요. 그래서 본래 설정을 최대한 살린 채 최대한 희망적인 결말을 만들려 노력해 보았습니다. 해피엔딩에 늦는 일은 없겠죠. 역시 이러는 편이 뒷맛이 더 개운하네요. 쓰면서도 확실히 즐거웠습니다. 비유와 쉼표를 마구 키우던 옛날 문체와 익숙한 인물들에 정감이 가득 갔어요. 앵커판에서 실시간으로 적던 때처럼, 오랜만에 망설임 없이 자판을 쳤네요. 같이 이 아이들을 만들어주셨던 당신께, 이 아이들을 읽어주셨던 당신께, 더할 나위 없는 감사를 올립니다. 이 이야기도, 당신도, 그동안 늘 기억하고 있었어요.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을 아는, 또는 당신의 계절에 갇힌, 또는 새로운 수레바퀴를 돌리려는 당신에게도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보다 더 행복하시길. >>231 >>233 저야말로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부디 행복하시길.
대박 외전 올라왔구나 선스크랩 후정독... 스레주도 행복하길!!
갱신~! 앵커판에서 실시간으로 새벽이네 이름이 지어지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 ㅎㅎ 그립다!
우와 갱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