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 수감된, 넥타이를 푼

창작소설 2018/07/04 16:09:06

#1 이름없음 2018/07/04 16:09:06

이 글은 스레더즈에서 제3장과 외전까지 연재되었으며 사이트와 함께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제0장과 제1장을 찾았으므로, 기억을 되살려 나머지 내용도 복구할 요량으로 스레를 세웁니다. 앵커판에서 연재되었던 이상, 이 글은 저뿐만 아니라 저 외의 참가자들과 함께 만들어졌음을 알립니다. 설정 오류를 메우는 등의 이유로 내용이 기존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하로는 제2장부터 연재됩니다. 이하 링크의 제0장과 제1장부터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https://www.evernote.com/shard/s399/sh/9be6d940-2861-4aef-b13f-22ea5bce937c/6399a3b14b3d7897dc74d6a324881353 (제0장 + 제1장)

#2 이름없음 2018/07/04 16:11:27

+제2장 야구공이 있는 풍경 "...나." "일어나." "이새벽, 일어나. 오늘 파티를 열어야지." 새벽은 눈을 뜹니다. 머리맡에 익숙한 나무의 감촉이 느껴집니다. 무릎에 담요가 덮여 있습니다. 바람이 환한 빛처럼 교실에 가득이 번집니다. 분필 가루가 포말을 머금은 바닷물처럼 휘몰아칩니다. 새벽은 창문으로 눈을 돌립니다. 텅 빈 운동장이 보입니다. 해변도 아니고, 소금기 없는 공기는 말랐으나, 친근한 목소리에 새벽은 부력을 느낍니다. 책상 앞에 학생이 서있습니다.

#3 이름없음 2018/07/04 16:13:37

새벽은 바로 꿈임을 직감합니다. 그는 산타처럼, 또는 산타의 자루에 숨어 그를 뒤쫓는 아이처럼 분명히 하늘을 날고 있었으므로. 학생은 얼음이 녹듯이 느린 새벽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티를 냅니다. 새벽이 묻습니다. "누구야?" "자다 깬 줄 알았더니 죽었다 살아났냐. 숨쉬는지 잠시 확인을 안 했더니 이런 불상사가." 학생이 팔짱을 끼지만, 방어적인 태도가 무색하게 웃고 맙니다. 장난기가 가득합니다. 소년의 겁먹은 목소리를 흉내냅니다. "도와줘, 누나. 길 잃었어." "어릴 적 일이잖아!" "봐아. 기억하잖아." 학생이 목소리를 얻은 공주처럼 폭소합니다. 교정의 고요함이 몸을 낮춰 절합니다. 새벽은 턱을 굅니다. 학생을 모를 리야 없습니다. 삼 년 전에 새벽의 옆집에 이사온 친구로 계속 어울려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은 그보다 더 오래 되었는데, 그들은 칠 년 전, 새벽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같은 놀이공원에서 같은 시간에 미아가 된 전적이 있었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사람 사이로 점점 더 걸어들어갔더니, 놀라워라, 때마침 터진, 과자들보다 더 수많은 색깔과 수의 폭죽에 눈이 뺏겨 그들은 폐관 즈음에야 심장이 화덕에 밀쳐진 부모에게 손이 잡혀 헤어졌지요.

#4 이름없음 2018/07/04 16:14:44

"왜 여기야?" 새벽은 상자에 갇혀 매립지에 온 곰인형처럼 맥락이 낯섭니다. "전원 안 들어왔니. 110볼트에 꽂힌 헤어 드라이어 같다. 짐작해봐." "기억이 안 나는걸." "난 좀 더 넓은 의미로 말한 거야. 평일인데 여기 있을 이유가 뭐 있겠어?" 조금씩 기억이 돌아옵니다. 그들은 학생이 없는 등교길을 따라 학생이 없는 교문에 다다랐습니다. 그날이 개교기념일이었음을 머리보다 발이 먼저 알았지요. 하지만 칼을 뺐으면 하다못해 다른 칼이라도 베어야 한다며 학생은 새벽을 데리고 교문을 넘어갔습니다. 졸렸던 새벽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한숨 잠을 청했습니다.

#5 이름없음 2018/07/04 16:15:46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새벽은 입가로만 웃더니 책상에 머리를 대고 눕습니다. 학생은 새벽이 조는 줄로 알고 칠판을 탕탕 칩니다. "평소와 다르네. 정체를 밝혀! 넌 필시 새벽이로 분장한 외계인이렸다." "그렇다는 증거는?" 새벽이 고개를 살짝 듭니다. 학생이 걸어오더니 자신만만하게 새벽의 상의를 잡습니다. "숨어들어오겠다면 사전준비가 철저했어야지. 우리 학교 넥타이가 아냐! 옆 중학교의 넥타이지!" 학생은 새벽의 넥타이를 풀더니 교탁 위에 던집니다. 새벽의 잠이 달아났음을 확인하자, 학생은 교탁 뒤로 성큼 걸어가더니 분필을 잡습니다. 줄을 그어 칠판을 둘로 나누고, 중앙보다 조금 위에 정형적인 문을 그리더니, 팔을 치켜 올려 맨 상단에 글자를 적습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고, 학생은 우리뿐이니, 이 학교는 우리 거야." 학생이 힘을 주어 흰 글씨를 눌러씁니다. 대문자로 생일 축하를 적습니다. "오늘은 우리 동생 생일이야! 우리, 세계 최고의 멍청이들끼리 머리를 모아 최고의 생일 잔치를 만들자! 왼쪽에는 준비물을, 오른쪽에는 무엇을 할지를 적는 거야." 대차대조표 같은, 하루 더 움직여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보이는 것만 같은 두 개로 나뉜 칠판을, 새벽은 응시합니다.

#6 이름없음 2018/07/04 16:17:07

"교실에서 하겠다면, 책상과 의자로 왕좌를 만드는 것이 어때?" 새벽이 순서를 양보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듭니다. "채택! 집에서 이불을 들고 와서 장식해야겠다!" 학생의 손이 글씨를 남기고 움직입니다. 궁전, 그 밑으로 PNE 케이크와 폭죽을 적습니다. "우리 동생은 불꽃놀이라면 사족을 못 써. 쥐불놀이는 위험하겠으니 이걸로 만족하자." 학생은 끙 소리를 내더니 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양머리처럼 감습니다. "케이크 자르고 불꽃놀이라면 너무 심심한데." "학교 전체가 무대이니 추격전이 제격이겠다." 학생은 새벽의 말을 듣고 교실 한복판으로 걸어갑니다. 새벽과 하이파이브를 칩니다. "채택! 우리 동생에게 딱이야. 경쟁심이 강하니까." 그렇게 칠판이 채워집니다. 둘은 완성된 선과 문과 글자와 계획을 응시합니다. 지켜졌으면 좋을 그림들입니다.

#7 이름없음 2018/07/04 16:31:47

"하지만 이불을 들고 와야 한다면." 새벽이 말을 흐립니다. 그들의 아파트는 학교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신선한 5월일지라도 그런 고행은 사람들의 눈을 너무 사로잡습니다. 칠판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며 빙빙 돌던 학생이 휴대전화를 높이 꺼내듭니다. "도움을 청하자. 여명 오빠한테 전화할게." "여명 형한테? 수업이 있을 시간이야." "내 부탁이면 수업도 빼고 와줄 거야." 학생이 표정에 신자 같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신호음이 들리더니 덜컥 남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쌤. 오늘 저희 좀 도와주세요." 여명은 학생의 과외 선생입니다. 새벽은 학생이 전화를 하는 모습을 단지 바라봅니다. "그래요. 오빠가 올 필요는 없고 저희가 그쪽으로 갈게요. 점심 때 갈 테니 뭐 좀 사주시고요. 좋아요. 다음 수업도 잘 부탁드려요." 예의 바른, 또한 거리를 벌리는 인사로 학생은 통화를 마칩니다. 새벽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함박 웃음을 짓습니다. "잘 됐어. 나가는 김에 밥먹고 장보고 오자. 여명 오빠도 파티에 참석시키고. 오후 4시에 운동장이 개방되니 그때 짐 가지고 들어오면 제격이겠네."

#8 이름없음 2018/07/04 16:33:56

새벽은 '장을 본다'는 말을 들으니 문득 무엇인가가, 생일잔치에서 빼놓아선 안 될 무엇인가가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선물이 없었구나. 마침 추격전이고 하니 운동화가 어떨까 싶은걸." 학생은 어느새 교탁 위에 올라가 다리를 가위질하듯이 흔들고 있습니다. 내려오기가 귀찮은지, 학생은 분필을 잡지 않고 대답합니다. "채택! 우리 동생과 이미지가 겹쳐. 달림으로써 마음의 구멍을 잊으려 드는 폭주열차지." "썩 나쁜 성격은 아닌 것 같네." "도넛의 구멍은 도넛일까?" "하루키구나. 네가 준 책 읽었어. 구멍 없이 도넛을 먹을 수 없다면 도넛이겠지." 새벽의 지식은 대부분 학생이 알려준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학생은 지루해졌는지 다리를 흔들기도 그만둡니다. 박자를 맞추는 짓조차 아주 지루할 때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멸망하면 좋겠다. 나는 타자이고 타자는 지옥이니까." 학생이 허공을 올려다봅니다. 꺼진 조명입니다. 학생은 조심스럽게, 쓸쓸해지지 않을 속도로 교탁 위에 눕습니다. 교실 뒤쪽으로 돌아눕습니다. 새벽은 시야를 낮춥니다. 자신보다 앞서 쓴 사람들이 흔적을 남긴 책상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더럽혀야만 흔적을 남길 수 있나 봅니다. 학생은 점심 때까지, 잠시 쉬자고 말합니다. 누운 채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작지만 확고한 발성입니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노래가 계속됩니다. 시작을 말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하나, 끝을 말하기 위해선 이 네 단어로 충분합니다. 새벽은 책상 위의 선들을 봅니다. 갑자기 슬퍼집니다. 이곳이 꿈인 줄을 알고 있으므로. 지금 자신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학생이 현실에서는 죽었음을 믿지 않지만 짐작하고 있으므로. 부정하지만 죽었음을 상정하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금요일에 사태가 발발했을 때, 자신이 학생을 놔두고 도주해버렸으므로. 새벽은 엎드립니다. 무릎 위의 담요는 전혀 흩뜨리지 않고. 학생은 새벽을 깨우지 않습니다. 두 팔을 짚어 교탁 위에 앉더니, 이번에는 칠판을 보고 노래를 거듭할 뿐입니다. 같은 곡조를 다른 가사로. 여명을 만나러 이 교실을 떠날 때까지. 이것은 필시 새벽의 꿈입니다.

#11 이름없음 2018/07/05 17:12:43

기억해주셔서,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이전에 본 적이 없으신 분도 참여해주셨던 분도 모두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독립기념일이라고 근처 산에서 불꽃놀이가 열렸는데, 취재 가야겠다 생각만 하고 기껏 밤이 되니 치안이 걱정되어 못 갔네요. 소설 내에서 생일잔치 때 불꽃놀이 장면을 적는 것으로라도 추후에 만족해야겠습니다.

#12 ◆k62Le3U7xRu 2018/07/05 17:13:42

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행복한 꿈에서라면 자는 것이 악몽보다도 두려운 일입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꿈은 뒤집힌 상자의 유리잔처럼 깨지는 일이 잦으니까요. 잠을 자도 사라지지 않는 세계라면 그것은 악몽입니다. 그런 까닭에, 눈꺼풀을 열었을 때 바깥 풍경처럼 학생이 있는 교실이 보이자, 새벽은 내심 기뻤습니다. 잠을 자지 않고 눈을 감고 있던 학생과 일어서 교실을 떠납니다. 아직 굳게 닫힌 교문 철창을 넘습니다. 목적지는 학교와 상점가가 있는 도시 서쪽입니다.

#13 ◆k62Le3U7xRu 2018/07/05 17:16:59

대학으로 가는 길에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교복을 입고 정오에 외출을 하고 있자니, 규칙을 어기고 있지 않음에도 영화 페리스의 해방에서와 같이 일탈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인파에 쓸려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새벽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말 그대로의 햇빛입니다. 하루동안 밤 속에서 불을 밝히며 견뎌왔던 새벽에게는 의미를 가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길이 분주합니다. 낮은 자신이 지기 전에 모든 일을 끝마치라고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것만 같습니다. 호손 효과가 처음 발견됐던 실험도 그랬지요. 빛이 강할수록 성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관찰될 때 더 성실해집니다. 새벽이 앞서 가는 학생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놀이동산에서 만날 때만 해도 여러모로 더 어려보이던 학생은 이제 새벽을 끌고 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를 잠시나마 잃자 한번도 뺏긴 적 없는 것처럼 슬퍼하던 그녀의 부모는 별거하고 있습니다. 서쪽으로 걸어가면 그림자는 옆으로 늘어집니다. 발치의 짧은 그림자를 꾸준히 보다, 새벽은 가끔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잔상을 하늘에 새깁니다. 학생은 심심할 때면 새벽에게 끝말잇기를 걸었다가, 발걸음이 빨라지면 멈추기를 거듭합니다.

#14 ◆k62Le3U7xRu 2018/07/05 17:18:01

둘은 대학의 정문을 지나갑니다. 자동차가 주차된 선 없는 공터를 둘이 지나갑니다. 여명은 학교 도서관 안에 있다고 합니다. 새벽이 걱정합니다. "전화를 하는 것은 꺼려지네." "들어가면 되지. 자주 드나들어 사서 직원과 아는 사이야. 나만 믿어." 학생에 끌려 새벽은 강제로 나무 그늘을 밟고 갑니다. 정문에서 학생이 사서에게 익숙한 듯 손을 들어 인사를 합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일행이에요." 새벽이 따라가려 합니다. 사서도 문을 열고 있으나, 학생은 장난스럽게 새벽을 밀칩니다. "아니에요. 나 혼자 찾아올 테니까 가만 있어." 학생이 열람실로 향합니다. 새벽은 멀뚱멀뚱 서있습니다. 점심시간이라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쪽으로 비켜섭니다. 사서 직원은 학생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이미 알고 있는지 수긍하는 표정으로 웃습니다. 학생과 여명이 곧 내려옵니다. 반대편 문으로 가고 있어, 새벽은 급히 건물을 반 바퀴 돌아갑니다. "아, 새벽이구나." "안녕하세요, 여명 형. 들었다시피 생일 파티에요." "주인공은 우리 둘 다 모르는 사람인가?" 여명이 자신과 새벽을 지시하며 학생에게 묻습니다. "제 동생이니, 오고가며 보았을지는 몰라도 사실상 초면이지요." 학생이 둘을 바라보며 뒤로 걷습니다. " 준비나 빨리 끝마치자고요. 식사가 먼저고, 생일 선물을 사면, 마지막으로 쌤 집에서 이불 좀 빌려와야해요." "이런. 오랜만에 기숙사에서 집으로 가는데, 가족들은 다 나가있을 시간대잖아." 여명이 한숨을 쉽니다. 가족을 등한시하는 자신이 미안한 듯합니다.

#15 ◆k62Le3U7xRu 2018/07/05 17:21:25

정오, 어느덧 그림자가 밟힐 것을 신경쓰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시간대가 되었으므로, 셋은 서둘러 점심 식사부터 하기로 합니다. 학생의 주도로 버거킹에 들어갑니다. 체면이 있는지라 여명이 지갑을 꺼냅니다. 여명부터 차례로 주문을 합니다. "와퍼. 단품으로요. 콜라도 됐어요." "불고기 와퍼요. 물론 세트에요." 학생이 끼어듭니다. "간단히 와퍼 세트로 주세요." 새벽이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일행이에요." "아니에요." "또 이러기야?" 새벽이 학생을 찌릅니다. 여명이 빨대를 뽑더니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감자튀김을 트레이에 쏟아 탁자 한복판에 모읍니다. 간단한, 식사 속도를 늦추기에는 충분한 잡담이 시작됩니다. 새벽과 학생이 정한 준비물을 여명이 읽습니다. 궁전, PNE 케이크, 폭죽, 이불, 그리고 운동화. 여명의 손가락이 종이를 가리킵니다. "다 좋은데, 이 PNE 케이크란 대체 뭐냐?" "Price not economic! 비싼 케이크요!" 학생이 곧장 답합니다. "왜 이렇게 줄임말을 쓰니. 물론 간결함은 통속적인 미덕이지만." 여명이 불평하더니, 학생의 동생에 대해 묻습니다. 학생은 뒷담화를 시작하려는지 힐끗 미소를 짓습니다.

#35 ◆k62Le3U7xRu 2018/07/13 15:46:12

새벽은 눈을 뜹니다. 꿈이 이어집니다. 눈앞에 초들이, 그 너머에 왕좌 위에 올라선 노을이 보입니다. 노을은 앞머리를 긁적이며 표정의 반을 가립니다. 채하가 빵칼을 꺼냅니다. 여명이 수저를 꺼내다 말합니다. "케이크를 자르려면 촛불을 꺼야겠지." "그래. 식사를 하려면 누군가 내려와야겠네." 둘은 동시에 위를 올려다봅니다. 노을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고도에서 내려가며 버리려는 모양입니다. 일어서더니 조심해서 단단한 책상을 찾아 발을 딛습니다. 채하와 새벽이 밑에서 기다리다 노을의 손을 잡고 내려오는 일을 거듭니다. "알아. 빨리 끄라는 거지." 노을이 손부채질을 하려는지 팔을 걷습니다. 채하가 만류합니다. "소원을 떠올리면서 불어." "이루지 않기 위해서나 소원을 비는 거지. 이룰 소원이면 안 빌어도 돼." 노을의 손을 붙잡고 있던 채하는 갑자기 웃음이 만연해져선, 뒤로 돌아가더니 노을의 등을 떠밉니다. "그래.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네. 빨리 불이나 끄고 케이크나 먹자." 등이 밀리자 반항심이 든 모양입니다. 노을은 교탁 양편에 손을 짚더니, 입바람으로 생일 초 6개를 끕니다. 양초만이 생일 잔치 현장을 밝힙니다. 촛불을 끄는 노을을 보며, 여명과 새벽과 채하는 희미하게 웃습니다. 그녀가 소원을 빌었을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36 ◆k62Le3U7xRu 2018/07/13 15:55:20

새벽이 케이크에 발을 담갔던 초를 꺼냅니다. 초는 뿌리를 잃습니다. 이들은 제 몸도 다 태워보지 못한 채, 이렇게 10분 남짓 타오르다 모조리 버려지는 운명이지요. 교탁 한구석에 생일초를 치우고, 새벽은 조심해 고구마 케이크를 여덟 조각으로 나눕니다. 노을은 새벽의 등 뒤에 서 케이크가 나뉘는 모습을 빤히 바라다봅니다. 노을의 시선에 민망해져 새벽은 서둘러 케이크 자르기를 마칩니다. 새벽과 노을을 남기고 여명과 채하가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 이불 밑에 숨었던 운동화와 폭죽 세트를 꺼내옵니다. 노을은 선물이란 티가 확 나는 운동화보다도, 아직 터지지 조차 않은 불꽃놀이에 더 흥미가 동한 모양입니다. "불꽃놀이야?" "그래. 학교는 우리가 세를 냈어. 하늘도 곧 세를 내줄게." 노을은 과장된 칭찬을 하는 대신 총총걸음으로 교탁 옆에 붙습니다. 플라스틱 숟가락을 들더니 케이크 한 조각을 한 움큼 떠먹습니다. 미소를 짓습니다. 불꽃놀이와 케이크에 대한 반응을 한 번에 하는 성싶습니다.

#37 ◆k62Le3U7xRu 2018/07/13 16:08:25

머지않아 넷은 식사를 마칩니다. 케이크가 사라집니다. 유일한 광원이던 양초 두 개가 점차 짧아집니다. 적은 수가 모인 자리에는 활기보다도 고요가 어울리는지, 넷 중 누구도 교실을 빛으로 시끄럽게 채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스위치는 방치됩니다. 노을은 책상 한 개를 이불에서 빼내 그 위에 걸터앉습니다. 여명과 채하는 폭죽을 나눠듭니다. 운동장에 폭죽을 설치하러 나간다고 합니다. 둘의 족음이 교실에서 복도로 빠져나갑니다. 새벽은 따라나서려다, 생일잔치의 주인공인 노을을 홀로 두기가 마음에 걸려 교실 안에서 미적댑니다. 봄의 저녁은 봄 같지가 않아 나갈 의욕이 줄어듭니다. 노을은 가만히, 고민에 잠긴 것처럼 턱을 괴고 꾸준히 앉아있습니다. 새벽을 고의로 무시하는 것처럼. 이런 어색함이 겸연쩍어 새벽은 이제야 교실 앞의 스위치를 떠올립니다. 대화 거리가 생기기를 바라며 교실의 불을 켭니다. 양초 두 개가 순식간에 빛을 잃습니다. 노을은 화들짝 놀라 잠시 눈을 가립니다. 실뚱머룩한 얼굴을 든 노을은, 이제야 칠판이 눈에 들어온 모양새입니다. 생일 잔치의 준비물과 순서가 보란듯이 적혀있습니다. 광원이 양초 두 개뿐일 때에는 미처 보이지 못했습니다. 고민 이외의 무엇인가에 이제야 감흥이 생겼나 봅니다. 노을이 일어섭니다. 칠판 쪽으로 향합니다. 새벽은 교실의 문 쪽에 기대어 서있습니다. "언니는 가끔 무섭다니까. 내가 이걸 못 알아볼 줄을 다 알아채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을은 칠판을 만집니다. 하얀 선으로 갈라진 좌우. 그리고 중앙의 위편에 그려진, 어울리지 않는 하얀 문. 손에 닿지 않는 것은 언제나 잃을 수 있습니다. 노을은 어떤 본뜻에서였는지, 위로 팔을 뻗습니다.

#38 ◆k62Le3U7xRu 2018/07/13 16:22:44

문 틈새로 저녁의 햇빛이 들어옵니다. 노을은 놀라 뒤로 물러섭니다. 아무리 거리를 두더라도 새로운 것의 신비는 가시지 않음에도. 새벽은 이곳이 꿈이므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음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놀란 채로 노을의 손끝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필로 그려졌을 하얀 문이 벌컥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풍경은, 새벽이 사춘기 특유의 결백함을 빌려, 결코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던 것입니다. "아는 곳이야." 새벽이 말합니다. 노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시겠지요. 저희 도시의 놀이동산이니." 침착한 노을의 답변에 새벽은 말문이 막힙니다. 의표입니다. 분주한 사람들, 시원스럽게 핀 튤립, 돌아가는 회전목마, 이들을 보자면 틀림없이 단순한 놀이공원일 뿐입니다. 새벽은 7년 전, 새벽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채하와 만났던 놀이공원을 자신도 모르는 중에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그곳이라는 보장이 없음에도. 비록 새벽의 꿈이라고 할지라도. 새벽이 칠판의 열린 문을 빤히 쳐다보자, 노을은 거리감을 두려는지 더욱 뒤로 물러섭니다. 새벽은 노을에겐 자신이 초면이니 이런 태도가 당연하다 여깁니다. 어제 보았던 활기찬 모습과는 다른, 완전히 가라앉은 모습이 어색할지라도 말입니다. "관심이 있으신가 봐요?" 노을이 빈정댑니다. "마치 발 뻗을 자리를 찾듯이 바라보시네요."

#39 ◆k62Le3U7xRu 2018/07/13 16:34:25

새벽은 대답도 겁도 없이 열린 문 뒤로 팔을 넣어봅니다. 새벽의 팔이 저녁 햇빛에 물듭니다. 공간이 이어져 있습니다. 다리를 내딛어보려 하자, 문은 칠판만큼이나 커지더니 생일잔치에 대해 쓰인 모든 글씨를 잡아먹고 맙니다. 노을은 문이 열렸을 때 놀랄 기력을 모두 소진했는지, 식은 얼굴로 조금씩 비꼽니다. "식후에 약 먹듯 떠나실 생각이에요?" "아직은." 새벽이 답합니다. "파티 주인공만 남기기 꺼려져. 그러니 폭죽 설치하러 운동장에 내려가지도 않았는걸." 노을은 머리를 오른쪽으로 기울입니다. 왼쪽 머리에 묶은 꽁지가 미끄러져 턱을 가립니다. "혼자 가기는 싫다는 건가요." "말이 그렇게 되네." 새벽은 수긍합니다. 노을이 촛불을 끄듯이 입바람을 붑니다. 물론 한숨입니다. "전 불꽃놀이 전에야 오면 되니, 목숨으로 딱지를 치듯 떠나보죠." 새벽은 채하가 말하던 노을의 성격을 떠올립니다. 절실한 소통을 위해 확실한 지식에 매달린다고 하였죠. 눈앞의 이치를 벗어난 장소에, 자신은 초면인 사람과 들어가는 상황은 그 묘사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어쩌면 생일은 하루 치의 희망을 품게 하는 날일까요. 내가 아는 것 너머에 나를 아는, 심지어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하던, 삼 일 이상 가지 않던 우리의 희망을.

#40 ◆k62Le3U7xRu 2018/07/13 16:47:54

새벽과 노을은 어쩌다 같은 길을 가게 된 사람처럼, 따로따로 저녁의 놀이공원으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분주하고 서로 다른 목적지를 지녔음에도 일사분란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제 하루를 놀이공원에 대피해 보냈으므로, 새벽은 몇 번 들렀던 놀이공원의 길을 나름 파악합니다. 그들이 걷고 있는 이곳은 관람차 앞에 펼쳐진 넓은 광장입니다. 눈앞에는 고개를 들어야만 눈에 다 들어오는 관람차가 수레바퀴처럼 서서히 돌고 있습니다. 행선지가 없는 새벽과 노을은 사람들의 길을 방해하지 않고자, 꼭 붙어 길 한복판으로 비켜섭니다. 마침 비어있던 벤치에 둘은 앉습니다. 관람차를 향하는 방향입니다. 그리고 새벽은, 아주 익숙한 장면을 발견합니다. 삼인칭 시점의 광경이 눈에 익었을 리야 없음에도. 유년기의 기억 대다수가 삼인칭으로 재구성됨을 생각하면, 시각은 의외로 눈만의 소유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10살 남짓되어 보이는 두 아이가 관람차에 오르는 줄에 서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시간이 쓰이는지 너무나도 명쾌한 광경입니다.

#87 ◆k62Le3U7xRu 2018/07/22 13:58:28

"뭐야. 채하잖아." 교실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새벽은 어디선가 들어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복도에서 한 번쯤은 사사로운 대화를 엿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채하가 교실 안으로 손을 흔듭니다. "사람을 태우러 왔어. 오늘 안으로 캠프파이어를 할 거거든." "뒤에는 누구야?" 새벽의 선배로 보이는 학생이 짖궂게 묻습니다. 새벽은 교실 안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앞문과 뒷문이 책상과 의자로 막혀있습니다. 사람은 총 다섯입니다. 네 명은 이 학교의 교복을, 다른 한 명은 옆 중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습니다. 노을이 다니는 그 중학교입니다. 새벽은 이들이 좀비 사태 와중에도, 어떻게든 은신처를 만들었구나 싶습니다. "대단하네. 어떻게 안전지역을 확보했어?" "채하 덕분이지." 처음에 채하를 알아보았던 그 학생이 답합니다. "난 편의점에 있다가 사람들을 피해 교문 앞까지 도망쳤거든?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집어들더라고. 참나, 하늘을 나는 채하였지. 그대로 1반 교실에 잡혀왔어." 새벽은 말을 잃습니다. 채하의 목덜미를 바라봅니다. 채하가 작게 웃습니다. "내가 만든 안전구역이야. 나 혼자 말 없이 도망갈 수는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안전한지 확인하고 이 학교를 떴지."

#88 ◆k62Le3U7xRu 2018/07/22 14:08:55

편의점에서 왔다던 학생은 채하와 일면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새벽이 학생의 이름을 묻습니다. "설기. 뭐, 올해 와서는 등교도 안 했지만." 출석부의 깨끗하던 이름입니다. 아마도 가출을 해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지요. 설기는 새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봅니다. 작년 운동회 때 같은 팀에 속했던 것도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얼굴만 알고 지내던 사이가 대학에서 유일하게 아는 지인이 되었다고 하여 친밀해지지는 않듯이, 그들은 서로 데면데면해하다가 눈을 피합니다. "여하튼, 우리와 갈 사람이 필요해. 자청해봐." 채하가 롤러코스터를 위 아래로 흔들며 자원자를 받습니다. 선배 같은 학생이 되묻습니다. "우리를 어디로 보내려고?" "놀이동산. 경찰들과 기술자들이 살고 있어. 식량도 넘치고 게다가 내가 살고 있지!" 새벽은 채하가 아직 놀이공원에 입주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핀잔을 주려다가 맙니다. 교실에서 적대감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별로. 꼭 데려가야 한다면 저 둘이나 데려가." 새벽이 작년에 같은 반이던 동급생이 설기와, 그와 함께 있는 남중생을 가리킵니다. 지금 보니, 이 학교 학생인 셋은 한편에 뭉친 한편, 설기와 남중생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채하는 배에서 배로 건너가는 병사처럼, 몸은 롤러코스터에 둔 채 창턱에 팔을 굅니다. 둘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남중생의 이름을 묻습니다. "연화에요. 설연화." 남중생은 머리 속에서 순서가 꼬였는지, 우선은 말을 뱉고 그 다음에 몸을 떱니다. 설기가 남중생의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그를 안심시키는 데에 도가 튼 모양새입니다. "이름이 별 거야. 이름 들킨다고 해서 죽지는 않거든."

#89 ◆k62Le3U7xRu 2018/07/22 14:21:26

새벽은 구출되던 당시 학교에 들러 외쳤던 문장들을 되짚습니다. 내일 다시 구출작전을 펼치겠다고 알렸지요. 그 말을 이들이 들었을까요? 설기는 고개를 도리질합니다. "좀비들은 너무 시끄럽게 굴잖아. 사람 소리가 안 들릴 만큼이나." 들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 선언이 헛되었나, 약간 씁쓸해하던 새벽에게 채하가 조용히 말합니다. "걱정마. 내일 구출작업이 있을 테니까." 평소처럼 자신만만해하고 있습니다. 기차가 다음 역에 멈출 것이 당연하다 말하는 승무원 같습니다. 새벽이 대하던 채하는 항상 이런 태도를 견지했지요. 새벽은 달라지지 않은 무엇인가에 종류를 알 수 없을 안심을 느낍니다. 채하는 이미 갈 사람이 둘로 정해졌다는지, 벌써 롤러코스터를 창가에 주차하고 있습니다. 설기가 망설입니다. "저기, 내가 꼭 가야 해?" 하긴, 둘이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세 명이었지요. 새벽이 연화에게 말을 겁니다. "시설 꽤 좋아. 뭐가 무서운 거야?" "대화를 시작하고 3분도 안 되어 끌려가는 조급함이요." "아참." 사실입니다. "참. 그러고 보니, 둘이 아는 사람이 놀이공원에 있었구나." 채하가 중얼거립니다. 설기도 연화도 그 말을 놓치지 않습니다. "누구야? 너라고 하면 화낸다." "일단, 네 오빠." 채하가 설기에게 말합니다. 새벽은 민기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민기의 여동생은 가출을 해, 학교 외에는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고등학교로 차를 몰았다고요. 채하는 연화에게 고개를 돌립니다. "네 친구도 한 명 있어." 들떠있던 연화는 순식간에 표정이 식습니다. 설기가 그랬듯이, 자신의 가족이 있기를 바랐겠지요. 설기가 연화의 두 손을 포개 잡고 쓰다듬습니다.

#90 ◆k62Le3U7xRu 2018/07/22 14:24:43

"...가죠." 연화가 설기에게 떨어진 옷을 건네듯 나긋하게 말을 냅니다. 설기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궁상은 안 떨어? 날 보고 싶었다거나." "잔뜩 그랬어." 채하가 직접 민기를 본 적도 없으면서 즉답하는 것을, 새벽은 또다시 넘깁니다. "그럼 보러 가야겠다. 연화야, 조심해서 올라타." "저도 알아요." 넷이 롤러코스터에 줄줄이 앉았습니다. 남은 셋은 교실에서 운동장을 내려다 봅니다. "완전히 비었구나." 한 명이 말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지." 새벽의 동급생이 주저합니다. 채하는 공중으로 치솟기 직전, 사람 두 명의 자리를 채운다는 듯 문장 둘을 던집니다. "식당에라도 서둘러 가봐. 너희 식량 떨어졌잖아." 넷이 탄 쇳덩이가 밤하늘로 치솟습니다. 행선지는 놀이공원입니다.

#91 ◆k62Le3U7xRu 2018/07/22 14:44:41

튤립이 없는 튤립공원 상공에 조심스럽게 롤러코스터가 접근합니다. 속도감에 익숙하지 않은지 얼굴에 거의 핏기가 가신 연화를 설기가 어르고 달래고 있습니다. 연화는 괜히 반발하지 않습니다. 어리광을 피울 상대란 나이차가 큰 형제자매뿐이고, 형제자매에겐 반발해보았자 최소한의 만족감도 느낄 수 없으니까요. "어떻게 날아다니는 건지, 신기하기도 해라." 설기가 이전의 새벽과 비슷한 말을 합니다. 채하가 냉정하게 비꼽니다. "언제는 엘리베이터 원리를 알고 탔어?" 그새에 롤러코스터가 속도를 줄이며, 겨우 멈춰 뭉쳐있던 모래를 공중으로 흩뿌리며 흙더미 위에 착륙합니다. 민기가 쉬고 있는 남자 숙소는 범퍼카와 회전목마 사이에 있습니다. 일행 넷은 관람차를 관통해 로터리를 지납니다. 관람차의 문은 닫힐 것이 두려운지 조심해서 턱이 괴여 열려있습니다. 민기의 숙소 번호를 그들은 모릅니다. 새벽이 직원 숙소 1호의 문을 두드립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이 나옵니다. 번갈아서 순찰을 돌고 있으니, 아직 잠에 빠지지 못한 사람이 하나쯤은 있었겠지요. "민기 형 숙소 좀 알고 싶어서요." "옆에 옆이야." 나온 남성은 눈을 반쯤 감고 말합니다. 그러더니 1초 정도, 눈을 번쩍 떴다가 감습니다. 놀람이 지나갑니다. "너 분명 납치됐다며." "리저렉션." 옆에 숨어있던 채하가 중얼댑니다. 남자가 천천히 쓰러집니다. 새벽이 문을 닫습니다. "왜 리저렉션이 기절시키는 주문이야. 근본 없어." "시끄러워." 설기의 참견에 채하가 노골적으로 귀를 막습니다.

#92 ◆k62Le3U7xRu 2018/07/22 14:53:11

새벽이 문을 두드립니다. 누구야, 하는 민기의 발음이 거진 뭉개집니다. 그러나 문을 연 민기의 얼굴은 거의 생생합니다. 저녁 동안에 잠을 잔 덕분인가 봅니다. "어라. 너 새벽 아냐." "민기 형. 돌아왔어요." 민기는 문에 걸었던 체인을 풉니다. 손잡이를 다시 잡은 민기는 주위를 살핍니다. "그 말은 곧." "마녀도 왔죠." 채하가 새벽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순간, 어둠속에서 무엇인가 번쩍입니다. 일행이 동시에 뒤로 물러섭니다. 민기가 식칼을 꺼내들었습니다. 문짝을 방패로 몸을 숨깁니다. "나머지는 누구야?" "나야. 바보 오빠 같으니." 설기가 투덜대며 앞으로 걸어나옵니다. 연화가 만류하려 들지만, 설기는 겁도 없이 민기의 손을 잡더니 칼을 떨어트립니다. 땅에 박힌 칼을 설기는 들더니 벽 저편으로 밀어버립니다. "마녀가 칼에 죽으면, 어? 천사도 칼에 맞아 죽겠네, 응?" "아는 사람이야?" 마녀를 알고 있냐니, 이상한 질문이지만 설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새벽이 대답을 대신합니다. "노을이의 언니에요." 민기는 태엽을 감아도 돌아가지 않는 시계를 보듯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마녀모자를 쓴 채하를 지켜보더니, 간단히 단언합니다. "그러면 네가 채하구나." "...네?" 채하가 당황합니다.

#93 ◆k62Le3U7xRu 2018/07/22 15:03:20

새벽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노을이 언니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던가요? 노을은 최대한 자신의 정보를 숨기려 들었습니다. 게다가 민기는 노을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거리를 벌리곤 했습니다. "어떻게 알았어요?" 채하가 발작하듯이 캐묻습니다. "삼 년 전까지 너희 아파트에 살았거든." 새벽과 여명을 구출하던 때 민기가 말했지요. 그가 말을 계속합니다. "너희 옆집이었어." "지금의 제 집이네요." 새벽이 말합니다. 새벽은 삼 년 전 그 아파트로 이사를 와 채하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노을은 보지 못했지요. "너희 자매가 둘 다 그 아파트에 있던 때에 바로 옆집에 있었으니, 당시에 있던 소동 덕에 너희 이름은 알게 됐어." "그럼." 채하가 망설입니다. "노을이에게 적대적이었던 것도?" 새벽이 장단을 맞춥니다. "아는 사람이 예언자를 표방해봐라. 웃기지 않겠어? 골려줄 요량으로, 가명을 부탁할 때 실명을 말해줬지. 보니 나이가 어린 쪽이다 싶었지만 이름이 노을인지 채하인지 헷갈려 두 이름 다 제안했어. 놀라더니 자기를 노을이라 부르라 하더군. 그러면 뻔하지. 넌 남은 쪽이니 채하야." 민기의 장광설을 채하는 얌전히 듣습니다. 마녀 모자를 꼭 눌러 씁니다. "...아하. 그랬군요." "보아하니 동생 덕분에 비밀이 털렸네." 설기가 키득키득 웃습니다. 채하는 곤란도 기쁨처럼 잠시 오고 가는 것이란 듯이, 태연하게 민기에게 길을 묻습니다. "저희는 입주자이니 등록을 해야겠죠. 안내를 하세요." "명령조라니. 너희 자매는 참. 하나가 예언가일 때는 웃기다 생각했는데 다른 쪽은 아예 마녀일 줄이야." 민기가 팔짱을 끼고 채하를 곁눈질하다가, 설기와 그 옆의 남중생이 눈에 밟히는지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94 ◆k62Le3U7xRu 2018/07/22 15:11:36

일행이 다섯이 되었습니다. 다섯 명은 졸래졸래 본부인 기념품 가게로 몰려갑니다. 어떻게 다섯마저도, 이런 무질서함을 연출할 수 있을까요. 채하와 민기가 자꾸 선두를 경쟁합니다. "길을 안내해달라더니." "잘못된 길을 갈 때 잡아달라고요. 동생이나 챙겨요. 걱정도 안 돼요?" 채하의 질책이 옳았으므로, 민기는 설기를 따라 뒤쳐집니다. 설기는 칼부림과 자신이 모르던 이야기에 혼이 나간 연화를 또 다시 어르고 있습니다. 어른의 어원이 된 얼우다와 어르다는, 받침대 하나만큼의 차이밖에 지니지 않습니다. 민기가 설기더러 다치지는 않았냐고 난리를 피우고, 설기는 설기대로 민기를 피하며 동선이 뒤죽박죽이 됩니다. 옳은 길을 향하는지 확인할 유일한 감독역을 맡은 새벽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 해보지만, 채하는 한 번도 길을 잃지 않고 기념품 가게까지 다다릅니다. 평상시에 다녀봤던 길이, 좀비 사태가 발발했다고 하여 미로가 되지는 않으니까요. 마침 본부에는, 호연이 노을과의 산보를 마치고 본부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노을은 일찌감치 관람차로 배웅해준 뒤였습니다. 풍경이 딸랑거리자 호연과 서장이 경계 태세를 취합니다.

#95 ◆k62Le3U7xRu 2018/07/23 14:28:48

기껏 선두를 잡았던 채하는, 층계를 오를 때 쯤에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늑장을 부르고 있습니다. 민기와 설기, 연화가 둘을 추월해 들어갑니다. "새로운 사람 합류했어. 우리 동생이랑 지인이야." 민기가 호연과 서장을 부릅니다. 설기와 연화가 총총거리며 들어옵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호연이 손을 들어 반갑다는 의사를 표하려 들 때, 새벽이 들어옵니다. "다녀왔습니다." 새벽이 졸린 음성을 내뱉습니다. "좀 웃으면서 인사해라." "학교에선 안 저랬는데." 민기와 설기가 핀잔을 줍니다. "이쪽 의자에 앉으세요." "잘 왔어!" 호연이 새벽을 반깁니다. 서장은 의문 나는 데가 있나 봅니다. "자네 납치 당하지 않았던가?" "아참, 그랬지! 돌아온 거야?" 호연이 서장의 말을 듣고서야 호들갑을 떱니다 이번에는 마녀 모자를 젖힌 채하가 한껏 꾸민 맵시로 들어옵니다. "저도 왔어요." "이쪽에 앉으시면 돼요." 연화가 내민 의자 쪽으로 채하가 동선을 바꿉니다. "덜렁이." "모자 좀 벗어라." 설기와 민기는 이번에도 채하를 놀립니다. "좀 쉬어." "그래, 편히 쉬다 가." 호연이 새벽의 말에 맞장구를 칩니다. "잠깐, 자네는 그 마녀잖아?" "아참, 그랬지! 정체를 밝혀요!" 서장보다 한 박자 느린 호연입니다.

#96 ◆k62Le3U7xRu 2018/07/23 14:37:09

소동이 일단락됩니다. 채하는 호연 앞에 서 수갑을 찬 두 손을 내밉니다. "어서 풀어줘. 난 경찰이 믿을 만한 사람이야." "노을이 언니에요." 새벽이 말합니다. 호연은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냅니다. "노을이라면 믿을 수 있지." 기어코 채하의 수갑이 풀립니다. 채하는 털레털레 자리로 돌아갑니다. "소개가 필요한 시간 같은걸." 호연이 분위기를 잡습니다. 민기가 선수를 칩니다. "여기 얘는 내 동생이고." "얘도 제 동생이에요." 설기가 연화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뭐?" 민기가 당황합니다. "왜 그래, 오빠?" "형, 왜 그래요?" 연화가 설기의 장단에 맞춥니다. 민기가 할 수 없이 따릅니다.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죠." "우리 동생 똘똘해라." 설기가 연화와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앞장서 양측의 민기와 연화와 어깨동무를 합니다. 키 차이가 크게 나는 삼중 어깨동무가 완성됩니다. 채하가 풀린 한 손을 갈비 앞으로 갖다댑니다. 호연이 입을 열려던 채하를 만류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지 못하니까. 새벽, 너 데려갔던 저 사람은 누구야?" 새벽은 잠자코 고민합니다. "나쁜 사람인 줄 알았지만 노을이의 언니였고 제 친구였던데다가 민기의 가족도 구했던, 알고 보니 영 나쁘지만은 않은 마녀?" "그건 뭐야." 채하가 불평합니다.

#97 ◆k62Le3U7xRu 2018/07/23 14:43:07

서장이 빙그레 미소를 짓습니다. 호연을 바라다 봅니다. "그거야,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지 않나?" "네?" "얼핏 봐선 나쁜 줄 알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던 사람." "동생?" 민기가 답합니다. "오빠?" 설기가 답합니다. "누나." 연화가 답합니다. 호연은 셋의 답을 모두 피합니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민이군요." "경찰은 시민을 위해 존재해." 자기소개의 마지막은 이름을 밝히며 끝납니다. 연화와 설기, 채하의 이름이 공개되자 호연이 옆자리 앉았던 민기의 옆구리를 콩콩 찌릅니다. "내가 길거리 취객이냐." "들었어? 채하래." "들었지." "네가 차에서 말했던 이름이잖아." "그 아파트 주민이랬지? 삼 년 전이지만 봤던 사이야." "삼 년이면 얼굴 많이 바뀌었을 텐데." "노을은 알아봤거든. 알고서 실명을 말한 거야." "짖궂구나." "못됐어." 설기가 한 마디 보탭니다. "풀이 죽었을 노을이의 심정을 생각해보라고요." 채하가 다섯 마디를 보탭니다. "진짜 못됐어." 설기가 두 마디를 더 보탭니다. 민기가 말립니다. "그만해라. 두 손 든다."

#98 ◆k62Le3U7xRu 2018/07/23 14:58:04

서로가 누구였는지 털어놓았으므로, 무엇이 되어갈지 논의해볼 시간입니다. "우선 숙소를 배정하세. 내일 아침이면 호연이 찾아가 할 일을 알려줄걸세." 서장이 뜸을 들이더니 머리를 긁적입니다. "이 도시 시민이라면 놀이공원은 와봤을 테니, 길 안내는 필요도 없겠군. 종말 상황의 대피처가 익숙한 곳이라니, 좋지 않나." "종말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죠." 설기가 몸을 좌우로 흔듭니다. "둘로 나누어야겠지? 채하 양과 나머지 셋으로." "왜죠?" 민기가 되묻습니다. "가족끼리 있어야 편하잖아요." 연화가 고민도 않고 말합니다. "역시 우리 동생, 똘똘하네." 설기가 다시 연화와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민기가 끙 앓습니다. 현재 호연의 숙소인 본부 앞 게임센터에는 채하가, 사무소에는 민기와 설기, 연화가 배정됩니다. 민기는 짐을 빼게 생겠다며 꿍얼거립니다. "밤이 늦었으니 가세나." 서장이 벌떡 일어섭니다. "잠깐만요. 캠프파이어에 대해 할 말이 있어요." 채하가 가로막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그 주제에 대해 노을과 말해왔던 새벽과 호연, 민기가 일시에 채하를 바라다봅니다. "동생이 제안한 것 말인가? 그보다 그런 것도 알고 있군. 도청장치라도 심어놓았나?" 서장이 허털웃음을 짓습니다. "들으셨을 텐데요. 전 근방의 좀비를 없앨 수 있어요. 안전 문제는 확실히 보장되죠." 서장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다른 사람들을 둘러봅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 힘들었을 테니 쉬러 가게." 엉거주춤 일어섰던 사람들이 기념품 가게를 빠져나갑니다. 그때 채하가 사람들을 부릅니다.

#99 ◆k62Le3U7xRu 2018/07/23 15:32:42

"저기요, 궁금증을 채워도 될까요?" "뭔데?" 태도가 유해진 호연이 관심을 보입니다. "저희 동생, 노을이에 대해 여기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호연과 민기, 새벽이 곰곰이 생각합니다. "죽이 잘 맞고 좋지." 호연이 답합니다. "의심스럽기야 하지만, 노을이라서가 아니라 연기를 해서 그런 거야." 민기가 답합니다. "수상쩍어도 대화하다보면 즐거워." 새벽이 답합니다. 채하는 나름 수긍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궁금했거든요. 그럼 다들 잘 자요." 츄러스 천막으로 돌아가려던 길, 연화가 새벽을 붙잡습니다. "어, 노을이랑 잘 아시던 것 같아서요." "참. 혹시 네 친구야?" 새벽이 관심을 보입니다. 채하가 말하기를, 연화의 친구가 이곳에 있다고 했지요. 마침 노을과 연화는 동갑입니다. "맞아요. 듣자하니 제가 알던 모습과 다른 것 같아서요." "...다르겠지." 새벽은 꿈에서 보았던, 좀비 사태 이전의 노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채하에 따르면 완벽을 추구한다 하였고, 정이 없어 보이기도 하였지요. 놀이공원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영 다릅니다.

#100 ◆k62Le3U7xRu 2018/07/23 15:41:27

"네가 아는 모습은 어땠는데?" "작년 반장이었어요." "아, 그 느낌이었어." 새벽은 음악실에서 처음 봤던 노을의 모습을 묘사할 한 단어를 비로소 찾습니다. 새벽이 노을과 면식이 있는지 모르던 연화는, 그런가 보다 하고 말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초등학생 때도 알았거든요. 그때는 또 달랐어요." "어땠으면 그런 말을 다 해?" "조숙했어요. 어릴 때는 키가 엄청 컸어요. 그러다가 거의 안 자라게 됐죠." "그게 끝?" "성격도 딴판이었죠. 지금은 모든 과목에도 운동에도 최소한의 선이 있다는 듯 최선을 다하지만, 그때만 해도, 지금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느낌을 풍기고 다녔거든요." "언제가 기점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요. 여름방학 이후로 사람이 변했더라고요. 그런데 여러분이 말하는 노을이는, 마치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해서요." 새벽은 고민합니다. 무엇인가를 더 잘하기 위해 애쓰던 노력을, 지금은 예지몽을 믿고 신비를 연출하는 데에 쓰는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이전과 비슷함에도, 어떤 단절이 있었던 것만 같습니다.

#101 ◆k62Le3U7xRu 2018/07/23 15:48:44

"으음. 뭐야, 뭐 하는 거야?" 설기가 연화를 뒤에서 붙듭니다. "노을이에 대해 뒷담화하던 거야?" 호연이 끼어듭니다. "그런 것 아니에요." 새벽이 부정합니다. "앞으로 그럴 때는 나를 꼭 끼워주도록!" "노을이에게 이를 거에요." 새벽이 놀리듯 말합니다. 실책입니다. "그래. 어서 노을이를 찾아가." 기회를 잡은 설기가 장난을 칩니다. "대화하다보면 즐겁다며." 호연이 새벽의 말을 따라합니다. "수상쩍어도 찾아가고 싶을 만큼 말이야." 설기가 논조를 더합니다. 남을 놀리는 데에 특화된 남매입니다. "참. 연화야, 저 넥타이 많이 안 봤니?" "아. 저희 학교 넥타이네요. 그런데 제 것보다 짧아요. 뭘까요." 호연의 물음에 연화가 의문스러워 합니다. 그러더니 새벽을 빤히 바라봅니다. 새벽이 부담스러운지 눈을 감습니다. "저 자러 가요. 그만 놀리세요." "선물 받은 모자 쓰고 다녀. 노을이가 화내더라." "세상에. 선물까지 받았어?" "어디까지 선물로 받으려고요?" 연화마저 동참합니다. 새벽은 자기 편이 없다고 한숨을 쉬며,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뒤로 합니다.

#102 ◆k62Le3U7xRu 2018/07/24 15:59:12

점차, 설기의 입가에 걸려있던 냉소가 커피를 홀짝이듯이 사라집니다. "옛날엔 생각 없이 잘만 놀렸는데, 이젠 좀 힘들구나." "늙은 거야." 호연이 말하더니, 채하의 잠자리를 마련하려 먼저 게임 센터로 향합니다. 설기와 연화가 앞서가던 민기를 따라 사무실로 발걸음을 서두릅니다. 새벽은 바깥에서 본 츄러스 천막이 약간 기울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고속으로 날아다니다 보니 직선과 곡선이 두루뭉실해진 것일까요. 새벽은 자신의 눈을 탓하며 안으로 들어갑니다. 밀가루 포대가 웬일인지 한가운데까지 옮겨져 있고, 자신의 소지품은 흩어져 있습니다. 눈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집니다. 여명은 자고 있습니다. 여명이 멀쩡하다면 다른 문제는 없겠지요. 새벽은 마음을 놓습니다. 그떄 누군가가, 얼마 전에 다녀온 침입자와는 영 다르게 천막을 푹푹 두드립니다. 노크인 모양입니다.

#103 ◆k62Le3U7xRu 2018/07/24 16:08:56

새벽이 천막을 젖힙니다. 털털 바퀴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다름 아닌 끌차를 밀고 온 설기입니다. "누구 실어가려고?" "호연 언니가 말하기를, 밀가루가 있더더라고?" 새벽은 뒤를 돌아봅니다. 누구 짓인지, 방 한가운데데 보란듯이 내놓아져 있군요. "밀가루는 무슨 일이야?" "내일 츄러스를 해먹기로 했어. 분위기만 봐서는 캠프파이어가 성사될 기운이 들거든." 그러더니 머리를 긁적입니다. 괴로움 없이도 표정이 지어집니다. "안 된다 해도 나쁠 건 없잖아? 캠프파이어를 하든 안 하든, 단 걸 먹으며 기운을 차리자." 새벽과 설기가 힘을 합쳐 밀가루 포대를 끌차 위에 올립니다. 설기가 끌차를 뒤로 돌립니다. 둘은 손을 내보입니다. 말 없이 작별을, 푹 잘 것을, 재회를 인사합니다.

#104 ◆k62Le3U7xRu 2018/07/24 16:18:55

천막이 폐쇄됩니다. 새벽이 바닥을 더듬으며, 여명을 피하며 자신의 요를 찾아 집어듭니다. 지폐처럼 바스락거립니다. 분수대에 던져지는 동전처럼 새벽은 바닥 위에 푹 고꾸라집니다. 그러나 새벽의 숙면을 소음이 가로막습니다. 민기의 음성입니다. "야밤중에 왜 이리 멀리 왔어?" "낮에는 멀리 못 가잖아." "말 돌리지 마. 위험하게 혼자 돌아다니고 그래?" "뭐가 걱정이야. 평소에도 이러고 다녔어." 새벽은 설기가 가출했었음을 떠올립니다. "밤의 살기에 옷을 껴입고, 옷 벗기려는 사람들한테 맞서 살에 멍 입히면서 버텼거든." "이게 꼭 한 마디를 안 지지." "한 마디 져주면 너무 기고만장해지는 바보가 있거든." "그러고 보니 너 다친 거야? 약부터 바르자." "남한테 보이지도 않는데 뭐가 문제야. 걷는 데 문제 없거든." 민기와 설기가 한동안 말다툼을 하며 천천히 천막에서 멀어집니다. 다시 조용해지자 새벽은 뒤척입니다.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자 여명이 앉아있었습니다. 새벽은 깜짝 놀랍니다. "나쁜 꿈을 꿨어." 여명이 말합니다. 어둠에 가려 그의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새벽은 여명에게 보이지 않을 입을, 역시나 열지 않습니다. "끝까지 널 옆에서 도울게. 넌 내 동생이고 제자니까." 새벽은 연두처럼 연하게, 고맙다고 말합니다. 여명이 쓰러지더니 등을 돌리고 눕습니다. 새벽은 한동안 정면을, 천으로 막힌 하늘을 바라다봅니다. 여느 때와 같이, 지키지 못할 약속만이 난무하는 밤입니다.

#105 이름없음 2018/07/24 16:28:00

오후 내내 논문을 들여다봤더니 눈이 못 버티겠네요. 오늘 글은 여기까지. 어림하여, 지금까지의 분량이 원고지 200매를 넘겼습니다. 외전을 빼고 전체의 삼 분의 일 가량 복구했다고 생각하니, 아직 원고지 400+a매가 남은 셈이네요. 가능한 한 간결하게 적으려 했는데, 600매면 작은 판본으로 300페이지 책이 나올 분량이었죠. 갈 길이 멀다 싶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173 ◆k62Le3U7xRu 2018/08/03 13:00:11

가장 가까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여명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립니다. 새벽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오더니 팔을 붙잡습니다. 범퍼카 근처의 남자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주위를 둘러싸던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놀이공원 각지로 퍼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새벽의 발걸음은 늦추어져야 했습니다. 연화가 새벽을 불러세웁니다. 새벽이 자동차 쪽을 봅니다. 간이 침대 위에서 노을이 일어서 있습니다. 현기증이 심한지 머리를 부여잡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야?" 일어나니 캠프파이어는 사라져 있고 언니는 쓰러진데다가 산불이 북소리처럼 다가오고 있으니 그런 질문을 할 법도 하겠지요. 하루가 통째로 날아갔음을 알리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하지만 사태를 정리하기가 급합니다. 연화와 설기가 피로해하는 노을을 보듬는 동안, 새벽은 사람들을 깨우러 여명과 민기를 뒤쫓아 달립니다. 상당한 거리를 달음박질치다보니 사람은 단순히 즐기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자연스레 원망이 들고 맙니다. 페인트로 칠해진 철제 구조물들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불길 덕분에 이들은 환하지만 머지 않아 폐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우구스틴을 기리며 분수 위에 세워졌으나, 나치에 의해 철거되어 군수물자가 되어버렸던 동상처럼, 행복하지 않은 왕자가 되고 말겠지요. 여기서 탈출해야 합니다. 연기가 밀려오기 전에 서둘러야 합니다. 서장이 급히 수를 셉니다. 놀이공원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수의 머리가 모였습니다. 제일 처음 모였던 경찰들은 최대한 물자를 챙겼습니다. 그러나 놀이공원에 남긴 상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울타리로 보호되던, 음식과 물이 풍족하던 넓은 땅을 버릴 때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세계의 종말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완결로서 부족한 데가 없습니다.

#174 ◆k62Le3U7xRu 2018/08/03 13:09:12

차량 열 대를 모두 동원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지체할 수 없습니다. 차량에 사람들이 차오르고, 열쇠가 시동을 켜기 위해 돌아갑니다. 호연과 노을이 의식을 잃고 쓰려져있던 채하를 부축해 차에 태웁니다. 호연이 운전대를 잡고, 여명이 조수석에, 새벽과 채하와 노을이 뒷좌석에 탑니다. 창문처럼 문이 닫힙니다. 철창이 열립니다. 차량들이 놀이공원을 줄줄이 빠져나갑니다. 새벽이 탄 차, 팔라다는 헤드라이트가 깨져버렸으나 불길이 타오르는 이 현장에선 더 적은 빛이면 모를까, 더 많은 빛은 필요 없습니다. 내려가던 중에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놀랍니다. 최근에는 구름이 바다의 포말보다도 적던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었으니까요. 호연이 운전대를 꼭 잡습니다. 불길이 꺼지는 효과가 일부 있겠으나, 기름으로 시작된 불인 이상 어떻게 될지 감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검은 연기가 거미줄에 몰려드는 죄인들의 손 같습니다. 차량들은 거미줄 위의 이슬처럼 나란히 굽은 산길을 내려갑니다. 마침내 산을 빠져 나왔습니다. 앞장인 차에 탄 서장이 창문을 열어 뒤에 소리를 지릅니다. 명령이 하달됩니다. 목적지는 고등학교입니다. 호연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인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안전거리를 유지합니다. 유원지에서 빠져나가기 직전, 서장에게 학교에 좀비가 없어져 안전했음을 보고한 참이었으니까요. 산을 빠져나왔다면 불을 쳐다볼 차례입니다. 거대한 모닥불입니다. 어제 미봉되었던 캠프파이어가 되살아난 것만 같습니다. 비 때문인지 불이 서서히 소화됩니다. 검은 연기가 정체됩니다. 좀비는 불에 뛰어드는 습성을 지녔었으니, 저런 큰 불이라면 근방의 좀비들이 모두 몰려들었을 것임이 틀림 없습니다. 위장에 들어간 것처럼 모두 타버리고 말았겠지요. 엎질러진 납골당에서와 같이 뼛가루가 가득하겠지요. 산불이 양초라도 되는 것처럼 새벽은 잔잔히 합장을 합니다. 모래 같아진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자신의 부모님도, 노을의 부모님도, 여명의 동생도 저 안에 있을지 모릅니다. 덩어리가 아닌 뼈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뼈로 지탱하려 들었던 인생은 어떤 꼴이 되고 마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격려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대로 등을 돌리면 되는 것일까요. 새벽은 자는 것처럼 엎드립니다. 울음을 터뜨리기 위해서입니다.

#175 ◆k62Le3U7xRu 2018/08/03 13:18:19

차 안의 사람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량 행렬은 도로에 안전히 진입합니다. 호연은 근처에 몰려든 좀비가 한 구도 없음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주민이던 사람은 이 차 열 대에만 남은 것일까요. 그리 생각하니 쓸쓸해집니다. 백미러로 실내를 흘낏 봅니다. 새벽을 그대로 놓아둡니다. 노을과 채하, 새벽, 그리고 여명이라. 이런 배치라면 자신은 짝을 잃은 떡잎처럼 고독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절 외롭게 만드는 조합이네요." "왜 그래, 경찰 씨?" 노을이 호연을 걱정합니다. 자신의 말이 심한 무게로 느껴졌을까 걱정되어, 호연은 과장되게 부정의 표시를 취합니다. "다들 형제자매인데 나만 혼자니까. 우리 동생 데리고 올걸." 호연의 대학생인 동생은 죽었고, 늦둥이인 아기는 연화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뒤따라오는 차에 있습니다. 학교에 도착해서야 동생을 다시 안을 수 있겠지요. "틀렸어요." 노을도 새벽도 여명도 아닌 목소리가 들립니다. 채하입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지는 않았나 봅니다. 잠꼬대입니다. 호들갑스럽게 놀라 상체를 들었던 새벽은, 서둘러 자신의 눈물자국을 뭉갭니다. 노을은 몸을 동그랗게 맙니다. "많이 졸려." 유언을 내뱉는 것처럼 힘없습니다. 노을이 잠듭니다. 하루 동안 먹은 것이 없으니 힘이 완전히 빠져버렸나 봅니다. 식음을 거의 전폐했던 것은 새벽도 매한가지입니다. 새벽도 눈을 감습니다. 강 너머에서와 같이 몽롱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역시 쓸쓸하네요." 여명이 가로등을 보며 말합니다. 꺼져있습니다. 모아놨던 태양광 에너지가 다 떨어졌을 시간입니다.

#176 ◆k62Le3U7xRu 2018/08/03 13:39:55

새벽은 눈을 뜹니다. 놀이공원입니다. 낮입니다. 봄입니다. 튤립공원입니다. 튤립이 공책 속의 종이처럼 무성합니다. 공들인 것처럼 가지각색입니다. 빛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다고 하여 빛이 싫은 것은 아닙니다. 주위를 돌아봅니다. 꿈이라면 나름지기, 아는 사람이 출현해야 합니다. 아니라면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은 노을을 만납니다. 방황하나 봅니다. 방금 전 막 실신에서 돌아왔던 때처럼 행색이 엉망입니다. 새벽이 노을을 불러세웁니다. 노을은 새벽을 바라봅니다. 환한 낮이니 차림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노을이 맵시를 다듬으려다 한심한 듯 손을 내려놓습니다. "내 꿈인데, 뭐하고 있는 거야." 새벽은 입을 다뭅니다. 이틀 전에도 비슷한 꿈을 꾼 기억이 납니다. 새벽과 노을이 같은 꿈을 꾼다고 착각할 정도의 우연입니다. 노을은 새벽에게 말을 거는 대신 조심스럽게 튤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싱그러운 냄새가 납니다. 새벽은 거리를 두고 노을을 따라갑니다. 그러던 노을이 갑자기 멈추어섭니다. 아예 자세를 낮추고 수풀 뒤로 숨어버립니다. 새벽은 노을 근처에서 노을의 행동을 따라합니다. 노을은 노을과 비슷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벽은 뒤늦게 알아챕니다. 노을과 채하와 비슷한 두 사람이 튤립 구근을 캐고 있습니다. 대략 일 년 전의 모습일까요.

#177 ◆k62Le3U7xRu 2018/08/03 13:50:31

노을은 구근을 캐다가 양파망에 옮겨 담습니다. 튤립을 좋아해 매년 구근 캐기 행사에 참여한다고 하였지요. 즐거운지 열심입니다. 일찍이 일어난 채하는 노을을 내려다 보다 뒤로 발을 옮깁니다. "슬슬 가자. 식사한 뒤에 돌아가자고." "벌써?" 노을이 애원합니다. 채하는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작년에 못 준 생일선물로는 충분하잖아." "그치만." "또 그런다." 채하가 휴대전화를 집어듭니다. 노을이 멈칫합니다. 채하는 웃으며 주머니를 채웁니다. 시간만 보기 위해서였다던 듯이. 노을이 일어서 옷에 묻은 흙을 텁니다. 채하가 앞서 가고 노을이 뒤따라갑니다. 노을은 채하의 그림자를 남몰래 콱콱 밟습니다. 그 광경을 노을과 새벽은 지켜보던 도중이었습니다. 노을이 둘에게 보이지 않도록 멀리 돌아갑니다. 새벽도 자세를 낮춘 채 노을을 따라갑니다. 새벽은 노을이 울상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어둠 속에서 상대의 감정을 읽는 연습을 하다보니, 이런 밝은 빛 속에서는 감정의 줄기를 잡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은 과업이 된 것만 같습니다. "못된 언니. 내가 언제까지 입을 다물 줄 알고." "무슨 일인데 그래?" 새벽이 묻습니다. 노을은 힘겹게 입을 뗍니다. 이것이 꿈이라 생각하는 탓에 마음이 동했나 봅니다. 새벽은 꿈의 등장인물에 불과한 노을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말할 리 없음을 알면서도, 스스로 어리석게 느껴질 만큼 진지한 자세로 듣습니다. "새벽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많아. 예를 들어 언니는 중학교를 안 나왔어." 새벽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채하는 옆 지역의 중학교를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눈앞의 노을은 꿈의 등장인물에 불과하다고 단언합니다. 마침 노을도 입을 다뭅니다. 못 다 떨어진 바위 같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178 ◆k62Le3U7xRu 2018/08/03 14:04:01

"하긴. 안 믿는구나. 나도 바보 같아. 꿈에 대고 무슨 바람을 가진 거야." 노을이 속절없이 중얼댑니다. 갑자기 새벽의 가슴팍을 치기 시작합니다. 새벽은 당황하여 뒤로 물러섭니다. "꿈이면 내 말을 좀 들으라고. 그래야 내 꿈이잖아." 새벽은 순간 어떤 균열을 느낍니다. 채하와 새벽은 분명 같은 꿈을 꾼 적이 있었지요. 여러 명이 꿈을 같이 꾼 적이 있었지요. 그렇다면 노을과 자신이 꿈을 같이 꾸는 것 역시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네에서처럼 뒤로 밀쳐지는 느낌이 듭니다. 새벽은 눈을 감았다 뜹니다. 꿈이 깨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깨지지 않았습니다. 새벽은 공중에 떠있습니다. 밤입니다. 아래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새벽은 직감합니다. 어제 있었던 캠프파이어 현장입니다. 새벽의 옆에는 노을이 있습니다. 이전에 채하의 손에 끌려 공중에서 이 장면을 한 번 더 보았을 때와는 달리 새벽은 안심합니다. 노을이 죽었다 생각하였기에 애통한 반응을 보였으나, 노을이 돌아왔으니 과거를 무리 없이 돌아볼 수 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그제야 새벽은 다른 점을 찾습니다. 노을이 홀로, 외롭게 서있습니다. 마녀모자를 쓴 채로, 세례를 받은 것처럼 온통 젖어서는. "안돼." 새벽은 노을을 향해 급히 몸을 돌립니다. 새벽과 함께 공중에 떠있는 노을은,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새벽이 노을에게 괜찮냐고 묻습니다. 노을의 손을 잡고 두드립니다. 노을은 새벽에게 사실을 고합니다. "전에 꾸었던 꿈이야." "캠프파이어잖아? 꿈꾸었다니." "이 꿈을 꾸었어. 새벽이 납치당한 직후에." 노을은 눈을 감습니다. 새벽이 말을 걸어도 등을 돌리며 피합니다. 싫다는 고함만을 계속합니다. 그 소리는 밑의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못합니다. 새벽은 무력감을 느끼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봅니다.

#179 ◆k62Le3U7xRu 2018/08/03 14:13:40

노을, 채하, 새벽, 여명, 호연, 민기, 설기, 연화, 호연의 늦둥이 동생과 경찰 셋. 어제 열렸던 캠프파이어와 같은 구성입니다. 그러나 분위기만은 확연히 다릅니다. 마치 저 중앙에서 타오르는 것이 장작이 아닌 귀중한 유품이라도 된다는 듯이. 호연은 울고 있고, 채하는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습니다. 호연의 동생의 울음소리가 주위를 가릅니다. 경고한다기보다는 성가신 느낌만을 줍니다. 그들 모두의 관심이 쏠린 곳은, 모닥불을 바로 등지고 서있는 노을입니다. 노을의 옆에는 기름통이 놓여있습니다. 마녀모자를 쓴 채 자신의 치마 언저리를 내려다봅니다. 표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다리만 보이지 않는다면, 그 안에 사람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을 모양새입니다. "이게 내 일이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과는 남한테 가지." 노을이 말합니다. 그 뒤에서 불길이 맹렬히 타오릅니다. 불티가 시계소리처럼 번집니다. "그래. 내가 죽어야 세계가 돌아간다니 어쩌겠어." 노을이 말합니다. 불길이 타오릅니다. "내 꿈이니까. 내 꿈을 지켜야지." 노을이 말합니다. 불길이 타오릅니다. 노을이 고개를 듭니다. 잿빛이던 옷 한복판에서 노을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노을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합니다. 불이 노을을 잡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던 노을이 새벽을 발견합니다. 채하의 옆에 쭈그려 앉아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짓습니다. 노을은 새벽을 원망합니다. 이해하기 쉬운 표정을 지었다면 저주할 수 있었을 것을. 그리하여 너무도 평범한 악담만을 새벽에게 남깁니다. "새벽 씨는 새벽 실격이야." 역광, 빛이 아름다운 역광입니다. 노을의 얼굴이 명확히 보이지 않습니다. 따뜻하고 빛나는 모닥불이 세를 불립니다. 노을을 집어삼킵니다. 그제야 노을의 표정이 보입니다. 비명을 지릅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모두가 눈을 돌립니다. 오직 채하만이 노을을 끝까지 응시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노을이 사라집니다. 노을을 없앤 사람들만이 남았습니다.

#203 ◆k62Le3U7xRu 2018/08/06 12:52:22

>>197에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204 ◆k62Le3U7xRu 2018/08/06 12:57:18

새벽은 가던 길을 돌아 운동장으로 내려옵니다. 인파를 뚫고 그 맨 앞에 섭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호연이 분주해 보입니다. 채하는 차를 등지고 서있습니다. 차 안을 살펴보는 척 사람들의 눈길을 피합니다. 지프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뒤로 물러나 보실래요." 채하가 소곤거립니다. 사람들은 한시에 조용해집니다. 몇몇 사람들이 뒷걸음질을 칩니다. 채하는 바로 옆에 서있던 호연에게도 물러가라는 손동작을 합니다. 얼굴이 드리워진 그늘이 도드라집니다. 새벽은 의아함을 느낍니다. 역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갑니다. 고개를 들어 새벽을 바라다보는 채하의 눈빛엔 낙관이 한 점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불안해집니다. 새벽이 호연에게, 몸을 피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무엇을 하려고?" "그야 차는 훌륭한 연료니까." 새벽은 채하가 자폭을 시도하려 했음을 알아챕니다. 채하는 고분고분합니다. 원망과 수치, 회한과 자책이 넓게 펼쳐집니다. 자포자기한 심정인 것 같으면서도 정처 없는 결의가 엿보입니다. 이런 결말에 이를 것이었다면 없는 편이 좋았을 자유를, 감히 내치지 못하고 위태롭게나마 서있습니다.

#205 ◆k62Le3U7xRu 2018/08/06 13:03:20

이틀 전에 다쳤던 다리를 아직도 접니다. 곤란한 기침이 터져나옵니다. 제대로 쉬지도 먹지조차 못했으니 몸상태가 좋지 않음이 당연합니다. 채한느 자신의 저는 다리를 보며 생각에 빠집니다. 유치원 시절에는 연극 무대에 올랐었는데.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도록 각광을 받고, 다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시하는 각본을 달달 외웠는데. 거짓말을 목발로 삼아 여기까지 왔구나. 연기는 끝장난 채로. 새벽이 또 다시 걸어옵니다. 채하는 자신의 생각이 움직이는 길을 봅니다. 피식 웃음을 짓고 맙니다. 새벽을 참으로 미워하였지요. 악의를 가득 품고 살았지요. 무력하게, 그러면서도 멍청하게 버텨왔지요. 사람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간직할 수는 있다면, 자신은 대체 무엇을 지켜온 것일까요. 채하의 눈앞에까지 걸어온 새벽이 묻습니다. "왜 그래?" 채하는 답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말하는 순간 새벽이 자신을 이해할까봐. 위로할까봐. 그러면 자신이 마음을 놓아버릴까봐. 종래는 피해자 행세를 하며 잘못을 덮어버릴까봐. 지금보다 더 못된 인간이 되어버릴까봐. 그러나 목은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하나인 목은 외로워 자꾸만 진실을 토로하려 듭니다.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다만 한 사람에게라도 비밀을 털어놓으면 안 될까요. 그러는 것이 그토록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요.

#206 ◆k62Le3U7xRu 2018/08/06 13:10:37

채하는 고개를 옆으로 틉니다. 호연이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호연은 계속 노을의 편이어야 합니다. 돌렸던 고개를 그대로 앞으로 옮깁니다. 새벽이 보입니다. 희망을 걸어보려 합니다. 채하가 손을 뻗습니다. 새벽의 어깨를 잡습니다. 부탁합니다. "내가 밉지. 하지만 삼십 분만 시간을 줄 수 있어? 값은 치를게." 새벽은 주위를 돌아봅니다. 자신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꾸로 자라는 고드름처럼 자리를 가만히 붙들고 있습니다. 호연이 한숨을 쉬더니 나섭니다. "자리를 비울 때가 아니에요. 인생에는 살아갈 때와 증언할 때가 있죠. 지금은 주위 경계를 철저히 해야 할 시점이에요. 잘못하면 몰살이죠." "이런 처지가 된 것이 누구 때문인지." 목소리가 들립니다. "대신 생존자도 합류시켰고 안전한 공간도 만들어졌죠. 잠시만 시간을 줍시다." 호연의 말에 결국 모두가 흩어집니다. 스탠드에 선 서장이 그들을 재촉합니다. 안심하며 호연은 뒤를 돌아봅니다. 봉에서 빠져나온 커튼처럼 새벽과 채하가 운동장 위로 허물어집니다. 호연이 놀라 그들을 흔듭니다. 미묘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채하의 이마를 짚은 호연이 혼잣말을 합니다.

#207 ◆k62Le3U7xRu 2018/08/06 13:22:47

새벽은 눈을 뜹니다. 익숙한 공간입니다. 놀이공원입니다. 레일을 따라 휩쓸리는 사람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릅니다.관람차가 천천히 돌아갑니다. 따뜻한 저녁입니다. 모두 다른 목적지를 지녔음에도 질서정연하게 사람들이 이동합니다. 인파로부터 비켜서 온갖 소리를 듣습니다. 외동인 두 아이를 찾는 방송에서부터, 두 꼬마의 재잘거림까지. 새벽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길 반대편에 채하가 있었습니다. 새벽이 채하에게 걸어갑니다. 채하는 새벽이 도착하기도 전에 발을 뗍니다. 채하가 새벽을 이끄는 꼴이 되었습니다. 조용히 둘은 마지막 햇빛이 내려앉는 흙먼지 위로 신발을 얹습니다. "나는 꿈을 만들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어. 하지만 아무 꿈이나 만들 수 있는 건 아냐. 내가 체험해본 일을 기반으로 해야 해." 말하며 채하가 새벽을 돌아봅니다. 새벽은 멈추어섭니다. 멈춘 둘을, 돌 앞에서 휘어가는 물처럼 인파가 자연스럽게 피해갑니다. "네가 요근래 들어 꾼 꿈은 모두 내가 만든 거야. 내 경험이란 거지. 현실에서 직접 경험했단 것은 아니지만." "노을의 예지몽도?" "맞아." 채하는 마녀모자를 들어올리더니 벗어버립니다. 떨어졌던 모자는 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어 저 멀리 날아갑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채하가 겪지 않았는데도 꿈의 배경이 된 장소들이 있었잖아." 새벽은 채하의 말에 숨을 죽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꿈 속에서 들렀던 장소에는 어디가 있던가요. 고등학교, 새벽이 미아가 되었던 놀이공원, 노을의 집, 노을의 수학여행지, 새벽과 채하가 처음 만났던 산책로, 그리고 노을이 불타오르던 캠프파이어. 그러나 채하가 경험하지 않았을 것들이 있습니다.

#208 ◆k62Le3U7xRu 2018/08/06 13:28:56

"놀이공원에서 나와 만난 건 노을이었어." "알아챘구나. 노을이 말했지?" 채하가 웃습니다. "넌 그때 실종되었어." "채하는 실종됐지." 채하가 말을 받습니다. "그리고?" "노을이가 수학여행을 간 버스와 숙소도." "그렇지. 게다가 거기에는 노을이의 반 친구들도 있었지? 채하가 걔들과 같은 반이었을 리는 없으니." 새벽은 자신이 꿈속에서 만난 노을과 겪었던 일을 채하가 이상하리만치 잘 알고 있는 것이 미심쩍습니다. 그러나 다음 의문점을 제시하는 데 열을 올립니다. "노을이 불타오르던 캠프파이어도." "그럼. 노을이는 살았으니까."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잖아." "아니. 일어났어." 채하가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그리고 곧장 표정이 굳습니다. "예지몽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야." 새벽이 말을 잇습니다. "노을이 말하길, 바다에서 내가 보트를 타고 상어들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꿈이 있다고 했었어." "새벽이 그런 경험이 없다면 나 역시 없었겠지." 채하가 답합니다. 전혀 숨기는 기색이 없습니다. 배를 감싸쥐고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희미하게 웃습니다. 뒤돌아서 다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새벽이 채하를 뒤따라갑니다. 인적이 묘연한 천막으로 걸어갑니다.

#209 ◆k62Le3U7xRu 2018/08/06 13:35:49

둘은 막사 안으로 들어갑니다. 천막은 어둡습니다. 채하가 빔프로젝터를 켭니다. 흰 화면이 바람에 물결치는 천막 위를 뛰놉니다. 채하가 그 앞에 병을 세워둡니다. 병이 조명이 됩니다. 채하가 뒤돌아 새벽을 마주봅니다. "하지만 다른 사례들은 왜 이상하지 않을까? 그야 당연하겠지. 내가 채하로 살았으니, 채하의 기억을 갖는 건 당연해." 채하가 천천히 벽면을 따라 걷기 시작합니다. 걸음이 가지를 치듯이 느릿합니다. 채하는 자신의 말을 계속합니다. "하나도 이상한 건 없다고 생각해봐. 내가 노을의 기억을 갖는 것이 당연할 가능성도 있겠지. 어떤 사례일까?" 채하는 새벽을 바라보는 대신 발걸음을 지속합니다. 새벽은 채하를 지켜봅니다. 채하가 유도하고자 하는 결론은 너무도 낮고 속이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물이 고이듯이 의도치 않았는데도 답을 찾고야 맙니다. 새벽이 입을 엽니다. "넌 노을이야?" 확신을 하지 못하면서도 말을 내뱉고 맙니다. 채하는 여전히 새벽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그저 순순히 고개를 조악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