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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3:09:38 ID : ry3QpU6nSHz
2018년 3월 봄, 우리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너는 나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2019/05/07 13:14:48 ID : ry3QpU6nSHz
한국사람인 나, 스페인사람인 너. 우리가 알게된 곳은 엉뚱하게도 일본어플이었다. 일본어를 사용하려고 받아두었던 어플에서,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도 못하는 너와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그때 당시 나는 영어도, 스페인어도 하지 못했고 다른 외국인들과의 교류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2019/05/07 13:21:37 ID : ry3QpU6nSHz
나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너에게 신선함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부담도 됐었다. 처음부터 좋아한다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낯선 너에게 내가 느낀 부담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료한 일상 속에서 매일 계속되는 연락과 영상통화로 들려주는 너의 악기연주로 인해 나는 너와 연락하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2019/05/07 13:25:33 ID : ry3QpU6nSHz
"내년 여름에 스페인에 가고싶어" 여행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그저 빈말이었다. 관심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거니와 일본여행도 일본어를 잘 하게 된 이후 갈 만큼 나는 새로운 장소는 무서워했다. 그런데 내 말에 너가 한 말은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번년도 여름에 널 스페인에 초대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우리가 알게된지 겨우 5일째 되는 날이었다.
2019/05/07 13:48:57 ID : ry3QpU6nSHz
나는 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을테다. 갑자기 니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처음엔 가볍게 수락했던 너의 제안이 내 머릿속에 부풀고 부풀어 여러가지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그 상상은 너와 연락했던 며칠간의 좋았던 기억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너에 대한 무지가 너를 두렵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너에 대해 알아가고 싶었다. 니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너에 대한 일말에 믿음을 놓치기 싫어서였을까? "난 너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 없어" 라고 말하는 것이 왜그리 무서웠는지 모른다. 니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한몫했을테다.
2019/05/07 14:15:29 ID : ry3QpU6nSHz
너는 항상 그랬다. 내 목소리로 내 상태가 어떤지 참 잘 맞췄다. 아마 그때도 그랬을거다. 무슨일이냐고 말하라는 너의 말에 못 이겨 울면서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내 울음에, 또한 내 말에 너는 당황해했다. 너를 믿지 못하는 듯한 나의 모습에 너의 전부를 1년 단위로 세세하게 알려주겠다며 말하며 너도 같이 울었다. 니가 내 앞에서 보인 첫 울음이었을것이다. 이상하게도 너의 눈물에 나는 안심이 되었다. 그 후, 나는 정말로 1년 단위로 너의 삶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니가 사는 곳, 부모님이 사는 곳, 니가 다니는 대학교 등 모든 것들을 구글맵으로까지 세세하게. 너는 행동함으로써 나에게 믿음을 주었다.
2019/05/07 14:29:16 ID : ry3QpU6nSHz
그날 이후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나는 너를 신뢰하게 됐고 너가 처음부터 나에게 보인 관심에도 나도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문제되지 않았다. 일상을 공유하고 매일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조차도 한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너는 날 좋아하는걸까?" 너는 내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니가 어느나라 사람인지 그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 스페인 사람이든 아프리카 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너는 너일뿐이야. 너의 웃음, 너가 나를 보는 눈빛, 똑똑하고 아름답고, 뭔가를 열심히 하려는 니 모습이 좋아. 도와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어. 문득 이게 사랑이란 걸 깨달았어."
2019/05/07 14:50:54 ID : ry3QpU6nSHz
생각해보면 너는 눈물이 많았다. 여느 연인들처럼 자기 전에 자장가를 불러줬을 때도 넌 울었고, 4월 너의 생일날 긴 장문의 메세지를 남겼을 때도 너는 울었다. 또, 너는 옛 친구들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너가 너무 좋았다. 작은 것에도 감동하며 감정표현이 풍부한 니가 좋았고, 그런 감수성은 나에게 세심한 배려로 다가왔다. 너의 사랑 안에서 나는 점차 안정되어 갔다. 그런 너의 눈물이 슬픔의 눈물이 된 건, 5월달 무렵 내가 서울로 올라오고 난 후였다.
2019/05/07 15:17:53 ID : ry3QpU6nSHz
새로운 환경을 마주하게 된 우리는 너무 예민했다. 너는 서울에 있는 남자들을 질투하며 많이 불안해했다. 가끔씩 그 불안감에서 비롯된 날카로운 말이 나를 찔러대기도 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홀로서기에 적응하느라 외로웠고 전에 살았던 곳과는 다른 화려함에 압도됐다. 친구의 권유로 가게 된 언어교환카페와 펍들, 그곳에서 또다른 외국인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있어서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너와의 대화(영어)를 좀 더 이해하겠다는 명목 하에, 서울에서의 친구들을 사귀겠다는 명목 하에 나는 아무 거리낌없이 놀러다녔다.
2019/05/08 12:45:28 ID : ry3QpU6nSHz
그때 당시 우리는 자주 싸웠다.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에게 화를 냈고, 울었고, 다시 화해했다. 그러면서 지쳐갔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외국인들을 만날때면 나는 내심 부러웠다.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때때로 너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너가 너무 좋았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 언어의 장벽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사랑하는데 있어서 언어나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영어가 버겁다는 나에게 너가 울면서 나에게 한 말이다.
2019/05/08 12:53:04 ID : ry3QpU6nSHz
한달 후, 나의 방황이 잦아들었을 무렵 우리는 다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스페인으로 가 널 만날 날이 정해졌기도 했고 다행히 좋은 상사를 만나 안정된 업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우리는 핸드폰 화면 속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다. 가끔은 그리움에 사무쳐 울기도 했지만. 실로 안정된 나날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너를 만날 7월이 되었다.
2019/05/08 13:06:32 ID : ry3QpU6nSHz
13시간의 비행 끝에 나는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출국장 문을 나가기 직전,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앞에 니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토록 보고싶어했던 너가. 격한 긴장과 떨림에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 가방에선 기다림을 참다 못한 너의 문자가 울리기만 할 뿐이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떨림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리고, 나는 출국장 문을 나섰다.
2019/05/08 16:47:56 ID : bdyE7dSGq1v
글 너무 예쁘다 ㅂㄱㅇㅇ!!
2019/05/09 14:26:27 ID : ry3QpU6nSHz
고마워 덕분에 힘난다
2019/05/09 20:21:29 ID : ts4IJTTU1Du
글 잘쓰넹 다음 이야기도 들려줘!
2019/05/10 13:54:42 ID : ry3QpU6nSHz
누군가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단번에 너를 찾았다. 좀 진부한 말이지만, 너밖에 보이지 않았다. 영상통화에서 매일 보던 너가 실제로 내 눈 앞에 있는게 조금은 어색했다. 너도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긴장했을지도 모른다. 너도 너의 새로운 모습에 신기해하고 있었으니까. 약간은 허둥대는 너의 모습이 귀엽게 다가왔다. 어색했던 분위기도 이내 사라졌다. 날 바라보는 너의 눈빛은 영상통화 속 그대로였다. 심장의 고동이 점차 빨라져 숨이 막혔다. 살짝 어지럽기도 했다.
2019/05/12 08:49:27 ID : h9hbvjBy44Z
누군가 나에게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너와 함께 보냈던 일주일’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스페인에서의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게 완벽하진 않았다. 마드리드 솔광장에 니가 미리 찾아봤던 식당에 들어가려다가 하필 식당이 예약제라 다른 식당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벤치에 앉아 로맨틱한 분위기 속에 갑자기 지나가던 강아지가 똥을 싼다던지, 길을 많이 헤매기도 했다. 또한 내 몸상태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너와 있어서 모든게 좋았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스스럼없이 키스를 하기도 했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같이 공연을 보고, 작은 모래언덕을 지나 대서양에서 해수욕을 하기도 했으며 너가 공부하는 대학교를 구경했다. 그때도 너는 울보였다. 내가 준 편지를 읽고 울고,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일어나니 내가 떠나는 것을 미리 걱정하며 울고, 해수욕장에서도 울고, 마지막날 공항에서도 너는 울었다.
2019/05/12 09:07:03 ID : h9hbvjBy44Z
너가 있기에 더이상 스페인은 나에게 무섭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전혀 슬프지 않았던 이유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거란 확신 덕이었다. 12월, 우린 “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너는 그때 그렇게 약속했었다. 또한 나는 귀국하자마자 니가 쓴 진심어린 장문의 메세지에 너의 사랑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너는 정말 나를 사랑했다. 대학교를 그만두고 나와 함께 한국으로 가고싶다고 말할정도로. 너는 정말 나를 원했다. 미래의 일이지만 너는 나와 결혼하고 싶어했고 너의 여동생을 물론이고 할머니, 부모님도 나의 존재를 말했다. 니가 가족파티에 갔을 때, 너의 어머니께서 “몇년 후면 이 자리에 00이도 있겠지”라고 말하셨다고 했다지. 너는 나와 하고싶은 게 정말 많았다. 나와의 버킷리스트로 35가지나 써낼 정도였으니-그중에서 몇개는 이뤘다-. 나도 정말 너를 사랑했다. 너를 좀 더 알고 너와 함께 사는 그날을 위하여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귀국한 이후로도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계속 이어졌다. 때때로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울기도 했지만.
2019/05/12 09:24:09 ID : h9hbvjBy44Z
너는 참 모든 걸 열심히 했었다. 학교에서도 꽤 좋은 성적을 받고 있었으며 음악학원의 강사 일도 다른 아픈 강사 몫까지 대신 할 만큼 열심이었다.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러 2시간정도 떨어진 본가에 갔다 오는 것을 반복했다. 나도 귀국 이후 사무직 일을 시작하고 스페인어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점점 연락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밤 1시에서 2시 사이.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시차가 원망스러워 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했고 동시에 너무 많은 일에 피곤해했다. 그나마 12월에 만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2019/05/12 09:31:27 ID : h9hbvjBy44Z
어느날 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시험에서 낙제했다며 흐느껴 울던 너. 재시험은 12월에 있었고 우리의 희망마저 스러졌다. 그래도 재시험이 끝나고 만날 수 있겠지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재시험 날짜는 10월이 지나고 11월이 와도 공표되지 않았다. 이것이 불행의 끝은 아니었다.
2019/05/12 09:44:11 ID : h9hbvjBy44Z
너는 가족의 병환으로 본가로 내려와 간병을 해야만 했다. 당연히 시험준비나 일을 하지도 못했다. 너는 매일 밤을 꼬박 새야했으며 아침이면 피곤에 절어 자는 것을 반복했다. 말뿐인 위로 밖에 건넬 수 없는 나로서도 굉장히 힘든 나날이었다.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월급을 다 털어 스페인으로 다녀올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너는 그걸 원치 않았다. 12월엔 재시험이, 1월에도 기말시험이 있더랬다. 결국 12월이 되기 며칠 앞두고 너는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8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2019/05/12 09:50:01 ID : h9hbvjBy44Z
헤어지는 순간 조차도 넌 다정했다. 너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너가 많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임을 알기에 함부로 잡을 수도 없었다. 한동안 멍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예전에 넌 내가 너의 첫사랑이라고 말했었다. 생각해보면 너도 나에게 첫사랑이었다.
2019/05/12 10:21:18 ID : h9hbvjBy44Z
헤어진 지 이제 반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너와 닮은 사람을 찾으며 만나보기도 했고 많이 놀기도 했다. 어느날은 그리움을 참지 못해 너에게 연락을 하기도 했다-그마저도 내가 연락하는 게 불편하다는 너의 말에 이제는 하지 못하고 있다-. 난 아직도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으며, 너를 그리워하며 이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2019/05/12 10:40:35 ID : h9hbvjBy44Z
최근에 스페인어로 된 <어린왕자>를 읽었다. 그 속에서 이런 말이 있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그렇게 되면 황금빛 물결치는 밀밭을 볼 때마다 네가 생각날 테니까. 나는 밀밭 사이로 부는 바람에도 사랑하게 될 테니까] 너는 나를 길들였고 나는 너의 스페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니가 떠난 후로도 스페인을 놓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다.
2019/05/12 10:44:13 ID : h9hbvjBy44Z
넌 내 삶을 변화시켰다. 내가 숨기고 싶어하던 모든 것에서 나를 사랑으로 감싸줬고 보호해줬다. 정서적인 안정을 찾게 해줬고 새로운 것들을 도전할 수 있게 해줬다. 나를 나로서 있게 해줬다.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을 알려줬다. 너는 선생님이자 울타리였으며 너는, 나의 어린왕자였다.
2019/05/12 10:44:58 ID : h9hbvjBy44Z
-끝-
2019/05/12 20:57:43 ID : bdyE7dSGq1v
와 되게 찡하게 다가온다 ,, 잘 봤어 쓰느라 고생했어 레주!!
2019/05/12 21:26:47 ID : ZinO3CnSE4J
정말 예쁜 이야기네 니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워!
2019/05/13 09:29:27 ID : ry3QpU6nSHz
읽어줘서 고마워!
2019/05/13 09:29:36 ID : ry3QpU6nSHz
아니야 내가 더 고마워!
2019/05/13 10:27:43 ID : 9y2KY2oE8mN
읽는 내내 그게 무슨 감정인지 나도 너무 잘 알아서 맘이 미어지는것 같아..
2019/05/13 22:56:35 ID : h9hbvjBy44Z
헤어질때도 얘는 미안해하더라고 내 잘못으로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여러가지 문제때문에 힘들다고 하면서 자기는 바보라고 엄청 자책했었어. 근데 나는 왜 내가 얘한테 못했던 것만 생각날까. 진짜 얘가 날 바라보는 눈빛을 잊지 못하겠어. 얘 덕분에 만나는 남자 기준이 높아져서 이제는 함부로 사랑에 안빠져. 진짜 내 인생에서 가장 행운은 얘를 만난거인것 같아.
2019/05/15 23:37:27 ID : soY07hy7xRx
대박이다 눈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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