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0/04/29 00:15:28 ID : o43XwMmGpTP 0
O반 친구들, 온라인 개학한 지도 3주가 되어 가네요. 영상으로 많은 과목 수강하는 게 쉽지 않죠? 학교에 오지 못하니 긴장감도 떨어지고 그럴수록 더 불안해질 것도 같아요. 캄캄한 밤에 여러분 생각이 나서 몇 자 적어봅니다. 보지 못하지만 늘 생각하고 응원하고 있어요. 어려운 상황 속에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을 지내고 있는 여러분이 자랑스러워요. 담임쌤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주세요. 그럼 굿나잇~ 라고 선생님이 반톡에 올리셨는데 입덕각 선다 나 이분 썰 좀 풀어보려고 하는데 들을 사람 있니
2 이름없음 2020/04/29 00:16:08 ID : oGrfdQreY63 0
오 들어볼게
3 이름없음 2020/04/29 00:16:19 ID : 6pgmGk5Qr9j 0
엌 나 들을레
4 이름없음 2020/04/29 00:18:22 ID : o43XwMmGpTP 0
일단 이분은 작년에도 날 가르치셨는데 단위수가 일주일에 두번인 과목이었음. 여자분이셨고, 내가 처음 만난 건 1학년 때. 1학년 때 우리 담임쌤이 원래 쭉 3학년 하시던 분이고 2학년도 가르치셔서 학교에서 어느정도 인지도가 있는 편이라 2학년들만 할 수 있는 활동에 우리반을 끼워넣어주셨어. 그게 STEAM 이라고 창의 융합 체험 활동이었는데 주제 하나를 가지고 국어, 수학, 과학, 기술, 미술을 융합해서 작품을 만드는 그런 류의... 활동이었어. 그때 이 선생님은 국어 과목이셨고, 처음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머리카락이 엄청 길고 밝은 갈색에 가까운 갈색인데 얼굴은 다람쥐를 닮으셨지만 진짜 엄청 마르셨거든. 정말 상상 그 이상으로 마르셨어. 딱 맞는 치마를 입는데 그 안으로 손 하나가 다 들어가는...? 심지어 마르기만 했으면 그냥 그렇거니 하고 넘어가는데 진짜 몸매가 대박적이야. 뭐 흔히들 생각하는 그런 이상적인 몸매?
5 이름없음 2020/04/29 00:23:26 ID : o43XwMmGpTP 0
딕션도 완전 좋고, 자주 웃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그렇다고 해서 거리감이 좁아진다거나 밝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은 안 들었던 것 같아. 그리고 2학년에 올라왔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이더라... 그분이셨어. 소문을 들어보니까 연세대 수석 입학인가 수석 졸업하셨다는데 진위여부는 모르겠지만 우선 연세대를 나오신 건 맞아. 일 정말 잘하셨고, 수업도 정말 빡세게 하셨어. 애들이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시험도 기말고사만 쳤는데 기말고사도 엄청나게 어려웠고, 수행평가 만점이 전교에 두세명 정도밖에 없었어. 교양과목이고 국어 선생님이다 보니까 책을 읽고 하는 활동이 많았는데 사실 독서를 인생의 낙으로 삼는 나에게는 최고의 과목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좀 힘들어했어. 특히 글 쓰는 활동도 되게 많았는데 작가 지망생이었던 나에게는 흠잡을 곳 하나 없는 과목이었다.
6 이름없음 2020/04/29 00:27:41 ID : o43XwMmGpTP 0
설명하기 어려운데 항상 눈 마주치면 웃어주시고, 뭔가를 물어보면 성실하게 대답해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밝고 다정한 성격이구나 이런 느낌은 아니야. 분명 잘 웃어주시는데 왜 그런 느낌이 안 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다른 분들은 본인의 이야기도 하고 그러시는데 난 이 분의 TMI를 들은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딱히 화를 내신 기억도 없고 아무튼 이 분은 1학기 때까지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1학기 때는 문학 위주로 수업을 하셔서, 영화를 보거나 독서를 하는 일이 굉장히 많았거든. 그래서 그랬던 걸지도 몰라. 내가 문법은 싫어해도 문학은 진짜 좋아하거든! 이 분은 우리 옆옆반 담임선생님이셨는데 그 반 아이가 하나같이 그러더라. 너희한테 하는 거랑 우리한테 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 담임선생님인지 교과선생님인지 구분이 안 간다, 공적 자아랑 사적 자아가 일치한다, 이런 식으로. 감정표현을 안 하신다고 했어. 딱히 자기 반이라고 챙겨주는 것도 없고 잘못하면 더 혼나는 그런 것도 없다고. 일은 잘하지만 대체적으로 우리한테 관심이 없다고.
7 이름없음 2020/04/29 00:32:32 ID : o43XwMmGpTP 0
그런데 알고보니까 앞에서 말한 그 아이는 그냥 빡센 커리큘럼과 수행평가 때문에 이 쌤한테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는 아이였다. 듣고 있는 사람 있니? 여름방학식 날이었고 우리는 아이들끼리 한 학기 지각비를 모으고, 각자 사비도 좀 보태서 교실에서 엽떡과 치킨을 시켜 먹고 파티를 하면서 놀고 있었다. 담임선생님도 자리를 비켜주신 상태.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뒷문을 두드리더라. 사실 그때 우리가 문을 다 막아놓고 많이 야한 영화를 보고 있어서 정말 당황스러웠다. 재빨리 영화를 수습하고 문을 열었는데 그 선생님이 서 계셨다. 손에는 책을 들고 있었다. 내 책이었다. 당황스러워서 벌떡 일어났다. 그 책 제목이 뭐였냐면 <노르웨이의 숲> 이었다.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흔히 생각하는 그런 양서라기보다는 사실 읽었을 때 닥치고 세수 이런 느낌에 가까운 막장드라마다. 선생님이 나를 가까이 부르면서 책을 건네주셨다. 이름도 안 썼는데 내 책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평소에 내가 자주 쓰던 라이언 북마크를 눈여겨보고 계셨다고 말씀하시더라.
8 이름없음 2020/04/29 00:37:55 ID : o43XwMmGpTP 0
거기서 살짝 반전매력 비슷한 걸 느꼈다. 그렇게 나는 빠빠 하고 보내려고 했는데 우리 반 아이들이 무슨 근자감인지 그 선생님을 붙잡았다. 선생님이 평소에 마르셔서 그런지 자주 어지럽다고 하시는 편이었는데 (다른 선생님 피셜) 그걸 빌미로 우리 반 아이들이 강제로 음식을 나눠주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시면서 안 드시려고 하셨다. 너희가 돈 주고 산 음식을 내가 어떻게 먹냐는 마인드였는데 그냥 우리가 떼를 써서 강제로 먹게 하셨다. 원래 이 분은 항상 웃는 낯이셔서 표정변화가 딱히 없는데 진짜 맛있어하는 표정이 보이더라. 그래서 계속 퍼드렸다. 그렇게 20분 정도 먹다가 수다 떨다가 회의 간다고 가시고 우리도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 2학기가 되니까 문학 끝나고 문법을 하더라. 난 문법이 진짜 약하고, 너무 싫고, 아무튼 여러모로 나랑 안 맞는 친구다. 십몇년을 했는데도 그렇다. 게다가 이 선생님은 교과서 이외의 다른 기출문제 풀이라던가, 이론 복습도 철저히 하시고 (이번 온클에서도 따로 영상 편집해서 기출문제 풀이까지 하는 열정을 보이셨다) 시험도 어렵게 내시는 편이다. 수행평가로 보는 쪽지시험도 마찬가지. 정말 너무 따라가기 벅찼다.
9 이름없음 2020/04/29 00:41:27 ID : o43XwMmGpTP 0
어느 날은 학교 독서실에 혼자 남아서 문법을 공부하고 있는데 너무 안 되서 스트레스가 만땅 쌓였다. 학교 복도에 잠깐 나왔는데 시간이 6시쯤 되었던 것 같다. 아무리 해도 안 외워지고 수업은 따라가기 벅차고 수행평가나 시험은 한 만큼 나오지도 않고 선생님은 멋있게 설명하는데 난 알아듣지도 못하고. 여러모로 한심하고 짜증나고 오만 감정이 다 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울었다... ㅎ_ㅎ 아무도 없어서 진짜 엄청 울었다. 교무실도 가까웠는데 뭔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눈 떠 보니까 갑자기 내가 기대고 있던 창틀 옆에 탄산음료가 있었다. 당황스러워서 주변을 살펴보니까 갑자기 근처 복사실 같은 곳에서 문을 열고 그 선생님이 나오셨다. 망했다 싶어서 들어가려는데 이미 눈이 마주쳤고 선생님이 오라고 하시더라. 갔더니 의외로 하시는 말은 별로 없었다. 뭐가 잘 안 되냐고 물어봐주시고, 힘내라고 형식적으로 몇 마디 해주셨는데 그게 기나긴 위로보다 훨씬 더 나았다.
10 이름없음 2020/04/29 00:48:50 ID : o43XwMmGpTP 0
그 일 이외에 2학기 때는 큰 일이 없었다. 그냥 이 선생님도 인간이구나... 싶은 정도의 기나긴 수다를 떨었고, 시험은 여전히 어려웠고, 여전히 나는 문법이 쥐약이고, 학기 마지막에 선생님이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본인과 이야기하고 싶으면 와도 된다고 했는데 난 반쯤 호기심에 갔다. 그런데 갔더니 맙소사 책 취향이 너무 잘 맞아서 진로상담은 안 하고 책 이야기만 하고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약간의 호감이 있을 뿐 전체적으로는 감정이 0에 가까웠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다. 작년 선생님들은 내가 대부분 좋다 싫다, 이렇게 이분법적인 감정을 가졌었는데 이 분은 몇 안 되는 예외였거든. 게다가 젊으셔서 학년이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 학년에 고정될 것 같았는데 겨울방학 때부터 슬슬 O반 담임이 이 분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결국 현실이 되었다. 처음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Aㅏ.......?" 진짜 당황스러웠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11 이름없음 2020/04/29 00:51:58 ID : o43XwMmGpTP 0
글을 쭉 읽으면 알겠지만 절대! 절대! 스윗한 사람 아니고 다정한 사람도 아니다. 저 일화는 그냥 내가 호감을 느끼게 된 일화 중 하나였을 뿐. 통화를 했는데 농담도 엄청 많이 하시고, 능청스러운 말투도 쓰시고, 무엇보다 내 긴장을 풀어주려는 게 느껴져서 침대에 누워서 통화했다. 그 정도로 편안한 기분이었다... 공지도 빠르게 올려주시고, 꼼꼼하고, 심지어 내가 공지를 잘못 이해해서 선생님을 여러모로 귀찮게 해드렸는데 그걸 또 공지에 수정사항으로 넣어주셨다. 3월부터 담임선생님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0>호감>호!감! 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다. 단점이 있다면 말투가 AI에 가까울 정도로 딱딱하다는 점. 통화하거나 대화하면 나름 착하고 다정한 말투인데 문자만 하면 말투가 얼음장이 된다.
12 이름없음 2020/04/29 00:54:21 ID : o43XwMmGpTP 0
그래서 그런지 이 선생님이 문자로 조금만 다정해지면 심장이 쫄깃쫄깃해진다. '수업 잘 들어요~' 라고 예의상 보내준 말에도 심장이 쫄깃해지고, 온라인클래스 질문게시판에 답변을 달았을 때 '좋은 질문 고마워요~^^' 라는 말을 덧붙이셨는데 그것도 참 심장이 쫄깃하다. 나 이미 입덕한 건가? 게다가 1레스의 저 문제의 장문 카카오톡까지...! 진짜 심장 쫄깃하게 한다. 밤에 생각나서 적어봤다니 도대체 무슨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굉장히 심장 쫄깃한 말인가. 재미없는 썰이지만 풀어봤다.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모의고사 보러 갔을 때도 잠깐 만났는데 선생님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며, 힘내라고 살짝 토닥거려주셔서 정말 많이 당황했다... 내가 당황하니까 사회적 거리두기를 까먹었다면서 씩 웃는데 뭐랄까... 심장이 많이 쫄깃하더라. 게다가 상담할 때 보니까 나를 굉장히 잘 파악하시고 계시던데 일주일에 두 번, 그 시간 동안 언제 파악하셨을까. 레더들이 보기에는 어떤 분 같은지 궁금하다
13 이름없음 2020/04/29 01:00:16 ID : TXBtg6jcsnT 0
딱 그거같은데? 친해지기 힘든데 한번 친해지고 나면 다 퍼주는 스타일 남한테 잘 호감 안 갖는데 한번 호감가지고 나면 오래가는 스타일 그런데 레주는 이미 호감사기에 성공한 듯
14 이름없음 2020/04/29 01:01:18 ID : o43XwMmGpTP 0
그런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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