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0/08/11 13:18:39 ID : A1xveNvDAnR 0
잠깐 낮잠 자다 짧게 꾼 꿈인데, 오랫동안 잊기 어려울 것 같아. 여기에라도 기록하고 싶어서 남겨.
2 이름없음 2020/08/11 13:20:52 ID : A1xveNvDAnR 0
나는 방학이지만 기숙사에 살아. 집에는 가끔 내려가. 꿈에서도 내가 잠깐 집에 내려가 있었어.
3 이름없음 2020/08/11 13:23:57 ID : A1xveNvDAnR 0
집에 내려가면서 필요 없는 짐을 이것저것 챙겨 내려갔는지 짐이 제법 많았지. 내가 집에 오든 말든 평소에는 눈길도 안 주던 아빠가 그날따라 말을 걸었어. -그럼 넌 집에 아예 온 거야? -아뇨, 다시 기숙사 올라가야죠. 대답하면서도 웬일로 말을 거시나 싶었지. 어쩌면 좀 기뻤던 것 같아. 아빠가 나한테 관심 가져줘서.
4 이름없음 2020/08/11 13:31:03 ID : A1xveNvDAnR 0
그렇게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웬일로 아빠가 방으로 따라 들어오셨어. 아빠는 청소하거나 나한테 시킬 일이 없으면 내 방에 안 오셨는데. -짐이 왜 이렇게 많아? 아빠가 침대에 앉아서 내 짐을 기웃거리시더라고. 이것저것 열어보시면서 이게 뭔지 묻기도 하고. 나도 그건 잘못 여시면 다 빠진다는 등 별거 아닌 말을 했던 것 같아. 아빠랑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묻는 말에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정말 너무 오랜만이었어. 아빠가 내 방에 들어온 것도, 내 일상에 관심 가지면서 뭔가 물어보는 것도 정말 너무 생소한 일이어서, 그 들뜨면서도 어색한 기분이 잊히지 않아. 그렇게 대화를 하다가 아빠가 피곤하셨는지 내 침대에서 주무셨어. 마침 엄마 오시는 소리가 들려서 나갔는데, 현관에서 구두를 벗으시는 엄마 뒤로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빠가 보였어.
5 이름없음 2020/08/11 13:33:28 ID : A1xveNvDAnR 0
술에 취한 아빠는 들어오면서 찡그린 얼굴로 날 쳐다보면서 뭐라고 했던 것 같아. 우리 아빠는 조금만 술을 드셔도 얼굴이 쉽게 붉어지셔서, 꿈에서도 얼굴이 무척 빨갰어.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가서 아빠를 확인했어. 아빠는 내가 나왔을 때랑 똑같이 침대에서 주무시고 계셨어.
6 이름없음 2020/08/11 13:35:53 ID : A1xveNvDAnR 0
엄마한테 가서 얘기했지. 엄마, 아빠가 둘이에요. 그런데 엄마가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시더라고. 정상적인 일은 아니어도 꿈속에서는 그냥 헤프닝 정도였던 모양이지. 꿈이라 그런지 나도 크게 놀라지 않았어.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말했거든. -하나는 죽여야겠어요. 깨어 있는 지금 생각하면 좀 무서워.
7 이름없음 2020/08/11 13:39:59 ID : A1xveNvDAnR 0
꿈이었지만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어.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게 결정하고 부엌에서 식칼을 뽑았어. 이상하게도 둘 중 하나를 죽이면 그냥 연기가 돼서 흩어진다는 지식이 있었어. 칼을 들고 술에 취한 아빠 쪽으로 다가갔어. 누가 진짜인지 고민해보지도 않았어. 사실 누가 진짜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거든.
8 이름없음 2020/08/11 13:44:30 ID : A1xveNvDAnR 0
술에 취한 아빠는 취해서였는지, 아니면 내가 장난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내가 칼을 든 걸 보고도 별 반응이 없으셨어. 나도 거실에서는 용기가 안 나더라. 아빠가 바로 앞에 있는데 칼을 들고 머뭇거렸어. 그래서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아빠가 들어올 때 칼을 휘둘렀어. 그런데 역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어. 아빠 배에 칼을 찌르지 못하고 바로 앞에서 멈췄어.
9 이름없음 2020/08/11 13:48:03 ID : A1xveNvDAnR 0
그때서야 아빠는 내가 진심인 걸 알았는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칼날을 붙잡았어. 이걸 뺏기면 진짜 내가 죽겠구나 싶어서, 칼을 부여잡고 소리지르면서 발버둥쳤던 것 같아. 어찌어찌 칼을 빼내고 그냥 마구잡이로 휘둘렀어. 아빠가 계속 칼을 뺏으려고 해서 급하게 화장실 밖으로 뛰어나왔어.
10 이름없음 2020/08/11 13:50:26 ID : A1xveNvDAnR 0
그렇게 온 집안을 뛰어, 아니 도망다녔던 것 같아. 아빠가 쫓아오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칼을 마구 휘둘렀어. 칼날은 생각보다 날카로웠던 것 같아. 마지막에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어. 아빠가 날 붙잡고 칼을 뺏으려고 해서 마구 버둥거리다가, 아빠가 잠깐 물러섰을 때 칼을 사선으로 내리그었어.
11 이름없음 2020/08/11 13:53:27 ID : A1xveNvDAnR 0
느낌으로는 별로 깊게 그은 것 같지 않았는데, 아빠가 비틀거리면서 현관 쪽으로 비틀비틀 물러났어. 내가 그은 곳에서는 생각보다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어. 그제야 아빠 모습이 제대로 보였어. 아빠 얼굴은 내가 휘둘렀던 칼 때문에 온통 피투성이였어. 이상하게 그 얼굴이 더는 우리 아빠로 보이지 않았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아.
12 이름없음 2020/08/11 13:57:02 ID : A1xveNvDAnR 0
아빠가 두 번 피를 토하더니 결국 현관에 쓰러졌어. 나는 동생을 안고 있었는데, 동생을 대충 달래고 다시 일어서서 현관으로 다가갔어. 확실하게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피로 얼룩진 목 위로 튀어나온 혈관이 여러 가닥 보였어. 이 사람이 나중에 깨어나면 날 죽이려 할 거라고, 이걸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못 하겠더라. 그렇게 머뭇거리던 중에 꿈에서 깼어.
13 이름없음 2020/08/11 13:59:25 ID : A1xveNvDAnR 0
제목은 저렇게 지었지만, 난 꿈에서 결국 아빠를 완전히 죽이지 못했어. 아직도 어느 쪽이 진짜 아빠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싶지도 않아. 다만 꿈속의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뭐였을지가 궁금해. 지금은 환한 대낮인데. 앞으로 한동안 어두울 것 같아.
14 이름없음 2020/08/11 14:00:23 ID : A1xveNvDAnR 0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 길지도 않고, 스레딕에 글 쓰는 게 오랜만이라 실수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날 모르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어. 여기까지 읽어준 사람이 있다면 들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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