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18/07/29 01:02:18 ID : atzgoZbcsmM 0
그 곳으로 도망간건 20살이었어. 난 재수생이었고 미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학원에서 지독한 왕따를 당했거든. 도망칠 수 밖에 없었어. 먹는 족족 토하는 날 엄마가 살리려 강제로 보내다시피 했으니까. 그 곳은 내가 간 날부터 장마가 시작된듯 했어. 축축하고, 후덥지근하고, 네온사인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 내가 살던 지역에선 볼 수 없는 높은 건물들과 어려운 길들이 무섭고도 좋았던거 같아. 어쨌건 그 곳에선 날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테니까. 나는 이러나 저러나 재수생이었으니까 학원을 다녀야했고 짐도 풀기 전에 이곳저곳으로 상담을 다녀야했어. 그리고 결국 결정한 곳에서 너를 만나게 됐지.
2 이름없음 2018/07/29 01:02:57 ID : MmMkqY4Gtut 0
힘든 시기에 만났구나
3 이름없음 2018/07/29 01:07:13 ID : atzgoZbcsmM 0
사실 그 학원은 학원이라기엔 조금 부족해보였어. 독학재수학원이랍시고 선생님이 상주해 계시지만 학생들이 나가건, 졸건 상관하지 않았거든. 오히려 내겐 감사한 일이었지만. 소규모라고 하기도 벅찬 아주 작은 그 학원은 타지역에서, 그것도 아주 멀리서 온 내게 첫날부터 큰 관심을 쏟았어. 특히 20살인데다가 얼마없는 여자였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어. 나는 그 관심들이 낯설고 달콤했어. 마른 땅의 단비 같았지. 그게 독인줄도 모르고.
4 이름없음 2018/07/29 01:11:16 ID : atzgoZbcsmM 0
첫날부터 나보다 한 살 많은 삼수생이 내 번호를 따갔고,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줄도 모른채 그곳 사람들의 호의에 벅차서 행복에 겨워하고 있었어. 게다가 내 방 사람들 거의 모두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오빠들이었고 나름 호감형 얼굴에 학원에 흔하지 않게 꾸미고 다녔던 나는 생각보다 눈에 띄는 존재였나봐. 정말 나는 그때 정말정말 행복했어. 내가 죽어서 천국을 가게된다면 그때 그 곳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엄청난 호의들. 그래서 난 너는 보이지도 않았어. 그 작은 학원에서 너라는 존재를 알게된건 보름이 지난 후였지.
5 이름없음 2018/07/29 01:15:33 ID : atzgoZbcsmM 0
너랑 처음 말은 하게된건 우리가 같은 시기에 배탈이 났을 때였어. 사실 그 전까지는 네 얼굴을 알고는 있었지만 별 관심이 없었거든. 20살의 나는 그렇게 행복했으면서 속으로는 불안에 떨었어. 이 호의들이 언제까지 갈까. 나는 그냥 미움받는게 존재일까. 나는 왜 미움을 받을까. 그 애들은 왜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했을까. 내가 윤리와 사상이라는 사탐과목을 선택한 이유는 그거였어. 내 삶에서 어떤 이유가 있어야 버틸것 같았거든.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어. 그애들이 나보고 죽으라고 하던 그 순간과 목을 매달려 가방끈을 계단에 묶던 그 순간이 자꾸 꿈에 나타났으니까. 네게 관심이 갈리가 없지. 너와 대화를 튼 이유는 정말 간단했어. "점심 때 죽먹을거야?"
6 이름없음 2018/07/29 01:20:00 ID : atzgoZbcsmM 0
너는 뭐랄까, 아주 조용하고 무심하게 대답을 했던거 같아. 사실 너랑 처음 밥을 먹었던 순간이 기억이 잘 안나. 말 그대로 우리는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밥을 같이 먹어야하는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7 이름없음 2018/07/29 01:29:25 ID : atzgoZbcsmM 0
너는 참 말이 없는 아이더라. 조용히 듣는게 특화되어 있는 사람들 있잖아. 내가 이야기하면 가만가만 끄덕이기만 하는 바람에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계속 쫑알거렸던건 나였어. 나도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8 이름없음 2018/07/29 01:35:02 ID : atzgoZbcsmM 0
어쩔 수 없이 내 이야기를 많이 하다보니 내 개인적인 것들까지 너한테 들렸나봐. 너는 정말 신중하게 들었어. 말하는 내가 어색해질 정도로. 우리의 배탈(?)이 빨리 낫지 않은게 다행인지 아닌지 어쨌든 덕분에 우린 친해질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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