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19/09/01 08:06:51 ID : 5eZbclcldvd 0
나는 현재 1년 조금 넘게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어. 8살 차이에 국적도 다르지만 서로 팔불출이라 꿀 떨어지게 연애 중이야. 하지만 날 아는 누군가 그 사람과 나의 이야기를 묻는다면 솔직히 당당하게 얘기할 자신은 없어. 때문에 익명의 힘을 빌려 여기서라도 얘기하려고 해.
2 이름없음 2019/09/01 08:15:20 ID : 5eZbclcldvd 0
때는 2018년 4월 즘. 내 직업 특성상 나는 독일 병원에 발령받게 됐어. 나는 원래 살던 곳, 캘리포니아나 아니면 미국 어딘가에 발령 받게 될 거라 굳게 믿고 있었기에 독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실감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근무 시간과 근무량으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라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가족이랑 더 떨어지게 되는 건 더더욱 싫었지. 결국엔 체념해 비행기에 타는 순간까지 아무 생각 않고 있었어. 공항에서 내 상관이 나를 마중나오고, 그 차에 올라타 독일어로 써진 간판과 사인을 볼 때 그제야 내가 독일에 홀랑 떨어졌구나, 하고 체감을 했다. 상관은 새벽 3시에 날 임시 숙소에 데려다주고 다음날 10시에 다시 온다고 했어.
3 이름없음 2019/09/01 08:22:14 ID : 5eZbclcldvd 0
나야 뭐 정신없이 잠들었지. 상관이 문을 부서저라 두드릴 때서야 겨우 일어났고. 그렇게 대충 이를 닦고 옷을 입은 나는 비몽사몽한 채로 상관에게 이끌려 앞으로 일하게 될 곳으로 가게 됐어. 상관은 이리저리 다니면서 건물 구조도 설명해주고 내 부서 사람들에게 소개도 시켜주고 그랬지. 그리고 나는 내 부서를 총괄하는 사람에게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그 분이 통화중이라 잠깐 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었어.
4 이름없음 2019/09/01 08:23:08 ID : k79bjxWnXAm 0
ㅂㄱㅇㅇ
5 이름없음 2019/09/01 08:26:20 ID : 5eZbclcldvd 0
그냥 벽에 기대 멍하니 기다리고 있는데 저 복도 끝에서 누군가 오는 거야. 우리 부서 유니폼을 입고 말이지. 그 사람은 날 지나치려다 문득 멈춰서서 내게 인사를 하더라고. 여기 새로 오는 사람이냐면서. 생긴 건 참 착하게 생겼었어. 아마 그 송아지 같은 눈이 한 몫 한 거겠지. 그런데도 딱 목소리나 말투, 풍채가 상관 같아서 나는 바로 예의를 차렸어. (내 직업을 예상하는 사람이 있을 진 모르겠지만, 내 직업은 계급이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상관에겐 늘상 예의를 꼬박꼬박 차려야 해. 이를 테면 상관한테 얘기 할 때 열중 쉬어 자세를 한다던가.)
6 이름없음 2019/09/01 08:33:15 ID : 5eZbclcldvd 0
열중 쉬어 자세를 하고, 네. 여기가 제 첫 발령지입니다. 하고 잔뜩 기합주고 대답을 했는데, 그 사람이 잠깐 멈칫하다가 웃는 거야. 그리고 자긴 상관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럴 필요 없다고 얘기를 했지. 나도 괜히 기합준 게 쪽팔려서 바로 자세를 편히 하고 내 소개를 했어. 나는 Lee 라고. 사실 유럽 국가에 오는 건 처음이고 시차도 적응이 안 된지라 얼떨떨 하지만, 만나서 반갑다고 말야. 그러니 그 쪽도 바로 자기 소개를 하고 급하게 또 처리할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다고 했어. 나는 그러라고 했지.
7 이름없음 2019/09/01 08:37:17 ID : 5eZbclcldvd 0
그렇게 그 사람이 바람처럼 떠나고 나서야, 나는 그 사람 얼굴과 이름을 곱씹게 시작했다. 그 사람은 자기를 Ace (에이스)라고 소개했어. 원래 다른 긴 성이 있는데, 그 성의 처음 알파펫 3개를 따면 Ace가 된다고 하더라. 좋은 이름이지. 에이스! 키는 한 170 좀 넘어보였고, 목소리는 단호하지만 사람 인상 자체는 참 좋았다. 아까 말한 것처럼 송아지 같은 눈에, 넓직한 코, 두툼하지만 결코 못생기지 않은 입술에 까무잡잡한 피부... 영어도 약간의 악센트는 있지만 수려해 처음엔 멕시칸이라고 생각했지. 아직 많은 대화를 안 해보고 일도 같이 안 해봤지만 꽤 좋은 사람 같았어.
8 이름없음 2019/09/01 08:38:30 ID : 5eZbclcldvd 0
생긴 건 어찌나 젊어 보이는지... 그때의 난 적게는 20살 끽해야 23살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27살이란 걸 들었을 땐 말을 잃었다.
9 이름없음 2019/09/01 08:41:52 ID : oFg0la8ktvu 0
보고 있어!
10 이름없음 2019/09/01 08:46:11 ID : 5eZbclcldvd 0
맞아, 질문은 언제든 자유롭게 해도 돼! 내 신상이 탈탈 털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대답해 줄 수 있어. 어쨌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In-Process 라고 병원과 내가 책정된 조직에 등록을 하는 과정을 밟아야 했고 (약 1달에서 길게는 2달까지 걸려.) 그 동안은 그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어. 간간히 스쳐지나긴 했지만 늘 바빠보였고, 나도 등록절차가 대부분 하루종일 잡아먹고 꽤나 까다로운 지라 굳이 말을 붙일 여유를 가지지도 못했지. 뭐,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서 Ace는 굉장히 일을 잘한다. 모든 일이 빠르고 정확하다-라는 소문은 여기저기서 듣긴 했지만.
11 이름없음 2019/09/01 08:46:34 ID : 5eZbclcldvd 0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12 이름없음 2019/09/01 08:51:02 ID : 5eZbclcldvd 0
그 소문 자체가 나에게 호감을 주긴 했어. 나는 일 잘하는 사람 좋아하거든. 어쨌든 그 이후로, 에이스와 두번째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건 4월 말 즈음 병원 내 도서관에서 였어. 나는 그날 병원 컴퓨터 엑세스를 얻기 위해 도사관에서 빌려주는 컴퓨터 앞에 앉아 필수 온라인 트레이닝을 3시간 째 하고 있었지. 그런데 에이스가 들어와 내 맞은 편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는 거야. 날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하더라고. 너 리(Lee) 맞지? 이러면서. 그제야 나는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때고 인사를 했어.
13 이름없음 2019/09/01 08:57:26 ID : 5eZbclcldvd 0
어, 안녕?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에이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진부한 대답을 했어. 나야 뭐... 그냥 저냥 지냈지, 라면서. 나는 3시간 째 계속되는 온라인 트레이닝에 지치기도 했고, 내 뇌를 좀 환기시켜 보고자 대화를 거기서 끊지 않았어. 나쁘지 않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 나는 지금 온라인 트레이닝 3시간 째야. 너무 힘들어... 내가 그렇게 불평을 하자 에이스는 온라인 트레이닝이 다 그렇다며 언젠가는 끝날거라고 사람 좋게 웃더라고. 그리고 자기는 지금 Duty-Driver 중이라고 했어. Duty-Driver은 병원 내에서 한달에 적어도 한 번, 많게는 두 번, 본인 부서 일과는 별개로 맡게되는 일종의 잡무야. 그 잡무 날에는 24시간 대기하며 병원 프론트에서 차량이 필요하단 전화를 받으면, 병원에 등록된 차를 끌고 전화를 건 사람들을 데려오거나 데려다주는 일을 해. 운전수가 필요하단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는 병원 내 아무데서나 대기하고 있으면 된다고 설명해줬어.
14 이름없음 2019/09/01 09:01:58 ID : 5eZbclcldvd 0
그때부터 대화 물꼬가 트여서 이것저것 얘기하기 시작했어. 언제 독일에 왔는지, 일은 어떤지, 또 국적은 뭔지. 나이는 몇 살인지. 에이스는 꽤나 놀랄 만한 대답들을 내놓았다. 일단 국적부터가 복잡했는데... 어머니는 중국인+필리핀 혼혈이시고 아버지는 멕시칸+필리핀 혼혈이셨어. 즉 에이스는 중국인+필리핀+멕시칸 혼혈이지. 고등학교 때까지 필리핀에서 자라서 필리핀어가 유창하고 스페인어는 조금 할 줄 안다고 했어. 온리 한국인 토종인 나는 네가 참 생소하다... 라고 대답했더니 놀라면서 내가 처음에는 일본인인 줄 알았다네.
15 이름없음 2019/09/01 09:06:55 ID : 5eZbclcldvd 0
그 다음으로 날 놀래킨 건 나이였어. 난 그때 19살이었거든. 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나랑 비슷하거나 조금 많을 줄 알고, 몇 살이야? 23살? 이렇게 물었는데. 장난스럽게 웃더니 아니, 맞춰봐. 하더라고. 나는 의아해 하면서, 그것보다 어려? 20살? 불렀는데 더 웃는 거야. 난감해하면서 그럼 더 많은가...? 스물 넷? 이라고 얘기하는데 내가 18살 부터 25살까지 쭉 부르고 나서야 자기는 27살이라고 하더라고.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바로 미친놈. 농담이지? 라고 욕을 했어. 정말 그렇게 안 보이는 젊은 얼굴이었거든. 욕한 건 바로 사과했지만, 에이스는 넉살 좋게 웃으며 다들 내가 어린 줄 알아. 이젠 적응 됐어. 라고 말하더라.
16 이름없음 2019/09/01 09:12:32 ID : 5eZbclcldvd 0
그 뒤로도 여러가지 많은 얘기를 했는데, (지금은 다 기억 안나지만...) 그 중에서 내 눈을 가장 사로잡았던 건, 에이스의 경청하는 태도였어. 사람 말을 듣는 자세가 어쩌면 그리 바른지. 사람 눈을 곧고 당당하게 쳐다보면서 적당히 반응 해주고, 말 도중에 절대 끼어들지 않고, 내 조직 내에서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거친 언어 하나 없이 똑부러지게 말 하고. 두번째 대화하는 거지만 사람이 참 괜찮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 이게 27살의 연륜인가 싶기도 하고. 너 사람 말도 참 잘 들어주고, 착하게 생격어. 라고 칭찬을 했어. 그 때 에이스를 부르는 전화가 울려서 더 많은 대화는 못하고 가버렸지만 꽤 친해졌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어. 내 부서내에 아시안계는 에이스 뿐이라 뭔가 동질감도 솟아났고.
17 이름없음 2019/09/01 09:15:52 ID : 5eZbclcldvd 0
이렇게 써 놓고 보니까 참 나나 에이스나 정상인 사람 같아 양심에 좀 찔린다.
18 이름없음 2019/09/01 09:19:27 ID : 5eZbclcldvd 0
나랑 에이스 둘 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대부부은 정상적이게 생활해. 다만 가끔 똘끼 기질이 튀어나와서 그렇지. 그런데 내 똘끼가 이 미친 연애의 시작점이 될 줄은 나도 이 때 꿈에도 몰랐어.
19 이름없음 2019/09/01 09:23:53 ID : 5eZbclcldvd 0
여기서 잠깐 내 얘기를 꺼내자면, 나는 일이 끝난 뒤에 핸드폰이나 걷기 이외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집에 식당에서 저녁먹고 돌아오면 차가 없으니 딱히 나갈 곳도 없고, 술이랑 클럽은 아예 해본적도 없고 즐기지 않는지라 나가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은 다 거절하고, 컴퓨터도 아직 없고... 그냥 핸드폰으로 트위터를 하거나, 페이스북을 보거나, 가족과 문자하다가 잠들어버리는 게 대다수. 때때로 나가서 내 병원과 숙소 근처를 걸어보긴 했지만 그게 다였어. 사실 근처에 도보 거리로 성이 있다고 해 가보곤 싶었는데, 친구들은 걷는 거 다 싫어해서 혼자 노래 들으면서 걸었지.
20 이름없음 2019/09/01 09:27:33 ID : 5eZbclcldvd 0
내가 세 번째로 에이스를 만나게 된 날은 5월 첫째주. 이건 아직도 기억나. 5월 5일이었어. 그냥 평소처럼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일어날 준비를 하는데, 식당 입구에서 에이스가 보이는 거야. 도서관에서 대화 나눈 날 이후로 보지 못했고, 나름 몇 안 되는 아는 얼굴이라 반갑게 인사를 했지. 나는 에이스가 그냥 인사 받아주고 갈 줄 알았어. 그런데 나를 보고 인사를 하더니 나한테 다가와 내 맞은 편에 앉는 거야. 지금 와서 에이스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겠대. 그냥 내 앞에 앉아서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나. 내 앞에 앉고 나서 잘 지내냐고 묻더라고. 나는 차차 적응하고 있다고 그랬지. 일 끝나면 딱히 할 건 없어서 핸드폰하거나 걸으면서 잠드는 게 대다수지만.
21 이름없음 2019/09/01 09:30:56 ID : 5eZbclcldvd 0
핸드폰이나 혼자 걷는 거에 살짝 질려있던 나는 혹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까 싶어서 에이스에게 너는 일 끝나면 뭐하냐고 물어봤어. 그랬더니 자기는 클럽이나 술마시는 쪽은 전혀 아니고, 운동이나 그냥 자기 숙소에서 컴퓨터를 한다네. 그리고 나한테 묻는 거야. 혹시 내가 걷는 걸 좋아하냐고. 나는 냉큼 대답했지. 응, 나 걷는 거 좋아한다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별로 그쪽이 취미가 아닌지 같이 걷자고 물어보는 족족 거절당한다고... 며칠전엔 근처에 전망 좋은 성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어딘지만 알면 걸어서 가보고 싶다고. 그냥 내 취미가 걷기라 흥분해서 막 이것저것 얘기를 했어.
22 이름없음 2019/09/01 09:37:15 ID : 5eZbclcldvd 0
그렇게 걷기에 대해 한 5분정도 열변을 토했을까. 잠잠히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에이스가 묻는 거야. 그럼 나랑 같이 걸어볼래? 나는 어? 했지. 자기도 걷는 거 좋아한다고. 보통은 다른 친구랑 산책로를 운동삼아 뛰지만, 자기도 걸으면서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고. 자긴 성이 어딨는지도 아는데 오래 걷는 거 싫어하지만 않으면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나는 신나서 바로 응!! 어!! 나 갈래! 진짜 고마워! 라고 소리치듯 대답했다. 이때는 에이스한테 이성적인 감정이 하나도 없었어. 사람이 착하고 바라 사람대 사람으로 호감/동경은 있지만 이성적인 관심은 아닌... 그냥 일 끝나고 혼자 그렇게 유럽 국가 방구석에 처박히거나 혼자 있는게 외로웠기에 에이스의 그런 제안은 내게 참 단비같았지. 얘기하기도 편하고, 같이 걸으면서 아이스크림 맛있는 장소도 알려주고 길 안내까지 하주겠다는데 내가 마다할소냐. 에이스도 그땐 나한테 하나도 이성적인 관심이 없다고 했어. 제로. 빵. 영. 그냥 그렇게 식당에 혼자 앉아있는 모습이 자기 예전에 처음 왔을 때 모습이랑 닮아서, 또 같은 아시아 계니까 동질감이 들어서 동생마냥 챙겨줘야 겠다고 문득 생각이 들었대. 그리고 사실 내가 걷는 거 좋아한다고 했을 때 진짜 내가 걷는 걸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냥 장단 맞춰줄라고 꾸며낸 건지 반신반의 했다고 했어.
23 이름없음 2019/09/01 11:53:25 ID : mJWjdCmFijg 0
보고 이써
24 이름없음 2019/09/01 20:44:49 ID : nBe1u5Qk5O3 0
스레주 글을 참 잘 쓴다. 잘 듣고 있어.
25 이름없음 2019/09/01 22:30:18 ID : 5eZbclcldvd 0
들어줘서 고마워. 많이 횡설수설 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해주니 참 고맙다.
26 이름없음 2019/09/01 22:35:30 ID : 5eZbclcldvd 0
그리고 에이스는 자기가 저녁시간에 운동 끝나면 연락하겠다고 했어. 나는 들뜬 마음에 집에와서 씻고, 낮잠 좀 자고, 그리고 부모님이랑 통화를 하고 있었지. 그때가 한 오후 6시 즈음이었는데, 에이스에게 문자가 왔어. 같이 걷지 않겠냐고. 부모님이랑 카톡으로 통화중이었던 지라, 나는 지금은 좀 볼일이 있는데 미안해. 조금 나중에는 안 될까? 라고 답을 보냈다. 처음에 에이스는 그게 거절의 뜻인 줄 알았대. 그리고 아, 걷는 거 좋아한다는 얘기는 그냥 남들처럼 꾸며낸 거구나- 했고. 그래고 내 두변 째 답을 받았을 때 조금 놀랐다고 해. 19시 30분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라고 보낸 답.
27 이름없음 2019/09/01 22:38:40 ID : 5eZbclcldvd 0
에이스는 당연히 괜찮다고, 천천히 일 끝내고 보자고 답장을 줬어. 부모님과의 통화를 마치고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운동화 딱 신고 나갔지. 참고로 에이스랑 나는 같은 숙소에 살았어. 나는 3층 에이스는 1층이었지만. 숙소 앞에 나가니까 에이스도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걷기 좋고 편한 옷으로 차려입고 있더라고. 별 거 아닌데, 참 단정하다, 라는 생각을 했어. 어쨌든 그렇게 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대화는 시작되었지.
28 이름없음 2019/09/01 22:46:10 ID : 5eZbclcldvd 0
어떻게 이 직업을 택하게 되었느냐부터 시작해서 일은 어떤가. 부서내 사람들은 어떤가.직업 전에는 어떤 일을 했는가. 그때의 삶은 어땠나. 세세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대충 이런 얘기들이었어. 또 성 가는 길에 아주 가파른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걸 사람들이 '심장 운동 언덕'이라고 부른다고 했어. 가끔 아침에 운동할 때 이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게, 에이스는 말을 할 때 참 격식있고, 사람에 따라 그 눈높이를 맞춰줄 수 있다는 거야. 나랑 말할 때 어른이라고 해서 가르치려 들지도 않고,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주제를 정하고, 농담을 던질 때도 그 농담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지 사과를 하고. 소소한 것들인데 평소엔 잘 보지 못하는 배려. 그게 에이스에 대한 호감을 한층 높여줬던 것 같아. 말하기도 정말 편했고. 물론 에이스가 내 얘기를 열심히 들어준 만큼, 나도 에이스 얘기를 정말 열심히 경청했어.
29 이름없음 2019/09/01 22:51:11 ID : Dtg40mmrdU0 0
누구라도 그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배려로 그 상대의 됨됨이를 보면 호감을 느끼게 될 거 같다.
30 이름없음 2019/09/01 22:52:50 ID : 5eZbclcldvd 0
맞아. 사람 됨됨이. 더 예쁘게 말해줘서 고마워!
31 이름없음 2019/09/01 22:58:28 ID : 5eZbclcldvd 0
그 성까지가 내 숙소 내에서 20-25분 정도 떨어져있는 곳이었는데, 그 시간이 참 빨리 가더라. 가는 길에 구불구불한 길을 가진 마을도 지나갔는데 참 예뻤어. 가는 동안 나는 에이스에게 계속 고맙다고 했어. 나는 그때 진심으로 고마웠어. 방에 혼자 할 것도 없어서 외로웠는데, 이렇게 이곳저곳 알려줘서 고맙고, 성까지 안내도 고맙고, 얘기도 들어줘서 정말로 고맙다고. 내가 언제 밥 한번 사야겠다고. 그랬더니 자기 제안이었는데 선뜻 동행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더라. 동행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 콕 박혔다. 기분좋은 박힘이었어.
32 이름없음 2019/09/01 23:03:33 ID : 5eZbclcldvd 0
어쨌든! 성에 도착해서 계단을 쪼로록 올라 제일 높은 곳에 가서 경치를 바라보는데 속이 탁 트이더라고. 워낙 작은 성이라 둘러보는 건 5분도 안 되어서 끝나더라. 이제 갈까... 했는데 성 아래로 보이는 마음에서 축제가 열리는 게 보이는 거야. 나는 에이스에게 물어봤지. 저거 축제 열리는 거야? 에이스 왈, 응 축제야. 독일에선 이렇게 간간히 저녁 즈음에 축제를 열곤해. (그러니까 야시장 같은 개념이지.) 저 마을 멀어보여도 가까워. 아까 우리 심장 운동 언덕에서 오른쪽 샛길로 빠졌지? 그 심장 언덕을 쭉 내려가면 저 마을이야.
33 이름없음 2019/09/01 23:08:20 ID : 5eZbclcldvd 0
나는 성까지만 보고 집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저 말을 하는 에이스가 그 축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거야. 혹시나 해서, 저기 가고 싶어? 라고 물어봤더니 가서 구경하고 싶대. 보는 거 오랜만이라고. 약간 피곤하긴 했는데, 나도 이 참에 독일 문화나 한번 구경해보자! 싶어서 가자고 했어. 길안내 잘 해줘~ 라는 말과 함께. 다시 구불구불 마을길을 걷고, 심장 운동 언덕 아래로 내려갔을 때 축제 입구가 보였어. 풍선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손에 술 한병씩 들고 걸어다니는 어른들도 보이고, 맛있는 핫도그랑 햄버거 냄새도 나고. 어느새 피곤함 보다는 들뜸이 앞서서 내가 에이스를 재촉했어. 빨리 들어가 보자고 말야.
34 이름없음 2019/09/02 00:44:22 ID : 5eZbclcldvd 0
핫도그/햄버거 가게, 초콜릿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 몇 안 되는 놀이기구, 독일 기념품 가게, 그리고 게임 가게까지... 오랜만에 보니까 신나더라. 한바퀴 빙 돌면서 구경하는데 에이스가 그냥 보기만은 심심한지 게임이라도 한번 하고 갈까?라고 제안했어. 하고는 싶었는데, 나는 정말 성만 걸으러 나온 거라 지갑이고 돈이고 하나도 안 들고 나와서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어. 그랬더니 괜찮다고, 어차피 자기가 가자고 한 거고, 돈도 있으니까 조금 즐기다 가자고 날 보채더라. 그리고 묻는 게, 너 사격 잘해? 에이스는 눈은 모조 사격장 가게에 가 있었어. 가짜 총으로 판에 걸려있는 점수를 사격해 명중한 점수만큼 상품을 받는 게임. 나는 사격을 못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도전해보자고 했어. 한국돈으로 한 700원되는 돈을 내고 내가 먼저 총을 잡았어. 총 10발. 나 5발, 에이스 5발 나누기로 했다. 거의 1년만에 하는 사격이라 잘 하진 못했어. 머쓱해하며 총을 넘기자 에이스는 당당하게 난 사격 잘하는 편이야, 하곤 남아있는 5발 중 5발을 다 맞추더라.
35 이름없음 2019/09/02 00:50:02 ID : 5eZbclcldvd 0
결국 우리가 상품으로 받은 건 동그란 검은색 구슬에 해골이 그려져 있는 작은 열쇠걸이였어. 나는 열쇠도 없고 딱히 쓸데도 없으니까, 또 일단 내 돈으로 한 게임이 아니니까 에이스에게 주려고 했는데 나보고 가지라고 했어. 자기는 열쇠걸이 많다고. 그냥 기념으로 가지고 있으라고. 얼떨떨하게 고맙다고 하면서 받았지. 그 열쇠걸이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 내 가방에 달고다녀. 그리고 에이스는 좀 출출하다면서 핫도그 가게에 멈춰섰어. 나보고 뭐 먹고 싶냐고 묻는데 거기까지 얻어먹는 건 너무 너무 미안해서 그냥 제일 싼 음료수를 골랐어. 에이스는 아마 핫도그를 골랐던 것 같아. 그때 알게 된 건, 에이스는 케첩이나 마요네즈, 겨자 같은 소스를 싫어한다는 거였어. 요리 중에 섞여 있는 건 괜찮지만 생으로 그렇게 뿌려먹는 건 딱 질색이라고. 입맛 참 특이하네 싶었지. 어쨌든 워낙 작은 축제라 더 볼 것도 없고, 나는 돈도 없고, 그만 돌아가는 결론이 났어. 돌아가는 길엔 서로의 음식 취향을 얘기했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아주 편하고 재밌는 대화였다.
36 이름없음 2019/09/02 00:53:53 ID : 5eZbclcldvd 0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어서 숙소에 도착하고, 나는 에이스에게 고맙단 인사를 했어. 오늘 나랑 동행해줘서 정말 고마워. 독일와서 이렇게 재밌었던 날은 처음이야. 덕분에 이것저것 알게 되기도 했고. 열쇠걸이도 예뻐. 정말로 이건 내가 나중에 갚을게. 그러자 에이스는 자기야말로 고맙다고 했어. 그리곤 내일 또 걸을까? 라고 묻더라.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자고 했어.
37 이름없음 2019/09/02 04:41:18 ID : wspgnU6runv 0
ㅂㄱㅇㅇ
38 이름없음 2019/09/02 05:40:19 ID : 5eZbclcldvd 0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다음날 일이 끝나고 7시 즈음에 우리는 다시 숙소 앞에서 만났어. 우리는 병원을 따라 쭉 걷기로 했지. 그러면 원으로 걷게 되거든. 한바퀴 도는데 천천히 걸으면 20분 정도 소요 돼. (참고로 병원은 바로 숙소 앞 횡단보도 건너 도보로 6-7분 거리야.) 에이스는 나한테 먼저 물었어. 오늘 하루 어땠냐고. 나야 아직 병원에 등록 중이니까 브리핑만 주구장창 듣고 있다고 지겹다고 했어. 일 시작하면 정말 열심히 잘 할 자신있다고. 빨리 배울 거라고.
39 이름없음 2019/09/02 05:50:27 ID : 5eZbclcldvd 0
그랬더니 그 말 여기 있는 3년 내내 딱 한 번 들어봤다고 하더라. 자기 부서 사람들은 열심히 하는 사람은 소수고 그 다음은 다 농땡이 치기 바쁘다고. 그런 자세로 처음부터 오는 사람 별로 없는데, 일단 내가 일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마음 자세는 괜찮다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칭찬 들은 게 좀 머쓱해서 동양인이 다 그렇지~라고 대답했어.
40 이름없음 2019/09/02 05:56:11 ID : 5eZbclcldvd 0
그러다 보니까 얘기가 동양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어. 동양계 사람들이 일하는 방법이랑 여기 있는 독일인이나 미국인이 일하는 차이. 각자 나라에는 어떤 문화가 있는지. 왜 또 우린 훈육 차원에서 좀 맞으면서 자라잖아. 그래서 어릴 때 무슨 잘못을 해서 어떻게 맞았는지, 필리핀 학교는 어땠는지, 한국 학교는 어땠는지. 미국에 넘어와서 겪은 어려움이 뭐였는지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얘기를 했다. 우리가 그렇게 얘기하다 시간을 봤을 때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밤 11시였어. 4시간 동안 주구장창 걸으면서 얘기를 한 거야. 한번도 끊김없이,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41 이름없음 2019/09/02 17:45:19 ID : wGq6oY7f9a7 0
보고있어!!
42 이름없음 2019/09/02 20:10:09 ID : V9dzRDxWrtc 0
보구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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