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 늦여름에, 어느 학교로 전학을 갔어. 한 학년에 20명에서 25명씩 5반은 되었으니 사람이 꽤 많았지. 그 많은 사람을 뚫고 갈 자신이 없던 나는 아침일찍 아버지의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어. 방학때 미리 수속도 밟고 담임선생님께 인사도 드렸으니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곤 차에서 내려 혼자 학교에 발을 들이밀었고. 때마침 나의 담임선생님이 되실 분께 문자를 받아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교무실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어.
한 10분쯤 그러고 있었을까, 한 친구가 가방을 들고 교무실문 앞으로 왔어. 문을 몇번 흔들어 열리지 않은걸 확인하고 짜증이 났는지 몸을 획돌려 내가 서있던 벽쪽으로 와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등을 기댔어. 졸렸는지 그렇게 눈까지 감더라. 사교성이 꽝이었던 나는 그 친구에게서 최대한 거리를 뒀고. 그 발걸음 소리가 거슬렸는지. 걔가 움직일거면 소리 좀 작작 내고 다니라고 하더라고. 실제로는 조금 더 껄렁하긴 했는데... 아무튼 그 말과 분위기에 쫀 나는 마침 서있던 자리에 얼음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얌전히 주저앉았어.
그렇게 또 5분이 지났고, 계단을 올라오는 구두소리가 들렸어. 보통 학생은 구두를 신지 않으니까, 분명히 선생님이라 생각했고. 우리층쪽에서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덕에 아, 이 교무실 선생님이시구나 라는 생각에 막 기뻐했던 것 같아.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무지 안심했거든.
그 안심이 무색하지 않게, 그 구두소리의 정체는 그 교무실의 선생님이었을 뿐더러. 방학때 미리 인사드린 담임선생님이셨어. 더한 안심을 한 나는 선생님이 문쪽으로 오시기 전에 미리 그곳에 향해버렸고, 조금 떨어진 구석에서 자고있던 그 친구는 깨울까 하다가 쫄아서 그만뒀어.
선생님이 전학생, 그러니까 나를 잘 챙겨주라고 부러 걔 옆에 앉게 해주셨는데. 처음에는 툴툴거리더니, 자기 무리 애들이 놀자고 하는 것도 뿌리치고 쉬는 시간마다 학교 구경도 시켜주고 밥도 같이 먹어주더라. 체육 시간에는 짝도 해주고. 어느날에는 갑자기 사는곳 같은 신상이나 하는 게임 같은걸 털어가더니 자기 무리 애들이랑 접점도 만들어 친해지는걸 도와줬어. 전학 갈때마다 잠깐씩 관심만 받고 단편성으로 말 거는 애들만 있었지, 꾸준하게 말 걸어주고 챙겨주고, 다른 친구들에게 막 친해져보라고 말해주는 애는 그때 처음 만났어.
그렇게 2주가, 3주가 지났어. 선생님의 강요에서 시작한 관계였으니까 금방 자기 친구들한테 갈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짝지어 하는 활동에 계속 나 데리고 다니고, 팀으로 몇명씩 모이는 것도 막 오바 떨면서 자기가 챙겨 다녔어. 내가 다른친구들하고는 아직 좀 낯가리는 걸 알았는지 밥은 막 따로 먹자고 했어. 내가 괜히 미안해져서 마음에도 없는 말 꺼내니까 자기는 나랑 단둘이 먹는게 편하다고 막 웃더라.
그렇게 한달이 좀 지났을무렵에는 나랑 걔랑까지 해서 한 6명이서 지지리도 몰려다녔어. 맨날 쉬는시간마다 모여있고, 점심시간에는 다른반 애들이랑 섞여서 농구하고. 하교는 방향 같은 애들끼리 했는데, 어쩌다보니 그게 나랑 걔였어. 사는 곳은 끝까지 잘 안알려주면서 달라붙고는 내 집 앞까지 항상 같이 가길래. 같은 아파트에 사는구나 했지. 그게 아니라는건 너무 나중에 알았지만.
그 무리도 물론 편하고 재밌었지만. 가장 편했던건 아무래도 걔였어. 걔가 먼저 이리 치대고 저리 치대고, 놀러가자 찡찡거리고 주번 활동 때마다 끌고가는식으로 귀찮게 굴어준 덕이 컸지. 꼭 둘이서만 놀자고 졸랐는데 그때마다 등짝 한대 엉덩이 한대 때리고 걷어차면서 데이트냐고 막 웃곤했어. 그럼 걘 아프지도 않은지 실실 웃으면서 또 등에 달라붙었지.
이어서 적어볼게.
아버지의 일은 그래도 차츰 안정되어서, 그나마 오래 그곳에 머물 수 있었고, 그렇게 그 무리와 함께했던 반년이 지났어. 중간중간, 시끌벅적하고 실없는 일상들이 섞여있었고. 난 그게 좋았어. 어울려서 장난치는거 별로 안좋아한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걸 그때 알았지.
가장 편했던건 걔였다고 말했었잖아. 그래서 나는 방학에도 걔와 함께 다녔어. 사실 걔쪽에서 먼저 멋대로 집앞에 찾아와 전화를 하는 바람에 끌려다녔다는 느낌도 있지만, 결국 문을 열고 오래도록 돌아다녔던건 내 선택이었지.
그때당시에는 좋은 친구가 생긴것 같아 좋았어.
내가 걔한테 느끼는 감정이 마냥 우정이 아니란건, 좀 갑작스레 깨달았어.
걔가 스킨십이 좀 많은 편이었는데. 어떤식이냐면... 맨날 등에 매달리고, 내가 앉아있을때는 내 머리위에 턱 올리고. 손목 붙잡고 손잡고 막 껴안고는 해맑게 꺄꺄 거리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애들이랑 떠드는 식... 나는 원래 이런놈이구나... 하면서 넘겼는데. 어느날부턴가 기분이 좀 이상한거야.
주변에서도 니들은 징글징글하게 붙어다닌다 그러고, 3학년때 담임선생님은 아예 우리 둘을 세트로 부르셨을 정도였는데... 분명 진짜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거든? 근데 스킨십에 이상한 기분을 느끼니까 저런 말들까지 신경 쓰였어.
간질간질한데 불쾌하진 않고, 오히려 걔 반응에 더 신경쓰게되더라.
근데 그놈은...애들이 장난하는거엔 몰랐냐, 우리 이미 100일됨 이런식으로 대꾸하고. 선생님께서 그렇게 부르면 싱글싱글 웃고 말더라고. 빌어먹을 놈이 그렇게 웃으면서 또 달라붙는데, 그 이상함을 느끼고나서는 평소처럼 대꾸를 못하겠더라.
그래서 피해다녔어. 3학년 한 한달정도를 피해다녔을걸. 같은반이라 쉬는시간마다 다른애한테 피해있고 집은 뛰어가는 식이었는데... 쫓아오진 않더라고.
그래도... 나도 영영 어색하게 멀어지고 싶지는 않아서. 그 말 듣고 좀 지나서. 걔한테 먼저 말 걸었어. 집 같이 가자고. 그러니까 걔가 막 벙쪄있다가 엄청 활짝 웃으면서 알겠다는거야. 그 웃음이 진짜 귀여웠어. 덩치도 좀 있는편인데다 귀엽상은 아니었는데, 막 환하더라. 예뻤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그 뒤로 한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같은 동네에서 같이 등교하고 점심시간 학생회 시간때마다 마주치다 같이 하교하는 생활이 이어졌어. 여전히 그 애는 스킨십이 많고 밝고 귀엽고. 예뻤어.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기 약 2달전. 또다시 이사를 가게되었어. 항상 별 생각없던 이사가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물이 날것 같더라. 그 소식을 그때 무리애들이랑 걔한테 전하니까, 송별회라도 해주겠다고 이사가는 전날밤, 내 방에 모였어.
함께 시끌벅적 떠들다보니까 시간이 너무 늦었더라고. 그래서 애들 급하게 차비줘서 보내고, 나랑 매일 같이 등하교하던 걔는 따로 데려다주려고 슬리퍼랑 가벼운 가디건 걸치고 나왔어.
근데 걔가 자꾸 나를 보내려고 하는거야. 그래서 내가 마지막인데 내가 데려다주면 안되는거냐고 사정사정하니까.
귀가 붉어져서는, 자기는 반대편 동네 산다고 말하더라
반대편동네에서 우리집까지.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렸어. 내가 괜히 애들 차비를 주면서 보냈을까.
근데 그런 말을 들으니까 머리가 띵해서 아무말도 못하겠더라. 한참을 그러고있으니까, 걔가 내 머리에 딱밤 한대 놓으면서. 체력도 기르고. 무엇보다 나 외로울까봐 그런거라고 막 변명을 하더라고.
자기 딴에는 변명이라고 했을텐데. 빨간 귀랑 더듬는 말투때문에 그냥 귀엽기만 하더라
고2때 전학이라니, 너무 애매하잖아. 그래서 같이 다니는 놈들은 여럿 있었는데, 그 15살의 그놈들만큼 편해지지는 않더라. 그래서 정을 더 못붙이고 계속 걔네들만 붙들었어. 그 빙구놈들은 또 착하긴 착해서 욕하면서도 놀아주고, 걔는 위에서 말한것처럼 찾아와주고 찾아오라고 해주고 그랬지.
입시가 정말정말 힘들었는데, 걔네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큰 힘이 되었어.
그렇게 전학간 학교에 정붙이지 못한 채 1년이 지났고, 고3이 되었어. 사실 내가 집안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어. 그래서 대학 대신 취업을 하려했고, 그 얘기를 어쩌다보니 걔한테도 했어.
10대의 자존심이란게 뭐라고, 티가 났을텐데도 애써 꾸역꾸역 감췄던 말들을 고3이 된다는 부담감때문인지 뭔지 때문에 다 털어놓았는데. 그냥 좀 눈물이 나더라. 나 공부 잘했었거든.
그런데 걔는 정색하고 말하더라. 니 대학 가고싶어 했잖아. 라고. 거기서 뭐라하기도 그래서 그냥. 이 형편에 대학은 무슨, 돈이나 벌어야지. 이렇게 대답해 버렸어. 그러니까 걔가 더 열심히 해서든 목표를 낮춰서든 장학금이라도 받아서 가라고. 네가 왜 포기하냐고 막 화를 내더라고.
다시 돌아올 때 걔랑 수능 끝나는 날 둘이서만 따로 있기로 했어. 원래는 6명이서 모이기로 했는데, 취소했지. 걔네도 알겠다고 하길래 맘편하게 둘이서 함께할 생각을 했어.
걔랑 뭐할까. 둘이서 뭘 먹을까, 뭐 주고싶은데 돈 있나... 이런 생각을 하고 여러 대화도 나누면서 남은 시간을 보냈어. 대학을 가든 안가든 수능성적이 있으면 과외라도 할 수 있다는 말에 꼬셔져서 꽤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지.
그렇게 수능전날. 걔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어. 그래서 무턱대고 전화를 걸었지.
걔는 흔쾌히 받아서 꽤 오래 통화도 해줬어. 나는 떨린다 이러면서 말을 했고, 오후 8시쯤 되었을때. 슬슬 자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끊으려 했어.
내가 망설이면서 타이밍 재는 것 같으니까 걔가 웃으면서 이쯤 끊을까 하는거야.
그래서 내가 그러자고 말을 했고. 평소같으면 잘자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을 애가 좀 머뭇거리더라고. 그래서 나는 무슨 할말 있냐고 물었고. 걔는 대뜸, 야. (내이름) 너 내일 만나기로 한거 잊지마라 이러면서 전화를 끊었어.
나는 좀 어이없기도 하고 그래서, 문자로 보고싶다 내일봐 이렇게 보내고 잠들었지. 너무 이른거 아닌가 싶긴한데, 난 잠을 좀 자야 문제가 풀리는 편이라 그렇기도 하고 수험장까지 거리가 있는 편이기도 해서 그랬어.
보내고 곧장 잠들었기에 답장도 확인 못했지
수능날 아침은 평화로웠어. 도시락을 싸서 나가려는 길에 눈도 제대로 못뜬 동생들의 응원을 받고 나보다 일찍 집을 나가신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쪽지도 받았어.
폰은 전원을 꺼 가방에 넣었고. 그렇게 도착해서 무슨 정신인지 모르게 시간을 보내니, 어느새 제 2외국어까지 다 봤더라.
결국 그 해에 대학은 못갔어. 1년을 걔를 그리워하면서 살았고.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날 도와준건 그 15살의 빙구놈들이었고. 술에 꼴고 담배에 꼴아있던 내게 한, 걔가 니꼴보면 퍽이나 좋아하겠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어. 걔네 부모님한테도 너무 늦게 찾아뵈었는데, 하시는 말씀이. 날 그렇게 좋아했대. 매일 내 얘기만 하고, 그랬다더라고.
그 말들에 뒤늦게 정신차리고 일어서니. 21살 초입이더라. 걔가 대학은 가라고 했던게 생각나서. 그 뒤로 제정신 차려서 1년을 더 공부해서 22살에 대학 들어갔어. 꽤 잘 갔지. 그럼 걔가 좋아할 것 같았거든. 더 좋은 선택지가 있었는데, 거긴 장학금을 못받아서 못갔어. 이런 내 사정 걔도 이해할거라 믿으며 학교를 다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