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hhxO3Cry5cJ 2019/04/13 19:24:21 ID : 7cMoZbjz81j 0
그냥 어디 말 할 곳 없는 것들을 끄적이는 곳. 난입은 자유긴 한데 난입할 이야기가 있으려나?
2 ◆hhxO3Cry5cJ 2019/04/13 19:38:37 ID : 7cMoZbjz81j 0
이름이라는 건 그 대상의 모든 것이다. 또한, 이름은 그것이 탄생했을 때부터 다 스러져 없어질 때까지 곁에 머물며 함께하는 존재이다. 나는 이렇게나 중요한 이름을 내 일기장에 허투루 붙여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 일기장에 이름은 천천히 생각한 뒤에, 진짜 멋들어진 제목을 지어 줄 것이다.
3 ◆hhxO3Cry5cJ 2019/04/14 11:52:35 ID : 7cMoZbjz81j 0
나는 완벽을 추구한다. 나는 매분 매초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를 고민하고 걱정한다. 또 지나치게 양심적인데다 무엇을 하던 항상 정해진 규칙과 지시, 기준 등에 집착하여 얽매인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분노와 경멸로 휩싸인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4 ◆hhxO3Cry5cJ 2019/04/14 11:56:33 ID : 7cMoZbjz81j 0
그렇다면 나는 완벽한 인간인가? 전혀 아니다. 나는 심각하게 불완전하다. 참을성과 인내심이 부족하고 쉽게 분노한다. 또한, 감정표현을 잘 하지 못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따듯한 말 한 마디를 해 주는 것 대신 주변 사람들을 혐오하고 헐뜯는다.
5 ◆hhxO3Cry5cJ 2019/04/14 12:24:27 ID : 7cMoZbjz81j 0
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기에 모두들 나를 바르고 성실한 모범생쯤으로 생각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저 착한 일들을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게 아니라 지키지 않았을 때에 사람들의 실망과 마음속 깊은 곳에 공포가 너무나도 커서 강박적으로 지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다들 나를 성실하다고 칭찬하고 참 바르다고 칭찬하며 너무나 착한 아이라고 칭찬한다. 나는 이 칭찬들이 너무 역겹다. 내가 아닌 다른 놈을 칭찬하는 기분도 들고 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저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그래서 난 칭찬을 혐오한다.
6 ◆hhxO3Cry5cJ 2019/04/14 12:40:55 ID : 7cMoZbjz81j 0
겉으로 보이는 나는 점점 완벽해져 가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좋아한다. 맡은 일은 알아서 잘하고 착하고, 매사에 밝으며 유쾌하니까. 물론 겉으로만 좋아하는 척일 가능성이 높지만 뭐 겉으로 싫어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상관없다. 또한 겉껍질은 동경에 대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신기해하며 부러워하고 칭찬한다.
7 ◆hhxO3Cry5cJ 2019/04/14 12:47:41 ID : 7cMoZbjz81j 0
반면에 속은 어떠한가. 내 속은 겉과 완전히 다르게 결함투성이며 많은 것들이 결여되어 있다. 속 좁고 옹졸하며 세상을 다 알았다는 듯한 오만함. 타인에 대한 끝없는 분노, 멸시, 혐오. 거기에 집착과 우울, 좌절, 열등감 등등에 찌들어있다. 나는 그저 이런 불완전하고 추악한 사람일 뿐이다.
8 ◆hhxO3Cry5cJ 2019/04/14 12:53:19 ID : 7cMoZbjz81j 0
이런 양극으로 치닫는 완벽하고 불완전한 인격 사이에 있자니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다. 혼란하다. 내 결함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너무너무 답답하다.
9 ◆hhxO3Cry5cJ 2019/04/14 14:57:06 ID : L9g1A41xyGr 0
여우비 내린다. 기분 묘하네.
10 ◆hhxO3Cry5cJ 2019/04/14 21:59:33 ID : 7cMoZbjz81j 0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재미있다. 그 사람의 행동과 습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 사람이 한 일, 그리고 그 사람의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치부까지 모두 알 수 있다. 나는 그것들을 알게 되는 것이 너무 즐겁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음 이렇게 써 놓고 보니 그냥 관음증 변태가 적어놓은 글 같네.
11 ◆hhxO3Cry5cJ 2019/04/14 22:07:21 ID : 7cMoZbjz81j 0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난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는 걸 정말로 싫어한다. 누군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몹시 나빠진다. 그리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내 뒤에 있을 때도 기분이 아주 좋지 않고 불안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알게 되는 게 싫다. 그냥 내가 보여주는 것만 봐 줬으면 좋겠다. 그래, 이중적인 거 맞다. 나도 이런 모순되고 이중적인 내가 싫다.
12 ◆hhxO3Cry5cJ 2019/04/15 00:21:31 ID : 7cMoZbjz81j 0
나는 물고기를 한 마리 기른다.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일 수도 있고 세 마리일 수도, 혹은 네 마리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한 마리인 건 확실하다. 나는 하루에 아홉 번씩 매일같이 밥을 준다. 가끔 바쁘면 굶긴다. 굶으면 알아서 잘 챙겨 먹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게 즐겁고 뿌듯하다. 물고기가 없으면 내 삶은 조금 더 편해질 수는 있겠지만 아마 조금 아쉬울 것 같다. 그러니까 물고기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나는 물고기를 기르지 않는다.
13 ◆hhxO3Cry5cJ 2019/04/15 00:36:33 ID : 7cMoZbjz81j 0
다른 사람의 감정이 스민 글을 읽는다는 건 참 재밌는 일인 것 같다. 뒷담화 판이나 하소연 판에 있는 글들을 읽을 때면 나도 덩달아서 슬프고 화가 난다. 정말 묘한 기분이 든다.
14 ◆hhxO3Cry5cJ 2019/04/15 00:41:36 ID : 7cMoZbjz81j 0
그중에서도 특히 일기 판이 제일 강하다. 일기 판에 일기들을 읽고 있자면 희로애락과 그 외의 모든 감정들이 진하게 느껴진다. 우울한 레스를 읽으면 우울함이 스며들고 행복한 레스를 읽으면 마음이 따스해지고 분노에 휩싸인 레스를 읽으면 속이 뜨거워진다. 정말로 진짜로 너무너무 재밌다. 아.. 나는 정말로 관음증 변태인 걸까. 어쨌거나 이런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해줘서 다들 고맙다.
15 ◆hhxO3Cry5cJ 2019/04/16 00:29:23 ID : 7cMoZbjz81j 0
옛날에, 다 같이 가면을 쓰고 배를 탄 적이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목적 없는 배였지만 그래도 매 순간순간이 재미있었고 즐거웠다. 그렇게 몇 달을 흘려보냈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가면을 벗자는 의견이 나왔고,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 나는 썩 좋은 의견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배를 더 타고 싶어서 그들을 따랐다. 확실히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니 훨씬 더 가까이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여러 나날을 몽롱하고 행복하게 보냈다.
16 ◆hhxO3Cry5cJ 2019/04/16 00:34:39 ID : 7cMoZbjz81j 0
그렇지만 항해가 그렇게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위로는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고 밑으로는 파도가 세차게 부딪혀왔다. 그래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아니, 내가 노력한다면 충분히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만이 모두를, 그리고 배를 지킬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오만한 생각이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곳에 내가 낄 수는 없다. 애초에 나 자신도 심각하게 불완전한 존재이면서. 어떻게 배를 지킬 수 있었겠는가. 내 자신감은 잠깐 행복에 취해 새어나온 만용이며 무모한 목표였을 뿐이다.
17 ◆hhxO3Cry5cJ 2019/04/16 00:39:40 ID : 7cMoZbjz81j 0
그렇게 나는 도망쳤다. 오만했던 나 자신이 한심해서 도망쳤다. 도망친 지 며칠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멍청하게도 그리웠다. 다시 밑바닥에서 노를 젓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배는 예전에 내가 보았던 그 배가 아니었다. 배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으며 갑판 위에는 온갖 벌레와 쥐가 돌아다니고, 승객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이 상황을 바꿀 힘과 의지, 그리고 옛날엔 넘쳐 흘렀던 자신감이 없다. 지친 건 아니다. 우울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그냥 신물이 난다. 그들은 내가 없어도 행복하며, 내가 없어도 우울하다. 내가 왜 이걸 지키려고, 해결하려고 그렇게 발버둥치며 노력했던 걸까.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거지 누구의 도움으로도 바뀌지 않는다.
18 ◆hhxO3Cry5cJ 2019/04/16 00:43:15 ID : 7cMoZbjz81j 0
그래서 나는 다시 도망칠 것이다. 이번엔 내가 한심해서가 아닌, 그저 신물이 나기에 도망치는 것이다. 어련히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라면서 나는 저 멀리 따듯한 내 꿈으로 도망쳤다. 꿈 속에는 내가 상상하고 갈망하던 행복한 목적지가 있다. 내 상상 속에 배도 이젠 슬슬 놓아줄 때가 된 것 같다. 이렇게 도망치고 달아나고 피하고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 제일 나답다. 차라리 이게 훨씬 편할 것 같다.
19 ◆hhxO3Cry5cJ 2019/04/16 00:47:35 ID : 7cMoZbjz81j 0
같이 배를 탔던 사람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얼른 힘든 일 모두 이겨냈으면 좋겠다. 언젠가 다시 만날 일이 생긴다면 그때에는 모두가 행복하고 내가 완벽해진 상태에서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 나 혼자 도망쳐버려서 조금 미안.
20 ◆hhxO3Cry5cJ 2019/04/16 07:00:15 ID : 7cMoZbjz81j 0
이야기 끝
21 ◆hhxO3Cry5cJ 2019/08/13 00:22:22 ID : 7cMoZbjz81j 0
그냥 꿈에 나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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