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5p 2020/02/08 14:33:50 ID : MkpQq3XwMpe 0
그러므로 진실 같은 건 없다.
2 이름없음 2020/02/08 15:47:37 ID : PjvxDzdQnCp 0
아빠는 둘째를 바라지 않았다. 엄마의 몸이 지나치게 약했기 때문이었다. 첫째를 낳은 것도 주변의 성화에 의해서였다. 할 수만 있다면 아빠는 그 넓은 집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살 생각이었다고 했다. 어찌어찌 태어난 첫째는 아빠보다는 엄마를 더 많이 닮아 있었다. 머리색은 아빠의 것이었지만 눈매라던가 순한 성질 같은 건 분명 엄마의 것이었다. 첫째는 막 태어난 애치고는 지나치게 얌전해서 의사가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뭔가를 파악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지분간을 하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하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히 있더니, 돌연 숨을 몸 쉴 정도로 울음을 터뜨려서 주변의 혼을 쏙 빼놓았다. 어쩌면 너를 찾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첫째는 모든 면에서 빨랐다. 빨리 몸을 뒤집고 빨리 일어섰고 빨리 걷고 뛰고 말했다. 읽어준 거라고는 동화책 몇 권이 전부였는데 온갖 말을 할 줄 알았다. 어느 날은, 아빠가 드물게 집에서 가만히 있던 그 날은 눈이 무섭게도 쏟아지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이웃집이 차로 꼬박 이십분을 달려야 하는 거리에 있을 정도로 고립된 집에서 묵직하게 쌓이는 눈을 지켜보는 일이 첫째의 공포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웅크린 채로, 울음기가 묻어나온 목소리로, 왜 나는 쌍둥이 동생이 없어요? 하고 물었다. 아빠는 대답 대신 자기가 쌍둥이란 단어를 가르쳐준 적이 있었던가, 왜 하필 그냥 동생도 아니고 쌍둥이 동생인 것인가 고민했고, 엄마는 첫째가 태어나던 그 순간의 침묵을 떠올렸다. 아, 어쩌면 너를 찾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3 이름없음 2020/02/09 01:17:38 ID : MkpQq3XwMpe 0
아빠는 싫어했다. 그 당시 아빠가 제일 싫어하던 걸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산더미같은 일감을 던져주는 직장과 허구한 날 날라오는 은사의 편지였는데 그 명예의 전당에 둘째라는 존재도 추가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아빠의 반응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첫째는 네 살이 되던 해에 동생을 만났다. 엄마는 의사와 아빠의 걱정을 가뿐히 무시하고 멀쩡한 몸으로 그를 안았다. 첫째와는 달리 둘째는 초장부터 요란하게 울음을 터뜨리더니 차차 조용해졌다. 별로 손을 안 탄다는 점에서는 둘이 비슷했지만 가장 큰 게 달랐다. 둘째는 자주 아팠다. 곧잘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였고 자주 고열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당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평생을 앓다가 나아지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소리소문없이 죽어버린 그를 둘째와 겹쳐보았다. 내가 고집을 부려서 네가 이렇게 되었다고, 길고 긴 밤과 새벽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엄마는 울었다. 명암만 언뜻언뜻 구분할 수 있는 방 안에서 머리며 뺨에 얹어지는 손가락만이 유일하게 또렷했다.
4 이름없음 2020/02/14 23:05:30 ID : MkpQq3XwMpe 0
그 애는 아주 예뻤어. 운명의 신이 그 애에게 불행한 유년기에 대한 보상을 미리 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게 지나친 나머지 그녀의 어린 시절이 한층 더 불행해질 거란 사실을 신은 몰랐겠지. 신이란 원래 그런 법이니까. 머리카락도 눈도 코도 입도 예쁘지 않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어.  그 애를 처음 보자마자 나는 금방 알아차렸어. 오빠가 하필이면 그 날 하필이면 그 병원에 들어간 건, 태어났을 때 쌍둥이여야 할 나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본 거랑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라고.
5 이름없음 2020/02/14 23:05:47 ID : MkpQq3XwMpe 0
그렇게 해서 그 애는 우리 집에 들어왔어. 오빠보다 한 살이 어렸으니 그녀는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셈이었는데 언니라고 불리면 어째서인지 귀가 새빨갛게 물들 정도로 부끄럼을 탔어. 나는 모른 척 언니언니 소리를 달고 살았지. 그러면 그 애는 아주 예쁜 목소리로, 이름으로 불러줘, 하고 대답했는데, 눈썹을 애매하게 찡그리고 입매를 살짝 늘어뜨리면서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짓는 그 얼굴이 좋아서 나는 그 애를 언니라고 부르는 걸 멈추지 않았어. 이 주쯤 지나고 나니 그 애도 포기했는지 언니, 하면 응, 하면서 나를 바라보더라.
6 이름없음 2020/02/14 23:06:27 ID : MkpQq3XwMpe 0
그 애는 똑똑했어. 눈치도 빨랐고, 무엇보다도 너무 착했어. 사람이 지나치게 착하면 안타까워지곤 하잖아. 그 애는 이 집안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게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린 것 같았어. 정원에 있는 그네에 앉아서 해를 쬐다보면 어디선가 낯선 시선이 느껴졌는데, 그쪽을 보지 않아도 그 애라는 걸 알 수 있었어. 나는 그 애가 나를 질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지. 그런 생각 자체가 시혜적이라고도 생각했어.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의 시혜적인 태도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착한 아이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우러난 건지, 그러면 그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했어.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헤아리다가 문득 깨달아버린 거야. 그 애는 나를 부러워하는 데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졸지에 나는 아주 멍청한 꼴이 된 거지.
7 이름없음 2020/02/14 23:09:05 ID : MkpQq3XwMpe 0
그의 아버지가 우리 아빠와 친구였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만났어. 내가 무언가를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한 건 다섯 살이 되고서였으니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건 그쯤에서지만. 그는 막 내가 막 태어나 움직이고 걷고 달리는 걸 몽땅 다 봤다고 해. 그 날 나는 창틀에 앉아 있었어. 엄마가 보면 깜짝 놀라서 삼십분은 족히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테지만 너무 답답했거든. 창문을 여는 걸로는 부족했어. 의자를 밟고 책상을 밟고 창틀에 간신히 앉아 내다본 밖은 어느덧 여름이 완연해서 깊고 진한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우고 눈을 돌리는 곳마다 온통 파란 나뭇잎들로 가득하고 먼 곳에 있는 바다가 보석을 박아넣은 천처럼 물결치고 있었어. 나는 꽤 여유로워져서 두 다리까지 모두 창틀 위로 올리고 최대한 편한 자세를 찾으려 낑낑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밑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하마터면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 했어.
8 이름없음 2020/02/14 23:12:06 ID : MkpQq3XwMpe 0
눈만 간신히 뜬 채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고 있는데 밑이 잠잠하더라고. 창틀에서 다리를 내리고 아래를 보니까 나만큼이나 놀란 얼굴을 한 남자애가 있지 뭐야. 아 글쎄 정말이지, 그 때 만났으면 안됐는데 말이야.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어. 그 애는 내가 완전히 내려갈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어. 발로 단단한 바닥을 딛고 서서 고개만 슬쩍 밖으로 빼니까 그 애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라고. 왠지 안심을 시켜줘야 할 것만 같아서, 난 괜찮다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러려면 거의 소리를 질러야만 했어. 마침 바람이 너무 불어서 나뭇가지가 엉망진창으로 흔들리는 통에 내 목소리가 하나도 안 들렸거든. 그가 그걸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별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니라서 그냥 그대로 창을 닫아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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