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0/03/11 02:54:08 ID : snPipbAY5Wi 3
최근 연애판이 이쪽 주제로 조금 과열된 양상이 없지 않아서 아직도 스레 세우기 조금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우선 세워볼게! 사귀지도 않았고 그냥 나 혼자 좋아했던 것들이니까 재미있게 봐줘라... 아 그리고 미리 말하자면 짝사랑러의 한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뭐랄까... 조금 다크다크한 이야기도 나온다! 차라리 괴담판이나 뒷담판에 갈 법한 그런 이중적인 사람들이 있거든. 제목이 이런 이유는 세 번째 분이 나에게 해주셨던 가장 인상깊은 말이어서 그래. 그래서 이 이야기의 주제가 뭐냐면 말이지
2 이름없음 2020/03/11 02:56:35 ID : snPipbAY5Wi 0
3년 동안 세 명의 학교 선생님들을 좋아해봤던, 그리고 세 번째 분은 현재도 좋아하고 있는 이야기야. 스레딕 눈팅하다 보니까 생각보다 나 같은 스레더들이 많아서 조금 써보려고 해. 첫 시작은 중학교 3학년이었다. 과목은 역사. 중학교 졸업한 지 3년이 다 되었는데도 이 분의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아 다른 의미로...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잊겠어
3 이름없음 2020/03/11 03:14:48 ID : snPipbAY5Wi 0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인기가 엄청나게 많으셨다. 잘생겼고 젊었고 유머러스하셨고 매력이 넘치셨으니까... 정말 애들이 다 좋아했어서 2학년 때만 다른 분께 역사를 배웠는데 애들이 다 "아 그 쌤 보고싶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로. 아무튼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싶다... 완벽 그 자체. 역사를 정말 좋아하셔서 우리나라 역사 말고도 세계사 이야기를 곁다리로 해주곤 하셨는데 그것마저도 너무 멋져 보이고 재밌었어..
4 이름없음 2020/03/11 12:35:46 ID : dwk07fgqjdx 0
엉 그래서??
5 이름없음 2020/03/11 12:42:28 ID : snPipbAY5Wi 0
그때 나는 한참 소설에 빠져 있었는데 쌤은 그런 내가 기특했는지 재미있었는지 내가 읽는 책에 관심을 보였고 우리는 항상 시간이 있을 때마다 짤막하게 역사에 관한 대화를 나누곤 했어. 오만과 편견을 읽었다면 그 시대 영국이 어땠는지, 연을 쫓는 아이라는 책을 읽은 날에는 중동의 전쟁에 대해서... 뭐 이런 사소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어. 난 당연히 엄청나게 기뻤지. 쌤은 다른 여자아이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고 잘 이야기했지만 나는 뭔가 학문적으로, 가볍지 않게 쌤에게 접근해서 우리 둘 사이에는 사제관계적인 그런 감정뿐만 아니라 우정 비슷한 그런 감정도 생겼다고 생각했거든.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어. 역사 시간에 쌤이 다른 역사 tmi를 꺼내면 다른 아이들은 다 뭔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쌤 덕분에 그걸 알고 있던 나는 속으로 쌤이 하는 말들을 다 이해하면서 나름 기뻐했어.
6 이름없음 2020/03/11 12:44:12 ID : rs79eFjAo3O 0
오 나 그 기쁜 감정 뭔지 알 거 같아ㅜ보고있어
7 이름없음 2020/03/11 12:53:52 ID : snPipbAY5Wi 0
아침 일찍 교무실에 결석계를 제출하러 간 날에는 쌤이 빵 같은 걸로 아침을 떼우고 계셨는데 나한테 먼저 "한 입 먹을래?" 하면서 먹여주시기도 했고 내가 교무실 청소였는데 청소하고 갈 때마다 "수고했어" 라면서 사탕을 건네줬어. 청소가 4명이었는데 3명이 몰래 튀어서 나 혼자 청소하러 왔을 때는 쌤이 팔을 걷어붙이고 같이 청소해주셨어. 쓰레기 들고 분리수거 하는 곳까지 걸어가면서 또 역사 이야기를 했는데 참 기뻤어. 청소 끝나고 다시 교무실로 돌아왔을 때 쌤이 "아이고 애들이 다 도망가서 레주 혼자 다 했네" 라고 말하면서 수고했다며 초코파이를 쥐여줬는데 그것도 정말 기뻤어. 원래 짝사랑이라는 게 참 바보같잖아? 이런 사소한 거에 이불 걷어찰 정도로 설레고.
8 이름없음 2020/03/11 12:58:33 ID : snPipbAY5Wi 0
어느 날은 고등학교 탐방을 간다고 더운 여름날에 현창체험학습을 나갔는데 그날 날씨가 정말 더웠어. 6월이었는데 쪄 죽을 것 같아서 쌤이 원래는 안 되지만 예외적으로 애들한테 편의점을 다녀와도 된다고 허락했어. 애들이 다 각자 마실 걸 고르거나 아이스크림을 고르는데 나는 그 와중에 쌤이 너무 신경쓰여서 더워 죽을 것 같았는데도 내 몫의 간식을 고르지 않고 기억을 되새겨서 쌤이 수업시간에 언급한 적 있던 음료수를 샀어. 선생님이 깜짝 놀라시면서 고맙냐고, 너는 안 덥냐고 물어봤는데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 했어. 더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도 쌤이 그거 마시는 걸 보는 게 더 좋더라. 쌤이 또 다른 애들이랑 같이 이야기하면서 걸어가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깡이 없어서 짜증나기도 했고, 고등학교 탐방을 가서는 컴퓨터실을 구경했는데(그곳이 정보고등학교여서) 조작하다가 뒷자리 쌤과 눈이 마주쳐서 화들짝 고개를 돌렸어.
9 이름없음 2020/03/11 13:00:03 ID : q6lA3VhBthb 0
ㅂㄱㅇㅇ! 설렌다...그 느낌 나도 알지 ㅎㅎ
10 이름없음 2020/03/11 13:03:40 ID : snPipbAY5Wi 0
설렜던 게 주요 주제가 아니니까 설렜던 건 조금만 더 풀게! 쌤은 가끔 영어를 써야 하면 꼭 필기체를 쓰셨어. 고등학교 때 심심해서 혼자 연습했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 멋있더라. 급식 먹고 밖에서 놀다 우연히 마주쳤는데 항상 다정하게 밥은 잘 먹었냐며 먼저 말 걸어주고, 벚꽃 피는 시즌에는 꼭 한 번씩 야외수업을 했는데 내 어깨에 벌이 앉았을 때는 쌤이 무심코 가만히 있으라면서 벌이 갈 때까지 내 팔을 붙잡아 주기도 했어. 서로 책을 추천해 주기도 했고. 그렇게 가까워질수록 나는 더 깊이 쌤을 짝사랑하게 됐어. 쌤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난 원래 그렇게 남들에게 살갑게 대하면서 길게 대화하는 사람이 아닌데 쌤이니까 가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나와도 공감하면서 끄덕거리고 집에 와서 찾아보고 그랬던 것 같아.
11 이름없음 2020/03/11 13:07:47 ID : snPipbAY5Wi 0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느꼈어. 이 쌤은 나와 역사를 주제로 많이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본인의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고, 주변에 맴도는 아이들을 모두 공평하게 잘 대해줬지만 언제나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미묘한 벽을 세웠어. 가끔 아이들이 지나치게 시끄럽게 굴 때면 화난 것 이상의 그런 눈빛을 하셨고 이상하게 남자아이들은 이 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남자애들 말이, 그냥 그 선생님은 남자의 감으로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나? 얼굴이 잘생기고 말이 재미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게 좋아할 만한 건 아닌 것 같다는 식으로 말했어. 여자아이들은 계속 이 쌤을 좋아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좀 신기해. 여자의 감이 있듯 남자의 감도 있는 걸까?
12 이름없음 2020/03/11 13:09:07 ID : rs79eFjAo3O 0
오.....뭐지
13 이름없음 2020/03/11 13:11:25 ID : snPipbAY5Wi 0
졸업식 시즌이 가까워 올수록 참 웃기게도 짝사랑이 아주 조금씩 사그라들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방어기제였던 거 같아. 어차피 졸업하면 못 만날 거고 만난다고 해도 그 횟수가 현저히 적어질 테니까. 끝까지 고백은 하지 않았어. 사실 고백했던 여자애들이 몇 명 있었는데... 다들 아주 명확한 거절의 말을 들었다는 소문이 있었거든.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서 꾹 참았어. 천만다행이었지. 졸업식 전날 우리 반 아이들은 다 같이 모여서 밖에서 노는 시간을 갖기로 했어. 물론 담임 선생님도 같이 초대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반장과 부반장이 협의한 끝에 그건 안 하기로 했어. 많은 여자아이들이 정말 아쉬워했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솔직히 담임쌤을 초대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필터링해야 하니까 남자아이들은 그게 싫었던 걸지도 몰라.
14 이름없음 2020/03/11 13:18:04 ID : snPipbAY5Wi 0
애들끼리 워낙 단합이 좋았다 보니 마지막 시간은 정말 길게 이어졌어. 밥 먹고 노래방도 가고 몇몇 애들은 PC방을 가기도 하고 단체사진도 찍고. 그렇게 오전 11시쯤 시작된 송별회는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끝났어.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학교 쪽으로 향했어. 혹시 선생님을 볼 수 있을까봐. 그런데 정말 마법같이 선생님이 교문에서 나오고 계시더라고. 물론 내 집 방향과는 반대로, 다른 동료 선생님이랑 이야기를 하면서. 참고로 두 분은 학교에서도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로 친한 친구 사이였어. 인사나 하려고 쌤 뒤를 따라가다시피 했는데, 두 분은 무슨 이야기에 열중해서 뒤쪽은 쳐다보지도 않더라고. 처음에는 내일이면 올해 3학년 애들도 졸업이네- 식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점점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어.
15 이름없음 2020/03/11 13:20:07 ID : dwk07fgqjdx 0
ㅂㄱㅇㅇ 뭐야뭐야
16 이름없음 2020/03/11 13:21:05 ID : Bzf86ZfQnA1 0
ㅂㄱㅇㅇ
17 이름없음 2020/03/11 13:23:21 ID : snPipbAY5Wi 0
동료 쌤 "너는 인기가 진짜 많더라. 매년 똑같네. 어쩜 그러냐?" 역사 쌤 "야~ 그래서 부럽냐?" 동료 쌤 "부럽다.... 기 보다는 좀 신기하지." 역사 쌤 "아 진짜 피곤해 죽겠어. 여자애들 때문에. 이상하게 남자애들은 안 그러는데 여자애들만 짜증나게 달라붙잖아. 얘네가 진짜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내가 만만해 보이나..." 동료 쌤 "야~ 걔네들도 그냥 좋으니까 그런 거겠지 설마 뭐 악의가 있겠어" 역사 쌤 "이것들이 진짜 계속 참고 있었더니 뭣도 모르고 기어오르잖아. 계속 짜증나게 말 걸고 먹을 거 주고."
18 이름없음 2020/03/11 13:28:42 ID : snPipbAY5Wi 0
동료 쌤 "그럼 싫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아 그러고 보니까 너한테 고백했던 애들도 있었다며?" 역사 쌤 "진짜 진절머리 나. 여자애들이라는 게 원래 다 그래? 어려서 정신머리가 없는 건가? 하긴 뭐 애새끼들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이래서 내가 중학교 오기 싫었는데." 동료 쌤 "왜 그 너랑 잘 붙어다녔던 여자애 있었잖아" 역사 쌤 "아, 스레주? 걔도 똑같아. 소심해서 다른 애들처럼 달라붙지만 못했지 자꾸 책 얘기 하면서 나랑 대화하고 싶어하고. 그래, 그나마 걔는 좀 괜찮았다. 고백하려는 게 뻔히 보였어, 걔도." 동료 쌤 "잘 얘기하길래 둘이 죽이 잘 맞나 싶었더니." 역사 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스레주처럼 겉으로 공부 잘하고 모범생 같은 애를 확 내쳐버리면 대외적으로 내가 어떻게 보이겠냐? 가뜩이나 남자애들 평판도 안 좋은데." 동료 쌤 "너는 여자애들이 좋아해주는 맛으로 사냐?ㅋ" 역사 쌤 "웃기잖아. 나는 걔네들을 속으로 싫어하는데 걔네들은 뭣도 모르고 나한테 좋다면서 달려드는 게."
19 이름없음 2020/03/11 13:29:43 ID : Bzf86ZfQnA1 0
헉...충격적이야....ㅂㄱㅇㅇ
20 이름없음 2020/03/11 13:31:08 ID : snPipbAY5Wi 0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기억나는 뼈대에 조금 살을 붙여서 구성해봤어. 실제보다는 심할 수도 있고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문맥은 똑같을 거야. 저 말 듣고 충격받아서 그 순간 이후로 마음이고 뭐고 다 와장창 깨졌어.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여자애들한테 잘해줬다는 게 정말 쓰레기 같았어. 남자애들이 싫어했던 건 걔네도 본능적으로 이런 걸 느껴서일까? 졸업식 날 보는데 치가 떨리더라. 친구들 몇몇한테도 이걸 이야기해줬어. 정말 친했던 애들만. 그 중에는 이 쌤한테 고백했던 애들도 있었는데 한동안 힘들어하더라.... 정말 고백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21 이름없음 2020/03/11 13:31:54 ID : snPipbAY5Wi 0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잘생긴 애들은 얼굴값한다는 말이 있잖아. 나 원래 그런 말 안 좋아해서 안 믿었는데 이 쌤 사건 이후로 정말 믿게 됐다. 그렇게 중3 마지막을 스펙타클하게 끝내고 고등학교 1학년으로 올라왔어. 가뜩이나 중3때의 일로 조금 껄끄러웠는데 또! 남자 담임쌤을 맞이하게 됐어. 과목은 역사와는 조금 반대되는 과학. 원래 3학년을 하시던 분이었지만 올해만 잠시 1학년을 맡게 되었다고 본인을 소개하시더라고. 첫 인상이 딱 이과생 이미지였어. 역사쌤과는 반대되는 느낌이었지만, 이 쌤도 제법 잘생겼었어. 역사쌤이 다정하고 따스하게 생긴 미남이라면 과학쌤은 전형적인 이과상 냉미남이었다고 설명하는 게 맞겠다.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그냥 내가 느낀대로 설명하자면 냉미남이었어.
22 이름없음 2020/03/11 13:38:17 ID : snPipbAY5Wi 0
안경을 꼈고, 옷은 항상 와이셔츠와 슬랙스를 입고 다니셨고, 표정이 거의 없으셨고 말투도 무뚝뚝했고 웃을 때도 희미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웃으셨어. 수업 실력은 어마어마했고 입시 정보도 많이 알고 계셨고 아이들을 휘어잡는 것도 잘하셨어. 사실 우리 반은 이미 과학쌤에게 잔뜩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터라 딱히 휘어잡을 것도 없었지만 남자아이들이 정말 무서워했어. 역사쌤을 싫어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싫어했어. 규칙을 정말 중시하셔서 그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으셨어. 별명이 냉혈한이었어. 애들이 장난식으로 저 쌤은 몸 속에 파란 피가 흐를 거라고 막 뒷담 까고 그랬었다. 딱히 나도 별로 다가가고 싶지는 않았어. 그냥 얼굴 잘생긴 싸가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23 이름없음 2020/03/11 15:01:22 ID : Ru61yIGmk9s 0
흐음 보고있어 두번째 쌤 뭔가 싸하다.....
24 이름없음 2020/03/11 15:47:30 ID : E7aoGpVbxwp 0
레주 진짜 상처 많이 받았겠다ㅜㅜ부디 2번째, 3번째는 좋은 사람이길....
25 이름없음 2020/03/11 16:29:23 ID : E5PbeE3va8r 0
좀 뜬금없긴 한데 제목 너무 특이하고 인상적이다....기다릴게
26 이름없음 2020/03/11 17:49:36 ID : snPipbAY5Wi 0
세 번째 선생님이 나한테 해주신 가장 인상깊은 말이자 나의 세 번째 짝사랑 스타트를 끊었던 대사야ㅎㅎ 아, 이어서 써볼게. 그런데 그 과학쌤은 싫어하는 애들도 많았지만 좋아하는 애들도 많았어. 잘생겼고 단칼같은 원칙주의적 모습이 애들한테는 멋있어 보였나 봐. 난 별로 그렇다는 생각을 안 하고 살았는데. 애들이 막 "너네 담임쌤 XXX라며? 아 개부러워ㅠ" 이럴 때도 난 그냥 웃으면서 얼버무릴 뿐이었어. 솔직히 내 이상형이랑 닮긴 했어. 키 크고 오피스룩 잘 입는 이과 냉미남에 젊으신 편이고 목소리도 좋고. 내가 가장 크게 상처 받았던 두 번째 짝사랑이 시작된 계기는 정말 정말 사소하고도 어이없었어. 아마 그날이 시험 마지막 날이었을 거야. 마지막 과목은 내가 제일 어려워하던 수학이었고.
27 이름없음 2020/03/11 22:18:20 ID : snPipbAY5Wi 0
당연히 나는 수학을 아주 퍼펙트하게 망쳤어. 가뜩이나 중학교 수학도 못했는데 고등학교 첫 시험, 게다가 수학이니 얼마나 긴장했겠어. 또 우리 학교가 수학시험이 꽤 어려웠거든. 그래도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줄은 몰랐어. 우리 학교가 학년을 섞어서 시험을 치기 때문에 우리 반(1학년) 에는 아직 3학년들이 2교시 시험을 치고 있어서 종례를 운동장에서 해야 했어. 핸드폰은 받아야 했으니까. 핸드폰 받고 애들이랑 운동장에서 답을 맞춰봤는데 진짜 스펙타클하게 틀렸더라고. 지금 이 스레에 레스가 이것까지 포함해서 27개 달렸는데 그것보다 조금 더 높은 점수였어. 익명이니까 쪽팔리지만 말할게(.....). 내가 암만 중학교 때 수학을 못했어도 이 정도까지 떨어진 적은 없었어.
28 이름없음 2020/03/11 22:38:33 ID : 8lu6589tbh8 0
ㅂㄱㅇㅇ
29 이름없음 2020/03/11 22:42:30 ID : snPipbAY5Wi 0
너무 충격받아서 애들이랑 답 맞춰보고 시험지 붙잡고 멍하니 운동장에 주저앉아 있었어. 애들이 왜 그러냐고 집 가자고 막 그러다가 내가 그냥 화내면서 다 돌려보냈어. 도대체 왜 그랬지.....? 울지는 않았고 정말 그로기 상태로 충격받아서 현실부정하면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분명 사람이 다 빠져나가서 텅 비어있던 운동장에 누가 다가오더라. 난 당연히 관리인이나 가끔 할 일 없이 운동장 돌아다니시는 선생님인 줄 알고 쪽팔려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너무 낯익은 목소리가 "아직도 안 갔네." 라고 말하는 거야. 고개를 들었더니 우리 담임이더라. 표정도 무표정에 웃고 있지도 않고 눈빛도 차분하고 목소리도 차가웠는데 '아직도' 라는 말에 이상하게 꽂혔어. 그 느낌 알지? 뭔가 '어라...?' 하는 그런 느낌.
30 이름없음 2020/03/11 22:44:13 ID : snPipbAY5Wi 0
솔직히 혼날 것 같아서 죄송하다고 하면서 집까지 무작정 뛰어갔어. 시험점수 같은 건 다 까맣게 잊고 전력질주했지. 심장이 엄청나게 뛰었어. 평소에는 그렇게 무신경하고 무관심하고 무심함 그 자체인 선생님이 왜 나한테 말을 걸었을까?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든 걸 보니까 나도 그렇게 관심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아. 다음 날 학교에 갔는데 쌤하고 딱 마주쳤을 때 쌤이 "집에는 갔나 보네?" 이렇게 살짝 툭 던지듯이 말했는데 그 말투에서 이상하게 장난기가 읽히더라. 좀 웃기지. 그날부터 선생님이 좀 다르게 보이더라고. 아직도 이 얘기 하면 애들이 정말 어이없어해. 뭔 그런 걸로 짝사랑을 시작하냐면서.... 나도 어이없는데 레스주들은 얼마나 어이없을까. 뭐.... 보고있는 사람 있으면 더 써볼게.
31 이름없음 2020/03/11 22:57:48 ID : Bs9tcspbvdz 0
ㅂㄱㅇㅇ
32 이름없음 2020/03/11 23:55:55 ID : 9xRyHwrbu3z 0
스레주 두번째 쌤 뭔가 내취향이야....ㅜ 제발 레주한테 상처로 안 남았으면 좋겠는데 레주 말하는 거 보니까 뭔가 아픈 기억으로 남은 거 같아서 마음아프다ㅜㅜ보고있어! 세 번째도 궁금하네....ㅋㅋ
33 이름없음 2020/03/12 01:01:12 ID : E7aoGpVbxwp 0
아오 세번째 진짜 ㄹㅇ궁금하다ㅜ
34 이름없음 2020/03/12 09:25:33 ID : 43VhxVcNwK6 0
레주 어디갔어....ㅜㅠ
35 이름없음 2020/03/12 23:19:14 ID : Bs9tcspbvdz 0
빨리와줘ㅠㅠ
36 이름없음 2020/03/12 23:42:13 ID : snPipbAY5Wi 0
기다린 레스주들아 미안해! 스레딕이 오류가 났는지 레스 알람이 안 떠서 좀 늦었어. 내가 고3이라 요모조모 바쁘기도 하고.... 나 과제 조금만 하고 새벽에 돌아올게ㅠㅠ 세 번째 궁금해줘서 고마워:) 이 분은 제발 아무 문제 없길 바라고 있지만, 나에게 스레 제목에 있는 말을 해 준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좋으신 분 같다고 믿고 싶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두 번째 분의 이야기도 그렇게 길지는 않을 예정이야. 상처받은 건 별로 질질 끌고 싶지 않아서....
37 이름없음 2020/03/13 02:11:59 ID : snPipbAY5Wi 0
참 웃긴 게, 짝사랑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객관적으로도 그랬어) 선생님이 경계심이라고 해야 하나? 벽을 좀 풀었어. 학기 초에 군기를 어느 정도 잡으셨다고 생각했던 모양인가봐. 농담도 좀 하시고, 장난도 어느 정도 받아주고, 그러는 횟수가 굉장히 늘어났어. 평소에 항상 냉혈인간이던 사람이 한 번 인간적이기 시작하니까 그 갭이 정말 크더라고. 당연히 나는 더 마음을 키워갔지. 선생님이 장난친답시고 내 과자를 확 뺏어먹은 날이 있었는데 어후 그날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체육대회 날 사진 찍을 때도 하트 해달라니까 엄청 투덜거리다가 결국은 작은 하트로 협의를 보기도 했어. 수업시간에 본인 이야기를 하는 횟수도 조금씩 늘어났고. 당연히 착각몬 레주는 아...! 이 쌤이 드디어 마음을 열어구나! 라고 생각했지.
38 이름없음 2020/03/13 02:16:35 ID : snPipbAY5Wi 0
아 정말 생각하기 싫은데 제일 설렜던 거 하나만 쓰고 가자면 스승의 날에 쌤이 애들한테 초콜릿이랑 간식거리를 엄청 받았는데, 쌤이 나한테 자기 이 많은 먹거리들을 다 처리할 수가 없다면서 내 주머니에 페레로로쉐랑 땅콩버터 초콜릿(Reese) 2개를 그냥 주머니에 쑤셔넣고 가셨었어... 내가 이걸 어떻게 먹냐고 하니까 쌤이 아 그러면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거라고 생각하라고 거의 화내다시피 했는데 정말 설렜었어. 또 무슨 문제를 물어보는데 그때 교실이 너무 시끄러워서 내 목소리가 안 들리니까 쌤이 가까이 오라고 내 손 끌어당긴 거? 이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더 듣고 싶은 레더들 없지...?
39 이름없음 2020/03/13 02:22:25 ID : snPipbAY5Wi 0
이것도 학기 마지막 즈음에 깨졌던 것 같아. 다른 반 애를 통해서 들었는데 쌤이 올해를 마지막으로 전근가신다는 거야. 그걸 어떻게 들었냐면 다른 반 애한테 들었어. 걔도 우리 쌤 수업을 듣는데, 걔는 또 교무실 가서 정말 우연히 엿들었다고 하더라. 난 2학기 때 과학부장도 하고, 학급회장도 하고, 질문도 많이 해서 쌤과 나름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했거든. 중3때 일이 생각나서 너무 친해지지는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쩔 수가 없더라고. 그냥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쌤과 친해졌다고 믿고 있었어. 그런데, 다른 반도 아니고 자기가 담임인 반인데,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진짜 서러웠어. 내가 왜 그걸 다른 애를 통해서 들어야 하는 거지? 내가 이상할 수도 있지만 정말로 서럽더라고.
40 이름없음 2020/03/13 02:24:45 ID : wFcmlcnAY65 0
아....그거 이해함.....ㅜ 서운할 만 하네
41 이름없음 2020/03/13 13:17:54 ID : pV83zU1u9Bv 0
ㅂㄱㅇㅇ
42 이름없음 2020/03/13 16:22:40 ID : q6lA3VhBthb 0
레주 나랑 비슷하다 ㅋㅋㅋ 나도 항상 쌤들 짝사랑하고 그랬었는데....ㅜ 난 그래도 나름 훈훈하게 끝냈는데 레주는 어째 다 짝사랑 엔딩이 파국(??) 이어서 안타깝네ㅠ 보고있엉
43 이름없음 2020/03/13 22:28:10 ID : snPipbAY5Wi 0
혹시 내 이야기가 불쾌하거나 꺼려지니? 요즘 연애판이 교사학생 스레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만 쓰도록 할게. 솔직하게 말해줘도 좋아. 하루 정도만 더 생각해보고 삭제할까 말까 결정할게. 그러게... 나도 좀 슬프네 왜 내 짝사랑은 두 번 다 파국이었을까
44 이름없음 2020/03/13 23:00:57 ID : snPipbAY5Wi 0
덕분에 힘이 나네. 일단 삭제는 보류해둘게. 혹시 삭제된다면 새로 스레 세우도록 할게. 고마워. 그리고 추천 고맙다!
45 이름없음 2020/03/14 01:53:35 ID : E2nCpalfU7w 0
난 좋은데... 흔한 짝사랑이 아니라 더 보고싶어
46 이름없음 2020/03/14 02:14:59 ID : bdxzO67s2sp 0
보고있어!
47 이름없음 2020/03/14 02:48:14 ID : 1yJPilCknu6 0
와 대박이다 첫번째 쌤 진짜 와 소름돋는다 무서워
48 이름없음 2020/03/14 11:28:09 ID : 1dyHBgpgjdw 0
그래서??? 그래서어!??!? 전근가는데 그래서!!??!?
49 이름없음 2020/03/14 16:12:53 ID : snPipbAY5Wi 0
그래서 마지막 전날 용기 내서 쌤한테 물어봤어. 전근 가시는 게 맞냐고. 그랬더니 아무런 망설임도 없고 어떻게 알았냐는 말도 없이 맞다고 하더라. 최소한 어디서 들었냐, 정도는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럼 정말 맞다는 거잖아. 어디로 가는지 물어볼 용기도 없는데. 쌤이 되게 껄끄러워하는 분위기였는데도 계속 물어봤어. 왜 저희한테 안 말해줬냐고, 언제 결정된 거냐고. 난 절박했거든. 중학교 3학년 때 첫번째 쌤 이후로 더 이상 상처받기 싫었고 어이없게 열어버린 마음인데 이대로 상대방이 나를 후려치면 정말 상처가 어마어마하게 클 것 같아서. 그랬더니 선생님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딱 한 마디 하셨어. 그 특유의 차가운 눈빛과 목소리로. "내가 그걸 너한테 왜 알려줘?" 라고.
50 이름없음 2020/03/14 16:16:09 ID : 2oLarfhBBtc 0
...?!??!?.............
51 이름없음 2020/03/14 16:39:15 ID : snPipbAY5Wi 0
짤막하게 대화로만 써볼게 으...... 별로 생각하고 싶은 기억은 아니라서. 따옴표가 쌤이고 슬래시(-)가 나야. - 아니 쌤 그래도 저희 반 담임쌤이셨는데...... "그래서?" - 그냥..... 전근 가시면 내년에는 안 계시는 거잖아요. "그렇지." - 아쉬워하는 애들도 많을 텐데.... 애들도 티는 안 냈지만 엄청 아쉬워하고 있을 텐데.... "그럼 그러는 거지 뭐. 이제 와서 말해봤자 바꿀 수도 없고." - 아....... "그리고 너, 항상 궁금했던 건데." - 네? "원래 그렇게 특이하니?" - .....? 네......? "아니, 문과 갈 거라면서 과학에 목숨 거는 것도 웃기고, 말하는 것도 특이해서. 게다가 이렇게 끝까지 나한테 매달려서 물어보는 것도 웃겨서 말하는 거야." - 과학....... 은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했던 건데. "선생님 좋다고 관련없는 과목 열심히 하는, 그때 너가 말한 그 애가 너였어?" - ....... "아무튼 굳이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고 싶지는 않아서." - .......
52 이름없음 2020/03/14 16:49:28 ID : 1dyHBgpgjdw 0
미친; 저건 좀 오바다....... 말넘심 수준이 아니라 인성파탄인데 거의.....?
53 이름없음 2020/03/14 16:57:14 ID : snPipbAY5Wi 0
이때쯤이면 쌤이 좀 성격도 풀고 어느 정도 애들과 어울려 놀아서 아이들도 제법 좋아하게 된 상황. 물론 남자아이들은 엄하게 잡아서 남자아이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여자애들은 굉장히 좋아했어. 인기도 굉장히 많으셨고. 나도 쌤이 벽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좀 다가갔어. 당연히 착각이긴 했지만..... ㅎㅎ 내가 지금까지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좀 남들과 다른 독특한 면이 많아서 항상 주변인들이 그걸로 트집을 잡거나 자존감 깎아먹는 게 좀 많아서 특이하다는 말 듣는 거 진짜 싫어했거든. 그러니까 정말 악의를 담아서 '너 진짜 이상하다' 라던가 '너 되게 독특하다' 라고 하는 그런 말들이 나한테는 배로 상처였어. 저 말을 듣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어. 내가 사람 때문에 이렇게 울어볼 수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밤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울었어. 첫 번째 쌤은 뒤통수 맞았을 때 그냥 치가 떨리고 화가 났는데 두 번째 쌤은 너무 슬프고 화나고 착잡하고 오만 감정이 휘몰아치더라.
54 이름없음 2020/03/14 17:02:56 ID : snPipbAY5Wi 0
그렇게 정신없는 겨울방학을 보냈어. 제발 이번에는 짝사랑하지 않게 해 주세요, 하다못해 남자쌤을 만나지 않게 해 주세요.... 이렇게 멍청하게 빌었어. 진짜 그때는 세상 모든 게 짜증나고 왜 나만 이런 건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하는 짝사랑마다 다 이딴 식으로 파탄이 나는 건가 싶었어. 다들 이 마음 뭔지 알지...? 상처받기 싫었어. 그 어떤 때보다도 절박했던 것 같아.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담임쌤이 누굴까, 하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는데 나랑 같은 반이 된 친구가 담임쌤이 또 남자라는 거야. 또. 그때 정말 멘탈이 바스라질 대로 바스라졌어. 첫 시간에 쌤이 뭐라고 말 하는데 듣기 싫어서 그냥 귀를 틀어막고 있었어.
55 이름없음 2020/03/14 17:06:13 ID : snPipbAY5Wi 0
물론 그런 반항이 오래가지는 않았어. 선생님은 딱히 아무런 마음도 없어 보였는데 나 혼자 엄청나게 경계했어. 뭘 물어봐도 단답이었고, 수업은 열심히 들었지만 (하필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전 과목이셔서) 질문 생겨도 일부러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고 , 마주쳐도 인사는 항상 무뚝뚝한 표정으로 했어. 제발 선생님이 나한테 관심을 꺼줬으면 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그때는 남자라는 존재가 다 싫었어. 게다가 이 선생님이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랑 타입이 비슷해서 더욱 싫었던 것 같아. 딱히 미남은 아니지만 순한 강아지상에 웃고 농담 잘하고 다정다감하게 잘 챙겨주는 그런 스타일. 내가 제일 껄끄러웠던 건 이 '다정다감' 이었어. 자꾸 내 벽을 무너뜨리려는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싫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다시피 했어.
56 이름없음 2020/03/14 17:07:51 ID : SGla2skq7Aq 0
야 와씨 나 그 마음 뭔지 알아 상처받기 싫어서 벽을 세우는데 누군가 나한테 다정하게 다가오는 것도 싫고 세워진 벽을 지키고 싶은데 상대방이 자꾸 다가올 것 같으니까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거 그러면서 혼자 멘탈 와르르맨션 되는 거... 뭔지 알아 심지어 세 번째는 첫 번째랑 스타일도 비슷했다니 더 힘들었겠다ㅠㅠㅠ
57 이름없음 2020/03/14 20:02:08 ID : 1yJPilCknu6 0
와 대박 진짜 선생님들 그래도 제자한테 너무 하신당....
58 이름없음 2020/03/14 20:16:05 ID : 8lzWkmmnzRA 0
ㅂㄱㅇㅇ....첫번째 두번째 뭐냐 진짜ㅠㅠㅠㅜ레주 상처 많이 받았겠다....
59 이름없음 2020/03/14 21:53:44 ID : uk1iqjimK2I 0
보고있어....레주 상처 많이 받았겠ㄷ네ㅜㅜ
60 이름없음 2020/03/15 01:56:28 ID : snPipbAY5Wi 0
그 선생님이 어떤 식으로 다정했냐면... 그냥 매너가 좋았던 것 같아. 학생들이랑 눈을 마주치면서 대화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정말 친절하게 설명해주셨고, 항상 "고마워" 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셨고, 자는 애들을 깨울 때도 항상 주변 아이들한테 부탁해서 깨우셨어. 여자아이들인지라 사소한 터치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 말투랑 행동에서 다정다감함이랑 세심함이 묻어 나오는 느낌 다들 알지? 그냥 그런 식이었어. 항상 그렇게 행동하셨어. 알다시피 나는 그게 너무 불안하고 싫었어. 그런데 그러면서도 좋았어.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었어.
61 이름없음 2020/03/15 01:59:03 ID : snPipbAY5Wi 0
써놓고 봐도 웃긴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 중 하나가 내가 책을 들고 가서 질문을 했는데 선생님이 그 책을 받아들면서 손이 살짝 닿았어. 무의식 중에 화들짝 놀라니까 "미안해 레주야 잠깐 좀 볼게" 라고 하셨던 거. 질문하러 교무실에 왔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보조 의자 빼주면서 "앉아서 질문해도 돼." 라고 말해준 거. 모의고사 칠 때 다른 쌤들은 OMR 카드를 본인이 먼저 빼 가서 서명하는데 이 쌤은 내가 자리를 다 정돈할 때까지 기다려줬던 거.
62 이름없음 2020/03/15 02:01:13 ID : wFcmlcnAY65 0
오 인정 설렐 만 하다
63 이름없음 2020/03/15 02:04:30 ID : snPipbAY5Wi 0
스레딕 분위기가 좀 험악하니까 자세하게 쓰지는 않을게. 그러다 모의고사가 끝나고, 우리 반이 학기 초에 자기소개서 비슷하게 무슨 서류를 작성해갔는데 맨 아래 칸에 자신의 성격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이라는 질문이 있었어. 아마 면접 때를 대비해서 그런 질문을 만들어 놓으셨던 것 같아. 그런데 위에서 말했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성격이 독특하다' 라는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류를 작성할 때 고민 끝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제발 선생님이 나한테 신경을 끄고 좋은 학생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비뚤어진 마음으로 썼어. '독특하다' 라고.
64 이름없음 2020/03/15 02:07:31 ID : snPipbAY5Wi 0
상담할 때 보란 듯이 원래 교복 잘 안 챙겨 입었는데 딱딱하게 보이고 싶어서 교복에 마이까지 완전 단정하게 입고 갔어.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무튼 그렇게 상담을 하는데, 기대도 안 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종이를 꺼내면서 "그런데 이건 무슨 뜻이야?" 라고 물어보는 거야. 그런데 다행히도 그날은 원만하게 대답할 수가 있었어. 전날 아이들끼리 모여서 서로의 취향이 얼마나 독특한지(호불호 갈리는 민트초코 좋아하는 친구부터 해서 나는 이 영화에서 남들이 다 싫어하는 이런 캐릭터가 좋다 뭐 이런 취향판 같은 이야기를 나눴었어) 수다를 떨었는데 쌤이 그걸 듣고 있다가 자는 아이들 있으니까 조금 조용히 이야기해달라고 한 마디 하셨거든. 그래서 조금 안심된 마음으로 대답했어.
65 이름없음 2020/03/15 02:08:10 ID : JQsi7aoNvzV 0
레주 마음 다 알 것 같아ㅜㅜㅜ아 레주 고생했어 진짜ㅠㅠㅠ
66 이름없음 2020/03/15 02:12:00 ID : snPipbAY5Wi 0
이대로 써볼게 - 저는 그냥 남들이 싫어하는 걸 다 좋아하고 남들이 잘 신경 안 쓰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오.... 그래? 예를 들면 어떤 거?" - 친구들이 우울한 소설책 싫다고 하는데 전 그런 거 좋아하고, 영미 고전문학 읽는 걸 좋아하고, 남들이 다 좋아하는 영화를 싫어하고.... (솔직히 이런 의도로 말을 하신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냥 굳이 깊게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피상적으로 말했어) "음..... 그렇구나." - 네 그렇죠. 저 되게 독특하죠 선생님? (반항적으로 느껴줘도 이해해줘. 이때 뭔지 모를 심리 때문에 좀 비뚤게 굴었었어 지금은 안 그러지만) "글쎄... 조금 특이하고 때로는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게 너가 좋은 거라면." - ..... ? "그게 너인 거지. 안 그래?"
67 이름없음 2020/03/15 02:13:40 ID : mk1jArBupRu 0
아.....와..... 드디어 나왔다.... 이거였구나
68 이름없음 2020/03/15 02:15:22 ID : 1yJPilCknu6 0
와 대박이다 설렌다
69 이름없음 2020/03/15 02:17:22 ID : snPipbAY5Wi 0
사소한 말이지만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은 처음이었어. 부모님도 친구들도 아무도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고 심지어 두 번째 분은 내 독특함을 들먹이면서 나한테 씻기 힘든 상처를 남기고 가셨으니까 더더욱 인상적이었어. 그리고 그날부터, 이상하게 나는 더 이상 벽을 세울 수 없었어. 벽을 세우고 '낯가림' 이라는 장벽의 뒤에서 아무리 선생님에게 단답을 하려 해도, 눈을 피하려 해도, 다정다감함과 세심함을 무시하고 모른 척 하려고 해도 그게 힘들어졌어. 정확히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 좋아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자면 정말 많겠지만 나는 그 중 하나를 고르라면 의 사건을 고르고 싶어. 정말로. 그동안의 상처가 다 씻겨져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거든.
70 이름없음 2020/03/15 02:19:36 ID : snPipbAY5Wi 0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뭔가 설레는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으면 말해줘. 더 써야 하나 모르겠네. 사실 쓰려고 했던 이야기는 여기까지라서...
71 이름없음 2020/03/15 02:22:39 ID : CpbBcK7zeY9 0
다 읽었어 새벽에 너무 설렌다....ㅎ 세 번째 짝사랑은 꼭 해피엔딩(?) 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길 바래 스레주! 질문이 있다면 음......... 설레는 썰을 더 듣고 싶기는 한데 요즘 연애판 분위기가 조금 그렇네 핳ㅎ 선생님들 외모 묘사해주라! 외적으로! 세세하게 해줘도 좋아 ㅎㅎ
72 이름없음 2020/03/15 12:28:23 ID : U1CmHBcE5Vh 0
끝인 건가! 써줘서 고마워 잘 읽었어
73 이름없음 2020/03/15 15:14:10 ID : 8jfUZbfWjjv 0
오 쉣더 미쳤나봐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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