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남극의 집 (1)
2.남사친이 뭘 해야 우리 이쁜 여주가 설렐까 (4)
3.소설 제목 기부 좀 (9)
4.울컥하는 감정을 어떻게 길게 표현하지 (7)
5.바다에 사는 인어 여주가 인간 남주에게 무슨 선물을 줄까?? (33)
6.특이한? 그런 캐릭터를 만들고 싶어 (7)
7.인소 남주와 순정만화 남주의 차이점이 뭐야? (5)
8.. (1)
9.주변 인물 인용은 어디까지 허락된다고 생각해? (2)
10.스토리 짜줄게 (9)
11.혹시 내 글좀 봐줄수 있니ㅠㅠ (6)
12.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3)
13.설레는 상황 창작해서 적고 가기 (12)
14.합창, 수감된, 넥타이를 푼 (238)
15.내 글 지적해줘!! (누군가한테 글 보여주는건 처음이양...ㅎ) (7)
16.묘사가 어려워 (4)
17.여기에 스트리머로 쓴 소설도 올라옴? (5)
18.다들 엠비티아이 뭐여? (33)
19.. (1)
20.내가 소설을 써볼려고 그러는데 (3)
1
이름없음
2018/07/04 16:09:06
ID : o1wpTQsnXy1
12
이 글은 스레더즈에서 제3장과 외전까지 연재되었으며 사이트와 함께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제0장과 제1장을 찾았으므로, 기억을 되살려 나머지 내용도 복구할 요량으로 스레를 세웁니다.
앵커판에서 연재되었던 이상, 이 글은 저뿐만 아니라 저 외의 참가자들과 함께 만들어졌음을 알립니다.
설정 오류를 메우는 등의 이유로 내용이 기존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하로는 제2장부터 연재됩니다. 이하 링크의 제0장과 제1장부터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https://www.evernote.com/shard/s399/sh/9be6d940-2861-4aef-b13f-22ea5bce937c/6399a3b14b3d7897dc74d6a324881353
(제0장 +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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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k62Le3U7xRu
2018/07/24 15:59:12
ID : o1wpTQsnXy1
0
점차, 설기의 입가에 걸려있던 냉소가 커피를 홀짝이듯이 사라집니다.
"옛날엔 생각 없이 잘만 놀렸는데, 이젠 좀 힘들구나."
"늙은 거야." 호연이 말하더니, 채하의 잠자리를 마련하려 먼저 게임 센터로 향합니다. 설기와 연화가 앞서가던 민기를 따라 사무실로 발걸음을 서두릅니다.
새벽은 바깥에서 본 츄러스 천막이 약간 기울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고속으로 날아다니다 보니 직선과 곡선이 두루뭉실해진 것일까요. 새벽은 자신의 눈을 탓하며 안으로 들어갑니다. 밀가루 포대가 웬일인지 한가운데까지 옮겨져 있고, 자신의 소지품은 흩어져 있습니다. 눈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집니다. 여명은 자고 있습니다. 여명이 멀쩡하다면 다른 문제는 없겠지요. 새벽은 마음을 놓습니다.
그떄 누군가가, 얼마 전에 다녀온 침입자와는 영 다르게 천막을 푹푹 두드립니다. 노크인 모양입니다.
103
◆k62Le3U7xRu
2018/07/24 16:08:56
ID : o1wpTQsnXy1
0
새벽이 천막을 젖힙니다. 털털 바퀴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다름 아닌 끌차를 밀고 온 설기입니다.
"누구 실어가려고?"
"호연 언니가 말하기를, 밀가루가 있더더라고?"
새벽은 뒤를 돌아봅니다. 누구 짓인지, 방 한가운데데 보란듯이 내놓아져 있군요.
"밀가루는 무슨 일이야?"
"내일 츄러스를 해먹기로 했어. 분위기만 봐서는 캠프파이어가 성사될 기운이 들거든."
그러더니 머리를 긁적입니다. 괴로움 없이도 표정이 지어집니다.
"안 된다 해도 나쁠 건 없잖아? 캠프파이어를 하든 안 하든, 단 걸 먹으며 기운을 차리자."
새벽과 설기가 힘을 합쳐 밀가루 포대를 끌차 위에 올립니다. 설기가 끌차를 뒤로 돌립니다. 둘은 손을 내보입니다. 말 없이 작별을, 푹 잘 것을, 재회를 인사합니다.
104
◆k62Le3U7xRu
2018/07/24 16:18:55
ID : o1wpTQsnXy1
0
천막이 폐쇄됩니다. 새벽이 바닥을 더듬으며, 여명을 피하며 자신의 요를 찾아 집어듭니다. 지폐처럼 바스락거립니다. 분수대에 던져지는 동전처럼 새벽은 바닥 위에 푹 고꾸라집니다. 그러나 새벽의 숙면을 소음이 가로막습니다. 민기의 음성입니다.
"야밤중에 왜 이리 멀리 왔어?"
"낮에는 멀리 못 가잖아."
"말 돌리지 마. 위험하게 혼자 돌아다니고 그래?"
"뭐가 걱정이야. 평소에도 이러고 다녔어." 새벽은 설기가 가출했었음을 떠올립니다. "밤의 살기에 옷을 껴입고, 옷 벗기려는 사람들한테 맞서 살에 멍 입히면서 버텼거든."
"이게 꼭 한 마디를 안 지지."
"한 마디 져주면 너무 기고만장해지는 바보가 있거든."
"그러고 보니 너 다친 거야? 약부터 바르자."
"남한테 보이지도 않는데 뭐가 문제야. 걷는 데 문제 없거든."
민기와 설기가 한동안 말다툼을 하며 천천히 천막에서 멀어집니다. 다시 조용해지자 새벽은 뒤척입니다.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자 여명이 앉아있었습니다. 새벽은 깜짝 놀랍니다.
"나쁜 꿈을 꿨어." 여명이 말합니다. 어둠에 가려 그의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새벽은 여명에게 보이지 않을 입을, 역시나 열지 않습니다.
"끝까지 널 옆에서 도울게. 넌 내 동생이고 제자니까."
새벽은 연두처럼 연하게, 고맙다고 말합니다. 여명이 쓰러지더니 등을 돌리고 눕습니다. 새벽은 한동안 정면을, 천으로 막힌 하늘을 바라다봅니다. 여느 때와 같이, 지키지 못할 약속만이 난무하는 밤입니다.
105
이름없음
2018/07/24 16:28:00
ID : o1wpTQsnXy1
0
오후 내내 논문을 들여다봤더니 눈이 못 버티겠네요. 오늘 글은 여기까지.
어림하여, 지금까지의 분량이 원고지 200매를 넘겼습니다. 외전을 빼고 전체의 삼 분의 일 가량 복구했다고 생각하니, 아직 원고지 400+a매가 남은 셈이네요.
가능한 한 간결하게 적으려 했는데, 600매면 작은 판본으로 300페이지 책이 나올 분량이었죠. 갈 길이 멀다 싶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106
◆k62Le3U7xRu
2018/07/25 13:40:54
ID : pU5e2LhBulg
0
노을은 열린 관람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잠에 빠져듭니다. 놀이공원에 누가 새로 들어왔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노을은 예지몽이 아닌 꿈을 꿉니다.
캠프파이어가 열리기 전까지,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역사적으로 이런 시간은 동화나 비극적인 신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잠시 동화가 이야기됩니다.
한 소녀가 포치에 앉아 동화책을 읽고 있습니다. 표지가 뜯겨나가 표지만 보고도 판단될 수 없게 된, 처절한 책입니다. 회색 평원에서, 그녀를 입양하고 맞이한 아주머니는 역시 회색입니다. 넓지만 볼 것은 없고, 다가오는 것을 앞서 알 수 있지만 오는 것은 허리케인뿐인 평원에서, 소녀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책을 낭독합니다. 강아지는 소녀가 책을 내려놓기를, 그리하여 책을 껌처럼 물어뜯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주머니는 젊은 만큼 아름다웠던 때 이곳에 살기 위해 왔다. 젊음도 아름다움도 태양과 바람이 가져갔다. 빛나던 눈과 입에는 잿빛만이 남았다. 말라비틀어져 웃을 일도 없었다. 고아 도로시가 왔을 때, 아주머니는 아이의 웃음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곤 손을 심장 부근에 올려야만 했다. 그리고는 또 재잘거리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가득찬 눈으로 도로시를 바라보곤 하던 것이다.
아저씨에 관한 장을 읽으려던 때, 갑자기 누군가가 소녀와 개를 낚아챘습니다. 그리고는 둘을 관람차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부탁하듯이 외쳤습니다. 소녀가 볼 수 있던 것은 후광을 가리던 인간 같은 형체뿐이었습니다.
"여기 가만히 있어라! 허리케인이 몰려온다!"
문이 닫혔습니다. 문은 잠겨 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녀와 개는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관람차가 회전합니다. 하늘로 치솟기 시작합니다. 땅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문과 벽과 문이 다름 없어질 때까지.
107
◆k62Le3U7xRu
2018/07/25 13:49:04
ID : pU5e2LhBulg
0
큰 충격과 함께 소녀는 잠에서 깼습니다. 푹신한 개가 아니었다면 위험할 뻔했지요.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옵니다. 더 이상 어둡지 않습니다.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문이 벌컥 열립니다. 소녀는 난쟁이들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긴, 그러나 챙이 없는 모자를 비롯해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쪽 마녀를 물리쳐 주셨군요! 죽이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소녀는 관람차에서 나옵니다. 구두 두 짝이 관람차 밑에 깔려 있습니다. 난쟁이들이 구두를 벗겨 태우려던 것을, 소녀는 만류합니다. 자신의 낡은 구두를 벗고 새로운 구두를 신습니다.
"저는 이제 어디로 가면 되나요? 집으로 가려고 하는걸요."
난쟁이들은 입을 다뭅니다. 그러나 작은 노파가 총총거리며 나타납니다. 그녀가 든 칠판에 하얀 분필로 글자가 적힙니다.
"당신을 에메랄드 시로 보내라고 합니다."
"어디인가요?"
"모두가 초록색인 장소이지요.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살고 있습니다. 도움을 얻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 혼자서요? 저는 평범한 소녀인걸요."
그녀의 말에 먼치킨들이 웃음을 짓습니다. 노파가 말합니다.
"이곳은 요술의 땅이에요. 동물도 말을 하는 마법의 땅, 오즈랍니다."
소녀의 개가 호응하듯이 흥겹게, 멍 짖습니다.
108
◆k62Le3U7xRu
2018/07/25 13:57:34
ID : pU5e2LhBulg
0
노파는 칠판을 들여다보더니 정합니다.
"당신은 분신술을 쓸 수 있군요."
소녀는 짧은 노력 끝에, 자신의 분신을 만납니다. 소녀가 분신을 들여다봅니다.
"너는 내 그림자를 닮았구나."
소녀는 분신을 동쪽 마녀를 감시하기 위해 남겨둡니다. 난쟁이들의 호응을 받으며, 소녀와 개는 에메랄드 시로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여행답게, 소녀는 여러 일행을 만났습니다.
"나는 탐욕이 없어. 그래서 무엇도 할 수 없어." 사자가 소녀의 앞에 섰습니다..
"나는 자존심이 없어. 그래서 무엇도 할 수 없어." 나무꾼이 소녀의 옆에 섰습니다.
"나는 상상력이 없어. 그래서 무엇도 할 수 없어." 허수아비가 소녀의 뒤에 섰습니다.
에메랄드 시로 들어가기 전, 수문장이 그들에게 초록 안경을 건넸습니다.
"이 도시는 너무 밝습니다. 안경 없이는 눈이 멀어버리죠. 그래서 모두의 안경은 잠겨있답니다. 방문객을 빼고는요."
안경을 쓰고 다섯 일행은 도시로 들어섭니다. 모든 것이 초록색입니다. 구름마저, 디저트 가게마저 초록색입니다. 가게 안에는 학생 두 명이 빨대로 아이스티를 마시다,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집니다. 일행은 곧장 직진해 오즈의 성으로 들어갑니다.
109
◆k62Le3U7xRu
2018/07/25 14:08:39
ID : pU5e2LhBulg
0
"나는 위대하며 잔인한 오즈다. 너는 누구이며, 왜 하필이면 나를 찾아다녔는가?"
거대한 머리에서 음성이 울려퍼집니다. 소녀는 꿈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오즈가 묻습니다.
"그 구두는 누구에게서 약탈했느냐?"
"동쪽 마녀를 물리친 대가로 난쟁이들에게서 받았습니다."
"이마의 자국은 무엇이냐?"
"노파에게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왜 이곳에 머물지 않느냐?"
"아름답고 찬란하나, 어쩔 수 없습니다. 전 되돌아가야 합니다."
"너는 동쪽마녀를 죽였다. 그만큼 강하지 않느냐?"
"제 자유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즈는 소녀와 일행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 땅에서는 받기를 바라기 위해 먼저 주어야 한다. 서쪽 마녀를 죽여라. 그녀는 이제 이 땅에 남은 유일한 악한 마녀다."
"나는 마녀를 죽일 만큼의 욕심이 없어." 사자가 말합니다.
"내게는 일을 미루지 않을 동기가 없어." 나무꾼이 말합니다.
"내게는 계책을 떠올릴 상상력이 없어." 허수아비가 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소녀와 함께하겠다고 말합니다. 개를 앞세워 그들은 서쪽 땅으로 나아갑니다.
110
◆k62Le3U7xRu
2018/07/25 14:17:37
ID : pU5e2LhBulg
0
수문장에게 초록 안경을 반납합니다. 서쪽 마녀에게 어떻게 가냐고 소녀가 묻습니다.
"길은 없습니다. 갈 사람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녀가 찾아올 겁니다. 그녀는 당신들을 노예로 만들려고 단단히 벼를 것이 뻔하거든요."
정말이었습니다. 머지 않아 마녀가 늑대들을 이끌고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소녀의 개가 늑대와 마주했습니다. 마녀가 혀를 찼습니다.
"이런. 하나는 어리고, 하나는 말을 못 듣고, 하나는 의욕이 없고, 둘은 의욕이 없고, 셋도 의욕이 없구나. 노예로 쓸 수가 없지 않니."
그러더니 일행을 타이르기 시작합니다. 이 길을 돌아, 길이 없는 곳이 아니라 길 있는 곳으로 가지 않겠냐고. 사기꾼 오즈를 잡으러 가지 않겠냐고.
잠시 후, 일행과 마녀는 수문장을 물리친 채 도시로 들어섰습니다. 초록색인 줄로만 알았던 도시는 알고 보니 형형색색이었습니다. 색색의 구름이, 색색의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마녀는 이 도시가 초록색인 것은 안경 때문이라 일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외치기를, 우리는 해방군이라고.
그들은 그대로 성으로 들어갑니다. 마녀와 일행, 그리고 오즈는 대치합니다.
"위대하지 않으나, 잔인한 오즈." 마녀가 오즈를 부릅니다. "모두 끝났다. 모두 끝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안경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오즈가 자신을 속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유지했음을 알았습니다. 성으로 몰려오는 그들을, 마녀와 소녀는 막아섰습니다.
"우선 동화를 끝내도록 하자." 마녀가 말했습니다.
111
◆k62Le3U7xRu
2018/07/25 14:23:19
ID : pU5e2LhBulg
0
소녀는 오즈의 행방을 정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오랜 토론 끝에, 오즈는 노동 교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구시대의 잔재들을 제 손으로 파괴하게 되었지요. 양손, 그리고 나무 방망이만으로 말입니다.
소녀는 구두를 땅에 두 번 부딪히며, 자신은 되돌아갈 것이라 말했습니다. 소녀는 연기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되돌아간 것일까요. 그러나 추측뿐입니다.
서쪽 마녀는 오즈의 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시를 초록색으로 칠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초록 안경 따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해방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건물들이, 모든 하늘이 초록색으로 보이지만 말입니다. 오즈의 성에는 매일 사람들이 출근해 초록 연기를 굴뚝으로 피워냅니다.
사자는 욕심을 얻었습니다. 이제 사자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게 사자가 바란 탐욕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무꾼은 자존심을 얻었습니다. 이제 누구와도 말을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무꾼은 더 이상의 자존심을 바라지 않습니다.
허수아비는 상상력을 얻었습니다. 이제 적을 친구로 믿을 수 있습니다. 적을 적으로 여길 만큼의 상상력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112
◆k62Le3U7xRu
2018/07/25 14:35:04
ID : pU5e2LhBulg
0
자신을 감시하던 소녀의 분신이 사라지자, 동쪽 마녀는 눈치를 보더니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난쟁이들에 의해 잡혀버렸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생명만을 연장하게 되었습니다.
오즈는 오늘도 나무 방망이를 듭니다. 캉캉, 불꽃놀이 같은 소리가 이어집니다. 벽돌이 빠집니다. 시멘트가 빠집니다. 못이 빠집니다. 먼지가 일어섭니다. 건물을 하나 무너뜨리면 다음 건물을 무너뜨립니다. 시계가 역행하듯, 북쪽에서부터, 서쪽으로, 남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그리하여 오즈가 마침내 동쪽에 다다랐을 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소녀가 타고 온 관람차만이 남았습니다. 오즈는 철제 구조물을, 관람차를, 바퀴살과 같은 철골을 방망이로 내리칩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관람차가 허물어집니다.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자유의 몸이 되어, 오즈는 동쪽 마녀의 면회를 신청합니다.
당신이 마침내 왔습니다. 동쪽 마녀는 당신을 바라봅니다. 먼지로 가득 찼군요. 말을 해보세요, 먼지를 내뱉어도 저는 들을 자신이 있습니다. 눈을 뜨세요, 눈동자의 자리에 먼지가 찼더라도 저는 눈을 돌리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공 같은 기침을 합니다. 그러더니 정면을 바라봅니다. 유리창 너머로, 저는 당신의 손이 있는 자리를 더듬습니다. 그곳에 심장이 놓인 것처럼.
노을
당신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당신은 고꾸라집니다. 의자 밑으로 떨어집니다. 저, 동쪽마녀는 일어섭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면회의 끝을 알리는, 당신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립니다. 마치 경보음 같습니다. 오래 전, 파국이 왔을 때 울렸으나, 이제야 도달한 음성처럼 빛납니다. 당신을 바라보며 저는 힘 없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당신이 죽었으니 축제가 열릴 것입니다. 당신이 죽었으니 더 많은 희생양은 필요 없겠지요.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역사적으로 이런 시간은 동화나 비극적인 신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저, 동쪽 마녀는 한숨을 쉬더니, 오래전에 시작한 이야기를 입에 담았습니다. 옛날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더라고요. 한 소녀가 포치에 앉아 동화책을 읽고 있었더라고요. 표지가 뜯겨나가, 표지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게 된, 처절한 책이었더라고요.
113
◆k62Le3U7xRu
2018/07/26 15:23:44
ID : pU5e2LhBulg
0
노을이 눈을 뜹니다. 꿈에서 깨어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감각이 생생합니다. 이상합니다. 오늘만 해도, 예지몽이 아닌 꿈을 벌써 두 개나 꾸었습니다. 혼잣말이 흘러나옵니다.
"기분이 이상해."
"그렇지?" 노을의 앞에 채하가 나타납니다. 노을은 답하려다 말고, 온몸이 굳어버립니다.
"왜 여기 있어?"
"그러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뭐 하려고 왔어?"
"불 좀 피우려고. 준비는 끝났어. 넌 네 마지막 꿈을 따르면 돼."
채하가 웃더니 관람차를 빠져나갑니다. 노을은 혼이 나가버립니다. 채하를 뒤따라왔던 새벽이 관람차 문을 두드리더니 들어옵니다. 어깨를 잡고 흔들어 노을의 혼을 다시 집어넣습니다. 노을의 눈동자가 무딘 도끼처럼 새벽을 향합니다.
"새벽씨이번엔모자쓰고왔네혼내주려했는데."
아직 부족한가 봅니다. 노을을 더 뒤흔듭니다. 열 번 찍힌 나무처럼 노을의 정신이 확 돌아옵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 그보다 새벽 씨 돌아왔네?"
"마녀가 채하였고, 채하는 내 친구였고, 캠프파이어가 통과됐고,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했어."
"머리 안이 꼬이는걸. 꿈도 괴팍한 걸 꿨는데."
새벽이 노을의 꿈에 관심을 보입니다. 노을이 다리를 꼬고는 기억을 되짚습니다.
"나는 동쪽마녀였어."
"그래?"
"언니가 탄 관람차에 깔렸다가 감옥에 갇혔어."
"채하는 노을에게 무슨 의미인 거야."
"새벽 씨는 늙어서나 면회오더니, 내 앞에서 늙어죽었어."
"어째서 나까지."
114
◆k62Le3U7xRu
2018/07/26 15:28:57
ID : pU5e2LhBulg
0
"아이고. 바보 커플 나셨네요."
관람차 문 뒤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노을이 흠칫 놀랍니다. 설기가 얼굴을 빼꼼 내밉니다.
"너도 서둘러 잠깨. 듣고 보니 네가 밀어붙인 행사라며?"
"누구세요?"
"네 언니 친구야. 너처럼 네 언니 싫어해."
경계감을 보이던 노을이, 그 말 한 마디에 확 풀어집니다. 설기를 환영하고 나섭니다.
"똑똑한 사람이네."
"그럼. 잘난 척하지만 빈틈이 많아. 날 구출해주면서 우리 베이스캠프에는 식량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 많았거든. 허탕을 친다니까."
"예시를 들지 않아도 언니는 바보야."
"그래, 바보야." 설기가 웃습니다. 새벽은 노을이 한쪽에 밀어둔 담요를 정리합니다.
"어디 나가자." 새벽이 제안합니다. "잠 깨는 데에는 산책이 최고지."
"데이트예요?"
설기의 뒤편에서, 새로운 인물이 끼어듭니다. 설기가 등을 굽힙니다. 연화가 업혀 있습니다. 노을이 연화를 알아봅니다.
"넌 또 왜 여기 있어?"
"구출됐어?"
"우리 언니는 바보지?"
"어... 잘 모르겠어."
"넌 내 적이야." 노을이 토라집니다.
115
◆k62Le3U7xRu
2018/07/26 15:40:07
ID : pU5e2LhBulg
0
새벽이 노을을 데리고 관람차를 빠져나옵니다. 캠프파이어를 할 아침이 되었으나, 여전히 사방이 어둡습니다. 새벽이 관람차 계단을 내려가며, 설기에게 묻습니다.
"연화는 왜 그러고 있어?"
"아, 얘?"
설기가 열두시의 시계탑처럼 뻣뻣하게 서 한 번 뜀뛰기를 합니다. 설기의 등에 업힌 연화가 깜짝 놀랍니다.
"침대에서 떨어졌거든. 널바닥에 자다 침대에 가니 잠버릇을 주체할 수 없었나봐."
"참. 츄러스 만든다더니." 새벽이 어젯밤의 일을 기억합니다.
"맞아. 오빠가 식당에 갔어. 조리원들이 만들어주신 츄러스 갖고 곧 오실 거야. 캠프파이어 때 나누어 줄게. 기대해."
노을의 눈에 기쁨이 스칩니다. 곧 있을 캠프파이어, 곧 만날 사람들, 곧 이루어질 꿈. 검은 밤과 노란 등, 통행 금지를 연상시키는 배경이 노을을 스쳐갑니다.
새벽과 노을이 내려갑니다. 노을은 외줄의 끝에 다다른 사람과 같은, 복잡한 표정을 짓습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텅텅거리는, 길쭉하게 뽑힌 노을의 그림자는 그리스의 설화를 연상시킵니다. 전장에 나가는 연인의 그림자를 벽면에 따라그린 여인이, 그리스 최초의 화가가 되었다던 전설을. 글과 그림과 그리움은, 벽면에 새긴다는 점에서 같은 어원을 지닙니다.
"아참."
"왜 그래요, 누나?" 연화가 설기에게 묻습니다.
"저 애들, 우리 말 하나도 부정 안 했어."
116
◆k62Le3U7xRu
2018/07/26 15:48:28
ID : pU5e2LhBulg
0
채하는 아마도 여명을 만나러 츄러스 천막으로 갔을 것입니다. 새벽은 같은 동선을 잡습니다. 노을에게 꿈에 대해 묻습니다.
"나 말고는 누가 등장했어?"
"새벽이 형이랑 민기랑 경찰 씨, 그리고 빌어먹을 언니."
새벽은 노을의 말을 애써 교정하지 않습니다. 말을 돌립니다.
"채하를 정말로 싫어하는구나."
"엄청 싫어해. 내가 두 살이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좋아해본 적 없어."
채하가 다섯 살일 때입니다. 둘 중 누구도 멀쩡한 기억을 가지지 않았을 때인데, 우리는 왜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남을 꺼려할까요.
노을이 증기기관차처럼 한숨을 푹푹 내쉽니다. 새벽을 앞서가더니, 마구 짜증을 냅니다.
"내가 잠든 새에 일이 너무 많이 생겼어. 멍청한 예언가라니. 이대로라면 내 신비가 날아가버려."
"넌 신기해." 새벽이 노을의 지나친 고민에 웃음을 짓습니다.
"아니거든. 다 끝났어."
노을이 새벽을 보며 뒤로 걷습니다. 새벽이 쓴 모자를 빼앗아듭니다. 양팔로 잡은 모자를 머리 위로 들어올립니다. 노을의 위에 UFO가 떠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노을이 UFO에 잡혀가는 척, 으아아 소리를 냅니다.
"도와줘. 내 신비가 다 날아가."
새벽은 모자를 잡습니다. 노을에게 모자를 씌워줍니다. 흔들리던 노을의 꽁지머리가 얼굴에 착 달라붙습니다. 땀이 많이 난 모양입니다. 노을은 모자를 새벽에게 되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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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6 16:00:57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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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잠시, 오스트리아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무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카푸친 납골당, 성 슈테판 성당, 그리고 성 아우구스틴 성당에 심장과 유골이 나뉘어 보관된, 역사의 토막살인의 현장에 대해서요. 노을은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거기는 왜? 마르가리타 같은 유명인 때문에?"
"외국이니까. 해외여행을 못 가봤어."
새벽이 천막 근처에서 여명을 만납니다. 새벽이 유쾌하게 손을 듭니다. 그러나 여명은 복잡다단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뒤에는 채하가, 축제를 앞두고 짓기 마련인 타이머 같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여명 형?" 새벽이 묻습니다.
"놀음은 그만 하도록 하자."
여명이 새벽을 냉정하게 물리칩니다. 새벽은 잠시 멈칫합니다. 잠시 표정이 일그러집니다. 그러나 과민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줄을, 새벽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노을은 눈치를 살피더니, 새벽의 뒤편으로 총총거리며 물러섭니다.
"더 머뭇거리지 말자. 소원팔찌를 돌려줘."
여명이 새벽에게 손을 내밉니다. 새벽은 자신의 손목을 봅니다. 여명이 생일 선물로 준, 소원팔찌를 차고 있습니다. 지금 보니, 새벽은 얼마나 선물을 많이 받았던가요. 새벽이 머뭇거립니다. 노을은 눈치를 살피더니, 무엇인가 깨달은 모양새입니다.
"내놓으라고 해. 보니까 자기도 하나 갖고 있었네. 선물을 줄 거면 다 줬어야지."
새벽이 노을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바지 주머니에 넣은 여명의 손목에, 구슬로 된 팔찌가 얼핏 보입니다. 여명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한 손을 여전히 새벽에게 내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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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6 16:11:02
ID : pU5e2LhBulg
0
"글쎄. 뭘 복잡하게 정리하려 그래. 그냥 없던 셈 쳐. 어서 캠프파이어에나 가자."
채하가 끼어듭니다. 열성을 품고 있습니다. 이런 일 따위야 금방 넘겨버리고, 얼른 일상의 궤적에 돌아가자는 투입니다. 무슨 신호였을까요. 새벽은 손목에서 팔찌를 쓸어내립니다. 엮인 구슬들이 땅바닥에 떨어집니다. 새벽이 팔찌를 주워듭니다. 묻은 모래를 털어냅니다. 여명에게 건넵니다.
"...고맙다."
붕대로 감긴 듯, 작게 여명이 중얼댑니다.
"이걸로 모두 정리하도록 하자."
"...저야말로."
새벽이 감정이 씻겨나간 목소리로 답합니다. 누구도 동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평소라면 절대로 동요하지 않던, 채하가 굳은 눈으로 둘을 바라봅니다. 자신만이 빠져나간 세계의 단면을 바라봅니다. 그 이상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노을입니다. 노을이 불안해져, 눈을 감듯이 채하를 부릅니다.
"언니, 왜 그래?"
"...아냐."
채하가 부정합니다. 새벽은 눈이 침침합니다. 밤이 물처럼 가득합니다. 짓눌리는 것 같습니다. 옷을 털면 밤이 빠져나올 것 같습니다. 불투명해, 바로 옆에 선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약속도 허물어질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새벽은 채하의 탈선을 생생히 느낍니다. 항상 자신만만하게 처신하던 그녀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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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6 16:15:48
ID : pU5e2LhBulg
0
채하가 여명을 건물에 들어갈 때 밀치는 문처럼 피합니다. 뒤로 물러섭니다.
"먼저 가세요. 쌤. 저 사무실에 가볼게요."
"도와줄까?"
"아니오. 시계가 필요해서 그래요. 먼저 가든지 하세요."
채하가 빠져나갑니다. 여명은 새벽과 노을이 서먹한지, 천막에 들렀다 가겠다고 전합니다. 개운하지 않은 채로, 새벽과 노을이 캠프파이어 장소로 향합니다. 노을이 점쳤던 곳입니다. 관람차 앞 광장입니다.
"지금 일에 무슨 의미가 있었지?" 새벽이 묻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을 새벽은 도저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사자가 모르면 어쩌란 거야." 노을이 핀잔을 줍니다. 그러더니 성큼 새벽을 앞서갑니다. 새벽은 순간 고립된 기분을 느낍니다. 누구의 심정도 넘겨짚을 수 없습니다.
"새벽 씨는 새벽 씨만 생각해."
노을은 그렇게 말하나, 새벽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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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6 16:30:59
ID : pU5e2LhBulg
0
광장의 한편에는 꼭 녹였다 굳힌 것 같이, 얼기설기 쌓인 장작들이 가득합니다. 호연과 경찰 셋이 노을과 새벽을 맞이합니다. 호연이 팔을 높이 듭니다. 구멍을 판 뒤, 그 안에 우물 정 모양으로 장작을 쌓아올리는 중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양만 보아서는 타오르기보다는,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한 구조물인 것만 같습니다. 호연이 장작을 가리킵니다.
"다 채하가 가져온 거야."
"언니가?"
"마녀랬잖아." 새벽이 노을에게 설명합니다. 노을이 시무룩해집니다.
"이 근처 좀비도 다 없애버렸어. 안전 걱정은 사라졌지."
"좀비가 없었을 때도 우리는 항상 위험했는걸. 경찰 씨가 실업자가 안 됐잖아." 노을이 억지를 부립니다. 호연이 웃습니다.
"인류 모닥불 협회가 어찌되었든 창립되겠네."
"협회." 노을이 눈을 번쩍입니다. 새벽은 노을이 기운을 차린 듯하자, 내심 안심합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무얼 해야 할까. 노래라도 불러야 하나?"
"정석적이네." 노을이 답합니다. 호연이 심술궂은 얼굴을 합니다.
"왜 캠프파이어 때는 노래를 부르는지 알아?"
"어째서야?"
"불을 보면 죽고 싶어지거든. 그걸 잊기 위해서라도 노랫말로 도망쳐야 해."
호연은 네모나게 장작을 쌓기를 계속합니다. 노을은 조용해집니다. 새벽의 손을 잡고 적당한 자리를 물색하며 주위를 돌아봅니다.
"불을 보고 싶지?"
노을의 물음입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새벽은 머리를 조악댑니다. 멀리서, 츄러스 상자를 든 채 걸어오는 민기와 설기, 연화가 보입니다. 새벽은 멈추어 서서, 이곳이 적당하겠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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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7 15:10:25
ID : pU5e2LhBulg
0
캠프파이어의 시작입니다. 호연이 우물에 기름을 끼얹습니다. 불이 붙여집니다. 땅을 피해 도망가는 풀처럼, 불길이 맹렬하게 손을 뻗습니다. 불티가 튀어옵니다. 주위가 환해옵니다. 오랜 밤 중에 너무 강한 빛을 보자, 사람들은 일시에 눈을 찌푸립니다. 네모난 모닥불은 꼭 목이 잘린 시체 같습니다. 새벽은 빛을 등져 밝음에 익숙해진 뒤에야,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새벽의 바로 옆에 노을이 앉아있습니다.
"하아."
노을은 마치 아마추어 천문학자 같습니다. 근로기준법의 순풍에 올라타, 일 년에 단 15일 주어지는 유급휴가를 써 어디 산에서 별을 관측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배가 난파하고 가족의 유산 문제에 불려가고 스파이들로부터 외국의 왕족을 지키느라 14일을 허비해 버렸습니다. 나름의 성과도 얻고 인연도 얻었지만 휴가 마지막 날, 별을 보겠단 목표는 아직 분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망원경을 트렁크에 넣고 산으로 갔습니다. 마침 8월, 페르세우스 유성우의 날입니다. 망원경을 물고 간 멧돼지를 잡고, 근처의 영화 촬영팀마저 쫓아냈습니다. 지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어. 이 정도면 하늘도 내 정성에 탄복하고 유성우를 줘야 해. 소원은 빌지 않을게. 그런 하찮은 이유가 아냐. 난 정말 별을 보고 싶어. 이렇게 아마추어 천문학자는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은 하루종일 흐렸습니다.
새벽이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이런 이야기를 짤 만큼 심려 깊은 몸동작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모닥불 협회 창립을 앞두고 그런 못된 표정을 짓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호연도 새벽과 같은 낌새를 느꼈는지 노을의 팔을 붙잡습니다.
"깜짝 놀랐잖아요!" 노을이 기겁합니다. 비밀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처럼.
"혹시나 해서 마지막으로 물을게, 노을아."
"우리 사이에 거리 벌릴 필요 없는데. 경찰 씨."
"너, 어젯밤에 우울하던 건 가셨어?"
호연은 고층에서 야경을 내려다볼 때처럼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새벽이 관심을 보입니다.
122
◆k62Le3U7xRu
2018/07/27 15:18:28
ID : pU5e2LhBulg
0
"노을, 무슨 일이야?"
"그저, 뒤숭숭한 꿈을 꿨어."
노을은 말을 줄이려 합니다. 대화에 구멍이 나는 것만 같습니다. 호연의 말투가 순식간에 험악해집니다. 노을은 한 번, 자신의 꿈을 맹목적으로 따른 전적이 있습니다.
"어젯밤처럼, 네가 좀비에게 물려야 한다는 꿈은 아니지?"
"그런 거 아냐."
노을은 갑자기 다짐한 듯한 목소리를 냅니다.
"난 이제 꿈을 안 믿어. 완벽하게 박살났는걸."
"나를 봐서라도 꿈을 따르지는 마."
노을은 입을 다뭅니다. 새벽을 흘끗 봅니다. 대화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 채하가 뒤에 멀찍이 떨어진 채 새벽을 호출합니다. 노을은 가녀린 팔을, 새벽을 향해 뻗었다가 접습니다.
채하는 모처럼 들떠있습니다. 시계를 번쩍 치켜듭니다. 사무실에 들른다더니, 벽에서 시계를 떼어왔나 봅니다. 못에 거는 용도였을 고리가 달랑거립니다.
"새벽, 봐. 시계 구했어."
"그거 자랑이야?"
"시간은 중요하지. 태양의 그림자에서 기원했던 시계가, 밤에도 똑딱 잘도 돌아가네? 10시 5분 전이야. 5분."
채하의 음성이 떨리고 있습니다. 잠시 대화가 끊깁니다. 새벽은 모닥불 전체를 조망합니다. 채하와 새벽 앞에 노을이 앉아있고, 여명은 반대편에서 불의 상단을 하염없이 보는 중입니다. 호연과 경찰 셋이 경비를 섭니다. 민기와 설기, 연화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츄러스를 쥐여주는 중입니다. 민기의 등에는 호연의 어린 동생이 업혀있습니다. 설기가 새벽과 채하를 부릅니다.
123
◆k62Le3U7xRu
2018/07/27 15:34:52
ID : pU5e2LhBulg
0
"단 것 좀 먹어. 너희 너무 지쳐보인다."
"안 지쳤어." 채하가 말합니다. 설기가 이해한다는 듯 웃습니다.
"축제를 준비하느라 너무 애를 써서, 정작 축제를 못 즐기면 안타깝잖아." 너희의 노력을 안다며, 설기가 또 다시 웃습니다. 새벽은 시계를 붙든 채하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는 즐기는 장소가 아냐."
채하가 답합니다. 설기는 듣지 않았다는 듯 새벽과 채하에게 츄러스를 내밉니다. 새벽과 채하가 앞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나 츄러스를 받는 사람은 새벽뿐입니다. 채하는 양손에 붙든 시계를, 그 안의 바늘을 노려봅니다.
"3분 전이야."
새벽은 그제야, 자신이 노을 근처까지 걸어왔음을 깨닫습니다. 노을이 채하에게 말을 겁니다.
"저기, 언니. 모닥불 좋네. 특히 시작하는 모닥불은."
채하가 노을을 바라봅니다. 그들 앞으로 상사화 같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상사화는 꽃대궁이 진 후에야 잎을 내는데, 모닥불은 불꽃이 진 이후에 무엇을 낼까요? 빛을 쬔 채하의 얼굴이 새벽에게 생생히 보입니다. 새벽은 모종의 체념을 느낍니다. 그것의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노을은 비에 씻긴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말을 잇습니다.
"언니, 미워해서 미안해."
채하는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것 같은 무심함을 가장합니다.
"계속 말해봐."
"언니가 오컬트 얘기하는 것 진짜 싫었어. 우주인이니, 마법이니. 근데 그건 언니가 마녀 같은 이상한 사람이라 그랬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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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7 15:40:13
ID : pU5e2LhBulg
0
채하는 노을을 빤히 바라봅니다. 간파되기 앞서 간파하려는 때 흔히 나타나는 성급함을 취합니다.
"그래. 넌 오컬트 싫어했지. 남과 나눌 수 없으니까."
"아니, 그런 이유가 아냐. 낯선 것이, 형태가 없는 것이 싫어서가 아냐. 특히 그 우주인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어."
새벽은 채하의 눈에서 원망과 비슷한 색채를 읽습니다. 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한 것이었다는, 명령을 받은 사람의 억울함이.
"난 밤하늘이 밤하늘이면 좋겠어. 왜 거기에 사람을 집어넣고는, 이윽고는 밤하늘을 적으로 여기는 거야?"
노을이 위를 바라봅니다. 새벽이 노을의 시선을 쫓습니다. 별이 가득한, 소원을 빌어도 들어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밤하늘입니다. 별의 길입니다. 불은 높이 타오르지만, 별을 파묻을 만큼의 밝음은 내지 못합니다. 사람에 든 기억의 비율만큼, 하늘 속에 어둠이 섞여듭니다.
채하는 답하지 않습니다. 대치 상황이 이어집니다. 채하는 갑자기 마녀 모자를 눌러씁니다. 채하의 얼굴이 다시 가려집니다. 고개를 내린 채하는 다시, 벽에서 떼온 시계를 바라봅니다. 새벽은 어찌 처신할지 몰라 순간 답답해집니다.
125
◆k62Le3U7xRu
2018/07/27 15:47:51
ID : pU5e2LhBulg
0
이때 동아줄이 내려옵니다. 우리가 답을 찾는 곳은 늘 타인입니다. 호연이 분위기를 띄우려듭니다.
"이럴 때는 노래지. 누가 노래 좀 불러봐. 거기, 새벽."
이런, 새벽이 지목당합니다. 철로 된 동아줄에 머리를 맞은 꼴이 됩니다. 모두의 시선이 새벽에게 쏠립니다. 새벽이 머뭇거립니다. 공중에 버려진 새벽의 손에, 다른 손이 마주칩니다. 채하의 것입니다. 채하가, 마녀 모자를 눌러쓴 채하가, 깨질 것 같은 목소리로 권합니다.
"같이 불러줄게. 곡명은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호연이 되묻습니다.
"외국 노래야?"
"한국어로 번역해 부를게요. 좀비 아포칼립스에 딱 맞는 노래예요. 시체 구덩이에 들어가고도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시인 이야기거든요."
소원을 위해 흔들리는 생일 케이크 위의 초처럼, 채하의 목소리는 떨림에도 불구하고 나름 강단이 있습니다. 새벽은 조금 안심합니다. 채하가 오늘 아침부터 이상한 태도를 보이던 것이 영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습니다. 채하가 앞장서 강, 약, 약의 세 박자 박수를 칩니다. 노래 앞에서 활기를 되찾습니다. 채하가 멋대로 번역하여 새벽에게 알려주었던 그 노래가, 캠프파이어 위로 울려퍼집니다.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돈마저 연인마저
끝났네 아우구스틴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코트도 지팡이도
진흙 속에 뒹굴고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두 끝났네
126
◆k62Le3U7xRu
2018/07/27 15:56:45
ID : pU5e2LhBulg
0
노래가 즐겁게,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이어집니다. 똑같으면서도 중독성 있는 박자가 퍼집니다. 채하는 앞장서 즐겁게 민요를 부릅니다. 새벽과 자신의 노래에, 타인의 목소리가 섞여들었음을 깨달을 때까지. 노을이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채하가 번역한 그 가사로. 새벽이 순찰 전에 노을에게 가사를 일러준 적이 있음을, 채하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노래가 멈춥니다. 채하가 손뼉을 그만둡니다. 채하의 두 손이, 꺼진 불처럼 떨어집니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음에도, 채하의 시선이 노을을 향해 떨어짐이 느껴집니다. 노래를 웅얼거리던 노을이 채하를 돌아봅니다. 잠시, 불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들립니다.
"네가 어떻게 이 노래를 알아?" 채하의 목소리가 떨립니다. 부정된 사람처럼. 손에 땀이 아닌 피가, 타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처럼.
"그야 가르쳐줬으니까."
"조심했는데. 너한텐 넘어가지 않도록."
서쪽 하늘에는 깎여나간 손톱 같은 초승달이 긁혀있습니다.
제일 먼저 이상을 눈치챈 사람은 민기였습니다. 민기가 삽을 집어듭니다.
"불을 끄자."
호연과 여명이 합류합니다. 연화가 민기의 등에 업혀있던, 호연의 동생을 들어올립니다. 갓난아기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사이렌 같은 울음이 떨어집니다. 새벽의 시선이 채하에게 떨어집니다. 채하는 바닥에서 시계를 집어들었습니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10시야."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호연과 여명, 민기 셋이 흙을 모닥불로 집어던집니다. 구덩이를 메웁니다.
127
◆k62Le3U7xRu
2018/07/27 16:03:42
ID : pU5e2LhBulg
0
"새벽 씨."
새벽의 허리 높이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노을입니다. 새벽이 노을의 옆에 앉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제부터 준비한 행사였을 텐데. 갑자기 허락된 행사였는데. 협회가 창립된다고 했는데. 왜 화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분위기가 침울할까요. 한껏 멋을 내고 성장한 사람들의 모습이 무색해집니다.
"무서워. 날 여기 있게 해줘."
노을이 옆에 앉은 새벽을 향해 왼손을 뻗습니다. 새벽이 그 손을 잡습니다. 땀이 나있습니다. 대체 무엇을 걱정한 것일까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새벽은 손에 힘을 줍니다. 손이 둘인 것은 각자 자신과 남을 돌보기 위해서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노을과 새벽은 꺼져가는 모닥불 방향으로 앉아, 뿌리를 내리는 씨앗처럼 잠자코 위를 올려다봅니다. 밤하늘에서 모닥불의 영역이 소각됩니다.
빛이 사라집니다. 우물 모양으로 쌓인 나무에, 빨간 불똥이 죽지 않고 살아남습니다. 모래로, 흙으로, 뼛가루 같은 가루로, 불이 진정됩니다. 이윽고는 분수대 위에 세워진 동상과 같은, 검은 덩어리만이 남습니다. 불이 진화됩니다.
128
◆k62Le3U7xRu
2018/07/27 16:13:22
ID : pU5e2LhBulg
0
어둡습니다. 온 세계에 그림자가 덮힙니다. 경찰 한 명이 비상용으로 들고온 가스등불을 엽니다. 등대처럼 빛이 몇 줄기 쏟아집니다. 노을과 새벽의 뒤에서, 가느다란 말이 들립니다. 둘이 동시에 뒤를 돌아봅니다. 채하입니다. 호연 옆에 서있습니다. 장신인 호연의 목 부근에 대고, 채하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모두 망쳤어요."
"진정하렴." 호연은 채하의 약한 모습이 처음이지만, 서투르지 않게 채하의 모자를 토닥입니다.
"제가 다 망쳤어요."
호연의 옷깃에 눈물이 스며듭니다. 응석을 부리는 아이 같습니다. 호연은 어찌할 줄 몰라합니다.
채하는 호연에게서 떨어집니다. 울음은 여전합니다. 커튼의 주름처럼, 단정치 못하게 어리광이 접힙니다. 채하는 휘청이며 모닥불 쪽을 바라봅니다. 노을과 새벽을 향해, 채하의 눈이 매섭습니다.
"박노을."
채하는 익숙한 이름처럼 노을을 부릅니다.
"왜, 언니?"
"너는 내 그림자에 불과해." 채하가 단언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채하는 앞으로 걸어갑니다. 바닥에 떨어진 시계의 유리가 깨져있습니다. 이제 바늘은 보호받지 못합니다.
"나는 이만 갈게."
"기다려!" 뒤따라온 새벽이 급하게 외칩니다. 그러나 채하는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내일 보자.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롤러코스터에 올러탄 채하가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채하의 두 다리가 허공 위에서 오르고 내립니다. 새벽은 채하를 망연자실한 채 볼 뿐입니다. 스노볼 안의 세상처럼, 보이지만 잡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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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7 16:20:34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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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꺼졌습니다. 사람들은 흩어졌습니다. 캠프파이어는 망가졌습니다. 협회는 없었습니다.
실내에 박혀있던 새벽은, 저녁이 되어서야 야구방망이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의 행선지는 자이로드롭입니다. 다리미로 다려진 듯이 표면이 매끈합니다. 전파탑처럼 굳건합니다. 새벽은 야구방망이를 듭니다. 자신의 몸이 아파오는 것에, 뼈가 울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철제 구조물을 계속해서 가격합니다. 불꽃놀이와 같은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탕, 탕, 탕. 열아홉 번을 기어코 채우고, 새벽은 야구방망이를 내던집니다. 바닥에 주저앉습니다.
소리를 듣고 호연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난리냐고 묻습니다.
"소리라도 들려야죠."
호연이 되묻습니다.
"불꽃이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 소리라도 들려야죠."
새벽의 말에는 뼈가 없습니다. 어두컴컴한 낮 한가운데에서, 팔찌가 사라진 새벽의 팔이 뚜렷한 이유 없이 앙상해 보입니다.
비틀거리며 다시 실내로 들어간 새벽은, 다음날, 6월 28일 새벽 4시까지, 그 안에 잠자코 있었습니다.
130
이름없음
2018/07/27 16:30:15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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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3장의 시작입니다. 오늘 적은 부분은 흔적이 남아 있어 비교적 쉽게 복구했습니다. 이제 전체의 40% 가량입니다.
이미 한 번 사라졌던 글을 읽어주셔 감사드립니다. 이 인물들의 끝까지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31
이름없음
2018/07/27 16:32:09
ID : 6Y2q41AZeF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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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써주는 수고해줘서 나도 감사해 XD!! 재밌게 읽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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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8/07/28 14:28:42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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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미 내용을 아시더라도, 새로 적으며 전에는 없던 상징을 집어넣고 있기도 하니, 찾아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내일 스카이다이빙 다녀옵니다. 밤 늦게 돌아와 접속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133
◆k62Le3U7xRu
2018/07/28 14:36:53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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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스노볼'
눈을 뜹니다. 낯선 천장입니다. 머리가 아픕니다. 얄궂은 이마를 쓸어올리며 새벽이 상체를 듭니다. 강박적으로 모자를 씁니다.
고개를 들리니 창문에는 금이 가 있습니다. 새벽의 그림자가 금 위로 겹쳐집니다. 문은 열려 있습니다. 새벽은 일어서 밖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슬레이트가 텅, 슬픈 소리를 냅니다. 울림은 곧잘 슬픔으로 번역됩니다. 세계는 텅 비고, 도망칠 곳은 사라진 꼴이 영락없이 엇비슷합니다.
새벽의 발이 길을 잃습니다. 새벽도 길을 잃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둡습니다. 길을 가리는 검정은 어둠이 아닙니다. 새벽은 공원의 찬 기온을 느낍니다. 밤에 시간이 멈춰버린 지금으로선, 지저귀는 산새도 뒤척이는 구름도 없습니다.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길에 갇혔습니다. 길의 출구를 찾아야 합니다. 계단을 내려다봅니다. 이대로 지하까지, 개 세 마리를 지나 지하까지 내려가면 좋을 텐데. 그러나 내리막은 땅 위에서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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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8 14:48:10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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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첫 행선지는 관람차입니다. 열려있습니다. 모든 열린 것은 비어 있습니다. 내부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노을의 짐의 윤곽이 느껴집니다. 노트와 퍼즐, 우산이 있습니다. 새벽은 그곳에서 야구방망이와 공, 글러브 또한 발견합니다. 그러나 관람차는 비어있습니다. 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새벽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홀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노을은 관람차를 이미 나갔습니다. 새벽은 관람차의 좌석 위에 손을 올립니다. 온기가 느껴집니다. 새벽은 이곳을 숙소로 잡았던 노을을 떠올립니다. 노을의 열에 들떴던 분자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열을 식힐 목적인지, 새벽은 자신의 야구 방망이를 손으로 흝습니다. 흠집이 나있습니다. 이 이상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벽은 문을 빠져나옵니다. 층계를 내려갑니다. 내리막보다는 오르막을 더 단단히 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바람대로 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새벽의 다음 행선지는 사무소입니다. 민기, 설기, 연화의 숙소입니다. 문이 이번에도 열려있습니다. 새벽이 손잡이를 잡으려던 무렵, 문이 안쪽으로 벌컥 열립니다. 방 안에서 촛불의 빛이 튀어나옵니다. 빛을 연화가 가리고 있습니다. 연화는 베개를 든 채로 멈추어 서 있습니다. 역광 속에서도, 연화의 볼을 먹어치운 눈물 자국이 보입니다.
"악몽을 꿨니?"
새벽은 답하지 않기 위해 묻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듭니다. 문을 밉니다. 문이 둘 사이에 끼어듭니다. 새벽은 방금 전의 장면을 복기합니다. 뒤편에는 설기가, 이불을 덮고 있었습니다. 민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역광만이, 내용보다도 형식만이 기억에 남습니다.
새벽은 침을 삼킵니다. 뒤돕니다. 문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밀어도 활짝 열려버릴 겁니다. 그러나 문은 열렸어도 방은 닫힌 것만 같습니다. 외부에서 항상 열 수 있지만 실은 폐쇄된 공간인 관람차와 비슷합니다.
떠나던 새벽의 신발에 덩어리진 바퀴들이 부딪힙니다. 깨진 시게입니다. 채하가 버렸던 그 시계입니다. 새벽은 덩어리진 시간을 집어듭니다. 사무실의 외벽에 못이 걸려있을 리 없습니다. 새벽은 벽면에 시계를 비스듬히 기대놓고, 다음 행선지를 찾습니다. 언제까지 길에 갇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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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8 14:56:18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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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앞은 깔끔했습니다. 인류가 멸망하고, 다시 번성해 멸망할 시간이 흐른 뒤라면, 어느 도시라도 이와 같은 평평함을 지닐 것입니다. 얼어붙은 바다와 같은 휑함을 기념품 가게 앞에서 봅니다. 도망치듯 본부 안으로 들어갑니다. 서장이 차를 홀짝이고 있습니다.
서장은 새벽에게 머그컵이 있는지 묻습니다. 서장의 뒤로 늘어선 선반에는 텀블러와 머그컵이 잔뜩 진열되어 있습니다. 새벽은 노을에게서 하나를 선물받았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들고오지 않았다고 털어놓습니다.
서장은 유감을 표합니다. 서장이 새 컵을 꺼냅니다. 그 위로 주전자를 기울입니다. 차가 눈물처럼 쏟아집니다.
"한 잔 하게나."
서장이 권합니다. 숨마다, 서장의 몸이 들썩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새벽은 예의 바르게 거부하고 유리문을 나갑니다. 들어올 때와 같은 풍경이 울립니다.
본부 앞의 게임센터에는, 새벽이 모르는 경찰이 있었습니다. 채하도 호연도 없습니다. 경찰은 새벽에게 말을 걸지 않습니다. 새벽은 경찰을 모릅니다. 그의 경찰복만을 알 뿐입니다. 천막을 돌아 봅니다. 핀볼 기계와 오락기들이 가득합니다. 과연, 이런 것들을 젖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런 커다란 천막을 지었군요.
새벽은 한때 자신이 꾸몄던 방을 떠올립니다. 채하를 떠올립니다. 채하를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채하는 자유분방했습니다. 수업시간에도 문자를 보냈고, 시험 전날에도 뛰어다녀 새벽을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채하는 미래를 모래처럼 하찮게 여기고, 그보다는 수집에 열정을 보였습니다. 채하는 새벽의 방을 창고로 빌렸습니다. 음반, 중고책, 원두. 새벽은 채하의 취미를 꺼리지 않았습니다.
채하가 천을 깁듯 만든 새벽의 벽이, 지금 이 게임 센터와 비슷하게 여겨집니다. 안이 아무리 휘황찬란해도, 천쪼가리에 의해 지탱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허술한지요. 새벽은 뒤로 돌아 나갑니다. 길의 출구를 찾지 못한다면, 놀이공원의 출구에라도 가보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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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8 15:03:44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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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에는 사람들이 몰려있습니다.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웅하기 위해서입니다. 차의 전조등이 켜져있습니다. 노을은 저 차의 이름을 팔라다라 지었습니다. 새벽은 잠옷 위에 조인 넥타이를 한 번 더 강하게 조입니다. 모자를 바로 잡습니다. 차 옆에는 민기와 호연, 여명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호연이 새벽에게 다가옵니다. 새벽은 호연이 어색합니다. 새벽은 자신이 기억상실에 걸렸는지 의심합니다. 호연에게, 자신이 누구이고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장난을 겸해 말합니다. 호연은 즉각 화색을 표합니다. 새벽은 고개를 흔들며, 호연의 기대를 박살냈단 이유로 더 큰 죄책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호연은 길에서 빠져나갑니다. 차로 들어갑니다. 여명더러, 어서 들어오라 재촉합니다.
여명은 새벽에게 나중에 보자고 말합니다. 새벽의 두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쌉니다. 양 팔목에 소원팔찌가 소리를 냅니다. 백구십에 달하는 거구가 새벽 앞에서 쓰러집니다. 새벽은 감정을 자제하며 여명을 바라봅니다. 여명의 손이라는 껍질에 앉힌 새벽의 손에, 여명의 눈물이 못다한 말처럼 스며듭니다.
놀이공원의 철문 앞에 선 두 경찰, 차에 탄 호연과 민기, 그들을 배웅하러 나온 다섯 남녀, 모두가 눈을 돌립니다. 보지 않으니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곳에 대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배기가스가 놀이공원에 버려집니다. 세 명이 탄 차가 패잔병처럼 도시로 빠져나갑니다. 전조등이 멀어집니다.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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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8 15:10:52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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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시간입니다.
새벽은 첫 행선지던 관람차로 돌아갑니다. 좌석에 앉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양초를 든 연화입니다. 관람차 안에 앉은 새벽을 보고, 연화는 놀라 손을 치켜들었다가 양초의 뜨거움에 다시 놀라고 맙니다. 새벽은 무덤덤하게 연화를 지켜봅니다.
새벽이 온 이유를 묻기도 전에, 연화는 종이가방을 들여보입니다. 연화가 머뭇대던 통에 다시 말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노을한테 배달왔어요. 세면 도구와 잡다한 것들이에요."
연화는 새벽의 맞은 편에 종이가방을 올려둡니다. 크게 숨을 들이쉽니다.
"전 설기 누나께 들은 대로 전해드릴게요. 노을이가 숨바꼭질을 신청했대요. 놀이공원 안에 있겠다고 해요."
연화가 새벽의 반응을 살핍니다. 조심스럽습니다.
"새벽 형이 걸어다니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제가 이 말을 전한 건, 저도 새벽 형이 돌아다니기를 원한단 거예요."
새벽은 연화를 먼저 보냅니다. 맞은 편에 놓인 종이가방이 사람인 것처럼 예를 갖추다가, 한 박자 늦게 관람차를 빠져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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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9 16:39:03
ID : PcoGnDumsn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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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쉴 시간이 아닙니다.
정처 없이 걷던 와중에, 새벽이 설기와 마주칩니다. 설기는 놀이공원과 어울리지만 밤과 아포칼립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있습니다. 다른 손에는 밤과 아포칼립스에 어울리는 대신 놀이공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양초가 들려 있습니다. 새벽은 조소합니다. 설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물품입니다. 그러나 그 웃음마저 곧 질식합니다.
설기가 피크닉 바구니를 뒤적이더니 종이로 감싼 밀가루 막대기를 건넵니다. 새벽은 멀뚱히 쳐다봅니다. 설기가 직접 설명해줍니다.
"츄러스. 설탕은 절약했어. 하지만 조미료 없이도 바삭한 식감이 있잖아."
설기는 허술한 매듭 같은 새벽의 손에 츄러스를 억지로 쥐여줍니다. 저녁을 굶은 새벽을 위한 배려로 보입니다. 설기가 한탄을 합니다.
"여명 오빠도, 호연 언니도, 오빠도 너무한걸. 도망친 사람을 쫓는다고 너 혼자 내버려두다니."
설기는 마치 자신을 남겨지지 않은 것 같은 태도입니다. 설기는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빙글 돌아섭니다.
"뭐 먹고 싶다면 식당으로 와. 호연 동생도 볼 겸. 잘 때는 귀엽거든."
새벽은 설기가 멀어지게 합니다. 요기를 마치고 식당으로 걸어갑니다. 그제서야, 설기도 식당을 목적지로 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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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9 16:52:03
ID : PcoGnDumsn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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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시간이 아닙니다. 식당에는 설기가,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연화가 호연의 갓난 동생을 안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입니다. 그들이 새벽을 알아챕니다. 새벽은 의자를 꺼내 그들 옆에 앉습니다. 조곤조곤, 그들의 말투는 손가락을 넣었다간 친절이 묻어나올 만큼, 새벽을 향한 배려로 짙게 칠해져있습니다.
"우리라도 그래야지. 영화를 봐, 괴물이 인질을 잡아가면 일가족이 나서잖아."
"허락을 받아야겠죠." 연화가 설기의 말에 답합니다. 그러면서도 새벽을 계속 훔쳐봅니다. 그에게는 훔칠 기쁨이 남아있지 않음에도.
"될지를 모르겠는걸. 담판은 지어봐야겠어."
"그렇죠. 구불구불하니 위험해요."
연화는 모처럼 안심한 목소리를 냅니다. 빛깔이 강한 식탁 위에 연화가 호연의 동생을 내려둡니다. 호연의 동생이 깨어나더니 울음을 터뜨립니다. 팔다리를 버둥거립니다. 자신을 가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 더욱 크게 우나 봅니다. 조리실 안에서 직원이 포대기를 들고 나옵니다. 아기의 팔다리를 감싸 보 안에 가둡니다. 주체할 수 없는 몸 때문에 울 일은 없어지겠지요. 그러나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직원은 뚱한 표정을 짓더니, 설기와 연화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기를 조리실 안으로 들고 갑니다. 설기는 감사인사를 합니다. 인사가 가능합니다.
새벽은 멀미를 앓는 것처럼 식탁 위에 엎드립니다. 연화가 새벽을 바라봅니다. 산보를 그친 것이 못내 아쉽나 봅니다. 그러나 설기가 연화를 잡아끕니다. 새벽은 눈을 감습니다. 균형감각이 시각과 다를 때에는 무엇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새벽은 어지러움에 맞서는 비법을 떠올립니다. 완전히 기울어지다 결국은 빗방울처럼 줄 밑으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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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9 17:03:21
ID : PcoGnDumsn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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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눈을 뜹니다. 새벽과 팔 한 개만큼 떨어진 곳에서, 노을이 구슬을 손에 들고 탬버린처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오케에서와 같은 화려함도 무절제함도 없습니다. 노을의 동작은 수수하고 절제되었습니다. 가루가 소리도 없이 떱니다. 그때마다 요란함이 아닌, 눈이 쌓이는 소복함이 태어납니다. 노을의 손에 들린 것은 스노볼입니다.
소리도 요란함도 없이, 공 속의 세계가 뒤집어집니다. 흔들리고 복잡해질수록, 스노볼 안의 세계는 아름다워집니다. 노을의 입이 열립니다. 새벽이 일어난 것을 눈치챘나 봅니다.
"신기하지 않아? 우리가 스노볼에 할 수 있는 것이란, 깨부수거나 흔드는 것뿐이야."
새벽은 자신의 가방에 들어있던 스노볼을, 자신이 자는 사이 노을이 들고갔나 보다고 넘겨짚습니다.
"우리는 스노볼에게 무력해. 그런데 이 풍경은, 우리 맘대로 되지 않으면서도 어쩜 이렇게나 눈물겹게 어여쁜지."
노을은 스노볼을 흔들고, 가라앉는 눈을, 수족관을 채운 물고기의 시체인 양 바라봅니다. 스노볼을 테이블에 내려둡니다. 노을이 생각을 정리합니다.
"새벽 씨, 인류 최초의 살인을 알아?"
새벽에게 건네는 노을의 소리로 된 손은, 칭찬을 할 때처럼 다정합니다.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벽은 고민도 없이 답합니다.
"카인과 아벨인가?"
노을은 볼에 보조개를 띄웁니다. 잔에 담긴 샴페인에 잔물결이 이듯, 노을의 꽁지머리가 찰랑거립니다. 빨대를 무는 때처럼 얼굴을 새벽을 향해 뻗습니다.
"과학적으로 말이야. 이과면서 말이야. 관심 없어?"
새벽은 고개를 내젓습니다. 듣고 싶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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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29 17:16:18
ID : PcoGnDumsn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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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이 이름이 맞을 거야. 난 외울 필요 없는 이름 외우기를 좋아하거든. 다른 이름을 외우지 않기 위해."
노을은 의자를 뒤로 뻅니다. 다리를 꼬는 모습이 보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두개골을 찾았어. 같은 자리에 상처가 두 번이나 났대. 옆에는 규암으로 된 돌도끼가 발견됐어. 약 40만 년 된 살인이야."
"인간인 거야?"
"그럼. 규암은 근방에 없었거든. 무역으로 얻은 거야. 말을 할 줄 알았단 거지."
새벽은 엎드립니다. 곁눈질로 노을을 봅니다. 식당이 고요합니다. 조리실에도, 식당 밖에도 아무도 없으리라는 착각이 들게 만듭니다.
"어째서 죽였을까?"
"아마 장례의식이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죽였다고?" 새벽은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노을이 정정합니다.
"다른 이유로 치명상을 입었을 거야. 그대로 사람을 잃게 생겼겠지. 그럴 수 없어서, 귀하게 여겨왔던 규암으로 돌도끼를 만든 후 의식을 치른 거야. 두개골을 깨 뇌를 꺼낸 거지. 아마 뇌를 보존했거나, 씹어삼켰을 거야.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야."
정적이 흐릅니다. 둘은 서로를 기억할 사람들처럼 침묵하고 있습니다. 잠자코 있던 새벽이 팔을 뻗습니다. 노을 앞의 스노볼을 가져오려 합니다. 하지만 노을의 손이 빨랐습니다. 노을은 일어섭니다. 의자를 집어넣습니다. 발이 하나인 의자가 사람보다도 더 굳건히 서있습니다. 노을은 가벼운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나갑니다.
"최초의 살인은 애도를 위해서였어.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스노볼과 함께 노을이 식당을 빠져나갑니다. 새벽이 일어섭니다. 노을의 뒤를 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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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30 15:44:19
ID : PcoGnDumsn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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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밖은 흰, 텅 빈 공간입니다. 탕, 탕, 타당. 총소리도 아닌 야구공을 치는 소리도 아닌 괴음이 들립니다. 폭발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새벽은 꿈에서 노을과 같이 관람했던 불꽃놀이가 떠오릅니다. 어둠 속에서 그런 소리도 있어야 버틸 수 있지, 새벽은 노을에게 그리 말했습니다.
"언니를 이젠 이해할 수 있어."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새벽은 목소리를 뒤쫓습니다. 신호등처럼 눈밭에 채하가 서있습니다. 채하의 발치에 작은 플라스틱 눈사람이 버려져 있습니다. 플라스틱 돔이 두 동강 났습니다. 하늘은 속을 숨길 햇빛이 고갈되자 검게 속을 드러내었는데, 채하의 발을 눈이 묻어놓았습니다. 눈이, 점차 붉어집니다. 채하의 입이 열립니다.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아니. 너에게 물을게. 넌 숭고한 희생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해?"
새벽은 눈을 감더니 가볍게 고개를 젓습니다. 자유가 곤란하지 않을 수 없듯이 의무는 숭고할 수 없다고 새벽은 생각합니다. 채하는 말 없이 고개를 조악댑니다. 새벽이 노을의 행선지를 묻습니다.
"노을은 내 그림자야. 항상 나와 있어."
새벽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묻습니다. 채하는 누그러집니다. 자신의 발치를 보며 도리어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눈앞의 사람마저 이해하지 못하잖아? 그러니까, 스노볼이 장식의 기능을 하지 못하면, 쏟거나 박살내버리잖아?"
새벽이 식당에서 한 걸음 멀어집니다. 채하의 말은 쥐어짜인 것 같습니다. 땀 같은 눈이 땅에 고입니다.
"스노볼을 보고 위안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인데도, 스노볼을 버리잖아."
새벽은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땅이 요동칩니다. 새벽은 꿈이 깨지는 것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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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30 15:52:10
ID : PcoGnDumsn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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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하는 눈을 뜹니다. 학교입니다. 2학년 1반입니다. 설기와 연화가 어젯밤 구출되자 이곳에는 학생 세 명만이 남았습니다. 채하는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들은 채하의 말에 순순히 따랐습니다. 채하가 학교 근방의 좀비를 없애, 이 일대는 잠정적으로 안전지대가 되었으니까요. 마녀인 채하로선 간단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람이었음을, 자신이 돕는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던 사람임을 잊는다면 마법을 쓰기야 쉬웠습니다.
맥베스의 세 마녀처럼 나이차가 도드라지던 그들은 감사인사를 하고 떠났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물이 임하듯 어디론가 갔을 겁니다. 책상으로 만든 침대 위에 올라간 채하는, 일어서지 못하고 잠결에 버둥거립니다. 위를 향해 중얼댑니다.
"내 잘못이 아냐. 이런 일이 일어난 건 내 능력밖의 일이었어. 난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다고."
그것이 동시에 최악의 선택지였을지라도. 채하는 독백합니다. 그러나 독백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채하가 급히 이불에서 나옵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옵니다. 손에는 식칼이 들려있습니다.
144
◆k62Le3U7xRu
2018/07/31 15:12:35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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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하가 책상 위에 두었던 양초에 불을 붙입니다. 실루엣에 색이 들어갑니다. 채하는 민기를 알아봅니다. 낯빛에 경계심이 가득합니다. 민기가 주위를 둘러봅니다. 채하는 도망갈 길을 찾습니다. 위협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더 생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민기가 다가오자 말립니다.
"위협하지 마요. 어차피 전 갇힌 신세인걸요."
"갇히기는. 뒤에 창문이 있잖아." 민기가 쏘아붙입니다. "네가 날 줄 아는 건 안다고."
"올라탈 것이 없으면 무리에요."
채하가 마녀모자를 꼭 눌러씁니다. 채하는 창밖을 힐끔 내려다봅니다. 어제 타고 온 롤러코스터는 운동장에 정박해있습니다.
"행여나 뛰어내릴 생각은 하지 마. 바깥에는 여명이 있거든. 더 보기 싫지?"
"그렇네요."
채하는 고개를 비틀어 뒷문 밖을 내다봅니다. 사람이 한 명 더 보입니다. 틀림없이 호연일 것입니다. 화단과 복도, 두 길은 막혀있습니다. 설움에 채하의 눈꺼풀이 내려앉습니다. 교실에는 세 사람이 있을 뿐인데도 말로 호랑이를 몇 십 마리 뽑아낸 것처럼 분위기가 묵직합니다.
"그래요. 잡아가요. 항복합니다."
그 말을 듣고 호연이 들어옵니다. 채하에게 또 다시 수갑을 채웁니다. 체포됩니다. 채하는 호연의 뒤를 따라 졸레졸레 교실을 빠져 나갑니다. 교정 밖에 그들을 놀이동산으로 데려갈 차가 마련되어 있을 겁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 민기가 나가는 채하를 불러세웁니다.
"잠깐만. 네가 들고 온 것들은?"
"알아서 들고 내려오세요."
팁을 남기고 식당을 떠나는 것처럼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채하는 교실 바닥을 눈으로 휘젓습니다. 양초는 그것이 만든 음영만큼 교실을 환히 밝힙니다. 그러나 채하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몰라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기보다는 어둠에 지지 않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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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31 15:20:10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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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정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채하는 여명을 무시합니다. 수갑 찬 손으로 뒷문을 열더니 가장 안쪽에 앉습니다. 호연은 차 바깥으로 다리를 내어둔 채 시트에 걸터앉습니다. 민기가 내려오기를 기다립니다.
민기는 채하가 쓰던 담요만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나머지는 어디 있냐고 호연이 묻기도 전에, 민기가 선수를 칩니다.
"내가 들고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왜 나한테 맡긴 거야."
"무거우니까요." 채하가 웃습니다. 호연이 눈치를 줍니다.
"시끄러워. 그래, 그럼 내가 갈게."
잠시후 모두가 차 안에 탑니다. 민기가 운전대를 잡고, 여명과 호연이 채하의 양쪽에 앉아 도망치지 않도록 막습니다. 채하는 머리가 아픈가 봅니다.
"저는 좀 잘게요."
"내가 들어갈 때도 자고 있더니만." 민기의 핀잔입니다.
"바늘에라도 찔리면 좋을 텐데.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안 그래주려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뜻하는가 봅니다. 호연이 안전벨트를 맵니다. 출발하자고 권합니다. 자동차가 운동장을 빠져나갑니다. 모래가 뭉쳐지지 못한 채 도시의 사람들처럼 흩뿌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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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31 15:34:45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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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는 새벽이 눈을 뜹니다. 호연의 동생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들립니다. 무엇을 그리워하기 위해, 무엇을 일찍이 배격하기 위해 이토록 요란하게 우는 것일까요. 기계처럼 뻑뻑한 몸동작으로 기지개를 펴더니 새벽은 벌떡 일어섭니다. 연화와 설기의 대화를 떠올리자니, 그들은 지금쯤 본부로 갔을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새벽의 어림짐작이 맞았습니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설기와 연화가 서장 앞에서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나무는 모름지기 열 번씩 찍어야죠."
"그래. 알겠네. 슬슬 시동을 걸까."
설기의 말에 답하던 서장이 새벽을 빤히 쳐다봅니다. 새벽은 서장의 모습이 흐릿합니다. 선명해도 별 상관 없었을 겁니다. 지금의 새벽은 무관심과 광적인 관심 사이를 왕복하는 지경입니다. 그러더니 꾸벅 의식이 끊겼다가 돌아옵니다. 연화가 일어서 새벽을 부축합니다.
"눈도 게슴츠레 떴더니, 역시나 졸고 있었네요."
"안 잤어." 새벽이 연화에게 몸을 맡깁니다.
"자기가 깨어있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죄를 짓지 않은 이상은."
연화가 새벽을 실은 채 문을 열려 바둥거립니다. 설기가 일어서 문을 당깁니다. 서장은 의자에 버티고 앉아 떠나가는 그들을 봅니다.
"준비를 끝내면 바로 오게. 다음에는 새벽까지 넣어 담판을 짓지."
새벽은 관람차까지 실려옵니다. 장판처럼 좌석 위에 깔립니다. 새벽을 정자세로 눕히고 설기와 연화는 손을 탁탁 털며 계단을 내려갑니다. 스테인리스가 텅텅 울립니다.
"올라올 때만 해도 이런 소리가 나진 않았었죠?" 연화가 묻습니다.
"손이 비어서 그런 거야. 주위에 민감해진 거지."
설기가 답합니다. 발을 모으고 뛰어 지상을 밟습니다. 돌을 걷어차며 연화를 기다립니다. 연화는 텅텅, 소리를 감상하며 천천히 두 발로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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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31 15:48:47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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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누군가 자신의 뺨을 치는 것을 느낍니다. 눈을 뜹니다. 사방이 하얗습니다. 현실은 월요일부터 계속 밤에 가라앉았으므로, 이것이 꿈임은 추론할 이유조차 없습니다.
채하가 눈밭에 서있습니다. 새벽은 발치를 내려다봅니다. 스노볼도, 붕대를 감았어야 할 상처도 없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식당에서 꾸었던 꿈과 이어졌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새벽은 채하를 바라봅니다.
"꿈은 잠을 지키기 위해 있다고 하던데, 왜 이런 꿈만 꾸는지 모르겠어."
"난 네 꿈의 등장인물이 아냐. 좀 예의를 지켜."
채하가 쏘아붙입니다. 새벽은 그 말에 별 의의를 두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꾸는 꿈이란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채하는 문을 향하기 위해 새벽을 등집니다. 백묵으로 네모난 상자를 그립니다. 문이 생겨납니다. 분필에서 떨어져 나온 분말과 흩날리는 눈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채하가 새벽에게 손을 내밉니다.
"한 번 더 가자. 잊기 위해서는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을 써야 해."
문 바깥은 검습니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새벽은 문 너머의 시간대가 다름 아닌 어제 열렸던 캠프파이어임을 직감합니다. 그러나 채하의 손을 피하지 못합니다. 손을 잡기도 전에 앞으로 몇 발짝을 걸어갑니다.
문을 넘기 전에 채하가 소곤댑니다.
"참. 너 예전에 나한테 고백을 한 적이 있었지."
"거절됐지만. 뭐, 중학생 때였고." 이 년은 된 일입니다.
"너한테 일말의 호감을 품은 적이 있었어."
호감이 일말이라는 수식어와 같이 쓰이던가요. 희망, 후회, 가능성과 쓰이지 않던가요. 새벽은 머뭇거립니다. 채하가 말을 잇습니다.
"그래. 2017년 6월 26일부터 27일까지였어. 기억해."
그저께와 어제입니다. 오늘은 28일입니다. 새벽이 오한을 느낍니다.
"그것, 전혀 이해 안 돼."
"그래, 그거야. 날 이해하지 말아."
새벽과 채하는 문턱을 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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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31 15:55:12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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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과 채하는 공중에 떠있습니다. 어제 있었던 풍경이 그대로 보입니다. 모닥불이 꽃처럼 피어오르고,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벽은 그중에서 시계를 든 채하만이 유별남을 확인합니다. 태도부터 감정까지, 눈치챌 수 있을 모든 것이.
관람자인 새벽과 채하가 아니라, 당사자인 그들을 새벽과 채하로 부를 시간입니다.
노래가 불립니다. 노래가 식습니다. 불이 불어납니다. 민기와 여명, 호연에 의해 불이 식습니다. 주위가 어두워집니다. 채하가 호연을 붙잡더니 울음을 터뜨립니다. 모두, 어제 일어났던 일입니다. 반복됩니다.
채하는 호연에게서 떨어집니다. 울음은 여전합니다. 커튼의 주름처럼, 단정치 못하게 어리광이 접힙니다. 채하는 휘청이며 모닥불 쪽을 바라봅니다. 노을과 새벽을 향해, 채하의 눈이 매섭습니다.
"박노을."
채하는 익숙한 이름처럼 노을을 부릅니다.
"왜, 언니?"
"너는 내 그림자에 불과해." 채하가 단언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채하는 앞으로 걸어갑니다. 바닥에 떨어진 시계의 유리가 깨져있습니다. 이제 바늘은 보호받지 못합니다. 새벽은 자신이 잡고 있던 노을의 손이 식는 것을 느낍니다. 노을은 시계에서 분리된 바늘처럼 땅으로 떨어집니다. 새벽이 받아들 새도 없었습니다. 뒤통수에 모래가 묻습니다. 땅에 닿은 전신에서 힘이 풀리더니 표정마저 죽어버립니다. 새벽은 노을의 맥을 집습니다. 심박이 잡히지 않는 것을 새벽은 자신의 실수 탓으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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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31 16:10:18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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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하는 계속해서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갑니다. 채하 앞에 새벽과 노을이 있지만 않았다면, 새벽은 그 풍경에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겁니다. 새벽은 노을의 손을 더 꼭 붙잡습니다.
"머리 좀 식히자. 손은 놔. 잠시 데려가야겠어."
새벽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노을의 등에 팔을 받쳐 일어서려던 채하가 새벽을 반히 바라다봅니다. 말이 걸리기도 전에 호연의 호통이 들립니다.
"무슨 짓이야. 손 들어."
"손 들려고 이러는 거예요. 정리될 필요가 있거든요."
"헛소리하지 말고. 실탄은 아니지만 다치기엔 충분해."
"거칠어졌네요."
채하는 주위를 돌아봅니다. 도망로를 찾나 봅니다. 호연 외에 온 경찰은 세 명뿐이라 구멍이 많습니다. 그때 채하는 자신의 팔에서 노을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새벽이 노을을 가로채더니, 현장을 빠져나갑니다. 뛰어나가는 새벽을 향해 채하가 손을 뻗습니다. 더 이상 관망할 수 없게 되었는지, 호연이 다리를 겨냥해 고무탄을 발사합니다. 왼 다리에 탄을 맞은 채하가 허물어집니다. 땅을 짚은 채 채하가 짐승 같은 비명을 지릅니다. 새벽은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채하가 노을을 데리고 가선 안 된다는 것만은 곧바로 느껴 알 수 있었습니다. 새벽은 건물을 굽이굽이 피해 달립니다. 추격할지도 모를 채하의 시야를 가리고자 합니다. 모퉁이를 돌던 길에 새벽의 모자가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그러나 동화에서처럼 모자를 쫓을 시간도 언덕을 오를 시간도 없습니다. 새벽은 무작정 채하를 피해 달립니다.
관람차 쪽에서 무거운 철덩이가 박차오르는 굉음이 들립니다. 캠프파이어가 열렸던 장소입니다. 새벽은 머뭇거리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볼 기력은 없습니다. 행동의 지침이 되는 것은 종종 추상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새벽은 한참을 달립니다. 새벽은 머리 위로 폭발하듯 날아오는 형상을 느낍니다. 고개를 들어올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처 보이기도 전에 일찍이 새벽을 앞서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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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31 16:19:08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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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요란하게 땅이 뒤흔들립니다. 뿌리를 박고 서있던 나목이, 뿌리만 남기고 떨어져 나갑니다. 곤두박질친 가지들이 변호할 새도 없이 부러집니다. 새벽의 다리가 얼어붙습니다. 새벽이 주저앉습니다. 노을을 든 채입니다. 나목을 직격한 것은 롤러코스터입니다. 새벽과 채하가 타고 온 그 롤러코스터입니다. 노을과 새벽이 도망치고 있을 위치를 겨냥했나 봅니다. 조금만 더 빨리 뛰었다가는 저 목재 같은 앙상한 꼴이 되었을 겁니다. 그 위에는 채하만이, 밤하늘의 달처럼 홀로 앉아있습니다. 채하가 일어섭니다. 새벽을 향해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옵니다.
"노을은 이대로는 위험해. 내가 데려갈게."
"이해가 안 돼." 잠시라도 멈추어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채하의 늘어진 왼 다리는 계속해서 땅에 끌립니다.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노을이를 살려야 해. 지체할 시간이 없어. 어서 넘겨."
"농담이지?"
"그럼. 농담이야." 채하가 킥킥대며 웃습니다. "농담이 있어야 버틸 수 있지."
얼어붙은 새벽에게서 채하가 노을을 넘겨받습니다. 애증 어린 눈으로 자신의 품을 바라봅니다. 노을은 미동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거야. 너도 날 곧 이해할 거니까."
마지막 말을 넘기고 채하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비틀거리며 롤러코스터로 돌아갑니다. 정신이 돌아온 새벽이 뒤늦게나마 뛰어갑니다. 롤러코스터가 공중으로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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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31 16:24:56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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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만 갈게."
"기다려!" 뒤따라온 새벽이 급하게 외칩니다. 그러나 채하는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내일 보자.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롤러코스터에 올러탄 채하가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채하의 두 다리가 허공 위에서 오르고 내립니다. 새벽은 채하를 망연자실한 채 볼 뿐입니다. 스노볼 안의 세상처럼, 보이지만 잡히지 않습니다.
호연은 제때가 지나 달음박질쳐왔습니다. 엎어진 새벽과 새벽 같은 나목을 봅니다. 묻습니다.
"노을은 살아있지?"
"모르겠어요."
새벽은 바닥에 엎어진 채로 한동안 꼼짝도 않습니다. 호연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가능했을 방법들을 떠올립니다. 결국은 채하를 놓치고 말았으리라는 비관에 이르고 말면서도.
하늘에서, 새벽과 채하는 그 광경을 내려다봅니다. 새벽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원망하듯이 채하에게 묻습니다.
"대체 무슨 의도였어?"
채하를 자신의 꿈의 등장인물로 여기므로, 그녀가 정답이 아닌 듣고 싶은 말을 할 줄을 알면서도 사람을 대하듯 채하를 대합니다. 채하는 어깨를 으쓱입니다.
"무슨 의도?"
"저런 짓을 한 의도. 또 이 광경을 보게 한 의도."
"말해주려고 지금 네 꿈에 온 거야."
채하는 자신이 새벽의 꿈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백묵을 꺼내듭니다. 다시금 문을 쓱싹하고 그립니다. 이번에 보이는 문 너머는 그나마 밝습니다. 채하가 환하게 웃습니다.
"내 의도를 찾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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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7/31 16:32:26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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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채하는 차 안에서 푹 곯아떨어졌습니다. 잡혀오는 중이니 사형수의 노래라도 불러야 할 판인데도, 정말로 곤히 잠들어있습니다. 호연은 걱정이 되는지 조수석에 앉은 노을의 팔을 자꾸 매만집니다. 몸이 완전히 식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의식만을 잃었을 뿐인가 봅니다. 지금 이 상황만 해도 목숨이 위험함은 사실이지만요.
"왜 이런 짓을."
여명이 참담한 얼굴로 밖을 내다봅니다. 그러나 밖은 충분히 어둡습니다. 여명은 도로가 아니라, 창문에 반사된 자신과 채하를 보고야 맙니다. 결국은 눈을 감습니다.
"고등학생이라면 입시 스트레스지."
"장난할 마음 아니거든." 호연이 민기에게 거칠게 답합니다.
"그게 아니면 너무 이유가 많아."
호연은 그 중 자신이 채하를 납득할 이유가 몇 개나 될지 생각합니다. 더불어 자신이 누군가를 납득한 전적이 있었는지도. 가늠을 포기하고 호연은 조수석에 쓰러져있는 노을을 친애하며 쓰다듬습니다. 어제 언니에게 붙잡힌 후 학교에 방치되었던 그녀를. 자신이 업고 막 차에 태웠던 그녀를. 손가락에 계속 메마른 머리카락이 걸립니다. 빗자루 같습니다. 호연은 모든 것이 쓸려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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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1 13:14:39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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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새벽은 채하의 손에 잡혀 꿈 속의 문을 통과한 참이었습니다. 새벽이 걸어갑니다. 그러나 채하는 멈춰서더니, 새벽을 향해 발길질을 합니다. 새벽이 엎어집니다. 모래가 만져집니다. 그들이 다니던 학교의 운동장입니다. 밝은 일광에 새벽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러던 중에도 채하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립니다.
"원한이 많거든. 알아서 빠져나와. 헤매다 보면 진상을 알게 되겠지."
새벽이 놀라 뒤를 돌아봅니다. 채하는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히죽 웃습니다. 그들이 들어왔던 문으로 뒷걸음질칩니다. 뜻밖의 일을 당해 어리둥절하던 새벽을 남겨두고 채하가 학교를 떠납니다. 새벽은 자신이 학교에 홀로 남겨졌음을 깨닫습니다.
새벽은 고개를 들어 교정을 바라봅니다. 비명이 들려옵니다. 젖은 것 같은 비명이, 검고 붉은 비명이 들려옵니다. 외마디 소리들이 번잡해지더니 소란으로 번져갑니다. 새벽은 이 울음을 알고 있습니다. 2017년 6월 23일, 좀비 사태가 발발했던 때의 학교입니다. 새벽은 저 교실 한복판에 있었지요.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된 고드름처럼 학생들이 창문으로 떨어집니다. 얼어붙었던 새벽은, 생존욕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섭니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가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죽는 순간 꿈이 끝난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합니다. 누구를 도울 수는 없었을까 저렴한 죄책감을 품던 새벽은, 이번에도 죄책감을 택합니다. 고민할 새도 없이 겁에 질려 교문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154
◆k62Le3U7xRu
2018/08/01 13:28:06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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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외부라 하여 안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이러스가 아닌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한 발생이던 탓에, 사태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감염자가 속출합니다. 새벽은 내리막길을 질주합니다. 상가에서 멀어지고, 집이 있는 주택가에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지난 금요일의 좀비 사태 때 새벽의 도주로이기도 하였습니다. 새벽은 잠시 부주의해집니다. 모퉁이를 돌던 사이, 그 앞에 멈춰있던 시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시체가 새벽을 향해 두 손을 뻗습니다. 자신이 씹은 사람을 기억할 것도 아니면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둔탁한 타격음이 들립니다. 시체가 나가떨어집니다. 반사적으로 바닥에 나자빠졌던 새벽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듭니다. 한 학생이 가방을 휘둘렀는지 휘청이고 있습니다. 학생이 새벽에게 손을 내밉니다.
"어서 가자!"
새벽은 손을 잡고 일어섭니다. 학생의 주도 하에 질주합니다. 막판 스퍼트를 내는 선수처럼 전력을 다합니다.
"근처에 우리 아파트가 있어! 도망치자!"
새벽은 학생을 빤히 바라봅니다. 아는 사람입니다. 노을입니다. 아마 꿈속의 인물인 탓에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노을의 생일파티가 무산되었으므로 현실에서 둘이 처음 만났던 것은 26일, 월요일이었습니다. 새벽은 면식이 없는 자신을 끌고 가는 노을에 의문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달음박질과 박자를 맞춥니다.
노을의 언니인 채하는 새벽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새벽은 노을이 중학교 근처의 외진 아파트에, 채하와 별개로 살고 있었음을 알아챕니다. 꿈인 만큼 어디까지가 진실일지는 알지 못함에도, 새벽은 필사적입니다.
만전을 다하며 그들은 아파트 단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누가 끌려간다고 말할 새도 없이, 그들은 앞다투어 아파트의 유리문을 깨다시피 엽니다. 노을이 가방을 뒤적입니다. 열쇠를 꺼냅니다. 열쇠에는 왜 이리 용도가 많을까요. 시동을 끌 뿐만 아니라 바깥을 감금하는 역할도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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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1 13:38:04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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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노을의 집에 들어온 새벽과 노을이 한차례 숨을 가다듬습니다. 질식할듯 색색거리다, 노을이 균형을 잡고 일어섭니다. 가위로 포장을 뜯어 생수병을 꺼내옵니다. 둘은 중독될 것처럼 물을 들이킵니다.
"만세. 세상이 망했어."
정신을 먼저 차린 노을의 단발마입니다. 새벽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허탈하게 웃음을 짓습니다. 동공이 동전처럼 커져 있습니다.
노을은 문을 이중삼중으로 꽁꽁 잠급니다. 새벽은 베란다 쪽을 봅니다. 잠시나마 안전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 정도로 단단히 막았으니, 아빠는 못 들어오겠지."
새벽은 노을이 빼둔 의자에 앉습니다. 식탁에 두 손을 올립니다. 자신이 없는 듯이 자꾸만 혼잣말을 내뱉는 노을이 의아합니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위악일까요. 그렇다면 방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못된 짓이 됩니다. 새벽이 말을 겁니다.
"자기소개라도 하자."
노을은 자신이 들인 외부인을 빤히 쳐다보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갑니다. 크레파스를 꺼내옵니다. 중학교에 올라온 이후로 쓰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여있습니다. 자주색 크레파스를 꺼냅니다. 도화지는 없나 했더니 크레파스가 벽지를 가릅니다. 하얀 벽지가 순식간에 칠판이 됩니다.
"박노을이라고 불러. 튤립, 장미, 신, 모닥불, 폭죽, 범퍼카, 모험을 좋아해."
모두가 이전에 노을로부터 들은 그녀의 취미입니다. 새벽은 주위를 돌아봅니다. 작은 집입니다. 화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튤립이나 장미가 없네?"
"아빠가 싫어해서 그래. 학교 화단에 심고 있어."
노을이 크레파스를 식탁 위에 던지고는 자신도 의자에 앉습니다. 토라진 듯 식탁에 엎드렸다가 금세 기운을 되찾습니다.
"이렇게 종말이 오다니, 너무 좋아."
"아직 종말이 확정되진 않았어."
"종말이 아니면 내가 종말로 만들 거야."
노을은 새벽에게 크레파스를 건넵니다. 자기소개를 권하는 줄을 새벽은 이해하고, 단순히 말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새벽의 이름과 잡다한 정보를 들은 노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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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1 13:48:23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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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아버지와 산다는 사실로부터, 새벽은 채하가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음을 떠올립니다. 가족이 둘로 나뉘었나 봅니다. 이혼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말입니다. 새벽이 크레파스를 쓰지 않음이 확실해지자, 노을은 토라진 낌새를 보이더니 크레파스를 집어듭니다. 자신의 방으로 되돌려놓으려는지 닫았던 방문을 엽니다. 하지만 크레파스를 되돌려놓지는 못합니다. 나무 문 뒤로 보인 것이 자신의 방이 아닌 하얀 빛이었으므로.
새벽은 그것이 꿈의 배경을 옮길 때 쓰던 그 문잉믈 직감으로 알아차립니다. 노을은 얼떨떨한 기색을 보입니다. 손가락으로 공간을 찔러보더니 그곳이 어디론가 이어짐을 눈치챕니다. 얼이 빠져 새벽에게 묻습니다.
"왜 이런 것이 생겼지? 좀비 하나로는 세계를 없애기 부족한가?"
연화가 증언했던 노을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입니다. 예지몽이 없었다면 노을은 종말을 이렇게 받아들였을까요. 크기도 알 수 없는 상황을 마주쳤을 때, 가장 손쉬운 처세는 자신 있음을 연기하는 것입니다. 새벽은 말을 돌립니다.
"좀비로부터 숨어드는 데 현관문 한 짝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려나."
"들어가보고 싶네."
노을이 말합니다. 새벽이 의자에서 일어섭니다.
"무섭지도 않아? 현실이 아닐 텐데."
새벽을 바라보는 노을의 눈매가 또렷합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습니다. 새벽이 스스로 우문을 했다고 느낄 만한 분위기입니다.
"내가 행동하는 장소가 현실인걸."
자신이 꿈을 꾸는 줄을 알고 있으므로, 새벽은 자신의 상황에 크게 연연치 않습니다. 노을의 뜻을 따릅니다. 노을이 새벽의 옷 소매를 붙잡더니 빛을 향해 발을 옮깁니다.
새벽은 잠시 고민합니다. 채하가 자신을 좀비 한가운데에 밀어넣은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꿈을 꾸게 한 데에는 어떤 저의가 깔려있을 겁니다. 이 문이 생겨난 것은 고의를 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배경과 인물이 꿈이라 생각하는 데에서 오는 허무함을, 새벽은 의혹과 열의로 덮습니다. 그것이 섣불리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을 만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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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1 14:00:39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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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걱정거리가 한 순간에 소음에 휩쓸려 날아갑니다. 새벽은 번잡한 주위를 둘러봅니다. 문을 통과하여, 좀비를 피해 도피해있던 노을의 아파트를 벗어난 후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감을 잡는 데에 새벽은 꽤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입니다. 높낮이가 다른 버스와 승합차들이 주차장을 메웠습니다. 사람들은 차가 아닌 자신의 발로 행선지를 찾아 움직입니다. 새벽은 자신의 바지 주머니께를 더듬다가 돈이 든 것을 눈치챕니다. 고등학교에 떨어졌을 때 바뀌었던 복장인 교복에, 초록 지폐 한 장이 구겨져 들어있습니다.
노을을 찾아 상가를 거닐다, 새벽은 군것질거리를 몇 점 삽니다. 호두과자와 감자구이를 손에 든 채 노을을 찾아 주위를 알짱거립니다. 그러나 새벽을 먼저 찾은 사람은 노을입니다. 노을이 팔을 뻗어 새벽의 어깨를 두드립니다. 노을 옆에는 다른 일행인 연화가 서있습니다.
"어느 시간과 장소인지 알겠어?"
"작년에 있던 수학여행이네요." 노을이 답합니다. 그러더니 연화를 돌아봅니다.
"인사해. 이새벽이야. 인사하세요. 제 반 친구 연화에요. 속이 안 좋다고 해서, 버스에서 내려 산보 좀 시키고 있었어요."
겸사 널 찾으러 다니면서, 라 노을이 덧붙입니다. 영영 떨어졌는가 걱정했다는 말과 함께. 위장에 번데기가 매달렸는지 파리한 연화에게 새벽이 감자조림을 내밀지만 거절당합니다. 노을이 오물거리며 감자조림을 먹습니다.
"경주로 가는 길이었어요. 중요했던 날이니 기억나네요."
"쉬는 시간이라면 곧 버스를 다시 타야겠네?"
"아참."
노을이 휴게소에 매달린 시계를 쳐다봅니다. 천장 전망대에 앉아 노닥거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노을은 기절하다시피 엎드려있던 연화를 깨워 계단을 내려갑니다. 그러다 새벽을 바라봅니다. 따라오라는 의사가 연해에 내리쬐이는 등대처럼 명확히 전해집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게 될 때까지, 최대한 동행하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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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1 14:11:53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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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가 버스에 올라탑니다. 담임교사가 걱정을 하며 물을 건넵니다.
"잘 쉬게 했어요. 한 시간은 바벨탑처럼 거뜬할걸요."
노을이 빳빳하게 경례를 하며 뒤이어 올라탑니다. 담임교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건넵니다.
새벽이 뒤이어 올라탑니다. 물을 건네려던 담임교사의 손이 멈칫합니다.
"고등학생인가요?"
"경주 가던 학생이에요. 노을이 언니 친구고요."
담임이 노을을 찌릅니다. 노을이 동조합니다.
"바보 같아서 낙오했대요. 좀 도와주자고요."
"이러기야."
어찌되었든 새벽은 비었던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앉은 노을이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더니 새벽에게 보여줍니다. 어디까지 오려고요, 라고 적혀있습니다.
"경주에 가야 문이 있겠지. 기다리자."
"전 괜찮지만 많이 지루하겠다 싶어서요."
노을은 진행 중이던 카드게임에 새벽을 합류시킵니다. 한바탕 카드 게임과 수다가 계속됩니다.
"노을이는 어떤 애야? 지인으로서 궁금해."
새벽이 묻자 노을 옆에서, 카드 두 개를 든 학생이 답합니다.
"반장이란 건 들어서 아시겠죠."
"어쩌다 보니." 현실에서의 연화가 어젯밤 말해준 사실이지만요.
"항상 모든 일에 열심이에요. 폭주열차. 책갈피를 안 쓰고 책을 다 읽는 타입."
"그렇지. 두 번째 꽃부터는 죽이지 않고." 한 명이 들어옵니다.
"영화를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듯이 보고." 한 명이 더 보조를 맞춥니다. 노을이 얼이 빠져 괴상한 비유들을 해명합니다.
"작년에 영화감상부, 올해에 원예부라 그래요."
단순히 동아리에 속했다 하여 그런 인상 비평을 받지는 않겠지만요.
159
◆k62Le3U7xRu
2018/08/01 14:18:20
ID : A4ZdDvxzO04
0
버스가 경주 외각에 근접합니다. 새벽은 잠에 빠지지 못하고 계속 뒤척입니다. 노을은 영화부 부원이던 학생과 수다를 나눕니다.
"다가오는 것들이 엄청 좋았어. 상영회라도 하면 기꺼이 다시 보러 갈래."
"고전 영화야?"
자신보다 영화를 더 잘 알던 학생의 태도에 노을은 의아해하다가, 그것이 2017년에 개봉된 영화임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서둘러 무마합니다.
"아참. 책 제목을 헷갈렸네."
딴전을 부리던 노을이 앞 좌석의 새벽을 톡톡 쳐 깨웁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합니다. 목소리에 부끄러움이 묻어있습니다.
"미래에서 온다는 짓, 정말 할 게 못 되네요."
늦은 저녁에 경주에 도착합니다. 새벽의 숙소가 없는 이상 이곳에 더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숙소에 숨어들어가 자는 대신, 그들은 어딘가로 통하는 문을 서둘러 찾습니다. 학생들과 떨어져 주위를 헤매던 새벽과 노을은, 기어코 숙소 뒤편에서 흰 문을 찾아 그 안으로 발을 옮깁니다. 이 곳이 아닌 어디론가 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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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1 14:27:38
ID : A4ZdDvxzO04
0
새벽의 머리가 나무에 부딪힙니다. 새벽은 뒤로 나자빠집니다. 바람이 통하는 널바닥입니다. 정신을 추스린 채 새벽이 주위를 살펴봅니다. 한여름입니다. 자신이 그늘에 있다 싶더니, 팔각 지붕이 덮인 정자입니다. 옆에는 풀이 무성하고, 저 앞에는 내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개천 양 옆으로 포장된 산책로가 젓가락처럼 뻗어있습니다.
새벽은 주위를 돌아봅니다. 근처에는 노을이 없습니다. 일어서려다 말고, 새벽은 자신의 복장이 그대로임을 알아챕니다. 긴팔을 입은 채 무더운 햇볕 속으로 발을 들이자니 거부감이 듭니다. 새벽은 조끼를 벗고 팔을 걷으며 잠시 시간을 보냅니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노을이 발을 내딛습니다. 노을은 위화감을 느낍니다. 자신을 내려다봅니다.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습니다. 더불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초등학교 때 이사를 하며 버린 옷입니다. 강물은 거울 노릇을 하기에는 탁합니다. 보는 대신 키를 어림하고 얼굴을 만지며, 노을은 자신이 초등학생 때만큼 어려졌음을 깨닫습니다.
게다가 이 배경은 3년 전, 2014년임이 영락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잊겠나요. 자신이 이곳에 버려진 것으로 보아, 근처에는 노을이 찾는 그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과거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양, 노을은 굳은 걸음으로 산책로를 방황합니다. 머지 않아 앞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발견합니다. 밀집모자를 쓴 채하와, 모처럼 내려온 산책로에서 길을 잃은 새벽입니다. 그러나 새벽은 3년 전의 모습을, 중학생 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 새벽이 자신과 같이 온 새벽인지 아닌지를, 노을은 부딪혀 확인해보려 합니다.
161
이름없음
2018/08/01 14:36:28
ID : A4ZdDvxzO04
0
"안녕하세요."
노을이 둘 사이에 끼어듭니다. 인사만으로 사람이 얼마나 놀랄 수 있는지 증명하려는지, 채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봅니다. 비대칭한 긴 옆머리가 찰랑거립니다. 새벽은 낯선 사람을 마주할 때 두르는 예의를 적당량 보이고 있습니다. 노을은 이 새벽이 자신과 같이 온 그가 아님을 확신합니다. 순간 장난기가 입니다.
"어머.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이죠?"
"아, 맞아. 둘이 알아?"
"그럼요. 동생이니까. 웬일인지 날 저기 떼놓고 갔지만."
"가만 있으라니까, 왜 여기로 왔어."
채하가 매섭게 묻습니다. 그러나 노을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언니를 믿고 순종적이던 초등학생이 아닙니다.
2014년 여름, 새벽은 채하와 노을이 살던 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새벽과 채하는 중학교 2학년, 노을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동네를 처음으로 돌아다니던 새벽은, 강 근처 산책로에서 마침내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앞에 나타난 사람이 채하였습니다. 채하는 새벽을 아파트까지 안내해주었고, 그들이 이웃집에 살 뿐만 아니라 4년 전 놀이동산에서 같이 미아가 된 전적이 있었음을 알아채 새벽에게 전했습니다. 새벽과 채하의 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노을은 그 흐름을 깨고 싶어집니다. 새벽에게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같이 가요."
"잠시 뒤에 따라오라고 했잖아. 말 진짜 안 듣네."
채하가 노을을 노려봅니다. 노을은 말 없이 눈을 감고 그들을 따라갑니다.
162
이름없음
2018/08/01 14:47:55
ID : A4ZdDvxzO04
0
"어머니와 둘이서 산다고 하더니."
새벽의 물음에 채하가 무감하게 답합니다.
"가족을 보일 거라면 깜짝 파티처럼 알리고 싶어서. 말로 전해지면 감흥이 없잖아."
채하의 말에 노을이 속으로 웃습니다. 채하는 노을이 거추장스러운가 봅니다. 마음을 굳혔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냅니다.
"네가 산책하고 싶대서 와준 거잖아. 넌 좀 돌아다니다 와."
"둘이서만 가다가 길을 잃으면 어떡해. 같이 가줄게."
채하는 말없이 휴대전화를 엽니다. 노을은 가소롭다는 표정입니다. 채하는 신경질적이 됩니다. 이마에 주름이 집니다. 새벽이 둘의 눈치를 봅니다.
"나 때문에 불편해?"
"아니. 더워서 그래."
채하는 협박이 통하지 않자 귀찮아졌는지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넣습니다. 노을은 더욱 활짝 웃음을 지으며, 어찌 되었든 둘을 졸레졸레 따라갑니다.
뭉쳐가던 셋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요란스럽던 대화를 듣고, 정자에서 산책로로 나온 새벽입니다. 새벽은 익숙한 얼굴들에 놀랍니다. 3년 전의 자신과 채하입니다. 그러나 3년이 어려져 초등학생 때의 모습을 한 노을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노을은 새벽을 반깁니다. 새벽은 노을을 바로 알아보지는 못하면서도 손을 들어 화답합니다. 3년 전의 새벽은 새벽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3년 전의 채하는 새벽을 보더니 잠시 굳습니다. 새벽이 채하에게 말을 겁니다.
"저를 아세요."
채하는 평탄한 대답을 내뱉습니다. 새벽은 머뭇거립니다. 비교적 최근에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하더라도, 새벽에게 채하는 항상 굳건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단절에 혼란스러운 사람은 새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때를 노려, 노을이 3년 전의 새벽을 잡아챕니다.
"언니. 더우니까 머리 아프지? 이 사람은 내가 아파트까지 안내해줄게."
노을은 말을 내뱉고 난 뒤에야 동정을 살핍니다. 채하는 피가 굳은 것처럼 멍하니 있습니다. 노을은 3년 전의 새벽을 붙잡고 산책로 옆에 난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산책로에는 새벽과 채하만이 남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흐르는 강 옆에서 그들은 서로를 마주봅니다.
163
이름없음
2018/08/01 14:57:29
ID : A4ZdDvxzO04
0
새벽은 깃발처럼 먼저 채하를 향합니다.
"뭔가, 내가 방해를 해버린 것 같네."
"그러게요." 채하는 평정을 되찾습니다. "이상해서요. 마치 꿈인 것처럼."
채하는 손수건으로 목에 감긴 땀을 닦습니다. 그늘을 찾아 둘은 옆으로 이동합니다. 강을 내려다봅니다. 나무 열매가 상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몸 괜찮아?"
"어느 정도."
채하는 일단 새벽에게 존댓말을 합니다. 새벽은 바람조차 일지 않는 공중을 응시합니다. 읽힐 것이 없는 더위입니다. 새벽은 자신의 3년 전을 떠올립니다. 이곳에서 길을 잃었다가 채하를 처음 만났지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던 때에도 채하를 만났음을 알게 되었더랬지요. 노을이 새벽을 데리고 갔으니 기억과는 달라졌습니다. 기억을 변주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새벽은 허탈감에 빠져 떠난 노을의 쪽을 바라봅니다. 경사 때문에 도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노을이도 못 됐네. 언니 좀 데리고 가지."
새벽의 한탄에 채하가 과민하게 반응합니다.
"...네?"
"아. 동생 말이야."
"노을이라니요."
채하의 말에 새벽이 의아해합니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는지 몰라 둘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새벽이 문득 위를 바라다봅니다. 착각이 아닙니다. 정말로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세찬 비에, 새벽과 채하는 놀라 나뭇가지 밑으로 몸을 밀칩니다. 새벽은 어둠 속에서도 주위를 살핍니다. 한동안 꿈에 있었더니 암순응이 풀렸습니다. 때문에 근처에서 터벅터벅 발걸음을 내던 장본인도, 시간이 꽤 걸려서야 알아차립니다.
164
이름없음
2018/08/01 15:03:43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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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걸어오는 사람은 마녀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체격이 작습니다. 새벽은 그 골격이 방금 전에 보았던, 초등학생 때의 노을과 흡사하다고 느낍니다. 마녀 모자 밑으로, 노을이 피식 웃습니다.
"나는 언니를 노을이라고 불렀어."
비가 내리치는 와중에도 그 음성만은 똑똑히 들립니다. 새벽은 분명 채하를 겨냥하고 있을 발언이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언니, 나의 노을 언니."
마녀모자를 쓴 노을의 입가가, 초침처럼 천천히 올라옵니다. 순간,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더니, 새벽은 그대로 꿈에서 밀쳐집니다.
등에 식은 땀이 붙었습니다. 새벽은 관람차 좌석에서 일어섭니다. 거친 숨을 내쉽니다. 말이 되지 못한 호흡이 무참히 형체를 잃습니다.
165
◆k62Le3U7xRu
2018/08/01 15:09:51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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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하는 자동차 뒷좌석 한가운데에서 눈을 뜹니다. 노곤하게 기지개를 펴려다, 제 손목에 걸린 수갑을 깨닫고 절제합니다. 옆에서는 호연이 계속 노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채하는 시선을 돌립니다. 여명은 창밖으로 몸을 돌린 채 눈을 감고 있습니다.
"슬슬 산길인가 보네요."
채하는 운전자인 민기에게 말을 겁니다. 민기는 무시하려다가, 결국은 답을 하고 맙니다.
"그렇지. 놀이공원에까지 가야 하니까."
"말을 하는구나."
호연이 옆에서 끼어듭니다. 여전히 노을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노을이를 깨워주면 좋을 텐데. 그럴 시간에."
적대감과 같은 무게의 애원이 들어가 있습니다. 채하는 무심합니다. 그러더니 속닥, 음절을 중얼거립니다.
자동차 램프가 깨집니다. 왼쪽이 먼저 깨지더니, 이윽고 오른쪽마저 박살납니다. 민기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선잠에 들었던 여명도 꺠어납니다. 주위가 어둠에 휩싸여 있습니다. 자동차에 달린 조명이 모두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전기는 빛이 되지 못하고 잠에 빠집니다.
민기가 말이 막혀 앞을 쳐다봅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입니다. 옆은 까마득한 절벽입니다. 아무리 길을 잘 안다해도 이 상태로 운전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밤은 일말의 낮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안 됐네."
채하가 중얼거립니다. 장난기를 넘어선 악의마저 느껴집니다.
166
◆k62Le3U7xRu
2018/08/02 13:41:21
ID : A4ZdDvxzO04
0
산길은 낮이었던 밤처럼 어둑합니다. 주위에는 아무 광원도 없습니다. 차에 깔린 것처럼 빛 한 줄기도 틈입해오지 못합니다. 민기는 열쇠를 잡았다가, 시동을 끄지 못하고 손을 내립니다. 운전대를 돌릴 것도 아니면서 괜히 꼭 손에 쥡니다.
"열쇠는 시동을 끄기 위해 있는 거야."
"시끄러워."
채하의 농담을 호연이 가로막습니다. 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들을 충분히 골려먹을 수 있음을 깨달았나 봅니다. 수갑이 찰랑거리는 소리만이 들립니다.
"빛만 있다면."
"아무리 외웠어도 이 길을 무작정 가는 건 무리야."
호연과 민기는 방책이 떠오르지 않으면서도 말을 뱉고 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곳에 가만히 있자는 것 외에는 개진할 의견조차 없습니다. 호연은 지닌 물품이 무엇 있던가 더듬어봅니다. 별다른 소지품은 없습니다. 단지, 새벽과 여명과 노을을 구출하고 오던 날 가져가 내려놓지 않은 기름 한 통이 트렁크에서 출렁거릴 따름입니다. 호연은 논의해볼 가치도 없음을 알면서도 의견을 개진해봅니다.
"불을 질러 길을 밝혀볼까?"
"기각이야."
어이가 없는지 민기의 목소리에서 바람이 빠집니다. 풍선을 묶듯이 호연이 강하게 나섭니다.
"문제는 둘이잖아. 길이 안 보이고 나가면 좀비가 있다. 둘 모두 해결할 유일한 방안이야."
물론 호연도 타개책이 없기에 이런 주장을 해본 것에 다름 아닙니다. 모두가 동의한다 해도 실제로 행해볼 생각은 없습니다. 불을 붙여 좀비를 피해 길을 가봤자, 기껏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가요. 산불이지요. 놀이공원에 도착하는 것이지요. 화마도 놀이공원에 도착해, 겨우 맞이한 도착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겠지요.
167
◆k62Le3U7xRu
2018/08/02 13:47:45
ID : A4ZdDvxzO04
0
아무도 호연의 말에 답하지 않습니다. 옹호도 비판도 소용 없는 말놀음에 불과하니까요. 갈 곳 없는 차만 계속 진동합니다. 그 진동 속에 사람의 말이 뛰어듭니다.
"좋다."
채하입니다. 호연은 무시하려 들지만, 채하의 이어진 말에 관심을 보입니다.
"산불이 날까봐 걱정이지? 그 정도야. 내가 손을 봐줄게."
"도와준다는 거야?"
호연이 화색을 표합니다. 민기가 야유합니다.
"지금 자동차를 부순 것도 너 아냐?"
"의심이야. 계속 날 의심하는구나."
"지금 이득을 볼 사람은 너밖에 없거든."
"나도 빨리 놀이공원에 도착하고 싶어. 앞으로 일어날 일이 중요한걸."
민기는 입을 앙다뭅니다. 그러더니 돌다리를 두들기듯 묻습니다. 긴장과 신중함이 날개처럼 균형을 잡습니다.
"진심이야? 어떻게 산불이 나지 않게 막을 건데?"
"돌아다니던 좀비도 마법처럼 없앴는걸. 산불이 나지 않게 불을 가두면 끝이잖아."
끝이지, 하고 호연은 채하의 말을 메아리처럼 자그마하게 따라합니다. 모종의 불안을 느끼며. 채하는 머리를 기울여, 마녀 모자로 호연의 볼을 콕콕 찌릅니다.
168
◆k62Le3U7xRu
2018/08/02 13:57:05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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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갈 거야?"
호연은 채하의 형체를 바라봅니다. 표정도 경계도 없이 대화만을 건네는 사람 같은 형태를. 호연은 붓을 꺾듯이 결국은 결심합니다. 일어섭니다. 트렁크에서 기름통을 꺼냅니다. 차문을 엽니다. 주위에 좀비가 돌아다니지는 않는가, 한껏 자신을 타이르면서. 기름이 모닥불처럼 통 속에서 이리저리 출렁입니다.
호연은 차의 뒷편에 기름을 뿌립니다. 경사로를 따라 액체는 그들이 내려온 길을 거슬러 내려갑니다. 호연이 라이터를 떨어트립니다. 불이 번집니다. 주위가 삽시간에 환해집니다. 호연은 암순응이 완료된 눈을 타이르며 서둘러 차 안으로 뛰어듭니다. 민기가 차를 출발시킵니다. 은은한 빛이 주위를 밝힙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보입니다. 아직 정신을 잃은 노을이, 모두를 외면하는 여명이, 기대감에 부풀어있는 채하가 보입니다.
새로운 빛이 끼어듭니다. 민기가 차를 급히 멈춥니다. 놀이공원에서 내려오는 차가 있습니다. 두 차가 손뼉처럼 서로를 마주합니다. 헤드라이트가 민기를 밝힙니다. 민기는 그 차 안를 운전하는 사람이 서장임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더 타고 있음을 확실히 느낍니다.
그들의 등장에 호연이 침묵합니다. 그들을 구하러 내려왔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불을 질렀을까요. 그들을 따라 내려갔으면 될 것을. 이제 문제는 산불입니다. 호연이 채하를 보채듯이 바라봅니다. 그러나 채하는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호연이 급박해집니다.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지른 불은 아니지만."
호연은 잠잠히 채하의 모자를 들어올립니다. 채하는 고개를 흔들며 답합니다.
"걱정 말라니까. 놀이공원에 도착하면 바로 해결해줄게."
169
◆k62Le3U7xRu
2018/08/02 14:06:00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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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분 전, 잠에서 깨어나 본부로 돌아온 새벽을 설기와 연화는 서둘러 맞이했습니다. 식당에서부터 논의하고 서장과 합을 맞추어, 채하와 노을을 데리러 떠난 민기와 호연, 여명을 마중나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서장은 이미 놀이공원 입구에서 차를 마련해놓은 뒤였습니다. 새벽은 설기와 연화에게 이끌려 조수석에 짐짝처럼 밀어넣어진 후, 설기와 연화의 격려를 받으며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민기와 호연, 여명이 타고 갔던 그 차를 마주칩니다. 노을이 팔라다라 명명했던 그 말을. 새벽은 조수석에 타고 있는 노을을 발견합니다. 안전벨트가 매어진 것으로 보아 숨이 남아있나 봅니다. 뒷좌석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던 설기가 의혹을 내밉니다.
"차 뒤편이 환하네? 무슨 일이래?"
그러나 물을 새가 없습니다. 차의 전등이 모두 깨져있습니다. 안내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장은 차를 유턴합니다. 서행합니다. 팔라다가 뒤따라 옵니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 서장은 일정한 속도로 능숙하게, 놀이공원으로 그들을 안내합니다.
설기가 문득 말을 꺼냅니다.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사실 연화는 제 동생이 아니에요."
"그랬겠지. 돌림자부터가 달랐잖나."
"낯선 사람과 있기 싫었어요."
"가끔은 사실보다 더 진실인 것이 있지."
사실은 공예와 같은 어원을 지닙니다. 사실보다 더 진실인 것이 있겠지요. 설기를 향해 뒤를 돌아보던 새벽이, 비탈길의 풍경에 화들짝 놀랍니다. 나무마다 불이 옮겨붙고 있으니까요. 메마른 탓인지 그 속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170
◆k62Le3U7xRu
2018/08/02 14:45:26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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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기다리던 경찰들이 철창을 엽니다. 진군해오는 연기 탓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추 알아차린 눈치입니다. 차에서 내린 서장과 새벽이 서둘러 뒤따라 오는 차로 달려갑니다. 민기가 차문을 엽니다.
"노을이는 구했고 채하는 데려왔어요."
그러더니 자신이 온 길을 바라봅니다. 말문이 막히나 봅니다.
"보다시피 산불이 났지요. 헤드라이트가 꺼졌어요. 채하가 불을 질러 길을 밝히면 자신이 산불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했죠."
"약속을 어겼나?" 서장이 눈을 갸름히 뜬 채 묻습니다. 민기는 뒤통수를 긁습니다. 간지럽다기보다는 제스처의 형식을 띤 것 같습니다.
"글쎄요. 놀이공원에 오면 손을 쓰겠다고 말하더군요. 이제 검증할 일이죠."
호연이 채하를 데리고 내립니다. 여명이 그 뒤를 따라옵니다. 새벽과 설기, 연화가 힘을 합쳐 노을을 차 밖으로 꺼냅니다. 경찰들이 미리 들고온 간이 침대에 노을을 눕힙니다.
새벽이 뒤를 돌아봅니다. 당사자 모두가 모였습니다. 말을 꺼내면 돌이 구르기 시작할 겁니다. 돌을 밀어버린 사람은 이번에도 채하입니다.
"불이 예쁘구나."
마치 어제 꺼진 캠프파이어라도 된다는 듯이 채하가 심미적인 발언을 내뱉습니다. 심미는 퇴폐의 변명입니다.
"다른 할 말은 없어?" 설기가 따집니다.
"약속대로 불을 꺼야지." 호연의 재촉을 채하가 말립니다. 채하가 가지런히 모은 두 손 위에서, 수갑이 딸랑거립니다. 채하가 입을 엽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잠시만 동화를 이야기해보자."
해가 산에 추락한 것처럼 그들이 온 뒷편이 온통 환해졌습니다. 채하는 역광을 받고 사람들을 향해 서있습니다.
171
◆k62Le3U7xRu
2018/08/02 14:59:42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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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채하는 보이지 않는 입으로 말을 겁니다. 눌려도 자국이 남지 않겠다 싶을 만큼 뻣뻣이 선 채하는, 줄에 묶인 동상을 연상시킵니다.
"죽음과 전쟁과 기아와 역병이 내려와 지상이 불에 타오르다. 익숙한 비유지?"
익숙히 전해듣던 종언의 이미지입니다. 사람들이 종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종말은 오지 않겠으나.
"종말 말이야?"
새벽이 되묻습니다. 채하는 새벽을 봅니다. 시선이 오래 머물다 떨어집니다.
"맞아. 죽음에 의한 역병 탓에 기아와 다툼이 일어났지."
"그건 신화지. 지금 네 행동과 무슨 상관이지?"
민기가 날카롭게 찌릅니다. 채하가 문장에 웃음을 섞습니다.
"노을이는 자기를 아카바울이라고 불러달랬지. 바울은 종말을 알리는 편지를 썼어. 모두 노을에게서 시작한 거야."
그리고는 짐짓 진지하게 말을 내뱉습니다. 평탄함을 가장합니다.
"협박을 받았다고 생각했어. 예지몽을 꿔 세계를 어지럽히는 꼬마가 있다. 질서를 망가뜨리고 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아이는 죽어야 한다. 네가 그 일을 맡아라."
채하가 문장을 끝마칩니다. 새벽은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속으로는 적잖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채하의 말뜻은 명확합니다. 노을이 질서를 어지럽혀 자신이 그녀를 죽이는 역을 맡았다. 단순한 설명이 아닙니다. 설득입니다. 노을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이곳의 모두에게 허락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결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두를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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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2 15:09:07
ID : A4ZdDvxzO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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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채하가 원하던 대로 되지는 않으려나 봅니다. 민기가 끼어듭니다.
"웃기고 있네. 이건 전염병이 아니거든. 팔 잡혔다고 감염되는 역병이 있냐?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지."
새벽이 정신을 차립니다. 호연도 합류합니다.
"노을이를 죽인다니, 언니로서 할 말이야? 정신 차려. 뭔가 마법을 쓰니까 대단한 존재라도 된 줄 알아?"
호연의 말투가 배수진에서처럼 격해집니다. 새벽은 호연이 노을이 누운 간이 침대 바로 옆에 서있음을 깨닫습니다.
"다시 생각해봐. 자기 동생을 죽이라고 하는 신이 어디 있어? 넌 잠시 정신이 나간 거야."
채하는 치지 않는 피아노처럼 침묵합니다. 화마에서 피어오른 먼지들이 세월처럼 채하의 모자에 내려앉습니다. 채하는 새벽을 바라봅니다. 확인하듯이 묻습니다.
"다른 사람은 무시해. 단순히 순수한 감상을 들려줘봐. 어떤 결론이 맞겠어? 아이야, 미래야?"
추상명사를 맞이하자 새벽은 순간 고민이 헛되었다고 느끼고 맙니다. 새벽은 불길을 봅니다. 더 밝아질수록 역광을 맞는 채하는 더 내려앉습니다.
"노을이야." 새벽이 답합니다.
채하는 예감했다는 것처럼 주위를 바라봅니다. 모두가 그녀를 향하고 있습니다. 적대감과 당혹이 버무려져서는. 균열이 생겼습니다. 새벽은 채하와 사람들 사이에 어떤 틈이 생겼다고 느낍니다. 완전히 갈라져 버렸다고.
틈을 넘어 채하의 울먹임이 전해집니다.
"나한테 왜 그래. 왜, 그랬던 거야."
아무도 함부로 나서지 못합니다. 채하의 수갑에 갇힌 두 손이 꼼지락거립니다. 세례를 받았으나 수건은 받지 못한 사람처럼 벌벌 떱니다.
"언니. 왜 나는. 언니. 언니."
채하가 더듬습니다. 단어마저 곧 나누어집니다. 말이 아닌 음절을 내뱉습니다.
"무서워. 언니. 노을 언니. 억울해."
단발마 같은 단어들을 내지르더니 채하는 다리가 잘린 가구처럼 앞으로 퍽 고꾸라집니다. 타닥, 불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공백을 채웁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채하가 아닌 서로를 마주봅니다. 여명이 다가가 채하를 흔듭니다. 채하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채하가 끄겠다고 약속했던 산불은 놀이공원을 향해 맹렬히 전진해오고 있습니다.
173
◆k62Le3U7xRu
2018/08/03 13:00:11
ID : o1wpTQsnX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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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여명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립니다. 새벽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오더니 팔을 붙잡습니다. 범퍼카 근처의 남자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주위를 둘러싸던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놀이공원 각지로 퍼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새벽의 발걸음은 늦추어져야 했습니다. 연화가 새벽을 불러세웁니다. 새벽이 자동차 쪽을 봅니다. 간이 침대 위에서 노을이 일어서 있습니다. 현기증이 심한지 머리를 부여잡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야?"
일어나니 캠프파이어는 사라져 있고 언니는 쓰러진데다가 산불이 북소리처럼 다가오고 있으니 그런 질문을 할 법도 하겠지요. 하루가 통째로 날아갔음을 알리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하지만 사태를 정리하기가 급합니다. 연화와 설기가 피로해하는 노을을 보듬는 동안, 새벽은 사람들을 깨우러 여명과 민기를 뒤쫓아 달립니다.
상당한 거리를 달음박질치다보니 사람은 단순히 즐기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자연스레 원망이 들고 맙니다. 페인트로 칠해진 철제 구조물들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불길 덕분에 이들은 환하지만 머지 않아 폐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우구스틴을 기리며 분수 위에 세워졌으나, 나치에 의해 철거되어 군수물자가 되어버렸던 동상처럼, 행복하지 않은 왕자가 되고 말겠지요. 여기서 탈출해야 합니다. 연기가 밀려오기 전에 서둘러야 합니다.
서장이 급히 수를 셉니다. 놀이공원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수의 머리가 모였습니다. 제일 처음 모였던 경찰들은 최대한 물자를 챙겼습니다. 그러나 놀이공원에 남긴 상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울타리로 보호되던, 음식과 물이 풍족하던 넓은 땅을 버릴 때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세계의 종말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완결로서 부족한 데가 없습니다.
174
◆k62Le3U7xRu
2018/08/03 13:09:12
ID : o1wpTQsnXy1
0
차량 열 대를 모두 동원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지체할 수 없습니다. 차량에 사람들이 차오르고, 열쇠가 시동을 켜기 위해 돌아갑니다. 호연과 노을이 의식을 잃고 쓰려져있던 채하를 부축해 차에 태웁니다. 호연이 운전대를 잡고, 여명이 조수석에, 새벽과 채하와 노을이 뒷좌석에 탑니다. 창문처럼 문이 닫힙니다. 철창이 열립니다. 차량들이 놀이공원을 줄줄이 빠져나갑니다. 새벽이 탄 차, 팔라다는 헤드라이트가 깨져버렸으나 불길이 타오르는 이 현장에선 더 적은 빛이면 모를까, 더 많은 빛은 필요 없습니다.
내려가던 중에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놀랍니다. 최근에는 구름이 바다의 포말보다도 적던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었으니까요. 호연이 운전대를 꼭 잡습니다. 불길이 꺼지는 효과가 일부 있겠으나, 기름으로 시작된 불인 이상 어떻게 될지 감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검은 연기가 거미줄에 몰려드는 죄인들의 손 같습니다. 차량들은 거미줄 위의 이슬처럼 나란히 굽은 산길을 내려갑니다.
마침내 산을 빠져 나왔습니다. 앞장인 차에 탄 서장이 창문을 열어 뒤에 소리를 지릅니다. 명령이 하달됩니다. 목적지는 고등학교입니다. 호연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인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안전거리를 유지합니다. 유원지에서 빠져나가기 직전, 서장에게 학교에 좀비가 없어져 안전했음을 보고한 참이었으니까요.
산을 빠져나왔다면 불을 쳐다볼 차례입니다. 거대한 모닥불입니다. 어제 미봉되었던 캠프파이어가 되살아난 것만 같습니다. 비 때문인지 불이 서서히 소화됩니다. 검은 연기가 정체됩니다. 좀비는 불에 뛰어드는 습성을 지녔었으니, 저런 큰 불이라면 근방의 좀비들이 모두 몰려들었을 것임이 틀림 없습니다. 위장에 들어간 것처럼 모두 타버리고 말았겠지요. 엎질러진 납골당에서와 같이 뼛가루가 가득하겠지요. 산불이 양초라도 되는 것처럼 새벽은 잔잔히 합장을 합니다. 모래 같아진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자신의 부모님도, 노을의 부모님도, 여명의 동생도 저 안에 있을지 모릅니다. 덩어리가 아닌 뼈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뼈로 지탱하려 들었던 인생은 어떤 꼴이 되고 마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격려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대로 등을 돌리면 되는 것일까요.
새벽은 자는 것처럼 엎드립니다. 울음을 터뜨리기 위해서입니다.
175
◆k62Le3U7xRu
2018/08/03 13:18:19
ID : o1wpTQsnXy1
0
차 안의 사람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량 행렬은 도로에 안전히 진입합니다. 호연은 근처에 몰려든 좀비가 한 구도 없음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주민이던 사람은 이 차 열 대에만 남은 것일까요. 그리 생각하니 쓸쓸해집니다. 백미러로 실내를 흘낏 봅니다. 새벽을 그대로 놓아둡니다. 노을과 채하, 새벽, 그리고 여명이라. 이런 배치라면 자신은 짝을 잃은 떡잎처럼 고독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절 외롭게 만드는 조합이네요."
"왜 그래, 경찰 씨?"
노을이 호연을 걱정합니다. 자신의 말이 심한 무게로 느껴졌을까 걱정되어, 호연은 과장되게 부정의 표시를 취합니다.
"다들 형제자매인데 나만 혼자니까. 우리 동생 데리고 올걸."
호연의 대학생인 동생은 죽었고, 늦둥이인 아기는 연화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뒤따라오는 차에 있습니다. 학교에 도착해서야 동생을 다시 안을 수 있겠지요.
"틀렸어요."
노을도 새벽도 여명도 아닌 목소리가 들립니다. 채하입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지는 않았나 봅니다. 잠꼬대입니다. 호들갑스럽게 놀라 상체를 들었던 새벽은, 서둘러 자신의 눈물자국을 뭉갭니다. 노을은 몸을 동그랗게 맙니다.
"많이 졸려."
유언을 내뱉는 것처럼 힘없습니다. 노을이 잠듭니다. 하루 동안 먹은 것이 없으니 힘이 완전히 빠져버렸나 봅니다. 식음을 거의 전폐했던 것은 새벽도 매한가지입니다. 새벽도 눈을 감습니다. 강 너머에서와 같이 몽롱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역시 쓸쓸하네요."
여명이 가로등을 보며 말합니다. 꺼져있습니다. 모아놨던 태양광 에너지가 다 떨어졌을 시간입니다.
176
◆k62Le3U7xRu
2018/08/03 13:39:55
ID : o1wpTQsnX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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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눈을 뜹니다. 놀이공원입니다. 낮입니다. 봄입니다. 튤립공원입니다. 튤립이 공책 속의 종이처럼 무성합니다. 공들인 것처럼 가지각색입니다. 빛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다고 하여 빛이 싫은 것은 아닙니다.
주위를 돌아봅니다. 꿈이라면 나름지기, 아는 사람이 출현해야 합니다. 아니라면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은 노을을 만납니다. 방황하나 봅니다. 방금 전 막 실신에서 돌아왔던 때처럼 행색이 엉망입니다. 새벽이 노을을 불러세웁니다.
노을은 새벽을 바라봅니다. 환한 낮이니 차림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노을이 맵시를 다듬으려다 한심한 듯 손을 내려놓습니다.
"내 꿈인데, 뭐하고 있는 거야."
새벽은 입을 다뭅니다. 이틀 전에도 비슷한 꿈을 꾼 기억이 납니다. 새벽과 노을이 같은 꿈을 꾼다고 착각할 정도의 우연입니다. 노을은 새벽에게 말을 거는 대신 조심스럽게 튤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싱그러운 냄새가 납니다. 새벽은 거리를 두고 노을을 따라갑니다.
그러던 노을이 갑자기 멈추어섭니다. 아예 자세를 낮추고 수풀 뒤로 숨어버립니다. 새벽은 노을 근처에서 노을의 행동을 따라합니다. 노을은 노을과 비슷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벽은 뒤늦게 알아챕니다. 노을과 채하와 비슷한 두 사람이 튤립 구근을 캐고 있습니다. 대략 일 년 전의 모습일까요.
177
◆k62Le3U7xRu
2018/08/03 13:50:31
ID : o1wpTQsnX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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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은 구근을 캐다가 양파망에 옮겨 담습니다. 튤립을 좋아해 매년 구근 캐기 행사에 참여한다고 하였지요. 즐거운지 열심입니다. 일찍이 일어난 채하는 노을을 내려다 보다 뒤로 발을 옮깁니다.
"슬슬 가자. 식사한 뒤에 돌아가자고."
"벌써?" 노을이 애원합니다. 채하는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작년에 못 준 생일선물로는 충분하잖아."
"그치만."
"또 그런다."
채하가 휴대전화를 집어듭니다. 노을이 멈칫합니다. 채하는 웃으며 주머니를 채웁니다. 시간만 보기 위해서였다던 듯이. 노을이 일어서 옷에 묻은 흙을 텁니다. 채하가 앞서 가고 노을이 뒤따라갑니다. 노을은 채하의 그림자를 남몰래 콱콱 밟습니다.
그 광경을 노을과 새벽은 지켜보던 도중이었습니다. 노을이 둘에게 보이지 않도록 멀리 돌아갑니다. 새벽도 자세를 낮춘 채 노을을 따라갑니다. 새벽은 노을이 울상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어둠 속에서 상대의 감정을 읽는 연습을 하다보니, 이런 밝은 빛 속에서는 감정의 줄기를 잡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은 과업이 된 것만 같습니다.
"못된 언니. 내가 언제까지 입을 다물 줄 알고."
"무슨 일인데 그래?"
새벽이 묻습니다. 노을은 힘겹게 입을 뗍니다. 이것이 꿈이라 생각하는 탓에 마음이 동했나 봅니다. 새벽은 꿈의 등장인물에 불과한 노을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말할 리 없음을 알면서도, 스스로 어리석게 느껴질 만큼 진지한 자세로 듣습니다.
"새벽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많아. 예를 들어 언니는 중학교를 안 나왔어."
새벽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채하는 옆 지역의 중학교를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눈앞의 노을은 꿈의 등장인물에 불과하다고 단언합니다. 마침 노을도 입을 다뭅니다. 못 다 떨어진 바위 같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178
◆k62Le3U7xRu
2018/08/03 14:04:01
ID : o1wpTQsnXy1
0
"하긴. 안 믿는구나. 나도 바보 같아. 꿈에 대고 무슨 바람을 가진 거야."
노을이 속절없이 중얼댑니다. 갑자기 새벽의 가슴팍을 치기 시작합니다. 새벽은 당황하여 뒤로 물러섭니다.
"꿈이면 내 말을 좀 들으라고. 그래야 내 꿈이잖아."
새벽은 순간 어떤 균열을 느낍니다. 채하와 새벽은 분명 같은 꿈을 꾼 적이 있었지요. 여러 명이 꿈을 같이 꾼 적이 있었지요. 그렇다면 노을과 자신이 꿈을 같이 꾸는 것 역시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네에서처럼 뒤로 밀쳐지는 느낌이 듭니다. 새벽은 눈을 감았다 뜹니다. 꿈이 깨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깨지지 않았습니다. 새벽은 공중에 떠있습니다. 밤입니다. 아래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새벽은 직감합니다. 어제 있었던 캠프파이어 현장입니다.
새벽의 옆에는 노을이 있습니다. 이전에 채하의 손에 끌려 공중에서 이 장면을 한 번 더 보았을 때와는 달리 새벽은 안심합니다. 노을이 죽었다 생각하였기에 애통한 반응을 보였으나, 노을이 돌아왔으니 과거를 무리 없이 돌아볼 수 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그제야 새벽은 다른 점을 찾습니다. 노을이 홀로, 외롭게 서있습니다. 마녀모자를 쓴 채로, 세례를 받은 것처럼 온통 젖어서는.
"안돼."
새벽은 노을을 향해 급히 몸을 돌립니다. 새벽과 함께 공중에 떠있는 노을은,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새벽이 노을에게 괜찮냐고 묻습니다. 노을의 손을 잡고 두드립니다. 노을은 새벽에게 사실을 고합니다.
"전에 꾸었던 꿈이야."
"캠프파이어잖아? 꿈꾸었다니."
"이 꿈을 꾸었어. 새벽이 납치당한 직후에."
노을은 눈을 감습니다. 새벽이 말을 걸어도 등을 돌리며 피합니다. 싫다는 고함만을 계속합니다. 그 소리는 밑의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못합니다. 새벽은 무력감을 느끼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봅니다.
179
◆k62Le3U7xRu
2018/08/03 14:13:40
ID : o1wpTQsnXy1
0
노을, 채하, 새벽, 여명, 호연, 민기, 설기, 연화, 호연의 늦둥이 동생과 경찰 셋. 어제 열렸던 캠프파이어와 같은 구성입니다. 그러나 분위기만은 확연히 다릅니다. 마치 저 중앙에서 타오르는 것이 장작이 아닌 귀중한 유품이라도 된다는 듯이. 호연은 울고 있고, 채하는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습니다. 호연의 동생의 울음소리가 주위를 가릅니다. 경고한다기보다는 성가신 느낌만을 줍니다. 그들 모두의 관심이 쏠린 곳은, 모닥불을 바로 등지고 서있는 노을입니다.
노을의 옆에는 기름통이 놓여있습니다. 마녀모자를 쓴 채 자신의 치마 언저리를 내려다봅니다. 표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다리만 보이지 않는다면, 그 안에 사람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을 모양새입니다.
"이게 내 일이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과는 남한테 가지."
노을이 말합니다. 그 뒤에서 불길이 맹렬히 타오릅니다. 불티가 시계소리처럼 번집니다.
"그래. 내가 죽어야 세계가 돌아간다니 어쩌겠어."
노을이 말합니다. 불길이 타오릅니다.
"내 꿈이니까. 내 꿈을 지켜야지."
노을이 말합니다. 불길이 타오릅니다. 노을이 고개를 듭니다. 잿빛이던 옷 한복판에서 노을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노을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합니다. 불이 노을을 잡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던 노을이 새벽을 발견합니다. 채하의 옆에 쭈그려 앉아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짓습니다. 노을은 새벽을 원망합니다. 이해하기 쉬운 표정을 지었다면 저주할 수 있었을 것을. 그리하여 너무도 평범한 악담만을 새벽에게 남깁니다.
"새벽 씨는 새벽 실격이야."
역광, 빛이 아름다운 역광입니다. 노을의 얼굴이 명확히 보이지 않습니다. 따뜻하고 빛나는 모닥불이 세를 불립니다. 노을을 집어삼킵니다. 그제야 노을의 표정이 보입니다. 비명을 지릅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모두가 눈을 돌립니다. 오직 채하만이 노을을 끝까지 응시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노을이 사라집니다. 노을을 없앤 사람들만이 남았습니다.
180
◆k62Le3U7xRu
2018/08/04 12:40:23
ID : pU5e2LhBulg
0
새벽과 노을은 공중에 떠있습니다. 지상에서 별을 잡을 수 없듯 그들은 사람들을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노을은 겁에 질려 울고 있습니다. 악몽이 깨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꿈이 지키려는 것은 잠이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꿈에게서 내팽개쳐 진 노을을 새벽이 부릅니다. 안심시키려 합니다.
"저건 꿈에 불과하잖아."
"나한텐 아무것도 없어. 예지몽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걸."
"악몽일 뿐이야."
"그게 현실에 그대로 적용됐는걸. 꿈에서 보였지만 놀이공원에 없던 세 사람이 다음날 아침에 나를 찾아왔어. 모두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단지 노을이 불에 뛰어들지만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새벽은 자신이 모르던 새에 일어난 일을 듣고, 관절이 굳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어. 끝난 거야."
노을은 새벽의 말에 답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타죽는 모습을 메아리처럼 한 번 더 보고 말았으니 제정신이 아니겠지요. 새벽이 들이쉬던 숨이 멈춥니다. 그네에서 반동을 받을 때처럼 상체를 떠미는 압력이 느껴집니다. 새벽은 눈을 깜박입니다. 꿈이 꺠집니다. 호연이 운전하는 차로 돌아옵니다.
181
◆k62Le3U7xRu
2018/08/04 12:50:41
ID : pU5e2LhBulg
0
새벽이 고개를 돌립니다. 노을도 거의 같은 순간에 눈을 뜬 것 같습니다. 몽롱해합니다. 속눈썹이 눈에 들어갔는지 눈을 비비고 있습니다. 눈물자국이 나있습니다. 속눈썹 때문입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자각이 있던 새벽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학교 근방의 도로에 들어섰음을 알고서야 터지듯이 묻습니다.
"혹시 튤립 공원 꿈 꿨어?"
노을은 조용히 고개를 돌립니다. 새벽을 응시합니다. 그럴 듯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벽과 노을은 서둘러 자신들이 알던 정보를, 벽에 핀으로 메모지를 꽂듯이 정리해나갑니다.
"채하는 자기 꿈에 남을 초대할 수 있다고 했어."
"지금 꿈도?"
노을이 확신에 차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의 두 꿈에는 모두 채하가 출현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꿈을 두 번이나 꾸게 했다면 꿈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단 뜻일 거야."
새벽이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노을이 화들짝 놀랍니다. 생각이 총알처럼 머리를 지나갔나 봅니다.
"예지몽." 노을이 말합니다. "언니가 만든 꿈에 나를 초대한 거야.:"
노을은 점차 자신의 발상에 확신을 더해갑니다. 노을에게 특정한 꿈을 꾸게 한 후, 그것에 맞추어 현실을 바꾸어 나가면 그것이 다름아닌 예지몽이겠지요.
182
◆k62Le3U7xRu
2018/08/04 12:56:23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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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과 노을은 둘 사이에 끼인 채하를 내려다봅니다. 채하는 의식불명인 상태입니다. 어떤 답도 내놓지 않습니다. 진전이 되지 않습니다. 새벽과 노을은 방금 전의 꿈에 대해 머리를 맞대어봅니다.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새벽의 물음에 노을이 머뭇거리다 나름의 해답을 내놓습니다.
"두 개 다, 내가 겪었거나 꾸었던 것들이야. 새벽만 모르던 장면들이지."
노을이 납치된 후 놀이공원에서 방랑할 때 새벽은 비슷한 꿈을 꾸었습니다. 채하는 말했습니다. 자신의 의도를 알려주기 위해 새벽에게 여러 꿈을 종횡무진하게 만들겠다고. 채하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만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무엇인가 숨겨져 있단 것 외에는 무엇도 알 수 없습니다. 새벽은 논의를 포기하고 시트 위에 털썩 쓰러집니다.
차 안의 논의가 막히거나 말거나, 차량 행렬은 빨대 속의 스무디처럼 이동해 학교에 진입합니다. 좀비가 없는지 확인하며 선봉이 내린 후, 뒤따라온 차들이 바리케이드처럼 교문 근처에 세워집니다. 채하가 좀비를 없앴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지, 학교 내부는 꽤 안전지대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서둘러 제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흩어지고 뭉칩니다.
183
◆k62Le3U7xRu
2018/08/04 13:07:35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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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도 노을도 내립니다. 채하는 원래 그랬다는 것처럼 포근히 눈을 감고 있습니다. 새벽은 채하를 홀로 두지 못해 잠시나마 그 옆에서 머물기로 합니다. 사람들 몇 명이 차 근처로 찾아옵니다. 호연에게 산불이 난 경위에 대해 묻습니다. 호연은 손을 꽉 쥡니다. 그러나 비밀은 손에서 빠져나갑니다. 짜이는 것처럼 진실이 알려집니다. 중간에 조명이 박살났고, 채하가 안전을 보장하겠으니 불을 지르라 충동질했고, 채하는 이렇게 기절해버렸다고요. 실제로 불을 지른 장본인은 자신이라 말하기를 빼놓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의 적의는 이미 뭉칠 곳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우선 돌아섭니다. 채하가 아직 잠들어있기 떄문이 아니라, 그녀가 깨어나지 않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녀 때문에. 좋던 숙소를 잃었네."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호연은 쓸쓸한 눈으로 모래를 내려다봅니다. 자갈이 많이 섞여있습니다.
새벽은 차문을 닫고 차 안에 남아있습니다. 시동이 꺼진 차가 불이 꺼진 창문처럼 허합니다. 열쇠는 꽂혀있습니다. 본래만 해도 경운기처럼 바퀴를 돌려 출발하던 차체입니다. 움직이기 위한 것인 주제에, 왜 열기 위한 것과 같은 도구를 쓰는지요. 새벽은 가방을 정리합니다. 깨지지 않은 스노볼이 눈에 들어옵니다. 좀비를 유인할까 두려워 돌려보지 못했던 오르골을, 원판 아래 태엽을 만지작거려 봅니다.
태엽이 돌아가는 짧은 시간 동안은, 외부의 무엇도 방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을 지키려면, 혼란스러운 지금은 태엽을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신심을 유지하려면 사려해야 합니다. 새벽의 선택이 옳았습니다. 차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요.
184
◆k62Le3U7xRu
2018/08/04 13:16:22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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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문고리에 손을 올립니다. 밖에서도 동시에 손잡이를 움켰습니다. 노을이 문을 엽니다. 새벽이 몸을 낮추어 동행자들을 확인합니다. 민기와 설기, 그리고 새벽이 얼마 전에 보았던 2학년 학생입니다.
"말 섞은 지가 참 오래되었구나." 민기가 말합니다.
"안 그래도 바쁘니 내일까지도 모일 일 없겠다 싶었는데, 정말 유쾌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그러며 민기는 자신이 데려온 학생의 어깨를 툭툭 칩니다. 2학년 1반 교실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마도 채하에 의해 잠시 내쫓겨 더 위의 교실을 점거하고 있었나 봅니다. 자신이 불려온 사연을 아직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낌새입니다.
"채하와 설기와 아는 사이라, 같이 면식이 있는 우리가 전담해 같이 움직이게 됐어. 그러니 자연스럽게 채하 얘기를 하게 됐지."
"동생 학교 생활엔 정말 관심이 없어서." 설기가 훼방을 놓습니다. 민기가 손을 휘둘러 설기의 말을 흩트립니다.
"채하가 옆 도시의 중학교에 다녔다고 하더라? 내가 아는 사실과 달라 맞추어보니, 내가 모르는 새에 더 큰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
"뭐. 맞아. 언니는 중학교를 안 다녔거든."
노을이 맞장구를 칩니다. 새벽은 그들을 멍하니 지켜봅니다. 그 뒤에 무슨 사정이 튀어나올지 종잡기가 힘듭니다.
185
◆k62Le3U7xRu
2018/08/04 13:28:05
ID : pU5e2LhBulg
0
"머리를 많이 굴리셨나 보네요." 새벽이 호응을 합니다. 말을 잇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오셨어요? 아니면 채하를 보러 왔나요?"
"새벽 씨를 보러 왔어." 노을이 시선을 피합니다. "내가 허락했어."
그들과 계속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강을 넘어버릴 것이 눈에 선합니다. 그것이 새벽에게 이로울지 해로울지 알지도 못하면서, 장바구니에 통조림을 담듯 배경지식도 무엇도 없이. 새벽은 자세를 바로 합니다. 노을과 민기의 발언을 내치지 않습니다.
"언니는 중학교를 안 나왔어. 그런데도 새벽 씨를 속였지." 노을이 말합니다.
"네게 일찍이 말했지만, 나는 어린 쪽이란 것을 알면서도 이름을 헷갈렸어." 민기가 말합니다.
"내가 두 살이 된 이후로는 언니를 좋아해본 적이 없어." 노을이 이전에 했던 말을 한 번 더 합니다. 낡은 책을 전등 밑에서 펼치는 것처럼.
충분히 즐겼는지 민기가 새벽에게 묻습니다. 노을에게 허락을 받았다 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정말로 노을 고유의 가정사이니까요.
"새벽, 3년 전 노을의 집에선 유전자 검사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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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4 13:49:32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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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노을과 채하의 부모가 지금 별거 중임을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새벽의 옆집에서 채하와 함께, 노을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지요.
"바람을 폈나요? 그래서 이혼을 하고?"
"새벽 씨. 막장드라마 많이 봤지."
노을이 반박합니다. 그렇다면 더 복잡한 사연이 묶여 들어가있는 것일까요. 모자에 머리카락을 구겨넣듯, 사암에 모래가 응축됐듯.
"그럼 왜 따로 사는 거야?"
"감정 싸움이 극으로 치닫기에는, 경멸과 무시 몇 초면 충분한걸."
노을이 풀죽은 목소리로 답합니다. 새벽은 머릿속에서 기억들을 나열해봅니다.
외동이라 관심이 절박하오니. 7년 전 놀이공원에서 들었던 미아 찾기 방송이었습니다. 분명히 채하를 찾는 것이었겠지요.
연화가 전하기를, 노을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키가 매우 컸으나, 거의 자라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꿈에서 보았을 때 노을은 항상 새벽을 초면인 것처럼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비밀을 가진 것처럼, 억울해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만날 때만 해도 채하는 새벽보다 어려보였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재회한 이후로는 새벽을 끌고 다녔습니다.
3년 전 강변공원에서 처음 만났던 무렵, 채하는 노을을 남기고 자신을 만났습니다. 왜 노을을 그늘에 박아두었던 것일까요.
"유전자 검사 결과는?" 새벽이 마지막으로 확인합니다.
"친자였어."
노을이 답합니다. 소송이 아니더라도 친자검사를 하는 경우가 분명 있었더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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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4 14:04:46
ID : pU5e2LhBulg
0
"실종 아동 찾기."
새벽에게 노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집안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 못마땅한가 봅니다. 그러나 단어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새롭게 별자리를 그려야 합니다. 모든 선분이 사라집니다.
"채하가 실종된 연도는 언제였어?"
"2004년. 언니가 5살이던 때였어."
노을이 두 살이던 해입니다.
"채하가 돌아온 것은?"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을 새벽이 합니다. 새벽이 아는 답을 노을이 합니다.
"3년 전. 그러니 그때 친자 검사를 했지."
"놀이공원에서 나와 만난 채하는?"
노을이 답하지 않습니다. 새벽의 팔을 잡습니다. 허리를 굽힙니다. 새벽과 눈높이를 맞춥니다.
"없어진 언니의 이름을 물려받았어.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남은 딸 한 명에 모든 관심을 뺏겨버릴 테니까. 우리 언니는 없던 사람처럼 될 테니까. 그래서 노을이던 이름을 개명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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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4 14:05:51
ID : pU5e2LhBulg
0
설기가 둘을 빤히 쳐다보다 옆에 서있던 학생의 목에 팔을 두릅니다.
"가자."
"어?"
"우리 있을 곳이 아니다."
"맞아. 어서 가라." 민기가 학생의 등을 떠밉니다. 설기가 민기를 잡아챕니다.
"네 역할도 끝났거든. 어서 교내 수색에나 합류해."
"하."
민기가 허탈해져 뒤로 물러섭니다. 굳은 것처럼 서있는 새벽과 노을을 남기고 떠납니다. 새벽은 역으로, 자신이 세계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왜 날 모르는 척했어?"
버티다가 내놓은 말이 그것입니다. 노을이 답합니다.
"부모님의 비밀을 알고 있었어. 여덟 자리 숫자의 돈 같은 것. 집이 무너지는 건 막고 싶었어."
그걸 빌미로 입막음을 당했던 걸까요. 하지만 노을이 지키고 싶어하던 집은 결국 조각나고 말았습니다.
"별 일 없었어. 최대한 밖에 소문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막았지. 옆집은 사정을 알았나 보지만."
노을은 적적한 눈빛으로 오두커니 섭니다. 줄이 매달린 가을 나무 같습니다.
"내 이름을 언니에게 돌려줬어. 모두가 이름을 되찾았다고 말하더라. 그리고 언니의 말에 따라 새벽을 모르는 척했어. 그러려니 했어. 별 것 아닌 요구였는걸. 협박을 과하게 한다 싶었지. 옆집에 이사올 줄도 몰랐는걸. 언니가 새 친구 쉽게 사귀는구나 싶었지."
새벽은 아직도, 다리만을 돌린 채 차 안에 앉아있습니다. 노을이 답답하다는듯이 새벽의 양어깨를 꽉 잡습니다.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는 돌을 씹는 것처럼, 마녀를 태울 장작을 패는 것처럼 또박또박 발음합니다. 새벽의 숨이 거칠어집니다.
"언니는 마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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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4 14:15:45
ID : pU5e2LhBulg
0
"새벽이 오기도 전에 새벽이 이사올 줄을 알았어. 아빠 엄마의 개인적인 비밀을 사진까지 찍은데다 휴대폰에 넣어다녔어. 버스터미널에서 경찰에게 수습되었을 때 망설임도 없이 우리집을 지목했어. 실종되었던 당시의 기억은 하나도 안 난대. 내 이름과 경험을 마치 모자처럼 들고가고는 새벽 씨에게 내 행세를 했어. 놀이공원에서의 기억은 하나도 없으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상하지도 않아? 난 놀이공원에서의 일, 한 번도 말한 적 없어."
노을이 해일처럼 자신을 쏟아냅니다. 새벽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던 이상함을 묵묵히 듣습니다. 어떤 반응도 노을을 되려 자극하고야 말겠지요.
"내게 예지몽을 꾸게 한 사람은 틀림없이 언니야. 그럼 뭘 알았단 거야? 좀비 사태가 일어날 줄을 알았어. 밤이 멈출 줄을 알았어. 경찰 씨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았어. 놀이공원에 설기와 연화가 올 줄을 알았어. 언니가 내게 꿈을 하게 하고 그것을 실현한 거야. 이 사태의 원인은 언니야."
노을이 새벽의 양어꺠를 더 단단히 움킵니다. 그것이 문고리, 또는 손잡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을이 간절한 표정을 짓습니다. 무덤덤한 새벽이 못내 답답함이 틀림없습니다. 전해지지 않습니다.
"꿈으로 나한테 알려주기만 한 것도 아냐. 나한테 명령을 했어. 내가 좀비에게 저항하지 않게 했고, 내가 모닥불에 자원해 뛰어드는 장면을 두 번이나 보여줬어. 그러며 내게 꿈을 믿으라, 꿈을 따르라 했어. 이보다 더 한 악의가 어디 있어? 한 번 들통나니까 너무도 심각한 악기잖아?"
노을이 들이쉬지 못했던 숨을 몰아쉽니다. 노을의 이마가 땀에 번들거립니다. 노을이 오른손을 새벽의 무릎 위로 올립니다. 흥분을 몸 밖으로 내쫓습니다. 그러나 노을은 이 흥분을 품고 갈 당위를 갖고 있습니다. 의문이 해명되지 않았습니다. 채하는 아직도 새벽의 뒤편 시트에 엎질러져 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새벽은 끝까지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앞으로 팔짱을 낄 따름입니다. 노을은 실망한 눈으로 새벽을 바라봅니다. 억울한가 봅니다. 새벽은 꿈에서 자신을 믿으란 말을 여러 번 했는데, 마치 둘이 다른 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력하게 앉아있습니다. 노을이 새벽에게서 손을 뗍니다. 악담이 감정싸움과 합쳐지면 얼마나 무익한지를 알고 있으므로, 노을은 최대한 조용히 돌아섭니다. 차문이 고장난 것처럼 활짝 열려있습니다. 노을의 마지막 말이 그 사이로 파고듭니다.
"너무해. 새벽 씨는 새벽 실격이야."
새벽만이, 기절한 채하 옆에 남습니다.
190
◆k62Le3U7xRu
2018/08/05 12:54:38
ID : pU5e2LhBulg
0
새벽은 다시, 태엽이 감기지 않은 오르골 속의 눈사람처럼 차 안에 가만히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또 창문을 두드립니다. 갑자기 앞문이 열립니다. 새벽이 낯을 듭니다. 호연입니다.
"신고 받고 왔어. 노을이를 괴롭혔다지?"
"잡혀가면 30분 동안 격리될 수 있나요."
"서비스로 한 시간은 더 줄 수 있어."
호연이 말장난을 멈추고 새벽을 걱정스럽게 내다봅니다. 어제부터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새벽이 넋을 놓지는 않을까 걱정되나 봅니다.
"침묵은 싫지. 무엇인가 얘기해봐."
"제가 얘기해야 하나요."
"취조실에서 경찰이 자기 사정을 얘기하니. 난 들어주는 편이야."
새벽은 조수석에 앉은 호연을 멍하니 지켜봅니다. 그러더니 화제를 찾습니다.
"호연 누나. 오는 길에 쓸쓸하다고 하셨죠?"
"그랬지. 그 차에서 나만 형제자매가 없었으니까."
"저도 홀로였기는 매일반이에요."
191
◆k62Le3U7xRu
2018/08/05 12:59:42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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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은 새벽의 말에 의아함을 표출합니다. 목 주위를 긁습니다.
"진실로는 말을 섞기 싫다 이거지? 좋아. 거짓 놀음을 해볼까."
그러며 자세를 바로 잡습니다. 희미한 웃음이 새벽을 통과해 지나갑니다. 지프가 한 번 기우뚱합니다.
"그 말은 곧, 여명이 네 형이 아니란 건가?"
"네. 아니에요. 애초에 집조차 다르거든요."
새벽의 집은 주택가에 있습니다. 여명의 가족이 사는 아파트는 꿈 속에서 생일파티를 준비할 때 방문해보았듯이, 마트 근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정을 모를 호연은 자신이 아는 방면으로 접근해보는 수밖에 달리 없습니다.
"그러면 뭔가 이상해지는걸." 호연이 뜸을 들이다 새벽의 거짓을 뒤집어보려 합니다.
"너희 형제는 6월 25일에 생일파티를 했을 텐데."
"그래요. 다름 아니라 그게 이상했죠."
"왜? 생일초도 멀쩡히 아홉 개였다며."
호연은 연도로 새벽의 나이를 역으로 연산해봅니다. 만 열일곱, 올해로 열여덟. 큰 초 하나와 작은 초 여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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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5 13:05:19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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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초를 케이크에 꽂았죠. 자. 이상하지 않나요. 사태가 발발한 건 금요일 아침이에요."
"그래. 누가 모르겠니."
"자. 그러면 생일준비도 금요일에 끝났겠죠."
새벽이 다리를 꼽니다. 근처를 지나던 바람에 새벽의 모자가 하느작댑니다. 무심코 답을 하려던 호연은 수상한 점을 찾습니다.
"일요일에 쓸 케이크를 금요일에 샀다고?"
"아니오. 금요일에 쓸 케이크를 금요일에 샀죠."
"네 생일이 원래 23일이었니?"
"아니오. 25일이 맞아요."
새벽이 키득댑니다. 이 이상 숨겨도 의미가 없을 비밀은, 믿을 만한 사람에게 털어놓는 편이 좋습니다. 호연이 마른 세수를 합니다.
"그런 거니. 아파트 근처에 있다가 사태가 터지자 급히 네 집까지 도망쳤구나."
"아니에요. 여명 형은 상가에 있었어요. 자기 집 근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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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5 13:12:22
ID : pU5e2LhBulg
0
"그러면 서둘러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 않나?"
"그러게요. 하지만 저희 아파트까지 왔죠. 게다가 제가 사는 5층에까지."
"너 때문에?"
"그건 아니었어요."
호연은 손을 내저어 새벽의 말을 우선 정지시킵니다. 길이 묘연하지만 자력으로 돌파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날 생일이던 사람과 여명이 찾으러 간 사람은 동일인?"
"맞아요."
"네가 받은 선물도 원래 네 것이 아니었고?"
"제게 선물할 요량으로 부탁한 선물도 있었지만, 저한테 와서는 안 됐죠."
"그렇다면 네 지인이구나. 네 생일 때 선물을 주려 했다면."
"그렇죠. 제 취미는 온전히 제 것이 아니니까요. 야구 정도면 몰라도. 특히 책을 수집하는 취미는 친구를 따라한 거였어요."
존재감 없이 옆 차문에 기대어있던 채하가 움찍댑니다. 호연이 시선을 채하에게 뺏깁니다. 새벽은 마음을 놓습니다. 이제 한가한 선문답에 시간을 뺏길 필요는 없겠지요.
"채하니."
"네."
새벽이 쓸쓸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축하를 받았어야 할 사람, 여명이 걱정스러워하며 도시를 가로지르게 했던 사람은, 지금 이전과는 완전히 단절된 모습으로 힘없이 누워있습니다. 꺠어난다고 하여도 사람들의 적의와 묻지 못한 책임을 받게되겠죠.
194
◆k62Le3U7xRu
2018/08/05 13:26:49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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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치면, 왜 연기를 했니."
호연은 먼저 물어놓고는, 또다시 손사래를 칩니다. 좋은 답을 얻기는 쉬워도 좋은 질문을 받는 것은 드문 경험이죠. 이 경험을 날리지 않기로 합니다.
"설기와 연화 같은 이유였나? 아는 사람들끼리 숙소를 쓰려고?"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새벽은 밑을 내려다봅니다. 맨바닥을 가리는 시트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스노우볼도 수레바퀴 아래서도, 채하를 위한 선물이었죠. 야구 물품은 채하가 제게 주려고 사달라고 부탁했던 거였죠."
새벽은 망설입니다. 하지만 여명은 더 이상 환상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겁니다. 채하가 찾아왔던 날 형제 연기를 끝내자고 부탁했으니까요. 새벽이 결심을 굳힙니다.
"여명에겐 동생이 있었어요. 구출되던 때 여동생이 없다고 말했으니 남동생일 거에요."
새벽이 말소리를 줄입니다. 행여 날카롭기라도 할까봐. 작다면 오래 남을지라도 상처를 입히지는 않으므로.
"자외선 팔찌는 동생이 만들었던 거였죠. 두 쌍을."
하나를 새벽의 생일날 그에게 주었습니다. 놀이공원에 오기 전부터 환상을 망치질하듯 만들어왔지요.
195
◆k62Le3U7xRu
2018/08/05 13:37:27
ID : pU5e2LhBulg
0
새벽은 사람을 떠올립니다. 동생 대신에 지인을 선택했던 사람을 떠올립니다. 실패하고 이웃집에 머물게 되었던 사람을 떠올립니다. 준비한 케이크와 선물을 엉뚱한 사람에게 허비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잃은 동생 대신 같이 사는 유일한 동거인을 동생이라 속였던 사람을 떠올립니다. 결국은 누구도 얻지 못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선물은 허비되었고 성과는 없었습니다.
호연은 이 사안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환상입니다. 물론 가끔 환상이 부족하다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 높은 시야를 가질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환상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환상입니다. 쓰러진 자를 대체할 더 많은 대체품, 잘려나간 나무 대신에 마주할 더 높다란 불뿐입니다.
호연은 동생이 거금으로 기타를 사놓고는 외치던 궤변을 떠올립니다. 피카소가 말하길 예술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깨닫게 하는 거짓이라 하였습니다. 거짓말쟁이였지만 길거리에서 불타던 모습만은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을 만큼 장광이던 아이였는데. 만일 자신도 동생이 사라진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질합니다. 숨을 들이쉽니다.
호연은 다리를 밖으로 돌립니다. 나가 앞문을 누르듯이 닫습니다. 새벽이 기대어 앉던 뒷문을 엽니다. 쓰러지던 새벽을 다시 차 안으로 밀어넣고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기운이 빠진 새벽이 허탈하게 웃습니다. 더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아직 새 거짓을 만들지 못했으므로.
"호연 누나. 뭐하나요."
"거짓말 잘한다. 우리 동생."
"여명 형 같은, 설기 같은 소리를 하네요."
새벽이 핀잔을 줍니다. 호연은 한껏 기지개를 펴며 교정 쪽을 바라봅니다.
"노을이가 2학년 1반 교실에서 기다린대.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가봐."
새벽은 사람이 있는 건물을 바라봅니다. 노을이 있습니다.
196
◆k62Le3U7xRu
2018/08/05 13:45:12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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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얘기를 지금 와서야 하시네요."
"중요한 애기를 전해듣기 위해서지."
"이렇게 될지도 몰랐으면서."
"새벽이 슬슬 자기 비밀을 말해줄 시간이 됐다 싶었어."
새벽이 뚱한 내색을 숨기지 않습니다. 몸을 이미 돌린 꼴이 토라진 것도 같습니다.
"진짜로요?"
"거짓인지 알아맞혀볼래?"
"쳇."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받은 새벽이 운동장을 박차며 계단을 향해 속도를 더합니다. 노을을 무감하게 대했던 잘못을 달래야 합니다.
사람들이 화단에서 손전등을 들고 수색중입니다. 좀비가 남지 않았나 확인하나 봅니다. 새벽은 그들을 지나쳐 정문으로 들어서려 합니다. 그때 누군가 운동장을 가로지릅니다. 호연입니다. 호연이 스탠드 부근에 있던 서장에게 무슨 의사를 전달합니다. 새벽이 멈추어 서장이 올라오기를 기다립니다.
일 층에 다다른 서장이 새벽을 포함한 사람들에게 방금 도착한 소식을 전합니다.
"채하 양이 일어났다는군."
"채하?"
"마녀."
몇 사람이 동시에 답합니다. 사람들이 운동장으로 서둘러 몰려갑니다. 서장은 모든 사람들이 빠지지 않도록 경찰들의 이름을 일일히 부르며 그들을 멈추어서게 합니다. 새벽은 밑을 내려다봅니다. 어두컴컴한 모래 사이에서, 사암과 같은 사람의 형태가 보입니다. 모자를 보아 틀림없이 채하입니다. 새벽은 위를 올려다봅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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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5 13:56:23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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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계단 위로 올라갑니다. 추격전을 할 때 달렸던 그 길로. 노을이 오늘에 와서야 처음으로 밟아보았을 계단으로. 창문에서 보면 운동장에서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복도에 다다르니 민기와 설기, 연화가 쓰러져 있습니다. 물을 나누어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새벽이 민기에게 무슨 일인지 묻습니다.
"안을 봐라." 말하고 민기가 쓰러집니다.
"너 때문이야."
설기가 말을 보태고 또 쓰러집니다. 유일하게 남은 연화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새벽에게 얼른 들어가보라 재촉합니다. 새벽은 창문이 가리어진 앞문을 엽니다.
의자입니다. 책상입니다. 늘어져 있는 대신 거대한 삼단 케이크처럼 쌓아올려져 있습니다. 새벽은 이것이 꿈에서 준비했던 노을의 생일파티와 유사한 광경임을 알아챕니다. 골격을 숨기던 형형색색의 요가 비록 지금은 없음에도. 노을은 그 맨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생일의 주인공이던 노을에게, 왕좌라고 말하며 앉혔던 자리입니다. 그러나 장식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지 올라선 노을은 친숙하고 위태해 보입니다.
"새벽 씨가 준비해줬던 그곳이야."
여명과 채하도 같이 힘을 썼지만요. 그리고 이번 것을 만든 사람들은 지금 복도에 거진 쓰러져 있지만요. 새벽이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노을은 자신의 깜짝파티가 성공한 것이 마음에 드는 눈치입니다. 교탁 위에 양초 두 개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노을의 기쁨이 환하게 전해집니다.
198
◆k62Le3U7xRu
2018/08/05 14:06:34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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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내 첫 예지몽을 말했지."
노을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차분히 포개고 있습니다. 교실의 가장 높은 곳에 앉은 노을은 신전의 사제처럼, 또는 그곳에서 타오르던 불처럼 보입니다. 새벽은 고대의 철학자가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신에 대한 모독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 신은 없다. 둘, 신은 우리에게 간섭하지 않는다.셋, 우리가 공물을 바치면 신은 반드시 들어준다. 새벽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느낌을 받습니다. 그 문장에 신이 아니라 사람 각자, 특정해서 노을이 들어가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 같습니다.
"관람차에서 언니와 내가 싸우는데 같이 있던 세 명이 모두 언니 편을 들었어. 담임선생님과 엄마와 새벽 씨가 모두. 주제는 이상했어. 언니가 누군가를 지칭할 때 '씨'를 절대 쓰지 말라는 거야. 난 반발했어. 나이가 들 때까지 그런 호칭은 안 쓰겠지만 금지하지는 말라고. 그런데 모두 언니 편을 들던 거야."
노을이 숨겼던 예지몽의 나머지 부분이 드러납니다. 새벽은 노을의 말투가 왜 그랬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노을이 웃습니다.
"언니한테 쌓인 것이 많았나봐. 그런 꿈을 꾸다니. 게다가 꿈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그래서 언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언니에게 투정을 많이 부린 것도 알겠지만, 언니는 캠프파이어에서 내가 화해를 요청할 때도 날 배신했어."
새벽은 답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비겁함을 알면서도 끼어들지 못합니다.
"왜 바뀌지 않을까."
"우리는 바꾸기 보다는 지키기 위한 존재니까?"
선문답의 꼴이 되었습니다. 해답을 찾지 못한 둘은 그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창문 밖으로 회색 연기가 피오르고 있습니다. 이 높이에서 불꽃놀이를 보았었지요.
199
◆k62Le3U7xRu
2018/08/05 14:16:36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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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간이 지났습니다. 기어코 정신을 차린 민기와 설기, 연화에게, 노을은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민기가 반발했습니다.
"우리는 요리사가 아냐."
"하지만 노을이 말하니 기꺼이 배워볼게." 연화가 답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건 겁쟁이지." 설기가 민기의 양어깨를 붙듭니다. 민기가 울상이 됩니다.
"너희들 나 괴롭히는 거지."
"아니야. 케이크잖아." 설기가 진지하게 말합니다. 구겨졌던 민기의 표정이 잠잠해집니다.
그동안 노을과 새벽은 떠돌며 사람들의 일을 거들었습니다. 교무실에 있을 때 연화가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나름 케이크를 완성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생일 잔치를 시작해야 합니다. 미루지 맙시다.
여명이 껐던 양초를 켭니다. 새벽, 노을, 여명, 민기, 호연, 설기, 연화, 모두가 교실에 모였습니다. 연기가 열린 문을 따라 복도로 흘러갑니다. 새벽은 눈을 감고도 발자국 소리를 느낍니다. 교실로 들어오는 채하의 소리를. 진행을 맡은 노을이 생일초를 꺼냅니다. 새벽이 자신의 생일잔치 이후 지금까지 챙겨놓았던 생일초입니다. 작은 초 여덟 개를 대칭으로 꼽습니다. 큰 초를 양초에 갖다댑니다. 모든 초에 불을 붙입니다.
200
◆k62Le3U7xRu
2018/08/05 14:20:36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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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박수를 칩니다. 여명이 박수를 칩니다. 노을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자고 지휘합니다. 여명은 노래 실력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내립니다. 작을 목소리가 벌써 눈에 선합니다. 노래가 시작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박채하.
생일..."
노래는 끝나지 못했습니다. 울음이 터진 여명이 나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문을 닫고 나갔습니다. 노을은 문을 다시 반쯤 엽니다. 축제를 계속합니다.
"생일 선물을 주어야겠죠?"
그러나 선물을 준비한 사람은 새벽뿐인가 봅니다. 새벽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스노볼을 꺼냅니다. 태엽을 감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빛이 나고, 오르골이 돌아가고, 눈이 내립니다. 그 작은 구 안에서. 내리는 눈이 뒤집힌 연기인 것만 같습니다. 모두가 잠시 침묵합니다. 불이 꺼지고 소리가 줄어든 뒤에야 노을이 환영합니다.
"언니. 축하해. 원래 언니가 받았어야 할 선물이야."
이미 호연과 새벽에게서 전말을 전해들은 노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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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62Le3U7xRu
2018/08/05 14:28:11
ID : pU5e2LhBu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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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잔치가 끝납니다. 참석자들이 조용히 교실을 떠났습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교문 앞의 바리케이드를 보강해야 합니다. 새벽과 노을은 책상 위에 걸터앉습니다. 왕좌의 맨 아랫단입니다. 불꽃놀이를 보았던 높이입니다.
케이크 위에는 생일초가 여전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작은 초는 수명을 다했습니다. 큰 초만이 타고 있습니다. 아직 소원 한 개가 남아있습니다. 저 초가 꺼지기 전에 저 초를 불어 끄면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바람이 초를 끌 때까지 기다립시다. 양초가 타 생긴 기운만이 바람의 방향을 알립니다.
새벽과 노을은 꾸준히 교탁을 바라봅니다. 너무 조용하다 싶으면 태엽을 돌립니다. 닫힌 세계, 밖으로 나오지 않을 세계가 변합니다. 빛이 주위를 둘러쌉니다. 꺼지기 전까지 둘러쌉니다. 꺼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노볼 안의 눈사람은 유리가 깨지지 않는 이상 모래 같은 눈만을 알고 살 것입니다.
오르골 소리에 의존해도 너무 조용할 때면 화제를 꺼내듭니다. 새벽은 아우구스틴 동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염병 속에서도 살아남은 시인의 동상입니다. 강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속에서 군수물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둘은 행복한 동상의 결말에 대해 이야기를 짓습니다. 이번에는 사암으로 만들어져 해체되지 않을 거라고, 사실 군수물자가 아니라 한 직업인의 칼이 되었다고, 사실 레지스탕스의 총이 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고. 그러나 무엇이 사실일지는 모릅니다.
아직 반쯤 닫아놓았던 뒷문이 벌컥 열립니다. 새벽과 노을이 놀라 몸을 돌립니다. 호연입니다.
"일하러 가야지."
태연하게 말했던 호연이 앞을 봅니다. 양초가 꺼지지 않은 것을 봅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호연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드나들 길을 열어두기를 잊지 않습니다.
"아직 시간이 안 됐구나. 좀만 더 있어."
나가는 호연은 얼굴을 고의로 숨깁니다. 노을이 바닥을 내려다봅니다. 노을의 얼굴에 그늘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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