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19/05/19 00:01:32 ID : uoLbyINBzdV 0
편지씀
2 이름없음 2019/05/19 00:03:19 ID : uoLbyINBzdV 0
엄마가 경량 패딩을 입은 모습을 보고 웃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름의 문턱에 다다른 모양입니다. 얇은 와이셔츠(저는 아직도 와이셔츠와 남방의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남방의 어원이 남쪽 지방 사람들이 입는 옷이라는 게 정말인가요?)를 입을지, 반팔 티셔츠를 입을지 고민하다가 후자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실내는 에어컨을 틀어둘 테니 가디건을 한 장 챙겼구요. 아침밥으로 엊그제 남겼던 스콘 반쪽을 먹었는데도 어중간하게 배가 고팠기 때문에 카페 근처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를 사기로 결심하고 아파트를 나섰습니다. 그리고 잠깐 멈춰섰습니다. 선크림을 발랐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저는 칠 팔월에도 선크림 바르기를 게을리 하고, 피부가 타는 것보다 아파트 엘레베이터를 타는 게 더 싫은 사람이었으므로 그냥 갈 길을 갔습니다. 손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대고 후다닥 걸어가는데 날이 제법 더워서 우울해졌어요. 해가 거리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채우고 이따금씩 흔들리는 이파리들은 색이 잔뜩 진해져서 봄철의 그 나무들과는 생판 달라 보였던 데다가 음지와 양지의 경계가 유난히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여름은 늘 그래요. 글이나 영상물로 보면 사계절 중 가장 생생하고 아름다운데 실상은 자외선 때문에 따끔거리는 피부와 부자유한 겨드랑이만이 존재하고… 데오드란트를 빨리 사야 하는데, 드럭 스토어 월말 세일이 유난히 멀게 느껴집니다. 여름에 생기는 나무그늘은 좋아해요. 편의점에서 초콜릿이 든 찹쌀떡(천 팔백원이나 주고 샀는데 고작 세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먹지 마세요.)을 산 다음에 들어간 카페는 기대했던 것만큼 쌀쌀해서 기분좋게 가디건을 걸쳤습니다. 저는 더운 날 추운 실내에서 옷을 여러겹 입는 걸 즐깁니다. 저 세 가지 요소 중 단 하나도 빠져서는 안됩니다. 기억해주세요. …사실 기억 안 해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를 시킨 다음에 밀린 책을 읽었습니다. 읽었다기보다는 봤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올해 들어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정도가 심했습니다. 끝까지 다 읽기는 했지만 머리에 남은 건 없다시피 했으니 공연히 시간만 낭비한 셈입니다. 그치만 제대로 읽었다고 해서 그게 시간낭비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저는 독서에 회의적이고 스스로에게 관대합니다. 좋아하는 문장 몇 개를 베껴 쓰고 요약 과제가 있는 책도 간신히 읽고나니 슬슬 카페가 지겨워져서 귀가했습니다. 삼각 김밥 하나랑 컵누들, 과자 한 봉지까지 사들고 와서 혼자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컵누들 따위에 돈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냥 진라면이나 먹을 걸 그랬어요. 집에서 보내는 낮 동안에는 늘 노래를 듣는 편입니다. 플레이 리스트에 있는 음악들은 하도 들어서 슬슬 질리지만 올해까지는 크게 변화가 없을 것 같아요. 웬만하면 삭제도 안 하고 새 곡을 듣지도 않는데, 오늘은 어쩌다가 몇 개를 듣게 돼서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네 곡을 추가했습니다. 자잘하게 일이 많았던 하루여서 쓸 말이 적지 않습니다. 적은 건 제 집중력의 총량 뿐. 고질적인 게으름과 알러지가 도져서 지금도 입 주변이 계속 따끔거려요(게으름과 알러지가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신다면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알러지 검사를 언제 한 번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일단 지금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약 먹기 싫으니까……. 왜 성인용 가루약이나 물약은 보편화되지 않는 걸까요? 전세계에서 알약을 못 먹는 게 저만은 아닐 텐데요. 고등학교 때 이과를 가서 약학을 전공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결론적으로 저는 또 쓸모없이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니 내일도 그렇겠지요. 아마 죽으면 나태 지옥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제 남은 책을 마저 읽고 공부하는 시늉을 좀 해볼까 합니다. 그리고 우울하게 잠들 거예요. 내일은 단호박 샐러드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한 조각 위안이 됩니다.
3 이름없음 2019/05/25 00:06:44 ID : uoLbyINBzdV 0
비 오는 날 냄새가 유난히 진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공기 중의 수분 때문이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저는 이걸 초등학교 n학년 때 영재반 수업을 대비하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곳에 왜 가게 된 건지도 기억이 잘 안 나요. 추측해보건대 아마 그 나이에도 결코 적지 않았을 제 지적 허영 때문일 겁니다. 이상한 과학 논술 문제집까지 사서 공부를 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저는 이과적 학문에 젬병이었으므로… 별로 효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왜 붙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 수업은 관내 전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라 익숙한 얼굴보다 낯선 얼굴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프로 외향인이었던 당시의 제게는 애들 사이에 녹아드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그중 어떤 여자애와는 정말 제 인생에 다시 없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는데, 음, 이 애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 제게 안 좋게 작용했는지에 대해 떠올리니 갑자기 기분이 처참해지네요. 화제를 돌리겠습니다. 문제는 같은 학교를 다니던 남자애들이었습니다. 삼십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었는데도 성비가 몹시 극단적이어서 조별 수업을 할 때면 남자애들이 과반일 수밖에 없었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꼭 같은 학교 애들끼리만 짝을 지어줬어요. 저희 학교에서는 저만이 여자애였고, 그 애들은 저를 정말 싫어했어요. 아니, 몇 명만 싫어했나? 두 명 정도랑은 그래도 같이 수다를 떨었던 것 같기도 한데… 제가 기억을 왜곡시켰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간에, 그중에서도 파란 안경테(얼마나 충격이었으면 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김새가 기억이 납니다)를 쓴 키 작은 녀석이 극성이었어요. 참다참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고 울면서 묻기도 했었습니다. 그 애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때 저는 그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각종 인간관계가 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시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비관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 것 같네요…….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는데……. 늘 말을 하다보면 생각한 것보다 길어지곤 합니다. 애초에 무슨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서 말문을 트는 유형이 아니어서요. 대화가 갑자기 산으로 바다로 가는 건 제게는 익숙한 일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익숙해지세요.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이런 일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감정을 논리로 풀어내는 능력이 굉장히 부족하다는 걸 체감하게 된 일이 오늘 하나 있었습니다만 굳이 풀지는 않겠습니다. 기록으로 남기면 잊어버리기가 어려워서요. 저는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방법을 제법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덕분에 흑역사는 이맘때가 아니면 잘 떠올리지 않을 수 있어요. 요즘은 매일이 힘드네요. 비 오는 날 향수 냄새가 멀리까지 퍼지고, 천둥과 번개의 시간 차를 가지고 거리를 가늠하는 일 따위가 제일 고민이었던 시기가 미친듯이 그립고 안타까워요. 뭔가를 좀 더 배울 수 있었을 텐데요. 그렇게 동굴 속으로만 파고들지 않고 주변에서 저를 충분히 기꺼워하던 사람들을 사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 저는 왜 그렇게 그 모든 걸 흘려보내고 내쳤던 걸까요. 가장 슬픈 건 미래의 제가 현재의 저를 위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든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매일 후회하고 매일 더 나은 미래를 그리면서 사는데 세상은 도통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해가 뜨겁다 못해 따가운 날씨가 계속되네요. 비가 내리면 좋겠어요. 기왕이면 제가 학교를 안 가는 날에. 습기 찬 아침 버스는 최악이니까… 저 지금 자체 휴강도 못하거든요. 한 번만 더 하면 재수강인데 비 오는 날 아침 버스를 탈 바에야 재수강을 하겠어요. 당신은 매일 출근하지만 비 좋아하잖아요. 저도 비를 좋아했는데, 당신이 비를 좋아해서 이제는 싫습니다. 저는 우울하지만 당신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많이는 말고 조금만…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남겨놓은 선에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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