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19/12/05 18:12:50 ID : tBy2MmHAY9y 0
사실 작년 이맘때쯤에 꾼 꿈인데 꿈일기 비슷하게 끄적여둔 거 뒤적이다 보니까 생각나서 얘기하고 싶당ㅎㅎ 생략된게 많아서 길진 않어 그냥 혼자 천천히 쓸게 일단 시작은 세계를 이루는 세 명의 신이 있었어 자세히 안 써 있는데 내 기억으로는 아마 바다, 태양, 바람이었던 것 같아 바다의 신은 여신이었고 나머지 둘은 남신이었어 나는 그 신들과 진짜 친한 사이였던 듯 해 쓴 것도 그렇고 기억도 그렇고 신들이 아니라 약간 친구처럼 '그 애들'이라고 기억하거든
2 이름없음 2019/12/05 18:20:26 ID : tBy2MmHAY9y 0
나는 세계가 텅 비었을 적부터 존재했어 그러니까 그 애들이 세계를 만들고 생명을 불어넣은지 얼마 되지 않을 때부터 나도 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이었어 원래 신들은 보통 세계에 직접 내려와서 간섭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신들도 자주 밑에 왕래를 했기 때문에 나도 신들을 만날 수 있었어 만나면 만날 수록 나는 세계를 좀 더 채우려는 신들의 노력이 마음에 들었고 신들을 응원하고 도와주려는 나도 신들의 마음에 들게 됐어 그래서 어느 날은 혹시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냐고 물어봤지 걔네도 내가 처음으로 마음에 든 인간이니까 뭔지 궁금했나봐 나는 이 세계와 너희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 세계와 함께 죽고 싶으니 나를 이 세계에 계속 남겨주면 안되냐고 했고 그 애들은 수락했어 나중에야 알았지만 결론적으론 반복되는 환생을 겪게 됐지
3 이름없음 2019/12/05 18:29:12 ID : tBy2MmHAY9y 0
세기가 지나갈 수록 신들과의 왕래는 줄었지만 나는 태어나고 죽는 걸 반복했어 그 약간 배경이 판타지였어서 마법이란게 있는 곳이었거든 여자로 태어나고 남자로 태어나고 예언자로 태어나고 주술사로 태어나면서 같고 다른 생을 지냈지 그렇게 수십 세기가 지날 수록 시간에 대한 감각은 무뎌지고 지난 몇 천년의 기억은 지워지지도 않고 쌓이고 있지만 난 영원한 시간에 지치거나 질리기는 커녕 더 집착하기 시작했어
4 이름없음 2019/12/05 18:41:02 ID : tBy2MmHAY9y 0
나는 그 세계를 너무 사랑했어 사실은 점점 미쳐가고 있었지 더 이상 자아가 인간의 것이 아니었어 점차 내가 신과 동격이라는 생각이 강해져갔어 그도 그럴게 신들의 배려로 나는 항상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을 만한 나이로 태어났어 그리고 늘 막강한 힘도 가지고 있어서 무서울게 하나도 없었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에 대한 자만심에 빠졌고 모든 이를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했어 모든 걸 가질 수 있었지만 찰나의 존재들이 누릴 그 아름다움이 부러웠거든 난 세계의 아름다움을 잊은 지 오래라 뭔가를 아름답게 바라볼 수도 없었어 나는 늘 세계를 돕기 위해 살아갔지만 그렇게 몇 세기를 의미없게 보냈어 또 다시 태어난 그 당시 나는 정점에 있는 젊은 마법사였어 어느 날은 갑자기 나 혼자 사는 집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나한테 뭐라고 했어 아마 제자로 받아달라고 한 것 같아 거절했는진 기억 못하지만 그 기점으로 가끔 나를 찬양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어 나를 거의 숭배하려는 사람들을 보니까 갑자기 기분이 좋은 거야 지금 이 사람들은 그 세 명의 신보다 나를 떠받들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어 어쩌면 그 애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5 이름없음 2019/12/05 18:56:36 ID : tBy2MmHAY9y 0
그래서 내 밑으로 사람들을 모았어 나는 눈에 띄게 사람들을 위기로부터 구해주고 심할 때는 병 주고 약 주고 자작극도 했지 내 존재에 의심을 품는 사람도 몇 죽였어 사람을 죽이는 건 처음이었지만 물론 몰래했어 그러는 사이에 내 추종자들이 늘어났어 지금 생각하면 거의 사이비 교주 같은 느낌이지만.. 어쨌든 그 동안 나도 나이가 들었지 여잔지 남잔진 기억 안 나지만 아무튼 현자님 소리를 들을 만큼 늙었던 것 같아 내 안의 현자님은 왠지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 느낌이라..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내 사후에 대한 주제가 나왔던 것 같아 내가 죽어도 내 명성은 온 세계가 알 것이다 대충 그런 거 그래서 갑자기 마음이 덜컥했어 나는 죽어도 죽는게 아니지만 내가 죽어버리면 이 사람들은 나를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 다시 태어나서 내가 그 현자의 환생입니다 이래도 안 믿을 거 아냐? 추종자들이 많은 동안 진짜 신이 된 기분이었는데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았어 다시 평범한 인간 같은 게 되고 싶지 않았어 그때부터 나는 신의 친구라고 떠들고 다녔어 나는 그들의 벗이고 나도 신과 다름없다고 나도 영겁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그랬어 사람들 눈에는 늙어서 노망난 것 처럼 보였겠지 그래서 사람들을 모았어 광장같은 곳에 최대한 많은 내 추종자(이때쯤엔 거의 신자 수준이었어)들을 모아서 나는 잘 보이는 곳에 섰지 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어 곧 신이 되어서 돌아올 거니 잘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살했어 어떻게 죽었는진 기억이 안 나 대충 머리가 떨어진 것 같아
6 이름없음 2019/12/05 19:01:31 ID : 47BwFh9jzbz 0
꿈 한번 스펙타클 하네..ㄷㄷㄷ
7 이름없음 2019/12/05 19:04:33 ID : k6ZinU1BdRB 0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신되면 개꿀잼이겠다
8 이름없음 2019/12/05 19:09:53 ID : tBy2MmHAY9y 0
나는 늘 죽어 다시 태어날 때는 신들을 거쳤어 다음 삶에서 원하는 환경 같은 게 있는지 물어보고 선처해줬거든 근데 내가 더 이상 원하는게 없어서 대충 알아서 해달라고 하고 몇 세기 정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어 아무튼 나는 바다의 여신을 찾아갔어 이름도 있었던 거 같은데 안 써놔서 모르겠네.. 나는 바다의 신에게 가서 다짜고짜 나를 빠른 시일 내에 태어나게 해줄 수 있느냐고 했어 다음 생의 시작은 랜덤이라 몇 세기가 지난 후일 수도 있거든 난 바다의 신에게만 얘기했어 사실 죽은 후에야 머리가 좀 차가워져서 신에게 이길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거든 나는 바다의 신과 가장 친했어 세계의 초창기부터 서로 가장 신뢰했지 그래서 내 부탁이라면 들어줄 것 같았어 여담인데 꿈에서 그 애를 파란머리 예쁜 언니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니 알맹이는 그냥 나였던 듯 해..ㅋㅋ
9 이름없음 2019/12/05 19:24:01 ID : tBy2MmHAY9y 0
그 애는 아마 내 삶을 계속 보고 있었을 거야 태양의 신과 바람의 신은 세계를 구축하고 빈 부분을 메꾸느라 바빴지만 바다의 신의 역할은 바다답게 살아가는 생명들을 보살피는 거였어 대충 유치원 자유시간에 원생들이 노는 거 구경하는 느낌으로 말이지 시간이 빌 때는 언제나 나를 보고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나는 진짜 앞뒤 생각이 없었어 그 애랑 대화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몇십년씩 지나가서 나는 말년에 노망이 나 미쳐버린 마법사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거든 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내 입으로 전부 말했어 그 사람들에게 내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늦게 된다면 나는 전부 잃을거야 이런 말을 했지.. 나는 사람들에게 내 특권에 말해본 적도 없었고 자살을 한 적도 없었어 나와 신들과의 암묵적인 약속이었을거라 생각해 모처럼 영원히 사는데 자살할 이유도 없으니까 뭐.. 모든 게 처음이었지만 순식간에 일어났지 짐작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간과했던 건 그 애였어 그 애는 바다의 신이고 생명을 돌보는 것이 그 애의 일이지 그 아이는 생명의 신이었고 나는 그 아이를 위해 그 애가 사랑하는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기로 다짐했었던 걸 잊고 있었어 그 옛날 누구도 몰래 둘이서 했던 약속이야 태양의 신과 바람의 신은 인간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어 그냥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중간 재료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 애는 인간을 사랑했고 나도 그 아이에게서 태어난 존재야 그리고 그 애가 사랑했던 인간들을 몇이나 죽여버렸다는 걸 깨닫지 못했어
10 이름없음 2019/12/05 19:25:30 ID : tBy2MmHAY9y 0
그치? 나 꿈에서 깨고 한 동안 헤어나오질 못했서ㅋㅋㅋㅋㅋ 마자 그럼 재밌었을텐데 결론적으론 신이 되지도 못함ㅋㅋ큐ㅜ
11 이름없음 2019/12/05 19:45:36 ID : tBy2MmHAY9y 0
바다의 신은 내가 횡설수설하는 걸 가만히 듣다가 말을 끝맺자 살며시 웃었어 그 애는 종종 알겠다는 대답 대신에 예쁘게 웃곤 해서 나는 됐다 이제 거의 다 됐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애의 웃음이 갑자기 무너지는 거야 정말로 본 적 없는 싸늘한 얼굴로 나를 내려봤어 그래서 어라? 저렇게 높이 앉아있었던가? 같은 느낌이 들었어 정말 세상에 없을 차가움이었어 생기 가득했던 눈동자가 돌이 되어서 날 쳐다보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지 바다의 신이 말했어 너를 내 아우라 생각하고 좋아하고 아꼈지만 이런 마지막이라니 심히 아쉽고 안타깝구나 같은 대사였다고 생각해 나는 그 전까지 인간도 신도 될 수 없다는 두려움에 잡혀있었어서 내 힘을 인간들에게 보여줄 생각에 머리가 안 돌아가서 마지막? 무슨 소리지? 이러고 멍청하게 서 있는데 그 애가 손을 들어 나를 가리키는 걸 마지막으로 갑자기 정신이 차려졌어 숲이었어 앞에 바다의 신은 없었고 나는 8살 남짓 어린 꼬마 남자아이였어 나는 놀랐어 나는 늘 성인이거나 성인에 가까운 나이로 태어나서 이제껏 어린아이로 태어나 본 적이 없었거든.. 엄청나게 당황했지 그리고 직감적으로 내가 있던 세계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어 나는 마법도 쓸 수 없었고 예언도 할 수 없었고 몸이 날쌔거나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었어 그냥 평범한 남자애였던 거야 진짜 너무너무 무서웠어 더군다나 숲 속에서 길도 몰랐으니까 걷고 걷고 걸어도 똑같은 길이고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서 해가 지는 중이었어 나는 그 짧은 시간에 의지도 용기도 삶에 대한 미련도 전부 잃어버려서 거의 텅 빈 사람이 돼서 숲 한 가운데에 그냥 멍하니 서 있었어 해가 거의 져 가자 풀 숲에서 곰인지 늑대인지 엄청나게 커다란 동물에게 습격받아 죽어버리면서 신은 되고 싶지 않아 다시 인간이 되고 싶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써 있는게 마지막이야 꿈은 이렇게 끝 누구든 읽어주면 그냥 고마워ㅎㅎ 꿈은 당사자는 이해되지만 개연성이 부족한 곳이 있으니까 꿈일기 쓴 걸 바탕으로 중간이 없는 부분들을 내가 살짝 메꿔서 10% 정도는 보완한 거야 그러니까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아 아직도 가끔 그 꿈에 대해서 생각나는데 꽤 기분이 오묘해 바다의 신을 다시 만나면 사과해야지.. :3
12 이름없음 2019/12/05 19:49:35 ID : 9beE4GmoK7A 0
재밌게 읽었당!! 신화에 나오는 권선징악 스토리 느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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