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창작소설판 잡담 스레 2☆☆ (464)
2.청춘은 켜켜이 쌓인 하루하루의 잔상이라고 (27)
3.일상에서 문득 생각난 문구 써보는 스레 (724)
4.If you take these Pieces (487)
5.글 잘 안 쓰는 소재구걸주 (61)
6.이름 남기고 가면 간단한 분위기 대답해주기 (214)
7.ㄱ부터 ㅎ까지 좋아하는 단어 적는 스레 (103)
8.생각난 소설의 개요만 쓰고 가는 스레 (2)
9.나 로판식 제목짓기 잘함 (31)
10.요즘 글 쓰다가 문득 든 생각인데 (1)
11.홀수스레가 단어 세 개를 제시하면 짝수가 글 써보자! (705)
12.✨🌃통합✨ 질문스레(일회성 스레 말고 여기!!!!!!!)🌌 (219)
13.네 홍차에 독을 탔어 (208)
14.내가 작가가 된다면 쓰고 싶은 대사 혹은 문장 (89)
15.요즘 릴레이 소설이 너무 하고 싶은데 (4)
16.제일 쓰기 어려운 게 bl 빙의물인듯 (4)
17.다들 캐릭터 이름 만들때 쓰는 방법있어? (33)
18.:D (64)
19.다치거나 아픈 사람 묘사 (2)
20.소설 써보고싶다 (1)
다른 사이트에서 꾸금으로 연재하고 있는데 스레딕에서 15금으로 남겨보려고.
"우리 세계에서 사랑은 그 누구도 감당 할 수 없는 약점이야. 그런데 상관없어. 널 사랑하는건 내 인생에서 하나 남은 순수한 감정이니까"
시카고와 뉴욕, 두 마피아 가문을 잇는 정략결혼.
코라 라일리의 미국 마피아 소설 시리즈 '바운드 바이 블러드 마피아 크로니클' 을 한국어로 번역? 재해석? 해보았습니다.
캐릭터와 큼지막한 사건들은 온전한 저의 창작물이 아닙니다.
1권의 원작 제목은 '바운드 바이 아너' (Bound by Honor) 입니다.
등장인물
등장인물
스쿠데리 가문 (시카고 마피아):
우두머리 엔조 스쿠데리
첫째 아리아 스쿠데리
둘째 지아나 스쿠데리
셋째 릴리아나 스쿠데리
막내 파비아노 스쿠데리
비티엘로 가문 (뉴욕 마피아):
우두머리 살바토레 비티엘로
첫째 루카 비티엘로
둘째 마테오 비티엘로
막내 라페엘 비티엘로
1.
"머리 좀 돌려봐"
아리아가 제 무릎에 머리를 베고 있는 릴리에게 중얼거렸다. 릴리의 긴 백금발 머리카락이 아리아의 무릎을 간지럽혔다.
"....."
얼마나 눈감고 누워 있었다고, 릴리는 벌써 새근새근 자고 있는 듯했다.
잠시동안 동생 릴리의 평화로운 얼굴을 지켜보던 아리아는 고개를 들어 통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보편적인 시카고의 우중충한 하늘이 아리아의 마음을 묘하게 달래주었다.
어차피 경호원 엄베르토와 부모님의 아니꼬운 눈초리 없이는 자유롭게 밖에도 못나가는데, 햇빛이 밝은 화창한 날보다는 차라리 우중충한게 나았다. 조용히 멍때리고 있던 아리아의 적막은 얼마 안가 지안나에 의해 꺠졌다.
"언니! 언니!"
다급한 지안나의 부름에 아리아가 릴리를 까맣게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무슨일이야?"
"아 뭐야... 내 머리..."
잠에서 막 깬 릴리가 불평했다.
"아 씨 릴리, 분위기 파악 좀 해봐. 언니, 아빠가 서재로 불러. 아마 진짜 이번엔 진행하실 생각인가봐... 엄청 단호해! 어떡해..."
아리아는 단번에 지안나가 뭘 뜻하는지 알았다. 작년부터 아리아의 정략 결혼 얘기가 오고갔음에도 아직까지 실행이 안된 이유는 엄마의 굳센 반대와 아리아가 아직 21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난달 4월, 절망적인 21번쨰 생일을 맞은 아리아는 진작 체념하고 있었다.
"지안나 언니, 무슨 말이야? 언니 진짜 팔려가는거야?"
놀란 릴리의 언니가 팔려가냐는 순수한 질문이 아리아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결혼보다는 계약, 또는 매매가 이 정햑결혼의 정확한 속뜻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시카고 마피아 카포 (capo; 마피아 조직의 우두머리) 의 첫째딸로서 정략결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아빠만 원한다면 그 누구도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아리아는 쓴웃음을 보이며 용감하게 라운지의 문쪽으로 걸어갔다.
"걱정하지마. 다 괜찮을거야. 아빠랑 이야기하고 올게. 너희는 엿들을 생각 하지 말고 여기 조용히 있어, 알겠지?"
최대한 태연하고 대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종래에는 목소리가 떨리는걸 아리아도 막을 수 없었다. 지안나와 릴리는 진지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평소의 장난기를 죽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운지 문을 닫고 아빠의 서재로 내려가는동안 아리아의 머릿속은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미래의 남편이 될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스쿠데리 가문 장녀인 본인의 처지에 대한 억울함까지 아리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마침내 서재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적갈색 나무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아리아의 아빠는 심란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등받이에 기대었다.
"....."
방 안으로 들어온 아리아가 말이 없자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나도 딱히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치만 너도 알잖니, 이정도면 불평할 수도 없이 괜찮은 상대라는거."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빠 엔조의 눈에는 정작 죄책감따위 없었다. 그가 말하는 결혼 상대는 뉴욕 마피아 카포의 첫째 아들 루카 비티엘로를 뜻했다. 그리고 아빠 말이 맞았다. 아리아가 본 주변 여자들의 정략결혼 상대는 으레 마흔은 넘은 배나온 마피아 고위 멤버들이었고 이들은 가문 여자들이 갓 스무살이 되었을 때 그녀들을 쏙쏙 채갔다. 먼저 결혼한 사촌언니 니나와 리비아의 정략 결혼 상대들도 그랬다.
사실 아리아는 18살때부터 루카가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양쪽 부모님들은 정략결혼을 고려하고 있었고 모든 사교 행사마다 마주치게끔 했기 때문이다. 루카는 그때부터 매년 생일이나 연말마다 다이아몬드 귀걸이나 가라반니 드레스 같은 사치스러운 선물을 보내왔다.
그때만 해도 루카와의 정략결혼은 아주 먼 미래같이 느껴졌었는데... 부모님도 크게 재촉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러시아의 브라트바 (bratva; 러시아 쪽 마피아) 와 아일랜드 마피아가 계속해 무력으로 두 가족을 압박해 오니 양쪽 아빠들도 마음이 급해졌나 보다. 두 마피아 조직은 결혼으로 연을 맺고 힘을 합쳐 권력을 지킬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건 알아요 근데... 굳이 루카랑 결혼 해야만 동맹을 맺을 수 있는건-"
"나도 알아. 그치만 살바토레 비티엘로가 우리가 그들의 가족이 되지 못하면 우리를 신뢰할 수 없다는 분위기야.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바다. 그간 우리 관계가 그렇게 평탄했던 것도 아니고."
야속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루카의 아빠 살바토레 비티엘로는 엔조보다 훨씬 더 험악하고 차가운, 늙은 마피아 양반이었다. 그간 두 가문 사이에 작고 큰 전투와 전쟁이 있었던건 사실이지만 살바토레는 마음만 먹으면 시카고 마피아를 통째로 삼킬 힘이 있었다.
"다음주 브런치에 공식적인 상견례가 있을 테니 그렇게 알고 있고, 들어가 봐. 동생들한테 괜한 말 하지 말고."
엔조는 할말이 끝나자 다시 눈앞에 있던 서류로 눈을 옮겼다. 아리아는 예쁜 여자가 널리고 널린 가문에서 왜 살바토레와 루카가 본인을 원한건지, 결혼 날짜는 언제가 될 건지 등 쏟아지는 의문을 뒤로하고 창백해진 몸을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라운지로 이끌었다.
2.
다시금 문을 열고 들어간 라운지 안에는 막내 남동생 파비아노도 합류해 있었다.
"파비아노! 9신데 얼른 자야지 여기서 뭐하는거야! 너희가 파비아노 깨웠지? 너희 정말..."
아리아는 7살짜리 파비아노를 쓱 들어 방으로 다시 데려다 놓으려 계단으로 향했다. 아리아의 발걸음을 멈춘 건 릴리의 슬픈 목소리였다.
"언니... 미안... 우리가 파비아노한테도 말했어."
"그래서 어떻게 된거야? 아빠가 보낸대? 얼른 말해봐 얼른. 루카 그놈한테 가는거 맞지?"
지안나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흘렸다. 어쩜 첫마디부터 저렇게 성격이 잘 드러나서... 큰 숨을 들이쉬고 아리아는 말을 꺼냈다.
"그래.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아... 다음주 가족 브런치에 비티엘로 가문을 불러서 상견례를 하겠대."
"상견래가 뭐야? 우리도 갈 수 있어?"
파비아노가 물었다.
"상견'례'. 그리고 안돼. 어른들만 오는 자리야."
릴리가 대꾸했다.
"릴리 너도 16살밖에 안됐으면서. 내가 혼자 가서 아리아 언니 지킬 수 있으니까 너도 빠져 있어."
"지안나 너는-"
"언니라고 부르라니까?"
"그만!" 아리아가 고개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안그래도 머리 아프단 말이야. 나도 자세한건 몰라, 아무리 첫째라도 아빠가 우리한테 중요한 사항 전달한적 있었니?
아리아의 말에 순식간에 라운지가 조용해졌다.
"파비아노, 너는 얼른 들어가서 자. 누나 지켜주려면 잠을 충분히 자 놓아야지."
자매들끼리 얘기하기 위해 파비아노를 올려보내고 난 뒤, 지아나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억울해. 처음은 언니겠지만 그 다음 결혼하는건 내가 될 거잖아. 그 다음은 릴리.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이렇게 갇혀 지내야 하는데. 난 어른이 되면 도망부터 갈거야."
지안나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뭐든 말부터 하고 보는 당당한 톰보이. 아리아는 가끔 그런 지안나가 대단하게 느껴지면서도 부러웠다.
"너희도 어쩔 수 없는 일인거 알잖아. 나도 이미 받아들였는데 너희가 왜 그래, 누구 하나 죽는것도 아니고. 나 괜찮아."
"...언니가 결혼해 버리면 우리랑 떨어지는 거잖아. 난 싫어."
릴리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대답했다.
"주말에 보러 오면 되지, 그리고 결혼하면 엄베르토가 아니라 남편의 보호 아래 있을 거니까 더 자유로울 걸? 그럼 우리 주말마다 놀러 가자. 셋이서."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경호원 엄베르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파비아노 누가 깨우래. 너희가 그러면 혼나는건 나야."
"엄베르토 아저씨!"
엄베르토는 아리아가 태어났을 때부터 스쿠데리 남매를 경호한, 엔조가 가장 믿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덕분에 남매는 가끔 엄베르토가 엔조보다 더 아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엄베르토 아저씨, 루카 비티엘로 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는 거 없어요?"
지안나의 질문에 엄베르토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말해주세요." 아리아의 침착한 부탁에 엄베르토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15살에 메이드 맨이 된 (made man; 이탈리아계 마피아 가문의 정식 일원이 된. 메이드 맨이 되려면 대부분 누군가를 죽이거나 조직 내에서 특별한 선서를 해야한다) 무서운 사람이지, 그 인간은... 그때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어. 단도 하나로."
"그래도 아리아, 걱정하지 마라. 본인 가족은 절대적으로 지키는 사람이니까."
"그게 어떻게 안심이 되는 소리에요!"
지안나의 언성을 배경으로 아리아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15살에 사람을 죽인... 과거에 보았던 루카의 차가운 회갈색 눈동자가 언뜻 떠올랐다. 뉴욕 마피아 카포의 후계자로서 잔혹하고 무서운 남자라는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엄베르토의 말로 갑자기 모든게 실감이 났다. 냉혈한 킬러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 가족들과 떨어져 평생 그의 말에 고분고분 순종하면서, 첫키스부터 순결, 후계자까지 바쳐야 한다.
동생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애써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흑... 흐윽..."
모든게 야속했다. 벗어날 수 없는 이딴 숨막히는 마피아 가문에 태어난 것도, 하필 여자라서 정략 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만 아빠한테 들으며 평생을 숨졸이며 살아야 하는 것도.
엄베르토는 원칙상 남매의 몸에 손 하나 댈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 옆을 꿋꿋히 지키는 엄베르토의 눈에는 진심어린 위함이 끼쳐 있었다.
"언니..!"
세 자매는 서로를 껴안고 같이 울기 시작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지안나가 결심이라도 한 듯 눈을 치켜떴다.
"우리 나가자. 셋이 다 같이 마지막으로 시카고 거리를 활보하는거야. 함께하는 마지막 금요일이잖아. 나 바에 갈래."
"상견례가 다음주인거지 결혼식은 언젠지 모른다고! 안 돼. 릴리는 미성년자고 너도 아직 21살 안됐잖아*." (미국은 만 21살부터 음주를 할 수 있다.)
"아리아 언니, 우리는 마피아 가족의 일원이야. 마피아가 하는 일에 비하면 미성년자 음주는 불법 축에도 못 껴. 엄베르토 아저씨!"
지안나가 라운지를 나간 엄베르토를 크게 불렀다.
"버크셔 룸 (시카고의 업스케일 바/라운지) 으로 데려다 줘요!"
3.
세 자매를 태운 리무진은 머지않아 밤이 되어 형형색색의 불빛이 드리운 골목 앞 로비에 멈췄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아리아, 지안나, 릴리는 평소와 다르게 한껏 꾸민 차림으로, 짧은 치마떄문에 다소곳이 무릎과 손을 모으고 있었다. 어렸을때부터 자매를 봐왔던 엄베르토는 그 모습에 픽 웃음이 났다.
진중한 얼굴로 자매를 리무진에서 내리는걸 도와준 뒤 엄베르토가 그들을 따라가려고 하자, 지안나가 그를 막아섰다.
"오늘 하룻밤만요? 네? 새벽 1시 전까진 올게요. 칵테일 한잔만 마시고 약은 근처에도 안가고..."
"새벽 1시? 제정신이야? 아리아 결혼 소식때문에 서운한건 알겠지만 너무 위험해. 안돼."
엄베르토가 반문했다. 시카고 밖에 있는 바도 아니고 버크셔 플레이스에는 자매들을 알아볼만한 고위층 사람들이 다분했다.
그때, 아리아가 엄베르토의 등을 톡톡 쳐 원피스 자락을 걷었다.
허벅지 위쪽애 채워진 가터벨트 안에는 자그마한 글록 권총이 끼워저 있었다.
"그건 언제 아빠 창고에서 가져온거야..."
세 자매를 말릴 수 없다는걸 눈치챈 엄베르토는 마지못해 바 안까지 따라다니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맞은편 스피크이지 (speakeasy; 음지의 작은 프라이빗 술집) 앞에 주차해놓고 기다리고 있을거야. 아리아가 있으니까 믿고 맡긴다. 1분이라도 늦을 생각하지 말고, 이상한 짓 하려는 새끼 있으면 바로 불러. 머리통을-"
"네!"
엄베르토는 신나서 뛰어가는 자매의 뒷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
지안나와 릴리는 휘황찬란한 실내에 감탄하며 곧장 카운터로 달려가 코스모폴리탄을 한잔씩 주문해 홀짝거렸다.
아리아는 왠지 속이 메스꺼워 아무것도 시키지 못했다.
시끄럽진 않지만 고급 스피커로 둥둥거리는 음악의 베이스가 속을 뒤틀고 두통을 일으켰다. 아리아는 마지못해 자기를 부르는 동생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화장실로 비틀리는 걸음을 옮겼다.
'하...'
아리아는 길다란 세면대 거울에 비친 창백한 몰골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참 청춘을 즐길 나이인 21살, 일반인 친구 하나 없이 자기 인생에 주도권 없이 휩쓸려 존재하기만 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이순간, 아리아에게 필요한 건 통제였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뭐든 오로지 자기만의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그리고 잠깐, 아리아의 머릿속에 위험한 생각이 스쳤다.
'동정이라도 내 선택 하에 뺏기는거야'
모든 마피아의 여자들이 그랬듯 아리아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와 보호 아래 자랐기 때문에 연애, 관계는 물론 키스도 해보지 못했다. 정략결혼으로 팔려가기 전, '순결한 상태'여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가 고작 물건 정도밖에 안된다는 생각에 아리아는 비소했다.
첫날밤에 루카가 자기가 처녀가 아님을 알아내서 일어날 난리도, 모르는 사람과의 섹스도 두렵지 않았다. 처음을 괴물같은 루카와 의무감에 뺏기느니 차라리 전자가 나을지도 몰랐다.
주머니에서 립스틱을 꺼내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덧바른 아리아는 묘한 차분함에 휩싸여 화장실을 나왔다. 무서워 보이지 않는 남자를 찾아 버크셔 플레이스를 훓던 아리아의 눈은 적갈색 머리의 젊어보이는 한 남자에 멈췄다.
'빨간 머리..? 귀엽네...'
정장 차림으로 창가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는 남자는 해봐야 아리아보다 몇살밖에 차이가 안 나 보였다. 그래서인지 더 대담해졌나, 아리아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혼자 오셨어요?"
아리아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혼자 왔냐니, 경험 없는 아리아가 즉석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말은 그정도에 그쳤다. 남자도 그게 꽤 재밌었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 손에 술잔이 안들려있네요. 아니면 이미 마실 만큼 마신 건가?"
아리아를 위아래로 스캔하는 남자의 눈빛은 청량한 외모와 달리 끈적하고 더러웠다. 아리아는 초조함에 침을 삼켰다.
"아니...요, 사실 한잔도 안마셨어요."
"그럼 한 잔 사드려야겠네"
아리아가 정신을 붙잡고 반론하기 전 이미 그녀 앞에 양주를 담은 잔이 배달되었다.
'위스키는 한번도 안마셔봤는데...'
아리아는 선뜻 잔을 들지 못했다.
"천천히 마셔요, 예쁜 여자 마음대로 해야지. 이름이 뭐에요?"
"아리.. 아니, 아일라요. 아일라."
"아일라... 이름도 예쁘네? 난 와이어트에요."
"아, 네... 와이어트씨. 만나서 반가워요."
어색하게 악수를 요청하는 아리아를 손을 내려다본 와이어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아리아를 그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그쪽 같은 여자가 여기 뭐하러 온거에요, 혼자온 남자 헌팅이나 하고."
와이어트가 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리아는 상체를 뒤로 빼 술잔에 손을 뻗어 양주를 한번에 비웠다. 더 이상 맨정신으로 진행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뜨거운 알코올이 목을 태우며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순식간에 아리아의 얼굴이 열기로 화끈해졌다.
"글쎼요... 그쪽 같은 남자나 한번 어떻게 해보려고?"
여자가 내뱉은 당돌한 말에 와이어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평생 쓸 운을 지금 이순간 다 썼다는 표정으로 아리아에게 물었다.
"무슨 사연이에요, 이거 마음이 좀 불안한데?"
"신경 안쓰셔도 돼요. 제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갈까요, 아니면 와이어트씨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까요?"
아리아는 이상하게 뻔뻔해졌다. 술기운인가, 처음 잡아보는 컨트롤에 갑자기 무서울게 없어졌다.
더 주체할게 없다고 생각한 와이어트는 아리아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 화장실의 파우더룸에 진입한 아리아는 검은 대리석 석판에 흩뿌려진 하얀 가루를 보고 주춤했다.
"이쪽으로 가요"
끝없이 이어지는 화장실 칸들을 지나쳐 가장 끄트머리로 들어간 후, 아리아는 눈을 감은채 와이어트의 질척거리는 키스를 받아들였다. 보기와는 달리 술을 많이 마신건지, 와이어트의 혀에서는 쓴맛이 났다.
"으... 써..."
첫키스는 눈물이 날 정도로 허무했다. 마치 개가 자신의 입 안을 핧는 느낌이었다. 술집에서 아무나랑 섹스하자는 결심으로 와이어트를 유혹한 거니 할말은 없었지만, 적어도 처음이라면 영화처럼 느낌은 사뭇 날 줄 알았다. 아리아는 점점 더 무감각해져갔다.
와이어트의 손은 아리아의 목덜미와 가슴을 지나 다리 사이에 다다랐다.
"윽!"
그 부위에 처음 느껴보는 남자에 손길에 아리아는 저절로 움츠렸다. 하지만 와이어트는 상관없다는 듯 더 집요하게 아리아를 만졌다.
원피스 끝자락을 올리고 아리아의 속옷을 잡아 내리려던 와이어트의 손등에 차갑고 단단한 물체가 닿았다.
"씨발!"
와이어트는 아리아의 허벅치에 차인 총을 그제야 눈치채고는 아리아의 눈을 보지도 않은채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 씨... 까먹고 있었잖아..!"
큰 일이 터지길 바라지 않았던 아리아는 급하게 와이어트를 부르며 쫓아갔다.
"와이어트! 와이어트! 그런게 아니라...!"
쿵! 아리아는 양복 조끼를 입은 넓은 남자의 가슴팍에 부딫혔다.
"아... 저기... 죄송해요... 제가 좀 급해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아리아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아리아 스쿠데리. 와이어트는 또 누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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