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GHOST DUET (172)
2.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86)
3.달걀과 닭 (46)
4.. (1)
5.🌜 (3)
6.사실 난 신이고 (2)
7.행복한 내 삶 (2)
8.🔑🔒✒ (15)
9.우주최강 (19)
10.커밍한 적 없는 오픈퀴어의 일기 (40)
11.판타지 소설을 써보려 하는 사람의 일기 (2)
12.오늘 11시쯤에 일어났다 (1)
13.안녕하세요 공주입니다. (6)
14.공개되는 비밀일기 (3)
15.(대충 생각나는대로 적어보겠다는 제목) (46)
16./ (1)
17.. (5)
18.일기장 (13)
19.하와와 여중생쟝의 일기인 거시와요 (38)
20.죽고싶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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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15:40:25
ID : AlDAqpgmE5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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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은 일곱시였다. 목요일 마지막 수업은 말 많기로 유명한 언어학 교수였고, 그는 보드리야르에 대한 이야기만 시작하면 도통 입을 다물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전 시간에 예고한대로 그는 보드리야르의 저작을 가지고 두 시간을 휴식 없이 떠들어댔다. 듣는 내가 진이 빠지고 입이 마를 지경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N은 부러지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목을 직각으로 꺾은 채 졸고 있었다. 그녀를 흔들어 깨워 벽 쪽에 기대게 한 다음, 필기가 되다 만 강의안을 만지작대다가 그에게 톡을 보냈다. 뭐해/지금 끝나서 차트 정리 중. 아직 수업이야?/넹 교수완전정신나감… 좀있다봐/(이모티콘) 일 하는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대화를 끊었다. 고작 두 세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기분좋은 들뜸이 치밀었다. 여섯시 반이 지나 수업이 끝나고 누구보다 빠르게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셔틀을 타고 돌아가는 두 명을 정류장까지 배웅하고, 장을 봐야 한다는 기숙사생 하나와 동아리 정기모임이 있다는 N과 함께 대로변으로 걸어갔다. 말할 때마다 입김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손이 시리다고 하자 N이 자기 주머니에 내 손을 집어 넣었다. 한창 열이 오른 핫팩을 만지작거리면서 희미하게 들리는 캐롤 선율을 따라 흥얼거렸다. 워킹 인 더 윈터 원더랜드……. 노래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싸구려 산타 옷 위에 패딩을 꿰 입은 휴대폰 대리점 직원들과 로드샵 직원들의 호객 행위에 묻혀 사그라졌다.
친구들과 교차로에서 헤어지고, 골목 어딘가에 있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카페에 들어갔다. 그 때가 여섯시 오십 팔 분이었고 그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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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15:47:02
ID : AlDAqpgmE5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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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침한 노란 조명이 켜진 실내에는 반질반질하게 니스 칠이 된 원목 테이블과 짙은 색 가죽 소파들이 놓여 있었고, 공기 중에는 커피와 옅은 버터 냄새가 감돌았다. 아늑하고 땅굴 같은 인상이었다. 어중간한 나이의 여성이 내게 목례했고 나도 따라 웃으며 인사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외투를 벗고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언제인지 톡이 하나 와 있었다. 미안한데 조금 늦을 것 같아. 잠깐 머뭇거렸다가,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1이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이미 핸드폰을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소리나게 테이블에 내려놓고, 턱을 괸 채 카운터 앞에 놓인 메뉴판을 읽었다. 갑자기 미뤄진 약속에 이렇게까지 감흥이 없는 건 예삿일이라 익숙해져 버린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이 사람을 좋아하는 탓에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좋아져 버린 건지. 답은 알 수 없었고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뜨거운 라떼를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와서 챙겨 온 책을 읽기 시작했다. 기말고사가 코앞이었지만 딱히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밤 시럽이 들어갔다는 라떼를 반쯤 먹고, 서비스라며 챙겨준 뽀송뽀송한 마들렌도 이미 다 먹어치웠는데 그 사람은 나타날 기미조차 없었다. 창문 너머 새까만 풍경을 몇 번이고 흘끗댔지만 보이는 건 창문에 비치는 내 모습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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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15:52:33
ID : AlDAqpgmE5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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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은 양 생각을 접어두고 책장을 넘겼다. 정발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예약을 걸어두고 산 책이었다. 번역도 매끄러웠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여전히 멋있었다.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명탐정은 여전히 부드러운 말로 범죄자를 단죄했다. 이제는 단종된 담배를 지겹게도 피워대는 묘사를 보고 순간 세대차이를 느껴버렸지만…. 시험이 끝나면 1권부터 다시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던 찰나 맞은편 자리에 그 사람이 나타났다. 달려왔는지 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숨을 골랐다. 멍청한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달려왔어? 거기서?” “응, 미안, 갑자기 하나가 늦게 온다고 했는데, 마침 퇴근하려는 게 눈에 띄었나봐. 오래 기다렸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어물어물 사과하는 사람의 면전에 대고 농담으로라도 모진 말을 못하겠어서 손사래만 쳤다. 아니야. 별로 오래 안 기다렸어. (한시간도 넘게 기다렸지만.) 책 읽고 있었고. 아, 물 마실래?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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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15:53:18
ID : AlDAqpgmE5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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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16:10:13
ID : wLcGmsnVd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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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름없음
2019/11/10 16:22:36
ID : wLcGmsnVd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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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일상의 한 장면을 말해보라면 역시 공원 옆 스타벅스가 가방 먼저 떠오른다. 담쟁이 덩굴이 붉은색 외벽 위를 빽빽하게 뒤덮고 있는 건물이었다. 번화가 한복판인데다 근방에 있는 학교만 네다섯개 가까이 되니 애매한 시간대가 아니면 늘 만석이었다. 혼자서는 잘 가지 않았고 대부분 M이나 R과 함께였다. 해도 잘 들지 않는 구석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케이크(꼭 두개 이상)와 커피를 시켜놓고 각자의 할 일을 했다. 나는 거의 전공 공부였고 R은 자소서를 쓰거나 가끔 대외활동이나 인턴 업무를 봤다. M은 책을 읽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리트 문제집을 펼쳐두었다. 대화는 뜸했고 보통은 두시간 가량을 침묵 속에서 집중한 채로 보내다가 한 사람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케이크를 허겁지겁 먹어치울 즈음에야 말문이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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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17:13:52
ID : 9bba5U3PdA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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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 조금 늦을 거야. 이 말을 듣기 전까지 수많은 기다리지 말고 갈래? 에 대답해야만 했다. 내가 자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일종의 배려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담담하게 괜찮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수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내내 내가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내 생각만큼 나를 안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그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부담스럽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러면 너무 슬픈 일인데. 다행히 아직까지 그런 일이 현실에 나타나지는 않았다.
나는 항상 경계하고 있다. 모든 것을. 그 사람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안 그렇게 생겨서 단 걸 좋아하는 것도 곤란할 때 짓는 애매한 미소도 자기가 본 영화 얘기를 할 때의 목소리도 내가 읽는 책 내용을 물어보는 상냥함도 좋다. 나는 누굴 이렇게까지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 이 모든 게 좋으면서도 무섭다. 누군가에게 과하게 의지해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건 이전 일로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최대한 내 생활에 집중하고 그 사람이 없어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만, 정말로 그 사람이 떠나버린다면 그러한 노력들이 전부 무용해질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때때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연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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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17:24:11
ID : 9bba5U3PdA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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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름없음
2019/11/10 19:50:15
ID : 1bcrgqo1y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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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면접이 싫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평가받는 자리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에버랜드 알바생이나 중증 자신감 과잉인 M이라면 좀 다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격렬하게 면접을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간단한 전화 면접조차 손을 덜덜 떨면서 봤었고, 2학년의 주말을 책임졌던 카페 알바 면접 때도 온갖 신경안정제로 무장하고 갔던 사람에게 일 년을 갈아넣은 면접이 얼마나 무서웠을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면접일로부터 한 주 전, 면접계를 제패한(적어도 본인 말에 의하면) 항공과 친구를 옆에 끼고 백화점을 돌았다. 무릎이 늘어난 슬랙스를 차마 입을 수가 없어 좀 더 각이 잡히고 비싸 보이는 걸로 하나, 정장용 블라우스 하나, 검은색 단화까지 한 켤레 샀다. 부모님에게는 엄금이었으므로 돈은 내 통장에서 나갔다. 알바비를 성실하게 모아둬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날이 추웠지만 롱패딩을 입고 싶지는 않아서 코트를 걸치고 그 위에 목도리며 장갑까지 자질구레하게 걸치고 한 시간 반 거리의 학교로 갔다.
대기실에 앉아 심장이 옥죄다가 풀리는 기분을 곱씹으며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애쓰던 순간의 느낌은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워버린 지금도 어렴풋하게 남아 자기 전마다 나를 괴롭힌다. 수험번호가 불릴 즈음에는 위장이 뒤틀리다못해 토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망치기도 무섭고 들어가기도 무섭다. 나는 정신줄을 반쯤 놓은 채 문을 열었다. 삼대일 면접. 잘 차려입은 교수들은 내가 엉터리로 써낸 자소서와 나를 번갈아보더니 다정하게 웃었다. 나도 마주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수험번호 xxx-xxx, xxx입니다. 안녕하세요, 기다리느라 힘들었죠? 아, 아뇨.
현 전공과는 다른 분야여서인지 전공 지식보다는 주로 자기 소개서와 학업 계획서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질문이 들어왔다. 대부분이 예상 질문지에 있던 것들이었고, 나는 최대한 성실하고 단정한 투로 대답하는 데에 신중을 기했다. 나는…… 짱 성실하다…… 나는 이 전공이 너무 좋다…… 나는 적응력도 존나 좋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예의바른 인간이다……. 텔레파시를 쓰는 외계인도 이 정도로 강렬하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쪽에 기운을 지나치게 쓴 나머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할 시간이 주어졌을 때 나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배움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해서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들은 다시 한 번 웃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조금 비틀거렸다……. 그렇게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려다, 불현듯 친구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근처 사는 친구를 불러 술을 진탕 먹고 나는 좆됐다고 하소연하다가 막차 타고 귀가했답니다.
방학이니 평일에도 나오라는 사장님의 부르심을 받고 컵 닦이 일을 지속하기를 몇 주, 결과가 떴지만 바로 보지는 않았다. 지원한 학교들이 다 비슷비슷한 날짜에 결과를 발표하기 때문이었는데, 연속으로 고배를 마신다거나 하는 일은 죽어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며칠을 미루다가 카운터 안 쪽 창고에서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으로 결과를 조회했다. 가장 낮은 곳부터 차근차근 수험 번호를 입력하는 동안 내 왼손 엄지손가락의 손톱은 개작살이 나버렸다. 오, 합격……, 오 대박 여기도 합격……, 와씨발 미친 여길 붙었네 뭐야 면접관 돌았나봐……, 그리고 다음도……. 내 생에 이렇게 많은 합격 문자를 받아본 건 처음이어서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설거지를 하다가 얼음을 갈다가 수다를 떨다가 케이크를 먹다보니 근무 시간이 끝났다. 한 군데만 붙어도 온갖 요란을 떨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기쁨도 감흥도 잠시간이었다. 날이 찼고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서 같이 알바하는 사람 둘을 붙잡고 호프집에 가서 시간을 죽였다.
11
이름없음
2019/11/10 19:54:55
ID : qnXtbg1zRz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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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또 먹네.
요즘들어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느낌이야.
아저씨라서.
네가 훨씬 어린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네.
훨씬은 아니지.
네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 난 대학 다니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되게 어리게 느껴져.
보통은 그 정도로 어리다고 느끼지 않아.
아, 해 안 바뀌었으면 좋겠다.
왜?
왜냐니, 보통 다 그러지 않아?
난 별로... 시간 가는 걸 막을 수도 없고.
와 진짜 아저씨네.
나이 드는 것 자체는 별로 신경 안 쓰이는데,
그래서 건강관리를 그 모양으로 하는 거야?
조용히 해. 나 진지한 얘기 하잖아.
미안.
나는 아직 어린 나 그대로인데 사회에서 요구하는 게 달라진다는 것 때문에 나이 먹기 싫어.
진지한 이유였네.
고등학생 때랑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다들 어른이라고 하면서 무언가를 기대하니까 짜증나. 난 공과금 납부하는 것도 잘 모르는데.
그건... 자동이체 되니까 상관없지 않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직도 잘 모르거나 급한 일 생기면 엄마한테 달려가고 싶어.
그렇구나.
열일곱살 할래. 고딩 시켜줘.
말은 그렇게 해도 잘 하고 있네.
음.
다들 그럴 거야. 잘 못하지만 주변에서 도움 받거나 검색해보면서 그런 척 하는 거지.
그래?
그렇지 않을까? 너도 어머니한테 안 가고 혼자 잘 하고 있잖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도 충분히 어른다울걸.
방금 말 완전...
왜?
완전 어른 같아... 아저씨네.
그래... 나도 나이 안 먹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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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19:58:57
ID : bbdAZgY5S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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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책 편식 안 하려고 노력 중이야.
학교 근처 서점을 돌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과학 잡지를 뒤적거리던 그 사람은 대답없이 내 손에 들린 책들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제목들이 하나같이 살벌한데.
이건 논문 때문에 사는 거야. 한국과 일본의 풍속 문학과 그 발전상의 차이.
호러 소설을 보면 그런 걸 알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 역시 이과라 잘 모르는구나.
자고로 섬나라의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은…… 나는 즐겁게 헛소리를 늘어놓고 그는 즐거운 얼굴로 내 논리를 슬쩍슬쩍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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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20:08:45
ID : bbdAZgY5S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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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20:15:33
ID : bbdAZgY5S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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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니 또 사주 팔자가 성행한다. 나는 사주를 신봉하지는 않지만 꽤나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인데, 그것이 내게는 일종의 경고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종교도 없고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세계의 시작점에 누군가가 있음을 막연하게 믿고 있는 나는 내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는 데에서 기묘한 안정감을 느낀다. 올 한 해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야, 미리 조심해! 이런 문장을 보게 되면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머릿속에 그 말을 심어둔다. 이러이러한 일에 관해서는 여러 번 곱씹는 게 좋겠군. 그런 식으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다가, 해가 저물어 갈 때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게 다 내가 열심히 조심한 덕이고, 일어난다면 내가 덜 조심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온 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를 봤었나. 홍대 쪽에서 노닥거리다가 갑자기 그러면 사주를 보러 가자! 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몇 군데를 검색해 그 중 하나를 골라 찾아갔다. 사주 가게가 다 그렇듯 그곳 또한 괴랄한 센스의 가정집 같은 분위기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먼저 상담 중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손에 쥐고 질문을 골랐다. 일단 내년 운세랑, 맞아, 취업운, 시험운도 봐주나? R은 연애운은 무조건 봐야 한다고 주장했고 M도 신나서 찬성했다. 무언가를 열띄게 설명하던 둘 중 하나가 훌쩍이면서 가게를 나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이윽고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또 우르르 들어가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주인 아저씨는 생각보다 평범한 인상에 평범한 차림새였고 평범하게 컴퓨터를 조작하고 있었다. 저기 무료 사이트 깔려 있는 거 아니냐며 R이 속삭였다. 같은 의심을 하고 있던 나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안녕, 내 삼만원. 그냥 그 돈으로 고기나 썰러 갈 걸 그랬구나.
그런데 아저씨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마자 자동적으로 호들갑이 튀어나왔다. 미친 대박 다 맞아 R이 내 어깨를 쥐어뜯었고 이런 건 다 상술이며 사람 반응을 관찰하면서 그럴듯하고 흔한 말을 늘어놓는 것뿐이라던 M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의 신명나는 과거털이 다음에는 신상분석이었다. 나는 통계학적으로 까칠하고 예민하며 자존심이 세지만 그만큼 단순한 인간으로 판명이 났다. 그런 성격 분석은 남들에게도 다 들어맞는다던 M이 그 말에 제일 좋아했다. 직업운은 셋 다 그럭저럭 괜찮게 나왔다. 나와 R은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이 결정되고 가늘고 길게 안정적으로 영위할 것이고, M의 경우 취업 후 초년에 너무 힘을 빼지 않는 게 좋고 중장년 시기 뇌물 수수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야(M의 진로 때문에 셋 다 빵 터졌다.) 한단다. 셋 다 연애는 질리도록 할 테고 결혼 후에는 배우자에게 집중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거라는 예상보다 심심한 판정을 받았고, 대망의 배우자운은…… 쓰고 싶지 않다……. 나는 그날부로 음양오행을 불신하기로 결심했고 M은 웃으면서 질색했고 R만 좋아했다. 개소리로 치부하고 잊으려고 노력했는데 아저씨 말이 너무 잘 맞아들어서 슬슬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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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20:34:28
ID : i9th801jzc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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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20:35:19
ID : i9th801jzc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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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시험 때문에 추가학기 다니면서 철학과 수업을 듣긴 들었다.
17
이름없음
2019/11/10 21:43:35
ID : JSFeNBz9j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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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복작복작한 생일은 이십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우리 집 사람들은 케이크에 초 꽂고 노래 부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 뿐더러 친구들과도 크게 파티를 한 적이 없었다. 스물 한 살 생일 때는 직접 사 온 케이크를 초도 없이 대충 퍼먹으면서 자축했고, 스물 두 살 때는 알바처에서 추근대던 오빠가 사다 준 걸 내다 버렸었다. 생일 관련해서는 별로 좋은 추억이 없네……. 그래서 오전부터 밤까지 내리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보내는 생일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분위기를 못 타고 어영부영 휩쓸려 다니다가, 저녁 즈음에야 간신히 아무 생각 없이 기분 좋게 웃고 떠들 수 있었다. 오락실에 가서 한 시간쯤 놀다가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고 정신없이 마셔댔다. 진작에 곤죽이 된 케이크를 주섬주섬 정리하는 R의 어깨에 기대 술병을 가방에 집어 넣다가 M에게 걸려 이유없이 옥신각신한 걸 여태 잊지 못하고 있다. 라벨이 귀여웠는데, 요즘은 잘 안 파는 모양이다. 본 기억이 없네. 소주병 뚜껑을 만지작대다가 피를 볼 뻔 했고 술병은 꾸역꾸역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갔다.
배웅해준다는 걸 다 물리치고 혼자 비틀비틀 버스 정류장에 가서 앉아 있을 때 그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의 직장은 분명 여기서 한 정거장이나 떨어져 있는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마냥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 생일이에요. 그 사람이 웃으면서 축하 인사를 해줬고 나는 불가항력으로 웃어버렸다. 친구들이랑 놀다가 지금 집에 가시는 거예요? 혼자 가도 괜찮아요? 안 괜찮다고 말 하면 그쪽이 데려다 줄 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 정도로 정신이 날라가지 않은 상태였다. 괜찮아요. 잠들까봐 한시간 뒤에 알람도 맞춰놨어요.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파란 버스가 도착했다. 이유도 모르고 부끄러워진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버스를 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힐끔 바깥을 봤는데 그 사람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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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22:25:58
ID : 1CpdU5hwM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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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22:28:24
ID : 1CpdU5hwM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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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안고 잘만한 인형을 하나 샀다. 택배 상자를 뜯을 때면 어김없이 녀석이 나타났다. 캣타워 꼭대기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테이프 뜯어내는 소리에 급히 뛰어 온 녀석이 상자 근처를 기웃거리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고 나서야 내용물을 꺼냈다. 봉지에서 산리오 캐릭터의 머리통(...)을 구출하자 한창 상자 속에 들어가 놀고 있던 녀석이 이번에는 봉지로 돌진했다. 너 거기 들어가면 좀 있다 목욕시킬 거야, 같은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고양이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세제를 푼 물에 인형을 잠시 담궈두고 봉지에서 녀석을 꺼낸 뒤 잔해를 정리했다. 불만스럽게 그릉대는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자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소리가 달라졌다.
웬 인형을 샀냐기에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에 깊이 눌러앉은 모습은 생각만큼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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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22:44:47
ID : 1CpdU5hwM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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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낀 달의 나는 정말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평상시에도 뾰족한 미친년이었는데 그 때는 정말 뾰족을 넘어선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돼 있었다. 쉽게 화를 냈고 사소한 것에 울었다. 버스가 제때 오지 않아서, 바람이 자꾸 불어서, 옷 색깔이 어울리지 않아서. 이러다 시험이고 인간관계고 모조리 말아먹겠구나 싶어서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미세먼지 경보가 떴을 때도 쓰지 않던 마스크를 하고 모자를 뒤집어 쓰고 조용히 등교해서 조용히 하교했다. 애꿎은 사람에게 성질을 내느니 이 새끼는 수틀리면 지 혼자 틀어박힌다는 욕을 먹을지언정 아무도 마주치지 않는 게 나았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고 울적해질대로 울적해져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심정으로 요약본을 외우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엄마인가 싶어서 확인했는데 그 사람이었고 이미 여러 번 그랬듯이 이번에도 모른 척 할 심산이었다. 신호가 몇 번 오다가 끊겼고 곧장 문자가 왔다. 괜찮니 아픈 건 아니지 일 정리되면 연락 줘 목소리 듣고 싶어 기타등등 이십 몇 년 살면서 가장 듣고 싶었지만 아무도 나한테 해주지 않은 말들을 보자마자 와앙 울어버렸다. 햇살이 희붐하게 들어오면서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선명히 보이고 교차로에 멈춰 선 차들이 울리는 클랙션 소리가 요란한 그 순간 하나하나를 예민하게 느끼면서 울었다. 연락은 그로부터 삼일 뒤에 했다. 착신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은 전화를 받았고 나는 또 울면서 시험이 끔찍하게 싫고 망할까봐 무섭고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 그게 또 얼마나 싫은지에 대해서 줄줄이 얘기했다. 입을 닥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코를 먹어가면서 웅얼댔다. 그 사람은 계속 괜찮다는 말만 했다. 뭐가 괜찮냐고 발작적으로 묻자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고, 일이년 늦춰진다고 뭔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상투적이고 진부하고 지루한 말들인데 좋아하는 사람이 육성으로 내뱉으니 또 느낌이 달랐다. 나는 담요를 뒤집어 쓴 채로 가만히 그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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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23:27:27
ID : Be445gmLe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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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사에 쉽게 질리고 순간의 감정과 본능에 휘둘리는 편인 데 비해 그 사람은 한 가지 일에 손쉽게 깊이 파고들 수 있고 대체로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이것처럼 서로가 극과 극인데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조심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조심하고 있다. 그 사람의 선을 넘지 않도록, 무언가 맞지 않는 부분이 생기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고유한 성질이므로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하냐고 따지거나 무작정 내 편을 들라고 하지 않기 위해 노력... 하지 않는다. 노력하겠노라 결심했는데 노력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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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0 23:29:39
ID : Be445gmLe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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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냐고 물어봐줘. 피곤하지도 않으면서도 피곤한 체 하면서 어리광 부리고 싶으니까. 오늘 정말정말 피곤하니까 손도 잡아주고 팔짱 껴도 얌전히 있어주고 보폭도 맞춰줘. 뜬금없이 기대도 별말 없이 받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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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1 10:21:42
ID : e3RzRA45fh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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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M을 결혼식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적당히 선선한 날씨였다. 핸드메이드 자켓과 일반 자켓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후자를 골랐다. 연한 살굿빛 블라우스를 입고 한참 동안 고데기와 씨름을 하다가 아빠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왔다. 예식장은 서울 한복판이었고 굳이 가족들이 차를 끌고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되는 거리였다. 종로는 버스 천지니까. 그렇지만 구태여 오겠다는 걸 거절할 이유도 핑계도 없어서 마음대로 하라고 전날에 말해둔 터였다. 오랜만이었지만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무료하게 창밖을 내다보거나 졸거나 했고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네비게이션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국회의사당을 지나 국도로 빠진 차는 낯선 동네를 몇바퀴 돌고 나서야 예식장을 찾았다.
식이 시작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면면들이 손짓하는 게 보였다.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고 엄마와 함께 사촌들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축가 연습을 하던 신랑의 친구가 마이크를 가지고 직원과 실랑이를 하는 동안 안을 둘러보는데 맞은편 자리에 신기하게도 M의 얼굴이 보였다. 와 닮았네 진짜 닮았는데? 닮았구나 닮 아니 본인인가?! 옆사람과 얘기하던 그 애가 슬쩍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걸 보고 확신했다. 아는 척을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충동적으로 톡을 했다. 고모들의 수다 소리 때문에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서. 그리고 미친듯이 쏟아지는 물음표. M을 향해 손을 흔들자 그 애도 나를 발견하고 웃기 시작했다. 왜 그러냐는 엄마에게 맞은편에 친구가 있다고 말하는 중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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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1 10:46:51
ID : rfar9bg3O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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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 이건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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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1 10:47:43
ID : rfar9bg3O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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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내게서 마음이 뜬다면 두번만 잡아보고 털어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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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1 11:59:53
ID : MrvyMjdveF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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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은 자주 책을 읽는다. 학교를 다닐 적에는 사람이 잘 가지 않는 카페나 그 사람의 집에서 읽었다. 전공 책은 내 집 내 방에 틀어박혀 온갖 욕을 씹어대며 읽었기 때문에(그래야 더 잘 읽히고 문장을 걸러내기가 수월하다.) 그 사람의 옆에서 읽는 책은 대부분 취미용이었다. 문학상,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단편집, 지금도 느리지만 꾸준히 나오는 시리즈물, 이미 열댓번도 더 읽고 심지어 필사까지 했던 소설들. 그때만큼은 이어폰을 끼지 않았다. 재밌는 문장이 나오면 소곤소곤 읽어주며 동의를 구했다. 번거로울 법도 한데 그 사람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마주 웃어주었다.
요즘은 이전처럼 양 옆에 딱 붙어 읽지는 않는다. 그 사람은 소파 대신 바닥에 앉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읽고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잡문을 읽고 쓴다. 다리를 쭉 뻗으면 무릎께에 그 사람의 등이나 목덜미가 닿는다. 심심한데 그만 읽고 놀아주면 안 돼? 하고 물으면 그 사람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나를 토닥이고 나는 체념하듯이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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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1 12:24:46
ID : nBbu1fRA5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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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제일 기분 좋았던 일 ; 막 퇴근한 그 사람이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서 우리집 마님에게 아빠 왔어~ 하고 인사하는 걸 봐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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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1 14:14:13
ID : inU3U2Lbu1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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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써? 잠깐 얼굴이나 보자고 부르길래 개처럼 헐레벌떡 달려갔다가 들은 말이다. 이학년 때부터 가끔씩 렌즈를 꼈는데, 삼학년에 올라간 이후로는 거의 매일 렌즈를 끼고 다녔다. 엄마가 안경을 쓰지 않은 쪽이 낫다고 해서였다. 라식을 하자니 타고나기를 수술대와 병원 냄새를 극혐하는 인간이어서 삼개월짜리 소프트 렌즈를 낄 수밖에 없었다. 한겨울만 빼고. 렌즈를 끼고 히터가 빵빵한 강의실에 몇 시간이고 처박혀 있다가는 눈깔이 뽑힐 것만 같아서 반강제로 안경을 썼는데, 그 사람에게는 아직 안 보여줬던 모양이었다. 이상해? 그 사람이 준 핫팩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아니, 그냥 안경 쓴 걸 본 건 처음이라 신기해서. 상냥하게 말하면서 볼을 살짝 건드리길래 무심코 뒤로 물러났다. 손 차갑잖아. 괜히 호들갑을 떨면서 핫팩을 도로 쥐어주자 그 사람은 그런가, 하며 또 순순히 사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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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2 11:37:12
ID : rfar9bg3O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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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년 일학기 때 처음으로 과탑을 했다. 시간표를 모조리 전공으로 채웠던 데다가, 동아리에도 간간이 얼굴을 비춰야만 했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쌓느라 정말 개고생을 한 학기였다. 몇 점 나왔어? 4.4. 미쳤네, 너 왜 수능으로 못 들어온 거야. 시험 때 긴장 많이 하는 편이지? M이 물었다. 긴장을 많이 하긴 한다. 긴장도 불안도 평균적인 사람보다 쉽게 자주 느낀다. 인생은 늘 위태로웠고 사소한 것에 절박하게 굴었으니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렇긴 한데... 그것보다는 그냥 수학을 못해서 못 온 걸걸.
너 지금 프로그래밍 하잖아.
그거랑은 좀 다른 얘기임... 그래프랑 도형 문제는 아직도 못 풀어. 이건 그냥 외우면 되잖아.
그런 얘기를 했다고 그 사람에게 말을 했더니 이과 수학 만점을 놓친 적이 없는 사람에게서 이해는 안되지만 이해한다는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우리 진짜 안 맞는 거 알지? 내가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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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2 18:59:46
ID : u5TPa2nxu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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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이가 데면데면했던 때.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다가 막차가 오기 한 시간 전에 밖으로 나왔다. 오빠의 취업 문제로 집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그 즈음에는 일을 만들어서라도 싸돌아다니다가 귀가해서는 잠시 눈만 붙인 다음 다시 외출하곤 했다. 그날은 사거리 앞 편의점에서 투플러스 원 하는 요거트를 세 개 사서 스타벅스 옆 공원에 가 있었다. 12월 말, 춥고 어두운 밤이라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불빛도 몇 없는 공원 구석에 자리를 잡고 요거트를 먹기 시작했다. 거기는 서울 중심가였고 근처 가게들이 아직 문을 연 시간대라 크게 무섭지도 않았다. 한 통을 비우고 다리를 까딱대며 핸드폰을 하는데, 여기서 뭐하세요? 하고 조금 놀란 목소리가 옆애서 들렸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무릎 위에 두었던 백팩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 사람은 나만큼 놀라서 허겁지겁 가방을 주웠고 그제야 나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안심하다못해 조금 즐거워지기까지 했다. 찰나였지만 거듭된 만남만으로 나는 이미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진 상태였다.
밤중에 이런 외진 데서 이어폰까지 꽂고 계시면 어떡해요.
아 괜찮아요 노래 안 듣고 있었고... 지금 바로 옆에도 사람들 돌아다니는 걸요. 지금 퇴근하시는 거예요?
아뇨 오늘은 밤 근무라. 지금 왔는데 잠깐 시간이 남아서 산책이나 하려고 왔어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오셨나봐요. 그거 저녁은 아니죠?
그렇게 뭐라뭐라 수다를 떨다가... 내가 그 사람한테 요거트 하나를 줬고... 어째서인지 나란히 앉아서 요거트를 먹다가 번호를 교환했다. 통성명도 그때 했다. 얼굴이랑 이름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네,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들어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정류장까지 바래다 준다는 말은 거절했다. 저기까지 기어서 오 분도 안 걸리는데요. 추워요. 들어가세요. 일...(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조금 당황했다.) 힘내시고요...? 마주 인사하는 걸 보는둥 마는둥 하며 정류장까지 미친듯이 달려갔다. 미친 개쪽팔려! 열이 잔뜩 오른 얼굴을 식은 손으로 마구 누르며 정류장 구석에 찌그러졌다. 버스는 금방 왔고 집까지도 금방이었다. 가는 내내 가슴이 기분 나쁘게 말랑거렸다.
그리고 그 날 집에 들어가서는 머리채를 잡혔다. 다음날 밤에 마주쳤을 때 바로 사과받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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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2 19:05:04
ID : u5TPa2nxu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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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었는데, 학교를 눈코가 시뻘개진 채로는 갈 수 없으니까, 동이 트기도 전에 옷을 꿰입고 이십사시간 롯데리아에서 커피 하나를 시켜놓고 꾸역꾸역 눈물을 삼켰다. 목구멍이 뜨끈한 덩어리로 꽉 차 있어서 숨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밖에는 눈이 매섭게 내렸고 알바생은 내쪽을 한 번 보더니 비질하던 방향을 반대로 틀었다. 머릿가죽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서럽고 원망스럽고 화가 나서 눈물이 자꾸만 났다. 대학만 잘 가면 사랑만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새 친구를 잔뜩 사귀고 그 사람을 만나면서 아, 이제 우울증도 완치되겠네,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부모는 여전히 나보다 그를 사랑하고 그들이 계속해서 그를 사랑하는 이상 나는 영영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결국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울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길게도 만난 친구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미안함과 뒷수습 할 생각에 포기하고 혼자 울었다. 실내에 울리는 오래된 발라드도 재수없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출근하는 사람들도 재수없었고 등교 버스마저 재수없게 보였다.
32
이름없음
2019/11/13 09:54:23
ID : 5RDy43U3TQ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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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다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나중에 결혼한다면, 아이를 낳는다면(그 사람은 자식을 낳는 것에 있어서는 꽤 회의적으로 보인다.), 애매한 동거를 그만두고 정말 집을 합친다면. 그런 주제로 대화를 하는 상상은 여러 번 해보았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저 겁이 나서이지만 그 사람의 심중은 알 길이 없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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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3 12:27:29
ID : rfar9bg3O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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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에는 카페에서 두시간 동안 주절대다가(보통 내가 말을 한다.) 헤어지고, 어느 날에는 정류장에서 얼굴만 보고 헤어지고...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그 사람이 갑작스럽게 불려가는 바람에 아무렇지 않은 척 배웅해야만 했던 적도 있었다.
34
이름없음
2019/11/13 14:36:55
ID : rfar9bg3O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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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13 14:46:11
ID : rfar9bg3O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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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름없음
2019/11/13 22:10:50
ID : E1eE4JVbx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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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이름없음
2019/11/13 22:18:29
ID : E1eE4JVbx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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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허를 따긴 했지만 여전히 운전은 무서워서, 대부분 이동할 때는 그 사람이 운전대를 잡았다. 예전에는 몇 번 가르쳐준답시고 내가 그 사람 차로 인적 드문 대로변을 달리기도 했는데 이십 분만에 포기했다. (2단? 3단??? 뭔데??? / 아니 거기선 기어 안 넣으니까, 브레이크 너무 세게 밟지 말 / 그냥 오빠가 평생 해주면 안될까 아몰라 나 그냥 걸어다닐래엉엉) 이렇게 멀리까지 드라이브 하는 건 오랜만이라 솔직히 전날 밤부터 들떠 있었다. 옷도 신중하게 고르고 머리도 매만졌다.
주말이니만큼 진작에 각오하고 있었지만 주차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도무지 나아갈 생각을 안 하는 차들을 노려보다가 히터를 높였다가 낮추고 라디오 채널을 마구 돌렸다. 마침내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어렸을 적 엄마가 그랬듯 주차 자리를 찾았다. 저기, 왼쪽에. 아, 다행이다... 내부를 두 바퀴 돌고 나서야 간신히 차를 댈 수 있었다.
38
이름없음
2019/11/17 17:52:19
ID : jBuqZeIJW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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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좋아하는 일을 꼽아보라면 역시 멀리서 그 사람을 발견하고 살금살금 다가가 뒤에서 꼭 끌어안는 일. 하도 자주 매달려서인지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허리에 둘러진 손을 매만지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서, 안녕, 하고 말해주는 순간의 모든 게 좋다. 오빠가 그렇게 해줄 때마다 너무 좋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입 밖으로 낸 적은 아직 없다. 마음을 꽉 채우는 애정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에 부드러운 질감을 가지고 있다.
39
이름없음
2019/11/19 11:13:47
ID : rfar9bg3O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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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 아파트답게 몰딩은 밝은 회색빛이 도는 갈색이었고 벽은 흰 칠이 돼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내 집을 가지면 한 면 이상은 밝은 청회색 칠을 하겠다고 막연히 결심하고 있었는데, 막상 입주하고 나니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대신 청회색 소파를 들여놓았다. 밝은 칠이 된 원목 손잡이가 있는 패브릭 소파. 바닥에는 얇은 무채색의 러그를 깔았고, 그 위에는 아이보리 빛깔의 테이블을 두었다. 티비는 고민하다가 빼버렸고, 대신 식물 두 개를 두었다. 그리고 한들한들 흔들리는 쉬폰 커튼(얼마 전에 떼고 블라인드로 바꿔버렸다.)... 적막한 거실에 가만히 앉아서 그 움직임을 가늠하듯 눈으로 따라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외로워져서 한동안 무릎에 얼굴을 파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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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20 10:05:09
ID : g6i0642Go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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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살, 동양인 여성이고요, 유럽은 스물 네살 때 처음 가 보고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창 유행하던 예능 형식의 여행 다큐라면 분명 이런 자막이 떴을 거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티비 프로가 아니고 현실이었으므로… 나는 바짝 맨 크로스백의 잠금 장치를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 높이의 캐리어를 질질 끌면서 어감마저도 낯선 타지의 공항을 가로지르는 것은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데 난데없이 제3의 유럽국에 떨어져버린 상황이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시 내가 할 줄 알았던 이 나라의 말 :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에 가고 싶어요, 얼마인가요?
오기 전 여행 블로그에서 몇 번이고 정독했던대로 우버를 부르고, 인사를 하고, 짐 칸에 넣은 캐리어 대신 작은 가방을 끌어안고 초조하게 창 밖 풍경을 내다보았다. 기사는 잔뜩 긴장한 나를 향해 연신 잡담을 걸어왔는데 어찌저찌 대답을 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제발 조용히 하세요! 를 외쳐야만 했다. 인고의 삼십분이 흐른 뒤, 이번에 나는 호텔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좋은 시간 보내시라는 관광업이 번성한 나라의 기사다운 멘트를 남기고 사라진 우버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다가 힘없이 프런트로 들어가 체크인을 했다. 직원은 악명과는 달리 제법 친절할 뿐만 아니라 캐리어를 손수 옮겨주기까지-원래 다 그런 건가…… 호텔 잘 안 가봐서 모르겠다-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짐을 모조리 내던지고 핸드폰부터 찾았다. 한국과 이곳의 시차는 일곱 시간. 잠 깨느라 고생 중이겠네. 저혈압인 그 사람은 아침마다 일어나는 데 애를 먹곤 했다. 고민하다가 도착했다는 말만 짧게 남기고 핸드폰을 던져버린 다음 노트북을 켰다. 반 년 간 근무하기로 되어 있는 곳은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한적한 도시였다. 경기 촌년, 심지어 서울과의 거리가 전철로 다섯 정거장이 채 되지 않는 곳에서 살던 나로서는 갑작스럽게 결정된 타국의 시골 직장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약한 기차편을 다시 확인하고,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중으로 내려갈 거란 소식을 전하고, 이제 곧 만나게 될 직장 사람들에게 온 메일에 답장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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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9/11/28 16:11:36
ID : wFipffhtiq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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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0/03/25 16:12:23
ID : qnXtbg1zRz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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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을 갈구하거나 타인이나 주변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모두 유년기 육친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기질이라고 한다. 가장 오래 전 기억을 꼽으라면 엄마의 품에 안겨 비스듬히 누워 있는 세 살 적의 모습이 바로 떠오르는데도, 온기와 살냄새 같은 것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늘 불충분함을 느끼곤 했다. 양친의 첫번째가 될 수 없다는 암묵적인 사실 위에 지나친 자의식이 덧입혀져 십대의 나는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애정 전선을 형성했고 이십대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여대를 갔고 외부 동아리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이성 알바생들과도 의식적으로 거리를 뒀다. 사랑을 하는 것도 받는 것도 무서웠다.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바에야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먼저 일어나는 건 언제나 내 쪽이다. 흰색 이불 위에 진 커튼의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제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을 깨닫고 손을 뻗어 흐트러진 이부자락을 정리해준다. 그때 차오르는 건 순전한 기쁨이다. 하루의 시작을 그런 마음과, 살아있는 누군가에 대한 애정과 배려와 함께한다는 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좋은 일이어서 이별이라던가 돌려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라던가 내가 더 많이 좋아한다는 사실에서 은연중에 다치고야 마는 자존심 같은 것들은 다 구석으로 밀려나버린다.
최근에는 엄마와 다시 전화를 주고받는다. 쉬는 날에는 차를 가지고 본가 앞까지 간다. 가끔은 아빠도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간다. 외곽에 있는 유명한 베이커리 카페나 인적이 드문 경기도나 강원도의 강변에 간다. 일터에서 있었던 일이나 최근에 읽었던 책 가끔은 그 사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엄마는 즐거워보인다고 말한다. 그 속에 있는 감정을 읽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애쓴다. 맞아 즐거워 엄마랑 놀러다니는 것도 그 사람과 같이 오후를 보내는 것도 동료들과 점심을 먹은 다음 한숨을 내쉬면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도. 요즘은 정말 살아있길 잘했다는 기분이 드는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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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0/03/25 16:27:34
ID : qnXtbg1zRz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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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다닐 적의 나는 언제나 조급했다. 늦바람이라도 든 것 마냥 다들 새내기 때 일찌감치 털어버린 것들을 삼학년이 돼서 섭렵했다. 서울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고 술을 마셨고 자정 즈음에 귀가했다. 적막한 거실, 할로겐 전등빛을 받으면서 현관에 웅크리고 앉아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이유도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목표를 이뤘는데도 어째서인지 감정은 통제되지 않았다. 간신히 신발을 벗고 대충 화장을 지우고 물을 뒤집어쓴 다음 침대에 앉아 바디로션을 발랐다.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일상들에 대한 분노를 담아서 종아리를 꾹꾹 눌렀고 정신을 차려보면 알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과 친구들이 하나 둘 실습이나 인턴을 나간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덩그러니 교수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예상한 일이잖아. 일 년 뒤처진다고 해서 뭐 큰 일 있겠어? 그렇지만 나는 이미 재수도 했고 친구들은 슬슬 간호사다 사회복지사다 직함 하나씩 달고서 월급쟁이 일을 시작했는데 나는 장기 학부생 딱지밖에 없네. 교수가 먹으라고 준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저는 야채도 토마토도 참치 샌드위치도 싫어해요 교수님.
교수는 기침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그는 손도 대지 않는 샌드위치와 나를 한 번 보고는 물었다. 일은 예전에 해봤다고 했지? 커피 타는 것도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면요. 교수는 쉽게 웃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시간표를 묻더니 에이포 용지 두 장을 줬다. 너희 집에서 별로 안 먼 데야. 그말대로 거기에 적힌 건 집에서 삼십분 정도 떨어진 기관이었다. 저 아직 커리 다 못 끝냈는데. OO학은 끝냈잖아 내 수업도 다 들었고. 그래도요 안돼요 저 못해요. 괜찮아. 그 교수는 처음부터 나를 그런 눈으로 봤다. 도통 심중을 알 수가 없었지만 싫은 소리를 더 하기도 전에 교수가 휙 몸을 돌렸다. 현장 가고 싶다고 했잖아 가 가 괜찮아 어차피 다른 애들이나 너나 현장 가면 다 처음부터 시작이야 앉아서 배우는 거 그거 조금 더 안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 나는 샌드위치와 종이를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축축해진 빵 뚜껑을 씹으면서 교재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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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0/03/27 18:21:54
ID : qnXtbg1zRz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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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 위에 손가락을 얹거나 어디 한 구석이라도 팔이나 어깨에 붙이고 잔다. 우리 둘 다에게는 그런 일말의 온기가 닿아있다는 그 사실이 지나칠 정도로 무게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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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0/03/31 15:15:06
ID : atxVbBfam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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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에는 밀린 청소를 한다. 그 사람은 휴일이 없다시피하기 때문에(최근 들어 더 바빠졌다) 나 혼자 하는 수밖에 없다. 둘 다 크게 깔끔 떠는 타입도 아니고 온갖 기계들을 곳곳에 둔 덕에 힘들지는 않다. 이불을 세탁기에 처넣고 제일 좋아하는 섬유 유연제를 한 가득 붓고 반쯤 비어 있는 냉장고를 닦고 다시 세탁기 앞으로 달려가 이번에는 건조기에 집어 넣고 드라이클리닝을 맡길 옷을 모조리 꺼낸 다음 서랍장에서 가벼운 겉옷들을 꺼내 옷걸이에 걸어두고 건조가 끝난 이불을 꺼내 창 앞에 널어두고 잠시 한숨을 돌리다가 대충 식빵을 구워먹고 로봇 청소기(천재) 전원을 눌러놓고 후다닥 세탁소에 다녀온다. 욕실 청소만큼은 자기가 하겠다고 하니 마음 편히 방치 중이다. 진이 다 빠져서 소파에 대자로 드러누워서 느긋하게 거실을 횡단하는 청소기와 그 꽁무니를 쫓는 회색 먼지덩어리를 본다.
46
이름없음
2020/12/11 19:05:42
ID : E1eE4JVbx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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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안에 다리를 모아 넣고 차가운 커피를 마신다. 오들오들 떨고 있다보면 날도 찬데 왜 차가운 걸 마시냐며 핀잔 같지 않은 핀잔이 들린다. 대답없이 어깨에 기대면 엷은 온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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