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xU1wtwFdxBb 2020/02/19 00:50:06 ID : 5TO9uk2q1ve 8
키워드 던지면 레주가 글 쓴다! 글을 잘 쓰는 건 절대 아니야. ㅠ_ㅠ 그래도 조금씩 글을 쓰는 버릇을 들여보려고! 꾸준히 하다보면 분명히 실력도 늘 거라고 믿어! 그런 의미에서 귀차니즘 레주를 도와줄 천사같은 레스주를 구한다! 다들 부탁할게... ㅠㅠ
2 ◆xU1wtwFdxBb 2020/02/19 00:51:32 ID : 5TO9uk2q1ve 0
첫 번째 키워드는 겨울.
3 이름없음 2020/02/19 00:55:43 ID : y6jfO5V83yM 0
두번째 키워드! 그리움!
4 ◆xU1wtwFdxBb 2020/02/19 01:21:39 ID : 5TO9uk2q1ve 0
당신이 떠난 후 삼백 번의 밤을 건넜다. 그칠 줄로만 알았던 비는 밤새도록 내렸으며, 떨어질 대로 떨어진 기온 탓에 그것은 이윽고 새하얀 형체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떼는 걸음마다 자국이 새겨졌다. 문득 당신의 얼굴이 그려졌다. 겨울에 우리 동네에서는 아이들끼리 눈사람을 만들었어.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넣어서. 눈사람이 깨끗이 녹는 날에 그리움도 모두 녹는다는 전설이 있거든. 눈가가 홧홧했다. 당신은 왜 끝까지 그런 말을 했는데. 숨은 꺽꺽 넘어가는 주제에 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는데. 멀리서 아이들의 새된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뻣뻣하게 돌렸다. 내가 누구 좋으라고 그런 말을 들어. 평생의 밤을 지새워도 좋으니 당신은 내게서 잊혀지려고 하지 마. 내게 있어 가장 찬란했던 겨울은 당신의 병실에서 맞은 십이월이었어.
5 ◆xU1wtwFdxBb 2020/02/19 01:23:05 ID : 5TO9uk2q1ve 0
고마워! ㅠ__ㅠ 이번 년도 대박 날 거야! 파이팅!
6 ◆xU1wtwFdxBb 2020/02/19 01:59:21 ID : 5TO9uk2q1ve 0
메리 앤이 죽었다. 그 새벽에 양피지에 휘갈긴 유언은 뭉툭했고 부검 도중 발견된 잘린 혓바닥의 절단면은 반듯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수군거렸다. 메리 앤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야. 그러나 그건 분명한 자살이었다. 나는 메리 앤이 싫었다. 이마가 넓었고 입은 좁았으며 부는 없는 주제에 웃음이 많았다. 어느 날 메리 앤이 속삭였다. 네가 좋아. 어쩌라고. 술병으로 메리 앤의 머리를 내려쳤다. 구석에 처박힌 메리 앤은 동이 트자 조용히 집을 나섰고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보름 후 돌아온 메리 앤은 수척했다. 아버지가 나더러 첩이 되래. 것도 싫으면 창부가 되래. 메리 앤은 테이블보에 코를 박고 울었다. 지난 십 년간의 메리 앤은 웃음이 전부인 아이였다. 낯설었다. 있잖아, 날 좀 죽여줘. 자살하기엔 겁이 나. 너라면 괜찮겠다 싶어. 날 좀 죽여 줘.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메리 앤은 자살했다. 그러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십 년 간의 동정인가. 아니면 또 다른 감정인가. 메리 앤은 없다. 그 아이의 토악질 나오는 웃는 낯을 다시 볼 수 없다. 인식한 순간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 어느 날 메리 앤이 그랬듯이.
7 이름없음 2020/02/19 16:24:04 ID : NvxzTWnXunv 0
세번째 키워드 여름! (+ 사랑..?)
8 이름없음 2020/02/19 17:10:23 ID : 1zTQq1AZjtd 0
네 번째 키워드 유언! 되게 잘쓴다 스레주!!
9 ◆xU1wtwFdxBb 2020/02/19 18:41:00 ID : oK5e6mE7e1z 0
키워드 고마워! 가만히 있어도 금전운 올라가서 부자되길 바랄게! 갈 길이 멀지만 칭찬 고마워... ㅠ___ㅠ 너 레더 내가 많이 아낀다...
10 이름없음 2020/02/19 19:12:40 ID : 5dQk4GrcNuk 0
다섯번째 키워드 별이 쏟아지는 밤 바다!
11 ◆xU1wtwFdxBb 2020/02/19 20:06:55 ID : 5TO9uk2q1ve 0
대체로 그 아이의 하늘은 맑았다. 아이의 얼굴엔 항상 빛이 가득이었다. 어른들은 심심할 적마다 아이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 앤 세상의 선구자가 될 테지. 여신 아리아나의 축복을 받은 아이야. 마을 안팎으로 구전마냥 퍼진 이야기에 아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이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충실히 주신의 아이를 섬겼다. 어설픈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랐고 여신의 아이라는 명목 하에 빛을 갈구했다. 아이는 돌연 증발했다. 땅에 발을 딛은 지 열네 번째의 초여름을 맞은 날이었다. 어른들은 땀이 눅진하게 말라붙도록 아이를 찾아 헤맸다. 그 해의 여름은 유난히 열이 강했다. 어른들은 점차 아이의 이름을 잊기 시작했다. 웃음이 많은 아이였다. 제멋대로인 호칭을 갖다 붙이고 이제는 제멋대로 잊으려고 한다. 아이가 사라진 후 세 번의 여름이 흘렀다. 그들은 여전히 응답없는 기도만을 반복한다. 새로운 선구자를 내려달라며.
12 이름없음 2020/02/20 06:06:22 ID : rfdSGpRA41C 0
여섯 번째 키워드 아이돌!
13 이름없음 2020/02/20 06:08:22 ID : Fa3DwMlvfQr 0
일곱 번째 키워드 햇살 내리쬐는 오후(대략 3시 이후부터 하교 무렵도 괜찮음)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풋풋한 사랑
14 이름없음 2020/02/20 15:01:15 ID : wFdzSK0snRC 0
여덟 번째 키워드 외로운 눈사람
15 ◆xU1wtwFdxBb 2020/02/20 15:48:53 ID : 5TO9uk2q1ve 0
키워드 고마워! 다들 연애운 대박 나길 바랄게! 사랑하는 거 알지?
16 ◆xU1wtwFdxBb 2020/02/20 16:51:50 ID : 5TO9uk2q1ve 0
네가 웃었으면 좋겠어. 그가 입버릇처럼 읊던 말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나 나를 데리고 다녔고, 고물상에만 처박혀 있기엔 아직 세상은 값진 것이 많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괴짜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건 사실이었다. 어느 날 무심히 지나치던 고물상에서 어린 아이만한 크기의 양철 인형을 주운 그는 그 길로 밤낮을 공들이며 인형을 개조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이 저였다. 사람이 노력과 정성으로 만든 인형에는 영혼이 깃든다. 자신을 공학자라 칭한 그는 나에게도 이름을 주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나한테는 여동생이 있었어. 사고로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 아이와 너는 참 닮았더라. 그래서 너를 그곳에 버리고 올 수 없던 거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나를 운명이라고 불렀다. 명아, 명아. 운명아. 그는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는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있잖아, 명아. 나는 네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자꾸만 네가 살아있다고 믿게 돼.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 대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건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싹 말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손으로 나를 움켜쥔 그는 허공에 한숨섞인 음성만을 반복했다. 명아. 명아. 웃어 줘. 응? 웃어 주라. 마지막 한 번이라도 네가 살아있음을 알려 줘.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했다.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맞았다. 나는 여기 살아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보여주는 세상을 보고 자라 왔다. 평생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심었다. 그가 죽지 않기를, 그리고 내 웃음이 당신에게 닿기를 바랐다. 그렇게 어느 날의 아침이 밝았다.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밤새 혼잣말을 뇌까렸던 입은 뻣뻣하게 굳었고 볼품없던 손은 식은 지 오래였다. 감지 못하는 눈이 따가웠다. 당연한 아침처럼 그가 눈을 뜰 거라 생각했다. 소중한 사람의 부재라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감정이었구나. 당신은 어땠어. 당신은 어떻게 버텼던 거야. 뜨거운 것이 안에서 울컥 치솟았다. 고개를 들었다. 명아.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비추었다. 눈물이 베갯잎을 타고 흘렀다. 웃어 주라. 그의 목소리가 완연했다. 눈꼬리를 접었다. 나 살아 있어. 살아 있다니까. 이제 가도 돼. 고마웠어. 잘 가, 안녕. 안녕, 사랑했었어.
17 이름없음 2020/02/20 19:11:21 ID : hxO8lvhf9gZ 0
아홉번째 키워드 책장 스레주 엄청 말 귀엽ㅂ게 하네... 스레주도 이번년도 대박나랑!!
18 ◆xU1wtwFdxBb 2020/02/23 01:07:57 ID : 5TO9uk2q1ve 0
키워드 고마워! 늦게 봤네! 레스주도 이번 년도 대박 나라! 행운 상승 펑펑 되라!
19 ◆xU1wtwFdxBb 2020/02/23 02:00:52 ID : 5TO9uk2q1ve 0
이쯤의 밤바다는 지독하게 시린 바람이 분다. 그렇기에 인근 지역의 사람들조차 검은 물결을 감히 찾지 않는다. 태양이 뜨겁던 날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저를 찾던 이방인들이 눈에 선했다. 인간은 언제나 그랬다. 허울 좋은 핑곗거리를 만들어 찾은 바다에서 찰나의 웃음과 비례한 많은 것들을 남기고선 사라진다. 처음엔 그게 좋은 것인 줄만 알았다. 찾는 이가 있다는 것은 제 쓸모가 아직 다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셈이니까. 덧없는 웃음을 받은 것으로도 족했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다는 넓은 만큼 포용 범위도 크다. 바다는 넓은 만큼 깊기도 해서, 그 안에 할당량을 모두 채워 넣지 않으면 끝없는 외로움에 질식하고야 만다. 바다는 섬세하다. 그렇기에 밤바다는 하릴없는 외로움에 잠겨 추락한다. 점차 말라가는 밤바다는 알지 못한다. 제 위에 얼마나 많은 별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지. 조금만 고개를 올렸더라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저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을 마주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도 밤바다에는 시린 바람이 분다. 그의 오랜 외로움은 반짝이는 것들이 먹고 사는 것이기에, 여전히 밤하늘에 빼곡히 들어찬 별들은 밤바다만을 바라본다.
20 이름없음 2020/02/23 03:04:27 ID : cnu03yE8i6Z 0
독약! 글 너무 잘쓴다~
21 이름없음 2020/02/23 14:07:55 ID : upO05TQtAi8 0
열 한번째 키워드 야경!! 레주 글 잘 쓴다!̆̈ !̆̈ 완전 잘 읽고 있어!̆̈ !̆̈
22 ◆xU1wtwFdxBb 2020/02/24 00:53:41 ID : 5TO9uk2q1ve 0
키워드 고마워... ㅠ__ㅠ 살면서 들은 말 중에 제일 뿌듯하고 행복한 말이야. 건강운 펑펑 올라가서 코로나 이기기를 바랄게!
23 ◆xU1wtwFdxBb 2020/02/24 01:27:20 ID : 5TO9uk2q1ve 0
사랑하지 않았어요? 앳된 목소리다. 출처가 어느 곳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무거운 눈을 들어 주변을 헤집었다. 그러니까 난, 뭘 하고있던 거지.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춤을 너무 오래 췄나. 아, 매니저 언니가 한 소리 하겠다. 시시한 생각을 하며 제 눈 앞의 하얀 형태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눈알을 바쁘게 굴렸다. 동그랗고, 하얗고. 딱딱한... 무언가. 그러니까, 알약? 알약이, 왜... 여기에. 상황을 알아차리려 애쓰던 머리에 다시 한 번 목소리가 울렸다. 사랑하지 않았냐고요. 그 많은 팬들과... 당신의 자리를. 그래, 사랑해.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래서 이게 다 뭔데? 받아치려 벙긋한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예감이 흘렀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당신, 자살했어. 오전 열두 시 경에, 당신의 자택에서. 타인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나의 죽음은 기묘했다. 죽었대.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이. 인지한 순간 많은 것이 머릿속을 메웠다. 죽어. 왜 안 죽어? X같은 X. 쟤만 나오면 X같더라. 쟤가 우리 오빠들 제치고 1등이래. 실력도 안 되는 X이. 내가 저 X보다 잘하겠다. 일순간 호흡이 멈추었다. 짓눌린 동공이 굳었다. 아, 이제 알겠다. 있잖아. 나는, 내 죽음은 말이야. 자살이 아니야. 자살한 게 아니야. 수많은 손가락이 나를 감쌌어. 내 목을 죄었고 내 혈관을 막았고 내 호흡을 막았어. 나는, 자살하지 않았어. 수많은 잣대들에 내몰리는 게 버거웠던 거야. 단지 그것이 전부였던 거야. 미안해.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미안해. 다음의 근원은 좀 더 강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단지 그뿐이기를 바라.
24 ◆xU1wtwFdxBb 2020/02/24 01:30:04 ID : 5TO9uk2q1ve 0
키워드 모두 이상하게 극단적인 글로 표현해버리네... 고칠 부분이 많은 것 같아서 슬퍼 ㅠ__ㅠ
25 이름없음 2020/02/24 21:43:18 ID : rfdSGpRA41C 0
세상에..ㅠㅠ 인데 이렇게 멋진 글로 표현해 줘서 너무 고마워!!! 스레주 반드시 훌륭한 작가가 될거야..ㅠㅠ 그 때 훈장처럼 이 글 간직하고 있을게...
26 이름없음 2020/02/24 22:33:04 ID : bu02k7ak1eG 0
신천지와 코로나로 종교재난영화시나리오같은 소설 한편 충분히 나올듯한데... 무거운 주제인가ㅠ
27 이름없음 2020/02/25 13:01:53 ID : k5Qk5O5SIKY 0
첫눈!
28 이름없음 2020/02/25 20:01:36 ID : 1yE7bBe41xx 0
짝사랑? 아냐 스레주 글 분위기 완전 멋져!! 진짜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잘보고있어!
29 ◆xU1wtwFdxBb 2020/02/26 17:18:40 ID : 5TO9uk2q1ve 0
너 레더 말 너무너무 예쁘게 한다... 과분한 성찬인데도 정말 고마워 ㅠ__ㅠ 레스주도 꿈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기도할게! 이루어져라!
30 ◆xU1wtwFdxBb 2020/02/26 17:21:18 ID : 5TO9uk2q1ve 0
키워드 잘 받았어! 종교에 재난에...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주제이지만 노력해볼게 >_< 제대로 된 글도 아닌데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놀랍고 신기하고 막 그렇고... 많이 사랑해! 이번 년도 걸리는 일마다 술술 풀려라!
31 이름없음 2020/02/26 17:53:01 ID : s1g2NxRwk4H 0
애증! 요즘 너무 가벼운 사랑 얘기만 나오는것 같아소 좀 무거운 사랑얘기를 듣고싶오.,
32 ◆xU1wtwFdxBb 2020/02/26 18:29:07 ID : 5TO9uk2q1ve 0
김이현은 남들보다 조금 더 무른 사람이었다. 욕심은 적었으며 말투는 온화했다. 외모는 잘난 주제에 사소한 문제로 툭하면 골머리를 앓았다. 허우대 멀쩡하게 생겨먹어선 제 의견 하나 입 밖에 내질 못하는 김이현은 말 그대로 영락없는 등신이었다. 야, 내 친구가 네 번호 좀 달라는데. 줘도 되지? 김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아치 새끼들이. 보는 내가 답답했다. 싫다고 하면 되잖아. 저런 얼굴을 하면서 고개는 왜 끄덕이는데. 그러나 훈수 둘 처지가 아니었다. 당장 내 꼴도 말이 아니었다. 삼 년째 같은 학교, 삼 년째 같은 반. 그리고 삼 년째 김이현을 좋아하는 나도 마찬가지로 영락없는 등신이었다. 인지하니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저 멍청이는 저를 향한 고백이 오는 족족 전부 받는다. 물론 이쪽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채로. 절대 그런 식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미웠다. 눈물을 참느라 발개진 눈이 문득 저를 바라보던 김이현에게 닿았다. 멍한 눈이 잠깐 멈추었다. 정신을 차린 제 쪽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놀란 가슴이 난타를 쳐댔다. 잠시 후 정적을 깨는 차분한 목소리가 교실의 한 쪽을 메웠다. 미안. 이번엔 다른 의미로 놀란 가슴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니까, 김이현이 거절을 했다. ... 왜?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친 찰나, 이번에는 김이현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무심결에 바라본 귓볼이 발갰다. 아무래도 좋았던 심장이 다시금 난동을 부렸다. ... 그래, 그럼. 놀란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넣은 상대편이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스피커에서 석식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짤막한 종이 울렸다.
33 이름없음 2020/02/26 19:54:55 ID : 42K1wnCmJSI 0
<초연-하다> 1 . 「…에」 어떤 현실 속에서 벗어나 그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하다. 2 . 보통 수준보다 훨씬 뛰어나다. 내가 좋아하는 말인데 스레주 글 보고 얘기 듣고 싶어서 적어봤어!
34 ◆xU1wtwFdxBb 2020/02/28 02:01:05 ID : 5TO9uk2q1ve 0
키워드 접수 완료! 초연이라는 말 나도 좋아하는 말이야! 체념을 예쁘게 포장한 말 같아서 처음 들었을 때 친숙하기도 했었고 ㅎㅁㅎ... 너 레더들 이번 년도 시험운 혹은 합격운 대박 날 거야! 많이 고마워!
35 ◆xU1wtwFdxBb 2020/02/28 03:10:49 ID : 5TO9uk2q1ve 0
-가지 마요 - -마음을 원했잖아 -나누고픈 사랑이 없어 마음을 조각낸다. 뒤틀린 욕망을 짓이긴다. 감정을 난도질한다. 포장된 날것을 입에 넣는다. 하룻밤을 지새운 사이는 더없이 깔끔하다. 우리의 관계도 그랬다면 좋았을까. 레번트의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괜시리 향담배를 태우게 되는 날의 연속이다. 날것의 온기가 마땅치 않던 상황에 같은 처지를 만났고 운명인 줄 철썩같이 믿었다. 하루의 정을 교환했다. 옅게 번진 밤의 온도가 관계를 연장했다. 연심을 품었다. 이윽고 태워질 마음이었다. 며칠의 온기는 그 해의 겨울을 웃돌았다. 좋아한다 속삭였던 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 눈이 쌓였다. 유무의 온도차가 극명했다. 바람이 머리칼을 흐트렸다.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르도록 자리를 지켰다. 언젠가 돌아오는 날 제가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긴 겨울을 났다. 마주한 하늘이 푸를 무렵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쌓인 눈은 여전했다. 그때야 비로소 체감한 것 같았다. 제 몸을 두른 눈은 영원히 녹을 일이 없을 거라고. 그리고 그 눈이 사라질 때에도 저는 그 자리에 머무를 것이라고.
36 이름없음 2020/02/28 13:04:40 ID : fRvg7AqmGk6 0
레주 글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혹시 영향 받거나 재밌게 읽었던 책 있으면 추천해줄 수 있어 >:3c ? 그리고 , 글 보고 울컥했다... 요즘 감수성이 늘었나... 증발한 아이랑 죽어가는 묘사가 너무.. 뭐라 해야 하지 안타깝다..?넘 슬펏다...
37 이름없음 2020/02/28 13:13:45 ID : fTO9wE4NvDs 0
키워드! 엇갈리다!
38 이름없음 2020/02/28 15:13:50 ID : k5Qk5O5SIKY 0
손톱!
39 ◆xU1wtwFdxBb 2020/03/01 21:38:27 ID : 5TO9uk2q1ve 0
책...! 은 딱히 없고 나는 글을 쓸 때에 주로 그 키워드에 떠오른 그림을 그려! 그 그림을 보고 글을 쓸 때도 동화되어 쓰는 편이야! 누가 내 글을 보고 웃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는데... 울컥했다 그래서 놀랐어. 근데 이것도 좋은 것 같아. 울컥했다는 건 몰입했다는 뜻이려나? 나도 너 레더 감상평 보고 울컥했다... 사랑해 ㅠ__ㅠ 이번 년도 조금 일하고 많이 벌어라!
40 이름없음 2020/03/01 21:40:17 ID : 5TO9uk2q1ve 0
키워드 잡았다 얍 (‘ㅁ’)/ 고마워! 뭐니뭐니해도 맛있는 게 최고지! 이번 년도 먹고싶은 거 다 먹길 바랄게!
41 ◆xU1wtwFdxBb 2020/03/01 22:06:25 ID : 5TO9uk2q1ve 0
아이들은 매 시간마다 사람으로 가득찬 도서실을 돌았다. 삼십 평 남짓한 학교 도서실은 늘 그렇듯 몰려온 아이들로 인해 북적였다. 이유인즉 책이 가득인 투박한 나무 책장 너머로 운명이 이뤄지기 때문이란다.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이 깜찍한 소문은 물결처럼 번져 전교생이 도서실로 몰리는 주원인이 되었다. 책장 너머로 손을 뻗었을 때 잡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네 운명이래. 아주 잠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코 뻗은 손을 물렸다. 웃긴 소리가 맞다. 그래도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믿지도 않을 거, 딱 한 번은. 갈등하는 사이 절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소란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다른 것보다 곱절로 낡은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만. 눈을 딱 감고 책 사이로 팔을 넣었다. 누군가 잡지 않는다면 되려 제가 우스운 꼴일 게 뻔했다. 십 초만 있다가 빼자. 초를 아주 느리게 세었다.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흘렀다. 삼, 이... 일. 고개를 숙였다. 역시 시도조차 않는 편이 나았다. 내 주제에 무슨. 공부벌레 소리나 듣고 자란 애가 무슨 놈의 운명이고 그래. 뒷사람들의 재촉이 늘어났다. 그대로 팔을 뺐다. 빼려는 순간이었다. 은은한 사람의 온기가 겹쳤다. 그러니까, 내 팔에. 놀라 고개를 퍼뜩 치켰다. 마주한 팔에 힘이 들어갔다. 반대쪽에서 자그맣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따스한 소리가 귀에 박혔다. 그만 마주 웃어버렸다. 찰나에, 아주 조금. 측정이 불가한 운명이라는 걸 믿어보고도 싶었다.
42 ◆xU1wtwFdxBb 2020/03/02 04:03:18 ID : 5TO9uk2q1ve 0
방 안을 메운 가구는 전시용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말끔했다. 고풍스러운 벽지, 고풍스러운 가구. 모두 그의 입맛대로 맞춘 것이겠지. 레이는 짤막한 호흡을 뱉었다. 숨이 갑갑했다. 이제는 지체할 수 없었다. 주머니에 숨겨둔 병 속에는 무색의 액체가 가득이었다. 느릿하게 마개를 딴 병을 손에 쥐었다. 따스한 색으로 우려진 홍차에 덤덤한 얼굴이 비쳤다. 똑. 한 방울으로도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는 액체가 그의 몫에 떨어졌다. 이젠 되돌릴 수 없었다. 고통스럽게도 그건 제가 제일 잘 아는 사실이었다. 다음 순간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평온을 가장한 눈동자가 일그러진 표정의 레이를 향했다. 실은 저도 알고 있었다. 사랑스러워서,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끔찍한 제 연인은 제 모든 것을 알아챈다. 상냥한 눈동자로 죽음을 요구하는 일그러진 마음도, 지금 제 몫의 홍차에 든 게 무엇인지도. 일상을 가장한 목소리가 나긋하게 물었다. 레이, 홍차에 독을 탔나요?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 대답했다. 응. 독을 넣은 건 저인데, 어쩐지 마시는 것도 제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죽기를 원하나요? 목구멍에 가시가 돋은 듯 따끔거렸다. 그래. 힘겨운 말이었다. 뒤이어 머리맡에서 나긋한 소리가 들렸다.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맞은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그때야 비로소 그의 의중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레이를 사랑한다. 또한 레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제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도, 그럼에도 영원히 증오한다는 것도. 그런데, 그런데. 네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네가 이렇게 죽어버리면. 그러면 더 이상 내가 널 증오할 수가 없잖아. 평생을 마음 속에서 지울 수가 없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친듯이 홍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발, 그러지 마.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마. 하지만 그가 더 빨랐다. 그는 잔을 손에 쥐었다. 여전히 나긋한 눈을 한 채로, 상냥한 웃음을 띈 채로. 담담히 제 몫의 홍차를 비웠다. 그러곤 웃었다. 아주 밝게. 잠시 뒤 레이의 집에 놓인 검은 백합이 졌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실려 들어왔다.
43 이름없음 2020/03/03 05:24:52 ID : o1zQq1zXunz 0
미래 사회! 너무 이상한 키워드인가..?
44 이름없음 2020/03/03 15:52:36 ID : fU2LfdO8nTT 0
절벽과 노을! 위에서부터 보고왔는데 레주 글 너무 잘쓴다...
45 이름없음 2020/03/03 23:53:46 ID : 03Dvwtula1b 0
레주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몇 살 인 지 물어도 될까.....? 글도 너무 잘 쓰고ㅠㅜㅜㅜ본받고 싶은 필력이다.. 항상 잘 보고 있어!! 키워드는 혹시 노래로 대체해도 될까??? 일본 우타이테 노래 중에 너의 밤하늘 초계반이라고 있거든...! 그 노래를 글로 써주면 진짜진짜 고마울 것 같아 ㅠㅠㅜㅠ 내 인생노래라 누가 써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레주가 써주면 진짜 완전 좋을 것 같아!!! 레주 사랑해!!
46 ◆xU1wtwFdxBb 2020/03/04 04:50:38 ID : 5TO9uk2q1ve 0
키워드 고마워! 전혀 이상하지 않아 ㅠ__ㅠ 오히려 내가 저런 키워드를 맡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멋진 단어야!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하네.... 글을 잘 쓴다니... 아직 갈 길이 멀어 ㅠ_ㅠ 그렇지만 너 레더 말이 엄청 힘이 된다. 많이많이 사랑해! 코로나 다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랄게!
47 ◆xU1wtwFdxBb 2020/03/04 04:58:44 ID : 5TO9uk2q1ve 0
나이를 말해도 스레딕 규칙에 어긋나지 않으려나? 어긋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부분에선 조금 신중해질게. 내가 이런 곳에 글을 쓰는 이유도 나이 문제로 내 글에 색안경을 끼는 사람들을 방지하기 위함이거든. 아마 너 레더 생각보다 많이 어릴 거야. 그와 별개로 내 글을 읽어주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고맙게 생각해 ㅠ__ㅠ 노래 키워드 신청은 처음 봐서... 방금 듣고 왔는데 완전 명곡이다. 듣는 순간 우타이테 분 목소리도 그렇고 완전히 빠져서 몇 번이나 돌려봤어. 감히 내가 너 레더의 인생 노래를 맡아도 될 정도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는데, 응원해준다면 열심히 써 볼게! 나도 많이 사랑해 >_<!
48 이름없음 2020/03/05 06:19:53 ID : 1yE7bBe41xx 0
레주야 이런 말을 하면 레주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다른 사람들이 레주 글을 읽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레주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내가 보기엔 스레주는 진짜 글을 잘 쓰는 사람이고, 웬만한 어른(혹은 나이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표현력과 글을 매끄럽게 쓰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거든!! 글을 쓰는 능력과 글에 대한 마음가짐은 나이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스레주가 어린데도 이렇게 멋진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오지랖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건 부러워서 얘기하는 거야(소곤소곤) :D 스레 너무 잘 보고 있어!! 이런 스레 세워줘서 고마워! 키워드: 눈내리는 겨울밤에 뜬 별
49 이름없음 2020/03/09 05:25:35 ID : 1DvA2HCrzdU 0
스레주 글 너무 잘 쓴다 문체가 내 스타일이야 가독성도 좋고 글에서 진정성이 느껴져 계속 글 써주라ㅜㅜㅜ 너무 잘 써
50 이름없음 2020/03/09 15:56:04 ID : k5Qk5O5SIKY 0
따사한 오후!
51 이름없음 2020/03/09 15:56:33 ID : 2rarardO3zT 0
우울 주사위 바람
52 이름없음 2020/03/10 13:42:39 ID : AZjvvdDzcFf 0
키워드 : 악역 레주 너무 글 잘쓰자너ㅜㅜ 들숨에 재력과 날숨의 명예를 얻으며 살어ㅜㅜㅜ
53 ◆xU1wtwFdxBb 2020/03/10 16:29:43 ID : 5TO9uk2q1ve 0
우선 정말 미안해.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집에 이래저래 일들이 많아서 감히 들어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어. 많이 지쳐있었는데 문득 여기가 생각이 나서 들어왔더니... 다들 까맣게 잊고 있을 줄 알았던 내 스레가 갱신되어 있는 거야. 놀람 반 두려움 반으로 들어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런 장문 편지가 있었어. 왜 그동안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지. 조금만 일찍 들어왔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을 다시 읽고 얼마나 울컥했나 몰라. 전혀 오지랖이 아니야. 지금까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어. 늦게 와서 미안해. 키워드도 잘 받았어! 앞으로 더 노력해보려고. 이런 다정한 응원을 여기에서 들을 줄은 몰랐어. 많이 사랑해... 너 레더로 인해 내가 딛고 일어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 것 같아! (ฅ́˘ฅ̀*)♡ 너 레더는 항상 행복만 하길 바라... >_<7
54 ◆xU1wtwFdxBb 2020/03/10 16:33:14 ID : 5TO9uk2q1ve 0
키워드 고마워... 정말 많이. 글에 대한 칭찬은 언제 들어도 부끄럽고 그렇긴 하지만 이상하게 오늘 더 기분이 좋은 것 같아 p(´∇`)q 다들 많이 애정해! 키워드가 엄청나게 밀려있긴 하지만 더 힘내서 써보도록 할게! 다들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꼭 그 사랑 오래도록 단단하길 바라!
55 ◆xU1wtwFdxBb 2020/03/10 16:52:02 ID : 5TO9uk2q1ve 0
Sleepless Night In Seoul. 차르르. 윤이 나는 우드 블라인드가 고운 소리와 함께 말려 올라갔다. 탁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목시계가 유리창 너머의 빛을 머금는다. 실내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널따란 방의 한 쪽 면을 차지한 유리창으로 노란 불이 스몄다. 각각 다른 이채를 띤 끝도 없는 빌딩 숲이다. 오래 전의 제가 가장 사랑했으며, 끝도 없이 탐내 마침내 손에 넣은 풍경이었다. 바퀴벌레와 제습제 향이 정신을 좀먹던 그 지하는 과거에게 바칠 기억이다. 불쑥 솟아버린 눈높이에도, 사사로운 감정 대신 채워 넣은 야망에도 후회가 없었다. 높은 곳에 선 이상 더 쥘 수 있는 카드는 없다. 올라가야만 한다. 마침내 그 누구도 저를 건드릴 수 없을 때까지. 정상에서 마주한 야경은 이곳보다 조금 더 따스할까. 마주한 불빛들이 품은 냉기를 보며 아주 조금은, 제 미래에 관한 일말의 동정을 품었던 것 같기도 했다.
56 ◆xU1wtwFdxBb 2020/03/10 16:55:21 ID : 5TO9uk2q1ve 0
이건 굉장한 장편이 나올 것 같아서... 나중에 각 잡고 제대로 길게 써도 될까? 여긴 아무래도 단편만 다루는 곳이라 너무 길어지면 쓰지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키워드가 너무 좋아서 버리지는 못하겠어. 여유가 생기는 다음에 아예 스레 세워서 장편으로 이어볼게!
57 ◆xU1wtwFdxBb 2020/03/10 22:51:53 ID : 5TO9uk2q1ve 0
길 좀 물어도 될까. 낯선 목소리에 감긴 눈을 향해 미동을 넣었다. 타지에서 건너온 이방인인 모양이다. 어딜 가려고요. 낮게 꺼진 목소리가 잠긴 목을 타고 기어나왔다. 스페스 3번가로. 억양이 고급스러운 게 영락없는 부잣집 도련님이다. 하인 하나 대동하지 않은 것이 미심쩍었지만 그런 것까지 따져 물을 여유는 없었다. 때마침 궁핍했고, 여동생은 기어이 죽음의 문턱까지 닿은 참이다. 정확히 시선이 잡힌 뒷주머니를 노려 금화를 낚아챘다. 인페르나의 겨울은 혹독하다. 남의 삶을 빼앗지 않는다면 내뱉는 숨조차 사치가 된다. 달음박치는 걸음마다 억지로 도려낸 죄책감이 눌어붙었다. 제게 돈을 갈취당한 소년은 어떻게 될까. 귀한 집 자제같으니 그깟 돈 따위 얼마든지 차고 넘칠 수 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썩어빠진 사회가, 사회가 잘못한 일이다. 이름모를 병으로 저를 제외한 일가족 전부가 죽음을 초래한 것도, 끝끝내 의사 한 번 불러오지 못하고 핏줄이 터진 눈을 감긴 것도. 때마침 온종일 하얗기만 하던 하늘이 급격하게 흐려지더니 곧 작고 보송한 것이 떨어져 아이의 머리를 건드렸다. 그게 이상하리만치 따스해서, 아이는 끝내 내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울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욱욱 하고 토악질을 하는 입에서 죄의식이 뭉텅이처럼 흘렀다. 멀고도 외딴 곳에 위치한 소규모 도시인 인페르나의, 그 해 첫눈이었다.
58 이름없음 2020/03/11 00:09:22 ID : nBfhwK6qknw 0
와 스레주 글 진짜 잘쓴다..... 나중에 책같은거 써주면 안될까 너무 읽고싶어 늦은거 같지만 갑작스러운 첫키스로 하나 써줄수 있을까..?
59 ◆xU1wtwFdxBb 2020/03/12 18:10:49 ID : 5TO9uk2q1ve 0
키워드 잘 받았어! 책이라니... 뭔가 어엄청 부끄럽다 (๑′ᴗ‵๑) 늦은 건 반박할 수가 없지만... 가능한 한 이 스레에 책임감 갖고 키워드 신청이 그칠 때까지 열심히 쓰려고! 그런 의미에서 키워드는 언제나 환영해... >_<
60 ◆xU1wtwFdxBb 2020/03/12 18:50:21 ID : 5TO9uk2q1ve 0
있잖아, 영아. 고작 사랑을 한 것이 죄가 된다면 내 목은 이미 이 거리의 어딘가에 전등 대신 매달려 있을까? 어쩌면 머리보다 무거운 쇠줄에 묶여 일평생을 썩어가야 할지도 몰라. 나에게 너는 그만큼의 감정이었어. 인간의 죽음을 먹고 나락으로 떨어진 악마가 남은 생을 연명한다는 무저갱 속에서도 네 이름 석 자라면 담담하게 버틸 수 있는. 나에게 너는 그런 존재였어. 그랬어, 영아. 사랑을 어떻게 한 순간의 죄악이라 단정 지을 수 있었니? 이러면 내가 뭐가 돼. 네 생각에 잠 못 들던 그 숱한 밤은 거짓이라 치부하기에 너무나 숨이 막혀. 영아, 영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그 웃음마저 가짜는 아니었잖아. 더한 밤을 네 발치에서 매달려도 좋을테니 제발, 나 좀 사랑해주라 영아.
61 이름없음 2020/03/13 13:39:17 ID : k5Qk5O5SIKY 0
헉 나 키워드 준 레스주! 너무 잘써줘서 내가 다 고맙다.. 작가님..
62 ◆xU1wtwFdxBb 2020/03/14 22:52:49 ID : 5TO9uk2q1ve 0
그저 어릴 줄로만 알았던 세상은 담담해지는 법을 알았다. 제 반평생의 감정을 바쳤던, 동시에 끝도 없는 아픔을 받았던 이에게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이별을 고하고 돌아서는 길이었다. 평소엔 얼씬도 않던 골목을 걸었다. 기분이 바닥을 치던 찰나에 막다른 곳을 만나 기어코 울어버렸고, 눅눅한 습기에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와중에 그 애를 만났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람의 얼굴이 저런 걸까. 어린 날의 저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안아주고 싶다는 다소 충동적인 감정이 혀끝에 맴돌았다. 그리고 끝내 그 눈동자에 깃든 정제된 고통과 무형의 감정을 보는 순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있잖아, 언니랑 같이 갈래? 결핍된 아이였다. 그러기에 절실했다. 지금이라도 그 틈을 채울 수만 있다면, 적어도 나처럼은 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오만한 자신감이었다. 나로 하여금 저 아이가 바뀔 것이라는 한없이 멍청하고 오만한 자신감. 애정이란 걸 본 적도 느낀 적도 없는 아이가, 급작스럽게 흐르는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면. 과연 그 사랑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나 있을까. 답은 뻔했고, 결과 역시 같았다. 언니 나 사랑하잖아요. 사랑한다며. 왜 그런 표정이에요. 언니가 사랑한다고 그랬잖아. 근데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요. 나누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랬어. 언니가 그때처럼 막다른 곳에 몰리면 나만 볼 수 있잖아. 언니 표정이 왜 그래요. 웃어 봐요. 웃어 주세요. 언니, 제발.... 열여덟의 부탁이라 하기에는 마치 꼬마의 투정과도 같았으며, 투정이라 넘기기엔 죄악감을 모르는 살생을 저질렀다. 텅 빈 눈동자에 악을 쓰는 너를 담았고 메마른 입에 네 이름을 올렸다. 공아. 공주야. 이제야 알 것 같아. 그때 네가 눈에 밟혔던 이유. 난 너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어. 잠깐의 동정과 그로 인한 책임감이었던 거야.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문장이 어눌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지금,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게 다였다. 공은 죽었고, 나는 살았다. 하루가 다르게 미쳐가는 숨을 반복했다. 몇 번씩 저도 모를 단어들을 뇌까리며. 공아, 있잖아. 눈이 트이는 무수한 밤마다 네 생각이 나. 열넷의 네가 열띤 얼굴로 웃던 게 떠올라. 네가 좋아하던 영화들이 떠올라. 네 뒷모습이 떠올라. 언젠가 네가 물어본 적이 있었지. 날 데려온 걸 후회하지는 않냐고. 후회해. 미치도록 후회해. 그러나 내가 다시 한 번 그때로 간다고 해도 몇 번이고 같은 선택을 할거야. 널 데려온 걸 후회하지만, 너와 함께했던 시간까지 후회하지는 않아. 결국 우리는 서로 구원받은 셈이니까. 제정신일 때 마지막으로 하는 말에 네 이름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치 공주야. 팔만한 크기의 부엌칼을 손에 쥐고는 억지로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나는, 네가... 증오스러워, 공아. 미치도록 싫고 미치도록 저주스러워. 내 주변을 전부 앗아간 네가 소름이 끼쳐. 내가 이렇게 된 것도 전부 네 탓이니까. 그래, 맞아. 전부 맞는 말이야. 하지만, 있잖아... 있잖아. 그때 말은 전부 다 거짓이었어. 한 순간도 널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 나는 동정심을 사랑으로 착각할 만큼의 바보가 아니야. 그래도 그걸 끝내 입밖에 낼 수는 없었어. 그래도 말이야, 일평생 누군가가 특별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더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너를. -사랑해, 공아. 무거운 것이 고꾸라지는 소리가 선연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으므로, 해가 질 즈음엔 누구도 찰나의 마지막 단말마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63 ◆xU1wtwFdxBb 2020/03/14 22:54:48 ID : 5TO9uk2q1ve 0
이렇게 긴 줄은 몰랐는데...? 정말 좋아하는 키워드라 글자수 연연하지 않고 손 가는 대로 했더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p(´∇`)q
64 ◆xU1wtwFdxBb 2020/03/14 22:58:16 ID : 5TO9uk2q1ve 0
작가님이라니... 그런 호칭으로 부르면 부끄러워서 죽을 지도 몰라 ㅋㅋㅋㅋ 사실 저 글을 쓸 때 첫눈을 조금 다르게 해석해서... 호불호 많이 갈릴까 걱정했는데 일단 키워드 맡기신 분은 만족해서 다행이다 ㅎㅁㅎ. 중복신청도 가능하고 그냥 글에 대한 비평이나 코멘트 등등 어떤 걸 달아줘도 좋으니까 꼭 언제든지 놀러 와!
65 이름없음 2020/03/15 15:53:23 ID : k5Qk5O5SIKY 0
중복신청 돼? 그럼 난초! 중세 동양풍 소설 보고 싶어서 매난국죽에서 하나 골라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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